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지새는 안개 ◈
◇ 재 2 장 ◇
카탈로그   목차 (총 : 5권)     이전 2권 다음
1923.2~
현진건
목   차
[숨기기]
1
지새는 안개
2
제 2 장
 
 
 

1

 
 
4
밤은 자정을 넘은 지 오래다. 태양에 광선을 따라 대지를 입맞추던 이른 봄의 애틋한 입김도 얼어 버리고 새맑은 하늘이 검은 내 가물거리는 공간을 서 늘 서늘하게 덮고 있었다. 무덤 같은 침묵이 쓸쓸하게 미닫이를 대 지르고있을 뿐이었다.
 
5
평일의 습관대로 열 점이 되자 불을 끄고 누운 창섭은 이때껏 암만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모로도 눕고 바로도 누우며 잠을 들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눈이 보송보송해 옴을 어찌할 수 없었다.
 
6
그는 저도 모르게 무슨 생각에 잦아져 있었다. 하되 만일 누가 그더러 ' 시방 네가 무슨 생각을 하였느냐?’고 물을 것 같으면 아마 그는 대답 하기 어려웠으리라. 그의 머리엔 지낸 일 닥칠 일이 연달아 잇대어 치밀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다가도 한 번 깜박하면 앞 생각 뒷 생각이 무슨 연기나 안개 모양으로 한테 엉기고 서로 어우려져 뿌옇게 뒤범벅이 되는 까닭이다. 줄여 말하면 그의 머리엔 무심한 포장(布帳)에 활동사진이 어른거리듯 갖은 영상이 제멋대로 나타났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나타났었다. 그런데 한 영상이 지나가고 다른 영상이 새로 그어감에는 반드시 그 처녀의 모양이 한 번 선하게 그의 눈꺼풀 속으로 들어왔었다. 그러면 그의 심장이 찡하고 소리를 치자 고동을 끈치는 듯하였다.
 
7
그는 오늘 그 처녀를 보았다. 아모 기대와 아모 예감 없이 우연히 자연히 그는 그 처녀를 보았다. 본 그 찰나로부터 그 여성은 솜씨 있는 재인 바치가 끌로 새긴 듯이 그의 가슴에 자리를 잡고 말았다.
 
8
그가 건너방에서 영숙이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이었다. 미닫이 밖에서,
 
9
"영숙이!"
 
10
하며 탄력 있는 고운 목소리가 불렀다. 영숙은,
 
11
"누구야?"
 
12
하고 창경(窓鏡)으로 내어다 보더니 급히 창섭을 향하며,
 
13
"제 동무가 왔어요."
 
14
하였다.
 
15
창섭은 얼른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안방으로 건너가면서 그는 그 목소리 나던 곳에 슬쩍 일별(一瞥)을 던졌다. 그는 거기 여학생 둘이 서 있는것을 보았다. 보았다느니보담 알았다는 게 옳을는지 모르리라. 뒷사람은 앞 사람에 가리었고 그의 안계(眼界)에 들어오긴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야말로 전광(電光)의 일섬(一閃) 같은 짜른 찰나이기 때문에 똑똑히 보았 다기는 억울하다. 다만 까만 머리와 보얀 타원형이 얼른하고 그의 시선을 스쳤을 뿐이다. 하건만 그 순간에 그는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을 본듯 싶었다. 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열 번 스무 번 보아 알던 이 같기도 하였다.
 
16
창섭은 안방에 무료히 앉아 있다가 두 처녀가 영숙의 방에 들어가기를 기다려 자기가 거처하는 뜰 아랫방으로 나려왔다. 그는 두 처녀의 옆을 거쳐서 제 방에도 못 나려오리만큼 여성적이었다. 여성적이라면 부끄럼 많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리고도 섬세한 살결이라든지 갸름갸름한 손가락을 가진 조그마한 손이라든지 하릴없는 여성적이었다.
 
17
어쩐지 가슴이 야릇하게 수선수선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의식 한가운데 곧 날아가려는 새 모양으로 몸을 움츠린 채 쓸데없이 정신을 모으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말끔 귀로 몰리었다. 그의 왼 몸이 통으로 귀에 쏠리었다. 그 귀엔 세 처녀의 담소가 미묘한 음악을 아뢰고 있었다. 그들의 수작은 간격도 멀고 말낱도 가늘건만 또렷또렷이 창섭의 이막(耳膜)을 울리었다. 눈에 아니 보이는 세 처녀의 심리와 거동을 따라 그의 얼골도 흐리락빛나락 하였다. 쾌활하고도 삼가로운 웃음이 건너방이 미닫이 틈으로 새 어나 오자 창섭의 입술에도 웃음이 흘렀다……. 그럴 사이에 아까 본 그 처녀를 또 한 번 보았으면 하는 갈망 끝에 몹시 목마른 이가 입술을 물에 대 다가 만 듯한 갈망이 불같이 일어났다.
 
18
"아까 좀 자세히 보았더면 좋을 걸 갖다가……."
 
19
그는 후회하였다.
 
20
그러나 후회는 끝끝내 후회일 따름이다, 지금 와서 후회한다고 지나간 그때가 다시 올 것은 아니다. 시방은 시방으로 다시 볼 방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안으로 향한 미닫이를 가만히 열었다. 그리고 영숙의 방 창경(窓鏡)에 눈살을 쏘았다. 하건만 검푸른 창 경 이 저 가는 햇빛에 번쩍번쩍 반사될 따름이고 그 안에 있는 이의 그림자도 얻어 볼 수가 없었다. 몇 번을 그 방 곁에 가 볼까 하였는지 모르리라. 얼마나 교묘한, 영숙이에게 물어 볼 말을 생각해 내었는지 모르리라. 하되 그것은 얼렁뚱땅에 좀된 그의 능히 할 바 아니었다.
 
21
그는 미닫이를 발름히 열어 둔 그대로 제자리에 와 앉았다. 아모리 시방 애를 쓴대도 속절 없음을 깨달은 그는 차라리 그들의 돌아갈 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22
어쩌면 그 동안이 이다지도 지리하랴! 이 얼마 아니되는 시간이 창섭에게는 여러 달포와 비겨 떨어질 것이었다. 이야기는 끈쳤다. 이어졌다 하였다.
 
23
이야기가 끈칠 때마다 창섭은 인제 가는가 부다 하고 헛되이 가슴을 두근거리었다.
 
24
마츰내! 그들의 돌아갈 때가 왔다! 그 처녀를 다시 볼 기회가 왔다! 그들의 옷 단속하는 소리가 바스락바스락하였다. 영숙의 방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창섭은 열어 놓은 문틈으로 눈을 내어 놓았다. 뒤에 섰던 처녀는 마루에 걸터 앉아서 구두를 신고 있고, 앞섰던 처녀는 제 동무의 신 신기를 기다리며 마루 끝에 서서 영숙이와 그래도 미진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츰 불 같은 구름을 멍에하고 서(西)로 서(西)로 기울어지는 석양이 광선의 빛발을 아낌없이 그 처녀의 왼 몸에 나렸다. 그는 한 팔을 이마에 얹어 볕을 가리우며 눈을 나리 감고 있다.
 
25
이같이 아름다운 그림이 어데 있으랴! 이같이 성스러운 그림이 어데 있으랴! 만일 있다고 하면 성모 마리아의 그것이리라. 검은 양사 단으로 위아래를 감은 그 처녀는 참말 그림에 있는 성모 마리아를 상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 아모리 명화라도 이 산 그림을 따르지 못할 것은 말하는 게 실수 일것이다. 더구나 광선의 바다에 멱감고 있는 그는 미의 나체를 드러낸 듯 하였다. 이마에 비스듬히 걸린 말씬말씬한 손목엔 살 속 깊이 피묻힌 깁 올이 같은 힘줄이 파름파름 떠 보인다. 처녀다운 혈색 좋은 뺨은 아늘아늘 한 데손만 대면 터질 듯 연붉은 입술이 방싯방싯 열릴 때마다 소리 없이 기어 드는 빗물과 마주쳐 하얀 이빨이 반작반작하였다.
 
26
두 처녀의 발자최는 벌써 대문 밖으로 사라졌건마는 창섭의 눈에는 그 입상이 언제든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공상의 바다에 허우적거리는 그의 가슴에도 이 꽃다운 모양이 선연히 떠돌았다.
 
27
"세상에 그런 여성도 있던가."
 
28
창섭은 그 명징하고 적막하면서도 웃음의 그림자가 떠도는 듯한 눈매와 애교의 그것 같은 입모습을 또 한 번 가슴에 그리면서 혼자 소근거렸다. 갑자기 그는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까맣게 높은 가을 하늘에 번적이는 별을 쳐다 볼 때 모양으로 그는 속절없음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말뚱말뚱해 오며 언제나 잠이 들지 알 길이 없었다…….
 
 
 

2

 
 
30
창섭은 새파란 인광 같은 것이 흐르는 가운데 여기저기 부시게 번적이는 흰 나비가 춤을 추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는구나 그는 생각 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 시방 햇발이 내 눈꺼풀을 쏘아 이런 작용을 일으키고 있구나 하였다. 벌써 일어날 때가 지냈다. 시방 곧 기동을 하여야 될 텐데 하면서도 어젯밤의 잠 못 잔 피로에 그의 몸은 백 길 천길 되는 바다 속으로 자꾸 자꾸 깔아지는 듯하였다.
 
31
이럴 즈음에 그는 제 어깨가 가볍게 흔들림을 깨달았다. 누가 나를 깨우는구나 하고 눈을 뜨려 하였다. 풀로 조아붙은 듯한 눈을 간신히 벌린 그는 무에라고 말할 수 없는 충동을 느끼었다. 어제 보던 그 보얀 타원형이 여전히 자기를 나려다보고 있다! 내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구나, 그는 번개같이 생각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찰나이었다. 그 다음 찰나에 그는 '오빠! 오빠!’하며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자 제 사촌 누이 영 숙이가 자기를 깨우고 있는 줄 깨달았다. 그는 무슨 죄나 범한 듯이 얼골을붉혔다.
 
32
"오빠 오빠! 오늘은 웬일입니까? 어데 몸이 편찮으셔요?"
 
33
영숙은 제 오빠가 잠 깨는 기척을 보자 걱정스럽게 물었다. 영숙은 얼골이 동 글고 납작한 코끝이 오목한 처녀이었다. 그 조금 쩌른 듯한 윗입술엔 언제든지 웃음이 그림자와 어린 맛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큼직한 눈은 항상 에그머니 하고 놀래는 빛이었다.
 
34
"아니, 아모 데도 아프지 않아."
 
35
창섭은 부신 듯이 눈 깜박거리며 중얼거렸다.
 
36
"그러면 왜 일어나지 않으셔요?"
 
37
"어젯밤에 좀 늦게 자서……."
 
38
"또 밤새도록 책을 보셨구먼!"
 
39
"아니,……."
 
40
하고 창섭은 영숙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이 고개를 돌리었다.
 
41
"정말 아모 데도 아프지 않으십니까? 신색이 아주 좋지 못한데 뭐."
 
42
영숙은 또 한 번 근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여섯 점이면 반드시 일어나는 제 오빠가 오늘은 아츰 밥 때가 되어도 기척이 없어서 웬일인가 하고 나려와 보았다. 오빠는 이불을 뚤뚤 감은 채 요를 내어버리고 맨 방바닥에 가루 누웠다. 그 식은 땀에 젖은 얼골이 적지 않게 그를 놀래게 하였다. 그 좀 들어간 눈이 더욱 옴팍해 보이며 그 언저리에 검푸른 힘줄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43
"정말 아모 데도 아프지 않아."
 
44
창섭은 귀찮은 듯이 한 마디를 던지고 다시금 눈을 스르르 감으려 하였다. 그 모양은 마치 '내 아픈 데를 알려 주어도 쓸데가 없고 또 알려 줄 필요도 없다. 당초에 나는 말하기가 귀찮으니 가만히 이대로 내어바려 다고.’ 하는 것 같았다.
 
45
"에그, 왜 저러시나……?"
 
46
영숙은 생각하였다. 언제든지 자기에게 다정하고 싹싹한 오빠가 오늘은 어찌 대꾸하기도 싫어하는가 하고 스스로 의아히 여기었다.
 
47
"오빠! 왜 또 눈을 감으셔요?"
 
48
영숙은 또 말을 이었다.
 
49
"아츰 아니 잡수렵니까?"
 
50
이 말에는 아모 대답 없기는새려 감은 눈도 뜨지 않았다. 영숙은 한동안 무료 히 앉아 있었다.
 
51
이윽고 창섭은 눈을 슬며시 떴다.
 
52
"저어……."
 
53
창섭은 무겁게 입을 떼었다.
 
54
"저어…… 어제 온 여학생이 누구야?"
 
55
"네? 제 동무예요."
 
56
"이름이 무엇이야?"
 
57
"하나는 박화라라는 애고, 하나는 이정애라는 애이야요."
 
58
"저어…… 검은 옷 입은 이가 누구야?"
 
59
영숙은 놀랜 듯이 창섭의 얼골을 바라보았다.
 
60
"오빠가 언제 보셨어요?"
 
61
"아니……저어……."
 
62
창섭은 어물어물하며 또 한 번 하염없이 얼골을 붉혔다.
 
63
"그 애는 이정애이야요.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64
창섭은 또 대답이 없었다. 다만 그 눈이 이상하게 빛날 뿐이었다.
 
 
 

3

 
 
66
그 후부터 정애의 환영은 이따금 창섭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흔히 펴놓은 책의 글자가 아물아물해지며 황홀히 넋을 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것도 하로 이틀이지 한 번 본 인상이 조금도 어그러짐 없이 며칠 몇 달을 고대로 남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서녘의 붉은 놀이 해의 넘어감을 따라 차츰차츰 걷히는 모양으로 그의 정애에 대한 기억도 날이 감을 좇아 엷어 지기는 하였다. 그러나 멋있는 거문고 곡조가 머리올같이 가늘고 가늘어져 끈칠 듯 끈칠 듯할 때에 타는 이가 다시 줄을 튕기는 것같이 정애의 환영이 사라질랴 말랴 할 즈음에 그의 소리가 영숙의 방에서 나기도 하고 그의 모양이 길거리에서 마주치기도 하였다. 끈치려던 악기가 새로운 가락을 노래 함과 같이 사라지려던 환영도 새로운 색채를 띠고 창섭의 머리에 살아왔었다.
 
67
하룻날 창섭은 영숙을 데리고 진고개를 가게 되었다. 영숙은 공책과 연필도 사야 되겠고 또 벌써부터 주문하였던 교과서가 일한서방(日韓書房)에 왔는지 안 왔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혼자 가기가 무엇하다고 제 오빠를 조르매 창섭이도 책 구경할 겸 흔연히 그 청을 들어 주었다.
 
68
형매(兄妹) 들이 그 서사(書肆)문 어구에 들어서랼 때이었다. 누가 뒤에서,
 
69
"영숙이!"
 
70
하고 불렀다. 영숙은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창섭이도 무심코 돌아다 보았다. 두어 간 떨어진 곳이 화라와 정애가 걸어온다! 해후의 반김에 눈을 번적이며 고개를 다소곳하고 재츰재츰 걸어오는 정애의 모양은 아름답고 살아왔다.
 
71
그들은 한 데 다가들었다. 다 알면서도 서로 온 까닭을 묻고 책 사러 온것을 피차에 말한 뒤 용하게 만남을 서로 기뻐하였다.
 
72
"그래 혼자 온담!"
 
73
화라는 그 독특한 나무래는 듯한 긁어 잡아다리는 듯한 어조로 영숙을 비난 하였다. 그리고 약간 붉은 기가 도는 실눈을 살짝 흘기었다. 그 숱 많은 눈썹은 새까맸다. 그 붉은 물이 똑똑 듣는 듯한 입술은 마치 육회(肉膾) 덩어리 같았다. 이것이 들어서 그의 얼골에 너무 난(爛)한 기운을 떠돌게 하였으되 그 둥글게 살찐 어께의 윤곽과 솔직한 허리가 매력에 넘쳐 있었다.
 
74
"왜 너희들은 둘이만 오니?"
 
75
영숙이도 지지않게 대항하였다.
 
76
"우리는 둘이고 너는 혼자니까 말이지."
 
77
하고 화라는 딱다글 웃었다. 그리고 제 웃음소리가 지나쳐 큰 것을 무안히 여기는 듯이 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시선은 창섭의 시선과 마주쳤다. 창섭은 처음엔 놀랜 듯하던 그 실눈이 점점 자기를 향하여 대담스럽게 빛남을 보았다. 일초! 이초! 둘의 시선은 마주 쏘고 있었다. 그러다 먼저 시선을 피하긴 창섭의 편이었다. 그는 몸을 돌이켜 처녀들과 반대 방향으로 이 편 책장에 꽂힌 책을 뒤적거리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책에 있지 않았다. 정 애가 제 가까이 움직이고 있다는 의식이 그로 하여금 더할 수 없이 흥분 케 하였다. 왜 화라는 나를 보지 않는가! 왜 정애도 나를 보지 않는가!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는 웬일인지 정애에게 제 자신을 보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다만 한 번이라도 오즉 일 찰나 동안이라도 정애가 자기를 보아 주었으면 하였다. 그는 제 얼골이 제 모양이 주마등같이라도 번개 같이라도 정애의 시선에 스치기를 얼마나 바랬는지 알 수 없었다.
 
78
그러다 정애가 시방 자기를 보고 있을는지 모르리란 요행을 바라는 마음 이 머리를 쳐들었다……. 나와 그는 서로 등을 지고 있으니 그가 나를 본다 한 들…… 창섭은 제 뒤통시에 근질근질 기어다니는 정애의 시선을 느끼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돌이키었다. 아아, 이 어찌 공교한 일인가? 그는 제 얼골에 흐르는 정애의 맑은 눈동자를 확실히 발견하였다. 그럴 사이도 없 이정애는 당황히 외면하고 말았다. 창섭은 왼 몸의 피가 일시에 얼골에 오름을 느끼었다.
 
79
왜 정애가 나를 보고 있었는가? 그는 금방 한 제 생각은 씻은 듯이 잊어버리고 이번에는 반대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여기 무슨 큰 이유가 없지 못 할듯 싶었다. 무슨 깊은 의미가 없지 못할 듯싶었다…….
 
80
"오빠, 아니 가셔요?"
 
81
하는 소리가 찬물을 끼얹는 듯이 뒤숭숭한 창섭의 귀를 울리었다. 깜짝 놀랜 창섭의 눈은 바로 제 곁에서 있는 제 누이동생을 보았다. 그럴 동시에 이편을 보고 웃는 듯한 두 처녀를 보았다(창섭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82
"응, 가지."
 
83
잠꼬대 같은 대답을 하고 그 책사(冊肆)를 나온 창섭의 발길은 허둥허둥 하였다.
 
 
 

4

 
 
85
따스한 볕이 금빛으로 번쩍거리면서도 반투명체의 실안개 같은 것이 사라지려는 새벽 꿈 모양으로 어슴푸레하게 조는 어느 공일이었다.
 
86
창섭이가 제 방에서 홀로 투르게네프의 「On The Eve」를 정신없이 읽고있노라니,
 
87
"오빠!"
 
88
하며 부르는 영숙의 소리가 들리었다.
 
89
"오빠! 이것을 보아요, 이것을!"
 
90
"무엇을!"
 
91
창섭은 급히 밖을 내어다 보았다. 영숙은 장독간 뒤에 제가 가꾸는 개나리 나무 앞에 서 있는 듯하였다.
 
92
"어서 이리 나오셔요. 꽃이 피었어요! 꽃이!"
 
93
"응! 꽃이!"
 
94
창섭은 놀랜 듯이 몸을 소스라쳐 뛰어나왔다. 며칠 전부터 그 개나리가 노릇 노릇이 봉오리를 맺기 시작할 때 오빠와 누이는 날마다 그 불어 가는 누런 점을 헤아리면서 어린애 모양으로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되어 나오기를 기다림이 그들의 즐거운 바람의 하나이었다. 어제 저녁까지도 움츠리고 있던 그것이 어느새 피었단 말인가?
 
95
"이것 보세요! 예쁘게도 피었지요."
 
96
오빠가 제 옆 가까이 들어섰을 제 누이는 살가워 못견디겠다는 듯이 꽃에 거의 대인 입을 떼며 감탄하였다. 파르스름하게 봄 입김이 통한 휘 추리에 조그마한 꽃이 한 숭이 두 숭이 세 숭이 네 숭이나 노란 입술을 방싯 열고있었다.
 
97
"참 예쁘게도 피었군!"
 
98
창섭이도 감탄을 마지않으며 그 꼴 낱을 손으로 건드리려 하였다.
 
99
"에그, 가만 두셔요. 떨어질라요."
 
100
하고 영숙은 창섭의 손을 가볍게 밀치었다. 남매는 그윽한 꽃향기를 바르면서 이윽이 거기 서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봄이다!’하는 느낌이 가득하였다.
 
101
"그런데 오빠, 저어…… 저어……."
 
102
영숙은 무엇을 물으려는 듯이 입을 떼었다가 스스로 부끄러운 듯이 웃는다.
 
103
"왜 그래?"
 
104
하고 창섭이도 멋모르면서 빙그레하였다.
 
105
"저어…… 저어…… 꽃이 어째서 피어요?"
 
106
하고 영숙은 제 물음의 어처구니없음을 엄벙하는 듯이 또 스스로 웃었다.
 
107
그러나 그 얼골은 매우 진국이었다.
 
108
"봄이 되었으니 피지."
 
109
창섭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110
"봄이 되면 사람은 어때요? 사람에게도 피는 게 있어요?"
 
111
창섭은 놀랜 듯이 영숙을 보았다. 그의 얼골은 붉게 빛나고 있다.
 
112
"그것은 왜 물어?"
 
113
"저어…… 봄이 되면 사람에게도 무슨 피는 게 잇을 듯싶어서요."
 
114
"있고 말고 그것은 젊은이의 가슴에 피는 사랑의 꽃이지."
 
115
이런 말이 불쓱 입술에 떠올라 왔으나 창섭은 덤덤히 입을 닫치고 멀거니 봄 하늘을 쳐다보았다. 영숙이도 제 오빠의 기색을 살피자 더 물으려 들지 않았다. 달착지근한 비애가 자근자근이 그들의 가슴을 눌리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즈음에 문득,
 
116
"영숙아?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니?"
 
117
하는 소리가 그들의 덜미를 짚었다. 남매는 일시에 고개를 돌리었다. 화라 와 정애가 어느 결엔지 중문(中門) 안에 들이 서 있었다. 창섭은 정애를 보았다. 본 그 순간에 속에서 무엇이 탁 하고 터지는 듯하며 왼 몸이 핑등그르 돌아가는 듯하였다. 정애는 제 시선이 창섭과 마주치자 얼골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었다. 그것은 남자와 불의에 시선의 마주침을 부끄러워 함이리라. 하건만 창섭은 제게 인사하는 줄로 알았다. 그는 굽실하고 허리를 굽히었다. 그러나 영 숙이가,
 
118
"언제 왔던?"
 
119
하고 뛰어가는 바람에 창섭의 이 어설픈 인사가 두 처녀에게 들키지 않은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120
세 처녀는 영숙의 방으로 사라지고 창섭은 호올로 제 방에 돌아왔다. 말소리 웃음소리는 또 문틈으로 새어 흘렀다. 또 창섭은 넋을 잃고 말았다.
 
121
"오빠!"
 
122
하며 부르는 영숙의 소리는 듣기는 들었건만 창섭은 가슴만 울렁거리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뒤미처 그는 영숙의 두 번째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123
그제야 간신히,
 
124
"왜 그래?"
 
125
하였다.
 
126
"이리 좀 오셔요."
 
127
란 말에 일어는 섰으되 그의 발길이 비틀비틀하리만큼 창섭은 흥분 되었었다.
 
 
 

5

 
 
129
정애와 한자리에 섞인 창섭은 좋아해야 옳을지 언짢다 해야 옳을지 제 마음을 무에라고 형용할 수가 없었다. 살얼음 위에나 걸어가는 것같이 간이 오그라 붙는 듯하며 얼골의 근육 하나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었다. 가끔 제 뜻을 어기어 손이 머리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앉음앉음이 제격에 맞지 않은것 같기도 하여 그는 겸연쩍어 견딜 수 없었다. 제법 말을 건네고 수작을 붙이 기는 새려 숨도 크게 쉬지 못하였다. 그래! 제 숨소리가 유난히 색색 거리는 듯해서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호흡조차 종용종용히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랐다.
 
130
이런 지경일진대 한시바삐 그 자리를 떠났으면 좋으련마는, 모르면 모르되 누가 등채를 밀어낸다 하더라도 그는 정애가 있는 방에서 나오기 싫었으리라. 온실에나 들어온 듯이 꽃 냄새 같은 것이 떠도는 그 곳의 공기가 그에게 알 수 없는 쾌감을 주어서 봄날의 볕 같은 따스하고 보드라운 그 무엇 이속으로 스며 흐르는 듯하여서 여간 노력과 용기가 들지 않았으되, 그 애 닮은 모양을 슬쩍슬쩍 곁눈질이 하고 싶었다.
 
131
그리고 이 곁눈질이 사람의 애를 말리는 것은 없으리라. 어느 때는 앵도같이 하늘하늘 터질 듯한 앳된 뺨, 어느 때는 보얀 기름이 지르르 흐르는듯 한 목, 혹은 까만 치마 위에 질척하고 미끄러진 듯할 은어 같은 흰 손, 혹은 푸수수한 풍정(風情) 있는 머리, 어찌하다간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 모양으로 피할 곳을 몰라 하는 눈자위, 어찌하다간 무안새김으로 웃음이 떠 도는 귀염성 있는 입모습 ─ 이 모든 미의 편린이 늘어지게 오래오래 보기를 요구하였건만, 슬쩍 던지었다가 황망히 피하는 그의 눈에서 얼른하고 사라짐은 참말이지 감질 날 일이었다. 그만큼 이 모든 것이 실물 이상의 매력으로 그의 가슴을 궁성거리게 하고 그의 눈을 쉴 새 없이 잡아 다리었다…….
 
132
며칠 후에 화라와 정애는 정말 영어 책을 가지고 왔다. 권수로는 삼권( 三卷)이라도 네이셔널 이권(二卷) 정도가 될락 말락 한 여자용 영어 독본 이었다.
 
133
창섭이로 말하면 동경서 중학교도 마쳤으려니와 더구나 영어에 취미를 붙여서 배워야 되겠다는 결심이 억지로 취미를 나게 하였는지는 모르나 따로 영어 정칙(正則) 야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한 까닭에 지금은 그리 어렵지 않은 영자책을 줄줄 나려 보는 터이니 이런 것을 읽고 새김에야 조금도 거리 낌이 없으련마는 남을 가르쳐 본 경험이 없는지라 속으로 환하게 알면서도 말로 발표하기가 곤란하였고 또 각별히 유청한 음독과 교묘한 번역을 해 보려 애쓴 결과는 도리어 헛읽기도 되고 더듬거리기도 되었다. 이 뜻 아니 한 병신 구실을 속으로 짜증도 내며 하염없이 얼골도 붉히기도 하였다.
 
134
"선생님! 저희들을 그렇게 어려이 아실 거야 무엇 있어요? 그대로 죽죽 새겨 주십시오그려."
 
135
화라는 창섭의 머뭇머뭇하는 양이 딱하다는 듯이 민망하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어가며 그런 말을 하였다. 창섭은 더욱 무안해 하며 슬쩍 정애를 보고 웃었다. 정애도 그 속눈썹 긴 눈을 치떠 창섭을 바라보며 쌩긋 웃는다. 창섭은 제 얼골이 타는 듯한 화끈거림을 어찌할 수 없었으되 정애의 웃는 얼 골로 말미암아 짜릿짜릿한 쾌감을 맛보기도 하였다.
 
136
이러구러 날이 감을 따라 그들은 친숙해지고, 친숙해감을 따라 그런 어색함과 어려움이 한 겹 두 겹 벗겨져 갔었다. 넷이 한자리에 모이어 자미( 滋味) 난 담소에 때 가는 줄을 모르기도 되었다. 하로는 화라가 창섭에게 물었다.
 
137
"저어, 내일 저녁 청년회관에서 고학생들이 각본 「격야(隔夜)」를 한다는데, 그것이 어때요? 자미(滋味)있어요?"
 
138
"매우 자미(滋味)있는 것입니다. 러시아( 露西亞) 문호( 文豪) 투르게네프의 지은 소설인데 각색은 아마 일본 사람이 한 게지요?"
 
139
"그 책을 보셨어요?"
 
140
"네, 한 번 보았습니다."
 
141
"그러면 그 골자를 이야기해 주실 수 없을까요?"
 
142
"글쎄요, 벌써 거진 잊은 걸요. 그리고 나는 입담이 없어서……."
 
143
"입담이 없다손 치더라도 말씀이야 못할 게 무엇이에요? 누가 변사의 설명을 듣자는 것도 아니고……."
 
144
하다가 급히 말을 변하며,
 
145
"대강만 이야기해 주셔요!"
 
146
"지금 당장 말씀입니까?"
 
147
"그러문요."
 
148
"퍽도 급하십니다그려.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시겠군."
 
149
창섭은 처음으로 농담 한 마디를 하고 영숙이와 정애를 돌아보며 웃었다. 세 처녀도 웃었다. 웃음이 끝나자 한동안 긴장한 침묵이 거기 있었다. 세 처녀의 눈동자는 창섭의 입술로 몰리었다.
 
150
"오빠, 어서 해요!"
 
151
영숙은 참다 못하여 한 번 졸랐다. 창섭은 머리를 긁적긁적하면서 웃고만 있다.
 
152
"선생님! 좀 이야기해 주셔요 네?"
 
153
정애도 마츰내 한 전 재촉하였다. 그 눈동자는 무엇을 알겠다는 열심에 맑게 빛나고 있었다. 창섭의 가슴은 다시금 방이질하였다. 그리고 물끄러미 정애를 바라보는 그 눈은 '당신의 청이면 무엇이라도 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야 하고 말고요, 하고 말고요.’하는 듯하였다.
 
154
이윽고 창섭은 그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말하기가 매우 거북 살스러운 듯이 따듬따듬하다가 차츰차츰 신이 나서 스스로도 놀랠만한 웅변으로, 없어진 조국을 건지려고 이국수토(異國殊土)에 망명객이 되어 심혈을 뿌리는 불가리아(勃牙利[발아리]) 혁명당 수령 인사롭과, 그에게 뜨거운 사라을 바치는 러시아(露西亞[노서아])의 아름다운 처녀 에레나 사이에 얽히고 설킨 비장하고도 농염한 연애소설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에레나가 인사롭을 사모하는 대목에 이르자 그의 목소리엔 더욱 힘이 있고 열이 있었다.
 
155
"에레나는 불같은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었습니다. 고국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남편을 따라갔습니다. 내일같이 불가리아( 勃牙利[ 발 아리]) 의흙을 밟게 되자 오늘 저녁같이 인사롭은 폐병으로 말미암아 조국의 회복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에레나의 애써 간호한 보람도 없이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156
창섭은 스스로 흥분되어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부르짖는 소리로 이렇게 끝을 맺었다. 숨소리를 죽이고 손가락 하나 꼼짝도 않으며, 왼 몸을 귀로 삼아 듣고 있던 세 처녀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었다. 창섭은 눈물이 어른어른 하는 정애의 눈을 바라볼 제 웬일인지 그를 부여잡고 목을 놓고 실컷 울었으면 하는 충동을 느끼었다.
 
157
어슴푸레한 저문 빛이 어느 결엔지 방 안의 긴장된 공기를 검게 물들었다.
 
 
 

6

 
 
159
"벌써 늦었네."
 
160
이윽고 화라는 혼잣말같이 한 마디하고 몸을 일으킨다. 그때껏 이야기에나 온 이물과 정경의 환영을 제 눈앞에 그리면서 모두들 멍하게 앉아 있었다. 화라의 일어남을 보자 세 사람도 잠을 깬 듯이 따라 일어선다.
 
161
"선생님, 참 감사합니다. 좋은 이야기를 듣겨 주셔서."
 
162
화라는 이런 인사를 잊지 않았다.
 
163
"천만에……."
 
164
창섭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165
"그러면 또 뵈옵겠습니다."
 
166
하고 화라는 허리를 굽힌다. 정애도 말없이 상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그 보얀 목덜미가 야릇하게 창섭의 시각을 질렀다.
 
167
두 처녀는 문간을 향하고 걸어간다. 창섭은 마루 끝에서 정애의 치마 뒷자락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것이 스르르 중문(中門)지방을 스쳐 넘어가 버리자 창섭은 갑자기 제 가슴이 한 그믐 밤빛같이 캄캄해짐을 느끼었다. 정애는 가 버렸다! 정애는 가 버렸다! 하는 의식이 뼈끝까지 사무치는 듯 하였다.
 
168
"오빠! 거기서 왜 그러고 서 계셔요?"
 
169
동무들은 문간까지 보내고 돌아 온 영숙이가 괴이하다는 드키 물을 때까지 창섭은 돌로 맨든 부처나 무엇같이 섰던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있었다.
 
170
그 날 저녁밥은 웬일인지 달지 않았다. 두어 술을 끄적끄적하고는 갈증 든 사람 모양으로 숭늉만 두 대접을 켜고 아랫방에 나려온 그는 쓰러지듯이 책상을 의지하고 주저앉았다. 그의 눈앞에는 「격야(隔夜)」의 일판이 얼씬덜씬 지나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이 러시아 소설에 있는 일이 아니고 마치 자기가 친히 겪은 것 같았다. 그렇다! 인사롭은 꼭 저이었다. 엘레나는 누구가 될꼬……?
 
171
창섭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고국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애인을 따라 나서는 에레나의 돌올한 모양, 너울치는 물결 비틀거리는 배 안, 깜박 거리는 등불 밑에서 제 남편의 병 구완하기에 골몰하는 에레나의 가련한 모양이 역력 히 나타난다…….
 
172
그러다가 문득 인사롭과 에레나가 서로 쓸어안고 키스하는 광경이 보인다. 처음엔 인사롭은 얼골빛이 거무튀튀하고 어깨판이 떡 벌어졌으며 키가 후리 후리한 헌헌 장부이고, 에레나는 머리올이 금실 같고 코끝이 뾰족한 서 양 여자이라니, 어느 결엔지 인사롭은 얼골이 할쑥하고 몸피도 별로 굵지 않은 사내로 변하고, 에레나 또한 머리가 검으며 코도 그리 높지 않은 여자로 변하였다……. 언뜻 깨달으니 시방 키스를 하고 있는 남녀는 다른 사람 아닌 창섭과 정애이었다! 이 환상으로 그린 키스로 말미암아 그의 입술이 보드라운 촉감에 가늘게 떠는 듯하였다.
 
173
그는 이 환영을 쫓으려고 한 번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아찔하고 눈앞에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며, 책을 집고 있는 보얀 손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더구나 그 눈물에 적어 윤 흐르는 눈자위가 물끄러미 자기를 바라보는 듯하였다……. 창섭의 애는 빠작빠직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174
그는 고만 못 견딜 만큼 정애가 보고 싶었다. 덮어놓고 보고 싶었다. 지금 만일 정애를 볼 수 있다 하면 그는 즐거이 물에라도 뛰어들었으리라, 불에도 뛰어들었으리라. 정애를 보는 값으로 하늘을 주어도 아깝다 안 했으리 라. 지구를 준대도 오히려 적음을 한하였으리라.
 
175
그러나 아모리 하여도 정애를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알지도 못하는 정애의 집을 찾으려 행길에 나서는 자기, 정애 집 문 앞에 빙빙 도는 자기, 용감스럽게 대문 안에 쓱 들어는 섰으나 부를까 말까 망설이는 가운데 어찌 어찌하여 정애가 쪼르르 나와 서로 반기는 모양을 현실인지 공상인지 분간을 못 하리 만큼 또렷또렷이 생각하면서도 속절없이 앉아 있는 것을 깨닫자 그는 휘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그야말로 애간장이 조 비비는 듯하였다.
 
176
"아아, 내가 정애를 사랑하는구나!"
 
177
그는 참다 못하여 마츰내 이렇게 부르짖었다.
 
 
 

7

 
 
179
"아아, 내가 정애를 사랑하는구나!"
 
180
창섭은 그렇게 부르짖건만 그는 정애를 사랑하랴 사랑할 수 없는 처지이었다. 그에게는 청정하고 신선한 처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었다. 그는 기혼 남자인 까닭이다.
 
181
그는 열 세살 되던 봄에 열 아홉 살 먹은 색시에게로 장가를 들었었다. 물론 제 의사로 든 것은 아니로되 남들이 어른이 된다고 떠드는 바람에 그 도멋 모르고 좋기는 하였었다. 그리고 색시도 처음엔 그리 밉지 않았었다. 부부가 무엇인지 안해가 무엇인지 알지는 못하였으되 어머님 품에 자던 자기가 인제 그와 한 요 위에 잘 것과 다른 사람한테는 응석을 부리더래도 그에게는 꼭 어른 노릇을 할 것과 자기보담 나이는 많지마는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톡톡히 꾸짖어서 길을 들여야 될 것을 대강 짐작하였다. 또 그는 자기에게 고운 옷을 해 입히고 맛난 반찬을 해 주는 침모나 찬비(饌婢) 같은 것이니, 그에게는 옷 투정 반찬 투정을 막 하여도 막 하여도 매도 아니 맞고 꾸중도 아니 모시는 것을 그는 신기하게도 생각하였다. 이런 편으로 보아전에 없던 그런 사람 하나가 생긴 것이 어린 창섭의 생각에는 그리 해롭지 않았었다.
 
182
그때껏 한문을 읽고 있던 창섭은 새로운 공부를 하겠다고 장가들던 이듬해로 상경하였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야학으로 일년 동안 일어와 산술을 배워 가지고 껑충 뛰어 ××중학교(시방은 ××고등보통학교)에 입학 하였었다. 그 중 학교의 이년에 진급하랼 제, 일본 명치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 군 H은행 부지배인으로 있는 맏형의 주장으로 동경 유학을 하게 되었다. 동경에서 정칙 예비학교에 다니며 밤낮으로 골똘히 준비한 결과, 그는 C 중학교 삼년급의 보결시험에 입격되었었다. 들기는 들었으니 학과에 익숙지 못한 그는 하기 휴가를 공부에 이용하노라고 그 해는 집에 돌아오지 못 하였다. 사학년에 승급 되던 해의 여름에야 그는 오래간만에 정다운 고향의 흙을 밟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그럭저럭 열 아홉이나 되었으니 차차 자기의 꿈같은 장래에 있을 안해의 윤곽을 상상도 해 볼 적이 있다. 그 시( 時) 창섭의 눈에 비추인 제 안해의 꼴은 참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183
구정물이 뚝뚝 듣는 행주치마는 곁에 얼른만 하여도 불쾌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 조금도 가다듬지 않은 우수수한 머리며 벌써 두어금 가는 주름이 잡힌 이마며, 그 앳된 빛 하나 없는 시들시들한 뺨을 볼 제 창섭은 저 것이 내 안해인가 하였다. 맏누님 뻘이 훨씬 넘는 저 늙어 빠진 여자 가내 안해인가 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매 창섭의 가슴은 마치 새침한 가을 밤 모양으로 쓸쓸하고 어두웠다. 그리고 무슨 지겨운 짐승처럼 곁에만 와도 몸서리가 침을 어찌할 수 없었다.
 
184
몇 해만에 집에 돌아 온 창섭이건만 밥숫가락만 뚝 떼면 훌쩍 뛰어나가 밤이 되어도 돌어올 줄 몰랐다. 그러다가 부친과 (그는 열 두 살에 모친을 여의 었다.) 친척들의 만류함도 듣지 아니하고 고만 달아나다시피 동경으로 뛰어갔었다. 그 후부터는 하기 방학이 되어도 귀성(歸省)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185
"흥, 이런 사람들은 이런데!"
 
186
무슨 대학 졸업생을 신랑으로, 어떤 여학교 출신을 신부로 꽃다운 결혼식이 거행되었다는 신문 기사가 눈에 띄일 적마다 창섭은 화증나는 듯이 휙 신문을 집어 동댕이치며 한숨을 쉬기도 하였다.
 
187
"그들은 참으로 행복일다!"
 
188
우리 유학생들 가운데도 미혼한 남학생과 미혼한 여학생끼리 꿀 같은 사랑에 단꿈을 꾼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는 이렇게 부러워도 하였었다.
 
189
그래도 그의 낙은 공부하는 데 있었다. 남이야 구경을 가든지 운동을 하든지 그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거기에 희망이 있고 광명이 있었다.
 
190
그러나 그는 하고 싶은 공부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집의 한 사오백 하던 살림이 남의 빚봉수로 말미암아 거덜이 나고 말았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의 준비에 골몰하던 그는 고만 고국으로 아니 돌아올수 없게 되었다.
 
191
돌아는 왔으나 갑갑도 하거니와 더구나 보기 싫은 안해가 있기 때문에 직업을 구한다고 핑계하고 서울로 뛰어 올라왔었다. 서울 온 뒤에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어느 서양 선교사를 찾아다니며 영어를 배우기도 하고 또 일상 좋아하는 문학서류에 잠착도 하는 형편이다.
 
 
 

8

 
 
193
나는 정애를 사랑한다. 불같이 사랑한다! 그러하건만 나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다. 사랑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렇게 생각하매 창섭은 그야말로 흉격이 막히는 듯하였다. 나는 기혼 남자다! 나는 뚜렷한 안해 있는 사람이다! 나의 몸은 이미 더러워졌으니 어찌 바다 속 깊이 잠긴 진주보담도 더 맑고 깨끗한 처녀의 사랑을 바랄 수 있으랴, 얻을 수 있으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리라. 얼마나 쓰리든지 얼마나 아프든지 나는 그 채쪽을 달게 받아야 될 사람이다. 창섭은 또 한번 곱삶아 보았다. 그리고 정애의 사랑을 아주 단념하리라 하며 이를 악물었다.
 
194
이를 악물고 그는 책에 자미(滋味)를 붙이려 하였다. 그러나 전자엔 뜻 맞는 벗이나 정다운 애인이나 진배없던 책이 인제는 보려고 하면 보려 할수록 펴 들기조차 염증이 난다. 한 대목을 가지고 몇 번을 읽어도 뜻을 알 수가 없었다.
 
195
책을 제 갈 대로 집어동댕이친 그는 흔히 끝 모를 공상의 바다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일어났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일어나는 큰 물꽃 가운데 정애의 환영이 가끔 물결에 어른대는 달 그림자 모양으로 번쩍임을 어찌할 수 없었다.
 
196
정애가 오는 날이면 그의 번민은 더욱 심하였다. 사랑하는 이의 발자최 소리를 남 먼저 듣건마는 짐짓 방문을 굳이 닫고 있는 그의 마음이야 어떠하였으랴! 그 웃음소리, 말 소리가 귀를 쑤실 때 그의 가슴이야 어떠하였으랴! 한두 번 그는 책상에 머리를 쓰러트리고 쓰리고 따가운 눈물을 짜내지 않았다.
 
197
어느 날 오후이었다. 화라와 정애가 영숙을 찾아오더니 얼마 후에 화라 혼자만 남아 있고 정애와 영숙은 어데로 나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화 라가 창섭의 방으로 나려온다.
 
198
시방껏 정애가 제 앞에나 있어 눈만 뜨면 보일까 두려워하는 듯이 잔뜩 눈을 감고 누웠던 창섭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화라는 웬일인지 새빨갛게 상기 된 얼골로 말없이 창섭을 바라본다. 창섭이도 놀랜 듯이 마주 보고 있었다.
 
199
"왜 혼자 꼭 들어앉아 계셔요?"
 
200
이윽고 화라는 이런 말을 하며 격에 맞지 않은 웃음을 웃는다. 그 얼골은 일시에 불이 확 붙는 듯이 붉어진다. 그러다가 창섭의 덤덤히 대답 없 음을 보고 조금 머뭇머뭇하더니 얼골빛을 바루려고 애를 쓰며 갑자기 놀라는 표정을 한다.
 
201
"왜 신관이 저렇게 못 되었습니까? 어데가 편찮으셔요?"
 
202
라고 근심스럽게 듣는다.
 
203
"아니에요. 내 얼골이 그렇게 못 되었나요?"
 
204
그제야 창섭이도 지어 웃으며 면경(面鏡)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관자놀이가 움쓱 들어가고 얼골이 백지장같이 할쑥하다.
 
205
화라는 매우 걱정되는 듯이 창섭을 거들 떠보며,
 
206
"암만 해도 무슨 병환이 있는 듯한데요?"
 
207
"병환이 무슨 병환입니까?"
 
208
하고 창섭은 하염없이 웃었다.
 
209
"그러면 무슨 걱정되시는 일이 있어요?"
 
210
"아모 걱정도 없는걸요."
 
211
"그러시다면 만행이겠습니다. 어쩌면 신색이 저렇듯 그릇되실까요?"
 
212
"낸들 알 수 있습니까? 아마 봄을 타는 게지요."
 
213
"왜 그렇게 말씀을 데면데면하게 하셔요? 다정히 하시지를 못하고……."
 
214
하며 화라는 원망스럽게 눈을 살짝 깔아 메친다. 창섭은 어이가 없다 하는듯이 화라를 바라보았다.
 
215
"왜 남을 보시기만 하셔요? 하하하…… 제가 실언을 하였는가 봅니다. 철 없는 생도의 말이니 선생님, 행여 노(怒)여워 마셔요."
 
216
이 계집애가 나를 놀리는 셈인가 하고 창섭은 불쾌한 생각이 와락와락 났으되 억지로 좋은 낯을 지으며 농담 비슷하게,
 
217
"원 천만에 말씀도 다 하십니다. 실언이 슨 실언이에요? 화라 씨도 딱 하시지."
 
218
"고맙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런 실언을 용서해 주신다니 참으로 고마습니다."
 
219
이번엔 화라의 말이 진국이었다. 그 소리조차 떨리었다. 그리고 몹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벙어리 모양으로 눈이 빛나고 입술이 움직이면서도 정말 벙어리같이 말은 하지 못한다.
 
220
그럴 사이에 영숙이와 정애의 돌아오는 기척이 나매 화라는 얼른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간다.
 
221
"선생님 계시니?"
 
222
아름다운 정애의 목소리가 묻는다. 창섭의 머리는 다시금 회호리 바람에 내어둘리는 듯하였다. 그러자 미닫이는 소리 없이 열리었다. 열린 밀장 사이로 정애의 안타까운 모양이 나타난다.
 
223
"선생님, 안녕하셔요!"
 
224
란 말과 함께 정애는 부끄러운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나직이 숙인다. 창섭은 부신 것이나 본 듯이 눈이 캄캄해짐을 느끼었다. 인사를 해야되 겠다고 생각한 순간에 이미 때가 늦은 줄도 깨달았다. 답례를 고만 두려하면서도 제 뜻을 어겨 머리가 꾸벅하고 말았다. 창섭은 더할 수 없이 무안하였다.
 
 
 

9

 
 
226
"에그! 오빠가 담배를 먹네."
 
227
영숙이가 뜰 아랫방에 나려왔다가 시커면 연기를 후후 뿜고 있는 창섭을 보고 놀라 부르짖었다.
 
228
"담배 먹는 데 그렇게 놀랄 것이 무엇이야?"
 
229
하고 창섭은 핏기 하나 할쑥한 얼골에 쓸쓸한 웃음을 띠운다.
 
230
"안 잡숫던 것을 잡수시니 말이지요."
 
231
"그야 안 먹던 것을 먹는 수도 있고 먹던 것을 안 먹는 수도 있겠지."
 
232
하며 창섭은 심술궂게 담배 연기를 영숙의 얼골에다 보낸다.
 
233
"에그, 오빠도!"
 
234
영숙은 연기 들어간 눈을 부비며 원망하였다.
 
235
"왜 연기나 그렇게 싫어? 나는 담배 먹는 것밖에 낙이 없는데……."
 
236
"그게 무슨 낙이에요?"
 
237
"그 낙을 누이야 알 수 있나? 한 모금 두 모금 빨 적에 빠짓빠짓 타 들어가는 것도 자미있고 더구나 후 내어 뿜을 때는 내 가슴 안에 서린 연기조차 덩달아 나가는 듯해서 속이 시원하단다."
 
238
"왜 오빠의 가슴에 불을 때입니까? 무슨 연기가 나와요?"
 
239
창섭은 제 말이 너무 지나친 것을 후회하는 듯이 입을 다문다. 영숙은 해죽이 웃으며,
 
240
"그런데 나 오빠한테 물어볼 말이 있어요."
 
241
"응! 무슨 말이야?"
 
242
"저어……, 오빠가 왜 정애를 피하셔요?"
 
243
창섭은 가슴이 뜨끔하였으되,
 
244
"내가 왜 정애 씨를 피할 리 있나?"
 
245
라고 딴청을 부렸다.
 
246
"그러면 정애가 오면 왜 꼭 방에 들어앉아 계시고 올라오시지 않아요?"
 
247
"그것은…… 저어…… 무슨 정애 씨를 피하는 게 아니라 요사이 좀 생각 하는 것이 있어서…… 위선 어제도 올라가지 않았던?"
 
248
"어제만 해도 화라가 그렇게 조르지 않았으면 아니 올라 오셨을걸 뭐. 그 뿐이에요? 넷이서 트럼프의 조커 잡기를 할 적에 우리들은 먼저 떨어지고 오빠하고 정애하고 둘이만 남았는데, 정애의 손에 있는 조커를 오빠가 뺴앗아 갈 때에 정애가 웃지 않았어요? 그 때 오빠의 얼골빛이 어떠한 줄 아십니까? 화라 말마따나 기막힌 고뇌가 떠돌았어요. 그리고 판도 마치기 전에 내가 졌습니다 하고, 휙 뛰어 나가시지 않았어요?"
 
249
"그것은…… 저, 그것은……."
 
250
창섭은 더듬거리었다. 그 움쓱 들어간 관자놀이에 거미줄같이 드러난 푸른 맥이 펄떡펄떡한다.
 
251
"화라가 그래요. 암만해도 오빠의 태도가 수상한다고."
 
252
이렇게 말끝을 맺고 영숙은 제 오빠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창섭은 덤덤히 대답이 없었다. 한동안 답답한 침묵이 있은 후,
 
253
"누이!"
 
254
문득 창섭은 소리를 떨었다.
 
255
"네, 왜 그려셔요?"
 
256
영숙은 심상치 않은 부르짖음에 깜짝 놀래었다.
 
257
"누이…… 누이……, 내 태도가 수상하다고?"
 
258
창섭의 목소리는 벌써 울음에 걸떡인다. 호동그랗게 뜬 영숙의 눈에 제 오빠의 뺨을 스치는 눈물이 비치었다.
 
259
"오빠! 왜 우셔요 네?"
 
260
영숙이가 이런 말을 물을 겨를도 없이 창섭은 허전거리는 손으로 덥석 누 이의 손을 잡았다. 영숙은 제 오빠의 손이 불같이 뜨거움을 느끼었다.
 
261
"누이! 누이! 누이는 내가 왜 우는지 모를 것이다. 누이는 이 눈물 맛을 모를 것이다. 이 쓰고 떫은 눈물 맛을 모를 것이다. 나의 뼈와 살을 깎고 저 미는 이 슬픔을 누이는 모를 것이다……."
 
262
하면서 창섭은 흐드겨 운다. 영숙은 그 큼직한 눈을 더욱 더욱 둥그랗게 뜰 뿐이었다.
 
 
 

10

 
 
264
세차게 흐르는 물결을 어설픈 방책(防柵)의 막을 배 아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정열을 낡은 도덕관념의 눌릴 배 아니다. 눌리면 눌릴수록 안으로 붙고 속으로 타들어 가다가 마츰내 이런 헌 누더기 도덕관념을 녹이고 마는것이다. 도덕이 인조(人造)인 담음에야 사람의 생각을 따라 언제든지 가치를 전도(顚倒)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든지 새로운 도덕을 지어낼 수 있는것이다.
 
265
사랑하려 해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 사랑하면서 사랑하여서는 안 되는 고통, 이 고통으로 하여 살이 여의고 피가 마르던 창섭은 마츰내 정애를 사랑 해도 관계찮다는 이유를 맨들어내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에게 안해가 없다는 증명이었다.
 
266
창섭을 그의 남편이라 하고, 그를 창섭의 안해라고 남들이 부르는 여자 하나가 창섭의 시골집에 있기는 있다. 법률상으로 보든지 민적상으로 보든지 창섭에게는 뚜렷한 안해가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가 만일 창섭의 안 해 일진대 창섭의 의사로 정할 것이 아니냐. 그러하거늘 시방 남들이 부르는 창섭의 안해는 창섭의 의사로 정한 것이 아니다. 아모 철모르는 열세 살 된 어린아이가 어른 시키는 대로 사모관대(紗帽冠帶)를 하고 어떤 집에 가서 얼 골도 한 번 못 본 처녀와 절을 주고 받았을 따름이요, 그렇게 하면 자기가 그 의 남편이 되고 그가 자기의 안해가 되는 줄 몰랐으며 또 피상적으로 남편이란 명칭과 안해란 명칭을 들어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 함인 줄 알지 못하였다. 의지 있은 뒤의 행위라야 효력이 있는 것인즉 의지 없는 행위에 어찌 책임을 질 수 있으랴. 다만 그것은 허수아비의 작난에 불과한 일이다. 그렇다. 창섭은 허수아비로 그의 남편이 되었고 그도 허수아비로 창섭의 안해가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창섭은 마음이 있고 살아 있는 사람 이어든 어찌 허수아비의 안해 있는 것으로 안해가 있다 하랴! 그러므로 창섭은 안해가 없는 사람이다!
 
267
이런 결론을 얻으매 창섭의 가슴은 갑자기 환해지는 듯하였다. 이 환해진것은 사랑하는 이를 사랑할 수 있는 기쁨의 탓도 탓이려니와 지질렸던 정화가 거리낌 없이 타오르는 까닭도 까닭이었다. 지질렸던 그 때는 시커먼 연기에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하더니 활활 이는 이 때는 새빨간 불길에 애가 쩔쩔 끓는 듯하였다. 그 때도 견딜 수 없었지만 이 때도 견딜 수 없었다.
 
268
"이 사랑을 정애에게 고백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어떻게?"
 
269
이것이 문제이었다.
 
270
"정애가 오거든 꼭 붙들고 나의 마음을 절절히 말해 버리리라."
 
271
그러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얻을 수가 없었다.
 
272
"에라, 편지로 해 버릴까 부다."
 
273
그는 밤중에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나서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몇 장을 버리고 몇 장을 곤쳐 썼다.
 
274
'이것을 보면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염려로 얼마를 망설이다가 어느 날 저녁 몹시 열이 띤 그는 이것저것 불계하고 그 편지를 우체통에 들이치고 말았다.
【원문】재 2 장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56
- 전체 순위 : 1049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136 위 / 88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1) 사의 행렬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지새는 안개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개벽(開闢) [출처]
 
  1923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목차 (총 : 5권)     이전 2권 다음 한글 
◈ 지새는 안개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9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