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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외투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23권  24권  25권  26권  27권  28권  29권  30권  31권  32권  33권  34권  35권  36권  37권  38권  39권  40권  41권  42권  염상섭

1. 외투

1
병화는 밥을 뚝 따세고는 허둥지둥 나왔다. 아까부터 드러누워 생각하였지만 암만해도 오늘은 경애를 가보고 싶은 것이다. 오늘은 덕기에게 보내는 편지에 경애 말을 쓰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아까 부인과 이야기한 것과 같이 부친을 이용하기 위해서도 경애를 잔뜩 껴야만 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이 난 것이다. 병화는 결단코 경애를 사랑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 여자가 자기를 사랑할 리도 없지만 자기도 그 여자의 정체를 캐어보자는 호기심이 있을 따름이요, 또 형편 보아서 상훈과의 관계를 이용이나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사랑하고 싶은 정열이 없는 게 아니나 자기 처지가 허락지를 않으니까 단념을 하는 것이다.
 
2
병화는 쌀쌀한 바람을 안고 육조 앞으로 삼청동으로 기어올라갔다. 상훈에게로 가는 것이다. 어제 새 외투를 주는 바람에 입었던 찢어진 헌 외투는 거기다가 벗어두고 왔는데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역시 가지고 왔더라면 좋았을 것을 공연히 두고 왔다고 생각하였다.
 
3
상훈은 없었다. 저녁때 나갔다고 한다. 주인이 없다는 말을 들으니 경애를 만나러 가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든다. 볼일이 그밖에 없을 리가 없겠건마는 공연히 그렇게 생각이 드니 더욱이 시기가 나면서 점점 더 계획대로 할 생각이 든다. 사랑지기를 앞세우고 방으로 들어가보았으나 외투가 아니 걸렸고, 가택수색하듯이 양복장 문을 열게 하자니 잠기었다. 적지않이 낙심이 되어 멀거니 섰으려니까 사랑 사람이 그제야,
 
4
"무슨 외투 말씀요?"
 
5
하고 꿈속같이 묻는다.
 
6
"아니, 어제 내 외투를 여기 벗어놓고 갔는데..."
 
7
"그 찢어진 거요.?"
 
8
"예예, 그것 말씀요."
 
9
하며 병화는 반색을 한다.
 
10
"그럼, 그건 아까 주인 영감이 아범을 주시나보던데."
 
11
하고 픽 웃는다.
 
12
"아범을? 행랑아범을?"
 
13
하고 병화는 더욱이 낙심이 되면서도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웃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14
"그건 남의 단벌 외투인데... 그건 고사하고 아무리 찢어졌어도 3대째 물려내려온 우리집 가보나 다름없는 것인데 말이 되나, 하여간 바꿔 입으로 왔는데..."
 
15
하고 병화는 서둘러대었다.
 
16
"그대로 입어두시구려. 설마 영감이 그 외투를 다시 벗어내라고야 하시겠소."
 
17
사랑 사람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며 가장 사폐나 보아주듯이 이런 소리를 한다.
 
18
"안 돼요. 좀 창피는 하지만..."
 
19
체면이고 무어고 다 집어치웠다. 사랑 사람은 참았던 웃음을 커닿게 한 번 웃고서 마루 끝에 나와서,
 
20
"아범! 아버엄."
 
21
하고 소리를 친다. 아범 대신에 어멈이 한참 만에 대답을 하고 행랑방문을 덜컥 열고 나와 사랑문을 삐걱 밀치고 들어온다.
 
22
"왜 그러세요? 아범은 병문에 나갔는데요."
 
23
이거 틀렸구나 하고 병화는 또 염려가 되었다. 어디로 번적 없으면 낭패다.
 
24
"어서 가서 불러오게."
 
25
어멈은 나갔다. 그러나 혹시 외투를 아끼어서 방에 걸어두고 나가지나 않았는지? 만일 그렇다면 창피하게 당자가 보는데 가져가는 것보다도 그대로 뚝 떼어 가지고 가버렸으면 설왕설래 말없이 좋을 것 같았다.
 
26
"아, 그럴 게 아니라 제 방에 두고 나갔으면 내가 떼가지고 가지."
 
27
하고 병화는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구두를 끌고 쭈르르 나가버렸다.
 
28
병화가 빈손으로 들어오려니까 뒤미처 아범이 큰기침을 하고 터덜터덜 들어온다.
 
29
걷어올린 외투깃 속에 방한모 쓴 대가리를 푹 파묻고 좌우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양이 푸근한 눈치다.
 
30
"여보게, 그 외투 벗어서 이 양반 드리게."
 
31
"왜요?"
 
32
하고 아범은 놀란다.
 
33
"왜든 어서 벗어드려! 이 어른 거야."
 
34
하고 사랑 사람은 두 사람을 다 놀리듯이 웃는다.
 
35
"아니, 영감께서 저더러 입으라고 내주셨는뎁쇼?"
 
36
그래도 아범은 벗기가 아까운 모양이다.
 
37
"아따 잔소리 퍽두 하네. 자네 팔자에 외투가 당한가! 하루쯤 입어 봤으면 그만이지."
 
38
하고 껄껄 웃는다.
 
39
아범은 그래도 내놓기가 서운해서 외투 입은 제 모양을 두서너 번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기가 막힌 듯이,
 
40
"흠!"
 
41
하고는 입맛을 다시고 또,
 
42
"흠!"
 
43
하고는 입맛을 쩍쩍 다시다가.
 
44
"옜습니다!"
 
45
하고 훌떡 벗어서 병화에게 내던지듯이 준다.
 
46
"이거 대단 미안하우. 추운데... 내 며칠 후에 형편 피면 다시 갖다주리다."
 
47
병화는 참 미안하였으나 이왕지사 지금 와서는 그대로 안 받을 수도 없다.
 
48
"싫습니다!"
 
49
아범은 코대답을 하고,
 
50
"흠! 이건 섣불리 감기만 들겠는걸!"
 
51
하고 웅숭그리고 나간다.
 
52
병화는 아범이 입었던 외투를 속에 껴입고 뚜벅뚜벅 버티고 나오려니까 외투를 바꿔 입고 갈 줄 알았던 사랑 사람은 문을 걸러 쫓아나오다가 이력차게,
 
53
"전당국에를 가시는 모양이구려?"
 
54
하고 또 껄껄 웃는다.
 
55
한 시간쯤 후에는 병화가 바커스에 들어설 수가 있었다. 주부는 일전 일이 있는지라 반가워하지 않으나 경애는 난로 앞에 앉은 채 은근히 반기를 눈웃음을 치며,
 
56
"그 동안 웬일예요?"
 
57
하고 묻는 양이 오래 안 온 것을 나무라는 듯싶다.
 
58
"무에 웬일이란 말이오?"
 
59
병화는 반갑지 않은 게 아니요, 더욱이 전일보다 더 친숙히 말을 거는 어조나 태도가 기쁘기는 하나 일부러 핀잔 주듯이 맛대가리 없이 대꾸를 하였다.
 
60
"아니 글쎄 말야..."
 
61
하고 경애는 눈을 떨어뜨려버린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수심이 낀 낯빛으로 풀이 없이 앉았는 모양이나 그것이 병화의 감정에는 발자하게 새새거리며 날뛰는 경애보다 은근하고 깊이가 있어 보여서 좋았다.
 
62
"거기 앉으셔요."
 
63
시름없이 무슨 생각을 하는 눈치다가 옆에 불을 쬐고 있는 병화를 다시 쳐다본다.
 
64
"왜 무슨 걱정이 있소?"
 
65
병화는 담배를 꺼내며 앉으라는 교의에 털썩 주저앉았다.
 
66
경애는 거기에는 대꾸도 안하고 병화의 기닿게 얽어맨 외투 소매를 만져보면서,
 
67
"그 날 이렇게 찢어졌어? 어디 입겠소."
 
68
그 말투가 구차한 부부끼리 옷 걱정을 해주듯이 붙임성이 있어서 병화는 또 기뻤다. 만약 상훈이 준 그 외투를 입고 왔던들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났다. 상훈의 대추인 줄은 모른다 하여도 한창 모양이나 내느라고 뻗쳐 입은 것을 보고 이 여자가 속으로 웃었을 것이다. 웃기까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이러한 다정한 말을 아니 붙였을 것이다.
 
69
"아무러면 어떤가? 그렇지 않아도 그 덕에 외투가 하나 생겼는데..."
 
70
병화는 웃으며 여기까지 말을 꺼내려니까 저편에서 조용히 술을 먹던 한 패가 부르는 바람에 경애는 일어섰다. 오늘은 날이 몹시 추워서 그런지 9시나 되었건만 조선 손님이 단 한 패뿐이다. 이 사람들은 이 집이 익숙하지가 못해 그런지 양복값을 하느라고 체면차려서 그런지 이 편을 가끔가끔 유심히 바라볼 뿐이나 그리 떠들지도 않고 경애를 불러가려고 애도 안 쓴다.
 
71
경애는 술을 가져다가 따라주고 곧 이리로 다시 왔다.
 
72
"그래 어쨌어요? 왜 안 입었에요?"
 
73
허리가 부러진 재미있는 이야기나 되는 듯이 경애는 소곤소곤 뒷말을 채친다.
 
74
"그래 하루를 입어보니까 암만해도 내 주제에는 구결이 들어맞지 않기에 오늘 여기 오는 군자금으로 끌어버렸지."
 
75
하며 병화는 웃는다.
 
76
"뉘 건데?"
 
77
"뉘 걸까? 생각을 해보구려."
 
78
병화는 웃으면서도 '여기다!' 하는 듯이 경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어라고 말이 나오나 들어보자는 것이다.
 
79
"응, 같이 왔던 그이?"
 
80
"그이가 누군지 알아? 서로 아는 모양이던데 왜 그날 내 앞에선 시치미를 뚝 떼어요?"
 
81
"글쎄,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지만 왜 그이가 무어라고 해요?"
 
82
"별말은 없지만..."
 
83
경애는 아직까지도 상훈과의 내력을 이야기하기 싫었다. 그러나 이 남자가 그러한 창피스런 말까지 흉허물없이 하는 것이 사내답게 시원스러워 좋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면 일전 밤에 키스를 하고 댄스를 한 것이 어렴풋하고 취중에 상훈이 보라고 일부러 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후회를 하거나 꺼림한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84
어느 모를 보아서 그런지 병화가 첫눈에 흉하지 않고 일전 만났을 제 덕기에게 들은 말이지만 자기 부친과 신앙 문제로 충돌이 되어서 그 모양으로 떠돌아다닌다는 것이 동정을 끄는 것이다.
 
85
병화로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큰 동기는 역시 일전에 그 키스를 해 준 데 있지만 그것이 일시적 희롱이거나 무슨 이용거리로 한 일이라는 의심이 없지 않으면서도 어느덧 이런 통사정까지 하게 되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이상도 하다.
 
86
"아무것두 안 잡수세요? 애를 써 전당까지 잡혀 가지고 오셨는데."
 
87
어설피 말문이 막힌 것을 깨뜨리려고 경애가 물었다.
 
88
"왜 안 먹긴. 오늘은 내 한턱 쓰리다."
 
89
"난 그렇게 못 먹어요."
 
90
"왜?"
 
91
"어디 좀 갈 데가 있어서."
 
92
"어디요? 좋은 데면 나두 대서볼까?"
 
93
하고 병화가 웃으려니까 경애는 곤댓짓을 하며 마주 웃고 일어섰다.
 
94
병화는 문득 상훈과 만날 약속을 한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자 자기도 놀랄 만큼 시기심이 부쩍 나는 것을 깨달으면서 오늘은 아무래도 놓아 보내지 않으려고 생각하였다. 상훈이 아니고 다른 남자일지라도...
 
95
경애는 싫다던 술을 심심풀이로 홀짝홀짝 마시고 앉았다. 술을 먹여서 못 가게 하겠다고 생각한 병화는 애를 써 권할 필요도 없었다.
 
96
병화는 아까 아범의 외투를 벗겨 입던 이야기를 하여 들려주며 서로 웃었다.
 
97
"이 헌털뱅이라도 그 사람에게는 가문에 없는 것일 텐데 남 못할 일을 했어. 병문에 나가서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였겠고, 좋아라 하고 어깨춤이 났을 텐데 생각하면 가엾지."
 
98
병화는 이런 소리도 하였다.
 
99
"그러지 말고 잡힌 것을 다시 찾아입고 그 외투는 갖다가 주슈. 술은 얼마든지 내가 낼 테니."
 
100
"나두 그럴 생각이지만 실상이야 누가 술에 몸이 달아 왔나...?"
 
101
"그럼 무엇에 몸이 달아서? 흐흥..."
 
102
하고 경애는 코웃음을 친다. 그것이 병화에게는 자기를 모멸하는 듯이 들려서 불쾌하였으나 말을 돌리어 어째 덕기 부자를 만나서 모르는 체하였느냐고 여러 번 조심을 해보아도 경애는 생글생글 웃기만 하다가,
 
103
"차차 알지요. 이야기할 계제가 되면 이야기하죠. 하지만 좀더 지내보고요."
 
104
하고 좀처럼 말을 아니하였다. 그러나 좀더 지내보고 이야기한다는 말에 병화는 반색을 하였다.
 
105
"좀더 지내보다니, 내가 당신의 비밀을 지킬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다져 보겠단 말이지?"
 
106
"그도 그렇지만..."
 
107
하고 경애는 여전히 웃을 뿐이다.
 
108
병화는 수수께끼 같은 이 여자의 속을 점점 더 알 수가 없었다. 자기와 동지가 될 만한 교양이나 의식이 있는 것인가? 단순히 성욕적으로 자기가 총각이라니까 호기심이 있어서 그러는 것인가? 혹은 자기를 상훈이나 덕기의 병정으로 알고 상훈과의 사이에 자기를 다리를 놓으려는 수단인가?... 자기에게 취할 점이라고는 없는데 이 계집이 무슨 소득이 있으리라고 이러는지를 알 수가 없다. 행랑아범이 입었던 외투를 벗겨 입고 다니는 처지인 줄 알면서 웬만한 계집이면 아랫입술을 빼물 텐데 아무리 핏줄은 다르다 하겠지만 역시 홑벌로만 보기 어려운 계집 같다.
 
109
"간다는 데는 안 가우?"
 
110
병화가 도리어 똥겨주었다.
 
111
"차차 가죠. 하지만 당신도 쫓아와보지 않으려우?"
 
112
주기가 조금 도니까 경애는 도리어 추긴다.
 
113
"어딘데? 좋은 데만 가다뿐일까?"
 
114
"좋은 데 아니면 내가 가나?"
 
115
"은근한 데?"
 
116
실없이 이런 소리도 해보았다.
 
117
"은근도 하지!"
 
118
하고 경애도 웃는다.
 
119
"나하구 둘이만?"
 
120
"그럼 둘만이지!"
 
121
"만난다는 사람은 누구게?"
 
122
"만날 사람야 어쨌든지..."
 
123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군."
 
124
"잔소리 말구 오구 싶건 나만 쫓아와요. 훌륭한 데 데리구 갈 테니."
 
125
"알구 보니 여간 불량이 아니로군!"
 
126
"에에 에에, 불량에도 불량! 대 불량 소녀지."
 
127
하고 경애는 깔깔 웃으며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간다.
 
128
아까 있던 손들도 벌써 가버리고 텅 빈 바에서 혼자 유쾌한 듯이 술잔을 기울이고 앉았으려니 한참이나 치장 차리느라고 거레를 하고서 경애가 나온다.
 
129
"자식 새끼는 숨을 모는데 술만 먹고 돌아다니는 이러한 철저한 불량도 없을걸."
 
130
경애는 병화 앞에 와서 서며 자탄하듯이 이런 소리를 한다.
 
131
"자식이라니? 아이가 있소?"
 
132
병화는 놀랐다.
 
133
"왜 동정녀 마리아도 아이를 낳는데 나는 혼잣몸이라고 아이 못 낳을까? 둘이 만드는 것보다 혼자 만드는 게 더 용하고 현대적이라우."
 
134
경애는 말끝만 붙들면 예수교를 비꼬는 버릇이다.
 
135
"흥, 딴은 용하군마는 현대적을 찾자면 애 아버지는 기저귀 빨고 애 어머니는 술 먹고 돌아다니는 게 제격이지... 한데 아이가 앓는다구?"
 
136
"앓아요. 약은 지어서 이렇게 들고만 다니구..."
 
137
경애는 농담을 집어치우고 금시로 애연한 낯빛을 띠며 외투 주머니에서 양약 봉지를 꺼내 보인다.
 
138
"아이는 어디 있기에 아무러면 약 갖다줄 틈이 없을라구? 약부텀 갖다줍시다. 애 아버지도 구경할 겸."
 
139
애 아버지를 구경하겠다는 말에 경애는 속으로 웃으면서 그러지 않아도 애 아버지를 구경가는 길이라고 혀끝까지 말이 나오는 것을 참아 버렸다.
 
140
길에 나와서도 병화는 약부터 갖다주자고 여러 번 권하였으나 경애는 잠자코 나만 따라오라고 하면서 앞장을 서서 걷는다.
 
141
병화는 쫓아가면서도 처음에는 물론 상훈을 만나러 가나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상훈을 만나는 데 자기를 끌고 갈 리가 없다. 취홍인지도 모르겠으나 상훈이라면 언제 약속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경애와 같이 가서 만나서는 재미없는 일이 많다.
 
142
경애는 K호텔까지 와서 잠깐 섰으라 하고 먼저 뛰어들어간다.
 
143
정말 장난으로 둘이만 끌고 왔는가도 싶다. 그렇다면 이 거지 꼴을 하고 따라 들어가기가 창피하여 애가 씌었다. 어쨌든 이러한 데에 드나드는구나 생각을 하니, 쳐다보던 경애가 뚝 떨어진 것 같은 경멸하는 생각도 든다. 모던 걸이란 으레 그런 줄 알았지만 경애도 보통 소위 밀가루에 지나지 않는다 하는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상훈이고 누구고 없다면 자기를 무얼 보고 이렇게 쉽사리 제풀에 서두를까? 의심쩍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재미없을 것도 없다. 불계만 보고 있으려니까 사무실로 들어가던 눈치던 경애가 하녀와 같이 마루 끝에 나와서 밖에 컴컴한 속에 섰는 병화를 손짓으로 부른다.
 
144
병화는 볼이 미어진 구두를 벗으면서 나올 제 닦아나 신을걸, 하는 생각을 했다.
 
145
촌계 관청으로 병화는 두 계집애 뒤만 따라서 으슥한 복도를 돌아 들어가면서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하는 것을 깨달았다.
 
146
하녀는 어느 구석진 양실 방문 앞에 와서 선다. 밑에는 슬리퍼 한 켤레가 코를 밖으로 돌려서 얌전히 놓였다. 병화는 새삼스럽게 무엇에 속았던 것처럼 놀라면서 무슨 말을 붙이려는데 경애가 벌써 손잡이를 돌려서 문을 활짝 열었다. 병화는 눈을 또 놀라게 한 것은 맞은 벽에 돌려진 조선 병풍이다. 무엇에 홀린 것 같다.
 
147
경애의 뒤에서 들여다보니 거기에 상훈의 지지벌건 상이 내려다보인다. 상훈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스러지며 병화를 험상스런 눈으로 치떠보다가 얼른 감추고 다시 웃는 낯으로,
 
148
"어서 들이오."
 
149
하고 알은 체를 한다.
 
150
'망신이로구나! 공연히 왔구나!'
 
151
하는 후회가 잠깐 났으나,
 
152
'망신은 내가 망신이냐? 저편이 망신이지.'
 
153
하는 생각이 들어서 딱 버티고 들어서며 병화는 껄껄 웃음부터 내놓았다.
 
154
"이거 댁 사랑을 떠다노신 것 같습니다그려? 아늑한 품이 미인 앉히고 술 먹기 똑 알맞은걸요."
 
155
"그래서 이렇게 미인을 청해오지 않았소. 허허허"
 
156
상훈은 무색하고 화증이 나는 것을 참느라고 호걸풍의 속 빈 웃음을 내놓았다.
 
157
"자아, 술 친구를 모셔왔으니까 나는 갑니다."
 
158
앉지도 않고 섰던 경애는 다시 나가려 한다.
 
159
상훈은 얼떨떨하였다. 그보다 병화의 처지가 몹시 군색하였다.
 
160
"염색 없이 영문도 모르는 사람을 데려다 놓고 가면 어쩌란 말이오? 두 분이 재미있게 노실 텐데 멋모르고 따라와서 우습게는 되었지만 잠깐 앉으시구려. 나는 곧 갈 테니."
 
161
병화는 경애를 붙들었다.
 
162
"누가 당신 때문에 간다나요? 난 약을 갖다주어야 해요. 어린 숨이 깔딱깔딱하는데 술주정뱅이하고 앉았겠에요?"
 
163
경애는 상훈이 들어보라고 이런 포달을 부렸다.
 
164
"그럼 무엇하자고 나를 끌어다놨단 말요? 그러지 말고 앉으슈. 약은 댁이 어딘지 가르쳐만 주면 내가 가는 길에 갖다가두리다."
 
165
"고맙습니다. 하지만 무얼 무엇하자고 오셔요. 애 아버지 구경하겠다고 하셨지? 이렇게 애 아버지 구경두 하시구 나 대신 술 대작도 하시구려."
 
166
하고 경애는 두 사람을 다 놀리듯이 샐샐 웃는다.
 
167
병화는 애 아버지 구경하라는 말에 눈이 번쩍 띄었으나 시치미 딱 떼고,
 
168
"나더러 당신 서리를 보라지만 선생님이 들으실 리 있나. 이 손으로 술을 따라서야 맛이 있나요? 허허허..."
 
169
하며 슬쩍 농쳐버리다가,
 
170
"선생님, 이거 실례 많습니다. 선생님께서 저두 데리구 오라셨다고 끄는 대로 온 것이라서 누가 이런 줄야 알았겠습니까? 저는 물러갑니다 용서하십쇼."
 
171
하고 엉덩이를 들먹거린다.
 
172
상훈은 실없이 자기를 놀림감이 된 것 같아서 창피스럽고 화가 났으나 꾹 참고 병화를 붙들면서 경애더러 가라고 역정을 내었다.
 
173
"왜 내게 화를 내슈? 당신께는 자식이 아무것두 아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요. 자식이 발을 뻗게 되어도 당신 술타령이나 하는데 쫓아다녔으면 좋을 듯싶지요? 왜 오너라 가너라 하고 날마다 성이 나게 하는 거예요?"
 
174
경애는 시비판을 차리려는 듯이 주저앉아버린다.
 
175
상훈은 어제 오늘 이틀이나 이 집에 와 앉아서 경애를 부르는 것을 어제는 가만 내버려두고 오늘은 올까말까 망설이던 차에 병화가 달려들어서 이렇게 늦게야 오게 된 것이다.
 
176
경애도 말이 그렇지 그렇게 뿌리치고 가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들은 경애가 앉은 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177
상훈은 말대꾸를 하면 점점 창피할 것이니까 시치미를 뚝 떼고 병화에게 술만 권한다. 얼른 고뿌찜으로 몇 잔 먹여서 배송을 내려는 것이다.
 
178
"이건 내가 댁의 산소를 봅니까?"
 
179
병화는 고뿌 술을 먹이려는 의사를 알아차렸다.
 
180
"김군은 우리 집 산소를 보고 나는 김군 댁 산소를 봄세그려."
 
181
하고 상훈은 웃다가 병화의 외투를 이제야 보았는지 깜짝 놀라며,
 
182
"그건 왠 외투요?"
 
183
하고 묻는다.
 
184
"왜요? 내 외투지요."
 
185
"응? 아까 바깥애를 내주었는데...?"
 
186
"네! 바깥애에게서 찾았습니다."
 
187
병화는 시치미를 뗀다.
 
188
"은, 말이 되나. 내 건 어떻게 했단 말인가?"
 
189
"배에 들어가 있습니다."
 
190
"벗어버리게. 행랑것 입힌 것을... 이가 꾀었을 거야."
 
191
하고 상훈은 눈살을 찡그린다.
 
192
"벗어버리면 또 주시겠습니까? 물각유주인데 내 말없이 주신 게 잘못이시지요."
 
193
"주는 대로 잡혀먹게! 김군 줄 게 또 있으면 바깥애를 대신 주겠네. 없는 사람이란 으레 그런 거지만 여간 천량 가지고는 밑 빠진 가마에 물 붓기지 대는 수가 있나."
 
194
상훈은 웃으면서도 삐쭉하고 핀잔을 준다. 이때까지의 화풀이를 여기다 하려는 것 같다.
 
195
병화는 아니꼬운 품이 곧 대들어보고 싶었으나 그래도 덕기의 낯을 보아서 참으려니까 경애가,
 
196
"이 양반한테 무얼 얼마나 대어주셨다고 그런 소리를 하슈?"
 
197
하고 말을 가로막는다.
 
198
"아니야, 옳은 말씀은 옳은 말씀인 것아, 원래 술이란 밑 빠진 가마에 물 붓기니까... 술만 안 얻어먹으면 그런 소리 들을 리도 없겠지만 외투는 내일 댁으로 갖다가드리죠. 난 갑니다. 더 앉았으면 이제는 가달라고 하실 거니까..."
 
199
하고 병화는 홱 일어섰다.
 
200
"나도 가요. 같이 가세요."
 
201
경애도 일어섰다.
 
202
병화는 다시 붙들고도 싶지 않았으나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가는 것이 무슨 때문인지 얼떨떨하였다.
 
203
"이것 봐, 잠깐 내 말 듣고 가."
 
204
경애를 붙들려 하였으나 그대로 나가면서,
 
205
"약이 급해서 그래요. 이야기는 같이 가면서 못 하세요?"
 
206
하며 그래도 차마 훌쩍 가지는 못한다.
 
207
상훈은 하는 수 없이 따라 일어섰다.
 
208
병화는 두어 간통 앞을 서서 뒤도 아니 돌아다보고 휘죽휘죽 간다.
 
209
"김군, 김군!"
 
210
하고 상훈은 불러보았다. 그래도 나어린 사람을 그 모양으로 노해 보내서는 체면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211
"내가 가서 붙들지요."
 
212
하고 경애는 쪼르르 쫓아간다.
 
213
"너무 그러지 말아요. 어쨌든 그러지 말아야 할 일이 있으니 슬슬 비위를 맞추어요. 그리고 내일 저녁때 3시에 저리 오슈."
 
214
경애는 병화에게 이렇게 일러 보내고 뒤떨어져 상훈과 만났다.
 
215
"술이 취해서 그대루 간대요. 실례가 있더라도 용서하시라구요."
 
216
경애는 아까보다도 마을을 푼 것 같았다.
 
217
"실례야 무슨 실례가 될 거 있나. 내가 실없이 말이 잘못 나갔지만 그것도 저편이 없는 사람이니까 곡자아의로 그러는 거지."
 
218
하고 상훈은 신지무의 하였다.
 
219
두 사람은 잠자코 조선은행 앞을 지나 남대문 편을 향한다.
 
220
"어디를 가세요? 댁으로 아니 가세요?"
 
221
경애는 줄줄 쫓아오는 상훈을 가만 내버려두었다가 재동빌딩 앞에 와서 발을 멈춘다.
 
222
"어서 가요. 데려다줄게."
 
223
상훈은 앓는 자식의 얼굴도 보고 경애 모친과 묵은 감정도 풀어 볼까 하는 생각이 있어서 경애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이다. 그러노라면 모녀의 감정도 풀려서 모친도 딸을 권할 것이요, 또 경애 자신의 의향도 자세히 들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전까지 와서는,
 
224
"늦었으니 그만 가시죠. 서로 불편한 일도 있고 하니 며칠 후에 아이가 성해지고 하면 다시 들러 주세요."
 
225
하고 아이년이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서서 들어올까보아 가로막고 서 버린다.
 
226
상훈은 어쩌는 수 없이 돌쳐서버렸다. 그러면서도 어떤 놈이 있어서 그러는 거나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어서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몇 해 만에 집에를 부덕부덕 들어가자 할 체면도 아니었다.
 
227
상훈은 이튿날 늦은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다가 아범이 도로 땟덩이 회색 두루마기를 입고 터덜터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우스운 생각이 나서,
 
228
"그 외투는 도루 뺏겼다지!"
 
229
하고 말을 걸었다.
 
230
"네에. 심상 좋은 걸 그랬어와요. 부덕부덕 벗으라시는 걸 어쩔 수가 있나요? 그런데 그 서방님 댁이 어디예요?"
 
231
"왜 다시 가서 달래려구?"
 
232
"아니예요..."
 
233
참 그런데 어제 그 편지 갖다두었니? 만나뵈었니?"
 
234
어제 저녁때 나갈 제 아범에게 편지를 써맡기고 나간 생각이 이제야 난 것이다.
 
235
"네! 갖다드렸에요... 그런뎁쇼..."
 
236
아범은 눈이 멀개서 망단한 듯이 어름거린다.
 
237
"무엇 말이냐?"
 
238
"저어, 무얼 적어주시던뎁쇼..."
 
239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꺼내고야 말았다.
 
240
"무어? 그래 어쨌단 말이냐?"
 
241
상훈은 급히 묻는다.
 
242
"얻다가 떨어뜨렸는지 온 식전 찾아 봐두 그 답장이 없어와요. 분명히... 아마 그 외투 주머니 속에 넣은 걸..."
 
243
"분명히... 아마란 무슨 소리야? 지금 곧 가서 찾아가지고 오너라."
 
244
하고 야단을 친다.
 
245
여자에게서 오는 답장이라 으레 불호령이 내릴 것을 생각하고 아주 속여 버릴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그랬다가 나중에 그 외투 임자가 편지를 가지고 와서 주머니 속에 이런 것이 있습디다 하고 주인에게 내 놓으면 그 때 가서는 속였다는 죄목이 하나 또 늘 것이니 무서워서 망설이다가 이실직고를 하고 만 것이다.
 
246
"네! 그 외투 속에 제가 넣었기만 하였다면 잃어버리기야 하겠습니까?"
 
247
"잔소리 말고 어서 갔다 와, 이놈아."
 
248
"네! 네!"
 
249
하고 아범은 후닥닥 한걸음에 뛰어나갔다.
 
250
잃어버리고 안 잃어버린 게 걱정이 아니라 그 동안 병화가 그 편지를 뜯어보았을 것이 염려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어제 취했고 아직 이르니까 그대로 넣은 채 벗어두었으면 감쪽같이 주머니 속에 있을 것 같기도 하다.
 
251
이런 조바심을 하며 맛없는 아침상을 받고 앉았으려니까 아범이 다시 허둥지둥 뛰어들어온다.
 
252
"왜 입때 안 가고 또 들어왔니?"
 
253
상훈은 미닫이를 밀치고 또 호령이다.
 
254
"저어, 그 댁이 어디던가요?"
 
255
"미친놈! 옛이야기 같구나! 난 그렇게 뛰어나가기에 어딘 줄 아나 보다 하였구나..."
 
256
이렇게 나무라면서도 속으로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등신이긴 매한가지다. 그러나 병화가 어디 있는지 자기 역시 알 수가 없다.
 
257
아범은 오정 칠 때나 헛발을 치고 돌아와서,
 
258
"그 댁에서두 모른답세요."
 
259
하고 머리를 긁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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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廉想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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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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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04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