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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화공주 (善花公主) ◈
◇ 숨은 사랑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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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현진건
목   차
[숨기기]
 

1. 1

 
2
수품이가 다짜고짜로 칼을 빼어들자, 눌문은 웬 영문인 줄 모르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였지만, 수품에게 호락호락 질 눌문이가 물론 아니었다.
 
3
그 애티 있는 얼굴에 벌컥 피가 오르자, 어느 결엔지 그의 손에도 서리 같은 환도가 번쩍였다.
 
4
"이놈, 너만 칼이 있는 줄 아느냐! 누구를 보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느냐!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느냐! 뭣이 어쩌고 어쩐댔지. 꽃 애기씨께 손을 대였담 봐라. 목을 비겠다. 원 같지도 않은 소리. 꽃 애기씨 말끝에 네 몸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탄하고 덤벼든단 말이냐! 그 연연한 볼에 손을 대면 녹아 나릴 듯하다고 하였지, 누가 정말 손을 대여봤다더냐!"
 
5
하고, 눌문의 큼직한 눈은 화경같이 빛났다. 너무도 세찬 반박에 수품의 칼 쥔 손은 떨리었으나, 그 꼿꼿이 선 눈썹이 한번 찡끗하고 움직이자 왼 몸은 분노의 덩어리로 변한 듯, 그 가냘픈 체수가 빳빳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6
눌문을 노리는 가느다란 눈엔 새파란 불길이 이는 듯, 이를 악물고 잇새로 말을 배앝았다.
 
7
"네까짓 놈이, 네까짓 놈이 어디 언감생심 꽃 애기씨의 손톱 하나도 건드렸으면 당장에 천참만륙될 것. 그야 두말 할 게 있느냐! 네까짓 놈의 입길에 꽃 애기씨가 오르나리는 게 살이 떨린단 말이다, 피가 끓는단 말이다!"
 
8
"원 별놈의 별의별 소리를 다 듣겠구나. 꽃 애기씨 말만 들어도 네놈의 살이 떨릴 게 뭐란 말이냐? 그 따위 소리를 지망지망히 하다간 네놈의 목이야말로 열이 있어도 보전을 못할 줄 모르느냐? 건방지고 무엄한 놈!"
 
9
"오냐, 내 목숨이야 열이든 백이든 누가 네놈에게 염려를 하라느냐. 네놈의 목숨이야 내 삼척 장검이 한번 번득이면 가을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한조각 썩은 잎. 그까짓 썩은 잎쯤 베혔기로 살인이나 될 법하냐."
 
10
"오, 나는 썩은 잎이고 네놈은 바루 금지옥엽이란 말이냐! 아무리 네 아비가 이찬 지위에 올라앉아 서슬이 푸르다 해도, 내 칼에 묻은 네 몸의 피는 씻어주기 어려울걸."
 
11
"이놈, 아무리 불학무식하기로 존장을 쳐들어 욕지거리!"
 
12
하고, 수품은 분통이 터져서 더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13
"나는 비록 군주(軍主)의 아들이다마는 너 같은 썩은 선비쯤 백 명이고 천 명이고 한칼에 무찌를 내다."
 
14
"어디!"
 
15
버럭 외마디 소리를 지르자 수품의 날카로운 칼끝은 눌문의 가슴을 향해 정통으로 짓쳐들어왔다.
 
16
"이게 겨우 칼 쓰는 법이냐!"
 
17
눌문은 비웃듯 한 마디를 던지고 여유작작하게 수품의 칼을 막아내었다.
 
18
칼과 칼은 눈부신 달빛 아래 쨍하고 서로 부딪치며 한 줄기 흰 무지개가 흩어진다.
 
19
두 칼은 몇 번 마주쳤다 떨어졌다. 수품의 날렵한 칼 솜씨와 눌문의 세찬 검술은 막상막하 저절로 호적수를 이루었다. 피차에 약간 취기는 어리었을망정 능란한 솜씨는 좀처럼 실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20
여러 친구들은 하도 어이가 없는 일이라, 애초엔 미처 말릴 생각을 못하였고, 나종에는 정말 칼날이 왔다 갔다 하고 보니 함부로 뛰어들어 갈라 놓기도 어려웠다. 몽롱한 취안들로 자기네 코앞에 벌어진 사단이 참인가 거짓인가 의심이나 하는 듯이 멀거니 있을 뿐이었다.
 
21
일진일퇴 오 합 십 합이 넘어가자 두 칼은 갈수록 살기를 띠고 어우러져 좀처럼 헤어질 줄을 몰랐다.
 
22
마츰내 칠부가 마지 못하는 듯 선뜻 제 칼을 뽑아 들고 사납게 날뛰는 두 전사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2. 2

 
24
"이게 무슨 짓들이냐, 자네들이 미쳤단 말이냐!"
 
25
칠부의 호통이 떨어졌다. 어떻게 그 목소리가 호되었던지 정신을 놓고 섰던 몇몇은 경풍을 할 지경이었다.
 
26
평시에 점잖고 부드러워 보이던 칠부가 이런 벽력 같은 소리를 지닌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27
"냉큼 칼을 던지고 물러서지를 못하느냐!"
 
28
두 번째 호령은 더욱 추상같았다. 그 의젓해 보이던 두 눈에는 불 같은 광채가 번쩍였다.
 
29
그 서슬에 두 사람은 움찔하고 칼을 멈추었다.
 
30
"도대체 자네들이 칼을 빼어든 곡절이 무엔가? 이게 임금께 충성된 일인가?"
 
31
칠부는 말끝을 약간 부드럽게 하면서도 두 친구를 번갈아보며 꾸짖는 듯 물었다.
 
32
"……."
 
33
"……."
 
34
싸우던 둘은 씨근벌떡 가뿐 숨길을 돌리며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35
"임금께 충성되지도 않은 일, 그러면 어버이께 효성을 다하기 위해서 칼을 빼어들었는가?"
 
36
"……."
 
37
"……."
 
38
"이도 저도 아니라면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기 위함인가?"
 
39
싸우던 이들은 말없이 고개만 수그러졌다. 칠부는 한층 목소리를 가다듬어, "둘이 버티고 서서 물러나지 않는 것은 적진과 대진 중이란 말인가? 왜 대답이 없는가? 화랑의 길을 가는 자가 살생은 않을 수 없는 일, 그렇다고 함부로 죽이지 말고 죽일 만한 자를 골라 죽여야 하는 것 아닌가? 자네들의 오늘밤에 저지른 일은 이 다섯 가지 경계에 모조리 어그러지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도 칼을 들고 섰을 터인가?"
 
40
두 사람의 손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이 쥐었던 칼이 일시에 힘없이 떨어졌다.
 
41
칠부의 얼굴찌는 새삼스럽게 엄숙해지고 그 목소리는 더욱 장중한 맛을 띠었다.
 
42
"더구나 이런 재미롭지 못한 사단이 꽃 애기씨로 말미암아 벌어졌다는 것은 더욱 통탄할 노릇일세. 입 밖에도 내지 못할 노릇일세. 그분을 가지고 설왕설래하다가 칼부림까지 하다니 될 뻔이나 할 말인가? 도대체 그분이 누구신가? 금지옥엽, 공주가 아니신가? 이 소문이 왁자하게 나서 대내에까지 들어가 보게. 위에서 얼마나 진노를 하실 텐가. 설령 위에서 아무런 처분이 안 계시다 해도 신자 된 도리에 배를 갈라 용서를 빌어도 오히려 죄가 남을 것 아닌가? 항차 그분이 어떠신 분인가? 신라의 빛이시고 신라의 자랑이 아니신가? 그대도록 맑고 높고 아름다운신 분은 몇 백년 몇 천년 만에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시거나 하신다는 분이 아니신가?……."
 
43
칠부는 잠깐 말을 끊었다. 그는 너무 감격에 겨워 목이 메이고 말았던 것이다.
 
44
"그 애기씨의 아름다움은 다시 이 하늘 아래에는 짝이 없으신, 백제에서도 고구려에서도 멀리 중원에서도 신라에 한 번 나서 그 애기씨를 지척에 뵈올꼬지고라고 발원까지 한다지 않는가. 우리가 다행히 이 땅 이 나라에 나서 그분을 우러러 뵈올 수 있는 것만 해도 영광이요 지복이어든, 만일에, 만일에……."
 
45
칠부의 장강대하를 기울이는 듯하던 웅변이 금세로 더듬거린다. 그의 불같이 빛나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46
"만일에 우리가 하찮은 시비로 그분에 털끝만치라도 누가 되고 옥에 티가 된다면 그런 죄송쩍고 아까운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47
말을 채 마치지 못해서 칠부는 칼을 던지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수품과 눌문도 주저앉았다. 여럿 중에는 감격에 겨운 그 누구인지 훌쩍 소리까지 내었다.
 
 

3. 3

 
49
과연 칠부의 말마따나 신라 선화 공주의 아름다운 이름은 천하에 떨치었다.
 
50
진평왕이 아들이 없고 딸 삼 형제만 두었다는 것부터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접양지국 백제와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멀리 수(隋)나라의 조정에까지 화제에 오르나리게 되었다. 나쁘게 말하는 편은, 아들이 없고 딸들만 있으니, 지금은 진평왕이 절륜의 용맹과 거대한 체구로 나라를 잘 다스리겠지만, 만일 죽기만 하는 날이면, 후사가 끊어져 내란이 일어나고 나라가 어지러우리니 그 틈을 엿보자고 단안을 나리기도 하였고, 좋게 말하는 편은, 비록 딸은 딸일망정 맏공주가 인물도 출중하려니와 슬기가 놀랍고 덕성이 무던하니 여왕으로도 넉넉히 나라를 바루잡을 터인즉, 호락호락 넘볼 수도 없다고 관측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십 년 후가 될지 이 십 년 후가 될지 모르는 노릇이라, 노련한 정치객 이외에는 그리 큰 흥미를 끌지 못하였고, 젊은 축의 속을 끓이기는 차라리 셋째 공주가 절세미인이란 점이었다. 이 소문이 어떤 경로를 밟고 어떻게 전파가 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마, 선화 공주의 자색이야말로 천하에 뛰어난다는 평판이 자자하였다.
 
51
젊은 장수나 공자들은 십 만 대병을 휘몰아 대번에 신라를 쳐 무찌르고 왕궁을 범한 뒤에 절세가인 선화 공주를 뒷 수레에 싣고 의기양양하게 개선을 해 보는 것이 미상불 그들의 호화로운 꿈이었다. 나라를 얻고 미인을 얻고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는 것이 청춘과 야심에 불타는 그들의 일생의 소원이요 소망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신라 쪽 동편 하늘을 흘겨보며 장검을 어루만져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을 한한 자도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52
언젠가는 고구려 장수와 백제 왕자가 단신으로 장사치나 농부로 변장하고 국경을 몰래 넘어 서라벌 서울로 들어와서 왕궁을 엿본다는 풍문이 떠돌아서, 군사를 풀어 왕궁을 경계하는 한편으로 거리거리에 방을 내붙이고 수상한 외국인 같은 눈치만 보이거든 곧 관가로 밀보하라고까지 한 일도 있었다.
 
53
다른 나라의 귀공자들도 선화 공주 때문에 이런 공단 같은 꿈을 꾸는 판이니 더구나 본국인 신라의 , 명문거족의 자손으로 태어난 다음에야 저마다 선화 공주에게 불 같은 향의를 가질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공주님이 심에 어찌하랴. 하늘 까마득하게 반짝이는 별임에 어찌하랴. 사색도 낼 수 없는 노릇, 호소도 할 수 없는 노릇. 가슴속 깊이깊이 숨은 사랑을 부둥켜 안고 남 모르게 제 애간장만 바짝바짝 태우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4
그런데! 오늘 밤 흐무러진 한가위 잔치에서, 그 물씬한 향락의 분위기 안에서, 그 도취의 황홀경 속에서, 제각기 그리고 그리던 선화 공주를, 꽃 애기씨를 제 눈앞에 현실로 보고야 말았다. 백랍이라 하기엔 너무 생기고 돌고 옥으로 깎았다면 너무 따스할 듯한 그 살결을 현실로 보고야 말았다. 그 어여쁜 눈매, 그 연연한 뺨을 분명히 보았다. 가는 웃음이 실바람처럼 스쳐 가는 듯한 입술을 분명히 보았다. 그 옻빛 같은 머리 밑에 뽀얗게 드러난 살쩍을 분명히 보았다. 알맞게 편 목고개가 확실히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55
그 날씬한 가는 허리가 확실히 그들의 눈앞에 움직였다. 질질 흐르는 비단 옷자락 위로 무수한 별처럼 번쩍이는 주옥과 금은의 혼란한 꾸밈꾸밈이 정말로 그들의 눈을 어리게 하였다. 그 존귀한 모양 그 한아한 거동이 참말로 그들의 창자를 녹이게 하였다.
 
56
그들은 미칠 듯하였다.
 
57
왕궁을 떠나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극히 사랑하는 이에게 한 발자욱이라도 더 가깝게 가고 싶었다.
 
58
새벽 이슬을 맞으면서도 다시 안압지 못둑으로 그들은 모였던 것이다.
 
59
그들은 더 참을래야 참을 수 없었다. 더 견딜래야 견딜 수 없었다. 더 숨길래야 숨길 수 없었다.
 
60
저절로 선화 공주의 이름이 입길에 올랐다. 한번 그 이름을 듣자, 가슴이 울리고 창자가 울리고 왼 몸 뼈마디가 저리었다.
 
61
저 이외의 다름 사람이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무슨 큰 모독 같았다. 큰 죄악 같았다. 까닭 모를 불덩이 같은 분노가 치받치어 칼까지 빼어들고 만 것이다.
 
62
먼저 칼을 뽑아 든 수품이가 조금 기단하였을 뿐 그들의 마음 경지는 거의 같은 형편에 놓여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적어도 수품, 눌문, 칠부 세 사람은 왜 그러냐 하면, 칠부는 당시 재상 상대등 노리부(駑里夫)의 아들이요, 수품의 아버지는 이찬 수을부(首乙夫)로 상대등에 다음 가는 지위에 있었다 선화 공주의 . 부마를 구하자면 이 두 사람이 첫 물망에 오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눌문은 비록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북한산주 군주(北漢山州軍主) 눌최(訥催)의 아들일망정 세 사람이 다 같은 참뼈(眞骨)로, 더구나 눌문은 어려서부터 화랑에 뽑히어 그 낭도가 오늘날 천 여명을 헤아렸고 왕의 총애도 두터워 불시 발탁으로 대아찬(大阿飱) 벼슬까지 받은 터이라 내심으로 만만한 자신은 결코 칠부와 수품에게 떨어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4. 4

 
64
한가위 잔치가 있은 지도 어느덧 열흘 넘게 지났다.
 
65
상대등 노리부의 작은 사랑에는 주인 칠부가 휘황한 촛불 아래 손자 병서를 보다가 말고, 벌떡 일어나 미닫이를 한번 드르륵 열어젖히고 닫쳐진 덧문 문풍지를 손으로 더듬더듬 무엇을 찾는 듯하더니, 다시 미닫이를 닫다, 제 앉았던 다단향 책상머리와 옆을 두리두리 살피기도 하고, 나종에는 고개를 책상 밑에 처박고 들여다보기도 하며 무엇인지 분주히 찾는 모양이었다.
 
66
"대관절 이놈이 어디 숨었단 말인가?"
 
67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찾기를 단념한 듯 다시 책을 집어들었으되, 종시 마음이 쏠리지 않는 모양으로, 필경 책을 덮어버리고 와락 일어나 방안을 왔다갔다 거닐었다.
 
68
"미물도 사람의 정을 꽤 충동이거든. 허."
 
69
한탄 비슷 쓴 웃음을 배앝는다. 본대부터 나이보담 노성한 그의 얼굴이건만 이 열흘 동안에 눈에 띄도록 수척해지고 앳된 티가 사라졌다. 눈등이 꺼지고 볼이 홀쭉 빨아들었다.
 
70
그는 아까부터 쓰르라미 우는 소리에 마음이 헛갈리어 보는 책도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71
쓰르람, 쓰르람! 단조로우나 애를 끓는 듯한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까닭 없이 귀에 울리고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는 이 조그마한 벌레의 정체라도 알아보려고 찾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72
문틈에서 새어 나오는가 하면 바루 책상머리에서 울고 그곳으로 눈을 주면 어느 틈엔지 책상 밑에서 재재거린다.
 
73
상 밑을 굽어 보는 새 영리한 그놈은 벽 속에나 숨은 듯.
 
74
"허, 고놈!"
 
75
그는 또 한 마디를 뇌이었다. 실없이 찾기를 시작한 노릇이 불찰인지 모른다 하잘것없는 조그마한 . 일이나마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여지없이 그의 비위를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76
그의 싫어하는 것은 하필 쓰르라미 소리뿐이었다. 요새 와서 더욱 느껴지는 가을이 도대체 싫었다.
 
77
아닌 밤중에 우 하고 몰려 와서 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도 싫었다. 가까스로 든 잠을 깨워 버리는 고통은 어지간히 큰 것이었다. 정녕 사람의 발자 최소리를 내는 버석버석하는 낙엽 소리는 더구나 싫었다. 생생하던 푸른 빛이 하루밤 사이에 걷히고 누르불긋 단풍이 드는 것도 마땅치가 않았다.
 
78
왜 이렇게도 마음이 죄이는가. 왜 이렇게도 가슴이 뻑적지근한가. 그가 선화 공주를 사모하기는 어느 동료보담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동료보담 지체가 높지 않은가, 나이가 차지 않았는가, 어른답지 않은가.
 
79
동료들 중에 가장 의젓하고 점잖다는 비평이 높은 그이어니, 입때 내색을 낼 리야 만무하였다. 내색을 내지 않기로 꽃 애기씨야 자기의 천생배필같이 든든한 자신이 없지 않았었다.
 
80
그렇던 것이 저번 한가위 밤을 지낸 뒤에는 어쩐지 마음이 서틀러진다. 자기의 경쟁자가 하나둘이 아니요, 또 결코 넘보지만 못할 작자들이었다.
 
81
이 둘 데 없는 심사를 누구에게 호소할까.
 
82
물론 당자인 꽃 애기씨에게 호소하는 것이 가장 첩경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가망도 없는 일.
 
83
그러면 누구에게.
 
84
한 번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의 가슴은 한 그믐 밤빛같이 어두워진다. 재상가 집에서 근엄하게 자라난 그는 절대로 권도를 쓸 생각도 못하였다.
 
85
그의 방안을 거닐던 발길은 별안간 뚝 멈추어졌다.
 
86
"에라, 아버지에게나 호소해 버릴까?"
 
87
언뜻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간 것이다.
 
88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인 아버지, 임금님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모으신 아버지, 그 어른이 드시면 안 될 리도 없을 상싶었다. 엄하신 때엔 열화와 같으시지만 벌써 칠순이 넘으시고 자기를 집안의 기둥으로 믿고 귀여워하시는 아버지시니 자기의 간곡한 소원을 아니 풀어주실 리도 만무할 듯하였다.
 
89
더구나 자기는 둘도 없는 외동아들이 아닌가.
 
90
"옳다, 아버지께 청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
 
91
그는 있는 용기를 다 내어 방장 큰사랑으로 건너가려는 임물이었다.
 
92
문득 댓돌에서 인기척이 나며 큰사랑에서 부리는 어린 종놈이 불쑥 나타났다.
 
93
"쇠불한께옵서 잠깐 오시라는 분부가 계시옵니다."
 
94
칠부는 제 귀를 의심하였다. 이게 웬일로인가. 이야말로 천우신조가 아니냐. 내가 아버지께 여쭐 말씀이 간절하거늘 아버지께서 먼저 부르시니 일은 벌써 다 된 일이었다.
 
95
허둥지둥 큰사랑으로 건너가는 그의 발길은 춤이라도 추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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