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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의 하롯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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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7월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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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하롯밤
2
코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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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을 나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참담한 경우를 당한 일이 있다. 처음 온 수토(殊土) ─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타향에서 나는 주머니에 돈이라고는 쇠천 샐 닢도 없고 하롯밤 눈 붙일 곳도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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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와서 이틀 사흘 지나는 동안에 내 몸에 붙어 있는 것으로 없어도 출입 못하게 되잖을 것을 있는 대로 다 팔아 먹은 나는 그 시가지를 나와 증기선 부두가 있는 ‘이스테’라고 하는 데를 가 보았다. 거기는 항해의 시절이면은 거친 노동자의 생활로 하여 뒤끓는 듯하던 곳이건만, 시방은 적적히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어른거리지 않았다. 그 때는 벌써 시월의 마지막 날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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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이 젖은 자각 돌멩이에서 자각 돌멩이로 발을 질질 끌며 그 어디 면포(麪麭)의 조각이 떨어져 있지나 않았는가 하고 눈에 불을 켜면서 나는 인적이 끊어진 건물과 창고 가로 빙빙 돌아다니었다. 그러면서 먹을 것이 넉넉함은 얼마나 좋은 일이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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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의 교양 정도에 있어서는 마음 주림은 육체의 주림보담 쉽게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시(試)컨대 길거리에 방황해 보라. 밖으로 보아도 ─ 물론 내부도 그렇게 나쁘지 않을 듯한 건물이 제군의 전후좌우에 즐비할 것이다. 그것을 보고 제군은 어떤 생각을 일으키는가. 필연코 건축이라든가 위생이라든가 기타 종종의 현명하고 고상한 문제에 관하여 갖가지로 사색할 것이다. 그리고 또 제군은 따스하고 말쑥하게 차림차림을 차린 분들과 마조치리라. 그네들이 제군에게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 모두 예절있게 깍듯하게 제군의 생활상의 비참한 사실을 주의치 않으려고 짐짓 외면을 할 것이다. 이렇다, 이렇다. 배고픈 사람의 마음은 배부른 사람의 마음보담 반보담 더 수양되었고 보담 더 건전한 것이다. ─ 여기다! 여기 배 곯는 이를 위하여 만장(萬丈)의 기염(氣焰)을 토(吐)할 결론도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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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저물고 비는 뿌리며 북녘 바람이 맹렬히 불기 시작하였다. 솨르륵 솨르륵 텅 빈 울막과 가가를 울리며 주점의 칠(漆)먹인 창경(窓鏡)속으로 불어 들기도 하고, 강물에 부딪혀 거품을 내기도 하였다. 물결은 흰 대강이를 높이 치어들고 쫓기고 쫓으며 멀리멀리 달음질하다가, 조급하게 피차(彼此)의 어깨를 뛰어넘고는 좌알 하고 높은 소리를 지르며 물가에 기어오른다. 그것은 마치 강이 겨울이 가까웠음을 느끼고 북풍이 오늘밤이라도 강 위에 던질는지 모르는 얼음의 올개미로부터 벗어나려고 들숨 날숨 없이 달아나고 또 달아나는 것과 같다. 하늘은 무겁고 어두웠다. 그리로부터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가랑비가 쉴 새 없이 부슬부슬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에두른 모든 읍울(悒鬱)스러운 자연의 비가(悲歌)는 산산이 부서지고 찢겨져 형체조차 남지 않은 버드나무 두어 주(株)와 그 뿌리에 매이어 있는 엎어진 편주(扁舟)한 척(隻)을 얻어 한층 더 그럴 듯한 운치를 보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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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되어 용골(龍骨)을 기울트리고 잇는 유선(遊船), 찬바람에 겁략(劫掠)된 차마 볼 수 없는 노목(老木) ─ 나의 주위에 있는 것치고 어느 것 하나 파괴(破壞)되고 황량하고 생기 없지 않은 것은 없었다. 그것을 조상하는 듯이 하늘은 마를 때 모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참말 나의 주위엔 음침(陰沈)과 최패(催敗)와 영락(零落)이 있을 뿐이었다……. 나 홀로 살았고 딴 것은 말끔 죽은 듯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생물인 나조차 동사(凍死)나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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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십팔 세이었다. ─ 좋은 시절이다! 덜덜 떨리는 이(齒)사이로 추움과 주림을 읊은 노래를 읊조리면서 차가운 자각 돌멩이 위를 걸어다니던 나는 무슨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어떤 판장 밑을 자세자세 살피다가 우연히 그 밑에 물에 빠진 새앙쥐가 되어 물 흐르는 옷이 두 어깨에 달라붙은 웬 여인이 땅 위에 구부리고 있는 것이 나의 눈에 띄었다. 나는 주춤 발길을 멈추고 그 여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피었다. 궐녀는 두 손으로 모래를 후벼파고 있는 것 같다. ─ 판장 밑을 파 뚫으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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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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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나는 궐녀 가까이 다가들어 엉거주춤 허리를 굽히고 물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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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녀는 그윽한 소리를 내자 놀랜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호동그랗게 회색의 눈으로 나를 뚫을 듯이 바라보고 있을 사이에 나는 궐녀가 나와 동년배인 소녀인 것과 그리 밉지 않은 얼굴에 불행히 세 개 푸른 사마귀가 있는 것을 보아 알았다. 그 푸른 사마귀는 둘은 두 눈 밑에, 또 하나 조금 큰 것은 코뿌리에 있는데 ─ 뛰어나게 큰 것도 없고 뛰어나게 작은 것도 없을뿐더러 또 분포의 배치조차 극히 교묘하건만, 그래도 그것이 궐녀의 아름다움으로 볼 수 있었다. 이 배치의 미는 분명히 인간의 용모를 망하게 하는 데 숙달한 미술가의 작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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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고 있음을 따라 그 눈 가운데 공포가 차츰차츰 걷히어 갔었다……. 궐녀는 두 손에 모래를 털며 목면의 머릿수건을 곤치고는 다시금 주저앉으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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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먹을 것을 찾고 있지? 그렇거든 파 보아! 나는 고만 손에 힘이 없어졌어. 저기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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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궐녀는 울막을 얼굴로 가리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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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 면포도 있을 게고……곱창도 있을 게야……저 울막에서는 시방도 장사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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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기 시작하였다. 궐녀는 잠깐 나의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의 곁에 앉아 나를 거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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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묵묵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범죄의 순간에는 도덕이라든가 법률이라든가 또는 경력 많은 분들의 가르침과 같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일각일초라도 염두에 먹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는, 모든 것을 내가 생각하였는지 않았는지는 오늘날 앉아서 단언할 수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대로 ‘참’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자백 않을 수가 없다. 곧 그 순간에 나는 오즉 한 생각 ─ 무엇이 이 판장 안에 있는가 하는 것밖에 모든 것을 잊었(忘)을 만치 그만치 나는 그 널조각 밑을 후벼 파기에 열심이었다는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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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어 간다. 곰팡이같이 사람에게 앉히는 쌀쌀한 잿빛 안개는 더욱 더욱 짙게짙게 우리를 에워싼다. 굵고 센 빗발은 판장의 널조각에 퍼붓고, 물결의 포후(咆吼)하는 소리는 산이 무너지는 것 같다. 어데서인지 밤 순라(巡邏)가 그 덜렁덜렁하는 것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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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울 밑에 밑받침이 있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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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나의 조수가 정다이 묻는다. 나는 궐녀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채 못알아 들었기에 잠자코 있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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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울 밑에 밑받침이 있느냐 말이야? 밑받침이 있고 보면 암만 파 들어가도 헛일이지. 우리가 시방 뚫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밑받침이 있으면 마츰내 그것에 맞힐 뿐이 아니야. 이러는 것보담 차라리 자물쇠를 비트는 편이 좋겠구먼. 썩어서 흐늘흐늘하는 자물쇠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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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이란 좀처럼 여인의 소견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보는 바와 같이 나는 때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언제든지 좋은 생각을 귀중히 알며, 또 언제든지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이용하기에 힘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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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물쇠를 찾아내자 나는 이어차 하고 잡아채니 과연 몽창 둘러빠진다. 나의 공범자는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서 아가리를 벌린 네모 난 구멍 안으로 배암같이 기어 들어가며 가는 목소리로 나를 칭찬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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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만한 사람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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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이면은 여자로부터 터럭만한 칭찬을 받더라도, 고금의 연설가를 낱낱이 한 묶음에 묶은 것보담도, 더 나은 웅변가가 있는 찬사를 다 늘어놓는 것보담 더 고마웁게 생각할 나이건만, 그 때의 나는 지금과 같이 싹싹하고 연(軟)한 내가 아니었으므로 나의 협력자의 그럼에 대하여는 아모런 주의도 하지 않고 다만 걱정스럽게 궐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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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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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녀는 단조로운 어조로 제가 발견한 것을 헤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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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한 광주리. 두터운 모피. 차양(遮陽)한. 양철통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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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말끔 먹지 못할 물건이다. 나는 희망이 사라지는 듯하였다……. 그럴 즈음에 궐녀는 문득 기운차게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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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있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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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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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포가 한 덩어리 있어……. 조금 눅눅할 뿐이야……자아.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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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포 한 덩어리가 나의 발부리에 날아오자 뒤미처 궐녀, 나의 용감한 협력자도 뛰어나왔다. 나는 벌써 한 조각을 물어 떼어 입안이 뿌듯하게 움질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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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좀 주어요!……한데 우리가 여기는 있을 수 없지……어데로 갈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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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녀는 사방을 두런두런 둘러보았다……. 거기는 암흑과 습기와 황량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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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거기 엎어진 유선이 있구먼……저리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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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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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걷기 시작하였다. 그 노략물을 입 가득히 씹으면서……. 비는 더욱 극렬해 가고 물소리는 요란해 간다. 어데서인지 여음을 길게 빼며 조소하는 듯이 휘이휘이 하는 소리가 울리었다. ─ 마치 천상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위대한 그 무엇이 지상의 일체의 제도와 또 이 무서운 추풍(秋風)과 그 가운데 영웅아인 우리를 한꺼번에 불어 날리고 말려는 것같이. 이 휘파람(嘯)소리가 나의 심장을 아프도록 고동시키었건만 나는 먹기를 마지 않았다. 거기 들어서는, 나의 왼편에 걸어가는 소녀도 나에게 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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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은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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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나는 궐녀에게 물었다. 왜 물었는지 나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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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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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궐녀는 연달아 쩝쩝 입을 다시면서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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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궐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의 심장은 방애질하였다. 그리고 또 나는 눈 앞의 안개 속을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그것은 마치 나의 운명의 지독한 얼굴이 나를 보고 수수께끼의 웃음을 빙글빙글 웃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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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간단(間斷)없이 선복(船腹)을 뚜드렸다. 그 부드러운 또닥 소리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며. 그리고 바람이 기울어진 배 벌어진 틈으로부터 솨솨 불어 들 적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나무 조각이 덩달아 달각달각 ─ 일종의 불안한 듣기 싫은 소리를 내었다. 파도는 강빈(江濱)에 부딪혀 흩어져 단조롭고 희망 없는 가락을 아뢰고 있다. 마치 거기 싫어서 싫어서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 기막히게 둔하고 무거운 그 무엇이 있음을 하소연하는 듯도 하고, 또 때때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헛되이 애를 써보다가 마츰내 비명을 않을 수 없게 되는 듯도 하였다. 빗소리는 물결의 부딪히는 울림과 한데 어우러져 길게 빼는 한숨 ─ 광명이 번쩍이는 더운 여름에서 싸늘하고 안개 많고 습기 많은 가을로 옮겨가는 변천으로 말미암아 상채기를 입고 기운을 잃어버린 세계의, 뼈골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이 엎어진 배 위에 떠도는 것 같았다. 풍백(風伯)은 쉴 새 없이 거칠 대로 거친 강빈(江濱)과 거품 부글거리는 물결을 퉁탕거리어, 그 비장한 노래를 노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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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舟)로 의지간(依支間)을 삼은 우리의 처지는 더할 수 없이 불유쾌한 것이었다. 좁고 눅눅한 데다가 갈라진 선복으로부터 차가운 빗발과 싸늘한 바람조차 들이친다. 덤덤히 앉아 있는 우리는 치위에 떨고 있었다. 나는 자려고 한 것이 생각이 난다. 나타샤는 등줄기를 배 한편에 걸치고, 몸을 고슴도치같이 옹송그렸다. 무릎을 두 손으로 움켜 안고 그 위에 턱을 고인 그는 크게 뜬 눈으로 강을 노려보고 있었다. 밑에 있는 푸른 사마귀로 말미암아 그 눈은 끔찍이 크게 보이었다. 궐녀는 꿈쩍도 않는다. 웬일인지 이 부동과 침묵이 나로 하여금 궐녀에게 대하여 무서운 생각을 들게 하였다. 나는 궐녀와 무슨 이야기든지 하여야 될 듯싶었으되 무에라고 말을 꺼내야 옳을지 몰랐었다. 말을 시작한 이는 궐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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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기막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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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녀는 의심없이 깊은 확신있는 어조로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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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불평을 부르짖음이 아니었다. 그 말 가운데 불평 같은 것은 아랑곳도 않는 가락이 있었음이라. 단순히 제가 이해하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어떤 결론을 얻었음이리라. 그것을 시방 궐녀가 소리를 높여 부르짖고 있음이리라. 그런데 나는 나에게 모순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논박도 할 수 없으매, 나는 여전히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궐녀도 또한 나 있는 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같이 몸을 꼼짝도 않고 화석같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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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걸거려서 소용이 무엇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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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샤는 또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냉정하게 생각한 것 같되 그래도 그 말에는 불평스러운 울림이란 조금도 없었다. 이 인간은 세상이란 것을 생각하다가 제 처지를 돌아보고 제가 세상에게 놀림을 받는 분풀이를 하려면 저는 다만 ‘게걸거리는 수’─ 궐녀 자신의 말을 빌리면 ─ 밖에 딴 도리가 없다는 확신을 얻은 것이 명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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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상의 선의 명확한 것이 나에게는 말할 수 없이 슬프고 아팠었다. 좀 더 잠자코 있기만 하면 참말 눈물이 날 듯싶었다……. 계집 앞에 더구나 그 계집 자신은 울지 않는데 내가 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궐녀에게 말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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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못살게 굴은 사람이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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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물어보았다. 이 순간 나에게는 이것 이상으로 귀에 거슬리지 않고 델리케이트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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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슈카란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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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궐녀는 보통 어조로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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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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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사람……. 과자 장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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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두들겨 맞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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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만 쳐 먹으면 정해 놓고 남을 친다오……. 수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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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궐녀는 나를 향하여 제 자신의 일, 파슈카의 일, 둘의 관계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 작자는 붉은 윗수염 있는 과자상으로 오현금(五弦琴)을 잘 탔었다. 한번 궐녀에게 놀러 온 궐자가 고만 궐녀의 마음에 들었었다. 그것은 궐자가 유쾌도 한 사나이일 뿐더러 훌륭한 좋은 옷을 입은 까닭이었다. 그것 때문에 궐녀는 궐자에게 홀리고, 궐자는 궐녀의‘정부’가 되었었다. ‘정부’가 된 궐자는 다른 사나이가 궐녀에게 주는 돈푼을 궐녀로부터 알알이 알겨내기로 일을 삼았었다. 그 돈으로 술을 먹고 궐자는 함부로 궐녀를 때리었다. 그러나 그것도 궐자가 현재 궐녀의 목전에서 다른 계집과‘노닥거리’지만 않았던들 아모렇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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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이람? 나도 남만 못하잖아.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분명히 나를 깔보는 수작이지. 망할 놈 같으니. 그저께 내가 마님(女主人)께 어데 잠깐 다녀오마 하고 그 놈한테 가지를 않았니. 가니깐 데이미카하고 술을 권커니 잣거니 먹고 있겠지. 나는 하도 분해서‘이 도적놈아!’고, 소리를 질렀더니만 그 놈이 우루룩 달겨들어 나를 죽어라고 때리겠지. 차고 쥐어박고 머리채를 휘잡아 끌겠지. 그나 그뿐인가. 내 몸에 지닌 것을 낱낱이 뒤죽박죽을 만들어서 ─ 그래 내가 요 꼴이야. 요 꼴을 하고 어찌 마님 앞에 나가느냐 말이야. 그 망할 놈이 모든 것을 못 쓰게 만들었어……옷이고 재킷이고……몇 번 입지도 않은 것이야. 남이 오류(五留)나 주고 산 것을 갖다가……. 그뿐만 아니지 머릿수건조차 찢어 버렸어……. 하느님!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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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녀는 문득 울 듯한 긴장한 소리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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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한 바람은 고함을 지르고 지동(地動)치듯 휘불었다……. 또 나의 이는 위로 아래로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궐녀도 치움을 못 이기는 것 같았다. 더욱 더욱 몸을 옹송그리며 나에게 달라붙었었다. 어두운 밤 빛을 통하여 궐녀의 안광이 나에게 보일 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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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사내놈들이란 모두 개 같은 놈들이야! 한 가마에 집어 넣고 푹푹 삶고 싶다. 갈기갈기 쥐어 찢고 싶다. 너희들 가운데 죽어가는 놈을 보면 춤 배앝고 돌아서지. 손톱만치라도 가엾다 생각하는가 보아. 육시를 할 깍쟁이 놈들! 입으로 살살 발라 맞추고 개같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지. 이쪽도 숙맥이라 너희들에게 몸을 맡기지. 그러면 이쪽은 고만 망하는 날이다 ─ 너희들은 고만 지근지근 이쪽을 밟으려 들지……. 에이 한심한 놈들!”
 
 
66
궐녀는 우리 사나이를 여지없이 타매(唾罵)하였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는 그 저주 가운데 아모 폭력도 없고 아모 악의도 없었다. 그 소위 ‘한심한 놈’에 대한 증오도 없었다. 그 어조는 조금도 그 어의와 일치되는 점이 없이 매우 온화도 하거니와 대체 그 성음의 전체가 몹시 약하였다.
 
67
그렇기는 하되 그 말은 나에게 어릴 적부터 오늘날까지 읽고 들은, 도도한 웅변으로 견고한 신념을 늘어놓은 염세적 서적과 연설보담 가일층 강렬한 감명을 주었다. 이것은 극히 미세하고 극히 정치한 죽음의 묘사보담도 죽어가는 사람의 고민의 소리가 더 자연스럽기도 더 격렬도 한 것과 같은 이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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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으로 한심(寒心)하다 싶었다. ─ 곁에 있는 사람의 애소(哀訴)도 애소(哀訴)려니와 제일 치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나는 가늘게 신음을 하며 치를 떨었다.
 
69
그 순간 나의 몸에 두 팔이 감겨 있는 것을 느끼었다. ─ 하나는 목에 하나는 얼굴 위에. 그러자마자 걱정스럽게 다정하고 친절한 소리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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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아퍼?”
 
71
나는 이 소리는 누구인지 딴 사람의 소리이고 그것이 금방 모든 사나이를 악한이라 선언하고 그 파멸을 축수한 나타샤라고는 암만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궐녀임이 어찌하랴. 궐녀는 다시 무슨 급한 일이나 생긴 듯이 말을 재게 하였다.
 
72
“어데가 아퍼! 치우냐? 사지가 얼어붙었니? 에그 야릇한 사람도 다 보겠네. 무슨 짝에 조그마한 올빼미(䲷)모양으로 잠자코 있었담! 치우면 치웁다고 하지를 않고. 자아……땅바닥이라도 허리를 뻗고 눕구려……. 나도 누울테야……자아 나를 꼭 껴안아요……. 단단히 틀어 안아요. 그러면 얼마 안되어 몸이 녹을 테니 몸이 녹거든 우리 등을 맞대고 자요.……곧 밤이 샐거야. 곧 새고 말고……너도 술을 먹었지?……있던 데에서 쫓기어 났지?…… 그까짓 것 아모렇거나 상관은 없지만.”
 
73
이렇게 궐녀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를 고무해 주었다.
 
74
나는 세 번 저주를 받아도 좋다! 이 단순한 사실 가운데 나에게는 이 어떤 아이러니(反語)의 세계가 숨어 있음이랴! 상상해 보라! 그 당시 나는 인간 운명의 귀추에 깊이 잠심하여 사회 조직의 개조를 생각하며 정치상의 혁명을 생각하며 아마 저자(著者)자신도 이루 측량해 알 수 없을 듯한, 못같이 깊고 악마같이 슬기로운 기다(幾多)의 명서(名書)를 독파하고 ─ 한 걸음 더 나아가‘유력한 사회의 힘’이 되려고 전력을 경주하고 있던 터이다. 그것은 고만 두고라도 나는 나로서 존재할 특권을 가졌다. 자기의 생활상 상당한 필연적 세력을 가졌다. 따라서 인류사회의 한 줌 위대한 역사적 지보(地步)를 점령하기에 넉넉한 권능을 가졌다. ─ 적어도 이만한 포부는 있었었다. 그러하거늘 시방 돈에 정조를 파는 여자가 제 살의 온미(溫味)로써 나를 뎁히고 있다. 인세(人世)에 아모런 지위도 없고 아모런 가치도 없는, 불쌍하고도 더러운 여자, 저편에서 나를 돕기까지에는 내편에서는 꿈에도 도우려고 않던 여자, 설령 도우려 하였을지라도, 나는 실상 어떻게 구할 것을 몰랐을 여자, 그 여자가 제 몸으로 나를 뎁히고 있다!
 
75
아아! 나는 이 모든 것이 꿈 가운데 ─ 불쾌하고 가위눌리는 꿈 가운데 일어난 일로 생각하고 싶었다.
 
76
그러나!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랴 생각할 수 없었다. 왜? 차가운 빗발이 나의 몸에 떨어짐을 어찌하리. 궐녀의 몸이 착 나에게 달라붙어 있음을 어찌하리. 그 따뜻한 입김이 나의 얼굴에 서림을 어찌하리. 그리고 그것이 ─ 조금 술내는 났지만 ─ 나의 마음을 어루만짐에 어찌하리. 바람은 호통 치며 비는 나리 질리며 파도는 미쳐 날뛰며 우리 둘은 서로 한데 동여맨 듯이 붙어 안고 있건만, 그래도 치워서 덜덜 떨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너무나 현실이었다. 누구를 물론하고, 이 현실같이, 이같이 압박적이고 무서운 꿈을 꾸지 못하였을 것을 나는 보증하여 주저치 않는다.
 
77
그런데 나타샤는 연해연방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자가 아니고는 흉내도 못 낼,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씨였다. 그 울림과 힘에 감동되어 내 가슴에 한 점 불이 반짝하고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그것으로 하여 내 심장 가운데 무엇이 녹아 나리는 듯하였다.
 
78
그러자 내 눈으로부터 눈물이 우박같이 쏟아졌었다. 그것이 나의 심장으로 부터, 그 날 밤까지 거기 붙어 있던 많은 나쁜 것, 많은 어리석은 것, 많은 슬픈 것, 많은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타샤는 나를 위로하기 를 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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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고만두어. 응. 걱정할 것은 없어. 고만두래도 그래. 사람이란 한 때가 다 있단다……될 날이 있을 거야……그럴 텐데. 실심(失心)할 것이 무엇이야?…….”
 
80
하고 궐녀는 연달아 잇달아 나를 키스하였다……궐녀는 헤일 수 없는 뜨거운 키스를 나에게 주었다……아모 것도 바라지 않고 아모 것도 구하지 않고…….
 
81
그것이 내가 여자로부터 얻은 최초의 키스이었고 또 가장 아름다운 키스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후의 키스는 모두 나로부터 혼나게 비싼 값을 빼앗았을 뿐이고 그 값으로 내가 얻은 것은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
 
82
“인제 고만 걱정을 말아요. 왜 사람이 이래! 있을 데가 없거든, 내 내일 하나 주선해 줄게.”
 
83
궐녀의 보드라운, 달래는 듯한 속살거림이 나의 귀에는 꿈속을 거쳐오는 듯이 울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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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기서 하롯밤을 밝히었다.
 
85
밤이 새자 배 안으로부터 기어 나온 우리는 시가지로 들어왔었다……거기서 우리는 서로 애틋한 작별을 하였었다. 그 후 반년 동안이나 나는 시방 이야기한 가을의 하롯밤을 같이 지낸 그 친절한 나타샤를 찾아 방방곡곡으로 헤매였건만 드디어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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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궐녀가 벌써 죽었거든 ─ 그랬으면 궐녀에겐 좋을 것이다 ─ 평화롭게 쉬어 주소서! 만일 살아있다고 할지라도……나는 또한 ‘그의 마음에 평화나 주시소서!’라고 빌련다. 그리고 궐녀의 영락(零落)의 의식이, 원컨대 그 마음에 침입치 말아 주소서……왜? 만일 인생이 살아야 될 것일진댄, 그런 것은 군것이고, 아모 쓸데없는 고통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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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1922.7.)
【원문】가을의 하롯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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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의 하롯밤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개벽(開闢) [출처]
 
  1922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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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7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