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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레종(鐘) ◈
◇ 제4막 ◇
카탈로그   목차 (총 : 5권)     이전 4권 다음
1942.3
함세덕
1
어밀레 鐘[종]
2
제 4 막
 
 
3
혜공왕 6년 10월 초순.
4
주종공방(鑄鐘工房) 내부.
5
정면에 점토의 더미[堆]. 이 속에 종의 토형(土型)을 묻어놨다. 주위에 용로가 3개. 탕출구(湯出口)는 전부 토형 상부 기삽부(旗揷部)를 향해 있다. 노(爐) 밑 아궁지로 바람을 보내는 풀무. (이것은 땅에다 묻고 발로 밟는 식) 노(爐) 주위에는 사닥다리가 거미줄같이 얽혔고 상구(上口) 옆에 지휘자가 열도와 동즙(銅汁)을 보는 가설의 발판. 좌변에 동재(銅材)를 올리는 기중기.
 
6
막이 열리면 주정들이 “어 - 허, 어 - 허” 하며 풀무를 밟는 사람, 시뻘건 아궁이에 숯을 던지는 사람, 사닥다리로 자재를 운반하는 사람들이 바쁘다. 가마입으로는 자주빛 불꽃이 올라갔다.
 
7
부역꾼 1  당(唐) 황제 아드님이 욕을 보고 돌아가셨다니까, 오래잖어 무슨 변이 있을 거야.
8
주정 1  누가 혼인을 안 한다구 했나? 제가 싫여서 뺑소닐 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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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 2  공주님이 얼골을 화젓가락으로 지지셨기 때문에 뺑소닐 쳤지. 괜히 싫여서 파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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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 3  공주님두 무서운 분이시지. 어쩌자구, 얼골을 지지셨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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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꾼 2  애매한 도깨비로 욕본 양반은 김체신 장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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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제   6개월 동안 근신을 하라고 하셨다지요? 부사님께선, 모두들 그러는데 아무 죄도 없다고 그러든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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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 1  시키지도 않으신 일을 하셨기 때문야. 죄 없이 근신하라 하시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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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꾼 1  아, 박사님 눈 멀었다고 공주님께 알려드린 게 뭣이 허물될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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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 2  누가 알려드린 걸 글르다나? 담을 넘어서 모시고 나온 게 글르단 말이지. 시키지 않은 중매노릇은 웨 하셨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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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꾼 1  그렇다면 박사님두 똑같이 처벌하시든지 해야지, 한 사람만 처벌하시고 짜장 죄인은 웨 그냥 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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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 1  지금 박사님을 처벌했다간 종은 어떡허구? 아, 다섯 해 동안 해 내려오든 일을 중지해버리란 말야? 구리만 오면 끓여 불판인데, 지금 와서 일을 작파해서야 되겠어?
18
부역꾼 1  그렇다구 지은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우리나라 국법으론 우스운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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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 1  종 다 만들어 놓거든 처벌하시면 되지 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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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제   공주님은 아주 딱 감금을 해버리셨대요.
 
21
이때 이화녀와 녹사(錄事), 언쟁하며 들어온다. 이화녀는 몹시 수척해졌다.
 
22
녹 사   글쎄 안 된대루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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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녀   잠깐만 만나뵙고 가겠어요.
24
녹 사   안 돼오. 글쎄, 당신을 공방에 드린 것을 검교사께서 아셔보우. 내목은 당장 대뜰에 굴를 거요.
25
이화녀   나는 귀중한 자식까지 바친 사람이 아니에요? 어째 들어갈 권리가 없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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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사   당신 때문에 일이 얼마나 지장이 된지 아오? 박사께서 눈이 머셨다는 건 당신도 잘 알겠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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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녀   아 - 니, 그럼 나 때문에 머셨단 말이에요?
28
녹 사   그럼, 당신 때문이 아니구.
 
29
판사, 재료를 들고 나온다.
 
30
판 관   (녹사에게) 누굴 못살게 굴려구 이 아낙넬 또 들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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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사   암만 붙들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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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녀   (판관에게) 요새도 박사님은 매일 치료를 받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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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관   주야를 불고하고 의박사께서 전심전력해주셔서 불일간 눈은 뜨시게 될 거요.
34
이화녀   (반가운 듯이) 그럼!
35
판 관   눈은 완차케 되신다구 해두 요전 구리를 끓였다가 탕출을 못했으니 숯만 몇 천 섬이 손해냐 말이야? 그것뿐인가? 일일이 들자면……. 좌우간 돌아가시오. 박사께서 요새야 겨우 정신을 좀 수습하셨소. 또 오늘은 마즈막 날인데 당신 때문에 요전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면 어떡허겠소?
 
36
이화녀, 단념한 듯이 울면서 허청허청 나간다. 미추홀, 도면과 자(尺[척])를 들고 온다. 눈에는 눈목[繃帶[붕대]]을 처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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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녀   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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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누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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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녀   저 ……. 기집애 어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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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관   (주정들에게) 끌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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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제지하며) 그대루 두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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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사와 주정들, 이화녀의 팔을 붙든 채 박사를 바라본다.
 
43
미추홀   소원대로 눈이 멀었으니 인제 시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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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녀   (가슴이 찔려 말이 쿡 맥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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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인젠 저주 안 하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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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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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오셨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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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녀   (조용히 울다가 고개를 들고) 네.
49
미추홀   무슨 말씀이시오.
50
이화녀   저 …….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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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무슨 말씀이시오. 주저하지 말고 하시오.
52
이화녀   (가느단 울음 속에) 하로바삐 하로바삐 종을 완성해 주세요.
53
미추홀   (의아하야) 할 말씀이란 그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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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녀   네.
55
미추홀   그럼 축원을 하시는 게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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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녀   네, 축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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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나를 그렇게 미워하시구 종이 안 되기만 그처럼 바라시드니 오늘은 어째 축원을 하십니까.
58
이화녀   박사님껜 오늘이야 비로소 여쭙니다만, 저는 새벽마다 신궁에 올라가 검님께 하로바삐 종이 되기를 빌어왔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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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내 눈이 정말 멀었으니 미안해서 그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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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녀   (고개를 흔들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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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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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녀   우리 기집애 목소리가 듣구 싶어서요. (돌연 호소하듯이) 박사님, 이번만은 기어코 종을 만들어주십시오. 이번만은 기어코 만들어주십쇼. 나는 혼자서 참말 외롭고 슬퍼서 살 수가 없습니다. 궂은 비가 줄줄 나리는 밤중이나 황둥개가 멍멍 짖는 새벽에는 기집애가 보구 싶어서 이리 딩굴구 저리 딩굴구 하다간 옷을 주섬주섬 걸치곤 이 공방에 왔었습니다. 무덤이라도 있다면 붙들고 울기나 하고……잔디풀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그래두 자식이 땅 속에 살아있거니 생각이나 하겠지만……. 박사님과 일꾼들은 모두 잠들었을 때 나는 몇번이구 구리 가마만 어루만진지 모릅니다. 으슴컴컴한 이 공방을 왔다갔다 하다가는 그냥 돌아가군 돌아가군 했어요. (말끝은 이화녀 독특의 애조 속에 오열로 변해간다. 판관 이하 하나씩 둘씩 눈물을 감추려고 들어가버린다)
63
박사님, 우리 기집애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종이 되면 틀림없이 우리 기집애 목소리가 들어 있을 것만 같어요. 내 자식은 죽었지만 혼은 종 속에 살어 있을 겁니다. 조석으로 종소리가 날 때마다 우리애 음성을 듣도록 해주세요. 그년 목소린 구슬을 굴리는 듯 맑었습니다. 지금도 밤이면 그년이 천자 책을 읽는 맑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기러기가 날르는 달밤에는 노래도 참 잘 불렀습니다. 하로바삐 종을 완성해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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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애기 어머니, 고맙습니다. 너무 설워마십쇼. 오늘밤이라도 구리물만 부르면 내일은 종이 됩니다. 어린애는 한 번 죽었지만 이 종과 함께 신라 천만년 후세까지 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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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녀   (희망에 차며) 그럼 내일 새벽엔 종소리를 듣게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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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네.
 
67
이때 대화(大和) 의박사로 경주에 와서 개업하고 있는 오노히로토시(小野博臣[소야박신]) 들어온다. 뒤따라 의료기구 상자를 든 무라사키히메. 이화녀는 한편 구석으로 비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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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히로토시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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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박사님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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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히로토시  (이화녀를 가리키며) 저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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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어린애를 바치신 애기 어머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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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히로토시  저, 박사님을 저주한, 그?…… 겉보기에는 어찌 아주 상냥하지 않습니까? 저는 옛 이야기에 나오는 마귀할멈을 연상했는데요. 하하하.
 
73
이화녀, 자기 얘기를 하는 눈치를 채고 피하는 듯이 나간다.
 
74
오노히로토시  그런데 오늘은 눈동자가 지끈지끈 아프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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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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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히로토시  눈물은?
77
미추홀   어제보담 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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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히로토시  자, 저쪽으로 갑시다. 오늘은 새로운 약을 갖고 왔습니다.
79
미추홀   오늘은 손을 뗄 수가 없는데……. 하루쯤 넘겼다 내일 발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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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히로토시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몸은 더욱 아껴야 해요. 게다가 눈의 치료도 오늘이 마지막인데 순조롭게 가면 내일쯤엔 안대를 뗄 수 있을지 몰라요. 중요한 순간이 왔습니다.
81
미추홀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바다엘 꼭 좀 나가봐야 할 텐데, 오늘은.
82
무라사키  바다엔 뭣 하시러요.
83
미추홀   배가 들오나 좀 가봐야 하겠습니다. 급찬이 구리를 얻으러 귀국으로 가신 지 벌써 다섯 달이 넘는데, 이때껏 돌아오시지를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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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히로토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박사님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까? 김초정(金初正) 님이 숙동(熟銅) 3만 근을 가득 싣고 무사히 영일만 포구에 도착하셨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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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감격하야) 정말입니까?
86
오노히로토시  정말이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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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사키  조곰 아까 급찬한테서 장계(狀啓)가 왔었어요. 검교사님하구 모두들 달려갔으니, 오래잖아 이리들 오실 겁니다.
88
미추홀   (설레는 가슴을 진정치 못하며) 박사님, 빨리 들어가셔서 약을 발라주십쇼.
 
89
미추홀, 도리어 오노히로토시를 재촉하며 집무실 편으로 들어간다. 뒤따라 무라사키히메, 이때 멀 - 리서 장로(長路)에 지친 말의 울음 소리. 채쭉을 내리치며 강행을 재촉하는 규환 소리. 김옹, 급히 달려온다.
 
90
김 옹   (안을 향하야) 판관!
 
91
판관 ․ 녹사, “네 -” 하고 급히 나와 부복한다.
 
92
김 옹   일본서 가져오는 구리를 실은 마차가 사장에 빠진 모양이다. 모두들 더리구 가서 조력하구 날르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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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 ․ 녹사, 대답하고 들어가 주정 ․ 도제 ․ 부역인부들을 더리고 나와 환호성을 치며 나간다. 미추홀 ․ 무라사키 ․ 오노히로토시, 치료를 끝마추고 나온다.
 
94
미추홀   검교사님, 급찬께서 숙동을 3만 근이나 얻어오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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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옹   음, 일본국의 후의를 헛되이 하지 않게스리라도 이번만은 실패 없이 해야 할 텐데……. 네 눈이 그러니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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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성급히 박사에게) 언제나 이 눈이 완치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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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히로토시  이제 괜찮습니다. 이것으로 다 나았다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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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네? 그럼, 붕대를 끌러도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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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히로토시  (황급히 제[制]하며) 성급하게 굴지 말아야 해요. 오늘 축시가 돼야 뗄 수 있습니다. 깨끗한 생수로 고약을 모두 씻어버리고 눈을 뜨세요. 반짝이는 구리를 볼 수 있을 겁니다.
100
무라사키  (김옹에게 통역한다)
101
김 옹   (경희[驚喜]하며) 오늘밤에?
102
무라사키  네.
103
김 옹   (오노히로토시에게) 참으로 수고하셨소.
104
오노히로토시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105
김 옹   그럼 난 이 길로 입궐해서 구리가 왔다는 것을 상감마마께 아뢰고 오겠소. 취홀의 눈이 낫게 된 것도 아뢰고.
 
106
김옹, 나간다.
107
미추홀   왜 해필 삼경(三更)이에요. 지금 끌러두 마찬가지 아닙니까?
108
오노히로토시  그건 안 돼요. 생수는 삼경에 제일 맑아지기 때문에 약으로 쓰는 겁니다. 그건 그렇고, 여기 가까운 데에 맑은 생수는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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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사키  박사님, 생수라면 제가 좋은 곳을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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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히로토시  멀지 않지요?
111
무라사키  예, 멀지 않아요. 봉덕사(奉德寺) 뒷산의 대숲을 건너가면 바로 거기예요. 정말 수정같이 맑은 생수가 있어요. 국왕마마와 공주마마께서 매사냥에서 돌아오시는 길에 반드시 한번은 이 생수를 찾아서 타는 갈증을 달래곤 하신답니다.
112
오노히로토시  거참, 잘됐군. 좋은 일은 서둘러야 합니다. 빨리 검사하러 가십시다. (가다가 발을 멈추고) 오늘밤에 일을?
113
미추홀   곧 착수해야겠습니다.
114
오노히로토시  하지만 밤일은 눈에 좋지 않아요. 내일로 미루는 게 좋겠는데요?
115
미추홀   그건 안 됩니다. 더우기 가마 속엔 검님께 바친 어린애의 생령이 들어 있으므로 한시가 급합니다.
116
오노히로토시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용광로 가까이에는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부디부디 말씀드립니다. 동즙(銅汁)의 김을 쐬었다가는 그땐 두 번 다시 고치지 못합니다.
117
미추홀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휘만 할 테니까, 염려마십쇼.
118
오노히로토시  그러면 공주님, 생수가 있는 곳으로 가보시지요.
119
무라사키  네.
 
120
오노히로토시와 무라사키 나간다.
 
121
間[간]
 
122
멀 - 리서 마차를 밀고 오는 훤소(喧騷). 공주 시무나, 목탁을 든 채 주위를 살피며 봉덕사 쪽에서 들어온다. 목에는 염주를 걸었다.
 
123
시무나   (달려가) 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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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반신반의로) 네?
125
시무나   나에요. 시무나에요.
126
미추홀   공주님이……어떻게.
127
시무나   독경을 하다가 창밖을 내려다보니까, 구리를 실은 마차가 쭉 늘어서서 공방으로 가드군요. 오늘밤엔 구리물을 끓여부실 것을 생각하니 앉었을 수가 있어야지요.
128
미추홀   공주님. (손을 잡을려고 더듬는다)
129
시무나   박사님, (긴장이 탁 풀리며) 참말이지 뵈옵고 싶었어요.
 
130
어느덧 밤은 깊었고 멀 - 리 토함산성에 초생달이 훤하다. 떨어진 민가에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와 어느 나 어린 도련님이 읽나 보다. 천자문을 더듬는 듯한 졸음 띤 소리.
 
131
시무나   종이 극성이 되면 박사님은 이 서울을 떠나시겠지요.
132
미추홀   네, 그렇지만 죄진 몸이니 필시 귀양을 가게 될까 봅니다.
133
시무나   (울며) 박사님, 검교사님께서는 반드시 요전 그 일은 용서해 주실거에요.
134
미추홀   용서를 해주신 대두 신라 천지에야 갈 데가 있겠습니까. 바다 가운데 있다는 우산국(于山國)으로나, 그렇지 않으면 아주 바다를 건너 야마토(大和[대화])로 갈까 합니다.
135
시무나   야마토로요?
136
미추홀   네, 일본 천황께선 조곰도 민족적으로 차별하거나 그러시지 않는다 합니다. 오히려 미치노쿠노쿠니(陸奧[육오]ノ國[국])라는 넓은 땅에다 여기서 건너간 사람들을 위해서 부락까지 건설해주셨다 합니다. 그뿐 아니라 전답과 벼씨를 내리시고 앞으로 20년간 세금을 면제해주셔서 평화찬 생활을 하게 하신답니다.
137
시무나   (먼 - 미지의 나라에 대한 동경에 싸이어) 미치노쿠노쿠니, 미치노쿠노쿠니……. (조용히 노래로 변한다)
 
138
천황의 세상이 영원히 번창하라고 동쪽에 있는
139
미치노쿠야마(陸奧山[육오산])의 집안에 황금꽃이 피었네.
140
― 오오토모이에모치(大伴家持[대반가지])
141
(돌연 무슨 결심을 한 듯) 박사님, 저도 함께 더리고 가주세요.
142
미추홀   (놀라며) 미치노쿠로요?
143
시무나   네, 아무데라도 좋아요. 여기처럼 까다로운 제도가 없고 귀찮은 속박이 없는 데면 아무데라도 갈 테에요. 밭을 매고……. 사냥을 하고……. 송이를 따고…….(황홀한 꿈을 꾸듯이) 길쌈을 짜고……. 대추가 주렁주렁 열리면 떡을 쪄서 추석을 차리고……. 봉선화가 피면 백반과 섞어 빠서 손톱을 빨갛게 물들이고……. 이렇게 단 하로라도 살고 싶어요.
144
미추홀   그렇지만 요전 공방에 한번 들르신 것만인데두 그처럼 난리가 났었는데……. 어마마마와 중신들께서 허락을 해주시겠어요?
145
시무나   허락만 얻는다면 더리고 가주시지요?
146
미추홀   그렇지만 그건…….
147
시무나   제가 정식으로 청원해보겠어요. 물론 당장 승낙은 안해주시겠지만……. 정 못 한다면 도망해 나오지요, 뭐.
148
미추홀   (감격하야) 공주님.
149
시무나   (무릎에 엎더진다)
150
미추홀   공주님, 우셨군요.
151
시무나   (미소를 지으며) 아니요.
152
미추홀   눈물이 흘르시는데요.
153
시무나   (급히 닦으며) 박사님, 제 얼골이 뵈어요?
154
미추홀   아니오.
155
시무나   그런데 뭘?
156
미추홀   뵈진 않어도 제 마음속엔 호수의 달과 같은 공주님 얼골이 잠자고 있어요. 고대로 그릴 수도 있고 구리로 상을 만들 수도 있어요. (하며 영상을 허공에 그린다)
157
시무나   (무의식중에 손으로 자기 볼의 상처를 만져보고 소스라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158
미추홀   그렇지만 오늘밤 삼경만 되면 두 달 동안 그리워하던 공주님 얼골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겁니다.
159
시무나   삼경요? (돌연 무거운 돌로 정수리를 얻어맞은 듯 비틀거리며 전신을 부르르 떤다. 장래할 무서운 결과를 앞둔 공포에 얼골은 생기를 잃고 창백해간다. 간신히 신음하는 듯이) 삼경요?
160
미추홀   네, 조곰 아까 박사께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밤 삼경에 고약을 씻고 샘물에 눈을 닦으면 광명을 보게 될 거라구 했습니다. 지금 무라사키히메하구 샘물을 검사하러 가셨어요.
161
시무나   (자기도 모르게) 박사님, 그럼 전 어떡하면 좋아요.
162
미추홀   네?
163
시무나   아, 아니에요.
 
164
이때 무라사키, “박사님”, “박사님” 부르며 들어온다. 시무나, 급히 숨는다.
 
165
무라사키  박사님, 의박사께서 샘터로 곧 오시라고 합니다.
166
미추홀   네.
167
무라사키  주위에는 향긋한 냄새가 풍기구 물이 거울같이 말 - 간 샘이에요. 빨리 가셔서 눈을 씻으세요.
168
미추홀   네.
 
169
무라사키, 미추홀을 부축하고 나간다. 시무나, 불안과 초조 속에 쫓아갈까말까 한참 망설이더니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무라사키”하고 규환을 치듯 부른다.
 
170
무라사키  (돌아보고 놀란다) 공주님?! 이 밤에 어떻게 여길?…….
171
시무나   (호소하듯이) 무라사키, 박사님을 샘가루 모시구 가지 말어요.
172
무라사키  네?
173
시무나   박사님 눈에 붕대를 풀르지 말도록 해줘요. …… 이 시무나의원이에요.
174
무라사키  (악연[愕然]하야) 원이라니, 눈이 뜨시지 못하게 하는 게 원이에요?
175
시무나   박사님은 지금도 내 얼골이 예전처럼 아름다운 줄 알구 계셔요. 만일 눈을 뜨셔서 내 미워진 얼골을 보신다면 얼마나 놀래고 실망하시겠어.
176
무라사키  (냉연[冷然]히) 공주님 한 분의 숭가진 얼골을 안 뵈실려구 박사님을 일생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버리시겠다는 말씀이에요?
177
시무나   (가슴이 찔려 전신을 떤다)
178
무라사키  참된 사랑이란 그런 것은 아닐거에요. 얼골의 곱고 미운게 무슨 상관이에요. 신뢰와 존경이 제일이지.
179
시무나   그렇지만……. 그렇지만…….
180
무라사키  공주님, 그런 염려는 다 버리시고, 기왕 나오신 길이니 저하구 같이 박사님을 모시고 샘으로 가십시다.
181
시무나   (조용히 오열하며) 무라사키, 박사님이 실망하시기 전에 내가 곱게 사라지는 게 좋겠어.
182
무라사키  공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183
시무나   꿈이 없는 곳에 사랑이 있을 리가 없어……. 내 한몸, 이 말썽 많은 내 한몸 죽어버리면 그만이야……. (허청허청 나간다)
184
무라사키  (쫓아가며) 공주님!
185
시무나   빨리 박사를 모시고 갔다와요.
 
186
그동안에 미추홀은 사닥다리를 올라가 용광로 우에 섰다.
 
187
미추홀   공주님, 저는 이대로 눈을 뜨지 않겠습니다. 그리하야 예전의 아름다운 공주님 얼골을 가슴 속에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188
무라사키  (당황해 하며) 아, 안 됩니다. 그건 안 됩니다. 박사님은 나라의 큰일을 맡으신 몸이 아닙니까. 오래잖아 구리 실은 마차가 닿을 거에요. 한시 바삐 눈이 뜨셔서 종을 만드셔야 합니다.
189
미추홀   걱정마시오. 눈은 멀더라도 머릿속에 공방만은 환히 다 보이니 역사에는 조곰도 지장이 없을 겁니다. (가마 상구[上口]에 얼골을 내밀고 붕대를 풀려 한다)
190
시무나   아, 안 됩니다.
191
무라사키  안 됩니다.
 
192
두 여자의 비명과 동시에 문전에 마차가 도착한 듯한 벅적한 소요. 마명(馬鳴), 채쭉 소리. 인부들의 떠드는 소리. 오노히로토시, 들어오다가 미추홀을 보고 악을 쓴다.
 
193
오노히로토시  무엇을 하는 거에요? 미추홀님, 그렇게 하면 눈이……. 눈이…….
194
미추홀   (기어코 붕대를 풀었다)
195
오노히로토시  예이, 이 천지 바보야……. 이런 뻔뻔스러운 놈 같으니라구. 내 고생도 아랑곳 않고 일부러 눈을 망치다니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냐.
196
미추홀   일본국의 의박사님, 박사님께 참으로 죄송합니다. 오노히로토시 은혜도 모르는 놈, 어떤 핑계를 대도 용서치 않겠다. 검교사 님께 말씀을 드려서 반드시 진실을 밝히고 말겠어. (무라사키에게) 그대도 같이 가십시다.
 
197
오노히로토시, 무라사키를 더리고 대노(大怒)해가지고 나간다. 구리 포대를 메인 주정, 인부들을 더리고 김옹 들어오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망연(茫然)한다.
 
198
김 옹   (대성질타하며) 취홀이 네가 미쳤느냐? 어쩌자고 눈을 또 가마에다 댄단 말이냐?
199
미추홀   검교사님, 조곰도 염려마시고 빨리 구리를 좀 뵈주십쇼. 눈은 다시 불편해졌습니다만은 그대신 저는 이 펄펄 끓는 불꽃 같은 정열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오늘밤이야 말로 이 가슴에 벅찬 감격으로 미취홀이 일생일대의 영예를 걸어 천만년 후세까지 남을 신종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200
김 옹   (망연히 그를 바라만 보다가, 판관 시켜 동을 미추홀에게 쥐어주게 한다)
201
미추홀   (구리를 쥐어보드니) 판관, 곧 일 시작합시다. 각기 부서에 서시오.
 
202
일동, 박사의 말에 고무되어 기운차게 일을 시작한다. 미추홀, 구리를 가마 속에 쏟으니 화염은 충천하야 지령대(指令臺)에 선 박사의 홍조띤 얼골을 비친다. “에 -, 호 -” 하며 풀무질을 하는 사람들. 술섬을 통째 아궁지에 지피는 사람들. 사닥다리로 구리 포대를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 마차에서 운반하는 사람들. 용광로에다 재료를 쏟는 사람들. 공방 내(內)는 이양(異樣)한 긴장 속에 역사(役事)가 진행된다.
 
 
203
― 막 ―
【원문】제4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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