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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카 영화 시론(試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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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
박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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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영화 시론(試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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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너무나 가혹한 견지에서 아메리카 영화를 관람하며 비판하여 왔다. 아메리카인의 습성과 기질을 잘 알지도 못하고 관념적인 관찰만 하여왔다. 이것은 단지 우리들의 지식의 빈곤에서만 온 것이 아니라 어떤 종의 사회제도가 주는 계급의식에서 유달리 지나치게 한 것이다. “아메리카 문학의 연구자는 예외적으로 그 연구의 제 조건이 좋다. 최초서부터 하려 해도 불근 350년의 역사를 알면 되고 그 대상의 지리적 고립과 통일에 관한 문헌도 비교적 완비되어 있다. 또 발전 그 자신이 직선적이며 아메리카 생활은 야성적인 개척의 세계에서 고도로 기계화된 문명으로 신속히 움직이며 세계 어느 나라에 비할 수 없는 변화를 하고 있다.” 이 글은 어떤 아메리카 문학사를 런던 타임스 의 문학주보가 비평한 것이다.
 
 
 

1. 콜로니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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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들이 아메리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아메리카 영화의 역사가 아니고 차라리 그 배후의 아메리카 문화와 사상의 유동을 아는 것이 오늘의 영화 관상(觀賞)에 좋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들은 350년을 연구하지 않아도 오늘의 아메리카에서라도 우리와는 먼 거리의 정신적 풍속을 발견한다. 요즘 신문이나 잡지에서 읽을 수 있는 아메리카의 사회 현상 그리고 유나이티드 뉴스의 경마장 풍경, 새로운 형의 자동차 경주 등으로서도 아메리카의 측면을 알 수 있다. 사상을 알려고 하는 것은 약간 힘들지는 모르나 트루먼 대통령의 의회보고 연설이 절대적인 찬성리에 그치고 그 다음날이면 아메리카 시민은 모두들 이 연설이 가진 의의를 잊어버린다. 아메리카는 350년의 새로움을 가질망정 더 한층 복잡하다. 여기에 오늘의 아메리카의 비극이 있다. 콜로니의 세계의 전형적인 절망이 있다. 아메리카가 신세계였으므로 기다릴 만한 전통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아메리카 영화의 이면은 더욱 비참한 것이다. 우리는 콜로니 문명을 절대적으로 알지 못하면 아메리카, 즉 콜로니의 세계를 말할 수 없다. 오늘의 아메리카의 표정, 그 비극성은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늦게 영화에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감촉이 민감한 영화에서 가장 늦게 나타났다.
 
 
 

2. 오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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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영화의 숙명, 즉 오락성을 새삼스럽게 말하고 싶지 않다. 아메리카 영화는 오락 영화로선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단연 우수하다. 그것이 비교적 재미있고 기교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은 아메리카 영화의 제작기구와 필요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이다. 여러 가지 작품이 비슷비슷하다는 것도 결과로선 오락성이 비슷하다는 것밖에 없다. 전통이 없는 아메리카에서 영화가 기성예술에게 방해당하지 않고 자유스럽게 진행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웠으나, 오락 이상의 것을 추구한 사람들에게는 불만을 주었다. 완성기 이후의 영화가 그 예술적 완성을 본 것은 차라리 아메리카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하였다고 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2차대전 전 「꺼져가는 등불」, 「평원아(平原兒)」, 「잃어버린 지평선」등은 서정시적인 데도 있으며 대체로 꿈과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었다. 이 무렵의 아메리카 영화는 무난한 오락성을 가지고 있었다. 꿈을 그리고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은 영화가 처음부터 지닌 커다란 특징이었다. 리스킨, 카프라의 지난날의 작품을 생각할 때 역시 꿈이나 로맨스라는 것은 아메리카 영화의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요는 꿈의 종류와 그 수법이겠으나 영화를 오락으로서 볼 때에는 건전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꿈을 그린다는 것이 가장 충실한 사명이라 하겠다. 그러나 천편일률의 로맨스의 결말적인 해피엔드에선 거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꿈이 그려 있다 할지라도 몇 번 지나면 관객은 완전히 권태할 것이다. 아메리카 영화는 무슨 일이 있다 하여도 예술성보다 오락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관객을 실망하게 한다. 관중층에게 만족하게 하려면 고답적인 영화는 벌써 실패다. 문학적이다 과학적이다 하더라도 물론 오락성이 필요하지만 아마 우리들은 기상천외의 생각을 하지 않는 한 아메리카 영화에서 재래적 예술성은 찾아보지는 않을 것이다. 해방 후 서울에서 상영된 영화를 보더라도 우리는 영화수법이나 제재가 예전 것보다 이상하게도 달라진 것을 지적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만일에 그들 영화 제작자들이 예술성을 도모하여 만들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능숙하게 그 예술성을 알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경험과 사고방식이 너무 이반되어 있고 우리는 아메리카 영화의 과거의 성격을 신경이 마비될 지경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들이 모르는 곳에 아메리카 영화는 오락과 함께 예술성을 동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예술성 자체를 분명히 모르는 것은 날이 갈수록 우리가 더 많은 영화를 접견하면 완전히 알게 된다고 믿고 싶다. 그렇다 해서 모든 아메리카 영화가 단순한 의도 아래 스타 중심으로 오락성의 작품만을 기계적으로 제작한다면 그 경향이 심할수록 할리우드는 정서 없는 예술가의 집단이 될 뿐이요 영화인은 공업적 생산가 외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3. 문학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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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에서는 소위 베스트셀러는 대반 영화화되는 모양이다. 아메리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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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회사에서는 새로 출판되는 작품을 보는 부문이 따로 있어 가지고 그 작품을 영화화하면 어느 정도의 흥행 가치를 얻을 수 있는가를 제일 먼저 염두에 둔다. 「라인강의 감시」의 원작자 릴리언 헬만도 신진 극작가로 유명하기 전까지는 그런 일을 했다. 흥행 가치만 있다면 어떤 예술적 소설이라도 저속하지 않을 정도로 영화화한다. 외지(外誌)를 보면 마가렛 미첼의 명작 『바람과 함께 떠난다 Going With the Wind』는 영화화된 작품으로선 미증유의 역사적 대작으로, 소설보다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 소설의 영화화는 여러 가지 점에서 흥미가 있는 것으로, 출판되기도 전에 1,037페이지의 대작을 영화사로 먼저 보냈다. 영화사에서는 5만 불을 지불한 다음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모양으로 아메리카의 소설은 베스트셀러만 된다면 내용은 여하튼 간에 모두 영화화된다. 소설만 많이 읽게 되면 그 내용이 영화화하기에는 힘든 것이라도 영화사 내의 전 기능을 가지고 촬영 개시로 옮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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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에는 그 작품의 선전 가치에 커다란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존 스타인벡의 『노한 포도 The Grapes of Wrath』, 『다람쥐와 사나이 Of Mice and Men』, 펄 벅의 『대지 Good Earth』, 크로닌의 『성채 The Citadel』,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 Arch of Triumph』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 An American Tragedy』, 브롬필드의 『비는 온다 The Rains Cames』, 힐튼의 『굿바이 칩스 씨 Good-bye Mr. chips』, 다프네 드모리아의 『레베카 Rebecea』, 존 파시 『아다노의 종 A Bell for Adano』, 헤밍웨이의 『탈출 To Have and Have Not』,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허비 앨런의 『앤소니 어드버스 Anthony Adverse』, 레이첼 필드의 『땅 위의 모든 것과 천국도 All This, and Heaven Too』, 싱클레어 루이스의 『공작부인 Dodsworth』등이 있다. 여기에 쓴 작품 「아메리카의 비극」, 「대지」, 「비는 온다」, 「공작부인」등은 조선에서도 상영되었는데 놀랄 만한 사실은 영화는 소설의 일부분만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땅 위의 모든 것과 천국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탈출」같은 작품도 근일 중 상영될 것이다. 외지의 평을 보면 상기한 영화는 소설이 가지고 있는 표현의 반도 없다는 것이다. 영화에는 소설의 골격만 앙상하게 남길 뿐이요 영화로서의 특별한 조합은 도저히 만들기 힘든 모양이다. 이제부터 아메리카 영화도 소설을 영화화하는 중 차차 그 표현의 범위도 넓어질 것이고 그들이 이러한 문학작품을 추종하는 동안에 문학에 떨어지지 않을 만한 영화를 만들 것이다. 또 거기에 문학 자체가 아메리카의 현재의 생활과 인간정신의 심각한 면을 그리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까닭에 아메리카의 소설로부터 영화화된 작품은 아메리카의 생활의 표현으로서 보통의 영화보다도 대단한 흥미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메리카 영화와 아메리카 문학과의 관계는 흥미 있는 아메리카의 단면을 장차는 나타낼 것이다. 문학과 영화는 아메리카뿐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밀접한 관계인 것이다. 좋은 문학작품과 좋은 영화는 어느 시대에도 필요하다. 천학한 나는 베스트셀러만 이야기하였는데 아메리카 영화에는 베스트셀러 외의 소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든 작품이 허다하다는 것도 말하겠다.
 
 
 

4.예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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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화가 극도로 발전하고 전통의 배경은 없는 아메리카는 예술의 온상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구라파의 예술가들이 걱정하고 있는 탈피의 고뇌는 없다. 현재의 레벨은 적으나마 아메리카는 아메리카로서의 자신의 예술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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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의 영화와 아메리카의 영화의 예술을 우리는 평가할 때 구라파 영화(구라파의 영화 이것은 주로 불란서 영화를 말한다)는 내향성이고 아메리카 영화는 외연성 extéieur이라 한다. 현대의 아메리카 문학의 특색을 문학자들이 표현할 때 ‘외연적 방법’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처럼 아메리카 영화는 외연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아메리카 영화에서 불란서 영화의 내향성을 찾고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술을 부정하는 것은 틀린 일이다. 그러나 구라파의 예술유산과 주지(主知)를 더 많이 알고 있는 우리로선 간혹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아메리카의 문화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의 영화에 접할 때에는 더욱 주의할 문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아메리카 영화를 전적으로 훌륭한 예술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유는 사회기구의 혼란과 개인의 윤곽이 똑똑치 못한 데다 예술을 창조하려는 근본적인 예술가의 정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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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영화는 단지 아메리카의 중요한 산업의 하나다. 그러므로 영화 제작의 기구(機構)는 벌써 현대 아메리카 사회의 조직과 혼란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아메리카의 예술가들이 무질서하게 동요하는 기계문명에 도전하는 것을 보더라도 자본주의가 부서지지 않는 한 아메리카 영화는 참다운 의의의 진실한 예술성은 갖지 못할 것이다. 예술적인 영화를 만들고 아메리카 영화의 발전에 지금까지 힘써 온 사람 중에 예술적 앙양성을 가진 아메리카 영화작가들이 몇 명이나 되는가. 지금까지 아메리카 영화의 예술적 작품은 모두들 구라파의 영화작가들의 것이었다. 에른스트 루비치, 프랑크 카프라, 조셉 폰 스턴버그, 루벤 마무리앙, 루이스 마일스톤, 프랭크 로이드, 프리츠 랑, 에드먼드 굴딩, 로베르 플로레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 줄리앙 뒤비비에, 알프레드 히치콕 등. 그러나 아메리카 영화의 제작기구 속에 구라파의 예술의 전통을 꽃피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작가 자신이 외연적인 아메리카의 사회에서 생활하고 구라파 예술의 전통에는 미련을 가지지 말고 예술가로서의 고매한 정신을 잊지 말 것이다. 그 다음 처음부터 아메리카 영화기구의 기계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독자의 예술을 만드는 것이다.
 
 
 

5. 향수와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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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의 본 싱클레어 루이스 원작인 「공작부인」(원명은 Dodsworth)는 1929년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시드니 하워드가 각색한 다음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였는데 이 영화는 여러 점으로 보아 절대로 우수한 아메리카의 영화였다. 주인공 도즈워스(월터 휴스턴 분)는 오랫동안 자동차 제조로써 사회에 공헌하여 왔다. 자기의 일이 얼마나 사회 문화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철(鐵)과 같은 신념으로 믿고 왔다. 그는 공장을 양도한 다음 잠시의 위로를 위하여 구주 여행을 떠난다. 내용은 이 영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잘 알 줄 안다. 무식한 처 프랜(루스 채터튼 분)은 여러 가지 행동에서 아메리카 여성의 진실을 잊어버린다. 코트라이트 부인(메리 애스터 분)은 그러한 아메리카 여성을 상실하지 않았다. 그러면 아메리카인의 진실이란 무엇이냐? 싱클레어 루이스는 그것은 구대륙의 전통을 벗어나 신대륙에 희망을 찾고 영국에서 건너온 아메리카인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건전한 건설의 정신, 자유한 문명을 건설하려는 의지라고 하고 있다. 문명이 건설함에 따라 이 건전한 정신은 상실되었다. 도즈워스는 기선 갑판 위에서 20대의 청년처럼 건강히 흥분되어 “아 비숍의 등대입니다. 그야 나는 이 여행이 처음이니깐요. 나는 저 등대를 보니 웬일인지 영국에 관하여 여러 가지를 읽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중략) 그리고 존 오스틴, 올리버 트위스트 그리고 셜록 홈스 ─ 영국, 어머니와 같은 영국. 아 나의 모국”하고 말한다. ─ 영국을 그리워하는 마음 이것은 기계문명 속에서 시달린 아메리카인의 향수다. 도즈워스는 건전한 아메리카 정신을 구현한 것이고 그의 처 프랜은 향수를 잊은 아메리카의 자칭 문명인을 대표한 것이다. 카프라와 리스킨의 이상향의 꿈처럼 기계문명과 물질문명에 골머리가 난 아메리카인은 간혹 현실사회에서 떠나고 싶어한다. 그리고 「오페라 해트」, 「잃어진 지평선」은 옛 작품이었으나 그 영화적 가치는 항상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후 상영된 작품 중에도 이러한 제재와 표현방식을 새롭게 갖추어 만든 작품도 있었으나 그 수법이 너무도 유치하며 도저히 상기한 영화의 수준이 되지도 못했다 나는 막연히 . 향수라 하였으나 이 노스탤지어가 말하는 것은 현대문화와 부패되는 아메리카 물질정신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일 것이며 혼란된 사회제도를 혐오하고 반항한다는 슬로건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향수와 이상은 아메리카 영화인만 아니라 솔직한 아메리카 대중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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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향수와 좀 다른 데서 나는 판타지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요즘의 아메리카 영화의 진로를 재미있게 본다. 그러나 그들이 의도하고 있는 점은 너무도 소극적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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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대전 중 아메리카는 물질과 정신 양면에서 다소나마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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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정신이 일상생활에서 차츰차츰 부서져 간다는 것은 아메리카인으로서는 가장 쓸쓸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시 중 모든 인적 물적 국력을 쏟아냈다. 아메리카 영화도 역시 힘 도와 일을 하였다. 일선의 병사를 위한 영화, 대외선전 영화, 반나치 영화, 총후 생활영화로서 ─. 그런데 일방 아메리카 시민의 생활고는 심해 가고 정신적 위기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전쟁이 주는 현실이란 몇 년 전의 따스한 생리적 기억이 아니고 살아나갈 앞날의 생활적 빈곤이다. 이러한 여유 없는 경지에 빠진 아메리카인은 한두 사람이 아닐 거다. 불안과 혼란은 “우리들은 20세기의 문명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에요”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실망일 게다. 그러므로 아메리카 영화는 내향성을 무시치는 못하고 외연적이면서도 생활과 정신의 두 가지를 표현하려고는 애써본 모양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그들은 예술 유산의 정다움을 알고 사회상의 비참을 똑바로 볼 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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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영화 예술가는 관념적이나마 재래예술의 본질인 외면 묘사에만 고집되지 않았다. 그들은 판타지를 그려냄으로써 불건강한 생리를 돕고 물질의 허식으로 된 아메리카의 사회에서 도피하였다. 판타지는 가까운 의미의 생활에의 반항이다. 향수의 판타지 이것은 시대의 유동으로 변화된 아메리카인의 가장 큰 꿈이요, 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은 현실 사회의 표면적 현상인 결함을 폭로하고 있다.
 
 
 

6.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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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영화를 감상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의식을 뺏기지 않는 것이다. 아메리카가 자본주의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나라라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일이다 . 일본의 어떤 영화 평론가는 아메리카 영화를 감상하는 데 제1조건은 그 영화 제작에 있어 최대의 주체가 된 작자를 알지 않으면 못 쓴다 했다. 물론 이것도 영화를 알기에는 중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수많은 영화 제작자를 전문적 이외에는 알 수는 없다. 전기한 바와 같이 아메리카 문명은 우리의 생활과 사고와는 너무도 떨어져 있고 아메리카의 영화 정책은 될 수 있는 한에서 국가 정책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메리카인의 기계화되고 모노폴리화된 영화가치보다도 흥행가치에 중점을 둔 영화로 잠시 간은 재미있게 보내나 그 고화(考畵)가 우리에게 주는 한가지 의문은 자기 계급이 어디 있는지 똑바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1년에 수백의 영화를 만드는 할리우드의 예술가의 제작 양심은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 감명 깊을 수 있게 할까 또는 그들을 어떻게 하면 잘 울릴 수 있는가 하는 데 경향하고 있다. 지금까지 생각해 온 단순한 아메리카니즘도 아닌 면에 비통속적인 예술도 있는 한편 관객의 신념을 쉽사리 부수게 하는 오락도 있는 것을 우리는 날카롭게 판단하지 않으면 못 쓴다. 아메리카 영화에 있어서는 탄압을 당한 몇 명의 예술가의 영화 외에는 모두 우리의 사상보다도 퇴보된 것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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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재와 주인공을 모두 자본주의 문명과 사회에 충실하게 하고 그것을 옹호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우리의 선입감이 아메리카 영화라면 곧 예술 또는 오락이라고 믿는데 그 제작자 자체는 미안하게도 경제를 위한 산물로 알고 있다. 허위와 속악한 점도 구라파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게 많다. 옛날 영화에는 혁명을 취급한 것, 농업개량과 경영에 관한 것, 인종 문제와 지리적 해방 또는 노동자의 생활을 그린 영화도 간혹 있었으나 요즘에는 겨우 인간 생활과 죽음의 신비 정도의 영화를 만들고 만족하는 모양이다. 나는 또다시 아메리카 영화가 영화예술과 오락의 발전을 위하여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고 기계문명의 지반을 벗어나기를 급하게 애쓰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러면 아메리카 영화를 불안 없이 자본주의 문화일지언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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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194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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