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선화공주 (善花公主) ◈
◇ 불행한 행운 ◇
카탈로그   목차 (총 : 5권)     이전 3권 다음
1941년
현진건
목   차
[숨기기]
 

1. 1

 
2
칠부의 아버지 노리부는 칠순이 휠씬 넘어 팔순을 바라보는 늙은 재상이었다.
 
3
훤출한 키, 둥그스럼한 얼굴이 풍신도 좋으려니와 떡 벌어진 어깨판하며 꾸정꾸정한 허리하며 젊은 사람 뺨칠 만큼 건강하였다. 다만 이가 다 빠져 합죽한 입과 은사실 같은 흰 수염이 늙은이다웠을 뿐. 여섯 간이 넘는 넓은 방에 혼자 앉았으되 왼 방안이 거들먹하게 찬 듯하였다.
 
4
"아버지, 불러 계시오니까?"
 
5
장지를 열고 읍하고 서는 아들을 힐끗 바라보는 눈엔 자애가 흐르면서도 번쩍하고 광채가 돈다.
 
6
"이리 들어와 가까이 앉거라."
 
7
자상스러우나 그 목소리는 우렁우렁 울리었다. 한창 당년 천군만마를 질타하던 호령조가 어딘지 남아 있는 탓이리라. 그는 한 나이나 젊었을 적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에 여러 차례 출전을 하였고, 그 때마다 번번이 대공을 이루어 오늘날 상대등의 높은 지위를 차지한 터이라, 오로지 문벌 덕택으로 벼슬계제만 올라간 위인과는 저절로 그 유가 달랐던 것이다.
 
8
칠부는 분부대로 공손히 들어와 아버지 멀지 않게 꿇어 앉았으나, 아까 제 방에서 생각하던 바와 같이 그렇게 쉽사리 제 사정을 이 아버지 앞에서 털어놓기가 여간 거북하고 어려운 노릇이 아닌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었다.
 
9
머리는 저절로 수그러지고 몸은 저절로 웅숭그려졌다.
 
10
노리부는 칠부의 앉은 꼴을 보고,
 
11
"그 앉음 앉음이 뭐냐?"
 
12
못마땅한 듯이 화를 내었다.
 
13
칠부는 가슴이 덜렁하였다. 역정만 내신다면 마른 나무에 불 붙는 듯하는 아버지의 성정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14
틀렸구나 ─ ! 속으로 생각하고 제출물에 실망을 하였다.
 
15
"아무리 아비의 앞이기로 사내자식이 그렇게 궁축하게 기를 못 펴고 앉았단 말이냐, 쯧쯧."
 
16
아버지는 혀까지 찬다. 그러나 얼마나 깊은 사랑이 그 말 속에 숨겼느냐.
 
17
칠부는 오늘 따라 흑 하고 눈물이 날만치 감격하였다. 이런 좋은 아버지시니, 그 말씀을 사뢴다 해도 큰 꾸중을 모시지 않을 듯. 칠부의 가슴은 까닭 없이 두방망이질을 한다.
 
18
"그래, 너 요새『손자』병서를 보느냐?"
 
19
아버지는 엄부(嚴父)의 탈을 벗고 점점 자부(慈父)의 본색을 나타내었다.
 
20
"네에."
 
21
칠부의 대답 소리도 흥겨로웠다.
 
22
"그래, 뜻을 알겠더냐?"
 
23
"자세히는 모르옵지오만……."
 
24
칠부는 어리광 피듯 몸을 한번 추술렀다.
 
25
"자세히는 몰라도 대강은 안단 말이냐?"
 
26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27
"그 어수선한 한문을 무슨 수로 알알 샅샅이야 알 수 있겠느냐? 대강만 짐작을 해도 그만이지."
 
28
"네에."
 
29
칠부는 허청대 놓고 또 한 번 대답하였다. 실상인즉 아버지가 『손자』 병서를 손수 구해 주신 지가 한 달이 넘었다. 그렇게 술도 많지 않은 책이로되 이 때까지 다 읽지도 못하였다. 한문에 대한 남 못하지 않은 재주를 가져 문리까지 환하게 터진 칠부이매, 그 해석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아니지만, 읽은 대문조차 읽을 때뿐이지 도모지 기억이 남아 있지를 않았다. 아니, 읽을 그 때에도 무슨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애당초부터 몰랐다는 것이 옳을런지 모르리라.
 
30
그대도록 이마적 그의 왼 머리가 마음은 선화 공주에게 쏠리었던 것이다.
 
31
── 만일 아버지께서 강이나 하라시면 어떡하나.
 
32
불현듯 일어나는 생각에 칠부는 속으로 쩔쩔매었다.
 
33
"그래, 말타기와 칼쓰는 것보담 더 재미가 있더냐?"
 
34
아버지는 잼쳐 물었다.
 
35
"……."
 
36
칠부는 이 엉뚱한 질문에 무에라고 대답을 해야 옳을지 몰랐다.
 
37
그래 요새는 " , 글공부만 하고 검술 공부는 도모지 않는단 말이냐?"
 
38
아버지의 두 번째 엉뚱한 신문이 또 떨어졌다.
 
39
칠부는 더욱 움찔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검술을 여간 사랑하지 않는 줄 잘 안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한번 칼을 잡으면 천하에 대적할 이가 없었다는 검객이기도 하다. 필마단도로 적진을 짓쳐 들어가면 수많은 적군은 물길 갈라지듯 흩어지고 거침없이 적장의 머리를 버혀 기공을 세우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진 재상이 되어 칼을 놓은 지도 벌써 수십 년이 넘지마는, 지금도 칼집을 황금으로 장식한 삭방검 한 자루는 언제든지 벽상에 걸려 있었다. 그는 중원에서 나는 이 명검을 손에 넣으려고 수천금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칼에 대한 애착조차 깊었던 것이다.
 
40
칠부는 저도 모를 사이에 불빛을 받아 유난히 번쩍이는 황금 칼집을 쳐다보며,
 
41
"네에, 이따금씩 후원에서 검술 공부도 합니다."
 
42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제가 턱없는 사랑에 얽매이어 검술 공부까지 집어 치웠다면 앉은자리에 당장 벼락이 떨어질 것은 뻔한 일이 아니냐. 더구나 한번 아버지의 비위를 거스리는 나달에는 제 소원과 계획이 한꺼번에 물거품으로 사라질 것이 아니냐.
 
43
"정말이냐?"
 
44
아버지는 한번 다지고 그 광채 도는 눈이 칠부를 쏘아본다.
 
 

2. 2

 
46
── 아뿔싸, 내가 괜히 거짓말을 하였구나, 아버지께서는 내 폐부까지 꿰뚫어 보시는구나.
 
47
칠부는 송구스러워서 안절부절을 하였으나, 아버지는 이내 천장을 쳐다보며 자탄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48
"흥, 인제는 내가 귀까지 먹었나 보구나. 네 칼 우는 소리도 벌써 아니 들린 지가 오래니."
 
49
칠부는 더욱 양심이 찔리었다. 이대도록 저를 믿어 주시는 아버지를 속인 것이 죄송스러웠다. 지금 사뢴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란 것을 까바치기 위해서라도 선화 공주 일절을 설파해야 되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는 도실러 앉기까지 하였지마는 좀처럼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50
부자 사이에는 잠깐 침묵이 흘렀다.
 
51
노리부도 무슨 깊은 생각에 잦아진 듯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눈을 번쩍 떴다.
 
52
"그래,『손자』병서도 읽고 검술 공부도 하고, 오 ─ 그래서……."
 
53
노인답게 아까 한 말을 또다시 되풀이한다.
 
54
"너도『손자』의 뜻을 대강 짐작한다니 말이지.『손자』란 정말 천하에 첫 손가락을 꼽을 기서(奇書)이니라. 한적(漢籍)이 아무리 많다 하나 『손자』만한 기이한 서적은 다시 없느니라. 그네들의 소위 성경현전보담도 내 생각엔 더 특이한 책인 줄 안다. 그야말로 만인적(萬人敵)을 알으키는 좋은 책이니라. 그러나……『손자』를 읽어 안다 한들……."
 
55
노인의 말끝은 흐리마리하다. 다시금 골똘히 무슨 생각을 하다가,
 
56
"『손자』를 홑으로 병서로만 알아서는 아니 된다. 책 지은 사람이 병법의 대가라고 해서 꼭 전쟁에만 소용 있는 책인 줄 알아서는 안 된단 말이다. 그야 물론 싸우는 데 필요한 진리와 술법을 늘어놓은 것이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성현이 설파 못한 진리까지 적힌 책이니라. 전쟁이란 하필 갑옷 투구하고 창과 칼을 들고 나서야만 전쟁이 아니니라. 넓게 생각하면 이 세상이란 왼통 전쟁터다. 그러니 우리 일상 생활에도 병서는 물론 필요한 것. 이왕 시작한 터이니 잘 읽어는 두어라마는……."
 
57
노인의 말투는 점점 이상해진다. 칠부는 속으로 의아하였다. 기껏 자기가 읽어라 해 놓고, 읽어나 두어라마는 ─ 이라 함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아무리 정정은 하셔도 노인은 역시 노인이시라, 이게 소위 망녕의 시초인지도 모른다. 효성스러운 칠부는 어쩐지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58
"아버지, 읽어나 두란 말씀은 무슨 뜻이시온지?"
 
59
칠부는 한번 채쳐 물어 보았다.
 
60
어느 사이인지 아버지는 눈을 딱 감고 몸을 흔들흔들 하시며 얼른 대꾸가 없으시다. 그럴싸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합죽한 입이 더욱 합죽해진 것 같고, 흰 구레나룻 옆으로 불쾌한 뺨빛이 적이 젖힌 것 같았다.
 
61
"쓸데가 없기로 좋은 책을 읽어두는 게 안 될 짓이란 말이냐?"
 
62
이윽고 아버지는 도리어 더럭 화증을 내었다.
 
63
"그러고『손자』전편의 정수가 어느 마디에 뭉쳐 있는 줄 네가 아느냐?"
 
64
"……."
 
65
칠부는 아버지의 뜻하지 않은 역정과 힐문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66
"『손자』의 천언만언 중에 이 한 마디에 가장 뼈가 맺혔느니라. 한자로는 뭐라든가…… 으, 치지사지이생(置之死地而生)이라든가, 죽을 땅에 놓아 두어야 산다는 말이다. 참 용한 말이니라. 꼭 죽을 땅에 두어야 산다는 것은 물론 군사를 가르친 말이겠지만, 제 몸도 죽을 땅에 던져 놓아야 살아나는 길이 나서는 법이니라 . 몸을 사리고 살 곳을 찾는 사람은 정말 죽을 고비로 걸어들게 되느니라. 목숨을 떼어놓고 대드는 사람에겐 언제든지 살 길이 열린다는 말이다. 이 한 마디를 부디 명념하여라."
 
67
칠부는 아버지의 유언이나 듣는 듯이 눈시울이 뜨끈뜨끈해졌다.
 
 

3. 3

 
69
아버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금 말끝을 이었다.
 
70
"나는 오늘날까지 네가 하루바삐 자라서 국가의 간성이 되기를 빌었었다.
 
71
지금 비록 나라의 힘은 나날이 늘어간다고는 하지마는, 동해 바다 한 모서리에 붙은 손바닥만한 이 나라가 아니냐. 백제를 아우르고 고구려를 품에 넣어 삼한을 통일한 다음에 강대한 한족과 중원 천지를 각축할 것을 생각하면 이 땅에 태어난 자로 오죽 할 일이 많으냐. 해서 보람 있는 일이 산같이 쌓이지 않았느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고 나라를 북돋우고 문호를 빛내기가 손바닥 뒤집기보담 더 쉬운 이 때가 아니냐. 이야말로 남아로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 이 좋은 판국에 부드럽고 향기로운 뒷방 구석에 틀어박힌다는 건, 피가 끓는 젊은이로는 차마 못할 노릇……."
 
72
아버지의 어세는 나리지르는 폭포와도 같이 급격해진다.
 
73
칠부는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이 덜컥덜컥 나려앉았다. 아버지는 어디서 어떻게 아셨는지 제 옹졸한 속을 화경같이 들여다보신 것 같다.
 
74
"─ 세상에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서, 나가면 천병만마를 질타하여 적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들어오면 만백성과 뭇 신하를 거느리어 성명을 받드는 것이 얼마나 쾌한 노릇이냐. 설령 말가죽에 시체를 싸고 돌아오는 한이 있더래도 그 꽃다운 이름은 죽백에 길이길이 남을 것. 남고 안 남고는 둘째, 셋째. 첫째 남아로 떳떳한 일이 아니다. 응, 그렇지, 칠부야!"
 
75
칠부는 웬 영문인지 몰랐으나,
 
76
"네에."
 
77
하고, 맞장구를 치는 수밖에 없었다.
 
78
"그렇지, 그렇겠지. 네 뜻을, 나도, 잘, 안다."
 
79
하고, 노리부는 어리둥절해 하는 칠부를 귀여운 듯 아까운 듯 바라보다가 휘 한숨을 내쉬었다.
 
80
"내 비록 외동아들 너일망정 보신지책만 찾고 열 손 재배한 채 부귀와 영화만 누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출장입상은 부자 양대에 복이 과분한 줄 알았지만 자유로운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임금을 위하여 든든하고 씩씩한 일꾼이 되기를 바랐더니라 . 나라를 위하여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처지에 있기를 바랐더니라. 나라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곧 나라 속에 사는 것, 그 오죽 영광스러운 노릇이냐, 후."
 
81
하고, 아버지는 기가 막힌 듯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82
아무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아버지의 말씀이나 결코 망령은 아니었다. 유언도 아니었다. 무슨 깊은 곡절이 있는 것만은 짐작이 아니 갈 수 없었다.
 
83
"호화로운 의복과 달콤한 술과 혼란한 이부자리 속에 파묻히어 사내의 일생을 보내다니 될 말인가, 될 말인가."
 
84
아버지는 연신 혼잣말을 뇌이고 또 뇌이었다.
 
85
"무슨 말씀이시온지?"
 
86
칠부는 궁금증을 걷잡을 수 없어 아버지의 기색을 살피며 다시 물었다.
 
87
노리부는 아들의 말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제 말 뒤끝만 잇는다.
 
88
"꿈에도 뜻하지 못한 노릇. 탈은 꼭 한가위 잔치야……."
 
89
"네?"
 
90
하고 칠부는 깜짝 놀래었다. 그러면 한가위 잔치 끝에 선화 공주로 말미암아 싸움이 일어나고, 수품과 눌문이 칼부림까지 한 사단이 어느 틈에 아버지의 귀에 들어갔는가. 이런 말이 날까 봐 자기가 그렇게 애를 졸이며 두 친구를 뜯어 말리고 여러 친구에게도 각별히 단속을 하였거늘, 필경엔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마츰내 큰 말썽을 버르어집어낸 모양.
 
91
─ 에익, 경망한 녀석들, 어느 놈이 입을 놀렸을까?
 
92
그 날 밤 하인들은 다 보냈고 몇몇 절친한 친구 이외에 잡인이라고는 없었으니 말을 내었다면 그 때 한 축에 끼었던 어느 놈의 소위가 분명하였다.
 
93
─ 이런 끔찍한 말을 입 밖에 내다니.
 
94
칠부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굴리었다.
 
95
아버지는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이윽히 아무 말이 없다가,
 
96
"이번 한가위 잔치를 너희들은 다 범상하게 알았겠지만, 속살로는 부마감을 구하실 겸 너의 젊은애 축까지 모조리 부르시고 예년보담 잔치도 더 광장하게 차리신 게다. 알아듣겠니?"
 
97
혹시나! 하고 칠부의 가슴은 뛰었다.
 
98
"그래서, 네가 첫째 물망에 올랐단다."
 
99
아버지는 배앝는 듯 한 마디 던지고 입을 닫아버렸다.
 
100
칠부는 아버지의 앞인 줄도 잊어버리고 무망중에 몸을 소스라쳐 일으켰다.
 
101
그는 왼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다시 펄썩 주저앉았다.
 
102
바라고 바라던 커다란 행복이 이렇게도 쉽사리 굴러 떨어질 줄이야.
 
 

4. 4

 
104
칠부는 제 귀를 의심하였다.
 
105
세상에 이런 희한한 일이 또 있을까. 그렇게도 가슴을 쥐어뜯고 지금도 아버지께 이 청을 드릴까 말까 마음을 졸이던 판이 아니냐.
 
106
그는 장지문을 박차고 뛰어나가 산이고 들이고 천방지축 헤매고도 싶었다.
 
107
그냥 이대로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이 엄청난 행복의 바위에 지질리어 두 수 없이 숨이 막히고 말 것 같았다.
 
108
그는 수수께끼 같은 아버지의 말씀을 분석해 볼 나위도 없었다. 그는 맏공주에 덕만, 둘째 공주에 월만이 있는 엄연한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공주라면 그의 일구월심에 맺히고 그리운 선화 공주 단 한 분이 있을 뿐이었다.
 
109
노리부는 섰다 앉았다. 상례를 벗어난 제 아들의 행동을 가여운 듯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위로하듯 타일렀다.
 
110
"이왕 그렇게 된 것을 지금 와서 안절부절못하면 어떡하느냐! 위에서 그 말씀이 계시기에 나도 몇 번 소신의 자식이 인물이 출중치 못하니 공주님을 받들어 뫼실 수 없다고 아뢰었지만 굳이 듣지를 않으시니 어떡하느냐 말이다. 왕명이시니 어떻게 거스를 수 있니? 너도 단념을 하여라."
 
111
칠부는 들을수록 용솟음해 오르는 기쁨을 가까스로 누르면서,
 
112
"저 이외에 다른 사람은 물망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113
넌즈시 물어 보았다.
 
114
"왜 여럿이 있었느니라. 이런 말은 입밖에 내어서는 안 된다. 첫째 죽은 이찬 종세(宗世)의 아들 음(飮)이 뽑혔으나 너무 왕실과 연줄이 가까웁다고 꺼리시고, 그 다음에는 이찬 수음부의 아들 파진찬 수품이 지체로 보아서 쩍 말 없을 자욱이지만, 당자의 몸피가 가냘프니 너무 약하지 않을까 염려하셨고, 또 그 다음엔 대아찬 눌문이 활달한 기상으론 볼 만한 점이 없지 않았으되 나이도 어리거니와 진중치가 못하다 하여 필경엔 너에게로 탁방이 난 게란다."
 
115
─ 그러면 그렇지.
 
116
칠부는 좋아라고 길길이 뛰었다.
 
117
─ 제까짓 놈들이 어림이나 있는 일이냐. 언감생심 내 발 밑에나 따를 것이냐.
 
118
칠부는 난데없는 자부와 자신이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하였다. 더구나 한가윗날 새벽 수품과 눌문이 칼까지 빼어들고 꽃 애기씨를 다투던 것을 생각하면 코웃음이 절로 터졌다.
 
119
─ 어처구니도 없는 놈들 같으니.
 
120
칠부는 또 한번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121
노인의 잠꼬대는 또다시 흥분된 칠부의 귀에 응얼거려 들리었다.
 
122
"너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한번 부마가 되면 꼼짝을 못하는 법이다. 지극히 그 몸을 아껴야만 한다. 싸움에는 물론 못 나가려니와 나라 정사에도 참예를 못하는 법이다. 털끝만치라도 그 몸에 해자가 붙어서는 아니 되는 까닭이다. 벼슬 계제가 아무리 높아도 정작 정사에는 왈가왈부를 못하는 법, 그저 허위(虛位)를 지킬 뿐이니라."
 
123
그제야 칠부는 아까부터 아버지의 탄식하는 까닭을 터득할 수 있었다. 아버지 같은 기상으로 아녀자에게 매인 몸이 되어 군사에 정사에 마음대로 뜻대로 권력과 경륜을 힘껏 휘두르지 못하는 것이 딴은 쓸쓸도 하리라, 적막도 하리라. 자기가 걷던 길로 자기 아들이 못 걸어 가는 것이 무한히 슬프기도 하리라.
 
124
그러나 정작 당자인 칠부 저는 어떠냐. 꽃 애기씨만 인해를 삼는다면 하늘을 주어도 아깝지 않고 땅을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그까짓 공명이 다 무엇이냐! 그까짓 영달이 다 무엇이냐. 죽백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다 무엇이냐! 못난이로 반편이로 천추만세에 손가락질을 받는다 해도 하상 대사이랴!
 
125
한평생 그이의 곁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 곧 소원이 아니냐! 그까짓 병서 읽은 것 쓰지 못하는 게 그렇게 원통하랴! 그까짓 검술 재조 못 부려 보는 게 그렇게 애닯으랴……!
 
126
"더구나 이 공주님이야 예삿 공주님이시냐. 다 같은 공주님이시라도 유만부동, 이 나라의 대통을 뒤이으실 맏공주님이 아니시냐……."
 
127
"네? 아버지, 아버지!"
 
128
칠부의 숨길은 삽시간에 가빠졌다.
 
129
"그러면, 그 그러면……저어……맏공주님, 더 덕만 애기씨 말씀이십니까?"
 
130
칠부의 말은 더듬거린다. 찡하고 우는 머릿속은 벼락이 금시에 나리친 듯.
 
131
"그럼 맏공주님이 아니시고?"
 
132
하고, 노리부는 자개바람이나 난 듯이 실룩거리는 아들의 기색을 괴이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원문】불행한 행운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44
- 전체 순위 : 1220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153 위 / 88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선화공주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1941년 [발표]
 
  역사소설(歷史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대한민국의 소설 (일제강점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목차 (총 : 5권)     이전 3권 다음 한글 
◈ 선화공주 (善花公主)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