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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뇌의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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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6
이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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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뇌의 밤
 
 

1. 1

 
3
저녁상을 막 치우고 난 숙경(淑卿)의 집 안방에서는 어린 시동생 영희(永熙)와 숙경과 방 주인 되는 시어머니의 세 사람이 환하게 비치는 램프 불 아래 윗목으로 늘어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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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은 이와 같이 식구가 모여 앉았을 때에는 알 수 없이 기쁘고도 슬픈 듯한 맘이 그의 가슴에 가득하였다. 그는 어떠한 행복스러운 것을 느끼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불만과 섭섭한 것이 반드시 있었다. 걱정과 두려움이 그의 행복스러운 이 평화스러운 순간을 항상 위협하였었다. 그는 만일 자기의 남편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마음을 태웠다. 또 만일 자기 남편이 역시 이 자리에 자칫 앉았으면 어찌어찌하겠다는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상이 그의 시어머니의 살림에 대한 이야기와 시동생 영희의 학교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항상 그의 머리에 떠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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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짓문을 격(隔)한 윗목방에서는 하녀 복순(福順)이가 솜을 되우랴고 솜뭉치를 손에 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것을 바라본 영희는 무슨 재미스러운 일을 발견한 듯이“어머니 저것 좀 보시오.”하면서 소리를 쳐서 웃었다. 숙경과 그의 시어머니도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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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할 점에 “저녁 잡수셨소?” 하면서 미닫이를 열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그는 이웃집 노파였었다. 이 노파는 아들도 딸도 없는 고독한 신세였었다. 그러나 몸은 젊은이보다도 튼튼하므로 추석이나 설 때가 되면 각처로 돌아다니며 비단 장수를 하여서 아무 부족 없이 살림을 하였었다. 몇 십 년동안 이러한 생애를 하였으므로, 인근 지방에서 상당한 생활을 하는 집치고는 이 할멈을 모르는 집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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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동안을 단련하여 온 그의 교제 수단은 어떠한 집에를 가든지 의대(疑待)를 받았었다. 숙경은 친가에서도 그를 알았고, 이 시집에 와서도 축일(逐日) 상봉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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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파는 오늘 저녁에도 상투의 너스레를(어성)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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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분이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십니까? 나도 들어 관계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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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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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들어와서 윗목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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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와 숙경의 시어머니는 자리를 아랫목에로 권한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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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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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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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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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댁의 큰아드님처럼 점잔하고 얌전하신 이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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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환심을 산 뒤에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 이야기는 대개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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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파가 친히 다니는 인근 읍 어떤 집에서 그 집 둘째 아들을 열다섯 살때에 장가들였는데, 신부는 신랑보다도 두 살이나 손위가 되었다한다. 그런데 혼인한 지 일 년 뒤에 그 집 신랑 되는 둘째 아들은 일본으로 공부하러 갔었고, 일본에 들어간 지 삼 년까지에는 여름이나 겨울 방학에 나와서라도 내외간에 그렇게 정답지도 아니한 대신에, 그다지 불화하여 보이지도 아니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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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자기 아내의 무식한 것을 민망히 여기는 빛은 가끔 감출 수 없이 나타나 보였다 한다. 이와 같은 냉랭한 기운은 해가 갈수록 두 사람 사이에 더하였고, 필경에는 그가 동경에서 어떠한 여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서 서로 잊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소문이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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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학생은 방학 때에 집으로 오지 않고 일본 각지로 여행을 다니느니, 무엇을 하느니 하고 집에서는 학비만 보내었다 한다. 그럭저럭 칠판 년이 지난 뒤에 그 학생은 졸업하고, 집에 돌아온 뒤에도 집에는 며칠 있지도 않고 경성에 무슨 긴급한 일이 있다 하고, 자기 부모가 만류하는 것도 듣지 않고 집을 나가버렸다 한다. 집에 있을 동안에도 그의 처와는 한마디 말은 그만두고, 처가 앞에 어른대기만 하여도 이마를 찌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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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내 되는 이는 그 뒤로부터 음식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었다. 서울에 올라간 그의 남편은 서울에서 살림하게 되었으니 돈을 보내라고 하더니, 돈을 보내준 지 며칠 아니 되어 그 아내되는 이는 한 장 편지를 받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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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에는 “부부 사이에는 제일 무엇보다도 애정이 있어야 할 것. 그런데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애(愛)가 없으니, 피차에 연을 끊는 일이 두 사람에게 피차 행복이 될 것과 당초에 결혼한 것은 우리들의 부모네끼리 자기네들 의사대로 작정한 것이지, 우리 두 사람은 피차간에 우리 결혼한데 대하여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우리가 부부의 관계를 맺은 것은 누구보다도 우리 두 사람의 행복을 구함이오, 부모나 형제간의 행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들에게 불행한 결과를 오게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용감스럽게 행복의 길을 찾는 것이 인륜에 떳떳한 것이라.” 는 의미로 길고 길게 쓰여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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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를 받은 그는 기절하였고, 그 뒤에는 방문을 닫고 절식(節食)하여 자처(自處)하려 하였다. 그 가족들이 지성껏 위로하여 그는 그의 친정에 가서 날마다 눈물로 비참한 세월을 보내게 되고, 그 남편은 일본에서 정들어 나온 여자와 결혼식을 한 뒤에, 그 부부는 음악회니 극장이니 하고 함께 팔을 겯고 다니는 한편에서, 그 처 되는 이는 친정에서도 시집살이 못한 년이라고 구박을 받아 어떤 절에 가 승 노릇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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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는 여기까지 말을 한 뒤에 한숨을 휙 내어 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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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여봅시오. 꽃같이 젊은 나이에 그 모양을 당하고 승이 되라 갈 때에, 감태(甘苔) 같은 머리채에 가위가 들어갈 때에, 그 생각이 오직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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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치맛자락을 들어 눈물을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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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의 시어머니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영희는 이러한 이야기에는 자기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참…….”하고, 세 사람은 동정에 잠긴 얼굴을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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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은 그 노파의 이야기에 남을 동정하고 슬퍼한다는 것보다도, 어떠한 공포와 불안의 생각이 가슴을 찔렀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알 수 없다…….’생각이 이에 이를 때에 몸이 으쓱 떨리었었다. 이 노파가 나의 일을 점쳐줌이 아닌가 하였다. 노파는 일본에만 가면 아내 소박을 하는 것처럼 말하며, 숙경의 남편의 진실하고 인정스러운 것을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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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의 시어머니는 숙경 너는 걱정 말라는 것처럼 수심과 불안과 공포에 쌓인 숙경의 얼굴에 자애에 타오르는 눈으로 위로를 주며,
 
30
“사람마다 그러하겠냐. 가속(家屬)이 저 하기에 있고, 금슬 있고 없는데에 달렸지.”
 
31
숙경 너는 걱정 말라 하는 듯이 말하였었다.
 
32
밤이 깊은 뒤에 노파는 돌아가고, 숙경도 평일보다 일찍 그의 방으로 왔었다.
 
 
 

2. 2

 
34
숙경은 자기 방에 들어왔었다. 방 안에는 쓸쓸한 기운이 가득하였다. 침구를 펴고 그 위에 피곤한 몸을 힘없이 던졌다. 침구의 찬 기운이 몸에 선득선득 스며들어 올 때마다, 그는 몸을 조금씩 떨었었다. 절로 떨리었었다. 그는 머리에 미통(微痛)을 감(感)하였고, 사지를 움직이기에도 힘이 없었다 그의 머리에는 노파의 . 하는 말이 오히려 남아 있었다. 따라서 자기의 남편이 근일 어떻게 있는가를 염려하였다. 근일에는 편지가 자주 오지 않는 것이 혹 무슨 까닭이 있나? 아까 노파가 말한 바와 같은 그러한 연고나 없나 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 내가 나의 맘도 알 수 없다.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참으로 그것이 아닌가?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천지의 자연(自然)한 힘이 이것을 나에게 통지함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 하면……. 그는 다시 몸이 떨리었다. 나의 남편처럼 남에게 칭찬 받는 이가 그러할 리가 있나. 이러한 의심을 두는 자신이 불충실함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꾸짖었으나, 이것은 자기의 양심을 속이는 거짓말같이 곧 없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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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힘없는 눈으로 천정만 쳐다보았다. 천정을 바른 그을린 반자지(斑子紙)의 그린 붉은 목단화(牧丹花) 숭어리와 갓 넝쿨 사이에 자기의 남편과 머리도 이상하게 틀어 쪽진 여자가 무엇이라 속살거리며 그를 비웃는 것이 환영으로 보이는 듯하였다. 숙경은‘내가 왜 이러한 생각을 하노’ 할 때에는 그것이 사라지고, 붉은 목단화 송이만을 희미하게 보이었었다. 그는 몸을 이리로 뒤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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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불안하였다. 다시 몸을 돌렸었다. 머리가 휭휭 내둘리었다. 내둘리는 머리를 들어 천정을 쳐다보았다. 보기 싫게 검붉은 목단화 송이 그림이 흩어져 있을 따름이었었다. 창 위에 숙경의 남편이 동경에서 여러 학우들과 함께 박은 기념사진이 걸리었었다. 숙경의 시선이 거기에 머무를 때, 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었다. 숙경의 시선이 등불을 돋우고 그 사진을 굽어볼 때에, 언제든지 조금 느끼던 질투의 맘이 전신에 불꽃처럼 일어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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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노파가 말하던 여자들도 이러한 여자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다……. 여자가 남자와 사진을 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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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놓으면서 그의 남편이 이 사진을 보내며 한 편지의 말을 그는 생각하였다. 새 여자들을 남자와 다름없이 모든 일을 하며 교제한다고 자기를 비웃는 듯한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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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 그의 남편과 좋아하는 이가 없는지 누가 보장하랴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아! 있으면…….’ 그는 사진을 던지고 아랫목에 다시 그 쓸쓸한 잠자리에로 들어갔었다. 노파의 한 말이 의연히 귀에 들리어온다. 서로 애정이 없으니까…… 부모끼리 자기 맘대로……. 애정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남자들이 요구하는 애정이 어떠한 것인지 과연 알 수 없고, 자기가 지금 그의 남편을 생각함에 어떻게 하여야 애정이 있다 할까. 어떻게 더 극진히 생각하여야 애정이 샘물 솟듯 할는지 알 수 없었다. 부모끼리 자기들 의사대로 이것은 , 나의 형편도 노파가 말하던 그 불쌍한 여자와 빈틈이 없이 맞는다.
 
40
‘나도 나중에는…….’ 이렇게 생각을 태울 때에는, 숙경은 가슴에서 무엇이 내려앉고 몹시 두근거리며 숨이 가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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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생각이 필경 극단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는 노파가 말한 그 불쌍한 여자와 같은 경우를 당한다면 자신은 어찌할까? 나도 그렇게 무정한 버림을 받을 때에는 어이할까? 숙경은 속으로 힘 있게 부르짖었다. 그때에는 두말할 것 없이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밤에 가만히 나가서 우물에나 바다에 이 몸을 던지면 그만이다. 그러면 저희들은 시원하다 하겠지. 친정의 부모, 시어머니, 영희는 그의 시체를 붙들고 슬퍼하겠지. 숙경은 느끼어 울음이 나왔다. 친정 부모들은 이러한 참혹한 일을 당하는 것은 모두 자기들의 허물이라 하겠지. 여자라고 교육을 시키지 않은 까닭이라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용서해라, 내가 잘못하였다 하겠지. 그러나 이것이 죽은 뒤에 그만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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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명상에 잠긴 숙경은 자기의 생각이 너무 무서운 것을 문득 깨달았었다. 그러면 그 사람처럼 친정으로, 또 중이 되어, 역시 죽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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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의 머리는 생각이 깊어갈수록 산란하고 아팠다. 이런 생각은 그대로 두려 하였었으나, 그러할 리가 없다고 억제하였었으나, 그것은 거짓말 같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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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여러 가지의 생각이란 생각은 모다 숙경을 괴롭게 하고, 마음을 태우게 하는 것이 아니면 공포, 불안, 비애뿐이었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피로가 전신에 퍼져서 눈감고 생각하던 그 모양 그대로 잠이 들었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감각만 무디어졌을 뿐이오, 그는 몽몽(濛濛한 운무(雲霧) 중에서 방황하는 것처럼 모든 불안한 의식이 막연히 활동하였었다.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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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경은 창살 사이로 새어드는 희미한 빛에 연기에 그을고 더러워진 실내를 개개풀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는 머릿속에 무수란 연철(鉛鐵)의 탄편(彈片)을 담고 잡아 흔드는 것 같은 무거움과 아픔을 느꼈다. 힘없는 두 팔을 들어 좌우 이마를 눌러보았으나, 역시 무겁고 아플 따름이었었다. 그는 머리를 손으로 누른 채로 간밤에 생각하던 생각을 다시 하였다.
 
47
아침 해는 벌써 앞산을 넘고 처마 안으로 길게 들어와 창살 두어 개의 그림자는 밝게 비추는 종이 위에 검게 인(印)쳐 있고, 온 방 안은 화안하게 밝았었다.
 
48
“학교 시간 늦어간다.”
 
49
하녀를 단속하는 그의 시어머니 소리에 숙경은 무거운 머리를 들고 일어났었다.
 
50
‘어머님께서 노하셨다…….’하는 의심과 두려운 생각을 하며, 흐트러진 머리를 홉뜨리고 침구를 친 뒤에, 솜과 같이 풀어진 피곤한 몸을 움직이어 마루로 나왔었다.
 
51
그가 마루에 나설 즈음에 대문으로 뛰어 들어오며, 그의 얼굴을 유심하게 바라보는 영희를 보았었다. 항상 활발하고, 인정 있고, 부지런하고, 자기의 남편을 축소시킨 것처럼 꼭 닮은 무사기(無邪氣)한 그의 어린 시동생을 보면, 언제든지 귀여운 생각이 났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 천진이 듣는 듯한 얼굴을 보는 순간에, 모든 우려에서 벗어난 것같이 기쁜 때에 웃는 벙그레한 얼굴로 보았었다.
 
52
영희는 고개를 한편으로 갸웃하게 기울이고 쳐다보며,
 
53
“아주머니도 늦잠 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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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그레 웃으며 그 곁으로 와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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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 어디 불편하오”
 
56
이상히 여기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57
숙경은 이렇게 인사하는 그의 시동생에게 무량한 감사를 느꼈다. 그의 하룻밤의 번뇌가 어린 시동생에게 발견된 것을 생각할 때에 얼굴이 문득 붉어졌다. 영희는 아침 재촉을 두어 번 하더니, 다시 대문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높고 가는 울리는 소리로“바람서리 거친 재 담 그늘에 핀 국화야. 너의 향기 흩어지고 너의 잎사귀 시들 날 오늘인가 내일인가.” 창가 하며 나아갔었다.
 
58
숙경은 영희의 그림자가 대문에서 사라지도록 그곳을 바라보았다. 숙경의 세계는 다시 적막하였다. 영희의 붉은 창가의 구절구절이 숙경을 더욱 슬프게 하였다. 무슨 암시를 받은 듯이 슬픔과 불안이 한 덩어리로 그의 진정하여가는 머리를 다시 산란하게 하였다. 은 쟁반 같은 아침 해가 앞산 두어 길 위에 올라와 윤습(潤濕)한 천지에 명랑한 빛을 폭포처럼 떨어뜨리고 있었다. 정하게 쓸어놓은 앞뜰에 동편 담의 포플러나무의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었다. 아침 바람에 날리어 이리로 저리로 다니는 낙엽이 힘 있게 내려 쏘는 아침 광선을 받아서 그 찬 이슬에 젖은 부분만 반짝반짝 빛이 나며,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었다.
 
59
숙경은 부엌으로 내려갔다.
 
 
 

4. 4

 
61
영희도 시간 안에 학교에 가고, 다른 식구들도 아침을 마친 뒤라 집안이 고요하여졌었다.
 
62
숙경은 따뜻한 가을 광선이 내려 쪼이는 앞마루에 바느질 그릇과 옷감을 들고 나아가 앉았었다. 바늘을 나르기에도 힘이 없었다. 그는 자기의 맘이 남모르게 괴로움을 더욱 괴로워하였다.
 
63
옅은 연대(鳶黛) 색으로 물들인 듯한 창궁(蒼穹)에서 아무 거침 없이 내려오는 가을볕에 전신이 따뜻하여지다가 뒤 숲을 거치어 낙엽의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일으키고 불어오는 바람결에 다시 싸늘하여지고 말았다. 앞뜰의 새 쫓는“우 ─ 우어…….”하는 부르짖는 날카로운 소리가 가을 늦은 아침의 고요한 공기를 무수히 흔들어 그 침묵을 깨뜨리었었다.
 
64
숙경은 바늘을 들고 기력 없는 눈으로 앞산을 바라보다가 그의 시어머니의 부르는 소리에 바늘을 놓고, 시어머니 방으로 들어갔었다.
 
65
그의 시어머니는 이야기책을 두 쪽에 접어 한편 손에 들고 아랫목에 누웠다가 한 손으로 쓰고 있던 뿔테 돋보기안경을 이마로 올리면서,
 
66
“이아! 일본에서 아무 소식도 없으니, 무슨 탈이나 없는지 갑갑하구나! 편지나 해보려무나!”
 
67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였다.
 
68
숙경은 그대로 자기 방에 들어가서 연상(硯床)을 내려놓았다. 언문간독(諺文簡牘)에서 몇 번이나 보고 외다시피 한 예투(例套)의 말로 오륙 행끼적거리고 보니, 다시 무엇이라 할 말도 별로 없었다. 그 서투른 글씨와 비뚤비뚤한 글줄을 볼 때마다 그의 눈에도 불쾌하였었다. 그대로 보낼 수는 과연 없었다. 전일보다도 더욱 고민하는 것을 그는 스스로 우습게 생각하면서도, 몇 번이나 썼던 편지를 두 손바닥으로 뭉치어버리고 다시 쓰기를 시작하였었다. 그는 사오 차나 정서(正書)한 뒤에 겨우 국문 편지 한 장을 써놓았으나, 봉투는 자기의 시동생 영희의 어린 손을 빌게 되었었다. 그래서 영희를 기다렸었다.
 
69
숙경은 그의 남편이 그 무식함을 조소할 때마다“아무리 여자라도 편지나 한 장 쓰고 신문이나 볼 줄 알아야지, 다른 여자들은 국사(國事)를 하느니 사회를 위하는 이때에, 저런 위인은 무엇을 하노!” 잊을 수 없다. 이러한 기억이 한편 구석에 있는가 , 이러한 경우에는 반드시 일어났었다. 이와 같은 기억날 때에는 무식한 자신보다도, 무식하게 만들어놓은 친정 부모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 주의에 있는 모든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70
숙경은 자기의 정력을 다하여 쓴 이 편지가 자기의 맘의 만의 하나라도 자기의 맘을 말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며, 자신의 무식한 것이 남편에 대한 한 죄악같이 생각하여진다. 따라서 이 편지가 자기 남편의 어떠한 불유쾌한 생각을 일으킬는지 알 수 없다는 염려가 다만 두어 마디 안부 인사로 끝을 막게 한 것이다. 숙경은 다시 머리에 미통을 감하였고, 몸이 으쓱으쓱하였었다.
 
 
71
그 편지를 부치고, 그 뒤에 숙경은 매일 괴로운 생각을 하였었다. 며칠 뒤에 숙경의 편지를 보기 전에 그의 남편의 편지가 왔었다. 전에 없던 위로하여주고, 집에서도 공부하라는 정다운 글이었었다. 숙경은 적이 안심하였었으나, 때때 불안과 비애가 그의 가슴을 침노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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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닫기 없음 ;\ib+' 《학지광》, 1921년 6월
【원문】번뇌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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