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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소녀의 애수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23권  24권  25권  26권  27권  28권  29권  30권  31권  32권  33권  34권 35권  36권  37권  38권  39권  40권  41권  42권  염상섭

1. 소녀의 애수

1
아침 한 차례 판 후에 경애가 틈을 타서 집과 바커스에 다녀오기를 기다려 필순은 병원으로 뛰어가 모친과 교대를 하였다. 그때까지 병화는 경찰서에서 나오지 않았다.
 
2
필순은 병상 앞에서 지키고 앉았다가 부친이 잠이 혼곤히 드는 것을 보고, 가만히 나와서 유리창 밖으로 길거리를 내다보고 섰었다. 마주 보이는 것은 개천을 새에 두고 부연 벌판에 우뚝 선 옮겨온 광화문이다. 날이 종일 흐릿하여 고단하고 까부러지는 필순의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웠다.
 
3
무슨 연들을 개천 속에서 날리는지 두 패 세가 조무래기들에게 휩쓸려서 법석들이다.
 
4
'오늘이 명일이로군. 연이고 널이고 내일까지 뿐이다!'
 
5
이런 생각을 하니 언제라고 남의 집 처녀들처럼 새옷을 입고 널을 뛰러 다니고 하며 설을 쇠어본 일도 없지마는 널 뛰는 소리도 들어봤던가 싶다. 어쩐지 자기만은 어려서부터 세상 처녀들과 뚝 떨어진 딴 세상에서 자란 것 같다.
 
6
공연히 세상이 쓸쓸하고 처량한 생각에 잠겨 들어가서 맥을 놓고 한참 섰으려니까 실컷 울고 싶기도 하고 무엇인지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닥쳐올 듯이 마음이 덜렁덜렁하는 것 같기도 하여 지향을 할 수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놀랄 만한 일이란 결코 불행하거나 슬퍼서 가슴이 터지게 울 것 같은 그런 일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덜퍽지고 시원스럽게 깔깔 웃을 일도 아닐 것 같으나,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행복스런 그림자가 노곤한 봄날에 단잠이 소르르 올 듯이 차츰차츰 손 닻을 데까지 기어드는 것같이 공연히 마음에 키이는 것이었다. 처녀가 혼인 날짜를 받아 놓았을 때와 같이 울고 싶은 것도 아니요 웃고 싶은 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 역시 울고도 싶고 웃고도 싶은 그런 얼떨떨한 공상에 잡혀들어가나 기실은 무엇을 공상하는지 아무것도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없다. 다만 가슴속이 답답하면서 근질근질하여 시원스런 사이다 한 고뿌를 마시거나, 손이 닿는 데면 살살 긁어 보고 싶을 뿐이다.
 
7
필순의 머리에는 어느덧 덕기가 안 오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와서 병원 앞으로 향하여 오는 사람이면 유심히 바라본다.
 
8
아침에 상점으로 전화를 걸고 병화를 찾다가 필순이 받으니까, 간밤 경과를 묻고 나서 이따가 병원으로 오마고 하였던 것이다.
 
9
-그러나 지금 그이가 오나보다 하고 기다리고 섰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와도 성이 가시고 부끄러워...
 
10
필순은 혼자 속으로 이렇게 변명을 하며 머리에서 덕기 생각을 쓱쓱 지워 버리려니까, 이번에는 덕기의 누이동생이라는 처녀가 머리에 떠오른다. 한 번도 보지는 못했으나 행복스럽게 깔깔대며, 틈 집 속을 휘젓고 다니는 곱게 꾸민 예쁜 아가씨로 상상이 되는 것이다. 고 또래의 계집애들이 모여 서서 널을 뛰고 발깍 뒤집으며 노는 양이 눈에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11
-어떻게 팔자가 좋으면 일생을 그렇게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지내누?
 
12
부러운 듯이 이런 생각을 한 것조차 부끄러운 듯이 얼굴이 발개지며, 그 생각도 잊어버리려 하였다. 아버지와 김 선생이 좌우에 서서 '지각 없는 못생긴 소리 작작해!' 하고 소리를 치는 것 같아서 정신이 반짝 들며 병실 문 편을 해죽 돌려다 보았다. 부친의 음성이 분명히 들리는 것 같아서, 가까이 가서 방문을 가만히 열어보니, 세 개가 놓인 침대 중에 저편 창문 밑으로 누운 부친은 그대로 자는 모양이요, 다른 병인들의 하얗게 센 얼굴들만 이리로
 
13
향하여 기웃한다. 필순은 문을 곱게 닫고 섰던 자리로 다시 와서 선다.
 
14
-하루에 입원료가 3원씩, 한 달이면 90원... 하루에 팔리는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5원 어치나 될까말까한데, 게다가 몇 식구씩 매달려서 먹고, 입원료 치르고... 이익은 고사하고 이러다가는 밑천째 들어먹겠다...
 
15
필순의 생각은 또다시 어두워 들어갔다.
 
16
-어쨌든 이불이나 한 채 어서 만들었으면...
 
17
필순이 한시가 급해서 애절을 하는 것은 부친의 금침이다. 부친이 삼동을 난 때 묻은 백지장 같은 차렵이불을 들쓰고 누운 양은 차마 볼 수가 없다. 남 볼상에도 얼굴이 뜨듯하고 창피하다. 병원 이불을 한 채 주마고는 하는데, 뒤집어씌우는 껍질을 빨러 가서 오지 않았으니 조금만 참으라는 것이다. 게다가 먼저 들어온 사람이 좋은 자리를 차지해서 한데로 난 창밑이라 외풍이 심하다. 병화가 아까 와서 보고 이불이 추울 테니 자기 것을 가져다가 더 덮어드리라고 하더란 말을 모친이 집에 와서 하나, 다다밋방에서 자느라고 일전에 일본 이불 한 채를 사다가 며칠 덮지도 않은 것을 염치없이 갖다가 더럽힐 수도 없지마는, 당장 병화는 무얼 덮으라고 가져올까... 필순은 꽁꽁 앓으면서 입 속으로 돈! 돈! 할 뿐이다.
 
18
-저러다가 고뿔이나 들리셔서 폐렴이 되고 더치시면 어쩌누?... 겁이 펄쩍 난다. 상여 뒤에 따라가는 자기 모양이 눈앞에 떠오른다. 눈물이 핑 돌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유리창에 물이 묻었는지 눈에 눈물이 가렸는지 어른어른하며 비스듬히 아래로 양복 입은 덕기가 종친부 다리를 건너서려는 것이 내려다보인다.
 
19
가슴의 피가 머리로 쭉 솟는 것을 애써 가라앉히며 필순이 눈물을 살짝 씻고 내려다보니, 덕기는 벌써 다리를 건너 섰다. 여기서 먼저 알은 체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어버렸다. 유리창을 열고 손짓을 하여 보이며 반기는 웃음이 인사 한 마리라도 내려보내고, 아래서는 되받아 올려 치치고 하면 그 얼마나 운치 있는 일이요 유쾌한 일이랴마는 지금의 자기 처지는 그러한 화려한 행동을 막는 것을 필순은 잘 요량하고 달뜨려는 제 마음을 걷잡았다.
 
20
웃음 한 번이라도 절제를 하는 것은 자기 부친이 병석에 있어서만이 아니다. 신분이 틀리고 교육이 다르고 빈부가 갈리고 그리고 계급이 나뉜 그 사람에게 함부로 웃어 보이고 따르는 눈치를 보이는 것은 아양이나 부리는 노는 계집 같을까 하여, 필순의 자존심이 허락지를 않는다. 그러나 저편이 고맙게 구는 것이 고맙지 않은 게 아니요, 그와 지체와 재산과 교양을 벗어놓은 덕기란 사람만은 어딘지 모르게 우아하고 탐탁하고 언제 보나 반가운 것을 또 어찌하랴. 필순은 언제든지 반갑고 기꺼운 웃음이 눈매와 입가에서 피어나오다가는 무슨 바늘 끝이 옆구리를 꼭 찌르는 것처럼 살짝 감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번 감추면 두 번만큼, 열 번 감추면 열 번만큼 마치 흐린 날 연기 서리듯 마음에 서려서 남아 있으리라. 또 그것은 압착된 산소나 질소 같은 것이다. 고화하면 살에서 나오는 '무'처럼 일생의 고질이 되어 비지같이 뭉크러 터져 나와서 큰 흠이 질 것이요, 그대로 서려 있다면 언제든지 한 번은 폭발이 되고 말 것이다.
 
21
병원 문 앞까지 다가온 덕기는 벌써 알아보고 위층을 쳐다보며 웃는다. 필순도 미소로 대답을 하고, 창 앞을 떠나서 찬찬히 층계로 향하였다. 내려가서 맞으려는 것이다.
 
22
현관에서 올라온 덕기와 만나서 나란히 돌쳐서려니까 밖에서 자전거를 버티는 소리가 나며 문을 열고,
 
23
"서방님!"
 
24
하고 부른다. 원삼이다.
 
25
"벌써 넘어오셨에요?"
 
26
원삼은 꾸뻑하고 일변 자전거에 실은 짐을 풀어 들여다놓으려 한다.
 
27
"응, 애썼네."
 
28
덕기가 받으려니까 필순이 대신 뺏듯이 받으며,
 
29
"무얼 이렇게 가져오셨에요?"
 
30
하고 두 볼이 살짝 발개졌다. 한 손에 든 것은 과실 광주리요, 한 손에 든 것은 길 떠나는 행구같이 가죽띠로 비끄러맨 누런 담요이었다.
 
31
"아씨, 오늘은 산해진 배달 겸 댁의 아범 겸 두 가지 심부름을 함께 왔습니다."
 
32
원삼은 껄껄 웃고 나가버린다. 담요는 댁의 심부름이요, 과실은 산해진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는 뜻인 모양이다.
 
33
"좀 쉬어서 녹여 가시구려. 또 저리 가시우?"
 
34
필순이 밖에 대고 소리를 치니까,
 
35
"에이 괜찮습니다. 바빠서 어서 가봐야지요. 이제 마님이 오신댔으니까, 아씨는 저리 오시겠죠?"
 
36
원삼은 자전거를 돌려놓고 몇 마디 하고는 휙 올라앉아서 기세 좋게 나간다. 두 사람은 나가는 뒷모양을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37
"잠깐 지내 봐두 퍽 좋은 이예요."
 
38
"쓸모 있다면 아주 댁에 데려다두셔두 좋겠죠."
 
39
"허지만 자기가 와 있으려 할지도 모르고 노 화개동 댁에서 내놓으시겠에요?"
 
40
"그야 어떻게든지 하지요." 긴 복도를 걸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덕기는 말을 돌려서,
 
41
"그 담요요, 할아버지 쓰시던 건데 어떨까요? 돌아가실 때는 덮으시지도 않기는 하였지마는...?
 
42
하고 의향을 묻는다.
 
43
"온 천만의 말씀두, 아무러면 어떻습니까마는, 이런 걸 왜 또 가져오셨에요. 여러 가지로 온 무어라고 말씀할지..."
 
44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이제 보니 추우실 것 같아서 마땅한 이불이 있으면 가져 올까 하다가, 이것이 도리어 편할 듯하기에... 그러나 기하는 사람은 역시 기하니까요..."
 
45
"그렇게 말씀하면 병원 이불이나 침대는 산 사람만 깔고 덮을까요. 어쨌든 가져 오셨으니 덮어드리기는 합니다마는..."
 
46
필순은 지금도 이불 걱정을 막 하고 난 판에 어찌나 고맙고 생광스러운지 목이 꼭꼭 메는 것 같아서 말이 아니 나왔다. 게다가 돌아간 조부의 물건이라고 기하고 꺼림칙해하지나 않을까, 그것까지를 염려하여 주는 그 마음을 무어라고 할지 이루 치사를 할 수가 없다.
 
47
담요를 이불 속으로 푸근히 덮어주니 병인도 좋아하는 기색이나, 말할 기력도 없는지 인사 한마디 변변히 못한다.
 
48
덕기는 조금 앉았다가 필순더러 나가자고 눈짓을 하여 데리고 복도로 나왔다. 아까 필순이 섰던 유리창 앞에 나란히 서서 덕기는 담배를 붙이며,
 
49
"김군 소식 못 들었지요?"
 
50
하고 찬찬히 말을 꺼낸다.
 
51
"아직 못 들었에요. 왜요? 무슨 일이 있에요?"
 
52
필순은 눈이 똥그래지며 묻는다.
 
53
"조금 전에 가택수색을 해갔다는군요."
 
54
"에? 상점에를요?"
 
55
필순은 놀란다.
 
56
"어머니께서도 혼자 퍽 놀라셨겠지만, 경애씨도 찾더라는 것을 목욕간 것을 집에 갔나보다고 했다는데, 한 놈은 아직 남아서 지키고 있더군요. 나도 누구냐고 묻기에 물건 사러 온 것처럼 하고 과실을 사서 들려가지고 간 담요와 함께 원삼이 더러 가져오라 하고 나와버렸지요. 그것도 마침 원삼이가 밖에 나와 섰다가 미리 귀띔을 해주고 어머니께서도 눈짓을 하시기에 모른 체하였으니까 그대로 빠져나왔지, 그러지 않았더면 언제까지 붙들려 앉았었을지 모르지요. 가는 사람마다 그 자리에 금족을 시키거나 데려간다니까..."
 
57
"그럼 어머니도 못 오시겠군요?"
 
58
필순은 여기서 먼저 갔다가 자기마저 붙들리고 모친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면 병원 일을 어떻게 하나 애가 씌었다. 그러나 피존 한 갑에 10전 하고 매코가 5전씩인 것밖에는 해태표만 되어도 얼마에 팔지를 모르는 모친에게 가게를 보여둘 수도 없는 일이다.
 
59
"전화를 좀 걸어보고 올까요?"
 
60
"어머니 오시라구?"
 
61
"글쎄요. 어머니가 오시는 걸 보고 내가 가야 하겠는데요."
 
62
필순은 아래로 내려가다가 얼마 만에 웬 양복 입은 남자 하나를 뒤에 달고 올라온다. 덕기는 즉각적으로 그게 누구인 것을 알아차렸다.
 
63
"여기 계십니다."
 
64
필순은 덕기에게 눈짓을 하고 망단한 기색으로 그 남자를 돌아다보았다.
 
65
덕기는 객의 얼굴을 버티고 서서 바라보며, 속으로는 필순을 데리러 온 게 아닌 눈치에 우선 안심이 되었으나 그래도 마음이 선뜻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은 모자를 벗으며,
 
66
"조덕기씬가요?"
 
67
하고 사람을 놀리는 듯이 빙긋하며 지나치게 공손하다.
 
68
덕기는 불쾌하면서도 자기가 재산가라는 의식을 똥겨주는 것을 깨달았다. 필순도 돈의 위력을 생각하였다. 속이야 어쨌든 남의 일컫기를 만석꾼의 숨은 부자라는 조 아무개의 손자 - 엊그제 장사를 지내고 오늘에는 갈 데 없는 상속자라니, 금단추의 학생복 입은 이 꼴이야 이무기가 다 된 형사 나리 속에 찼으련마는 그래도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이다.
 
69
"xx서에 있습니다. 댁의 지금 전화를 걸어보니 여기 오셨다고 해서... 미안합니다만 잠깐만 같이 가시죠."
 
70
"무엇 때문인가요? 김병화군에게 돈 대었다고 그러는 건가요?"
 
71
덕기는 한수 더 뜨려고 이렇게 웃었다.
 
72
"가십시다. 그러나 남 애를 서 마음을 잡고 생화를 붙들려는 사람을 자꾸 들쑤셔서 다시 악화를 시키면 안 되지 않겠어요?"
 
73
애송이라고 넘보았더니보다는 덕기의 분명한 어조와 태도에 형사도 끌려 들어갔다.
 
74
덕기가 병실에 벗어놓은 모자를 가지러 들어가려니까 필순이 앞질러 들어가서 중절모를 집어다 주며,
 
75
"경애씨도 들어갔대요. 형사는 그래두 그저 있대요."
 
76
하고 전화로 알아본 소식을 소곤소곤 일러준다.
 
77
"그럼 여럿이 와서 에워싸고 있는 게로군요."
 
78
아까는 하나만 남아 있는 줄 알았는데, 경애를 데려가고도 또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일이 퍽 중대하여진 것 같아서 덕기도 좀 뜨끔하였다.
 
79
"그럼 여기 계시겠나요? 어머님 오신대요?"
 
80
덕기는 형사를 따라 나서면서 물었다.
 
81
"못 오신대요. 예서 기다릴 테예요.:
 
82
필순의 목소리는 흐려졌다. 나가는 사람의 뒷모양을 바라보며 문간에 오도카니 섰는 필순은, 지금 가면 영영 못 올 길을 가는 사람같이만 생각이 들어서 섭섭한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83
만일 피혁의 일이 탄로가 났다면 자기도 불려갈 터인데, 형사가 다녀가면서도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면 거기까지 일이 커진 것 같지는 않다고 필순은 생각하였다. 모두 이렇게 붙들려갈 지경이면야 자기도 불려간들 어떠랴고 싶다. 뒤에 남는 어머니가 걱정일 뿐이지 겁날 일은 조금도 없다. 도대체가 덕기까지 붙들려가는 데에 실망이 되어서 이런 막가는 공상도 한 것이나 다시 생각하면 덕기야 아무 죄 없지 않은가? 오늘 해전으로 못 나온대도 곧 놓일 것은 분명하고 병화도 함께 풀려나올 것 같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 까부라져 들어가던 마음에 다시 생기가 난다.
 
84
깜박깜박 졸음이 올 것 같은 어둠침침한 병실에 간신히 마음을 진정하고 앉았는 판에 의외로 모친이 뛰어드는 것을 보고 필순은 무척 반가웠다.
 
85
"어머니! 어떻게 오세요?" 필순은 내달으며 눈물이 글썽하다.
 
86
"응, 어서 가봐라. 원삼이란 그이한테 맡겨두고 왔다. 둘이 다아 전화를 걸 줄 알아야지. 그래 기별두 못하고 뛰어왔다."
 
87
"형사는 갔에요?"
 
88
"응, 지금 막 같아. 그런데 조 선생님은?"
 
89
"지금 여기서 불려가셨에요. 형사가 와서."
 
90
"엉, 그것 안됐구나! 가엾어라. 저걸 어떻게 하니? 어제 그 애를 써주고 잠두 잘 못 잔 이를!"
 
91
모친도 아들이나 그렇게 된 듯이 놀란다.
 
92
"그리고 이 담요까지 손수 가지고 와서, 그 신세를 다 어쩌니."
 
93
모친은 담요를 손으로 쓰다듬는다.
 
94
필순이 상점에 가서 앉으니 오늘은 유난히도 손님이 불어서 꾸준히들 들락거린다. 서투르기는 하지마는 새로 개업을 하였다 하여 남보다는 싸게 팔고, 파 한 뿌리라도 낫게 주기 때문일 것이다.
 
95
손님이 삐기만 하면 필순은 문턱에 기대 서서 시름없이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
 
96
"아씨, 저 댁에 전화나 좀 걸어봅쇼."
 
97
원삼도 갑갑증이 나는지 뒤에서 소리를 친다. 덕기가 나왔으면야 전화라도 아니 걸 리가 없으리라는 생각은 들면서도 걸어보니 단통 덕기가 나오는 데는 놀랐다.
 
98
-어쩌면 그럴꾸!
 
99
필순은 바작바작 타던 자기 생각을 하면 덕기가 집에 돌아와 있으면서 전화를 아니 걸어준 것이 야속한 마음까지 든다.
 
100
덕기는 조금 전에 나왔는데 또 들를 데가 있으니까, 거기 돌아서 뒤미처 오마는 것이다. 그러나 8시가 넘어 겨울밤이 들도록 또 감감 무소식인 것을 보니, 경찰서에를 다시 들어갔을 리는 없고, 사람도 무심하다고 노여운 생각부터 앞을 선다. 자기 볼일도 있겠고 부득이한 사정이야 있겠지마는 무심하다느니보다는 무시를 당한 것 같고 고까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기가 덕기를 생각하고 아끼는 반만큼도 생각하여 주지 않는다는 원망이다.
 
101
-하지만 그 양반이 무얼 잘못했다구 원망을 할꾸...
 
102
필순은 오늘에 한하여 왜 이렇게 덕기에게 노염을 탈꾸? 하며 제 마음을 나무라도 보는 것이었다. 그래도 덕기가 인력거를 타고 오는 것을 보니, 하도 반가워서 체면 안 차린다면 뛰어나가서 손에라도 매달리고 싶다.
 
103
"병화군에게 돈 1000원 준 증거를 보여달래서 형사를 데리고 집에 왔다가, 또 다시 경찰서에 들어갔었지요."
 
104
덕기는 이렇게 늦은 변명 삼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필순은,
 
105
-그런 줄은 모르구...
 
106
하며 혼자 애걸을 하고 까닭없이 원망을 한 것을 뉘우쳤다.
 
107
"그래 보여주셨에요?"
 
108
"분명한 것은 없으나 마침 할아버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전날에 1000원짜리 소절수를 떼어낸 것이 있으니까, 그것을 보여 주었지요."
 
109
필순은 안심이 되었다.
 
110
"그러나 나올 것 같지 않기에 지금 경애씨 집을 들러서 덮개와 솜옷을 들여보내게 하였는데 좀체 받아주어야죠. 경애 어머니는 그저 거기 이불 보퉁이를 지키고 있는데, 어쩌면 곧 내놓을 것 같기도 하구..."
 
111
이 말을 들으니 필순은 한층 더 얼굴이 붉어지며 미안한 생각에 머리가 숙여졌다.
 
112
"원삼이, 이 근처에 설렁탕집 있나? 저녁을 안 먹어 좀 시장한데...?"
 
113
"에구 어쩌나, 저녁두 못 잡숫구... 진지는 있지마는 반찬이 무에 있어야지."
 
114
필순은 당황하였으나, 이런 귀객을 어찌하는 수도 없었다.
 
115
"어쩌다 저녁상을 받으실 새도 없이 그놈들에게 끌려다니셨에요?"
 
116
원삼은 설렁탕집으로 나서며,
 
117
"이 아씨두 그저 잔입으루 계신뎁쇼. 두 그릇 시켜 올까요?"
 
118
하고 필순을 치어다본다.
 
119
"난 싫어요. 먹구 싶지 않아요."
 
120
"아뉼시다. 저는 먹었습니다."
 
121
원삼이 나간 뒤에 필순은 부엌으로 들어가서 상을 차려다가 길체로 놓으며, 설렁탕이 오기를 기다린다.
 
122
"전 선생님께 뭐라구 말씀해야 좋을지 모르겠에요."
 
123
필순은 난로 앞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섰다가 이런 말을 꺼낸다.
 
124
"왜요?"
 
125
"저녁 진지두 못 잡숫구 그렇게 애를 쓰시구 돌아다니시는 건 모르구 전화도 좀 안 걸어주시나 하구 섭섭한 생각이 들던 게 죄가 되겠에요."
 
126
"천만에! 허나 그러시기야 하겠어요. 혼자 마음을 졸이구 계실 줄은 알면서두 곧 오려니 하는 생각에 그럭저럭 그만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127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죄송합니다. 어제부터 횡액에 걸려드셔서 너무나 애를
 
128
쓰시구 다니셔서..."
 
129
"무어, 천만에! 그런 말씀 마세요."
 
130
덕기는 이 소녀의 꾸밈없는 솔직한 말이 고맙고 정다이 들려서 기뻤다. 이 여자의 몸의 어디서 고무 냄새가 날까! 어디서 직공티가 보일까! 그 순진한 심보를 언제까지나 그대로 길러나가게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131
"그런데 이 상점은 어떻게 떠맡았는지 혹 들으셨에요?"
 
132
덕기는 화두를 돌려서 제일 궁금한 조건을 물었다.
 
133
"모르겠에요. 누가 뭐라구 해요?"
 
134
하고 필순은 말하기가 거북하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치어다본다.
 
135
"아니, 뉘게 들은 말은 없지마는, 장훈인가 하는 자가 들고 나서고, 나더러는 1000원 밑천을 대준 것같이 해달래서 경찰에도 불려가구 했지마는 암만해두 미심쩍은 일이 있기에 말예요."
 
136
덕기는 필순의 대답을 기다리는 모양이나 필순으로서는 난처하였다.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판에, 원삼이 설렁탕을 시켜 가지고 들어섰다.
 
137
덕기를 방으로 올려앉히고 상을 차려내면서, 어젯밤에는 경애가 병화 앞에서 이렇게 시중을 들었으려니 하는 생각을 하니 얼굴이 저절로 붉어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138
"이리 가지고 와서 함께 자십시다요."
 
139
"아녜요. 저 이따 먹겠어요."
 
140
필순은 귀밑까지 발개지며 문턱으로 비켜 앉는다.
 
141
"식습니다. 그럼 여기서라두 잡숫죠."
 
142
원삼이 설렁탕 한 그릇을 집어다가 난로 위에 놓아준다.
 
143
"자네는 그 거스른 것 가지구 추운데 막걸리라두 먹게그려."
 
144
원삼은 그렇지 않아도 생각이 나는 판에 좋아서 뛰어간다.
 
145
"그 장훈이란 이는 아니 들어간 모양이죠?"
 
146
필순은 궁금해서 이렇게 말을 붙이면서도 덕기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모른 척하고 속이는 것이 미안하였다.
 
147
"경찰에서도 그자의 말은 묻지 않는 것을 보면, 일은 더 확대되지는 않을 성싶더군요. 문제는 초점이 1000원인데, 그 1000원을 장훈이가 내 놓은 거야 아니겠지요?"
 
148
또 다시 1000원 논래가 나온다. 이 말을 또 꺼내고 싶어서 원삼을 내보냈는지도 모른다. 필순은 덕기가 국물을 훅훅 마셔가며 달게 먹는 것을 보고 난로 위에 놓인 뚝배기를 들어다가 뜨거운 국물을 더 따라주면서,
 
149
"그 동안 누가 밖에서 왔었지요."
 
150
하고 필순은 제풀에 말을 꺼낸다. 이 남자를 못 믿어서 속일 수는 아무래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처럼 친절히 해주는 이 사람을 속이는 것은 의리가 아니라고 다시 생각하고, 그 큰 비밀을 대담히 말하는 것이다.
 
151
"헤에. 그래요?"
 
152
덕기는 귀가 번쩍하였다.
 
153
"그래서 무슨 일을 하라고 김 선생님한테 돈을 드리고 갔는데, 그걸로 이것을 벌였다고 장훈이란 이가 트집인가 봐요."
 
154
필순은 이런 비밀을 제 입으로 꺼내기가 그래도 무서운 기색이다.
 
155
"허어, 그러면서 더구나 장씨가 떠들어대다니 말이 되나."
 
156
하고 덕기는 혀를 찬다.
 
157
"그래서 만일 그 사람이 잡혔다면 일은 커질 것이요, 저두 잡혀들어갈지 모르겠죠."
 
158
필순은 상을 물려내가며 이런 소리를 한다.
 
159
그러자 밖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나며 자리 보퉁이를 든 인력거꾼을 앞세우고 경애 모녀가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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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廉想涉) [저자]
 
193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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