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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上古文化史 (조선상고문화사) ◈
◇ 第四編 辰韓의 全盛과 對外戰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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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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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編 辰韓의 全盛과 對外戰爭
 
 

1. 第一章 辰韓의 勃興과 朝鮮支那 兩族의 大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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萊라 奄이라 淮라 徐라 하는 나라들의 支那(중국)와 對한 戰爭이 비록 朝鮮民族이 外族과 싸운 싸움이나, 이는 다만 海外植民의 일이라 本國에서는 모르며, 本國이 모를 뿐 아니라 萊와 奄이 姬發(희발)과 싸울 때는 徐와 淮가 모르며, 徐와 淮가 姬蘇(희소)와 싸울 때는 萊와 奄이 몰라, 매양 朝鮮民族 一部分의 支那(중국)에 對한 싸움이 되고 朝鮮民族 全體를 支那(중국)에 對한 싸움이 아니러니,이윽고 檀君 一千七百年 頃에 朝鮮에는 辰韓이 盟主가 되어 朝鮮의 諸王을 거느리며, 支那(중국)에는 齊가 盟主가 되어 支那(중국)의 諸侯를 거느리고, 兩族 便의 聯合軍이 燕京에서 만나 民族的 大戰爭을 開始하였나니, 이는 讀史者의 큰 趣味를 가질 만한 歷史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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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戰爭이 난 原因을 찾으면, (一) 箕子(기자) 武王 以後의 兩族의 宗敎가 갈라지며, (二) 萊周·奄周·徐周 三戰爭 以來로 兩族의 仇怨이 더 깊었나니, 以上의 兩因은 이 戰爭의 遠因이요, (三) 朝鮮은 阿斯達 王朝부터 統一이 깨어져 列國이 分爭하므로, 海外植民의 諸國들이 비록 어떠한 苦痛을 他族에게서 만나든지 이를 援救할 겨를이 없다가, 이윽고 辰韓 辰王이 나서 그 武力으로써 朝鮮 列國을 駕御하매, 이에 海外를 經營할 野心도 있고 能力도 있으며, 支那(중국)는 또 周穆王의 뒤로부터 周室이 微弱하여 諸侯가 命令을 服從하지 아니하더니, 이윽고 齊桓公이 나서 賢相 管仲(관중)을 얻어 齊를 富强케 하고 支那(중국) 北部의 盟主가 되매, 이에 辰韓의 勢力을 막아 支那(중국)로써 完全한 支那(중국)族의 차지로 삼으려는 目的을 가졌나니, 이와 같이 辰韓과 齊의 勃興은 곧 이 戰爭의 近因이라. 遠因 二와 近因 一이 合하매 兩族 사이에 戰爭은 避치 못할 事件이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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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韓 辰王의 歷史는 『三韓古記』의 없어짐을 따라 다시 人間에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三國·南北國 時代에 辰王의 遺烈을 欽慕하는 帝國들이 辰王의 徽號(「三韓傳」에 馬韓人 自立爲辰王 辰韓十二國 屬辰王 箕準滅後 馬韓人 復爲辰王 이라 함과 『渤海史』에 大祚榮 爲震國王 이라한 類)가 지기를 좋아하여 거의 檀君의 稱號[『三國遺事』에 解慕漱(해모수)·高朱蒙(고주몽)·解夫婁(해부루)가 檀君 或 檀君子라 한 類]와 같은 尊稱을 하였는데, 檀君은 대게 文化와 仁德을 힘쓰는 이가 檀君神祖, 곧 王儉氏를 仰慕하는 者가 가진 이름이며, 辰王은 곧 三韓 雄主 辰韓 辰王을 追述하는 者가 가진 이름이니라. 辰王에 對한 崇拜가 이러하였거늘, 後世 國民들이 그 이름도 아는 이 없으니 어찌 아깝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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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孤竹·太行 兩 大戰의 事實이 『管子』와 또 다른 支那(중국) 各 古書에 적히었는데, 그 戰爭의 主動者를 찾건대 一은 秦夏요 一은 齊니, 齊는 곧 支那(중국)의 盟主인 齊桓公이요, 秦夏는 곧 朝鮮 盟主인 辰韓이니, 支那(중국)史의 辰韓은 秦朝(「三韓傳」에 가로되 辰韓亦謂秦韓)이라고 하며, 秦夏라 함은 音譯의 訛傳이요, 玄帝는 곧 辰韓 辰王에게 올린 尊號라. 辰韓의 北部가 그 이름이 玄部 或 玄菟니, 玄菟는 今 秦天·興京 等地요, 當時 辰韓의 서울인 고로 玄帝라 함이며, 山戎은 곧 辰韓과 辰韓의 同盟國 孤竹·東屠·令支·扶餘 等이니, 戎이라 함은 꼭 後世와 같이 醜惡한 名詞가 아니라. 고로 古代에 大將을 元戎이라 하며, 또 一種 賤侮하는 뜻으로 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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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辰韓 辰王이 檀君朝가 扶餘로 옮긴 뒤를 이어 一時에 武功으로 朝鮮 列國을 合하여 그 同盟을 만들고, 檀君 一千六百二十八年에 燕을 降伏 받고 南으로 나아가 齊를 치니 (「齊世家」에 山戎伐齊 齊釐公 戰于齊郊라 함), 齊가 드디어 辰王에게 굽혀 歲貢을 받치고 玄帝의 尊號를 올리매, 이에 辰韓의 勢力이 支那(중국)를 덮어 周·魯·衛·曹·宋·許 等 列國이 다 齊의 뒤를 따라 上國으로 높이니, 이는 辰韓의 가장 全盛時代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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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竹·太行의 兩大 戰爭은 檀君 一千六百七十一年이니, 辰王이 齊를 친 지 四十四年 뒤니라. 辰王이 이때까지 生存하였다 하기 어려운즉, 이 戰爭의 主人은 辰王 一世가 아니라 곧 그 子 若孫(약손) 辰王 二世나 或 三世가 될 지로다. 이 戰爭 나기 前에 齊桓公이 管仲(관중)으로써 國相을 삼아 齊를 富强케 하고, 支那(중국) 諸侯와 同盟하여 辰韓의 勢力을 쫓으려 할 새, 管仲(관중)이 깊이 支那(중국)의 文物이 朝鮮 列國에 미치지 못하여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이에 文皮를 平壤(「管子」에 發朝鮮之文皮라 함)에서 사서 戎衣를 지으며, 鐵器를 夫餘에서 사서 兵仗을 만들며, 五部五軍의 法制를 본받아 閭·里·鄕·井·軍·伍·師·族 等을 改良하여, 또 朝鮮과 같이 徵兵制를 써서 農民도 다 農隙에 戰藝를 익히고 번갈아 邊境으로 수자리 보내니, 이에 齊의 强함이 支那(중국) 列國의 으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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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히려 辰韓의 威를 꺼려 그 同族인 支那(중국) 諸侯와 모여 盟約할 때에, 그 盟書의 第一條에 반드시 玄帝의 命令이 아니면 우리가 서로 싸우지 못한다 하여 辰王을 삼가 섬기매, 辰王도 齊를 忠實한 屬國으로 보더니, 이윽고 齊桓公이 凶計를 써서 萊國을 滅하매, 辰王이 크게 怒하여 곧 군사를 들어 支那(중국)를 치니, 이에 兩族의 種族的 大戰爭 곧 孤竹·太行 兩大戰이 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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萊國은 비록 小國이나 또한 齊의 先祖 姜太公(강태공)과 싸워 물리치던 자라. 고로 齊의 君臣이 매양 萊를 큰 仇讐로 보나 어찌 하지 못하다가, 齊桓公이 이미 政治를 改良하고 支那(중국) 諸侯를 모와, 겉으로는 平和를 宣布하나 밖으로 곧 朝鮮列國의 勢力을 支那(중국) 안에서 물리치자는 秘密同盟을 맺은지라. 管仲(관중)에게 그 攻戰의 次序를 물은대 管仲(관중)이 꾀를 드리되, "萊가 가장 齊의 걱정거리니 萊를 먼저 침이 可하나, 萊人은 勇敢하고 萊王은 暗昏하니, 힘으로 이기기는 어렵고 꾀로 亡치기는 쉽다"하고, 이에 齊의 黃金을 내어 萊의 곡식과 나무를 사니, 萊의 末王이 이 꾀를 깨닫지 못하고 가로되, "黃金은 나라의 보배거늘 齊의 君臣이 이와 같이 허비 쓰는도다" 하고 百姓을 모아 山에서 나무를 베이고 倉庫에서 곡식을 내어 齊로 보내 팔더니, 얼마 아니 되어 萊人이 먹을 곡식과 땔 나무가 다하고 오직 黃金만 집집에 가득하더라. 萊가 다시 齊에 向하여 나무와 곡식을 사려한즉, 齊는 바다(海)나 뭍(陸)에 對한 輸出을 모두 禁止하여 萊人이 크게 困難하거늘, 齊가 이에 군사를 들어 萊를 쳐서 滅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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萊가 滅하매, 辰韓이 이에 齊의 野心이 곧 全朝鮮 民族을 支那(중국) 안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줄을 알고, 이에 朝鮮 列國을 聯合하여 齊를 치려할 새, 한편은 屠何(도하, 人名)로 하여금 東屠(鮮卑)·孤竹·令支·無終 等 國의 군사를 거느리고 孤竹을 지나 燕을 치고, 한편은 早離(官名)로 하여금 山西 等地에 있는 赤·白·句注·代 等 國의 군사를 거느리고 太行山을 넘어 晋을 치니, 燕과 晋이 危急하여 齊의 구원을 請한데, 齊桓公은 曹·衛·宋·許 等 列國의 군사를 合하여 燕과 晋을 구원할 새, 군사를 나누면 辰韓보다 적다 하여 곧 第一步에 晋을 救援하고, 그 군사를 돌리어 다시 燕을 구원하기로 戰略을 定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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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管子』에는 「北至孤竹 拘秦夏』라 하고 國語에는 「至太行卑耳之谿 拘夏」라 한 바, 韋昭의 『國語註』에 拘夏는 地名이라 하니 이는 註釋의 틀림이라. 拘夏의 夏字 上에 「秦」字가 脫落됨이니 秦夏는 辰韓이라. 辰韓이 兩路로 군사를 내어 一은 太行으로 나아가고 一은 孤竹으로 나온 고로, 齊桓公이 먼저 太行山 南의 辰韓과 싸우고 다음에 孤竹에 가서 辰韓과 싸움이니, 拘는 拘捕의 義이요, 防禦의 義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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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戰爭의 結果에 그 勝敗가 어느 편에 있음은 分明치 못하니, 『史記』에나 『管子』에나 모두 辰韓이 敗한 줄로 말하였으니, 齊桓公의 싸운 터가 겨우 太行山과 孤竹에 그쳤은즉, 그가 이겼다 假定할지라도 그리 시원하게 이기지 못함이요. 劉向(유향) 『說苑』에는 "桓公이 孤竹을 치고 遼河를 지났다" 하니, 이는 後世의 稗說이라 確實히 믿을 수 없을뿐더러, 또 桓公의 자취가 遼河에까지 나왔으면 『管子』에 얼마만큼 자랑하였을 지어늘, 이제 『管子』에는 遼河란 이름이 없으며, 또 齊桓公이 遼河를 건넜다 할지라도 後來 燕國 盛時에 孤竹을 차지하고, 遼河의 東西를 갈라 西는 遼西라 하고 東은 遼東이라 하였은즉, 그 때의 遼河는 곧 灤河요, 今日에 遼河가 아니니, 今日에 遼河는 桓公이 꿈도 못 꾼 땅이니, 『說苑』의 記錄으로써 桓公이 全勝하여 遼河까지 건넌 줄로 알면 큰 誤失이라. 이제 우리도 이 戰爭의 經過를 말하자면 辰·齊 兩國이 다 疲困하여 드디어 戰爭을 그친 고로, 辰韓도 燕을 지나서 齊를 깨치지 못하며, 齊도 赤·白·句注·孤竹 等 國을 滅하지 못함이라. 그러나 孔丘(공구)와 司馬遷(사마천)이 다 管仲(관중)의 功을 자랑하여, 管仲(관중)이 아니라면 中國이 中國되지 못할 줄로 알았으니, 대개 이 戰爭 以後에 辰韓이 玄帝의 尊號를 버리며 歲貢을 廢하여 支那(중국)가 支那(중국)가 되게 함은 事實이 될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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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하든지 이 戰爭은 種族的 大戰爭이라. 兩民族의 거의 全體가 서로 편을 갈라 싸움이니, 後世의 百濟가 拓拔氏와 싸운 일이며, 高句麗가 隋煬과 싸운 일에 比하여도 더욱 大規模의 戰爭이로다. 그러나 우리의 後人이 辰王을 아는 이가 몇몇인가? 『釋史』로 보면 徐偃王의 子孫들도 齊桓公과 싸웠는데 알지 못하는 것이리라. 이것이 辰韓의 同盟이 되어 齊와 싸움인가, 辰韓과는 關係가 없이 오직 單獨的으로 齊와 싸움인가, 그 事實을 밝게 알 수 없으므로 辰·齊 戰爭 속에 徐를 같이 쓰지 못하노라.
 
 

2. 第二章 箕朝의 勃興과 辰卞의 聯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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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기자)가 檀君의 「遺經」을 받으며 周文王의 六十四卦에 對한 支那(중국)의 老師宿德으로 朝鮮에 들어온 고로, 平壤의 땅을 받아 列國의 諸侯로 드디어 子孫의 世襲을 許諾하더니, 이윽고 檀君 一千六七百年 頃에 辰韓이 朝鮮의 盟主가 되어 支那(중국)와 開戰하여 서로 지지 아니하는 판에, 箕(기자)氏는 홀로 百姓을 勸勉하여 農業을 힘쓰며 바다를 건너 齊와 通商하고, 또 法令을 簡易하게 하여 八條의 敎를 닦아 境內의 安富를 圖謀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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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條는 後世 史家들이 곧 箕子(기자)가 끼친 것이라 하나, 이는 箕子(기자) 千數百年 뒤에 漢人 班固(반고)가 箕朝의 傳한 바, 法令을 보고 箕子(기자)가 定한 것인 줄로 推測하여 斷定한 것이니, 그 明證이 될 수 없는 배다. 八條는 箕子(기자)가 講述한 그 洪範 三 八政 가운데 司寇의 職任인즉, 八條가 곧 檀君의 遺法을 쫓은 것이며, 「檀君古記」에 말한 바 三百六十餘事에 刑이 條一事인즉, 八條는 곧 三百六十餘事 가운데 一事 곧 刑의 條目이니, 箕子(기자)가 어찌 自己 信仰하던 宗國에서 나와 따로 倫理·刑法 等을 마련하였으리오. 다만 奇異하다 할 것은 箕朝가 末年까지 그 條文을 지켜 도무지 加減添削이 없었도다. 그 原因은 (一) 神權時代에 先祖의 法令을 神이 定한 것 같이 아는 까닭이며, (二) 上古 淳朴한 時代는 政治가 簡單한 까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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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朝가 이와 같이 簡單한 政治로 百姓을 다스리며 重商主義로 兩家의 政策을 삼아 무릇 數百年을 지내매, 四方의 列國들은 모두 戰爭에 시달리어 古代의 繁榮을 잃고 百姓들을 干戈을 싫어하여 箕朝로 돌아오는 者 많았다. 이윽고 檀君 一千九百餘年 頃에 三十五世 王이 나서 先代의 蓄績과 全國의 富饒를 가지고 小國의 位置에 있기를 부끄러이 여겨, 드디어 辰卞의 郡縣을 음습하여 차지하고 西로 나아가 鮮卑를 征服하고 孤竹을 滅하니, 이에 箕朝의 땅이 매우 넓어 南으로 漢江에 限하고, 北으로는 扶餘(阿斯達 王朝)王朝와 接하고, 西로 燕과 接하고, 東은 辰韓의 南部 山脈 곧 單單大嶺으로 限하여 强國이 되니, 辰韓·卞韓은 箕朝를 막기 爲하여 兩國이 聯合하여 드디어 辰卞이라 이름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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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那(중국)史에는 辰韓·卞韓을 眞番이라 하니 이는 音譯의 틀림이요, 箕朝 朝鮮이라 하니 이는 國別의 틀림이라. 辰卞·辰番의 辦正은 이미 第十四節에 보이고 朝鮮·肅愼의 辦正은 이미 第二節에 보인 바거니와, 箕朝는 다만 朝鮮의 西南部 곧 檀君의 良都로 後來에 樂浪이라 일컬은 자인즉 箕朝의 稱號는 다만 樂浪이니, 어찌 또 朝鮮이란 이름을 가졌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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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된 原因을 硏究하건대, 대개 朝鮮은 檀君 舊疆의 總稱인 고로 이 舊疆 안에 建設한 列國들이 모두 그 國名 아래에 매양 朝鮮 二字를 붙여, 辰卞은 辰卞朝鮮이라 하며(『史記』에 侵略眞番朝鮮이라 한 類), 樂浪은 樂浪朝鮮이라 하며(『漢書』에 樂浪朝鮮民犯禁八條라 한 類), 濊는 漢人 班固(반고)가 箕朝의 傳한 바 法令을 보고, 箕子(기자)가 定한 것인 줄로 推測하여 濊朝鮮이라 하며(『史記』에 穿濊貊朝鮮이라 한 類), 이밖에 馬韓·沃沮 等도 다 同一하게 馬韓朝鮮·沃沮朝鮮이라 하였을지나 오직 史冊에 쓰이지만 못함이니, 朝鮮 二字가 나라의 普通 稱號됨이 마치 東扶餘·北扶餘·卒本扶餘·泗沘 等 扶餘 二字가 서울의 普通 稱號됨과 같음이거늘, 後人이 이를 모르고 부질없이 分別하여 穢朝鮮이라 하면 穢와 朝鮮의 두 나라로 보며, 樂浪朝鮮이라 하면 樂浪과 朝鮮의 두 땅으로 보아 그 誤解가 朝鮮·肅愼을 딴 民族의 딴 나라로 봄과 같도다. 朝鮮史 硏究의 因難이 이것도 한 原因이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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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朝의 平壤에 對하여, 或은 廣寧縣을 平壤이라, 或은 海城縣을 平壤이라, 或은 蓋平縣을 平壤이라, 或은 鳳凰城을 平壤이라, 或은 今 平壤이라 하는 論辯이 紛紛하나, 實은 箕朝도 檀君朝 같이 三京을 두고 三京의 이름을 다 平壤이라 함이니, 대개 海城 或 廣寧縣 等地가 한 서울이 되어 北平壤이라 하며, 鳳凰城 等地가 한 서울이 되어 中平壤이라 하며, 今 平壤이 한 서울이 되어 南平壤이라 함이오. 그 中間에 혹 移都한 때가 있음이며, 漢城이 南平壤 되고 今 平壤이 中平壤됨은 高句麗 三京 때의 이름이요, 箕朝의 일이 아니니라. 箕朝의 첫 서울은 廣寧縣 곧 北平壤이요, 中·南 平壤을 차지함은 後世王이 卞韓을 쳐 빼앗은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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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壤의 古音은 「라」니, 訓民正音에 야(야와 같지 않으니, 곧 로 읽음)를 穰의 初發聲이라 하였은즉, 壤은 穰과 同音이니, 壤의 古音이 「라」가 되는 一證이요, 『三國史記』에 國川一作國讓이라 하여 國川의 川을 音譯하여 壤이 되었은즉 壤의 古音이 「」되는 證이 二이요, 『三國遺事』에 西京은 古代의 弁那라 하였는데 那·婁·良·羅는 古音에 다 「」라, 順那와 涓那가 順婁·涓婁되며 加瑟羅가 加瑟良된 類이니, 弁那의 那로 보아도 壤이 「」되는 證이요, 平壤笠을 「페라이」라 하니, 「라」는 「」의 홑소리니, 古今語音이 變遷하여 이러한 異同이 있음이나, 또한 壤이 「」되는 證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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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壤은 처음에 卞韓의 서울이라, 고로 金敬叔(김경숙) 『周官六翼』에 樂浪弁韓이라 하니 樂浪은 곧 平壤의 別名이며, 『說文』에 樂浪潘國이라 하니 潘國은 곧 卞國이며, 『漢書 地理志』에 遼東番汗縣이 있는데, 乾隆帝가 番汗을 弁韓의 訛傳이라 하니, 諸說을 合하여 보면 弁韓은 原來 遼東의 나라요 平壤은 곧 弁韓의 서울이라, 一 平壤 뿐이요, 二或 三 平壤이 아니러니, 이윽고 箕朝 盛時에 弁韓의 서울 곧 平壤을 쳐 빼앗고, 드디어 三京을 둘 새, 三京의 이름을 다 平壤이라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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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壤을 빼앗긴 뒤의 弁韓은 自立할 수가 없으므로, 드디어 辰韓에게 援助를 請하며, 辰韓도 이때에 勢力이 꺾여 箕朝를 막을 수 없으므로, 또한 辨韓을 꿇고자 하매 이에 辰·弁 聯合國이 되어 箕朝와 對하며, 後來에 南方에 播遷하여서도 서로 一族이 되어 或 辰弁이라 일컬으며(「甄萱傳」에 辰弁從之而興), 或 弁辰이라 일컬음이라(「三國傳」에 弁辰十二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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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朝가 비록 對外競爭은 辰王에 미치지 못하나, 그 城內에 活動은 또한 죽지 아니하였다. 孤竹을 滅함에서 當時 箕朝의 强盛함을 볼지며 雄略을 우러를 만하나, 그러나 孤竹은 數千年의 名國이라. 檀君 때부터 朝鮮의 西藩이 되어 支那(중국)를 막으며, 中間에 伯夷(백이)·叔齊(숙제)같은 聖人의 淸風直節이 萬古에 들리며, 末葉에는 辰王을 높이어 支那(중국) 列國을 치며 齊桓公을 막아 本族의 長城이 되어 모든 功德을 가진 나라가 一朝에 무너졌도다. 孤竹 같은 큰 諸侯가 亡함은 檀君 以後의 처음 일이더라.
 
 

3. 第三章 支那列國의 情形과 大夫 禮의 外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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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 一千六七百年 頃부터 二千年 頃까지 朝鮮과 支那(중국)의 兩民族의 歷史의 趨勢를 보면 類似한 點이 許多하나, 朝鮮의 宗國 檀君王朝가 阿斯達로 옮겨 夫餘朝가 되고, 支那(중국)의 宗國 周는 周武王 後孫 平王이 洛陽으로 옮겨 東周가 되어, 夫餘나 周의 命令이 다 그 諸侯에게 行치 못함이 같으며, 朝鮮은 辰韓이나 箕朝가 다 諸侯로서 勃興하여 一時에 覇國이 되어 列國의 盟主가 되었는데, 支那(중국)에도 齊桓公이 覇國 이름을 가져 支那(중국) 列國의 盟主가 됨이 같으며, 朝鮮에는 辰韓·弁韓·箕朝 等이 다 兼並으로 主義를 삼아 古代에 남아오던 小國이 自存치 못하는데, 支那(중국)도 山東의 齊, 山西·河南의 韓·魏·趙 三國(晋이 망하여 三國이 됨)과 陝西의 秦과 湖南·湖北의 楚와 直隸의 燕이 强盛하여 小國의 存立한 지가 몇이 못 됨이 같으며, 朝鮮에는 富國强兵이 國潮가 되어 古代 井田法을 破壞하고 個人 私力의 大小를 따라 貧富가 나게 하고 商業을 獎勵하여 風俗이 크게 變遷하였는데, 支那(중국)에도 井田의 限界를 없애고 土地의 開墾만 獎勵함이 같아, 平壤·慶州 等地의 井田이 高麗 뒤 까지도 그 자취가 있었거니와, 『公羊傳』이나 『孟子』에도 貊國의 二十分一의 稅法을 조롱한 바 貊은 支那人이 夫餘나 孤竹 等 國의 狐狢 等 皮物로 지은 옷을 보고 드디어 貊國 或 貉國이라 함이라. 대개 二十分一의 稅法은 곧 朝鮮 井田의 稅法이요 十分의 一의 稅法은 支那(중국) 井田의 세법인즉, 後世까지 朝鮮 井田이 存在함을 모르나, 그러나 이는 다만 朝鮮의 몇 部分뿐이요, 그 全體로 말하면 朝鮮의 井田이 廢址됨이 오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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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兄弟姉妹의 關係가 있다 할지나 이윽고 檀君 二千年 頃에 이르러, 兩族의 歷史에 큰 區別이 생겨 支那(중국)는 古文明을 維持하여 왔는데 朝鮮은 古文明의 歷史를 모두 兵火에 잃으며, 支那(중국)는 支那(중국)全幅을 마침내 統一하였는데 朝鮮은 孤竹·鮮卑 等地를 잃음뿐 아니라, 또 鴨綠江 南北에 分立으로 마쳤으니, 그 原因이 어디 있느뇨. (一) 地理의 關係니, 朝鮮은 夫餘와 遼東 以外에는 모두 山國이라, 支那(중국) 平原의 넓은 들이 統一하기 쉬움과 다르며, (二) 天然의 關係니, 支那(중국)에는 가장 勃興하는 秦國의 位置가 陝西에는 뒤로 들어올 外敵이 없는 고로 進攻退守에 便宜하거니와, 朝鮮은 그 主要한 나라 되는 辰韓과 箕朝가 모두 平安道와 遼東에 있어서, 西로 支那(중국)며 西北으로 匈奴가 있어서, 밖으로 侵略을 받음이 잦아 거의 四面受敵의 位置에 있음이 다르며, (三) 人事의 關係니, 箕朝가 箕子(기자)부터 平和로 주의를 삼아온 고로, 後世에 비록 英武한 임금이 날지라도 매양 이 主義에 갇혀 그 意見을 實行치 못하여, 드디어 外에 對한 進就性이 支那(중국)만도 못하여 그 結果가 매우 다르게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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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朝가 全盛하여 孤竹과 鮮卑를 차지하던 때는, 곧 孤竹의 接境되는 支那(중국)의 燕이 勃興하여, 燕候가 王號를 일컫고, 東으로 箕朝에 犯하려 하는 날이라. 箕朝 三十六世 王이 이 기별을 듣고 먼저 燕을 쳐 그 驕氣를 꺾고 朝鮮의 國威를 날리려 하더니, 이때에 만일 戰爭이 난 줄로 假定하면 그 勝負가 누구에 돌아갈까. (一) 土地의 廣陜을 比較하면 燕은 直隸의 西半部 土地만 가졌는데, 箕朝는 平安道부터 奉天 南半을 지나 奉天 西北과 東蒙古(鮮卑)와 直隸 東半(孤竹)을 가졌으니, 그 土地가 燕보다 몇 갑절이며, (二) 人民의 多寡를 比較하면 비록 古代의 人口統計가 後世에 傳치 못하였으나, 第一은 土地面積의 比例가 箕朝가 燕보다 많은즉 人口도 더 살 것이며, 第二는 箕朝는 休養生息 百餘年에, 날로 齊·趙와 싸우던 燕보다 다른즉, 人口가 繁殖하였을지며, (三) 國勢의 强弱을 보면, 孤竹과 鮮卑가 다 箕朝의 뜰아래 꿇던 때라, 그 氣勢가 처음으로 일어나는 燕보다 强할 것이며, (四) 軍制의 良否로 보면, 徵兵制度의 發達이 檀君朝부터 비롯되어 辰王과 列國의 講究訓鍊을 지나 箕朝에서 그 模範을 받았을 터인즉, 겨우 齊桓公이 朝鮮에서 새로 가져다가 改良한 支那(중국)의 軍制보다 깨끗할 것이니, 箕朝의 軍事가 또한 燕보다 나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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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優勢를 차지한 箕朝가 燕과 開戰하였으면 손꼽고 이길 자리에 앉았거늘, 不幸히 當時 朝臣 가운데 大夫 禮(예)란 자가 있어서 말하기를, 戰爭은 危殆한 일이니, 親睦으로써 서로 사귐이 옳다 하여, 王의 뜻을 돌리며 群臣의 意見을 꺾고, 드디어 外交의 責任을 맡아 使命을 띠고 燕에 가서 和好를 닦으니, 燕도 또한 大夫 禮(예)의 辭令에 굽혀 東侵일 뜻을 버리고, 使臣을 箕朝에 보내 禮를 대답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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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大夫 禮(예)의 燕行이 朝鮮外交史 가운데 夫婁(부루) 이후의 제일인이라. 夫婁(부루)는 우리 文明을 傳播하였으며, 大夫 禮(예)는 將來의 戰爭을 막았은즉 以後 大夫 禮(예)도 凡唐한 사람은 아니라 할 것이나 朝鮮의 情神을 죽이고 萬世의 禍根을 심은 자가 곧 大夫 禮(예)다. 설령 朝鮮의 實力이 燕보다 弱하다 할지라도, 當時의 燕과 箕朝는 서로 용납지 못할 兩雄이며 朝鮮과 支那(중국)는 함께 살지 못할 兩民族인즉, 나라를 爲하는 志士가 마땅히 피를 흘려 國民의 覺醒을 재촉하며, 興亡을 칼머리에서 決斷하여 後世 子孫에 範을 세움이 可하거든, 하물며 朝鮮은 크고 燕은 적으며 朝鮮은 强하고 燕은 弱하여, 燕이 오지 아니하여도 朝鮮이 갈 만할 때리오? 大夫 禮(예)가 이를 모르고 一時의 苟安을 좋아하여 戰爭을 避하고 平和를 求하여, 敵國의 形勢가 스스로 자라게 하였으니, 後來의 孤竹의 이름과 鮮卑의 빼앗김과, 秦始皇의 威嚇와 冒頓(모돈)의 暴虐과, 衛滿(위만)과 漢武의 入寇가, 곧 大夫 禮(예)의 引導한 바라 함도 可하도다. 고로 大夫 禮(예)는 功臣이 아니라 罪人이라 하겠도다. 箕朝의 罪人이며 夫婁(부루)의 罪人이며 朝鮮 萬世의 罪人이라 하겠다.
 
32
後世의 庸臣들은 大夫 禮(례) 같이 곧 月下의 戰爭도 막을 재주도 없으면서, 매양 國土를 팔며 國體를 낮추어 敵國의 歡心을 사려하나, 敵國의 歡心은 사지 못하고 輕侮와 恥辱만 사나니, 이는 또 大夫 禮(례)의 罪人이로다.
 
 

4. 第四章 北部人民의 大遷動時代

 

4.1. 奉開의 入寇와 孤竹 鮮卑 等地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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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夫 禮(례)의 外交政策이 겨우 一時의 苟安을 維持할 뿐이요, 永遠한 平和는 가져오지 못하였도다. 고로 支那(중국)와 蒙古(몽골)의 方面으로 禍亂이 이어이어 들어왔는데, 그 큰 자를 들면 (一) 秦開(진개), (二) 秦始皇, (三) 陳勝(진승)·吳廣(오광)·劉邦(유방)·項籍(항적) 等, (四) 冒頓(모돈), (五) 衛滿(위만), (六) 漢武니, 이는 朝鮮上古史 末葉의 六大亂이라. 朝鮮이 이 동안 數百年은 매양 主動者가 되지 못하고 被動者가 되며, 勝利者가 못되고 失敗者가 되었도다. 이제 秦開(진개)의 亂부터 말하리라.
 
36
秦開(진개)의 入寇한 事實을 이야기하기 前에 먼저 秦開(진개)에게 빼앗긴 地方을 辨定하노라. 前史에 매양 秦開(진개)가 箕朝와 싸워 二千里 땅을 차지하고 滿潘汗으로 境界를 定하였다 하니, 이는 魚豢(어환) 『魏略』에서 나온 말이요, 魚豢(어환) 『魏略』은 支那(중국)에서도 正史로 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小說의 種類며, 또는 小說로 더욱 자랑과 거짓을 主張하여 字音만 같으면 大秦[곧 羅馬(로마)]의 白人種도 秦의 子孫이라 하며, 辰韓도 秦人의 東遷한 자라 하여 本書가 價値 없는 글이며, 滿潘汗은 곧 『漢書 地理志』의 汶·番汗 兩縣의 音을 取하여 滿潘汗이란 地名을 僞造하고, 二千里는 『史記』 「燕世家」의 秦開拓地 千里라는 文字를 취하여 倍數를 더하여 二千里라 함이니, 그 억지로 끌어낸 자취가 드러나거늘 어찌 이를 믿으리오. 만일 魚豢(어환)의 말을 믿고 보면 西鴨綠(今 大遼河) 以西가 다 燕의 땅이 되었을 것이나, 『史記』에 燕 地方 千里라 하며 또 燕은 小國이라 하였으니, 어찌 이 같은 廣闊한 地方을 차지한 적이 있으며, 汶·番汗은 이 곳 遼陽 附近이라. 支那(중국)를 統一한 秦始皇도 꿈에도 밟아 보지 못한 땅이니, 燕의 東境이 어찌 秦의 東境보다 늘며, 汶·番汗은 곧 箕朝와 衛滿(위만)의 興亡하던 땅이니, 만일 當時에 燕의 땅이 되었으면 어찌 後來 衛滿(위만)의 近據되었으며, 古代의 遼河는 灤河라. 고로 燕의 末世에 遼西·遼東郡을 들 때에 永平府가 遼西가 되고 그 以東이 遼東이 됨인즉, 遼東도 遼西의 此例로 그 範圍가 山海關에 지나지 못하였을지니, 어찌 秦開(진개)가 벌써 遼陽·海城 等地까지 차지하였으리오. 고로 滿潘汗을 限하였다 二千里를 차지하였다 함은 다 慌說이어늘, 後人이 調査도 하지 아니하고 그저 믿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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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燕世家」에 가로되, 秦開(진개)가 東胡에 가서 볼모가 되매, 東胡王이 깊이 믿는지라. 秦開(진개)가 돌아와 燕王을 달래어 東胡를 쳐 千里를 開拓하였다 하니, 東胡는 곧 「퉁구스」라. 我史에 이른바 東屠요, 곧 東蒙古(鮮卑)의 地方이니, 東屠나 東胡가 다 意譯이 아니요, 곧 「퉁구쓰」의 音譯이라. 支那(중국)人이 남의 國名을 쓰자면 매양 極惡한 文字로 하는 고로 東胡라 함이니, 마치 「훈」을 匈奴라 함과 같으니라. 퉁구스, 곧 東屠가 檀君과 辰韓의 西番으로 後來에 箕朝에 服屬하였다가 드디어 秦開(진개)에게 속아 燕에게 亡함이니, 이는 箕朝가 그 屬地를 잃음이요, 本部를 잃음은 아니니라. 비록 屬地이나 이 땅의 得失은 곧 朝鮮盛衰에 關係가 적지 아니한 땅이라. 朝鮮이 東屠의 땅을 차지하면, 곧 이 곳으로 出兵하여 西南으로 直隸와 山西를 누르면 支那(중국)의 全幅이 震驚하여 할 바를 모르나니 辰王이 燕을 지나 齊를 치며 太行을 넘어 晋을 침도 이 땅을 가진 까닭이며, 高句麗 慕本王이 山西를 치고 蓋蘇文(연개소문)이 薛延陁(설연타)와 通함도 이 땅을 차지한 까닭이거늘 이제 秦開(진개)에게 이 땅을 빼앗기니, 이는 곧 箕朝의 致命傷이로다. 어찌 箕朝 뿐이리오. 곧 朝鮮의 夫餘·辰韓·弁韓·馬韓 等 列國의 衰運도 이에서 헤아릴지니라. 東屠를 잃은 뒤에 몇 해 못 되어 孤竹을 또 燕에게 잃어 燕이 灤河의 西에 遼西郡을 두고 東에 遼東郡을 두었나니, 대개 鮮卑는 朝鮮의 進取할 길이요, 孤竹은 防禦할 곳이라. 이 두 곳을 다 잃은 뒤에야 箕朝가 어찌 견디리오. 다만 敵國의 蹂躪을 기다릴 뿐이로다.
 
38
鮮卑는 後來에 高句麗 初年에 暫間 多勿할 때가 있으나, 孤竹은 箕朝가 잃은 뒤에 다시 朝鮮 地理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도다. 이것이 朝鮮史에 큰 부끄러움이니라.
 
 

4.2. 支那(중국) 秦始皇의 亂과 北辰 人民의 移動

40
燕이 朝鮮이 가진 孤竹과 鮮卑를 빼앗은 뒤에 몇 해 못 되어, 燕이 또 滅亡의 運에 닿았도다. 支那(중국)의 燕·齊·韓·魏·趙·楚·秦 等 列國이 競爭함은 以前에 말한 바거니와 檀君 二千八十年 頃에 秦始皇이 나서 秦王의 位에 올라 支那(중국) 統一할 野心을 가지고 곧 黃金을 헛쳐 列國의 君臣을 발가리하며 刺客을 보내 列國의 賢君과 良相을 暗殺하고, 또 날마다 大兵을 들어 列國의 땅에 덤비어 韓·魏·趙를 다 깨치니 楚·齊·燕도 그 危機가 눈 아래 있는지라. 燕太子 丹(단)이 燕의 悲運을 돌리려 하여 壯士 荊軻(형가)를 얻어 크게 厚禮하여 秦始皇 죽이기를 꾀하는데, 荊軻(형가) 蓋然히 許諾하고 三尺匕首를 가지고 易水를 건너 秦에 들어가 거짓 使者가 되여 秦始皇 보기를 求하여 始皇을 죽이려다가 功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잡혀 죽으니라.
 
41
荊軻(형가)는 죽었으나 秦始皇의 燕에 對한 憤怒가 발끝부터 장박이에 차서 蒙驁(몽오)·王賁(왕분) 等에게 命하여 빨리 燕을 치니, 太子 丹(단)이 窘急하여 할 바를 몰라 亡命하여 ×河(河名 未詳)가에 숨었더니, 秦兵의 急迫이 날로 더하매, 燕王이 어찌하지 못하여 드디어 사람을 보내 太子 丹(단)의 목을 베여 秦에 바치고, 눈앞에 禍를 免하니라. ×河는 後人이 혹 興京 附近의 咸廠門(柳條邊城의 門)에서 發源하여 遼河로 들어가는 太子河라 하나, 이곳이 當時 燕의 國境이 아니니, 太子 丹(단)이 이곳에 왔을 수 없도다. 太子河의 一名은 大梁河니, 梁은 良·壤 等 字와 같아 古音에 「」니 大梁河는 古語의 「따라가람」이라. 따라가람이 太子河됨은 「가우라가람」이 鴨子河라 함과 같을지니, 太子 二字를 보고 太子 丹(단)의 숨었던 곳이라 함은, 永平府의 狐蘇泉이 訛傳하여 扶蘇泉이 되고 扶·蘇 二字로 말미암아 秦 太子 扶蘇(부소)가 판 샘이라 함과 같으니라.
 
42
燕과 秦의 惡戰이 勿論 朝鮮 列國에 있어서는 이만치 좋은 機會가 없다 할지라. 燕은 朝鮮의 世讎니, 當時에 夫餘나 辰韓이나 箕朝에 사람이 있었다 하면, 燕의 窘急한 때를 타서 군사를 들어 燕을 쳐 鮮卑·孤竹 等地를 多勿함도 可하며, 그러지 아니하여 將來의 秦의 禍가 燕보다가 더 할듯하면 後世의 걱정됨을 爲하여 곧 燕과 원수 됨을 잊고 이와 握手하여 함께 秦을 침도 可하거늘, 이에 이러지도 못하며 저러지도 못하고 다만 팔짱을 끼고 燕의 亡함을 구경만 하였도다. 딱하다, 朝鮮의 사람이 없음이여. 몇 해가 못 되어 燕도 亡하며 齊도 亡하며 楚도 亡하여, 支那(중국) 全幅이 모두 秦始皇의 주먹 안에 들어간지라. 秦始皇이 怪傑은 怪傑이나 進就性보다 保守性이 强固한 支那(중국)式의 怪傑이라. 고로 그 六國 竝呑한 끝에 그 兵力으로써 外征에 힘쓰지 아니하고, 도리어 萬里長城으로 境界를 굳게 하려 하였도다. 長城 쌓은 動機는 秦人 候生(후생)이 朝鮮의 邊境에 놀다가 朝鮮의 豫言家가 傳하는 「亡秦者胡」라는 秘句를 얻어다가 秦始皇에게 바치니, 始皇이 二世 胡亥(호해)에게 亡할 줄은 알지 못하고, 드디어 臨洮부터 碣石까지 長城을 쌓아 東胡와 北胡를 막고, 將軍 蒙恬(몽염)을 보내 三十萬 名의 軍隊로써 守備하더라.
 
43
우리 古史에 西方 支那(중국)에 對한 境界가 分明치 못하여 매양 長城의 終端으로써 定界標를 잡으나, 長城의 起點도 또 分明치 못하여 史家에 큰 苦痛을 주는 바라. 이제 長城에 對한 地志를 말하기 前에 長城에 對한 歷史부터 알아야 本問題를 解決하리라 하노라. 長城의 歷史를 三期에 나누니, (一) 始皇 以前의 長城이요, (二) 始皇의 長城이요, (三) 始皇 以後의 長城이라. 三期의 長城이 모두 한 땅이 아니거늘, 史家가 매양 이를 모르고 始皇 以前의 長城이 없다 하는 고로 長城의 起源이 밝지 못하며, 始皇 以後의 長城이 없다 하는 고로 長城의 位置가 틀리도다.
 
44
『史記』에 燕이 匈奴를 막으려고 長城을 造陽부터 襄平까지 쌓았고, 그 안에 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을 두었다 하니(趙도 長城을 쌓았지마는 本書에 關係가 없으므로 빼노라), 이는 始皇 以前의 長城이라. 長城은 造陽부터 비로소 襄平에 그치고, 長城 안에 郡縣은 上谷부터 비로소 遼東까지 그쳤은즉, 襄平이 遼東郡 안에 있음은 自然의 勢라. 그러나 後世에 遼河 附近이 遼東城 됨을 보고 드디어 奉天을 襄平이라 하나, 그러나 上谷·漁陽·右北平·遼西가 다 灤河의 西에 있은즉 그 範圍가 다 數百里 밖에 아니 되거늘, 이제 遼東을 灤河부터 奉天까지 數千里를 잡음은 안 될 말이며, 燕의 拓地가 孤竹과 鮮卑에 있고 醫巫閭山을 지남이 아닌즉, 襄平과 遼東이 어찌 奉天이 되리오. 秦의 長城도 燕과 같이 匈奴를 막기 爲함인즉, 燕의 舊址를 因하여 쌓았으리니, 燕의 襄平과 秦의 碣石이 勿論 同一한 地點이 될지라. 이는 아래에 辯論하리라.
 
45
始皇 以後의 長城은 쌓은 者 許多하니, 齊 顯祖 天保 六年에 幽州부터 恒州까지 쌓은 九百里의 長城이 있으며, 後主 天統 元年에 庫堆戌부터 車海까지 쌓은 長城이 있으며, 周宣帝 大象 元年에 雁門부터 碣石까지 쌓은 長城이 있으며, 隋文帝 開皇 六年에 周의 長城을 다시 修築하였나니, 이는 史冊에 보인 長城들이요. 이 長城들은 秦의 舊址가 아니며 오늘에 남아있는 長城은 또 明 徐達(서달)이 쌓은 長城이라. 그 基址가 또한 支那(중국) 歷代의 遺物이 아니거늘, 이에 萬里長城을 말하는 者가 반드시 始皇의 長城이라 하고, 이에 의지하여 兩國의 境界를 잡으려 함이 (一) 誤요, 『晋書』 太康地理志 中에 長城이 樂浪의 碣石에서 비로소 이었다는 말을 因하여 樂浪을 平安道 或은 奉天으로 잡고, 그 안에서 碣石 遺址를 찾아 長城 遺址를 보려 하나, 樂浪은 歷代의 變遷이 많아 이에서 碣石을 찾음이 (二) 誤라. 이제 碣石이 있는 곳을 史冊에서 考據하여 長城의 起點을 묻고자 하노라.
 
46
이제 碣石이 보인 자를 들건대, 「禹貢」의 夾右碣石이란 碣石도 있으며, 『漢書 地理志』에 石北平 驪城 碣石山이란 碣石도 있으며, 『隋書』의 盧龍碣石도 있으며, 『新唐書』에 平州石城의 碣石도 있어서, 碣石이 이같이 多數하나 대개 右北平·盧龍·平州 等地는 다 永平府 界內니, 이는 地名의 다름이라 곧 一處이니, 秦의 長城 起點된 碣石이니라. 『杜氏通典』에 가로되, 秦의 長城은 高麗界의 碣石에서 비로소 이었고 北平의 碣石이 아니라 하나, 이는 다만 唐人의 疆土 넓히려는 野心의 붓이요 實際가 아니니라. 註家가 또 「禹貢」의 「夾右碣石」이란 말은 右碣을 夾하다 함인즉, 이는 右碣石이요 秦 長城의 起點은 左碣石이라 하나, 그러면 그 下文에 太行王屋 至于碣石은 또 어떻게 註하고자 하느뇨. 이를 高麗界에 있는 左碣石이라 하면, 이는 夏禹가 山西省에서 곧 朝鮮까지 가 봄이니 이럴 理가 없고, 그렇지 않다면 高麗 左碣石 永平 右碣石 以外에도 또 碣石이 있음이니, 이 碣石의 이름은 무엇이뇨. 도리어 孔安國(공안국)·蔡沈(채침) 等의 「註貢」조차 夾右碣石은 右에 碣石을 夾하였다고 봄이 可하니, 이에서 더욱 碣石은 永平府 碣石 하나요 둘이 아니며, 長城은 永平府 以外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함이 可하도다. 『後漢書』에 孔孫度(공손탁)이 가진 平州를 漢의 襄平이라 하고 燕의 襄平이라 아니하였거늘, 後人이 漢의 襄平을 곧 燕의 襄平으로 알매 長城이 몇 百里를 걸어 遼河까지 나오며, 『晋書』의 碣石은 곧 「禹貢」의 碣石이어늘 後人이 「禹貢」의 碣石과 晋書의 碣石을 둘로 나누매, 長城이 몇 千里를 걸어 朝鮮까지 나오도다. 무릇 地理의 沿革이 틀리면 事實의 本然과 興亡의 因果를 모두 알 수 없어 歷史가 歷史되지 못하나니, 이는 깊이 着眼할 것이니라.
 
47
長城의 起點은 이미 辨正한 바거니와 長城을 비록 近世의 눈으로 보면 아무 쓸데없는 한 石堆이지만 當時의 影響은 곧 지극히 컸도다. 匈奴의 南下하는 길을 막으매 匈奴族의 一部는 곧 天山을넘어 西亞細亞를 지나 歐州(유럽)에 들어가 白人의 꿈을 놀래고 一部는 東方으로 나와 朝鮮 西藩 곧 東屠의 땅을 들썩하게 하였나니 이는 長城의 間接 影響이라. 이다음에 다시금 詳叙코자 하는 바거니와 그 直接 影響도 적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長城 쌓을 때 役事가 浩大하여 몇 百萬 百姓을 부릴 새 燕·趙·齊·孤竹 等地에 있던 古朝鮮의 植民地들도 이미 朝鮮의 勢力이 西方에 끊긴지 오랜 고로 할 수 없이 秦始皇의 統御를 받아 그 채찍 밑에 長城의 役夫가 되어 거의 苦役과 暴政에 죽어 百年 或 千年 동안에 朝鮮을 잊고 支那(중국)를 내 집으로 알아 生子長孫하던 사람들이 할 수 없이 祖國으로 머리를 돌려 도망하니 이것이 支那(중국)族으로 말미암아 생긴 朝鮮遺民의 第一次 大遷動이더라.
 
48
그 遷動하는 길이 遼東은 箕朝와 秦의 中立 地帶가 되어 (下節에 보임) 經過치 못하므로 매양 배를 타고 조차 뫼와 내를 넘어 朝鮮 南方으로 들어와 鳥嶺 以南으로 向한 者 많았나니, 『三國史記』에 新羅를 辰韓 遺民이라, 朝鮮 遺民이라 함이 이를 말함이니라. 後人이 孤竹과 燕의 等地가 馬韓과 朝鮮의 古地임을 잊고, 도리어 秦과 晋의 同音에 傅會하여 辰韓을 秦人의 東走한 者라 하니, 그 誕妄함이 『魏畧』에 大秦 곧 羅馬(로마)를 中國의 支孫이라함과
【원문】第四編 辰韓의 全盛과 對外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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