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여인(女人) ◈
◇ 蟬丸 (세미마루) ◇
카탈로그   목차 (총 : 9권)   서문     이전 7권 다음
1929.12~
김동인
1
女人
2
7. 蟬丸
 
 
3
1921년, 옥엽이 때문에 생겨난 가슴의 아픔을 품은 채로 평양으로 돌아와서, 마음의 고적함을 그날그날의 술로써 모호히 하던 나는, 어떤 연회에서, 세미마루(せみまる:蟬丸)라는 일본 기생을 볼 기회를 얻었다.
 
4
그때, 그는 열어섯 살이었다.
 
5
나는 그에게서 몇 해 전에 나의 앞에서 홀연히 종적이 사라져 없어진 메리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갸름한 얼굴과, 좀 꼬리가 위로 향한 듯한 눈과, 웃음을 흘리려는 듯한 입에서, 메리의 모습을 발견하였다기보다, 그의 몸놀리는 모양이며 손짓이며 머리를 늘 좀 갸웃하고 있는 태도에서, 메리와 흡사하게 생긴 세미마루는, 이상히도 나의 피곤하고 외로운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6
나의 방탕의 발은, 이때부터 조선 요리집을 떠나서, 일본 요정(料亭)으로 향하였다.
 
7
그는 아직 천진스런 어린애였었다. 동경서 고등여학을 다니다가, 가정의 사정으로 기생이 되었다 하는 그는, 아직 학생의 때가 벗지 않은 천진스런 어린애였었다. 샤미셍(しゃみせん―삼현금)을 뜯으며, 도도이츠(どどいつ―일본 속요의 하나) 같은 것을 작은 소리로 읊어 본 뒤에는, “마다 나라이다께데, 우마꾸이까나이와.(まだ習ひだてで, うまく往かないわ―갓 배운 솜씨여서 잘 안 되네요)”
 
8
한 뒤에는, 얼굴을 약간 붉히고 하는 그였었다.
 
9
몇 해 동안을 꺼졌던 메리에게 대한 어린애의 아름다운 꿈은, 이 일본 처녀의 앞에 다시 차차 불붙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10
옥엽에게 대한 쓰린 기억을 잊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여럿에서 요리집에 가서 덤비기를 즐겨하던 나는, 세미마루를 발견한 뒤부터는, 차차 그들을 피하여 하였다. 그리고 혼자서 몰래 일본 요리집으로 가서, 조용히 그를 부르고 하였다.
 
11
그러나, 나의 그에게 대한 마음은, 아직껏 화류계의 계집들에게 가졌던 바와는 달랐다.
 
12
나는 그의 앞에서는 농을 못하였다. 마음대로 덤비지를 못하였다. 눈을 들어 정시조차 못하였다. 먹먹히 마주 앉아서, 화려한 그의 옷무늬를 곁눈으로 간간 보며, 그것으로 만족한 것이었었다.
 
13
내가 그에게 취한 태도는, 마치 연애하는 바보였었다. 외로움을 띤 미소와, 한숨과 때때로 발하는 외마디의 헛소리 비슷한 말― 이것이, 내가 그에게 대하여 취한 태도의 전부였었다.
 
14
표연히 요정에 뛰어들어가서, 그를 불러 놓은 뒤에, 그가 오기까지의 짧은 시간을 안절부절 보내는 나의 모양을 누가 볼 것 같으면, 급기 만난 때에는 많은 이야기가 나에게서 나오고, 많은 속살거림이 당연히 있을 것을 예기할 것이었었다. 사실 말하자면, 나도 그를 부를 때마다, 이번부터는 좀 이야기해 보려고 결심을 하고 하였다. 그러나, 급기 그가 들어 오기만 하면, 나는 말 한 마디를 똑똑히 못하고, 빙그레 웃으며 얼굴을 붉히고 하였다.
 
15
그는 연회에서 간간 볼 때는,(일본 기생의 풍속대로) 대판(大阪) 말을 썼지만, 단둘이 만날 때는 언제든 순 동경말을 썼다. 역시 말이 그다지 많지 않은 그가, 때때로(오래간만에 듣는)순 동경 여학생 투의 말로써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게는 듣기 향그러운 일이었었다.
 
16
“네, 죠이또(ね, ちょいと―저, 이봐요).”
 
17
그는 나를 이렇게 불렀다. ‘긴상’이라지도 낳고 ‘아나따(あなた―당신)’라지도 않고 이렇게 부른 뒤에, 샤미셍으로 교요히 나는 알지도 못하는 일본 노래를 딩동댕동 뜯은 뒤에는,
 
18
“도오?(どう―어때요)”
 
19
하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고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빙긋이 웃을 뿐이었었다.
 
20
나의 눈에 비친 그는 기생이 아니었었다. 몇 해 전 어린시절에, 많고많은 아름다운 꿈을 내게 주고, 홀연히 자취가 사라진 메리의 화신― 나는 그를 이렇게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대한 나의 태도도 전혀 이러한 관념 아래서 출발되었다. 역시 다른 일본 기생에게 대하여는, 아무 기탄 없이, ‘오마에(お前―자네)’라 부르고, 기사마(きさま:貴樣―너)‘라 부르던 나는, 그에게 대하여뿐은, ’요오상(葉さん)‘이라 불렀다. 그의 본 이름은 기무라 요오꼬(木林葉子)였다.
 

 
21
그해 봄, 나는 평화박람회를 보러 동경으로 갔다. 보름을 예산하고 떠났던 나는, 열해(熱海) 온천에서 몹쓸 병에 걸려서 넘어져서, 평양을 떠난 지 한 달 만에야 겨우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22
평양으로 돌아온 날, 나는 기차에 피곤한 몸을 잠시 누워서 쉰 뒤에 환천(丸天)이라는 귀금속점으로 내려갔다. 그 집은 나의 단골집으로서, 평양 있을 때에는, 언제든 하루의 몇 시간씩을 그 집에서 보내면서, 온갖 귀금속이며 보석들을 뒤적이면서, 거기 대한 취미를 만족시키는 것이 나의 한 버릇으로까지 되어 있던 것이었었다. 그리고, 내가 그 집에 늘 다니는 것을 안 뒤부터는, 세미마루도 그 집에 와서, 내게는 간단히 목례를 하고, 그 집 노파와 한담을 하는 일이 흔하게 되어 있던 집이었었다.
 
23
노파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길에서 돌아온 인사가 몇 마디 사괴어진 뒤에, 노파는 이런 말을 하였다―.
 
24
“긴상. 아노꼬(あの子―그 애) 만났어요? 그 새 몇 번을 우리 집을 들여다보고는, ‘아노 히또, 까엣떼?(あの人 歸って―그 사람 돌아왔어요)’하고 하더니―. 가와이이고네.(可愛い子ね―귀여운 애죠)”
 
25
아노꼬(あの子)라 함은 무론 세미마루를 가리킴이었었다. 그 소위 아노꼬가 나를 부르기를 ‘긴상(金樣)’이라 하지 않고 ‘아노히또(あの人)’라 하였다는 것은 이상히도 나의 마음을 뛰놀게 하였다.
 
26
“나니오―바까나…(何お―馬鹿な―누구를― 어처구니 없는)”
 
27
나는 그 노파에게 어떤 대답을 하였는지 똑똑히 기억치 못하나, 좌우간 이 비슷한 대답을 한 듯하다.
 
28
그 날, 나는 몇 번을 속으로 아노히또 하고는 빙긋이 웃고 하였다.
 
29
그날 밤, 그와 어떤 요정에서 만날 때는, 그도 아무 말을 못하였다. 나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다만, 무심히 뜯고 있는 샤미셍의 소리를, 나도 무심히 듣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30
“오야쯔레니 낫따노네(おやつれになったのね―야위셨네요).”
 
31
말 없이 몇 시간을 앉아 있다가, 내가 셈을 명할 때에,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32
‘당신을 못 보기 때문에.’
 
33
그때, 나는, 왜 이런 능청스런 거짓말을 못하였는지. 나는 정직히, 그새 병을 앓았다는 것을 변명 비슷이 대답하였다.
 
34
나의 바보의 연애는 다시 시작되었다. 때때로는, 말 한 마디 사괴지 않고, 밤까지 샌 일도 있었다. 나는 그에게 대하여, 별다른 욕망이 없었다. 다만 그가 나의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얼굴 한 번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말 한 마디를 사괴지 못하는 그라도, 곁에 있기만 하면, 천하가 내 앞에서 사라져 없어진다 할지라도, 내게는 근심 되지 않았다. ‘그’는, 즉 ‘천하’였었다. 적어도 내게는 천하 이상이었었다.
 
35
그러한 가운데서도, 나는 때때로 메리를 생각하였다. 세미마루와는 이렇게 서로 마주 앉을 기회라도 있다 하나 앉아 본 일조차 없는 메리에 대한 이상히도 애끓는 정열은 세미마루에게 대한 비상한 애착과 함께 때때로 가슴에 무럭무럭 일어나서, 나의 마음을 뒤집어놓고 하였다.
 

 
36
남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바보의 연애는 그냥 계속되었다. 그동안에 여름과 가을도 가고, 겨울도 지났다. 무거운 압박감― 그와 마주 앉았을 동안에 받는 것은, 이것뿐이었었다. 그는, 때때로 생각난 듯이 샤미셍을 뜯었다. 나는 눈을 감고 앉아서 곡조 없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뒤에는, 밤이 깊으면 작별하였다.
 
37
이러한 일일지라도, 그도 또한 나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기쁜 모양이었었다. 내가 부르기 전에, 그가 먼저 다른 좌석에 불렸으면, 무론 ‘모라이를 가께루(貰ひ를 かける―딴 손님에게 불려간 기생을 달라고 요청함)하여까지라도, 그를 오도록 하지만, ’모라이도메(貰ひ止め―달라고 요청해도 허락하지 않고 잡아둠)‘라 되는 경우에는, 그는 어떻게 수단을 써서든, 그 좌석에서 빠져나오도록 노력하였다. 권번에 부탁을 하여 권번의 힘으로써 빠져나오는 때까지 있었다.
 
38
어떤 날, 그는 자기 손에 박힌 ‘바찌다꼬(撥だこ―장구채를 잡아서 손에 생긴 굳은 살)’를 보라고 내 앞에 손을 내어민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손을 차마 잡지를 못하고, 허리를 굽혀서 그의 손을 내려다본 뿐 이었었다. 나는 그의 손조차 감히 잡아 보지를 못하였다.
 
39
내 외투를 입히느라고 그의 숨결이 내 목덜미를 스칠 때는, 나는 몸까지 떨고 하였다. 어떤날 밤, 길로 지나가는 다시(だし : 花車―축제 때 끌고 다니는 수레)를 구경하느라고 그와 내가 나란히하여 서서 길을 내려다볼 때에, 나는 내 옆구리로써 그의 체온을 감각하고, 취한 사람같이 비츨비츨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그를 놀라게 한 일까지 있었다. 남의 눈에는 바보로 보였을지도 모르나, 내게는 꿈과 같이 아름답고 즐거운 연애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두 벙어리가 마주 앉았다가는 헤어지고, 또 같은 일을 거푸하고, ―그것뿐이었었다. 손 한번을 잡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늘 기뻤다. 무슨 알지 못할 커다란 보배를 잡은 듯이 나의 마음은 늘 맑았다. 세상조차 유난히 밝고 즐거워 보였다.
 
40
일 년 반이라는 날짜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나는 그 일 년 반을 역시 싱겁기 짝이 없는 연애로 보냈다. 그러나, 남보기에는 싱겁다 할지라도, 내게뿐은 무엇에 비길 수 없이 유쾌하고 긴장된 생활이었었다. 딩딩댕댕, 고요한 밤에 고요한 방에서 하녀까지 물리치고, 역시 고여히 뜯는 샤미셍의 소리에 나의 온 젊은 마음과 온 젊은 넋을 잠그고, 먹을 줄 모르는 한 잔 술에 얼근히 취하여 가지고, 꾜우소꾸(脇息―사방침)에 기대고,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재미는 무엇에 비길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이 밝고 부드러운 꿈에 잠겨 들어가는 듯하였다.
 
41
“네, 죠이또 나니까우따히마세우까?(ね, ちょいと. 何か唄ひませうか―저, 이봐요. 무슨 노랠 부를까요)”
 
42
꼬리가 좀 위로 향한 듯한 기다란 눈을 고즈너기 치뜨며, 이렇게 말하는 그를, 탁 집어삼켜 버리고 싶은 괴상한 충동 때문에, 나의 마음의 줄〔絃〕은 때때로 해적였다.
 
43
“요오상(葉さん).”
 
44
뜻없이 이렇게 그를 불러 놓은 뒤에, 할 말이 없어서 싱겁에 웃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45
할 말이 없어? 나는 분명히 할 말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과연 할 말이 없었을까. 수없는 많은 말이 나의 가슴 속에서 기름 끓듯 끓는 내게, 왜 할 말이 없었을까. 그러나 나는 한 마디도 나의 마음을 그의 앞에 피력할 수가 없었다. 싱겁게 웃는 한 토막의 미소는 그때의 나의 마음의 전부를 대표하는 바였었다.
 

 
46
내가 그와 처음 만난 해 봄에, 모란봉에 일본 예기 원유회가 있었다. 그것을 구경을 오라는 부탁을 단단히 받은 나는, 그 날 그것을 구경하러― 아니, 오히려 세미마루를 보러 모안봉으로 갔다.
 
47
아직 사꾸라가 지지 않은 늦은 봄이었었다. 일인이 하나노꾸모리(花の曇り―꽃구름)라고 형용하는 사꾸라의 동산은, 꿈과 같았다. 그윽한 꽃 아래는, 가지각색으로 장식한 일본 계집애들과, 그것을 따라온 오입장이의 무리의 바다가 전개되어 있었다.
 
48
그 꿈과 같은 꽃의 그림자를, 역시 꿈과 같은 마음으로 빙빙 돌며, 세미마루의 그림자를 찾아 내려고 곁눈질을 하며 돌아다니던 나는, 종내 그를 발견치 못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득월루(得月樓) 아래 가서, 사꾸라나무를 기대고 서서 몸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꿈과 같은 앞 경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내 곧 코앞으로 양장한 일본 계집애들이, 무엇이 어떻다고 웃으며 지나갔다.
 
49
“!”
 
50
나는 갑자기 몸을 바로하였다. 그 가운데 한 계집애는 분명히 세미마루였었다.
 
51
“아―(あ)”
 
52
몸을 바로한 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반벙어리같이 이런 신음을 하며, 한 걸음 나서려 할 때에, 그들은 나를 주의도 안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
 
53
“?”
 
54
세미마루―ㄹ까. 나는 문득 이렇게 의심하였다. 기생의 옷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세미마루를 늘 보던 내게는, 양장을 하고,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서 양 가슴 위로 늘이운 그 소녀를 세미마루로 보기가 힘들었다. 나이에도 차이가 있었다. 양장을 한 그 소녀는 열 두세 살로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늘 보던 눈썹과 연지를 찍지 않은 그 소녀는 한 개의 여학생으로는 볼 수가 있을망정, 기생 세미마루와는 틀리는 점이 많았다. 그의 소녀다운 활발스런 몸가짐도 통상시에 보던 세미마루와는 매우 달랐다.
 
55
‘세미마루―ㄹ까.’
 
56
나는 저편 꽃 아래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며 머리를 기울였다. 키도 늘 보던 세미마루보다 적었다.
 
57
그러나 그 꼬리가 좀 위로 향한 듯한 눈과, 걸어다닐 때에도 좀 한편으로 갸웃하고 다니는 머리에서, 세미마루의 모습을 발견한 나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을 무시하고라도, 그를 세미마루로 보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세미마루는 오늘 모란봉에 오지 않았다고 결론을 할 수 있을 만치, 나는 아까, 깨깨 모란봉 일대를 다 살핀 것이었었다.
 
58
좀 뒤에, 그 양장한 소녀는 또 내 앞으로 지나갔다. 또 좀 뒤에 그는 또 지나갔다. 그 뒤에도 연하여 왔다갔다하였다. 그러나, 한 번도 내 편으로는 머리를 돌리지를 않고 매우 바쁜 듯이 총총걸음으로 지나갈 뿐이었었다.
 
59
필요 이상 내 앞으로 번번히 지나다니는 그 수수께기의 소녀의 앞에, 나의 의혹의 불은 고요히 그러나 차차 더 크게 불붙었다.
 
60
아직껏 그 얼굴과 몸가짐의 윤곽만 머리에 사진찍어 둔 뿐, 한번도 얼굴을 자세히 정시하여 본 일이 없는 나는, 그 수수께기의 소녀를 세미마루로 단정할 만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용기를 가지지 못하였다. 더구나 내 앞으로 그렇게도 빈번히 다니면서, 당연히 나를 보았을 그로서, 만약 세미마루라 할진대, 한번의 목례(目禮)도 없이 지나갈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를 세미마루가 아니라 하면, 세미마루는 어디 있나. 그리고, 그 소녀의 여러가지의 점에서 세미마루와 흡사한 인상을 느끼는 것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나.
 
61
내가 그곳에서 자리를 옮겨서, 부벽루의 앞에 가서 쉴 때에도, 그 소녀는 몇 번을 내 앞으로 지나갔다.
 
62
뒤에 알아보니깐, 그 양장한 소녀는 역시 세미마루였었다.
 
63
그때에, 왜 나를 못 본 체하였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그는,
 
64
“닷떼…(だって―하지만).”
 
65
할 뿐, 또 샤미셍을 들어서 곡조 없이 손으로 뚱뚱 뜯었다.
 

 
66
여름에, 유지영이 평양을 내려왔다. 그는 여관을 잡지 않고 H라는 친구의 집에 묵었다. 그 H의 집은, 우리가 늘 구락부로 쓰고, 진일을 그 집에서, 보내던 집이었었다.
 
67
그러나, 지영이 온 뒤부터는, 낮뿐 아니라, 밤에도 그 집에서 모여서 놀고 하였다.
 
68
세미마루에게 대한 내 마음을 비밀히 해두었던 나는, 지영이 평양 온 뒤부터는 밤에 그 구락부로 모이지 않을 핑계가 없었다. 그래서, 하릴없이 그곳에 가고 하였다. 따라서 세미마루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69
어떤날 낮, 지영과 K와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산보를 나갔다가 잠깐 쉬러 수정(壽町) K의 집으로 향하였다.
 
70
우리가 K의 집을 향하여 해락관(偕樂館)의 앞까지 이르렀을 때에, 우리의 뒤에서 우리의 곁을 빠져서 달음박질하여 우리보다 앞선 웬 일본 계집애가 있었다. 그는 우리보다 여남은 걸음쯤 더 앞서서 휠 돌아다보았다.
 
71
그것은 세미마루였었다. 세미마루는 한 번 휙 돌아보고, 누구에게 향하여서인지 분간키 힘들게,
 
72
“곤니찌와(今日は―안녕).”
 
73
한 뒤에, 도로 바로 서서, 그곳서 한 이십여 보쯤 더 가서 있는 꼬또부끼(ことぶき―壽)라는 일본 요리집으로 들어갔다.
 
74
꼬또부끼는 K의 집 대문의 꼭 맞은편에 있었다. 우리가 K의 집으로 들어갈 때에, 얼른 곁눈으로 보니까, 그는 현관에 서서, 주인 노파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몸을 비스듬히 안으로도 아니요 길로도 아닌 측면으로 서서….
 
75
K의 집에 들어가서 좀 앉았다가 나올 때에, 대문 밖에서 맞은편을 바라보니까, 세미마루는 길로 향한 방 안에 팔을 영창 밖으로 걸치고 앉아서, 우두커니 길을 내다보고 있었다.
 
76
지영이가 그 꼴을 보고 이런 말을 하였다―.
 
77
“저 계집애, 우리 가운데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아. 부러 주우이오 히꼬오 히꼬오또 아세루(注意お引かう引かうとあせる―주의를 끌려고 안달하다)하는 게 아리아리또 미에루(ありありと見える―여실히 보인다)하는데, K,자넨가?”
 
78
“난 알지도 못하네.”
 
79
“동인이 자넨가.”
 
80
“바가!(ばか―바보)”
 
81
나는 내어던지듯이 이렇게 말하여 버렸다.
 

 
82
가을에 낚시질을 시작하였다. 여름 한철을 지영이 때문에 세미마루를 만나는 습관을 깨뜨려 버린 나는, 세미마루에게 대한 정열이 식은 바는 아니었지만, 전에와 같이 하루를 못 보면 이튿날은 입맛이 없어지도록 등이 달지는 않았다. 그런 때에 낚시질을 시작한 것이었었다.
 
83
대동강의 낚시질은 자미있다. 열기, 잔뙈기에서 붕어와 피라미 뙈기, 내지는 챌낚이며 소가리 뙈기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간의 경험이 낳은 바의 가장 정밀하고 발달된 대동강의 낚시질은 재미있다. 극도고 발달된 낚시질 때문에, 비록 물 속의 고기의 수효는 다른 강에 비교하여 거의 없다고 하여도 좋을 만치 적미난, 적으면 적으니만치, 낚아 올리는 그 재미는 도저히 입으로 말할 수가 없다. 고기가 미끼를 문 때에 약동하는 쫑대의 허리며, 얼레를 통하여 감각하는 고기의 비약이며, 거의 끄을어올린 뒤에, 맑은 물 속에서 이리 버낏, 저리 벌낏, ―죽은 목숨을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퍼덕거리는, 낚시 끝에 달린 고기며, 그런 때마다 혹은 꺼부러져 들어가며, 혹은 실이 돨돨 풀려 나가는 얼레의 손맛, 종내 마상이까지 끄을려 올라와서 낚시를 떼일 때에, 손으로 감각하는 미끄러운 맛과 생명의 약동들은, 낚시질에 손을 대어 보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짐작도 못 할 통쾌와 희열이 있다.
 
84
그동안, 나는 세미마루를 잊었다. ―아니, 잊었다면 말에 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잊었다는 것보다, 물 가운데 세미마루의 그림자를 그려 놓은 뒤에, 그 그림자에, 나의 온 정열을 부읏고, 멀거니 앉아 있는 자미에, 실물 세미마루를 보고 싶은 안타까움을 잊은 것이었다. 내 마음속에 꿈을 잠겨 있던 세미마루는, 여기서, 명실이 갖은 ‘꿈의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었었다.
 
85
이 가을을 낚시질로 보내는 동안, 세미마루는 실재성을 잃고, 나의 마음속에서 한 우상으로 화하여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세미마루가 내 마음에서 우상화하는 동시에, 몇 해 전 어린시절에 홀연히 종적이 없어지면서부터 나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우상으로 화하여 버린 메리와 합일하였다.
 

 
86
그 해도 거진 다 간 섣달 그믐게 어떤 날, 김환이 북경으로 가는 길에 집에 들렀다. 그날 밤 환을 보내는 뜻으로, 어떤 일본 요정에서 소연을 열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세미마무를 만났다.
 
87
그 날을 기회로 나의 마음의 정열은 다시 폭발되었다. 나의 발길은 저녁만 되면 또 다시 따마야(たまや―祠堂)며 칠성관으로 가게 되었다. 또 다시 침묵의 연애는 시작되어 계속되었다.
 

 
88
이듬해 이른봄, 무슨 일로 한 달쯤 평양을 떠났던 나는, 평양으로 돌아온 날 밤으로 세미마루의 종적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나의 수저운 마음은, 요정 여장(女將)에게 세미마루의 간 곳에 대하여 똑똑히 묻지도 못하고, 이튿날 환천(丸天) 주인 노파에게 다시 물어서, 겨우 서울 이세옥(伊勢屋)이라는 집 주인 영감의 소실로 팔려 갔다는 말을 들었다.
 
89
“그 애가 떠나는 날, 집에 왔더니….”
 
90
노파는 이런 말을 하였다.
 
91
“가아이소네(可哀想ね―슬프군요). 울먹울먹 하면서 떠나더니…. 긴상 돌아오시거든 요로시꾸(よろしく―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해달라고 신신이 부탁을 하면서….”
 
92
이런 말도 하였다.
 
93
이러한 몇 가지의 말 앞에, 나는 말도 못하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몇 해 전에 내 앞에서 홀연히 종적이 없어져 버린 금발의 소녀 메리와 같은 자취를 밟아서, 여기서 또한 나의 앞에서 홀연히 자취가 사라져 없어진 흑발의 소녀와 나의 새에 얽히었던 쓸쓸하고 애연한 인연 때문에, 한숨을 쉬었다.
 
94
며칠 뒤에, 서울로 올라가서 전화부를 뒤적여서 이세옥을 찾아 본 결과, 전당국, 요리집, 술장사, 오복점(吳服店), 이렇게 네 가지의 이세옥을 찾아 낸 나는, 어느 곳에 세미마루가 가 있는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이, 전화부를 내어던졌다. 일일이 그 네 집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가 있는 곳을 집어 내기에는 나는 너무도 소담하였다. 설혹 가 있는 곳을 안다 할 지라도, 그 뒤에 행할 조처도 없었다.
 

 
95
그 뒤에 나는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그보다 썩 뒤에 대련(大連)에서 다시 히따리쯔마(ひたりつま―왼쪽 옷단)를 잡고 나섰다는 풍문은 들었으되,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알 수 없다.
 
96
다만, 어린시절에 한때 몹시도 나의 마음을 떨리게 한 뒤, 홀연히 종적이 없어진 메리와, 청년기에 들어서, 또한 나로 하여금 바보같이 만들어 놓은 뒤에, 또한 종적이 없어져 버린 세미마루, 하나는 혼혈아, 하나는 일본 소녀― 이 두 소녀는, 나의 머리에 가장 아름다운 우상으로 남아서, 나로 하여금, 늘 즐겁고도 애연한 회상에 잠기게 한다.
 

 
97
기무라 요오꼬(木林葉子)―. 기무라 요오꼬(木林葉子)―. 그는, 지금도 건재한지. 그의 생사며 행방을 알 수가 없는지라, 나의 마음은 더욱 그 애연한 인연 때문에 눈물겨워진다.
【원문】蟬丸 (세미마루)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166
- 전체 순위 : 485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73 위 / 88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6) 따라지
• (2) 봄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여인 [제목]
 
  김동인(金東仁) [저자]
 
  1929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목차 (총 : 9권)   서문     이전 7권 다음 한글 
◈ 여인(女人)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