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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화공주 (善花公主) ◈
◇ 사랑의 길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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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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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2
"맏공주, 맏공주!"
 
3
칠부는 기진맥진, 제 방에 머리를 싸고 드러누워서 혼자 수없이 중얼거렸다.
 
4
칠부는 그 날 밤 아버지로부터 무서운 선고를 받은 이후, 벌써 여러 밤을 뜬눈으로 밝혔다.
 
5
등골이 화끈하고 달았다가, 오싹하고 추웠다가, 진땀이 줄줄이 흘러나리고, 상기된 눈엔 시뻘건 핏발이 일어섰다. 핑핑 내어둘리는 머리는 천 근보담도 더 무거웠다.
 
6
"맏공주, 맏공주!"
 
7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이 불꽃처럼 일었다가 스러졌다가 하던 끝에, 마지막으로 저절로 입술을 뚫고 나오기는 이 한 마디였다.
 
8
"맏공주, 맏공주!"
 
9
아버지의 입에서, 벽력 같은 이 말이 떨어질 때보담은, 얼마쯤 그 끔직한 울림이 줄어졌지마는, 제가 속살거려 제가 들어보아도, 언제든지 귀는 찡 하고 울었다. 울리는 것은 귀뿐만이 아니다. 그의 왼 몸과 왼 넋이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였다. 그 한 마디는 마치 어마어마한 바위덩이 모양으로 그를 누르고 지질렀다. 그 세찬 압력에 자기의 안타까운 사랑은 두수 없이 꼼짝달싹을 못하고 그대로 질식을 해 버릴 것 같았다.
 
10
셋째 공주 선화에 대한 불같은 사모를 걷잡다 못하여, 마지막 수단으로 아버지께 이 사유를 사뢰려고 결심을 하였고, 그 결심을 하자마자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아 그는 겅정겅정 뛰지 않았던가. 막상 아버지의 앞에 앉고 보니, 쉽사리 말은 나오지 않고 몇 번이나 헛되이 몸을 도스르고 마음을 도슬렀던가. 생각하면 기괴한 운명적인 밤이었다.
 
11
아버지께서는 천연덕스럽게『손자』병서의 강(講)을 받다시피 하시고, 검술 공부를 채근하시고, 향기로운 규방에 파묻히어 장부의 일생을 늙히는 것을 한탄하시며, 좀처럼 칠부에게 말할 기회를 주시지 않다가, 뜻밖에, 천만 뜻밖에 나라에서 부마 감을 고르셨다는 비밀을 알으켜 주시고, 다른 사람 아닌 자기가 첫 물망에 올랐다 하실 적에 그는 얼마나 기뻐하였던가. 금세로 하늘에나 오르듯 행복의 절정에 곤두서서, 제가 제 몸을 어떻게 주체를 해야 옳을지 몰랐었다. 아버지의 앞인 줄도 잊어 버리고 마치 미친 사람 뻔으로 벌떡 일어서고 펄썩 주저앉고……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바루 제 눈 속에 뿌리를 박고 뻗쳐 일어선 듯, 아득하고 캄캄하던 앞길이 환하게 열리었었다.
 
12
부마라면 선화 공주의 배필을 두고 이름이요, 결코 다른 공주의 남편일 까닭이 없었다. 부마에 뽑혔다는 것은 곧 선화 공주와 백년가약을 맺게 된 것이요, 꿈엔들 다른 공주와 짝이 될 리가 없었다. 일구월심 머리와 가슴속에 그리고 새긴 것이 선화 공주 단 한 분뿐이어니, 그분 아닌 다른 공주에게 생각을 돌릴 여지가 없었다.
 
13
그는 깜박 다른 공주의 존재를 잊었던 것이다. 선화 공주 이외에, 첫째 덕만 공주, 둘째 월만 공주, 한 분도 아니요 공주가 두 분씩이나 있는 것을 그는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14
잊은 것이 잘못이라면 큰 잘못이요, 어림없다면 어림없는 수작이로되, 그때 칠부의 머릿속엔 공주란 말이 오직 선화 공주 단 한 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요, 그분 아닌 다른 분도 공주라고 부르는 것이 도리어 고이쩍게 들릴 지경이었다.
 
15
'맏공주'란 말을 들을 때, 그는 앉은자리에서 벼락을 맞는 듯하면서도 오히려 제 귀를 의심하였다. 아버지께서 황송한 말로, 미치셨거나 찰망녕이 나셨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혼란한 그 순간이 지나가자, 미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요 자기 자신인 것을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불보담도 더 밝은 명명백백한 사실을 그는 앙탈하랴 앙탈할 수 없었다.
 
16
나라에서 부마를 고르신다면 물론 맏공주님의 배필을 먼저 구하실 것이 의당한 일이었다. 첫째 둘째를 건너뛰어 셋째 공주 꽃 애기씨의 배필부터 뽑을 까닭이 없었다.
 
17
사실이 엄연하면 엄연할수록 그의 절망은 더욱 컸다. 찬란한 행복의 꽃구름에 싸여 둥실둥실 하늘 끝까지 떠올라가던 그는, 담박에 천길만길 절망의 구렁텅이로 거꾸로 떨어져 버렸다.
 
18
"저는 싫습니다. 죽는 한이 있드래도 싫습니다. 맏부마 노릇은……."
 
19
하고 울부짖어 보았으나, 아버지는 눈을 감으신 채 아무 대꾸가 없으셨다.
 
20
"낼, 조정에 들어가시옵거든, 이런 말씀을 아뢰 주시옵소서."
 
21
또 한번 부르짖었다.
 
22
아버지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떠서 못마땅한 듯이 애원하는 아들을 쏘아보았다.
 
23
"안 될 말이다. 지금 와서 싫다면 될 말이냐. 내가 입때 뭐라고 타일르더냐. 군부의 명령을 어떻게 거슬린단 말이냐. 안 될 말을 중언부언하면 무슨 쓸데가 있느냐. 사내자식이 한번 안 될 일이라 생각하면 선선히 단념을 해 버려야지."
 
24
아버지의 마지막 선고는 단념하라는 것뿐이었다.
 
25
내가 미친놈이야 미친놈이야 ─ , . 부마라면 아직 시집 안 가신 맏공주님의 신랑감 말이겠지. 어째 엉뚱하게 꽃 애기씨를 생각했더란 말인가.
 
26
제가 생각을 해 보아도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그릇된 지레 짐작만 하지 않았더래도 이 뼈마디 마디까지 저리고 쓰린 고통이 얼마쯤이라도 덜한 것을. 제 품속에 갈데없이 안긴 줄 알았던 행운이 실장인즉 피치 못할 액운인 줄 한 순간 먼저 알기만 해도 이대도록 살을 오려내는 듯이 원통하고 애숙하지나 않을 것을. 그런 액운을 다만 한 찰나 동안이라도 행운으로 기뻐 날뛰다니.
 
27
액운이라도 지독한 액운이었다. 맏부마로 뽑히지만 않았어도 실낱 같은 희망이 없지 않다. 그러나 맏부마로 작정되는 그 시각이 벌써 선화 공주의 배필 되기는 영영 틀리는 운명적 시각이다. 이런 줄은 모르고, 제가 부마로 뽑혔다는 바람에 으쓱 어깨가 올라가며 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사랑의 경쟁자 수품과 눌문을 비웃던 생각이 났다.
 
28
─ 제깐 놈들이 언감생심 내 대적이 될까 보냐.
 
29
하고, 뽐내던 것이 쑥스러웠다. 저는 희미한 희망조차 아주 끊어졌으되, 그들은 운수만 좋으면 어느 놈이고 정작 꽃 애기씨의 사랑을 누릴 수도 있지 않으냐.
 
30
─ 칠부는 맏사위님으로 뽑혔다니, 흥.
 
31
하고, 자기를 비웃는 갈걍갈걍한 수품의 얼굴과 두툼한 눌문의 입술이 아찔아찔하는 눈앞에 어른거리었다.
 
 

2. 2

 
33
─ 맏부마가 되는 것이 그렇게 하찮은 일일까?
 
34
칠부는 비웃는 수품과 눌문의 환영에 대항이나 하는 듯이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35
정상하게 생각한다면 맏부마가 되는 것이 결코 나쁜 일도 아니요 슬픈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남에게 비웃음 받을 까닭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영광이라면 이에 더 큰 영광이 없고 명예라면 이에 지나친 명예가 또다시 없으리라. 아버지의 말씀마따나 태자가 없으시니 지금 나랏님의 천추만세 후에는 맏공주 덕만 애기씨가 이 나라의 대통을 뒤이으실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기는 당당한 이 나라 여왕의 남편이 아니냐. 비록 지엄한 자리는 아니라 하더래도 이 나라의 극존극귀한 자리에 자기는 힘 안 들이고 올라앉는 셈이 아니냐.
 
36
더구나 덕만 애기씨도 , 결코 박색이 아니다. 꽃 애기씨처럼 아기자기한 자색만 없다 뿐이지 출중한 인물은 인물이다. 동녘 하늘에 둥실 솟은 보름달과 같이 희고 맑고 둥글고 환한 얼굴은 어느 한 구석 빈 데도 없고, 어느 한 모 곯은 데도 없었다. 부처님 귀처럼 두둑한 귓부리가 풍성풍성한 두 뺨은 얼마나 의젓하고 덕성스러운지 몰랐다.
 
37
칠부는 이날 이때까지 한 번도 덕만 공주를 눈앞에 그려 본 적이 없었다.
 
38
선화 공주와 또 달라서 맏공주님이시라 더욱 성스럽고 존귀하신 터이므로 감히 사모하는 열정을 쏟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거니와, 꽃 애기씨의 환영이 머리에 가득 차고 가슴에 가득 찬 칠부로서는 비단 맏공주뿐 아니라, 다른 어느 여인도 그의 마음에 머리올만한 자리 잡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39
인제야 그는 덕만 공주의 얼굴을 이모저모 뜯어보고 스스로 황홀하였다.
 
40
그 어글어글한 눈매는 너그럽고 다정한 웃음을 풍기면서도 한 줄기 맑은 광채가 쏘는 듯이 일어난다. 번듯한 이맛전엔 윤끼가 흐르고 숱많은 새까만 눈썹엔 서기가 어린 것 같다. 가득한 아래턱은 몽실몽실 갓 따다 놓은 복숭아 같고, 알맞게 일어선 코허리와 오목한 코끝이 상아로 깎아낸 듯이 아름답고 씩씩한 기운이 떠돌았다.
 
41
꽃 애기씨를 아츰 이슬을 머금은 한 떨기 해당화에 비긴다면, 덕만 애기씨는 푸른 물결을 헤치고 솟아나는 부용과도 같았다. 하늘하늘하는 엷은 구름을 나부끼며 돌아오는 반달이 꽃 애기씨의 양자라면, 덕만 애기씨는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두둥실 떠오르는 햇발과도 같았다.
 
42
─ 잘나신 얼굴, 아무렴, 잘 나신 얼굴이구 말구.
 
43
칠부는 자기를 다짐 두는 듯이 한번 뇌어 보았다.
 
44
그렇다. 너무도 잘나신 얼굴이었다. 너무도 잘나기 때문에 도리어 자기와 인연이 멀었다. 동이 떨어졌다.
 
45
우러러 뵈올 얼굴이요, 가까이 들여다볼 얼굴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누르는 위엄이 흘렀다. 어딘지 모르게 감히 범치 못할 무엇이 움직였다. 높고 높으신 어른으로 위해 올리고 받들어 올릴지언정, 아름다운 임으로, 사랑하는 안해로 백년을 지내기엔 너무 벅차고 송구스러웠다.
 
46
─ 그분의 치마 밑에서 목을 움츠리고 뒷방 구석에 갇힌 몸이 되어 아무런 나랏일에도 참예를 못하고 아까운 세월을 보내게 되다니 칠부는 필경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부마가 되기만 될 말로야 일생을 반편으로 판관으로 지내어도 고소원이라던 칠부가 아니었던가. 아버지의 쓸데없는 걱정을 오히려 망령으로 돌리던 칠부가 아니었던가. 다 같은 공주 이건만, 한번 사람이 바뀌고 보매, 나라의 부마란 죽은 목숨보담 더 불쌍하고 가련한 것이었다. 고량진미와 능라금침에 파묻히어 그날 그날을 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갑갑하고 답답한 노릇이냐.
 
47
─ 세상에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서 출장입상은 못할망정 일거수 일투족의 자유조차 잃어 버리고 한평생을 안해에게 매달려 지내다니 될 말인가, 될 말인가!
 
48
칠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탄식을 그대로 되풀이하였다. 그 어려운 한문 글자를 뜯어가며 가까스로 깨친『손자』병서는 어디다가 쓴단 말이냐. 십 년 가까이 배우고 닦은 검술을 속절없이 부려 보지 못한단 말이냐.
 
49
─ 안 될 말이다, 안 될 말이다.
 
50
접친 듯이 누웠던 칠부는 별안간 몸을 벌떡 일으켰다.
 
51
어찔 하고 내둘리는 머리를 그는 두 손으로 부등켜 쥐었다.
 
52
─ 사내란 나면서부터 사방(四方)에 뜻을 둔다 하였거늘, 삼국 풍운이 어지러운 오늘날 배운 재조를 한번 부려 보지 못하고 분내와 향내에 결은 규방에서 헛되이 잦아질 지경이면 차라리 지금 죽어 버리는 것이 오히려 쾌하지 않으냐!
 
53
칠부는 팔짱을 끼고 방안을 왔다갔다 하였다. 그는 이루어질 가망도 없는 사랑의 번민과, 밤빛같이 어두운 제 장래에 실망한 나머지, 참말로 죽음의 길을 선택해 보았다.
 
54
대번에 목을 찌르거나 배를 갈라 버리면 쉽사리 요정이 날 것이지만, 그것은 너무 보잘것없고 열쩍은 짓 같았다. 대장부의 죽음으론 너무도 무성무취하지 않으냐.
 
55
이왕 목숨을 떼어놓은 다음에야, 필마단도로 적진에 짓쳐 들어가 힘껏 마음껏 능란한 검술 솜씨를 부릴 대로 부리어 추풍낙엽같이 적장과 적군의 목을 무수히 버히다가, 세궁역진, 칼이 부러지거든 비장한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통쾌할 것 같았다.
 
56
─ 가자, 백제의 변경으로 가자. 지금 백제 군사가 쳐들어와서 분요를 일으켰다는 속함(速含), 앵잠(櫻岑),기잠(蚑岑) 등 육성(六城)으로 가자. 거기야말로 죽을 땅이 나를 기다리리라.
 
57
내일 아버지께 여쭈고 출전을 자원할까도 싶었으나, 좀체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실 것 같지도 않고, 설령 아버지께서는 이 비장한 청을 들어 주신다 해도, 이미 부마로 작정된 몸이라, 나라에서 허락해 주실 리 만무할 듯하였다.
 
58
가자면 차라리 아무도 , 몰래 이 밤으로라도 길을 재촉하는 수밖에 없다.
 
59
─ 칠부는 벽에 걸린 단도를 떼어 허리에 차 보았다. 정말 밤길을 떠나려고 단단히 결심한 사람 모양으로 칼을 차고 전포(戰袍)를 갈아 입으니, 차비는 이만하면 그만이었다.
 
60
문을 박차고 나서려다가 말고, 그는 잠깐 망설이었다.
 
61
─ 그런데……꽃 애기씨를.
 
62
전지에 나가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죽는 것은 좋지마는, 죽기 한 걸음 전에 꽃 애기씨의 얼굴이 보고 싶다. 의엿한 작별 인사는 못할지언정 먼 빛으로라도 바라보고, 제 마음으로나마 작별을 하기 전에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듯하였다.
 
63
─ 어떡할까.
 
64
에라, 이왕 내친 걸음이 아니냐. 지금 당장 궁으로 들어가자. 궁장이 아무리 높다 한들 뛰어넘을 도리가 바이 없지도 않으리라. 한번 궁 안에 들어선 다음에야 몇 번 궁중 출입도 해 본 터이니 구중궁궐이 깊다 한들 꽃 애기씨의 별당을 못 찾을 리도 없으리라.
 
65
칠부는 마치 허깨비에 홀린 사람 모양으로 진동한동 자기 집을 빠져 나왔다.
 
 

3. 3

 
67
어느덧 팔월 달도 그믐이 가까워, 자정 겨운 밤 공기는 선뜩선뜩 등골에 스며들었다.
 
68
칠부는 길고 긴 궁장을 돌고 또 돌았다.
 
69
그렇게 와글와글 들끓던 칠만 호 서라벌 서울도 깊은 잠에 떨어진 양, 죽은 듯이 괴괴하다. 대낮에도 으쓱한 이 곳이어니 이 캄캄 칠야에 어리친 개아미 한 마리 얼씬거릴 리 없었다. 바루 길옆 황룡사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결에 댕그렁댕그렁 한층 더 적막을 자아낼 뿐. 가만가만히 발소리를 죽여서 걷는 걸음이건만 서벅뚜벅 하는 제 가죽신 소리만 유난히 귀에 울렸다.
 
70
─ 이쯤이면 꽃 애기씨가 거처하는 별당 어름이 될까.
 
71
칠부는 이따금씩 발길을 멈추고 기웃거려 본다.
 
72
그는 몇 번 궁중 출입을 한 탓으로, 왕과 왕후께서 계시는 정침이 어디쯤이고 애기씨들의 별당이 , 대개는 어느 지점이리라는 짐작이 없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이 어두운 밤에 항차 드높은 담을 격해 놓고 그 지점을 점쳐 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어렵다기보담 귀신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73
그러하건만 이쯤이나 될까, 저쯤이나 될까, 헛되이 머리를 짜 가며 궁장을 더듬어 돌고 또 도는 것은, 담을 뛰어넘어 공주의 처소까지 가장 가까운 거리를 미리 자질한다는 것도 이유는 이유리라. 꽃 애기씨의 처소를 찾는 동안이 짧으면 짧을수록 더욱 좋을 것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러나 실상인즉 이 궁장을 뛰어넘기가 집에서 생각하던 것같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74
높이는 두 길이 넘고 넓이는 한 간통이나 될 듯한, 굼튼튼하고 육중한 궁장 ─, 그것은 마치 어마어마한 거인(巨人)의 떼 모양으로, 칠부의 앞길을 막아서서 놀리고 얼러대는 듯하다.
 
75
─ 네까짓 놈이 이 담을 넘어 보아, 어림도 없어.
 
76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를 것 같다. 반듯반듯하게 정 맞힌 돌들이 어둠 속에서 힐끔힐끔 사나운 눈알을 부라리는 것 같다.
 
77
한식경 넘게 칠부는 궁장을 돌다가 지친 듯이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78
─ 내가 이 담을 뛰어넘어 공주 처소에 찾아 들어간다 한들…….
 
79
언뜻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불 붙는 듯하던 정열이 잠깐 고개를 수그렸다.
 
80
─ 지금이 어느 때냐, 자정이 넘어 축시가 가깝지 않았느냐. 꽃 애기씨는 이미 공단 같은 꿈길을 걸으리라. 무망중에 문을 열고 뛰어들면 그분은 얼마나 놀랄 것이냐. 혹은 소리라도 칠는지 모른다. 그러면 궁중은 발칵 뒤짚히리라. 시녀들이 뛰어오고, 시위부(侍衛府) 군사가 들끓어 나오고…….
 
81
칠부의 용솟음하던 용기는 부쩍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82
한가위를 지낸 지도 어느덧 보름, 그 동안에 꽃 애기씨는 얼마나 더 어여쁘고 아름다워졌을까. 하루하루 방싯방싯 벌어지는 꽃봉오리 같은 그 얼굴이 얼마나 더 피어났을까.
 
83
─ 나는 이왕 죽은 목숨이 아니냐. 목숨을 떼어놓은 사람이 아니냐. 무서울 것이 무엇이고 겁낼 것이 무엇이냐.
 
84
─ 이 못생긴 놈아. 죽으러 가는 길에 꽃 애기씨를 한 번 안 보고 길을 떠날 수 있느냐.
 
85
─ 나는 바람결같이 이 담을 넘으리라. 바시락하는 발자욱도 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그분의 처소를 찾아들리라.
 
86
그분을 깨울 필요는 ─ 조금도 없지 않으냐. 소리 없이 비단 문을 열고 잠든 그 얼굴이나마 단 한 번 바라보면 그만이 아니냐. 그분의 얼굴을 이생에서 다시 한번만 본다면 이 밤이 새기 전에 죽음의 길을 재촉하여도 아무 한이 없을 것 아니냐?
 
87
칠부는 제 몸이 문득 날 것같이 홀가분해진 것을 느끼었다. 제가 발길을 멈추었던 그 자리에서 궁장을 쳐다보았다. 인제 와서는 꽃 애기씨 별당이 어디쯤 되리라고 어림을 잡아볼 필요도 없었다. 아무 데서나 결연히 궁장을 뛰어넘을 작정이었다.
 
88
일이 잘 되느라고, 어둠 속에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으나마, 그 곳은 후원협문이 가까운 곳으로 비교적 담 높이가 다른 데보담 낮았다.
 
89
칠부는 궁장에서 대여섯 걸음 물러나왔다. 발을 모두꾸려 방장 몸을 솟구치려는 판이었다. 문득 제 옆 멀지 않은 곳에서 난데없는 사람 발자욱 소리가 났다.
 
90
공중으로 날려는 칠부의 발은 멈칫하고 말았다.
 
91
칠부는 인기척 나는 곳을 쏘아볼 제, 제가 선 자리에서 서너 간밖에 떨어지지 않은 궁장 모퉁이에 정녕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는 한 걸음 두 걸음 자기 쪽을 향해서 가까워 온다.
 
92
─ 웬 놈일까?
 
93
칠부는 처음에는 적지 않게 놀래었으나, 나종엔 이 뜻하지 않은 헤살꾼에 대하여 불 같은 분노를 느끼었다. 그는 허리에 찬 환도 자루를 힘있게 쥐었다.
 
 

4. 4

 
95
그 사람도 자기 모양으로 넋을 잃은 듯 기신기신 기운 없는 걸음걸이였다.
 
96
깊은 생각에 잦아진 양, 고개를 지숙히 빠뜨리고 흐느적흐느적하는 팔다리가 풀기 하나 없어 보였다.
 
97
저편이 자기를 해치려는 위험인물이 아닌 것을 알아보자, 칠부의 긴장은 적이 풀리었으나, 아직도 그 작자의 일거일동을 쏘아보며, 제 숨 소리를 죽였다. 될 수만 있으면 저편이 누구이든지 간에 자기가 여기 이러고 서 있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피신을 하려다가는 도리어 저편의 눈에 띄게 쉬울 듯 손끝발끝 하나 꼼짝을 하지 않고 말뚝같이 서서, 제발 덕분에 자기를 몰라보고 그대로 지나치기를 바랐다.
 
98
두 간만큼 간 반만큼 , ! 두 사람의 거리는 다가들었다. 무슨 서슬에 저편에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래는 듯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99
그제야 그 쪽에서도 어둠 속의 칠부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 순간, 저편에서 먼저 입을 떼었다.
 
100
"누구냐?"
 
101
그것은 무망중에 불쑥 나오는 외마디 소리에 가까웠다.
 
102
"누구냐?"
 
103
칠부는 앵무새처럼 맞소리를 질렀다.
 
104
"나는 길 가는 사람."
 
105
"나도 길 가는 사람."
 
106
그 목소리들은 피차에 귀에 익었다. 양편에서 서로 의론이나 한 것같이 한 걸음 두 걸음씩 다가들었다.
 
107
"이게 웬일인가? 자네는 칠부가 아닌가?"
 
108
"어, 자네는 수품일세그려. 이 밤중에 웬일인가?"
 
109
"자네는?"
 
110
"자네는?"
 
111
두 친구는 서로 의아해 하며, 어둠 속에서 피차의 겉과 속을 더듬어 보았다.
 
112
두 친구는 신기하다는 듯이 한동안 마주 선 채 잠깐 말문이 막혔다.
 
113
"이 캄캄 칠야에 자네 혼자서 등불도 없이 여기를 오다니, 정말 뜻밖일세 그려. 허, 허."
 
114
칠부는 지어서 웃어 보였다.
 
115
"나는 자네가 천만 의외일세. 나는 곧잘 밤출입도 하는 사람이지만 자네 같이 술과 계집을 모르시는 성인군자도 밤길을 걸을 때가 있단 말인가? 허허."
 
116
수품도 허전허전 하는 소리로 억지 웃음을 웃었다.
 
117
"어쩐지 잠이 설들어서 소풍 차로 나온 길일세."
 
118
칠부의 변명은 어딘지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119
"자네도 잠을 설치는 밤이 있나?"
 
120
"원, 이 사람, 남을 잠충으로 아네그려. 낸들 잠 안 오는 밤이 없겠나?"
 
121
"칠부, 자네야 뭣이 부족해서 잠 안 오는 밤이 있겠나? 나는 요새 잠하고는 아주 담을 쌓았다네. 밤이 새도록 쏘다니지 않고는 배기지를 못한다네."
 
122
"허, 그것 또 큰일 났네그려. 또 어디 알뜰한 고운님이 생겼나보이그려.
 
123
나 같은 사람도 좀 같이 다녀 보세나."
 
124
흥 알뜰한 " , 고운님이 생겼다? 흥, 그렇기나 하면 작히나 좋으리."
 
125
"그러면 맨 건깽깽이로 밤이슬을 맞아가며 이 캄캄 칠야를 헤맨단 말인가?"
 
126
"그야말짝으로 외기러기 짝사랑, 후우."
 
127
수품은 말은 농조(弄調)로 하면서도 한숨은 진국으로 내쉬었다.
 
128
"짝사랑, 허 짝사랑이라니 자네 같은 인품과 풍채라면 왼 서라벌 논다니를 두루말이를 할 텐데 짝사랑이 웬 말인가. 그야말로 절세가인이 어디 숨어 있나 보이그려."
 
129
칠부는 수품과 말을 주고받는 사이 마음에 얼마쯤 여유가 생겼다. 아까 같았어도 꽃 애기씨를 한시바삐 보지 못하고는 그대로 죽을 것만 같았으나, 옛 친구이요 사랑의 경쟁자인 수품과 딱 마주치고 보니, 궁장을 뛰어넘기는 애적에 틀렸고, 그런 사색조차 숨기노라니 저절로 허튼 수작을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130
"절세가인? 흥. 여보게 칠부, 자네가 내 절세가인이 무엔줄 알겠나?"
 
131
"절세가인이 무에라니, 그야 물론 곱고 고운 각시겠지."
 
132
"아니라네, 아니야. 내 절세가인은 돌이라네, 돌!"
 
133
"절세가인이 돌이라께?"
 
134
칠부는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135
"바루 저걸새, 저것."
 
136
수품은 궁장을 손가락질해 가리켰다.
 
137
"궁장 말인가?"
 
138
"그러네, 궁장 말일세, 궁장이 싸늘한 돌맹이가 아니고 무엔가?"
 
139
"자네가 수수께끼를 하는 모양일세그려."
 
140
"수수께끼가 아니라 진정일세.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저 궁장 돌맹이를 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네. 하도 여러 번 만지고 더듬어서 인젠 그 반들반들한 돌얼굴이 정이 붙게 되었네. 낮에 밥을 먹다가도 훌쩍 집을 뛰어 나오면 저 돌맹이를 얼없이 바라보네. 술청에서 밤늦도록 술타령을 하다가도 돌아오는 길에는 저 길고 긴 돌맹이의 행렬을 휩싸안고 한번 돌아야만 직성이 풀린다네. 오늘밤같이 술도 싫고 놀음놀이도 싫어서 보송보송 뜬눈으로 자반뒤집기를 하다가도 한번은 뛰어나와 저 단단하고 육중한 놈들 옆을 한 바퀴 휘돌아야만 된다네."
 
141
칠부는 벌써 수품의 말눈치를 알아채고 제 가슴이 찔리어 뭐라고 농담을 걸 수조차 없었다.
 
142
수품은 또다시 말을 이었다.
 
143
여보게 " 칠부, 그만하면 자네는 내 속사정을 짐작하겠지."
 
144
"……."
 
145
동병상련, 병이 같으면 서로 불쌍히 여긴다. 아무리 서로 적대해야 할 사랑의 경쟁자이지만, 이 피나는 고백 앞에 귀를 아니 기울일 수 없었다. 칠부는 제 눈시울이 뜨근뜨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146
수품은 덥썩 칠부의 손목을 잡았다.
 
147
"여보, 형님, 칠부 형님! 카악 ─"
 
148
수품은 말을 하다가 말고 카악 침을 배앝었다. 말문이 눈물에 막힌 탓이리라.
 
149
"나보담도 한 나이라도 더 먹었으니 내가 칠부 자네를 형님이라고 불러도 결코 망발은 아닐 겔세. 형님! 어찌하면 나를 구해 줄 수가 없겠소?"
 
150
수품은 무릎이라도 꿇을 듯하다.
 
151
"내가 어떻게 자네를……."
 
152
칠부의 말끝은 흐렸다. 여북 답답해야 죽음의 길을 취한 자기가 아닌가.
 
153
제 시름도 주체를 못하는 주제에 남의 걱정을 도맡을 수 있는가. 그러나 똑같은 사정이요 딱한 사정이었다.
 
154
"여보게 칠부, 자네가 힘을 쓰면 될 듯도 한 일일세. 한 달 후에라도 좋고 두 달 후에라도 좋으니 어떻게 꽃 애기씨를 조용히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만나 볼 수 없겠는가? 말없이 단 한 번이라도 참 얼굴을 대한다면 이 육중한 궁장을 새에 두고 천번 만번 만나 보는 것보담 몇 백 곱절 낫지 않겠는가?"
 
155
"궁장을 새에 두고 만나 보다니……."
 
156
칠부는 귀가 번쩍 띄었다. 수품의 애원을 들어 주고 안 들어 주는 것은 둘째 셋째요, 자기는 궁장을 격해서나마 꽃 애기씨를 만날 수 있는 신통한 방법부터 알고 싶었다.
 
 

5. 5

 
158
"어떻게 궁장을 새에 두고 꽃 애기씨를 만난단 말인가? 무슨 묘한 방법이 있단 말인가?"
 
159
칠부는 숨을 가쁘게 쉬며 채쳐 물었다.
 
160
"그야 무슨 별다른 방법이 있기야 하겠나. 나는 딴은 신통하다면 신통도 한 일이야. 처음에는 그분 계신 곳에 한 발자욱이라도 가까이 가 보려고 저 궁장 밑에 다가서 보았네 . 내가 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그분이 계시거니 그분의 영롱한 눈초리가 어리고 그분의 향기로운 숨길이 서리거니 하는 생각만 해도 흐뭇하였네. 그러기를 열 번 스무 번, 한 번은 ─ 이 담 외면은 이렇듯 무뚝뚝하고 싸늘하지만 바루 이 담 내면엔 그분의 아름다운 그림자가 어른거릴른지 모른다. ─ 하는 생각이 언뜻 떠오르데. 그러자 별안간 가슴이 두근거린단 말일세. 정말 그분을 대하기나 한 듯이. 그 때도 지금처럼 어두운 밤이었네. 뛰는 가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 육중한 담 모서리를 뚫고 그분의 방싯 웃는 얼굴이 선연히 나타난단 말일세. 애절할 그 얼굴이 선연히 나타난단 말일세……. 이상하게도 향긋한 그분의 숨길조차 내 코 안으로 완연히 기어들었네. 그 후로는 내가 이 궁장을 끼고 돌 적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리면 영락없이 그분의 얼굴이 나타나고, 그 녹는 듯한 향내가 내 코에만은 스르르 스며들었네. 그분의 몸과 이 내 몸뚱아리는 이 궁장을 넘나들지 못하지만 바람결에 날리는 그분의 숨길과 내 숨길만은 이 높은 담을 넘어 정녕 서로 통하는가 부데……."
 
161
칠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진국으로 제 속을 털어내 놓는 수품의 얼굴을 빠안히 들여다 보았다. 이 세상에 저만큼 골똘히 꽃 애기씨를 사모하는 사람은 다시 없는 줄 알았더니, 수품의 사랑은 저보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듯하였다.
 
162
"그야 암만 만나 봐도 내가 그린 환영에 불과한 것, 속절없는 노릇이 아닌가. 정말 참얼굴을 좀 만나게 해 주게나."
 
163
수품은 매어달릴 듯이 또 다시 졸랐다.
 
164
"이사람, 내가 무슨 수로 꽃 애기씨를 만나게 해 준단 말인가?"
 
165
칠부는 배앝는 듯 한 마디 쏘아 붙였다. 신통할 줄 알았던 꽃 애기씨 만나는 방법이 시원치도 않거니와, 제가 지극히 사모하는 이에게 대한 저편의향의가 너무도 지나친 데 와락 화가 치받치었다. 아까의 동정과는 딴판으로 꽃 애기씨의 환영을 부둥켜안고 그 숨결을 맡아 보았다는 것이 시새롭기도 하고 괘씸도스러웠다.
 
166
"내가 다 아는 것을 자네가 시침을 떼면 되겠는가? 자네가 여기 온 뜻도 나는 다 아네."
 
167
"내가 여기 온 뜻을 자네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168
칠부는 가슴이 털썩 나려앉으면서도 채쳐 물었다.
 
169
"뻔한 노릇 아닌가? 자네는 다 된 일도 이렇듯 가슴을 졸이지 않는가? 단 며칠이 못 되어 어엿이 만날 그분 계신 곳에도 가까이 와 보려고 여기를 온 것 아닌가?
 
170
"그건 다 무슨 소리인가?"
 
171
"자네가 끝까지 시침을 떼려나? 그렇다면 내가 바른 대로 일러 줄게. 자네가 여기 온 것은 덕만 공주님을 사모하는 탓이 아닌가?"
 
172
"덕만 공주?"
 
173
"그래도 딴청을 부리네그려. 누구는 모르는 줄 알고……."
 
174
"안다는 게 무에란 말인가?"
 
175
칠부는 수품이가 덕만 공주를 사모해서 여기 온 줄로 아는 것이 역시나 다행하였으나, 덕만 공주란 말만 들어도 까닭 모를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176
"그러면 모른단 말인가? 아무리 궁중지밀한 분부시지만 파진찬 수품의 귀에는 들어오거든. 자네가 맏부마로 뽑힌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나?"
 
177
하고 수품은 한번 뽐내었다.
 
178
"자네가 덕만 공주님의 배필로 뽑혔단 말을 듣고 나는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였다네. 친구에게 좋은 일이 내게도 해로울 것은 없거든."
 
179
"흥, 좋은 일!"
 
180
"좋다 이를 뿐인가? 장래 나랏님이 되실 덕만 공주님의 남편이 되었으니 세상에 이보담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181
칠부는 귀라도 막고 싶었다.
 
182
"……눌문과 나도 그 물망에 오르기는 올랐다네마는, 인품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자네가 뽑히는 것이 의당당한 일이라고 나는 진정 좋아하였다네."
 
183
"자네는 떨어지고 내가 뽑힌 것이 그렇게 좋더란 말인가. 안 될 말."
 
184
"거짓말이라면 내 목이라도 베어 바침세. 공주님이라도 그런 높으신 어른을 뫼실 감도 못 되거니와,그 판에 내가 낙선이 된 게 내심으론 해롭지도 않았다네."
 
185
"그건 또 웬 말인가?"
 
186
"내가 자네께야 무엇을 기이겠나? 꽃 애기씨야말로 나에게는 생명일세.
 
187
자네는 벌써 짐작을 하였겠지만, 한가위 잔치 끝에 눌문과 칼부림을 한 것도 꽃 애기씨 때문. 목숨까지 떼어내 놓고 꽃 애기씨를 사랑하는 내가 만일 맏부마로 뽑혀 보게. 아주 절망이 아닌가? 생목숨을 끊는 수밖에는 다시 무슨 수가 있는가? 이번에 낙선된 것이 다행이라면 큰 다행이거든. 기쁘다는 게 참말 진정일세.
 
188
칠부는 실심한 사람 모양으로 아무런 대꾸도 없이 우두머니 서 있었다. 어찌하면 제 생각과 수품의 생각이 부절을 합한 듯이 이렇게 같을까? 제 속을 꼭 집어내어 수품의 입을 통하여 제 귀에 들려주는 것 같았다.
 
 

6. 6

 
190
한동안 자랑스럽게 재재거리던 수품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91
휘 그러나 그 기쁘다는 " , 게 하도 답답한 소리기도 하지. 신체가 튼튼치 못하다고 맏부마에 낙선된 놈이 셋째 부마인들 될 가망이 있을까, 한번 이 생각이 들면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네그려. 한번 간선에 빠진 것이 영영 미끄러질 장본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을 걷잡을 수 없네그려. 자다가 깨어도 가슴이 무슨 멍이고 든 듯이 삐적지근하게 아프고, 가위에 눌린 것 같이 식은땀이 흘러 나리네. 몸을 튼튼히 해야지 몸을 튼튼히 해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나를 타이르고 색도 멀리하고 술도 줄이었건만, 웬일인지 몸은 날이 갈수록 골골이 말라가네그려."
 
192
칠부는 친구의 애끓는 호소를 귓가로 흘려들으며, 겹겹이 쌓인 제 시름에 잦아졌다. 부마 간선에 떨어진 것도 그리 달가운 행운은 아닌 모양이나, 그래도 자기의 처지에 비하면 얼마나 행운과 희망에 넘치는 수품의 경우냐.
 
193
수품의 하소연은 그칠 줄은 몰랐다.
 
194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도리어 자네가 부러우이. 차라리 자네와 같이 맏부마로 나 뽑혔으면 쉽사리 꽃 애기씨를 단념이나 해 버리겠고, 아무리 단념을 하려도 단념을 못할 지경이라도 아츰으로 저녁으로 그 아름다운 얼굴을 대할수나 있지 않은가? 설령 꽃 애기씨가 다른 데로 출가를 한다 해도 평생을 두고 일년에 한번이나 이태에 한번쯤은 어렵지 않게 만나질 것 아닌가?"
 
195
칠부는 그 말에 귀가 솔깃하였다. 딴은 그렇기도 하리라. 이 어두운 밤길을 더듬거리며, 순라병의 눈초리를 피해 가며, 찬이슬을 맞아 가며, 이 드높은 궁장을 격해서 날아 넘어 오는 그분의 숨길이라도 맡아보려고 헤매는 것보담는 얼마나 수월한 노릇인지 모르리라. 의당당한 형부로 그분을 조석으로 만나보는 것쯤이야 미상불 쉬웁기도 하리라. 그러나 이것도 오죽 답답한 노릇이냐. 여북 가슴 미어질 일이냐. 자기를 속이고 안해를 속이고 사랑하는 그분까지 속이는 짓이 아니냐. 하루가 아니고 이틀이 아니고 기나긴 한평생 동안에 지긋지긋한 그 지옥고를 어떻게 겪을 것인가.
 
196
─ 암만해도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다.
 
197
칠부는 또 한번 굳게 결심하였다.
 
198
수품은, 제 친구가 어떤 번민의 회호리 바람에 싸인 줄도 모르고, 다시금 힘있게 칠부의 손을 부여잡았다.
 
199
"여보게 칠부, 그만하면 자네도 내 타는 듯한 충정을 살폈겠네그려. 아까 내가 자네를 형님이라 부른 것도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일세. 맏동서님이시면 형님이 아니겠소? 형님이 되셔서 이 아우를 구해 주오. 이 불쌍한 치정한을 구해 주오. 구월 안으로 가례도 치르게 되신다니, 그렇게 되거든, 제발 잊지 말고 내 일을 이루어 주오. 아드님이 없으시니 대모한 사삿일은 맏사위님이 맡아서 처단할 것 아니겠소? 내가 여기서 우연히 형님을 만난 것은 이야말로 천우신조. 내 일이 성취될 전조인가 보오."
 
200
수품은, 마치 물에 빠지는 사람이 지푸라기 한 개라도 움켜쥐듯이, 칠부를 잡고 늘어졌다.
 
201
"이야말로 오비가 삼척일세, 후."
 
202
칠부는 간단히 한 마디 대꾸를 하고 뜨거운 한숨을 내뿜었다.
 
203
잠깐 두 사이에 답답한 침묵이 흐를 때였다.
 
204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한 간통도 떨어지지 않은 궁장 위에 무엇이 털석하고 벼락 치는 소리를 내었다. 사면이 괴괴한 때라 조그마한 음향도 그 울림은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205
두 친구는 펄쩍 뛰도록 놀랐으나 눈길은 소리나는 데로 몰렸다. 웬 사내 하나가 궁장 위에 상반신을 불쑥 올려 놓았다. 뒤미처 와지끈 소리가 나는 것은 담 위를 짚은 두 손이 용을 쓰는 바람에 기왓장이 부서지는 까닭이리라. 어느새 두 다리마저 선뜻 담 위에 올라설 겨를도 없이 비호같이 이리로 향해 뛰어나렸다. 쿵 소리가 나자마자, 궁장을 뛰어나린 사람은 옷도 털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궁장 모퉁이로 사라져 버렸다.
 
206
어둠 속에서 두 친구는 서로 바라보며 혀를 빼어 물었다. 궁장을 뛰어넘기가 그렇게 어려운 노릇이 아니겠지만 그 거침새 없는 대담한 태도와 날랜 행동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07
더구나 칠부는 자기가 뛰어넘으려고 그렇게 망설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거늘, 그 난데없는 장한은 예 봐란 듯이 바루 제 코앞에서 제가 하려던 행동을 해내 뜨린 것이 장쾌한 생각까지 자아내었다. 어둠 속이라 그렇지 그 장한이 뛰어나린 자리가 그들이 서있는 곳과는 한두 발에 넘지 않았다.
 
208
말하자면 곧 지척이었다.
 
209
"웬 사람일까? 궁안에서 궁밖으로 뛰어넘으니, 수상한데……."
 
210
칠부는 그 장한의 정체가 궁금하였다.
 
211
"그 킷세하며 걸음걸이하며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 같기도 한데……."
 
212
수품은 머릿속으로 제 아는 사람을 이 사람 저 사람 들추어내어 보았다.
 
213
"글세, 그 똥똥한 몸피하며 날랜 품이 천연 눌문이 같기도 하네마는 ……."
 
214
칠부의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품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215
"옳아, 옳아, 갈데없는 눌문이야."
【원문】사랑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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