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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가실 (嘉實) ◈
해설   본문  
1923.2.
이광수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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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一[일]

 
2
때는 김 유신이 한창 들날리던 신라 말이다. 가을 볕이 째듯이 비치인 마당에는 벼 낟가리, 콩 낟가리, 모밀 낟가리들이 우뚝우뚝 섰다. 마당 한쪽에는 겨우내 때일 통나무더미가 있다. 그 나무더미 밑에 어떤 열 예닐곱살된 어여쁘고도 튼튼한 처녀가 통나무에 걸터앉아서 남쪽 한길을 바라보고 울고 있다. 이때에 어떤 젊은 농군 하나이 큰 도끼를 메고 마당으로 들어오다가, 처녀가 앉아 우는 것을 보고 우뚝 서며,
 
3
『아기, 왜 울어요?』
 
4
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처녀는 깜짝 놀라는 듯이 한길을 바라보던 눈물 고인 눈으로 그 젊은 농군을 쳐다보고 가만히 일어나며,
 
5
『나라에서 아버지를 부르신대요.』
 
6
하고 치마 고름으로 눈물을 씻으며 우는 양을 감추려는 듯이 외면을 하고 돌아서니, 길게 땋아 늘인 검은 머리가 보인다.
 
7
『나라에서 부르셔요?』
 
8
『녜, 내일 아침에 고을로 모이라고, 아까 관인이 와서 이르고 갔어요.』
 
9
젊은 농군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 같더니,
 
10
『고구려 군사가 북한산성을 쳐 들어온다더니, 그래 부르남.』
 
11
하고, 도끼를 거기 놓고 다른 집에를 갔다가 오더니,
 
12
『여러 사람 불렀다는데요. 제길 하루나 편안할 날이 있어야지. 젊은 사람은 다 죽고, 이제는 늙은이까지 내다 죽이려나. 언제나 쌈을 아니하고 사는 세상이 온담.』
 
13
하고, 처녀의 느껴 우는 어깨를 바라본다. 처녀는 고개도 아니 돌리고,
 
14
『가실씨는 안 뽑혔어요?』
 
15
하고 묻는다. 가실은 그 젊은 농군의 이름이라.
 
16
『명년 봄에야 나도 부르겠지요. 아직은 나이 한 살 부족하니까 남겨 놓는 게지요.』
 
17
하고 팔짱을 끼고 한참 생각하더니,
 
18
『아버지는 어디 가셨소?』 한다.
 
19
『고을에 들어가셨어요. 원님한테 말이나 해본다고. 늙기도 하고, 몸에 병도 있고, 또 어린 딸자식 밖에 없으니, 안 가게 해달라고 발괄이나 한다고, 그리고 아까 가셨어요. 이제는 오실 때가 되었는데…….』
 
20
하고 또 한길을 바라본다.
 
21
『말하면 되나요! 나라에서 사정을 볼 줄 아나요!』
 
22
하고 도끼를 들고 나무더미에서 통나무를 내려 장작 패기를 시작한다. 처녀는 놀란 듯이 눈물에 젖은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23
『장작은 왜 패세요?』
 
24
하고 가실의 곁으로 한 걸음 가까이 간다.
 
25
『우리 장작을 막 다 패고 왔어요. 영감님이 힘이 드시겠기에 좀 패 드릴 양으로.』
 
26
하고 뚝 부르걷은 싯뻘건 두 팔을 머리 위에 잔뜩 높이 들었다가「췌」소리를 치며 내려치니, 쩍쩍 소리가 나며 통나무가 쪼개어져서 장작개비가 가로 세로 뛴다. 처녀는 우두커니 서서 가실의 볕에 글은 허리가 굽혔다 폈다 하는 양과 싯뻘건 두 팔뚝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과 순식간에 자기 앞에 허연 장작더미가 쌓이는 것을 보고 섰더니, 무슨 생각이 난 듯이 사립문으로 뛰어 들어간다. 이윽고 처녀는 큰 사발에 뿌연 막걸리를 걸러가지고 나와서 가실이가 패던 토막을 다 패기를 기다려,
 
27
『술 한 잔 잡수셔요.』
 
28
하고 사발을 두 손으로 받들어 가실에게 준다. 가실은 도끼를 나무통에 턱박아 놓고, 한 편 팔굽이로 이마에 맺힌 구슬땀을 씻으면서 한 편 팔로 사발을 받아 든다.
 
29
『웬 술이 있어요?』
 
30
하고 그 힘있고도 유순한 눈으로 술을 물끄러미 들여다 본다.
 
31
『콩 걷는 날 했던 술이 항아리 밑에 좀 남았기에 새로 물을 길어다가 걸렀어요. 아버지 잡수실 것 좀 남겨 놓고…….』
 
32
하고, 치맛자락에 젖은 두 손을 씻으며 처녀는 만족한 듯이 빙그레 웃는다.
 
33
가실은 사발을 입에 대고 꿀꺽꿀꺽 단숨에 들이키더니 주먹으로 입을 씻으며 사발을 처녀에게 준다. 처녀는 사발을 받아 들고 가실을 물끄러미 보더니, 사립문으로 뛰어 들어가 부엌으로 들어간다. 가실은 처녀의 뛰어 가는 양을 보고 들어간 부엌 문을 이윽히 보더니, 다시 도끼를 들어 장작을 팬다. 얼마만에 처녀가 치맛자락에 무엇을 싸가지고 뛰어 나와서 가실의 곁에 선다. 가실이 자기를 돌아보는 기회를 타서 처녀는,
 
34
『밤 잡수셔요. 내가 아람 주어다가 묻어 두었던 것이야요.』
 
35
하고, 작은 손으로 줌이 버을게 한 줌 집어 가실을 주며,
 
36
『왕밤이야요!』
 
37
한다. 가실은 도끼를 자기 다리에 기대어 세워 놓고, 이빨로 밤 껍데기를 벗긴다. 처녀도 입으로 껍데기를 벗겨 먹는다.
 
38
『아버지 오시네!』
 
39
하고 처녀가 치마에 쌌던 밤을 땅에 내버리고 한길로 마중 나간다. 가실은 고개를 돌려 한길을 내다보았다. 늙은 수양버들 그늘로 수염이 허옇게 세인 설 영감이 기운 없이 걸어온다. 영감은 마당에 들어와 가실을 보고,
 
40
『장작 패 주었나?』
 
41
하고 감사한 낯빛을 보인다.
 
42
『녜. 우리 것 다 패고…….』
 
43
하고 수줍은 듯하면서도 만족한 듯한 웃음을 띤다.
 
44
영감은 장작개비 하나를 깔고 앉아서 휘유 긴 한숨을 쉰다. 처녀는 어느새 부엌에 들어가서 술 사발을 들고 나와서,
 
45
『아버지, 술 잡수.』
 
46
하고 아버지를 준다.
 
47
『응, 술이 남았든?』
 
48
하고 딸에게서 술 사발을 받으며,
 
49
『이 사람 한 잔 주지.』
 
50
『한 사발 드렸어요. 아버지 잡술 것 남겨 놓고.』
 
51
하면서 처녀는 가실을 본다. 가실은,
 
52
『저는 잘 먹었읍니다. 어서 잡수시우. 아직도 무엇을 하려면 더운데요.』
 
53
하고 영감의 피곤한 듯한 얼굴을 본다. 영감은 쉬엄쉬엄 한 사발을 들이키고, 아랫 입술로 웃수염 끝에 묻은 술을 빨아 들이면서 마당에 떨어진 밤을 집어 벗긴다. 처녀는 아버지가 오늘 고을 갔던 결과를 듣고 싶으나, 남의 앞이 되어서 묻지는 못하고 가실이가 물어 주었으면 하고 기다린다. 가실도 그 눈치를 알고 자기도 영감 곁에 쭈그리고 앉으며,
 
54
『그래, 고을 가셨던 일은 잘 되셨어요?』
 
55
하고 묻는다.
 
56
『안된대. 내일 아침에는 떠나야 하겠네.』
 
57
한참 말이 없다.
 
58
처녀는 그만 울음을 참지 못하여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싸고 돌아선다. 가실도 고개를 푹 수그린다. 영감도 고개를 수그렸다가 번쩍 들어 울고 돌아섰는 딸을 보며 가실더러,
 
59
『그렇지 않아도 내가 자네를 찾아보려고 했네.』
 
60
하고 물끄러미 가실을 보더니,
 
61
『자네도 알거니와, 내가 떠나면 저 어린 것 혼자 남네그려. 저것이 불쌍해! 제 어멈은 어려서 죽고……오라범들 다 전장에 나가 죽고……내가 이제 나가면 어떻게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나. 싸워 죽지 않으면 병들어 죽겠고, 병들어 죽지 아니하면 늙어서 죽지 않겠나. 나도 스무 살에 군사에 뽑혀서 서른 살에야 집에 돌아오니, 부모 다 돌아가시고……그런 말은 해서 무엇하나. 아무려나 내가 이번 가면 살아 돌아올 리는 만무하고……. 저것이, 내 혈육이라고는 저것 하나 밖에 안 남았네그려. 저것을 두고 가니, 내 마음이 어떻겠나.』
 
62
하고 노인은 억지로 울음을 참는다. 처녀는 그만 장적더미에 쓰러져 운다.
 
63
가실도 운다. 노인은 코를 풀고 소리를 가다듬어,
 
64
『그러나 다 팔자니 어쩌나.……내가 보니, 자네가 사람이 좋아! 그러니 내 딸을 자네 아내를 삼게. 그리고 이 집 가지고 벌어먹고 살게. 논허구 밭허구 나무판허구 자네 두 식구가 잘 벌면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것이니, 그러게.』
 
65
하고 일어나 장작더미에 쓰러져 우는 딸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66
『악아, 들어가 저녁 지어라. 닭 한 마리 잡고, 반찬도 좀 많이 하고, 술도 걸러라. 가실이도 함께 저녁 먹고 마지막으로 이야기나 하게.』
 
67
한다. 처녀는 일어나 두 손으로 눈물을 씻어가며 안으로 들어간다. 노인은 딸의 들어가는 양을 보고 돌아서서 다시 가실의 곁에 앉으며,
 
68
『가실이! 내 말대로 하려나?』
 
69
하고 손으로 가실의 땀에 젖은 등을 두드린다. 가실은 고개를 들어 노인을 쳐다보며 말하기 어려운 듯이 머뭇머뭇하더니, 간단하고도 힘있게,
 
70
『너무 황송합니다!』
 
71
할 뿐이다. 노인은 일어나 가실의 곁에 놓인 도끼를 들어 통나무 한 토막을 패기 시작한다. 가실이가,
 
72
『제가 패겠읍니다.』 하는 것을,
 
73
『가만 있게. 이게 다 마지막 해보는 것일세.』 하고,
 
74
『쒸, 쒸!』
 
75
하면서 팬다. 비록 늙었으나, 이전 하던 솜씨가 남았다. 가실이만큼 힘있게는 못하여도 그보다 더 익숙하게 한다. 그 토막을 다 패어 놓고, 도끼를 가실에게 주면서,
 
76
『에, 한참 장작을 팼더니, 기운이 나네.』
 
77
하고 땀을 씻으면서,
 
78
『저 고개 너머 논 두 마지기 안 있나. 그게 다 내 손으로 만든 겔세. 내가 이 가을에는 거기 새 흙을 좀 들여 펴고, 또 그 곁에 한 마지기 더 풀려고 했더니, 못하게 되었으니, 자내가 내일부터라도 하게. 그리고 저 소외양간은 접쪽으로 옮기게.』
 
79
하고 아무 근심 없는 듯이 벙글벙글 웃더니, 문득 무슨 근심이 생기는 모양으로,
 
80
『내가 혼인하는 것을 못 보고 가서 안되었네마는, 이벼나 다 타작을 하거든, 동네 사람들이나 청해서 좋은 날 받아서 잔치나 잘 하게.』
 
81
하고는 퍽 언짢아하는 빛을 보인다. 가실은 다만 들을 따름이요, 아무 대답이 없다.
 
 

2. 二[이]

 
83
이튿날 새벽 첫닭울이에 일어나서, 처녀는 절구에 쌀을 쓿고 물을 길어 오고 닭을 잡아 밥을 지었다. 지난 밤에는 아버지의 솜옷 한 벌을 짓느라고 늦도록 바느질을 하다가, 아버지 곁에 누워서 잠깐 잠이 들었다가, 첫닭의 소리에 깬 것이다. 아버지는 여러 번 곁에 누워 자는 딸을 만지면서 거의 한잠도 이루지 못하였다.
 
84
늙은 아버지와 어린 딸이 마주 앉아서 닭국에 밥을 말아 먹을 때에는 벌써 훤하게 동이 텄다. 해 뜨기 전에 말 탄 관인이 활을 메고 칼을 번쩍거리며 「군사들 나라」고 외치며 돌아갔다. 처녀는 밥상도 안 치우고 아버지의 웃 보퉁이를 싸고 해진 버섯 구멍을 막았다. 길치장하기에 울 새도 없었다. 아버지는 딸이 짐 싸는 동안에 소물을 먹인다, 마당을 치운다, 아침마다 하는 일을 하고, 농사하던 연장과 소와 닭장과 곡식가리를 다 돌아보고, 딸이 늘 물 길러 다니는 우물 길에 풀까지 베어버렸다.
 
85
해가 떴다. 지붕에는 은가루 같은 서리가 왔다. 동네에서 우는 소리가 난다. 닭들은 아침 햇볕을 맞느라고 사방에서 울고, 개들이 쿵쿵 짖는다. 마침내 떠날 때가 되어서 아버지는 봇짐을 지고 마당에 내려서면서 우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만져 주었다. 그리고,
 
86
『아무 걱정 말아라. 가실이 좋은 사람이니, 그 사람한테 시집가서 아들 딸 많이 낳고 잘 살아라. 남편 말 잘 듣고, 일 잘하고, 그래야 내 딸이다.』
 
87
하고 대문을 나선다. 딸은 아버지의 소매에 매어달려 운다.
 
88
이때에 앞 고개로 금빛 같은 햇빛을 등에 지고 어떤 커다란 사람이 뛰어 넘어 온다. 가실이다. 가실은 짚신 감발에 바지를 홀쪽하게 추켜 입은 조그마한 봇짐을 졌다.
 
89
대문 앞에 와서 노인께 절을 하면서,
 
90
『제가 대신 가겠읍니다. 일년이면 돌아온답니다.』
 
91
한다. 그 얼굴에서는 김이 오른다.
 
92
『자네가 어떻게 가나?』
 
93
하고 노인은 놀라며 묻는다.
 
94
『이제 늙으신 이가 어떻게 전장에를 가십니까. 그래 어저께부터 내가 대신 가리라고 작정을 했읍니다.』
 
95
하고는, 또 절을 하고 뛰어가려 한다. 처녀는 가실의 손을 잡으며,
 
96
『아버지 대신 전장에 가셔요?』 한다.
 
97
『녜.』
 
98
하고 가실은 처녀의 쳐든 얼굴을 내려다본다. 처녀는 눈물 묻은 얼굴을 가실의 가슴에 묻으며,
 
99
『그러면 가 줍시오. 그 은혜는 내 몸이 죽기까지 갚겠읍니다. 그러면 가줍시오.』
 
100
하고 한 번 더 가실의 얼굴을 본다.
 
101
노인은 가실의 결심을 휘지 못할 줄을 알고, 자기가 졌던 옷짐을 가실에게 주며,
 
102
『자네 은혜는 내가 죽어도 못 잊겠네. 그러면 갔다가 속히 돌아오게. 나를 자네의 장인으로 믿게. 부디부디 잘 다녀오게.』
 
103
이리하여 가실은 전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104
고을에 들어가서 여러 백명 군사로 뽑힌 사람들과 함께 마병 수십명에 끌리어 서울로 갔다. 가는 길에 여러 고을로서 군사로 뽑혀 오는 사람들을 만나, 치술령을 넘어올 때에는 천명이나 넘었다. 산비탈에는 늙은이 부인네 아이들이 하얗게 늘어섰다가, 자기네 아버지나 아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손으로 가리키고 부르며 발을 구르고 우짖는다.
 
105
가실이가 서울 동문을 들어설 때에는 벌서 해가 서편 산마루에 올라 앉고, 팔백 여덟이나 된다는 여러 절에서는 저녁 쇠북 소리가 둥둥 울려 나온다.
 
106
군사로 뽑혀 가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려고 장안 사람들은 모두 길가에 나섰다. 먼데 사람이 안 보일 만할 때에야 겨우 분황사 앞 영문에 다다랐다.
 
107
가실은 장관의 점고를 맞고 방에 들어갔다. 열 간통이나 되는 큰 방안에 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콩나물 모양으로 앉아서, 혹은 같은 고향에서 온 아는 사람들끼리, 혹은 모르는 사람들끼리 이야기들을 한다. 가실은 방 한편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서 전장에 나아가는 것이 무서운 듯한 생각과 그러나 명년 이때에 돌아오면 오래 그리워 하던 사람을 아내로 삼아 재미있게 살 것을 생각하고는 혼자 기뻐한다.
 
108
이윽고 어디서 풍류 소리가 울려 온다. 사람들은 일어서서 창으로 내다본다. 서남편으로 환한 불빛이 보인다. 창에 붙어서 바라보던 사람 하나이,
 
109
『저게 대궐이야, 상감님 계신 데야.』
 
110
하는 소리를 듣고, 대궐 대궐 하는 말만 듣고 보지는 못한 사람들은 일제히 그리로 밀려,
 
111
『응, 어느 게 대궐이야?』
 
112
하고 사람들 틈으로 고개를 내어밀고 발을 벋디딘다.
 
113
『저기 저 등불 많이 켠 데가 대궐이야, 임해궁이야.』
 
114
하고 누가 잘 아는 듯이 설명한다. 가실도 사람들 틈에 끼어서 내다보았다.
 
115
몇 천인지 모를 등불이 반딧불 모양으로 공중에 걸리고, 그 한가운데쯤 해서 커단 횃불 빛 같은 것도 보인다.
 
116
『등불도 많이도 켜 놓았다.』
 
117
하는 이도 있고,
 
118
『저렇게 환하게 불을 켜 놓고 타작을 했으면 좋겠네.』
 
119
하는 이도 있고,
 
120
『거기다가 씨름을 한 판 차려 놓았으면 좋겠네.』
 
121
하는 이도 있다.
 
122
그 중에 서울서 오래 병정 노릇하던 사람 하나이 이 사람들의 무식한 소리를 비웃는 듯이,
 
123
『이 사람들, 그게 무슨 소린가. 지금 상감님이 만조백관을 모으시고 연락을 배설한 것이야. 내일 용춘 장군 유신 장군이 우리들을 거느리고 낭비성으로 간다고 가서 승전해가지고 오라고 잔치하는 것이라네.』
 
124
한다. 북 소리, 피리 소리, 저 소리, 쇠 소리가 간간이 들려 온다.
 
125
밝디밝은 구월 보름달이 둥그런 얼음짱 모양으로 남산 위에 걸리고, 반월성과 황룡사가 달빛 속에 큰 그림자 모양으로 보인다.
 
126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창에서 떨어져서 구석구석에 목침을 베고 쓰러진다.
 
127
어떤 이는 벌써 종일 걸어온 노독에 코를 드렁드렁 곤다. 집을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논과 밭과 소를 떠나서 전장에 죽으러 나가는 어린 아이 같은 백성들이 팔 다리를 탕탕 둘러치며 코를 드렁드렁 골고 어제 떠난 집을 꿈꿀 때까지 가늘었다 굵었다 끊겼다 이었다 하는 임해궁 대궐 풍악 소리는 달빛에 떠와서 창 틈으로 스며 들어왔다. 가실도 처음에는 한참 잠이 안 들었으나, 어제 종일 장작을 패고 오늘 종일 길을 걷던 노독에 동여 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128
달이 거의 서산에 걸린 때 사방 절에서 일제히 종 소리가 울려 오고, 그중에 바로 영문 곁에서 치는 분황사 종 소리는 곤해 자던 군사의 꿈을 모두 깨뜨려 놓고 말았다.
 
129
나발 소리, 주라 소리가 영문 안에 일어난다. 자던 군사들은 둥지를 흔들린 벌 모양으로 여러 방으로서 쏟아져 나와 마당에 모여 선다. 마당 한가운데는 활과 화살통이 산더미 같이 쌓이고, 울긋불긋한 깃발이 횃불 빛에 나부낀다.
 
130
해뜨게 천여 명 군사가 제일대로 남대문을 나서서 서를 향하고 떠났다. 말탄 군사도 있고, 짐 실은 수레도 있다. 군사들은 모두 활과 살통을 메고 어떤 군사는 큰 창을 메었다. 가실도 큰 활과 살통을 메고 물들인 군복을 입었다. 어제까지 호미와 낫과 장작 패는 도끼를 들고 화평하게 살던 농부들은 하루 아침에 활을 메고 칼을 차고 사람을 죽이러 가는 군사로 변하였다.
 
131
『어디로 가는 모양이야?』
 
132
하고 가실의 뒤에 오는 한 사람이 누구더런지 모르게 묻는다.
 
133
『누가 아나. 끌고 가는 데로 따라가지.』
 
134
하고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대답한다.
 
135
『백제 놈들이 또 쳐 들어왔나?』
 
136
『이번에는 고구려 놈이라든가.』
 
137
『그 망할 놈들은 농사나 해먹고 자빠졌지 왜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들쑤석거려서 못 견디게 굴어.』
 
138
『글쎄나말이지. 또 그놈들은 우리네 신라 사람들이 들쑤석거린다고 그러겠지.』
 
139
이러한 말도 나오고, 또 어떤 때에는,
 
140
『글쎄, 우리는 무얼 먹겠다고 터덜거리고 가?』
 
141
『먹긴 뭘 먹어, 싸우러 가지.』
 
142
『글쎄, 무엇 먹겠다고 싸워!』
 
143
한참 대답이 없더니, 누가,
 
144
『누구는 갈 일이 있어서 가나. 가라고 그러니까 가지.』
 
145
하고 성난 듯이 픽 웃는다.
 
146
이 말이 대단히 재미나는 모양으로 누가,
 
147
『우리더러 싸우러 가라는 사람은 누구야? 아버지 말도 잘 안 들으려고 드는 우리더러?』
 
148
하고 더 크게 웃는다.
 
149
『참 누가 가라기에 가는 길이야?』
 
150
하고 누가 또 웃는다.
 
151
『안 가면 잡아다가 죽인다니까 가지!』
 
152
이 말에 모두「참 그렇다」하는 듯이 아무 말들이 없다. 가실은, 〈나는 늙은 장인 대신 나가는 길이야.〉 하고 생각하고 혼자 기뻤다.
 
153
이 모양으로 밤이면 한둔하고 낮이면은 걸어 낯선 강을 건너 낯선 벌을 지나 어마어마한 큰 영을 넘어 이렁저렁 서울을 떠난지 십여 일에 바다같이 넓은 노돌나루 턱을 건너 한양에 다다랐다. 그 동안에 도망한 사람, 도망하다가 붙들려 목을 잘려 죽은 사람, 병들어 죽은 사람,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은 사람, 이럭저럭 다 줄어버리고 서울서 함께 떠난 천명 군사 중에 노돌나루를 건너 이는 육백명이 다 차지 못하였다.
 
154
가실과 같이 온 군사가 노돌을 건너는 날은 삼각산으로서 하늬바람이 냅다 불고 좁쌀 같은 싸락눈이 펄펄 날렸다. 본래 한양에 있던 군사들은 모두 노닥노닥한 옷에 얼굴에 핏기 하나 없다. 그네들은 집에서 올 때에 가지고 온 옷도 다 입어 해어지고, 까맣게 때 묻은 군복을 입고 덜덜 떨고 섰다. 새로 가실과 같이 온 군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
 
155
『왜 다들 저 꼴이야, 해골만 남았으니?』
 
156
『우리도 저 꼴이 될 모양인가.』
 
157
『죽지 않아야 저 꼴이라도 되지.』
 
158
이런 말들을 하며 모두 풀이 죽어서 섬거적 편 영문에 들어갔다.
 
159
이 날은 서울 군사들이 이십여 일이나 먼 길에 새로 왔다 하여, 소를 여러마리 잡고 술을 많이 내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가끔 고구려 마병이 기웃기웃 모악재로 엿보고, 서울서 구원병은 오지 아니하고, 그래서 이곳서 수자리 사는 군사들은 하루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밤잠도 잘 자지 못하다가, 이번에 새 군사 오는 것을 보고 다들 기뻐하였다. 그 판에 오래 굶주렸던 창자에 쇠고를 실컷 먹고 술을 마시니, 추운 것과 고향 그리운 것도 잊어버리고 모두 신이 나서 떠들고 논다. 가실도 술이 취하였다. 자기와 한 방에 있게 된 늙은 군사는 이십년이나 병정으로 있었고, 서울도 오래 있었으므로, 영문 일도 잘 알고, 퉁소도 불고, 소리도 하고, 춤도 출 줄 알며, 여러 번 전장에 나갔으므로 싸움도 우습게 여긴다. 한참 떠들다가 이 늙은 군사가 무릎 장단을 치며 소리 한 마디를 부른다. 그 사설은 이러하다.
 
160
『에헤야 ─ 산도 설고 물도 선데, 누구를 따라 예 왔는가.』
 
161
이런 소리가 끝이 나니, 그 중에 한 오륙인 늙은 군사가 역시 무릎 장단을 치며,
 
162
『에헤야 ── 요 ── 임 따라 온 것도 아니로세, 구경온 것도 아니로세, 용천검 드는 칼로 고구려 놈 사냥을 온 길일세, 에헤야 ── 요.』
 
163
하고 화답을 한다.
 
164
늙은 군사는 더 신이 나서 얼씬얼씬 어깨춤을 추어가며,
 
165
『에헤야 ── 요 ── 새로 온 군사야 말 물어 보자. 고향 산천은 어찌된고, 부모 양친은 어찌 된고, 두고 온 처자도 잘 있더냐. 에헤야요.』
 
166
하면, 다른 늙은 군사들도 또 어깨춤을 얼씬얼씬 추며,
 
167
『임 따라 온 것도 아니로세.』
 
168
하고 아까 하던 후렴을 부른다.
 
169
다른 방에서 얼굴 붉은 군사들이 소리를 듣고 모여든다. 방이 터지게 모이고도 남아 싸락눈을 맞으면서 문밖에 섰다. 소리하던 군사들은 더욱 흥이 나서 일어나 춤을 추는 이도 있고, 손으로 부르거든 다리를 쳐서 장단을 맞추는 이도 있다. 늙은 군사가 한 마디를 먹일 때마다 받는 사람이 늘어 간다. 가실도 가만가만히 흉내를 내다가 나중에 곡조를 배워 후렴하는 패에 참예하게 되었다.
 
170
늙은 군사는 일단 소리를 높여,
 
171
『에헤야요, 사냥을 가자, 사냥을 가, 날이 새거든 사냥을 가자. 모악재 넘어 임진강 건너 고구려 군사 사냥을 가자.』
 
172
『에헤야요 ──, 임 따라온 것도 아니로세, 구경 온 것도 아니로세, 용천검 드는 칼로 고구려 왕의 머리를 베어 대왕께 바치러 온 길일세.』
 
173
『에헤야요, 일생 백년이 꿈이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 오늘은 살아서 놀더라도, 내일 일은 뉘라 아나. 아마도 북한산 석비레 판에 살 맞아 죽은 혼이로구나. 에헤야요.』
 
174
하고, 모두 슬픈 듯한 목소리로 후렴을 부른다. 후렴이 끝나면, 일동은 꼼짝 아니하고 늙은 군사의 입만 바라본다. 늙은 군사의 주름잡힌 얼굴은 흐트러진 백발이 천줄기 만 줄기 함부로 늘어졌다. 여전히 얼씬얼씬 춤을 추며,
 
175
『에헤야요. 북한의 석비레 파지를 마라. 흩어진 백골을 건드릴라. 어즈버, 우리네도 한 번 아차 죽어지면 흩어진 백골이 되리로구나.』
 
176
할 때에, 볕에 글은 늙은 군사의 눈에서는 눈물이 번쩍번쩍한다. 후렴 받던 군사들은 후렴을 부르려다가 모두 목이 메어 울었다. 가실은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다 못하여 목을 놓아 울었다.
 
177
이때에 갑자기 영문 마당으로서 취군 나발 소리가 울려 온다. 군사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았다. 고구려 군사가 밤을 타서 한양성으로 쳐 들어오는 것이다.
 
178
가실도 남들이 하는 모양으로 활과 살통을 메고 칼 하나를 들고 나섰다.
 
179
영문 마당에는 수천명 군사가 길게 길게 열을 지어 늘어섰는데, 앞에는 어떤 말 타고 기 든 장수가 기를 둘러가며 군사들에게 호령을 한다.
 
180
『지금 고구려 군사가 무악재로 쳐 넘어오니, 너희는 마주 나가 싸우되, 만일 고구려 군사가 쫓기거든 북한산 끝까지 따라가라.』
 
181
고 한다. 이때에 난데 없는 화살 하나이 그 장수의 탄 말 귀를 스치고 날아 온다. 수천명 군사는 일제히 고함을 치고, 인왕산 모퉁이를 돌아 무악재를 향하고 달려 갔다.
 
182
새벽이 되어 촌가에 닭이 울 때에 군사들은 북한산 끝에 다다랐다. 고구려 군사는 죽은 사람과 말과 살 맞아 엎드러진 군사를 내버리고 낭비성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신라 군사 중에서도 이백여 명이 죽었고, 소리 메기던 늙은 군사도 어디 간지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가실은 그 이튿날 여기저기 찾아도 보고 물어도 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3. 三[삼]

 
184
이곳에 진 치고 있는지 십여 일 후에 용춘 장군과 유신 장군이 거느린 팔천 대군이 들어오기를 시작하였다. 신라 군사들은 모두 기운이 나서 이번 길에는 평양까지 들여치고야 만다고 팔을 뽐내었다.
 
185
그러나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한 삼십리 나가다는 한 오십리 쫓겨 들어오기도 하고, 다시 한 칠십리 나가기도 하여, 한강과 임진강 사이로 오르락내리락하기에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왔다 가고 여름이 왔다 가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늙어 죽고, 병나서 죽고, 활 맞아 칼에 맞아 죽고, 도망하고 도망하다가 붙들려 죽어, 군사는 점점 줄어 들고, 군사가 줄면 몇 십리 물러가서 새 군사 오기를 기다리고, 새 군사가 오면 또 평양까지 짓쳐 들어가고야 만다고 한 백리나 가다가 또 군사가 줄면 물러 오고, 밤낮 이 모양으로 오르락내리락 되풀이를 하여 언제 싸움이 끝날 것 같지도 아니하다.
 
186
일년만에 돌아간다고 떠나온 가실은 벌써 삼년을 지내어도 돌아갈 길이 망연하였다. 새로 오는 군사를 편에 혹 고향 소식을 듣기는 하건마는 고향으로 소식을 전할 길은 없었다. 오는 사람은 있으되 가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소식을 전하랴.
 
187
설씨 집 소식을 듣기는 삼년째 되던 해 봄이었다. 노인은 여전히 건강하다는 말과 그 딸은 아직도 시집을 아니 가고 자기를 기다린다는 말을 들었다.
 
188
그러나 얼마후에 새로 온 군사의 전하는 말을 듣건대, 그 곳 어느 양반과 혼인을 하게 되어 가을에 성례를 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가실은 이 말을 들을 때에 몹시 설었다. 그러나 돌아갈 길이 망연하니 어찌하랴. 삼년 전에 서울서 같이 떠난 군사 중에 하나씩 둘씩 다 없어지고, 이제는 옛 얼굴을 볼 수가 없으니, 자기 생명도 풀잎에 이슬이 언제 스러질는지 믿을 수가 없다. 더우기 이 가을에는 신라에서도 있는 힘을 다하고, 고구려에서도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운다는데, 그때 통에는 암만해도 살아 남을 것 같지도 아니하다. 군사들의 말이 고구려에는 나는 장수가 있어 눈에 보이지 아니하게 다닌다 하며, 이번에는 그 장수가 나온다 하니, 더욱 명년 봄을 살아서 구경할 것 같지도 아니하다.
 
189
삼년째 되는 구월 보름께 낭비성을 쳐 들어가자는 군령이 내렸다. 군사들은 모두 지리하고 집 생각이 나서 싸울 생각이 없었으나, 이번만 싸우고는 집으로 돌려보낸다는 바람에 죽으나 사나 마지막으로 싸워 보자 하고, 술과 고기를 잔뜩 먹고 나발을 불고 북을 치고 먼지를 날리며, 낭비성을 향하고 달려 들어갔다. 가실은 정신 없이 일변 활을 쏘며 일변 칼을 두르며 앞으로 앞으로 나갔다. 낭비성에서는 화살이 빗발같이 쏟아져 달려가던 군사들이 하나씩 둘씩 벌떡벌떡 나가 자빠진다. 가실은 여러 번 죽어 넘어진 군사, 아직 채 죽지는 아니하고 피를 푹푹 뿜는 군사를 타고 넘어, 밟고 넘어, 그저 앞으로 앞으로 달려갔다. 천지가 모두 티끌이니, 지척을 분별할 수도 없고, 천지가 모두 고각함성이니, 무슨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그저 가던 길이니 앞으로 나갈 뿐이다.
 
190
『씩.』
 
191
하고 소리가 나며 화살 하나이 가실의 왼팔에 박힌다. 가실은 우뚝 서며 얼른 뽑아버렸다. 낭비성이 차차 가까와질수록 곁으로 날아 지나가는 화살이 점점 많아진다. 얼마 아니하여 언제 박히는 줄 모르게 살 하나가 가실의 오른편 다리에 박히어 가실은,
 
192
『아이고.』
 
193
소리를 치고 자빠졌다. 가실은 죽을 힘을 다하여 다리에 박힌 살을 뽑았으나, 팔 다리에서 피는 콸콸 쏟고, 아프기는 하고 기운은 빠져서 몸을 꼼짝할 수도 없었다. 가실은 옷으로 가까스로 상처를 막고 죽은 듯이 쓰러졌다.
 
194
신라 군사가 으악으악 하며 자기 곁으로 뛰어 지나가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한참 있다가 무엇이 자기 다리를 잡아 쳐들기에 눈을 떠 본즉 어떤 고구려 군사 둘이 칼을 들고 서서 자기를 본다. 그 중에 한 군사가,
 
195
『이놈아, 안 죽었니?』
 
196
하고 발로 옆구리를 찬다.
 
197
『안 죽었다.』
 
198
하고, 가실은 그 군사들을 쳐다보며 대답한다. 다른 군사가 손에 들었던 칼로 가실의 가슴을 겨누면서,
 
199
『이놈, 이 신라 놈! 벌써 네 군사는 다 우리 손에 죽고, 몇 놈만 살아서 달아났다. 요놈 너도 이렇게 폭 찔러 죽일톄야.』
 
200
하고 가실의 가슴을 찌르려 한다. 가실은 잠깐 기다리라는 듯이 손질을 하며,
 
201
『얘, 너와 나의 무슨 원수 있니? 내가 네 아비를 때렸단 말이냐. 네 소를 훔쳤단 말이냐. 피차에 초면에 무슨 원수로 나를 죽이려 드니? 나도 늙은 부모와 젊은 아내가 있다. 내가 죽으면 그것들은 어찌잔 말이냐.』
 
202
하였다. 군사 하나이 칼 든 군사의 팔을 붙들어 잠깐 참으라는 뜻을 보이며,
 
203
『이놈아, 그럼 왜 활을 메고 우리나라에 들어왔어? 맨몸으로 왔으면 닭잡고 밥이라도 해 먹이지! 이놈아, 왜 활을 메고 와서 우리 사람들을 죽여! 너희 신라 놈들은 죄다 죽일 놈이야. 괜히 가만히 있는 고구려를 들쑤석거려서 우리도 이렇게 전장에 나오게 만들고…….』
 
204
가실은 의심스러운 듯이,
 
205
『고구려 놈들이 괜히 가만히 있는 신라를 들쑤석거린다는데!』 하였다.
 
206
『누가 그러든?』
 
207
하고 칼 든 군사가 성을 내며,
 
208
『우리 상감님 말씀이 신라 놈들이 먼저 혼란을 일으킨다든데.』
 
209
가실은,
 
210
『우리 상감님 말씀에는 고구려 놈들이 가만히 안 있고 괜히 남을 들쑤석거린다든데.』
 
211
한다. 세 사람은 말없이 서로 물끄러미 보고 섰다. 가실은 힘을 써서 일어나 앉았다. 목이 몹시 마르다. 그래 칼 든 군사더러,
 
212
『내가 목이 말라 죽겠으니, 물을 한 잔 다오.』
 
213
한즉, 그 군사는 어쩔 줄 모르고 한참 어릿어릿하더니, 칼을 칼집에 꽂고, 가서 개천 물을 떠다 준다. 가실은 꿀꺽꿀꺽 다 들이켰다. 그리고는 두 군사더러,
 
214
『너희들 나를 죽이지 말아라. 나도 오늘 종일 활을 쏘았으니, 너희 사람도 몇 명 맞아 죽었겠지마는, 내가 죽일 마음이 있어서 죽였니? 활을 주면서 쏘라니 쏘았지. 너희도 그렇지, 너흰들 무슨 까닭으로 괜히 사람을 푹푹 찔러 죽여.』
 
215
하고 곁에 놓인 활을 당기어 꺽어버리며,
 
216
『자, 이러면 활 없이 맨 몸으로 너희 나라에 들어온 사람이 아니냐.』
 
217
하였다. 두 군사는 말없이 서로 마주보더니,
 
218
『어떻게, 이놈을 살려?』
 
219
『글쎄, 죄다 죽이라고 그러는데…….』
 
220
『살려 주자…… 이놈의 말이 옳구나.』
 
221
『글쎄, 사로잡아 왔다고 그럴까.』
 
222
『응, 우리 이놈을 잡아다가 영문에 바치자. 죽이지 말고.』
 
223
이리하여 두 군사가 가실을 부축하여 영문으로 잡아 들여다가 장수에게 바쳤다.
 
224
장수는 가실의 손과 얼굴이 무식한 농군인 것과 미미한 졸병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구태 죽일 필요도 없다 하여 장에 내다가 종으로 팔았다.
 
225
마침 어떤 늙은 농부가 가실을 사서 소 등에 올려 앉혀 어떤 시골 촌으로 데려갔다.
 
226
얼마안에 살 맞은 자리도 나아, 가실은 도끼를 메고 나무도 찍으러 다니고, 장작도 패고, 밤에는 새끼를 꼬고 신을 삼았다. 처음에는 신라놈 잡아 왔다고 모두 구경을 오고, 아이들도 따라 다니며「신라놈!」「당나라 개!」 하고 놀려먹더니, 차차 가실도 자기네와 꼭 같은 사람인 것을 알게 되어, 일군들 끼리도 서로 친구가 되고 말았다.
 
227
봄이 오면 거름을 져 내고 밭을 갈았다. 가실은 신라사람이라 논 농사를 잘 하므로, 주인집 밭으로 논을 만들어 둘째 해에는 벼를 많이 거두어 맛난 쌀밥을 먹게 하였다 하여, 주인 노인은 가실을 종을 대접하지 아니하고, 가족같이 대우하게 되고, 동네 사람들도 모두 가실을 청하여다가 논농사하는 법을 배웠다. 고구려에서는 거의 전쟁이 끊일 날이 없어 농사를 힘쓰지 아니하므로, 논밭이 다 황무하고, 또 그때까지는 논농사하는 이는 평양 근방 밖에는 없었다.
 
228
이리하여 가실은 이 동네에만 이름이 날 뿐 아니라, 이웃 동네에까지 이름이 났다. 사람 좋고, 힘써 일 잘하고, 그중에도 논을 만드는 데는 선생이라 하여 칭찬이 들레었다.
 
229
이렁저렁 또 삼년이 지났다. 가실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주인 노인더러 놓아 보내 주기를 청하였으나, 주인은 본국에 돌아가면 도리어 생명이 위태하리라는 것을 핑계로 놓아 주지를 아니하고, 또 지금 열 여섯 살 되는 딸의 사위를 삼으려는 뜻을 가졌다. 원래 이 노인은 아들 형제를 다 전장에 보내고, 농사할 사람이 없어 가실을 종으로 사 온 것인데, 가실이 있기 때문에 농사를 잘하여 집이 부요해졌고, 또 가실의 사람됨이 극히 진실하고 부지런하여, 족히 자기의 만년의 일생을 부탁할 만하고 믿으므로, 아무리 하여서라도 사위를 삼아 본국에 돌아갈 생각을 끊게 하려 한 것이었다. 또 이 노인의 딸도 가실을 사모하였다. 그가 큰 도끼를 둘러메어 젖은 통나무를 패는 것과 소에게 한 바리나 될 만한 나뭇짐이나 곡식짐을 지는 것을 볼 때에 처녀는 가실을 사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30
가실은 다만 힘만 쓰는 사람이 아니요, 여러 가지 지혜와 재주도 있었다.
 
231
톱과 먹줄과 대패를 만들어다 두고, 여러 가지 기구도 만들고, 자기가 유숙할 사랑채도 짓고, 노인과 처녀의 나막신도 파 주었다. 그 나막신이 아주 모양이 좋고 발이 편하다 하여, 노인은 처녀를 시켜서 들기름을 발라 터지지 않게 하였다. 또 농사하는 여가에는 쑥대로 발을 만들고 밈통을 만들어 붕어와 잔고기와 게를 잡아 오면, 처녀가 앞 개천에 나가 말끔히 씻어다가 풋고추를 넣고 조려 먹었다. 노인은 이것을 썩 좋아하였다.
 
232
가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아니하고 무엇이나 일을 하였다. 그래서 그 집은 늘 깨끗하고 없는 것이 없었다. 눈이 오기 전에 벌써 산더미같이 나무가 쌓이고 짚신과 미투리도 항상 쌓아 두고 신었다. 지난 겨울에는 처녀가 처음 길쌈을 한다 하여 가실이가 종일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좋은 재목을 구하여다가 물레 같은 것과 베틀을 만들었다. 이것은 길쌈 많이 하는 신라 본이라, 고구려 것보다 훨씬 보기도 좋고 편리하였다. 이 밖에도 가실이가 한 일이 많거니와, 그의 지혜와 재주는 동네 사람들도 다 탄복하였다. 그래서 가실은 온 동네에 없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무슨 어려운 일이 있으면 부인네나 아이들까지도「가실이더러 좀 해달래야」하게 되었다.
 
233
가실이가 하는 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도 새 잡는 기계와 고기 잡는 기계도 만드는 것이 한 재미가 되었다. 또 가실이가 부지런한 것이 동네 사람의 모범이 되었고, 말이 적으나 한 번 말하면 그것은 꼭 참말이요, 꼭 그 말 대로 하는 것을 볼 때에 동네 사람들은 가실을 믿고 두려워하였다.
 
234
그러나 가실에게는 슬픔이 있다. 백년을 약속한 사람의 소식을 알 수 없고, 또 만날 기약이 망연하다. 그래서 주인더러 보내 달라고만 졸랐다. 하나 일년 일이 다 끝난 가을이 아니면 결코 보내 달란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봄이 되어 농사를 시작할 때가 되면, 다시는 결코 간단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금년 ── 고향을 떠난지 육년이 되는 금년 ── 열아홉 살에 떠나서 스물 다섯 살이 된 금년에는 아무리 하여서라도 돌아가리라 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저녁을 먹고 나서 노인을 대하여,
 
235
『저를 금년에는 보내줍시오.』
 
236
하였다. 노인은 깜짝 놀라는 듯이 돌아앉으며,
 
237
『왜 또 간다고 그러나? 내가 지금 자네를 믿고 사네. 내 나이 벌써 칠십이야. 자네가 가면, 내가 어떻게 사나.』
 
238
하는 노인의 말소리는 간절하고 떨린다. 곁에서 노파가 역시 떨리는 소리로,
 
239
『그렇고말고. 영감이나 내가 장성한 아들 다 전장에 나가 죽고, 자네를 우연히 만나서 아들같이 믿고 사는데, 자네가 가면 이 늙은 것들이 어떻게 산단 말인가. 아예 그런 소리 말아요. 우리 양주가 죽거든 다 묻어 놓고…….』
 
240
하고 곁에 앉은 딸의 머리를 쓸면서,
 
241
『이 애 데리고 아무 데나 자네 마음대로 가세 그려. 이 딸자식도 자네게만 맡기면 자네가 하늘 붙은 데를 데리고 가더라도 마음이 놓여』
 
242
한다. 처녀는 부끄러운 듯이 슬며시 빠져 부엌으로 나가더니, 큰 바가지에 삶은 밤을 퍼가지고 들어와서 방 한가운데 놓고, 어머니 등 뒤에 가 앉는다. 노파는,
 
243
『자, 가실이, 밤이나 먹게. 이게 안 좋은가. 자네도 부모도 없다니, 우리를 부모로 알고, 가속도 없다니, 이 애를 아내로 삼고, 그리고 벌어먹고 지나면 안 좋은가.』
 
244
하고 밤을 집어 가실을 주며,
 
245
『자, 어서어서 먹어요. 이 애가 자네 준다고 삶은 것 일세.』
 
246
하고 딸을 등 뒤에서 끌어낸다.
 
247
『아니야요, 어머니도.』
 
248
하고 딸은 고개를 숙인다. 가실은 밤을 벗겨 우선 노인 양주를 드리고 자기도 먹었다. 밤 껍질을 벗기는 가실의 손을 떨렸다. 진실로 가실은 어쩔 줄을 몰랐다. 만일 주인이 강제로 자기를 못 가게 한다 하면, 벌써 빠져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불쌍한 세 식구가 자기를 믿고 사랑으로 매어 달릴 때에 그것은 차마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가실은 힘이 센 것과 같이 정도 세다. 그러나 정이 센 것과 같이 의리도 세다. 정이 센지라 주인을 차마 뿌리치지도 못하거니와, 의리도 센지라 설씨의 딸에게 한 번 맺은 약속을 깨뜨리지 못한다.
 
249
가실이 연해 밤만 벗기고 대답이 없는 것을 보고 노인은,
 
250
『가실이, 우리 두 늙은이의 소원을 이루어 주게. 다시는 늙은 것의 가슴을 조리게 하지 말게.』
 
251
하고, 노인은 손으로 가실의 등을 어루만진다. 노파와 딸은 근심스러운 눈으로 가실만 바라보고 있다.
 
252
가실은 굳은 결심을 얻은 듯이 고개를 번쩍 들어 노인을 보며,
 
253
『저도 두 어른을 부모로 알고 있읍니다. 부모처럼 저를 사랑해 주시니 부모가 아닙니까.』
 
254
하는 가실의 말소리는 깊은 감동으로 떨린다. 가실은 눈물 머금은 어조로,
 
255
『그러나 저는 육년 전에 고향을 떠날 때에…….』
 
256
하고 말을 뚝 끊더니, 다시 말을 이어,
 
257
『제 자랑 같아서 아직 말씀을 아니했읍니다마는.』
 
258
하고 자기가 설 영감이라는 노인 대신으로 전장에 나왔다는 말과 일년 후에 전장에서 돌아오면 그의 딸과 혼인하기를 약속하였다는 말을 다하고, 나중에,
 
259
『제가 무엇이 그리워 고향에를 가고 싶겠읍니까. 백년을 맹세한 사람이 밤낮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러는 것이올시다.』
 
260
하고 말을 끊을 때에, 가실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 뚝 떨어진다. 노인 양주는 가실이 하는 말을 들을 때에 더욱 가실의 심정이 착하고 아름다운 것을 찬탄하고, 가실의 눈물을 볼 때에는 노인 양주도 같이 울었다. 딸도 어머니의 등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노인은 한 번 더 가실의 등을 어루만지며,
 
261
『자네는 하늘이 낸 사람일세. 과연 큰사람일세. 어쩌면 남을 대신하여 죽을 자리에를 나간단 말인가. 옛말로는 우리 조상적에 그런 사람이 있었던 말도 들었지마는, 자네 같은 큰사람은 칠십 평생에 처음 보네.』
 
262
하고 칭찬하기를 말지 아니하다가,
 
263
『내 어째 자네가 웃는 낯이 없고, 늘 수심기가 있어 보이기에, 그저 고향이 그리워 그러나 했더니, 자네 말을 듣고야 알겠네.』
 
264
하고 혀를 찬다. 노파도 눈물 씻고 목이 메인 소리로,
 
265
『내 어째, 자네가 차차 수척해 가기에 웬 일인가 했더니, 그래서 그랬네 그려.』
 
266
하고 역시 혀를 찬다. 딸은 슬며시 일어나 나가더니, 건넌방에서 흑흑 느껴우는 소리가 들린다.
 
 

4. 四[사]

 
268
이튿날 아침을 일찍 지어 먹고, 가실은 고국을 향하여 떠나기로 하였다. 노인 양주에게 세 번 절하여 하직하고, 삼년 동안 정들인 동네의 동구로 나올 때에 노인은 손수 노자할 돈을 가실의 짐에 넣어 주고, 노파는 의복과 삶은 닭을 싸서 들어다 주며, 동네 사람들도 여러 가지 물건과 먹을 것을 싸다가 가실의 짐에 넣어 주며,「부디 잘 가라」고,「죽기 전 한 번 만나자」고 언짢은 얼굴로 작별하는 인사를 하며 동구 밖 강가까지 나온다. 가실은「동네 어른들께 신세 많이 졌노라」고,「그러나 천여 리 먼 나라에 다시 올 길이 망연하다」고 손을 잡고는 석별의 인사를 하고, 손을 잡고는 또 석별의 인사를 하였다.
 
269
나룻배에 오를 때에 노인은 뱃머리에 서서 가실의 손을 잡고,
 
270
『부디 잘 가게. 잘 살게. 이 늙은 것이 다시 보기야 어찌 바라겠나마는, 가 보아서 설씨의 딸이 다른 집에 시집을 갔거든 내게로 돌아오게. 이제로 부터 이태 동안은 딸을 시집보내지 아니하고 날마다 자네 돌아오기만 기다리겠네.』
 
271
하며 눈물을 떨군다.
 
272
가실도 눈물을 흘리며 다만,
 
273
『녜……아버지!』
 
274
할 따름이었다.
 
275
차마 손을 놓지 못하여 한참 서로 잡고 울다가 마침내 배가 떠났다. 사공이「어야, 어야」하고 젓는 서슬에 파랗게 맑은 가을 강물에 잔 물결이 일며 배가 저쪽 언덕을 향하고 비스듬히 건너간다. 가실은 뒤를 돌아보며 나온 언덕에 모여선 수십명 남녀를 향하고 손질을 하였다. 그 사람들도 잘 가라고 하면서 손을 두른다. 노인은 아직도 배 떠나던 자리에 서서 멀거니 가실을 바라보고 이따금 한 마디씩 무슨 소리를 친다.
 
276
가실은 배를 내려 한 번 더 저편에 선 사람들을 향하여 손질을 하고 짐을 걸머지고 지팡이를 끌면서 서리 맞아 마른 풀 사이로 길을 찾아 동으로 동으로 향하고 간다. 가끔 뒤를 돌아보며 손을 둘렸다. 저쪽에서도 손을 두른다. 가실은 조그마한 산굽이를 돌아설 때에 마지막으로 두 팔을 높이 소리를 높여,
 
277
『잘 있으오!』
 
278
를 서너 번이나 외쳤다. 저편에서도 팔들을 들고,
 
279
『잘 가오!』
 
280
하는 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들린다. 가실은 마음으로 그 노인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흘렀다.
 
281
가실은 힘껏 소리를 뽑아,
 
282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우리 나라로 나는 돌아간다.』
 
283
하고 소리를 하고 지팡이를 드던지면서 동으로 동으로 고국을 향하여 걸었다.
 
284
 
285
一九二三年二月十二日(일구이삼년이월십이일)~二十三日(이십삼일)
286
《東亞日報》 所載
【원문】가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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