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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새는 안개 ◈
◇ 재 3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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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2~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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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새는 안개
2
제 3 장
 
 
 

1

 
 
4
주사위는 던져지고 말았다.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운명에 맡기는수밖에 없다.
 
5
창섭은 번민하면서도 오뇌(懊惱)하면서도 밤이고 낮이고 정애에게로 날아가는 그 편지를 꿈꾸고 있었다.
 
6
그렇다. 그 편지는 날아가고 있었다. 날짐승이나 무엇같이 그 편지는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누런 복장을 하고 검은 가방을 떨렁거리는 체부의 꼴이란 이상하게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창섭의 눈에는 공중을 술렁거리고 떠나가는 흰 종이 조각이 보일 뿐이었다. 인제 그의 머리에 떠도는 것은 그 어여쁜 입 모습도 아니었다. 언제든지 쫓을 수 없고 물리칠 수 없던 그 생글 거리는 눈동자도 아니었다. 오즉 어둠침침한 가운데서 떠나가는 편지를 꼭 붙잡는 보얀 손이 어른거릴 뿐이었다.
 
7
어제 밤부터 그는 자기에게로 날아오는 편지를 눈뜨고 앉아서 꿈꾸기 시작 하였다. 아니다, 가는 종이 조각을 꿈꾸는 동시에 오는 종이 조각도 꿈꾸었다 함이 마땅할는지 모르리라. 쌍쌍이 나는 제비 모양으로 방향을 달리 하여다 같은 속력으로 내닫는 편지 두 장을 눈앞에 그리기도 하였다. 방향은 다르면서도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서 한데 부딪혀질까 보아 우스운 걱정조차 하였다.
 
8
시방도 그는 자기에게로 날아오는 글발의 상상에 얼을 잃고 있었다. 편지를 띄운 지가 사흘이나 되었으니 정애가 답장을 한다면 오늘쯤은 회신을 받기도 할 때다.
 
9
그는 오늘 왼 종일 방안에 꼭 들어앉아 있었다. 오즉 한 일을 기다리기에 심신이 더할 수 없이 피로하였으되 그의 신경은 칼날같이 날카로웠다. 바스락하는 소리만 나도 편지가 오는가 하며 쓸데없이 가슴을 두근거렸다.
 
10
어느덧 날은 저물어 서향인 그 방 미닫이의 윗머리에 머물렀던 마지막 햇발조차 사라지려 하건마는 기다리는 편지는 깜깜하게 소식이 없다.
 
11
"창섭이!"
 
12
문득 문간에서 이렇게 부르는 소리가 난다. 그는 천방지축으로 뛰어나갔다. '편지가 왔구나!’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그의 머리에 번쩍였다. 체전 부가 '창섭이!’하고 부를 리 만무하겠으되 기다림에 지친 그의 넋은 이런 터 무니 없는 환각조차 하게 되었다.
 
13
문간에는 다 해어진 고구라 양복에 추물이 다 된 캡을 쓴 학생 하나와 옥양목 두루막에 역시 캡을 쓴 학생인 듯한 청년 둘이 서 있다. 창섭은 꿈에도 생각지 않은 무슨 기막힌 일이나 딱 당한 모양으로 놀랜 듯 얼빠진 듯눈을 멍하게 뜨고 있다.
 
14
창섭의 이 얼빠진 모양에는 조금도 상관치 않는 듯이 고구라 양복 입은 청년이 뚜벅뚜벅 창섭이 가까이 들어서더니 부서지라고 그의 손을 쥐어 흔든다. 떡 벌어진 어깨판, 거무 튀튀한 얼골 빛, 얼른 보기에는 매우 위엄스럽게 도 건강스럽게도 보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알맞은 코 높이와 동 그 스럼한 턱이 이쁘장한 생김새로되 진한 먹으로 일자를 쭉 그은 듯한 시커먼 눈썹이 얼골에 늠름한 기운을 들게 하며, 또 그 눈썹과 어울리지 않게 조그마한 눈은 '그까짓 것’하는 세상을 넘보는 듯하다. 그리고 또 건강은 해 보이지만 기실 검누런 살이 시들시들한 것과 벌써 이마에 그려진 두어줄 주름을 보면 얼마나 신고간난(辛苦艱難)에 부대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말이 났으니 그의 성격조차 대두리만 따 두자.
 
15
그는 윤치국(尹致國)이란 청년인데 남에게 달려 지내고 매어 지내기를 딱 싫어한다. 얼른 말하면 그는 자유를 사랑한다. 제 행복보담도 제 목숨 보 담도 자유를 사랑한다. 그는 고통과 곤핍(困乏)의 비싼 값으로도 자유를 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는 제 자유를 압박하고 구속하는 모든 것과 싸웠다, 또 싸우리라. 그리고 옳든 그르든 제가 한 번 주장한 일 이면 뻑뻑하게 세운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고집이 하늘을 찔른다고 탱 천( 撐天)이라는 별명조차 들었다.
 
16
창섭과 치국은 고향이 같아서 사귄 지도 오래이지만 그 비례로 우의도 두터웠다. 누구 누구하여도 창섭이와 가장 친한 사람은 치국이었고 치국의 가장 좋아하는 벗은 창섭이었다. 어데까지 굳세고 우락부락한 치국이와 어데까지 보드랍고 얌전한 창섭이는 그 대척적(對蹠的) 성격에 있어 서로 합 한 것이 리라.
 
17
창섭의 손을 흔들고 있던 치국은 다짜고짜 없이,
 
18
"나는 내일 떠나겠네."
 
19
쉰 듯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20
치국은 집안이 구차한 탓으로 겨우 제 고장 고등보통학교 이년급밖에 치르지 못하였다. 향학열이 불같이 타오른 그는 주머니에 쇠천 샐 닢 없이 서울로 뛰어 올라와 갖은 곤란을 무릅쓰고 강습소에 다니어 가까스로 중등 정도의 지식을 얻었다. 서울 있으나 동경에 가나 돈 없기도 매한가지고 곤란하기도 매한가지라 하여 그는 일본에 건너가기로 작정하였다. 내일 떠나겠 단말이 곧 이 뜻이다.
 
21
"응!? 내일 떠나?"
 
22
창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무안새김으로 과장스러운 표정을 하였다.
 
23
"잠깐 들어가세그려."
 
24
하다가 조선옷 입은 키 좀 큰 청년을 보더니,
 
25
"어이구, 박 공(朴公) 오셨습니까?"
 
26
하며 인사를 한다.
 
27
"김 공(金公), 뵈온 지 퍽 오래이었습니다."
 
28
하고 키 좀 적은 청년이 창섭과 박(朴)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창섭에게 말을 건넨다.
 
29
"강 공(姜公), 참 오래간만입니다. 왜 한 번도 놀러 오시지 않았어요? 한번 가 뵈옵자 뵈옵자 하면서도……."
 
30
"천만에 나야말로 와 뵈옵지를 못해서……."
 
31
"김 공, 어서 두루막을 입고 나오시지요."
 
32
성미가 괄괄한 듯한 박(朴)은 김(金)과 강(姜)의 인사를 가루막으며 조급한 듯이 재촉을 한다.
 
33
"참, 치국이가 떠나는데 하도 섭섭해서 오늘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 하였습니다. 옷을 입고 나오시지요."
 
34
차근차근한 강(姜)은 이렇게 설명한다.
 
35
창섭은 아니 나갈 수가 없었다.
 
 
36
네 청년은 어느 조그마한 청요리집으로 왔다.
 
37
"우리 오늘 저녁에 흠뻑 먹읍시다."
 
38
박(朴)이 미리 선언을 한다.
 
39
"얼마든지 먹지."
 
40
치국이가 쾌활하게 찬성한다.
 
41
"그런데 우리 술은 무엇을 할꼬?"
 
42
그 중에 제일 주머니가 넉넉해서 치국의 일본 가는 여비도 보태 주고 또 오늘 저녁 쓰임도 제가 도맡아 내려는 강세창이 이런 제의를 한다.
 
43
"우리 오늘 배갈을 먹세. 먹고 좀 취해야지."
 
44
오늘 저녁에는 꼭 먹고 취해야 될 일이 있는 것처럼 박(朴)이 서슴지 않고 대답을 한다. 창섭은 놀랜 듯이 박을 바라보았다. 박이 넷 중에 술이 가장 세었다. 그의 이름은 사천이니 공업전문학교를 한 일년 다니다가 공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학교를 집어치우고 요사이는 일정한 공부도 하지 않으며 다만 이따금 연설회와 토론회에 나가는 것을 학과 겸 놀이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45
"무엇이든지 좋지."
 
46
치국은 그 조그마한 눈을 번쩍이며 부르짖었다.
 
47
"정종으로 합시다."
 
48
세창이가 이의(異議)를 한다.
 
49
정종과 배갈에 대하여 사천과 세창이 사이에 한참 의론이 분분하였으나 사천이가 꿋꿋이 세움으로 하는 수 없이 배갈로 정하게 되었다. 어깨가 앞으로 굽고 선잠을 깨인 듯한 퉁명스러운 얼골을 가진 중국인 뽀이가 치렁 치렁하게 딸면 네 그릇과 요리 몇 접시와 배갈 반 근을 들여왔다.
 
50
첫 잔은 세상없어도 최후의 일적(一適)까지 단숨에 말리는 법이라 하여 모두들 배갈 한 잔씩 마시었다. 여기저기서 카아카아 하는 소리가 난다. 창섭은 목구멍이 쇠 – 함을 느끼자, 뱃속에서 난데없는 불이 활활 일어나는 듯 하였다. 제 얼골이 붉은가 급려(急廬)하며 그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세 창의 얼 골은 주홍을 부은 것 같고 치국의 얼골은 다갈색으로 번쩍인다. 오직 사천이만 늠름하게 눈 가장자리가 잠깐 발그레할 뿐.
 
51
술은 또 한 번 돌았다. 술이 세 번째 돌자 사천은 넘을 듯 넘을 듯한 술잔을 들고 벌떡 일어선다.
 
52
"말씀 한 마디 드리겠습니다."
 
53
하고 카악 기침을 하더니,
 
54
"여러분! 누가 낙(樂)을 싫어하며 누가 고(苦)를 좋아하겠습니까!"
 
55
라고 연설조로 부르짖기 시작하였다.
 
56
"그러나 고(苦) 있은 뒤에 낙(樂)이올시다. 고(苦) 없이 얻은 낙( 樂) 은값 없는 낙(樂)이올시다. 많은 가격, 많은 희생으로 산 낙(樂)이면은 그 낙( 樂) 도 무상한 낙(樂)이겠지요. 장갑자동차와 같은 의지와 폭발탄 같은 감정을 가진 윤 군(尹君)이……."
 
57
듣는 이의 입술에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하는 이도 제 말씨에 스스로 만족한 듯이 생긋 웃었다.
 
58
"여보게 아스시게 아서! 자네는 무슨 연설회에나 나온 줄 아나? 장갑 자동차 란 말은 어데서 줏어 들은 문자인가?"
 
59
세창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이렇게 제지하였다.
 
60
사천은 엄연하게 얼골빛을 바루며,
 
61
"그게 무슨 버릇없는 소리야. 남의 말이 끝도 나기 전에…… 그 윤 군( 尹君) 이 돋은 간난(艱難)을 무릅쓰고 멀리멀리 동경에 부급(負芨)하여고 합니다. 그는 맨주먹으로 이역수토(異域殊土)에 고학하러 가는 길이올시다. 우리는 그의 튼튼한 몸과 꿋꿋한 뜻이 반드시 크게 이룸이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는 그의 광명이 찬란할 장래를 미리 축복하며 또는 그의 건강을 비는 뜻으로 다같이 이 잔을 마십시다……."
 
62
"히여 히여!"
 
63
모두들 일종의 감격으로 그 잔을 말리었다. 그런 뒤에 비틀비틀하며 치국이가 일어선다. 그는 말도 하기 전에 팔부터 내어 두르며,
 
64
"박 군의 말씀은 감사하게 들었습니다. 과연 나의 주머니는 텅 비었습니다마는……."
 
65
하고 주막을 불끈 쥐고 한 층 소리를 높여,
 
66
"이 주먹과 팔이 있으니 어데를 가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한 신고(辛苦)와 여하한 곤란이 있더라도 박 군의 말과 같이 장갑 자동차와 같은 의지로 갈아 없애겠습니다……."
 
67
하고 몸을 왼편 오른편으로 흔들기도 하고 앞으로 뒤로 굽혔다 폈다 하면서 남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한동안 지껄인다. 그의 눈에는 희망에다 는 불꽃이 주렁주렁 흩어지는 듯하였다.
 
68
이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창섭의 가슴은 취중에도 말할 수 없이 쓸쓸해 짐을 느끼었다. 남은 맨주먹으로 동경 유학을 기운차게 해 보려 하 거늘 학비가 떨어졌다고 울며불며 고만 집으로 돌아온 제 자신이 내어배앝고 싶었다. 남은 동경(憧憬)에 뛰고 희망에 타거늘 저는 방구석에 의기소침하게 처 박히어 풋사랑에 속을 썩이는가 하매, 부끄러워 얼골도 들 수 없었다.
 
69
그런데 편지는 왔는가 안 왔는가? 문득 창섭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2

 
 
71
그 날 밤에 거기서 취흥에 겨워 곡조도 안 된 창가를 함부로 외치기도 하고 되지도 않은 춤을 추었다느니보담 뛰기도 하며 요리 담은 접시를 장구 삼아 두들기다 셋이나 깨어도 놓고 열 두 점이나 되어 그들은 각각 제 숙소로 헤어졌다.
 
72
난생 처음으로 술이 잠북 취한 창섭은 평일의 얌전한 걸음걸이와는 아주 딴판으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길을 휩쓸며 삼촌의 집으로 돌아왔다. 제 방에 들어왔을 제 '편지가 오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또 번개같이 번쩍였다. 그는 핑핑 돌리는 시선을 책상 위에 던지었다. 그러자 그의 눈은 열 병환자와 같이 빛난다. 그는 그 위에 얹힌 소쇄(瀟洒)한 분홍 봉투를 본 까닭이다. '시내 안국동 17번지 김창섭 선생(市內 安國洞 一七番地 金昌燮 先生) 앞’이라 쓴 철필(鐵筆) 글씨가 그의 핏발이 선 눈에 아름답게 비치었다.
 
73
그는 허전허전하는 손으로 봉투 웃머리 찢었다. 편지와 함께 봉해 넣은 듯한 향수 냄새가 스르르 창섭의 단내 나는 콧구멍을 엄습하였다. 취한 술 이 일시에 깨이는 듯하였다.
 
 
74
'주신 편지는 반갑게 뵈었습니다. 저를 그렇게도 사랑하신단 말씀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지 알 길이 없사외다. 저도 선생님에게 숨은 사랑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저녁 일곱 점에 남산공원으로 갈까 하오니 여기서 뵈 옵게 되오면 저의 가슴에 맺히고 맺힌 회포를 저저히 아뢰올까 하옵내다.’
 
 
75
사연은 단지 이뿐이었다. 이 간단명료한 글발의 의미를 창섭은 한 번 보고는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을 고쳐 보고는 또 보는 가운데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 남산공원에서 만나자는 말이 낙인(烙印)과 같이 그의 머리에 박히었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손에 그 편지를 편 채로 들고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도루 방에 들어와서 그 편지를 차근차근 접치어 제 봉투에 넣었다. 넣은 것을 또 집어들고 처치할 곳을 모르는 듯이 또 한동안 망설이다가 책상 빼닫이를 열고 그 속에 들이뜨렸다. 그제야 적이 마음을 놓은 듯이 문지방에 걸터앉아 구두를 나더니 구두 신은 채로 또 방에 뛰어들어 온다. 책상 빼닫이로부터 그 편지를 꺼내어 이번에는 황급히 제 주머니에 넣는다. 마치 누가 곁에서 그것을 빼앗기나 할 것 같이. 그러고도 미심한 듯이 편지 넣은 주머니를 만져 보고 만져 보고 하면서 살그머니 대문을 열고 나왔다.
 
76
사람 없는 행길을 그는 풍우같이 달음질하였다. 숨도 가쁘고 다리도 아파 잠깐 평보로 걸을 때마다 축축한 밤바람이 그의 끓는 머리와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 주었다. 혼란하던 머리가 냉정해짐을 따라 약속한 시간은 벌써 지낸 일, 밤이 이렇듯 깊었으니 정애가 지금껏 자기를 기다릴 리 만무한 일, 시방 시근벌떡거리고 뛰어가는 것이 헛일이고 우스운 일인 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지는 않았다. 숨만 조금 돌리면 연해 달음박질을 말지 않았다. 시간이야 늦었든지 말든지 애인이야 여기 있든지 말든지 자기는가 보아야 될 의무가 있는 듯싶었다. 더구나 지금 그의 전신에 넘치는 행복의 느낌을 이러지도 않고는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77
새로 세 시가 가깝도록 그는 헛되이 남산공원 한양공원으로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78
제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편지지를 펼쳐 놓았다. 그는 번개같이 편지 한장을 써 가지고 다시금 집을 뛰어나왔다.
 
79
정애 집 대문에 다다르자 그의 가슴은 새삼스럽게 두근거렸건만 여의( 如意) 하게 그 편지를 닫혀 있는 문틈으로 밀어 넣을 수 있었다. 밀어 넣자 그는 무슨 맹수에나 쫓기는 사망 모양으로 달음박질하였다. 실실이 풀린 몸을 요 위에 누일 때는 하늘 한 가에 비스듬히 걸린 지새는 달이 꿈꾸는 듯 조는듯 광채 없는 오리알 빛으로 사라지려 할 적이었다.
 
 
 

3

 
 
81
몸은 무슨 무거운 돌에나 지질린 듯이 착 깔아졌건만 암만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윽고 찌걱거리는 물지게 소리가 돌같이 잠잠하던 정적을 깨 트리 기 시작하였다. 싸늘싸늘한 새벽 공기가 들어오는 줄 모르게 방안에 스미어 흘렀으되 그는 열병에나 걸린 사람같이 왼 몸에 열이 불이 난 듯하였다. 그는 참다 못하여 안으로 향한 미닫이를 열었다. 신선한 실바람이 냉수처럼 그 의 불덩이 같은 이마를 핥는다. 그는 상쾌하다 하였다. 밖에는 오로라( 曙光[ 서광]) 가 보야스름한 손으로 땅위와 공중에 늘인 밤 옷자락을 거듬거듬 거두어 올리고 있다.
 
82
이윽고 동녘 하늘을 덮었던 구름이 스르르 헤어진다. 그러자 구름 자락 이 눈빛으로, 그렇다! 밝고 깨끗한 눈빛으로 피어날 겨를도 없이 해님의 앞길을 밝히는 홍초롱 모양으로 붉은 놀로 변하였다. 그 뒤를 이어 싱그러운 해님이 그 광명에 번쩍이는 윤곽을 쑥 나타내었다.
 
83
창섭은 눈물이 날 듯한 행복을 느끼었다. 이 밤이 샘을 따라 그의 검은 운명의 밤도 새어 가는 듯싶었다.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세계가 열려 가는 듯 싶었다. 환희와 행복과 시와 미가 있는 여태껏 꿈에도 모르는 아름다운 세계가 다가오는 듯하였다. 그 아름다운 세계의 여왕 모양으로 정애의 환영이다 시금 그의 눈앞에 떠돌았다. 그의 철색 진 뺨에 해죽 웃음이 흘렀다.
 
84
조금 있노라니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그는 상연(爽然)한 기분으로 자리를 떠났다. 왼 밤을 잠 한숨도 못 잔 피로도 그에게는 없었다.
 
85
그는 제 손으로 대야에 물을 떠다 세수를 하였다. 차디찬 물에 얼골을 씻음 이 얼마나 상쾌한 것을 절절히 느끼었다. 어째 새로운 생활의 제 일보를 내어 디딘 듯싶었다. 그는 행복이었다.
 
86
아츰을 마치자 달착지근한 고달픔이 그 상쾌한 기분을 흘리고 또 흐리더니 고만 코를 꾸벅꾸벅 꿈의 나라로 끌려가 버렸다…….
 
87
얼마를 잤는지 저도 몰랐다. 그가 꿈과 현실 사이에 방황하고 있을 때 무슨 힘이 가볍게 제 어깨를 흔듦을 어슴푸레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숨울 들이 쉴 제 무에라고 말할 수 없는 향내를 느끼었다. 그 향기가 노곤한 몸에 사르르 녹는 듯한 쾌감을 주었다. 달착지근한 잠이 다시금 그 츨기 같은 나래로 그의 의식을 감기 시작하였다. 그럴 즈음에 아까보담 좀 더 강한 동요를 어께에 받았다.
 
88
잠 오는 눈을 부빈 그는 제 앞에 앉아 있는 화라를 보았다. 그 보얀 얼골이 꿈꾸는 창섭의 눈에 아름답게 보였다. 원원이 그가 화라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었다. 도리어 그 자유자재한 쾌활한 담소를 좋아도 하였었다. 그 가무러지는 듯한 실눈과 새빨간 입술을 미상불 어여쁘게도 보았었다. 그러나 정애에게 심신이 쏠린 그이라 화라의 그런 미점(美點)니 그에게 매력을 부릴 어느 겨를이 없었을 따름이다.
 
89
창섭은 놀라 몸을 소스라쳤다. ─ 정애가 같이 오지나 않았는가?
 
90
"단잠을 깨시게 하여서 매우 미안합니다."
 
91
하고 싱글싱글 웃는다. 그러나 그 얼골에는 내가 여북해서 웃겠니 하는 빛이 있었다. 창섭은 무인한 듯이 아모 대답이 없었다.
 
92
"그런데 무슨 낮잠을 그렇게 주무셔요? 아모리 봄날이 곤하다 하기 로니……."
 
93
화라는 의미있게 또 한 번 웃었다. 그 속에는 분명히 빈정대는 가락이 있었건만 창섭은 그의 기색을 살피지도 않고 하는 말에 주의도 하지 않았다. 정애가 같이 왔는가. 오늘 저녁 남산공원에서 만나자고 하였으니 시방부터 올 리가 없는데……. 창섭은 저대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94
"정애 씨하고 같이 오셨습니까?"
 
95
창섭은 부지불각(不知不覺)에 불쑥 이런 말을 물었다. 묻고 나서 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 말 한 마디에 더욱이 변한 것은 화라의 얼골빛 이었다. 그 얼골에는 마치 남에게 더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분노와 살기가 서리었다.
 
96
"정애가 오고 아니 온 것을 내가 어찌 안다고……."
 
97
급히 말을 변한다. 그러나 날카로운 어조로,
 
98
"정애는 오지 않았어요, 저 혼자만 왔습니다……. 그런데 정애를 왜 찾으셔요?"
 
99
하는 그 입술은 경련적으로 떨리었다.
 
100
화라의 얼골에 이런 변화가 생긴 줄도 모르고 창섭은 제 부끄러운 생각만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변명하였다.
 
101
"아니, 늘 같이 다녔었으니 혹 같이 오셨나 하고……."
 
102
"네에, 그러시겠지요."
 
103
하고 입을 비쭉한다. 삽시간에 화라의 얼골빛은 또 달라졌다. 아까의 살기와 분노가 사라진 대신에 쓸쓸한 비웃음이 다시 자리를 잡고 말았다. 어데 시방 시작된 일이기 내가 이렇게 화증을 낸단 말이냐, 참 우스운 일도 있다. 그 얼골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였다.
 
104
"그런데 선생님은 어쩌면 정애만 사랑하십니까? 저도 좀 사랑해 주 십 시오."
 
105
화라는 또 농을 치고 웃는다. 창섭은 가슴이 뜨끔하였으되 일부러 쾌활한 체로 고개를 번쩍 들며,
 
106
"원 별말씀도 다 하십니다그려. 무슨 정애 씨만 사랑할 리가 있습니까?"
 
107
하고 웃음으로 엄벙하였다.
 
108
"그러면 저도 정애와 같이 사랑하신단 말씀이에요?"
 
109
"그야 물론이지요."
 
110
창섭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였으되 내심엔 거짓말을 한 것이 불쾌하였다.
 
111
"참말인가요?"
 
112
라고 채쳐 묻는 화라의 안색은 다시금 변하였다. 어째 왼 얼골이 불이나 붙는 듯이 번쩍 빛나는 듯하였다. 그리고 열기 있게 창섭을 바라보는 눈은 핏발이 선 듯하였다.
 
113
'내가 정애를 사랑하는 줄 이 계집애가 아는구나.’ 창섭은 생각하였다.
 
114
'그래, 시방 나를 놀리는 모양이군……. 그런데 인제 몇 점이나 되었을까?거진 거진 저녁때가 되었나?’
 
115
저대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잇을 제 문득 터지는 듯한 상대자의 너 털 웃음을 듣고 깜짝 놀래었다.
 
116
"내가 미쳤나? 왜 사랑 타령을 하고 앉았어. 창섭 씨가 무슨 내 애인도 아닌데……."
 
117
화라는 스스로 빈정대는 듯이 이런 말을 하며 웃는다. 저편의 기색이 어떻게 변화하는 것을 도모지 상관치 않는 창섭은 그 웃는 것만 기뻤다. 그 의 입은 닫힐 사이 없이 벙글벙글 행복된 웃음이 넘칠 뿐이었다. 창섭의 벙글 거리는 양을 바라본 화라는 새무룩하게 입을 닫친다. 그 표정은 저편을 해치려다 도리어 저편에서 이익을 준 사람 모양으로 애닮음과 뉘우침을 나타내고 있었다.
 
118
"저어 선생님, 어잿밤에 아모 데도 나가시지 않았었습니까?"
 
119
조금 있다가 화라가 또 침묵을 깨트렸다. 창섭의 얼골에 박은 날카로운 시선을 옮기지 않으며,
 
120
"어젯밤 말입니까? 마츰 동경 가는 친구의 송별회가 있어서 거기 갔다가 늦게야 돌아왔습니다."
 
121
창섭은 무슨 변명이나 하는 드키 바른 대로 외어 버리었다.
 
122
"네, 그렇습니까?"
 
123
하고 인제야 알겠구나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제물에 어깨를 으쓱 한다. 제 속에서 불의에 치받혀 오르는 무슨 발작을 참노라고 애를 쓰는 모양 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일어서며 많은 실례를 하였다는 말을 한 체만 체 얼른 미닫이를 열고 나간다.
 
124
막 대문을 돌아설 제 화라는 복받치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건만 창섭은 미닫이를 열고 중천에 뜬 해를 쳐다보면서 조급한 듯이 혼자 소근거렸다.
 
125
"아직도 오정밖에 되지 않았네!"
 
 
 

4

 
 
127
오정밖에 아니 되었던 시간이 어느덧 오후 아홉 점에 가까워간다.
 
128
"어째 어때까지 오지를 않나? 약속한 시간이 지낸 지가 오래인데……."
 
129
창섭은 남산공원의 음악당(음악당이라고는 하지마는 여기서 음악을 하는것은 한 번 듣도 보도 못하였다.) 곁으로 이리저리 거닐며 초조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마디고 마딘 시간을 보내다 못하여 다섯 점이 채 못 되어서 집을 뛰어나왔다. 만일 길 가는 사람들이 주의해 보았던들 그의 걸음걸이는 하릴없이 춤추는 것 같았으리라. 그에게는 남산에 가는 것이 곧 행복의 묏부리에 오르는 일이었다. 게을한 때의 나래가 나느니보담 기어감을 따라 시가를 점(點)치는 점등도 웃음을 건네는 듯하였다. 우수수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도 풍류를 아뢰는 듯하였다…….
 
130
그러나 애 마르던 정각이 지나고 인제나 오나 인제나 오나 하는 사이에 시간이 얼른얼른 날아감을 따라 갖은 염려가 그의 머리에 물 끓듯 일어나기 시작 하였다.
 
131
하인이 대문간을 쓸 적에 그 편지를 무슨 헌 수지쪽만 여겨서 쓰레기통에 쓸어 넣지나 않았나? 그 투미한 하인이 그것을 불쑥 정애의 모친에게나 부친에게 전하지나 않았나? 과년의 딸을 둔 부모의 마음은 염려가 많을지니 그것을 떼어 보지도 않았을까?
 
132
이런 생각을 하매 창섭의 등에 찬 소름이 끼치는 듯하였다. 무서운 친권을 부릴 대로 부리며 탄식도 하고 책망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울고 쓰러진 정애의 애처로운 모양이 보이었다.
 
133
"그래도 혈마 그럴 리야 있을라구."
 
134
창섭은 스스로 제 상상을 부정하였다. 그 상상을 믿음에는 그는 너무도 행복의 기대에 발버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제 상가의 그릇된것을 증명하여 하였다.
 
135
"아모리 부모라 한들 남의 편지를 함부로 떼어 볼라구."
 
136
그러나 이것만의 이유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137
"또 그 겉봉에 발신인으론 영숙의 이름을 썼으니 누가 보더라도 정애 저와 같은 동성의 편지인 줄 알고 조금도 의심치 않았으리라."
 
138
이렇게 줏어대고 보니 적이 마음은 놓이건만 그러면 아니 오는 이유가 무엇 일까? 부끄럼 많고 망설임 많은 처녀의 마음이 그의 발길을 멈춤인가? 창섭은 홀로 싱긋 웃었다. 아니 그런 까닭도 아닐 것이다. 편지를 하기는 이편에서 먼저 하였다 할지라도 대담스럽게 남산공원에서 만나자고 먼저 청 하기는 저편이었다. 남자 아닌 여자로 처녀로 그런 대담한 청을 할 지경이면 그 연애도 여간 뜨거운 것이 아니리라. 백열(白熱)된 연애의 불꽃에야 호기( 浩氣) 며 주저가 아니 탈 수가 없을 듯싶었다.
 
139
창섭은 정애가 자기에게 가는 최초의 편지(이후로는 여러 백번 천번 올 것이다.)를 쓸 때의 고동하던 가슴과 또 그 날 저녁 자기를 기다리던 마음을 한 번 상상해 보았다. 그리하고 아마도 그 날 밤에 헛되이 애를 쓰고 밤바람을 쏘인 까닭에 병이 난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래서 올 마음은 간절하건마는 오지를 못하는가? 설령 정애야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려고 애를 쓰련마는 딸의 몸을 금지옥엽같이 아끼는 부모가 들어서 어데 무엇 하러 가느냐고 미주알고주알하고 캐면서 달래고 말림인가 하였다.
 
140
그러나 꼭 정애를 마나리란 불덩이 같은 믿음이 이 모든 불길한 이유를 사르고 녹여 버렸다. 그의 눈은 또다시 사람의 올라오는 길목을 바라보았건만 그 인 듯한 모양은 보이지 않았다.
 
141
반(半)넘게 서(西)로 기울어진 달은 창섭의 외로운 그림자를 땅바닥에 길게 누이며 밤은 자꾸자꾸 깊어간다.
 
 
 

5

 
 
143
그 날 밤을 거기서 거진 밝히었건만 끝끝내 정애는 오지 않았다. 그 이튿날 해도 저물매 행여 집으로 찾아올까 하는 그윽한 희망도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하로 지나 이틀 지나 나흘 닷새를 지냈으되 실약(失約)에 대한 이렇다는 저렇다는 연유를 들을 수 없었다. 영숙이가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무슨 소식을 전해 줄까 보아 기색을 살피기도 하고 또는 그런 말을 옮길 적당한 기회를 일부러 맨들어도 보았건만 영숙은 딴청만 부리었다. 벙어리 냉 가슴 앓듯 속을 썩히다 못한 창섭은 제 편에서 영숙에게 정애의 학교에 다니고 아니 다님을 살짝이 물었건만 정애가 여일령하게 등교한다는 간단한 대답밖에 들을 수 없었다.
 
144
창섭은 남산공원에서 하던 의심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해 보았다.
 
145
학교에 다니는 것을 보면 병이 났다손치더라도 이미 쾌차한 덧은 분명하다. 그러면 처녀의 조심과 부끄럼 탓이라 할까. 아모리 정애를 어리고 깨끗하게 생각하더라도 동이 닿지 않는 수작이니 사랑을 허하고 밀회소까지 지정한 여자에게 그렇듯이 지나치게 부끄럼과 조심이 있을 수 있으랴.
 
146
그는 자기에게 온 편지가 정애가 한 것이 아니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하지 않았다. 그는 정애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튼튼히 믿는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 하는 것이 그리 이치에 어그러진 일이 아닌 줄 믿는다.
 
147
남성에게 공통인 자존심과 자만심이 그에게도 없지 않았다. 외모로든지 재화( 才華) 로든지 남에게 우월감을 가진 그는 그런 마음이 도리어 더 많고 장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리라. 정애의 편지를 받을 때에도 '그러면 그렇지!’하는 마음이 그의 속 어데인지 움직이고 있었다.
 
148
하나 남은 것은 부모에게 들키지나 않았나 하는 염려이로되 이 또한 박약한 이유이니 만일 부모의 엄중한 감시 밑에 대문밖 출입을 못한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우편으로든지 또는 영숙을 통하든지 제 소식을 알려 줄 기회와 방편은 얼마라도 있을 듯싶었다.
 
149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창섭이 자신도 그 후 한 달을 지나고 두 달을 지냈건만 우편으로나 또는 영숙을 통하거나 그의 근황을 묻지도 않고 저의 정열을 하소연도 하지 않았다. 이 이상한 수수께끼를 푸노라고 정신도 잃었거니와 한 번 꺾인 용기를 다시 불러 일으킬 수도 없었음이며 또 남성 된 사랑으로도 용서치 못할 일이었다. 날이 감을 따라 희박은 해졌으되 그는 의연히 정애로부터 무슨 소식이 있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50
따스한 바람에 차차 더운 김이 섞이기 시작한 어느 날 밤이었다. 창섭은 며칠 밤의 못 잔 잠의 벌충을 하노라고 저녁 먹던 맡에 이불을 쓰고 누웠는데 한껏 고단한 몸이 흐릿하게 깔아지다가도 다시금 정신이 쇄락해지고 맑아오고 해서 깊은 잠이 들지를 않았다. 몸을 이리 뒤치고 저리 뒤치는 사이에 밤은 아마 열 점 가까이 되었으리라.
 
151
이 때에 저 있는 방에서 대문으로 통한 조그마한 중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가만가만히 제 방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창섭은 저의 착각이 아닌가 하고 더욱 귀를 기울일 사이에 벌써 그 방 뒷문을 뚜들기며,
 
152
"선생님 계셔요?"
 
153
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154
창섭은 놀랜 듯이 이불을 걷어 치우고 일어나 앉을 때 문밖에서,
 
155
"김 선생님 계십니까?"
 
156
하고 소리가 또 난다. 이 시간에 정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종의 전율이 되어 그의 몸에 끼치었다. 그는 조심조심 쌍바라지를 열었다.
 
157
문 밖에는 뜻밖에 웬 나이 열 네다섯 되는 아이가 서 있었다.
 
158
"김 선생님이십니까? 저어 김창섭 씨라는……."
 
159
창섭의 기색을 살피며 그 아이는 미심한 듯이 또 한번 다진다.
 
160
"왜 그래?"
 
161
"김 선생이십니까?"
 
162
"그렇다."
 
163
그 아이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드키 허리를 굽혀 무엇을 집어든다. 그것은 조그마한 시기 화분에 불그스름한 꽃방울이 조롱조롱하게 맺힌 월계화 한 포기를 심은 것이었다. 창섭은 어리둥절하게 그 애의 하는 양만 바라보고있었다.
 
164
그 애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들어 창섭을 말 없이 준다.
 
165
"이것은 누구한데 오는 것이냐?"
 
166
창섭은 화분에 손을 내어 밀며 물어보았다. 그 애는 그 말엔 아모 대답도 않고 손을 뒤로 돌려 꽁무니 어데서 편지 한 장을 내어 준다. 그러자마자 ' 이 것을 누가 보내더냐?’고 물을 겨를도 없이 그 애는 쏜살같이 달아나고말았다.
 
167
아이의 달아나는 뒤 꼴을 보내던 의아에 찬 시선이 제 손에 든 편지에 돌아왔을 제 왼 몸을 뒤흔드는 기쁨이 거기 있었다. 앞에는 간단하게 '김 선생님 앞’이라 쓰고 뒤에는 부친이의 이름이 없었으되 한 번 본 그 연분홍 봉투를 다시 볼 때 묻지 않아도 정애의 정찰(情札)인 줄 깨달았다. 너무도 돈담 무심하다 하여 정애를 얼마큼 미흡하게 생각하던 감정은 멀고 먼 옛날 꿈속에서 생각한 것같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168
그러면 그렇지! 정애가 가만히 있을 리 있나. 과연 그는 나를 사랑하였군.수줍게 뜨겁게 사랑하였군! 밤을 타서 나의 애 졸이는 마음을 위로 하려고이 꽃을 보낸 것이로다! 불가피의 사정으로 못 오는 저를 대신하여 이 꽃을 보낸 것이로다!
 
169
그는 눈물이 핑 돌리만큼 감격하였다. 그렇다, 서양 소설에나 있을 듯 한 고요한 밤에 남 몰래 제 애인에게 꽃을 보내는 이 시적 행위에 그는 한껏 감격 안 할 수 없었다.
 
170
그는 편지도 보기 전에 그 화분을 안는 시늉을 하며 꽃에다 입술을 대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 눈물이 걸신거리는 눈엔 웃음이 떠돌았다. 애인이 보낸 꽃을 키스한 제 시적 행위가 더할 수 없이 기쁘고 만족하였다.
 
171
그는 올 래야 올 수 없는 무슨 시적 사정을 상상하면서 그 겉봉을 뜯었다. 그러나 그 편지의 사연은 그야말로 천만의외이었다.
 
 
172
선생님의 존안을 못 뵈온 지 어느 덧 두 달이 가까웠습니다그려. 그 사이 선생님 기체후 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하셨는지요? 저는 그동안 졸업 시험인지 무엇인지 치르노라고 죽을 애를 썼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가지 뒤 숭숭 한 이 있사와 오뇌(懊惱)와 번민으로 그날 그날을 보내노라고 선생님을 가 뵈올 틈도 없었습니다그려. 그런데 저는 내일 식전꼭두로 어데를 좀 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한 일주일 걸릴 것도 같으오나 어쩌면 여러 달포가 될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 저녁으로 꼭 선생님을 한번 뵈옵고 싶은 마음은 불 같습니다마는 벌써 아홉 점이 지냈으니 안에서 주무시게도 쉬울 것이고 처녀의 몸으로 밤늦게 선생만 찾아 뵈옵는 것도 어디 무얼할 듯 싶어서 고만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173
그러면 선생님! 한동안 가르침을 들을 수 없게 되지 않아요? 이것이 저에게는 더할 수 없이 섭섭하였습니다. 마치 무엇을 잃은 것 같아요. 제 마음 탓인지는 모르나 선생님께서도 혹 어째 아니 오나 하고 기다리며 궁금해 하실듯 하여 생각다 못한 저는 외로운 객창(客窓)에 조그마한 위로나 될까 하고 이 꽃을 보내나이다. 저는 빛깔이 아름답고 송이가 탐스러운 이 꽃을 사 랑 합니다. 선생님도 행여나 사랑해 주실는지요? 총총히 두어 자(字)로 줄이오니 못 뵈옵는 동안 내내 안녕하셔요! 네!
 
174
화라는 올림.
 
 
175
편지 보기를 마친 창섭은 얼없이 바람벽을 바라보며 '화라가?’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정애하고 남산공원으로 만나자고 약속한 날의 낮에 다녀간 후로는 화라도 발을 끓고 오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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