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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역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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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자 강연을 듣고
2015년 8월 15일
2015년 8월 14일
about 문화재·역사·전
내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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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1. 19:07) 
◈ 조선 백자 강연을 듣고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의 백자란 주제로 전승창(아모레 퍼시픽 미술관장)이 강연자료를 포스팅합니다. 백자(白瓷)하면 그냥 하얀 도자기라 생각했는데 백자는 고려 때부터 시작됐다는유래부터 청자와 백자 차이, 백자의 안료와 시대 상황 등에 따라 이렇게 다양한 줄 몰랐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의 백자란 주제로 전승창(아모레 퍼시픽 미술관장)이 강연자료를 포스팅합니다. 백자(白瓷)하면 그냥 하얀 도자기라 생각했는데 백자는 고려 때부터 시작됐다는유래부터 청자와 백자 차이, 백자의 안료와 시대 상황 등에 따라 이렇게 다양한 줄 몰랐다.
개요
조선시대에는 청자靑磁와 분청사기粉靑沙器, 백자白磁, 흑자黑磁, 도기陶器 등 다양한 도자기가 만들어졌다. 이중 제작량이 많고
고려시대의 청자와 구분되는 특징을 갖춘 것이 분청사기와 백자이다.
 
 
 
특히, 백자는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제작기술 위에 중국 백자의 영향과 자극을 받아 15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도자기의 중심을 이루며, 순백자를 비롯하여 상감, 청화靑畵, 靑華, 철화鐵畵, 진사辰砂(혹은 동화銅畵), 음각, 양각, 투각, 상형象形 백자 등이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의 백자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초기와 중기로 나누기도 하며, 왕실용 백자를 제작하던 경기도 광주의 가마가 이동을 멈춘 1752년 이후부터 후기로 분류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백자는 전국 각지에서 제작되었지만, 특히 경기도 광주에서 왕실용과 관청용을 만들던 가마의 것이 큰 줄기를 이룬다.
 
조선 초기初期 :
개국1392~임진왜란1599
조선 개국 직후에는 고려청자의 제작 전통이 이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형태, 장식기법, 장식 소재에서 새로운 특징을 보이는 분청사기가 제작되었다. 궁중이나 관청도 전국의 제작지에서 공납貢納으로 거둔 분청사기를 사용했으며, 백자는 커다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소량 제작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5세기 중반부터 상황이 변화되었는데, 왕실과 지배층 사이에서 백자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경기도 광주廣州에 백자만을 제작하는 가마가 설치되고, 전라도 고흥이나 남원, 광주 등에서도 본격적인 제작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백자는 회백灰白 혹은 담청淡靑의 색이 주류이며, 굽은 다소 높고 밖으로 벌어지거나
깎음새가 거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장식이 없는 순백자純白磁 이외에
고려말 상감청자에서 조선 초기
상감분청사기로 이어지는 장식기법을 계승한
상감백자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상감백자에 분청사기의
장식소재로 즐겨 사용되던 연당초蓮唐草, 모란(당초), 당초, 간략한 풀꽃 등이 장식되었으며, 대접을 비롯해 접시, 잔, 병, 항아리 등 다양한 종류가 만들어졌다.
 
1466년에는 경기도 광주에 왕실과 관청용
백자제작을 전담하는 관요官窯가 설치되었다. 관요는 사옹원司饔院이 운영하였고 이때부터 백자의 질, 형태,
제작체계 등에 큰 변화가 생겼다. 관요에서는
상감백자와 다량의 순백자를 비롯해 중국 명明나라의 영향으로 눈처럼 희고 질이 좋은 청화백자靑畵白磁가 만들어졌다.
 
1470~1490년대를 거치며 눈부시게 발전하였는데, 그릇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형태와 장식, 유색이 일정한 격식을 갖추었다. 관요에서 제작된 왕실용 백자의 색깔을 눈처럼 희다는 의미로 설백색雪白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화백자의 경우,
보상당초 寶相唐草나 칠보七寶와 같은 소재가 사용되기도 하고 도식화된 구성이 나타나는 등
중국백자의 영향이 보이지만, 대나무나 소나무, 인물
등 조선의 회화에서 유행하던 소재가 그려지기도 하였다. 청화백자의 그림은 화원이 광주에 내려가 그린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도 중요하다.
 
이러한
제작경향은 16세기에도 계속되었는데, 전반에는 조선 초기에 백자의 특징이 더욱 뚜렷해진다. 다양한 백자 중에서도 왕실의 존엄과 권위의 상징으로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던 청화백자는 소재와 구성이 조선적으로 변화되었다. 이전에 보이던 소나무, 대나무는 물론, 매화나 용, 별자리, 물고기가 그려지는 한편, 시詩나 문자를 적어 장식하였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 사이 광주의 대표적인 제작지로는 우산리, 귀여리, 도마리,
번천리,
무갑리, 오전리, 학동리 등이 있다. 이 중 왕실용 백자를 제작하던 가마터에서는 대접이나 접시 등의 굽바닥에 ‘天, 地, 玄, 黃’의 글자를 새기기도 하였다. 그 의미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옹원에 의해 운영되던
제작집단을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후반에는 광주의 관음리,
대상령리, 곤지암리,
무갑리, 열미리 등에서 백자를 제작했으며, 청화백자 이외에 철화백자鐵畵白磁가 발견되기도 한다. 철화백자가 언제부터 관요에서 제작되기 시작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미 1505년 전후에 운영된 도마리 가마터에서 파편이 출토된다.
 
이 시기에는 그릇의 크기나 굽 지름이 조금 작아진 예도 있지만, 종류나 특징, 제작방법 등은 이전과 동일하다. 그러나 대접이나 접시의 굽바닥에 예정된 수량 외에 추가로 제작된 것을 의미하는 ‘別’이나
제작집단을 뜻하는‘左․右’등의 글자가 적힌 예가 발견된다.
 
관요에서 만들어진 백자의 특징 중에 하나가 굽(그릇 따위의 밑바닥에 붙은 나지막한 받침)의 형태인데, 15­~16세기에는 크게 두 종류가 발견된다. 하나는 왕실용 백자에 보이는 삼각형을 거꾸로 놓은 듯한
모양[도립삼각형倒立三角形]이고, 다른 하나는 궁중이나 관청에서 사용할 백자에 보이는 것으로
대마무의 마디[죽절竹節]를 연상케 하는 굽이다. 한편, 광주 관요 이외에도 경기도 일대를 비롯하여 충청, 경상, 전라도 등 전국 각지에서 일상생활에 긴요한 대접과 접시 등 다량의 백자가 제작되었다.
 
조선 중기中期 : 임진왜란
이후1600~금사리1752
 
16세기 말에 일어났던 임진왜란은 조선에 커다란 충격과 피해를 주었는데, 백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수의 사기장沙器匠이 죽거나 일본에 끌려갔으며 나라의 경제도 파탄에 이르러, 백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칠게 변화되었다.
 
특히, 17세기 전반에는 재원의 고갈은 물론 중국과의 교통로가 끊기며, 중국에서 구입하던
청화안료를 구하기 어려졌다. 이를 대신해 우리나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철사안료 鐵砂顔料를 사용한 철화백자가 다수 제작되었다.
 
이전과 달리 백자는 대체로 크기가 작아지거나
양감있는 곡선이 사라지고 직선화되었다. 눈처럼 희던 색깔은 푸른 기운이 도는 담청이나 연한 회색으로 변화되었으며, 그릇의 두께도 두껍고 무거운 것이 많아졌다.
철화장식에 용이나 매화나 대나무, 포도 등 이전에 사용되던 소재가 그려지기도 했지만, 구성이 간략해지고 세부의 표현이 생략되거나 생기가 없어지는 등 임진왜란의 피해가 그대로 나타났다.
 
대접과 접시 등이 주로 제작되었으며 그릇의 종류도 이전만큼 다양하지 못하지만, 16세기 후반부터 만들어지던 소형의 백자 명기明器(사람이나 동물,
그릇모양으로 만든 부장품)가 이 시기에도 유행하였다. 광주 정지리(1598~1605), 탄벌리(1606~1612 전후), 학동리(1613~1617 전후), 상림리 (1631~1636 전후), 선동리(1640~1649) 등 곳곳으로 관요를
이설(移設)했는데, 이중 선동리 가마터 발굴에서 그릇 밑바닥에
‘庚辰右(경진우)’나 ‘己丑(기축)’ 등 10년분에 해당하는 간지干支 적힌 파편이 출토되었다. 파편을 통해 대략 10년을 주기로 관요가 광주의 곳곳을 이동하며
제작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이전의 상황이 지속되는 한편,
제작활동이 점차 활발해지며 담청이나 회백색을 대신하여 우윳빛과 같이 흰색의 백자가 조금씩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도 순백자가 주류이며 철화백자가 소량 제작되었지만, 극소수 청화백자가 다시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제작지로 송정리(1649~1653 전후),
유사리(1660~1664 전후), 신대리(1665~1676 전후), 지월리(1677~?) 등을 꼽을 수 있지만, 17세기 말에는 어느 곳에서
제작활동을 벌였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시기에도 철화의
장식소재로 난초, 운룡雲龍, 초화草花 등이 그려졌다.
 
17세기 백자의 굽도 크게 두 종류가 발견되는데, 하나는 삼각형을 거꾸로 놓은 듯한 모양의 굽이 일부 지속되지만 높이를 낮게 만든 후 직하게 다듬어진 굽이고, 다른 하나는 대나무의 마디 모양이 일부 지속되지만 역시 높이가 낮아지고 굽 안바닥을 깊고 둥글게 깎아
오목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조대왕의
치세기간으로
접어 든 18세기 전반, 백자는 부흥기를 맞으며 형태와 장식, 색깔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발전을 이루었다. 백자는 궁평리, 오향리, 금사리(1726~1751) 등에서 제작되었는데, 색깔이 우유처럼
흰 빛을 띠므로 유백색 乳白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금사리에서는
조선중기와 후기를 대표할 만한 백자들이 만들어졌는데, 달처럼 둥근
달항아리나 굽이 높은 제기祭器가 등장하였고, 표면을 육각 혹은 팔각으로
모깎이 장식한 병과 항아리․대접 등이 발견된다. 또한, 청화백자의 제작이 다시 본격화되면서 문인화풍의 생략적이고 함축적인
그림장식이 유행하였다. 몸체 저부에 땅을 상징하는 한 줄의 횡선을 그리고, 그 위에 난초나 대나무, 혹은 매화를 그려 넣었다. 그림이 간결하고 소재 주변에는 여백이 많아,
조선초기의 청화백자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달항아리와 같이 대형의 항아리나 병 등이 다수 제작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이다
 
조선 후기後期 :
분원고정1752~1884
관요는
백자제작에 필요한 땔나무를 구하기 위하여 광주 내에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 약 10년을 주기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1752년 남종면南終面 분원리分院里에 가마를 이설移設한 후, 외지에서 땔나무를 조달하면서 더 이상 관요를 옮길 필요가 없어졌으며, 가마의 운영이 민영民營으로 전환되는 1884년까지 오랜 시간 한 곳에서 작업을 하게 되었다.
 
분원리로 가마를 옮긴 18세기 후반에는 이설 직전 금사리 시절과 유사한 백자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며 장식기법,
청화장식의 구성과 소재, 색깔, 그릇의 종류, 세부 형태 등 전반적인 특징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전에 드물었던 음각, 양각, 투각, 상형 장식이 사용되며, 필통․연적과 같은 문방구의 제작이 증가하였다. 또한 우윳빛의 색깔이 사라지고 푸른
담청백색淡靑白色이 증가하였다.
 
 
 
청화장식의 구성은 이전에 비하여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데, 딸을 상징하던 한 줄의 횡선橫線이 두 줄로 바뀌면서 단순히
문양대를 구획하는 선으로 변화되었다. 몸체 중앙에는 산수山水(소상팔경 중에
동정추월이 주로 그려짐)와 연꽃,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연꽃, 분재盆栽,
쌍조雙鳥, 민화民畵에 그려지던 호랑이와 까치 등 같은 다양한 소재가 그려졌다. 특히, 청화백자로 그림을 그린 후, 부분적으로
붉은 색의
동안료銅顔料를 칠하는 등 두 가지 이상의 안료를 동시에 사용하기도 하는 등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장식경향이 나타난다.
 
19세기 전반에는 분원리 가마의
제작활동 뿐만 아니라, 순백자와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음각, 양각, 투각,
상형장식의 백자가 더욱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특히, 연적의 경우 개구리, 잉어, 복숭아, 금강산, 사각, 팔각 등 갖가지 특정한 모양을
본 뜬 것이나 표면을 각이 지게 만든 것이 크게 유행하였다.
 
장식소재는 민화에 그려지던 소재가 더욱 많아지는데,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十長生이나 입신양명을 뜻하는 등용문登龍門 고사의 잉어[鯉魚], 출세를 의미하는 사슴이나 새우, 조개, 복을 상징하는 박쥐 등이 즐겨 채택되었다. 이 외에도 운룡雲龍, 운봉雲鳳, 포도, 오이, 밤, 모란, 국화, 대나무, 산수山水, 시詩,
수복문자壽福文字 등 다양하게 장식되었다. 장식기법도 이전처럼 하나를 단순하게 사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양각과 음각, 상형,
안료장식이 복합적으로 등장한다.
 
19세기 후반에는 전반의
제작전통이 답습되지만, 분원리의 관요에서 일반인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제작하는 사번私燔이 증가하였다.
 
청화백자의 경우, 소재의 구성이 단순하고 도식화되기도 하였으며, 세부의 표현이 생략되거나 붓질이 거칠기도 하다.
왕실용은
조선초기에 그랬듯이 화원畵員이 그림을 그렸겠지만, 사번의 그림은 분원에 상주하던 화청장畵靑匠에 의해 장식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접이나 접시 등 일상 생활용기는 물론, 매우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병, 항아리, 필통, 연적, 벼루, 주자, 합, 찬합,
세수대야 등 각종의 그릇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884년 분원의 가마는 민간에 운영권이 넘어가며
민간경영체제로 전환되고, 관요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후
조선왕실의 몰락으로 왕실백자의
제작전통의 사라지고, 일본에서 제작된
왜사기倭沙器의 유입으로 경쟁력을 잃은 분원은 마침내
제작활동이 중단되었다. 또한 각지에서 제작되던 투박한 조선백자 역시
왜사기의 영향으로 변화되거나 사라지며, 조선왕조 500년의
제작전통은 단절의 위기를 맞게 된다.
 
분원分院의 조직과 운영
 
경기도 광주 일대에 사옹원司饔院이 관할하는
사기제조장沙器製造場인 분원分院이 설치되어 조선시대 초기부터 말기까지 왕실용과
관청용의
사기제작을 관리하고 감독하였다.
 
사옹원의 임무는 왕에게 어선御膳을 바치는 일과 궐내의
음식제공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것이었지만, 사기沙器의 수요가 증가되면서 그 역할이 확대되어 어용御用 및
궁중소용의
그릇제작을 직접 주관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기그릇을 만드는 제작지에는 작업을 감독하는 관리가 파견되고 관청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사옹원의 분관인 ‘분원’이다.
 
▼경기 광주 분원 가마터
 
 
분원이 처음 설치된 시기는 1466년경으로 예종 원년(1469)에 반포된 <경국대전 經國大典> 공전工典 경공장京工匠 조에 사옹원에 380명의 사기장沙器匠이 소속되어 있어, 늦어도 이 시기부터 왕실용 백자를 제작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옹원 소속의 사기장은 당시 지방에서 비교적 질이 좋은 자기를 제작하던 장인을 선별하여 경공장에 편성했는데, 사기장의 수로 보아 광주에 분원이 설치된 초기부터 대량으로 백자를 만들었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380명의 사기장이 분원 내에서 어떠한 역할을 분담하였고, 이처럼 대규모의 인원을 어떠한 방법으로 운영하였는가에 대한
조선초기의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1625년(인조仁祖 3)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호戶와
봉족奉足을 합하여 1,140명이던 분원의 사기장이 해마다 핑계를 대고 도망하여 겨우 821명만이 남아
있다”고 적고 있으므로, 전체적인 사기장의 운영은
분삼번입역제分三番入役制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140명이 정원이었던 사기장의 수가 17세기 전반에는 821명으로 줄었고, 19세기 후반 분원의 규모와 규정을 기록한
<분주원보등"><분주원보등 分廚院報膽>에는 총인원이 552명으로 되어 있어, 분원의 인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분주원보등>에는"><분주원보등>에는 분원의
인적구성과 역할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감관監官을 비롯하여
분원경영의 실무를 담당했던 원역員役, 사령使令이 27명, 자기의 제작에 관계되는 장인은 변수邊首, 조기장造器匠, 마조장磨造匠, 건화장乾火匠,
수비장水飛匠, 연장鍊匠,
참역站役, 화장火匠, 조역助役, 부호수釜戶首,
감화장監火匠, 화청장畵靑匠, 연정鍊正,
착수장着水匠,
파기장破器匠 등 108명, 기타 잡역으로는
공사군工沙軍,
운회군運灰軍,
허벌장許伐匠,
부회군浮灰軍,
수토재군水土載軍,
수토감관水土監官,
수세고군收稅庫軍,
노복군路卜軍,
진상결복군進上結卜軍, 감고監考 등 417명이 있었으며, 총인원 552명의 거대한 조직이지만 작업만큼은 고도로 분업화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분원의
제작활동 기간은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용재총화慵齋叢話>에 “매년 사옹원 관리를 파견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자기만드는 일을) 감독하고 제작하여 어부御府에
수납한다”고 적고 있으므로, 해동기解冬期부터 결빙기結氷期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작활동에 따른 관리는
종8품從八品인 봉사奉仕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들중 한 명이 자기의 제작이 있을 때마다 분원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를 번조관燔造官 혹은
분원낭청分院郞廳이라고 불렀다. 봄부터 가을까지 분원에서 제작되던 자기의 수량은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19세기 후반 1867년(고종高宗 4)에 편찬된
<육전조례"><육전조례 六典條例>에 따르면 특별한 행사나 목적에 의해 만들어지는 별번別燔의
제작량을 제외하고 일상적인 경우
1,327죽竹(1죽은 10개), 즉 13,270개였다.
 
분원에서 자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재료인 백토白土의 공급이 중요한 문제였다. 조선시대 초기의 백토 산출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세기인 1530년(중종 25)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사기를 만드는 백점토白粘土는 이전에 사현沙峴이나 충청도에서 가져다 썼지만 지금은 양근楊根에서 파다
쓴다”고 적고 있으며,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는 양구楊口, 봉산鳳山, 진주晋州, 선천宣川, 충주忠州, 경주慶州, 하동河東, 곤양昆陽 등지에서 상황에 따라 채취하였음이
<승정원일기>"><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한편, 18세기 중반인
1746년(영조22)에 완성된
<속대전續大典>"><속대전續大典> 공전工典
잡령조雜令條에는, “사옹원
번조사기의 원료로는 광주廣州, 양구, 진주晋州, 곤양昆陽 등지의 백토가 가장
적합하다”는 기록이 있어, 분원이 설치되었던 광주에서도 질이 좋은 백토가 채취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백토만큼이나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자기제작에 소용되는
땔나무[번목燔木] 조달이었다. 분원은 필요한 땔나무의 조달을 위하여 숲이 울창한 지역을 조정에서 분할 받았고 여기에서
번목燔木을 채취하여 연료로 사용하였는데, 이 곳이 주로 광주지역에 해당한다.
연료조달의 문제는 분원의 운영이나 가마의 설치 및 이설移設 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으며, 현재 광주지역
일곱개 읍과 면에 290 여 곳 이상의 가마터가 곳곳에 산재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분원은
연료조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략 10년 정도를 주기로 대개 광주 내의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 이전하였다. 분원이 한 번 설치되어 땔나무를 채취한 곳은 나무가 다시 무성해질 때까지 비워 두었다가 다음에 다시 그곳에 분원을 설치하고 수목을 채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숙종대肅宗代부터는 화전민火田民이 유입되고, 점차 그 수가 증가하면서 화전으로 개간되어 황폐화되는 지역이 넓어졌으며, 이 같은 상황은 분원의 이동과 함께 18세기 중반까지도 지속되었다. 땔나무의 조달이 어려워지자 1752년부터는 이전과는 달리 현재의 남종면 분원리分院里에 분원을 고정시켜, 나무를 운반해 사용하는 형태로 변화되었으며, 이러한 운영방법은 분원이 민영화되는 1883년까지 지속되었다.
 
광주에서 확인된 293곳(2000년
조사결과)의 가마터 중에서 분청사기를 만들던 20여 곳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백자를 제작하던 가마이다. 1884년 이후에 운영된 가마터 8곳(1752년 이후 이동이 정지된 분원리 가마도 포함)과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관요가 설치되기 이전에 운영되던 10여 곳을 제외하면 나머지인 255곳은
백자제작을 전담하던 관요와 관련된 곳인 셈이다.
 
조선시대에 관요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1460년대 후반부터 분원이 고정된 1752년까지 그 사이의 기간을 모두 합하면 대략 280년이 되는데, 이것을 가마의 기본적인
이설주기였던 10년을 단위로 나누면 28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이 숫자로 255곳의 가마터를 나누면 10년 사이에 운영되던 가마의 수를 대략 추정해볼 수 있다. 이 방법으로 따지면, 10년 단위로 평균 약 9곳의 가마가 운영되었던 것으로 계산된다.
 
한편, 비교적
운영시기의 구체적인 추정이 가능한 17세기의 가마터는 78곳으로 조사되었는데, 이것을 10년 단위로 나누면 7.8基가 된다. 전체 평균 9곳과 비교하면 약 1.2의 차이가 나므로, 둘 사이의 편차를 평균하여 10년에 대략 8.4개의 가마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몇몇 가마터를 살펴보면, 광주의
백자가마는 가마의 세부나 퇴적에서 출토되는 파편으로 보아 최소한 몇 년 이상 사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즉, 위에서 살펴본 숫자는 10년에 8.4개의 가마가 순차적으로 축조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수량의 가마가 동시에 공존하였던 것을 의미한다.
 
결국, 갑발을 이용하여 왕실에서 사용할
최상질 백자를 제작하던 곳인
갑기번조요匣器燔造窯(줄여서 匣燔窯)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궁중이나 관청 등에서 사용할 다량의
조질백자를 만들던
상기번조요常器燔造窯 (줄여서 常燔窯) 몇 기가 동시에 설치되어 집단으로 운영되었다.
 
국보급
조선 백자 감상
 
 
 
 
알고 싶어요.
 
우리나라 백자는 언제 시작되었나?
10세기에 청자와 백자를 함께 만들었다.
 
도자기 생산 3요소는?
흙(옹기), 유약, 불을 말한다. 특히
가마불을 조종하고 온도를 맞추기가 힘들었다.
 
청자(비색)는 유약에 철 성분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는가?
유약에
철성분이 2~3%다.
 
백자원료인 백토는 어디서 구했나?
약 60%를 강원도 양구애서 조달했다.
 
청자 가마와
백자 가마의 온도 차이는?
청자 가마는 1200℃, 백자는 1300℃ 이다. 따라서 백자와 청자를 같이 가마에 넣고 구우면 둘
중하나는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그래서
청자가마에서는 백자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고려 백자의 품질이 떨어졌다. 가술적으로 백자가 청자보다 한 수위라 말한다.
 
경기도 광주를 가마터로 선정한 이유는?
지리적으로 한양과 가까워 한강을 통한 백자 운송이 용이하였다. 또한 유약의 원료인 수을토와 땔감이 풍부하여 연료와 원료의 수급에도 편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광주 분원리 지명의 유래는?
1752년 광주 남종면 금사리에서 분원리로 옮겨 마지막으로 130여 년간 운영되었는데, 오늘날 남종면 분원리라는 마을 이름은 분원이 이곳에 오랫동안 정착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백자관련
문헌기록
■ 세종실록世宗實錄, 卷 116, 29年(1447) 6月 甲子條.
☞ 傳旨禮曹 文昭輝德殿 所用銀器 自今代以 白磁器 예조에 전지하기를,
“문소전과
휘덕전에 쓰는 은그릇들을 이제부터 백자기로 대신하라.”하였다.
 
■ 성종실록成宗實錄, 卷 77, 8年(1477) 閏 2月 壬子條.
☞ 傳旨議政府曰…比聞 勳戚貴近先自毁法 閭巷小民亦相率而侈靡 其中巨商富賈繼情無忌習以爲俗 至如畵磁器非土産也 而求買上國 其不畏邦憲如此 의정부에 전지하기를…근자에 들으니, 훈척, 귀근이 먼저 스스로 법을 무너뜨리고, 여항의 소민도 또한 서로 좇아 분수에 지나친 사치를 하고,
그 중에 거상, 부고는 제멋대로 하여 거리낌이 없는 것이 습관이 되어 풍속을 이루어서
화자기와 같은 것은 토산이 아닌데, 중국에서 구하여 사기까지 한다 하니, 방헌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다.
 
■ 중종실록中宗實錄 1. 卷 67 25年(1530) 2月 乙丑條.
☞ 沙器燔造白粘土 前者或於沙峴或於忠淸道取用 今則又於楊根地掘取 사기를 번조하는 데 쓰는 백점토를 전에는 혹 사현이나 혹 충청도에서 갖다 썼는데 지금은 양근에서 파다 쓰고 있다.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卷 127, 10年(1618)
閏4月 辛酉條.
司饔院啓曰 朝家宴享所用畵樽 自經亂後蕩無遺在 每欲貿靑燔造 而絶無貿易之路凡過宴禮 不得已假畵而用之 사옹원이 아뢰기를, “조정의 연향宴享 때 사용하는 화준畫樽이 난리를 치른 뒤로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므로 늘 푸른 안료를 사다가 구워내려고 했습니다만,
사올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연향하는 예禮가 있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임시로 그림을 그려 사용하였습니다.”
 
■ 영조실록英祖實錄, 卷 82, 30年(1754) 7月 甲午條.
☞ 敎曰 磁器之畵 古用石間朱 今聞以回靑畵之云 此亦侈風 比後卽畵龍樽外 一切嚴禁 하교하기를, “자기의 그림에는 예전에 석간주를 썼는데, 이제 들으니 회청으로 그린다고 한다. 이것도 사치한 풍습이니, 이 뒤로 용준龍樽을 그리는 외에는 일체 엄금하도록 하라.”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 7冊, 仁祖 3年(1625) 7月 戊申條.
☞ 李敏求 以司饔院言啓曰 本院沙器匠 法典內戶奉足幷一千一百四十名內 年年逃故稱頉只存八百二十一名 이민구가
상옹원의 말을 아뢰기를, “본원 사기장의
법전내 호와
봉족은 합쳐서 1,140명이지만 매년 탈이 있다고
핑계되어 도망가 단지 821명만 남아 있습니다.”
 
2. 43冊, 仁祖 12年(1634) 5月 癸卯條.
☞ 司饔院 以提調意啓曰 天使宴享時所用畵龍樽 前日則假畵龍樽用之 其負持往來之際多有脫畵之弊 故自本院備價 付與赴京譯官 使之貿來 非一非再 而譯官等稱頉 不爲貿來以此不得已 以石間朱起畵 燔造龍樽 唐差接見時 皆以此用之 今此詔使接待時赤以此樽用之之意啓 傳曰 知道 사옹원에서 제조의 뜻으로 아뢰어 말하기를,
“중국사신 연향에 사용하는
화룡준은 예전에는 즉 가화의 용준을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을 지고 왕래할 때 그림이 벗겨지는 폐해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본원(사옹원)에서 돈을 준비해서 북경에 가는 역관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사갖고 오도록 한 것이 여러 번이다. 그런데 역관들이 핑계를 대고 사갖고 오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부득이
석간주로 그림을 그려 용준을 번조하였습니다. 중국 사신을 접견할 때 모두 이것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번에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도 역시 이 용준으로 사용할 것을
아룁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알았다고 하였다.
 
3. 255冊, 肅宗 2年(1676) 8月 庚戌條.
☞ 李觀徵 以司饔院官員 以都提意啓曰 分院沙器燔造之所 排設取柴 若近十年 則樹木旣盡決難繼燔 故例移於他處矣 今者燔所之設 已至十二年 切無刈柴之路 不得不移設 이관징이 사옹원 관원으로서 도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분원사기 번조소는 시장柴場을 설치하여 나무를 취하고 10년쯤 되면 주변의 나무가 거의 없어져 사기를 번조하기 어려워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현재의 분원 번조소를 설치한 지 이미 12년이 되었습니다. 나무를 벨 길이 없으므로 옮겨서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경국대전經國大典, 「刑典」, 禁制條(1469).
☞ 大小員人用…酒器外金銀靑畵白磁器者…杖八十 대소원인이 술그릇 이외에 금은이나 청화백자기를 사용하는 자는 장杖 팔십에 처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志勝覽, 京畿道 廣州牧 土山條.
☞ 每歲司饔院官率畵員, 監造御用之器 매년 사옹원 관원이 화원을 이끌고 내려가 왕이 사용할 그릇들을 감독하고 제작한다.
 
■ 용재총화慵齋叢話 (成俔, 1439-1504), 卷 10.
☞ 每歲遣司饔院官 分左右邊…從春至秋 監造而輸納于御府 매년 사옹원 관원을 보내어
좌우변으로 나누고…봄부터 가을까지 감독하고 제작하여 어부(御府)에 수납한다.
 
■ 송암집松岩集 (李魯, 1544-1598), 卷 3, 畵記條.
☞ 隆慶四年夏 舅監察文公 爲官司饔 分監沙器 廣州地也 畵工二人從 禮部遣爲龍罇也 융경隆慶 4년(1570) 여름에 감찰監察로 재직 중인 외삼촌 문공文公이 사옹원에서 근무하였다. 직분은 사기를 감독하는 일이었는데, 광주 땅이다. 화공 두 사람이 따라갔는데, 예부에서 용준龍罇을 위해 보낸 것이다.
 
설수외사雪岫外史 (李喜經, 1745-1805),
☞ 先朝聖德崇儉 因禁甲器 又除繪匝 豪富之家 日趨中國日本之磁 競相侈靡 而…燔司之器制益麤劣 色尤黴濁 匠不用意 徙費其資 甚可歎也 선조이신 정조대왕은 성인의 덕을 가져 검소함을 숭상하여 갑기匣器를 금하고 채화를 없애니 부호들은 나날이 중국과 일본의 자기에 마음이 쏠려 서로 다투어 사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분원의 그릇은 제작이 더욱 거칠고 열악하여 색이 더욱 검고 탁하다. 장인은 신경을 쓰지 않고 그 물자만 허비하니 심히 한탄스럽다.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李圭景, 1788~?), 卷 27, <古今瓷窯辯證說>
☞ 正廟朝禁畵彩燔造後 於白瓷上陽刻作花卉凸起燔出矣 不久復用靑彩 정조 때 화채 번조를 금한 후 백자 위에 양각으로 화훼를 볼록하게 만든 후 구워냈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청채를 사용하였다.
 
\na-;출처:전승창
아모레퍼시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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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