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맥(麥) ◈
◇ 맥(麥) 3장 ◇
카탈로그   목차 (총 : 3권)     이전 3권 ▶마지막
1941.2
김남천
 

1. 3장

 
2
독신용의 방이 서른 여섯에 가족용의 두 칸씩 맞붙은 방이 스물 다섯이나 되어서 100명이 훨씬 넘는 식솔이 살고 있는 집이고 보니 들고 나는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따져서 기억해둘 수도 없고 또 그 이상 그 사람들의 성품이나 생활 습속 같은 것에 대해서 눈여겨볼 겨를이나 흥미도 없으므로 일단 사람을 들여놓은 뒤에는 특별한 일이나 없으면 그다지 밀접한 교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기야 무경이가 한집안에서 자고 먹고 하였고 또 출입구가 있는 옆에 사무실이 있어서 손님들 측으로 보면 눈에 익은 존재였으나 무경이 편으로 보자면 한 달에 한 번씩 방세나 받고 난방비나 전등료나 급수료 같은 것이나 받아 치우면 규칙을 문란하게 하지 않는 이상 아무러한 교섭이나 간섭 같은 것을 가지게 될 리 만무하였다. 사무실 밖에서 상서롭지 못한 일로 무경이가 그들과 직접 대면하는 일은 거의 없어 그런 때마다 강영감이나 주인 자신이 나서서 처리해왔으므로 무경이는 복도에서 오래된 사람이 아니고는 그대로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이관형이도 응당히 그러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3
그러나 며칠 동안 한집 옆 방에 같이 지내면서 그의 낯을 다시 대해본 적도 없었으나 어쩐지 그의 생각만은 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들어오는 날부터 교섭이 이상해졌고 또 사람된 품이 보통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하루 한두 번씩 그를 찾아오는 문란주를 주목해보는 때마다 역시 이관형의 존재는 언제나 머리에 떠올랐다. 그래서 자기 방으로 돌아갈 때엔 대체 이 사람은 나의 옆 방에서 하루 종일 무엇으로 소일을 하는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곤 하였다.
 
4
대학 강사에서 실패한 사람, 그대로 대학 강사래도 모르겠는데 그것에서 실패하고 그리고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르고 여자의 가운을 걸치고 번듯이 침대에 누워서 담배만 피우고 빵조각이나 씹다가는 머리맡에 팽개쳐 두고…… 이런 것이 가끔 이상하고도 우스꽝스러워서 무료할 때마다 때때로 머리에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강영감은 강영감대로 문란주가 나타나는 것만 보면 으레히,
 
5
“양복점 주인 아씨가 또 오셨군, 대학교 선생 심방하러.”
 
6
하고 말하곤 하여서 무경이는 책상에 머리를 묻고 사무에 열중하다가도 그들의 관계로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7
“영감님은 그 여자완 기쓰구 해봅니다그려.”
 
8
하고 웃는 말로 하면,
 
9
“흥.”
 
10
하고 콧방귀를 뀐 뒤엔
 
11
“무어 그럴 일도 없지만 난 그 부인네와 사내의 관계가 이상스러워서 그러지 않나. 친척이라든가 그런 관계는 아니여, 내 눈은 속이지 못하지. 대학교 선생이라구 뻐기면서두 내 눈이야 어디 속였나.”
 
12
무경이의 대답이 없어도 입 안으로,
 
13
“심상하잖아! 내 눈이야 속이나.”
 
14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보일러 칸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래서는 무경이도 영감의 이끄는 대로 문란주와 이관형이의 관계로 생각을 달리게 되는 수가 있었는데 남들의 남녀 관계에 젊은 여자가 무슨 참견이냐고 낯을 붉히면서도 가끔 그러한 것을 천착해보고 앉았는 저 자신을 발견해보게 되는 것이었다.
 
15
이관형이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온 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출근 시간에 사무실로 내려가니까 그와 교대해서 저희 집으로 가는 강영감이,
 
16
“거 이상허지. 하루에 한두 번씩은 꼭 오군 하는 그 양복점 아씨께서 어제는 결근을 허셨어. 밤에나 올련가 했더니 거 웬 셈일까.”
 
17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경이는 그저,
 
18
“그래요.”
 
19
하고만 대답하고 그러한 이야기에 깊이 생각을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정이 넘고 1시가 되었을 때였다. 사무실 안에서 별로 할 것도 없고 하여 잡지를 들고 앉았는데 이 집에 이사온 지 처음으로 이관형이라는 그 사내가 휘우청휘우청 층계를 내려오고 있었다. 머리와 낯바닥은 그대로였으나 옷은 양복뿐으로 물론 여자의 가운 같은 것은 둘렀을 리 만무하였다. 무경이는 잡지를 든 채 그의 거동을 눈여겨보았다. 그는 층계를 내려오더니 우선 복도를 한 번 쭉 살펴본다. 아래층은 절반 이상이 식당과 당구장과 목욕탕이 되어 있으므로 그런 것을 패 쪽을 따라서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흥미가 있는지 느린 다리를 이끌며 패 쪽 밑으로 가서 기웃기웃 방안의 설비같은 것을 엿보듯 하더니 다시 제 방으로 올라갔다. 한참만에 그는 편지 봉투를 하나 들고 내려와서 이번에는 곧바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20
그는 문 안에서 껀뜩 머리를 수그리었다. 무경이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받았다.
 
21
“전화 좀 빌려주십시오.”
 
22
무경이는 아무말 않고 전화통을 옮겨주었다. 그는 다시 전화번호 책을 찾아서 뒤적거리더니,
 
23
“여기서 가까이 대두구 쓰는 용달사가 있습니까?”
 
24
하고 묻는다.
 
25
“있습니다.”
 
26
그러고는 번호를 가르쳐준 대로 번호를 부르고 메신저 하나만 보내달라고 말하였다. 전화를 끊고는 메신저가 오는 동안 제 방에 올라가 있을 것인가 여기서 기다릴 것인가를 망설이는 듯이 잠깐 주춤하고 서 있다.
 
27
“여기 앉으시요, 곧 올 겁니다. 그리구 전화는 삼층에두 하나 설비해놓았으니까 스위치를 돌리시구 인제부터 거기서 이용하시지요.”
 
28
“아, 네에, 그렇습니까. 미처 몰랐습니다.”
 
29
이관형이는 의자에 앉았다. 무경이는 사내와 낯을 마주 대하고 앉았기가 면구스러워 잡지에 눈을 묻었으나,
 
30
“거 어째 이발소가 없습니까?”
 
31
하고 사내가 물어서 그는 얼굴을 들었다. 그러고는 사내의 시선과 부딪쳐서 이상스럽게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았다. 인제 이발할 생각이 나는게로군 하고 생각해보니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32
“이발소는 처음에 시작했으나 요 바루 맞은편에 오래된 이발소가 있어서 도무지 영업이 되질 않었답니다. 이 집 사람들만 가지구야 영업이 성립되겠어요. 일백 이삼십 명 된다구 허지만 그 중엔 부인네두 많구 한 사람이 두번씩 깎는다 쳐두 한 달에 오륙십 원 수입밖에 더 되겠어요. 이발사 한 사람을 채용해두 수지가 맞질 않습니다. 그래 가까운 데 이발소두 있고 해서 폐지를 했답니다.”
 
33
“하하아 그렇겠군요.”
 
34
이관형이는 감탄하는 듯이 목을 주억거렸다.
 
35
“그 이발소 자리는 오락장이 되었지요, 바로 목욕탕 옆 방.”
 
36
“예에.”
 
37
그러고 있는데 메신저가 들어와서 이관형이는 편지를 그에게 맡겼다.
 
38
“이 윤선생이 안 계시다면 아무한테두 보이지 말구 그대루 갖구 돌아와.”
 
39
하고 타일렀다.
 
40
“돌아오건 좀 제 방으루 보내주십시오.”
 
41
부탁하고 이관형이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한 40분 걸려서 메신저가 돌아왔다. 윤아무개한테 편지는 전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또다시 한 30분 지난 뒤에 둥실둥실하게 생긴 멀끔하고 정력적인 젊은 신사가 아파트를 찾아와서 이관형이를 물었다. 무경이는 그에게 방을 가르쳐주면서 이 사람이 아까 용달을 보냈던 윤아무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42
인제 오래인 잠을 깨어나서 차차 움직이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생각해보면 어쩐지 이관형이의 거동이 탈피(脫皮) 작용을 하고 있는 동물처럼 생각되어 웃음이 났다. 그러나저러나 대학 강사가 되었다가 실패하곤 저런 판국을 경험하게 되는 것인가고 생각하면 어떤 엄숙한 인생의 문제에 부딪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적지 않이 침울해졌다. 그럴 때마다 그는 오시형이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내들이란 어떤 커다란 문제 앞에 서면 저렇게 평상되지 않은 행동을 가지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아주 그러한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져버리면 타락자가 되고 낙오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일까. 이관형이의 오늘 행동이 그러한 구렁텅이로부터 정상된 생활 상태로 복귀하려는 사람의 몸부림 같아서 그는 지금 아까와 같이 웃음이 떠오르지도 않는 것이다.
 
 
43
얼마해서 윤아무개는 나갔다. 한참 뒤에 이관형이가 다시금 층계위에 나타난 것은 그때에 마침 강영감이 사무실에 있어서,
 
44
“어유 저 사람이 어떻게 된 셈판인가, 목욕할 생각을 다 내구.”
 
45
참말 밖을 내다보니까 이관형이는 수건을 들고 복도에 내려서고 있었다. 잠시 목욕간을 넘겨다보고는 이편 쪽으로 낯을 돌리고 사무실로 들어온다.
 
46
“이거 자주 들러서 사무 보시는데 죄송합니다. 미안하지만 은행 시간이 넘었구 해서 말씀 여쭙는데 소절수 1장 바꾸어주실 수 없을까요?”
 
47
시계는 3시 반이 넘었었다.
 
48
“글쎄, 얼마나 쓰시려는지요. 돈이 많지는 못한데.”
 
49
“1000원짜리지만 우선 있는 대루 돌려주시지요. 적어두 좋습니다.”
 
50
“한 200원.”
 
51
“네 그게믄 충분합니다.”
 
52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소절수 1장을 꺼내서 무경이에게 넘겼다. 윤갑수라는 사람의 소절수였다. 무경이가 금고를 여는 동안 이관형이는 무료히 서있다가, 문득 강영감을 발견하고,
 
53
“일전 일루 영감께선 여태 노하셨습니까?”
 
54
하고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껄껄 웃었다. 강영감은 관형이가 웃는 바람에 적지 않이 겸연쩍어져서,
 
55
“온 천만에 말씀을, 고만 일에 노헐 나입니까.”
 
56
하고 제법 여태까지의 일은 잊어버린 듯이 대답하였으나 그래도 그다지 마땅하지는 못 한 것인지 슬며시 문을 열고 복도로 빠져 나갔다. 그것을 보고는 무경이도 함께 미소를 입술가에 그려보았다.
 
57
“200원이올시다. 세어보십시오. 그럼 이 소절수는 맡아두었다가 내일 찾아다드리지요. 식산은행이시죠?”
 
58
관형이는 돈을 받아서 넣으며,
 
59
“고맙습니다.”
 
60
그러곤 획 낯을 돌리다가 시계 밑에 붙여놓은 길쯤한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에 놀란 듯이 여자가 옆에 있는 것도 불구하고 잠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터거리를 한 번 쓱 쓸어본다. 그러고는 무경이를 곁눈질하고 씨익하니 웃었다.
 
61
“면도를 빌려드릴까요?”
 
62
그러니까 사내는 머리를 극적극적 긁으며,
 
63
“에이 뭐 면도는요.”
 
64
하고 데석을 설레설레 털었다. 그러나 잠시 더 멍청하니 서서 거울을 바라보다가,
 
65
“제 면도가 아마 여기 있을 거예요.”
 
66
그러니까 힐끗 무경이를 본다. 남의 남자에게 면도를 빌려준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수상쩍은 일이어서 나직이 변명하듯이 서랍에서 면도를 찾으며 중얼거린다.
 
67
“이사올 때 잊었다가 핸드백에 넣었더니 배가 불러서 꺼내두었었는데…… 여기 있습니다. 잘 들는지 모르지만 써보시지요. 전 통이 쓰지 않습니다.”
 
68
그래서 이관형이는 면도를 얻어 들고 비누곽을 타월로 잘라 맨 것을 디룽궁디룽궁 휘저으며, 욕탕 있는 데로 갔다. 그 뒷모양이 우스워서 무경이는 욕탕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69
4시가 가까워서 사무실은 강영감에게 맡겨놓고 무경이는 다녀온 지도 얼마 되고 하여 어머니한테로 갔다. 어머니와 정일수 씨는 장충단 이편 앵구장이라는 주택지에 살고 있었다. 가면 언제나 반가워하고 쓰다듬어 줄듯이 고맙게 친절히 해주었으나 한 시간쯤 앉았노라면 으레히 인제 아파트의 사무원은 그만두는 게 어떠냐는 권면(勸勉)이 퉁겨 나오곤 하였다. 먹을 것이 없니 입을 것이 없니 방 한 칸을 빌려갖고 사는 건 살림이 간편해서 네 말마따나 좋을는지 모른다 쳐도 무엇 때문에 남에게 구속받는 생활을 하면서 뭇사람의 시중을 드느냐 하는 것이 언제나 판에 박은 듯이 나오는 어머니의 말이었다. 어머니나 정일수 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고 무경이 자신조차도 그러한 생각을 먹어볼 때가 있으므로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그는 그저 좋은 말로 어루만져두는 것이었으나 오늘은 기어이 속 시원히 동경 같은 데루 학교나 가보는 것이 어떠냐는 말까지 나오고야 말았다.
 
70
무경이는 저녁도 얻어 먹지 않고 붙잡는 어머니를 바쁜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서 뿌리쳐버리고 앵구장을 나섰다. 교외에 나가보면 봄이 한 걸음 한걸음 닥쳐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해질 무렵의 거리를 걸으면서 생각에 잠긴다.
 
71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시형이와 자기와의 관계가 이미 파탄이 나버린 지 오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으나 속 시원히 공부나 더 해보라는 권면 뒤에는 벌써 그러한 눈치가 숨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오시형이와 나와의 관계는 남들이 생각하듯이 완전히 끝이 나버린 것일까, 시형이가 들었던 방과 시형이를 위하여 얻었던 직업을 이렇게 놓아주지 않고 있는 것은 남들이 보듯이 쓸데없는 고집에 불과한 것은 아닌 것일까.
 
72
맥이 풀려서 그는 지나가는 자동차를 잡아타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빈 방안에 앉아보아도 마음은 그대로 침울하였다.
 
73
시형이의 애정을 인제는 믿지 않는다고 제 마음에 타일러온 것은 벌써부터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 타이르고 뇌보고 하는 것을 지금 새삼스럽게 인정하려 들면 역시 마음은 어느 귀퉁이에선가 도리질을 계속하는 것이다.
 
74
사람의 일이 설마 그럴 수야 있을까. 설마 그럴 수야 ― 이 설마에 매달려서 그것을 생활의 유일한 기둥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75
그는 머리를 털고 일어나서 전등을 켰다. 열심히 방을 정돈하였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먼지를 털고 걸레를 치고…… 그러면 가슴이 좀 후련해졌다. 그는 식당으로 가서 오래간만에 정식을 먹었다. 거의 다 먹었는데 이관형이가 아주 딴판인 모습으로 식당엘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님이 더러 있어서 그는 이내 무경이를 발견하지는 못하였으나 식당 안에 들어와 본 것이 처음인지 방안을 한 번 휘둘러 살피다가 무경이가 밥을 먹고 앉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옷은 별것이 아니었으나 면도를 하고 안 하는 데 사내의 얼굴이란 저렇게 달라지는 것인지 불빛 밑이라 낯빛은 의연히 창백했으나 그럴수록 부드럽게 감아서 말린 머리카락 밑에 백석(白晳)이란 형용이 들어맞을 온후하면서도 날카로운 얼굴 모습이 뚜렷하게 들어나 보이는 것이었다. 면도를 빌려주길 잘 했다고 생각하면서 밥 먹던 손을 놓고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맞아주듯 하였다.
 
76
“진지 잡수러 오십니까?”
 
77
“네, 처음으로 식당을 좀 이용해보려고요. 참 면도는 선생님이 안 계셔서 제 방에 가져다두었는데 선생님께선 오늘 늦게까지 사무 보십니까?”
 
78
이관형이는 옆의 테이블에 앉으며 말을 건네었다.
 
79
“저두 이 집에서 기거합니다. 바로 선생님 옆 방인걸요.”
 
80
그걸 여태 몰랐다는 듯이 사내는 ‘네에’ 하고 놀라면서,
 
81
“그런 걸 모르구 1주일 가까이 지냈으니…….”
 
82
따라온 보이에겐,
 
83
“나도 저 선생님 잡숫는 걸루 갖다주게.”
 
84
하고 일러놓곤 무경이의 시선과 마주쳐서 허허어 하고 웃었다.
 
85
“그러시면 이십 삼 호든가 사 호든가!”
 
86
“네, 이십 삼 호요.”
 
87
“그래서 면도가 다 있으셨군 그래.”
 
88
그러고는 또 웃어 보였다. 식사 끝이 화려한 것 같아서 무경이는 유쾌하였다.
 
89
“전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90
하고 관형이의 시킨 것이 오기 전에 그는 자리를 떴다. 방으로 돌아와서 찻잔을 부시고 가스에 물을 끓였다. 불을 밝히고 마음을 가라앉히어 책이나 읽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한참만에 주전자의 물이 끓어서 그는 잔을 내어 놓고 홍차를 만들었다. 그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여니까 이관형이었다.
 
91
“면도 가져왔습니다. 난 또 남의 방에 잘못 들어오진 않나 하구서
 
92
…….”
 
93
“그대루 두시구 쓰실 걸 그랬지요. 그러나저러나 좀 들어오세요. 지금 막 홍차를 만들던 중입니다. 들어오셔서 한 잔 잡수세요. 립턴이 좀 남은 게 있어서 자아 방은 누추하고 좁지만.”
 
94
관형이는 문지방에서 잠시 머뭇머뭇하였으나,
 
95
“방을 아주 깨끗이 정돈하셨군요. 이렇게 청결해야만 되는 건데 우리 같은 사람은 도시 이런 아파트 생활에 부적당합니다.”
 
96
침대가 있는 데와 취사상이 있는 데는 모두 두터운 커튼을 쳐서 여자의 방 같은 화사한 색채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97
“그럼 한 잔 얻어 먹을까. 오래간만에……. 이거 너무 실례가 많습니다.”
 
98
그러고는 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응접 의자로 안내하고는 조그만 앞치마를 스웨터 위에다 두르고 무경이는 홍차를 만들었다.
 
99
“선생님 공부하십니다그려.”
 
100
하고 놀란 듯이 뒤를 놓은 서가와 그 옆으로 쌓아놓은 많은 서적을 굽어본다. 무경이의 것 외에 오시형이가 미결감에서 보던 것이 대부분 그대로 있어서 서적은 의외로 많았었다.
 
101
“그저 허는 시늉이나 합니다.”
 
102
“아니 거 대부분이 철학이 아닙니까.”
 
103
그는 참말로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차를 가져다 앞에 놓아도 무경이의 얼굴만 감탄하는 낯으로 뻐언히 쳐다보고 있었다.
 
104
“너무 그러시지 마세요. 부끄럽습니다.”
 
105
그러나 열심히 공부한다는 칭찬을 받는 것은 그다지 불쾌한 일은 아니었다.
 
106
“어서 식기 전에 차 드세요.”
 
107
관형이는 깊이 감동된 듯한 얼굴로 가만히 앉았었으나 이윽고 차를 들어서 맛보듯이 입술로 가져갔다. 무경이도 마주 앉아서 차를 들었다.
 
108
“선생님은 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치셨어요?”
 
109
“나요?”
 
110
그러고는 찻잔을 놓았다.
 
111
“일전에 대학 강사라구 사칭했던 건 취소하지 않았습니까.”
 
112
그러나 입술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113
“그렇게 놀리시지 마십시오. 그때엔 사정이 그렇게 되어서 실례를 했었지만.”
 
114
무경이도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115
“가르쳤달 것까진 없지만 영어를 좀 강의했습니다.”
 
116
“그럼 영문학이 전공이세요?”
 
117
“네, 선생님의 철학으루 보면 아주 옅은 학문이올시다.”
 
118
“온 천만에, 제가 또 철학이니 무어 변변히 공부헌 줄 아시구 그러세요. 저 책두 대부분이 제 것이 아니랍니다. 어찌어찌 그렇게 될 사정이 있어서 요즘 좀 뒤적거려보지만.”
 
119
관형이는 다시 서가 있는 쪽을 돌아다본다.
 
120
“니체, 키에르케고르, 베르그송, 뒤르켕, 딜타이, 하이데거, 세렐, 페기, 올테가, 짐멜, 슈미트, 로젠베르크, 트레루치, 듀이…….”
 
121
그렇게 책 이름의 밑을 따라가며 입 속으로 중얼중얼하다가,
 
122
“어유우 이거 뭐 굉장한 거물들이 아주 뭇별처럼 찬연히 빛나고 있습니다그려. 모두 세계 정신을 저저끔 떠받들고 구라파를 구해보겠다는…….”
 
123
그러고는 낯을 돌려 찻잔을 다시 들면서,
 
124
“나두 인제 저 사람들을 좀 공부해야지…….”
 
125
저의 여태껏의 생활이 엉망이었던 것을 부끄러워하는 낯으로 가만히 그렇게 뇌었다. 그러나 무경이는 어쩐지 낯이 간지러웠다. 책은 쪼르르니 꽂아 놓았지만 저는 아직 그 뭇별처럼 빛나는 구라파의 사상가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 것도 알고 있달 자신이 없었다. 자기를 무슨 큰 공부꾼이나 되듯이 착각하고 있는 젊은 학자를 눈앞에 앉혀 놓고 그는 난데없는 부끄러움을 맛 보고 있다. 그럴수록 오시형이의 생각이 난다. 그이에게 구원을 준 사람은 그의 말에 의하면 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라 한다. 하긴 저 사람들은 오시형이의 애정까지도 무경이에게서 빼앗아갔지만.
 
126
그런 것을 마음속으로 생각해보다가 무경이는 낯을 들었다.
 
127
“선생님, 제가 하나 여쭈어볼 말씀이 있습니다.”
 
128
“무어 말입니까? 저는 그런 방면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129
무경이는 그러한 사내의 겸사의 말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열심스러운 태도로 물어본다.
 
130
“동양학이라는 학문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131
동양학은 어떻게 해서 오시형이를 저토록 고민 속에 파묻히게 만드는 것일까, 동양학으로 가는 길이 무엇이건대 그것은 오시형이와 최무경이의 관계를 이토록 유린하고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일까. 그의 질문에는 학문과 애정의 문제가 함께 얽혀져서 마치 그의 생활의 전체를 통솔하고 지배하는 열쇠 같은 것이 관측되어 있는 것이다. 사내들 세계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라 한다. 사실 그는 오시형이가 평양으로 내려간 뒤부터 그를 이해하고 있달 자신이 없어졌다. 지금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이관형이라는 사내 역시 정체를 붙들 수 없는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것을 보면 교양있고 얌전한 지식인 같으다. 그러나 한편으론 문란주와 같은 나이 먹은 여자와 강영감의 말은 아니지만 심상하지 않은 관계를 맺어놓고 질서 없는 비위생적인 생활도 버젓하게 벌여놓을 수 있는 사람.
 
132
무경이의 묻는 말에 처음은 농말조로 받아 넘기려다가 그의 태도가 지나치게 진지한 데 눌리어서 이관형이도 잠시 제 머리를 정리해보듯 한다.
 
133
“전문 부분이 아니어서 상식적인 것밖에는 대답할 수 없겠습니다. 그리구 그런 정도로도 잘못된 해석이나 또 엉터리 없는 추상이 많을 줄 압니다마는. ……내 생각 같애선 서양 사람이 자기네들의 학문적 방법을 가지고 동양을 연구하는 것과 동양인이 구라파의 학문 세계에서 동양을 분리할 생각으로 동양을 새롭게 구성해보려는 노력과 이렇게 두 가지루다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가 있는데 어느 것이나 독자적인 학문을 이룬다든가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줄 생각합니다. 서양학자가 구라파 학문의 방법을 가기고 동양을 연구한다고 그것을 동양학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역적인 의미밖에 되는 게 없으니까 별로 신통한 의미가 붙는 것이 아니고 그저 편의적인 명칭에 불과할 것이오, 또 동양인인 우리들이 동양을 서양 학문의 세계에서 분리해서 세운다는 일에도 정작 깊은 생각을 가져보면 여러 가지 곤란이 있을 줄 압니다. 가령 동양학을 건설한다지만 우리들의 대부분은 구라파의 근대를 수입한 이래 학문 방법이 구라파적으로 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의 거의가 구라파적 학문의 방법을 배운 사람들이니 그 방법을 버리고서 동양을 연구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동양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학문 방법으로 동양을 연구하여야 할 터인데 내가 영국 문학을 한 사람이라 그런지 사회 과학이나 자연과학이나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구라파적 학문 방법을 떠나서는 지금 한 발자국도 옴짝달싹 못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니시다 같은 철학자도 서양 철학의 방법을 가지고 일본 고유의 철학 사상을 창조한다고 애쓴다지 않습니까. 한동안 조선학이라는 것을 말하는 분들도 우리네 중에 있었지만 그 심리는 이해할 만하지만 별로 깊은 내용이 없는 명칭에 그칠 것입니다. 요즘에 율곡 같은 분의 유교 사상을 서양 철학의 방법을 가지고 연구해보려는 분들이 생기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양학의 성립이란 애매하고 또 내용 없는 일거리가 되기 쉽겠습니다.”
 
134
“그러나 서양 학자들이 동양을 연구하는 데는 좀더 다른 의미도 들어 있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서양의 몰락과 동양의 발견이라든가 하는.”
 
135
“네 잘 알겠습니다. 요즘 그렇게들 말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겠지요. 구라파 정신의 몰락이라든가 구라파 문화의 위기라든가 하는 소리는 이 쭈루루니 책장에 꽂혀 있는 뭇별 같은 사상가들이 오래 전부터 떠들어오는 말이고, 구라파 정신의 재생이나 갱생책을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동양을 발견하는 일이 많다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그러나 그들은 결코 구라파 정신을 건질 물건이 동양의 정신이라고는 믿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가지로 세계를 건질 정신은 역시 구라파 정신이라고 깊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양 사람으로서는 물론 당연한 일이고 우리 동양 사람은 감정적으로래도 항거하구야 견뎌 배길 일이지만 그러나 구라파 학자의 동양 발견이라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 서양 학자가 동양에 오면 도시의 근대 건축이나 그런 것에는 조금도 감탄하지 않고 고적이나 유물 앞에서는 아주 무릎을 친답니다. 그를 안내한 동양 학자는 이것을 설명해서 서양 사람들은 위안으로밖엔 감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유물이나 고적에서 서양을 건져낸다든가 세계정신을 갱생시킬 요소를 발견하고 감탄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런 점은 우리 동양 사람이 깊이 명심할 일입니다.”
 
136
무경이는 가만히 듣고 앉아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오시형이의 이론을 그대로 옮겨서 또 한 번 질문을 던져본다.
 
137
“앞으로의 현대의 세계사를 구상해보는 데 있어서 서양사학에서 떠나 다윈 사관에 입각하여 여러 개의 세계사를 꾸며놓는 것은 어떨까요?”
 
138
학문적인 술어가 마음대로 입에 오르지 않아서 그는 더듬더듬 자기의 의사를 표현해놓는다.
 
139
“동양에는 동양으로서 완결되는 세계사가 있다, 인도는 인도의, 지나는 지나의, 일본은 일본의, 그러니까 구라파학에서 생각해낸 고대니 중세니 근세니 하는 범주를 버리고 동양을 동양대로 바라보자는 역사관 말이지요. 또 문화의 개념두 마찬가지 구라파적인 것에서 떠나서 우리들 고유의 것을 가지자는 것. 한번 동양인으로 앉아 생각해 볼 만한 일이긴 하지마는 꼭 한가지 동양이라는 개념은 서양이나 구라파라는 말이 가지는 통일성을 아직껏은 가져보지 못했다는 건 명심해둘 필요가 있겠지요. 허기는 구라파 정신의 위기니 몰락이니 하는 것은 이 통일된 개념이 무너지는 데서 생긴 일이긴 하지만. 다시 말하면 그들은 중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중세가 가졌던 통일된 구라파 정신이 자주 깨어져버리는 데 구라파의 몰락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정신의 갱생을 믿는 것은 통일을 가졌던 정신의 전통을 신뢰하기 때문이겠습니다. 불교나 유교는 이러한 정신적 가치로 보면 훨씬 손색이 있겠지요. 조선에도 유교도 성했고 불교도 성했지만 그것이 인도나 지나를 거쳐 조선에 들어와서 하나도 고유의 사상이나 문화의 전통을 이룰 만한 정신적인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허기는 그건 불교나 유교의 탓이라기보다는 우리 조상들의 불찰이기도 하지만.”
 
140
어느 한귀퉁이를 비비고 들어가볼 틈새기도 없을 것 같았다. 이관형이의 이러한 생각을 듣고 있으면 그가 비위생적인 생활태도를 가지는 데도 어딘가 이해가 가는 듯이 느껴졌다. 동양인으로서 동양을 저토록 폄하(貶下)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하나의 비극이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하였다. 그는 잠시 오시형이의 편지를 생각해보았다. 비판만 하면 자연히 생겨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의 지식인들의 하나의 통폐라고 말하면서 비판보다도 창조가 바쁘다고 한 것은 이러한 것을 두고 말하였던 것일까.
 
141
잠시 말을 끊고 앉아 있던 이관형이는 주머니를 뒤져서 담배를 꺼냈다.
 
142
“미안하지만 담배 한 가치만 피웁시다.”
 
143
그러고는 성냥을 그어서 담배를 붙였다. 한 모금 깊숙이 빨고는,
 
144
“요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반 고호라는 화가의 말인데.”
 
145
다시 한 모금 빨아 마신 뒤에,
 
146
“인간의 역사란 저 보리와 같은 물건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 흙 속에 묻히지 못하였던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갈려서 빵으로 되지 않는가. 갈리지 못한 놈이야말로 불쌍하기 그지 없다 할 것이다. 어떻습니까?”
 
147
그러고는 또 한 번 뜨즉뜨즉이 그것을 외고 있었다. 무경이도 그의 하는 말을 외가지고 다소곳하니 생각해본다. 그러나 한참만에,
 
148
“그게 어떻단 말씀이에요. 흙 속에 묻히는 것보다 갈려서 빵이 되는 게 낫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잖으면 흙 속에 묻혀서 많은 보리를 만들어도 그 보리 역시 빵이 되지 않는가 하는 말씀입니까?”
 
149
하고 물어보았다. 이관형이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150
“여러 가지루 해석할 수 있을수록 더욱더 명구가 되는 겁니다. 해석은 자유니까요.”
 
151
“그럼 전 이렇게 해석할 테예요. 마찬가지 갈려서 빵가루가 되는 바엔 일찍이 갈려서 가루가 되기보담 흙에 묻히어 꽃을 피워보자.”
 
152
이관형이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었다.
 
153
“구라파 정신이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적에 그들이 니힐리스틱하게 던져본 말입니다. 이렇게 구라파가 몰락해버리는데 정신을 신장해보는 사업에 종사해본들 무엇하랴, 이건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의 해석이랍니다. 선생님의 해석은 건강하고 낙천적이고 미래가 있어서 좋습니다.”
 
154
“선생님께선 그런 사상을 가졌으니까 대학에서두 실패를 보신 거예요.”
 
155
“대학에서 실패를 보구 그런 사상을 가졌다는 편이 진상에 가깝겠지요.”
 
156
“영국 문학을 하셨구 그런데 바로 그 정신의 고향인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영국이 지금 망하게 되었으니까 선생님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시죠.”
 
157
관형이는 담배를 껐다.
 
158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대학에서 실패한 건 되려 자유주의적이 못되기 때문이었구, 또 내 정신의 고향이 결코 영국인 것도 아닙니다. 우린 동양 사람이 아니예요. 대학에서 몇 년 배웠다구 그대루 영국 정신이 터득된다면 큰일이게요. 오히려 병집은 그 반대인 데 있습니다. 구라파 문화를 겉껍질루만 배운 데. 그럼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나저러나 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고 하면서도 여태 서루 통성두 없었군요. 저는 이관형이라고 부릅니다.”
 
159
그래서 무경이도 제 이름을 가르쳐주고 인사를 하였다. 그러고는 마주 보며 웃었다.
 
160
“그러면 내 정신의 비밀을 들어보십시오. ……아까 동양을 여행하는 외국 사람들이 우리 서양식 건축과 문명을 구경하고는 감탄은 샘스러 그저 누추한 모방품을 본 듯이 유쾌하지 못한 낯짝을 한다는 의미의 말씀을 드렸지요. 바로 그 서양식 건축 같은 가정이 우리 집이라구 해두 과언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는 서울서두 손꼽이에 들 수 있는 무역상입니다. 말하자면 브르주아올시다. 아버지의 세 자식은 모두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보시는 바 영문학을 하였고 내 누이 동생은 음악 학교를 나와고 내 끝 동생은 금년 봄에 삼고(三高) 독문과를 나옵니다. 모두 문화의 가장 찬연한 정수를 전공했습니다. 우리 가정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현란하고 난숙한 부르주아의 가정이올시다. 그런 의미에선 티피컬한 가정이라구 해두 과언은 아니겠습니다. 그런데…….”
 
161
그는 잠시 숨을 돌리듯 하며 말을 끊었으나 다소 침울한 빛이 눈가장에 떠올랐다.
 
162
“그런데 우리 조선이 근대를 받아들인 상태를 이것과 대조해보면 우리 집 가정의 타입이 더 뚜렷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개화가 있은 지 가령 70년이라고 합시다. 이때부터 구라파의 근대를 수입해왔다고 쳐도 실상은 구라파의 정신은 그때에 벌써 노쇠해서 위기를 부르짖고 있던 때입니다. 우리들은 새롭고 청신하다고 받아들여온 것이 본토에서는 이미 낡아서 자기네들의 정신에 의심을 품고 진보라는 개념 자체에 회의를 품어오던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의 고장의 노후하고 낡아빠진 문명과 문화를 새롭고 청신하게 맞아들인 것입니다. 구라파가 결단이 났다고 우리들이 눈을 부실 때엔 벌써 이미 시일이 늦었습니다. 받아들인 문명과 문화는 소화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벌써 구라파 정신은 갈 턱까지 가서 두 차례나 커다란 전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영국 문학을 하였으나 조곰씩 조곰씩 깊은 이해를 가져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나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그들의 답답한 정신 세계에 자꾸만 부딪치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란 그러한 아들을 가지고 있는 상인입니다. 무역상이라고 하니까 앞으로 자유주의 경제가 완전히 통제를 당하고 보면 당연히 결단이 나겠지요. 지금은 상업적 수단이 있어서 되려 시국을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들은 이층에서는 양식을 잡숫고 아래층에 와서는 깍두기를 집어 먹는 그런 사람들이요, 또 그 정도로 아주 될 대로 되어버려서 모두 권태와 피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노인네들 말대로 하면 우리 집도 장차 쇠운에 빠지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누이 동생은 음악이 전공이지만 그것에 몰두할 수 없은 지 오래고,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은 벌써 학문이나 학업에 권태를 느껴온 지 오랩니다. 내 매부는 비행가였었는데 이 용기 있고 참신한 청년은 얼마 전에 향토비행을 하다가 울산 부근에서 안개를 만나 불시 착륙하였으나 바위와 충돌해서 비행기와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163
“얼마 전에 신문에 났던?”
 
164
“네 아마 그것이겠지요. 그러한 가운데 나는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건 작년부터 약 1년 가까이 내 주위에는 참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 욱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가령 문란주 같은 여자가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약 1년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인데 처음부터 나는 이 여자를 데카당스의 상징처럼 느껴왔습니다. 그 사람이 들으면 노할는지 모르고 또 그 자신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도 모르나 나는 그를 볼 때마다 퇴폐적이고 불건강한 것의 대표자처럼 자꾸 느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자꾸 그를 피하고 물리쳐왔지요. 또 오늘 나를 찾아와서 소절수를 주고 간 양반, 이 분은 내 아저씨 뻘 되는 분인데 몸도 건장하고 정력도 좋고 돈도 먹을 만큼은 있고 한 청년 신삽니다. 그는 하나의 정복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복욕은 여자를 정복하는 데만 쓰였습니다. 그는 그 방면에 레코드 홀더가 된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 백인영이라는 은행가가 있었는데 이 양반은 잔 재주를 너무 부리다가 그것 때문에 은행에서 실패했습니다. 그의 첩은 바로 저 문란주의 지기지우입니다. ……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1년 동안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그렇던 내가 교내의 파벌과 학벌 다툼에 희생이 되어서 아주 실패를 보게끔 되었습니다. 요 얼마 전입니다. 나는 그 날 술에 취하였습니다. 술에서 깨어보니까 문란주네 이층에가 누웠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까 명치정에서 문란주가 오뎅 해서 한잔 먹고 나오는데 내가 비틀거리고 오더라나요. 나는 4,5일 동안 이층에 번듯이 누웠었습니다. 아주 기력이 없고 수족을 놀리기도 싫어진 겁니다. 무슨 정신에 집에는 여행 가노라는 엽서는 띄워놓았지요. 나는 집에 들어가기도 싫어졌습니다. 또 문란주 씨네 집에 그대로 묵고 있는 데도 싫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옮아온 것이 이 아파트올시다. 이사하자 막 늙은 영감과 또 최선생과 말다툼을 하였고…….”
 
165
“잘 알겠습니다.”
 
166
하고 무거운 머리를 들어 관형이에게 인사를 하듯 하고 무경이는 일어나서 다시 가스 불을 열어놓았다.
 
167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은 비위생적인 데도 철저히 빠져 있을 수 없는 사람인 모양입니다. 빵 가루가 되기보담 어느 흙 속에 묻혀 있기를 본능적으로 희망하는 인물인지도 모르지요. 그것이 더 비극이지만.”
 
168
물이 사르르 하고 더워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169
“실상은 저도 그것과는 다르지만 그 비슷한 정신적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170
남의 신변의 비밀을 듣고나니 어쩐지 제 비밀도 털어놓아야 할 것처럼 생각되어졌다.
 
171
그러나 이관형이는,
 
172
“그러시겠지요. 요즘 청년치고 그런 것 가지고 있지 않는 분이 쉬웁겠습니까.”
 
173
할 뿐 그 이상 이야기를 듣고 싶은 표정은 없었다. 무경이는 일어나서 홍차를 한 잔씩 더 만들었다. 차를 쭉 마시고는,
 
174
“이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공연히 방해 되셨지요?”
 
175
관형이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176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177
하고 인사하였을 때 방을 나가려는 사내는 작은 약병을 꺼내 잘랑잘랑 흔들면서,
 
178
“잠이 안 오면 이걸 먹고 잡니다.”
 
179
그러고는 시니컬하게 웃어 보였다. 이관형이를 보내고난 뒤 책을 펴놓았으나 물론 읽혀지진 않았다. 침대에 들어가 누워도 잠도 이내 오지 않았다.
 
 
180
늦게야 잠이 들었으나 아침은 또 이르게 눈이 뜨였다.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기가 싫다. 어젯밤에 들은 이관형이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인간의 역사란 보리와 같다고! 비밀을 털어놓고 샅샅이 들어보면 그러한 생각에 찬성을 하건 안 하건 이해는 가질 수가 있다. 오시형이도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한 정신 세계를 헤매고 있는 것일까. 이관형이보다 복잡하였지 단순할 것 같진 않아 보인다. 그럴수록 그를 만나고 싶다. 만나서 모든 것을 들어보고 싶다. 그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181
그러나 오시형이를 만나고 싶다는 그의 욕망은 곧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오시형이는 지금 무경이가 사는 이 서울에 올라와 있다고 한다.
 
182
아침도 먹기 전이었다. 어디서 전화가 왔다고 하여서 그는 전화통 있는데로 갔다. 오시형이를 보석시켜준 변호사한테서 온 것이었다. 오시형이가 공판에 올라왔을 텐데 어디서 유하는지 모르느냐는 전화내용이다. 무경이는 당황하였다. 차마 모른다고 말하기는 창피하였으나 역시 그렇게 대답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
 
183
오늘이 공판인데 좀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변호사는 전화를 끊는다. 오늘이 공판? 그러면서 어째서 오시형이는 나에게 그런 것조차도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서울에 올라왔으면서도 어째 여관도 알리지 않고 한 번 찾아도 오지 않는 것일까.
 
184
아침도 먹을 수 없었다. 사무실에는 잠시 나갔다가 머리가 아프다고 들어와버렸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공판정으로 찾아가볼 밖에 도리가 없었다. 시간이 퍽 지났을 것이지만 그는 이내 아파트를 나와서 재판소로 달려갔다. 정정(廷丁)에게 물어서 공판정에 들어가니까 재판은 퍽 진행이 되어 있었다. 방청객이 더러 있었으나 그런 것엔 눈이 가지도 않았다. 공범 여섯이 앉아 있는 앞에 머리를 청결하게 깎은 국민복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그것이 오시형이었다. 심리는 얼추 끝이 날 모양이었다.
 
185
“피고가 학문상으로 도달하였다는 새로운 관념에 대해서 간명히 대답해보라.”
 
186
재판장은 온후한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서류 위에 법복 입은 두 손을 올려놓고 그는 오시형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187
“구라파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역사란 마치 흐르는 물이나 혹은 계단이 진 사다리와 같은 물건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맨 앞에서 전진하고 있는 것은 구라파의 민족들이요, 그 중턱에서 구라파 민족들이 지나간 과정을 뒤쫓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시아의 모든 민족들이요, 맨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것은 미개인의 민족들이라는 사상이 그것입니다. 고대에서 중세로 근대로 현대로 한줄기의 물처럼 역사는 흐르고 있다 합니다. 그러니까 설령 그들이 가졌던 구라파 성신이 통일성을 잃고 붕괴하여도 새로운 현대의 세계사를 구상할 수 있고 또 구상하는 민족들은 자기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에 있어서의 말하자면 일원사관일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서 떠나서 우리의 손으로 다윈 사관의 세계사가 이루어지는 날 역사에 대한 이 같은 미망은 깨어지리라고 봅니다. 역사적 현실은 이러한 것을 눈앞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188
“그러면 피고의 그러한 생각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과 세계사적 동향은 어떻게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189
피고는 말을 끊고 숨을 돌릴 듯하고는 다시 이야기의 머리를 잠깐 돌려보듯 하였다.
 
190
“저의 사상적인 경로를 보면 딜타이의 인간주의에서 하이데거로 옮아갔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아데거가 일종의 인간의 검토로부터 히틀러리즘의 예찬에 이른 것은 퍽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철학이 놓여진 현재의 주위의 상황으로부터 새로운 문제를 집어올린다는 것은 최근의 우리 철학계의 하나의 동향이라고 봅니다. 와츠지 박사의 풍토사관적 관찰이나 다나베 박사의 저술이 역시 역시 국가, 민족, 국민의 문제를 토구하여 이에 많은 시사를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과거의 사상을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 건설에 의기를 느낀 것은 대충 이상과 같은 학문상 경로로써 이루어졌습니다.”
 
191
재판장은 만족한 미소를 입술에 띠었다. 무경이도 숨을 포 내쉬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피고석 뒤에 놓인 방청석으로부터 젊은 여자가 약간 허리를 드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이윽고 재판장은 오후에 심리를 계속하고 일단 휴식에 들어간다는 선언을 하였다. 젊은 여자는 완전히 일어섰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키가 날씬한 여자였다. 무경이는 가슴이 뚱하고 물러앉는 것을 느꼈다. 그 여자의 옆 자리엔 오시형이의 아버지, 그리고 또 그 옆자리엔 어떤 늙은 신사. 피고석으로부터 돌아온 오시형이는 긴장한 얼굴을 흐트려놓으며 그 여자가 서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무경이는 뒤숭숭해진 공판정의 소음에 앞서 복도로 나왔다. ‘그 여자이다! 도지사의 딸!’ ― 그리고 이것으로 모든 문제는 끝이 나는 것이 아닌가. 복도 가운데 서보았으나 몸을 유지할 수가 없어서 그는 무턱대고 걸어본다. 뜰로 나왔다. 날이 쨍쨍하다. 몹시 현기증이 난다.
 
192
어떻게 그래도 용하게 아파트는 찾아왔다. 문밖에서 지금 막 아파트를 나오는 문란주와 만났다. 그는 겨우 인사를 하였다.
 
193
“사무실에서 들으니까 몸이 편하지 않으시다더니…….”
 
194
하고 말하는 문란주의 얼굴도 핏기가 없어 보인다.
 
195
“네, 그래서 병원에 다녀옵니다.”
 
196
문란주는 잠깐 동안 가만히 서 있었으나,
 
197
“그럼 잘 조리하세요.”
 
198
하고 걸어 나갔다. 데카당스의 상징 같다고 하는 문란주와 그는 차라도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껴보았으나 그대로 제 방으로 올라왔다.
 
199
‘인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200
침대에 누우니까 처음으로 눈물이 나서 그는 실컷 울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서 노크 소리가 났다. 두들기는 품으로 보아 어젯밤에 찾아 왔던 이관형이의 것이 분명하다.
 
201
“네에.”
 
202
하고 대답해놓고는 낯을 고치고야 문을 열었다.
 
203
“어젯밤은 실례했습니다. 어데 편하지 않으시다고요.”
 
204
“아뇨 괜찮습니다.”
 
205
“글쎄 그러시면 다행이지만…….”
 
206
잠시 말을 끊었다가,
 
207
“지난 생활을 청산해보려고 어데 훨훨 여행이나 떠나보렵니다. 방은 그대루 두고 다녀와서 정리하기루 하겠어요. 우리 집엔 실상은 아저씨한테 돈 취해 갖고 지금 경주 방면에 여행하는 중이라고 알려두었는데 헛소리를 참말로 만들어볼까 합니다.”
 
208
“그럼 경주로 가십니까?”
 
209
“뭐 작정은 없습니다. 휘 한바퀴 돌아보면 마음이 좀 거뜬해질까 해서 보리 알을 또 한 번 땅 속에 묻어볼까 허구서.”
 
210
그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아까 다녀 나가던 문란주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으나,
 
211
“잘 생각하였습니다. 그럼 어저께 소절수를 마저 찾아드리지요.”
 
212
“죄송합니다.”
 
213
소절수를 찾으러 강영감을 은행으로 보내고 무경이는 사무실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다.
 
214
‘나두 어데 여행이나 갈까?’
 
215
‘아예 어머니 말마따나 동경으루 공부나 갈까?’
 
216
그런 것을 생각해보았으나 원기도 곧 솟아나지 않았다.
【원문】맥(麥) 3장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26
- 전체 순위 : 1815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233 위 / 88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1) 두포전
• (1) 광!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제목]
 
  김남천(金南天) [저자]
 
  1941년 [발표]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연작소설
【원문】경영(經營), 맥(麥)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목차 (총 : 3권)     이전 3권 ▶마지막 한글 
◈ 맥(麥)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5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