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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
◇ 쫓기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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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6월~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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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순신
 
2
10. 쫓기는 길
 
 
 

1

 
4
이 순신이 바다에서 적의 수군과 싸워서 연전연승하는 동안에 왕과 및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어찌하였나? 장차 한산도(閑山島)의 큰 해전을 말하기 전에 그동안 왕이 쫓겨 가던 이야기를 하자.
 
5
사월 삼십일.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영 앞에 이 순신 막하의 수군이 진을 치고 장차 전선을 향하여 출동하려고 파리강의 대회의를 하던 날 순변사 이 일(李鎰)의 상주(尙州) 패군 장계를 보고 비 오는 밤에 왕이 서울을 버리고 비를 맞으며 돈의문을 나서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쫓겨 가는 지향없는 길을 떠났다는 것은 벌써 말하였다. 바길을 걸어 박석 고개(고개)에 이르니 날이 새었다. 고개에 올라 서서 장안을 돌아보니 화광이 충천하였는데 니것은 백성들과 군사들이 원망의 초점이던 남대문 안 창고에 불을 놓은 것이었다.
 
6
반석 고개를 넘어 돌다리(돌다리)에 이르니 다시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경기 감사 권 징(權徵)이 군사 수십인을 데리고 따라 왔다. 이때에는 수인이라는 것도 적지 아니한 것이었다. 모두 슬몃슬몃 달아나는 판에 적지 아니한 기쁨이 되고 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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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碧蹄館)에 이르러서는 비가 퍼붓는 듯하여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었다.
 
8
『잠간 비를 거어 가심이 어떠하올지?』
 
9
하고 웃소매와 수염에까지 물이 줄줄 흐르는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왕께 아뢰었다. 왕도 입은 옷이 온통 살에 달라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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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지체해서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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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도 왕도 떨리는 사지를 진정치 못하여 벽제역(碧蹄轢)에 들어 갔다. 그러나 역에는 역승(역승)도 역졸도다 달아나고 오직 눈꼽 낀 노파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죽기를 무섭게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 노파뿐인 듯하였다. 노파는 왕이 어느 양반인지도 모르는 듯이 말 없이 바에 앉아서 이 이상 행인 일행을 그리 흥미도 없는 듯이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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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잠시 들어 앉았으나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를 아니하여 곧 가자고 재촉하였다. 일행은 또 이곳을 떠났다. 말들도 밤새 먹지도 못하고 달려 와서 고개만 내어 두르고 굽으로 땅을 팔 뿐이요, 잘 가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왕을 따르는 귀족, 고관들도 혹은 발이 부르렀다고 하고 복통이 난다고 하여 일행에서 떨어져서 서울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서울에 남겨 두고온 좋은 집과 풍성한 먹을 것과 아름다운 처첩을 생각하였다. 따뜻한 술과 몸 보하던 약을 먹을 생각을 하면 껄렁껄렁하게 되어 쫓겨나는 왕을 따라 이 찬비를 맞고 가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다. 또 실상 말 하나도 얻어 타지 못한 군졸들은 발이 부르트고 다리가 나무때기 같이 되었다. 걸을래야 걸을 수가 없는 자도 있었다. 종묘 위패를 몰아 태운 가마 하나가 앞을 서고 그 다음에 말을 탄 왕이 서고 다음에 영의정 이 산해(李山海), 좌의정 유 성룡(柳成龍) 등, 종친들이 서고 중간에 왕비, 기타 종실 부인들과 몇 개 궁녀들이 혹은 타고 혹은 걷고, 그 뒤를 이어 금관자, 옥관자들이 섰다. 얼마 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몇 명이 떨어지고 또 얼마를 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또 몇 명이 떨어지고 또 얼마를 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또 몇 명이 떨어지고 또 얼마를 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또 몇 명이 떨어졌다. 심지어 시종(侍從)이니 대간(臺諫)이니 하는 자들까지도 많이 떨어져 버리고, 일행의 사람 수효는 갈 수록 줄었다. 마치 양식 준비 없는 앞길을 위하여 일행을 줄이는 것 같았다.
 
13
혜음령(혜음령)에를 올라 갈 때에 빗방울이 굵기가 우박과 같은 것이 때마침 부는 서풍에 왕 이하로 일행의 면상을 사정 없이 두들겨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약한 말을 탄 궁녀들은 옷자락을 머리에 써서 빗방울의 아픔을 막으면서 소리를 내어서 통곡하였다. 날이 저물었다. 내려 두드리는 빗발 사이로 호호 탕탕한 임진강(臨津江)이 번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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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강만 건너면야.』
 
15
하고 왕이나 신하나 이 강을 건너는 것이 큰 피난이나 되는 것 같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잔뜩 물을 먹은 강 언덕의 흙은 결코 일행을 환영하지 아니하였다. 무론 땅에는 말 발굽이 쑥쑥 들어가고 단단한 땅은 얼음판과 같이 미끄러워서 말들은 무릎을 꿇고 사람들은 나자빠졌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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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람이 반 넘어 개 흙투성이가 되어서 겨우 임진강에 다다랐다. 강물은 비에 불어서 흐린 물결이 소리를 치며 달려갔다. 그것은 실로 처참한 경치였다.
 
18
천신 만고로 왕은 배에 올랐다. 따르는 신하들도 반신은 물에 담그며 배에 오르고 부녀들은 마치 송장 모양으로 정신없이 남자들에 안기기도 하고 끌리기도 하며 배에 올랐다. 이 판에 하나도 떠내려 간 사람이 없는 것이 믿을 수 없이 이상한 일이었다. 왕은 작은 배의 뱃전을 꽉 붙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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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과 좌상은 어디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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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마치 잃어 버린 의지할 사람을 찾는 듯이 이 산해와 유 성룡을 불렀다. 두 사람이 왕의 곁에 가매 왕은한 손에 이 산해를 한 손에 유 성룡을 팍 붙들었다. 두 사람은 왕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다. 이것을 보고 창황중에도 서인(西人)들은 동인인 이 산해와 유 성룡을 밉게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도승지 이 항복(李恒福) 만은 그렇지도 아니하나, 이조 판서 유 홍(兪泓)과 찬성 최홍원(최홍원)은 이산해, 유 성룡을 아무러한 기회에라도 한번 골리려는 생각을 임진강 비를 맞으면서도 떼어 놓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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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럭저럭 강은 건너 왔다. 그러나 이 어두운 그믐밤에 비까지 내리니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어디가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 성룡은 도승청(渡丞廳)에 불을 놓기를 명하였다. 도승청이란 임진강 나루를 맡은 도승이라는 벼슬아치의 관정이다. 비가 오건마는 이 묵은 큰 집에는 불이 붙어 강북까지도 환히 비치어서 길을 찾을 수가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좋은 묘책이라고 모두 칭찬하였다. 왜 그런고 하면, 이 도승청에 불을 놓기 때문에 쫓겨가는 길을 찾은 것도 고마운 일이어니와, 적병이 뒤를 따를 때에 떼를 모을 제목을 없이 한 것도 좋은 일이었다.
 
22
초경에 동파역(東坡轢)에 다다르니 거기는 파주 목사(波州牧使) 허 진(許晋), 장단 부사(長端府使) 구 효연(具孝淵)이 지대 차사원(支待差使員)으로 이곳에 있어서 왕이 하루 먹을 음식을 갖추어 음식을 갖추어 가지고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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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굶고 길을 걸은 호위인(扈偉人)들은 역사에 들자 음식 냄새를 맡더니 문득 미친 사람같이 날뛰어서 부엌으로 달려들어 주먹 다짐으로 서로 빼앗아 먹고, 상감 자실 것과 점잖은 대관들 먹을 것이라고는 한 알갱이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입에 밥풀을 발라 가지고 한 주먹이라도 더 먹겠다고 아우성하는 꼴은 과연 아귀인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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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곰도 안 남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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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배 고픈 왕은 수상을 향하여 물었다. 이 산해와 유 성룡은 왕의 이 말에 낙루하고 궁녀들은 통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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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들 우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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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왕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왕과 대관들은 이 밤을 굶어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파주목사 허 진은 왕에게 저녁밥 못 드린 죄를 두려워 하면 도망하고, 상감이 잡숫기도 전에 먼저 다 먹어 버린 호위하는 군사들은 먹고 나서야 죄 지은 줄을 알고 에라 빌어 먹을 것, 따라 가면 별 수가 있느냐? 경칠 것 밖에 남은 것이 있느냐 하고 밤 동안에 다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28
이튿날인 오월 초하루에 왕과 그 일행이 길을 떠나서 개성으로 향하려 하나, 서울서 데리고 온 군사와 나중에 경기 감사 권 징이 데리고 온 이졸들도 말을 훔쳐들 타고 하나 없이 달아나서 호위할 사람이 있나, 손발 잘린 사람들 모양으로 우두커니 동파역에 앉아서 행여나 누가 오나 하고 기다리기를 저녁때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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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걸어서 떠나지?』
 
30
하고 왕은 적병이 따라 올 것이 두려워서 재촉하나 일리를 못 걸어 본 왕이나 왕비나, 늙은 재상들이 걸음을 걷자는 것은 망계였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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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동네에 사람을 보내어 보았으나 반 이상은 다 피난을 가버리고, 설사 남아 있는 백성들이 있댔자 왕과 대관들이 저 꼴이라면「잘쿠산이」할 뿐이요, 누구 하나 나서서 그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려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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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농부 하나는 관인을 보고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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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들 호강했지. 저희들이 우리 위해 한 일이 무에야? 저희들이 생전에 누구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해보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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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한 이랑 갈았나? 논에 풀 한 대를 뽑아 보았나? 백성들의 등을 긁고, 나라를 망해 놓은 것 밖에 한 일이 무에냐 말야. 무슨 낯에 누구더러 오라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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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징발하러 갔던 관인은 겁이 나서 동파역으로 돌아와 웬 농부 하나가 꾸짖던 말을 일동(왕까지도 한방에 앉은 일동이다)에 보고하였다. 모두 말 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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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이 되어서 황해 감사(黃海監司) 조 인득(趙仁得)이 본도 병마를 거느리고 왔는데, 서흥 부사(壻興府使) 남 의(南義)가 군사 수백인과 말 오륙십필을 가지고 먼저 왔다. 왕과 일행이 재생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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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초췌한 얼굴에 다시 살아 난 웃음을 띄우고 친히 남 의의 손을 잡고 그 충성을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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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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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왕의 행차의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일행 중에 누구가 우선 아까 버릇 없는 말을 한 늙은 농부를 잡아다가 물고를 내이고 가자고 하였으나. 지금 그러할 새가 있느냐 하여 파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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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떠나려 할 때에 사약(사약) 최 언준(崔彦俊)이가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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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인이 어제도 종일 못 먹고 오늘도 종일 못 얻어먹었으니, 어떻게 길을 가오? 어디서 쌀을 좀 얻어다가 요기나 하고 가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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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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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잠시 배고픈 줄도 잊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사지에 기운이 빠져서 땅 속으로 찾아 들어가는 듯하였다.
 
45
황해도 군사들이 가진 군량 대소미 섞인 쌀 두어 말을 얻어서 일지도 아니하고 밥을 지어 우선 궁인들만 요기를 시켜 가지고 길을 떠나 오시 쯤 하여 초현참(招賢站)에 다다르니, 거기는 황해 감사 조 인득이 백관들은 서울을 떠나서 쫓기는 길을 나선 후로 비로소 밥을 얻어 먹었다. 모래가 반이나 섞이고 밑은 타고 위는 설어 단 냄새가 나는 밥, 게다가 구더기가 둥둥 뜨는 된장국, 그러나 이것도 서울서 먹던 고량진미보다 맛이 좋았다 저녁때에 개성에 다달라서 왕은 남문 밖 공서에 들고 따라 가는 백관들도 각각 이웃 민가에 숙소를 정하였다. 길에서 비를 맞고 밥을 굶고 말 탄 자는 꽁무니가 아프고 걸은 자는 발이 부풀어 쥐죽은 듯하던 작자들도 개성 같은 큰 도시에 표연히 자리를 잡고 보니, 새로 기운들이 나서 저녁 밥상을 물리기가 바쁘게 동인, 서인에 당파 싸움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벽제관과 임진강에서도 무슨 생각이 났던지 달아나지 아니하고 따라왔던 몇 개 대간이라는 무리들이 기세가 당당하게 영의정 이 산해를 탄핵하였다. 그 이유는, 영의정이 국사를 그릇하기 때문에 나라가 적의 고초를 당한다는 것이었다. 아아! 그들은 서울서 개성까지 오는 동안에 저 배 고프고 제 다리 아픈 책임을 영의정 이 산해라는 동인 늙은이에게 풀려 한 것이다. 그들은 이 산해라는 동인 늙은이에게 풀려 한 것이다. 그들은 이 산해보다도 유 성룡을 더 미워하였지마는 한꺼번에 둘을 맞히려는 것은 전술상 불리한 줄을 알기 때문에 우선 이 산해를 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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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왕은 듣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한 늙은이를 잘 자리를 잡는 길로 파직한다는 것은 보통 인정으로 못할 일이었다. 왕에게는 이 인정이란 것이 있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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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을 먹기가 바쁘게 대간은 다시 영상 이 산해를 탄핵하였다. 왕은 마침내 이 산해를 파하고 좌의정 유 성룡으로 영의정을 삼고 최 흥원(崔興源)으로 좌의정을 삼고 윤 두수(尹斗壽)로 우의정을 삼았다. 그러나 유 성룡이가 수상이 된다는 것은 서인들에게는 더욱 견디지 못할 일이었다. 서인들의 말에 의하면, 신묘년에 일본에 보내었던 사신 황 윤길(黃允吉), 김 성일(金誠一) 두 사람 중에 서인인 황 윤길은 반드시 일본이 불원에 우리 나라를 침범하리라고 바로 보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만일 황 윤길의 말대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범할 것을 믿고 병비를 하였던들 오늘날 이 꼴이 되었을 리가 있느냐? 그런데 동인인 김 성일이가 부사이면서도 정사인 황 윤길의 말에 반대하여 결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지 아니하리라? 평 수길은 아주 하잘 것 없는 인물이라고 한 것을 이 산해, 유 성룡이 제 당파에 일편된 사곡한 마음으로 김 성일의 말을 옳게 여기기 때문에 오늘날 나라를 그르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산해를 탄핵한 「교걸 오국(交結誤國)」이라는 죄는 당연히 유 성룡도 질 것이라고 해서 또 들고 일어나서 오늘 아침에 새로 난 영의정 유 성룡을 탄핵하였다. 실로 동인 편에서는 서인들의 이 논죄에 대하여서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일본이 침범하지 아니하리라고 김 성일의 말을 믿은 것은 분명히 이 산해와 유 성룡의 비록 죄까지는 아니라고 치더라도 밝지 못함이라는 책임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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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평소에 그렇게 믿어 오던 이 산해와 유 성룡을 동시에 파하기가 난처하였으나, 또한 다수 서인들의 앙탈을 막을 힘도 없어서 그날 저녁때에 유 성룡을 파하고 최 흥원(崔興源)으로 영의정을 삼고, 윤 두수(尹斗壽)로 좌의정은 삼고, 유 홍(兪泓)으로 우의정을 삼았다. 유 흥은 서울을 버리기를 크게 반대하면서도 맨 먼저 처자를 관북으로 피난시킨 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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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 와서 하루를 무사히 지내니 왕을 따라 온 백관들은 서울을 버리고 떠난 것을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두고온 집과 처첩이 그리웠던 것이다. 왕도 이 사람들의 말에 감동이 되어서 서울을 떠난 것을 후회하였다. 그리고 승지 신 집(申潗)을 서울로 보내어 서울 형편을 알아서 곧 귀환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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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 집이 임진강을 다 건너기도 전에 오월 초삼일에 서울은 적병의 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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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함락이 되었나 - 유도 대장(留都大獎) 이 양원(李陽元)은 성중을 지키고, 도원수(도원수) 김 명원(김명원)은 한강을 지켰다. 남으로 올라 오는 적병이 서울에 들려면 한강을 건너야 할 것은 이 양반들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월 삼일, 해가 낮이나 되어서 도원수 김 명원은 한강가 제천정(濟川亭)에 앉아서 유월 염천에 서늘한 바람을 쪼이면서 미희로 하려금 술을 따르게 하고 종사관으로 더불어 시를 짓던 것이다. 이분네가 도원수라 하나 병법을 알 리가 없어서 척후를 쓰지 아니하니, 적병이 앞고개 너머까지 와도 알지 못하고 운자를 다노라고 애를 쓰다가 적구이 강 저편에 온 것을 보고는 군기와 화포와 모든 기계를 강중에 집어넣고 도원수의 옷을 벗어 버리고 미리 준비하였던 패랭이를 쓰고 짚신을 신고 도망하였다. 종사관(종사관) 심 우정(沈友正)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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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이 국가의 간성이 되어서 도성을 지키다가 싸워서 죽을지언정 어디로 간단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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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명원의 소매를 붙들었으나 명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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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행재를 지켜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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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소매를 뿌리치고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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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끼. 개 같은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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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종사관 심 우정은 김 명원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로 내지르고 혼자 잔병을 데리고 적병을 막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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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 대장 이 양원이 성중에 있다가 한강을 지키던 도원수 김 명원(金命원)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단 말을 듣고 자기도 아니 달아날 수 없어 성을 버리고 양주(楊洲)로 갔다. 오직 강원도 조방장 원 호(元豪)가 불과 수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주(麗州)를 지켜서 적병이 삼사일을 강을 건너지 못하였으나, 원 호가 강원도 순찰사 유 영길(柳永吉)에게 불려 본도로 돌아가매 다시는 강을 지킬 사람이 없어서 적병은 여염 민가를 헐어 그 재목으로 떼를 모아 타고 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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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삼로 적병은 아무 저항없이 한강을 건너 마치 제 고향에 들어가듯이 서울에 들어 왔다. 이 모양으로 싱겁게, 참 싱겁게 서울이 적병의 손에 들었다, 서울로 향하는 적병을 막으려는 한 큰 군사 - 오만의 대군이 있던 것을 여기서 한 마디 말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 오만 대군이라는 것은 곧 삼도 순찰사의 군이다. 전라도 순찰사 이 광(李光), 충청도 순찰사 윤 국형(尹國馨), 경상도 순찰사 김 수(金粹)의 연합군- 이군은 본래 밀양이 함락되었다는 기별을 듣고 대고 달아난 위인들이다 - 의 군관 십여 인을 합한 것이니, 군사 수효가 오만이 넘었다. 그중에도 대부분은 용맹이 있고 잘 싸우기로 이름있는 전라도 군사다. 애초에 이 광이 전라도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도우려 오다가 왕이 서쪽으로 달아났다는 기별을 듣고 싸우지도 아니하고 전주로 돌아갔었다. 이것을 보고 전라도 사람들이 다 분개하게 여겨 이 광에게 대하여 불평하는 사람이 많았다.
 
62
이광도 생각해 보면 마음이 편안할 수는 없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충청도 군사와 연합하여 서울로 향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 광이 전라도 군사를 거느리고 온 것이 아니라, 전라도 군사가 이 광을 떠밀고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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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도 순찰사군 오만 대병은 충주(忠州)로 부터 죽산(竹山)을 거치어서 오는 적병을 막을 양으로 용인(龍仁)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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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에 이르러 바라보니 북두문(北斗門) 산성에 적병이 쌓은 듯한 작은 누(壘)가 있었다. 광은 첫째로 험한곳을 택하여 진을 치고, 둘째로 용인 성내에 적의 형세가 어떠한지 염탐해 보려고도 아니하고 수하에 있는 오만명 군사를 밀어 다짜고짜로 용사로 이름 있는 백 광언(白光彦), 이 시례(이시례) 양인은 수백명의 선봉을 거느리고 북두산에 올라가 적루에서 십여 보나 되는 곳에서 말을 내려 누를 향하여 활을 몇 방 쏘았으나 적병은 도무지 빛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백 광언, 이 시례 등은 적병이 자기네가 무서워서 나서지 못하는 줄만 생각하고 의기 양양하여 소리를 지르며 싸움을 돋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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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선봉장과 군사들이 모두 마음을 놓아 혹은 활을 벗어 걸고 혹은 웃통을 벗고 땀을 들이고 있을 때에, 갑자기 고함소리가 나며 서리 같은 긴 칼날을 내어 두르고 누로 부터 일대 적병이 달려 나와 시살하였다. 광언, 시례 등은 창황히 달아나려고 각기 제 말을 찾다가 미처 찾지 못하고 적병의 칼에 죽고 군사들도 거의 함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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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문을 듣고 군중이 크게 놀래었다. 더욱 놀란 것은, 세 순찰사와 서울서 내려 온 군관들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적병 사오인이 머리에 흰 수건을 동이고 긴칼을 내어 두르며 오만 대군을 향하여 달려 오니, 좋은 말이 있는 순찰사와 군관들은 기운차게 채찍을 둘러 달아났다. 장사 없는 군졸들은 군자와 기계를 내어 버리고 그들의 용감한 장수들의 뒤를 따랐다. 오만 대병이 무너지는 소리가 산 무너지는 소리와 같았다. 이 광(李光)은 무사히 전주(全州)에, 윤 국형(尹國馨)은 공주(公州)에, 김 수(金粹)는 경상 우더에 각기 탁족이나 시회하려 갔던 사람 모양으로 돌아 가서 선화당에 들어 앉았다. 그리고 용인 오만 대병이 앉았던 자리에는 군자, 군기가 무수히 길을 막아서 사람이 통행할 수가 없으므로 적병들은 이것을 모아 놓고 불을 갈라 버렸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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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삼도 순찰사의 오만 대병이 적병 사오인의 칼에 흩어진데 들뜬 비위를 잠깐만 참고 도원수 김 명원(金命元)과 부원수 신 각(申恪)에 관한 우습고 슬픈 이야기를 하나 더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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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도원수 김 명원(金名元)이 한강을 지킬 때에 부원수 신 각(申恪)의 의견은, 「우리 군사가 오합지중이 되어서 싸움을 당하게 되면 도망하기가 쉬우니, 차라리 전군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가서 배수진을 치자. 그러하면 뒤로 도망할 곳이 없으므로 부득이 적과 사생을 결할 것이요, 그리하면 적병은 천리 행구에 피곤한 군사요, 우리는 잘 자고 잘 먹은 군사일 뿐더러, 우리편은 먼저 험한 곳을 잡아 진을 치고 있을 것인즉 아직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새로 서투른 지방에 오는 객군인 적병을 싸워 이기는 것은 심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한강을 앞에 두고 이쪽에서 적을 막으려 하면. 적병은 한강 저편에 자리를 잡고 몇 날이든지 군사를 쉬이며 우리 형세를 염탐할 것이요, 또 그동안에 강을 건널 꾀를 할 것이니, 이왕 군국을 위하여 한번 싸우는 바이면 강을 건너가 배수진으로 자웅을 결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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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 명원은 이런 위험한(제 목숨이)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신 각의 의견을 좇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김 명원이 다른 군사보다도 먼저 적병이 강을 건너오기도 전에 강 저쪽에 있는 적병을 보기만 하고 뺑소니를 하는 양을 보고는 신 각은 김 명원을 버리고 서울로 유도대장 이 양원(李陽元)을 찾았다. 이제 이 양원의 군사나 가지고 한번 싸워 보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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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양원도 김 명원과 다름이 없는 위인이었다. 도원수 김 명원은 강 저쪽에 있는 적병의 빛이라도 보고 달아났지마는 유도 대장 이 양원은 적병이 온다는 소리만 듣고 벌써 처첩을 끌고 동소문으로 빠져 나갔다. 그들의 생각에 피난처는 동소문 밖에 있는 줄 아는 것이 유행이었다. 강원도, 함경도를 안전 지대로 알았던 것이다. 고관대작의 처첩 자녀들은 물게뭉게 동소문을 나간 것이다.이 양원이 그리로 나가지 아니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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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각도 동소문으로 나간 사람임에는 틀림 없다. 적병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동소문으로 따라 나갔다. 신 각이 이 양원의 무리와 다른 것은 그가 양주(楊州)에서 이 양원을 만나 때마침 올라 오던 함경 남도 병마 절도사 이 훈(李훈) 의 군사와 합하여 서울로 부터 노략질하며 내려 오는 적병을 깨뜨려 모가지 육십여 급을 베인 것이다. 사월 십 삼일 적병이 부산에 상륙함으로 부터 적병이 경상, 충청, 경기도를 석권하는 동안에 우리 사람이 적병을 이긴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양주의 첩보를 듣고 백성들이 기뻐하는 양은 시로 비길 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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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웬 일인가. 부원수 신 각이 양주에 전승한 지사흘만에 개성에 쫓겨가 있는 왕으로 부터 신 각을 베라는 교지를 가진 선전관이 와서 신 각의 목을 잘라 버렸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74
김 명원이 한강에서 도망하여 임진강을 건너서야 비로소 정신을 수습하여 장계를 하되, 자기가 한강을 지키지 못함이 마치 부원수 신 각이 자기의 호령을 복종하지 아니하고 달아난 데 있다는 것 같이 하였다. 이것을 볼 때에 여러 사람들은 패군장의 책임 전가로 생각지 아니함도 아니었으나 우의정 유 흥도 그 흥분 잘하는 어조로,
 
75
『주장의 호령을 아니 들은 자는 죽음이 마땅하오?』
 
76
하고 바로 추상 열일같이 대의 명분을 내세우는 통에 주장 없는 왕은 그리로 솔깃하여 베이라고 전교를 내린 것이다. 아마 이것이 유 흥의 필생의 공적일 것이다. 이튿날 양주에서 부원수 신 각이 적병을 깨뜨리고 육십여 급을 베었다는 첩보를 받고 왕은 크게 뉘우쳐 곧 선전관을 뒤따라 보내었으나 벌써 늦었다. 패장군 김 명원의 손에, 승전한 신 각이 죽은 것이다.
 
 
 

7

 
78
이 모양으로 서울이 함락되니, 왕이 또 쫓기는 길을 떠날 것은 물론이지마는 왕은 갈 데로 간다 하더라도 군략상 임진강을 지키기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번 한강의 요해를 잃어 버리면, 다음에 지킬 것은 임진강이다. 만일 임진강에서도 적병을 막지 못한다하면, 그다음에 버티어 볼 데는 대동강을 앞둔 평양 밖에는 없다. 그리고 만일 평양까지 잃어버린다 하면, 이쫓기는 무리들은 마침내 명나라 황제에게 살려 줍소사 하고 빌고 붙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처자와 신주를 끌고 압록강을 건너, 그리고 좋아하던 명나라에 내부(內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나,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셋 밖에 있느냐? 그것은 비둔한 몸뚱이와 처자와 그리하고 신주가 아니냐? 강산과 동족은 그들을 먹이기에 필요한 모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79
아무려나 임진강을 지키는 것은 필요하였다. 경성을 점령한 적군은 반드시 왕을 사로잡으려고 승승장구하여 임진강을 건널 것이다.
 
80
경성 함락의 경보를 듣고 대관의 무리는 왕을 모시고 또 개성을 떠났다. 대관들 중에는 함경도로 가자는 자가 많았으나 유 성룡이 반대하였다. 함경도로 가자는 대관들의 동기는 아무 다른 계책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네 식구들을 먼저 함경도로 보냈으니까 그것을 만나 보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함경도로 갔다가 만일 거기도 적병이 들어오면 다시는 쫓겨 갈 데가 없다는 이유로 평양으로 향하기로 하였다. 왜 그런고, 하면, 평양에 갔다가는 다시 의주로 도망할 수도 있고 의주서도 못배기게 되면, 평생 소원인 명나라로 도망할 수 있는 까닭이었다. 유 성룡이 속으로 믿는 것은 명나라 청병이요, 이 항복의 무리가 믿는 것은 바로 명나라로 도망하는 것이었다.
 
81
어찌나 급하였던지 개성을 떠날 때에 종묘 신주를 잊고 떠났다. 보산역(寶山驛)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어떤 종실 한 사람의 머리 속에 종묘 신주를 개성 목청전(穆淸殿)에 내어 버리고 왔다는 생각이 나서 울고 불고 왕께 아뢰었다. 그래서 밤으로 개성에 달려 가서 종묘 신주를 봉환하였다.
 
82
평산(平山)·봉산(鳳山)·황주(黃州)·중화(中和) 등을 지나서 이렛만에 왕의 일행이 대동강을 건너 평양에 들어갔다.
 
83
이렇게 왕이 평양으로 읆고 전략으로 임진강을 지키는 것을 주장 삼았다. 그러나 임진강을 지키는 데도 무슨 일정한 방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는 적병의 수효가 얼마요, 병기가 어떠한 것이니 싸워야겠다 하는 것을 생각할 위인은, 왕의 좌우에 있는 대관이란 무리들 주에는 하나도 없었다. 있다 하면 유 성룡이라고나 할까? 그들은 일생에 계획이라든지 주장이라든지를 가져 본 일이 없는 무리다. 그들은 자기 일개의, 기껏행 자기의 조그마한 당파의 이익, 그것도 목전의 이욕을 위하여 고식적으로 준동할 뿐이었다. 그 준동도 적당한 길을 밟아서 정정 당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음모와 음해의 비열한 수단으로 하였다. 그중에 그래도 나라를 안중에 두는 이는 유 성룡 하나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 성룡은 미움을 받았다. 닭의 무리에 끼인 학은 닭들의 배척을 아니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84
이제 임진강을 지키는 데도 이 무리들의 하는 일은 그들의 성격(이것은 조선 민족의 성격은 아니다. 조선 민족 중에는 이 순신 같은 사람도 있지 아니하냐)을 유감없이 폭로시킨 것이다.
 
85
그러면 그들은 어떤 모양으로 임진강을 지키려 하였는가.
 
 
 

8

 
87
도원수 김 명원이 한강에서 패하여 패한다는 것보다도 적병의 먼빛을 보고 달아나서 임진강에 다다랐으나 곧 행재소인 개성에 올 용기는 없었다. 면목도 없었으려니와, 혹시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까닭이었다.
 
88
그래서 임진강에 앉아서 한강에 패한 시말을 장계하고 가만히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명원의 패군 장계를 보 조정은 크게 흥분하였다. 김 명원은 마땅히 벨 것이라는 말을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심히 가까운 우의정 유 홍의 두호로 근 패군한 죄를 용서함이 될뿐더러, 여전히 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경기도, 황해도의 군사를 거두어 임지니강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리하여 도망하는 도원수 김 명원에게는 또 한번 도망의 재수를 시험할 기회를 주었다. 그렇지마는, 왕은 패군지장인 김 명원을 안심하고 신임해지지를 아니하여 함경 북도 병사로 있다가 갈려 온 신 할(申할)에게로 임진강을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
 
89
그리고도 임진강이 안심이 되지 아니하여, 북경으로 부터 새로 돌아 온 지사(知事) 한 응인(韓應寅)에게 평안도 강변 정병 삼천인을 주어 임진에가서 적병을 치기를 명하고 (이때에는 벌써 적병은 임진강 남쪽에 와서 진치고 건너 올 꾀를 하고 있었다) 도원수 김 명원의 절제를 받지 말라 하였다. 이것은 한 응인이 명나라에 다녀왔다는 권위가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평안도 정병이란 것을 크게 믿은 까닭도 있었다. 한 응인을 임진으로 보낼 때에 좌의정 윤 두수(尹斗壽)는,
 
90
『이 사람이 얼굴에 복기가 있으니 반드시 좋은 일이 있으리라.』
 
91
고 주장하였다. 장수를 전장에 보낼 때에 얼굴에 복기를 믿는 정승도 갸륵하거니와, 이 말을 믿는 다른 무리들도 차라리 가긍하여 임진강을 지키는 데 김 명원(金命元), 신 할(신할), 한 응인(韓應寅) 세 사람이 각자의 대장이 되었다. 신 할은 도원수의 절제를 받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일은 없지마는 대장부 어찌 남의 절제를 받으려 하는 따위요, 게다가 김 명원이 한강에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한 위인이니 부하에게 위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한 응인은 바로 명나라부터 돌아 온 사람이 아니냐? 왕으로 부터 도원수의 절제를 받지 말라는 명까지 받은 당당한 장수가 아니냐? 임진강 언덕 위에 세 알 닷곱 되는 군사를 가지고 각각 독립하고, 반목하는 도원수 세 분이 공을 다투는 장관을 이루었다.
 
92
맨 처음 임진강에 온 김 명원은 임진강 북안에 진을 치고 군사를 나누어 여러 여울목을 지키게 하고, 강에 있는 배를 하나 없이 거두어 적병이 타고 건널 배가 없게 만들고 다만 소수의 유병(유병) 으로 하여금 강을 건너가 적병을 부수려는 적극적 작전을 할 사람도 못되고, 또 그러할 병력을 부수려는 적극적 작전을 할 사람도 못되고, 또 그러할 병력도 없었다. 다만 그는 아직 적병이 건너 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목적을 삼고 있었다. 이러하기를 십여 일이나 하였다.
 
93
하루는 대안에 있는 적병이 강변에 짓고 있던 여막에 불을 놓고 장막을 걷고 군기를 싣고 물러 가는 양을 보였다. 이것을 보고 신 할(신할)은 김 명원 더러,
 
94
『보시고, 저놈들이 못 견디어 달아나오. 호기를 물실이라, 따라가 잡읍시다.』
 
95
하였다. 도원수 김 명원은,
 
96
『필시 그놈들이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요, 고만하고 달아날 놈들이 아니요, 뒤에는 군사도 많고 군량도 많거든, 달아날 리가 있소?』
 
97
하고 신 할을 힘을 막았다.
 
 
 

9

 
99
『도망하는 적병을 가만히 보고만 앉았단 말이요?』
 
100
하고 신 할(신할)은 얼굴이 주홍빛이 되어서 도원수 김 명원(金命元)에게 대들었다. 경기 감사 권 징(權徵)도 신 할의 의견에 찬성하여,
 
101
『급격 물실이란 이런 것을 두고 이른 말이요, 도망하는 적병을 그대로 놓아 보내면 무슨 면목으로 성상을 대하오?』
 
102
하고 추격설을 주장하였다. 김 명원은 원래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우기어 내일 의지력이 없는 사람인 데다가 신 할과 권 징의 주장에 기가 질리어서 굳세게 막지를 못하고 다만,
 
103
『적병은 그렇게 쉽게 볼 것이 아니요.』
 
104
하고 입을 다물었다.
 
105
『대감을랑 여기 편안히 앉아 계시오. 소인은 적을 치러 가겠소.』
 
106
하고, 신 할은 한강의 패장 김 명원을 비웃는 듯이 한번흘겨 보고 자리를 차고 나왔다. 권 징도 신 할을 쫓아 나왔다.
 
107
신 할은 도원수의 승낙도 없이 강변에 매어 둔 배들을 꺼내어 군사를 싣고 의기 양양하게 임진강의 물결을 헤치며 건너 갔다. 도원수 김 명원은 자기의 절제를 받지 않고 자행 자지하는 두 장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108
『큰일 났군. 저녁때가 다 못되어서 적병이 임진강을 건너 오겠군.』
 
109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도원수다. 신 할, 권징을 억지로 내려 누를 수도 있었고 또 군법을 시행하여 목을 베일 권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우유 부단하는 성품과 한강의 패전이라는 허물은 그로 하여금 그러한 권력을 부릴 의지력을 잃게 하였다.
 
110
신 할과 권 징이 도원수 김 명원의 막하게 있던 군사 대부분을 제 마음대로 가지고 강을 건너가 바로 적병이 물러 간 길을 추격하려고 먼지를 일으킬 때에, 한 응인(韓應寅)이 평안도 강변 정병 삼천명을 몰아서 임진강에 다다랐다.
 
111
응인은 김 명원을 만나 왕이 자기에 준, 도원수의 절제를 받지 말라는 패를 내어 보이고 마치 도원수 김 명원이 자기보다 자리가 낮은 사람이나 되는 듯이, 상관이 하관에게나 묻는 듯이 적병의 형세를 물었다.
 
112
왕이 한 응인에게 도원수인 자기의 절제를 받지 말라는 패를 준 것을 볼때에, 또 한 응인이 안하게 무인하게 연치로나 관등으로나 그러할 수 없는 처지에 자기에게 심히 무례함을 볼 때에, 모욕감과 분노로 전신이 싸늘하게 식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김 명원은 이 모든 모욕을 은익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113
김 명원은 자기가 적병을 십여 일이나 임진강에서 막던 말과 적병이 오늘 돌연히 여막을 불사르고 군기와 군자를 다 싸싣고 임진강을 떠난 것은 결코 도망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무슨 계교가 있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신할과 권 징이 자기의 말도 듣지 아니하고 자의 로 월강하여 적을 추격한다는 말을 대강하였다.
 
114
한 응인은 김 명원의 말을 듣고 신 할이 앞서 간 것을 분하게 여겼다.
 
115
『내가 경성을 회복하거든 대감은 천천히 뒤따라 오시오.』
 
116
하고, 한 응인은 저편에 군사 싣고 건너간 배들을 부르고 자기가 거느린 군사더러 곧 도강하기를 제촉하였다.
 
117
평안도 군사 중에서 나이 지긋한 군사 한 사람이 응인의 앞에 나서며,
 
118
『안전께 아뢰오, 군사가 먼 길을 걸어 와서 다리가 앞은 데다가 아직 밥도 먹지 아니하옵고, 또 기계도 정비하지 아니하옵고, 그뿐 아니라 후군도 아직 다 들어서지 아니 하였을 뿐더러, 적의 정위도 아직 알 수 없사온 즉 오늘 하루를 여기서 군사를 쉬면서 척후를 놓아 적성을 알아 본 연후에 명일 형세를 보아 전진 함이 옳을까 하오.』
 
119
하고 아뢰었다.
 
 
 

10

 
121
오늘은 쉬고 명일 행군하자는 말을 들을 때에 한 응인은 낯빛이 주홍빛이 되어 호령하였다.
 
122
『누구의 영이라고 네 감히 잔소리를 하는고, 다시 말이 있으면 군법 시행할 테다.』
 
123
하고, 발을 굴렀다. 그 군사는 입을 벌리려다가 곁에 사람에게 끌려서 제자리에 들어 갔다. 그러나 강변에 있으면서 소시로 부터 오랑캐와 수없이 싸워서 실전의 경험이 있는 평안도 군사의 눈에 한 응인이 하는 일은 도무지 싸움이란 것을 모르는 것이었다.
 
124
비록 어러운 병서는 읽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싸움의 첫째 비결이 적의 형편을 아는 것에 있는 것은 강변에서는 아이들도 다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반 한 응인은 대체 적병이 몇 명이나 되고, 어떠한 곳에 있고, 어떠한 기계를 가졌는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가서 싸우라고만 하니 정신있는 사람의 일 같지 아니하고, 또 주린 군사와 피곤한 군사를 전장에 내세우는 것은 병가에서 대기하는 일인데, 오늘 개성서 임진강까지 몰아온 군사를 밥도 안 먹이고 나아가 싸우라는 것도 정신있는 사람의 일 같지는 아니하였다. 오직 하나 믿는 것은 신 병사(신할)의 군사가 앞서 간 것이지마는, 도원수의 말에 의하면, 신 병사도 무턱대고 간 모양이었다. 이런 줄을 잘 아는평안도 군사들은 숙맥 같은 한 응인의 말대로 강을 건너는 것보다는, 바로 말을 하여 응인으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게 하려 하였다. 그래서 늙수그레한 사람이 삼사인이나 뒤를 이어서,
 
125
『사또께서 나가라면 가옵지오마는, 이 피곤하고 주린 군사를 끌고 형세고 알지 못하는 적군중에 들어가는 것은 오계인가 하오, 첫째, 나가는 군사들이 제각기 적병이 얼마인데 어떠한 기계를 가지고 어떠한 곳에 있다 하니,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했으면 이기리라는 자신이 있어야 하지를 아니하오? 군사가 의심을 가지고 가는 것은 병가에서 대기하는 것인데, 지금 군사들이 모두 의심이 있으니 오늘 하루르 쉬어서 내일 적병을 치는 것이 옳을까하오. 』
 
126
하고, 그들의 일생에 체험한 진리로 한 응인을 가르쳤다. 한 응인은 분이 상투끝까지 올랐다. 하향 천종이 양반을 몰라 보고 무엄이 그지 없이 - 한 응인은 칼을 빼어 높이 들었다.
 
127
『오. 너희놈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는구나!』
 
128
하고, 처음부터 말하던 군사 사오인을 불러서 열밖에 내어 세우고,
 
129
『이놈들, 양반을 몰라 보고 함부로 주둥아리르 놀려 인심을 현란케 하는 놈들!』
 
130
하고, 나무 찍듯이 손수 그 군사들의 목을 찍어 버렸다.
 
131
『다시 입을 놀리는 놈이 있으면, 모조리 이 모양으로 법을 알릴테니 그리 알어!』
 
132
하고, 한 응인은 앞가슴을 떡 벌리고 기고 만장하여 군사들에게 배에 오르기를 재촉하였다. 아무도 감히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133
이 때에 별장 유 극량(유克良)이 나서며 한 응인을 보고,
 
134
『강변 군사들의 말이 지당한가 하오. 가볍게 움직이는 것이 만견지계가 아닌가 하오.』
 
135
하였다. 한 은인이 크게 노하여 칼을 빼어 극량을 베려 하니, 극량이 태연히 말하기를,
 
136
『내가 결발 종군하여 일생을 견장에 살았거든 어찌 죽기를 피하겠소? 마는, 나라 일이 그릇되니까 하는 말요.』
 
137
하고,
 
138
『가자!』
 
139
하고, 자기의 부하를 앞세우고 선봉이 되어 강을 건넜다. 응인도 도원수 김 명원에게 서울에서 만날 것을 장담하고 배에 올랐다. 그러나 한 응인은 자기가 왕의 증명을 받은 몸이라 하여 도원수 김 명원과 같이 강 이쪽에 머물렀다.
 
 
 

11

 
141
신 할(신할), 한 응인(韓應寅) 등의 군사는 서로 앞을 다투고 공을 다투어 임진 벌판을 지내어 미시나 되어서 문산포 뒷산에 다다랐다.
 
142
평안도 정병 중에 한 사람이 여기가 정히 적이 복병 하염즉한 곳이니 잠시 군을 멈추고 적세를 엄탐해 본 뒤에 가자고 하였다. 별장 유 극량(유극량)도 그 말을 옳게 여겨서 신 할에게 간절히 경진 말 것을 말하였으나, 신할은 듣지 아니하고 군사를 몰랐다.
 
143
한 응인이 거느리고 온 강변 정병은 한 응인이 임진강 저편에 머물고 그들은 아무 인도 연도 없는 신 할에게 복종할 까닭도 없었다.
 
144
『어차피 죽는 길이니, 한 놈이라도 더 죽일 도리만 해라. 불원 천리하고 왔다가 이렇게 싱겁게 죽기는 아까운 일이다.』
 
145
하고, 그들은 각자위위 대장으로 싸울 결심을 하였다.
 
146
신 할은 청함 받은 사람 모양으로 대로로 전진할 때에 과연 산 뒤로서 일성 방포를 따라 복병이 일어나 조총과 긴 일본 칼로 엄습하니, 군사들은 미처 손을 쓸 새가 없이 적병의 탄환과 칼에 맞아 순식간에 수천명 군사가 도륙을 당하고 병사 신 할도 적병의 칼에 맞아 죽었다.
 
147
겨우 죽기를 면한 군사들은 임진강을 향하고 달아났다. 이편 군사들도 칼을 가졌으나 일본 칼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또 활을 가지고 조총을 당해 내지 못할 것도 부산, 동래, 상주, 충주의 여러 번 싸움에 잘 경험한 것이었다.
 
148
게군이 다 달아날 때에 별장 유 극량(유극량)만은 말에서 내려서 따에 주저 앉으며,
 
149
『오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다!』
 
150
하고, 활을 당기어 적병 오륙인을 쏘고 마침내 적의 칼에 죽었다.
 
151
임진강을 향하고 쫓겨 오던 군사들이 임진강에 다다랐을 때에는 적병은 벌써 발뒤꿈치에 달렸었다. 왜 그런고 하면, 적병은 잘 쉬고 배가 부르고, 이편은 먼 길에 피곤하고 또 배가 곯아서 걸음이 적병만큼 빠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전장에서 부터 임진강에 오는 동안에 길가에 넙너른한 것이 이편 군사의 시체였다. 뒤에 검은 옷 입은 사람의 손에 칼이 한번 번쩍하면 흰옷 입은 이편 군사의 목이 동강이 나서 길가에 굴렀다. 이렇게 죽고죽고 임진강까지 뛰어 온 군사가 전군 만여명 중에 단 천명이 못되었다.
 
152
석양이 임진강 서편 산에 걸렸을 때에 강가에는 군사들의 아우성 소리가 슬프게도 일어났다. 그러나 도원수 김 명원은 우리 군사가 패하여 쫓겨 오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 군사를 실어 건너기 위하여 배를 강남으로 건너 보내었으나, 우리 군사의 발 뒤에 그름같이 적병이 따르는 것을 보고 다시 배를 강북으로 거두었다.
 
153
강가에 이르러서도 배를 얻지 못한 도망하는 군사들은 부질없이 도원수와 한 응인을 부르다가 등 뒤에 임한 적병의 칼을 피하여 강물에 뛰어 들었다. 군사들이 강물에 뛰어 드는 모양이 「마치 바람에 날리는 어지러운 나뭇잎 같았다.」고 서애(西愛) 유 성룡(柳成龍)이 기록하였다. 강물레 잠겼건마는 미처 물에 뛰어 들지도 못한 군사들은 모조리 등 뒤로 적병의 긴칼을 맞아 엎디어 죽었다. 한 사람도 능히 적병과 겨눈 사람이 없었다. 진실로 못난 백성이었다.
 
154
도원수 김 명원(金命元)과 한 응인(韓應寅)이 강북에 있어 이 모양을 보고 넋을 잃고 있을 때에, 상산군(商山君) 박 충간(朴忠侃)이 맨 먼저 말을 타고 달아났다. 이것을 보고 군사들은 황혼이라 달아나기 잘하는 도원수 김 명원인 줄만 알고,
 
155
『도원수가 달아난다!』
 
156
하고, 여울을 지키던 군사들도 모두 달아났다. 한 응인, 김 명원도 뒤를 이러 달아났다. 경기 감사 권 징(권징)은 죄 받을 것이 무서워서 평양으로 가지 못하고 경기 가평(加平)으로 달아나서 피난하였다.
 
 
 

12

 
158
이렇게 신사 신 할(신할)은 전망하고, 도원수 김 명원(金命元)과 한 응인(韓應寅), 권 징(權徵)은 달아나고 임진강에 남았던 군사들은 장수를 잃고 모두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적병은 아무 저항 없이 임진강을 건너서 질풍같이 개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왕과 그 일행은 벌써 평양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159
소서 행장(小西行長)과 가등 청정(加藤淸正)은 같이 개성을 지나서 평양으로 향하다가 황해도 안성역(안성역)에 이르러서 제비를 뽑아 청정은 함경도를 맡게 되고, 행장은 평안도를 가지게 하고, 천야 장정(淺野長政)은 황해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전라도를 제하고는 적장이 분할하여 차지하고 웅거하게 되었으니.
 
160
평수가 (平秀家_=字 ( )田秀家)는 경성과 경기도를 차지하고, 모리 길성(毛利吉成)은 강원도를 차지하고, 복도 정측(福島正側)증아부원친(曾我部元親) 등은 충청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임진강의 패전의 보가 오매 평양에 있던 왕과 대관들은 또 평양을 버리고 다른 피난처를 구하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크게 믿었던 한 응인(한응인)의 평안도 강변 정병이 대번 무너진 것을 본 대관들은 혼이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161
평양에는 군량은 넉넉하였으나 믿을 만한 장수가 없었다. 그래서 양사(兩司) 홍문관(弘文館)에서는 연일 복합(伏閤)하여 평양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왕께 청하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 철(鄭徹)이 극력하여 평양을 버리기를 주장하였다.
 
162
원래 정 철은 강계(강계)에 정배 중이었던 것을 왕이 개성에 피난하였을 때에 남문에 올라서 일반 인민에게 소원을 말하라 할 때에 어떤 사람이 정 철을 불러 올리소서 하고 청하는 말을 듣고 강계로 부터 불러 올린 것이었다.
 
163
정 철과 그 무리는 평양을 보리기를 주장하고 왕과 동궁과 종친들도 적병이 따를 것이 무서워 정 철의 말에 기울어질 때에 유 성룡(유성룡)은,
 
164
『평양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아니하오, 평양은 지키는 것이 옳소. 인성( = )은 서울도 버렸거든 평양은 못 버리랴 하거니와, 그때와 이때와는 시세가 같지 아니하오, 서울로 말하면 군사와 백성이 적병을 무서워 붕괴하여 버렸으니 지키려 하여도 지킬 수가 없었지마는, 평양으로 말하면, 백성의 마음이 대단히 굳고 또 앞에 대강이 있어서 지킬 가망이 있을 뿐더러, 여기서 며칠만 지키고 있으면 반드시 명나라 구원병이 올 것이니, 그리하면 반드시 적병을 물리칠 수가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고 평양을 버리고 떠난다 하면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는 다시 저접할 지세가 없으니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요.』
 
165
하고, 굳세게 평양을 버리는 것이 옳지 아니함을 주장하였다. 좌의정 윤 두수(尹斗壽)는 유 성룡의 말에 찬성을 하였으나,
 
166
정 철은
 
167
『아무리 평양의 민심이 굳고 앞에 대강이 있기로 장수가 없어 어떻게 지킨단 말요?』
 
168
하고, 피출설을 고집하였다. 유 성룡은 분개한 낯으로 정 철을 향하여,
 
169
『나는 평소에 대감이 강개한 뜻이 있어서 어려운 것을 겁을 내는 사람이 아닌 줄 믿었더니. 오늘 이런 말은 참으로 의외요.』
 
170
하고 꾸짖었다.
 
171
윤 두수도 정 철의 무기력한데 분개하여, 내 칼을 빌어 이 간신을 비였과저(    )이라는 문산(文山)의 시를 읊었다. 정 철은 대노하여 소매를 뿌리치고 일어나 나왔다.
 
 
 

13

 
173
이렇게 조정에서 평양을 지킬까 버릴까 하는 의론이 정치 못하여 대관들은 은밀히 뒷구멍으로 피난할 꾀를 하며, 혹은 처자를 먼저 피난시키고 혹은 재물을 먼저 실어 내니, 평양백성들은 이 무리가 믿을 수도 없는 무리인 줄 알고나도 나도 하고 다들 도망해 버리고 말았다.
 
174
백성들이 도망하는 것을 보고는 큰일 났다고 대관들은 쩔쩔 매었다. 이에 급히 회으를 열고 평양 성중의 백성들을 떠나 가게 말고 이미 떠나 간 백성들을 다시 불러 들일 계교를 토의한 결과로 대동관(대동관)앞에다가 성중 부로를 모으고 왕세자가 왕을 대신하여,
 
175
『평양을 굳게 지킬 터이니 다들 떠나지 말라!』
 
176
하고 효유하였다.
 
177
그러나 백성들은 세자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생각에 좌우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간신들이지마는, 왕은 그렇지 아니한 사람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둥궁을 내세운 것은 이 간신놈들의 속이는 꾀다.
 
178
과연 왕의 뜻인지 알 수 없다 - 이렇게들 수근거렸다. 그래서 부하들 중에서 어떤 부하 하나가 나서며,
 
179
『아뢰기 황송하오나 동궁 말씀은 백성들이 믿지 아니하오, 상감께옵서 친히 효유하시면 어떨지 몰라도,』
 
180
이렇게 아뢰었다.
 
181
다른 부로들은 이 사람의 말이 옳은 것을 표시하려는 듯이,
 
182
『그렇소.』
 
183
하고, 일제히 외쳤다. 동궁이 들어가 왕께 이 뜻을 아뢰었다. 대관 중에 어떤 사람은,
 
184
『이 버러지 같은 상놈들이 동궁 영지를 아니 믿는다니 군사를 풀어 그놈들을 무찌르시오!』
 
185
하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186
『지금이 어느때요. 백성의 뜻을 거스릴 때가 아니요.』
 
187
하는 유 성룡의 말이 서서 마침내 백성들의 청구대로 왕이 친히 평양을 버리지 아니할 뜻을 성중 백성에게 효유하기로 정하고 승지로 하여금,
 
188
『내일 성상께옵서 친히 너희들게 전교가 계실 터이니 다들 이곳으로 모이라.』
 
189
하는 명을 전케 하였다. 이튿날 대동관 앞에는 왕의 말씀을 듣겠다고 평양 성중 백성들이 모여 들었다. 백성들이 많이 모인 것을 보고 어떤 대관은 겁을 내어 왕이 친히 나서는 것을 위태하다고 반대하였다.
 
190
『그 무지한 놈들이 무슨 일을 할는지 아오?』
 
191
하는 걱정에 대하여 유 성룡은,
 
192
『이 나라 이 백성을 힘입어서는 것이어늘, 대감이 백성을 그렇게 낮추 보아 쓰겠소? 또 임금의 말씀은 땅과 같다 하였으니 한번 하신 말씀을 거둘 수는 없는 것이요.』
 
193
하고, 왕에게 어제 약속대로 친히 백성들을 향하여 맹세할 것을 청하였다.
 
194
왕은 유 성룡의 뜻을 쫓아 곤룡포에 익선관을 갖추고 대동관 문턱까지 나갔다. 백성들을 무서워하는 대곤들도 부득이 떨리는 무릎으로 왕의 뒤를 따랐다.
 
195
왕은 승지로 하여금,
 
196
『평양성을 굳게 지킬 터이니 너희들은 백성들에게 떠나지 말고 나라를 도와 적병을 물리치도록 효유하여라.』
 
197
하는 말을 전하게 하였다.
 
198
승지의 말을 들은 백성들 중에 수십명이나 많은 사람들은 땅에 엎드려 통곡하고,
 
199
『평양 자제가 하나도 없이 다 죽을 때까지 성상을 위하여 싸우리이다.』
 
200
이 모양을 보고 왕은 눈물을 흘리고 무릎이 떨리는 대관들도 마음을 놓았다.
 
 
 

14

 
202
왕이 이렇게 백성에게 약속하였으니 싫더라도 평양을 지키는 모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좌의정 윤 두수(尹斗壽)로 수성 대장(守城大將)을 삼아 도원수 김 명원(金命元), 순찰사 이 원익(李元翼)을 거느려 평양을 지키게 하였다.
 
203
이렇게 장수가 부족한 판에 포망에 패랭이 쓰고 짚신 감발에 거지 모양을 차린 순변사 이 일(李鎰)이 부하 오륙인을 거느리고 평양에 들어 왔다. 그는 상주(尙州)에서 적병에게 패하여 벌거벗고 머리를 풀고 도망하여 충주(忠州) 신 입(申砬)에게로 갔다가 신 입이 충주 탄금대에서 죽고 군이 흩어지매, 강원도, 함경도, 황해도를 산속으로 숨어 천신만고로 평양까지 온 것이었다. 그는 충주 패보를 서울에 보낸 원훈이었고, 충주 패보는 오월 그믐날 왕으로 하여금 서울을 떠나게 한 가장 큰 원인이 된 것이었다.
 
204
패군장인 순변사 이 일(李鎰)이 거지 꼴을 하고 평양에 오매, 원체 장수가 귀하던 터이라 그의 패군의 죄를 논하는 이가 없고 도리어 환영하였다. 적병이 황해도를 지났다는 말을 듣고 인심이 더욱 불안하던 이때에 비록 패군지장이라 하더라도 이 일같이 이름 있는 장수를 얻은 것이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일의 그처럼 초라한 꼴과 초췌한 얼굴을 보고 유 성룡,
 
205
『이곳 사람들이 자네를 크게 믿는데 이처럼 모양이 초췌해서야 뭇사람의 마음을 위로할 수가 있나.』
 
206
하고, 자기의 행리를 뒤져서 남철의 한 벌을 내어 입히니 다른 대관들도 혹은 총립을 주고 혹은 체영을 주어 일습을 갈아 입고 나니 면목이 일신하였다. 그러나 신을 벗어주는 이가 없어서 짚신을 신은 것을 보고 유 성룡이,
 
207
『비단옷에 짚세기가 잘 아니 어울리는 걸.』
 
208
하고 웃으니, 좌우가 다 대소하였다. 이렇게 쫓기는 생활에 의외의 웃음판이 벌어졌을 때에 황해도로 타보 갔던 벽동 토병(碧憧土兵)임 욱경(任旭景)이 달려 와 적병이 벌써 황해도 봉산(鳳山)에 돌아 왔단 말을 보하였다.
 
209
『봉산이란 아직 멀었지?』
 
210
하고 일좌가 눈이 둥그레 해였다.
 
211
유 성룡은 수성 대장인 좌의정 윤 두수(尹斗壽)를 보고,
 
212
『적병이 봉산에 왔으면, 척후는 벌써 강건너 와 있을 것이요, 특별히 영귀루(영귀루) 아래서 강이 두 갈래로 갈려서 얕은 여울이 되어서 길만 알면 걸어 건널 수가 있을 것이니까 만일 되어서 길만 알면 걸어 건널 수가 있을 것이니까 만일 적이 우리 사람 향도를 얻어서 몰래 건너 와서 갑자기 엄습하면 성이 위태할 것이요, 마침 이 순변사가 왔으니 곧 보내어 여울을 지키게 하여서 불측지변을 막는 것이 어떠하오?』하였다.
 
213
윤 두수는,
 
214
『대감 말이 옳소.』
 
215
하고, 곧 이 일더러,
 
216
『그러면 자네가 곧 가서 여울목을 지키도록 하게.』
 
217
하였다.
 
218
『무어 어느 새에 그 놈이 올라구요.』
 
219
하고, 이 일은 여전히 적병을 우습게 보는 어조였다. 유 성룡은 대단히 못마땅한 듯이 양미간을 찌푸리고 이 일을 한번 흘겨 보았다. 그는 이 일이 상주에서 패한 것이나, 신 입이 충주에서 패한 것이나, 「척후(斥候)」라는 것을 모르는 때문인 줄을 안 까닭이었다.
 
220
이 일은 유 성룡이 못마땅해하는 눈치를 보고,
 
221
『가라시면 곧 영귀루 아가한테로 가겠읍니다마는, 소인 혼자서야 지킬 수가 있소. 소인이 데리고 온 군사라고 열이 다 못 되니 군사를 주시오!』
 
222
하였다.
 
 
 

15

 
224
이 일은 새 옷을 갈아 입고 위의를 갖추어 가지고 말높이 앉아 합구문(合毬門)으로 나갔다. 그는 자기가 강원도에서 부터 데리고 온 군사 몇 사람과 평양에 있던 군사 수백인을 합구문 앞에 벌여 놓고 의기 양양하게 문루 위에서 군대 검열을 합네 하고 날이 늦도록 떠나지를 아니하였다. 오래 굶주렸던 판이라 이 일은 술과 고기를 많이 장만하고 계집까지 불러서 질탕하게 놀고 있었다. 유 성룡은 이 일이 이렇게 하였더니, 과연 이 일은 군복도 다 벗어 젖히고 취안이 몽룡하여 계집을 희롱하고 있고 군사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225
유 성룡은 곧 대장 윤 두수를 보고,
 
226
『이거 큰일 났소. 이 일이가 상주서 하던 버릇을 또 하고 있는 모양이요.
 
227
시각이 급한 이때에 하가 다 가도록 합구문에서 술을 먹고 있다오.』
 
228
하고, 성화같이 재촉하기를 청하였다.
 
229
윤 두수는 종사관을 합구문으로 보내어 이 일에 즉각으로 출발하여 영귀루 앞 여울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
 
230
『적병이 봉산 왔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겁들이 나.』
 
231
하고, 이 일은 미진한 홍을 아끼며 합구문을 내려 군사를 몰고 떠났다.
 
232
군사 중에는 영귀루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233
『남쪽으로만 가자!』
 
234
하고, 이 일은 몽롱한 취한 눈으로 평양 의성의 넓은 경치를 바라보고 되는 대로 군사를 몰았다. 마침 석양에 보통문이 공중에 솟은 것을 보고 그리로 가자고 하였다. 보통문이 공중에 솟은 것을 보고 그리로 가자고 하였다. 보통문의 모양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235
이 모양으로 강서(江西)로 가는 길로 거의 십여 리나 가서 평양 좌수(平壤座首) 김 내윤(金乃胤)이 성밖에 나갔다가 몰아 오는 것을 만났다.
 
236
『영귀루를 이 길로 가느냐?』
 
237
하고, 이 일이 물을 때에 김 좌수는 딱 기가 막혔다.
 
238
『이 길로 가면 보통강이요, 영귀루는 지금 오신 길로 돌아 가야 하오.』
 
239
할 때에, 이 일은 크게 노하여,
 
240
『이놈, 네가 진작 길을 인도하지 아니하고 인제야 와서 그 말을 한단 말이냐!』
 
241
하고, 즉석에서 김 좌수를 길 바닥에 엎어 놓고 볼기를 십여 도나 때린 뒤에,
 
242
『죄당만사로되 특히 목숨만은 살려 주는 터이니 앞을 서서 길 인도를 하여라.』
 
243
하고, 이 일 장군의 호령이 추상과 같았다. 평양 좌수 김 내윤이 아픈 다리를 끌고 이 일을 인도하여 만경대(萬景臺) 밑에 다다르니 벌써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평양서에서 내려 오니 겨우 십리였다. 대동강 저쪽 언덕을 바라보니 벌써 적병 수백명이요, 강중에 있는 작은 섬에 살던 백성들은 겁을 집어 먹고 달아나느라고 갈팡질팡하였다.
 
244
이 일은 대안에 있는 적병을 보고는 술이 번쩍 깨어서 곧 무사 십여 인을 불러 섬에 들어가 활을 쏘기를 명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무서워서 발을 내놓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서로 바라보고 머뭇거리었다.
 
245
이 일은 칼을 빼어 머뭇거리는 군사를 베려 하니 그 때에야 군사들이 절벅절벅 물소리를 내며 물에 들어 섰다. 이 때에 적병들은 어떤 조선 사람 하나를 길잡이로 앞에우고 섬 저쪽 강 갈래를 건너서 거의 이쪽 언덕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때에 이쪽 군사가 굳센 활로 쏘아 순식간에 아펐던 적병 육칠명을 넘어뜨리니 그제야 물에 들어 섰던 적병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저쪽 언덕으로 달아나 버렸다.
 
246
이 일은 군사를 거두어 여울목을 지키리고 하였다. 군사들오 적병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기운을 얻었다.
 
 
 

16

 
248
유월 일일에 명나라 요동도 사사 진무(        ) 임 세록(林世祿) 이는 조선의 일본군의 형편을 살피러 왔다. 왕은 그를 대동관(大同관) 에서 접견하고 적병의 흉포함과 나라의 흥망이 경각에 달렸으니 명나라에서 곧구원을 보내어 주기를 간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임세록은 가다 부다 하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으나 그 말하는 눈치를 보건대 조선 조정 말을 믿지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임 세록의 이 태도는 왕과 및 대관들의 마음을 극도로 불안하게 하였다.
 
249
이에 왕은 명장의 맘을 돌리기 위하여 얼마 전에 파직하였던 전 영의정 유성룡으로 하여금 당장(명나라 사람을 당인, 명나라 군사를 당병, 명나라를 당장이라고 부른다)을 접대하는 일을 맡겼다. 비록 평소에 유 성룡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자라도 이 일에는 유 성룡을 반대할자가 없었다.
 
250
유 성룡은 당장 임 세록에게 조선의 현상과 왜정을 간곡하게 설명하였다.
 
251
임 세록은,
 
252
『왜병이 부산에 왔단 말을 들은 지 며칠이 안되어서 국왕이 경성을 버리고, 또 며칠이 안되어서 개성을 버리고, 또 며칠이 안되어서 왜병이 벌써 평양에 왔다고 하니 어찌 그렇 수가 있소? 아무리 왜병이 갑작스럽게 났다기로소니 이럴수야 있소? 또 조선에도 사람도 있고 군사도 있으려든 이렇게 빨리 적병을 끌어 들이는 수야 있소?』
 
253
하는 임 세록의 말 속에는 조선이 왜병을 인도하여 명나라를 침범하려는 불측한 뜻을 가졌다는 소문(명나라에는 그때에 이러한 소문이 떠돌았다)을 믿는 듯한 기미를 머금었다.
 
254
유 성룡은 글력으로 조선이 왜와 통한 사실이 없는 것을 변명하였다. 그리고 왜병이 대동강 저편에 와 있는 것이 사실이란 것을 실지로 보이기 위하여 유 성룡은 임 세록을 데리고 연광정(연광정)에 올라 경치와 형세를 가리키며 설명하였다. 일굴 수상이던 늙은이가 일개 젊은 외국 군관에게 호의를 얻으려고 애쓰는 양은 눈물겨운 일이었다. 임 세록은 당장인 것을 자세하고 가끔 유 성룡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언사와 행동을 하였으나 아무도 감히 탄하지는 못하였다.
 
255
유 성룡이 바야흐로 인세록에서 평양의 형세를 설명할 때에 마침 까만 왜병 하나가 강쪽 수풀 속으로 번뜻번뜻 보이더니 이윽고 이삼인이 뒤이어 나와서 혹은 앉고 혹은 서고, 그 한가한 모양이 마치 길을 가다가 쉬는 것과 닽았다.
 
256
성룡이 세록을 보고 손으로 강 저쪽을 가리키며,
 
257
『옳지. 나왔소. 저게 왜병 척후요.』
 
258
하였다.
 
259
세록이 연광정 기둥에 기대어 성룡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260
『거 어찌 왜병이 그리 적소?』
 
261
하고, 성룡의 말을 믿지 아니하는 빛을 보인다. 성룡은,
 
262
『아니요. 왜가 본래 교사해서 대병이 뒤에 올 때에는 반드시 앞에 정탐을 보내는 법인데, 정탐은 언제나 이삼인에 불과하는 법이요, 만일 몇 명 안된다고 마음을 놓았다가는 반드시 적의 꾀에 빠지는 것이요.』
 
263
하고, 사실대로 정성껏 설명하였으나 세록은 말같지 아니한 소리라는 듯이 픽 웃고,
 
264
『그렇소.』
 
265
할 뿐이었다. 그리고 임 세록은 돌아가서 회보할 길이 바쁘다고 평양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임 세록이 떠난 뒤에 왕과 여러 대관들은 성룡을 보고,
 
266
『어떻게 되었소? 당장이 의심이 풀려서 갔소? 구원병이 곧 올 모양이요?』
 
267
하고, 조바심을 하고 물었다.
 
268
『우리 나라에 대한 의심이 매우 깊은 모양이요.』
 
269
하는 성룡의 말은 왕 이하 여러 대관의 가슴에 큰 못을 박는 듯하였다.
 
 
 

17

 
271
유 성룡의 말 한 마디,
 
272
『우리나라에 대한 의심이 매우 깊은 모양이요.』
 
273
는 왕과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평양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평양에 주저앉으려 한 것도 명나라 구원병을 믿은 것이다. 이제 만일 명나라가 우리 나라를 의심한다 하면 나무에도 돌에도 붙일 곳이 없다고 이 무리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 해낸다는 생각은 이 무리의 마음속에는 나 본 일이 없고, 언제나 저는 가만히 앉고 남이 다 해주기를 바라도록 대가리가 생신무리들이다.
 
274
『피난 가자. 산골짝으로 가서 목숨을 부지하자.』
 
275
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요, 정신 작용의 전체였다. 차차 꽁무니를 빼는 자가 생기고 왕의 마음도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276
이런 줄도 모르고 백성들은 왕이 평양을 지킨다는 성명을 듣고 다들 피난처로 부터 성중으로 돌아 왔다. 그래서 평양 성중에는 빈 집이 없도록 사람이 찼다.
 
277
『상감님이 평양은 안 떠나신다.』
 
278
하는 말을 부로들은 가가 호호에 돌아 다니며 개유하였다. 상감님이 평양을 안 떠난다는 것은 곧 죽기로써 평양을 지킨다는 말과 같았다.
 
279
그러나 당장 임 세록이 조선을 의심하였다는 말을 들은 대관의 무리들은 대동강 건너편에 적병의 그림자가 하나씩 둘씩 늘어가면 갈수록 겁이 나서 식불안 침불감 하였다.
 
280
이때까지에 전라 좌수 수군 절도사 이 순신(李舜臣)이 거제도(巨濟島)연해에서 여러 번 승전하였다는 장계가 오나 조정에서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유 성룡이 수군이 필요함을 누누이 말하였으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281
하루는 적병의 한 떼가 대동강 저편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이편 형편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이것을 보고 적병의 총공격이 있을 줄 알고 왕은 은밀히 재신 노 직(노직)을 시켜 종묘와 사직의 위패와 궁인을 보고 적병의 총공격이 있을 줄 알고 왕은 은밀히 재신 노 직(노직)을 시켜 종묘와 사직의 위패와 궁인을 호위하여 칠성문으로 나가려 하였다. 이것을 본 평양 백성들은 손에 칼과 몽둥이를 들고 길을 막고 노직, 궁인 할 것 없이 함부로 두들겼다. 이 판에 종묘와 사직의 위패가 땅에 떨어져서 굴렀다.
 
282
백성들은 일행 중에 있는 노 직이와 재신들을 가리키며,
 
283
『이놈들 평일에 국록을 도적해 먹고 이제 와서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속이니 너희같이 죽일 놈들이 또 어디 있단 말이냐.』
 
284
고, 고함을 쳤다. 행궁 곁에도 백성들이 부녀와 어린 아이들까지 데리고 모여 들어서 모두 발을 구르고 입에 거품을 물며,
 
285
『평양을 안 지키고 달아나겠거든 무슨 까닭에 참땋게 피난가 있는 우리들을 속여서 불러 들여다가 적병의 손에 어육이 되게 하고는 저희만 살겠다고 달아나? 이놈 간신놈들 나서라! 네놈들의 모가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가만히죽을 줄 알았더냐?』
 
286
하고 아우성을 하였다. 행궁 안에서는 백성들이 일어나 반란을 일으킨다 하여 처음에는 군사로 하여금 무찌르려 하였으나 군사들이 도리어 백성들에게 물리침을 당할뿐더러, 더러는 도리어 백성들 편이되므로 정 철 이하 대관들은 행궁 안에 서서 낯빛이 흙빛이 되어 떨고만 있고, 왕도 어찌할 발를 모르고,
 
287
『성룡을 불러라. 성룡이 어디 갔느냐?』
 
288
하고 애를 썼다.
 
 
 

18

 
290
이때에 유 성룡은 연광정(연광정)에서 군사 회의를 하다가 민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곧 행궁을 향하고 달렸다. 길에서 여러 번 백성들에게 봉변할 뻔하였으나 유 정승이라는 말을 듣고는 백성들은.
 
291
유 정승이다. 유 정승은 충신이다. 유 정승은 평양을 지키자는 사람이다.』
 
292
하고, 길을 열어 주었다.
 
293
유 성룡이 행궁 문에 들어 서니 왕과 백관들은 이제 살아난 듯이 일제히 숨을 길게 쉬었다.
 
294
『이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를 어찌하오?』
 
295
하고, 왕이 성룡에게 물을 때에 성룡은,
 
296
『반란이 아니요. 거가가 평양을 떠나시지 말라는 것이요.』
 
297
하였다.
 
298
반란이 아니란 말에 왕은 적이 안시하였다. 다른 대신들은 이것을 반란이라고 왕에게 아뢰었던 것이었다. 성룡이 곧 행궁 문밖, 성 위에 나서서 백성들 중에 수염 많이 난 늙은이를 손으로 불렀다 그 늙은이는 성룡의 앞으로 가까이 갔다. 그 늙은이는 토관(이 땅 벼슬아치)이었다.
 
299
성룡은 그 늙은이더러,
 
300
『너희들이 거가가 평양을 떠나지 마시고 힘을 다하여 성을 지키시기를 원하는 것은 지극히 충성된 마음이지마는 이렇게 민란을 일으켜서 궁분을 놀라게하니, 이런 해괴한 일이 어디 있느냐? 또 소정에서도 시방 성상께 여쭈어서 평양을 굳이 지키기로 성상이 허하시었거든,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이냐? 네 모양을 보아 하니 유식한 듯 싶으니 네가 뜻으로 백성들을 효유하여서 물러가게 하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도 장차 중죄에 빠져서 용서할수 없을 것이니 그리 알아라.』하였다.
 
301
그 늙은이가 성룡의 말을 다 듣더니 손에 들었던 지팡이를 놓고 손을 들어 옵하고 하는 말이,
 
302
『백성들이 성을 버리려 한다는 말을 듣잡고 분함을 못이겨서 그러한 것이요, 대감 말씀을 들으니 소인의 가슴이 툭 터지는 것 같소. 평양 백성이 하나라도 살아 있고는 적병의 발이 한걸음도 평양 성안에 들어오지 아니할터이고 다시는 백성을 속이고 평양을 떠 난다는 의론이나지 말게 하시오.』
 
303
하고, 백성들에게 성룡의 말을 전하여 안심하고 해산하게 하였다.
 
304
이날 평양 백성들이 성룡의 말을 듣고 물러간 뒤에 조정에서는 오늘 민란의 책임 문제가 났다. 저녁에 감사 송언신(宋言愼)을 불러 민란 진정 못한 책이을 물으니 언신은 민란 장두라고 지목하는 사람 세 사람을 잡아 대동문(大同門)안에서 목을 베었다.
 
305
백성도 다 물러가고 밤이 고요하게 되매, 왕은 정 철(정철) 이하 제실을 불러 어디로 갈 것인가를 토론하였다. 평양을 아니지키고 버린다는 것은 이미 정한 것이었다. 아까 백성들에게 한 말은 전혀 거짓말이었다. 더구나 한번 민란을 당하고 나니 평양이 진저리가 나는 듯하였다.
 
306
조신들은 대부분 함경도로 가기로 주장하였다. 그것은 전에도 말하거니와, 자기네의 처, 가족이 대개 함경도에 피난한 까닭이었다. 이때로 말하면 벌써 함경도는 가등 청정의 손에 들어서 희령까지 쫓겨 갔던 왕자들까지도 사로잡힌 때이지마는 길이 통치 못하고아무도 보변하는 자가 없어서 조정에서는 모르고 있던 것이다. 마침 동지(동지) 이 회득(이회득)이 일찍 영흥 부사로 민심을 얻었다 하여, 그로 함경도 순검사(함경도순검사)를 삼고, 병조 좌랑(병조좌랑)김 의원(김의원)으로 종사관(종사관)을 삼아서 내전과 궁번을 부탁하여 밤중에 먼저 함경도를 향하여 떠나 보내었다.
 
 
 

19

 
308
유 성룡은 왕에게 함경도로 피하는 것이 옳지 아니한 것을 말하였다. 이미 백성들에게 평양성을 지키기를 약속하였으니 이제 곧 평양을 보리면 이것은 백성을 속이는 것이라. 임금이 한번 백성을 속이면 다시는 백성이 임금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리라는 것으로 누누이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보다도 피출설을 주장하는 무리가 다수인 까닭에 그리로 기울어진 것이었다.
 
309
『서울과 개성을 버린 것도 명나라의 의심은 더욱 클 것이요, 명나라가 우리 나라를 의심하면 구원병은 더욱 오기가 어려운 것이니, 평양을 굳게 지켜서 명나라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인가 하오.』
 
310
하고, 성룡은 명나라의 의심을 끌어서 평양을 떠남아 옳지 아니함을 말하였다. 백성을 속이는 것이 옳지 아니하다는 말에는 까딱 없던 무리들도 명나라가 의심한다는 말에는 미상불 겁이났다.
 
311
『명나라에 보할 때에는 평양성에서 크게 싸워서졌다고 하면 그만 아니요?』
 
312
하고, 어떤 사람(그의 명예를 위하여 이름은 쓰지 말자)이 말하였다.
 
313
유 성룡은 이어,
 
314
『또 제 이책으로 평양을 버리고 다른 데로 피한다 하더라도, 함경도로 피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오, 원래 거가가 서쪽으로 오신 것은 명나라를 의지하여서 나라를 회복하자는 것인데, 이제 명나라에다가 청병은 하여 놓고서 깊이 북도로 들어 간다고 하면 중간에 적병이 막혀서 명나라와 소식이 끊어질 터이니 통할 길도 통하기가 어려 우려든 회복을 어찌 바라오? 또 적병이 각도에 흩어져서 아니 간 곳이 없거든 북도에라고 반드시 적병이 없으란 법이 없으니, 만일 북도에 갔다가 적병을 만나면 다시 갈 곳이 오랑캐 땅 밖에는 없지 아니하오, 그야말로 의지할 곳이 아주 끊어질 터이니 이런 위태한 일이 또 어디 있으리이까? 이제 조신들이 가족이 많이 북도에 가 있으므로 각각 사사로운 생각으로 북편으로 가기를 주장하는 것이요, 신으로 말하여도 늙은 어미가 동으로 피난하였다 말을 들었으니 비록 간 곳을 알지 못하나 필시 강원도나 함경도에 있을 것이온 즉, 사사로운 정으로 말하오면 신인들이 어찌 북으로 갈 마음이 없아오리까마는 국가의 대계로 보아 여러 사람의 뜻과 같지 아니하게 사뢰는 것이요.』하였다.
 
315
왕도 성룡의 말에 측연히,
 
316
『경의 모친이 지금 어디 있을까? 내 탓이로군.』
 
317
하였다.
 
318
『아니요!』
 
319
하고, 지사(知事) 한 준(韓準)이 성룡의 말을 반대하여 북도로 가는 것이 좋은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북도로 가족을 보낸 대관들의 시킴을 받아 성룡의 말이 왕의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도록 하러 한 것이었다.
 
320
이때에 대동강에는 적병이 온 지가 사흘째 되었다. 유 성룡, 윤 두수 등이 연광정에 앉아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떤 왜병 하나가 나무때기 끝에 조그마한 종이 조각 하나를 끼어서 강가 모래판에 꽂고 이것을 와보라는 듯이 손을 들어 손짓을 하였다.
 
321
유 성룡은 아마 그것이 무슨 편지리라 하여 화포장(火砲匠) 김 생려(金生麗)를 시켜 매생이(대동강에 있는 작은 배)를 타고 가서 가져 오라 하였다.
 
 
 

20

 
323
화포장 김 생려가 성룡의 명을 받아 매생이를 저어 강을 건너가 그 나무때기가 꽂힌 모래 위에 오르니, 그 나무때기를 세운 사람이 손에 아무 병기도 없이 생려의 곁으로 와서 반가운 듯이 생려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져, 말은 통치 못하나 친절한 뜻을 표하며 막내 끝에 달았던 편지를 주고 연광정을 가리키며 가져 가라는 뜻을 표하였다.
 
324
생려는 그 왜병을 작별하고 매생이를 저어 연광정으로 돌아와 그 편지를 수성 대장인 윤 두수에게 올렸다. 윤두수는 손을 들어 그 편지를 밀며,
 
325
『그것은 보아 무엇 하오.』
 
326
하였다.
 
327
『안 볼 것은 무엇 있소?』
 
328
하고 유 성룡이 그 편지를 받았다. 겉봉에는,
 
329
『(上 朝鮮國         ) 』
 
330
하었다. 이것은 이 덕형(李德馨)을 가리킨 것이었다. 편지를 쓴 이는 평 조신(平調信)과 현소(玄蘇)이었다. 그러고 편지 사연은 서로 만나서 강화할 일을 의논하자는 것이었다.
 
331
원래 소서 행장(小西行長)은 처음부터 풍신 수길의 조선 침입에 반대하였다. 그는 아무쪼록 이 전쟁이 나지 아니하게 하려고 여러 번 두 나라 사이게 섯 애를 썼다. 전쟁이 열린 뒤에도 부산(釜山)에서 한번, 동래(東萊)에서 한번, 상주(尙州)에서 한번, 또 임진강(臨津江)에서 한번 조정에 화의하자는 뜻을 통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평양에서도 한번 더 이 뜻을 표하자는 것이었다. 평 조신으로 말하면,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 = )의 신하로 여러 번 서울에 사신으로 와서 그 공으로 가선 대부(嘉善大夫)까지 봉한 사람이요, 현소 라는 중도 조신과 같이 조선에 왔던 사람으로 책략과 문필이 있어서 소서 행장의 비서 모양으로 있었다.
 
332
윤두수는 원하는 빛이 없었으나 유 성룡의 주장으로 이 덕형(李德馨)을 보내어 저편이 말하는 바를 듣기로 하였다.
 
333
이 덕형이 가는데 대하여서도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 평복으로 갈 것이라는 이, 관복으로 갈 것이라는 이, 강 중에 뜨더라도 가운데까지 갈 것이라는 이, 가운데보다 이쪽에 서서 저편을 부를 것이라는 이, 통틀어 말하면, 저편을 얼마나한 정도로 대접할까 하는 데 대한 예문 토론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도, 강화를 할 것이냐? 한다 하면 어떠한 조건으로 할 것이냐 하는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서는 의견을 내는 이가 없었다. 윤 두수는 애초에 만날 필요가 없다는 사람이니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서 만나기를 주장하는 유 성룡에게도 어찌하든지 적군을 속여서 하루라도 공격을 연기시키려는 생각 밖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334
이 모양으로 화하거나 싸우거나간에 아무 작정된 방침도 없이 이 덕형은 종사판과 이삼 호위하는 무사를 데리고 배를 타고 강주에 나떴다. 의복은 많이 토론한 결과 이편의 예의와 위의 범절을 적에게 보일 필요가 있다하여 관복을 입고 따르는 자도 각각 위의를 갖추었다. 저편에는 배가 없으므로 이편에서 배 한 척을 보내어서 저편 사신에 타게 하였다.
 
335
두 배가 강중에서 만나매 평 조신은 뱃머리에 나서서 이편을 향하여 공손히 예하고 중 현소도 중의 법으로 합장하였다. 이 덕형도 읍하여 답례하였다. 평조신은 가선 대부요, 이 덕형은 자헌 대부(資憲大夫)니 하관이다 하는 생각이 이 덕형의 머리속에 있었다.
 
 
 

21

 
337
두 배에 탄 사람이 파차에 잠깐 주저한 것은 어느 편이 어느 편 배에 오를까 함을 정치 못함이었다.
 
338
평 조신과 중 현소의 일행은 마침내 이 덕형(李德馨)의 배에 올랐다. 이 덕형은 평 조신과 현소의 낯을 알았다. 작년에 그들이 대마도주 평 의지(平義智 = )의 사신으로 왔을 때에도 이 덕형은 그를 접대한 사람 중에하나였다.
 
339
덕형과 조신은 왜학 통사를 통하여 마치 전장에서 만난 적국 사람들이 아닌 듯이 웃고 피차에 인사를 하였다 현소가 먼저 말을 내었다.
 
340
『두 나라가 간패로 서로 대하게 된 것은 참으로 중원에 조공하려는 것 밖에 없는데 귀국이 그것을 허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일이 이에 이른 것이요, 지금이라도 귀국이 일본에 중원에 조공할 길만 빌려 주면 무사할 것이요.』
 
341
하였다. 덕형은,
 
342
『황조(皇朝)(= 명나라)에 조공을 청하려면 공손히 할 길이 있을 터인데 왜 이름 없는 군사를 끌고 이웃 나라를 침노하오? 만일 진실로 황조에 조공할 길을 트기를 원하거던 곧 군사를 거두고 다시 오오.』
 
343
하고 준질히 책망하였다. 조신은 성내는 빛도 없이,
 
344
『귀국에서 일본의 청을 들어 중원에 가는 길을 빌린다면 곧 군사를 거두겠으나 그 허락을 받기 전에는 거둘수 없소.』
 
345
하였다. 이모양으로 덕형과 조신과는 서로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여 타협점을 발견할 길이 없었다.
 
346
조신은 임진강(臨津江)에서도 군사만 물리길 빌리기를 허락하겠다는 조선측의 말에 속았노라 하고, 덕형은 군사를 물린다기에 믿었더니 도리어 복병을 하고 있다가 이편 군사를 역습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여 서로 약속을 저버린 것을 책하였다. 이리하여 피차에 언성은 높아 가고 감정은 흥분되어 조신은 마침내,
 
347
『지금 뒤에 삼십만 대병이 있고 또 십만명 수군이 전라도, 충청도를 돌아 평안도로 올 터이니 그리 되면 다시 용서가 없을 것이요, 귀국 왕을 사로잡아 항서를 씌우는 자리에서 대감도 다시 만납시다. 』
 
348
하고 호기를 부렸다.
 
349
덕형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며,
 
350
『이제 며칠이 아니하여 천병(天兵)(= 명나라 군병) 백만이 올 터이니 그때에 후회하지 말라.』
 
351
하였다. 이러고 조신과 현소는 자기네 배로 돌아가고 덕형도 연광정(연광정)으로 돌아 왔다. 연광정에 앉아서 하회를 기다리던 윤 두수(尹斗壽), 유 성룡(柳成龍) 이하 여러 사람들은 강중에서 이 덕형과 평 조신의 높은 언성을 가끔 들었다. 이렇게 유월 십일의 대동강상의 강화 담판은 파열이 되었다.
 
352
이 기회에, 오월 십 육일 임진강(臨津江)에서 소서 행장(小西行長)이 평 조신(平調信 =     )을 시켜 조선 조정에 보낸 편지를 보자.
 
353
(
 
 
 
 
 
 
 
 
 
 
 
354
)
 
 
 

22

 
356
이 글은 서투른 일본말식 한문으로 쓰였다. 그것은 중현소가 지은 것이다.
 
357
이것을 조선말로 번역하면 이러하다. -
 
358
『두번째 글을 올리나이다. 이제 올린 글에 화친하자는 말을 한 것을 귀국에서 믿지 아니하심은 그럴 듯한 일이로소이다. 우리 군사, 만리 풍파의 어려움과 강산의 험함을 지나 곧 서울에 들어 왔거늘 이제 연고 없이 화친하려 하니 귀국에서 믿지 아니하심이 또한 그럴 듯한 일이로소이다. 신(적은 글자로)이 귀국을 위하여 그 연유를 설명하리이다. 우리 전하 길을 빌어 대명국을 치려 하시매 비록 제장이 명을 받자와 이곳에 왔으나, 이로부터 또 수천리를 지나 대명국에 들어가고자 아니하니, 이러므로 먼저 귀국과 화친하고 그런 후에 귀국의 한 말씀을 빌어 대명국과 화친하려 함이로소이다. 귀국도 한 말씀으로써 대명국으로 하여금 일본과 화친케 하시면 세 나라가 다 평안하리니 이에서 더한 양책이 없는가 하나이다. 제장의 고생을 면하고 만민을 소생케 하시면 세 나라가 다 평안하리니 이에서 더한 양책이 없는가 하나이다. 제장의 고생을 면하고 만민을 소생케 하자 하는 것은 우리 모든 장수들의 뜻이로소이다. 전하도 귀국과 절교하기를 원치 아니하시나 귀국이 이웃 나라 사귀는 도리를 잃어 우리 군사를 막으므로 우리도 싸움을 할 뿐이로소이다. 신(적은 글자로 )이 공로 없이 귀국의 큰 벼슬을 받자오니 어찌 큰 은혜를 잊사오리까? 나라 명을 받자와 모든 장수의 앞장을 서는 것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연고로소이다. 이제 간담을 기울여 누누이 아뢰오니 족하를 살피소서.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거든 그 또한 가하나이다. 의지와 행장 두 사람이 한 종이에 쓴 편지를 올리나이다. 자애하심 빌고 이만 올리나이다. 자애하심 빌고 이만 올리나이다.』
 
359
이 편지 속에 전하라고 한 것은 태합(太閤) 풍신 수길(豊臣秀吉)이다. 풍신 수길이 외아들을 죽여 버린 홧김에 명나라를 치려는 생각을 내어 모든 장수가 부득이 온것이지마는 명나라에까지 싸우러 갈 생각은 없으니 조선에거 명나라에 잘 말해서 풍신 수길의 마음을 풀어 주게 하면 자연 싸움이 없어지리란 것이요, 또 평 조신(平調信)이 조선의 높은 벼슬을 받았다 함은 작년인 신묘년에 그가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에 조선에서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주었음을 기리킨 것이었다.
 
360
대동강상의 강화 담판이 파열이 되매 그날 저녁으로 일본군은 평양성 총공격의 결심을 한 듯하였다. 전에는 그렇게 빛을 보이지 아니하던 일본군 수천명이 강 동쪽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위엄을 보였다. 그들의 찬란한 깃 발과 번쩍거리는 검빛이 석양에 비치어 여름 구름의 뱃경과 아울러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였다.
 
361
대동강상의 강화 담판의 파열과 그날 석양의 적병의 시위는 왕 이하 조선의 조정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362
『평양을 버릴 것은 이미 결정되었다. 』
 
363
유월 십 일일 미명에 왕은 영의정 최 홍원(崔興嫄), 우의정 유 흥(兪泓), 전 대신 정 철(鄭澈) 등을 데리고 소리 없이 칠성문을 빠져 쫓기는 길을 나섰다. 이렇게 몰래 떠나는 뜻은 백성들을 무서워함이었다. 바로 그저께 백성들을 향하여 몸소 평양을 지킬 것을 서약하지 아니하였는가? 이제 도망군이 길을 떠나면서 첫 번째로는 백성들을 대할 면목이 없었던 것이었다. 따르는 신하들 중에도 가장 백성을 두려워한 이는 정 철과 유 홍이었다.
 
364
매전은 북도를 향하여 그저께 저녁에 도망군의 길을 떠나고 이제 세자를 데리고 초조한 도망의 길을 떠나는 왕의 눈에는 눈물이 있었다. 왕의 일행은 철옹성(鐵甕城)이라고 일컫는 영변(寧邊)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23

 
366
왕이 평양을 떠날 때에 좌의정 윤 두수(尹斗壽), 도원수 김 명원(金命元), 평안도 순찰사 이 원익(李元翼) 등으로 하여금 평양을 유수케 하고 유 성룡(柳成龍)으로 하여금 같이 평양에 머물러 당장(명나라 장수)을 접대하게 하였다.
 
367
십 일일 왕이 떠난 뒤에 윤 두수(尹斗壽), 김 명원(金命元), 유 성룡, 이 원익 등 유수군(留守軍)의 수뇌부는 연광정(練光亭)에 모여 앉았다. 그들은 마치 적군이 공격하는 양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같았다. 그들은 명색은 수성 대장이니 도원수니 하여, 마치 훌륭한 장수나 되는 것 같지마는 기실은 월귀나 좋이 짓는 선비들에 불과하였다. 일찍 활 한번 잡아 본 일 없고 병서 한 권 본 일 없었다. 다만 병원은 문관 자기네 손에 잡고 싶은 욕심에, 다시 말하면, 정말 군인인 무인에게 병권을 주기 싫은 까닭에 체철사니 도원수니 하는 직함을 띠는 것이었다.
 
368
지금 적병이 대동강을 건너서 평양성을 총공격을 하려는 이때에 그들은 관광하는 선비 모양으로 연광정에서 강바람을 쏘이고 앉은 것이었다. 왕을 따라서 안전 지대로 도망한 최 흥원(崔興嫄), 유 흥(兪泓), 정철(鄭澈)의 무리의 신세를 얼마나 부러워 하였을까? 부질없이 유 성룡의 말을 좇아 평양성 고수설에 좌단하였기 때문에 평양을 지키라는 왕명을 받게 된 것을 얼마나 한하였을까?
 
369
『어떻게 된 모양이요? 지킬 배비는 다 되었소?』
 
370
하고, 유 성룡은 유수 대장인 윤 두수에게 물었다. 윤 두수도 이름이 대장이지 군사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도수원 김 명원을 돌아 보았다. 그래도 명색이 도원수요, 도망하는 싸움이라도 두어 번 해본 경험이 있는 이가 김 명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명원도 항상 적군이 가까이 오기 전에 피하는 재주를 가졌기 때문에 실지로 싸우는 양은 본 일도 없고 지휘한 일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평양성의 수비에 대한 사실상 책임자다. 이 자리에서 한 마디 아니할 수가 없었다. 김 명원은,
 
371
『배비라야 별 배비 있소. 본도 감사 송 언신(宋言愼)이 대동문을 지키고, 병사 이 윤덕(李潤德)이 부벽루(浮碧褸) 이상의 여울을 지키고, 자산 군수(慈山郡守) 윤 유후(尹裕後) 등이 장 경문(長慶門)을 지키고, 성중 사졸 들이 성첩을 돌아 지키오.』
 
372
『성중 사졸이 모두 얼마나 되오?』
 
373
하고, 이번엔 윤 두수가 물었다.
 
374
『한 삼사천 되지요.』
 
375
하는 것이 김 명원의 대답이었다. 삼사천이라는 것이 숫자에 대한 대답으로 김 명원은 아는 것이었다.
 
376
『그러면 그 삼사천명 사졸은 어떻게 배치하였소?』
 
377
하는 것은 이 총중에서는 가장 병법에 소양이 있다는 유 성룡의 물음이다.
 
378
김 도원수는 말문이 막혔다. 한참이나 주저하다가,
 
379
『그저 성을 돌아 지키라고 하였소.』
 
380
하고, 강가에 연한 성을 바라보았다. 과연 성 위에는 여기 한떼 저기 한 모여서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혹은 여청 군복에 다홍동 달고 벙거지 쓴 정식 군사도 끼었지마는 대부분은 흰 바지저고리에 수건 동여맨 보통 백성들이었다. 이름을 붙이자면 의용병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어떤 곳에는 백여 명이나 한데 뭉치고 어떤 곳에는 둘씩 셋씩 따로 떨어져서, 혹은 앉고 혹은 서고 혹은 강을 들여다 보소 홋은 대관들이 좌정하신 연광정을 눈이 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여름볕은 찌는 듯하나 강바람은 그대로 서늘하였다.
 
 
 

24

 
382
또 을밀대(乙密臺) 근처 소나무 가지에는 혹은 저고리를 걸고 혹은 바지를 걸어 마치 빨래터와 같았다.
 
383
『저건 다 무엇이오?』
 
384
하고 유 성대룡이 김 도원수에게 물었다.
 
385
『대감 그것을 모르시오? 그것이 의병(의병)이란 것이요.』
 
386
하고 도원수는 자랑하는 듯이 웃었다.
 
387
『저걸 보고 누가 군사로 안단 말이요?』
 
388
하고 유 성룡도 웃었다.
 
389
『어떤 것은 너무 높이 걸렸어.』
 
390
하고, 윤 두수도 웃었다. 일좌가 다 웃었다. 김 도원수는 무안하여 종사관더러,
 
391
『여보게. 어떻게 시켰는데 옷을 저 모양으로 걸어 놓는단 말인가?』
 
392
하고 책망을 하였다. 이때에 강 저쪽을 바라보니 비록 수효가 많지는 아니하나 동대원(東大院) 강 언덕 위에 적병이 일자진(한일자 모양의 진)을 치고 우리 나라 만장과 같은 붉은 기, 흰 기를 늘여 꽂고 군사들이 모두 큰 검을 비껴 들었는데 그것이 햇빛에 비취어 마치 없는 번개와 같이 번쩍거렸다. 이편 군사와 저편 군사의 위풍을 비교할 때에 일좌는 모두 기가 막히지 아니할 수 없었다.
 
393
『저기 다 정말 검일까?』
 
394
『그게 검이 아니라 나무칼에다가 납을 발라서 멀리서보는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것이라오.』
 
395
이러한 회하도 있고,
 
396
『적병도 모두 얼마 안되는 모양이야, 공연히 초막만 많이 짓고 깃발만 많이 달았지 모두 풍인 모양이야.』
 
397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에 적병 육칠인이 조총을 들고 강변으로 나오더니 성을 향하고 일제히 쏘는데, 그 소리가 웅장하여 총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 총알이 성을 넘어 대동관(大同館) 지붕 기왓장 위에도 떨어지고 혹은 성루 기둥을 맞혀 두어치 깊이나 들어가 박혔다. 적병 중에 붉은 옷을 입은 자가 연광정(練光亭)을 바라보고 조총을 어깨와 볼 틈에 끼고 겨누어 주춤주춤 물가까자 내려와 쏜 총알이 연광정 위에 앉은 사람들을 맞혔다. 다행히 죽지는 아니하였으나 성 사람들이 모두 놀라몸을 오그리고 기둥 그늘에 숨었다. 윤 두수(尹斗壽), 김 명원(金命元) 이하로 모두 눈이 둥그레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398
『이러고 있어 되겠소? 우리도 응전을 하여야지.』
 
399
하고, 유 성룡 한 사람이 그래도 정신이 남아서, 군관 강 사익(姜士益)으로 하여금 방배에 몸을 숨기고 편전(片箭)을 쏘게 하였다. 살이 날아 적병이 있는 모래 위에 떨어지니 적병들이 두려워 주춤주춤 물러갔다. 그제야 도원수 김 명원도 기운을 얻어 활 잘 쏘는 군사 수십명을 뽑아 결음 빠른 배를 태워 중류에 나떠서 쏘게 하였다. 일변 쏘며 일변 저어 배가 강 동쪽 언덕에 가까이 가매 적병이 두려워 뒤로 피하였다.
 
400
우리 군사가 배에서 감을 현자 총으로 화전(火箭)을 쏘니 서까래 같은 불이 강을 건너 갔다. 적병은 그것을 우러러 보고 모두 부르짖고 떠들며 화전이 떨어진 곳으로 모여 다투어 그것을 구경하였다.
 
401
이날에 병선을 준비하는 거행이 태만하다 하여 도원수 김 명원은 공방 아전 하나를 잡아 들여 연광정 앞에서 군법 시행을 하였다. 목을 벤 것이다.
 
 
 

25

 
403
활로 잠시 소부대의 적병을 물리쳤으나 그것으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적병이 가진 조총의 위력은 그것을 처음 보는 이편 장졸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평양성에서 적병을 막을 길은 대동강 물을 깊게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단군묘(檀君廟)·기자묘(箕子廟)·동명왕묘(東明王廟)에 왕이 제신을 보내어 빌었으나 비는 오지 아니하고 강물은 나날이 줄어들었다. 아무리 물이 줄더라도 능라도(綾羅島) 이하로는 도보로 건너가기 어렵지마는 그 이상으로는 얕은 여울이 많아서 길만 알면 건널 수가 있었다. 적병이 아직까지는 길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에는 반드시 길을 찾을 것이요, 또 만일 대동강 물길을 잘 아는 우리 사람을 붙들기만 하면 금시라도, 오늘 밤에라도 건너올 것이니, 대동강을 건너기만 하는 날이면 평양성을 지킬 수 없으리라는 것은 다만 윤 두수, 김 명원 등의 의견뿐이 아니라 유 성룡의 생각도 그러하였다. 유 성룡은 윤 두수더러,
 
404
『대감, 어찌하자고 저 여울목을 아니지키시오? 다른데는 못하더라도 여울목만은 엄히 지켜야 하지 않겠소?』
 
405
하면서 재촉하였다.
 
406
윤 두수는 대답하는 대신에 김 명원을 돌아 보았다. 그는 오직 도원수 김 명원을 믿는 이었다. 원체 성미가 느린 김 도원수는,
 
407
『왜 여울을 안 지키나요? 이 윤덕(李潤德)이가 지킵니다.』
 
408
하고 유 성룡에게 대답하였다. 유 성룡은 언성을 높여,
 
409
『이 윤덕이 따위를 어떻게 믿는단 말이요!』
 
410
하고, 순찰사(巡察使) 이 원익(李元翼) 등을 향하여,
 
411
『여보, 하루 종일 이렇게 모여 앉아서 마치 무슨 잔치나 하는 것 같으니 이러고 어찌하잔 말이요? 왜 가서 여울을 지키지 아니하시오?』
 
412
하고 책망하는 어조로 말하였다.
 
413
이 원익은 무안한 듯이.
 
414
『가 보라고 하시면 소인이 안갈 리가 있소?』
 
415
하고 수성 대장 윤 두수를 바라본다. 윤두수는 잠깐 도원수 김 명원의 눈치를 보더니 이 원익을 향하여,
 
416
『그러면 대감이 가 보시오그려.』
 
417
하였다. 이것이 명령이다.
 
418
이 원익은 막하를 데리고 연광정을 내려서 청류벽으로 천하 제일 강산의 경치를 완상하고 글귀를 생각하면서 능라도 여울을 향하여 올라 갔다.
 
419
유 성룡은 연광정에서 돌아와 도저히 평양성을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또 자기의 맡은 직분이 성을 지키는 군무가 아니라 당장을 영접하는 것이라 하여 종로까지 가서 하루 바삐 당장을 맞아 오는 것이 평양성을 지키는 일이 된다는 핑계로 그날 밤 달빛을 타서 종사관(從事官) 홍 종록(洪宗錄), 신 경진(辛慶晋)을 데리고 평양성을 떠났다.
 
420
이날 밤에 도원수 김 명원은 정병 수백명을 가리어 고언백(高彦伯)으로 총사령을 삼아서 밤 삼경을 기회로 부벽루(浮碧樓) 밑에서 배로 능라도 나루를 건너 적진을 야습하기로 하였다.
 
421
삼경이라고 맞추어 놓은 것이 군사들은 삼경 전에 약속한 곳이 모였으나 장수 되는 고 언백이 사경이나 지나서야 왔다. 그래서 군사들이 적진에 다다랐을 때에는 벌써 훤하게 먼동이 텄었다.
 
422
적진에서는 여러 날 강을 건너지 못라여 지루한 생각이 난데다가 조선군이 적극적으로 습격할 것을 생각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마음 놓고 잠이 들어 아직 일어나지를 아니하였다.
 
 
 

26

 
424
조선 군사들은 머뭇머뭇하고 적진을 습격할 기운을 내지 못하였다. 더구나 장수 고 언백이 적진 있는 데까지 건너오지 아니하고 배를 타고 능라도 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군사들의 용기를 꺾었을 뿐더러, 그보다도 군사들의 비위를 상함이 더욱 컸다.
 
425
이때에 일각이 금싸라기보다도 더 귀한 이때에 군사들이 머뭇거리는 것은 더할 수 없는 큰 손실이었다 이때에 군사들 중에서 한 군사가 뛰어 나서며 칼을 들어 앞을 가리키고 자기가 먼저 적군 중으로 돌입하니, 모든 군사들이 기운을 얻어 뒤를 따랐다.
 
426
그 앞장 선 군사는 평양 병정 임 욱경(任旭景)이었다.
 
427
임 욱경은 적병이 자는 초막 하나를 습격하여 수십명 적병을 죽였다. 다른 군사들도 임 욱경의 칼에 흐르는 피를 보고는 기운을 내어 저마다 한 초막을 습격하였다.
 
428
이 통에 첫째 진의 적병이 놀라 잠을 깨어 일어났으나 미처 수족을 놀릴 새가 없이 조선 군사의 칼 끝에 죽었다.
 
429
이 모양으로 첫째 진의 적병 수천명이 거의 전멸하였다. 그리고 말 삼백여 필과 조총, 장검 등 좋은 군기를 수 없이 노획하여 이편으로 가져 올 양으로 강변으로 나를 적에 다른 진에 자던 적병들이 일어나 일시에 몰려오니 조선 사람들은 빼앗은 말과 군기를 모래판과 강물에 내버리고 다투어 배에 올랐으나 적병의 추격이 급하므로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는 자, 적병의 칼에 맞아 죽는 자가 수없고, 중류에 나떴던 배도 너무 사람을 많이 실어서 뒤집힌 것이 적지 아니하였다.
 
430
물길을 잘 아는 군사들은 왕성란(왕성란)이라는 여울목으로 걸어 건너 왔다. 고 언백은 적병이 밀어 오는 것을 보고는 곧 배를 대어 달아나고, 오직 임 욱경과 그를 따르는 몇 십명이 한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아니하고 싸웠다. 나중에 임 욱경이 혼자 살아 남아서 좌충 우돌로 수십명의 적병을 더 죽였다.
 
431
적병은 겹겹이 임 욱경을 에워싸고 사방에서 칼로 찍었다. 그러나 임 욱경의 용기와 칼 쓰는 재주에 여러 번 뒤로 물러날 때마다 몇 명씩 죽었다.
 
432
마침내 욱경은 적병의 탄환에 한 다리를 맞고 뒤로 치는 칼에 한 팔을 끊겼다. 그러나 그는 외다리와 외팔로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싸웠다. 그러다가 마침내 적병의 탄환이 가슴을 뚫었다. 욱경은 피를 뿜고 땅바닥에 쓰러지면서도 칼을 들어가까이 있는 적병을 향하여 던졌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433
고 언백이 군사 패한 보고를 할 양으로 성중에 들어오니 성중에는 인적이 묘묘한데 대동관에 들어오니 온통 빈집이었다.
 
434
『오. 다들 미리 달아났고나!』
 
435
하고, 고 언백은 말을 달려 수안을 향하고 도망하였다. 김 명원은 고 언백을 시켜 적신을 치게 하였으나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아니하여 윤 두수에게 도망하자는 헌책을 하였다. 그리고 도망하는 법도 설명하였다. 도망하는 법은 어떤고 하면, 김 명원의 계책에 의하면, 첫째로 성문을 열어 성중 백성을 내보내고 둘째로 군기와 군량을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김 명원이 여러 번 경험한 것으로 이 점에서 그는 도원수였다. 이 헌책을 하고 몰래 나와서는 급히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키기 전에(혹시 일으킬지 모르므로) 먼저 달아나 버렸다.
 
436
윤 두수는 김 명원의 헌책대로 삼경에 성문을 열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437
『다들 피난해라!』
 
438
하고 길로 다니며 외치게 하고 군기와 화포 등속은 풍월루 앞 못에 집어 넣고 윤 두수 이하 고관 대작들은 몸에 경보를 지니고 걸음 잘하는 말에 올라 캄캄한 밤에 보통문(普通門)을 더듬어 수안으로 달아났다. 보통문을 나서서야 윤 두수는 군량고(각지에서 모아다 쌀은 것이 십여만 섬이었다.)에 불놓기를 잊은 것이 생각났으나 그냥 달아나 버렸다.
 
 
 

27

 
440
유월 십 오일, 석양에 일본군은 왕성탄으로 건너기 시작하였다. 새벽에 습격했던 조선 군사들이 건너는 것을 보고 길을 찾은 것이었다.
 
441
왕성탄을 지키던 군사를 향하여 활 한 방 쏘아 보라는 말도 아니하고 말을 타고 평양 성중으로 달아나 버리고, 이것을 본 군사들도 활을 메고 이 윤덕의 뒤를 따라 성중으로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성중에 들어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왜 그런고 하면, 그들의 생각에는 성중에는 아직도 많은 군사와 대관들이 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왕성탄을 지키되 힘을 다한다고 하던 순찰사 이 원익은 밤중에 김 명원의 밀서를 보고 이 윤덕과 군사들에게 대해서는 군사와 군기를 가지러 간다고 일컫고 성내로 들어와 버렸던 것이다. 이 윤덕은 윤 두수, 유 성룡, 김 명원, 이 원익 들을 실컷 욕하고 원망하고 군사들도 다 내버리고 왕의 뒤를 따라서 달아나 버렸다.
 
442
이 윤덕을 따라 성중에 들어 왔던 군사들도 저마다 대관들과 대장들을 욕하고,
 
443
『이놈들을 배때기 째지 못한 것이 분하다. 』
 
444
하고 도망해 버렸다.
 
445
일본 군사들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아니하고 강을 건넜다. 그러나 여울 지키던 군사들이 활 한 방도 쏘지 아니하고 성중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시 꾀가 있음이라하여 곧 성중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부벽루 영명사(永明寺) 근방에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을밀대로 기어 올라갔던 척후의 보고를 듣고야 평양 성중이 텅 빈 것을 알고 대군이 일제히 성중에 들어 왔다.
 
446
이 모양으로 그 굳은 평양성 까지도 적군에게 내어 주었다. 임 욱경이 죽은 뒤에 한 사람도 싸워 보지도 못하고,
 
447
평양을 떠난 왕은 처음에는 영변(零邊)으로 갔다가 다시 박천(博川)으로, 왕이 의주에 도달하시었을 때에는 의주 성중은 무인지경이었다. 의주 목사는 달아나고 백성들은 피난하여 버리고 새와 닭, 개, 짐승의 그림자도 없고 남아 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이나, 늙은이, 홀아비 같은 사람뿐이었다.
 
448
왕은 이 유증(李幼證)으로 의주 목사를 삼고 따라 온 조신 십여 인을 거느리고 동헌으로 행궁을 삼았다. 왕은 의주에 이르러 동으로 서울 있는 곳을 향하여 통곡하고 글한 수를 지어 중신에게 보였다 - .
 
449
『                                             』
 
450
(나라 일 창황한 제 충신이 그 누구냐? 큰 뜻 두고 나라더나 회복은 너희 믿네. 관산 달에 통곡하니 압수바람 마음 아파라. 조신아 이후에도 동야 서야 다시 할다!)
 
451
동야 서야라 함은 이렇게 당파 쌈으로 나라를 망쳐 고도 동인이니 서인이니 다시 하겠느냐 하는 뜻이다. 나와서 가산(嘉山)·정주(定州)를 지나 유월 이십 이일에 의주(義州)에 도달하였다.
 
452
평양성을 점령한 소서 행장(小西行長) 등은 수십명의 조선 사람을 매수하여 위주에 이르기까지 각처에 염탐군을 늘어 놓아 밤낮으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래서 소서 행장은 연광정에 가만히 앉아서도 평안도 각읍의 사정을 빤하게 꿰어 들고 앉았다.
 
453
소서 행장이 의주까지 들이치지 아니하고 평양에 지체한 것은 제이차로 일본에서 건너 온 해군이 이 순신(李舜臣)의 해군을 싸워 이기고 경상, 전라, 충청도의 바다를 완전히 손에 넣어 수륙이 서로 응할 수 있는 날의 기다리는 까닭이었다. 부산서 의주, 육로 이천리의 전선을 해상권을 손에 넣지 않고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원문】쫓기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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