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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밀담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23권  24권  25권  26권  27권  28권  29권  30권  31권  32권  33권  34권  35권  36권  37권  38권  39권  40권  41권  42권  염상섭

1. 밀담

1
"조씨에게서 댁에 하인 갔지요?"
 
2
경애는 병화를 만나는 말에 물었다.
 
3
"예? 하인요? 아니..."
 
4
"집을 가르쳐달라고 내게로 왔던데?"
 
5
"안 왔어! 이 곤룡포가 탐이 나서 상전, 하인이 똑같이 몸이 던 게로군!"
 
6
"하하하... 아무러면 그럴라구, 참 어쨌든 그 외투를 찾아입으슈. 너무 흉해요. 얼마?"
 
7
"얼만 줄 알면 찾아 주려우?"
 
8
"많이는 못 해두 조금은 보탤 수 있지만..."
 
9
"그만 두슈."
 
10
병화는 너무 고마워서 실없는 말도 아니 나왔다. 언제 친한 사람이라고 그렇게까지 빈말이라도 해주는지 고마운 게 지나서 의혹이 들었다. 덕기가 그렇게 해주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의 소위 죽마고우니까 그럴지 모르지만 설사 덕기 부자의 친한 사람이라 하기로 그렇게까지 할 리는 없는 것이다.
 
11
'그야말로 내가 인복이 좋아서 그런가?'
 
12
하고 생각도 하여보았다.
 
13
"이것만 하면 되겠지요. 부족하면 남았을 테니 채시구려."
 
14
경애는 허리춤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5원 한 장을 꺼낸다. 5원 한 장쯤 아무것도 아닌 듯이 쑥쑥 빼내는 것도 의외지만 병화는 아무려니 까닭 없는 돈을 이 여자에게 받으랴 하고 다시 넣으라고 단연히 거절하였다. 그는 고사하고 7원에 잡힌 것을 어제 조금 쓰고 오늘 아침에 1원 얼마쯤 남긴 뒤에는 주인에게 다 털어놓고 나왔으니 어차피 그것 가지고는 찾지도 못할 것이다.
 
15
"그러지 말고 전당표를 이리 내슈."
 
16
하며 경애가 달려들 듯이 일어나서 다가온다.
 
17
이 계집애가 왜 이렇게 열심인가? 이제는 도리어 겁까지 날 지경이다.
 
18
"여기서는 이야기할 수 없고 어디를 같이 가야 할텐데 내가 창피해요. 그 꼴을 하고는."
 
19
경애는 아주 노골적으로 말을 털어놓았다.
 
20
"어디를 가자는 건지 잔칫집이면 이 옷을 못 갈라구."
 
21
하며 병화는 버티었으나 경애는 이제는 달려들어서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뒤지었다.
 
22
"이건 뭐요?"
 
23
몸을 빼낼 새 없이 경애는 봉투 한 장을 쑥 빼들고 겉봉을 보려 하는 것을 도로 뺏으려 하니 뒤로 감추고 서서,
 
24
"그럼 표를 내노슈. 바꿉시다."
 
25
병화는 하는 수 없이 전당표를 한 손에 꺼내들고 마주 붙들고 바꾸었다.
 
26
이 편지를 경애에게 안 보이려느니보다는 좀 실컷 애를 태워 주고 시달려 보다가 보여주려고 온 터이라 그렇게 쉽사리 빼앗기는 싫었다. 그러나 경애는 피봉 위에 이름이 아니 씌어서 그것이 뉘 편진지는 몰랐다.
 
27
"그건 무슨 편지기에 그렇게 질겁을 하슈? 러브 레터?"
 
28
"에! 러브 레터!"
 
29
"그럼 좀 봅시다."
 
30
경애는 눈이 샐쭉해진다.
 
31
"러브 레터기에 아니 보인다는데, 그러면 보자니 말이 되나?"
 
32
"자아, 외투 찾아 드릴게 하이칼라하고 애인한테나 가슈. 이런 곱장사는 다시 없을 걸."
 
33
경애는 자기를 조소하듯이 실소하면서 전당표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34
30분도 못 되어서 요릿간 사내 하인이 외투를 찾아 가지고 왔다.
 
35
"이건 너무 미안한데. 그 대신에 좋은 것 하나 보여 드릴까?"
 
36
병화는 외투를 갈아입으면서 실없는 소리를 하였다.
 
37
"고만 두어요. 남의 러브 레터 조각이나 얻어보려고 애쓰는 사람은 아니니... 당신한테 반한 여자를 좀 보았으면! 오죽할라구."
 
38
하고 비꼬아 주면서,
 
39
"이건 자네나 입게."
 
40
하고 경애는 병화가 벗어놓은 헌 외투를 옆에서 불을 쬐고 섰는 사내 하인에게 선심을 쓴다.
 
41
"절 주세요!"
 
42
하고 젊은 애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외투를 냉큼 집어서 팔을 꿴다.
 
43
"옛? 그건 임자가 있는데."
 
44
하고 병화는 놀라다가,
 
45
"그깐 버려라! 날 좀 뜨뜻해지면 이 외투를 벗어서 '바깥에'를 주지!"
 
46
하고 또 커닿게 웃는다.
 
47
"자아, 이제는 내가 차비를 차릴 테니 잠깐 기다려 주어요."
 
48
하고 경애가 쪼르르 들어가더니 부리나케 양장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49
"어디를 가자는 거요?"
 
50
"서백리아(시베리아)!"
 
51
하고 경애는 앞장을 선다.
 
52
주부는 그제야 나와서 일찍 들어오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53
"좀 걸어보지 않으랴우?"
 
54
"아무려나."
 
55
오후 4시나 되어 쌀쌀하여지기는 하나 그래도 오늘부터는 날이 풀려서 손발이 시릴 지경은 아니다. 길을 남산으로 들어선다. 병화도 잠자코 따라설 뿐이다.
 
56
"지금 무얼 하세요?"
 
57
경애는 별안간 불쑥 묻는다.
 
58
"낮잠 자고 수립 가서 쌈이나 하고!"
 
59
병화는 혼자 웃었다.
 
60
"하지만 이때껏 내가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사귀었습니까?"
 
61
벼락다지로 사귄 터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자기의 정체를 알면 이 여지가 놀랄 것이요, 다이너마이트를 만지던 아이가 내던지고 물러서듯이 질겁을 하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평범한 여자가 아니니만큼 코웃음을 칠지도 모를 것 같기도 하다.
 
62
"어디 취직이라도 하면 어떠슈? 총독부 속은 어를 수도 없겠지만 허다 못해 군서기고 군속이고..."
 
63
경애는 시치미 떼고 이런 소리를 한다.
 
64
"그 얘기 하려고 끌고 나왔소?"
 
65
"그래요. 총독부 관리를 소개해드릴까 하고 이렇게 외투까지 찾아 입혀가지고 나왔지."
 
66
"고마운 말씀이요. 시켜준답디까?
 
67
"응!"
 
68
"그래 내가 취직을 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우리집 동리에서 움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구세군 쌀--섣달 대목에 구세군에서 주는 쌀을 얻어주고 구문을 얻어먹는 전도 부인도 보았지만 당신도 내가 취직하면 구문이나 생길 줄 알고 이러는 거요?"
 
69
"무어요? 우리집 동리에서 토굴 속에서 구세군에서 쌀을 주어서... 하하... 왜 그리 '서'가 많소. 어쨌든 취직하고 결혼하고 뜨뜻이 먹고 때고 들어앉았으면 좀 좋겠소."
 
70
"만사구비에 지결동남풍이라더니 다른 것은 다 돼두 색시 없어 고만둘래요."
 
71
하고 병화가 웃어버리려니까,
 
72
"그거 무어 어렵소. 정 없으면 나라두 색시 노릇 해드리리다그려."
 
73
하고 경애도 농치다가,
 
74
"여보..."
 
75
하고 경애는 또 말을 추겨내려고 사내 말투처럼 병화에게 다시 말을 건다.
 
76
"조상훈 씨한테 어제처럼 공연히 그러지 말아요. 있는 사람이 뻗대는 거야 당연한 일인데 그걸 일일이 탄하다가는 아무것두 안 되어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있더라도 슬슬 흘려들어만 두면 그만 아니오."
 
77
경애는 타이르듯이 낮은 소리를 한다.
 
78
"언제 볼 사람이라구! 심사 틀리면 집어치는 거지 별 수 있나!... 그래두 덕기의 낯을 보아서 참았지."
 
79
병화는 속으로, 경애의 말을 옳게 생각하였으나 이런 소리를 해보았다.
 
80
"그렇지 않아요. 사람이 살자면 서서 똥누기로 되나. 어쨌든 내 말대로만 해요."
 
81
경애의 이 말에 병화는 귀가 번쩍 띄었다.
 
82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오?"
 
83
"별로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나도 돈 바람에 휘둘려 오늘날 이 지경이 되었으니까 돈을 먹어도 먹고 무슨 끝장이든지 내야지... 하지만 어제는 그렇게 했더라도 이제는 조씨 보는 데 우리가 친한 듯이 보일 거도 아니오. 좀 주의를 해요."
 
84
"언젠 누가 어쨌나?"
 
85
병화는 핀잔을 주다가,
 
86
"이거 왜 이렇게 끌고 가는 거요? 어 추워. 그까짓 이야기하자고 남산 꼴짜기까지 찬바람 맞고 올라올 거 무어 있소."
 
87
"또 이야기가 있지만 어디든지 들어사기랴우?"
 
88
"볼기 있는 데면 아무 데나 좋지."
 
89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쓸쓸한 조선 신궁 앞마당을 휘이 돌아서 삼백 여든 몇 층이라는 돌층계를 나란히 서서 간신히 내려서니 해는 벌써 뉘엿뉘엿하여졌다.
 
90
전차 선로까지 와서 경애는 자기 집이 바로 저기니 같이 가서 저녁이나 먹고 가자고 한다. 병화는 좀 의외이었으나 아무려나 좋다 하면서 따라섰다.
 
91
어떤 생활을 하는지, 문제의 아이는 어떠한지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이 여간치 않으나 그보다도 자기 집에까지를 끌고 가려 할 만큼 무관히 구는 것이 어쩐 까닭인지 알 수 없다. 꼬물꼬물하는 성질이 아니요, 발자하고 경쾌한 신경질적 영리한 계집애이기는 하지만 오다가다 만남 사람이나 다름없는 자기를 제 집에까지 끌고 가는 것은 여간 친절히 생각한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92
"우리집에 와본 남자 손님이라고는 당신 얼러 세 사람밖에 없어요. 내가 이러고 다니니까 이놈 저놈 함부로 끌어들이는 듯시피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집이 아무리 더러워도 여간 사람은 못 오는 데요."
 
93
마치 요샛말로 하면 치수 나가는 명기의 말티 같다.
 
94
"매우 치수가 나가는 거로구려! 그 단 셋에 하나 끼였으니 채표 타기보다도 어려운 행운이요, 알성급제만한 명예는 되겠지만, 나 빼놓고 두 사람의 행운아는...?"
 
95
이죽이죽하는 병화의 말을 경애는 가로막으며,
 
96
"비꼬지 말아요. 내가 기생인 줄 아슈?"
 
97
하고 나무란다.
 
98
"황송한 말씀입니다... 하여간 나 말고 다른 두 사람은 누군가요?"
 
99
"한 사람은 보셨고, 또 한 사람은 언제 기회 있으면 뵈어 드리지요."
 
100
"만나본 사람이 누군가?"
 
101
병화가 어리삥삥한 표정으로 눈을 꿈벅거리니까,
 
102
"애 아버지 구경 안했어요!"
 
103
하고 핀잔을 준다.
 
104
"그럼 둘째 애 아버지만 구경하면 다 본 셈이로군. 그리고 내가 셋째애 아버지! 허허..."
 
105
"이거 왜 이렇게 사람이 컴컴해!"
 
106
하고 경애는 큰길 사람이 보는 것도 창피한 줄 모른다느니보다도 계관치 않고 병화의 넓적팔을 쥐어박는다.
 
107
"내가 컴컴하우? 당신이 말을 잘못했소?"
 
108
병화는 여전히 느물느물 웃기만 한다.
 
109
"몰라요, 몰라요. 마음대로 생각해두구려."
 
110
"그런데 그 첫 애 아버지하고는 어떻게 된 셈속인지 좀 들어봅시다그려? 처음에 어떻게 애 아버지가 되고 지금은 왜 애 아버지 노릇을 쉬고 있고, 또 무슨 까닭에 요새로 별안간 애 아버지 복직 운동을 하려는지? 우렁이 속 같아서 도무지 알 수가 있어야지."
 
111
"아이가 나면 애 아버지 노릇하고 애 어머니가 구박하면 애 아버지 구실이 떨어지고, 또 마음을 돌리면 애 아버지를 다시 시키고 마음 못 돌리면 귀양 보내고, 뻔한 노릇이지."
 
112
"한창 당년의 x비 같구려? 세도 좋아 품이! 하지만 어떤 애 아버지든지 떡국은 먹는 거로군? 나는 어떻게 종신관으로 될 수 없을까?"
 
113
"객쩍은 소리 그만두어요. 그따위 실없는 소리를 할 때가 아니예요. 우리집에 들어가서 그런 실없는 소리 하다가 뺨 맞고 쫓겨날 테니 정신 바짝 차려요!"
 
114
경애는 실없는 듯이 이런 소리를 하였으나 별안간 그 말소리라든지 얼굴빛에 추상 같은 호령과 남을 압도하는 표독한 기운이 차 보인다.
 
115
병화는 무심중에 선뜻하여 여자의 얼굴이 다시 쳐다보였다. 그러나 병화는 태연한 낯빛으로 여전히 싱글싱글하면서,
 
116
"그 호령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오? 얻다가 준비해두었다가 쑥 내놓은 것 같으니!"
 
117
하고 역시 농담을 붙여보았으나 경애는 다시는 입을 벌리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경애란 이상한 계집애다. 지금 말눈치로 보아서는 노는 계집과 다름없고, 자기에게 성욕적으로 덤비는 것같이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어제 상훈에게 끌고 간 것이라든지, 또 전일에 상훈 앞에서 키스를 한 것이라든지, 혹은 자기와 상관한 남자들을 모두 서로 대면시키려는 말눈치로 보면 일종의 변태 성욕을 가진 색마나 요부 같기도 하다. 그러나 또 이렇게 호령을 하고 윽박지르는 것을 보면 그것이 혹시는 히스테리증의 발작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떻게 생각하면 불량 소녀의 괴수로서 무슨 불한당의 수두목 같아도 보인다. 옛책이나 탐정소설에서 보 수 있는 강도단의 여자 두목이라면 알맞을 것 같다. 사실 청인의 상점이 쭉 들어섰고 아편쟁이와 매음녀가 꾀는 음침하고 우중충한 이창골 속을 휘돌아 들어갈수록 병화는 강도들의 소굴로 붙들려 들어가는 듯한 음험한 불안과 호기심을 느끼는 것이었다.
 
118
그러나 경애 집 문전에 왔을 때, 병화는 이때까지의 자기의 종작없는 공상을 속으로 웃었다. 조촐한 기와집이 문간부터 깨끗하고 얌전한 것이 도리어 의외이었다. 중문간에 고르게 팬 장작을 가득 쌓고 비스듬히 들여다보이는 장독대가 겨울철이건만 앙그러져 보이는 것을 보니 불한당이나 불량 소녀의 소굴은커녕 사실 이놈 저놈 함부로 드나드는 뜨내기의 난봉 살림은 결코 아니다.
 
119
'나두 퍽 신경쇠약이 되었나보다.'
 
120
고 병화는 공연한 겁을 집어먹었던 자기를 또 한 번 웃었다.
 
121
경애는 안방으로 병화를 데리고 들어가서 외투와 모자를 벗어 던지고 아랫목에서 자는 아이 옆에 가만히 앉는다. 그러나 아이는 눈을 반짝 뜨고 캥캥댄다.
 
122
"응 응, 엄마 몸 녹여가지고! 엄마 몸이 차요."
 
123
하며 달래는 경애를 병화는 이상스러이 쳐다보고 앉았다.
 
124
바커스의 경애, 상훈 앞에서 보는 경애--아니, 그는 고사하고 지금 대문 밖에서의 경애와 이 방 안에서의 경애가 이렇게도 다를까 싶었다. 여자란 다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이 여자 같이 다각형으로 자유자재하게 변화하는 성격을 가지 여자는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125
"이제는 다 살아난 셈이야요. 3, 4일 전만 해도 죽는 줄 알았어요."
 
126
경애는 어린애의 머리를 짚어보며 얼러주다가 병화를 돌려다보고 상냥스러이 말을 건다. 집 안에 들어오더니 자기가 주인이라 해서 그렇겠지만 아까 새롱거렸다 호령을 했다 하던 것은 잊어버린 듯이 다정스럽게 대접을 하고 말씨도 고와졌다.
 
127
"어머니, 어머니, 나 좀 보세요."
 
128
부엌에서 애년을 데리고 밥을 짓는 모친을 불러 올리더니 돈 일원을 내 주고 반찬을 좀 해달라고 이른다.
 
129
"술도 조금만치만 사오라고 하세요."
 
130
경애는 그제야 짱알거리는 아이를 안아 올려놓고 달래면서 먹먹히 앉았는 명화에게 아까 그 편지를 보이라고 조른다. 편지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벙벙히 앉았는 병화를 이야기를 시키려는 것이다.
 
131
"진정한 사랑은 자랑이 아니라 비밀이요, 행복이 아니라 고통인 것쯤은 알 터인데 남의 비밀을 자꾸 보자니 딱한 양반이오."
 
132
하며 병화도 웃었다.
 
133
"당신 같은 분도 그런 연애 경험이 있을지?"
 
134
"남만 업신여기시는구려. 당신은 '애 아버지'하구 어땠을꾸"
 
135
"어쨌든 첫사랑이었으니까..."
 
136
"첫사랑- 첫정이면야 나중에는 또다시 그리 쏠리고 말지."
 
137
"하지만 원체 나이가 틀리고 불시에 우격으로 그렇게 되어서 그랬던지 지금 생각하면 그저 어리둥절하고 정 반 미움 반인 것 같애요."
 
138
"그래두 아이가 있으니까. 평생 연을 끊지는 못하지요."
 
139
"끊으려면 끊고 말려면 말고..."
 
140
경애는 신청부같게 대꾸를 하다가,
 
141
"그런데 참 아까 좋은 것 하나 보여주신댔지? 편지 대신 그 좋은 거 좀 보여 주시구려."
 
142
하고 말을 돌린다.
 
143
"글쎄, 그것도 하부로는 좀 어려운데! 보이기는 보이지만 보여드리는 대신에 무슨 턱을 낼 테요?"
 
144
"무슨 딴소리야? 외투 찾아준 대신에 보여주기로 한 것인데."
 
145
하고 어린 계집애처럼 조르다가,
 
146
"그래 무슨 턱이든지 소원대로 낼게 보이세요."
 
147
하고 덤빈다.
 
148
"빈말로만이야 소용 있나마는 속는 셈치고 그래 버리지."
 
149
하고 병화는 아까 그 봉투를 꺼내서 경애에게 툭 던진다.
 
150
"무어길래 야단스럽게 그러는 건구."
 
151
하며 경애는 찬찬히 꺼내 펴본다.
 
152
마침 급한 판에 잊지 않고 보내주신 것은 여간 생광스럽게 쓰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왜 십여 일이나 그렇게도 뵐 수가 없습니까? 하여간 이따라도 들러 주세요. 이렇게 어름어름 하시고 마신다면 저는 죽는 사람입니다. 집안에서는 날마다 야단입니다. 어쨌든 급한 것이 민적을 가르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경성부에 가셔서 민적 조사를 하신다고까지 날마다 야단이십니다. 뵙고 자세한 말씀 하겠지만 시원스런 말씀을 곧 주셔야 일가나 친구들에게도 망신을 안 하겠에요. 몸이 달아서 안절부절 못하고 그날그날을 보냅니다. 그나 그뿐입니까, 남에게 말 못할 이런 사정을 좀 생각해주셔요. 사람을 세워 놓고 너무 급해서 무슨 소리를 섰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따 6시에 거기 가서 기다리겠에요. 그저께도 밤 11시까지 기다리다가 헛발을 치고 돌아와서 꾸중만 들었에요...
 
153
"놀랐지요?"
 
154
편지를 다 보기 전에 병화는 놀리듯 충동이듯 웃는다.
 
155
"놀라긴, 그런 사람인 줄 언제는 몰랐던가? 하지만 이게 어디서 나왔에요? 외투 속에서?"
 
156
병화는 그렇다는 대답 대신에 흥하고 웃어버렸다.
 
157
"응, 그래서 몸달아 찾으러 다녔군, 하지만 누굴까?"
 
158
하며 병화는 껄껄 웃다가,
 
159
"정신 바짝 차려요. 애 아버지 빼앗긴 뒤에 후회 말고."
 
160
하며 또 충동인다.
 
161
경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웃으면서도 그 편지 임자가 누군지 몰라 몹시 몸이 다는 모양이다.
 
162
"허니까 아범이 심부름을 가서 맡아 가지고 온 것을 외투에 넣은 채 잊어버린 것이군요? 그러니 아범을 갖다주고 좀 물어봐다 주시구려? 다시 잘 봉해서 드릴게."
 
163
"경애는 장 밑에서 붙임풀 그릇을 찾아내 가지고 얌전히 봉해서 다시 준다.
 
164
"그래도 마음엔 안 놓이는 게구려? 그러지 말고 당신도 이혼하고 어떤 계집앤지 이 계집애도 떼버려야 애 아버지 노릇을 다시 시켜 주마고 해 보구려?"
 
165
"그랜 무엇하게. 몇 년이든지 데리고 놀라지. 하지만 남의 집 딸년을 모조리 버려 놓는 게 안됐으니까 좀 버릇을 가르쳐놓아야 하기는 할 거야. 더구나 이혼을 한다든지 하면 정말 혼을 내주고 말걸! 그전에는 나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덕기를 생각하면서 그 어머니가 가여운 생각이 들어요."
 
166
병화는 경애가 그만큼 요량이 드는 것이 무던하다고 생각하였다.
 
167
밖에서 밥상을 보느라고 데그럭거리면서 모친이,
 
168
"먼저들 먹으랸? 기다릴 테냐?"
 
169
하고 물으니까 경애가 좀 천천히 먹겠다고 대답을 하는 양이 누구를 기다리는 눈치 같다.
 
170
"누가 또 올 사람이 있소? 그건 애 아버지 아니오?"
 
171
병화가 또다시 실없이 소리를 꺼내려니까 경애는 눈으로 나무라고 자는 아이를 가만히 눕힌다. 수세미가 된 양복 치마 앞을 털고 화로 옆에 동그랗게 꿇어앉으며 무슨 생각에 팔린 기색이더니,
 
172
"지금 회의 일은 어떻게 되어가는 셈요?"
 
173
하고 묻는다.
 
174
"회라니?"
 
175
병화는 생게망게한 소리를 묻는다고 놀란 눈을 멀뚱히 떠보았다.
 
176
"xx동맹 중앙 본부 집행위원 아니세요?"
 
177
"그래 어쨌단 말이오?"
 
178
그런 것쯤은 덕기에게 들어서도 넉넉히 알 일이지만 그 이야기를 왜 지금 별안간 꺼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179
그뿐만 아니라 경애의 말 붙이는 태도가 너무나 긴장해 보이는 것이 이상하다.
 
180
"왜 그렇게 놀라세요? 회 형편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좀 알아 보자는 거예요."
 
181
병화는 점점 더 의혹이 부쩍 들어간다. 아까 취직을 하라는 둥 총독부 속으로 소개를 해주마는 둥 할 때는 실없는 농담으로만 들어두었지만 지금 이런 소리를 꺼내는 것을 들으니 이런 사람의 습관으로 경계하는 공포심이 버쩍 나는 것이다.
 
182
'이 계집애가 스파이가 아닌가?'
 
183
하는 생각이다.
 
184
"그건 알아 무얼 하려는 거요?"
 
185
"글쎄, 무얼 하든지... 그런데 저번 통에 당신은 어째서 빠졌었소?"
 
186
경애의 말은 점점 더 의심스러워간다.
 
187
"저번 통이 무슨 통이란 말이오?"
 
188
병화는 어름어름하며 딴전을 붙인다.
 
189
"제2차 xx당 사건 말예요. 물론 당신네 회가 중심은 아니었지만..."
 
190
제2차 xx당 사건이 병화의 회에서 중심이 아니었던 것까지를 아는 것을 보면 경애가 이편이든 저편이든 하여간 좌익 단체의 소식에 맹문이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병화는 너무나 의외인 데에 호기심과 놀라운 생각이 뒤섞여서 경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앉았을 따름이다.
 
191
"왜? 무시무시하슈? 옭혀들까보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시는 게로구려?"
 
192
하고 경애는 남자를 놀리다가 정색을 하며,
 
193
"당신이야말로 정신 차려요. 문간에 나가기 전에 본정서에서 형사대가 달려들 테니. 독 안에 든 쥐지. 이제는 하는 수 있나! 공연히 창피한 꼴 보이지 말고 이제는 딱 마음을 먹고 조용히 당하는 대로 당하실 생각을 하슈. 그 대신에 잡숫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해드릴 테니 내게서 마지막 술 한잔 잡숫고..."
 
194
하며 으르대듯이 타이른다.
 
195
병화는 사실 저번 통 획책에 끼이지 않았고, 그 당시에는 그래도 미심쩍어서 며칠 돌아다니다가 간정되니까 필순의 집으로 돌아간 터이다. 말하자면 병화와 몇몇 동지는 회의 뒷일을 보기 위하여 빠졌던 것이나, 그 후에는 도망을 했던 것도 아니니 아무러면 못 잡아서 경애를 시켜 이런 군색한 짓을 할 리가 만무한 노릇이다. 그러나 참 정말 경애가 스파이라면 꾀음꾀음하여 내막을 떠 보려고 할지는 모를 일이다.
 
196
"그래 그렇게 하나 낚아들이면 얼마씩이나 먹소?"
 
197
병화는 웃으면서 대꾸를 한다.
 
198
"먹긴 무얼 먹어요. 중국식으로 모가지 하나에 몇만 원씩 현상을 하고 잡는 줄 아슈?"
 
199
"생기는 것 없이 돈 들여가며 술까지 받아먹이고 붙들어줄 게 무어 있나?"
 
200
"그것두 내 재미지! 그런데 어쨌든 잡혀가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 아니오?"
 
201
"잡혀가기로 무슨 상관 있나. 죄 없으면 내놓겠지."
 
202
하고 병화는 코웃음을 친다.
 
203
"죄가 없어? 들어간 사람의 뒤를 받아서 제3xx당을 조직해놓은 것은 뻔히 아는데?"
 
204
경애는 눈을 날카롭게 떠 보인다.
 
205
"그리구 책임비서는 김병화라고 보고가 들어갔습니까?"
 
206
"책임비서 노릇이나 할 자격이 웬걸 있기에! 그런 기미만 채면 겁이 벌벌 나서 꽁무니를 슬슬 빼고 베돌면서..."
 
207
"그런 걸 번연히 알면서 나 같은 놈은 잡아다가 무얼 한답디까?"
 
208
"그런 사람일수록 잡아다가 족치면 주정이 허하니까 물 쏟아놓듯 토하고 말라는 소리까지 분단 말이죠! 불기만 하면 당장 놓여나올 거니까. 몇십 명이 옭혀 들어가도 자기만 어서 모면하고 빠져나오려고..."
 
209
"어떻게 잘 아우?"
 
210
하며 병화는 이죽이죽 웃기만 한다.
 
211
"그만 것두 모를까? 나 관상쟁이는 아니라두 사람을 쓱 보기만 하면 알아요. 애초에 당신 같은 사람이 사회운동이니 무어니 하고 나돌아다니는 것이 잘못이지."
 
212
경애는 야죽야죽 골만 올리려고 애를 쓴다.
 
213
"그러니까 군속이나 면 사무원 노릇이나 하라는 거구려?"
 
214
"아니면 덜!"
 
215
"그건 그렇다 하고 제 3xx당을 조직한다는 말을 뉘게 들었소?"
 
216
"그게 다 어림없는 소리예요. 뉘게 들었다고 내 입으로 말할 듯싶소? 그건 고사하고 벌써 일주일 전부터 시내 각 경찰서에서 뒤집어엎고 법석인데 그걸 이 때까지 꿈속같이 모르고 조상훈이의 꽁무니나 줄줄 쫓아다니며 바커스에나 들어엎대 있고 싶어하는 이런 운동자두 있나? 키스 한 번에 이렇게 녹초가 되었으니 내 침이 초보다두 더한가 보군!"
 
217
경애의 입에서 이런 심한 소리까지 나오는 것을 듣고 병화는 그대로 앉았을 수가 없었다. 기연가미연가하는 의혹도 의혹이려니와 아무리 실없는 소리라도 거기까지 막 트고 덤비는 데 모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분한 생각과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이 벌개지며 모자를 들고 벌떡 일어섰다.
 
218
"누구를 어린애로 아는 셈이란 말이오? 가만히 듣고 앉았으려니까 나중엔 별 음독가지 소리를 다 듣겠군! 스파이질을 해먹든지 잡아를 가든지 마음대로 해 봐요!"
 
219
하고 병화는 문을 화닥닥 밀치고 마루로 나섰다.
 
220
그러니까 방 안에서 흐흥- 하면서 냉소를 등덜미에다 끼얹을 뿐이요, 쫓아나와 붙들려고는 아니한다.
 
221
"어디 얼마나 마음대로 나가나봅시다! 대문 밖까지도 못 나가고 다시 들어오지는 말아요."
 
222
하고 경애는 또 부아를 돋우는 소리를 한다.
 
223
"사람이 아무리 타락을 했더라도 제 밑천은 찾아야지 여기까지 쫓아온 내가 잘못이지만."
 
224
병화는 좀 실컷 들이대고 싶었지만 속아넘어간 것이 자기 불찰이라는 열없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이것 역시 이 계집의 무슨 꾀에 한 수 넘어가는 것이나 아닌가 싶은 어리둥절한 생각이 들어서 뼈진 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225
건넌방에 있던 모친은 무슨 일이 난 듯이 눈이 휘둥그래서 내달아 나오며,
 
226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소마는 왜 남의 딸자식을 가지고 타락을 했느니 어쩌니 하고 야단이오?"
 
227
하고 역성이 시퍼렇다.
 
228
병화는 잠자코 꾸부리고 앉아서 구두를 신으려니까 이번에는 중문이 찌이걱하며 우중우중 누가 들어온다.
 
229
병화는 무심중에 가슴이 선뜻하는 것을 깨달으며 쳐다보았다...
 
230
후줄근하게 차린 헌칠한 양복 신사가 앞에 와서 딱 서며 입가에는 조소를 머금고 면구스러이 바라보는 눈이 안경 뒤에서 부리부리한다.
 
231
'형산가?'
 
232
하고 뜨끔한 순간이 지나니까 병화는 이상히도 마음이 가라앉으며 휙 지나쳐 나가려 하였다.
 
233
그 청년의 신은 구두 본새가 조선에서는 보기 드문 서양제나, 상해 다녀온 친구가 신은 것을 많이 본 것 같은 점과, 양복을 모양 낸 것은 아니나 몸에 턱 어울리는 것이 어딘지 외국 갔다 온 사람 같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형사의 티라면 어둔 밤중에 손끝으로 더듬어 만져보고도 알 만큼 그들에게 접촉이 많은 병화가 얼떨결에라도 겁을 잠깐 집어먹던 자기를 속으로 웃으며,
 
234
'이것이 소위 이 집에 드나드는 둘째 남자, 둘째 애 아버진가?'
 
235
하는 생각을 하였다.
 
236
"마침 잘 들어왔네."
 
237
모친이 반색을 하는 눈치로 알은 체를 하려니까 안방문이 열리며 경애가 눈짓을 하고 나온다. 병화는 그 눈짓을 못 보았다.
 
238
"여보세요. 날 좀 보세요."
 
239
김 선생이라고 하기도 싫고 말다툼 끝에 친숙히 병화씨라고 부르기가 서먹해서 그대로 소리만 쳤다.
 
240
병화는 건넌방 모퉁이를 돌쳐서려다가 돌아선다. 그대로 갈 것이지만 그러면 정말 겁이나 나서 줄행랑을 치는 줄이나 알까보아 가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한 것이다.
 
241
"벌에 쐬었소?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가는 법이 어디 있어요?"
 
242
경애는 내려와서 끈다.
 
243
"들어가시지요. 오비이락으로 오자 가시니 미안하외다그려."
 
244
그 청년도 생각하였더니보다는 소탈하게 말을 붙이고 껄껄 웃는다.
 
245
"오비이락으로 말하면 내가 할 소리외다. 관할 경찰서에서 문간에 와서 지키고 있다기에 지금 자수를 할까 하고 나가려는 길인데 마주 들어오니 노형이 그거든 같이 갑시다그려."
 
246
하고 병화도 마주 앉는다.
 
247
"잘 생각하셨소. 내가 뭐랍디까? 문지방도 못 넘어서 다시 들어올 걸 왜 그러는 거요?"
 
248
하고 경애도 놀리며 웃었다. 그러나 모친만은 웃을 수도 없었다. 무에 무언지 영문을 몰라서 마루 한가운데 섰을 뿐이다.
 
249
"어머니, 어서 차려서 상을 건넌방으로 들여다주세요."
 
250
경애는 남자들을 안방으로 몰아넣고 이런 부탁을 하며 따라 들어갔다.
 
251
"두 분 인사하세요. 이분은 우리 일가 오빠- 이번에 시골서 올라오셨어요. 또 이 분은 xx회 간부로 계신 분- 며칠 있으면 군속이나 면서기로 취직해 가실 양반입니다. 오늘은 환영 겸 송별 겸 약주나 한잔 대접하려구..."
 
252
두 남자가 퉁성을 하고 앉았는 동안에 경애는 혼자 조잘댄다. 그러나 병화는 이 청년이 시골서 올라온 오빠라는 말에 그의 얼굴을 다시 보고 다시 보고 하였다. 그 소위 '둘째 애 아버지'가 아닌 것이 섭섭도 하거니와, 차림차림이나 수작 붙이는 것이 촌 속에서 갓 잡아올린 위인은 아니다. 그선 그렇다 하기로, 하고많은 성명에 가죽 피 자 가죽 혁 자의- 피혁이라는 성명이 있을 리 없다. 피혁상을 하는 놈인가, 바지저고리의 껍질만 다니는 놈인가? 위인 됨됨이 껍질만도 아닌 양하다. 또 혹시 성은 피가라 하여도 이름은 하필 혁이라고 지었을꼬? 외국 나간 사람이나 요새 젊은 애들이 무슨 필요로는 물론이요,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도 신유행의 첨단적 모던 취미로인지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을 거꾸로 세로 뜯어발겨서 쓰는 것을 많이 보았지만 하여간 경애가 오빠라는 말이 준신할 수 없는 것만치 피혁이란 성명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대는 이름 같다.
 
253
병화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만 바라보고 앉았다.
 
254
피혁군은 밥을 먹을 때 별로 말도 없이 병화의 인금을 보는지 슬슬 눈치만 보다가,
 
255
"관변에 취직을 하려면 용이할까요? 다른 사람과 달라서."
 
256
이런 소리를 떠듬떠듬한다.
 
257
"공연히 누구를 떠보는 수작인지 실없이 놀리는 것이지요."
 
258
병화는 심중의 경계를 풀지는 않았으나 아까 같은 불뚝한 감장은 어느 결에 스러져 린 기색이다.
 
259
"술 몇 잔에 마음을 돌리셨구려? 아까 같애서는 곧 무슨 야단이라도 낼 듯싶더니! 그러기에 값이 싸단 말예요. 지금 누가 돈 1000은 고사하고 돈 100 주어 슈. 주의구 사상이구 가을 바람의 새털이지!"
 
260
경애가 또 각작거린다.
 
261
"주어 봐야 알지."
 
262
"보나마나! 지금은 아주 입찬 소리를 하지만 총독부 사무관 하나 준다 해 보구려- 아니, 사무관까지 어를 게 아니라 그저 당신께는 군속이 제격이지. 하하..."
 
263
"그역 지내 봐야 알지. 당신은 나하고 언제 지내봤다고 그렇게 남의 속을 잘 아슈? 여자의 좁은 소견으로 큰 새의 마음을 어찌 알리요."
 
264
하고 병화가 호걸풍의 웃음을 터뜨려 놓는다.
 
265
"그야 그렇지요. 아낙네들- 더구나 요새 모던 걸들의 물욕이 교폐한 그런 염량으로야, 하하하."
 
266
피혁군은 경애의 눈총에 껄껄 웃어버리고 말을 돌려서,
 
267
"아, 그럴 거 없이 정 그런 튼튼한 자국으로 취직이 하고 싶으시다면 우리 고을로 가십시다. 내 권리 자랑 같소마는 군청 속에 한 자리 비집기야 그렇게 어려울 것도 아니니..."
 
268
하고서 병화를 본다.
 
269
"노형까지 왜 이러슈?"
 
270
하고 병화는 웃으면서,
 
271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건구?"
 
272
하며 점점 더 의아하여진다.
 
273
"누구누구니 하는 사람들도 미즈텐(절개 없는 기생) 볼 줴지르게 변절도 하는데 상관 있나요. 김병화를 누가 그렇게 끔찍이 안다고..."
 
274
"김병화도 쫄딱 망했구나. 그러나 대관절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깔뵈는 건가...?"
 
275
병화는 자탄하듯이 이런 소리를 하고 밥상에서 물러나 앉는다.
 
276
"어쨌든 도회에 있으면 아무래도 유혹이 많으니까... 당장 입에 풀칠을 할 수 없는데다가 속에 똥만 들어앉았어두 이름은 나고, 게다가 정치의 중심이 있는 데니까 그런 유혹의 손이 뻗기도 쉽고 따라서 끌리기도 쉬운 일이지. 그런 걸 보면 오히려 지방 청년들이 곧이곧솔이요, 도리어 열렬하지. 첫째 지방 관헌이야 그런 고등 정책을 쓸 여지도 없고 머리도 없으니까. 늘 대치를 해 있기 때문에 긴장해 있고 투쟁적 자극이 더 심하거든..."
 
277
피혁의 의견이 병화에게도 그럴 듯이 들렸다.
 
278
병화는 역시 맹문이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279
"고향이 어디세요? 무얼 하시나요?"
 
280
하고 묻는다.
 
281
"나요? 나는 저 황해도 두메에서- 촌구석에 들어엎대서 부족 덕택으로 밥이나 치우고 있는 위인이지요."
 
282
하고 피혁군은 자기를 조소하듯이 웃어버린다.
 
283
병화는 더 캐어묻고 싶었으나 대답이 탐탁치가 않아서 입을 닫쳐버렸다.
 
284
밥상을 물리고 나니까 경애는 안방으로 건너가서 후딱 옷을 입고 나온다.
 
285
"난 벌이 가야 하겠습니다. 앉아들 이야기하세요."
 
286
하고 건넌방을 들여다보고 인사를 하자 그 김에 병화도 따라 일어섰다.
 
287
"더 놀다 가시지요."
 
288
하고 피혁군은 이사로 붙드는 모양이나 그리 탐탁히 권하지는 않고 마루 끝까지 와서 작별을 하고 들어간다.
 
289
경애는 내려서서 마루 위에 섰는 남자의 기색을 살피다가 병화더러는 문 밖에서 기다리라 하고 다시 구두를 벗고 방으로 따라 들어간다.
 
290
"어때요? 쓸만해요?"
 
291
급급히 소곤소곤한다.
 
292
"응! 어쨌든 아주 오게 해주."
 
293
피혁군도 수군수군한다.
 
294
경애는 더 캐지 않고 생글 웃으며 나가버렸다.
 
295
"그거 누구요? 정말 일가요?"
 
296
병화는 컴컴한 속에서 나란히 걸으며 말을 꺼냈다.
 
297
"그럼 정말 일가지 가짜 일가두 있나?"
 
298
"그런데 왜들 자꾸 까부는 거야?"
 
299
"왜? 무얼 어째서?"
 
300
"글쎄 말야."
 
301
"흐흥..."
 
302
하고 경애는 코웃음을 치다가,
 
303
"선을 뵈었으니까 왜 안 그렇겠소."
 
304
하고 소리를 내어 웃는다.
 
305
"선을 뵈다니?"
 
306
병화는 눈이 뚱그래진다.
 
307
"사윗감을 고르구 다닌다우. 그래서 내가 당신을 중매를 들려는 건데 다른 것은 다 가합해두 당신이 주의자인 것하구 놀구 술 자시는 것만은 싫답디다. 그래서 자꾸 군속이든지 면서기라도 취직하라고 뇌까리지 않습니까?"
 
308
"당자가 얼굴만 예쁘면 당신 사위 노릇은 못 하겠소?"
 
309
"하지만 주의도 버리고 술도 끊어야지."
 
310
"글쎄... 생각해봐서."
 
311
하고 병화는 코대답이다.
 
312
"생각해 보고 뭐고가 있나. 벌이 있고 술만 끊으면 고만이지. 무남독녀 외딸에 지참금은 적어도 500석은 되겠다!"
 
313
"호박이 굴렀군! 간밤에 꿈자리가 하두 좋더라니."
 
314
"남의 말은 듣나마나."
 
315
"그런데 주의를 가지고 있으면 고자가 된답디까?"
 
316
"고자나 다름없지 밤낮 감옥살이나 하구..."
 
317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 대리를 세우고 들어가지."
 
318
하고 병화는 느물느물하다가,
 
319
"그런데 여보! 그 사람이 언제 들어왔소?"
 
320
하고 별안간 딴청을 한다.
 
321
"무에 언제 들어와?"
 
322
"밖에서 언제 들어왔느냐 말예요."
 
323
"아까 저녁때 들어오는 것 당신도 보지 않았소."
 
324
경애두 웃으며 딴전이다.
 
325
"그만 두우. 나를 이때까지 시달리게 했것다! 두고봅시다. 이제는 내가 꼬질 테니."
 
326
"잠꼬대 고만 하고 이쁘게 보여서 어서 국수나 먹어요."
 
327
"여보!..."
 
328
하고 병화는 금시로 은근히 부른다.
 
329
"왜...?"
 
330
"황송한 말씀입니다만 국수는 우리가 그 사람을 먹입시다! 그러는 게 옳겠지?"
 
331
병화는 술내 나는 입을 경애의 뺨에 닿을 듯이 들이대고 웃는다.
 
332
"이거 왜 이리 컴컴한 소리를 해?
 
333
하고 경애는 핀잔을 주고 물러선다. 그러나 결코 노한 기색을 아니다.
 
334
"하고 보면 그동안 내게 왜 그렇게 친절했나 하였더니 결국..."
 
335
하고 병화는 말을 뚝 끊는다. 자기의 아까 말이 너무 노골적인 것이 잘못이라고 후회하였다.
 
336
"결국 어째?"
 
337
"글쎄 말야. 결국에 그 사람에게 소개하려고 한 것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단 말이지?"
 
338
"무슨 의미?"
 
339
경애는 말귀가 어둔 것은 아니나 시치미 떼는 것이다. 전찻길로 나서니까 피차에 잠자코 말았다.
 
340
'대관절 피혁이란 위인은 정체가 무엇인구? 사위를 고르러 왔다는 말은 역시 경애의 입에서 함부로 나온 소리겠지만 정말 무슨 일거리를 가지고 다니는 잔가? 계통은 무슨 계통일꾸...?'
 
341
병화는 겁겁한 성미에 다시 뛰어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자가 정말 무슨 계획을 가지고 국외에서 숨어들어온 자라면 무슨 계획일꼬? 응할까? 안 응할까? 그것도 문제지만 그렇다면 단단한 결심과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어쩐지 몸이 으슬으슬한 것 같기도 하나 이러구 무위하게 지내는 판에 일거리가 생겨서 막다른 골목에 든 운동을 다시 뚫어나갈 수 있게 된다면 활기가 생겨서 도리어 다행하기도 하다.
 
342
'그건 그렇다 하고, 요놈의 계집애는 어쩔 텐구? 차차 두고 볼수록 여간내기가 아닌데 이대로 씁쓸히 하고 말 수야 있나? 상훈이 하고 그렇거나 덕기의 서모 뻘이 되거나 그거야 누가 알 일인가...?'
 
343
병화는 기위 내논 발길이면야 갈 데까지 가고야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요 김을 놓치고 미끄러져버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설사 그 남자와 무슨 일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경애와의 관계가 두 사람을 맞붙여 주는 데 그치고 경애는 발을 쑥 빼버리든지 하면 아무 흥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344
일을 팔아서 사랑을 살 수는 없으나 일은 일이고 사랑은 사랑이다. 사랑까지 얻고야 말겠다는 욕심이다.
 
345
"그런데 무얼 보고 그이가 외국서 들어왔다는 거요?"
 
346
컴컴한 기에 사람이 뜸한 데를 오니까 경애는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은 말을 꺼낸다.
 
347
"내가 해삼위(블라디보스톡) 시대에 본 사람이에요."
 
348
"무어? 공연한 소리..." 경애의 목소리는 천연한 듯하면서도 놀라는 기색이다.
 
349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350
하고 병화는 웃으며,
 
351
"하여간 그 방면에서 온 것은 사실 아니오?"
 
352
하고 다진다.
 
353
"글쎄, 무얼 보고 그런 눈치더냐는 말예요!"
 
354
"구두를 봐도 그렇고, 양복 스타일을 봐두 그렇지 않소! 여보! 내 눈에 그렇게 뛸 제야 나보다 더 밝은 눈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주의를 하라고 하슈."
 
355
경애는 깜짝 놀랐다. 병화의 눈치 빠른 것도 탄복할 만하지만 어서 옷을 갈아입혀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356
"자, 여기서 나는 실례!"
 
357
조선은행 앞까지 와서 경애는 장갑을 빼고 하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358
경애는 웬일인지 힘을 주어 흔들면서,
 
359
"아까 그 편지 꼭 물어다주세요. 내일두 그맘때 오세요."
 
360
하고 떨어져 총총총 가버린다. 병화는 그 편지를 잊지 않은 것을 웃으며 한참 바라보고 섰다가 걷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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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기본 정보
◈ 기본
삼대(三代)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193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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