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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애련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23권  24권  25권  26권  27권  28권  29권  30권  31권  32권  33권  34권  35권  36권 37권  38권  39권  40권  41권  42권  염상섭

1. 애련

1
덕기는 이만하면 한시름 잊게 되었으니 이번 초하루 삭망이나 지내고 나서 경도로 떠날 작정을 하였다. 시험 준비도 충분치 못하고 어쩌면 추후 시험을 보게 될지 모르나 왕복 두 달 예정만 하면 졸업장을 맡아가지고 와서 경성제대의 본과에 들어가리라는 예정이다. 그러나 2월 초하루 삭망도 지내고 막 떠나려는데, 신열이 나고 감기 기운이다. 쓰고 누울 지경은 아니니까, 하루 연기하지 하고 지 주사가 몇 해 동안 약시중하던 솜씨로 집 안에서 지어주는 약 두 첩을 써보았으나 좀처럼 열은 내리지 않는다, 겨우내 유행하던 독감이 왔나? 하고 병원에를 가보니 그런 증세라 한다. 게다가 초상을 치르고 병화 일로 해서 연일 밤늦게 돌아다니고 무어니 무어니 집안 정리에 푹 지쳐서 몸살이 난 모양이다. 오한이 심한 저녁때 안방에 들어와 누워버린 것이 이틀 사흘 이내 일어나지 못한 것이 벌써 대엿새 되고 말았다.
 
2
병화가 3, 4일 두고 무심히 지내다가 전화를 걸어보고 뛰어와 본 것은 한창 열이 띄어서 신고할 때였다. 그렇게 열에 띄었으면서도,
 
3
"그래 장사는 잘되나? 이젠 형사는 쫓아다니지 않나? 필순양의 어른은 경과가 좋은 모양인가?..."
 
4
하고 연거푸 묻는 것이었다.
 
5
병화가 돌아와서 필순더러 덕기가 부친의 병 위문을 하더란 말을 하니까, 필순은 좋아하면서,
 
6
"에그 어쩌나? 그렇게 신세를 지구 난 가뵙지도 못하구..."
 
7
하며 애를 쓰는 것을 보고 병화는 그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못 가볼 것이 뭐냐?고 한다든지 가보라고 권하지는 않았다. 병화와 원삼이 아침저녁으로 돌려가며 문안을 다니는 것을 보고도 필순은 혼자 속으로 애절을 할 뿐이요 가겠다는 말을 냅뜰 용기가 아니 났다.
 
8
모친도,
 
9
"저를 어쩌나? 인사두 못 가구..."
 
10
하고 애를 쓸 뿐이다. 저편이 하도 부자라니 정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나 감히 엄두를 못 내는 것이다. 그러나 병화가 한 사날 후에 위문을 갔다 오더니,
 
11
"필순이, 과일이나 한 광주리 싸가지고 좀 가보지?"
 
12
하고 똥겨준다.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필순은 반색을 하면서도 그래도 망설이었다. 첫째 무엇을 입고 가나? 병원 같으면 몰라도 그 크나큰 집에를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부끄러운 것보다 겁이 났다. 그러나 병화는,
 
13
"무얼 그래? 그 집도 사람 사는 집인데... 어서 갔다 와요. 좀 보내 달라기에 보내마 하고 왔는데."
 
14
하며 귤이며 사과, 배를 과일 광주리에 주섬주섬 넣는 것이었다.
 
15
"과일을 좀 보내달라세요?"
 
16
필순은 귀가 반짝 띄며 채쳐 묻는다.
 
17
"응"
 
18
"그럼 원삼씨 들어오건 갖다두고 오라죠."
 
19
필순은 자기를 보내라는 것이 아니라 과일을 보내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눈치에 실망한 것이다.
 
20
"아무나 가져가면 어떨꾸. 아주 그 김에 인사라두 때구 오면 좋지 않아?"
 
21
실상은 덕기가 필순을 좀 만났으면 하는 눈치기에 가라고 한 것이나 그댓말을 당자에게 하기는 싫었다. 필순이 덕기를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공연히 어린 마음을 더 뒤숭숭하게 덧들여놓을까 무서운 것이요,. 또 혹은 덕기로서 생각하면 저희에게 하노라고는 하였는데 어쩌면 한 번도 아니 들여다보나? 하는 고까운 생각으로, 연해 필순이편 사정을 묻는 것인지도 몰라서 이러니저러니 말할 것 없이 어쨌든지 과일이나 가지고 가보라는 것이다.
 
22
"괜히 옷걱정을 하는 게지? 부잣집이기루 수단치마를 입어야 가나? 반찬 장수가 그런 걸 떨치구 나서면 되레 흉봐요."
 
23
필순은 아픈 데를 꼭 집어낸 것에 부끄러우면서도 힘을 얻었다. 사실 아무렇게나 입고라도 인사를 가야 옳겠다고, 부끄러우니 뭐니 교계치 않고 나섰다.
 
24
그러나 일러주는 대로 전차를 구리개 네거리에서 내려서 수하정으로 찾아들어가 솟을대문 문전에 다다르니 고개가 옴츠러지는 듯싶고 가슴이 설렁하여 공연히 혼자 쭈뼛쭈뼛할 수밖에 없었다. 무어라고 부를 수도 없고 불쑥 들어갈 수도 없어 한참 망설이고 섰으려니까, 어멈이 행주치마 밑에 밥그릇인지 무언지 불룩히 집어넣고 나오다가 물끄러미 쳐다보며,
 
25
"왜 그러우?"
 
26
하고 말을 건다. 그대로 갈 수도 없고 망단한 판에 살아난 듯싶다.
 
27
"저어, 산해진서- 효자동서 과일을 가져왔는데요."
 
28
필순은 아는 남자의 병 위문을 온 것이 아니라, 병화의 심부름으로 왔거니 하는 생각을 하니 의외로 말이 당돌히 나왔다.
 
29
"들여다두슈."
 
30
어멈은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는 눈치다. 그러나 어멈을 놓쳤다간 큰일이다.
 
31
"어렵지마는 이것 좀 들여다주세요."
 
32
방문을 열고 춘데 어서 들어가려는 어멈을 매달리듯이 붙들었다. 어멈은 필순을 한참 위아래로 훑어보고 나서,
 
33
"배달해온 거란 말요?"
 
34
하고 다지며 광주리를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배달부냐? 친구로서 위문품을 가져온 거냐? 하는 말눈치다. 아무렇거나 필순은 그대로 두고만 가더라도 자기가 위문을 다녀간 줄은 알 것이니 그것이 도리어 다행하다고 약은꾀가 난 것이다. 필순은 어멈이 들어간 뒤에 안에서 무어라나 덕기의 말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누가 뒤에서 붙드는 거나 같이 줄달음을 쳐서 나왔다.
 
35
금단추의 학생복을 아무렇게나 입고 좁아터진 점방에 와서 귀떨어진 소반에 설렁탕 뚝배기를 놓고 먹던 그 덕기가 저런 고래등 같은 집의 주인이라는 것은 정말 같지 않다. 덕기는 좋아도 솟을대문이 싫었다. 솟을 대문이 정을 떼어놓는 듯싶다. 돈 없는 덕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36
그러나 그런 팔자 좋은 부잣집 서방님이 무엇하자고 병화와 어울려 다니고 자기 같은 사람과도 사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돈 있는 덕기이기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세상 사람의 상정일 텐데, 돈 없는 덕기였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자기가 이상한 건 조금도 생각지 않고 이 처녀는 돈 있는 청년 같지 않게 소탈한 덕기를 더 이상히 생각하는 것이었다.
 
37
"여보 학생! 여보 나 좀 봐!"
 
38
그렇지 않아도 누가 뒤에서 부르는 것만 같아서 뒤를 돌려다보고 싶은 유혹과는 딴판으로 횡허케 골목을 빠져나오려니까 뒤에서 아까 그 행랑어멈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부른다.
 
39
필순은 반가운 생각이 들며 돌쳐섰다.
 
40
"여보 학생 귀먹었소? 걸음은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빠르단 말요?"
 
41
학생 아씨라고 부르기도 싫어하거니와 그런 존대를 받아본 필순도 아니지마는, 필순의 차림차림으로 넘본 어멈은 걸음 빠른 것까지 홀닦아세우며,
 
42
"서방님이 들어오라신다."
 
43
하고 핀잔 주듯이 전갈을 한다.
 
44
"뭐, 난 바루 갈 테예요. 할 말씀두 없구."
 
45
필순은 부르는 덕기 생각을 하고 저절로 얼굴이 상기가 되는 것을 깨달았다.
 
46
"안 돼요. 할말이 있거나 없거나 그야 뉘 알겠소마는 어서 들어와요. 남 야단 만나지 않게끔."
 
47
이번에는 핀잔을 주는 게 아니라 빈정대는 말눈치를 못 알아들을 필순도 아니지마는 그것이 귀에 거슬리기보다도 들어갈지 말지 망단해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잠깐 섰으려니까, 남 추워 죽겠는데 무슨 생각을 하구 섰는 거요? 누가 서방님 앞에 올라가서 끓어앉었으라니 부끄러워 못 들어간단 말요? 창문 밖에서 분부만 듣고 나오면 그만 아닌가."
 
48
필순은 잠자코 따라섰다. 병 위문 왔다가 부르기까지 하는데 그대로 간다는 것은 얼뜬 일이요,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부끄러운 말이니마는 세상밖에 나온 뒤에 잘사는 집이라곤 가본 일이 없으니 구경이 하고 싶다는 호기심이 한구석에 있기도 하였다.
 
49
드높은 축대 위를 어느 편으로 올라가야 좋을지 발이 허청 놓였다. 그래도 사람이 북적댈 줄만 알았더니, 이 큰 집 속이 절간같이 조용하고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은 다행하였다.
 
50
"이리 들어오슈."
 
51
축대 위에서 건넌방 편으로 향하려니까 의의로 안방 유리창에서 덕기 내다본다. 얼떨결에 마루로 올라섰으나 고무신짝을 내동댕이나 치지 않았는지 방에 들어가서도 애가 씌었다.
 
52
"밖이 차죠? 어서 앉으슈."
 
53
덕기는 반색을 하며 웃어 보인다.
 
54
"좀 어떠세요?"
 
55
문 밑에 쪼그리고 앉으며 간신히 한마디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언 귀가 녹느라고 그렇겠지마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필순은 속으로 또 걱정이다.
 
56
"그건 뭘, 추운데 들구 오시느라구..."
 
57
윗목에 놓인 광주리를 건너다보며 인사를 하는 것을 들으니, 필순은 병화가 보내는 심부름으로 온 것만으로 생각하였는데 의외로 생색이 나서 좋았다.
 
58
"그래 아버지께선 그만하시다죠?"
 
59
"예에."
 
60
모본단 이불을 밀쳐놓고 명주옷에 푸근히 묻혀앉아서 점잖이 수작을 하는 이 청년의 앞에 앉았기가 점점 괴로워지고 아까 행랑 사람의 말버릇을 생각하면 그 주인에게 깍듯한 경대가 받기가 황송한 생각까지 든다.
 
61
"시탕 하랴, 점방 보랴, 날은 춘데 참 어려우시겠군요."
 
62
"뭐 요새는 경애씨 하고 원삼씨가 보아주기 때문에 난 거진 병원에서 해를 보내니까요."
 
63
필순은 그 덕에 한창 보기 흉하게 터졌던 손등도 보야진 것을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살짝 감추려 한다.
 
64
"경애씨도 일을 좀 보나요?"
 
65
"예. 요새는 아침에 출근하듯 와서 온종일 매달려 계시죠."
 
66
"허어, 맘 잡았군!"
 
67
하고 덕기가 웃으니까,
 
68
"왜 언젠 달떴던가요? 요새는 살림에 찌든 아씨처럼 행주치마에 게다 짝을 끌구 종일 섰답니다."
 
69
하고 생긋 웃는다. 촘촘한 하얀 이빨을 살짝 보이며 고개를 잠깐 움츠러뜨리다 마는 양이 어린 처녀다워 보였다. 이런 환한 방에 놓고 보니 그 흰 살갗이 도리어 푸르러 보일 지경이요, 야윈 얼굴은 영양이 부족한 탓이겠지마는 도리어 병 후에 소복되어가는 미인에게서 보듯이 청조하고 나릿한 미태가 은연히 떠도는 듯싶다.
 
70
"그만 가겠에요."
 
71
말이 뜸한 틈을 타서 필순이 일어서려 한다.
 
72
"가만히 계슈. 좀 할말두 있구, 병원 가시겠군요? 아주 예서 점심 자시구 가시구려."
 
73
덕기는 친숙한 친구의 누이처럼 흉허물없이 구는 태도다.
 
74
"아녜요. 어머니께서 기다리시니까, 어서 가봐야 해요."
 
75
하고 필순이 일어서는 것을 모른 척하고 건넌방에다 대고 아내를 부른다. 필순은 마루를 건너오는 사람과 마주 나가는 수도 없고 그대로 섰다.
 
76
"몸도 채 못 녹이구 왜 이렇게 가슈?"
 
77
덕기댁은 안방에 들어서며 웃는 낯으로 필순을 치어다본다. 필순은 고개를 꼬박하여 보였다. 부푸하고 수더분한 색시라고는 생각하였으나 부잣집 며느리라고 어디가 다른지는 모르겠다.
 
78
"앉으시우."
 
79
필순은 하는 수 없이 대접성으로 다시 앉는 수밖에 없었다.
 
80
주인 아씨의 눈에 비친 필순은 상냥하고 얌전한 처녀이었다. 활짝 피지는 못하였으나 조촐하고 예쁘장한 색시였다. 옷 입은 것은 볼 것 없어도 어깨통이 꼭 집은 듯하고 몸매가 나는 것도 우둥퉁한 자기로서는 부러웠다. 그러나 남편이 밖에 나가면 이런 여자들하고 교제를 하거니 하는 생각을 하면 역시 덜 좋았다.
 
81
효자동 산해진에서 왔다니 누군지는 짐작하겠으나 그런 반찬 가게에 나서서 일하는 여자 같지도 않아 보인다. 그러나 반찬 장사치의 딸 같든 안 같든 병화라든가 하는 주인이 날마다 다녀가는데, 이 계집애가 왜 따로이 왔을꾸? 조금 의심이 든다. 김병화의 아내도 아니요, 이 여자가 벌써 바람이 들었나? 하고 다시 쳐다보았다.
 
82
남편은 이 색시가 가져온 귤을 먹고 싶다면서,
 
83
"무어 점심을 좀..."
 
84
하고 눈짓을 한다.
 
85
"추우니 뜨뜻한 장국을 해오구려."
 
86
하고 다시 이른다. 과자나 차 같은 것을 가져올까보아 똥기는 것이다. 이 집 규모에(덕기대에는 차차 어떻게 될지 모르지마는)손님 대접이란 밥이요 정초가 되면 떡국인데 그것도 여간 사람이 아니면 내지를 않는 것이다. 다만 덕기 손님에게만은 과자와 차를 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에도 안팎에 오는 손님이 십여 명씩 되는데 일일일 어쩌는 수 없겠지마는 조부의 치부도 그 규모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손님에게는 뜨뜻한 장국을 차려오라는 분부다. 극상등 손님 대접을 하라는 말이다.
 
87
아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가는 것을 보고 필순은 일어섰다. 이런 대가에 와 본 일도 처음이라 내심으로 쭈뼛거리는 판에 음식 대접을 한다니 대접이 아니라 죽을 고역을 치르라는 말이다. 더구나 병 위문 와서 대접받고 앉았을 수는 없다. 어서 내보내 주었으면 시원할 것만 같다. 올 때는 그립고 다정한 마음으로 왔으나, 맞대하고 보니 이 집 밖에서 보던 덕기와 이 집 안에서 보는 덕기가 딴사람같이 멀어진 것을 깨달았다. 덕기가 반겨하고 다정히 구는 것은 조금도 변함이 없건마는 어째 그런지 사이에 무엇이 한 겹 가로막힌 것 같고, 여기 올 때까지 공상으로 그리던 감정이 솟아나오지를 않아서 혼자 실망하는 것이다.
 
88
"왜 또 일어나슈? 좀 있으면 내 누이도 학교에서 올 것이요, 또 이야기할 것도 있어서 잠깐 다녀가시라고 김군더러 부탁을 한 것인데..."
 
89
덕기가 부탁을 해서 오라고 하였다니 기쁘기도 하고 뿌리치고 나설 수도 없다.
 
90
그러나 무슨 이야긴지 좀체 말을 꺼내지도 않는다.
 
91
"아버지께서 전에 장사하셨나요?"
 
92
"아뇨 학교 교사 다니셨에요."
 
93
"헤에, 그 왜 그만두셨나요?"
 
94
"만세 때 그만두신 뒤로는 내리 노시죠."
 
95
이런 이야기 하자고 부른 것은 아니겠지마는, 상이 들어올 동안 심심하지 않게 하려는 수작이다.
 
96
"그래 만세 때 여러 해 고생하신 게군요?"
 
97
"그 때는 일년 반쯤이었대요. 그 후에 4년 하셨답니다."
 
98
"허어, 그때는 어디서 사셨기에요?"
 
99
사람의 내력을 듣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마는 덕기는 그 부친의 내역에 더 흥미를 느꼈다.
 
100
"영성문 안 살었죠. 영성문학교 바루 옆집에서 살았에요. 2학년에 올라갈 때 그 풍파가 났답니다."
 
101
필순은 이야기에 팔려서 어느덧 아까 같은 사렴하고 쭈뼛거리는 마음도 스러졌다.
 
102
"그럼 그땐 아홉 살쯤 되셨겠군요?"
 
103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나, 덕기 생각에는 이 여자의 아홉 살 때라면 퍽 먼 날의 한창 귀여운 시절의 일 같다.
 
104
"어렸을 때 일이니까 어렴풋하지마는, 우리 어머니께서두 그때는 우리 아버님같이 단단하셨죠."
 
105
하고 필순은 열렬이란 말이 아니 나와서 단단하였다고 한 것이 우스웠던지 생긋 웃는다.
 
106
덕기도 거기에 끌려 웃었다.
 
107
"어쨌든 우리집은 그때부터 거덜이 났죠. 어머니께서는 영성문학교에 다니셨지마는, 생각하면 어머니께서두 고생 많이 하셨어요."
 
108
필순은 영성문 앞 집에서부터 산해진에 이르기까지 근 10년간 고초가 한꺼번에 머리에 떠오르는지 그 가냘픈 얼굴을 바르르 떠는 듯싶다. 덕기는 이 소녀의 혈관에도 혁명가의 피가 흐르는가 싶어 무심코 눈을 내리깔았다.
 
109
"그러시겠죠."
 
110
남편은 감옥살이나 하고 아내는 학교에서 떨려나고 하면 집 팔아먹고 자식까지 공장에 내세워 벌어먹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처지야 한두 사람이 아니겠지마는, 그동안 자기 집안은 무엇을 했던구? 적어도 부친과 자기는 어떻게 살았던구? 하는 생각이 든다.
 
111
"그래두 어머니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신 데가 없지요. 거기 비하면 아버지께서는 퍽 변하신 셈이죠. 그렇다구 해서 아버니가 김 선생(병화)과 꼭 의사가 일치하는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마는..."
 
112
"헝, 좌우익에 부친은 중간적 존재시군? 그래 당신은 어느 편이신가요?"
 
113
"나두 이편 저편 다 들지요."
 
114
하고 필순은 생긋 웃는다.
 
115
"팔방미인이란 말이죠? 기회주의자시군!"
 
116
하고 덕기도 웃다가,
 
117
"그래두 한집 속에서 충돌이 없이 구순히 지내시는 게 용하외다."
 
118
하고 감탄한다.
 
119
"허기야 일치점은 있거든요. 구차하니 서로 동정하는 것이죠. 피차에 배를 졸라 매구 앉았으니 의견이 틀린다고 말다툼할 기운두 없어 서루 사폐를 알아주는 건가봐요. 그런 점은 가정적이나 사회적이나 일반일 거예요..."
 
120
덕기는 필순의 예사롭게 하는 이 말에 확실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121
"사실이죠. 사회운동이나 민족운동이나 확실히 그 점에 가서는 일치점이 있지요."
 
122
"하기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김 선생 하시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구 뒷구멍으론 잔소리를 하시다가두, 급한 일이 생기면 도리어 어머니께서 앞장을 서서 서두르시구 무어나 군소리 없이 시중을 들어 주신답니다."
 
123
필순은 피혁 때만 해도 아무 소리 없이 병화가 시키는 대로 정성껏 옷 시중을 들어 주던 것을 생각하며 이런 소리를 한다.
 
124
"그렇겠죠!"
 
125
덕기가 대꾸를 하여주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126
"아마 선생님께서두 병화씨에게 하시던 걸 가만히 보면, 집의 어머니 같으신 데가 있는가봐요."
 
127
"잘 보셨습니다."
 
128
하고 서로 웃어버렸다. 덕기는 영리한 계집애라고 속으로 탄복하는 것이었다.
 
129
음식상이 들어왔다. 필순은 어려서 혼인집이나 환갑집에 가서나 받아 보던 듯한 편육이니 누름적이니 마른 과일이니 하는 접시가 늘비한 상이 들어오는 것은 고사하고 상을 들여오는 사람이 날마다 만나는 원삼댁인 데에 깜짝 놀라 반기었다.
 
130
"아가씨 오신 걸 알구 부리나케 쫓아왔죠. 어서 많이 잡수슈."
 
131
원삼의 처도 제 식구나 거두어먹이려는 듯이 인사를 하고 긴 소리 않구 물러나간다.
 
132
원삼의 처는, 이 집 행랑것이, 이사간 수원집의 행랑이 나는 대로 떠나가면, 그 뒤에 대신 와서 살 작정으로 낮에만 와서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이다. 셋방살이를 나서, 몸도 편하고 남에게 어엿한 대접을 받는 것은 좋기는 하나, 남편이 산해진에서 버는 잣단 돈냥으로는 살 수도 없거니와, 이런 크나큰 댁을 버리고 외톨로 나가 살기가 싫다는 것이다. 마님 아씨와 정도 들었지마는 제 살이로는 아무래도 굶어죽을 것만 같아서 안심이 안 되고, 이렇게 풍성풍성히 먹고 입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덕기는 원삼 내외의 이 말을 듣고 해방된 흑노라고 속으로 웃었으나 웃고만 넘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133
필순은 상을 받고 앉아서 얼떨떨하였다. 작년 가을에 덕기를 처음 만난 것이 서대문 밖 '소바' 집이었고 일전에 설렁탕도 한상에서는 먹지 않았지마는 함께 시켜다 먹었다. 그러나 처음 오는 시스러운 집의 남자 앞에서 대접을 받기란 그야말로 공경이 체중이었다.
 
134
"선생님, 왜 안 잡수세요?"
 
135
"난 입맛이 써서... 귤이나 먹죠. 어서 식기 전에 드슈."
 
136
덕기가 귤을 까는 바람에 반병두리 뚜껑을 여니 떡국이다.
 
137
-뭘, 만나던 첫 번에도 변도갑을 무릎 위에 놓고 국수를 쭈룩쭈룩 얻어먹었는데!
 
138
하는 생각을 하며 거기에 기운을 저를 들었다. 그러나 병원에 있는 어머니, 아버지 생각에 목에 걸릴 것 같다. 보는 사람만 없으면 상에 놓인 것을 그대로 싸 가지고 가고 싶다.
 
139
막 두어 술 넣으려니까, 주인댁이 아이를 안고 들어와 앉는다. 인사성으로 대객 삼아 들어온 것은 고마우나 또 주눅이 들어 얼굴이 다시 취해 올랐다.
 
140
"맛은 없어두 많이 자슈."
 
141
국수 외에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 것을 보고 덕기댁은 권하더니 아이를 떼어 놓고 나가서 자기도 떡국 한 대접을 들고 들어오며,
 
142
"나하고 잡숩시다."
 
143
하며 마주 앉는다. 덕기는 속으로 잘되었다 하고 빙긋 웃는다. 아내의 그런 너름새가 마음에 들었다.
 
144
"설에 친 떡이라, 마른 게 잘 붇지를 못했군."
 
145
하고 혼잣소리를 하며 편육을 집어 떡국 그릇에 넣어준다. 지금 부엌에서 원삼 처가 필순을 칭찬하는 바람에 아까보다는 호의를 갖게 된 것이다.
 
146
필순은 이제야 마음이 풀리며, 이것저것 집어먹어보았다. 편육도 일년에 몇 번 술안주 설 제 도마머리에서 한두 점 얻어먹던 그 맛이 새롭거니와, 근년에는 설에도 구경 못하던 전유어 맛이란 잊었다가 새로 찾은 듯싶다. 도대체 겨우내 주리던 통김치를 보니, 그것만 가지고도 밥 한 그릇은 먹겠는데, 그 싱싱한 맛이라니 한세상 나서 잘살고 볼 거라고 어린 마음에 자탄을 하는 것이었다.
 
147
상을 물려서 주인댁이 들고 나가서, 덕기는 과일을 권하면서 다락문을 열고 돌아서서 무엇을 흠척흠척한다. 필순은 병인 갖다주라고 먹을 것을 싸주려나? 하며 고맙기도 하나 들고 나가기가 부끄러운 걱정부터 하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았다가 덕기가 돌아앉기를 기다려서,
 
148
"그럼 이젠 가보겠어요. 괜히 와서 여러 가지로 미안합니다."
 
149
하고 절을 꼬박 하려니까,
 
150
"그럼 어서 가보슈. 이건 아버니 갖다드려요."
 
151
하고 어느 틈에 넣었던지 요 밑에서 봉투를 꺼내놓는다.
 
152
"그건 무엇입니까?"
 
153
무엇인 것을 짐작하는 필순은 얼굴이 또 홧홧하여졌다.
 
154
"떠나기 전에 한번 가뵙자던 게 그만 눕게 되어서... 이때껏 무어 위문도 못 해 드리구 하였기에 마침 오신 길에..."
 
155
"그만 두세요."
 
156
"무어 피차 뻔히 아는 처지에... 날마다 용에도 어려우실 거요..."
 
157
입원료는 상점에서 그럭저력 뜯어내나 쩔쩔맨다는 말을 병화에게 듣고 병화 편에 전해달라려다가, 어차피 한번 가보고 내놓는 것이 대접일 것 같아서 그대로 둔 것인데, 필순이 과실을 가지고 온 것을 보니 그대로 보내기가 안 되어 내놓는 것이다.
 
158
필순이 일어서려니까,
 
159
"또 언제 오시려우? 내일 모렛새라도 틈 있거든 놀러 오시구려. 실상 한다는 이야기도 못하고 말았지마는, 이렇게 누웠으려니까 갑갑하고 심심해서..."
 
160
하고 서운해하는 기색이다. 필순은 남자의 다정하고도 애소하는 듯한 이런 소리를 듣고 심약해진 병자를 동정하는 마음보다도 이 남자가 무심중에 뒤로 바싹 끼어안아나 주는 듯한 무서운 마음과 기쁜 생각에 또다시 얼굴이 불그레 상기가 되면서 그 말을 누가 들었을까 보아 애가 씌었다.
 
161
"예, 봐서요."
 
162
이렇게 얼버무려뜨리면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병원과 달라서 이런 데는 자주 올 수 없지 않느냐고 방패막이를 미리 해두었다면 좋았다고 생각하였다.
 
163
-하지만 또 오긴 미쳤나!
 
164
필순은 한옆에서 날마다라도 올 수 있으면- 하고 발버둥질하는 마음을 나무라듯이 혼잣소리를 하였다. 덕기가 자기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친절한지 그것이 못 믿을 일이다.
 
165
-그런 남부럽지 않은 아내에 자식이 있는데 무에 심심하구 갑갑할꾸?
 
166
하며, 그 말에 솔깃하여진 자기 마음을 어리석다고 스스로 코웃음을 쳐보았다. 언제라도 덕기가 총각이거나 독신 생활을 하는 남자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나, 처자를 갖추고 호강스럽게 사는 양을 보기 전과, 본 뒤가 마음이 여간 달라진 것이 아니다. 남자의 다정한 말과 고맙게 구는 태도에 빠질 듯하던 마음이, 그 아내, 그 자식, 그 호화로운 살림을 생각하곤, 자기 따위는 교제도 그만두어버려야 할 것이라고 낙망에 가까운 단념이 드는 것이다. 아까 그 집 안방에 들어가면서부터 전일에 병원에서나 산해진에서 보던 덕기와는 딴판 같고, 두 사람 사이에 무에 막힌 것같이 제풀에 설면해지던 것도, 이러한 실망과 자곡지심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덕기의 그 친절이란 것도 요새 돈푼 있는 집 자식들의 비열한 취미나, 심심파적으로 하는 농락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잘못하면 자기도 홍경애 짝이나 되면 어쩌려는구?...
 
167
약고 고생에 찌들려서 일 된 아이가 공장 생활 몇 해에 물은 안 들었어도 보고 들은 것은 있는지라 그만한 깜냥도 들었고, 앞뒤를 잴 줄을 알았다.
 
168
'어머니, 지금 조 선생 댁에 갔다오는 길인데요..."
 
169
병원으로 온 필순은 어른 몰래 무슨 대담한 짓이나 저지르고 온 듯이 웃으며, 모친의 기색을 살핀다.
 
170
"어, 어떻게? 잘되기 했지마는..." 인사는 치러야 하겠지마는, 나이 찬 계집년이 낯 서투른 집 남자를 찾아서 그런 데 한만히 다니는 것이 좋을 것은 없어 하였다.
 
171
"김 선생님이 과실을 좀 가져다두라셔서 문간으로 다녀만 오렸더니 자꾸 들어오라겠죠."
 
172
"간 바에야 들어가 뵈야지."
 
173
모친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과실을 보내자면야 원삼이 편엔들 못 보내서-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174
"그런데 이걸 주시던데..."
 
175
하고 봉투를 꺼내놓으니까,
 
176
"그건 또 왜?" 하고 받아 뜯어본다.
 
177
-100원 템이!
 
178
필순의 모친은 반가우며 애가 쓰이며 이상한 표정이다. 돈 100원이라면 필순이 직공 시절에도 석 달은 죽을 고생을 해야 받아오는 것이었다. 과실을 가져갔으니까 대거리로 보내는 것이요, 있는 사람은 100원쯤 대수롭지 않을지 모르지마는 고마우면서도 마음에 꺼림하지 않을 수 없다. 덕기란 사람이 원체 뉘게나 다정하고 마음이 고와서 불쌍하게 보고 그러는 것이겠지마는 남의 신세를 이렇게 지고 어쩌나 하는 것이 어렴풋이 드는 것이었다.
 
179
"뭐요?"
 
180
부친도 멀거니 바라보다다 묻는다. 덕기가 보냈다니까,
 
181
"음..."
 
182
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한숨을 쉰다. 부모가 그렇게 반색하지 않는 기미를 보니 필순은 그 집에서 점심 대접까지 받고 왔다는 말은 이야기 삼아 하고 싶어도 차마 못하였다.
 
183
이 때껏 무모에게 털끝만한 일이기로 숨기는 것이 없고, 못할 말이 없었건마는, 떡국 대접받고 또 놀러 오라더라는 말쯤 무엇 때문에 냅뜨지를 못하고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게 비밀을 가지게 되었는지,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자기 마음을 알 수가 없다.
 
184
"그런 줄 몰랐더니 필순 아줌마 숫기두 좋더군. 처음 간 집의 안방에 들어앉아서 떡국 한 대접을 넓죽넓죽 다 잡수시구."
 
185
이튿날 낮엔가 손님이 뜸해서 난로를 끼고 경애와 단둘이만 앉았자니까, 이런 소리를 불쑥 꺼내며 놀린다. 경애는 딸을 새에 두고 필순을 아줌마라고 부른다.
 
186
"그럼 할 수 있나! 먹으래긴 하구, 먹구는 싶구, 형님 같으면 그런 때 어떻게 했겠소?"
 
187
필순은 쓴웃음을 머금어 보인다.
 
188
"내야 배고프면 내라고 해서두 먹겠지만."
 
189
"난 그만 숫기가 없기에? 덕기씨를 첨 만나는 길루 우동집에 들어가서 쭈룩쭈룩 먹어낸 것 어쩌구? 하하하."
 
190
"이제 알았더니 필순 아줌마두 버렸군, 버렸어."
 
191
경애는 일부러 혀를 끌끌 찬다.
 
192
"아, 담배 직공 3년에 버려두 이만저만 버렸게!"
 
193
필순도 장난의 소리지마는 이렇게 퐁퐁 말대꾸를 하는 것은 처음 듣는 것이다. 필순은 별로 비밀 될 것은 아니나, 어머니에게도 숨겨버린 것을 원삼의 처의 입에서 나왔겠지마는 경애가 놀리는 것은 유쾌할 것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필순은 요새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뉘게나 대들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늘어가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날마다 잠자리가 편치 못해서 늘 잠이 부족하지마는 이제는 쓸데없는 공상으로 눈을 붙인 것이 몇 시간 되지도 않았었다.
 
194
"아직 일러요, 남자 교제를 하려거든, 내 이제 좋은 신랑감 하나 골라서 바칠 테니, 그때 가서 국수를 한턱 잘 먹이라구."
 
195
"그건 또 무슨 밑두 끝두 없는 소리를 하시는 거요? 일구 늦구, 누가 남자 교제를 하구 싶대게!"
 
196
경애의 말이 악의 없는 한때 실없는 말인 줄을 알면서도, 덕기와의 왕래를 그야말로 '남자 교제'라고 밀어붙이는 것이 듣기 싫었다.
 
197
"그야 내 다 잘 알아요. 하지만 한 살이라두 더 먹은 내 말을 잘 들어두란 말예요. 이 꼴이 된 내 처지를 잘 보아두란 말예요."
 
198
경애의 말은 어느덧 동생을 타이르는 형의 말씨같이 정다우면서도 심줄이 들어 있었다.
 
199
"누가 뭐 어쨌나요? 어제두 선생님이 과일을 가져다두라시니까 갔던 것이지."
 
200
필순은 얼굴이 발개지면서 변명이 급하였다.
 
201
"아니, 그것은 실없는 말이요, 어쨌든 주의하란 말예요. 덕기 같은 사람야 물론 좋은 사람이요, 나두 잘 알지마는, 내가 필순 아줌마만한 때 똑같은 처지에 있었기에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조심하라는 말이지! 듣기 싫다면 다시는 말하구 싶지두 않지만..."
 
202
피차에 무슨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하고 싶은 말들을 노골적으로 시원스럽게 못하니, 흐지부지 싸운 사람 모양으로 입을 담쳐 버렸다. 필순도 경애의 말이 옳은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덕기의 이름이 경애의 입초에 오르내리는 것이 첫째 싫은 것이었다.
 
203
-그는 하여간에 무슨 말을 하겠다는 것인구?
 
204
이야기 끝에 또 머리에 떠오르는 궁금증이 이것이다. 새삼스럽게 공부를 하라는 것도 아닐 거요, 아무리 궁리해보아도 그 외에 자기에게 할말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205
-일본에를 같이 가자는 걸까? 같이 가서 공부하자는 걸까?
 
206
이런 공상을 하여보고는 얼굴을 혼자 붉히며 고개를 옴츠러뜨렸다.
 
207
-나 같은 것은 데려다가 밥이나 지우자구...
 
208
자기의 분수 없는 공상을 혼자 비웃어도 보았다. 그러나 다녀온 지 사흘째 되던 날인가 원삼이 갔다 오더니 넌지시,
 
209
"저 댁 서방님이 내일 좀 다녀가시래요."
 
210
하는 전갈을 듣고는 공연히 가슴이 덜컥하며 자기 신상에 무슨 심상치 않은 변동이 닥쳐온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런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간다는 것은 큰 짐이다. 병이 나서 기동을 하면 으레 올 거니, 그 때에 만나기로 하고 단념하는 수밖에 없다.
 
211
"왜, 오늘 좀 안 다녀오시겠어요?"
 
212
이튿날 낮에 원삼은 이렇게 똥기었으나,
 
213
"어디 갈 새가 있어야죠."
 
214
하고 필순은 뒤숭숭한 마음을 꾹 참아버렸다.
 
215
가지 못할 데라고 단념을 하고 나니 마음은 가뜬할 것 같은데 어제 오늘은 더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고 얼이 빠진 것 같다. 만나고 싶은 간절한 생각이 있다느니보다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것이 궁금하고 애가 쓰이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나설 용기가 아니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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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三代)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193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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