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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화공주 (善花公主) ◈
◇ 세 가지 길 ◇
카탈로그   목차 (총 : 5권)     이전 5권 ▶마지막
1941년
현진건
목   차
[숨기기]
 

1. 1

 
2
아월(阿月)이네 술청은 오늘 저녁에도 벅적대었다.
 
3
안주인이 젊고 아름답고 두름머리도 있고 너름새 좋기로, 술맛이 그럴듯하고 음식 솜씨가 깔끔하기로, 허다한 서라벌 서울 술집 총중에도 둘째 가라면 설워할 만한 유명한 주점이었다.
 
4
새벽 훤할 때부터 새벽 훤할 때까지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기실 낮도 없고 밤도 없이 손님이 잇대어들고 잇대어나서 열도 넘는 중노미들이 언제든지 종종걸음을 쳤다.
 
5
오늘 저녁 따라 맨드는 안주가 더 질번질번하고 식칼 소리가 더 요란한 것은 큰손님 치다꺼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양지머리도 둘이나 삶아 내놓았다.
 
6
비록 애저(兒猪)일망정 돼지도 너댓 마리 쪄내었다. 부침개질 냄새와 가리 굽는 연기가 뭉게뭉게 대문간으로 쏟아져 나와서 길 가는 사람의 회(蛔)까지 동하게 하였다.
 
7
널따란 대청을 치우고 이 날 밤의 큰손님인 낭도(郎徒) 한 패가 자리를 잡았다. 일행은 오십 명도 넘을 듯. 예닐곱 개씩 맞추어 놓은 화류목 교자상을 가운데 두고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쭉 둘러앉았다.
 
8
그들은 많아야 갓 스물, 열일곱 여덟의 고만고만한 나이들 같다. 호화로운 긴 복두(幞頭)를 일매지게 쓰고 구슬 복두 끈이 영롱하게 번쩍였다. 겉옷(表衣[표 의 ]) 위에 질끈질끈 졸라맨 쇠띠하며 홀가분한 감발이 자못 씩씩하였다. 맹렬한 운동으로 말미암아 나이보담 신체들은 발육될 대로 발육되었 으나, 그 애티나는 얼굴들은 볕에 그을려 검붉은 빛이 돌았으되 동탕하고 아름다워, 화랑(花郞)이란 글자 그대로 꽃과 같은 도련님들이요 서방님들이었다.
 
9
제 앉은 자리 뒤에 벗어 놓은 활 동개로 보아 그들은 활쏘기를 익히고 돌아오는 길인 듯하였다.
 
10
교자상 위에는 벌써 음식이 벌려졌다.
 
11
자배기만큼이나 큼직큼직한 청동 양푼에 술이 넘치도록 따루어져서 여나무 개나 놓여 있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왼 마리 돼지며, 가리구이며, 기름이 바글바글 끓는 듯한 전유어며 , 게다가 얼큰한 지짐이와 아담한 채소 안주가 곁들이어, 왕만한 술 양푼을 중심으로 구멍 틈틈이 그들먹지게 짭잘하게 늘어 놓였다.
 
12
그러나 둘러앉은 축들은 이따금씩 대문쪽을 바라다보기도 하고, 혹은 그 먹음직스러운 안주와 술을 힐끗 보다가는 그대로 외면해 버리고 어느 누구 하나 젓가락을 들려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아마도 누구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13
일각이 지났다, 이각이 지났다…….
 
14
안주인 아월이가, 음식을 장만하다가 말고 올라온 듯, 양념 묻은 손을 치마 꼬리로 감추며 나타났다.
 
15
"그저 안 오셨군요. 웬일이예요?"
 
16
허청대놓고, 어리광 피듯, 혀가 조금 짧은 듯한 말씨로 이런 말을 하고, 가늘게 그은 듯한 눈썹을 살짝 찡그려 보이었다.
 
17
갓 스물이 넘었을 둥 말았을 둥, 턱이 둘이 되도록 살이 너무 오른 것이 험이라면 험이로되 동그스럼한 흰 얼굴이 예쁘고 다정스러웠다. 두 눈가엔 찡그린 눈썹과는 정반대로 생글생글 웃음이 실룩거린다.
 
18
"보는 바와 같네."
 
19
좌중에서 익살 잘 부리기로 유명한 덧니박이가 한 마디 받았다.
 
20
"히 히, 히 히."
 
21
좌중은 안주인이 들어오니 별안간 생기가 돌고, 별로 우습지도 않은 말이건만 여기저기서 가만한 웃음과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22
여럿의 시선은 함빡 아월에게로 몰리었다.
 
23
아월은 여럿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시침을 뚝 떼었다. 무엇에 놀래기나 한 듯이 눈을 호동그랗게 떠서 말 받은 낭도를 알아본다.
 
24
"뭘 보랍시오, 대관절 뭘 보란 말씀입시오?"
 
25
여럿은 아월의 능청에 또 한번 와그르 웃어대었다.
 
26
"좌중도 둘러보고 술상도 둘러보고 청상도 둘러보고 녹수도 둘러보고 ……."
 
27
덧니박이 익살꾼도 지지 않았다.
 
28
"아이 맙시사, 그러다가 정말 노래를 부르시겠네, 호호호."
 
29
이번에는 아월이도 자지러지게 웃어대었다.
 
30
뭘 봤기에 저렇게 좋아라고 웃음이 터져 나올까? 캄캄 칠야 어두운 밤에 알뜰한 고운 님이 넌즈시 사창 문 여는 것을 봤단 말인가? 이웃집 총각이 남의 속사정도 몰라 주고, 기세 좋게 말을 타고 쭐레쭐레 딴 마을로 장가 길을 떠나다가 제 동네 동구 밖을 못 나가서 낙마하는 꼴을 봤단 말인가 ……?"
 
31
"아이, 인제 고만해 두세요. 그만해도 말솜씨 좋으신 건 왼 세상이 다 아는걸."
 
32
아월은 치마 밑에 숨겼던 손을 내어 짤래짤래 저으며 덧니박이의 말을 막았다.
 
33
"내 말솜씨보담 자네 손짓 솜씨가 더 좋으이."
 
34
"아이참, 이 국들이 다 식었겠네."
 
35
아월은 불현듯 생각이 난 것처럼 국 대접을 만져 본다.
 
36
"에구머니, 벌써 육초가 끼이고, 이거 안 되겠군."
 
37
하고, 한동안 어쩔 줄을 모르는 듯이 쩔쩔 매는 시늉을 하다가,
 
38
"얘들아, 이리 좀 오너라."
 
39
뜰 아래를 향해 소리쳐 불렀다. 중노미 서넛이 대령하는 것을 보자,
 
40
"이거 큰일 났다. 국이 다 식었구나. 소반들을 가져 나와 이 국그릇을 물려 내어라, 그러고 이 가리구이들도 다시 구워야겠다."
 
41
제가 앞장을 서서 일변 국그릇을 물러내며 종알거렸다.
 
42
"그럴 줄 알았으면 천천히나 차릴 것을, 진동한동 차리노라고 괜히 진땀만 빼었지."
 
43
"이거 미안하구려, 수고가 망칙하구려."
 
44
덧니박이가 또 괴사(怪辭)를 피었다.
 
45
"하고 말 게야 뭐 있어요? 아무리 맛없는 음식이라도 갓 해 놓을 때엔 그래도 뜨신 맛이라도 있지, 가뜩이나 변변치 않은 음식을 식혀 놓아야 되겠어요."
 
46
하고, 국과 가리구이를 훌훌 몰아 가지고 나려간다.
 
47
"이것 참 정말 미안하구료."
 
48
낭도 하나가 진정으로 미안해 하였다.
 
49
"괜찮아요. 대아찬께서 아시면 상급을 두둑이 나리시겠지요."
 
50
하고, 아월은 씽긋 웃고 살랑살랑 나려가 버렸다.
 
51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대아찬 눌문이었다.
 
 

2. 2

 
53
또 한 시각이 지났다. 눌문은 좀처럼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54
아월이가 올라와서 한동안 재재거리는 바람에 여럿은 사람 기다리기 지루한 것을 잠시 잊었다가 아월이가 나려가고 나매, 기다리기에 더욱 지쳤다.
 
55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56
"고대 뒤따라 온다는 이가 웬일일까? 이렇게 늦을 까닭이 없는데."
 
57
그 중에도 눌문과 절친한 문숙(文宿)이란 낭도가 침묵을 깨뜨렸다. 한 일(一)자로 죽 그은 두 눈, 진한 눈썹, 넙주룩한 입이 당차고 믿음직해 보였다.
 
58
"그래, 우두머리(눌문을 가리키는 말)께서 정녕 곧 뒤좇아 오신다든가?"
 
59
덧니박이가 다지는 듯이 채쳐 물었다.
 
60
"이 사람, 내가 한 입으로 두 말할 줄 아나? 오신다기에 오신다고 그랬지. 그게 무슨 당찮은 소린가?
 
61
문숙이가 벌컥 화를 내는 바람에 덧니박이는 멀쓱해졌다.
 
62
한창 몸을 쓰고 용을 쓴 끝이요 출출한 판이라 진수성찬을 코앞에 놓고만 있노라니, 배에서는 쪼그락 소리가 연달아 일어나고 목구녕에서는 손이라도 넘어 올 것 같다.
 
63
"초다짐으로 우리 한 잔 해 보세나그려. 술 한 양푼이만 돌라 먹어 치우고 안주도 한 접시만 먹으면 고만이니 왼 상을 휘정거릴 것도 없단 말이지.
 
64
어디 목이 컬컬해 견디겠나."
 
65
마츰내 일좌 중에 제일 몸이 가냘프고 먹고 마시기에 안달인 '아귀'라고 별명까지 있는 낭도가 이런 제의를 하였다.
 
66
여럿은 말없이 침을 꿀꺽 삼키었다. 먹고 마시고 싶은 생각은 피차에 굴뚝 같았지만 자기네의 우두머리가 오기도 전에 첫 입을 대는 것이 부당한 일인 줄 알기 때문이다.
 
67
"누가 먹기에 걸신이 들렸던 말인가? 그 동안을 못 참아서 첫 꼭지를 떼다니 될 뻔이나 한 수작인가?"
 
68
문숙이가 엄연하게 꾸짖었다. 여럿은 또 한번 말없이 침을 삼켰다.
 
69
또 한 시각이 지났다.
 
70
"고이한 일, 어째 입때 오지를 않을까? 무슨 별 탈이나 생기지 않았으면!"
 
71
문숙은 진국으로 걱정을 하였다.
 
72
"아무튼 대아찬 행동이 요새에 이상한 점이 더러 있었어."
 
73
낭도 하나가 생각난 듯이 이런 말을 하였다.
 
74
"그래 참, 자네 말이 옳으이. 그 불콰하던 얼굴이 혈색이 거칠고……."
 
75
누가 맞방망이를 친다.
 
76
"걸음걸이에도 풀기 하나 없어 보이고. 그야말짝으로 첩첩 수심에 쌓인 것 같아."
 
77
덧니박이가 그예 한 마디 거들었다.
 
78
"아마도 무슨 걱정이 생긴 모양이야."
 
79
"무슨 걱정이 있다면 우리에게 아니 알릴 리가 만무한데."
 
80
문숙이가 고개를 기울인다.
 
81
"우리에게 말 못할 무슨 비밀 걱정이나 아닌지?"
 
82
"생사를 같이할 우리에게 숨기는 일이 있을 리 만무하지."
 
83
문숙은 또 여럿의 말을 막았다.
 
84
"암만해도 어느 때보담 행동이 달라진 것만은 분명하이."
 
85
"첫째 오늘만 해도 그 백발백중하던 활이 왜 그렇게 빗나간단 말인가. 열 번에 서너 번이나 관혁을 못 맞추니."
 
86
"딴은 이상한 일이어, 그 솜씨에 생으로 화살이 허청을 치다니."
 
87
"여보게들, 말 말게."
 
88
하고, 아귀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89
"자네들 알다시피 내가 오늘 개자리 (화살이 관혁에 맞는가 안 맞는가, 바루 관혁 밑에다가 웅덩이를 파 놓고 사람이 들어앉아서 조사하는 곳)를 맡아보지를 안 했겠나. 대아찬 화살이 번번이 빗나가기에 그대로 군호를 하였더니, 나종에 시근벌떡 뛰어와서'또 안 맞았어.'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 서슬에 나는 아주 경풍을 할 뻔하였네."
 
90
"자기도 하도 맞지를 않으니 의심도스러웠을 게야. 귀신 붙은 활이라고 별명까지 듣던 활 솜씨가 아닌가? 그 솜씨가 어쩌면 그렇게도 줄어들까?"
 
91
"줄기야 줄었겠나마는 심기가 불편하면 어디 활이 제대로 나가나!"
 
92
"여북해야 활을 꺾어 버렸겠나!
 
93
"그 굼튼튼한 각궁이 한 번 우쩍 잡아당기는 바람에 지끈 부러지니."
 
94
"장사는 장사야."
 
95
"허, 이 사람 보게. 눌문 대아찬이 장사인 줄 인제야 알았단 말인가."
 
96
"어디 기운 불림하는 거야 내가 보았어야 말이지, 궁술과 검술이 뛰어난 것은 알았지만."
 
97
"그 장 치는 걸 좀 봐요. 채쪽을 후려 갈기면 장방울이 뺑소니를 치며 반공중에 날아 오르지를 않나."
 
98
"힘뿐인가, 날래기는 뛰엄질을 해도 두세 길은 예사로 훌훌 뛰어넘지 않던가."
 
99
"그가 누구의 아들이기에 북한산주 군주 눌최의 아드님이 아니신가."
 
100
"그 아버지가 당대의 맹장이라,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부전자전으로 완력과 날램도 대를 물리는 게지."
 
101
여럿은 중구난방으로 안 오는 눌문에 대한 비평이 들끓어 나왔다.
 
102
눌문의 힘없는 그림자가 아월이네 집에 나타나기는 그 뒤에도 한식경이 넘어서였다.
 
 

3. 3

 
104
눌문도 칠부와 수품에게 지지 않게 선화 공주를 사모하는 것은 다시 이렁성거릴 필요조차 없으리라.
 
105
눌문이 편으로 말하면 이 하늘 아래에 꽃 애기씨를 사랑하는 사람도 오직 자기 하나뿐이고 그분의 , 백년의 짝이 되고 그분의 꿀보담도 더 달고 불보담도 더 뜨거운 사랑을 누릴 사람도 오직 자기 하나뿐인 줄로 칠석같이 믿었다. 무슨 까닭으로? 아무런 까닭도 없다. 아무런 이유도 없다. 굳고 굳은 신념이 그에게 그럴 줄로, 그래야 될 줄로 믿게 하였을 따름이다.
 
106
어느 뉘가 감히 선화 공주를 사랑하랴, 어느 뉘가 감히 그의 남편이 될 것이랴. 오직 자기가 있을 뿐이다. 자기야말로 하늘이 내신 꽃 애기씨의 천정배필이다. 자기 이외에 그분의 신랑감이 있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내가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요, 옳지 못한 일이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07
그만큼 그의 사랑도 뜨거웠다. 그만큼 그의 자부심도 강하였다. 하늘을 쓰고 도리질을 하는 것도 하려면 못할 것이 아니라는 타오르는 청춘의 힘이 그에게 턱없는 자존심을 주었던 것이다. 셋 중에 그의 나이 제일 어리기도 하였다. 어리다고 해야 그는 금년에 열아홉, 가장 많다는 칠부가 스물둘, 수품이가 갓 스물이다.
 
108
그런 때문에 그는 하루바삐 꽃 애기씨를 옆에 두고 아침으로 저녁으로 대하지 못하는 것만이 한 가지 번민이라면 번민이로되, 다른 두 사람 모양으로, 혹시나 남에게 앗길까 봐 조바심을 하고 애를 태우지는 않았다. 어느 때든지 선화 공주는 자기 품속으로 돌아올 줄로 믿고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동무들을 시새는 마음이란 털끝만치도 없었다.
 
109
그가 선화 공주를 공공연하게 만나보기는 저번 한가위 잔치까지 세 번밖에 안 된다. 첫 번은 진평왕이 등극하시는 의식을 거행할 때 두 분 형님과 함께 왕과 왕후의 뒤에 모시고 선 것을 보았고, 둘째 번은 하늘에서 나리신 옥대(玉帶)를 띠실 때에, 길고 긴 옥대 한끝을 무거운 듯이 쳐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외에는 모후(母后) 마야부인(摩耶夫人)을 뫼시고 절에 행차를 하실 때 어른어른하는 수레 주렴 안으로는 수없이 보았다.
 
110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그 얼굴에 마음을 조인다는 것보담도 저렇듯 아름다운 분이 내 안해가 되거니 생각하매, 주체를 못할 기쁨이 왼 몸과 넋을 뒤흔들었다.
 
111
이번 한가위 잔치에는 정말 오랜만에 꽃 애기씨를 정면으로 대하게 되었다. 그 날 밤 잔치에는 파격으로 젊은 축들을 앞줄에 앉히었다. 알고 보면 왕과 왕후께서는 사윗감을 고르시노라고 젊은이 축의 행동을 눈여겨 보시라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112
눌문이가 가장 나이 어린 덕으로 맨 앞줄에 나올 수 있었다.
 
113
왕후 편으로는 가장 젊은 선화 공주가 역시 맨 앞에 앉게 되었다.
 
114
눌문과 꽃 애기씨의 거리는 몇 자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다른 누구보담도 꽃 애기씨를 자주 보고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115
─ 저분과 나는 천상배필이라 이런 자리에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대하게 되는구나.
 
116
이런 생각을 하매 눌문은 길길이 뛰어도 이 기쁨과 행복에 배겨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117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꽃 애기씨가 얼굴을 환하게 내어놓지 않는 것이 한이라면 한이었으되, 이따금 드는 맑고 어여쁜 눈길은 제 얼굴 위로 이 글이글하게 흐르는 듯이 느껴졌다.
 
118
밤 잔치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의 발은 땅에 닿지 않고 겅정겅정 뛰었었다.
 
119
여럿 사이에 선화 공주 평이 나올 제 눌문의 어깨는 으쓱으쓱 저절로 추켜 올려졌다. 필경엔 그의 입술은 미끄러지고 말았다.
 
120
"흰 기름이 엉긴 듯한 그 고운 살결은 손만 대도 손바닥 밑에서 그대로 녹아나릴 것만 같애."
 
121
이것은 오늘밤에 제가 꽃 애기씨를 가까이 보고 여러 번 느낀 실감이었다.
 
122
이 말을 수품이가 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23
무엄하다고 책망하여도 분통이 터질 노릇이거늘, 칼까지 빼어들고 들이덤비니 눌문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고 말았다. 한칼에 수품을 두 동강이를 내어도 시원치 않았다. 검술로야 수품이쯤이 원래 대적이 아니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피차에 술이 취했기 때문에 칼끝이 정통으로 들어맞지를 않아 큰일에는 이르지 않고, 칠부의 도도한 웅변에 눌리어 칼을 던지고 만 것이었다.
 
124
샐녘에야 집으로 돌아와, 곤죽이 다 된 몸을 침상 위에 던지면서도 수품이 괘씸한 생각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었다.
 
125
제깐 놈이 언감생심 ─ , 나에게 칼을 빼어들고 들이덤비다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흥.
 
126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코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127
─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적어도 몇 천 명 낭도의 우두머리다. 네 아비가 이찬 벼슬께나 다닌다고, 괘씸한 놈.
 
128
잠이 어릿어릿 오면서도 눌문은 주정 반 잠투세 반으로 뽐내 보았다.
 
129
─ 대관절 꽃 애기씨가 네놈에게 무슨 관계냐. 무엄하니 마니, 내 장래 안 해 칭찬을 내가 하는데 네놈이 무슨 개소리 쇠소리냐. 건방진 놈, 우스꽝스러운 놈, 흥.
 
 

4. 4

 
131
─ 왜 수품이가 칼을 빼어들고 덤볐을까?
 
132
그 이튿날 늦잠을 깨고, 새 정신이 돌아오자, 눌문의 머리에 떠오르기는 첫째 이 의문이었다.
 
133
수품의 언사와 행위가 한없이 분하고 괘씸도 하였지마는, 그 속에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숨겨 있는 것 같았다.
 
134
꽃 애기씨가 아무리 공주님이요, 높고 귀하신 분이기로, 그 살결을 곱다고 한 것이 그렇게 죄 될 말일까, 무엄한 소리일까? 설령 무엄하다 하기로서니, 오늘날까지 그대도록 친하던 사이에 죽이려고 야심을 먹을 까닭이 무엇일까?
 
135
수품의 칼끝엔 분명히 살기와 독기가 어리었다. 술김에 작난삼아 빼어 든 칼 같지는 않았다. 달빛에도 그 타는 듯한 핏발 선 눈과 앙다문 이빨이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마치 저와 나와 무슨 불공대천지수나 맺힌 것처럼.
 
136
순진한 눌문으로도 까닭 붙은 일인 줄은 어렴풋이 짐작이 안 날 수 없었다.
 
137
문득 소리소리 외치던 수품의 말 한 마디가 귓가에 앵하고 울리었다.
 
138
"이놈! 꽃 애기씨를 손에만 대었담 봐라, 한칼에 네놈의 몸은 두 동강이가 될 줄 알아라!"
 
139
뼈가 맺히고 가시가 든 소리였다.
 
140
─ 혹시나 그놈도 꽃 애기씨를 사모하는 게나 아닐까?
 
141
눌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142
─ 옳다. 적실히 그놈도 꽃 애기씨에게 항의를 품은 모양이다. 어림도 없는 놈! 수품이 뇌이던 말낱이 샅샅이 살아온다.
 
143
"네까짓 놈의 입길에 꽃 애기씨가 오르나리는 게 살이 떨린단 말이다. 피가 끓는단 말이다!"
 
144
들을 그 때에는 흥분한 나머지 무슨 뜻인 줄 얼른 알아듣지를 못하였으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꽃 애기씨는 제 사랑이니 이름도 이렁성거리지 말라는 말이 분명하다.
 
145
눌문은 난생 처음으로 제 사랑의 경쟁자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제 이외에도 감히 선화 공주를 사모하는 작자가 있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146
─ 어림도 없는 놈! 그 다 뒤어져가는 말라깽이가 허.
 
147
코웃음을 쳐보았으나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148
활쏘기 내기를 하든지, 검술로 겨누든지 도저히 자기의 적수가 아니었다.
 
149
그양 힘으로 주먹다짐을 하여도 수품이쯤 여나문 달겨들어도 눈꼽만큼이라도 겁낼 것이 못 된다.
 
150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넘볼 경쟁자는 아니었다.
 
151
지체가 저보담 못하기는커녕 오히려 나은 편이었다. 벼슬 계제도 저보담 한 등이 높았다. 휘추리같이 가는 몸피가 불면 날을 것 같지만 맴시가 있고, 희고 갸름한 얼굴이 여우 새끼 모양으로 예쁘장스럽기도 했다.
 
152
부마가음이란 어디 무예(武藝)로만 뽑는 것이 아니매, 혹은 문벌 덕택으로 백우의 화살이 수품에게로 가지 말란 법도 없을 것 같았다.
 
153
눌문은 새로운 번민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154
─ 그런 줄 알았으면 그 때 한칼로 그놈의 목을 뎅겅 베고 말 것을!
 
155
눌문은 후회하였다. 저 쪽에서 선손을 걸고 칼부림을 하는 그 좋은 계제에 후환을 없애지 못한 것이 새삼스럽게 뉘우쳐졌다.
 
156
번민의 몇 날 몇 밤이 지나갔다.
 
157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 쪽이 불리하기만 한 생각이 들었다. 첫째로 꿀리는 것은 자기 아버지는 멀리 변방에 있고, 수품의 아버지 수을부는 상대등 다음 가는 이찬 지위에 있어 왕의 은총도 두터워 한창 서슬이 푸르다.
 
158
부자가 서로 짜고 무슨 간책을 꾸며낼는지도 모른다. 지금쯤은 귀신도 모르게 수품이가 꽃 애기씨의 부마로 작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159
눌문은 안절부절을 못하였다.
 
160
그러던 판에 괴상한 풍문이 그의 귀에 들렸다. 그것은 자기가 맏부마의 물망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161
눌문은 펄쩍 뛰도록 놀랐다. 칠부만 못하지 않게 그의 고민은 컸다. 상대 등과 이찬을 아버지로 모신 칠부와 수품과는 달라서, 그는 궁중 지밀한 일을 손살피같이 알아낼 길이 없었던 것이다.
 
162
이 풍문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정해 낼 재조는 없지마는 수품이 부자가 꾸며 낸 듯한 간책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자기를 맏부마로 추켜올려 세워서 꽃 애기씨에게 대한 사랑의 길을 영영 막아 버리고, 수품이 제가 어엿하게 꽃 애기씨의 백년랑군이 되려는 흉계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163
─ 수품이 네놈이, 수품이 네놈이!
 
164
눌문은 분통이 터져서 몇 번이나 주먹으로 땅바닥을 치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산으로 들로 헤매며, 입버릇처럼 수품의 이름을 뇌이고 또 뇌이었다.
 
165
─ 밤을 타서 궁중에 들어가, 꽃 애기씨를 들쳐업고 멀리 멀리 달아나자.
 
166
깊숙한 개골산으로나 북한주로 달아나자. 둘이 손에 손목을 이끌고 한번 달아 난 다음에야 수품의 아비가 제 아무리 서슬이 푸르다 한들 혈마 우리 둘을 어찌 하랴.
 
167
더구나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168
지난 한가위날 밤 잔치에서 꽃 애기씨와 누구보담도 가까이 앉았을 적, 꽃 애기씨는 정녕코 자기를 보고 또 본 것 같았다.
 
169
본 것 같은 게 아니라, 분명히 그 어여쁜 눈매가 정다웁게 자기를 쓰담고 지나간 줄 믿었다. 꽃 애기씨를 만나기만 해서 이런 사유를 알으켜 주면 그분은 의심 없이 자기를 따라 나설 것이었다.
 
170
이리하여 눌문은 그 날 밤으로 궁장을 뛰어넘었었다.
 
 

5. 5

 
172
덮어놓고 궁장을 뛰어넘으니 마츰 궁중 후원이었다. 아름드리 낙락장송 뒤에 몸을 숨기고, 가쁜 숨을 돌릴 겸 눈을 어둠에 익힐 겸 한동안 죽은 듯이 서 있었다.
 
173
사면은 괴괴하게 인기척이 없다. 후원 한복판 석가산 모옥 밑 연못에서 잉어가 뛰는지 이따금 풍덩풍덩 하는 물소리가 그윽히 들려 온다. 멀리 보이는 전각에도 사초롱의 초가 거의 다 닳았는지 불빛이 희미하다.
 
174
몇 번 궁중 잔치에 참예하기 때문에 이 후원의 발새는 그리 서툴지 않았지만, 이 후원에는 전각이 없고 비록 낮고 작을망정 또 다시 중문을 지나고 내장을 넘어야 전각이 있고, 왕과 왕후가 계시는 정침을 동으로 끼고 돌아 남으로 치우친 곳에 애기씨들이 거처하는 별당이 있는 것을, 눌문은 어렴풋이 짐작하였다.
 
175
궁장을 한번은 뛰어넘었지만, 또다시 담을 뛰어넘을 것이 성이 가시어, 혹은 중문이 열리지나 않았나 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중문 가까이 가 보니, 중문은 벌써 잠기었고, 게다가 파수병이 창을 짚은 채, 끄덕끄덕 졸고 섰다.
 
176
귀찮으나 또 담을 하나 넘을 수밖에 없다. 한 길도 되락 되락 한 담이라, 발소리도 내지 않고 그대로 사뿐 뛰어넘을 수 있었다.
 
177
정침을 멀리 돌아, 애기씨의 처소 가까이 이르기는 하였으나 어느 것이 꽃 애기씨의 처소인지 얼른 분간을 할 수 없었다.
 
178
공주가 세분이니 집채도 셋이고 맨 끝이 셋째 공주의 처소이니 지레짐작을 하였더니, 전각도 여남은 채가 될 뿐 아니라, 채마다 담이 있고 문이 있어서 또 담을 몇 개 더 뛰어넘어야 될지 방도가 나서지를 않았다.
 
179
눌문은 어둠 속에 선 채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180
구중궁궐이라더니 실상 들어와 보니 열 겹 스무 겹도 더 넘을 것 같았다.
 
181
설령 또 다시 담을 넘고 또 넘어 용하게 꽃 애기씨의 처소를 찾아낸다 하여도 덧문까지 첩첩이 닫히었으니 무슨 수로 꽃 애기씨를 만나볼 것이냐.
 
182
그까짓 덧문쯤이야 뻐개고 들어가기가 용이한 노릇이로되, 한번 와지끈하는 소리가 나는 날에는 시녀들이 잠을 깨고 파수병이 뛰어와서 만사가 틀릴 것은 아무리 앞뒤를 가리지 않는 눌문에게도 뻔한 일이었다.
 
183
눌문은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섰던 그 자리에서 무너지는 듯이 주저앉고 말았다.
 
184
처음 계획대로 그분을 들쳐 업고 달아나는 것은 애저녁에 틀린 수작이니 단념도 하겠지만, 그 애를 쓰고 허위단심 여기까지 들어와서 그분의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그대로 발길을 돌린단 말인가.
 
185
먼빛이라도 좋다. 그분의 그림자라도 보고 싶다. 비단 창 위에 흐릿이 비치는 그림자라도 좋다.
 
186
이윽고 눌문은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세상없어도 꽃 애기씨의 처소를 찾아내고야 말리라고 또 한번 결심을 한 것이었다.
 
187
방안에는 불을 켰는지 모르지만, 덧문이 빈틈 없이 닫힌 탓인지 불빛 하나 새어 흐르지 않았다. 세 번 장대 위에 드높은 전각들이 나는 추녀(飛檐 [비첨])를 반공에 솟구치며 어둠 속에 삼엄한 자태를 잠그었다.
 
188
눌문이가 어딘지 질정을 못하고 몸을 담에 부비며 조심조심 이리저리 헤맬 제, 문득 쩌렁쩌렁 창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189
대담한 눌문으로도 머리끝이 쭈뼛해지고 등골에 찬 땀이 오싹 흘렀다. 종잇장처럼 담에 몸을 붙이고 숨결을 죽였다.
 
190
순행 도는 시각이 되었음이리라. 궁문 있는 쪽에서 시위부 군사 너댓이 창을 휘두르며 이리로 향해 올라온다.
 
191
─ 인제 두수 없이 죽었구나.
 
192
눌문은 생각하였다. 몸을 움직여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도 없었다. 이야말로 움치고 뛸 수도 없었다. 운명을 하늘에 내어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193
군사들은 만뢰가 구적한 가운데 자기네들만 살았다는 듯이 저벅저벅 발소리를 높이 울리고 이리저리 휘돌아보며 올라왔다.
 
194
그들의 눈초리가 자기 서 있는 곳으로 모인 듯하여 눌문은 오마조마 가슴이 뛰놀았으나, 다행히 그들은 별당 근처는 바라다만 보고 정침 앞을 휘돌아 다시 나려가고 말았다.
 
195
그들의 발소리가 아주 멀리 사라진 뒤에야 눌문은 입때껏 참았던 숨길을 한꺼번에 모두꾸려 내쉬었다.
 
196
일각 일분이라도 지체할 자리가 아니었다.
 
197
눌문은 오던 길로 다시 돌아섰다. 궁 안을 벗어날 더 빠른 길이 있을 것도 같았지만 밤새 익은 오던 길을 그는 다시 취하기로 하였다.
 
198
안 궁장은 소리도 안 내고 뛰어넘을 수 있었다.
 
199
후원으로 빠져 나왔다. 후원 문 지키는 파수병이 이번에는 졸지 않고 창을 두르며 왔다 갔다 하는 꼴이 멀리서 얼른 보이었다.
 
200
눌문의 마음은 급하였다. 아까 시위부 군사들이 도루 나려가기를 기다리는 데 진땀을 빼었다.
 
201
지금 예까지 빠져 나와서 궁장 하나만 뛰어넘으면 아주 궁 밖으로 나서는 이 판에 다시 은신을 하고 이 파수병의 동정을 또 보살피기엔 진저리가 났다.
 
202
그는 다짜고짜로 줄달음을 쳐서 아까 뛰어넘어온 궁장 밑을 찾아갔다. 제 귀에도 제 발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203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장에 뛰어오르기는 하였으나,
 
204
"이놈! 게 있거라."
 
205
호통을 치고 파수병이 등뒤에 뛰어오는 것만 같았다.
 
206
未完[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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