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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춘해의 《조선문단》도 춘해가 돈을 다 없앤 뒤로는 폐간하여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만한 부수가 나왔으면 수지는 맞을 성싶은데 술값이 너무 많이 나가서 폐간의 비운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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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단》 잡지가 없어지매 조선의 문단도 한때 침체였다. 잡지 《조선문단》에서 빛을 競艶(경염)하던 꽃이 다 한꺼번에 사라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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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땅이던 그렇겠지만, 우리 땅은 더우기 명료히 출판물과 문학과가 共生共死性(공생공사성)을 보인다. 출판계가 아직 왕성치 못한 탓이겠지만, 잡지가 몇 개 생기면 문단도 활기를 띠고 잡지가 몇 개 없어지면 문단도 침체하고, 잡지가 없어지면 문단도 동면기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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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춘해의 《조선문단》이 폐간되고 《개벽》이 적잖게 좌익화하자 몇몇 좌익계 열의 문사가 겨우 꺼져 가는 생명을 존속할 뿐, 신생 조선문단은 침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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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양서 천하만사를 잊고 낚시질로만 소일을 하다가 그도 부족하여 또 놀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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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단》과 《개벽》의 원고료로 비교적 곤궁치 않은 생활을 하던 재경 문사들은 《조선문단》 폐간되고 《개벽》이 좌익화하자 작가로서 밥줄이 끊겨져서, 혹은 재빨리 신문사에 취직하며 혹은 문학을 폐업하며 등, 신생 조선문단은 참담한 형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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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때에 巴人(파인) 金東煥(김동환)의 《三千里(삼천리)》 잡지가 조선문학의 명맥의 한 귀퉁이를 붙드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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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은 감개성 많은 시인이었다. 동시에 조선일보 기자였다. 들리는 바에 의하건대(사실 여부는 보증하지 않는다.) 파인은 조선일보 기자로 당년 개최 되었던 共進會(통진회) 끝난 뒤에 출입기자에게 준 수당금(진실로 약간한 금액이다)을 가지고 버리는 셈치고 《삼천리》를 창간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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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의 하숙집, 빈대투성이의 파인의 거실― 《삼천리》사 편집실 발행과 발송실, 영업실을 겸했고 파인이 사장 ․ 편집인 ․ 기자 ․ 하인을 겸한, 참으로 빈약한 출판이었다. 《조선문단》을 요람으로 출발한 파인이지만, 그 당시는 진실로 무명한 시인이었다. 저널리스트의 열력도 적고 문단적인 열력도 적고 한 사람이었지만, 그 재치있고 엇글수한 편집 기술에 일종 미혹성이 있어 《삼천리》는 시골 독자에게 환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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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는 파인이요, 따라서 원고료를 내놓지 못하는 형편이며 우의에 호소해서 얻어내는 원고와 파인 자신이 꾸민 폭로 기사, 에로 기사 등의 하잘 것 없는 내용의 《삼천리》였지만, 이 밑천 아니 먹힌 잡지사 시골 독자에 매력 있었던 모양으로 비교적 잘 팔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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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또한 《개벽》은 좌익화하고 그 위에 잡지 내용보다도 원고료 지불을 아낄 필요로 신진급도 못 되는 무명인의 글만을 취급하는 형편인데, 파인의 《삼천리》는 그 목차가 벌써 사람의 호기심을 자아낼 만하여 일테면 ‘삼천리식’이라는 한 타입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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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은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집어치우고 잡지에 전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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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잡지란 다 없어지고 오직 《개벽》과 《삼천리》(명색은 월간이지만 대개 서너 달 혹은 너덧 달에 한 호가 났다)뿐이라 작품 발표기관을 잃은 신시단은 극도로 침체하였다. 때때로 마음 속에 충일된 창작욕에 참지 못하여 써 낸 우수한 작품들이 저절로 《삼천리》에 모여 《삼천리》에는 간간 《삼천리》답지 않은 우수한 글이 발표되어 이 덕으로 《삼천리》의 인기는 더욱 높아 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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