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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피묻은 입술 ◇
해설   목차 (총 : 42권)     이전 40권 다음
1932년
염상섭
1
삼대(三代)
2
40. 피묻은 입술
 
 
3
희미한 전등불이 으스름하게 내리비치는 쓸쓸한 긴 복도를 급한 발소리가 우르르 몰리며 수렁수렁한다.
 
4
문을 꼭꼭 닫고 괴괴하던 이 방 저 방에서 덜걱덜걱 문이 열리며 고개만 내밀고,
 
5
"왜 그러니?"
 
6
"무슨 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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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수면 부족으로 충혈된 눈들이 번쩍인다. 무슨 사건인 줄을 알자 누구나 '흥' 하고 놀라는 것도 아니요, 근심하는 기색도 아니다. 저마다 살기는 더 뻗치고 얼굴들로 모지라졌다. 매일 이맘때쯤이면 방방이 하나씩 데리고 앉아서 밤을 새워가며 취조를 하는 것이었다.
 
8
금천 부장은 허둥지둥 달려든 부하들의 보고를 듣고 나서 한 사람에게는 당자를 이리로 데려오라 명하고, 한 부하에게는 의사를 곧 부르라고 지시하였다.
 
9
밖에서는 각 취조실마다 그 앞에 순사를 하나씩 배치하여 출입하여 출입을 금한 뒤에 조금 있더니 검정 외투를 얼굴까지 뒤집어씌운 송장 같은 것을 5, 6명의 환도 없는 순사가 네 각을 뜨고 허리를 받치고 하여 가만가만히 모셔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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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은 구두를 벗고 슬리퍼를 신었기 때문에 발걸음 소리는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의식이 엄숙한 장례에 참렬한 것처럼 말이 없었다. 취조를 받고 있는 연루자들이 눈치챌까보아 절대 비밀을 지키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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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 주임실 앞에 지키고 섰던 순사가 문을 여니까 환한 불빛이 복도로 쫙 끼얹듯이 퍼져나오며, 네 각을 뜬 송장이 소리없이 불빛 속으로 꼬리를 감춘 뒤에 순사는 밖으로 문을 닫아주었다. 그러자 방문마다 지키던 순사들은 거동이 지나간 뒤처럼 우우 몰려서 저편으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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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 주임의 방 안이다. 흙 마룻바닥에 떼메어온 것을 내던지듯이 덜컥 내려놓으니까 이때까지 송장인 줄만 알았던 사람이 외투 자락 속에서 꿈질꿈질하며 숨이 턱에 닿는 신음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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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 부장이 앞으로 다가오자 부하가 덮었던 외투를 휙 벗겼다. 무거운 숨결과 함께 가슴이 벌렁벌렁할 뿐이요, 입에서는 피거품을 푸우푸우 내뿜는다. 금천의 무딘 눈에도 끔찍끔찍하고 의사가 오기 전에 곧 숨이 질까 보아 애가 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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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아니라 시꺼먼 선지 덩어리다. 코, 입, 눈... 할 것 없이 그대로 넉절을 한 선지 핏덩이다.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마치 그믐 밤중에 메주덩이를 손 가는 대로 뭉쳐 논 것 같다. 입이 어디가 붙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눈만 반짝하고 뜬다.
 
15
"이게 무슨 못생긴 짓인가? 큰 뜻을 품은 일대의 남아가 비겁하게도 이렇게 죽는단 말인가? 비소망어 평일이지--장군이 이렇게 비루할 줄은 몰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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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은 피투성이의 얼굴을 눈살을 찌푸리고 들여다보며 말을 하였다. 듣기에 따라서는 비웃는 어조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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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란 무사의 정신에 사는 것이다! 그리고 무사는 죽음을 깨끗이 잘하여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이왕 죽으려면 저 피스톨로(자기 책상 위에 놓인 피스톨을 가리킨다) 비장하고 남자다운 최후를 마친다면 오히려 장쾌하지나 않을까? 하여간 장훈이! 자네는 이젠 마지막 아닌가! 시운이 불리해서 뜻은 이루지 못하였을지언정 내 먹었던 큰 뜻은 세상에 알려놓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렇고, 내 뜻을 이을 동지를 얻기 위하여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꼭 세 마디만 들려 주게- 저 피스톨은 피혁이가 주고 간 것인가? 혹은 피스톨만은 다른 데서 나온 것인가? 또 피스톨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려 하였던 것인가? 너희들이 피혁이에게 받은 지령이 무엇이냐? 그 점만 말을 해주게. 이것은 그만이라고 무책임하게 그대로 내버려 두면 뒤에 살아 남은 사람은 고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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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은 몹시 심약해진 이 판에 무슨 말이든지 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답을 할 것 같으면 약을 먹고 혀를 깨물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훈의 입에서는 사흘 낮 사흘 밤을 두고 다만 모른다는 말 한마디 외에 다른 말이라곤 나온 것이 없었다. 이런 쇠 귀신 같은 놈은 경찰부 설치 이래 처음 본다고 혀를 내두르는 터이다. 그러느라니 장훈은 약을 안 먹기로 이 속에서 뼈를 추리기는 어차어피에 어려웠다. 자루 속에 뼈다귀를 넣은 것 같은 것이 장훈의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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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은 눈을 떴다 감았다 혼곤한 듯이 금천 형사의 말을 듣다가 육혈포란 말을 듣자 정신이 반짝 든 듯이 무서운 눈을 똑바로 뜨고 한참 노려보더니 입을 쫑긋하며 무엇을 훅 내뿜는다. 금천은 고개를 돌리며 나는 듯이 일어났으나 얼굴과 가슴에 유산탄을 받은 뜻이 핏방울 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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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섰던 부하가 눈자위를 곤두세우며 이놈아! 소리를 치고 발길로 허구리를 지르나 장훈은 눈도 안 떠보고 저어 깊은 통 속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신음 소리가 무겁게 들릴 뿐이었다.
 
21
더운 물을 떠 들여온다, 양복을 벗어서 빤다, 금천이 와이셔츠를 벗어 놓고 속셔츠 바람으로 세수를 한다 하며 한창 법석통에 의사가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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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좀 보아주슈.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놓아야 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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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이 수건질을 하며 의사를 동독시키는 품이 마치 숨만 걸린 자식을 애처로워하는 자부와 같다. 의사는 이런 경우를 하도 많이 보았는지라 유도군이 제 손으로 죽여놓고 제 손으로 소위 활을 넣어서 살리는 그런 종류의 사실이려니만 생각하고 우선 맥을 짚어보려다가 무엇인지 독약을 제 손으로 먹었다는 말에 다소 놀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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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무언데? 약은 어디서 났기에... 먹은 지가 오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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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좀 서두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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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 피도 독약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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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건 혀를 끊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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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컥컥 막히며 차마 들을 수 없이 신음하는 소리도 모른 척하고 갓 잡은 쇠머리나 뒹굴리듯이 피에 뒤발을 한 머리를 주무르면서 무지스럽게 입을 뻐기고 혀를 빼면서 만져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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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군데 몹시 찢어지기는 했어도 끊어지지는 않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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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혼잣소리를 한다. 병자는 소리조차 지를 기운이 없이 끙끙 앓는 소리만 잦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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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는 경애 모친의 친정 조카, 경애의 외사촌 오라비 놈에게서 잡았던 것이다. 피혁이 왔던 것, 피혁이 떠날 때 저희들 손으로 머리를 깎아준 것까지 알게 되자 경애와 병화가 주리를 틀리기 시작하여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으나 모든 것은 장훈에게로 몰아붙여버렸다. 경애는 위협이 무서워서 병화를 진권해주었으나 때마침 연애 관계가 시작되어 가는 판이었으므로 병화가 직접 관계하는 것이 무섭고 싫었고 병화도 전선에서 이제는 발을 빼려는 차이기 때문에 서로 의논하고 또 한 다리를 넘겨서 소개해준 것이 장훈이라고 주장하였다. 장훈의 부하에게 필순의 부친과 함께 둘이 몹시 얻어맞은 것도 장훈을 피혁에게 소개만 하여주고 저희들은 발을 쏙 빼어버린 것을 분개하는 동시에 비밀을 탄로시켜서 일에 방해가 될까 보아 미리 제독을 주느라고 그리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어쨌든 경애나 병화나 무어라고 꾸며대든지 조금도 외착이 날 염려는 없었다. 장훈은 병화를 혼을 낸 뒤에 새삼스럽게 긴밀해지기도 하였지마는,
 
32
"언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자네 편할 대로 대답을 해두게. 나는 어느 지경에를 가든지 벙어리가 되거나 정 급하며 이렇게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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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장훈은 자기의 모가지에 손가락으로 금을 그어 보인 일이 있었다. 병화와 경애 역시 미리부터 입을 모아도 두었지마는, 장훈을 절대로 믿게 되었던 것이다.
 
34
사실 장훈은 제 말대로 하고 말았다. 만주 방면에서 들어왔다가 나간 친구에게 실없이 얻어두었던 코카인, 그것이 장훈의 목숨을 빼앗으리라는 것은 자기도 생각지 못하였던 일이다. 그것이 어느덧 주머니 바대가 미어져서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안과 거죽 새로 떨어져서 옆구리의 도련께에 처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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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을 처음 유치장에 넣을 제, 당번 순사는 물론 주머니 세간을 모조리 빼앗지마는, 이것만은 손에 만져질 리가 없었다. 당자 역시 잊어버렸다. 그러나 사흘 낮 사흘 밤을 두고 죽을 곤경을 치르고 나니까 졸립다는 것보다도, 아프다는 것보다도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평상시에 먹었던 마음, 병화에게 일러둔 말이 머리에 떠올라오면서 누가 일러준 듯이 생각나는 것은 언젠가 얻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심심하면 꺼내어 친구들에게 보이고 냄새를 맡고 하던 코카인이다. 그러나 어쨌는가 생각이 아니 났다.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으나 또 생각나는 것은 조끼도련께 무엇인지 종이 부스러기 같은 것이 들어가서 손 끝에 만져지던 기억이다. 호주머니 속이 열파를 하여서 연필 끄트머리나 동전푼을 넣으면 새어들어가기 때문에 그것도 아마 코 풀려고 가지고 다니던 원고지 부스러기려니 하고 신지무의 해버렸던, 그것이 생각났다. 만져 보니 여전히 손에 만져졌다. 탈옥수가 쇠꼬챙이나 얻은 듯싶게 반가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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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은 입은 채 조끼 안을 쭉 찢었다. 미어지도록 닳아빠진 헝겊 조각에 손을 대기가 무섭게 발발 나갔다. 손에는 종이 봉지가 묻어 나왔다. 그러나 이것을 들고 보니 꺼내기 전에 반기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용기가 줄었다. 절망과 공포가 아찔하고 눈앞을 스쳐 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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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죽어? 그러나 그 뒤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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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하다가 못생긴 생각도 한다고 혼자 나무랐다. 쓸데있는 당면한 일은 생각이 안 나고 쓸데없는 죽은 뒤의 일은 무엇하자고 생각하는가 하고 혼자 화를 버럭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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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지금 죽기로 비겁하다고 치소를 받을 리는 없는 일이다고 또 다시 생각하였다.
 
40
- 당장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죽은 것은 아니다. 몇십 명의 동지를 대신해서 죽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들 개인이나 그들의 가족을 고통과 불행에서 건져주려는 그 따위 희생적 정신이란 것은 미안하나마 내게 없다. 나는 다만 조그만 시험관 하나를 죽음으로 지킬 따름이나 그 몇몇 우수한 과학적 두뇌를 가진 동지들이 머리를 싸매고 모여 앉아서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다. 이 연구와 시험도 미구 불원에 성공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죽음으로 지켜주는 것이 지금 와서는 나의 맡은 책임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내 죽음은 갑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험과의 결과를 못 보는 것만은 천추의 유한이다. 하지만 그 역시 내 눈으로 보자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벌써 각오하였던 것이 아닌가...
 
41
장훈은 저녁밥을 먹고 나서 물을 마실 때 위산이나 먹듯이 입에 코카인을 들어뜨려 버렸다. 머릿속이 흐려진 장훈은 이 모든 행동을 기계적으로 하였던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서 초월하여 약은 창자에서 도는 증세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혀를 깨문 것은 계획하던 바도 아니요, 자기도 의식 있어 한 노릇이 아니었다.
 
42
이 날 새벽에 장훈은 27세의 일생을 마치었다.
【원문】피묻은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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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