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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소문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23권  24권  25권  26권  27권  28권  29권  30권  31권  32권  33권  34권  35권  36권  37권 38권  39권  40권  41권  42권  염상섭

1. 소문

1
"자네, 그 1000원은 헷생색만 내고 말 텐가?"
 
2
오라는 필순은 아니 오고 병화가 저녁때 들르더니, 불쑥 이런 수작을 꺼낸다.
 
3
"1000원 주지 않았나? 경찰서 조서에까지 적혔으면야 게서 더한 증거가 어디 있나?"
 
4
병화도 껄껄 웃으며,
 
5
"그러지 말고 오늘 이행해보게."
 
6
하고 덮어 놓고 조른다.
 
7
"그럴 의사 없는데."
 
8
"피스톨 구경을 해야 하겠나?"
 
9
"자네는 원체 조선 사람의 돈- 흰 돈은 쓰지 않기로 결심하지 않았나. 외국서 들어온 붉은 돈을 가지고 왜음식 장사나 하는 외국 무역상 아닌가? 허허허..."
 
10
"무어? 어째? 흰 돈이란 백통전이요, 붉은 돈이란 동전 말인가?"
 
11
하며 병화는 또 껄껄 웃었으나 덕기의 입에서 '외국서 들어온 붉은 돈'이란 말이 나오는 것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12
"왜? 겁이 나나?... 하여간 아직도 밑천이 달리지는 않을 것인데, 정말 1000원을 내놓으면 이번에는 감옥까지 가라는 말인가?"
 
13
"3년 징역을 한다면 1000일이 넘지 않는가? 하루 1원씩 쳐서 1000원이니 우수리는 할인하고 1000원만 내게."
 
14
"1000일 일수로 부어가면 어떻겠나?"
 
15
"자네는 언제부터 개업했나? 빚놀이두 유산 목록의 하나던가?"
 
16
병화는 실없이 웃으면서도 기위 덕기의 입에서 '붉은 돈'이란 말이 나왔으니 아주 자세한 사정을 말해버릴까 말까 속으로 망설이었다. 필시 필순에게 들었을 것이니, 도리어 자세한 사정을 말해두는 편이 나았을 것 같으나 여자란 입이 가벼워 못쓰겠다고 필순을 속으로 나무랐다.
 
17
병화의 생각으로서는 경찰에까지 말썽이 된 1000원이니 그것을 정말 내게 하여 상점을 확장하겠다는 것도 한 조건이지마는 또 한편으로는 후일 또 무슨 일이 있을 경우에 덕기가 내었다던 1000원의 실상은 그 소위 '붉은 돈'속에서 쓴 것이라는 것이 발각되는 날이면 덕기의 신상에도 좋지 않으리라고 하여 이래저래 끌어 내자는 것이다.
 
18
"자네, 수단 용한 줄은 알았지마는, 사람을 짓고생을 시키고 이렇게두 덤터기를 씌워 상관없겠나?"
 
19
병화를 얼마간 도와주려는 생각은 없지 않았지마는 1000원이나 내놓을 수는 없었다.
 
20
"사람두, 왜 이리 녹록한가? 그럼 1000일 일수 부음세."
 
21
결국 자기가 기동한 뒤에 정미소에 나가서 돌려 주마고 하였다.
 
22
"그런데 요새 이상한 소문이 들리니 웬일인가?"
 
23
병화는 제 볼일은 다 왔다는 듯이 총총히 일어서려다가 지나는 말처럼 꺼낸다.
 
24
"무어?"
 
25
"대단히 좋지 못한 소문인데, 자세 의사한테 돈 먹인 일 있나?"
 
26
"무어? 그거 무슨 소린가?" 덕기는 누웠다가 일어나 앉는다. "글세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약을 잘못 써서 노영감이 돌아가셨는데, 초상 뒤에 자네가 의사들에게 돈을 먹인 것을 보면 내용이 있는 일이라고들 한다네그려!"
 
27
"누가 그러던가?"
 
28
덕기는 눈이 휘둥그래진다.
 
29
"누구랄 건 없구..."
 
30
"들은 대로 말을 하게그려."
 
31
"어쨌든 약을 잘못 쓴 것은 사실인가? 의사들에게는 얼마를 주었나?"
 
32
"공연한 미친놈들이 그런 소리를 내놓으면 입을 틀어막느라고 돈푼 줄 줄 알고 그러는 거겠지만 대관절 누가 그러던가?"
 
33
"원삼이가 제 친구에게 들었다고 어제 저녁에 눈이 뚱그래 와서 그런데.:
 
34
"원삼이가?... 그래 원삼이는 뉘게 들었다던가?"
 
35
덕기는 출처가 의외의 방면인 데에 다소 놀라면서 원삼이 직접 자기에게는 어째 말이 없나 하는 생각도 하였으나, 그런 말이란 더구나 아랫사람으로는 맞대해 놓고 말하기가 어려워서 못한 것일 것이다.
 
36
"별일이야 있겠나마는 한 입 걸러 두 입 걸러 퍼져나가면 성이 가시지 않은가?"
 
37
"온 말 같지 않은! 어떤 놈들이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어쨌든 원삼이를 좀 보내주게."
 
38
"나 역시 여기에는 필시 무슨 조건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였기에 들어만 두라고 말한 걸세."
 
39
하고 병화가 일어서는 것을 또다시 붙들어 놓고,]
 
40
"여보게, 아주 잠깐 물어볼 말이 있네."
 
41
하고 말을 돌린다. "무어?" "자네 언제까지 장사를 한 텐가?"
 
42
"하는 대로 해보지. 한정이 있는 일인가. 또 설사 나는 손을 떼는 한이 있더라도 잘만 되면야 필순이네를 맡겨도 좋구."
 
43
"그야 그렇지! 그런데 재미를 보아가는 모양인가?"
 
44
한 밑천 대마는 말눈치 같아서 병화는 눈이 번해서 열심히 달려든다.
 
45
"어쨌든 잘되겠지. 아직 한 달도 채 못 되네마는 밑질 리야 없고 그런 대로 뜯어먹기는 하는 셈일세."
 
46
"자아, 그러니 말일세. 자네도 이제는 믿을 만한 사람을 얻어서 일가를 이루어야 하지 않겠다?"
 
47
병화에게는 좀 의외의 말이었다.
 
48
"그거 무슨 소린가? 모두 믿을 만한 사람만 모이지 않았나?"
 
49
"하기는 그렇지마는 이 사품에 아주 결혼을 하는 게 어떠냐는 말야?"
 
50
"온 당치 않은 소리! 내가 그걸 시작한 것이 나도 유자생녀하고 배 문질러 가며 거드럭거리고 살자고 하는 거면 모르겠네마는 저것은 장래에 내 사유물이 아니라 동지의 쌀자루 밥통으로 만들자는 것일세. 무슨 일을 허거나 먹기는 해야 하고 자금이 다소 있어야 하지 않나. 우선 필순이네 세 식구를 굶기지 않고, 나도 일시적 호신책으로 시작하였지마는 차차 커질수록 우리들의 공동 기관을 만들 작정이란 말일세. 누구다 들어와서 교대해가며 일을 할 수 있지마는 먹는 것 외에 이익을 배당하려든지 한푼이라도 축을 내서는 안 될 일- 나부터도 그 멤버의 한 사람일 따름일세."
 
51
"그거야 아무렇게 경영하든지간에 자네 개인 문제도 해결해야 할 거 아닌가?"
 
52
"내 개인 문제라니? 이댈 살아가면 그만 아닌가? 결혼을 해서 사지를 결박을 짓지 않아도 붙들어매지 못해서 애를 쓰는 동앗줄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필순이 어른을 보게. 누구나 결혼을 하면 그 모양으로 남 못할 노릇 시키고 폐인밖에 더 되겠나?"
 
53
병화는 흐흥! 하고 웃다가,
 
54
"알아 듣겠네. 필순이로 말하면 제가 결혼할 때까지 물질적으로는 내가 어디까지 보호해주지마는, 그 다음 일은 제 자유에 맡기고 제 부모가 알아 할 것이 아닌가. 내가 그 이상 간섭하면 당자에게 불행이니까. 그리고 홍경애 역시 다만 이대로 우정 관계를 계속할 뿐이지 더 다시 발전될 것도 아니요, 결코 오래 가리라고도 생각지는 않네."
 
55
하고 염담한 태도로 도리어 핀잔을 준다.
 
56
"어디 일이란 그렇게 자네 형편만 좋게 되란 법이 있나? 만일 거기서 소생이 있게 된다든지 하면 지금 생각같이 간단히 처치가 되나? 그러니까 오래 못 갈 바에야 아주 얼른 저이하고 결혼을 하라는 말이지."
 
57
"누구하고? 홍하구?"
 
58
"홍하고야 자네 형편에 되겠나? 주의 사상이라든지 생활 정도라든지, 또 우리들 체념을 보든지..."
 
59
"응, 알았네. 무엇보다도 자네 체면 보아서 홍을 단념하고 필순이에게 장가를 들라는 말인지 또 혹은, 이거 내가 너무 넘겨짚은 생각인지 모르지마는, 필순이에게 대한 자네 감정이나 유혹을 청산해버리고 단념을 해 버리기 위해서 그렇게 해달라는 말인지도 모르겠네마는, 나는 도무지 모를 말일세. 되어 가는 대로 할 수밖에 없고, 자네 알아 할 일은 잔가 알아 하게! 나 모르네."
 
60
병화의 태도가 의외로 강경하였다.
 
61
"무얼 나더러 알아 하란 말인가?"
 
62
"필순이 일 말일세! 그렇다고 자네더러 데려가라는 말은 결코 아닐세. 다만 내게 올 소질이 없는 사람이요, 또 내게 와서 평생을 고생시키기는 가여우니 어쩌나. 나로서는 불간섭일세. 그렇게 걱정 않아도 저 갈 데로 가게 되겠지. 그리고 홍으로 말하더라도 설사 나와 산다기로 자네가 창피하다거나 성이 가실 일이 무언가? 어쨌든 지금 나는 그런 것으로 머리를 썩일 여유가 없네! 그까짓 일이야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라면 그만 아닌가."
 
63
병화는 벌떡 일어서 버린다.
 
64
"그러나 현편에서 요구를 하면 어쩔 텐가?"
 
65
덕기는 마지막 또 다진다.
 
66
"누가? 필순이가?... 그럴 리도 없지마는,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단연 거절일세. 필순이는 내 동지 될 위인도 아니요, 자네 말과 같이 그의 행복을 위하여서도 안 되고, 또 누구나 부모까지 맡을 만한 여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되네!"
 
67
병화의 말도 그럴듯하고 필순을 그 축에 맡겨두거나 병화와 평생을 고생하게 하기가 가엾기는 하나 또 그밖에 별로 해결할 도리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68
-부질없는 간섭일지도 모르긴 하지마는...
 
69
덕기는 이런 생각도 없지 않으나 하여간 필순의 의향도 물어보고 나서 또다시 권해 보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70
보내 달라고 부탁한 원삼은 날이 저물도록 아니 왔다. 기다리다 못하여 덕기가 몸소 사랑으로 나가서 전화를 걸었다. 날 고비에 외기를 쐰다고, 모친이 성화같이 나무랐으나 기동은 할 만하고 그 길에 필순도 불러보고 싶던 것이다.
 
71
필순은 불러달랄 것도 없이 전화통에 나왔다. 역시 그 목소리가 반가웠다. 저 편에서도 반기는 말소리가 그전같이 웃는 목소리는 아니다. 덕기 자신의 감정이 그래서 그런지 필순은 자기의 감정을 자제하려는 눈치가 전화로 듣는 말소리에도 역력하다.
 
72
그 동안 바빠서 못 가서 죄송하다면서 내일 오겠느냐니까 마지못해 그러마고 대답을 하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 덕기는 멀거니 한참 섰었다. 전화로 목소리만 듣고도 그처럼 반가워하는 어리석고 주책없는 자기 마음을 덕기는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73
자기의 이때까지의 노력이나 생각이 조금도 자기 마음에 부끄러울 것 없는 정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조금치도 허위가 없었던가? 진심으로 그 두 사람의 행복을 똑같이 축복하는 것이었던가? 필순의 장래를 염려하듯 병화의 행복도 조금도 못지 않게 염려를 하여줄 성의가 있는가? 만일 그 두 사람이 기뻐서 약혼을 하였다면 자기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일생의 처음이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마음의 상처를 고이 덮어서 가슴속에 넣어두고 평생을 살아갈 용기가 있을까?...
 
74
-나도 남 모를 위선자다...
 
75
그러나 이것만은 사실이다- 어서 필순이 남의 사람이 되어서 가 주었으면 자기는 더 깊어지기 전에 멀리 떨어져버리겠다고 생각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걸 생각하면 아까 병화가 남의 마음을 꼭 집어내서 '감정을 청산하고 유혹에서 벗어나려는 수단'이라고 하던 말이 남의 폐부를 찌르는 듯이 아프고도 시원하다. 그러나 유혹에서 벗어나려는 그 노력도, 그 사람을 위한다는 것보다도 자기를 위한 일이 아닌가? 이기적이다. 역시 위선자다...
 
76
덕기도 자기 비판, 자기 반성에 날카로운 인텔리다. 자기 비판이 냉철할수록 자기 속에서 사는 필순의 그림자가 너무나 또렷이 나타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순이다. 괴로웠다. 마음이 아팠다.
 
77
원삼이 30분도 못 되어 자건거로 뛰어왔다. 원삼도 요새 '바같애' 티가 없어져가고 외투에 방한모를 눌러쓰고 자전거로만 뛰어다니게 되었다.
 
78
원삼은 그 소문을 화개동 병문에서 노는 제 동무에게 들은 것인데, 또 그 동무는 그 동네 술집에서 옆사람들이 술을 먹어가며 수군거리는 것을 듣고, 어렴풋이 짐작한 것을 원삼에게 물어보았던 것이라 한다. 그러나 술 먹으며 이야기 삼아 하던 그 사람들이 누구던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양복 입은 젊은 사람이라는 것밖에는 종을 잡을 수가 없다 한다.
 
79
덕기는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야 이 집이나 화개동에 드나드는 사람 중에 양복을 입은 젊은 애가 누굴지 짐작을 안 간다. 친구들도 없지 않으나, 근자에 친한 사람들은 '경도'에 있는 유학생들이요 서울에 있는 사람은 중학교 동창생으로 모두 전문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교회 방면 사람들이니, 선술집 같은 데 들어설 사람은 없다. 그 외에 노상 안면쯤 있는 사람으로서야 의사에게 돈을 먹였으니 하는 남의 집 내막까지 참견할 사람은 못 된다.
 
80
하여간 원삼더러 제 동무라는 자를 불러가지고 오라 하였다. 원삼은 자전거를 타고 화개동을 다녀오더니 그자가 없어서 일러놓고 왔으니까, 내일 아침에는 어떡하든지 붙들어 가지고 오게 되리라 하고 가버렸다.
 
81
"그거 큰일났네. 암만해두 또 어떤 놈들이 흑책질일세그려."
 
82
지 주사는 옆에서 듣고만 있다가 입맛을 다신다.
 
83
"글쎄 말입니다. 누구든지 이 집안 내정을 빤히 아는 놈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도둑이 제 발이 저려서 그러는지요. 만일 그런 게 확적하면야 이번에는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걸요."
 
84
덕기는 이를 악무는 소리를 한다.
 
85
"도둑이 도둑야아 소리만 질렀으면 좋으련마는, 그래 놓고 뒤로 돌아가서 또 도둑질을 하려니까 걱정이지."
 
86
"물론 그러자고 하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87
"그래 의사들에게 무얼 좀 주었나?" "선사를 하였지요. 으레 할 것이 아닙니까. 다른 자들이야 집의 단골이니까 약간 손수세만 하고, 병원의 일본 의사는 애도 썼고, 박사란 체면도 보아서 좀 넉넉히 보냈지요."
 
88
"얼마나?"
 
89
"그것도 물건으로 하려다가 조수 말이 현금이라도 상관없다고 하며 도리어 현금이 좋을 것같이 말을 하는데 1,200은 좀 적은 것 같기에 300원을 보냈지요."
 
90
"300원 템이!"
 
91
하고 지 주사는 놀란다.
 
92
"그래야 우리 안목으로는 많은 돈 같지마는 저 사람들이야 그까짓 것 한 달 월급도 못 되지 않습니까?"
 
93
덕기는 남이 많다고 하면 아무쪼록 변명을 하였다. 다른 의사들에게는 2, 30원짜리 상품권을 보냈는데, 병원 의사에게만 조선 사람 조수에게 현금 100원과 과장에게 300원은 많은 것이었다.
 
94
지 주사부터라도 그것이 의문이었다. 그 300원이라는 것이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것을 덮어 두어 달라고 입수세로 준 것인지? 내심으로는 분하면서도 가문이라든지 세상 체면을 보느라고 울며 겨자 먹기로 눈감아버리고 못된 놈들을 도리어 덮어 주어 버렸는지? 또 혹은 장본인이 상훈이기 때문에 덕기로는 어쩌는 수 없이 몰려 지내는 것이나 아닐지?...
 
95
빤히 보고 지낸 지 주사부터라도 이런 의심을 먹는 것이었지마는 원삼의 친구란 자를 불러다 보았어야 요령부득이요, 소문의 출처를 붙드는 수가 없었다.
 
96
이튿날이다. 11시나 되었을 터인데 덕기 집에는 이제야 아침이 한창이다. 필순은 가뜩이나 쭈뼛거리는 마음을 참으며 마루 앞으로 들어서려니까, 부엌에서 어멈이 중얼거린다.
 
97
-이렇게 일찍 아침을 얻어먹으러 오나...
 
98
중간 말은 안 들리나 분명히 이런 소리가 들릴 때, 필순은 모닥불을 얼굴에 끼얹는 듯하였다. 원삼의 처는 눈에 안 뜨인다. 이 어멈이란 수원집이 끌어들인 것이지마는 필순은 어쨌기에 저번부터 못 먹어하든지 그것도 배냇병인가 보다.
 
99
건넌방에서도 인기척은 알았을 터인데 한참 만에야 주인 아씨가 내다보며 알은 체를 하나, 덜 좋은 기색 같다. 마루로 올라서 안방문 앞으로 가려니까 건넌방에서,
 
100
-어째 또 왔누? 계집애년이 저무두룩...
 
101
어쩌고 하는 소리는 모친의 목소리인 모양이다. 필순은 방문을 곱게 열고 뒤에서 등덜미를 탁 쳐서 들이미는 듯이 뛰어들어오다시피 하였다. 얼굴이 확 취하기도 하나, 반발적으로, 그래도 자기네 체면을 생각하기로 그럴 수가 있나! 하는 분심도 났다.
 
102
덕기는 잠이 어리어리하였던지 눈을 반짝 뜨며 웃음을 웃는다. 그러나 필순은 그것이 반갑다기보다도 여러 사람의 눈에 안 뜨이는 방안으로 숨게 된 것만 다행하였다. "좀 어떠세요?"
 
103
필순은 무안쩍은 생각에 할 수 없이 길체로 앉았다.
 
104
"예, 이젠 훨씬... 헌데 아버니께서야말루 저렇게 오래가셔서 걱정이군요."
 
105
이 처녀가 자기 집에 들어와서 무슨 욕을 보았는지 알 길이 없는 덕기는 몽총하니 좋지 않은 기색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106
"별루 더하실 것두 없습니다마는, 일전에는 너무 미안스럽습니다구 어머니께서 문안 여쭈라세요."
 
107
제 혼자의 전갈이다.
 
108
"온 천만에!"
 
109
덕기도 이 모처럼 청자 청자 하여 데려온 '귀객'의 신기가 몹시 좁지 않은 것을 보니, 기가 질려서 벙벙히 앉았다.
 
110
-왜 그럴꾸? 김군이 섣부른 소리를 해서 오해를 한 거나 아닐까? 어제 병화와 수작한 것을 벌써 들려주어서 노한 것만 같다. 그러나 병화가 아무리 숫기 좋고 말을 텅텅하는 사람이기로 당자를 맞대해 놓고 당신과 결혼하랍디다, 하고 직통 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그렇기로 노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만일 그래서 노하였다면, 덕기 자신에 대한 남다른 호의를 못 알아주고 가당치도 않게 친구와의 결혼을 권하였다 하여 야속하다는 것일지도 모르나 그것은 지나친 지레 짐작일 것이다.
 
111
"지금 병원에 가시는 길인가요?"
 
112
선뜻 나오는 말이 없어서 꺼낸 것이라서, 필순은 이것을 언턱거리로,
 
113
"예, 곧 가봐야 하겠에요."
 
114
하고 부리나케 일어선다.
 
115
"오시자 마자 왜 그러슈? 왜 내가 뭐 잘못한 게 있건 용서하시죠."
 
116
약간 실없는 어조로 농쳐 버리려니까 그제야 생긋해 보이며,
 
117
"천만에요!"
 
118
하였으나, 안 올 데를 온 자기의 어림없는 생각을 또 한 번 뉘우쳤다. 분하던 것이 이제는 후회와 절망으로 변하였다. 이 남자와 이 이상 교제를 계속하였다가는 무슨 욕을 볼지 무섭기도 하거니와 아무래도 자기 분수에는 어울리지 않은 것을 절실히 깨달은 것 같다.
 
119
"한 10분만 하면 이야기가 끝날 거니, 잠깐만 앉으셔... 그래, 상점 일이 잘 되어 간다지요?"
 
120
덕기는 더 옥신각신할 것 없이 다짜고짜 말을 붙였다.
 
121
"예, 잘 팔라는 셈예요."
 
122
필순은 엉거주춤하고 다시 앉는다.
 
123
"장사에 재미가 나요? 아주 장사꾼으루 나서시구 싶지는 않아요?"
 
124
필순이 대답하기가 거북한 듯이 남자를 바라보다가 인사성으로 방긋해 보일 뿐이다. 이 남자가 하고 싶다고 벼르던 이야기란 것이 이것인가 생각하니 실망도 된다. 일본에를 같이 가자지나 않을까 하던 꿈이 어이없이 스러진 것도 도리어 코웃음이 날 지경이다.
 
125
"그야 어렵겠죠. 장사가 뼈에 밴 것도 아니겠고... 하지만 내가 말씀하자는 것은 여자란- 하필 여자뿐이겠나요마는 더욱이 여자란 혼자 살기는 어려우니까, 또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니까..."
 
126
필순은 눈이 똥그래지며 긴장하였다.
 
127
"...쉽게 말하면 얼른 의탁할 사람을 택하시는 것이 좋겠단 말씀요, 어차피 할 결혼이면야 아주 속히 귀정을 내고 심신을 꽉 한 고장에 담는 것이 제일 좋을 듯싶은데..."
 
128
필순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적지않이 놀랐다. 이 남자의 입에서 결혼 문제가 나올 줄은 의외이었다. 결혼을 하라면 누구하고 하라는 말인가? 좋은 신랑감이 있으면 보지도 못하였으나 누이가 있다니 자기 매부부터 삼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무심코 떠오른다.
 
129
더구나 덕기의 입에서 병화의 말이 나올 제 필순은 눈이 회동그라지며 머리를 무엇으로 얻어맞은 듯이 뻑적지근하였다. 덕기는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잔소리를 한참 늘어논 뒤에 이렇게 말을 맺었다.
 
130
"...어쨌든 그렇게 되면 김군도 만족할 것이요, 필순양도 불만은 없겠지요?"
 
131
이 사람이 속을 떠보느라고 객담으로 이러는 것인가? 약간 분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건 안 될 말씀이에요. 홍경애가 있지 않습니까?... 하고 우선 속 답답한 소리를 딱 잘라버리고 싶었으나 홍경애 문제는 고사하고 필순 자신이 이 때까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일도 없거니와 더구나 병화에게 그런 감정이라곤 가져본 일이 없으니 애초에 이러고저러고가 없는 일이다. 병화와 친하기로 말하면 덕기보다 못할지 모르나 결국에 친구일 따름이다. 어떻게 말하면 오라비나 삼촌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필순도 그렇게 생각하여 왔거니와 병화도 그밖에 더 생각하지는 않고 있을 것이다.
 
132
"홍경애를 혹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마는, 그거야 같이 장사를 하노라니까 친해졌을 뿐이지 별일 있나요. 원체 홍씨란 사람이 살림이나 장사나 얌전히 들어앉아 할 위인도 아니지마는 필순씨가 김군의 장래를 생각하여 주고 지금 같은 그런 거친 생활에서 구해주실 성의가 있다면, 그밖에 도리가 없을까 해서 말씀인데..."
 
133
필순은 여전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았다.
 
134
"물론 아버님, 어머님 의사에도 있는 것이요, 내가 중뿔나게 나설 일이 아닌지도 모르지마는 피차에 이만 통사정은 할 수 있는 처지요, 우선은 필순씨의 의사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서 하는 말씀인데...?"
 
135
"전 모르겠에요..."
 
136
필순은 간신히 한마디 대꾸를 하였다.
 
137
"그럼 부모님께 내가 여쭈어볼까요?"
 
138
거기 가서도 대답이 없다. 대답이 없다고 반드시 반대의 뜻은 아니려니 싶어서,
 
139
"김군편만을 생각해서 헌 말씀은 아닙니다. 상점이 그만큼 되 어가는 것을 보니, 두 분- 두 분만 아니라 댁 전체가 합심해서 노력하시면 생활 근거도 잡히시리라는 점도 생각해본 것이에요."
 
140
하고 또 다른 각도로 권해보았다. 그러나 필순은 검다 쓰다 말이 없다. 덕기의 친구를 위하고 자기 집의 생도를 염려해주는 그 호의는 잘 안다. 그러나 병화를 자기의 결혼 상대자로는 다시 생각해 볼 여지도 없는 일이요, 홍경애의 존재를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일이다.
 
141
잠깐 피차에 말이 막히자 그 틈을 타서 필순은 일어섰다.
 
142
"가 봐야 하겠습니다."
 
143
조용히 사뿟 인사를 하며,
 
144
"다시는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145
하다가 말이 콱 막혀버렸다. 하마터면 눈물까지 핑 돌 뻔하였다.
 
146
저는 저대로 살겠다든지 무어라고 그런 뜻을 표시하려는 것인데, 어쩐지 별안간에 눈물이 솟아나려는 것을 참은 것이었다. 필순은 이때까지 남자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던지 다 잊어버리고, 다만 한 가지 이 남자가 자기를 아무렇게도 생각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안 듯싶다. 동시에 무엇엔지 속았다는 분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남자가 자기를 속인 것은 결코 아닌데 자기는 제풀에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나마 뉘게 하소연할 데조차 없고 이 남자 자신도 모르고 말아버릴 일이다. 그것이 더 분하여 울고 싶은지 모른다.
 
147
덕기는 필순의 노기를 품은 듯한 언성과 글썽해지는 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맘때 처녀의 심리를 잘 알 수 없는 덕기는 무슨 말이 이 여자의 귀를 거슬렸는가 애가 쓰였다.
 
148
"혹 내가 잘못한 말씀이 있더라두 오해는 마시구 찬찬히 잘 생각해 봐 두서요."
 
149
덕기는 따라 일어서며 이렇게 달랬다. 필순은 가슴이 더 답답하였다. 남의 속을 이렇게 몰라줄까 싶어 원망스럽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번연히 잘 알면서도 자기를 단념하라고 모르는 체하고 일부러 시치미를 떼는 것 같기도 하다.
 
150
필순은 하마터면 잊어버리고 나설 뻔한 목도리를 다시 돌쳐서 집어들고 나오려니까 방문이 밖에서 열린다. 어느 틈에 나왔는지 건넌방 마님이 문을 가로막고 선다. 딱 마주친 필순은 이 마님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가슴이 서늘해지며 주춤 남자의 옆으로 비켜섰다.
 
151
"약을 먹었으면 쓰고 눠서 조리를 해야지."
 
152
하고 들어보라는 듯이 필순을 무안스럽게 위아래로 훑어본다. 그렇지 않아도 대청으로 뜰로 빠져나가기가 큰 걱정인 필순은 쥐구멍을 찾을 지경이다.
 
153
"왜 이러세요? 어서 들어가 계셔요."
 
154
덕기는 하도 망단해서 한 걸음 물러선 여자를 몸으로 가려주듯이 막아서며 모친을 밀고 나가려는 기세를 보인다.
 
155
"밖이 어떻게 춥기에, 왜 나오려는 거야? 손님 배웅은 내 할게 누웠거라."
 
156
그 장한 손님 배웅에 앓는 귀한 아들이 찬바람을 쏘일까보아 애를 쓰는 것은 그럴 일이로되, 가려고 나선 필순을 보고,
 
157
"그럼 미안하지마는 오늘은 가주우. 몸이나 성해지거든 또 놀러 오든지."
 
158
하고 몸을 비켜 길을 터 준다.
 
159
필순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이만큼 나와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나올 제 덕기가 뭐라고 하던지, 누구들이 있었는지 하나도 생각은 아니 나나 마루 끝까지 나왔던 것과 건넌방 문이 방긋이 열리고 곱다한 여학생이 내다보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아마 늘 말하던 누이인 모양이나, 그 계집애 눈에, 미친 불량 소녀같이 보였을 것도 부끄럽다.
 
160
필순이 나온 뒤에 집은 잠깐 발끈 뒤집혔었다.
 
161
"그건 시집간 년이냐? 아무리 반찬 가게 년이기루 여기를 무엇하자구 제 집 드나들 듯 하루가 멀다구 오는 거냐?"
 
162
마님은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마루에 서서 안방에 대고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 가뜩이나 화가 나는 것을 참으며 수염도 없는 턱을 쓱쓱 문지르고 앉았던 덕기는,
 
163
"추운데 어서 들어가세요."
 
164
하고 한마디 대꾸를 하였다.
 
165
"너도 체통이 있어야지. 아무리 너 아버지 내력이기루 세상에 계집이 없어서 그따위 가게쟁이 딸년을 안방 구석으로 끌어들여서 씩둑깩둑하구 들어엎댔단 말이냐? 너두 이젠 집안 어른 된 체통이 있어야지!"
 
166
덕기는 모친의 히스테리가 또 동했구나 하며 잠자코 듣고만 있으나, '너 아버지 내력'이란 말에 가슴이 툭 찔리며 불현듯이 반감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의 자식이지마는, 아버지 같다는 것은 듣기 싫었다. 덕기는 자기가 부친같이 계집에 눈이 벌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67
"홍경애가 우리집에 드나들게 된 시초가 무언 줄 아니? 저 아버지가 애국지사루 옥중에서 중병에 걸려가지고 나와서 약 한 첩 못 쓰는 정상을 동정하고, 또 저희는 먹을 콩이나 난 듯이 덤벼든 거 아니던?...
 
168
덕기는 이 말에 또 한 번 가슴이 선뜻하는 것을 깨달았다.
 
169
"지금 그 계집애 어른두 징역살이로 늙었더라마는 얻어맞구 입원해 있다는구나? 언제 안 사람이라구 웬놈의 정성이 뻗쳐서 의사를 지시해준다, 담요를 갖다준다 하더니 그 딸년을 끌어들이는 꼴이, 약값, 입원료도 좋이 물잇구럭을 해줄 거라! 제2 홍경애 아니구 뭐냐? 수원집, 경애, 의경이, 그리고 3대째는 뭐라는 년이냐? 무슨 산소 탓인지 어쩌면 너 아버지 걸어온 길을 고대로 걸어가려는 거냐?"
 
170
모친의 입심이 어쩌면 이렇게 좋아졌나 놀랐다. 덕기는 귀를 막고 싶었다.
 
171
"너두 누구 못할 노릇을 하고, 밥을 굶기려고 지금부터 그런 데 눈을 뜨는 건지는 모르겠다마는..."
 
172
하고 며느리 역성을 드는 듯하더니,
 
173
"그만 해 두시고 어서 들어가세요. 감기 드십니다."
 
174
하며 부축을 하려는 며느리를 뿌리치고 이번에는 며느리를 들컹거린다.
 
175
"너부터 틀렸지! 너는 그 꼴을 보구두 왜 가만 있니? 네 오장은 어떻게 됐기에, 저번도 고년을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다 바치구 시중을 들구 대객을 하구... 비위두 좋다!"
 
176
"그럼 어쩝니까. 첩을 얻건 어쩌건 맘대로 하라죠. 제가 압니까."
 
177
하고 며느리는 웃는다.
 
178
"주책없는 소리 그만 두구, 어소 모시구 방으로 들어가! 누가 첩 얻는대?"
 
179
안방에서 소리를 꽥 지른다.
 
180
"너는 아직 어리니까 그런 유한 소리두 한다마는, 너 하나 문제가 아니야, 네나 내나 조씨 문중에 들어앉으면 조씨집이 늘어가고 창성하여가게 할 책임이 있지 않느냐. 나는 팔자가 사나워서 이 지경 됐다마는 너두 내 대를 물려서야 네 신세는 고사하구 조씨집이 무에 되겠나 생각을 해 보렴!"
 
181
시어머니는 일전에 필순이 다녀간 뒤부터 시앗 보지 말라고 추겨대는 것이다. 말이야 옳지마는 며느리를 아끼고 조씨집 가문이 기울어질까 보아서보다도 왜 그런지 며느리가 유산태평인 것이 밉살맞아 보여서 들쑤셔대고 싶은 것이다. 물론 아들 내외의 의가 좋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며느리를 꼬드겨서 자식 내외를 쌈이라도 붙이려는 것 같다. 하여간 이 사람 저 사람 닥치는 대로 들컹대고 큰 소리를 내는 버릇이 요새로 부쩍 늘었다. 의식 걱정 없고 몸은 한가로우니 그렇지 않아도 꾀까다로워질 텐데 히스테리가 점점 도져 가는 터이다. 100년 넘어를 두고 영감과 말다툼으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얻은 병인데, 경애 사단이 있은 뒤로는 생과부로 살아왔으니 그도 그럴 것이다.
 
182
"세상이 첩 얻는 남자가 하나 둘이겠습니까마는, 첩을 두기루 제 죄 될 거야 무어 있습니까? 얻으면 얻나보다 하죠."
 
183
하고 덕기 처는 씽긋 웃어버린다. 원체 제 성격이 유해서도 그렇겠지마는,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너무 심한 데에 역심이 나는지 한층 더 뛰는 소리를 한다.
 
184
"무어 어째? 넌 첩을 얻으라고 축수를 하니? 그거 알 수 없다! 넌 무는 성미냐?..."
 
185
하며 시어머니는 눈이 커대진다.
 
186
"...그거 알 수 없구나? 무슨 딴 배짱이 있기에 그렇지?"
 
187
며느리는 어이가 없어 잠자코 있으려니까, 건넌방에서 시뉘가 나오며,
 
188
"어머니, 어서 들어가세요. 이거 무슨 병환이신지, 가만히 있는 형까지 들쑤셔 가지구 왜 이러세요?"
 
189
하고 끄나, 모친은 꼼짝도 안 한다.
 
190
"그래 저두 뻔히 보다시피 대대로 첩년들 때문에 이 지경인데!"
 
191
"무에 이 지경이란 말씀예요? 누가 지금 첩을 얻느대니 걱정이십니까? 얻었으니 걱정이십니까? 오빠는 그렇지 않아요!"
 
192
덕희는 올케 역성 들랴, 오라비 역성 들랴 부산하다.
 
193
"안 그런 줄 위 아니! 그러니까 못하게 하자는 거지."
 
194
"글세, 어머니께선 어머니 걱정이나 하십쇼그려. 며느리가 시앗 볼까 봐서 얻지도 않은 첩 걱정까지 하실 게 뭐예요?"
 
195
"요년 말버릇 봐!"
 
196
마님이 딸에게까지 덤벼드는 것을 보구, 오라범댁은 덕희를 말려서 들여보내려 한다.
 
197
"내가 샘을 내구 투기를 해서 그런 줄 아니 ? 고년 홍경애 후림새에 빗나기를 시작하더니 이제는 계집 자식 다 내몰구 둘째년을 끌어들여 흥청망청 지랄들이구, 허구한 날 난장판인지 노름판인지 벌이구 앉었다니, 그 300석이 며칠 갈 듯싶으냐? 그나 그뿐이라면? 요새는 약주두 그리 잡숫지 않구 또 딴 구실이 생겼다더라!"
 
198
"별소리를 다 하시는구먼!"
 
199
딸이 질색을 하니까,
 
200
"별소리가 다 뭐냐. 이제 거적때기를 쓰구 내 눈앞에 기어들 날이 있으리라!"
 
201
하고 모진 소리를 한다.
 
202
모친이 무슨 잔소리를 하든지 안 들으리라 하고 신문만 골똘히 들여다보고 앉았던 덕기는 귀가 번쩍 뜨이며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203
"이제는 그만하시고 들어가세요. 아무러기루 저희들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204
덕기는 참다 못하여 한 마디 하였다.
 
205
"그래두 자식은 아비 딸는 것이라 듣기 싫은가보다마는 두구 봐라. 내 말이 하나나 틀린가. 종로바닥으로 거적을 들쓰고 침을 질질 흘리구 꾸벅꾸벅 졸며 걷는 것들은 처자식이 없고 천량이 없고 배운 것이 없어 그렇게 되었던?"
 
206
덕기는 선뜻한 마음이 들었다. 저번에 경도에서 받아본 병화의 편지에 자네 어르신네는 정말 아편이나 자시지 말게 하라는 실없는 말이 씌었던 것을 무심코 모았더니, 모르는 사람은 자기 뿐이요, 그것이 정말인가 하여 겁이 더럭 난다. 어쩐 내용인가 물어보고 싶은 것을 참고 일어나서 방문을 열고,
 
207
"어서 그만 들어가십시쇼. 감기 드십니다."
 
208
하며 마루로 나가려니까, 아들이 찬바람 쐬는 것은 무서워서,
 
209
"아니다, 나오지 마라. 나 들어간다."
 
210
하고 그제야 모친은 그래도 미진한 듯이 돌쳐서 딸, 며느리를 데리고 건넌방으로 들어간다.
 
211
"오빠가 진작 마루로 나오시질 않구!"
 
212
하고 덕희는 쌕쌕 웃으며 모친을 따라 들어갔다.
 
213
덕기는 자리에 드러누우며 세상이 신산하다고 생각하였다. 나이 스물 셋이 되도록 인생 고초라고는 감기나 앓아보았을까 그 외에는 소설책이나 병화의 생활을 통하여밖에는 모르고 자란 이 청년은 사생활이나 가정 일로 세상이 귀찮다거나 신산하다는 생각이 들어보기는 아마 오늘이 처음일 것이다. 모친의 퍼붓는 듯한 푸념에 귀가 징하고 머리가 아파서 신산한 생각이 든 것인지도 모르겠지마는, 지금까지 살림살이라는 것, 식구들의 불평이라는 것을 책임없는 처지에서 원광으로 바라만 보던 것이 별안간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에게 책임을 지우려 들고 자기도 그 속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니까 신산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책임은 걸머졌어도 자기 힘으로는 하나도 해결할 수 없는 데에 기운이 더 찌부러들고 신산한 생각만 들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214
생각하면 모친도 가엾다. 그 푸념이 병적이면 병적일수록 더 가엾다. 아내는 첩이라는 것에 무관심하고, 시어머니의 시앗 걱정을 도리어 우습게 여기는 말눈치지마는,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나 그 사람의 경험이나 그 사람의 처지로 그러한 것이지 모친의 성격, 모친의 경험, 모친의 처지로는 병이 되다시피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모친이 필순을 그렇게 멸시하고 윽박질러 보낸 것이 몹시 불쾌하고, 그야말로 점잖은 집 실내마님의 체통에 그러실 법은 있나 하는 불평이 없지 않지마는, 하도 몹시 데이면 회도 부쳐 먹는다지 않는가 하고 돌려 생각이 든다. 그러나 모친을 동할 뿐이지 모친의 성격이나 처지를 자기의 힘으로 고치는 도리가 없다. 해결할 도리가 없다.
 
215
부친- 부친도 가엾다. 때를 못 만났고, 그런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의 성격 때문이다. 조부의 성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같은 시대, 같은 환경, 같은 조건 밑에 있으면서도 부친의 걸어온 길과, 병화의 부친이 걷는 길과, 필순의 부친의 길이 소양지판으로 다른 것은 결국에 성격 나름이다. 돈 있는 집의 아들이라고 모두 부친 같은 생활을 할까! 그것을 생각하면 사람의 운명이니 숙명이니 팔자니 하는 것은 결국 성격에서 우러나오는 것, 성격 그것을 말하는 것 같다.
 
216
덕기는 어느덧 자기가 숙명론자가 되었나? 하고 혼자 코웃음을 치다가, 만일 병화가 이런 살림을 맡았던들 어땠을꾸? 하는 생각을 하여보았다. 피혁을 만나고 반찬 가게를 벌이고 하지는 않았지마는, 필순의 집을 먹여 살리고 장훈의 주머니 밑천은 떨어지지 않게 하였을 것이요, 역시 경애를 바커스의 마담으로쯤은 들여앉혀주었을 것 같다. 자기같이 이 구살머리적은 살림을 맡아가지고 애를 쓰거나 그야말로 금고지기로 붙들려 들어앉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병화가 부럽다. 병화는커녕 부친이 부럽다. 부친의 그런 생활이 부러운 것은 아니나, 부친의 그 300석을 자기가 가지고 자기의 2000석을 부친에게 바칠 수 있은 처지라면 얼마나 시원하고 자유롭게 훨훨 뛰어다니며 생활을 향락할 수 있을까 싶다. 원체 책상물림으로 나이도 차기 전에 이런 크낙한 살림을 맡게 된 것이 짐에 겨운 일이지마는 돈에 인색치 않은 성격인 덕기로 생각하면 열쇠 꾸러미를 놓칠세라 2000석의 한 섬이라도 축이 날세라고 애를 쓰며 이 뒤숭숭한 집안의 주인인지 '어른'인지가 되기보다는, 반찬 가게의 뒷방에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민 병화나 300석을 팔아 가며라도 첩치가를 하고 마음 편히 들어앉았는 부친의 상팔자로 보이는 것이다.
 
217
-할아버니께서 좀더 사시거나! 살림을 맡을 형이라두 있어 주거나!
 
218
덕기는 살림을 맡은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벌써 찜증부터 났다. 신산하였다. 새삼스러이 고독을 느끼었다.
 
219
그러나 오늘에 한하여 별안간 살림에 짜증이 나고, 병화가 부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모친의 첩 논래나 부친이 그 무서운 아편까지 피우는 눈치라는 데에 가슴이 더럭 내려앉았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필순을 그 모양으로 돌려보낸 것이 화가 나고, 노기를 품은 어조로 눈물이 글썽해지는 그 꼴을 생각하면 마음이 설렁해지는 판에, 모친의 첩 논래가 도리어 기분을 휘저어놓았기 때문이다.
 
220
그러나 덕기는 필순을 잊어버리려 하였다. 마음의 저어 속, 머리의 저어 속에 깊이 숨겨버리려고 애를 썼다. 건드리기가 무서웠다.
 
221
그러자는 것은 아닌데, 동기는 그렇지 않은데, 결과로 보아서는 결국 두 사람이 결혼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떠보고 다지려고 한 셈쯤 되고 말았다. 그리고 어린 처녀의 순진한 마음을 실망의 구렁에 쓸어 박고 말았는지도 알 수 없다. 실망까지는 몰라도 마음을 어수선하게 들쑤셔놓은 것만도 일을 저지른 것 같아서 애가 쓰이고 자기의 실수에 불쾌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는 수가 없다. 이 역시 해결할 도리가 없다.
 
222
"너 아버지가 걸어가신 길을 그대로 뒤밟아 가려느냐?"
 
223
"경애 아버지의 약값을 대다가 그렇게 되듯이 너도 그 애 아버지의 약값, 입원료나 물잇구럭을 해줄 거라!..."
 
224
모친의 이 말은 염통을 꼭 찌르는 것이었다. 이때껏 무심하였더니만큼 덕기는 깜짝 놀란 것이다. 거기에는 무슨 숙명적 무서운 인과가 엉클리어진 것같이 겁이 펄쩍 나는 것이었다.
 
225
-필순이를 '제2 홍경애'를 만들 수는 없다!
 
226
덕기는 속으로 뇌었다.
 
227
-필순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228
덕기는 어느덧 자기 눈에도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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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三代)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193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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