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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역사강화 ◈
◇ 제이편( 第二編) 중고(中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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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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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編[제이편] 中古[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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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一章[제십일장] 高麗[고려]와 契丹[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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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一[삼일], 高句麗[고구려] 恢復[회복]의 理想[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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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고려] 太祖[태조] 通三[통삼]의 業[업]을 이루매, 힘써 前朝[전조] 의 弊風[폐풍]을 없애고, 청신하고 간소한 정치를 행하여 國力[국력]과 民氣[민기] 를 기르기에 힘쓰며, 더욱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함으로써 國策[국책]을 삼아서, 北方[북방]에서 새로 일어난 契丹[계단]을 대항하기 위 하여 정신과 물질 두 쪽으로 여러 가지 준비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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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태조] 죽고 자손이 그 정신을 받아서 혹 軍備[군비]를 流失[유실] 하게 하고 혹 支那[지나]의 새 나라인 宋[송]으로 더불어 交際[교제]를 힘쓰더니, 太祖[태조]로부터 四代[사대] 약 四〇[사영]년 만에 成宗[성종]의 때에 이르러 制度[제도]를 그대로 본떠와서 폐단이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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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二[삼이], 契丹[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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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계단] 은 鮮卑[선비]의 一族[일족]으로 고구려의 未年[미년]에 그 西方[서방] 인 夭水[요수]의 上流[상류]에 居[거]하다가, 王太祖[왕태조]의 建國[건국] 하기 조금 전에 와 짝 강대하여서 渤海[발해]를 삼키고 거기 東丹國[동단국]을 만들어 一子[일자]를 보내어 두니, 이로부터 고려와 契丹[계단] 과가 境界[경계]를 接[접]하여 불안한 공기가 그 사이에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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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太祖[태조] 二〇[이영]년에 契丹[계단]은 國號[국호]를 遼[요]라고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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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三[삼삼], 徐熙[서희]와 姜邯贊[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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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고려] 는 國初[국초]로부터 遼[요]에 대하여 크게 敵愾心[적개심]을 부렸으나 遼[요] 한참 支那[지나]의 內地[내지]를 攻略[공략]하는 중이 므로 모르는 체하더니, 宋[송]과 遼[요] 交戰[교전]하매 高麗[고려]항상 宋[송] 의 편을 드니,成宗[성종] 十二[십이]년 (약 九四〇[구사영] 년 전)에 遼[요] 의 成宗[성종]이 蕭遜寧[소손녕]을 보내서 八〇萬兵[팔영만병]을 거 느리고 淸泉江[청천강] 근처로 들어와서, 고구려의 故土[고토]는 신라를 대신한 고려의 가질 것이 아니니 내어놓으라 하거늘, 王[왕]이 西京[서경]으로 나가서 防禦[방어]도 하고, 일변 中軍使[중군사] 徐熙[서희]를 契丹[계단]의 陣 [진]으로 보내서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者[자]이매 舊土[구토]를 찾는다 하면 遼[요]에서 우리에게 돌려보낼 것이 있으리라 하여 저를 屈伏[굴복]시키고, 여러 번 옥신각신하다가 마침내 遼[요]의 年號[연호]를 쓰기 로하고, 그 대신 압록강 以東[이동]을 완전히 고려의 所屬[소속]으로 協定[협정] 하고 和[화]를 맺었다. 그러나 이 뒤에도 고려의 北進[북진]이 쉬지 아니하고, 또 宋[송]하고 좋게 지내기를 마지아니하매, 十七[십칠]년 만에 遼[요] 의 成宗[성종] 四〇蠻軍[사영만군]으로써 다시 入寇[입구]하여, 王[왕] 은 羅州[나주] 로 避難[피난]하고 敵軍[적군]은 開經[개경]까지 들어왔다가, 都巡撫使[도순무사] 楊規[양규]에게 大敗[대패]를 당하고 물러났으며, 또 八[팔]년 만에 遼[요] 蕭排押[소배압]으로 하여금 二〇萬軍[이영만군]으로써 침입하게 하였으나, 西北面行營[서북면행영] 都統使[도통사] 姜邯贊[강감찬]에서 大敗[대패]되어, 겨우 수천명을 남겨가지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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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에도 遼[요]가 여러 번 와서 집적거렸으나 별수 없었으며, 이중에 고려도 疲斃[피폐]하여 遼[요]의 뜻을 거스르지 아니하여서 九[구]백 년쯤 전으로부터는 遼[요]쪽의 걱정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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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안에 渤海[발해]의 기친 백성들이 기회 있는 대로 故國[고국]을 興復[흥복] 하려 하여, 正安國[정안국]‧興遼國[흥요국]‧大元國[대원국]등을 세웠으나, 다 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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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藏唐京[장당경]에 對[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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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講話[본 강화] 第一章[제일장] 揷入寫眞[삽입사진] 說明[설명] 중의 「藏唐京[장당경] 」에 대하여 誤[오]가 아니냐고 물으시는 이가 있기로 著者[저자]에게 이 말을 傳[전]한 즉 唐藏[당장]으로 쓰는 것은 後世[후세]의 門籍[문적]에 보이는 바요, 혹 莊莊[장장]이라고까지 쓴 데도 있지마는, 이에 관한 最古[최고] 文獻[문헌]인 「三國遺事[삼국유사]」 舊版本[구판본]에는 분명 「藏唐京[장당경]」이라고 적어서 이를 좇은 것이라 하기 玆[자]에 原本[원본] 의 寫眞[사진]을 並揭[병게]하여 世[세]의 疑惑[의혹]을 풀기로 하였다. 또 錯誤[착오]나 不當處[부당처]에 대하여는 今後[금후]에도 아무 어려워하실 것 없이 叱正[질정]과 問難[문난]을 더하여 주시기를 著者[저자] 는 熱望[열망]하며, 이렇게 鞭韃[편달]과 敲推[고추]가 相應[상응]하여 一瑕瑾[일하근] 一缺陷[일결함]씩이라도 補正[보정]되면 그 幸[행] 著者[저자] 의 私[사]에 屬[속]할 뿐만 아니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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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二章[제십이장] 女眞[여진]과의 關係[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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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四[삼사], 女眞[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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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발해] 의 屬民[속민]이던 靺鞨人[말갈인]이 뒤에 女眞[여진]이란 이름으로써 고려의 東北境[동북경], 시방 咸興[함흥] 以北[이북]에 몰켜 살면서 고려를 父母[부모]의 나라라 하여 貢[공]을 바치고 지내더니, 시방부터 九[구] 백 년쯤 전에 고려와 契丹[계단]이 疲弊[피폐]한 틈을 타서 세력이 늘어가지고 자주 변방의 근심을 지으니, 고려에서 이를 성가셔 하여, 鴨綠江口[압록강구] 로부터 定州[정주]를 거쳐서 正平[정평]의 都連浦[도연포]에 까지 돌로 長城[장성]을 쌓고 그 침입을 방비하였으나, 오히려 베개를 높이하고 편안히 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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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五[삼오], 尹瓘[윤관]의 九城[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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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一大征伐[일대정벌]을 행하여 禍根[화근]을 뽑아 버릴 양으로 오래 준비를 하다가, 睿宗[예종][이]년 (약 八二〇[팔이영]년 전)에 尹瓘[윤관]을 都元帥[도원수]로 하여 十七[십칠]만 大軍[대군]을 거느리고 長城[장성]을 넘어서 女眞人[여진인]을 치니, 女眞人[여진인]이 크게 두려워하여 멀리 도망하거늘, 시방 咸興[함흥] 저쪽에 英州[영주] ‧雄株[웅주] ‧福酒[복주] ‧吉州[길주] 以下[이하] 九城[구성]을 쌓고, 南方[남방]의 백성을 데려다가 거기 살게 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의 東北界[동북계]가 많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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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六[삼육], 遼[요]와 金[금]과 宋[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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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진 세력은 즉시 회복되고, 阿骨打[아골타]가 그 部將[부장]이 되매 遼[요]의 소微[미] 한 틈을 타서 女眞[여진]의 諸部[제부]를 통일 하여 睿宗[예종] 一〇[일영]년에 皇帝[황제]를 일컫고, 서울을 시방 吉林[길림]에 두고, 國號[국호]를 세워 金[금]이라 하며, 인하여 宋[송]하고 合力[합력] 하여 遼[요]를 멸하여 버리니, 이로부터 고려 도리어 女眞[여진]을 上國[상국] 대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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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와 宋[송]과 金[금]이 한참 결고틀 때에 그 要衝[요충]에 있는 고려의 地位[지위] 자못 重大[중대]하니, 진실로 實力[실력]과 指導者[지도자] 가 있었더면, 고려의 國運[국운]이 한없이 비약할 수 있었건마는, 이 좋은 판에 고려의 所得[소득]은 겨우 압록강 방면의 약간 토지를 늘린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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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三章[제십삼장] 高麗[고려]의 病弊[병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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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七[삼칠], 敎幣[교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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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의 고려는 워낙 契丹[계단]과 女眞[여진]에게 二[이]백 년 가까이 졸려서 진땀이 빠진데다가 內部[내부]에도 여러 가지 缺陷[결함]이 있어 더욱 기운을 쓰지 못하였다. 첫째 宗敎[종교]의 弊[폐]이니, 신라 이래로 불교의 지위 높고, 더욱 고려에서는 王室[왕실]하고 깊은 관계를 맺어서 권력이 있으매, 寺院[사원]과 僧徒[승도] 분수 없이 늘어서 財用[재용]이 濫費[남비] 되고 遊食民[유식민]이 많아지며, 또 外患[외환]과 內愚[내우] 人心[인심] 이 불안하매, 公私[공사]로 祈禱[기도] 盛行[성행]하여 國力[국력]을 깸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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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形式[형식]만의 불교는 고려의 국력과 민심을 약하게 만든 큰 원인의 하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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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불교의 숭상이 盛[성]함을 인하여 公私[공사] 合力[합력]으로 오래 佛敎書籍[불교 서적] 의 좋은 것을 天下[천하]에서 모아다가 顯宗[현종] 十二[십이] 년(약 九一〇[구일영]년 전)으로부터 전후 六〇[육영]여 년의 積功[적공]으로써 <大藏經[대장경]> 六[육]천 권 가까이를 板刻[판각]하고, 그 위를 대어서 文宗[문종]의 王子[왕자]로 出家[출가]하여 僧[승]된 大覺國師[대각국사] 義天[의천]이 다시 遼[요]와 宋[송]과 日本[일본]등에서 佛典[불전] 의 主釋書[주석서]를 모아 들여서 宣宗[선종][삼]년 (약 八五〇[팔오영] 년 전)으로부터 시작하여 <續大藏經[속대장경]> 四[사]천 七[칠] 백 여권을 刊行[간행]한 것 같음은 세계 文化史[문화사]에 特筆[특필] 代書[대서] 할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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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大藏經[대장경]>이란 것은 佛敎[불교]의 標準[표준]되는 書籍[서적]을 모은 叢書[총서]를 부르는 이름이니, 그 板刻[판각]이 高麗[고려]보다 좀 먼저 支那[지나]의 宋[송]에 있었으나 여러 가지로 缺陷[결함]이 많더니, 고려의 新板[신판]은 卷數[권수]로나 內容[내용]으로나 또 板式[판식]으로나 매우 完全[완전]한 攻[공]을 거두어서, 다만 前[전]에만 없었을 뿐 아니라, 어느 意味[의미]로는 後[후]에도 다시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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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八[삼팔], 文弱[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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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처음 일어나매, 太祖[태조] 크게 剛健[강건][질][박]의 氣風[기풍]을 고취하였으나, 신라 이래의 文雅[문아] 崇尙[숭상]이 얼른 人心[인심]에서 빠지지 아니하고, 九八〇[구팔영]년 전 光宗[광종]쯤으로부터 文學[문학]으로써 人材[인재]를 뽑게 된 뒤에, 차차 重文經武[중문 경무] 하고, 避勞就逸[피로 취일] 하는 惡風[악풍]이 일반에 퍼지게 되며, 더욱 상류 사회 의 宋[송]을 닮으려 하는 熱[열]은 新羅人[신라인]의 唐[당]에 대하여서 보다 甚[심]하여 국민 정신의 頹廢[퇴폐]를 걷잡을 수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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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學[유학]과 漢文[한문]의 발달이 文宗朝[문종조]에 이르러 현저 하여져서 國學[국학] 이외에 私學[사학]이 處處[처처]에 있고, 그중에 崔沖[최충] 門庭[문정] 이 가장 著名[저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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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國學[국학]이란 것은, 국가에서 시설한 교육 기관이니, 國都[국도]에는 國子監[국자감](후에 成均館[성균관])이란 最高[최고]學府[학부]가 있고, 地方[지방]에도 다 鄕學[향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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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변 書籍[서적]의 蒐集[수집]이 크게 숭상되어, 天下[천하]의 珍書[진서] 를 다 고려로 몰리니, 支那[지나]에서 唐米[당미]의 난리 통에 없어진 古書[고서] 를 고려로서 얻어가는 것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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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九[삼구], 內訌[내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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矯弊[교폐]와文弱[문약]에 가뜩이나 民氣[민기]가 까부러지는 중에, 睿宗[예종] 이 죽고 仁宗[인종]이 서면서부터 權臣[권신]의 內訌[내홍]이 끊이지 않고, 또 그네의 跋扈[발호]가 심하여 朝廷[조정] 안의 일이 머리를 싸맬 지경이 매, 드디어 생각이 다른 데로 미칠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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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四章[제십사장] 崔氏[최씨]의 執權[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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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〇[사 영], 大爲國[대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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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上下[상하]가 濁亂[탁란]하여, 인민의 生計[생계]가 결딴나고, 국가의 理想[이상]이 없어지려 하매, 여기 깊은 感慨[감개]를 가지는자 인민의 중에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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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人[고려인]에는 古來[고내]로 吉地[길지]에 國都[국도]를 두면 三六國[삼육국] 이 來朝[내조]하리라는 信念[신념]이 있더니, 西京[서경] 平壤僧[평양 승] 妙淸[묘청]과 日者[일자] 白壽翰[백수한]이 이로써 王[왕]을 움직여서 王[왕]을 西京[서경]으로 데려다가 妙淸[묘청]의 新國運動[신국운동] 更始一新[경시일신] 의 계획을 진행하려하다가 반대파에게 막혀서 못 되매, 仁宗[인종] 十三[십삼]년 (약 八[팔]백년전)에 저희끼리 平壤城[평양성]을 웅거하여 나라를 세워 이름을 大爲[대위]라 하고, 年號[연호]를 天開[천개]라 하고, 純民重的[순민중적]으로 새 세상을 만들어보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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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준비가 적어서 계획이 썩썩 나가지 못하고, 變報[변보] 이르매 朝廷[조정]에서 金富軾[김부식]을 元帥[원수]로 하여 가서 치게 하여, 一[일] 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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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一[사일], 文武[문무]의 軋轢[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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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宗[인종] 의 子[자] 毅宗[의종]의 서매, 侫倖[영행]을 가까이 하여 遊樂[유락]을 일삼고, 또 文臣[문신]을 近幸[근행]하여 武官[무관]을 굴  하 매 武官[무관] 의 不平[불평]이 쌓이더니, 二四[이사]년 八[팔]월 延福亭[연복정] 놀이 끝에 大將軍[대장군] 鄭仲夫[정중부]가 亂[난]을 일으켜서 文臣[문신]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왕을 내치고 그 아우를 세우며, 政權[정권]을 온통 武臣[무신]의 손에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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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文學[문학]이 납작하여 짐과 한가지로 道義[도의] 무너져서 逆臣[역신] 叛將[반장]이 뒤를 이었으며, 朝廷[조정]에는 武臣[무신]끼리의 정권 쟁탈이 走馬燈[주마등]처럼 變轉[변전]하다가 明宗[명종] 二六[이육] 년(약 七三〇[칠삼영]년 전)에 崔忠獻[최충헌]이 仲夫[중부]의 餘黨[여당]을 말끔 치움에 미쳐 局面[국면]이 一新[일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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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二[사이], 崔氏[최씨]의 專政[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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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忠獻[최충헌] 이 권세를 잡으매, 私兵[사병]을 기르고 家臣[가신]을 둬서 大小[대소] 의 政務[정무]를 집에 앉아 처리하니, 武臣[무신]의 權力[권력] 이 이에 이르러 極[극]하였으며,專權[전권]한지 二四[이사]년 간에 四王[사왕]을 세우고 二王[이왕]을 폐하여, 王[왕]은 다만 虛位[허위]를 지킬 뿐이요, 忠獻[충헌]을 臣禮[신례]로 대접하지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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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獻[충헌]으로부터 四世[사세] 六〇[육영]여 년간을 崔氏[최씨]가 집권 하는데, 여러 가지 弊害[폐해]도 있었으나, 이 때문에 內訌[내홍]이 그치고 統一[통일] 한 방침으로써 曠前[광전]한 外患[외환]을 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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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五章[제십오장] 蒙古[몽고]의 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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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三[사삼], 蒙古[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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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氏[최씨] 의 政事[정사]는 專横[전횡]한 대신 簡素[간소]도 하여, 文華[문화] 의 病[병]을 하마 고치고 국가의 元氣[원기]를 혹시 소생할 듯 하더니, 마침 北方[북방]에 蒙古[몽고]라는 새 세력이 일어나서 外憂[외우] 때문에 다른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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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는 시방 外蒙古[외몽고]의 斡難河[알난하]를 점령하여 遼[요]와 金[금]을 섬기더니, 시방부터 六七〇[육칠영]년쯤 전에 鐵目眞[철목진] 이란자 四方[사방]을 정복하여 成吉思汗[성길사한]이 되고, 그 子[자] 窩闊台[와할태]에 이르러 金[금]을 滅[멸]하고 드디어 大國[대국]을 이루니, 이 것 이 高宗[고종] 二一年[이일년](약 七[칠]백 년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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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成吉思汗[성길사한]은 强盛[강성]한 君主[군주]의 義[의]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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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가 일어나매 東方[동방]의 大局[대국]이 온통으로 흔들려서, 高宗[고종] 초년으로부터 金[금]의 叛將[반장]인인 浦鮮萬奴[포선만노]의 東進國[동진국](시방 間島[간도])과 契丹[계단]의 遺民[유민]인 耶不斯[야부사]의 大遼收國[대요수국](시방 滿洲[만주]의 農安[농안]부근) 등이 여러 번 걱정이 되었으나, 金就礪[김취려]‧金希磾[김희제] 등 名將[명장]이 있어 번번히 平定[평정] 함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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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四[사사], 江華[강화]로 들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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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고종] 十八[십팔]년경으로부터 몽고의 禍[화] 차차 커지매 忠獻[충헌]의 子[자] 崔瑀[최우] 蒙古兵[몽고병]의 水上[수상]에 弱[약]함을 이용 하여 王[왕]을 끌고 江華島[강화도]로 들어가 居[거]하니 , 이 뒤 三〇[삼영] 년 동안에 몽고 大軍[대군]으로 침입한 것이 전후 여섯 번이요, 그 말굽이 南[남]으로 慶州[경주]에까지 미쳤으되 몽고는 항상 江華[강화]의 對岸[대안]에 와서 出陸[출륙]을 재촉할 뿐이요, 島內[도내]의 一尺土[일척토] 를 밟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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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五[사오], 高麗文化[고려문화]의 頂點[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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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고종] 一代[일대] 四〇[사영]여 년 間[간]은 가장 심히 남에게 몰려 지낸 시기요, 또 그 三分[삼분]의 二[이]를 江華[강화]에 가서 蟄居[칩거] 하였지마는, 氷雪[빙설]중에서 梅花[매화]가 피는 것처럼 고려의 文化[문화] 는 高宗[고종]의 前後[전후]에 가장 爛漫[난만]이 發揚[발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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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文化[고려문화]의 큰 자랑은 活字[활자]인데, 시방까지 아는 바로는 高宗[고종] 二一[이일]년 (약 七[칠]백년전)의 <詳定禮文[상정예문]>을 印刷[인쇄] 한 것으로써 그 始原[시원]을 삼으니, 이만하여도 西洋[서양] 보다 앞서기 약 二二〇[이이영] 년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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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西洋[서양]에서는 西曆[서역] 紀元[기원] 一四五〇[일사오영]년경을 活字[활자] 創造[창조]의 年時[연시]로 하니 고려 高宗[고종] 二一[이일] 년은 西曆[서역]으로 一二三四[일이삼사] 년에 當[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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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宗朝[현종조]의 <大藏經板[대장경판]>이 高宗[고종] 十九[십구]년에 몽고의 兵火[병화]에 탄 것을 二三[이삼]년으로부터 再刻[재각]에 착수 하여 十六[십육] 년만에 六[육]천 五[오]백여 권, 十七[십칠]만여 面[면]을 완성 하니, 이것이 世界[세계] 現存[현존] 最高[최고] 最善[최선]의 經板[경판]으로 有名[유명]한 <高麗板大藏經[고려판대장경]>이란 것이요, 시방 伽倻山 [가야산] 海印寺[해인사]에 있는 것이며, 高麗瓷器[고려자기]도 그 顔料[안요] 의 神秘[신비]함과 手法[수법]의 精妙[정묘]함으로써 세계에 짝이 드물다 할것인데, 그 가장 上品[상품]의 것은 대개 江華時節[강화시절]에 만든것이다. 또, 江華[강화]에 있는 상류 사회의 생활은 豪華[호화]와 奢侈[사치] 를 極[극]하고 伎樂[기악]‧假面戱[가면희]‧擊毬[격구]등 娛樂[오락]과 八關會[팔관회] ‧燃燈[연등] 등 儀式[의식]이 또한 江華[강화]에서 가장 성대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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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六章[제십육장][원]과의 關係[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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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六[사육], 蒙古[몽고]의 保護[보호]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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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氏[최씨] 의 몽고에 대한 策[책]은 가만히 물러나와서 그 군사를 늙 힘이 있었으나, 몽고도 三[삼], 四〇[사영]년을 두고 끈덕지게 손을 떼지 아니하고 늘 귀찮게 구니, 이 때문에 民生[민생]이 크게 困憊[곤비]하여 崔氏[최씨] 의 政策[정책]을 차차 괴롭게 여기더니, 高宗[고종] 四五[사오]년(약 六七〇[육칠영] 년 전) 崔氏[최씨]가 거꾸러지고 政權[정권]이 오래간만에 王[왕]에게로 돌아오면서, 드디어 蒙古[몽고]에 屈[굴]하기를 決[결]하고 太子[태자] 를 보내어 和[화]를 청하니, 蒙古主[몽고주] 忽必烈[홀필열]이 意外[의외] 와 같이 생각하여 待遇[대우]를 厚[후]히 하고, 인하여 高宗[고종] 의 訃報[부보] 이르매 將卒[장졸]로 하여금 太子[태자]의 일행을 모셔다내고, 고려 마침내 몽고의 保護國[보호국]이 되어 蒙兵[몽병]이 물러가고, 元宗[원종] 十一[십일]년(약 六六〇[육육영]년 전) 도읍을 다시 開經[개경]으로 돌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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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七[사칠], 東征[동정]
 
64
元宗[원종] 이 出陸[출륙]하던 이듬해에 몽고 都[도]를 燕京[연경](시방 北平[북평])에 정벌하기를 꾀하거늘, 고려에서도 高宗[고종] 이래도 倭寇[왜구]에게 沿海地方[연해지방]이 성가심을 받언 터이매, 이에 同意[동의] 하여 수년 동안 준비를 한 후, 元宗[원종]이 죽고 忠烈王[충렬왕]이 서던 해 (약 六五〇[육오영 년전]) 一〇[일영]월에 金方慶[김방경]으로 하여금 戰艦[전함][구]백 隻[척]에 麗蒙聯合軍[여몽연합군][삼]만 三[삼]천을 싣고 合浦[합포](시방 馬山[마산]부근)에서 떠나서 對馬[대마]와 壹岐[일기] 를 차례로 무찌르고, 시방 九州[구주]의 北岸[북안]으로 달려들어 博多[박다] 를 점령하니, 一〇[일영]월 二〇[이영]일 夜[야]에 風雨[풍우]가 大作[대작] 하여 우리 戰艦[전함]이 半[반]이더 엎지러진 故[고]로 드디어 공 없이 군사를 돌이켰다.
65
이 뒤 七[칠]년 만에 규모를 크게 하여 다시 연합군으로써 日本[일본]을 가서 쳤으나, 여름이라 疫疾[역질]이 유행하고 또 大風[대풍]을 만나서 사람과 배를 만ㅁㅎ이 잃고 전과 같이 虛還[허환]하였으며, 세 번째 出征[출정]을 준비하다가 元主[원주] 忽必烈[홀필열](世祖[세조])이 죽으매 그만 집어치웠다.
 
 
66
四八[사팔], 高麗[고려]의 疲弊[피폐]
 
67
忠烈王[충렬왕] 이후로는 王[왕]이 代代[대대][원]의 公主[공주]를 장가 들어서 元[원]의 서울에 別邸[별저]를 두고 많이 거기 있으매, 國定[국정] 이 날로 버스러지고 민심이 더욱 풀어졌으며, 王[왕]이 오고감과 元[원] 의 使者[사자]가와서 討索[토색]함에 國財[국재]가 다 들어가고, 일변 紀綱[기강] 이 해이하여 宮掖[궁액]과 官使[관사] 권려긍로써 土地[토지]를 兼倂[겸병] 하 매, 人民[인민]의 生計[생계]가 또한 몰못되어가서 고려의 疲弊[피폐] 점점 極亢[극항]에 올랐으며, 일허게 生活[생활]이 窘艱[군간] 하여지는대로 上下[상하] 廉恥[염치]를 돌보지 아니하여, 고려의 國家[국가] 經濟[경제] 와 道德[도덕] 兩方[양방]으로 다 破産[파산]치 아니치 못할 위기에 임하였었다.
68
이동안에 몽고의 風俗[풍속]이 저절로 많이 고려에 옮아 왔으며, 또 元[원] 의 판도는 歐羅巴[구라파]와 亞細亞[아세아]에 걸치고, 그 朝廷[조정]에는 世界[세계] 各國人[각국인]이 와서 벼슬살고 있었으므로, 먼 西方[서방] 의 文物[문물]도 元[원]의 서울을 거쳐서 고려로 들어온 것이 적지 아니하였다.
 
 
69
第十七章[제십칠장] 紅豆賊[홍두적]과 倭寇[왜구]
 
70
四九[사구], 恭愍王[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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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王[충렬왕] 이후로는 元[원]나라에 사위노릇 하는 덕에 六代[육대] 七〇[칠영] 여 년간 苟安[구안]하였더니, 약 六二〇[육이영]년 전에 恭愍王[공민왕] 이 서면서 元[원]나라의 찌그러져 감을 보고 國家[국가]의 中興[중흥]에 뜻을 두어서, 몽고의 風俗[풍속]을 부셔내고 元[원]나라 年號[연호] 를 쓰지 아니하고, 또 압록강‧두만강쪽의 아직 차지하지 못한 토지를 거두어 들이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恭愍王[공민왕]의 이러한 할약은 무론 元[원] 의 좋아하는 바 아니지마는, 이때는 元[원]이 이미 衰境[쇠경]에 들어서 탄할 기운이 없고, 또 內亂[내란]이 나면 고려의 援兵[원병]을 얻어 가 는 터이매, 알고도 모르는 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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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〇[오영], 紅豆賊[홍두적]
 
73
[원] 나라 未年[미년]에 叛徒[반도]가 그 四方[사방]에서 일어난 중, 北方[북방]에는 紅豆賊[홍두적]이란 자 가장 유력하더니, 元[원]에게 쫓겨 恭愍王[공민왕] 一〇[일영]월에 그 무리 一〇[일영]여만이 고려로 침입 하여, 岊嶺[절령](시방 瑞興[서흥]의 慈悲嶺[자비령])을 넘거늘, 王[왕]이 福州[복주](시방 安東[안동])로 피란하고, 賊[적]은 開經[개경]으로 들어와서 數月[수월] 동안 분탕질을 하다가, 摠兵官[총병관] 鄭世雲[정세운] ‧都元帥[도원수] 安祐[안우]에게 敗[패]하여 太半[태반]이 죽고, 나머지는 압록강을 건너 나가다가 元軍[원군]에게 부서져 大亂[대란]이 平定[평정]하였다. 그런 宮闕[궁궐] 과 閭巷[여항]이 다 兵火[병화]에 걸린 故[고]로, 王[왕]은 尙州[상주] ‧淸州[청주] 등지로 돌다가 이듬해 二[이]월에야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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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一[오일], 倭寇[왜구]
 
75
紅豆賊[홍두적] 의 亂後[난후]에 小小[소소]한 內亂[내란]도 있고, 또 女眞[여진] 의 근심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이때의 가장 큰 걱정은 실로 倭寇[왜구] 의 猖獗[창궐]함이었다. 南方[남방]의 沿海[연해] 州邑[주읍]은 무론 이어니와, 그 거정이 차차 北[북]으로 번져서 江華[강화] ‧喬桐[교동] ‧昇天府[승천부](시방 豊德[풍덕])와 같은 京都[경도] 咫尺[지척]의 곳에도 미치며, 지나는 곳에 才物[재물]만 빼앗아 가는 것 아니라 婦女[부녀]와 小兒[소아] 를 屠戮[도륙]하여 버리므로, 全羅道[전라도]와 楊廣道[양광도](시방 京畿[경기])의 海邊[해변] 고을이 텅비기에 이르렀다. 이때 고려는 오래 平安[평안]에 젖고 軍備[군비]가 虛疎[허소]하여서 倭寇[왜구]와 다닥드려 敗[패] 하지 아니하는 자 없으되, 오직 崔瑩[최영]과 李成桂[이성계]는 싸우면 바늗시 이겨서 그의 힘으로 南方[남방]이 다시 살게 되니, 이러므로 兩人[양인] 의 威望[위망]이 아무보다도 무거웠다.
76
恭愍王[공민왕]은 본디 英明[영명]한 資稟[자품]으로 처음에는 國運[국운]을 돌리기에 자못 노력하더니, 어려번 禍亂[화난]을 치뤄서 마음이 약하여지고, 또 權臣[권신]의 專恣[전자]에 데어서, 中年[중년] 이후에는 僧[승] 辛旽[신돈]을 擧用[거용]하여 國定[국정]을 맡겼더니, 旽[돈]이 忠良[충량]을 몰아내고 國政[국정]을 濁亂[탁난]하게 하다가, 마침내 不軌[불궤]를 꾀함을 보고는 王[왕]의 정치에 대한 생각이 더욱 倦怠[권태]를 더하였다.
 
 
77
第十八章[제십팔장] 高麗[고려]의 衰亡[쇠망]
 
78
五二[오이], 明[명]나라 일어나다
 
79
恭愍王[공민왕] 의 十七[십칠]년(약 五六〇[오육영]년 전)에 저 金陵[금능](시방 南京[남경])을 웅거하였던 朱元璋[주원장]의 군사가 燕都[연도] 로 달려 드어 元[원]을 몰아내고, 元璋[원장]이 金陵[금능]에서 帝位[제위]에 오르고 國號[국호]를 明[명]이라 하니, 元[원]은 쫓겨서 上都[상도](시방 開平[개평])로 갔다가 다시 應昌[응창](內蒙固[내몽고] 達里泊[달리박] 근처)으로 옮겼는데, 이것을 北元[북원]이라고 일컫는다. 恭愍王[공민왕]은 二三[이삼]년에 죽고, 禑王[우왕]이 뒤를 이었다.
 
 
80
五三[오삼], 崔瑩[최영]과 李成桂[이성계]
 
81
백 년동안이나 北方[북방] 근심의 保障[보장]을 삼던 元[원]이 별안간 쭈 부러지고 서투른 明[명]이 大陸[대륙]을 차 앉으매, 고려의 조정에서는 어떻게 國策[국책]을 정해야 할지 몰라서 議論[의논]이 不一[불일] 하였으며, 더욱 고려의 조정에서 가장 重望[중망]을 띠고 있는 崔瑩[최영]과 李成桂[이성계] 兩人[양인]이 여기 대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하였다. 崔氏[최씨] 는 일찍 救援兵[구원병]을 데리고 元[원]으로 가서 당시 支那[지나] 의 內情[내정]을 잘 알므로, 以爲[이위]하되 元[원]과 明[명]의 형세가 定[정] 한 것 아니매 마땅히 元[원]을 업고 明[명]을 누르면서 이 기회에 遼東[요동]으로 進出[진출]하여 國運[국운]을 새로이 하자 함에 대하여, 李氏[이씨] 는 明[명]이 이미 中原[중원]을 얻었으니 우리는 大勢[대세]에 응 하여 元[원]나라에 대하던 태도를 옮겨서 明[명]나라에 쓰면 그만 편할 것 이어 늘, 구태여 위험을 무릅쓸것이 무엇이냐 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82
五四[오사], 威化島[위화도] 回軍[회군]
 
83
한옆으로 明[명]은 정도 들기 전에 연방 고려에 향하여 달라는 것이 많을 뿐 아니라, 압록강의 支流[지류]인 波猪江[파저강](시방 佟佳江[동가강]) 邊[변]에 鐵嶺衛[철령위]를 세우고, 고려가 四[사]백 년 노력으로써 겨우 거두어 가진 압록강 유역을 가개려 하매, 崔瑩[최영]이 이제는 참을 수 없다하여, 禑王[우왕] 十四[사]년(약 五四〇[오사영]년 전) 四[사]월에 政明[정명] 의 師[사]를 일으켜 스스로 八道都統使[팔도도통사]가 되어, 王[왕]으로 더불어 平壤[평양]으로 나아가 앉고, 曺敏修[조민수]를 左軍都統使[좌군 도통사], 李成桂[이성계]를 右軍都統使[우군도통사]로 하여 五萬軍[오만군]을 거느리고 浮橋[부교]로써 압록강을 건너서 遼東[요동]을 取[취]하게 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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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간에 李成桂[이성계]一派[일파]에서는 음모를 꾸며서 大兵[대병] 이 鴨綠江上[압록강상] 의 威化島[위화도]에 이르러서는 다시 前進[전진] 하지아니하고, 曺敏修[조민수]를 달래어 雨[우]에 물을 건널 수 없다는 핑계로 천단히 回軍[회군]을 決行[결행]하여, 六月朔[육월삭]에 京都[경도] 近郊[근교] 로 들어와 가지고, 협박으로써 崔瑩[최영]을 高峰[고봉](시방 高陽[고양])으로 귀양 보내고, 王[왕]을 喬桐[교동]으로 내쳤다가 인하여 죽이고, 명색으로 王[왕]을 세우나 天下[천하]는 이미 李氏[이씨]의 손에 들어갔다.
85
이로부터 李氏[이씨]가 안으로 國王[국왕]의 廢立[폐립]과 朝臣[조신] 의 黜陟[출척]을 마음대로 하고, 밖으로 明[명]나라의 歡心[환심]을 사기에 힘써서, 四[사]년 만에 모든 준비가 완성되매, 恭讓王[공양왕][사]년, 시방부터 약 五四〇[오사영]년 전에 마지막 反對黨[반대당]의 유력자인 鄭夢周[정몽주] 를 죽이고, 七[칠]월에 群臣[군신] 推戴[추대]의 形式[형식]으로써 李成桂[이성계] 王位[왕위]에 올라서 舊王[구왕]을 내치고 國號[국호] 를 아직 高麗[고려]로 쓰다가, 이듬해에 비로서 朝鮮[조선]이라고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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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고려]는 이렇게 三四王[삼사왕] 四七五[사칠오]년 만에 陰謀[음모] 로써 얻었던 나라를 陰謀[음모]에 빼앗겼다[신라의 降[강]을 받을 때 로부터 四五七[칠사오칠] 년].
 
 
87
第十九章[제십구장] 高麗[고려]의 社會[사회]와 文化[문화]
 
88
五五[오오], 社會[사회]
 
89
고려의 一代[일대]는 조선 사회의 發達上[발달상]에 자못 의미가 깊으니, 첫째 신라의 민족 통일이란 것이 南方[남방]에 치우쳐서 地城[지성]으로 봐도 元山[원산]‧平壤[평양]을 넘지 못하였었는데, 고려는 北方[북방]을 근거로 하여 興起[흥기]한만큼, 一代[일대][근][오]백 년 동안에 비록 고구려의 舊有[구유]를 다 찾지 못하였으나, 그 甚[심]한 受難[수난]의 중에 오히려 豆滿[두만]‧鴨綠[압록] 兩江[양강]의 가에까지 국토를 넓히고, 또 신라에는 떨어져 나갔던 고구려와 및 그 계승자인 渤海[발해]의 北方[북방] 同族[동족]을 거두어서 種族[종족]의 團合[단합]을 完成[완성]한 것은 다 注意[주의] 할 만한 일이다.
90
新羅時節[신라시절]까지 貴族[귀족]과 海外[해외]로 다니는 일부 小數人[소수인] 의 外[외]에는 姓氏[성씨]가 있지 아니하였는데, 高麗初[고려 초]에 이르러 庶民[서민]도 차차 姓氏[성씨]를 일컬었으니, 支那[지나]문물의 影響[영향]에도 말미암은 것이겠지마는, 또한 사회 발달의 趨勢[추세] 일것이다.
91
우리의 百[백]가지 病原[병원]은 그 밑을 캐어 보면 구차로 돌아가는데, 이 몹쓸 것도 실상 고려로부터 물려 내려오는 것이다.
 
 
92
五六[오육], 制度[제도]와 思想[사상]
 
93
成宗朝[성종조]에 支那[지나]의 制度[제도]를 참작하여 중앙에는 宰相[재상] 의 下[하]에 吏[이]‧兵[병]‧戶[호]‧禮[예]‧工[공]등 六部[육부]와 모든 司[사] 를 두어서 庶務[서무]를 분담하고, 지방에는 管內[관내] ‧中原[중원] ‧河南[하남] ‧江南[강남] ‧嶺南[영남] ‧嶺東[영동] ‧山南[산남] ‧海陽[해양] ‧朔方[삭방] ‧浿西[패서] 등 一〇道[일영도]의 下[하]에 州縣[주현]을 나누어서 百姓[백성]을 다스리게 하니, 이 制度[제도]의 뼈다귀는 李氏朝鮮[이씨조선]에까지 물려 갔으며, 建國[건국]한지 얼마 아니하여 光宗[광종][칠]년(약 九七〇[구 칠 영] 년 전)에 支那[지나]와 같이 科擧法[과거법]을 베풀어 製述[제술] ‧明經[명경] 등으로 人材[인재]를 취하여 立身榮達[입신영달]의 門路[문로] 를 삼으니, 이것도 그대로 李氏朝鮮[이씨조선]에 전하여 갔으며, 이밖에 조선의 制度[제도]와 典禮[전례]가 많고 고려에서 시작하여 後世[후세]에까지 내려갔으니, 대개 震域[진역]에 있는 국가의 法制[법제]가 고려에 이르러 비로소 整齊[정제]하였기 때문이다.
94
또 조정에 있어서 文官[문관]을 높이고 武官[무관]을 낮게 아는 思想[사상] 과 上下[상하]一線[일선]의 痼瘼[고막]을 이룬 風水[풍수]의 迷信[미신] 이 다 고려에서 생긴 것이며, 儒敎[유교]는 文宗朝[문종조](약 八五〇[팔오영] 년 전)의 崔沖[최충]에 일어났으나 中廢[중폐]되고, 忠烈王未[충열왕 말](약 六三〇[육삼영]년 전)에 安裕[안유](晦軒[회헌])가 朱子[주자] 의< 四書集註[사서집주]> 를 刊行[간행]하여 宋學[송학]을 倡[창]하더니, 未年[미년] 의 鄭夢周[정몽주](圃隱[포은])에 이르러 性理學[성리학]의 기초 확 입하여 朝鮮[조선]理學[이학]의 祖[조]로 일컬으니, 李氏朝鮮[이씨조선]의 思想界[사상계]에 있는 絶對專制者[절대전제자]인 朱子學[주자학]도 실상 고려에 성립하여 내려온 것이다.
 
95
〇 우리 風水[풍수] 信仰[신앙]은 新羅未[신라미]의 道詵[도선]에 비롯 하였다 하나, 그 一線的[일선적] 流行[유행]은 高麗[고려]이후의 일이다.
 
96
〇 支那[지나]의 儒學[유학]이 代[대]를 따라서 好尙[호상]이 같이 아니하니, 漢代[한대]에 字義[자의]를 밝힘으로 爲主[위주]하던 學風[학풍]을 訓 詁學[훈고학] 이라 함에 대하여, 宋代[송대]에 原理[원리]를 밝히 爲主[위주] 하던 學風[학풍]을 性理學[성리학]이라 한다.
 
97
[요]하건데 후일의 李氏朝鮮[이씨조선]은 모든 것으로 고려의 延長[연장] 일 따름이다.
 
 
98
五七[오칠], 文學[문학]과 藝術[예술]
 
99
고려의 文學[문학]은 신라의 뒤를 이어서 처음부터 볼것이 있으나, 그 발달은 文宗朝[문종조] 崔沖[최충] ─ 後[후]에 盛[성]하여 高宗[고종] 전후에 절정에 이르렀으니, 仁宗朝[인종조]의 金富軾[김부식] ‧崔惟淸[최유청], 毅宗朝[의종조] 의 崔讜[최당](雙明齋[쌍명재]) ‧崔允儀[최윤의] ‧金寬毅[김관의], 明宗朝[명종조] 의 李仁老[이인로],高宗朝[고종조]의 李奎報[이규보](白雲[백운]) ‧崔滋[최자](農隱[농은] ‧東山叟[동산수] ‧拙翁[졸옹]) ‧李承休[이승휴](動安居士[동안거사]) ‧金克己[김극기] 등은 당시를 대표하는 文士[문사]이며, 忠烈王朝[충렬왕조] 의 李齊賢[이제현](益齋[익재]), 忠肅王朝[충숙왕조] 의 李穀[이곡](稼亭[가정]) ‧崔瀣[최해](猊山[예산]), 恭愍王朝[공민왕조]의 李崇仁[이숭인](陶隱[도은]) ‧李穡[이색](牧隱[목은]) 등이 다 一代[일대]의 巨手[거수] 이었다.
100
仁宗[인종] 二三年[이삼년](약 七九〇[칠구영]년 전)에 金富軾[김부식] 이< 三國史記[삼국사기]> 를 만드니, 이것이 現存[현존]한 古史[고사]의 가장 오랜 것이요, 그보다 一四〇[일사영]년을 뒤져서 忠烈王時[충렬왕시]에 僧[승] 一然[일연]이 <三國史記[삼국사기]>의 빠진 것을 모아서 < 三國遺事[삼국유사] 를 만들어서 稽古[계고]의 要門[요문]이 되었다.
101
고려에는 書家[서가] 많되 前期[전기]에는 肅宗朝[숙종조]의 坦然[탄연](大鑑國師[대감국사])과, 後期[후기]에는 恭愍王時[공민왕시]의 韓脩[한수] ‧混修[혼수](智雄尊者[지웅 존자] ‧幻庵[환암])이 가장 유명하며, 畵家[화가]에는 仁宗朝[인종조]의 李寧[이녕]이 가장 드러나서, 宋[송]에 가서 크게 徽宗[휘종] 의 稱賞[칭상]을 얻었으며, 恭愍王[공민왕]은 書畵[서화]에 다 능하고 더욱 畵[화]는 格[격]이 높고 技精[기정]하여 神品[신품]으로써 일컫는다.
 
102
〇 徽宗[휘종]은 宋[송]의 第八世[제팔세] 皇帝[황제]니, 君王[군왕]으로는 잘 자니 못하였으나, 畵技[화기]로는 有名[유명]한 이이다.
【원문】제이편( 第二編) 중고(中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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