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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제1 충돌 ◇
해설   목차 (총 : 42권)     이전 8권 다음
1932년
염상섭
1
삼대(三代)
 
2
8. 제1 충돌
 
 
3
"글쎄, 아버니께서는 망령이 나셔서 그리시든 옛날 시절만 생각하고 그리시든 형님으로서는 되려 그러지 못하시게 말려야 할 것이 아닌지요?"
 
4
"자네가 못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말리나? 자네가 못하시게 하지 못하기나 내가 여쭈어 안 들으시거나 매한가지가 아닌가?"
 
5
"못하시게 하기는 고사하고 그렇게 하시도록 충동이고 다니는 사람은 누구게요?"
 
6
"글쎄, 이 사람아, 딱한 소리도 하네그려. 그래 아저씨께서 누구 말은 들으시던가? 내가 다니면서 일을 꾸며놓은 것같이 생각을 하지만 자네 어쩌자고 그런 소리를 하나?"
 
7
"어쨌든 이 전황한 판에 무슨 정성이 뻗쳤다고 별안간 10대조니 10몇 대조니 하는 조상의 산소 치레를 하고 있단 말씀이오?"
 
8
상훈은 문제의 산소가 몇 대조의 산손지도 모른다.
 
9
"아버니께 여쭈어보게그려!"
 
10
상훈의 재종형 창훈은 핏대를 올리고 소리를 높인다.
 
11
제삿날이라 10시가 넘으니까 당내가 꾸역꾸역 모여들어서 사랑 건넌방 안은 뿌듯하고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상훈은 제가 참례는 아니하여도 으레 제삿날이면 사랑에 와서 앉았다가 음복까지 끝나야 가는 것이다.
 
12
영감님은 모든 분별을 하느라고 안방에 들어가 앉았고 사랑 큰방에는 윗항렬 노인들과 제삿밥 기다리는 노인축이 점령하고 떠든다. 덕기도 아까 8시가 넘어서 들어와서 제삿날 나다닌다고 조부에게 한바탕 꾸중을 듣고 안에서 제물을 올리는 시중을 들고 있다. 일할 사림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동육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절차부터 가르치기 위하여 꼭 손자를 시키는 것이다. 영감으로서 생각하면 죽은 뒤에 아들의 손으로 제사받기는 틀렸으니까 장손에도 외손자인 덕기 하나를 믿는 것이다.
 
13
내가 죽은 뒤에 기도를 어떤 놈이 하면 내가 황천으로 가다 말고 돌아와서 그 놈의 혓바닥을 빼놓겠다고 노영감은 미리미리 유언을 해둔 터이다. 아들이 예수교식으로 장사를 지내줄까보아 그것이 큰 걱정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죽으면 호상은 사랑에 있는 지 주사로 정하고 모든 초종범절은 지금 사랑 건넌방에서 상훈과 말다툼을 하고 있는 당질 창훈더러 서로 의논해 하라는 것이 벌써부터의 유언이다. 아들더러는 프록 코트나 입고 마차나 자동차를 타고 다르든지 기생집에서 콧노래를 부르고 누워 있든지 너 알아 하라고 일러두었다.
 
14
도대체 영감의 소원은 앞으로 15년만 더 살아서(15년이면 여든 두셋이나 된다) 안방차지인 수원집의 몸에서 아들 하나만 더 낳겠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태기가 있다면 죽을 때는 열 다섯 먹은 상제 하나는 삿갓가마를 타고 따르리라는 공상이다- 영감의 걱정이란 대개 이런 따위다. 창피해서 입밖에 내지는 않았으나 작년 올에 있을 태기가 없어서 아들 낳는다는 보험만 붙은 계집이면 또 하나 얻어도 좋겠다는 속셈이다... 날마다 지 주사는 아랫방 마루 안에 놓인 약장 앞에서 15년 더 살 약과 아들 낳을 약을 짓기에 겨울에는 발이 빠질 지경이다.
 
15
그러나 이 영감은 15년을 더 사는 동안에는 호상 차지할 맞늙는 지 주사와 50 넘은 창훈이 먼저 죽을지 모를 것이다.
 
16
"대관절 대동보소를 이리 옮겨온 것도 형님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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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은 종형을 또 들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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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오고 말고가 있나. 그런 일이란 집아 어른이 하셔야 할 것이요, 나는 영감님 분부대로 심부름만 한 게 아닌가? 자네는 나마 보면 들컹거리네마는 대관절 내가 무얼 잘못했단 말인가?"
 
19
창훈은 다시 순탄한 목소리로 눅진눅진 대거리를 하고 앉았다.
 
20
"그야 큰댁 형님 말씀이 옳지요. 또 사실 사무소를 둘 만한 곳이 어디 있습니까?"
 
21
옆에 앉았던 젊은 재종이 창훈 편을 든다.
 
22
"대동보소로 모두 얼마나 쓰셨소?"
 
23
상훈은 자기 부친이 족보 인쇄하는 데 적어도 3, 4000원은 그럭저럭 부스러뜨렸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24
"그 역시 나도 모르지. 장부에 뻔한 것이요, 회계 본 애가 있으니까?"
 
25
창훈은 냉연히 이렇게 대답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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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생각에는 내가 거기서 담배 한 갑이라도 사먹고 밥 한 그릇이라도 먹었을 성싶지만 없네 없어! 나도 조가로 태어났으니까 싫어도 하고 좋아도 하는 노릇이 아닌가?"
 
27
하고 코웃음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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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라올 제의 고무신짝이 구두고 변하고 땟덩이 두루마기가 세루 두루마기도 되더니 올 겨울에는 외투가, 그 위에 또 는 것은 어디서 생긴 것이오? 하고 들이대고 싶은 것을 상훈은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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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대동보소 문패는 언제 떼게 될 것인가요?"
 
30
한참 만에 상훈은 또 비꼬아서 말을 꺼냈다.
 
31
"인쇄가 다 되었으니까 떼지 말래도 떼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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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러니까 일거리가 이제는 없어져서 여관 밥값들이 밀리게 되니까 또 새 일거리를 꾸며냈단 말이지..."
 
33
좌중은 아무도 대꾸를 안하고 조용하다.
 
34
수하동 조 의관 댁 문지방 없는 솟을대문에는 언제부턴가 xx조씨 대동보소라는 넓고 기다란 나무패가 붙기 시작하였었다. 근 이태 동안 무릇 xx조씨라고 하는 '종씨' 쳐놓고 안 드나드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종씨 종씨- 보도 듣도 못하던 종씨의 사태가 났던 것이다. 그 종씨가 상훈에게는 구살머리적고 못마땅하였다. 그러나 조 의관은 그 무서운 규모로도 이 종씨를 할아버지 아저씨하고 덤벼드는 시골꼬락서니 젊은애들을 며칠씩 묵혀서는 노잣냥 주어 내려보내는 것이었다.
 
35
조 의관에게는 평생의 오입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을사조약 한창 통에 그 때 돈 2만 냥, 지금 돈으로 400원을 내놓고 40여 세에 옥관자를 뭍인 것이다. 차함은 차함이로되 오늘날의 조 의관이란 택호가 아주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요, 또 하나는 6년 전에 상배하고 수원집을 들고 또 여든 다섯에 죽을 때는 열 다섯 먹은 아들을 두게 될지 모르는 터인즉 그다지 비싼 오입이 아니나, 맨 나중으로 하는 오입이 이번 이 대동보소를 맡은 것인데 이번에는 좀 단단 걸려서 2만 냥의 열 곱 20만냥이나 쓴 것이다. 그것도 어엿이 자기 집 자기 종파의 족보회를 꾸민다면야 설혹 지금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덮어놓고 오입이라고 하여서는 말이 아니요 인사가 아니겠지만 상훈으로 보아서는 대동보소라는 것부터 굳이 반대는 안한다 하여도 그리 긴할 것이 없는데 게다가 xx씨의 족보에 한몫 비집고 끼려고- 덤붙이가 되려고 4000원 템이나 생돈을 내놓는다는 것은 적어도 오입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36
'돈 주고 양반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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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상훈에겐 일종의 굴욕이었다.
 
38
그러나 조 의관으로서 생각하면 이때껏 자기가 쓴 돈은 자기 부친이 물려준 1000냥에서 범용한 것이 아니라 자수로 더 늘린 속에서 쓴 것이니까 그리 아깝지도 않고 선고의 혼령에 대하여도 떳떳하다고 자긍하는 것이다. 저 잘나면 부조의 추증도 하게 되는 것인데 있는 돈 좀 들여서 양반되기로 남이 웃기는 새로에 그야말로 이현 부모가 아닌가 하는 용량이다. 어쨌든 4000원 돈을 바치고 조상 신주 모시듯이 xx조씨 대동보소의 문패를 모셔다가 크나큰 문전에 달고 xx조씨 문중 장손파가 자기라는 듯이 버티고 족보까지 박게 되고 나니 이번에는 xx조끼 중시조인 xx당 할아버니의 산소가 수백 년래에 말이 아니 되었으니 다시 치산을 하고 그 옆에 묘막보다는 큼직한, 옛날로 말하면 서원 같은 것을 짓자는 의논이 일어났다.
 
39
지금 상훈이 창훈더러 일거리가 없어져가니까 또 새판으로 일을 꾸민다고 비꼬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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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절 앞의 석물도 남 볼썽사납지 않게 일신하게 하여야 하겠고 묘막이니 제위답이니 무엇무엇... 모두 합하면 한 1만 원 예산은 있어야 할 터인데 반은 저희들이 부담하겠지만 절반 5000원은 아무래도 조 의관이 내놓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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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고 들어가면 재산 상속을 받을 권리도 있지만 없는 양부모면야 벌어서 봉양할 의무도 지는 것이다. 조씨 문중이 돈 낼 만한 사람이 없고 또 벌이지 않으면 모르거니와 벌인 일인 바에야 시종이 여일하게 깡그러뜨려야 할 일이다. 그러나 5000원을 저희가 분담한대야 그것에는 이 영감에게서 우려내려는 미끼로 하는 헛말임은 물론이요, 이 영감이 내놓는 5000원에서 뜯어먹으려고나 안했으면 다행이나 원체가 뜯어먹자는 노릇인 다음에야 더 말할 것도 없는 일, 어쨌든 뭇놈이 드나들며 굽실거리고 노영감을 쑤석대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못하겠다는 말이 입에서 아니 나와서 울며 겨자 먹기로 추수나 하면 내년 봄쯤 어떻게 해보자고 아직 밀어나오는 판이다. 내년 봄이래야 음력설만 쇠면 석 달이 못 가서 한식이다.
 
42
이 영감에게 제일 신임 있는 창훈을 앞장세우고 요새로 부쩍 조르고 다니는 것은 어서 급급히 착수할 준비를 하여 한식 차례를 잡숫게 하고 이눌러 일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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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감으로서는 이렇게 쌀값이 폭락하여서는 도저히 힘에 겨우니 좀더 연기를 하였다가 추석에나 가서 착수를 하든지 또다시 내년 한식 때에 의논을 해 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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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도 결단코 어수룩한 사람은 아니다. 어수룩이라니 거의 후반생을 산가지와 주판으로 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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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면서 천냥 만냥 판으로 돌아다니거나 있는 집사랑 구석에서 바둑으로 세월을 보내는 조가의 떨거지들이 다른 수단으로는 이 영감의 주머니 끈을 풀게 할 도리가 없으니까 족보를 앞장세우고 삶고 굽고 하는 바람에 조츰조츰 쓰기 시작한 것이 3000여 원 근4000여원을 쓰게 되고 보니 속으로 꽁꽁 앓는 판인데 또 xx당 할아버니가 앞장을 서서 5000원 논래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5000원을 부른 사람도 그만큼 불러야 3000원은 우려내려니 하는 것이요, 조 의관도 5000원의 반절은 아무래도 또 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죽을 날이 얄팍하여가니까 xx조씨 문중에서 자기가 둘째 중시조나 되는 셈치고 이 세상에 남겨놓고 가는 기념 사업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아 해보려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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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새로 부쩍 달고 치는 바람에 그러면 우선 1000원 하나를 내놓을 터이니 500원은 산역에 쓰고 500원은 묘막을 짓되 부족되는 것은 묘하에 있는 조씨들이 금력으로 보태든지 돈 없는 사람은 부역으로 흙 한줌 떼 한 장씩이라도 떠다가 힘으로 보태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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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제위답으로는 다소간 나중에 마련해 노마고 하였다. 조 의관 생각에는 그렇게 하면 1000원 내놓고 2000원 들인 생색은 나려니 하는 속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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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결국 아저씨께서는 돈 1000원 하나밖에 안 내노신다니까 나중 뒷갈망은 우리 발바투 돌아다니며 긁어모아야 할 셈이라네. 말 내놓고 안할 수 있나! 이래저래 뼈끝만 빠지고 잘못되면 시비는 우리만 만나고..."
 
49
창훈은 한참 앉았다가 혼잣말처럼 이런 소리를 한다.
 
50
"장한 사업 하슈. xx당 할아버니가 묘막 지어달라고, 제절 앞에 석물이 없어서 호젓하다고 하십디까?"
 
51
상훈은 '합디까'라고 입에서 나오는 것을 겨우 '하십디까'라고 존대를 하였다. xx당 할아버니라고 부르는 것도 좀 어설프다. 예수교인이라 하여 자기 조상을 존경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부친이 새로 모셔온 10 몇 대조 할아버지라 하니 좀 낯 서투른 때문이다.
 
52
"그런 소린 아예 말게. 자네는 천주학을 하니까 이런 일에는 반대인지 모르지만 조상 없이 우리 손이 어떻게 퍼졌으며 조상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 조씨도 그렇게 해서 남에 빠지지 않고 자자손손에 번창해 나가야 하지 않겠나."
 
53
창훈은 못마땅한 것을 참느라고 더욱 이죽이죽 대거리를 한다.
 
54
"조가의 집이 번창하려고?...하지만 꾸어온 조상은 자기네 자손부터 돕는답디다..."
 
55
상훈은 불끈하여 소리를 높이며 또 무슨 말을 이으려다가 마루 끝에서 영감님의 기침 소리가 나는 바람에 좌우 방안은 괴괴하여졌다.
 
56
"왜들 떠드니?"
 
57
화를 참는 못마땅한 강강한 목소리와 함께 건넌방 문이 활짝 열린다. 방 안의 젊은애들은 우중우중 일어서며 아랫목에 앉았던 상훈은 윗목으로 내려섰다.
 
58
방 안에서는 더운 김이 서린 담배 연기가 뭉긋뭉긋 흘러나온다.
 
59
"이게 굴뚝 속이지, 젊은것들이 무슨 담배를 이렇게 피우며 주책없는 소리들만 씨부렁대는 거냐?"
 
60
영감은 방 안을 들어서며 우선 나무라놓고 아랫목으로 가서 앉으며 자기의 발끈한
 
61
미를 속으로 간정시키려는 듯이 목소리를 가라앉혀서,
 
62
"어서들 앉어라."
 
63
하고 무슨 잔소리를 꺼내려는 지 판을 차린다. 영감은 제청을 다아 배설해 놓고 시간을 기다리느라고 사랑으로 나오다가 종형제간의 말다툼을 가만히 듣고 섰다가 참을 수 없어 뛰어든 것이다.
 
64
"너 어째 왔니? 오늘은 예배당에 안 가는 날이냐?"
 
65
영감은 얼굴이 발끈 취해 올라오며 윗목에 숙이고 섰는 아들을 쏘아본다.
 
66
"어서 가거라! 여기는 너 올 데가 아니야! 이 자식아! 나이 50줄에 든 놈이 젊은것들을 앞에 놓고 철딱서니 없이 무어 어쩌고 어째? 조상을 꾸어왔어? 꾸어온 조상은 자기네 자손만 도와? 배지 못한 자식!"
 
67
영감은 금시로 숨이 넘어가려는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벌건 목에 푸른 힘줄이 벌렁거린다. 상훈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한구석에 섰다.
 
68
"너두 내가 낳아놓은 자식이면야 사람이겠구나? 부모의 혈육을 타고났으면 조상은 알겠구나? 가사 젊은 애들이 주책없는 소리를 하더라도 꾸짖고 가르쳐야 할 것이 되려 철부지만도 못한 소리를 텅텅하니 이게 집안이 되려고 이러는 거란 말이냐? 안 되려고 이러는 거란 말이냐?"
 
69
여기서 영감은 한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목청을 돋운다.
 
70
"이 집안에서 나만 눈을 감아보아라! 집안 꼴이 무에 되나? 가거라! 썩썩 나가거라! 조상을 꾸어왔다니 너는 네 아비도 꾸어왔겠구나? 꾸어온 아비면야 조금도 네게는 도울 게 없을 게다!- 다시는 내 눈 앞에 뜨일 생각도 말아라!"
 
71
오른손에 든 장죽을 격검대 모양으로 들었다 놓았다 내밀었다 들이켰다 하며 펄펄 뛴다.
 
72
4000원 돈이나 드는 줄 모르게 들인 것을 속으로 앓고 또 앞으로 돈 쓸 걱정을 하는 판에 앨 써 해놓은 일에 대하여 자식부터라도 그따위 소리를 하는 것이 귀에 들어오니 이래저래 화는 더 나는 것이다. 게다가 원래 못마땅한 자식이요 또 오늘은 친기라 제사 반대꾼을 보니 가만 있어도 무슨 야단이든지 날 줄은 누구나 짐작했지만 마침 거리가 좋아서 야단이 호되게 된 것이다.
 
73
"아니에요.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아저씨께서 잘못 들으셨나보외다."
 
74
창훈은 속으로 시원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사치레로 한 마디 하였다.
 
75
"잘못 듣다니? 내가 이롱증이 있단 말인가?"
 
76
"그만해두세요. 상훈군도 달래 그렇겠습니까? 이 전황한 통에 꿈적하면 돈이니까 그것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이지요."
 
77
창훈은 이렇게 변명해주었다. 그러나 상훈으로서는 때리는 사람보다 말리는 놈이 더 미웠다.
 
78
"누가 돈 쓰는 아랑곳하랬나? 누가 저더러 돈을 쓰라니 걱정인가? 내 돈 가지고 내가 어떻게 쓰든지!..."
 
79
"아버니께서 하시는 일에..."
 
80
조금 뜸하여지며 부친이 쌈지를 풀어서 담배를 담는 동안에 상훈은 나직이 말을 꺼냈다.
 
81
"...돈 쓰신다고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마는 어쨌든 공연한 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첫째 잘못이란 말씀입니다."
 
82
"무어 어째 공연한 일이란 말이냐?"
 
83
부친의 어기는 좀 낮추어졌다.
 
84
"대동보소만 하더라도 족보 한 길에 50원씩으로 매었다 하니 그 50원씩을 꼭꼭 수봉하면 무엇하자고 3, 4000원이 가외로 들겠습니까?"
 
85
"3, 4000원은 누가 3, 4000원 썼다든?"
 
86
영감은 아들의 말이 옳다고는 생각하였으나 실상 그 3, 4000원이란 돈이 족보 박는 데에 직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xx조씨로 무후한 집의 계통을 이어서 일문일족에 끼려 한즉 군식구가 늘면 양반의 진국이 묽어질까보아 반대를 하는 축들이 많으니까 이 입들을 씻기기 위하여 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난봉 핀 돈 액수를 줄이듯이 이 영감도 실상은 한 1000원 썼다고 하는 것이다. 중간의 협잡배는 이런 약점을 노리고 우려 쓰는 것이지만 이 영감으로서는 성한 돈 가지고 이런 병신 구실 해보기는 처음이다.
 
87
"그야 얼마를 쓰셨든지요. 그런 돈은 좀 유리하게 쓰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88
'재하자 유구무언'의 시대는 지났다 하더라도 노친 앞이라 말은 공손했으나 속은 달았다.
 
89
"어떻게 유리하게 쓰란 말이냐? 너같이 5, 6000원씩 학교에 디밀고 제 손으로 가르친 남의 딸자식 유인하는 것이 유리하게 쓰는 방법이냐?"
 
90
아까부터 상훈의 말이 화롯가에 앉아서 폭발탄을 만지작거리는 것 같아서 위태위태하더라니 겨우 간정되려던 영감의 감정에 또 불을 붙여놓고 말았다.
 
91
상훈은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벌개진다.
 
92
부친의 소실 수원집과 경애 모녀와는 공교히도 한 고향이다. 처음에는 감쪽같이 속여 왔으나 수원집만은 연줄연줄이 닿아서 경애 모녀의 코빼기도 못 보았건마는 소문을 뻔히 알고 따라서 아이를 낳은 뒤에는 집안에서 다 알게 되었던 것이다. 덕기 자신부터 수원집의 입에서 대강 들어 안 것이다. 그러나 상훈 내외끼리 몇 번 싸움질이 있은 외에는 노영감도 이때껏 눈감아버린 것이요, 경애가 들어 있는 북미창정 그 집에 대하여도 부친이 채근한 일은 없는 것이라서 지금 조인광 좌중에서 아들에게 대하여 학교에 돈 쓰고 제 손으로 가르친 남의 딸 유인하였다는 말을 터놓고 하는 것을 들으니 아무리 부친이 홧김에 한 말이라 하여도 듣기에 괴란쩍고 부자간이라도 너무 야속하였다.
 
93
"아버니께서 너무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마는 어쨌든 세상에 좀 할 일이 많습니까. 교육 사업, 도서관 사업, 그 외 지금 조선어 자전 편찬하는데..."
 
94
상훈은 조심도 하려니와 기를 눅이어서 차근차근히 이왕지사 말이 나왔으니 할 말은 다 하겠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가려니까 또 벼락이 내린다.
 
95
"듣기 싫다! 누구 네게 그따위 설교를 듣자든? 어서 가거라."
 
96
"하여간 말씀입니다. 지난 일은 어쨌든 지금 이 판에 별안간 치산이란 당한 일입니까. 치산만 한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서원을 짓고 유학생들을 몰아다 놓으시렵니까? 돈 돈이거니와 지금 시대에 당한 일입니까?"
 
97
"잔소리 마라! 그놈 나가라니까 점점 더하고 섰구나. 내가 무얼 하든 네가 무슨 총찰이란 말이냐. 내가 죽으면 동전 한 닢이라도 너를 남겨줄 테니 걱정이란 말이냐. 너는 이후로는 아무리 굶어죽는다 하여도 한푼 막무가내다. 너는 없는 셈만 칠 것이니까... 너희들도 다아 들어두어라."
 
98
하고 좌중을 돌려다보며 말을 잇는다.
 
99
"내 재산이래야 얼마 있는 게 아니다마는 반은 덕기에게 물려줄 것이요, 그 나머지로는 내가 쓰고 싶은 데 쓰다 남으면 공평히 나누어주고 갈 테다. 공증인을 세우든 변호사를 불러대든 하여 뒤를 깡그러뜨려 놀 것이니까 너는 이제는 남 된 셈만 쳐라. 내가 죽으면 네가 머리를 풀 테냐? 거상을 입을 테냐?"
 
100
영감은 사실 땅문서도 차츰차츰 덕기의 명의로 바꾸어놓아가는 판이요 반은 자기가 쓰다가 남겨서 수원집과 막내딸의 명의로 물려줄 생각이다.
 
101
만일에 15년 더 사는 동안에 아들 하나를 더 본다면 물론 그 아들을 위하여 반 물려 줄 요량도 하고 있는 터이다.
 
102
이 때까지 술이 취하면 주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기도 많이 하였지만 오늘은 친기라 하여 술 한잔 안 자신 이 영감이 맑은 정신으로 여러 젊은애들 앞에서 이런 말을 떠들어놓는 것은 처음이다. 그래야 이 방중은 고사하고 이 집안 속에서 자기 편을 들어줄 사람이라고는 하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상훈은 새삼스러이 고독을 느끼고 모든 사람이 야속하였다.
 
103
"애비 에미도 모르고 계집 자식도 모르는 너 같은 놈은 고생을 좀 해 봐야 한다. 내가 돈이 있으니까 네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는 것이지 내가 아무것도 없어 보아라. 돌아다보기는커녕 고려장이라도 족히 지낼 놈은 아니냐. 어서 나가거라. 이 자식, 조상을 꾸어왔다는 자식은 조가가 아니다."
 
104
하고 노인은 별안간 벌떡 일어나서 아들을 떼밀어 내쫓으려는 듯이 덤벼든다. 젊은 사람들은 와 달려들어서 가로막는다.
 
105
"상훈이, 어서 나가게. 흥분이 되셔서 그러시니까..."
 
106
창훈은 상훈을 끌고 마루로 나왔다.
 
107
부친이 망령이 나느라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젊은 사람들이나 자식 보는데 창피도 스러웠다. 상훈은 안방으로 들어가는 수도 없고 아랫방에도 덕기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있으니 그리 들어갈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모자를 집어 쓰고 축대로 내려오니까 덕기가 아랫방에서 나와서 뜰로 내려온다.
 
108
"아랫방으로 들어가시지요."
 
109
덕기는 민망한 듯이 이렇게 부친에게 말을 걸었으나 부친은 잠자코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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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 근/현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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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삼대(三代)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1932년 [발표]
 
  사실주의(寫實主義) [분류]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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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