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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순진? 야심? ◇
해설   목차 (총 : 42권)     이전 14권 다음
1932년
염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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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三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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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순진? 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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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파출소에 붙들려갔던 이튿날 아침에 책상 위에 놓인 덕기의 편지를 발견하였다. 어제 저녁때 덕기가 와서 자기 방에까지 들어와 편지를 써 놓고 갔다 한다. 그러니까 길이 어긋났던 모양이다. 뜯어 보니 우선 반가운 것이 돈 10원이었다. 길 떠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먼 데를 찾아와서 돈까지 두고 갈 줄 알았다면 화개동서 청요리 접시에 팔려서 눌러붙지를 말고 정거장에 나가주는 것을 잘못하였다고 병화는 후회하였다. 그러나 눈이 퍼붓는데 정거장까지 기를 쓰고 쫓아나가면 부탁한 돈 때문에나 그런 줄 알 듯도 싶고 하여 되어가는 대로 그만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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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에게 충실한 친구임을 알려두려 신용을 단단히 보여두려 왔었네마는 필순양을 만나고 가는 것만은 왔던 보람이 있는 것 같으이. 그러나 실없는 말을 할 줄 모르는 나이니 웃으며 이 글을 쓰지는 못하는 것일세. 내가 없어지면 자네가 담배를 굶을 듯하기에 내 도시락 값을 두고 가네... 일전에 실없는 말로만 하였지만 참 정말 필순양이 공부할 의향이면 기별만 하게. 어떡하든지 도리는 있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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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실없는 말을 못 하는 성미니 웃으면서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무슨 의민지 처음에는 선뜻 못 알아보았다. 그러나 필순을 만나서 반갑다는 말과 공부를 시켰으면 좋겠다고 실없이 한 말을 또 뇐 것을 대조해 보고는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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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야말로 편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몰랐다. 이런 생활을 보지 못하고 자란 귀동자라 몹시 동정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필순이란 여자가 없었던들 그렇게 열심이었을 부가 있을까? 필순을 한 번 보고 이렇게까지 열심인 것도 결코 순진한 것으로만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위인이 아깝다거나 그 가정 사정이 가엾어서 마음이 움직였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 그런 천진스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을까? 자기의 감정을 대담히 솔직히 표백하는 것은 정직하고 또 동정심 많은 위인이기로 호기심이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야심이 없다고는 말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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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덕기는 처자가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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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사하고 대관절 공부를 시키면 어쩐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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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야심이 있는 것은 아니나 귀동자다운 센티멘틀한 감정이 파뜩하는 대로 당장 보기에 가엾어서 그럴 수도 없지 않으나 어쨌든 병화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이 두 남녀간에 장래에 무슨 비극이 생길지도 모를 것 같은 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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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사이에 열렬한 연애가 성립되어 필순은 호의호식하게 되고 부모들도 그 덕에 밥은 안 굶게 된다고 하자. 그러나 그 결과 는 어떻게 되나? 딸을 팔고 주의를 팔고 동지를 팔고, 그리고 덕기의 현재의 처자는 생목숨을 끊을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 남을 것이다- 병화는 그렇게 되는 듯싶게 혼자 공상을 하다가 혼자 눈을 부릅뜨며 화를 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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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돈 10원은 당장 생광스러웠다. 누구보다도 필순의 모친이 기뻐하고 칭찬이 늘어졌다. 신수도 얌전해 보이지만 아무리 친한 사이기로 길 떠나는 사람이 그 눈 속에 애를 써 찾아와서 돈을 두고 간다는 사람은 이 세상에 둘도 없으리라고 자기 일같이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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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자기 친구가 칭찬 듣는 것이 좋지 않은 것도 아니요, 덕기가 자기에게 그렇게 고맙게 구는 것이 특별히 필순이란 계집애가 여기 있기 때문에 한층 더 꾸며서 하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나 그래도 그 뒤에는 필순에게 자랑하는 마음이나 필순에게 보라는 조그만 허영심이 움직인 자취가 아주 없지 않으리라는 것이 얼마쯤 불쾌도 하였고 그런 생각이 있을수록에 아무 멋도 모르고 입에 침이 없이 칭찬하는 주인댁의 말이 듣기 실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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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고분고분치 않은 성질로는 덕기에게는 고맙다는 엽서 한 장이라도 부치기가 귀찮았다. 감사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나 감격한 듯이 허겁지겁을 해서 인사치레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으레 길 떠난 사람이 잘 도착했다는 기별을 먼저 할 것이니까 그때나 자기 부친과 하룻밤 지낸 이야기를 할 겸 답장을 해주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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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일이 지나니까 생각하였던 거와 같이 덕기에게서 간단한 엽서가 왔다. 다만 안부와 졸업시험 준비로 바빠서 긴 편지는 못 쓴다는 말뿐이었으나 끝에 필순과 주인 내외에게 안부 물어달라고 말을 껴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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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순에게만 인사를 한 것이 아니라 아직 안면이 없는 주인 부부에게까지 안주를 전하라는 것에 병화는 혼자 웃었다. 물론 필순에게 호의를 가지니까 자연히 그 부모에게도 마음이 가는 것이겠지만 병화는 이것까지 생각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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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이 집안 전체에 대해 그 극도의 빈궁을 동정하기 때문에 저절로 우러나오는 호의인 것을 짐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하니 병화는 얼마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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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이란 간특한 것이다. 지나는 전차 속에서 잠깐 마주 보고도 공연히 달라는 것 없이 얄미운 사람도 있고, 오고 가는 길가에, 눈결에 스쳐 가는 사람도 많이 본 사람같이 눈에 익고 호의가 쏠리는 경우가 있다. 덕기의 이 집안 사람에게 대한 감정이 그러한 것일지 모른다. 필순이 세상에 없는 미인이라 하여 그런 것도 아니요, 필순이나 이 집안 사정이 남에 없이 동정할 만한 처지라 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덕기에게는 어쩐지 가엾고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게 생각되는 것이지 모를 일이다. 그러한 까닭 없는 동정을 받고 안 받는 것은 그 사람의 임의겠지만 어쨌든 받는 사람으로서는 소위 인복이 있는 사람이다. 사실 필순의 집안 사람은 누가 보든지 싫다 안할 것이요, 인복이 있는 사람 같다. 인복이 있는 게 아니라 인복을 받을 만큼 마음씨가 좋고 깨끗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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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이런 생각을 혼자 하며 버둥버둥 누웠다가 일어나서 제 머리처럼 먼지가 뿌옇게 앉은 책상 앞으로 다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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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에게 답장을 쓰려는 것이나, 편지 쓰는 그 일이 흥미가 나는 게 아니라 일전에 덕기 부친과 하룻밤을 지낸 일을 써보내고 싶은 충동이 더 많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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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바커스 퀸(여왕)의 우박 같은 키스- 아니 실상은 진눈깨비 같은 키스이었던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불의에 맛보는 그 키스의 불 같고도 촉촉한 촉감이 자네의 전송을 방해하여서 그 날은 정거장에 못 나간 것일세. 이것은 자랑이 아니요 핑계도 아니라 나에게도 난생처음 당하는 행복의 결정(?)이었다는 것을 정직하게 고백- 보고하는 것일 뿐일세. 하여간 그 날부터 내 마음이 좀 싱숭생숭해진 것은 사실일세. 그렇다고 내 인생관이나 신념이 지진이야 왔겠나마는, 그러나 그 후부터는 그 집에는 가고 싶지 않은 내 심경을 혼자 생각해보아도 얼굴이 붉어지네그려. 머리도 좀 깎을 생각이 나고 옷의 먼지도 털고 싶고 될 수 있으면 크림도 발라보고 싶다면 이 사람! 자네 웃으려나? 웃지 말게! 정말일세. 자네 일전에 그 굉장한 편지와 함께 내 담뱃값을 두고 갔네마는 어쩌면 자네가 크림 값까지 대어야 할지 모르겠네. 그러나 다행한 일은 내가 그 헌털뱅이 외투를 면하게 된 것일세. 여기에 대한 설명은 차차 추후로 하기로 하고 어쨌든 인간도처 유청산이라더니 죽으면 파묻힐 곳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란 살라는 마련인가보네- 다른 말이 아니라 내 그 외투가 어느 때 어느 경우에 운수가 좋느라고 갈가리 찢어졌네그려. 그래서 자네 어르신네가 특별히, 특별히라는보다도 그 자선심에 호소하셔서 여벌 외투를 한 벌 내리셨네. 이 어의의 대추를 입고 나니 거리의 룸펜인 내가 보아도 놀랄 만큼 맑은 듯한 신사가 되었네. 이것을 입고 바커스의 퀸을 찾아가서 배알하고 싶은 생각이야 간절하나 여보게, 내 주제에 얻어입은 것이 빤히 보일 것 같아서 낯간지럽기도 하고 또 군량(술값)이 있어야 가지 않나. 그래서 이 외투를 잡혀가지고 가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으나 날이 좀 뜨듯해져야 하지 않나. 꽁지 빠진 새 모양으로 북더기 양복 위아랫막이만 입고 갈 수도 없으니까 말일세. 지금도 벽에 걸린 외투를 바라보고 침을 삼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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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정말 그 여자를 사랑하는가? 만일 사랑한다면 아무리 자네에게이기로 이렇게도 경솔히, 더구나 실없이 토설을 하겠나. 모르면 몰라도 아마 소위 첫사랑의 경험은 없네. 세상 사람은 청춘을 그대로 시들리고 늙히는 것을 불행이라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조차 없네. 이지적이요 타산적인 내 성격도 성격이지마는 중학교 졸업 후의 생활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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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까지 욕정을 돈으로 식히는 수단 이외의 여자로서 아는 사람은 필순이밖에 없네마는 필순이는 내게 대하여 이성이 아니라 동기일세 웬일인지 내게는 누이동생으로밖에는 보이지 안네. 그 애의 존재가 내 생활의 중축이요, 그 애가 있기 때문에 굶고 벗는 고통의 절반 이상이 덜리고, 그 애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언제나 깨끗할 수가 있는 것일세. 그러나 그 애를 나의 사랑하는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네. 공상으로라도 그 애를 장래의 내 배우자로 생각해본 일은 업네. 그러기에는 그 애가 너무나 맑고 그러기에는 그 애가 너무나 천진하고 귀여운 여러 가지 미점을 가졌기 때문일세. 나의 이러한 감정이 모순일까? 그러나 결코 나는 모순을 느끼지 않네. 그 애 자신은 세상의 모든 소녀들과 같이 제 본능과 이 사회가 가르쳐주고 보여 주는 갖은 욕망을 공상하고 있을지 모르나 그 욕망을 채울 기회가 절대로 없기를 나는 축수하는 것일세. 후일 그 애의 배우자를 선택한다면 나같은 무능자도 못쓰겠지만 자네 같은 유위의 청년도 거절하여야 할 것일세. 고무 공장에 보내는 것도 아니 되었으나 그래도 자네 댁 같은 유산계급이나 중산계급의 가정에 며느리로 들여보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네. 공장 안에서는 그래도 제 생활이 있으나 중산계급 가정에 들어가서는 마네킹 걸이 되니까 말일세. 자네가 만일에 빈궁한 서생이었더라면 혹시 30퍼센트까지는 필순이를 사랑할 자격이 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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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말이 딴 길로 나갔네마는 자네가 필순이를 공부를 시키지 못해하는 본의는 어디 있나? 시비조 같이 들릴지 모르나 그 열성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공부시킬 수만 있으면 시켜도 좋은 일이지만 공부를 시키면 무얼 하겠단 말인가. 거기에도 프티 부르주아의 유희적 기분이 섞이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없지 않으나 그건 고사하고, 지금 이 집에서는 그 애의 매삭 15,6 원 수입이 아니면 당장 4,5 식구의 입에 거미줄을 칠 지경일세. 이런 속에 이아치고 있는 나 같은 잡아먹지도 못할 위인은 애초에 거론도 할 것 없거니와, 하여간 그 애를 공부시키자면 그 부모의 생활비부터 부담할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나 자네의 자력과 성의가 거기까지 미치겠나? 결국에 자네 같은 사람의 하염직한 동정인지 취민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고사하고 지금의 그 알뜰한 교육은 시키면 무얼 하나? 너무 막 잘라 말하였다고 노하지나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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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놓고 보니 역시 공연한 잔소리였네. 그보다 우리의 퀸 이야기를 좀더 하여야 하겠네. 대관절 자네 생각에는 내가 홍경애라는가 하는 여자를 사랑할 자격이 있겠나 자격 심사부터 해보아주게. 아마 자네가 필순이에게 무자격한 것 이상으로 무자격할 것은 나도 모르는 게 아닐 세 그러나 여보게, 나 보기에는 그 여자가 암만해도 보통 여자 같지는 않으이, 아니 그보다도 먼저 할 말은 자네가 그 여자를 예전부터 아는 가? 하는 의문일세. 더구나 자네 부친이 그 여자를 아시는 모양이데그려. 암만해도 내 눈에는 이상히 보이기에 말일세. 가령 이런 경우를 상상해보세. 그 여자가 작반해 간 사람을 놀린다든지 혹은 그 사람의 속을 태워주려고 아무 상관 없는 나에게 친절한 작태를 해 보인다면 내 꼴은 무에 되나. 가만히 생각하면 내게 특별 호의를 보인 그 우박 같은 키스- 아니, 진눈깨비 같은 키스가 무슨 이용거리가 아니었던가 싶어서 이상도 하고 꺼림칙도 하이. 그야말로 멍텅구리 노릇을 하고 혼자 놓아서 날뛰는 내 꼴을 멀리 상상해 보고 혼자 웃지나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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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덕기 부친과 파출소에 붙들려갔다는 말은 덕기에게 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부자간인 다음에는 듣기 싫어할 것이요 대접이 아닐 것 같아서 무척 찧고 까불어 말이 많건마는 참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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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제 덕기 부친에게 일자 이후의 인사를 하러 들렀을 때에 외투를 준 것은 고마우나, 경애와 무슨 관계가 있는 듯이 미투리 캐는 데는 서이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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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몇 번 만난 사람이면야 그럴 리가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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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나이 아깝게 체통 없이 자꾸 뇌까릴 제, 병화는 진정으로 변명을 하다가 놀려 주고 싶은 생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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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친한 관계가 있습니다만 선생님께서 정 마음에 드신다면 양보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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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웃어 버렸다. 그러나 관계라는 말에 상훈은 또 놀라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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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무슨 실없는 소리를 그렇게 하나. 그러나 바른 대로 말을 하게. 그 애를 나도 대강 짐작하는 게 있으니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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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점점 더 몸이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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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대로 말씀입니다마는 저도 대강 짐작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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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짐작은 무슨 짐작이 있으랴만 서로 수수께끼 같은 소리를 하였다. 병화도 속을 뽑아보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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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어르신네를 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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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네는 인사는 없었죠만 대강 짐작은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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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헛소리만 탕탕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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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홍xx씨를 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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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xx란 이름에 병화는 좀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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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가 그 사람 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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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속으로는 입을 딱 벌렸으나 병화는 능청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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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러니 딱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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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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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xx라는 이름은 병화가 기미사건 이후에 들어 잘 알던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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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그 애를 어려서만 보았고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다가 거기서 만나보고 놀랐네마는 자네라도 또 만나거든 권고를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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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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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데서 나와서 무어든지 정당한 직업을 붙들든지 시집을 가라고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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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부자에게 첩으로나 들어가면 갈까요- 지금판에 취직도 용이치 않겠지만 웬만한 거야 눈에 찰 리도 없고, 선생님이 어떻게 거들어 주십쇼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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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슬쩍 이렇게 말을 걸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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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나 역시 그 부친과 다소 교분이 있던 것을 생각해두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으나 그러자면 공연한 세상의 오해가 무서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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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은 이런 소리를 하고 웃어버렸다. 상훈은 병화의 속을 뽑으려다가 도리어 뽑힌 것쯤 되었으나 상훈으로서는 이렇게 말을 비쳐두어야 병화에게 오해를 받지 않겠기 때문이었다. 실상은 아주 탁 터놓고 홍경애와 나와는 그렇지 않은 관계라는 말을 들려주어서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만들어 두고도 싶었으나 그 말을 꺼내면 자초지종을 기다랗게 설명하여야 할 것이니 그것이 창피도 스럽고 또 제 말은 그야말로 무슨 관계나 있는 듯이 풍을 치나 머리 하나 못 깎고 담뱃값 한푼 없이 돌아다니는 위인이 감히 그런 하이칼라의 모던 걸하고 어울리지도 못할 것이요, 경애도 결단코 병화쯤이야 문제도 삼지 않을 것이니 공연히 숙호충비로 먼저 말을 꺼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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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덕기 역시 별안간 그 아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수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가령 제 친구인 병화가 전일의 서모요 더구나 그 자식이 있는 경애와 심상치 않은 관계인 것을 알고는 잠자코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이 기회에 당연히 귀정을 내고 자식을 찾아오라는 뜻으로 그런 말을 꺼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의혹이 부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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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렇다면 일이 여간 꼴사납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렇더라도 자기의 내력을 지금 병화에게 설파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증이파의면야 더구나 결과는 기다려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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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그애는 여간내기가 아니니 어련할 게 아니나, 자네야말로 섣부른 짓 하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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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은 그래도 미심쩍어서 헤어질 때 병화에게 이런 충고 비슷한 말로 다져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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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야 문제도 아닙니다마는 선생님께서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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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병화도 슬쩍 한마디 대거리를 해두고 헤어져 나오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어쨌든 경애에게 한번 가서 캐어보리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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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가 이런 생각을 할 제 상훈도 속히 경애를 다시 만나서 따져도 보고 병화에게 절대로 자기네 내평을 발설 못하게 일러놓아야 하겠다고 궁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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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병화는 어제 상훈에게 찾아갔을 제 설왕설래하던 것도 편지에는 한 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이렇게 부리만 따놓으면 덕기 편에서 무어라고든지 답장이 올 것이니 그것을 보리라고 생각하였다.
 
60
편지를 써놓고 났으나 우표가 없다. 이 집 문안에 돈 10원이 들어온 것도 벌써 3, 4일이 지났으니 더구나 병화의 주머니 속에 오리 동록이 남았을 리 없다. 혹시 안에는 동전푼 남았을지 모르나 한푼을 둘에 쪼개 쓰려는 터에 우표값 내놓으라고 하기도 염의가 없어 여차직하면 그대로 넣어버려도 좋고, 이따 나가면 친구의 주머니를 털리라 하는 생각으로 그대로 내던져두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녹였다.
 
61
요새는 낮잠 자는 게 일이다. 추우면 추워서 그렇고, 배가 고프면 배가 고파서도. 그러나 두 끼니를 먹는 날도 할 일이 없다. 동지가 모이는 데는 난롯불도 못 피우는 먼지 구덩이에 들어가서 뿌연 책상만 바라보고 앉았을 수 없으니 가기 싫고, 겨울 들어가면서부터 모이던 두셋 친구의 여관도 한 동지가 붙들려 들어간 뒤로는 위험해서 모이지들을 않는다. 얼마간은 누구나 잠잠히 들어앉아서 물계만 보는 판이다. 그야말로 동면상태다. 무료하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으나 그렇게 한 모퉁이 해보지 못하고 어설피 붙들려 들어가고는 싶지 않다.
 
62
요새 며칠은 불도 뜨뜻이 때고 마음놓고 밥도 먹으니까 심신이 편해 그런지 잠이 많아졌다. 어쩐둥 잠이 든 것이 전등불 들어올 때까지 잤다. 눈을 떠 보니 필순이 들어와서 깼는지 앞에 오도카니 섰다.
 
63
"무슨 잠을 이렇게 주무세요? 이젠 동이 텄으니 어서 일어나 진지 잡수세요."
 
64
하고 나무라듯 하며 웃는다. 팔을 것도 손에는 거멍 검댕칠을 하고 한 모양이 벌써 공장에서 와서 부엌일을 하다가 들어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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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쿠... 이거 미안하군! 아가씨의 꾸중을 듣게 되긴 되었군마는 바깥이 춥지? 남은 추운데 갔다 왔는데 나는 이렇게 코를 골고 자빠져서 죄송무쌍합니다."
 
66
하고 병화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앉으며 넓죽이 절을 한다.
 
67
"그래두 잠이 들 깨신 게군? 정신차리셔요."
 
68
"정신 바짝 차렸지만..."
 
69
하고 병화는 무슨 실없는 소리를 하려는 듯이 웃다가 말을 돌려서,
 
70
"방이 왜 이렇게 더운가? 응? 불까지 땠어? 이거 정말 미안해서 살 수가 있나 오늘은 내 밥을랑 필순이가 겸쳐 먹게. 입두 염의가 있겠지 함부로 먹자고 보챌 리야 있나."
 
71
라며 기지개를 커닿게 켜고 하품을 한다. 병화는 제 방 군불을 제 손으로 때는 것이나 추운데 돌아온 필순이 땐 것이 더욱 미안하였다.
 
72
필순은 어린애처럼 병화의 하품하는 그 입에 주먹을 넣으려는 흉내를 내며,
 
73
"아이구 저 입과! 먹자고 보지 않는 저 입 봐?"
 
74
하고 깔깔 웃는다.
 
75
"게름뱅이 선생님의 조지. 그 입야 무슨 죄가 있다고 굶기세요. 어서 안방으로 건너가 진지 잡수세요."
 
76
하고 재촉을 한다.
 
77
병화가 나가는 뒤를 따라 나오던 필순은 책상 위의 편지가 눈결에 띄자 멈칫하며 본다.
 
78
"선생님, 편지 부치십니다그려?"
 
79
"응, 거기 놔두어!"
 
80
"고맙단 말씀이나 단단히 하시지요."
 
81
"응, 모두 고맙다고 하는데 필순이만은..."
 
82
하다가 병화는 말을 뚝 끊어버렸다.
 
83
필순만은 고맙다 안한다고 썼다고 하려다가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84
"필순이만은 어째요? 네?"
 
85
필순은 여전히 편지를 들고 서서 마루 끝에 나와 앉았는 병화에게 소리를 친다. 뒷말이 듣고도 싶고 어쩐지 '조덕기형'이란 넉 자가 반가이 보이는 것이었다.
 
86
"아냐, 실없는 소리야. 필순이만은 욕을 하더라고 썼단 말야."
 
87
병화는 하는 수 없이 대꾸를 하였다.
 
88
"왜 내가 그 이를 욕을 해요? 암 상관 없는 이한테 왜 내가 욕을 할라구?"
 
89
하고 짜증을 낸다.
 
90
필순은 실없는 말같이 하나 목소리는 실없지 않았다.
 
91
병화는 도시 공연한 소리를 냈다고 후회하며,
 
92
"거기 놔두어! 장난의 말야."
 
93
하고 방문 안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94
"그런데 왜 안 부치셨대요?"
 
95
"우표가 있어야지. 그대로 두어."
 
96
하고 병화는 빼앗아서 벽에 걸린 외투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97
"돈 드릴까? 내게 3전 있는데."
 
98
"3전 있건 고구마나 사먹어요."
 
99
"누구를 어린애로 아시네."
 
100
"어린애가 아니면 고구마는 쇠통 싫어하는데!"
 
101
하고 병화는 껄껄 웃어버렸다.
 
102
병화는 주인과 겸상을 해 밥을 먹는 것이었다. 마누라는 안방을 아니 치웠다고 사내들의 밥상은 건넌방으로 들여가게 하였다.
 
103
밥을 먹으며 필순의 부친도 덕기의 말을 꺼냈다. 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딸과 이야기하는 것을 안방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104
"이 밥이 말하자면 그 사람의 밥이라 해서 말이 아니라 위인 딴은 퍽 얌전하고 상냥한 모양이야. 사상은 어떤지 모르지만 장래 잘 이용해두 상관없지. 별수 있나. 무슨 일을 하든지 한푼이라도 있는 놈의 것을 끌어내는 수밖에."
 
105
필순의 부친은 이런 소리를 하였으나 병화는 잠자코 먹기만 한다. 필순의 부친은 다복한 윗수염에 벌써 흰 털이 두서넛 생기는만큼 겉늙어서 한 50이나 되어 보이고, 캥캥하니 암상궂게 생겼으나 상냥한 대신에 별로 주변성이 없어 보이는 중늙은이다.
 
106
"요전에 일본서는 무산자 병원에 어느 재산가가 기부를 한다니까 이러니저러니 문제가 많다가 한편에서는 안 받기로 결의를 하고, 한편에서는 받는다고 하였는데 결국에는 기부자가 취소를 하였다더군마는 내 생각 같아서는 얼마든지 받아도 좋을 것 같더군. 내는 놈이야 회유 수단이거나 말거나 거기에 이용되고 넘어가지만 않으면 그만 아닌가. 결국에 그 회유 수단이란 것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적이 주는 군량을 먹고는 못 싸우란 법이 있나. 그따위 조그만 결벽도 역시 소시민성이지."
 
107
병화가 잠자코 있는 것은 불찬성의 뜻인 줄 알고 주인은 이런 주창을 한 것이다.
 
108
"그렇지만 문제가 표면에 나타나면 일반 민중의 유치한 의식이 흐려질 것이요, 또 내놓는 사람은 그 점을 노리고 하는 일이니까 정책상 받지 않는 것도 옳은 일이지요."
 
109
병화는 비로소 한마디 대꾸를 하였다.
 
110
"그야 물론이지만 조선같이 조직적 기반이 없고 부득이 비합리적으로 나가는 경우에는 그런 결벽성은 불필요하단 말이야."
 
111
"하지만 덕기 따위 아직 어린애야 이용이고 무어고 있나요. 그 집 영감이 미구 불원간 죽으면 덕기 부친이 상속을 하니까 얼러본다면 덕기보다 한 대 올라가서 얼러봐야죠."
 
112
병화는 무슨 속셈이 있는 듯이 이런 소리를 하다가,
 
113
"참 그런데 한가지 이용해보시려우?"
 
114
하고 웃는다.
 
115
"무어?"
 
116
"실없는 말이지만 조군이 필순이를 보더니 공장에 보내서 썩이는 게 아까우니 공부를 시켰으면 좋겠다고 하던데...?"
 
117
"공부?"
 
118
하고 필순의 부친이 고개를 들다가 잠자코 만다.
 
119
"왜 어떠세요?"
 
120
"글쎄, 조금만 셈이 피면 공부를 시켜서 제 손으로 벌어라도 먹게 만들어 주고 싶지만 그런 젊은애를 믿을 수가 있나?"
 
121
"아까 이용한다는 말씀과는 다릅니다그려?"
 
122
하고 병화는 웃었으나 믿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까 말과는 딴 의사인 것을 짐작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123
주인은 무슨 말을 좀더 하려다가 안방에서 필순이 숭늉을 뜨러 나오는지 인기척이 나니까 말을 똑 그쳐 버렸다.
 
124
주인이란 사람은 지금은 표면에 나선 운동자는 아니나 병화의 선배 경이요 한때는 7, 8년 전에 제 1기생 경으로 감옥에도 다녀나온 사람이다. 나이 40이 훨씬 넘었으니 이제는 한풀 빠졌다고도 부겠으나 그렇다고 아주 무기력한 사람도 아니다. 다만 어린 처자와 생활에 너무 쪼들리고 또 지금 형편에 직업을 붙든다는 수도 없으니, 이렇게 들어앉아서 썩으면서 딸이 벌어오는 것을 얻어먹는 판이다. 그러니만큼 딸자식만은 자기의 밟은 길을 밟히지 않고 그대로 평범히 길러서 시집가기 전까지는 아들 겸 앞에 두고 벌어먹다가 몇 해 후에 시집이나 잘 보내자는 작정이다. 그러나 그것도 제 소원대로 남과 같이 공부나 시켜서 하다못해 소학교 교원 노릇이나 유치원 보모 노릇이라도 시켰으면 좋겠건만 가운이 이렇게 기울고 보니 고등과 2년에서 그만두게 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당자는 지금이라도 공부라면 상성이다.
【원문】순진? 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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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상섭(廉想涉) [저자]
 
  193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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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