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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김의경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23권  24권  25권  26권  27권  28권  29권  30권  31권  32권  33권  34권  35권  36권  37권  38권  39권  40권  41권  42권  염상섭

1. 김의경

1
오늘 아침에 병화는 김의경인가 하는 여자를 xx유치원으로 찾아갔다. 이왕이면 철저히 캐어보겠다는 호기심도 있지만 새문 밖에서 들어오는 역로라 무작정하고 들러본 것이다. 유치원 아이들을 놀리는 것이 언제 보나 재미있어서 심심하면 지나는 길에 들여다본 적도 있던 것을 생각하고 들어갔다. 그러나 가놓고 보니 오늘이 공일인 것을 깜박 잊었다.
 
2
'그야말로 천사 같은 남의 집 어린애들을 데리고 노는 계집애가 안국동에 있다는 집이 어떤 집인지 그런 데로 숨어다니며 못된 짓을 하는 년의 얼굴을 좀 보았으면...'
 
3
하는 생각을 하며 나오다가 문간의 행랑채 같은 데서 늙직한 교지기 같은 영감이 성경책인지 책보를 끼고 나오는 것과 만났다.
 
4
"김의경 선생 댁이 어디요?"
 
5
하고 물어 보았다.
 
6
"왜 그러슈?"
 
7
하고 영감쟁이는 병화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8
"만나실 일이 있건 나하고 예배당으로 갑시다."
 
9
한다.
 
10
"예배당엔 갈 새가 없고 그 댁에 볼일이 있는데..."
 
11
하고 집을 가르쳐달라니까 그자는 집을 정말 몰라서 그런지 하여간 예배당이 바로 요기니 같이 가서 당자를 만나보고 물어보라고 한다.
 
12
병화는 도리어 괜찮다고 따라섰다. 예배당에서는 주일학교 공부를 시키는 모양이었다.
 
13
밖에서 잠깐 섰으려니까 앞서 들어간 영감쟁이가 조그마한 금테 안경을 쓴 여자를 앞세우고 나온다. 모든 구조가 작고 가냘프지만 허리통은 한줌만하고 수족은 여남은 살 먹은 아이 같다. 눈 하나만은 서양 인형 같으나 얼굴은 동양화를 생각하게 하는 미인이다. 살갗은 건드리면 미어질 것같이 두 볼이 하늘하늘 얇다. 병화 눈에는 열 대여섯 살 된 계집애같이 보였다. 그러나 말을 붙이는 것을 보니 역시 나이 차 보였다.
 
14
알지 못할 남자가 헙수룩히 우뚝 섰는 것을 보고 김의경은 축대 위에 멈칫하며 멀뚱히 바라보다가 두어 발짝 내려서며 아무에게나 하는 버릇으로 생글하고 인사를 해 보였다.
 
15
"물론 모르실 것이올시다. 댁을 알아다달라는 사람이 있어서 학교로 갔다가 이리 왔습니다."
 
16
병화는 모자를 벗고 천연히 말을 붙였다.
 
17
"누구신데요?"
 
18
"나요?"
 
19
"아뇨, 저... 집에 찾아오신다는 이가요."
 
20
여자는 무엇을 경계하는 눈치다.
 
21
"댁 어르신네께 가뵐 양반이 있어서요..."
 
22
"간동 xx번지예요."
 
23
"네, 고맙습니다."
 
24
병화는 고개를 꾸뻑하고 휙 돌아서버렸다.
 
25
그 길로 병화는 자기네들의 단골 책사에 들러서 자기들이 만든 팜플렛(조그만 책)을 두세 권 얻어 가지고 간동 xx번지를 찾아갔다.
 
26
병화는 간동 초입의 커단 솟을대문 앞에서 몇 번이나 오락가락하였다. 큼직한 문패가 붙었고, 그 중에도 김가가 두엇 있으니 어느 것이 김의경의 집이려니 하고 문안에서 들어서서 빨래하고 앉았는 행랑어멈더러,
 
27
"김의경이란 여학생의 집이 어느 채에 들었수?"
 
28
하고 물어 보았다.
 
29
"여학생요? 안댁 아가씨 말씀요?"
 
30
안댁 아가씨라는 말에 병화는 좀 놀랐다.
 
31
"아니, 세든 이 가운데 유치원 선생 다니는 이 없소?"
 
32
"세든 이 중에는 없에요."
 
33
"그럼 안댁 아가씨로군. 지금 계시우?"
 
34
"안 계셔요. 예배당에 가셨에요. 어디서 오셨에요?"
 
35
어멈은 학생 아가씨에게 찾아오는 남자라 해서 눈이 점점 커졌다.
 
36
"주인 영감 계시우?"
 
37
"출입하셨에요."
 
38
"어디 다니시는데?"
 
39
지금은 다니시는 데 없에요."
 
40
어멈은 별걸 다 묻는다는 듯 한참 만에 불끈하는 소리로 대꾸하고는 빨랫줄에 무엇인지 쓱쓱 비비고 엎댔다.
 
41
"그래 다시는 여기 세놀 방이 없소?"
 
42
병화는 좀더 캐어보아야 별로 물을 말이 없어 셋방 얻으러 다니는 것처럼 말을 돌려댔다.
 
43
"없에요.!"
 
44
어멈은 또 쥐어박는 소리를 한다.
 
45
"사랑채에 방이 났다는데?"
 
46
추근추근히 묻는다.
 
47
"큰사랑은 벌써 들었고, 영감님 쓰시던 작은사랑도 며칠 전에 사람이 들었에요. 이젠 꽉 찼에요."
 
48
또 한참 만에 마지못해 볼멘소리를 하고는 물통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49
병화는 간동서 나와서 원삼에게 책을 주러 갔었다. 사랑으로 들어가긴 싫고 어정버정하다가 행랑방 문 앞에 사내 고무신이 놓인 것을 보고 두 드리니까 문이 풀썩 열린다. 가지고 간 책을 들여뜨리고 원삼과 같이 나왔다.
 
50
"오늘 안동 좀 가보시지 않으ㄹ쇼?"
 
51
아범은 밤 사이로 무척 친숙하여졌다.
 
52
"왜?"
 
53
"색시도 보구 약주도 잡숫게요."
 
54
하며 원삼은 웃다가 오늘 저녁 7시쯤 해서 가보라고 한다.
 
55
원삼은 조금 전에 그 집에를 다녀왔다고 한다. 병화가 뒤를 캐는 것을 보니 원삼도 웬일인가 하는 궁금증이 나고, 또 병화에게 알리러 가마고 약속한 것을 생각하고는 편지를 들고 나와서 제 방에서 몰래 뜯어보았던 것이다.
 
56
"댁까지 가서는 무얼 합니까? 제가 뜯어보고 이렇게 만나뵈옵건 일러드리기만 하면 좋지 않습니까?"
 
57
하고 원삼은 껄껄 웃는다.
 
58
"그러니까 그 집에는 또 그 색시 집으로 기별을 해둘 모양이로군?"
 
59
병화는 이런 소리를 하다가,
 
60
"오늘이 공일인데 저녁 예배는 안도 그 집에 모여서 볼 모양이로군."
 
61
하고 마주 웃었다.
 
62
"술상 놓고 색시 끼고 보는 예배가 어데 있습니까마는 한번 놀러 가 보셔요. 그런 것을 보아두어야 세상 물정을 안다지 않습니까?"
 
63
"이제 알았더니 원삼이도 오입쟁이로군!"
 
64
하고 병화는 다정스러이 원삼의 어깨를 탁 치고 나서,
 
65
"그건 다아 실없는 소리요. 지금 갖다준 그 책이나 잘 읽어보우. 우리는 두 주먹밖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돈도 명예도 지체도 종교도 아무것도 없는 우리 같은 사람이 정말 사람다운 구실을 하고 세상일을 하려고 손목만 맞붙들면 무어나 되는 것이오. 저 사람들은 말하지만 인간의 찌꺼기요. 걸레들요. 기생 자릿저고리란 말이 있지 않소? 값진 비단은 비단이지만 닳고 해져서 쓸데없는 헌 넝마란 말이오. 우리는 싱싱한 베올 같은 사람들이요. 짜놓으면 투박하고 우악스럽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니오..."
 
66
"그렇습죠..."
 
67
원삼은 장단을 맞추었다.
 
68
"지금도 그 문제의 계집애의 집에를 무슨 일이 있어서 찾아가보았지만..."
 
69
병화가 다시 말을 꺼내려니까 원삼은,
 
70
"그 전부터 아십니다그려?"
 
71
하고 놀란다.
 
72
"어쨌든 말야. 의외에도 훌륭한 집에서 살 뿐 아니라 상당한 집 딸이요, 공부까지 하였나보더군마는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은 무슨 때문인 줄 알아? 그 훌륭한 집에 채채이 세를 들이고, 심지어 주인 영감이 쓰던 큰사랑 작은사랑에까지 사람을 들였다는 것을 들으면 그전에 잘살다가 갑자가 어려워지고 버는 사람은 없으니까 다만 하나 남은 집 한 채를 가지고 세를 놓아 먹는 모양이나, 그 집인들 웬걸 자기 손에 지니고 있겠소. 몇 달이고 몇 해 안 가서 쳐나가면 이제는 자기네가 셋방으로 밀려나갈 것이로구려..."
 
73
"헤에, 그런 대가댁 따님예요."
 
74
하고 원삼은 눈이 둥그래진다.
 
75
"글쎄 그런 대가댁 딸이면 무얼 하나 말요. 호화롭게 자란 버릇은 그대로 남아 있고 유치원 같은 데서 받는 것쯤이야 분값도 안되고 하니까 원삼이네 댁 영감한테 월급을 받아야 살지 않겠소. 월첩이란 별거요?"
 
76
하고 병화는 웃는다.
 
77
"그렇습죠. 그러나 그러면 상관 있습니까? 그렇게라도 한 세상 잘 지내면 좋지요."
 
78
"좋고 안 좋은 것은 고사하고 그런 월급을 제꺽제꺽 주는 주인 영감은 또 어떻게 되어가는지 아느냐는 말이오. 모르면 몰라도 김의경인가 하는 여자의 부친도 요전까지는 그런 월급을 몇몇 년에게 척척 치렀을 것이지만 오늘날 저렇게 된 것을 보면 그네들의 앞길이란 빤히 보이지 않소?"
 
79
"그렇기로 아무러면 우리댁 영감이야 그렇겠습니까?"
 
80
원삼은 그런 것은 상상도 못할 일 같았다.
 
81
"그러리다. 경복궁 대궐을 다시 질 때 누가 100년도 못 채우고 남향 대문인 광화문이 동향이 될 줄 알았겠소? 하여간 그 책을 잘 읽어보우 지금 내 말을 차차 터득하게 될 것이니!"
 
82
병화는 이런 부탁을 남겨놓고 헤어져서 돌아다니다가 경애를 찾아온 것이다.
 
83
"하지만 그 계집애를 만나면 어떻게 할 테란 말이오?"
 
84
경애가 나갈 차비를 차리고 나니까 병화도 이렇게 급히 서두르는 것을 속으로
 
85
웃었다.
 
86
"만나 보고 어쩌든지 어서 나갑시다."
 
87
하고 재촉을 한다. 경애는 손님이 꾀어들기 전에 어서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88
"지금 간동으로는 가서 소용없고 이대로 가서 저녁 겸 점심이나 먹읍시다."
 
89
길거리로 나와서 병화는 이런 발론을 하였다.
 
90
경애는 잠자코 걷다가 어느 조잡한 골목쟁이로 들더니 커단 문을 쩍 벌려 놓은 오릿집으로 뒤도 아니 돌아보고 쏙 들어가버린다. 병화는 물어볼 새 없이 따라 들어섰다.
 
91
"여기는 김의경이 집이 아닌데?..."
 
92
병화는 구두를 벗으며 놀렸다.
 
93
"잔소리 말아요. 김의경이가 어떤 년인지 아무러면 그까짓 걸 쫓아다닐 홍경앤 줄 알았습니까?"
 
94
경애는 그따위쯤을 적대를 해서 시기를 하거나 질투를 하겠느냐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이다.
 
95
"흥, 조상훈 선생이 오신다고 이 집으로 지휘가 내린 게로군?"
 
96
병화는 권하는 대로 상좌로 화로를 끼고 앉으면서도 짓궂은 소리를 하였다.
 
97
"그런 눈치 없는 어림없는 소리 좀 말아요. 당신두 언제나 좀 똑똑해질 모양이오?"
 
98
경애는 혼자 깔깔 웃는다.
 
99
"너무 똑똑해서 밥이 없는데 에서 더 똑똑하라면 어쩌란 말요?"
 
100
"자아, 잔소리 말고 오늘은 피혁씨의 장래 사위님께 첨을 하느라고 한턱 내는 것이니 부자 사위 돼서 거드럭거릴 때 나 같은 사람두 잊지는 마슈."
 
101
"여부가 있소? 하지만 부자놈이 웃돈까지 놓아서 없는 놈에게 딸을 복장 안길 제야 가지지. 오죽하겠소. 남편이란 이름값 받아서는 첩치가하라는 일 게니 그 때 가서 또 한 번 중매를 들어서 정말 미인 하나 골라줄 것까지 미리 부탁해 둡시다."
 
102
하고 병화도 껄껄 웃어 버렸다.
 
103
"아무려나 합시다. 그 때 가선 나두 과히 흉하지 않다는 처분이시면 수청을 듭지요."
 
104
경애도 지지 않고 대거리를 하다가 낯빛을 고치며 목소리를 낯춰서,
 
105
"그건 그렇다 하고, 피혁씨의 눈에 몹시 든 모양인데 대관절 승낙을 할 테요?"
 
106
하고 경애는 밑도끝도없이 묻는다.
 
107
"그 중매쟁이 매우 서투르군. 선도 보이고 내력도 캐어봐야 승낙이고 뭐고 하지 않소?"
 
108
병화는 기연가민연가하면서 우선 이렇게 수작을 붙여 보았다.
 
109
"선이야 어제 보지 않았소. 또 내력은 어젯밤에 내게 말한 것같이 당신의 눈치챈 그대로만도 넉넉히 짐작할 게 아니오..."
 
110
경애는 이 멍텅구리가 정말 혼인 이르는 것으로만 고지식하게 알까보아서,
 
111
"신방이야 벌써 서대문 밖--독립문 밖에 꾸며 두었답니다마는 그건 당신 하기에 있으니까 들어가게 되면 들어가고 말면 말고... 하하하..."
 
112
하며 경애는 웃으면 남자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113
병화도 그런 어림이 없던 것은 아니나 이제는 일이 딱 닥쳤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마치 밤길을 걸으며 도둑이나 산짐승을 만날 듯 만날 듯 조바심을 하다가 검은 그림자와 딱 맞닥뜨린 것같이 머리끝이 쭈뼛하면서도 이상히도 도리어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이었다.
 
114
병화는 얼굴이 벌개지며 눈이 크게 뜨이더니 허허!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으나 그 웃음이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는 자기도 알 수 없었다.
 
115
"허지만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 않겠소? 첫째 당신을 내가 믿을 수 없으니 따라서 그 사람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116
한참 무슨 생각을 하는 눈치더니 병화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117
"되려 못 믿겠소? 나는 중매 노릇만 할 뿐이지만 나중에 낭패가 되면 그이가 곤란이오. 애를 써 진권한 내 낯도 나지를 않을까 보아 걱정이지!"
 
118
"응, 그래서 어제 온종일 나를 면서기를 시키느니 하고 찧고 까불었구려! 여보, 내 걱정은 말고 당신네들이나 무슨 장난들이 아닌지?..."
 
119
"쓸데없는 소리 고만두슈. 김병화 씨가 무에 그리 장해서 우리가 함정 파고 끌어 넣으려고 할 리가 있겠에요. 그런 염려는 말고 단단한 결심을 가지고 일을 맡겠거든 오늘 밤으로라도 그 사람을 가서 보슈. 나는 소개 뿐이니까 자세한 것은 직접 이야기를 해보면 아실 거니..."
 
120
"그 사람을 예전부터 알았습디까?"
 
121
"외가 쪽으로 어떻게 되어요. 어머니 조카 뻘예요."
 
122
경애의 말로 하면 수원 집을 팔아가지고 올라와서 맡겼던 돈을 자기 외삼촌이 가지고 상해로 도망한 뒤에는 일년에 한두 번씩 소식이 있을 뿐이었고, 그 동안 내리 외가에서 살다가 부친도 외가의 건넌방에서 돌아간 뒤에 비로소 따로 살림을 하게 되니까 외삼촌 댁은 더구나 살 수 없고 집은 내놓게 되어서 지금은 새문 밖 현저동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터라 한다. 그런데 상해에 있던 외삼촌이 그 후 얼마 만에 어느 방면으로 도망하였다던 이 조카- 즉 지금 온 피혁군과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이번에 외삼촌의 편지를 가지고 별안간 찾아온 것이라 한다. 물론 외삼촌 댁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와 살림에 쓰라고 돈 100원을 부탁해 보낸 것이나 셋방구석으로 떠돌아다니게 된 후로는 이태나 되도록 소식이 끊겼던 터이므로 피혁군도 천신만고를 해서 집을 찾았으나 찾아가보니 외가에는 묵을 방이 없고 한만히 여관에 들 수도 없고 해서 우선은 경애 집으로 끌고 와서 건넌방에 묵게 한 것이라 한다. 그러지 않아도 피혁군이 떠날 때 경애의 외삼촌은 자기 집에나 자기 누님 집에 묵으라고 일러 보냈던 것이다.
 
123
이러한 관계로 피혁군은 경애의 집에 묵으면서 사회의 물계도 살피고 경애의 위인을 엿보다가 그런 방면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니까 처음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고 또 무심하고 들어두었더니 얼마 후 무슨 인연이 닿느라고 그런지 일이 여기까지 발전되어온 것이라 한다.
 
124
경애는 피혁군의 일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고 또 자기로서는 그런 일에 찬성인지 불찬성인지 자기의 마음조차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애를 써 멀리 온 사람이요, 무슨 일을 의논해보고 몇 마디 부탁만 하고 갈 것이니 튼튼한 사람 하나만 대어달라니까 대어줄 따름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물론 피혁군 자신이 어서어서 제 일을 끝내고 달아나버리려는 조바심도 있겠지만 경애로서는 눈치가 뻔하니만큼 얼른 뚝 떠나보내야 우선 마음이 놓이겠다는 생각도 섞인 것이다. 그래도 위에 무슨 일이나 없을까 자기가 중매를 들어주니만큼 옭혀들 경우가 되면 어쩌나 하는 겁도 없지 않기는 하나 그렇다고 모른 척할 형편도 아니요, 또 그런 성질도 아니었다.
 
125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는 수 있나!'
 
126
-이러한 각오도 가지고 있기는 하는 것이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만일의 경우에 발을 뺄 준비 는 단단히 하여 두려고 약게 일을 꾸미는 것이다.
 
127
"난 몰라요. 다만 외가 쪽 오빠가 사윗감을 얻어달라는데 마침 조덕기의 부자를 친히 아는 관계로 그 친구인 당신을 대어준 데 지나지 않으니까 무슨 말썽이 나는 때라도 당신도 그렇게만 대답을 하시고 또 그렇지 않으면 그런 말 저런 말 다 고만두고 피혁씨가 당신을 직접 찾아가서 만났다고 해도 좋을 게 아니오. 그래서 당신과 나하고도 자연히 알게 된 것이라고 합시다그려."
 
128
경애는 일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말이 외착이 나지 않게 하느라고 미리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129
"되우 겁은 나는 게로군. 나두 몰라! 내가 쫓아다니는 게 성이 가시고 보기 싫으니까 일부러 조상훈이와 모해를 해서 끌어넣은 것이라고 할 것..."
 
130
하고 병화는 남은 열심히 하는 말을 여전히 농담으로 받아넘긴다.
 
131
"그런 쑥스런 소리 고만두고 이제는 술도 정침하고 정신차려요."
 
132
경애도 그 말은 그만 집어치우자는 듯이 술잔을 들어 합환주를 해서 병화에게 주며 눈웃음을 쳐 보인다.
 
133
"이것이 모두 꾐수였다. 그러나 이런 술은 수모가 먹여주어야 할 건데..."
 
134
하고 병화는 웃으며 받아 마시고 잔을 돌려보내려니까,
 
135
"또 그런 분수 없는 소리!"
 
136
하고 경애는 웃는 눈을 흘기며 잔을 내미는 남자의 손등을 탁 때린다.
 
137
그럭저럭 전등불을 켜놓고서 밥을 먹고 나니 거의 7시나 되었다.
 
138
"그럼 이 길로 가보실 테요?"
 
139
문밖에 나와서 경애는 물었다.
 
140
"글쎄 좀더 생각을 해보고..."
 
141
병화의 말눈치가 마음이 썩 내키지 않는 것 같은 데에 경애는 잠깐 경멸하는 마음이 생겼다.
 
142
"왜... 겹이 나는 게로구려?"
 
143
"흥! 아무러면 사람이 그렇게 얼뜰라구! 하지만 나두 인금두 달아보고 믿을 만한지 알아 놓고서야 말이지. 하여간 본성명을 대어 주."
 
144
"그것두 당자더러 물어보세요."
 
145
경애는 가르쳐주고 싶었으나 당자의 의향을 알 수가 없어서 말하기 거북하였다.
 
146
"그것 보우. 당신부터 나를 아직 탐탁히 믿지 못하는데..."
 
147
"그렇게도 생각하겠지만 당자가 자기 이름은 절대로 뉘게든지 비밀히 해 달라니까..."
 
148
이 말을 들으니 그 본성명을 대면 운동자축에서나 당국에서 짐작할 만 한 인물 같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더 이야기를 하려고 명치정 쪽으로 빠지는 으슥한 길로 들면서 수군수군 말을 잇는다.
 
149
"비밀히 한다는 약속을 했다면야 굳이 알려고는 하지 않지만 일을 부탁하려는 내게까지 비밀히 하려고는 아니하겠지? 그뿐 아니라 이름을 듣고 알 만한 사람이면 문제 없고, 나는 직접은 몰라도 물어볼 만한 데 수소문을 해보고 만날 만해야 만나겠다는데 안 알려주면 어쩌잔 말요."
 
150
"그두 그렇지만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며 아무개가 들어왔다는 소문을 내놓으면 아무리 동지간에라도 누설되기 쉽지 않아요?"
 
151
"그야 나두 그런 어림없는 짓을 할라구?"
 
152
"쓸데없는 소리 마슈. 단 세 사람이 한 이야기도 벌써 날만 새면 흘러나가는 세상에…… 당신네들의 실패가 모두 그런 데서 생긴 일이라고 그 사람이 그러던데?"
 
153
"그럼 당자를 만나뵈두 자기 본성명이나 내력은 말 아니할 테구려?"
 
154
"그야 모르지."
 
155
하고 경애는 한참 생각하다가 앞뒤를 돌아다보며 사람이 끊인 것을 모자,
 
156
"거기 나가서는 이우삼이라고 했답니다."
 
157
고 귀에다 대고 소곤소곤하였다.
 
158
"무어? 무어?"
 
159
병화는 채 못 들었는지, 듣고도 자기 귀를 의심하는 것인지 급급히 묻는다.
 
160
"이우삼..."
 
161
경애는 또 한 번 소곤댔다.
 
162
병화는 다시는 입을 벌리지 않았다.
 
163
"아우?"
 
164
경애는 어린애처럼 남자의 콧구멍을 들여다보듯이 착 붙어서 쳐다본다. 병화가 채 대답할 새도 없이 큰길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165
"자아, 그럼 난 가우."
 
166
하며 병화는 아래편으로 돌쳐섰다.
 
167
"어디로?"
 
168
하고 경애가 발을 멈췄으나 병화는 그대로 휘죽휘죽 가다가 휙 돌쳐서 다시 쭈르르 쫓아오더니 찬찬히 걸어가는 경애의 손을 뒤에서 꽉 쥔다. 경애는 깜짝 놀라며 섰다.
 
169
"난 누구라구? 애 떨어지겠소."
 
170
"몇 달 됐는데?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주어야지."
 
171
하고 병화가 웃다가,
 
172
"이번에는 둘째 애 아버지 거요?"
 
173
하고 또 실없는 소리다.
 
174
"듣기 싫어요. 그렇단 말이지 누가 정말..."
 
175
"겨우 안심이 되는군! 그런데 이따가 만날까?"
 
176
다정스러이 묻는다.
 
177
"지금은 어딜 가길래? 집에?"
 
178
"글쎄 어디를 가든지 이따가 10시나 11시쯤 저리 가리다."
 
179
병화는 경애의 대답도 아니 듣고 휙 떨어져 가버린다.
 
180
경애는 남자의 뒤를 돌아다보면서,
 
181
'저렇게 헐렁게비처럼 서두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할꾸?'
 
182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천진스런 아이들 같은 거동이 도리어 사랑스럽게 보여서 유쾌도 하다.
 
183
경애는 지금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나 병화를 끌고 집으로 가기는 싫었다. 이제는 그만큼 하여주었으면 저희끼리 만나든 말든 내버려 두리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주의를 떠난 병화의 몸뚱이와 마음만은 그래도 아직 한 끝이 자기 손에 붙들려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피혁의 심부름을 하느라고 친절히도 하고 실없는 농담도 하여왔지만 그러는 동안에 어쩐지 자기 마음의 한 끝이 병화의 마음에 말려 들어간 것 같다. 아니, 병화라는 남자가 자기 마음속에 마치 옷자락이 수레바퀴 밑에 말려들어 가듯이 말려 들어온 것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경애는 그 옷자락을 탁 무질러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차마 그러기에는 용기가 부족하다.
 
184
두 사람은 만나면 실없는 농담으로 서로 비꼬고 놀리고 할 뿐이지, 젊은 남녀들의 감정을 과장한 로맨틱한 꿈도 없고, 서로 경대하고 사양하고 하는 애틋한 말 한마디 주고받은 일은 없으나 그래도 은근한 맛은 있는 것 같고, 만나지 않을 때는 그렇지도 않다가 만났다 헤어진 뒤면 미진한 것이 남은 것 같아가는 자기 마음을 경애는 웃으며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185
'무슨 점을 보구 그럴꾸?'
 
186
하는 생각을 혼자 해볼 때도 있었으나 특별히 무슨 점을 보고 그러는 것이 아닌 데에 도리어 사랑은 눈트는 거나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김의경인가 하는 여자의 뒤를 그처럼 열심으로 충실하게 캐어다준 것을 보아도 그것이 한갓 경애에게 호의를 표한다거나 자기의 호기심으로만이 아닌 것 같다. 상관 있는 남자의 결점을 찾아다가 그 여자에게 보여주는 일- 그것은 연애하는 남자의 가장 야비하고 졸렬한 수단이지만 하여간 그것도 애욕의 표시는 표시다...
 
187
'싫지는 않지만...'
 
188
경애는 혼자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정말 사랑한다면 그런 위험한 일에 끌어 넣지는 않았을 것 같다.
 
189
실상은 피혁에게 끌어대어주느라고 부지중 친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는 고사하고 병화에게서 그런 일을 빼놓으면 무에 남는가? 다만 룸펜(떠돌아다니는 자)이다.
 
190
그건 그렇다 하고, 오늘 저녁에 상훈을 어떻게 해줄까? 하는 생각을 경애는 해 보았다. 섣불리 안동인가 하는 데로 불쑥 찾아가면 마치 난봉피우는 남편을 붙들러 간 본마누라나 같아서 꼴사납게 김의경의 코빼기야 보나마나 쑥스런 일이요,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두기도 밍밍하다.
 
191
'무슨 묘안은 없을까?'
 
192
하며 우선 팔뚝의 시계를 보니 아직 7시도 아니 되었다.
 
193
주정꾼이 꾀는 데로 아직 들어가기도 싫고 누가 있었으면 산보라도 하고 차라도 먹으며 라디오나 들을까 하는 생각이 났으나 아무도 없다. 어쩐지 애련하고 막막한 생각이 든다. 오래간만에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속이 근질근질하여 혼자 웃어 보았다.
 
194
아이도 그만하면 살아났고, 병화가 풍을 치고 하는 꼴이 피혁을 찾아간 모양이니 집에는 갈 필요 없고... 오래간만에 활동사진이나 잠깐 들여다 볼까 하는 생각을 하며 황금정 전찻길에서 중앙관으로 곱들었다.
 
195
"안녕합쇼? 구경 가십니까?"
 
196
무심코 지나려니까 누가 인사를 건다. 활동사진관 못미처 자동차부 앞에 섰던 운전사다.
 
197
바커스에서 손님이 청하면 늘 불러대는 데다. 경애도 여러 번 다서 잘 안다.
 
198
경애는 알은체해주고 구경을 들어갔다. 들어가 앉아서도 머리에는 안동 생각이 떠나지를 않으나 쫓아가지는 아무래도 싫다. 호텔에서 자기에게 사람을 보내듯이 인력거나 보내서 오나 안 오나 구경이나 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으나 인력거꾼들 입으로만 가르쳐주어서는 집을 찾을 것 같지 않다. 더구나 여기는 그런 사람 없다고 잡아떼어 버리거나 하면 공연한 헛수고만 팔 것이다.
 
199
'자동차를 다고 가서 데려내올까.'
 
200
지금 만난 운전사 생각이 나서 이렇게 결심을 하자 엉덩이가 들먹거렸으나 이왕이면 한바탕 어우러지게 노는 판에 끌어내는 게 좋겠다 하고 시간을 보내고 더 앉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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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三代)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193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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