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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열쇠 꾸러미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23권  24권  25권  26권 27권  28권  29권  30권  31권  32권  33권  34권  35권  36권  37권  38권  39권  40권  41권  42권  염상섭

1. 열쇠 꾸러미

1
덕기는 한나절을 들어앉았는 동안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쩐지 집 안에 무슨 이상한 공기가 떠도는 것 같은 감촉을 얻었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떠들썩한 기분과, 서로 속을 엿보려는 듯한 시기와 의혹과 모색의 빛이 덕기에게까지 전염되어 오는 것을 부지중에 깨달았다. 언제라도 서로 마음 주고 깔깔 웃는다거나 얼굴을 제대로 가지고 순편히 말 한마디라도 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마는 이번에 와서는 더욱이 거친 저기압이 집
 
2
안의 어느 구석을 들여다보아도 자욱하다.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 어디에 원인이 있는지 덕기는 알 수가 없다. 초상이 나려며는 까마귀가 깍깍 짖는다더니 조부가 참 정말 돌아가느라고 죽음의 음기가 솟아나서 그런지? 어른의 병환이 침중하니까 수심에 싸여서들 그런지? 그런 열녀가 효부는 가문에도 없으니 그럴 리도 없다. 그러면 그 동안에 또 무슨 대풍파가 있었던가? 덕기 자신이 늦게 왔다 하여 그러는 것인가? 그렇다면 죄는 창훈에게 있는 것이다. 세 번씩이나 쳤다는 전보가 왜 안 왔을꼬? 돈은 어디로 날아갔는고? 알 수 없는 일이다.
 
3
아내의 말을 들으면 안방으로, 사랑으로 밤낮 몰려서 틈틈이 수군거리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 중간에 무슨 요변, 무슨 동티가 있을 법하다더니, 과시 우주 터무니없는 말은 아닐 것 같다.
 
4
이 음산한 공기가 모두 안방에서만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고 뒤꼍이고 그 몇 연놈들의 몸뚱어리가 쓸쩍하는 데서면 풍기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웬일일꼬? 돈? 돈 때문에? 돈 동록 냄새가 욕기의 입김에 서려서 쉬고 썩고 하여 나오는 냄새 같기도 하다. 그러나 돈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고...?
 
5
생각하면 뉘 집에서나 열쇠 임자의 숨이 깔딱깔딱할 때가 닥쳐오면 한 번은 겪고 마는 풍파가 이 집에서도 일어나려고 뭉싯뭉싯 검부잿불처럼 보이지 않는 데서 타오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덕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6
수원집의 태도도 퍽 이상하여졌다. 온종일 두고보아야 모친과는 으레 그러려니 하더라도 건넌방 식구와는 잇새도 어우르지를 않고 영감 옆에 꼭 붙어 앉았다. 그래도 예전에는 덕기에게만은 거죽으로라도 좋게 대하더니 이번에는 덕기가 무슨 말을 걸어도 귀먹은 사람처럼 모른 척하다가 두 번 세 번 재쳐야만 마지못해 대꾸를 한다. 더구나 못된 짓은 덕기가 안방에 들어가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눈치인 것이다. 낮이고 저녁결에 사람이 좀 비었을 때 혼자 누운 조부가 심심할까도 싶고 이야기할 것도 있어서 안방에를 들어서면 더욱 그런 내색을 보이나, 그렇게 못마땅하고 보기 싫으면야 앉았다가도 저만 휙 일어서 나가버리면 그만일 터인데 나가지도 않고 턱살을 치받치고 앉았다. 나가기는커녕 마루에나 뜰에 있다가도 덕기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만 보면 쪼르르 쫓아들어와 지키고 앉았는 것이다. 자위가 폭 가라앉은 무서운 두 눈만 껌벅거리고 누웠는 조부와 무슨 비밀한 이야기나 할 줄 알고 그 안달을 하는 것인지? 덕기는 눈살을 한층 더 찌푸려지건마는 내가 이제는 이 집의 줏대다! 하는 생각을 하면 얼굴빛 하나 말 한마디라도 한만히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모든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쉬쉬하여가며 건드리면 터질 듯한 큰 소리가 나오지 않게 주의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저러나 대관절 사랑축들이 안방에를 왜 이렇게 꾀어드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지 주사는 한집 식구요, 약을 자기 손으로 지으니까 말 말고라도 제일 눈에 거슬리는 것은 최 참봉과 창훈이다. 어떤 때는 일가의 아저씨니 형님 아우니 말이 위문 옵네 하고 몰려들어서는 잔칫집 모양으로 떠들썩하니 안에서도 거기 따라서 더운 점심을 짓네 어쩌네 하고 한층 더 부산한 것은 고사하고라도 사랑에들만 몰려도 좋을 것을 병실에까지 무슨 종회나 가족회의 하듯이 몰려서 뒤집어엎는 데는 머리가 빠질 일이다. 그러나 당자인 병인이 그렇게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니 어찌하는 수도 없다. 그래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벌제위명으로 큰일이나 보아주는 듯시피 입으로만 떠들어대고 수군거렸지 누구 하나 기는 부친이 좀 다잡아서 엄숙하게 집안을 휘둘러놓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은 하나 역시 하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어린 자기는 성검도 안 서고 공부하는 애가 무얼 하느냐는 듯이 도리어 휘두르려고만 든다.
 
8
"아저씨, 그 영수증 가져오셨나요?"
 
9
덕기는 안방으로 건너가서, 저녁 먹고 와서 앉았는 창훈에게 전보환 부친 표를 채근하여보았다. 세 번씩 놓았다는 전보가 한 장도 들어오지 않은 것도 이상하거니와, 돈 부친 것까지 중간에서 횡령을 당하지 않았나 의심이 드는 것이었다.
 
10
"응, 여기 가져왔는데 그애가 잘못 부치지나 않았는지 문기가 들어오면 자세히 물어보고 오려 했더니 아직 안 들어왔어."
 
11
창훈은 눈에 잠이 어린 듯이 어름어름하며 지갑을 꺼내서 훔척거리더니, 착착 접은 종이를 꺼낸다. 등을 주황빛으로 인쇄한 것이 분명히 우편국에서 받은 돈 부친 표이기는 하다. 덕기는 받아서 펴면서,
 
12
"이게 웬일예요?"
 
13
하고 놀라며 웃는다.
 
14
"왜 그러나?"
 
15
"이건 바로 돈표가 아닙니까. 이것을 보내야 돈을 찾아 쓰는 게 아닙니까."
 
16
"응? 그럼 영수증하고 바꾸어 보냈단 말야?"
 
17
"그렇지요. 그건 그렇고, 전보환으로 보냈다면서 이것은 통상위체가 아닙니까?"
 
18
"무어? 통상위체? 통상위체란 어떤 건가?"
 
19
"통상위체면야 편지에 넣어보내는 게 아닙니까?"
 
20
"엉..."
 
21
하고 창훈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눈이 뚱그래지다가,
 
22
"온 자식두, 빙충맞은 못생긴 자식두 다 보겠군."
 
23
하며 아들을 혼자 나무란다.
 
24
"이리... 이리 다오."
 
25
조부는 눈을 감고 누워서 삼종 숙질간의 수작을 듣다가 눈을 뜨고 손을 내밀어 돈표를 받아들고,
 
26
"그 왜 (에구에구) 얼빠진 그애를 (에구에구) 시켰더란 말인가? (에구구) 그앤 그렇다 하기로 (에구) 자네... 자네두 이때껏 그런, 분간이 없다... 없단 말인가?"
 
27
하며 당질을 나무란다.
 
28
"할아버니 돈은 여기 이렇게 표가 있으니 염려 마시고 어서 주무세요. 숨이 더 차신가 뵈온데!"
 
29
덕기는 주부의 앓는 소리가 듣기에 애처로웠다.
 
30
"그러니까 돈하고 네게서 온 편지 겉봉을 안동해주고 전보환을 부치라 했더니 이른 말은 까먹고 아무거나 돈표면 되는 줄 알고 받아서 그거나마 영수증 쪽을 찢어서 봉투에다가 부친 게로구나."
 
31
창훈은 이런 변명을 하고 웃는다.
 
32
영감은 몸이 덜 아프면 좀더 따졌을 것이나, 오늘은 저녁때부터 점점 더 기함이 되어가는지 다시는 말이 없이 돈표를 덕기 앞으로 던지고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
 
33
그것을 보다 덕기는 이 판에 그까짓 논래를 더 할 경황도 없어서 잠자코 돈표만 주머니에 집어넣고 창훈에게도 나가자고 눈짓을 하여 가만히 나와 버렸다. 밤 10시- 정한 시간에 또 하번 온 의사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나 영양이 없는데다가 오늘은 조금 흥분이 되어서 열이 생긴 것이니 그대로 안정하여 자는 대로 두라 이르고 갔다.
 
34
이튿날 아침에는 문기가 와서 안방에 건성으로 잠깐 다녀나오더니 건넌방에서 내다보는 덕기를 보고,
 
35
"아버니께 들으니까 무어 돈을 잘못 부쳤다구? 난 그런 게 처음이라 무언지를 알겠던가? 일본놈이 돈표를 해주기에 급하기는 하고 어떻게 부칠지 몰라서 우편국에서 봉투를 사다가 넣어서 등기로 부쳤네그려. 여기 이렇게 등기 부친 표가 있지 않은가."
 
36
하며 서류 부친 쪽지를 내어주고 열없는 듯이 웃는다.
 
37
"상관 있소. 이왕지사 그렇게 된 것을..."
 
38
하며 덕기도 좋을 낮으로 웃어버렸으나 아무리 시골 생장이기로 그런 반편일 수야 있을까? 암만해도 곧이 들리지를 않았다.
 
39
"너 아범은 내가 어서 죽었으면 시원할 것이다. 너도 못 오게 하느라고 저희끼리 짜고 전보까지 새에서 못 치게 한 게 아니냐?"
 
40
조부가 이런 소리를 할 제 덕기는,
 
41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42
고 하기는 하였지마는 덕기도 의아는 하였다. 부친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랴 싶으나 창훈 아저씨라든지 최 참봉이 부친에게 되돌아 붙어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그도 모를 일이라고 의심도 난다.
 
43
그러나 아무래도 수원집과 부친이 한편이 될 리는 없고 창훈과 부친의 새가 금시로 풀렸을 리도 없으니 십중팔구는 수원집이 중심이 되어서 무슨 농간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44
"제 아무리 그래야 밥이나 안 굶게 하여주지. 그 외에는 막무가내다."
 
45
조부는 이런 소리도 하였다.
 
46
"왜 그런 말씀 하셔요. 그까짓 재산이 무업니까. 그런 걱정은 모두 병 환중이시니까 신경이 피로하셔서 안하실 걱정을 하십니다. 얼마 있으면 꼭 일어나십니다."
 
47
덕기는 조부를 안위시키려고 애썼다.
 
48
"네 말대로 되었으면 작히나 좋으랴만 다시 일어난대도 나는 폐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 금고 열쇠를 맡아라. 어떤 놈이 무어라고 하든지 소용없다. 이 열쇠 하나를 네게 맡기려고 그렇게 급히 부른 것이다. 하지만 맡겨 노면 이제는 나도 마음놓고 눈을 감겠다. 그러나 내가 죽기까지는 네 마음대로 한만히 열어보아서는 아니 된다. 금고 속에는 네 도장까지 있다마는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네 도장이라도 네 손으로 써서는 아니 된다. 이 열쇠는 맡아 두었다가 내가 천행으로 일어나면 그대로 내게 다시 다오."
 
49
조부는 수원집까지 내보내놓고 머리맡의 조그만 손금고를 열라고 하여 열쇠 꾸러미를 꺼내 맡기고 이렇게 일러 놓았다.
 
50
"아직 제가 맡을 것이야 있습니까? 저는 할아버니 병환만 웬만하시면 곧 다시 가야 할 텐데요? 그리고 아범을 제쳐 놓고 제가 어떻게 맡겠습니까?"
 
51
덕기로서는 도리로 보아도 그렇지마는 공부를 집어치우고 살림꾼으로 들어앉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52
"다시 간다고?... 못 간다. 내가 살아난대도 다시 못 간다."
 
53
조부는 절대 엄명이었다.
 
54
"하던 공부를 그만둘 수야 있겠습니까. 불과 한 달이면 졸업인데요."
 
55
"공부가 중하냐? 집안 일이 중하냐? 그것도 네가 없어도 상관없는 일이면 모르겠지마는 나만 눈 감으면 이 집 속이 어떻게 될지 너도 아무리 어린애다만 생각해 봐라. 졸업이고 무엇이고 다 단념하고 그 열쇠를 맡아야 한다. 그 열쇠 하나에 네 평생의 운명이 달렸고 이 집안 가운이 달렸다. 너는 그 열쇠를 붙들고 사당을 지켜야 한다. 네게 맡기고 가는 것은 사당과 그 열쇠- 두 가지뿐이다. 그 외에는 유언이고 뭐고 다 쓸데없다. 이 때까지 공부를 시킨 것도 그 두 가지를 잘 모시고 지키게 하자는 것이니까 그 두 가지를 버리고도 공부를 한다면 그것은 송장 내놓고 장사 지내는 것이다. 또 공부도 그만큼 했으면 지금 세상에 행세도 넉넉히 할 게 아니냐."
 
56
조부는 이만큼 이야기하기에도 기운이 푹 빠졌다. 이마에는 허한이 쭉 솟고 숨이 차서 가슴을 헤치려고 한다.
 
57
"살림은 아직 아범더러 맡으라고 하시지요."
 
58
덕기는 그래도 간하여보았다.
 
59
"쓸데없는 소리 마라! 싫거든 이리 다오. 너 아니면 맡길 사람이 없겠니. 그 대신 내일부터 문전걸식을 하든 어쩌든 나는 모른다."
 
60
조부는 이렇게 화를 내면서도 그 열쇠를 다시 넣어버리려고 아니하였다.
 
61
덕기는 병인을 거슬려서는 아니 되겠기에 추후로 다시 어떻게 하든지 아직은 순종하리라고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으려니까 밖에서 버석버석 옷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수원집이 얼굴이 발개서 들어온다. 이때까지 영창 밑에 바짝 붙어앉아서 방 안의 수작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엿듣고 앉았던 것이다.
 
62
덕기는 수원집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앞에 놓인 열쇠를 얼른 집어들고 일어서 버렸다.
 
63
"애아범, 잠깐 거기 앉게."
 
64
수원집의 얼굴에는 살기가 돌면서 나가려는 덕기를 붙든다.
 
65
수원집은 열쇠가 놓였으면 우선 그것부터 집어놓고서 따지려는 것이라서 덕기가 성큼 넣어버리는 것을 보니 이제는 절망이다. 영감이 좀더 혼돈천지로 앓거나 덕기가 이 집에서 초혼 부르는 소리가 난 뒤에 오거나 하였더라면 머리말 철궤 안의 열쇠를 한 번은 만져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금고 열쇠를 한 번만 만져볼 틈을 타면 일은 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틈을 탈 새가 없이 이 집에 사자가 다녀나가기 전에 덕기가 먼저 온 것이다. 덕기의 옴이 빨랐든지 저희가 굼된 탓이었든지? 어쨌든 이제는 만사휴의다!
 
66
"이 댁 살림은 누가 맡든지 그거야 내 아랑곳 있나요. 하지만 지금 말씀 눈치로 보면 사림을 아주 내맡기시는 모양이니 이왕이면 나더러는 어떻게 하라시는지 이 자리에서 아주 분명히 말씀을 해 주시죠."
 
67
수원집은 암상이 발끈 난 것을 참느라고 발갛던 얼굴이 파랗게 죽는다.
 
68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는 말인가?"
 
69
영감은 가슴이 벌렁벌렁하며 입을 딱 벌리고 누웠다가 간신히 대꾸를 한다.
 
70
"지금이라도 이 댁에서 나가라면 그야 하는 수 없이 나가지요. 그렇지마는 영감께선 안할 말씀으로 내일이 어떠실지 모르는데 영감만 먼저 가시는 날이면 저는 이 집에 한시를 머물 수 없을 게 아닙니까. 저년만 없으면야 영감이 가시면 나도 뒤쫓아가기로 원통할 게 무에 있습니까마는요 알뜰한 세상에 무얼 바라고 누구를 믿고 더 살려 하겠습니까마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제 사정도 생각해 봐 주셔야 아니합니까!"
 
71
수원집의 목소리는 벌써 울음에 젖었다.
 
72
"그 왜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슈?"
 
73
덕기가 탄하였다.
 
74
"내 말이 그른가? 자네도 생각을 해보게. 할아버니만 돌아가시면 이 집안에서 나를 누가 끔찍이 알아줄 사람이 있겠나?"
 
75
수원집은 코멘소리를 하며 눈물을 씻는다. 덕기도 아닌게아니라 그렇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어쩌면 눈물이 마침 대령하고 있었던 것처럼 저렇게도 나올까 싶었다. 그러나 지어 우는 것이 아니라 계획이 틀린 데에 분통이 터져 나오는 진짜 울음이다.
 
76
"하지만 지금 할아버니께서 돌아가시는 거요? 또 내가 살림을 떼맡는 자국인가요? 이 자리에서 그런 소리는 도무지 할 게 아니에요."
 
77
그래도 덕기는 타이르듯 달래었다.
 
78
"쓸데없는 소리들 말고 어서들 나가거라. 무슨 소리를 어디서 듣고 공연한 잔말이냐?"
 
79
영감은 기운도 없거니와 수원집의 말을 듣고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눈을 감고 듣기만 하다가 한마디 순탄히 나무란다.
 
80
"이렇게 말씀하면 엿들은 거 같습니다마는 지금 애아범에게 모두 살림을 내맡기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애아범 듣는 데라도 제 일까지를 분명히 말씀해 두셔야 하지 않으셨습니까? 실상은 집안 사람을 다 모아 놓고 일러두셔야 할 게 아닙니까?"
 
81
"글쎄, 딱한 소리도 퍽 하슈. 지금 할아버니께서 돌아가시니 걱정이슈? 또 설사 할아버니께서..."
 
82
덕기는 돌아간다는 말을 입밖에 내긴 싫어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돌린다.
 
83
"...할아버니께선들 어련하실 게 아니오. 내나 아버니께서나 무엇으로 생각하든지 조금치라도 부족하게야 할 리가 없지 않소. 사람을 지내 보았으면 아실 거 아니겠소?"
 
84
덕기는 조용조용히 일렀다.
 
85
"내가 무슨 욕기가 나서 이런 소리를 하면 이 자리에서 벼락이라도 맞고,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 아니 나왔네. 다만 하나 이것 하나(발치께서 자는 딸년을 눈으로 또 가리킨다) 때문에 앞일을 생각하면 캄캄하니까 그러는 게 아닌가."
 
86
영감은 깜박하고 들려던 혼곤한 잠에서 깨인 듯 몸을 틀며 눈을 번쩍 뜨더니 푹 꺼진 그 무서운 눈으로 휘휘 돌려다보고 나서,
 
87
"그저 잔소리야? 떠들지들 마라. 어서들 자거라."
 
88
맥없는 소리를 잠꼬대같이 하고 또다시 눈을 스르르 감다가, 세 번째 눈을 번쩍 뜨고 안간힘을 쓰면 말을 잇는다.
 
89
"염려들 마라. 내가 내 생전에 이런 꼴을 볼까보아 다 마련해놓았다. 옷 마르듯이 다 공평히 나눠놓았다. 누가 뭐라든지 소용없다. 우리 아버니께서 살아 오셔도 할 수 없다. 치수에 맞추어서 말라논 옷감을 누가 늘이고 줄일 수 있겠니! 내 앞에서 다시 누가 그댓말을 꺼내면 내 손으로 불질러버리고 죽는다."
 
90
영감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덕기가 나온 뒤에도 안방에서는 수원집의 흑흑 느끼며 종알종알 암상맞은 말소리가 어느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제 말마따나 이따 어떨지 내일 어떨지 모르는 등신만 남은 영감을 조르는 것이나, 조르는 것이 아니라 숨이 넘어가는 사람을 들볶는 것이다.
 
91
제 생각에는 한 반이나 내주었으면 좋을 듯싶은 터이나 정이야 있든 없든 남편이라 이름진 사람이 숨을 모는 그 자리에서까지 빚쟁이보다 더 하고 물건 흥정보다 더하게 조르다니- 그야 자식이 못되면 운명하는 아비를 내던져두고 형제끼리도 게걸거리며 싸우는 세상이지마는- 하는 생각을 하다가 덕기는 다시 건너가서 수원집을 몰아대고 싶은 것을 참고 뒷일은 아내에게 일러놓고 훌쩍 밖으로 나와버렸다. 돌아온 후 이들 만에 처음으로 문밖에 나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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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三代)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193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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