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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부모들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23권  24권  25권  26권  27권  28권  29권  30권  31권  32권  33권  34권  35권 36권  37권  38권  39권  40권  41권  42권  염상섭

1. 부모들

1
경애 모친은 경찰서에서 곧 내보낸다는 말에 지키고 있다가 마침 나오는 딸을 데리고 집으로 가려 했으나, 경애가 이리로 온다니까 상점 구경겸 따라온 것이다.
 
2
이 마님은 병화를 앞세우고 장사를 한다는데, 그리 찬성도 안하였으나 병화 따위와 깊은 사이가 생길까보아 애를 쓰는 판에, 어제 딸이 여기서 잤다는 말을 오늘 아침에 듣고 내심에 불쾌도 하거니와 더 애가 쓰이는 것이다. 그러나 다친 사람을 병구완하느라고 그랬다는 데야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데, 아까 덕기에게 자세히 들은즉 필순의 집 식구는 다아 나가고 둘이만 있었다고 하니 이제부터는 가만 내버려둘 수 없다고 속으로 앓는 것이다.
 
3
첫째 이 상점은 상훈이 벌여준 것으로 믿는 터이다. 피혁이 돈을 맡기고 갔는지 그때 사정은 모를 뿐 아니라 저희 주제에 목돈을 만들 것 같지도 않으니 으레 상훈이에게서 나왔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어쩌니저쩌니 해도 상훈과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다아 들고, 자초를 생각하면 은인이다. 게다가 아이가 달렸다. 몇 해 동안 그렇게 버스러져 지냈다 하여도 언제든지 다시 만나 살고야 말리라고 믿었던 것인데, 노영감이 돌아가자 장사를 시킨다는 말을 듣고 이제는 제곬으로 들어서는구나 하며 반색도 하고, 으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4
이제는 말없이 구수히들 살기만 하면 재잔이야 덕기 앞으로 갔다 하여도, 쌈지의 것이 주머니 것이요, 주머니의 것이 쌈지 것이니, 여생을 편히 지낼까 보다고 찰떡같이 믿는 터이다. 그러나 이 판에 떠꺼머리 총각 놈과 어울리다니 위태롭기 짝이 없다. 전자에는 피혁 때문에 교제를 한 것이라 할지라도, 애초부터 장사를 시작할 때에 병화를 데리고 하는 것은 마음이 안 놓였던 것이다. 상훈이 승낙을 하였기에 병화를 내세운 것이요, 또 병화 몫으로는 필순이란 계집애가 있다고는 하지마는 만일에 삐뜩해서 상훈의 의혹을 사게 되면 모처럼 풀리려는 돈구멍이 막일 것이요, 이래저래 말썽만 벌여져 놓을까 보아 몇 번이나 딸에게 다진 일이라서 그놈 때문에 이런 봉변을 당하고, 게다가 자세 듣고 보니 이때껏 상훈은 이 상점에 발그림자도 안 했다니 도무지 그 내평을 알 수가 없다.
 
5
경애 모친은 필순은 본체만체하고 덕기에게만 인사를 한다.
 
6
"에구우 이 춘 밤에 어서 댁으로 가실 일이지 감기 드시겠군."
 
7
하며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하다가, 설렁탕 그릇을 물려 논 것을 보더니,
 
8
"저런! 설렁탕을 어떻게 자셨소!"
 
9
하고 또 놀란다. 덕기는 웃기만 한다.
 
10
경애 모친은 수선스럽게 이 방 저 방으로 돌아다니며 뒷간까지 열어 보고 오더니,
 
11
"여름 한철은 그런 대로 살 수 있지마는 난 겨울에는 못 살겠다!"
 
12
하고 누가 와서 살라는 듯이 이런 소리를 한다.
 
13
딸은 못마땅하였다. 모친의 생각에는 사위가 사준 집이니 내 딸의 집- 내 집이라고 휘젓고 다니는 것이겠지마는, 필순이 보는 데 민망하였다.
 
14
"어서 어머니 가슈."
 
15
딸은 성이 나서 어서 쫓아보내려는 것이다.
 
16
"왜 넌 안 가련? 같이 가자꾸나."
 
17
"난 나중 가요. 내 걱정은 마시고 어서 가셔서 주무세요. 아이가 깼으면 안 될 테니요."
 
18
"오늘은 어서 가서 뜨뜻이 무어라도 먹고 편히 쉬어야 하지 않니."
 
19
데리고 가려거니 안 가려거니 하고 모녀가 다투는 판에, 병화가 툭 뛰어들어오며, 뒤미처서 원삼의 처가 함께 온 것처럼 따라 들어온다.
 
20
모여 앉았던 사람은 너무나 의외인 데에, 우중우중 일어서며 반색을 하였다.
 
21
"처음부터 문제가 될 게 있나! 어쨌든 조군은 말할 것 없고 여러분 애들 써서 미안하군."
 
22
병화는 고단한 기색도 없이 큰소리를 치며 들어와 앉는다.
 
23
"좀 저 온돌방으로 들어가서 눕구려. 몸부터 녹여야지."
 
24
경애가 이렇게 권하는 것도, 모친은 속으로 망할 년! 하고 고개를 외로 고았다.
 
25
"아 참 그렇게 하게. 저리 들어가세." 덕기를 끌었다.
 
26
"아니 춥지도 않고 자네가 들여보낸 밥을 먹어서 든든하이. 그러나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오늘은 개업 피로연 겸 한잔 먹세. 앓는 이는 미안하지마는, 이렇게 잘 오였으니..."
 
27
병화는 손등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매우 신기가 좋은 모양이다.
 
28
원삼의 처는 제가 온 사연을 발설할 틈을 타려고, 한옆에 원삼과 느런히 비켜섰다가 남편더러,
 
29
"어서 갑시다."
 
30
하고 재촉을 하면서 좌중에 대하여,
 
31
"영감마님께서 야단이세요, 온종일 집안일은 모른 척하고 무엇하느라고 밤중까지 틀어박혔느냐고 꾸중이세요."
 
32
하며 하소연이다.
 
33
원삼을 역정스럽게 불러가는 것을 보면 상훈이 감정이 난 모양이다. 누구나 그 뜻을 알았다. 경애 모친은 그럴수록에 병화가 밉살스럽고 병화 앞에서 알찐거리는 딸이 못마땅하였다. 그러나 경애는 코웃음을 치는 것이다.
 
34
'노하겠건 노하라지! 이 집을 사주든 오므라져 들어가든 할 대로 하라지, 자식! 정 말썽을 부리겠거든 데러가라지! 어머니도 잘 맡아 기르실지 모르겠지마는 더구나 내 일에 새삼스럽게 총찰을 하실 경우가 무슨 경우더람! 아무리 부모기로 시집 하나 변변히 안 보내주고, 지금 와서 병화에게 돈 없다고 쌍지팡이 짚고 나서실 경우던감!'
 
35
경애는 애초에 상훈과 그렇게 된 것이 모친이 상훈의 돈에 장을 대고, 그래도 좋을 듯이 귀띔을 하기 때문에 용기가 나서 내뻗어버린 것이지, 만일에 모친만 다잡아서 안 된다고 뿌리치고 다른 데로 시집을 보냈다면 오늘날 이렇게는 안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친을 그다지 원망은 안 하나 지금에 제 마음대로 겨우 병화를 붙든 것을 반대하는 데는 화가 나는 것이다. 원삼 내외가 간 뒤에 경애는 재촉재촉해서 모친을 먼저 보냈다. 경애는 모친이 경찰서로 가지고 갔던 옷이며 금침을 가지고 가겠다고 실랑이를 하는 것을 기어이 빼앗아두었다. 얼마 동안은 병인을 위하여서도 여기서 묵어야 하겠고, 이제는 상점 일을 탐탁히 다잡아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는데, 마침 이부자리를 가져오게 된 것은 잘된 것이다. 모친은 부르르 화를 내고 가려다가, 그래도 마음이 아니 놓이는지 문턱까지 배웅 나온 딸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36
"너 어쩌자고 그러니?"
 
37
모친은 으슥한 데 비켜서서 딸을 족친다.
 
38
"무얼요?"
 
39
경애는 무슨 말이 나오려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나, 입을 배쭉하며 도리어 핀잔을 준다.
 
40
"무어라니, 일껏 마음을 돌려서 이렇게 가게까지 내주었는데, 남의 공은 모르고 너는 할 대로만 하면, 누구는 역심이 아니 나겠니?"
 
41
"누가 가게를 내주구, 무얼 나 할 대로 했에요?"
 
42
딸의 말은 점점 뽀롱뽀롱 빗나가기만 하다.
 
43
"원삼이가 자기 상점이나 다름없는 여기 와서 일한다고 역정을 내는 걸 봐도 알 일이 아니냐? 모든 게 병화 때문 아니냐? 그놈부터 내쫓아야 한다. 그 놈을 밥 먹여가며 두어야 경찰서로 불려나 다니고 매나 얻어맞으러 다녔지 소용이 뭐냐?"
 
44
"그런 걱정 마시고 어서 가세요."
 
45
경애는 속이 바르르하는 것을 참고 큰 소리 없이, 어서 모친을 가게만 하려 하였다.
 
46
"걱정이 왜 안 되니. 그놈하고 공연히 엉정벙정하다가는 요거나마 들어먹고 이제는 굶어죽어! 왜 정신을 그래도 못 차리니?"
 
47
모친의 목소리는 불끈하였다.
 
48
"가령 먹을 것은 먹고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은 몸조심도 하고, 저편을 달래서 이 집값이라도 치르게 하고, 차차 네 마음대로 하기로 좋을 게 아니냐?"
 
49
"새삼스럽게 누구하고 헤지구 말구가 어디 있에요? 어떤 년은 누구 등쳐먹으러만 다니는 그런 더런 년인 줄 아셨습디까?"
 
50
경애는 발끈 터지고 말았다.
 
51
"그럼 뭐냐? 지금 하는 짓이."
 
52
"누가 무슨 짓을 했단 말예요? 이 상점을 누가 벌였기에, 집 임자를 어디로 내쫓으란 말씀예요? 이 상점에 조가의 돈이 오리 등록이나 든 줄 아슈?"
 
53
경애는 안하려던 말까지 해버렸다.
 
54
"그럼 뉘 돈이란 말이냐? 이때까지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단 말야?"
 
55
"거짓말이든 정말이든 그건 그렇게 알아 무얼 하실 테예요? 계집애 미쳐서 자기 아버지한테도 신용을 잃고 땅섬지기나 얻어가지고, 그게 분해서 자식까지 의절하려 덤비는 그런 사람을 무얼 바라고 어쩌란 말예요?"
 
56
경애가 너무도 야박스럽게 덤비는 바람에 모친은 말이 없이 멀거니 섰다.
 
57
"모르시거든 가만 계셔요. 행세하는 자식이 있고, 귓머리 맞풀고 2, 30 년을 살던 조강지처까지 내몰려고, 나이 50줄에 들어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입에서 젖내 나는 년을 집구석으로 끌어들이고 지랄을 버릇는, 그게 사람이라고 생각하슈?..."
 
58
"무어...?"
 
59
경애 모친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놀랐다. 그러나 캐어물어야 딸은 핀잔만 주었다.
 
60
전차에 올라앉아서도 딸의 말이 정말일까? 병화란 녀석한테 홀깍 빠져서 상훈과 떨어지려니까 있는 흉 없는 흉을 떠들쳐내는 것은 아닌가? 곰곰 생각하여 보았다. 모친은 전차가 총독부 앞에 오자 홧김에 이 길로 상훈에게를 가보리라고 차를 내려버렸다. 9시나 되었으니 늦기는 하였지마는, 지금 집에 들어앉았는 모양이요, 대관절 어떤 년을 떼어 들여앉히고 마누라까지 소박인지, 딸에게 못한 화풀이도 할 겸 생각난 김에 가서 단 몇십 석이고 귀정을 내자는 것이다.
 
61
-이러나저러나 그놈은 떼놓아야지.
 
62
병화는 오늘로 아주 이 마님의 눈밖에 났다.
 
63
대문은 닫혔으나 찌걱찌걱 흔드니 행랑에서 '누구세요?' 소리를 치고 원삼이 뛰어나와 문을 연다.
 
64
"이거 웬일이십니까?"
 
65
금방 효자동에 있던 사람이 이 밤중에 달려든 것을 보고 또 무슨 일이 났나 하여 놀란다.
 
66
"영감 계시지?" 마나님은 따라 들어서며 수군수군 묻는다.
 
67
"지금 막 나가셨에요."
 
68
"무얼! 주무시니까 어려워서 그러겠지마는 급한 말씀이 있으니 좀 여쭙게!"
 
69
"아니와요. 정말 나가셨에요."
 
70
"이 밤중에?"
 
71
"아아, 영감께서야 이제 초저녁이십죠."
 
72
하며 원삼은 웃는다.
 
73
"그럼 색시는 있겠군?"
 
74
"색시가 누굽니까?"
 
75
원삼은 또 헤헤... 웃는다.
 
76
"어쨌든 사랑문을 좀 열게."
 
77
경애 모친은 컴컴한 속에서 아범과 숙설거리고 섰는 것이 싫어 사랑문으로 향한다.
 
78
"들어가 보시나마나 아무도 없어와요. 색시는 그저께인가 그끄거께 왔다가 도루 갔에요."
 
79
"흥..."
 
80
딸의 말이 아주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로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81
"그럼 안에는?"
 
82
"안에야 마님이 계십죠. 그런데 왜 그리세요?"
 
83
원삼은 이 마님이 왜 이렇게 몸이 달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84
"정녕 없지?"
 
85
"그렇게 못 믿으시겠거든 들어가보세요. 하지만 이따라도 또 데리고 오실지는 모릅죠. 첫날 와서 주무시고 한바탕 야단이 난 뒤에는 밤이면 이슥해서야 같이 들어오시니까요."
 
86
"흥!"
 
87
-한 풍파 있었다는 것이 재미있게 들렸다.
 
88
"만나시려면 내일 아침 일찍이 오십쇼." 그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였다.
 
89
"그래 야단은 무슨 야단인가?"
 
90
"마님께서 가만 계신가요. 문전이 더러워지고 자식 기를 수 없다고 야단을 치시고, 영감께 데리고 나가라 하시니, 말씀이야 옳죠마는 영감님은 또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하십니까, 도리어 마님께 나가라고 야단이십죠... 암만해두 이 댁두 어떻게 되시려는지?... 전에는 영감께서 약주 한잔을 잡수셔도 쉬쉬하시고 그런 외입을 하시기로 누가 김이나 맡았겠습니까마는 뭐 요새는 그대로 마구 터놓고 밤이나 낮이나 기를 쓰는 것 같아요. 노영감님을 쫓아가시려고 돌아가실 때가 되어 그런지, 재산이 아드님께로 가서 화에 떠서 그러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91
"흥. 그 색시가 이 집 차지를 하겠다는 거로군?"
 
92
"그렇습죠. 그 아씨가 무어 애가 들었다나요. 그건 고사하고 저기 안동 사는 매당집이라든지 하는 그댁 마님의 수양딸이라나요. 그래서 그 염병 때 마님이 앞장을 서서 서둘러대기 때문에 아마 영감님께서도 쩔쩔 매시구 어쩔 줄 모르시는가 봐요..."
 
93
원삼은 흥이 나서 묻지도 않은 말까지 제풀에 숙설댄다. 경애 모친은 들을 것을 다아 듣고 나서,
 
94
"그럼 내일 올게 영감께는 암말 말게."
 
95
이렇게 부탁을 하여놓고 나와버렸다.
 
96
상훈은 경애가 산해진에 침식을 하고 있는 모양이라는 말을 원삼에게 듣고 화증이 나서 다시 뛰어나간 것이다. 오늘 신새벽에 병화란 놈이 와서 아침 단장을 깨워놓고 원삼을 잠깐 빌려달라기에 사랑방에는 의경도 자고 있는데, 긴 잔소리가 나올까보아 어서 배송을 내느라고 선뜻 들어주었지마는, 원체 그 산해진이란 경애가 병화를 데리고 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한 번도 들여다본 일이 없는 터이다. 집을 사달라고 조르니까 그러마고는 하였지마는 그따위로 병화와 동사를 하는지 동거를 하는 동안은 결코 사줄 생각은 없다.
 
97
하여간 오늘은 덕기까지 함께 꺼들려서 경찰에 붙들려갔다 왔다는 데는 화도 나고 궁금증이 아니 날 수 없다. 우선 경애를 불러보리라 하고 거리로 나와 전화를 빌려 걸어보니, 지금은 아무래도 나올 수 없다는 냉랭한 대답이다.
 
98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에,
 
99
"그렇게 급한 일이면 내일 아침에 댁으로 가죠."
 
100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경애도 들은 말이 있는지라 의경과 사랑방살이 하는 꼴이 보고 싶어서 발그림자도 안하던 집에를 아침결에 오겠다는 것이겠지만 상훈도 오늘은 의경이 아니 올 거니 상관없을 것 같아서 아무려나 하라고 내버려 두었다.
 
101
하여간 장사 터전을 마련해주는 조건으로 병화와는 하루바삐 떼어놓아야 하겠고, 제 의사나 한 번 들어보고 나서 의경의 살림도 따로 내든지 큰마누라를 아들에게로 보내고 아주 들여앉히든지 귀정을 내려는 작정이다. 아무래도 경애를 영영 떼어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홀몸도 아닌 의경을 어찌하는 수도 없는 형편이다. 사실 의경의 사정도 제 잘못은 어쨌든 집에서는 나와 버리고 유치원도 그만두어버렸으니, 이제는 큰마누라의 바가지쯤 귓가로 들을 작정치고 사랑방으로 기어든 것이다. 그런 중에도 다행한 것은 노영감이 돌아가 준 일이다.
 
102
매당집 떨거지 때문에 노영감은 더 살려야 살 수도 없었는지 모르지마는, 마침 죽어 자빠진 파리 한 마리에 개미 거동이 일어나듯이 의경까지 이 사품에 덕을 보겠다고 덤벼드는 판이다. 매당은 개미굴을 지키는 왕개미 격은 된다.
 
103
"아우님 차례는 얼마라던가?"
 
104
"단 200석이라우! 귀순이 몫이 따루 50석!"
 
105
"흥, ...하지만 그거라두 우선 받아두는 게지."
 
106
노영감의 초상을 치르고 나서 매당과 수원집이 만나 조상으로 받은 첫인사가 이것이었다.
 
107
"우리 조카님이 수났더군..."
 
108
수원집은 의경을 보고 비꼬았다.
 
109
"그야 그렇지! 미우나 고우나 아들 아닌가. 말이 그렇지, 아들 제쳐놓고 손주에게 물리는 법이 있겠나."
 
110
매당은 제 남편이나 장안 갑부가 된 듯싶게 허욕에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수원집은 콧날을 째긋하며,
 
111
"천석꾼이가 된대야 형님을 드릴 테 걱정이슈."
 
112
하고 핀잔을 주다가,
 
113
"300석! 게다가 현금이 한 2, 3000원 차례에 갔는지."
 
114
하며 비꼬는 것이었다.
 
115
"고작 300석?"
 
116
거리에서 주워걸린 사위--상훈이 단 300석이라는 데 매당은 놀라 자빠졌다.
 
117
"하지만 그렇게 꼼꼼하고 자바위게 하고 간 영감이 정미소 하나만은 뉘게로 준다는 말이 없이 유서에도 안 써놓았으니 이제 좀 말썽일걸! 우리도 그까짓 정미소에는 쌀 섬이나 있으려니 했더니, 웬걸 영감이 꼭 가지고 쓰던 장부에 보면 줄잡아도 현금이 3만 원 넘고 집이며 기계며 할만하다는데!"
 
118
이 말에는 수원집보다도 매당집의 입에 침이 괴며 안심이 되었다.
 
119
"일 맡아보는 놈이 임자 없는 거라구 홀깍 집어삼키면 어쩌누?"
 
120
매당은 이런 걱정도 하는 것이었다.
 
121
"별걱정을 다 하슈. 장부가 뻔한데! 그건 어쨌든지 영감이 그걸 왜 잊어버렸는지..."
 
122
수원집은 수원집대로 애가 말라하는 것이다. 하여간 매당집은 새판으로 팔을 걷고 나설 차비를 차렸다. 그래서 우선 의경부터 단단히 굳히려고 급기야는 화개동 집 사랑으로 끌고 가서 살림을 시키라고 복장을 안긴 것이다.
 
123
"이왕이면 화개동 집으로 들어가서 살라지. 어차피 나는 쫓겨날 거요, 화개동 마누라는 큰집으로 들어갈 것이니까, 얼른 서둘러야지 그렇지 않으면 홍경애에게 자리를 뺏길걸..."
 
124
수원집이 이렇게 충동이지 않아도 매당은 벌써 계획이 선 것이었다. 수원집으로서는 어서 떼어가질 것을 떼어가지고 태평통에 있는 집을 달래서 옮아 가자는 것이다.
 
125
유서대로 3년씩이나 상청을 지키고 있을 맛도 없거니와 따로 나가앉아야 남편을 골라도 고르고 정미소를 3분파하자고 때도 써볼 수 있지 한집 속에 있으면 맞대해놓고 싸우기도 어렵다. 어쨌든 그러자면 화개동 집이 뒤집혀서 덕기모가 밀고 들어오게 되고 따라서 수원집이 쫓겨나가는 모양이 되면 남 듣기에도 3년 못 참아서 제 몫만 찾아가지고 달아났다고는 안할 것이요, 도리어 내쫓은 며느리가 심하다고 할 것이다.
 
126
아니나 다를까. 의경이 오던 이튿날 덕기모가 아들에게 쭈르르 와서 하소연을 하니 아들로 그럴 듯이 듣는 모양이다. 수원집은 속으로 웃으며 저희가 무어라 할 때까지 가만히 거동만 보고 있었다. 뻔한 일이지마는 계획이 의외로 속히 귀정날 것 같은 기미를 본 수원집은, 의경이 첫날 다녀온 뒤로는 어린 마음에 아예 가지 싫어하는 것을 매당과 함께 달래서 날마다 화개동으로 쫓아 보내는 것이었다. 큰마누라에게 등쌀을 대자는 것이다. 어제도 며칠 있다가 오마던 의경이 밤중에 또 달려든 것을,
 
127
"그래서는 안 된다. 이젠 거기가 제 집인 줄 알고 꾹 들어앉았어야지, 갑갑하다구 쭈르르 오면 어쩌는 거냐."
 
128
하고 나무라고 구박을 하여 쫓아보낸 것이다. 이튿날 상훈은 경애가 정말 아침결에 달려들면 한집 속에서 세 계집이 맞장구를 칠 것이 싫어서 의경을 얼른 매당집으로 쫓아보내려는 판인데, 겨울 해에 10시도 못 되어서 경애는 달려들었다. 의경이 아침이면 간다니까, 몸은 고되건마는 꼴이 보고 싶어서 일찍이 동한 것이다. 이편에서 싫어하는 것같이 되어서는 돈도 아니 나오고 체면도 좋지 못하니까, 의경 때문에 물러나는 것처럼 뒤집어씌워야 말하기가 어엿하기에 그러는 것이다.
 
129
경애는 다짜고짜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마님은 안방에서 유리 구명으로 내다보다가 고개를 오므라뜨리고 원삼의 처만 부엌에서 밥상을 보다가 그래도 어제 한 번 보아서 낯이 익다고 반색을 한다.
 
130
"에구 어떻게 오세요?"
 
131
하고 멋모르는 어멈은 안방에다 대고 손님 오셨다고 마님을 부른다. 마님은 시키지 않은 짓도 한다는 듯이,
 
132
"왜 그래?"
 
133
소리를 몰풍스럽게 지르고 내다보며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이다. 4, 5년 전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양이지마는, 사랑에 하나 자빠져 있는데 또 하나가 기어드는 것도 보기 싫고, 도대체 이따위들을 딸자식에게 보이기가 싫은 것이다.
 
134
"얼마나 속이 썩으십니까. 잠깐 지나는 길에 영감께 권고나 하고 갈까 하고 들어왔습니다."
 
135
경애는 얼마쯤 동정하는 소리를 남겨놓고 사랑으로 나와버렸다.
 
136
마루 위로 잡담 제하고 올라서며 문을 똑똑 두드리니 속살속살 이야기하는 소리가 뚝 그치고 상훈이 마주 나오면서 몹시 당황해 한다. 의경은 세숫대야를 곁에 놓은 채 체경 앞에 돌아앉아서 머리를 가리고 있고, 영감은 지금 막 일어난 모양이다.
 
137
체경 속에 비친 의경은 잠깐 놀라는 기색이더니 시치미를 떼고 빼쭉 웃으며 그대로 빗질을 하고 있다.
 
138
"신혼 재미가 어떠신가요. 하지만 이게 뭐예요. 남의 집 귀한 따님을 데려다놓고 곁방살이를 시키다니?"
 
139
경애가 첫대바기에 농조를 붙이는 바람에 상훈은 허허 웃고 말았다. 의경도 거기에 끌려 생글하고 돌아다보며 인사를 한다.
 
140
이 여자의 입에서 가시 돋친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만은 다행하나, 그래도 노하고 덤비지 않는 것을 보니 상훈은 마음에 덜 좋았다. 큰마누라가 바가지를 긁는 것은 큰마누라답지 않고 성이 가시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애가 깔깔 웃고 마는 것은 벌써 마음이 천리 만리 떨어져나간 증거다.
 
141
"살림이나 시작하시고 구경오라고 하실 일이지, 한참 재미있게 지내시는 자랑하려고 부르셨소?"
 
142
"살림은 누가 살림한대?"
 
143
상훈은 열없게 웃는다.
 
144
"또 남 못할 소리를 하시는구려?"
 
145
하고 경애는 나무라듯이 남자를 흘겨보다가 의경을 돌려다보며,
 
146
"여보 아씨, 이 어른은 곧잘 미친 체하고 떡 목판에 엎드러지는 양반이니 정신차리고 꼭 붙드우. 그 댁이나 내나 팔자가 사나워 이 모양이 되었지마는 마음을 한군데 곡 붙이고 풍파없이 잘살아야 하지 않소."
 
147
하며 큰마누라나 된 듯싶게 이런 듣기 좋은 소리를 한다. 의경은 생글생글 웃기만 하면서 머리를 틀어얹고 핀을 여기저기 찌르고 앉았다.
 
148
"당신두 거울하고 의논을 해보슈. 머리에는 눈발이 날리고 돈 한푼이라도 쓰면 없어지는 것은 고사하고 욕예요. 100원을 쓰면 100원 어치, 1000원이면 1000원 어치의 욕을 버는 것을 모르고... 욕주머니를 차고 천당에를 가서 하느님께 끌어올려줍시사고 보채실 작정이면 모르겠지만..."
 
149
"죄가 무거워서 올라갈 수 있구요! 헤헤헤."
 
150
의경이 새채기를 하는 바람에 경애도 웃고 말았다. 상훈은 듣기에 창피도 하고 어쭙지 않아 보이기도 하나 경애의 태도가 다시는 말을 붙여볼 여지가 없게 되어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제는 단념해버려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수록 더욱 마음이 끌리고 아까운 생각이 간절하다.
 
151
보기에는 그렇지 않을 것 같건마는 진탕 먹고 입고 법석을 하거나 진고개 바닥으로 싸지르며 쓸 것, 못 쓸 것 흥청망청 사들이거나 하며 세월을 보내야지 그러지를 못하면 온종일을 톡톡 쏘고 짜증만 내는 이런 어린애는 하루 이틀을 데리고 지내기엔 재미가 날지 몰라도, 길게 갈 것 같지가 않다. 벌써 초로의 고비를 넘어선 자기에게는 철이 들고 살림을 잡을 만하게 된 경애가 알맞게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아무래도 남의 사람 같다.
 
152
"병화가 장사가 다 뭐야? 어젠 또 무엇 때문에 잡혀들 갔더란 말인가?"
 
153
이번에는 상훈이 한 마디 걸어 보았다.
 
154
"남의 걱정은 왜 이렇게 하슈? 지금 남의 걱정 하시게 되셨소?"
 
155
경애는 병화라는 이름을 쳐드는 것까지 듣기 싫어서 핀잔을 준다.
 
156
"남의 걱정이 아니라 그 모양으로 --끌고 다니는지, 끌려 다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장사는 고사하고 큰코 다치지!"
 
157
"속 시원한 소리두 퍽 하슈. 그러기에 내가 차지를 하자면 저 들여 논 돈을 얼른 빼내주어서 배송을 내자는 거지."
 
158
"모두 얼마만 있으면 된단 말야?"
 
159
상훈은 다가앉는 말눈치다. 의경의 눈은 깜작깜작해지며 다음 말에 귀를 반짝 든다.
 
160
"2500원-3000원까지는 있어야 될걸?"
 
161
두 사람은 잠자코 말았다. 상훈은 그 돈만 내놓으면 병화를 내쫓겠느냐고 다지고 싶으나 의경 때문에 입을 담쳐 버리는 것이다.
 
162
안에서 어멈이 밥상을 들고 나온다. 겸상이다.
 
163
"나는 세수도 안했는데, 왜 이리 급하냐?"
 
164
주인 영감은 역정을 내면서, 일어서는 경애를 붙든다. 자기는 나중 먹을 테니 여자들끼리 먼저 먹으라는 것이다.
 
165
"두 분이 재미있게 자실 것을 입이 부를게!"
 
166
하고 경애가 코웃음을 치며 일어서려니까 사랑문을 찌걱찌걱 흔드는 소리가 난다.
 
167
어멈이 상을 놓고 나가서 여니, 경애 모친이 들어온다. 전도 부인처럼 손에는 검정 우단 주머니를 들고 자줏빛 목도리를 코밑까지 칭칭 감았다. 모녀는 서로 놀라며 주춤하고 상훈은 어이없이 헤헤 웃으면서 바라만 보고 섰다.
 
168
경애는 모친을 그대로 끌고 가려 하였다. 아까 말눈치 같아서는 밑천을 해 줄 모양인데, 공연히 덧들여놓으면 창피스럽고 불끈하는 성미에 내키던 마음이 다시 들어갈까 보아 앞질러 모친을 달래려 한다.
 
169
그래도 모친은 한바탕 푸념을 한 뒤에 모녀를 못 데려가겠거든 일평생 먹을 것을 내놓거나, 그것도 안 들으면 재판을 하겠다고 막 잘라 말을 하였다.
 
170
"자식두 걸어서 재판질을 한다는데 왜 내가 재판을 못 하겠니! 너는 무엇하러 비릿비릿하고 구칙칙하게 줄줄 쫓아만 다니는 거냐? 세상에 사내가 동이 났더냐?"
 
171
이 마님이 입이 언제부터 이렇게 막 뚫은 창구멍이 되었는지 상훈은 예배당 시대를 생각하면 자기도 변하였지마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72
자식을 걸어서 재판질을 한다는 것은 상훈이 들어보라는 말이다. 정미소를 덕기가 두말없이 곱게 바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소송이라도 제기한다는 소문이 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훈과 최 참봉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 두 사람은 깔끔한 덕기에게 붙어서 먹을 것이 없을 성 싶은데, 또 한 가지는 상훈이 초상 때에 무시를 당한 것이 분해서 돌아간 노영감의 중독 문제를 쳐들어내어 흑백을 가리려는 기미가 보이자 상훈을 달래고 첨을 하느라고 돌라붙어서, 정미소를 안 내놓으면 소송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것이다. 이것은 우선 엄포지만 그 길에 지금 들어 있는 집도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것은 노영감이 전담은 대부분을 덕기의 명의로 바꾸어 놓았으니까 꼼짝 건드릴 수 없으나 이 큰집만은 명의를 그대로 두고 덕기가 들어 있으라고 유서를 썼을 뿐이니까, 법률상으로 상속권이 있는 상훈이 주장을 하면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덕기가 일을 거칠게 할 리가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상훈을 에워싸고 있는 놈들이 변죽을 울리고 다니는 것이다.
 
173
어쨌든 경애 모친은 이렇게까지 막 잘라 말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는데 의경을 보니 자기 딸이 밀려날 것 같아서 괘달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길거리에 나와서는 금시로 후회를 하고,
 
174
"말이 그렇지만 어린것을 생각하기로 아주 인연을 끊을 수야 있니. 입에서 젖내 나는 것하고는, 꼴보니 오래갈 것 같지도 않지 않으냐?"
 
175
하며 이번에는 다시 딸을 달래려 한다.
 
176
경애는 모친의 얼굴을 치어다보았다. 모친의 성품이 이렇게 변한 것을 이제야 안 것은 아니나 마음에 싫었다. 더구나 상훈을 놓치는 것이 아까워하는 양이 답답하였다.
 
177
이 날 낮에 덕기 모친은 침모더러 안세간을 큰집으로 실어 보내라고 일러 놓고 홱 나와버렸다. 영감은 암만해야 쇠귀에 경읽기로 점점 더 빗나갈 뿐이요, 늙은 년 젊은 년들이 신새벽부터 패패이 꾀어들어서 저자를 벌이는 그 꼴이야 이제는 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상훈은 마누라가 큰집으로 들어간대야 그다지 시원할 것도 없으나,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178
아들이 왔다갔다하고 한참 뒤숭숭하였으나, 결국 이틀 후에는 모녀가 큰집으로 옮았다. 원삼 내외는 있을 맛도 없는 판에 매당이 제 사람을 들이려고 행랑도 내놓으라니까 마침 잘되었다고 산해진에 가서 일을 보기로 하고 효자동 근처에 셋방을 얻어갔다. 원삼은 비로소 행랑살이를 면하고 상점원이 되었다.
 
179
덕기 모친의 세간을 부덩부덩 디미니 수원집은, 안방은 내놓지만 3년 상을 마쳐야 떠나지 않느냐고 점잖게 버티어보았다. 어쨌든 난 모르니 자기 세간은 광 속에라도 몰아놓고 방 하나만 내놓으라고 일러논 후 화개동으로 조카님- 의경이 집 드는 구경을 갔다. 이제는 매당집에서 마주칠 때와 같이 상훈에게 싸고 기우고 하지도 않거니와, 상훈 역시 덕기에 대한 불평이 같기 때문인지 서모와 매우 구순하게 지낸다.
 
180
매당은 신이 났다. 시집간 딸을 세간이나 내주듯이 큰마누라의 세간짐이 문전을 채 떠나기도 전에 동생 형님 하는 축을 앞뒤로 거느리고 쭉 들어섰다. 그래야 매당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는 성냥통 한 갑뿐이다. 집안을 들부셔내고 안방에 채를 잡고 앉아서 세간을 사들이는 판이다. 살던 솜씨요 하던 솜씨라, 발기가 머릿속에 있고 말 한마디면 떼그르하고 영등같이 들어서는 것이다. 심부름꾼은 창훈과 최 참봉이다. 이 마누라쟁이의 손으로 수양딸 조카딸 아우님들의 세간을 일년에도 한두 번 내는 것이 아니요, 그럴 적마다 최 참봉이 심부름을 한 것이니 최 참봉도 이력이 뻔하다. 그러고 보니 종로 각 점방에서도 매당이 적어 내보내는 발기면 두말 없다.
 
181
'값은 좀 비싸도 물건만 좋은 것으로'라는 것이 마누라의 심탁이다. 어차어피에 돈 스는 놈은 따로 있는 바에야 사는 사람도 그렇겠지마는 파는 사람도 물건만 눈에 차게 쭉쭉 뽑아서 들여 놓아 주면 한푼 깎지 않고 군소리 없이 제꺽제꺽 치러주게 하니, 이 마누라의 신용과 위세가 더 떨치는 것이다.
 
182
장전에 기별해서 화류 삼층장, 체경이 번쩍거리는 의걸이, 금침은 아직 없어도 금침장, 사방탁자, 문갑, 요강받침, 체경, 보료, 안석, 장침, 사방침, 무엇무엇... 찬장, 뒤주는 찬간으로 들여모시고 마루에는 양식으로 꾸밀 터이란다. 유기전이요, 사기전이요, 드팀전이요... 300석을 한목에 팔아대라는지 정말 혼인집같이 며칠을 두고 엉정엉정 법석이다. 마누라가 홧김에 솥도 빼어가지고 갔기 때문에 부엌에서는 솥을 거는데 건넌방에서는 이집 저집 침모 마누라가 모여 와서 금침을 꾸미기에 부산하다. 그래야 원삼의 친구들은 한푼벌이 구멍에 걸리지도 못하고 세간짐이 들어갈 때마다,
 
183
"며칠이나 살려누?"
 
184
"어떤 히사시가미인지 큰마누라 내쫓는 날로 저렇게 끌어 들이고서도 신상이 좋을라구!" 하며 숙설거리는 것이었다.
 
185
"나두 딸 하나만 얌전히 두었으면 부원군 노릇 한다네..."
 
186
"이르다뿐인가! 우리 언년이 년을 열두 살만 먹여 기생방에 박네그려..."
 
187
"그래서?" "다섯 해만 키우면 XX대감 막내마마가 되네그려."
 
188
"압다 말만 하게그려."
 
189
양지에 팔짱을 끼고 서서 주거니 받거니 시장기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190
"더 들어는 뭘 하나! 그때 쓱 올라서면 변리 놔서 두 잔 낼 테니 오늘 한 잔 내보란 말이지."
 
191
"그거 좋은 말일세. 그 변리 한잔부터 자네가 내보게. 5년 후에 먹을 거 다가 먹세그려나?"
 
192
"어차차! 언년이부터 어서 만들어놓아야 하겠네. 하하하!"
 
193
"허허허..."
 
194
객쩍은 입씨름이 충복이나 된 듯싶게 껄껄 웃고 만다.
 
195
매당은 집 든 지 대엿새 만에 이 상점 저 점방에서 뽑아 들여온 청구서 한 묶음을 상훈 앞에 내놓았다. 상훈은 펴보지도 않고 그대로 집어서 최 참봉을 주며 덕기에게 갖다가 주라고 명하였다.
 
196
덕기는 최 참봉이 주는 청구서 뭉치를 받아서, 한 장 두 장 떠들쳐보다가 발기 뒤의 총계 1400 몇십 원이라는 것을 보고 입을 쩝쩝 다시었다.
 
197
"이전에 가져가신 저금 통장만 해두 4000여 원은 남았던데, 그건 다아 무얼 하셨기에 이걸 내게루 보내시면 어떡하란 말씀인지?..."
 
198
저금 통장이라는 것은 장사 후에 부자가 유서를 꺼내보고 나서 땅문서는 건드리지 않고 장비 쓰고 난 예금 통장 하나를 부친이 집어넣고 간 것이다.
 
199
"그건 고사하고 지금 쌀 한 섬에 14원밖에 안하는데 100석을 팔아야 이 돈이 됩니다!"
 
200
덕기는 딱하다는 듯이 혼잣소리처럼 하며 문서를 척척 접어 밀어놓는다.
 
201
"글쎄, 나 역시 모르겠네마는 어르신네 분부니까 자네 알아 할 것 아닌가."
 
202
어른신네 분부라는 말에 덕기는 잠자코 앉았다가 청구서 뭉치를 문갑에 넣었다.
 
203
이튿날 낮에 덕기는 대관절 어떤 형편인가 하고 화개동으로 올라갔다.
 
204
안방에서는 떠들썩하고 마루에서도 요란스러이 도마질을 하는 한편에서 상을 보고 무슨 잔칫집 같으나 그보다도 덕기는 들어서면서부터 집을 잘못 찾았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모두 눈 서투르다. 세간이 눈 서투르고 사람이 눈서투르다. 마루 끝에 여자의 흰 고무신이 쭉 늘어놓인 것을 보고는 축대 위로 올라설 용기도 아니 났다. 뜰과 마루에서 오락가락하며 음식을 차리던 여편네들은 낯 서투른 남자 손님을 흘금흘금 바라들만 보다가 누군지 안방에 대고 소리를 치니까, 방 안이 잠잠해지며 최 참봉이 내다본다.
 
205
"어서 올라오게. 아버지 여기 계시네."
 
206
덕기는 하는 수 없이 마루로 올라서려니까 안방에 뿌듯이 들어앉았던 젊은 색시들이 군호나 부른 듯이 와짝 일어서며 미인의 시선이 일제 사격을 하는 바람에 덕기의 얼굴은 화끈 달았다. 어떤 얼굴이 어떻게 생기고 누가 무엇을 입었는지는 눈에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 여자들이 들어서는 자기와 바꾸어 행렬을 지어 마루로 나가는 것을 보니 소리를 배우고 파해가는 기생들 같다.
 
207
'무슨 잔친가? 집알이들을 온 건가!'
 
208
하는 생각을 하며 방 안에 들어서니까, 소복한 서조모가 서모와 함께 일어서며,
 
209
"어소 오게."
 
210
하고 알은 체를 한다. 그 옆으로 앉았는 우둥퉁하고 거북살스런 중노부인은 매당일 것이나 아랫목 새 보료 위에 앉았던 부친은 좀 어색한 눈치였다.
 
211
창훈은 눈에 안 뜨이고 최 참봉이 문 밑으로 앉았다.
 
212
"어젠 예서 주무셨습니까?"
 
213
덕기는 어제 서조모가 집에 들어와 자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인사로 한 마디하였다.
 
214
"응, 한데 어떤가? 아주 딴 집같이 눈이 부시기?"
 
215
수원집은 덕기가 무슨 말을 하러 온 것인 줄 짐작하기 때문에 짓궂이 이런 소리를 하고 방 안을 돌려다본다. 덕기도 아무 말은 아니하였으나 무심코 방 안을 둘러보았다.
 
216
유리같이 어른거리고 찬란한 속에서도 덕기의 눈을 놀라게 하는 것은 방 안 사람의 얼굴이 아랫목에서도 보이고 윗목에서도 보이고 맞은벽에도 자기의 얼굴과 그 뒤에 일자로 쭉 걸린 여자 망토와 조바위와 목도리가 찬란히 행렬을 지어 있는 것이다.
 
217
무심하였더니 덕기의 뒤에도 체경이 달려서 마주 달린 체경이 서로 몇 겹으로 반사를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집은 체경으로 도배를 한, 말하자면 체경방이다. 매당집의 고안이겠지마는 이것은 또 무슨 취미인구? 하며 덕기는 오래 앉았을수록 알지 못할 후터분한 공기가 압박을 하는 것을 깨달았다.
 
218
"어제 그건 봤니?"
 
219
부친이 비로소 말을 붙이나 아들은 다음 말을 기다리고 가만히 앉았다.
 
220
"치를 수 없거든 거기 두고 가거라."
 
221
역정스런 목소리나 여자 손들이 많은데 구차스럽게 세간 값으로 부자 충돌을 하는 꼴은 보이기 싫기 때문에 아들의 입을 미리 막으려는 것이다.
 
222
"안 치러드린다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223
덕기는 너무 오래 잠자코 있을 수 없어서 말부리만 따고 또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았다. 그러나 복통이 터져서 속은 끓었다. 속에 있는 말이나 시원스럽게 하고 있으나 부친 앞에서, 더구나 조인광좌중에 그럴 수도 없었다.
 
224
"이 판에 용이 이렇게 과하시면 어떡합니까. 여간한 세간 나부랭이야 저 집에 안 쓰고 굴리는 것만 갖다노셔도 넉넉할 게 압니까?"
 
225
안방 치장 하나에 1000여 원 돈을 몰아서 들인다는 것은 생돈 잡아먹는 것 같고, 누가 치르든지간에 어려운 일이다.
 
226
"이 판에 무슨 판이란 말이냐? 그따위 아니꼬운 소리 할 테거든 그거 내놓고 어서 가거라. 안 쓰고 굴리는 세간은 너나 쓰렴!"
 
227
영감은 자식에게라도 좀 점해서 그런지 화만 버럭버럭 내고 호령이다.
 
228
"할아버니께서 산소에 돈 쓰신다고 반대하시던 걸 생각하시기로..."
 
229
"무어 어째? 널더러 먹여살리라니? 걱정 마라. 아니꼽게 네가 무슨 총찰이냐? 그러나 정미소 장부는 이따라도 내게로 보내라."
 
230
부친은 이 말을 하려고 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231
"정미소 아니라 모두 내놓으라셔도 못 드릴 것은 아닙니다마는, 늘 이렇게만 하시면야 어디 드릴 수 있겠습니까."
 
232
"드릴 수 있고 없고간에, 내 거는 내가 찾는 게 아니냐?"
 
233
"왜 그렇게 말씀을 하셔요. 제게 두시면 어디 갑니까."
 
234
"이놈 불한당 같은 소리만 하는구나? 돈 1000원도 못 되는 것을 치러줄 수 없다는 놈이 무어 어째?"
 
235
부친은 신경질이 일어났는지 별안간 달려들더니 주먹으로 뺨을 갈기려는 것을 덕기가 벌떡 일어서니까 주먹이 어깨에 맞았다. 병적인지 벌써 망령인지는 모르겠으나 점점 흥분하게 해서는 아니 되겠다 하고 마루로 피해 나와버렸다. 그러나 금시로 정이 떨어지는 것 같고, 그 속에 앉은 부친은 딴 세상 사람같이 생각이 들었다. 신앙을 잃어버리고 사회적으로 활약할 야심이나 희망까지 길이 막히고 보면야, 생활이 거칠어가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동정도 하는 한편에, 이미 신앙을 잃어버린 다음에야 가면을 벗어버리고 파탈하고 나서는 것도 오히려 나은 일이라고도 하겠으나, 노래에 이렇게도 생활이 타락하여갈까 하고, 덕기는 부친에게 반항하기보다도 다만 혼자 탄식을 하는 것이었다.
 
236
집에 돌아온 덕기는 10원, 50원, 많은 것은 100 수십 원 되는 소절수를 십여 매나 떼어서 상점 발기와 함께 지 주사에게 내주고 곧 가서 셈을 치르고 오라 하였다.
 
237
부친의 첩치가는 끝났으나 또 급한 것이 수원집 처치다. 어린애를 데리고 본가로 갑네 하고 나가 앉았으니 트집은 트집이요 하여간 집이 급하다. 태평통 집을 급히 내게 하고 들어앉게 하여놓으니까, 수원집은 이사할 분별은 꿈도 안 꾸고 손부터 내민다. 자기 몫을 어서 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의 몫은 3년상이 끝날 때까지 맡아 두라는 게 조부의 유언이다.
 
238
"지금 아니 가져가시기루 축이 나겠으니 걱정이슈? 3년 받드는 동안 내가 시량범절을 아니 댈 테니 돈 쓸 일이 있어 그러슈? 할아버니 유언을 어쩌면 달이 가시기두 전에 거역한단 말씀요."
 
239
"3년상 안 받들고 내가 딴 맘 먹을까 봐 그런 유언을 하셨는지 모르지마는, 그래 나를 그렇게 못 믿더란 말인가?"
 
240
"못 믿기로 말하면야 나를 못 믿어 그러시는 거 아니겠소?"
 
241
"그야 내 칼두 남의 칼집에 들어가면 찾기 어렵지 않은가. 재물이란 조화가 붙은 것이라 앞일을 뉘 알리!"
 
242
이 모양으로 이틀을 두고 실랑이를 한 끝에 수원집이 아주 집을 든다는 날 부친이 와서 금고문을 열라는 엄명에 열고 말았다.
 
243
"줄 건 어서 주어버리지 잔뜩 붙들고 있으면 무얼 하니. 가겠으면 가구 제 정성 있으면 3년이라두 붙어 있는 거요."
 
244
부친의 의견대로 수원집 모녀 몫을 내주는 길에 부친의 300석도 가져갔다. 나눌 것을 다 주고 나니 덕기는 한시름 잊었다. 지 주사만은 500원을 주니까 도리어 맡아두라 한다. 나 죽거든 장비 쓰고 남는 걸랑은 단 하나 남은 딸에게 주어 달라는 것이다. 장비야 염려 말고 쓰고 싶은 대로 쓰든지 딸을 갖다주라니까, 슬 데도 없거니와 딸이 굶을 지경은 아니니 하여간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
 
245
부친의 첩치가에 과용을 하였으니, 큰마누라 내몰았으나, 수원집의 하는 소위가 가증하다느니 말은 많았어도 모친을 모시게 되고 부친이나 수원집도 소원대로 자리를 잡고 나니 일이 모두 제 자국에 들어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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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三代)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193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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