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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벗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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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이광수
1917년 《靑春》지에 발표된 서간체 형식의 단편소설으로 동경 유학 시절의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문장에 있어서는 아직 신소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그 묘사적 문체와 애정 문제의 대담한 표출은 근대 소설적인 성격에 접근하고 있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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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第一信(제일신)

 
2
사랑하는 벗이여
 
3
前番(전번) 平安(평안)하다는 片紙(편지)를 부친 後(후) 사흘만에 病(병)이 들었다가 오늘이야 겨우 出入(출입)하게 되었나이다. 사람의 일이란 참 믿지 못할 것이로소이다. 平安(평안)하다고 便紙(편지) 쓸 때에야 뉘라서 三日後(삼일후)에 重病(중병)이 들 줄을 알았사오리까. 健康(건강)도 믿을 수 없고, 富貴(부귀)도 믿을 수 없고, 人生萬事(인생만사)에 믿을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生命(생명)인들 어찌 믿사오리이까. 이 便紙(편지)를 쓴지 三日後(삼일후)에 내가 죽을는진들 어찌 아오리까. 古人(고인)이 人生(인생)을 朝露(조로)에 비긴 것이 참 마땅한가 하나이다. 이러한 中(중)에 오직 하나 믿을 것이 精神的(정신적)으로 同胞民族(동포민족)에게 善影響(선영향)을 끼침이니, 그리하면 내 몸은 죽어도 내 精神(정신)은 여러 同胞(동포)의 精神(정신) 속에 살아 그 生活(생활)을 管攝(관섭)하고 또 그네의 子孫(자손)에게 傳(전)하여 永遠(영원)히 生命(생명)을 保全(보전)할 수가 있는 것이로소이다. 孔子(공자)가 이리하여 永生(영생)하고, 耶蘇(야소)와 釋迦(석가)가 이리하여 永生(영생)하고, 여러 偉人(위인)과 國土(국토)와 學者(학자)가 이리하여 永生(영생)하고, 詩人(시인)과 道士(도사)가 이리하여 永生(영생)하는가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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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只今(지금) 病席(병석)에서 일어나 사랑하는 그대에게 이 便紙(편지)를 쓰려 할 제 더욱 이 感想(감상)이 깊어지나이다. 어린 그대는 아직 이뜻을 잘 理解(이해)하지 못하려니와 聰明(총명)한 그대는 近似(근사)하게 想像(상상)할 수는 있는가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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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病(병)은 重(중)한 寒感(한감)이라 하더이다. 元來(원래) 上海(상해)란 水土(수토)가 健康(건강)에 不適(부적)하여 이곳 온지 一週日(일주일)이 못하여 消化不良症(소화불량증)을 얻었사오며 이번 病(병)도 消化不良(소화불량)에 原因(원인)한가 하나이다. 첨 二(이), 三日(삼일)은 身體(신체)가 倦怠(권태)하고 精神(정신)이 沈鬱(침울)하더니 하루 저녁에는 惡寒(악한)하고 頭痛(두통)이 나며 全身(전신)이 떨리어 그 괴로움이 참 形言(형언)할 수 없더이다. 어느덧 한잠을 자고나니 이번에는 全身(전신)에 모닥불을 퍼붓는 듯하고 가슴은 바짝바짝 들이타고 燥渴症(조갈증)이 나고 腦(뇌)는 부글부글 끓는 듯하여 가끔 精神(정신)을 잃고 군소리를 하게 되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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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나는 더욱 懇切(간절)히 그대를 생각하였나이다. 그 때에 내가 病(병)으로 있을 제 그대가 밤낮 내 머리맡에 앉아서 或(혹) 손으로 머리도 짚어 주고 多情(다정)한 말로 慰勞(위로)도 하여 주고 ── 그 中(중)에도 언제 내 病(병)이 몹시 重(중)하던 날 나는 二(이), 三時間(삼시간) 동안이나 精神(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깨어날 제 그대가 무릎 위에 내 머리를 놓고 눈물을 흘리던 생각이 더 懇切(간절)하게 나나이다. 그때에 내가 겨우 눈을 떠서 그대의 얼굴을 보며 내 여위고 찬 손으로 그대의 따뜻한 손을 잡을제 내 感謝(감사)하는 생각이야 얼마나 하였으리이까. 只今(지금) 나는 異城(이성) 逆旅(역려)에 외로이 病(병)들어 누운 몸이라 懇切(간절)히 그대를 생각함이 또한 當然(당연)할 것이로소이다. 나는 하도 아쉬운 마음에 억지로 그대가 只今(지금) 내 곁에 앉았거니, 내 머리를 짚고 내 손을 잡아주거니 하고 想像(상상)하려 하나이다. 夢寐間(몽매간)에 그대가 내 곁에 있는 듯하여 반겨 깨어 본즉 차디찬 電燈(전등)만 無心(무심)히 天井(천정)에 달려 있고 琉璃窓(유리창) 틈으로 찬바람이 휙휙 들여쏠 뿐이로소이다. 世上(세상)에 여러 가지 괴로움이 아무리 많다 한들 異城逆旅(이성역려)에 외로운 病이(병)든 것보다 더한 괴로움이야 어디 있사오리이까. 몸에 熱(열)은 如前(여전)하고 頭痛(두통)과 燥渴(조갈)은 漸漸(점점) 甚(심)하여 가되 主人(주인)은 잠들고 冷水(냉수)한 잔 주는 이 없나이다. 그때 그대가 冷水(냉수) 먹는 것이 害(해)롭다 하여 밤에 커다란 무를 얻어다가 깍아 주던 생각이 나나이다. 焦渴(초갈)한 中(중)에 시원한 무 ─ 사랑하는 그대의 손으로 깍은 무 먹는 맛은 仙桃(선도) ─ 만일 있다 하면 ─ 먹는 맛이라 하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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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에는 여러 가지 空想(공상)과 雜念(잡념)이 많이 생기는 것이라 只今(지금) 내 머리에는 過去(과거) 일, 未來(미래) 일, 있던 일, 없던 일, 기쁘던 일, 섧던 일이 連絡(연락)도 없고 秩序(질서)도 없이 짤막짤막 조각조각 쓸어 나오나이다. 한참이나 이 雜念(잡념)과 空想(공상)을 겪고 나서 번히 눈을 뜨면 마치 그 동안에 數十年(수십년)이나 지나간 듯하나이다. 或(혹)「죽음」이라는 생각도 나나이다. 내 病(병)이 漸漸(점점) 重(중)하여 져서 明日(명일)이나 再明日(재명일)이나 또는 이 밤이 새기 前(전)에라도 이 목숨이 스러지지 아니할는가,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가 非夢似夢間(비몽사몽간)에 이 世上(세상)을 버리지나 아니할는가, 或(혹) 只今(지금) 내가 죽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제 손으로 제 몸을 만져 보기도 하였나이다.「죽음!」生命(생명)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이뇨. 生命(생명)과 죽음은 한데 매어 놓은 빛 다른 노끈과 같으니 붉은 노끈과 검은 노끈은 元來(원래)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노끈의 한 끝을 붉게 들이고 한 끝을 검게 들였을 뿐이니 이 빛과 저 빛의 距離(거리)는 零(영)이로소이다. 우리는 광대 모양으로 두 팔을 벌리고 붉은 끝에서 始作(시작)하여 時時刻刻(시시각각)으로 검은 끝을 向(향)하여 가되 어디까지나 붉은 끝이며 어디서부터 검은 끝인지를 알지 못하나니, 다만 가고 가고 가는 동안에 언제 온지 모르게 검은 끝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로소이다. 나는 只今(지금) 어디쯤에나 왔는가. 나선 곳과 검은 끝과의 距離(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나는 只今(지금) 病(병)이란 것으로 全速力(전속력)으로 검은 끝을 向(향)하여 달아나지 않는가, 할 때에 알 수 없는 恐怖(공포)가 全身(전신)을 둘러싸는 듯하더이다. 오늘날까지 工夫(공부)한 것은 무엇이며 勤苦(근고)하고 일한 것은 무엇이뇨. 사랑과 미움과 國家(국가)와 財産(재산)과 名望(명망)은 무엇이뇨. 希望(희망)은 어디 쓰며, 善(선)은 무엇, 惡(악)은 무엇이뇨. 사람이란 一生(일생)에 얻은 모든 所得(소득)과 經驗(경험)과 記憶(기억)과 歷史(역사)를 아끼고 아끼며 지녀 오다가 무덤에 들어가는 날, 무덤 海關(해관)에서 말끔 빼앗기고 世上(세상)에 나올 때에 발가벗고 온 모양으로 世上(세상)을 떠날 때에도 발가벗기어 쫓겨나는 것이로소이다. 다만 變(변)한 것은 고와서 온 것이 미워져서 가고, 기운차게 온 것이 가엾게 가고, 祝福(축복)받아 온 것이 咀呪(저주)받아 감이로소이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나이다. 이제 죽으면 어떻고 來日(내일) 죽으면 어떠며 어제 죽었으면 어떠랴 ─ 아주 나지 않았은들 어떠랴. 아무 때 한 번 죽어도 죽기는 죽을 人生(인생)이요, 죽은 뒤면 王公(왕공)이나 거지나 사람이나 돼지나 乃至(내지) 귀뚜라미나 다 같이 스러지기는 마치 一般(일반)이니 두려울 것이 무엇이며 아까울 것이 무엇이랴 함이 나의 死生觀(사생관)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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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人生(인생)이 生(생)을 아끼고 死(사)를 두려워함은 生(생)이 있으므로 얻을 무엇을 잃어버리기를 아껴 함이니, 或(혹) 金錢(금전)을 좋아하는 이가 金錢(금전)의 快樂(쾌락)을 아낀다든가, 사랑하는 父母(부모)나 妻子(처자)를 둔 이가 이들과 作別(작별)하기를 아낀다든가, 或(혹) 힘써 얻은 名譽(명예)와 地位(지위)를 아낀다든가, 或(혹)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기를 아낀다든가, 或(혹) 宇宙萬物(우주만물)의 美(미)를 아낀다든가 함인가 하나이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人生(인생)으로 하여금 生(생)의 慾望(욕망)과 執着(집착)을 生(생)하게 하는 것이니, 이 생각에는 人世(인세)의 萬事(만사)가 發生(발생)하는 것인가 하나이다. 내가 只今(지금) 死(사)를 생각하고 恐怖(공포)함은 무엇을 아낌이오리이까. 나는 富貴(부귀)도 없나이다, 名譽(명예)도 없나이다, 내게 무슨 아까울 것이 있사오리이까, ─ 오직 「사랑」을 아낌이로소이다. 내가 남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快樂(쾌락)과 남이 나를 사랑하여 주는 데서 오는 快樂(쾌락)을 아낌이로소이다. 나는 그대의 손을 잡기 爲(위)하여, 그대의 多情(다정)한 말을 듣기 爲(위)하여, 그대의 香氣(향기)로운 입김을 맡기 爲(위)하여, 차디차고 쓰디쓴 人世(인세)의 曠野(광야)에 내 몸은 오직 그대를 안고 그대에게 안겼거니 하는 意識(의식)의 짜르르 하는 妙味(묘미)를 맛보기 爲(위)하여 살고자 함이로소이다. 그대가 만일 平生(평생) 내 머리를 짚어 주고 내 손을 잡아 준다면 나는 즐겨 一生(일생)을 病(병)으로 지내리이다. 蒼空(창공)을 바라보매 모두 차디차디한 별인 中(중)에 오직 따뜻한 것은 太陽(태양)인 것같이 人事(인사)의 萬般現象(만반현상)을 돌아보매 모두 차디차디한 中(중)에 오직 따뜻한 것이 人類(인류) 相互(상호)의 愛情(애정)의 現象(현상)뿐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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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저 形式的宗敎家(형식적종교가), 道德家(도덕가)가 입버릇으로 말하는 그러한 愛情(애정)을 이름이 아니라, 生命(생명) 있는 愛情(애정) ── 펄펄 끓는 愛情(애정), 빳빳 마르고 슴슴한 愛情(애정) 말고, 자릿자릿하고 달디달디한 愛情(애정)을 이름이니, 假令(가령) 母子(모자)의 愛情(애정), 어린 兄弟姉妹(형제자매)의 愛情(애정), 純潔(순결)한 靑年男女(청년남녀)의 相思(상사)하는 愛情(애정), 또는 그대와 나와 같은 相思的友情(상사적우정)을 이름이로소이다. 乾燥冷淡(건조냉담)한 世上(세상)에 千年(천년)을 살지 말고 이러한 愛情(애정) 속에 一日(일일)을 살기를 願(원)하나이다. 그러므로 나의 잡을 職業(직업)은 아비, 敎師(교사), 사랑하는 사람, 病人看護(병인간호)하는 사람이 될 것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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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只今(지금) 사랑할 이도 없고 사랑하여 줄 이도 없는 외로운 病席(병석)에 누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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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기를 三(삼), 四日(사일) 하였나이다. 上海(상해) 안에는 親舊(친구)도 없지 아니하오매, 내가 앓는 줄을 알면 찾아오기도 하고 慰勞(위로)도 하고 或(혹) 醫員(의원)도 데려오고 밤에 看護(간호)도 하여줄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앓는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傳(전)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 뜻은 사랑하지 않는 이의 看護(간호)도 받기 싫거니와 내가 저편에 請(청)하여 저편으로 하여금 體面上(체면상) 나를 慰問(위문)하게 하고 體面上(체면상) 나를 爲(위)하여 밤을 새우게 하기가 싫은 까닭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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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지내 보니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爲(위)하여서는 連日(연일) 밤을 새워도 困(곤)한 줄도 모르고 設或(설혹) 病人(병인)이 吐(토)하거나 똥을 누어 내 손으로 그것을 쳐야 할 境遇(경우)를 當(당)하더라고 싫기는커녕, 도리어 내가 사랑하는 이를 爲(위)하여 服務(복무)하게 된 것을 큰 快樂(쾌락)으로 알거니와 제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爲(위)하여서는 한 時間(시간)만 앉아도 졸리고 허리가 아프고 그 病人(병인)의 살이 내게 닿기만 하여도 싫은 症(증)이 생겨 或(혹) 억지로 體面(체면)으로 그를 안아 주고 慰勞(위로)하여 주더라도 이는 한 外飾(외식)에 지나지 못하며 甚至於(심지어) 저것이 죽었으면 사람 죽는 구경이나 하련마는 하는 수도 있더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의 外飾(외식)하는 看護(간호)를 받으려하지 아니함이로소이다. 그때에도 여러 사람이 곁에 둘러앉아서 여러 가지로 나를 慰勞(위로)하고 救援(구원)하는 것보다 그대가 혼자 困(곤)하여서 앉은 대로 壁(벽)에 기대어 조는 것이 도리어 내게 큰 效力(효력)이 되고 慰安(위안)이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여러 사람의 看護(간호)를 받기보다 想像(상상)으로 실컷 사랑하는 그대의 看護(간호)를 받는 것이 千層萬層(천층만층) 나으리라 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아니한 것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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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日夜(제오일야)에 가장 甚(심)하게 苦痛(고통)하고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나 精神(정신)을 못 차리고 昏睡(혼수)하였나이다. 하다가 곁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기로 겨우 눈을 떠 본즉 어떤 淸服(청복) 입은 젊은 婦人(부인)과 男子學徒(남자학도) 하나이 風爐(풍로)에 조그마한 남비를 걸어 놓고 무엇을 끓이더이다. 稀微(희미)한 精神(정신)으로나마 깜짝 놀랐나이다. 꿈이나 아닌가 하였나이다. 나는 淸人女子(청인여자)에 아는 이가 없거늘 이 어떤 사람이 나를 爲(위)하여 ── 외롭게 病(병)든 나를 爲(위)하여 무엇을 끓이는고. 나는 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動靜(동정)을 보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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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있다가 그 少年學生(소년학생)이 내 寢臺(침대) 곁에 와서 가만히 내 어깨를 흔들더이다. 나는 깨었나이다. 그 少年(소년)은 핏기 있고 快活(쾌활)한 하고 상긋상긋 웃는 얼굴로 나의 힘없이 뜬 눈을 들여다보더니 淸語(청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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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시오? 좀 나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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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無人曠野(무인광야)에서 동무를 만난 듯하여 꽉 그 少年(소년)을 쓸어안고 싶었나이다.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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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關係(관계)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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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한 손에 부젓거락 든 婦人(부인)의 視線(시선)이 마주치더이다. 나는 얼른 보고 그네가 오누인 줄을 알았나이다. 그 婦人(부인)이 나 잠 깬 것을 보고 寢臺(침대) 가까이 와서 英語(영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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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약)을 다렸으니, 爲先(위선) 잡수시고 早飯(조반)을 좀 잡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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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내가 무슨 對答(대답)을 하오리이까.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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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謝(감사)하올시다. 하나님이여, 당신네게 福(복)을 내리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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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따름이로소이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나이다. 그 少年(소년)은 外套(외투)를 불에 쪼여 입혀 주고 婦人(부인)은 남비에 데인 藥(약)을 琉璃盞(유리잔)에 옮겨 담더이다. 나는 일어 앉아 내 이불위에 보지 못하면 上等(상등) 담요가 덮인 것을 發見(발견)하였나이다. 나는 참말 꿈인가 하고 고개를 흔들어 보았나이다. 나는 차마 이 恩人(은인)을 더 고생시키지 못하여 억지로 일어나 내 손으로 藥(약)도 먹으려 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두 恩人(은인)은 억지로 나를 붙들어 앉히고 藥(약) 그릇을 손수 들어 먹이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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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藥(약)을 먹음보다 그네의 愛情(애정)과 精誠(정성)을 먹는 줄 알고 단모금에 죽 들이켰나이다. 곁에 섰던 少年(소년)은 더운 물을 들고 섰다가 곧 양치하기를 勸(권)하더이다. 婦人(부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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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早飯(조반)을 만들겠으니 바람 쏘이지 말고 누워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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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물을 길러 가는지 아래 層(층)으로 내려가더이다. 나는 그제야 少年(소년)을 向(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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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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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 少年(소년)은 한참 躊躇躊躇(주저주저)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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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이웃에 사는 사람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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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내 册床(책상) 위에 놓은 그림을 보더이다. 나는 다시 물을 勇氣(용기)가 없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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婦人(부인)은 바께쓰에 물을 길어 들고 올라오더니 少年(소년)을 한 번 구석에 불러 무슨 귓속말을 하여 내어보내고 自己(자기)는 藥(약) 달이던 남비를 부시어 牛乳(우유)와 쌀을 두고 粥(죽)을 쑤더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물어 보고 싶은 맘이 懇切(간절)하기는 하나 未安(미안)하기도 하고 어떻게 물을지도 알지 못하여 가만히 베개에 기대어 하는 양만 보고 있었나이다. 그때엣 나의 心中(심중)은 어떻게 形言(형언)할 수가 없었나이다. 婦人(부인)은 그리 燦爛(찬란)하지 아니한 비단 옷에 머리는 流行(유행)하는 洋式(양식) 머리, 粉(분)도 바른 듯 만 듯, 自然(자연)한 薔薇(장미)빛 같은 두 보조개가 아침 光線(광선)을 받아 더할 수 없이 아름답더이다. 그뿐더러 매우 精神(정신)이 純潔(순결)하고 敎育(교육)을 잘 받은 줄은 그 얼굴과 擧止(거지)와 言語(언어)를 보아 얼른 알았나이다. 나는 그가 아마 어느 文明(문명)한 耶蘇敎人(야소교인)의 家庭(가정)에서 가장 幸福(행복)하게 자라난 處子(처자)인 줄을 얼른 알았나이다. 그러고 그의 父母(부모)의 德(덕)을 사모하는 同時(동시)에 人類中(인류중)에 이러한 淨潔(정결)한 處子(처자)있음을 자랑으로 알며 그를 보게 된 내 눈과 그의 看護(간호)를 받게된 내 몸을 無上(무상)한 幸福(행복)으로 알았나이다. 나는 病苦(병고)도 좀 덜린 듯하고 設或(설혹) 덜리지는 아니하였더라도 淸淨(청정)한 稀罕(희한)한 기쁨이 病苦(병고)를 잊게 함이라 하였나이다. 實狀(실상) 昨夜(작야)는 참 苦痛(고통)하였나이다. 하도 괴롭고 하도 외로와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어버리려고까지 하였나이다. 만일 이런 일이 없었다면 오늘 아침에 깨어서도 또 그러한 凶(흉)하고 슬픈 생각만 하였을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맘에 기쁨을 얻고 生命(생명)의 快樂(쾌락)과 執着力(집착력)을 얻었나이다. 나는 죽지 말고 살려 하나이다. 울지 말고 웃으려 하나이다. 이러한 美(미)가 있고 이러한 愛情(애정)이 있는 世上(세상)은 버리기 에는 너무 아깝다 하나이다. 하나님은 地獄(지옥)에 들려는 어린 羊(양)에게 두 天使(천사)를 보내다 다시 당신의 膝下(슬하)로 부른 것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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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風爐(풍로)의 불을 불고 숟가락으로 粥(죽)을 젓는 婦人(부인)의 등을 向(향)하여 慇懃(은근)히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天使(천사)시여 하였나이다. 婦人(부인)은 偶然(우연)히 뒤를 돌아보더이다.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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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층층대를 올라오는 소리가 나더니 그 少年(소년)이 蜜柑(밀감)과 林檎(임금) 담은 광주리와 牛乳筩(우유통)을 들고 들어와 그 婦人(부인)께 주더이다. 婦人(부인)은 또 무어라고 소곤소곤 하더니 그 少年(소년)이 알아들은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날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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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있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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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 册床(책상) 왼편 舌盒(설합)에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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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도 關係(관계)치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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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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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내 對答(대답)을 듣고 少年(소년)은 발소리도 없이 册床(책상) 舌盒(설합)을 열고 칼을 내어다가 林檎(임금)을 깍아 白紙(백지)위에 쪼개어 내 寢床(침상)머리에 놓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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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수세요, 목마르신데."
 
39
하고 焦悴(초췌)한 내 얼굴을 걱정스러운 듯이 보더이다. 나는 感謝(감사)하고 기쁜 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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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感謝(감사)하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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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얼른 두어 쪽 집어 먹었나이다. 그 맛이여! 빼빼 마르던 가슴이 뚫리는 듯하더이다. 그때에 그대의 손에 무쪽을 받아 먹던 맛이로소이다.
 
42
알지 못하는 處女(처녀)가 異國病人(이국병인)을 爲(위)하여 精誠(정성)들여 끓인 粥(죽)을 먹고 알지 못하는 少年(소년)이 손수 발가주는 蜜柑(밀감)을 먹고 나니 몸이 좀 부드러워지는 듯하더이다. 그제야 나는 婦人(부인)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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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感謝(감사)드릴 말씀이 없읍니다. 大體(대체) 아씨는 누구시완데 外國病人(외국병인)에게 이처럼 恩惠(은혜)를 끼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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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不知不覺(부지불각)에 눈물을 흘렸나이다. 婦人(부인)은 少年(소년)의 어깨를 만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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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이웃의 사람이올시다. 先生(선생)은 저를 모르시려니와 저는 여러번 先生(선생)을 뵈었나이다. 여러 날 出入(출입)이 없으시기로 主人(주인)에게 물은즉 病(병)으로 계시다기에 客地(객지)에 얼마나 외로우시랴 하고 제 同生(동생)(少年(소년)의 어깨를 한 번 더 만지며)을 데리고 藥(약)이나 한 貼(첩) 달여 드릴까 하고 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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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感激(감격)하여 한참이나 말을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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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安(미안)하올시다마는 좀 앉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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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婦人(부인)이 椅子(의자)에 앉은 뒤에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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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런 큰 恩惠(은혜)가 없읍니다. 平生(평생) 잊지 못할 큰 恩惠(은혜)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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婦人(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잠간 붉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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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萬外(천만외) 말씀이올시다."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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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듣고 나는 갑자기 精神(정신)이 아득하여지며 房(방) 안이 노랗게 되는 것만 보고는 어찌 된지 몰랐나이다. 아마 衰弱(쇠약)한 몸이 過劇(과극)한 精神的動搖(정신적동요)를 견디지 못하여 氣絶(기절)한 것이로다. 이윽고 멀리서 나는 사람의 소리를 들으며 깨어 본즉, 곁에는 그 婦人(부인)과 少年(소년)이 있고 그 外(외)에 어떤 洋服(양복) 입은 男子(남자)가 내 팔목을 잡고 섰더이다. 一同(일동)의 눈치와 얼굴에는 驚愕(경악)한 빛이 보이더이다. 나는 이 여러 恩人(은인)을 걱정시킨 것이 더욱 未安(미안)하여 기써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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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暫時(잠시) 昏迷(혼미)하였었읍니다. 이제는 平安(평안)하올시다."
 
54
그제야 婦人(부인)과 少年(소년)이 웃고 내 손목을 잡은 사람도 婦人(부인)을 向(향)하여,
 
55
"二(이), 三日內(삼일내)에 낫지요."
 
56
하고 아래로 내려가더이다. 婦人(부인)은「후 ─」하고 한숨을 쉬며,
 
57
"아까 잡수신 早飯(조반)이 滯(체)하셨는가요. 어떻게 놀랐는지 ─ 두 時間(시간)이나 되었읍니다."
 
58
그 後(후) 아무리 辭讓(사양)하여도 三日(삼일)을 連(연)하여 晝夜(주야)로 藥(약)과 飮食(음식)을 여투어 주어 부드러운 말로 慰勞(위로)도 하더이다. 그러나 앓는 몸이요, 또 물을 勇氣(용기)도 없이 姓名(성명)이 무엇인지, 다만 이웃이라 하나 統戶數(통호수)가 얼마인지도 몰랐나이다. 너무 오래 그네를 수고시키는 것이 좋지 아니하리라하여 不得已婦人(부득이부인)의 代筆(대필)로 몇몇 親舊(친구)에게 便紙(편지)를 띄우고 이제부터 내 親舊(친구)가 올 터이니 너무 수고 말으소서, 크나 큰 恩惠(은혜)는 刻骨難忘(각골난망)하겠나이다 하여 겨우 돌려보내었나이다. 그 동안 이 두 恩人(은인)에게 받은 恩惠(은혜)는 참 헤이릴 수도 없고 形言(형언)할 수도 없나이다. 더우기 그 추운 밤에 病床(병상)에 지켜 앉아 連(연)해 젖은 手巾(수건)으로 머리를 식혀 주며 자리를 덮어 주고 甚至於(심지어) 물을 데워 아침마다 手巾(수건)으로 얼굴을 씻어 주고 少年(소년)은 册床(책상)을 整頓(정돈)하여 주며 심부름을 하여 주고 ── 마침 十二月(십이월) 二十四(이십사), 五日頃(오일경)이라 學校(학교)는 休業(휴업)이나 ── 하루 세 번 藥(약)을 달이고 먹을 것을 만들어 주는 等(등) 親同生(친동생)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나이다. 나는 이 두 恩人(은인)을 무엇이라 부르리이까. 아우와 누이 ── 우리 言語中(언어중)에 여기서 더 親切(친절)한 말이 없으니 이말에「가장 사랑하고 가장 恭敬(공경)하는」이라는 形容詞(형용사)를 달아 「가장 사랑하는 누이」,「가장 사랑하는 아우」라 하려 하나이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살려 하나이다. 살아서 일하려 하나이다 ── 그대와 저와 세 사람을 爲(위)하여 그 세 사람을 가진 福(복) 있는 人生(인생)을 爲(위)하여 잘 살면서 잘 일하려 하나이다.
 
59
오늘은 十二月(십이월) 二十七日(이십칠일). 부디 心身(심신)이 平安(평안)하여 게으르지 말고 正義(정의)의 勇士(용사) 될 工夫(공부)하소서.
 
60
─사랑하시는 벗
 
 

2. 第二信(제이신)

 
62
前書(전서)는 只今(지금) 渤海(발해)를 건너갈 듯하여이다. 그러나 다시 사뢸 말씀 있어 또 그적이나이다.
 
63
오늘 아침에 처음 밖에 나와 爲先(위선) 恩人(은인)의 집을 찾아보았나이다. 그러나 姓名(성명)도 모르고 通戶(통호)도 모르매 아무리 하여도 찾을 수는 없이 空然(공연)히 四隣(사린)을 휘휘 싸매다가 마침내 찾지 못하고 말았나이다 . 찾다가 찾지 못하니 더욱 마음이 焦燥(초조)하여 뒤에 人跡(인적)만 있어도 幸(행)여 그 사람인가 하여 반드시 돌아보고 돌아보면 반드시 모를 사람이러이다. 幸(행)여 길에서나 만날까 하고 아무리 注目(주목)하여 보아도 그런 사람은 없더이다. 나는 무엇을 잃은 듯이 茫然(망연)히 돌아왔나이다. 돌아와서 그 보지 못하던 담요를 만지고 三(삼), 四日前(사일전)에 있던 光景(광경)을 그려 없는 곳에 그를 볼 양으로 철없는 애를 썼나이다.
 
64
나는 그가 섰던 자리에 서도 보고 그가 만지던 바를 만져도 보고 그가 걸어 다니던 길을 回想(회상)하여 그 方向(방향)으로 걷기도 하였나이다. 그가 우두커니 섰던 자리에 서서 깊이 숨을 들이쉬었나이다. 만일 空氣(공기)에 對流作用(대류작용)이 없었던들 그의 깨끗한 肺(폐)에서 나온 입김이 그냥 그 자리에 있던 온통으로 내가 들이마실 수 있었을 것이로소이다. 나는 그동안 門(문)을 열어 놓은 것을 恨(한)하나이다. 門(문)만 아니 열어 놓았던들 그의 입김과 살내가 아직 남았을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남은 김이나 들여마실 양으로 한 번 더 深呼吸(심호흡)을 하였나이다. 나는 다시 생각하였나이다. 그러나 香氣(향기)로운 입김과 깨끗한 살내는 내 房(방)에만 있을 것이 아니라, 全宇宙(전우주)에 퍼져서 全萬物(전만물)로 하여금 造物主(조물주)의 大傑作(대걸작)의 醇味(순미)를 맛보게 할 것이라 하였나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담요를 만지고 만지다가 담요 위에 이마를 대이고 엎더졌나이다. 내 가슴은 자주 뛰나이다. 머리가 훗훗 다나이다. 숨이 차지나이다. 나는 丁寧(정녕) 무슨 變化(변화)를 받는가 하였나이다. 「아아 이것이 사랑이로구나!」하였나이다. 그는 나의 말에 感謝(감사)를 주는 同時(동시)에 一種(일종) 不可思議(불가사의)한 불길을 던졌나이다. 그 불길을 只今(지금) 내 속에서 抵抗(저항)치 못할 勢力(세력)으로 펄펄 타나이다.
 
65
나는 朝鮮人(조선인)이로소이다. 사랑이란 말은 듣고, 맛은 못본 朝鮮人(조선인)이로소이다. 朝鮮(조선)에 어찌 男女(남녀)가 없사오리이까마는 朝鮮男女(조선남녀)는 아직 사랑으로 만나본 일이 없나이다. 朝鮮人(조선인)의 胷中(흉중)에 어찌 愛情(애정)이 없사오리이까마는 朝鮮人(조선인)의 愛情(애정)은 두 잎도 피기 前(전)에 社會(사회)의 習慣(습관)과 道德(도덕)이라는 바위에 눌리어 그만 말라 죽고 말았나이다. 朝鮮人(조선인)은 果然(과연)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國民(국민)이로소이다. 그네는 夫婦(부부)가 될 때에 얼굴도 못 보고 이름도 못 듣던 남남끼리 다만 契約(계약)이라는 形式(형식)으로 婚姻(혼인)을 맺자 一生(일생)을 이 形式(형식)에만 束縛(속박)되어 지나는 것이로소이다. 大體(대체) 이따위 契約(계약) 結婚(결혼)은 짐승의 雌雄(자웅)을 사람의 맘대로 마주 붙임과 다름이 없을 것이로 소이다 옷을 지어 입을 . 때에는 제 맘에 드는 바탕과 빛갈에 제 맘에 드는 모양으로 지어 입거늘 ── 담뱃대 하나를 사도 여럿 中(중)에서 고르고 골라 제 맘에 드는 것을 사거늘, 하물며 一生(일생)의 伴侶(반려)를 定(정)하는 때를 當(당)하여 어찌 다만 父母(부모)의 契約(계약)이라는 形式(형식)하나로 하오리이까. 이러한 婚姻(혼인)은 오직 두 사람 意義(의의)가 있다 하나이다. 하나는 父母(부모)가 그 아들과 며느리를 노리개감으로 앞에 놓고 구경하는 것과, 하나는 돼지 장사가 하는 모양으로 새끼를 받으려 함이로소이다. 이에 우리 朝鮮男女(조선남녀)는 그 父母(부모)의 玩具(완구)와 生殖(생식)하는 機械(기계)가 되고 마는 것이로소이다. 이러므로 지아비가 그 지어미를 생각할 때에는 곧 肉慾(육욕)의 滿足(만족)과 子女(자녀)의 生産(생산)만 聯想(연상)하고 男女(남녀)가 女子(여자)를 對(대)할 때에도 곧 劣等(열등)한 獸慾(수욕)의 滿足(만족)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로소이다. 男女關係(남녀관계)의 究竟(구경)은 毋論(무론) 肉的交接(육적교접)과 生殖(생식)이로소이다. 그러나 오직 이뿐이오리이까. 다른 짐슴과 조금도 다름 없이 오직 이뿐이오리이까. 肉的交接(육적교접)과 生殖以外(생식이외)에 ─또는 以上(이상)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리이까. 어찌 그러리요. 人生(인생)은 禽獸(금수)와 달라 精神(정신)이라는 것이 있나이다. 人生(인생)은 肉體(육체)를 重(중)히 여기는 同時(동시)에 精神(정신)을 승히 여기는 義務(의무)가 있으며 肉體(육체)의 滿足(만족)을 求(구)하는 同時(동시)에 精神(정신)의 滿足(만족)을 求(구)하려는 本能(본능)이 있나이다. 그러므로 肉體的行爲(육체적행위)만이 人生行爲(인생행위)의 全體(전체)가 아니요, 精神的行爲(정신적행위)가 또한 人生行爲(인생행위)의 一半(일반)을 成(성)하나이다. 그뿐더러 人類(인류)가 文明(문명)할수록, 個人(개인)이 修養(수양)이 많을수록 精神行爲(정신행위)를 肉體行爲(육체행위)보다 더 重(중)히 여기고 따라서 精神的滿足(정신적만족)을 肉體的滿足(육체적만족)보다 더 貴(귀)히 여기는 것이로소이다. 好衣好食(호의호식)이나 滿足(만족)하기는 凡俗(범속)의 하는 바로되 天地(천지)의 美(미)와 善行(선행)의 快感(쾌감)은 오직 君子(군자)라야 能(능)히 하는 바로소이다. 이와 같이 男子關係(남자관계)도 肉交(육교)를 하여야 비로소 滿足(만족)을 얻음은 野人(야인)의 일이요, 그 容貌(용모) 擧止(거지)와 心情(심정)의 優美(우미)를 嘆賞(탄상)하며 그를 精神的(정신적)으로 사랑하기를 無上(무상)한 滿足(만족)으로 알기는 文明(문명)한 修養(수양) 많은 君子(군자)라야 能(능)히 할 것이로소이다. 아름다운 女子(여자)을 사랑한다 하면 곧 野合(야합)을 想像(상상)하고, 아름다운 少年(소년)을 사랑한다 하면 곧 醜行(추행)을 想像(상상)하는 이는 精神生活(정신생활)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卑賤(비천)한 人格者(인격자)라 할 것이로소이이다. 외나 호박꽃만 사랑할 줄 알고 菊花(국화)나 薔薇(장미)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 얼마나 賤(천)하오리이까. 그러므로 男女(남녀)의 關係(관계)는 다만 肉交(육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精神的 愛着(정신적애착)과 融合(융합)에 있다 하나이다 ── 더구나 文明(문명)한 民族(민족)에 對(대)하여 그러한가 하나이다. 男女(남녀)가 서로 肉體美(육체미)와 精神美(정신미)에 홀리어 서로 全心力(전심력)을 傾注(경주)하여 사랑함이 人類(인류)에 特有(특유)한 男女關係(남녀관계)니 이는 무슨 方便(방편)으로 即(즉) 婚姻(혼인)이라는 形式(형식)을 이룬다든가, 生殖(생식)이라는 目的(목적)을 達(달)한다든가, 肉慾(육욕)의 滿足(만족)을 求(구)하려는 目的(목적)의 方便(방편)으로 함이 아니요,「사랑」그 물건이 人生(인생)의 目的(목적)이니 마치 나고 자라고 죽음이 사람의 避(피)치 못할 天命(천명)임과 같이 男女(남녀)의 사랑도 避(피)치 못할 또한 獨立(독립)한 天命(천명)인가 하나이다. 婚姻(혼인)의 形式(형식) 같은 것은 社會(사회)의 便宜上(편의상) 制定(제정)한 規模(규모)에 지나지 못한 것 ── 即(즉) 人爲的(인위적)이어니와 사랑은 造物(조물)이 稟賦(늠부)한 天性(천성)이라 人爲(인위)는 거스릴지언정 天意(천의)야 어찌 禁違(금위)하오리이까. 毋論(무론) 사랑 없는 婚姻(혼인)은 不可(불가)하거니와 사랑이 婚姻(혼인)의 方便(방편)은 아닌 것이로소이다. 吾人(오인)의 忠孝(충효)의 念(염)과 兄友弟恭(형우제공)의 念(염)이 天性(천성)이라 거룩한 것이라 하면 男女間(남녀간) 사랑도 毋論(무론) 그와 같이 天性(천성)이라 거룩할 것이로소이다. 그러므로 吾人(오인)은 決(결)코 이 本能(본능) ── 사랑의 本能(본능)을 抑制(억제)하지 아니할뿐더러 이를 自然(자연)한 (即(즉) 正當(정당)한) 方面(방면)으로 啓發(계발)시켜 人性(인성)의 完全(완전)한 發見(발견)을 期(기)할 것이로소이다. 忠孝(충효)의 念(염) 없는 이가 非人(비인)이라 하면 사랑의 念(염)없는 이도 또한 非人(비인)일지며 事實上(사실상) 人類(인류)치고 萬物(만물)이 다 가진 사라의 念(염)을 아니 가진 이가 있을 理(리)없을지나, 或(혹) 나는 없노라 壯談(장담)하는 이가 있다 하면 그는 社會(사회)의 慣習(관습)에 잡혀 自己(자기)의 本性(본성)을 抑制(억제)하거나 또는 社會(사회)에 阿謟(아첨)하기 爲(위)하여 本性(본성)을 欺罔(기망)하는 것이라 하나이다. 그러므로 人生(인생)이란 男女(남녀)를 勿論(물론)하고 一生(일생) 一次(일차)는 사랑의 맛을 보게 된 것이니 男子十七(남자십칠), 八歲(팔세) 女子(여자) 十五(십오), 六歲(육세)의 肉體(육체)의 美(미)와 心中(심중)의 苦悶(고민)은 即(즉) 사랑을 要求(요구)하는 節期(절기)를 表(표)하는 것이로소이다. 이때를 當(당)하여 그네가 正當(정당)한 사랑을 求得(구득)하면 그 二年(이년) 三年(삼년)의 사랑期(기)에 心身(심신)의 發達(발달)이 完全(완전)히 되고 男女(남녀) 兩性(양성)이 서로 理解(이해)하며 人情(인정)의 奧妙(오묘)한 理致(이치)를 깨닫나니, 孔子(공자)께서 「學詩乎(학시호)」아 하심같이 나는「學愛乎」(학애호)아 하려 하나이다. 이렇게 實利(실리)를 超絶(초절)하고 肉體(육체)를 超絶(초절)한 醇愛(순애)에 醉(취)하였다가 만일 境遇(경우)가 許(허)하거든 世上(세상)의 習慣(습관)과 法律(벌률)을 따라 婚姻(혼인)함도 可(가)하고 아니하더라도 相關(상관)없을 것이로소이다. 진실로 사랑은 人生(인생)의 一生行事(일생행사)에 매우 重要(중요)한 하나이니, 男女間(남녀간) 一生(일생)에 사랑을 지녀 보지 못함은 그 不幸(불행)함이 마치 사람으로 世上(세상)에 나서 衣食(의식)의 快樂(쾌락)을 못 보고 죽음과 같은 것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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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말이 길어지나이다마는 하던 걸음이라 사랑의 實際的利益(실제적이익)에 開(개)하여 한 마디 더 하려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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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實際的利益(실제적이익)에 세 가지 있으니, 一(일), 貞操(정조)니, 男女(남녀)가 各各(각각) 一個(일개) 異性(이성)을 全心(전심)으로 사랑하는 동안 決(결)코 다른 異性(이성)에 눈을 거는 法(법)이 없나니 男女間(남녀간) 貞操(정조) 없음은 다 사람에 對(대)한 사랑이 없는 까닭이로소다. 大抵(대저) 한 사람을 熱愛(열애)하는 동안에는 晝夜(주야)로 생각하는 것이 그 사람뿐이요, 말을 하여도 그 사람을 爲(위)하여, 일을 하여도 그 사람을 爲(위)하여 하게 되며, 내 몸이 그 사람의 一部 分(일부분)이요, 그 사람이 내 몸의 一部分(일부분)이라 내 몸과 그 사람과 合(합)하여 一體(일체)가 되거니 하여 그 사람 없이는 내 生命(생명)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내 全心全身(전심전신)을 그 사람에게 바쳤거니 어느 겨를에 남을 생각하오리이까. 古來(고래)로 貞婦(정부)를 보건대 다 그 지아 비에게 全心全身(전심전신)을 바친 者(자)라. 그렇지 아니하고는 一生(일생)의 貞操(정조)를 지키기 不能(불능)한 것이로다. 또 朝鮮人(조선인)에 왜 淫風(음풍)이 많으뇨. 더구나 男子(남자)치고 二(이), 三人(삼인) 女子(여자)와 醜關係(추관계) 없는 이가 없음이 專(전)혀 이 사랑 없는 까닭인가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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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이), 品性(품성)의 陶冶(도야)와 事爲心(사위심)의 奮發(분발)이니,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내 言行(언행)을 監視(감시)하는 威權(위권)은 王(왕)보다도 父師(부사)보다도 더한 것이라, 王(왕)이나 父師(부사)의 앞에서는 할 좋지 못한 일도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敢(감)히 못하며, 王(왕)이나 父師(부사)의 앞에서는 能(능)치 못할 어려운 일도 사랑하는 이의 앞에서는 能(능)히 하나니, 이는 첫째 사랑하는 이에게 나의 義氣(의기)와 美質(미질)을 보여 그의 사랑을 끌기 爲(위)하여, 둘째 사랑하는 者(자)의 期望(기망)을 滿足(만족)시키기 爲(위)하여 이러함이니, 이러하는 동안 自然(자연)히 品性(품성)이 高潔(고결)하여지고 여러 가지 美質(미질)을 기르는 것이로소이다. 古來(고래)로 英雄烈士(영웅열사)가 그 愛人(애인)에게 奬勵(장려)되어 品性(품성)을 닦고 大事業(대사업)을 成就(성취)한 이가 數多(수다)하나니 愛人(애인)에게 滿足(만족)을 주기 爲(위)하여 萬難(만난)을 排(배)하고 所志(소지)을 貫徹(관철)하려는 勇氣(용기)는 實(실)로 莫大(막대)한 것이로소이다. 그대도 愛人(애인)이 있었던들 實驗(실험)에 優等首席(우등수석)을 하려고 애도 더 썼겠고 運動會(운동회) 達距離競走(달거리경주)에 一等賞(일등상)을 타려고 競走練習(경주연습)도 많이 하였을 것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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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삼), 여러 가지 美質(미질)을 배움이니, 첫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맛을 배우고, 사랑하는 者(자)를 爲(위)하여 獻身(헌신)하는 獻身(헌신)맛을 배우고, 易地思之(역지사지)한 同情(동정)맛을 배우고, 精神的要求(정신적요구)를 위하여 生命(생명)과 名譽(명예)와 財産(재산)까지라도 犧牲(희생)하는 犧牲(희생)맛을 배우고 精神的快樂(정신적쾌락)이라는 高尙(고상)한 快樂(쾌락)맛을 배우고…… 이밖에도 많이 있거니와 上述(상술)한 모든 美質(미질)은 修身敎科書(수신교과서)로도 不能(불능)하고 敎壇(교단)의 說敎(설교)로도 不能(불능)하고 오직 사랑으로야만 體得(체득)할 高貴(고귀)한 美質(미질)이로소이다. 人類社會(인류사회)에 모든 美德(미덕)이 거의 上述(상술)한 諸質(제질)에서 아니 나온 것이 없나니 이 意味(의미)로 보아 사랑과 民族(민족)의 隆替(융체)가 至大(지대)한 關係(관계)가 있는 가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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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半島(반도)에는 사랑이 갇혔었나이다. 사랑이 갇히매 거기 附隨(부수)한 모든 貴物(귀물)이 같이 갇혔었나이다. 우리는 大聲疾呼(대성질호)하여 갇혔던 사람을 解放(해방)하사이다. 눌리고 束縛(속박)되었던 우리 精神(정신)을 봄 풀과 같이 늘이고 봄 꽃과 같이 피우게 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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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男子(남자)나 女子(여자)나)을 보고 사랑 하여 못 쓰나이까. 우리는 아름다운 景致(경치)를 對(대)할 때 그것을 사랑 하지 아니하며, 아름다운 꽃을 對(대)할 때 그것을 鑑賞(감상)하고 읊조리고 讚美(찬미)하고 입맞추지 아니하나이까. 草木(초목)은 사랑할지라도 사람을 사랑하지 말아라 ── 그런 背理(배리)가 어디 있사오리이까. 毋論(무론) 肉的(육적)으로 사람을 사랑함은 社會(사회)의 秩序(질서)를 紊亂(문란)하는 것이매, 마땅히 排斥(배척)하려니와 精神的(정신적)으로 사랑하기야 왜 못하리이까. 다만 그의 양자를 胷中(흉중)에 그리고 그의 얼굴을 對(대)하고 말소리를 들고 손을 잡기를 어찌 禁(금)하오리이까. 제 兄弟(형제)와 제 姉妹(자매)인들이 이 모양으로 사랑함이 무엇이 惡(악)하오리이까. 이러한 사랑에 肉慾(육욕)이 짝하는 境遇(경우)도 없다고 못할지나, 人心(인심)에는 自己(자기)가 精神上(정신상)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對(대)하여 肉的滿足(육적만족)을 얻으려 함이 罪悚(죄송)한 줄 아는 觀念(관념)이 있으므로 결코 危險(위험)이 많으리라고 생각하지 아니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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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體(대체) 社會(사회)의 乾燥無味(건조무미)하기 우리 나라 같은 데가 다시 어디 있사오리까. 그리고 品性(품성)의 卑劣(비열)하고 情(정)의 醜惡(추악)함이 우리보다 더한 이가 어디 있사오리이까. 그리고 이 原因(원인)은 敎育(교육)의 不良(불량), 社會制度(사회제도)의 不完全(불완전) ─ 여러 가지 있을지나 그 中(중)에 가장 重要(중요)한 原因(원인)은 男女(남녀)의 絶緣(절연)인가 하나이다. 생각하소서. 一家庭內(일가정내)에서도 男女(남녀)의 親密(친밀)한 交際(교제)를 不許(불허)하며 甚至於(심지어) 夫婦 間(부부간)에도 肉交(육교)할 때 外(외)에 接近(접근)치 못하는 수가 많으니, 自然(자연)히 男女(남녀)란 肉交(육교)하기 爲(위)하여만 接近(접근)하는 줄로 더럽게 생각하는 것이로다. 이렇게 人生和樂(인생화락)의 根源(근원)인 男女(남녀)의 交際(교제)가 없으매, 社會(사회)는 朔風(삭풍) 불어 지나간 曠野(광야)같이 되어 快樂(쾌락)이라든가 忘我(망아)의 웃음을 볼수 없고 그저 욱적욱적 小小(소소)한 實利(실리)만 다투게 되니 社會(사회)는 恒常(항상) 서리친 秋景(추경)이라, 이 中(중)에 사는 人生(인생)의 情境(정경)이 참 可憐(가련)도 하거니와 이 中(중)에서 쌓은 性格(성격)이 그 얼마나 粗惡無味(조악무미)하리이까. 一家族(일가족)은 勿論(물론)이어니와 親(친)히 性格(성격)을 알아 信用(신용)할 만한 男女(남녀)가 正當(정당)하게 交際(교제)함은 人生(인생)을 春風花香(춘풍화향)의 快樂裏(쾌락리)에 둘뿐더러 吾人(오인)의 精神(정신)에 生氣(생기)와 强(강)한 彈力(탄력)을 줄 줄을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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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意味(의미)로 보아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나 또는 只今(지금) 내 새 恩人(은인)을 사랑하는 것이 조금도 非難(비난)할 餘地(여지)가 없을뿐 더러 나는 人生(인생)이 되어 人生(인생) 노릇을 함인가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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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참이나 담요에 엎디었다가 하염없이 다시 고개를 들고 册床(책상)을 對(대)하여 보다 놓았던 小說(소설)을 읽으려 하였나이다. 그러나 눈이 册張(책장)에 붙지 아니하여 아무리 읽으려 하여도 文字(문자)만 하나씩 둘씩 보일 뿐이요, 다만 한 줄도 連絡(연락)한 뜻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부질 없이 두어 페이지를 벌덕벌덕 뒤다가 휙 집어 내어던지고 椅子(의자)에서 일어나 뒤숭숭한 머리를 숙이고 왔다갔다하였나이다. 아무리 하여도 가슴에 무엇이 걸린 듯하여 견딜 수 없어 그대에게 이 便紙(편지)를 쓸 양으로 다시 册床(책상)을 對(대)하였나이다. 書簡用箋(서간용전)을 내려고 册床舌盒(책상설합)을 열어 본즉 어떤 書柬(서간) 한 封(봉)이 눈에 띄었나이다. 西洋封套(서양봉투)에 다만「林輔衡氏」(임보형씨)라 썼을 뿐이요, 住所(주소)도 없고 發信人(발신인)도 없나이다. 나는 깜짝 놀래었나이다. 이 어떤 書柬(서간)일까, 뉘 것일까? 그 恩人(은인) ── 그 恩人(은인)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即(즉) 나를 사랑하는 생각으로)써 둔 것 ── 이라 하는 생각이 一種(일종) 形言(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부끄러움 섞인 感情(감정)과 함께 일어나나이다. 나는 이 생각이 참일 것을 믿으려 하였나이다. 나는 그글 속에「사랑하는 내 輔衡(보형)이여, 나는 그대의 病(병)을 看護(간호)하 다가 그대를 사랑하게 되었나이다 ── 사랑하여 주소서」하는 뜻이 있기를 바라고 또 있다고 믿으려 하였나이다. 마치 그 말이 엑스 光線(광선) 모양 으로 封套(봉투)를 꿰뚫고 내 뜨거운 머리에 直射(직사)하는 듯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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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은 자주 치고 내 숨은 차더이다. 나는 그 書柬(서간)을 두 손으로 들고 茫然(망연)히 앉았었나이다. 그러나 나는 얼른 뜯기를 躊躇(주저)하였나이다. 대개 只今(지금) 내가 想像(상상)하는 바와 다를까보아 두려워함이로소이다. 만일 이것이 내 想像(상상)한 바와 같이 그의 書柬(서간)이 아니면 ── 或(혹) 그의 書柬(서간)이라도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면 그때 失望(실망)이 얼마나 할까, 그때 부끄러움이 얼마나 할까. 차라리 이 書柬(서간)을 뜯지 않고 그냥 두고 내 想像(상상)한 바를 참으로 믿고 지낼까 하였나이다. 그러나 마침내 아니 뜯지 못하였나이다. 뜯은 結果(결과)는 어떠하였사오리이까. 내가 기뻐 뛰었사오리이까, 落望(낙망)하여 울었사오리이까. 아니로소이다. 이도 저도 아니요, 나는 또 한 번 깜짝 놀래었나이다.
 
76
무엇이 나오려는가 하는 希望(희망)도 많거니와 不安(불안)도 많은 맘으로 皮封(피봉)을 떼니 아름다운 鐵筆(철필) 글씨로 하였으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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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金一蓮(김일련)이로소이다. 못 뵈온지 六年(육년)에 아마 나를 잊었으리이다. 나는 그대가 이곳 계신 줄을 알고 또 그대가 病(병)든 줄을 알고 暫時(잠시) 그대를 訪問(방문)하였나이다. 내가 淸人(청인)인 듯이 그대를 속인 것을 容恕(용서)하소서. 그대가 熱(열)로 昏睡(혼수)하는 동안에 金一蓮(김일련)은 拜(배)"
 
78
라 하였더이다 . 나는 이 書柬(서간)을 펴 든 대로 한참이나 멍멍하니 앉았었나이다. 金一蓮(김일련)! 金一蓮(김일련)! 옳다 듣고 보니, 그 얼굴이 果然(과연) 金一蓮(김일련)이로다. 그 좁으레한 얼굴, 눈꼬리가 잠간 처진 맑고 多情(다정)스러운 눈, 좀 숙는 듯한 머리와 말할 때에 살작 얼굴 붉히는 양하며 그 中(중)에도 귀 밑에 있는 조그마한 허물 ── 果然(과연) 金一蓮(김일련)이러이다. 萬一(만일) 그가 上海(상해)에 있는 줄만 알았더라도 내가 보고 모르는지 아니하였으리이다. 아아 그가 金一蓮(김일련)이런가? 내가 그대에게 對(대)하여서는 아무러한 秘密(비밀)도 없었나이다. 내 胷底(흉저) 속속 깊이 있는 秘密(비밀)까지도 그대에게는 말하면서도 金一蓮(김일련)에 關(관)한 일만은 그대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말 아니하고 참을 수 없사오며 또 對面(대면)하여 말하기는 수줍기도 하지마는 이렇게 멀리 떠나서는 말하기도 얼마큼 便(편)하여이다.
 
79
내가 일찍 東京(동경)서 早稻田大學(조도전대학)에 있을 제 같은 學校(학교)에 다니는 親舊(친구) 하나가 있었나이다. 그는 나보다 二年長(이년장)이로되 學級(학급)도 三年(삼년)이나 떨어지고 맘과 行動(행동)과 容貌(용모)가 도리어 나보다 二(이), 三年(삼년)쯤 떨어진 듯, 그러나 그와는 처음 만날 때부터 서로 愛情(애정)이 깊었나이다. 나는 그에게 英語(영어)도 가르치고 詩(시)나 小說(소설)도 읽어 주고 散步(산보)할 때에도 반드시 손을 꼭 잡고 二(이), 三日(삼일)을 作別(작별)하게 되더라도 서로 떠나기를 아껴 西洋式(서양식)으로 꽉 쓸어안고 입을 맞추고 하였나이다. 그와 나와 別(별)로 主義(주의)의 共通(공통)이라든가, 特別(특별)히 親(친)하여질 格別(격별)한 機會(기회)도 없었건마는 다만 彼此(피차)에 까닭도 모르게 서로 兄弟(형제)같이 愛人(애인)같이 사귀게 된 것이로소이다.
 
80
하루는 그와 함께 어디 놀러 갔던 길에 어느 女學校(여학교) 門前(문전)에 다다랐나이다. 나는 前(전)부터 그 學校(학교)에 金一鴻君(금일홍군)의 妺氏(말씨)가 留學(유학)하는 줄을 알았는 故(고)로 그가 妺氏(말씨)를 訪問(방문)하기 爲(위)하여 나는 먼저 돌아오기를 請(청)하였나이다. 그러나 그는「그대도 내 누이를 알아 둠이 좋을지라」하여 紹介(소개)하려는 뜻으로 나를 데리고 그 寄宿舍(기숙사) 應接室(응접실)에 들어가 더이다. 거기서 暫間(잠간) 기다린즉 門(문)이 방싯 열리며 單純(단순)한 黑色(흑색) 洋服(양복)에 漆(칠) 같은 머리를 한 편 옆을 갈라 뒤로 치렁치렁 땋아 늘인 處女(처녀)가 방금 沐浴(목욕)을 하였는지 紅暈(홍훈)이 도는 빛나는 얼굴로 들어오더이다. 一鴻君(일홍군)은 일어나 나를 가리키며,
 
81
"이이는 早稻田(조도전) 政治科(정치과) 三學年(삼학년)에 있는 林輔衡(임보형)인데, 나와는 兄弟(형제)와 같은 사이니, 或(혹) 以後(이후)에라도 잊지 말고……."하고 나를 紹介(소개)하더이다. 나도 일어나 慇懃(은근)히 절하고 그도 答禮(답례)하더이다. 그러고는 限(한) 五分間(오분간) 말없이 마주앉았다가 함께 宿所(숙소)에 돌아왔나이다. 그後(후) 一鴻君(일홍군)이 感氣(감기)로 數日(수일) 辛苦(신고)할 때에 그 妺氏(말씨)에게서 書籍(서적)을 몇 가지 사 보내라는 寄別(기별)이 왔더이다. 學期初(학기초)이라 時日(시일)이 急(급)한 모양인 故(고)로 一鴻君(일홍군)의 請(청)대로 내가 代身(대신) 가기로 하였나이다. 나는 이때에 아직 一蓮(일연) 아씨에게 對(대)하여 別(별)로 想思(상사)의 情(정)도 없었나이다. 다만 아름다운 깨끗한 處子(처자)요, 親舊(친구)의 누이라 하여 情(정)답게 여겼을 뿐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處子(처자)를 爲(위)하여 힘쓰기를 매우 기뻐하기는 하였나이다. 그래 곧 神保町册肆(신보정책사)에 가서 所請(소청)한 書籍(서적)을 사가지고 곧 나를 寄宿舍(기숙사)에 찾아가 前(전)과 같이 應接室(응접실)에서 그 册(책)을 傳(전)하고 一鴻君(일홍군)이 感氣(감기)로 辛苦(신고)하는 말과 그래서 내가 代身(대신)왔노라는 뜻을 告(고)하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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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나는 自然(자연)히 가슴이 설레고 말이 訥(눌)함을 깨달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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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얼굴이 빨갛게 됨을 슬쩍 볼 때에 나의 얼굴도 저러하려니 하여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였나이다. 그는 겨우 가느나마 快活(쾌활)한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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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奔走(분주)하신데 수고하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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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뿐이러이다.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우두커니 섰었나이다. 그도 할 말도 없고 수줍기만 하여 고개를 숙이고 册(책)싸개만 凝視(응시)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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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나는 어서 가야 될 사람인 줄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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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겠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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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門(문)밖에 나섰나이다. 그도 門(문)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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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謝(감사)하올시다. 奔走(분주)하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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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이다. 나는 速步(속보)로 四(사), 五步(오보)를 大門(대문)을 向(향)하여 나가다가 不意(불의)에 뒤를 휙 돌아보았나이다. 幻覺(환각)인지는 모르나 琉璃窓(유리창)으로 그의 얼굴이 번듯 보이는 듯하더이다. 나는 다시 부끄러운 맘이 생겨 더한 速步(속보)로 大門(대문)을 나서서 冷靜(냉정)한 모양으로 또 四(사), 五步(오보)를 나왔나이다. 그러나 自然(자연)히 몸이 뒤로 끌리는 듯하여 차마 발을 옮기지 못하고 四(사), 五次(오차)나 머뭇머뭇 하였나이다. 狂亂怒濤(광란노도)가 서두는 듯한 가슴을 가지고 電車(전차)를 탔나이다. 宿所(숙소)에 돌아와 一鴻君(일홍군)에게 前後始末(전후시말)을 이야기할 제도 아직 맘이 가라앉지 못하여 一鴻君(일홍군)이 有心(유심)히 나를 보는 듯하여 얼른 고개를 돌렸나이다. 그러고 그날 하루는 아무 생각도 없이 맘만 散亂(산란)하여 지내고 그 二(이), 三日(삼일)이 지나도록 이 風浪(풍랑)이 자지 아니하더이다. 그 후부터는 하루에 몇 번씩 그를 생각지 아니한 적이 없었나이다.
 
91
하루는 一鴻君(일홍군)이 어디 가고 나 혼자 宿所(숙소)에 있을 제 如前(여전)히 그 생각으로 心緖(심서)가 定(정)치 못하여 하다가 幸(행)여나 그의 글씨나 볼 양으로 一鴻君(일홍군)의 册床(책상) 舌盒(설합)을 열었나이다. 그 속에는 그에게서 온 書柬(서간)이 있는 줄을 알았으므로 葉書(엽서)와 封書(봉서)를 몇 장 뒤적뒤적하다가 다른 舌盒(설합)을 열었나이다. 거기서 나는 그와 다른 두 사람이 박힌 中板寫眞(중판사진) 한 장을 얻었나이다. 나는 가슴이 뜨끔하면서 그 寫眞(사진)을 두 손으로 들었나이다. 그 寫眞(사진)에 박힌 모양은 꼭 日前(일전) 册(책) 가지고 갔을 때 모양과 같더이다. 한 편을 갈라 넘긴 머리하며 방그레 웃는 態度(태도)하며, 한 손을 그 동무의 어깨에 얹고 고개를 잠간 기울여 그 동무의 걸앉은 椅子(의자)에 힘없는 듯 기대어 섰는 양이 참 美妙(미묘)한 藝術品(예술품)이러이다. 나는 그때 寄宿舍(기숙사) 應接室(응접실)에서 그를 對(대)하던 것과 같은 感情(감정)으로 한참이나 그 寫眞(사진)을 보았나이다. 그 방그레 웃는 눈이 마치 나물나물 더 웃으려는 듯하며 살짝 마주 붙인 입술이 今時(금시)에 살짝 열려 하얀 이빨이 드러나며 琅琅(낭랑)한 웃음소리가 나올 듯. 두 귀밑 으로 늘어진 몇 줄기 머리카락이 그 부드럽고 香氣(향기)로운 콧김에 하느 적하느적 날리는 듯하더이다. 아아 이 가슴 속에는 只今(지금) 무슨 생각을 품었는고. 내가 그를 보니 그도 나를 물끄러미 보는 듯, 그의 그림은 只今(지금) 나를 向(향)하여 방그레 웃는다. 그의 가슴 속에는 日光(일광)이 차고 春風(춘풍)이 차고 詩(시)가 차고 美(미)와 사랑과 溫情(온정)이 찼도다. 이에 외롭고 싸늘하게 식은 靑年(청년)은 그 흘러 넘치는 기쁨과 美(미)와 사랑과 溫情(온정)의 一滴(일적)을 얻어 마시려고 무릎을 꿇고 두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그 앞에 엎더졌도다. 그가 한 방울 피를 흘린다사 무슨 자리가 아니 날 모양으로 그가 가슴에 가득찬 사랑의 一滴(일적)을 흘린다사 무슨 자리가 나랴. 뜨거운 沙漠(사막)길에 먼지 먹고 목마른 사람이 서늘한 샘물을 보고 一掬水(일국수)를 求(구)할 때 그 우물을 지키는 이가 이를 拒絶(거절)한다 하면, 너무 慘酷(참혹)한 일이 아니오리이까. 그러나 내가 아무리 이 寫眞(사진)을 向(향)하여 懇請(간청)하더라도 그는 들은 체만체 如前(여전)히 방그레 웃고 나를 내려다볼 뿐이로소이다. 그가 마치 「내게 사랑이 있기는 있으나 내가 주고 싶어 줄 것이 아니라, 주지 아니치 못하여 주는 것이니 , 네가 나로 하여금 네게 주지 아니치 못하게 할 能力(능력)이 있고사 이 단샘을 마시리라」하는 듯하더이다. 나는 이윽고 寫眞(사진)을 보다가 마침내 情火(정화)를 이기지 못하여 그 寫眞(사진)에 내얼굴을 닿이고 그 입에 熱烈(열렬)하게 입을 맞추고 그 동무의 어깨위에 놓은 손에 내 손을 힘껏 대었나이다. 나는 狂人(광인)같이 그 寫眞(사진)을 품에 품기도 하고, 뺨에 닿이기도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하고, 뺨도 대고 키스도 하였나이다. 내 얼굴은 水蒸氣(수증기)가 피어오도록 熱(열)하고 숨소리는 마치 全速力(전속력)으로 다름질한 사람 같더이다. 나는 한 時間(시간)이나 이러다가 大門(대문) 열리는 소리에 놀래어 그 寫眞(사진)을 처음 있던 곳에 집어넣고 얼른 일어나 그날 新聞(신문)을 보는 체하였나이다.
 
92
그 後(후) 얼마 동안을 苦悶中(고민중)으로 지내다가 나는 마침내 내 心情(심정)을 書柬(서간)으로 그에게 알리려 하였나이다. 어떤 날밤 남들이 다 잠든 열 두 時(시)에 일어나 불일듯하는 생각으로 이러한 書柬(서간)을 썼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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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누이여, 내가 이 말씀 드림을 容恕(용서)하소서. 나는 외로운 사람이로소이다. 父母(부모)도 없고 同生(동생)도 없고 넓은 天下(천하)에 오직 한 몸이로소이다. 나는 至今(지금)토록 일찍 누구를 사랑하여 본 적도 없고 누구에게 사랑함을 받은 적도 없나이다. 사랑이라는 따뜻한 春風(춘풍) 속에 자라날 나의 靈(영)은 至今(지금)껏 朔風寒雪(삭풍한설) 속에 얼어 지내었나이다. 나는 나의 靈(영)이 그러한 오랜 겨울에 아주 말라 죽지 아니한 것을 異常(이상)히 여기나이다. 그러나 以後(이후)도 春風(춘풍)을 만나지 못하면 可憐(가련)한 이 靈(영)은 아주 말라 죽고야 말 것이로소이다. 그 동안 봄이 몇 번이나 지났으리이까마는 꽃과 사랑을 실은 東君(동군)의 수레는 늘 나를 찾지 아니하고 말았나이다. 아아 이 어린 靈(영)이 한 방울 사랑의 샘물을 얻지 못하여 아주 말라 죽는다 하면 그도 불쌍한 일이 아니오리까. 나는 猥濫(외람)히 그대에게서 春風(춘풍)을 求(구)함이 아니나 그대의 胷中(흉중)에 사무친 사랑의 一滴甘泉(일적감천)이 能(능)히 말라 죽어가는 나의 靈(영)을 살릴 것이로소이다. 그대여, 그대는 내가 그대에게 要求(요구)하는 바를 誤解(오해)하지 말으소서. 내가 장난으로 또 凶惡(흉악)한 맘으로 이러한 말을 한다고 말으소서. 내가 그대에게 要求(요구)하는 바는 오직 하나 ── 아주 쉬운 하나이니, 即(즉)「輔衡(보형)아 내 너를 사랑하노라, 누이가 오라비에게 하는 그대로」한 마디만 그만이로소이다. 만일 그대가 이 한 마디만 주시면 나는 그를 다시 護身符(호신부)로 삼아 一生(일생)을 그를 依支(의지)하고 살며 活動(활동)할 것이로소이다. 그 한 마디가 나의 財産(재산)도 되고 精力(정력)도 되고 勇氣(용기)도 되고 ── 아니, 나의 生命(생명)이 될 것이로소이다. 나는 決(결)코 그대를 만나보기를 要求(요구) 아니하리이다. 도리어 만나보지 아니하기를 要求(요구)하리이다. 대개 歲月(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그대는 늙기도 하오리이다. 心身(심신)에 여러 가지 變化(변화)도 생기리이다. 決(결)코 그런 일이 있을 理(리)도 없거니와 或(혹) 그대는 惡人(악인)이 되고 病身(병신)이 되고 罪人(죄인)이 된다 하더라도 내 記憶(기억)에 남아 있는 그대는 永遠(영원)히 열 일곱 살 되는 아름답고 淸淨(청정)한 處女(처녀)일 것이로소이다. 後日(후일) 내가 老衰(노쇠)한 老人(노인)이 되고 그대가 曾祖母(증조모)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또는 그대가 이미 죽어 그 아름답던 얼굴과 몸이 다 썩어진 뒤에라도 내 記憶(기억)에 남아 있는 그대는 永遠(영원)히 그處女(처녀)일 것이로소이다. 그리하고 그대의「내 너를 사랑한다」한마디는 永遠(영원)히 希望(희망)과 歡樂(환락)과 熱情(열정)을 나에게 줄 것이로소이다. 이러므로 나는 決(결)코 그대를 다시 對(대)하기를 願(원)하지 아니 하고 다만 그대의 그「한 마디」만 바라나이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胷中(흉중)에 찬 사랑의 一滴(일적)을 이 매마른 목에 떨어뜨려 죽어가는 이 靈(영)을 살려 주시면 그 靈(영)이 자라서 將次(장차) 무엇이 될는지 어찌 아오리이까. 只今(지금)은 夜半(야반)이로소이다. 冬至(동지) 寒風(한풍)이 萬物(만물)을 흔들어 草木(초목)과 家屋(가옥)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發(발)하나이다. 이러한 中(중)에 발가벗은 어린 靈(영)은 한 줄기 따뜻한 바람을 바라고 구름 위에 앉으신 天使(천사)에게 엎디어 懇求(간구)하는 바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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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를 써 놓고 나는 再三(재삼) 생각하였나이다. 이것이 罪(죄)가 아닐까. 나는 벌써 婚姻(혼인)한 몸이라 다른 女子(여자)를 사랑함이 罪(죄)가 아닐까. 내 心中(심중)에서는 或(혹)은 罪(죄)라 하고 或(혹)은 罪(죄)가 아니라 自然(자연)이라 하나이다. 내가 婚姻(혼인)한 것은 내가 함이 아니요, 나는 男女(남녀)가 무엇이며 婚姻(혼인)이 무엇인지를 알기도 前(전)에 父母(부모)가 任意(임의)로 契約(계약)을 맺고 社會(사회)가 그를 承認(승인)하였을 뿐이니, 그 結婚行爲(결혼행위)에는 내 自由意思(자유의사)는 一分(일분)도 들지 아니한 것이요. 다만 나의 幼弱(유악)함을 利用(이용)하여 第三者(제삼자)가 强制(강제)로 行(행)하게 한 것이니, 法律上(법률상)으로 보는 지 倫理上(윤리상)으로 보든지, 내가 이 行爲(행위)에 對(대)하여 아무 責任(책임)이 없을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 契約的行爲(계약적행위)가 내 意思(의사)에 適合(적합)한 줄로 여기는 時(시)는 그 行爲(행위)를 是認(시인)함도 任意(임의)여니와 그것이 나에게 不利益(불이익)한 줄을 깨달을진댄 그 契約(계약)을 否認(부인)함도 自由(자유)라 하였나이다. 나와 내 아내는 조금도 우리의 夫婦契約(부부계약)의 拘束(구속)을 받을 理(리)가 없을 것이라, 다만 父母(부모)의 意思(의사)를 尊重(존중)하고 社會(사회)의 秩序(질서)를 근심하는 好意(호의)로 그 契約계약) ── 내 人格(인격)을 蹂躪(유린)하고 侮辱(모욕)한 그 契約(계약)을 눈물로써 黙認(묵인)할 따름이어니와 내가 精神的(정신적)으로 다른 異性(이성)을 사랑하여 蹂躪(유린)된 權利(권리)의 一部(일부)를 主張(주장)하고 掠奪(약탈)된 享樂(향락)의 一部(일부)를 恢復(회복)함은 堂堂(당당)한 吾人(오인)의 權利(권리)인가 하나이다. 이 理由(이유)로 나는 그를 사랑함이요 ── 더구나 누이와 같이 사랑함이요 ── 또 그에게서 그와 같은 사랑을 받으려 함이 決(결)코 不義(불의)가 아니라고 斷定(단정)하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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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學校(학교)에 가는 길에 書柬(서간)을 投凾(투함)하려 하였으나 무엇인지 므를 생각에 制御(제어)되어 하지 못하고 그날에 十餘次(십여차), 그 後(후) 三日間(삼일간)에 數十餘次(수십여차)를 넣으려다는 말고 넣으 려다는 말고 하여 그 皮封(피봉)이 내 포키트 속에서 닳아지게 되었다가, 한 번 모든 名譽(명예)와 廉恥(염치)를 단번에 賭(도)하는 생각으로 마침내 어느 郵便凾(우편함)에 그것을 넣고 한참이나 그 郵便凾(우편함)을 보고 섰었나이다. 마치 무슨 絶大(절대)한 所得(소득)을 바라고 큰 冒險(모험)을 할 때와 같은 웃음이 내 얼굴에 떴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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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三日(삼일)만에 學校(학교)로서 돌아오니, 案頭(안두)에 一封書(일봉서)가 놓였더이다. 내 가슴에는 곧 風浪(풍랑)이 일었나이다. 나는 그 글씨를 보았나이다 ── 果然(과연) 그의 글씨로소이다. 나는 그 片紙(편지)를 집어 포키트에 넣고 선 자리로 발을 돌려 大久保(대구보) 벌판으로 나아갔나이다. 집에서 뜯어 보기는 남이 볼 念慮(염려)도 있고 또 이러한 글을 房(방)안에서 보기는 不適當(부적당)한 듯하여 ── 깨끗하고 넓은 自然(자연) 속, 맑은 하늘과 빛나는 太陽(태양) 아래서 보는 것이 適當(적당)하리라 하여 그러함이로소이다. 나는 내 발이 땅에 닿는지 마는 지도 모르면서 大久保(대구보) 벌판에 나섰나이다. 겨울 날이 뉘엿뉘엿 넘어 가고 演習(연습) 갔던 騎兵(기병)들이 疲困(피곤)한 듯이 돌아오더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맘 속에 數千(수천) 가지 數萬(수만) 가지 想像(상상)을 그리면서 方向(방향) 없이 마른 들판으로 向(향)하였나이다. 이 片紙(편지) 속에 무슨 말이 있을는가 ── 나는「사랑하나이다 오라비여」하였기를 바라고 또 그렇기를 믿으려 하였나이다. 나는 그 片紙(편지)를 내어 皮封(피봉)을 보았나이다. 그리하고 그가 내 片紙(편지)를 받았을 때의 그의 모양을 想像(상상)하였나이다. 爲先(위선) 보지 못하던 글씨에 놀래어 한참을 읽어 보다가 마침내 가슴이 설레고 얼굴이 훗훗했으려니, 그 글을 두 번 세번 곱 읽었으려니, 이 世上(세상)에 女子(여자)로 태어난 後(후) 첫 經驗(경험)을 하였으려니, 그리고 心緖(심서)가 散亂(산란)하여 그 片紙(편지)를 구겨 쥐고 한참이나 멍멍하니 앉았었으려니, 그러다가 一邊(일변) 기쁘 기도 부끄럽기도 하여 곧 내 모양을 想像(상상)하며 내가 自己(자기)를 그리워하는 모양으로 自己(자기)도 나를 그리워하였으려니, 그러고 곧 이 回答(회답)을 썼으렷다, 써가지고 넣을까 말까 躊躇(주저)하다가 오늘에야 부쳤으렷다, 그러고 只今(지금)도 나를 생각하며 내가 이 片紙(편지) 읽는 光景(광경)을 想像(상상)하고 있으렷다. 어제까지 어린아이같이 平穩(평온)하던 맘이 오늘부터는 異常(이상)하게 설레려는. 아무려나 나는 메마르던 목을 축이게 되었다, 나는 사랑의 단맛을 보고 生命(생명)의 快樂(쾌락)을 보게 되었다, 말라 가던 나의 靈(영)은 甘泉(감천)에 젖어 잎 피고 꽃 피게 되었다 하면서 풀판에 펄썩 주저앉아 그 皮封(피봉)을 떼고도 얼른 그 속을 끄집어내지 못하고 한참이나 躊躇(주저)하며 想像(상상)하다가 마침내 속을 뽑았나이다. 아아 그 속에서 무엇이 나왔사오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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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激怒(격노)하였나이다. 「흑」하고 소리를 치고 벌떡 일어나며 그 片紙(편지)를 조각조각 가루가 되도록 찢어버렸나이다. 그러고도 不足(부족)하여 그것에 침을 뱉고 그것을 발로 지르밟았나이다. 그러고 方向(방향)없이 벌판으로 彷徨(방황)하며 그 侮辱(모욕)받은 羞恥(수치)와 이에 對(대)한 憤怒(분노)를 참지 못하여 혼자 주먹을 부르쥐고 이를 갈고 발을 구르며「흑」,「흑」소리를 連發(연발)하였나이다. 當場(당장) 그를 칼로 푹찔러 죽이고도 싶으고 내 목숨을 끊어버리고도 싶으고…이 모양으로 거의 한 時間(시간)이나 돌아다니다가 어스름에야 얼마큼 맘을 鎭定(진정)하고 돌아왔나이다. 돌아와 본즉 一鴻君(일홍군)은 벌써 저녁을 먹고 불을 쪼이며 담배를 피우다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有心(유심)히 내 얼굴을 쳐다보더이다. 그에게 對(대)한 憤怒(분노)와 羞恥(수치)는 一鴻君(일홍군)에게 까지 옮더이다.
 
98
이튿날 나는 感氣(감기)라는 핑계로 學校(학교)를 쉬었나이다. 어제는 다만 一時的(일시적)으로 激怒(격노)만 하였거니와 오늘은 羞恥(수치)와 悲哀(비애)의 念(염)만 가슴에 가득하여 그 안타까움이 비길 데 없더이다. 나는 베개 위에 머리를 갈며 이불을 차 던지고 입술을 물어뜯었나이다. 이제 무슨 面目(면목)으로 世上(세상)을 보며 무슨 希望(희망)으로 世上(세상)에 살랴. 一鴻君(일홍군)이 만일 이 일을 알면 그 좁은 속에, 그 어린 속에, 얼마나 나를 嘲弄(조롱)하랴. 아아 나는 마침내 사랑의 맛을 못 볼 사람인가. 언제까지 孤獨(고독)하고 冷寂(냉적)한 生活(생활)을 할 사람인가. 나는 어찌하여 따뜻한 손을 못 쥐어 보고, 사랑을 말을 못 들어 보고 熱烈(열렬)하고 자릿자릿한 抱擁(포옹)을 못하여 보는고. 사람이 원망되고 世上(세상)이 원망되고 내 生命(생명)이 원망되어 내 손으로 내 머리털을 몇 번이나 쥐어뜯었사오리이까. 그러다가 오냐, 내가 男子(남자)가 아니다, 一開兒 女子(일개아여자)로 말미암아 이것이 무슨 꼴인고 하고 주먹으로 땅을 치며 決心(결심)하려 하나 그것은 제가 저를 속임이러이다. 그의 모양은 如前(여전)히 나의 가슴을 밟고 서서 방그레하는 모양으로 나를 支配(지배)하더이다. 나는 하염없이 天井(천정)을 바라보고 누웠나이다.
 
99
나는 一封書(일봉서)를 받았나이다. 그 글에 하였으되
 
100
"사랑하는 이여, 어제 지은 罪(죄)는 容恕(용서)하시옵소서. 그대가 그처럼 나를 사랑하시니 나도 이 몸과 맘을 그대에게 바치나이다. 暫間(잠간) 여쭐 말씀 있사오니, 午後(오후) 四時(사시)쯤 하여 日比谷公園(일비곡공원) 噴水池(분수지) 가에 오시기를 바라나이다."
 
101
이 글을 받은 나는 미친 듯하였나이다. 곧 日比谷(일비곡)으로 달려갔나이다. 이제야 살았구나, 十九年(십구년) 겨울 世界(세계)에 봄이 왔구나 하면서.
 
102
夕陽(석양)이 鶴噴水(학분수)를 비치어 五色(오색)이 玲瓏(영롱)한 무지개를 세울 제 나는 藤棚下(등붕하) 걸상에 걸앉아 紫煙生(자연생)하는 噴水(분수)를 보면서 여러 가지 未來(미래)의 空想(공상)을 그렸나이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로다. 슬픈 사람이 아니요, 不幸(불행)한 사람이 아니로다. 宇宙(우주)의 美(미)와 享樂(향락)은 내 一身(일신)에 集中(집중)하였도다.
 
103
只今(지금) 내 身體(신체)를 組織(조직)한 모든 細胞(세포)는 기쁨과 滿足(만족)에 뛰며 소리하고, 熱(열)한 血液(혈액)은 律呂(율려) 맞추어 循環(순환)하는도다. 내 얼굴이 夕陽(석양)에 빛남이여 天國(천국)의 樂(낙)을 맛봄이요, 내 靈(영)이 춤을 추고 노래함이여 砂漠(사막)길에 오아시스를 얻음이로다. 萬物(만물)이 이제야 生命(생명)을 얻었고 人界(인계)가 이제야 웃음을 보이도다 하였나이다. 果然(과연) 아까까지도 萬物(만물)이 모두 죽었더니 저 天使(천사)의 口號(구호)한 마디에 一齊(일제)히 蘇生(소생)하여 뛰고 즐기도소이다. 이따금 電車(전차)와 自動車(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릴 뿐이요, 公園內(공원내)는 至極(지극)히 고요하여이다. 樹林(수림)속 瓦斯燈(와사등)은 어느새 반작반작 稀微(희미)한 빛을 發(발)하나이다. 이때에 噴水池(분수지) 저편가으로 쑥 나서는 이가 누구이리까. 그로소이다, 아아 그로소이다. 그는 只今(지금) 내 곁에 섰나이다. 내 눈과 그 눈은 같이 저 噴水(분수)를 보나이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붉히며 절하였나이다. 그의 빨간 얼굴에는 夕陽(석양)이 反照(반조)하여 마치 타는 듯 하더이다. 내 가슴이 자주 뛰는 소리는 내 귀에도 들리는 듯, 나는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어떤 行動(행동)을 할 것인지 全(전)혀 모르고 우두커니 噴水(분수)만 보고 섰었나이다. 하다가 겨우 精神(정신)을 차려,
 
104
"제가 그 따윗 片紙(편지)를 드린 것을 얼마나 괘씸히 보셨읍니까. 버릇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105
그도 한참이나 머뭇머뭇하더니 겨우 눈을 들어 暫間(잠간) 나를 보며,
 
106
"저는 그 편지를 받자 한끝 기쁘면서도 한끝 무서운 생각이 나서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이것이 罪(죄)인가보다 하는 생각으로 도로 보내었읍니다. 그러나 도로 보내고 다시 생각한즉 어찌해 도로 보낸 것이 罪(죄)도 같이 또 알 수 없는 힘이 제 등을 밀어……."
 
107
하고는 말이 아니 나오더이다. 얼마 沈黙(침묵)하였다가,
 
108
"제가 先生(선생)의 착하심을 믿으므로 설마 惡(악)에 끌어 넣지는 아니 하시려니 하고요."
 
109
나는 다시 내 뜻을 말하였나이다 ── 나는 그에게 다만,
 
110
"오라비여 사랑하노라."
 
111
한 마디면 滿足(만족)한다는 뜻과 決(결)코 그를 다시 對面(대면)하고자 아니하는 뜻을 말하였나이다. 아직 어린 그는 毋論(무론) 그 意味(의미)를 十分(십분) 解得(해득)할 수는 없을지나 그 맘 속에 神奇(신기)한 變動(변동) ── 아직 經驗(경험)하여 보지 못한 사랑의 意識(의식)이 생긴 것도 毋論(무론)이로소이다. 그러나 이 밖에 彼此(피차) 하려는 말이 많은 듯하면서도 나오려는 말은 없는 듯하여 한참이나 黙黙(묵묵)히 섰다가 내가,
 
112
"아무려나 그대는 나를 살려 주셨읍니다. 그대는 나로 하여금 참사람이 되게 하였고 내게 살 能力(능력)과 살아서 즐기며 일할 希望(희망)과 기쁨을 주셨읍니다. 나는 그대를 爲(위)하여, 그대의 滿足(만족)을 爲(위)하여 工夫(공부)도 잘하고 큰 事業(사업)도 成就(성취)하오리다. 나는 詩人(시인)이니 그대라는 생각이 내게 無限(무한)한 詩的刺激(시적자격)을 줄 것이외다. 그대도 부디 工夫(공부) 잘 하시고 맘 잘 닦으셔서 朝鮮(조선)의 大恩人(대은인) 되는 女子(여자)가 되십시오."
 
113
나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내 義務(의무) 같기도 하고 또 그밖에 할 말도 없어 또는 , 이런 말을 하여야 그의 내게 對(대)한 信愛(신애)가 더 깊어질 듯하여 이 말을 하였나이다. 그러고 오래 같이 섰고 싶은 맘이야 懇切(간절)하나 그럴 수도 없어 둘이 함께 고불고불한 길로 公園(공원)을 나오려 하였나이다. 그는 나보다 一步(일보)쯤 비스듬히 앞섰나이다. 그의 하얀 목이 異常(이상)하게 빛나더이다.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나이다. 그는 떨치려고도 아니하고 우뚝 서더이다. 그 손을 꼭 쥐었나이다. 그의 푹 숙인 머리는 내 가슴에 스적스적하고 그의 머리카락을 내 입김에 날리더이다. 나는 胷部(흉부)에 그의 體溫(체온)이 옮아옴을 깨달았다. 나의 꼭 잡은 손은 갑자기 확확 달음을 깨달았나이다. 내 몸은 痙攣(경련)하듯이 떨리고 내 눈이 朦朧(몽롱)하여졌나이다. 이윽고 두 얼굴은 서로 입김을 맡으리만큼 가까워지고 눈과 눈은 固定(고정)한 듯이 마주보나이다. 나는 그의 새말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았나이다. 두 입술은 꼭 마주 붙었나이다.
 
114
따뜻한 입김이 내 입술에 感覺(감각)될 때 나는 나를 잊어버렸나이다. 불같이 뜨거운 두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내 입술에 感覺(감각)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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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내 사랑하는 이여」하고 우리는 速步(속보)로 公園(공원) 밖에 나왔나이다. 이때에 누가 뒤로서 내 어깨를 치더이다. 깨어 본즉 이는 한바탕 꿈이요 곁에는 一鴻君(일홍군)이 正服(정복)을 입은 대로 앉아서 나를 깨우더이다. 一鴻君(일홍군)은 有心(유심)히 웃더이다. 나는 또 羞恥(수치)한 생각이 나서 벌떡 일어나 水道(수도)에 가 洗手(세수)를 하였나이다. 밖에 서는 바람 소리와 함께 豆腐(두부)장수의 뚜뚜 소리가 들리더이다. 一鴻君(일홍군)은 簡單(간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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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일이요, 내가 그대를 그런 줄 알았더면 내 누이에게 紹介(소개) 아니하였을 것이요. 만일 그대가 未婚자(미혼자)면 나는 기뻐 그대의 願(원)을 이루게 하겠소. 그러나 記憶(기억)하시오, 兄(형)은 旣婚男子(기혼남자)인 줄을."
 
117
나는 고개를 숙이고 들었을 뿐이로소이다. 果然(과연) 옳은 말이로소이다.
 
118
누구나 이 말을 다 옳게 여길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世上萬事(세상만사)를 다 그렇게 單純(단순)하게만 判斷(판단)할 수가 있사오리이까. 우리가 簡單(간단)히「옳다」하는 일에 그 속에 어떠한「옳지 않다」가 숨은 줄을 모르며, 우리가 簡單(간단)히「옳지 않다」하는 속에 어떠한「옳다」가 있는지 모르나이까. 世人(세인)은 제가 當(당)한 일에는 이 眞理(진리)를 適用(적용)하면서도 第三者(제삼자)로 批評(비평)할 때에는 이 眞理(진리)를 無視(무시)하고 다만 表面(표면)으로 얼른 보아「옳다」「옳지 않다」하나이다.
 
119
只今(지금) 내 境遇(경우)도 表面(표면)으로 보면 一鴻君(일홍군)의 말이 果然(과연) 옳거니와 一步(일보) 깊이 들어서면 그렇지 아니한 理由(이유)도 깨달을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一鴻君(일홍군)에게 對(대)하여 아무 答辯(답변)을 하려 하지 아니하고 다만 듣기() 하였을 뿐이로소이다. 그 後(후)에 나는 이유를 알았나이다 ── 그가 내 書柬(서간)을 받고 一鴻君(일홍군)을 請(청)하여 물어 보았고 一鴻君(일홍군)은 내가 旣婚男子(기혼남자)인 理由)(이유)로 이를 拒絶(거절)하게 한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120
그 後(후) 나는 매우 失望(실망)하였나이다. 술도 먹고 學校(학교)를 쉬기도 하고 밤에 잠을 못 이루어 不眠症(불면증)도 얻고 (이 不眠症(불면증)은 그後(후) 四年(사년)이나 繼續(계속)하다), 幽鬱(유울)하여지고 世上(세상)에 맘이 붙지 아니하며 成功(성공)이라든가 事業(사업)의 希望(희망)도 없어지고 ── 말하자면 나는 싸늘하게 식은 冷灰(냉회)가 되었나이다. 或時(혹시) 나는 鐵道自殺(철도자살)을 하려다가 工夫(공부)에게 붙들리기도 하고, 卒業(졸업)을 三(삼), 四月後(사월후)에 두고 退學(퇴학)을 하려고도 하여보며, 이리하여 여러 朋友(붕우)는 나의 急激(급격)한 變化(변화)를 걱정하여 여러 가지로 忠告(충고)도 하며 慰勞(위로)도 하더이다. 그러나 元來(원래) 孤獨(고독)한 나의 靈(영)은 다시 나을 수 없는 큰 傷處(상처)를 받아 모든 希望(희망)과 精力(정력)이 다 스러졌나이다. 나는 이러한 되는 대로 生活(생활), 落望(낙망), 悲觀的生活(비관적생활)을 一年(일년)이나 보내었나이다. 만일 다른 무엇(아래 말하려는)이 나를 救援(구원)하지 아니 하였던들 나는 永遠(영원)히 죽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로소이다. 그「다른 무엇」은 다름 아니라, 「同族(동족)을 爲(위)함」이로소이다. 마치 人生(인생)에 失望(실망)한 다른 사람들이 或(혹) 削髮爲僧(삭발위승)하고, 或(혹) 慈善事業(자선사업)에 獻身(헌신)함같이, 人生(인생)에 失望(실망)한 나는 「同族(동족)의 敎化(교화)」에 내 몸을 바치기로 決心(결심)하여 이에 나는 새 希望(희망)과 새 精力(정력)을 얻은 것이로소이다. 그제부터 나는 飮酒(음주)와 懶惰(나타)를 廢(폐)하고 勤勉(근면)과 修養(수양)을 힘썼나이다. 가다가다 맘의 傷處(상처)가 아프지 아니함이 아니나 나는 少年(소년)의 敎育(교육)에 이 苦痛(고통)을 잊으려 하였으며 或(혹) 이 新愛人(신애인)에게서 새로운 快樂(쾌락)을 얻기까지라도 하였나이다. 그렁성하여 나는 至今(지금)토록 지내어 온 것이로소이다. 이 말씀을 듣고 보시면 내 行動(행동)이 或(혹) 解釋(해석)될 것도 있었으리이다. 아무려나 나는 그 金一蓮(김일련)을 爲(위)하여 最大(최대)한 希望(희망)도 붙여 보고 最大(최대)한 打擊(타격)과 動亂(동란)도 받아 보고 그 때문에 내가 只今(지금) 所有(소유)한 여러 가지 美點(미점)과 缺點(결점)과 한숨과 幽鬱(유울)과 悲哀(비애)가 생긴 것이로소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뒤에 金一蓮(김일련) 그가 나를 變形(변형)한 모양이로소이다.
 
121
이 金一蓮(김일련)이, 即(즉) 그 金一蓮(김일련)일 줄을 누가 알았사오리이까. 只今(지금)껏 때때로「奔走(분주)하신데……」하던 容貌(용모)와 音聲(음성)이 一種(일종) 抑制(억제)할 수 없는 悲哀(비애)를 띠고 내 記憶(기억)에 일어나던 것이 무슨 緣分(연분)으로 六年(육년)만에 또 한 번 번뜻 보이고 숨을 것이니이까. 내 心緖(심서)는 六年前(육년전)과 같이 散亂(산란)하였나이다. 그래서 終日(종일) 그를 찾아 돌아다녔나이다. 내가 이 담요에 얼굴을 대고 있을 제 日比谷(일비곡) 꿈이 歷歷(역력)히 보이나이다. 그것은 꿈이로소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꿈이 아니라 하나이다. 만일 그것이 꿈이면 世上萬事(세상만사) 어느 것이 꿈 아닌 것이 있사오리이까.
 
122
그 꿈은 참 解明(해명)하였나이다. 그뿐더러 一瞬間(일순간) 꿈이 내 一生 涯(일생애)에 가장 크고 重要(중요)한 內容(내용)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꿈이오리까.
 
123
편지가 너무 길어졌나이다. 벌써 新年(신년) 一月一日(일월일일) 午前(오전) 三時(삼시)로소이다. 歲(세) 잘 쇠시기 바라고 이만 그치나이다.
 
 

3. 第三信(제삼신)

 
125
나는 三日前(삼일전)에야 海參威(해참위)에 漂着(표착)하였나이다 ──.
 
126
갖은 고생과 갖은 危險(위험)을 겪고 몇 번 죽을 번하다가 내 一生(일생)이 元來(원래) 고생 많은 一生(일생)이언마는 이번같이 죽을 고생하여 본 적은 없었나이다. 나는 上陸(상륙)한 後(후)로부터 이곳 病院(병원)에 누워 이 글도 病狀(병상)에서 쓰나이다. 이제 그 동안 十餘日間(십여일간)에 지내온 이야기를 들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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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美國(미국)에 가는 길로 지난 一月五日(일월오일)에 上海(상해)를 떠났나이다. 혼잣몸으로 數萬里(수만리) 異域(이역)에 向(향)하는 感情(감정)은 참 形言(형언)할 수 없더이다. 桑港(상항)으로 直航(직항)하는 배를 타려다가 旣往(기왕) 가는 길이니, 歐羅巴(구라파)를 通過(통과)하여 저 人類 世界(인류세계)의 主人(주인) 노릇 하는 民族(민족)들의 本國(본국) 구경이나 할 次(차)로 露國(노국) 義勇艦隊(의용함대) 프르타와號(호)를 타고 海參威(해삼위)로 向(향)하여 떠났나이다. 나 탄 船室(선실)에는 나 外(외)에 露人(노인) 하나이 있을 뿐. 나는 외로이 寢牀(침상)에 누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다가 元來(원래) 衰弱(쇠약)한 몸이라 그만 잠이 들었나이다. 깨어본즉 電燈(전등)은 반작반작 하는데 機械(기계)소리만 멀리서 오는 듯이 들리고 자다 깬 몸이 으스스하여 外套(외투) 뒤쳐쓰고 甲板(갑판)에 나섰나이다. 陰十一月下旬(음십일월하순) 달이 바로 檣頭(장두)에 걸리고 늠실늠 실하는 波濤(파도)가 月光(월광)을 反射(반사)하며 파랗게 맑은 하늘 한편에 啓明星(계명성)이 燦爛(찬란)한 光彩(광채)를 發(발)하더이다. 나는 外套(외투)깃으로 목을 싸고 甲板上(갑판상)으로 왔다갔다 거닐며 雄大(웅대)한 밤 마다 景致(경치)에 醉(취)하였나이다. 여기는 아마 黃海(황해)일 듯, 여기서 바로 北(북)으로 날아가면 그대 계신 故鄕(고향)일 것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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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顧茫茫(사고망망)하여 限際(한제)가 아니 보이는데 方向(방향) 모르는 靑年(청년)은 물결을 따라 흘러 가는 것이로소이다.「江天一色無纖塵皎皎空中 孤月輪(강천일색무섬진교교공중고월륜)」이란 張若虛(장약허)의 詩句(시구)를 읊조릴 제 마음조차 이 詩(시)와 같이 된 듯하여 塵世名利(진세명리)와 뒤숭숭한 心慮(심려)가 씻은 듯 스러지고 다만 月輪(월륜) 같은 精神(정신)이 뚜렷하게 胷中(흉중)에 坐定(좌정)한 듯하더이다. 山(산)도 아름답지 아님이 아니로되 曲折(곡절)과 凹凸(요철)이 있어 아직 사람의 맘을 散亂(산란)케 함이 있으되 바다에 이르러서는 萬顷一面(만경일면) 지질펀한데 眼界(안계)를 막는 것도 없고 心情(심정)을 刺激(자격)하는 것도 없어 참말 自由(자유)로운 心境(심경)을 맛보는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中(중)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은 愛人(애인)이라, 그대와 一蓮(일련)의 생각은 心中(심중)에 雜念(잡념)이 없어질수록에 더욱 鮮明(선명)하고 더욱 懇切(간절)하게 되나이다. 만일 이 景致(경치)와 이 心境(심경)을 저들과 같이 보았으면 어떠랴, 이 달 아래 이 바람과 이 물결에 그네의 손을 잡고 逍遙(소요)하였으면 어떠랴 하는 생각이 차차 더 激烈(격렬)하게 일어나이다. 그러나 여기는 萬頃海中(만경해중)이라 나 혼자 이 天地(천지) 속에 깨어 있어 이러한 생각을 하건마는 그네들은 只今(지금) 어떠한 꿈을 꾸는가. 아아 그립고 그리운 母國(모국)과 愛人(애인)을 뒤에 두고 數萬里外(수만리외)로 漂泊(표박)하여 가는 情(정)이 그 얼마나 하오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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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船室(선실)에 들어가 자리에 누웠나이다. 그러나 精神(정신)이 灑落(쇄락)하여 졸리지는 아니하고 하릴없이 上海(상해)를 떠난 적에 사 가진 新聞(신문)을 끄내어 뒤적뒤적 읽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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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다시 잠이 들었더니 더 할 수 없는 恐怖(공포)를 가지고 그 잠을 깨었나이다. 일찍 들어 보지 못하던 轟然(굉연)한 爆響(폭향)이 나며 船體(선체)가 空中(공중)에 떴다 내려지듯이 搖動(요동)하더이다. 나는「水雷(수뢰), 沈沒(침몰)」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일어나며 門(문)을 차고 甲板(갑판)에 뛰어 나가다가 소낙비 같은 물바래에 精神(정신)을 잃을 번하였나이다. 甲板上(갑판상)에는 寢衣(침의)대로 뛰어 나온 男女船客(남녀선객)이 몸을 떨며 부르짖고 船員(선원)들은 미친 듯이 左右(좌우)로 馳驅(치구)하더이다. 우리 배는 벌써 三十餘度(삼십여도)나 左舷(좌현)으로 傾斜(경사)하고 汽罐(기관)소리는 죽어 가는 사람의 呼吸(호흡) 모양으로 아직도 퉁퉁 퉁퉁하더이다.「水雷(수뢰), 水雷(수뢰)」하는 소리가 絶望(절망)한 音調(음조)로 名(명)사람의 입으로 지나가더니 上甲板(상갑판)에서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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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船體(선체)는 水雷(수뢰)에 腹部(복부)가 破碎(파쇄)되어 救援(구원)할 길이 없소. 只今(지금) 救助艇(구조정)을 내릴 터이니 各人(각인)은 文明(문명)한 男子(남자)의 最後體面(최후체면)을 생각하여 女子(여자)와 幼兒(유아)를 먼저 살리도록 하시오."하고 외치는 것은 船長(선장)이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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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敏活(민활)한 水夫(수부)들은 船上(선상)에 配置(배치)하였던 個人 救助艇(개인구조정)을 내리고 船客(선객)들은 悲慘(비참)한 慟哭(통곡)속에 女子(여자)와 小兒(소아)를 그리로 올려 태우더이다. 어떤 婦人(부인)은 그 지아비에게 매어달려 말도 못하고 慟哭(통곡)하며 그러면 그 지아비는 無情(무정)한 듯이 그 아내의 가슴을 떠밀어 救助艇(구조정)에 싣고 소리 높이 「하나님이시여 主(주)께 돌아가나이다」하고, 어떤 이는 미친 듯이 부르짖 으며 前後(전후)로 왔다갔다하며, 어떤 이는 氣力(기력)없이 甲板(갑판)에 기대어 彫像(조상) 모양으로 멍멍하니 섰기로 하더이다. 各救助艇(각구조정)에는 水夫(수부)가 六穴砲(육혈포)를 들고 서서 定員以外(정원이외) 오르기를 不許(불허)하고 어떤 卑怯(비겁)한 男子(남자)는 억지로 救助艇(구조정)에 오르려다가 여러 사람의 叱責(질책) 속에 도로 本船(본선)에 끌려 오르기도 하더이다. 救助艇(구조정)은 하나에 二十餘名(이십여명)씩이나 싣고 定處(정처)없이 萬頃(만경)에 나뜨더이다. 거기 탄 女子(여자)와 小兒(소아)는 本船(본선)에서 時間(시간)이 못하여 죽으려 하는 지아비와 아비를 向(향)하여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우짖고 本船上(본선상)에 남아 있는 男子船客(남자선객)과 船員(선원)은 도리어 萬事泰平(만사태평)인 듯이 沉着(침착)하더이다. 사람이란 避(피)할 수 없는 危險(위험)을 當(당)할 때에는 도리어 泰然(태연)한 것이러이다. 船體(선체)의 前半部(전반부)는 半以 上(반이상)이나 물에 들어가고 우리는 暫時(잠시)나마 生命(생명)을 늘일 양으로 後半部(후반부)로 옮았나이다. 本船(본선)을 떠나는 救助艇(구조정)에서는 讚頌歌(찬송가)가 일어나며 이것을 듣고 우리도 各各(각각) 讚頌歌(찬송가)를 부르며 어떤이는 두 팔을 들고 소리를 내어, 어떤이는 고개를 숙이고 主(주)에게 마지막 祈禱(기도)를 올리더이다. 나는 暫間(잠간) 故鄕(고향)과 家族(가족)과 同族(동족)과 그대와 그와 朋友(붕우)들과 품었던 將來(장래)의 希望(희망)을 생각하고 아주 冷靜(냉정)하게 最後(최후)의 決心(결심)을 하였나이다. 나는 이 世上(세상)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때에 恐怖(공포)하였나이다. 아껴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世上(세상)의 冷酷(냉혹)하고 괴로움을 생각할 때에 하루라도 바삐 이 世上(세상)을 벗어남을 기뻐하였나이다. 나는 더러운 病席(병석)에서 오줌똥을 싸뭉개다가 죽지 아니하고 新鮮(신선)한 朝日光(조일광) 茫茫(망망)한 海洋中(해양중)에 悲壯(비장)한 景光裏(경광리)에 죽게 됨을 幸福(행복)으로 여겼나이다. 實狀(실상) 집에서 죽으려거든 功成名遂(공성명수)하고 限命(한명)까지 살다가 子女(자녀)와 社會(사회)의 깊이 哀悼(애도)하는 속에 하거나, 그렇지 아니하거든 或(혹)은 霜刃下(상인하)에, 或(혹) 人類(인류)의 文明(문명)을 爲(위)하여 電氣(전기)나 化學(화학)의 實驗中(실험중)에 죽을 것인가 하나이다. 나는 저 苟且(구차)하게 無氣力(무기력)한 生命(생명)을 아껴 醜(추)한 生活(생활)을 이어가는 者(자)를 誹笑(비소)하나이다. 只今(지금) 洋洋(양양)한 바다는 우리를 받아들일 양으로 늠실늠실하고 光輝(광휘)한 太陽(태양)은 他界(타계)로 가는 우리를 作別(작별)하는 듯이 우리에게 따뜻한 빛을 주더이다. 배가 가라앉음을 좇아 차차 後部(후부)로 옮는 船客(선객)들을 이제야 몸과 몸이 서로 마주 닿게 되었나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上甲板(상갑판)과 檣(장)으로 기어 오르나이다. 汽罐(기관) 벌써 죽었나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로소이다. 그러나 우리 中(중)에는 이제는 우리 이도 없고 덤비는 이도 없고 다만 悲愴(비창)한 한숨 소리와 祈禱(기도)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릴 뿐이로소이다. 船員(선원)은 우리 生命(생명)이 이제 四十分(사십분)이라 하나이다. 우리 心臟(심장)은 一秒一秒(일초일초) 뛰나이다. 一分(일분) 가나이다, 二分(이분) 가나이다. 이때에 가끔 물바래가 우리 熱(열)한 얼굴을 적시더이다.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우으로 우으로 올라가나이다. 다만 一瞬間(일순간)이라도 할 수 있는 대로는 生命(생명)을 늘이려 하는 人生(인생)의 情狀(정상)은 참 可憐(가련)도 하여이다. 救助艇(구조정)도 어디 갈 데가 있는 것이 아니요, 後(후)에 오는 배만 기다리는 故(고)로 그 周圍(주위)로 슬슬 떠다닐 뿐이러이다. 가끔 女子(여자)의 울음 소리가 물결 소리와 함께 울려 올 뿐이로소이다. 十分(십분) 지났나이다. 남은 것이 三十分(삼십분). 우리는 不知不覺(부지불각)에 주먹을 부르 쥐고 입을 꼭 다물었나이다. 마치 우리를 向(향)하여 오는 무엇을 抵抗(저항)하려는 듯이. 그러나 우리는 그 運命(운명)을 抵抗(저항)할 수 있사오리까. 아까 救助艇(구조정)에 오르려던 男子(남자)는 失神(실신)한 듯이 甲板上(갑판상)에 거꾸러지며 거푸을 吐(토)하고 痙攣(경련)을 生(생)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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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빙그() 웃으면서 그 사람의 파래진 얼굴을 보았나이다. 우리는 그를 救援(구원)하려 할 必要(필요)가 없고 다만 暫間(잠간) 먼저 가거라, 우리도 네가 아직 一哩(일리)을 앞서기 前(전)에 따라갈 것이로다 할 뿐이로소이다. 이때 우리 心中(심중)에야 무슨 慾心(욕심)이 있으며 무슨 念慮(염려)가 있으리이까. 萬人(만인)이 꿈에도 놓지 못하던 名利(명리)의 慾(욕)이며 快樂(쾌락)의 慾(욕)이며 ── 온갖 것을 다 잊어버리고 다만 우리가 世上(세상)에 올 때에 가지던 바와 같은 純潔(순결)한 맘으로 오려는 죽음을 맞을 따름이로소이다. 이때에 우리 二百餘名(이백여명) 사람은 모두 聖人(성인)이요, 모두 天使(천사)로소이다. 만일 누구나 葬式(장식)을 볼 때에 暫間(잠간) 이러한 생각을 하였던들 社會(사회)의 모든 惡(악)하고 無用(무용)한 軋轢(알력)이 없어질 것이로다. 이 배에는 或(혹) 金貨(금화)도 실었으리이다. 그러나 只今(지금) 누가 그것를 생각하며, 美人(미인)은 있으리이다. 그러나 只今(지금) 누가 그를 생각하오리이까. 그뿐더러 우리의 生命(생명)까지도 그리 아까운 줄을 모르게 되어 沈沒(침몰)하는 船體(선체)의 異常(이상)한 不快(불쾌)한 音響(음향)을 發(발)할 때마다 本能的(본능적)으로 몸이 흠칙흠칫 할 뿐이로소이다. 二十分(이십분) 지내었나이다. 船體(선체)는 漸漸(점점) 물 아래로 잠기나이이다. 우리는 더 올라 갈 곳이 없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섰나이다. 이때에 群衆中(군중중)에서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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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배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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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외친다. 群衆(군중)의 視線(시선)은 一齊(일제)히 西(서)편 까만 點(점)으로 쏠리더이다. 船長(선장)은 마스트 第一桁(제일항)에 올라가 雙眼 鏡(쌍안경)으로 그 異點(이점)을 보더니, 손을 내어두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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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號(호)외다. 우리 배보다 二時間後(이시간후)에 떠난 코리아號(호)외다. 우리 배 沈沒(침몰)한다는 無線電信(무선전신)을 받고 이리로 옴이외다. 그러나 저 배는 一時間後(일시간후)가 아니면 오지 못할 터이니 各各(각각) 무엇이나 하나씩 붙들고 저 배 오기를 기다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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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얼굴은 一時(일시)에 變(변)하였나이다. 沈着(침착)하던 마음이 도리어 動亂(동란)하더이다. 一條(일조)의 生道(생도)가 보이매 至今(지금)껏 죽으려고 決心(결심)하였던 것이 다 虛事(허사)가 되고 이제는 살려는 希望(희망)을 가지고 努力(노력)하게 됨이로소이다. 우리는 船員(선원)과 함께 널쪽 뜯기에 着手(착수)하였나이다. 나도 依接(의접)할 것을 하나 얻을 양으로 잠기다 남은 甲板(갑판) 위로 뛰어 돌아 가다가 異常(이상)한 소리에 깜짝 놀래어 우뚝 섰나이다.「사람살리오!」하는 女子(여자)의 소리(英語(영어)로) 들리며 무엇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이다. 나는 곧 그 소리가 서너 치나 이미 물에 잠긴 主檣(주장)밑 一等室(일등실)에서 나는 줄을 알아 차리고 얼른 뛰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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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문)을 칠 터이니 물러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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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손에 들었던 도끼로 돌저귀를 때려부수고 힘껏 그것을 잡아 제쳤나이다. 그 속에는 어떤 늙은 西洋夫人(서양부인) 하나와 젊은 東洋夫人(동양부인) 하나이 있다가 흐트러진 머리 寢衣(침의) 바람으로 문을 차며 마주 뛰어 나오더이다. 나는 그 門(문)을 떼어 生命(생명)을 依接(의접)할 양으로 도끼로 잡을 손 있는 데를 깨뜨렸나이다. 이때에 뒤로서 누가 내게 매어달 리기로 돌아본즉 이것이 누구오리까. 내 恩人(은인) 金一蓮(김일련)이로소이다. 나는 다른 말 할새 없이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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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門(문)을 잃지 말고 여기 매어달리시오. 只今(지금) 救助(구조)할 배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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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나이다. 돌아서며 보니 船客(선객)과 船員(선원)들은 벌써 널쪽을 하나씩 집어 타고 물에 나떴더이다. 甲板(갑판)에 물이 벌써 무릎을 잠그고 船體(선체)는 漸漸(점점) 빠르게 가라앉더이다. 게다가 굽신굽신하는 물결이 몸을 쳐 한 걸음만 걸핏하면 그만 千(천)길 海中(해중)으로 쑥 들어 갈 것이로소이다. 船上(선상)에는 우리 세 사람 뿐이로소이다. 내가 도끼로 문을 부시는 동안에 남들은 다 내려간 것이로소이다. 아아 어찌하나 이 門(문) 한 짝에 세 사람이 붙을 수 없고 그러나 이제 달리 어쩔 수도 없어 그 危急(위급)한 中(중)에 얼마나 躊躇(주저)하였나이다. 그러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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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門(문)을 타고 나가시오. 걸핏하면 그만이오. 어서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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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다시 물 속에 든 도끼를 찾아 다른 門(문)을 부시려 하였나이다. 그러나 이때에 벌써 물이 허리 위에 올라 오고 물 속에 잠긴 돌저귀를 부시지 못하여 한참이나 애를 쓰다가 뒤를 돌아본즉 두 婦人(부인)은 水上(수상)에 조금 남겨 놓인 欄干(난간)을 붙들고 흑흑 느끼더이다. 나는 이를 보고 허리를 물에 잠그고 겨우하여 그 門(문)을 뜯어 내어 놓고 본즉 먼저 뜯어 놓은 門(문)이 갑자기 밀어 오는 물결에 밀려 달아나더이다. 나는 도끼를 집어 내어던지고 그 門(문)을 잡고 헤어나갈 準備(준비)를 하였나이다. 그러나 어찌하리요. 門(문) 하나에 셋은 탈 수 없으니 우리 셋 中(중)에 하나는 죽어야 할 것이라, 누가 죽고 누가 살 것이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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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寸刻(촌각)의 餘裕(여유)도 없나이다. 두 婦人(부인)더러 그 門(문)의 한편 옆에 붙으라 하고 나는 다른 옆에 붙어 아주 우리 몸이 뜨기만 바랐나이다. 沈沒(침몰)하는 本船(본선) 周圍(주위)에는 運命(운명)에 生命(생명)을 맡긴 人生(인생)들이 或(혹)은 널쪽에 或(혹)은 救命帶(구명대)에 或(혹)은 救助艇(구조정)에 붙여 물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말없이 떠다니나이다. 아까 보이던 코리아號(호)는 果然(과연) 오는지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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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우리 몸은 全(전)혀 그 門(문)에만 매어달리게 되었나이다. 두 婦人(부인)은 氣運(기운)없이 門(문)설주를 잡고 내 얼굴만 쳐다보더이다. 그러나 세 사람의 重量(중량)에 門(문)은 連(연)해 가라앉으려 하고 그러할 때마다 弱(약)한 婦人(부인)네는 더욱 팔에 힘을 주므로 우리는 몇 번이나 머리까지 물 속에 잠겼나이다. 가뜩이나 겨울 물에 四肢(사지)는 얼어 들어 오고 팔맥은 풀리고 아무리 하여도 이 모양으로 十分(십분)을 지낼 것도 같지 아니하더이다. 이제 우리가 한 가지 오래 갈 妙策(묘책)은 門(문)을 胸腹部(횽복부)에 기대고 팔과 다리로 方向(방향)을 잡음이러이다. 그러나 걸핏하면 널쪽이 뒤집히든가 가라앉든가 할 모양이니 어찌하오리이까. 그러나 우리는 數分間(수분간)에 一次(일차)씩 물에 잠기어 아무리 하여도 이대로 참을 수는 없더이다. 이때말로 姑息(고식)을 不許(불허)하고 勇斷(용단)이 必要(필요)하더이다. 이렁그렁하는 동안에 氣力(기력)은 차차 耗盡(모진)하더이다. 元來(원래) 纖弱(섬약)한 金娘(김랑)은 벌써 흐뜩흐뜩 느끼며 졸기를 시작하더이다. 아무리 하여도 셋 中(중)에 하나는 죽어야 하리라 하였나이다. 나는 얼른「살아야 할 사람」은 나와 내 同胞(동포) 金娘(김랑)인가 하였나이다. 人道上(인도상)으로 보아 두 婦人(부인)을 살리고 내가 죽음이 마땅하다 하려니와 나는 그때 내 生命(생명)을 먼저 버리기에는 너무 弱(약)하였나이다. 그러나 저 西洋婦人(서양부인)을 떠밀어 내기도 生命(생명)이 있는 동안은 못할 일이러이다. 또 한 번 우리는 물 속에 들었다 나왔나이다. 숨이 막히고 精神(정신)이 아뜩아뜩 하더이다. 나는 다시 생각하였나이다. 아직 國家(국가)가 있다. 國家(국가)가 있으니 內外國(내외국)의 別(별)이 있다, 그러니까 다 살지 못할 境遇(경우)에 내 同胞(동포)를 살림이 當然(당연)하다 하였나이다. 그러나 斷行(단행)치 못하고 또 한 번 물에 잠겼다 나왔나이다. 나는 이에 決心(결심)하였나이다. 차라리 이 널쪽을 뒤쳐엎었다가 둘 中(중)에 하나 사는 者(자)를 살리리라 하였나이다. 아아 나의 사랑하는 이의 生命(생명)이 어찌 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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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시여 容恕(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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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널쪽을 턱 놓았나이다. 아아 그때의 心中(심중)의 苦悶(고민)이야 무엇으로 形容(형용)하리이까. 널쪽이 번쩍 들리며 두 婦人(부인)은 물 속에 들어 갔나이다. 나는 얼른 널쪽을 잡으려 하였으나 널쪽은 물결에 밀려 數步外(수보외)에 달아나더이다. 이윽고 두 婦人(부인)도 물을 푸푸 뿜으며 나뜨더이다 . 나는 最後(최후)의 努力(노력)이로구나 하면서 널쪽을 버리고 金娘(김랑) 있는 데로 헤어 가서 한 손으로 그의 겨드랑을 붙들고 널 쪽을 向(향)하여 헤었나이다. 널쪽은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우리 보다 앞서 가더이다. 나는 死力(사력)을 다하여 헤었나이다. 우리의 두 몸은 이제야 겨우 코 以上(이상)이 물 위에 떴을 따름이로소이다. 나는「이제는 죽었 구나」하며 남은 힘을 다하였나이다. 그러나 屍體(시체)나 다름 없는 女子(여자)를 한 손에 들었으니 어찌 하오리이까. 그렇다고 차마 그는 놓지 못했나이다. 나는 不知不覺(부지불각)에「아이구」하였나이다. 그러나 내 生命(생명)은 아직 끊기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래도 허우적허우적 널쪽을 向(향)하여 헤었나이다. 거의 기운이 다하려 할 제 널쪽이 손에 잡혔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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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 기운을 내어 金娘(김랑)을 널쪽에 올려 싣고 나도 가슴을 널쪽에 대었나이다. 그러고는 다리를 흔들어 널쪽의 方向(방향)을 돌렸나이다. 西洋婦人(서양부인)이 아직도 떴다 잠겼다 함을 보고 나는 그리로 向(향)하여 저어가려 하였나이다. 그러나 내 四肢(사지)는 이미 굳었나이다. 그러고는 精神(정신)을 잃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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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본즉 나는 어느 船室(선실)에 누웠고 곁에는 金娘(김랑)과 다른 사람 들이 昏迷(혼미)하여 누웠나이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말도 잘 나가지 아니하더이다. 이 모양으로 二十分(이십분)이나 누웠다가 겨우 精神(정신)을 차려 나는 어느 배의 救援(구원)을 받아 다시 살아난 줄을 았았나이다. 그러고 겨우 몸을 일혀 곁에 누운 金娘(김랑)을 보니 아직도 昏迷(혼미)한 모양이러이다. 뒤에 들은즉 이 배는 우리가 기다리던 코리아號(호)요, 그 船客(선객)들이 衣服(의복)을 내어 갈아 입히고 우리를 自己(자기)내 寢台(침태)에 누인게라 하더이다. 저녁때쯤 하여 金娘(김랑)도 일어 나고 다른 遭難客(조난객)도 일어나더이다. 三百餘名(삼백여명)에 生存(생존)한 者(자)가 겨우 一百二十幾人(일백이십기인). 나도 그 틈에 끼인 것이 참 神奇(신기)하더이다. 아아 人生(인생)의 運命(운명)이란 果然(과연) 알 수 없더이다. 船長(선장)도 죽고 나와 같은 房(방)에 들었던 이도 죽고 毋論(무론) 西洋婦人(서양부인)도 죽고 ── 그러나 그때 救助艇(구조정)에 뛰어 오르려다가 도로 끌려 내린 者(자)는 살아나서 바로 내 맞은편 寢牀(침상)에 누워 앓는 소리를 하더이다. 여러 船客(선객)은 여러 가지로 慰問(위문)하여 주며 어떤 西洋婦人(서양부인)네는 눈물을 흘리며 慰問(위문)하더이다. 나는 그네에게 對(대)하여 나의 目睹(목도)한 自初至終(자초지종)을 말하였나이다. 그네는 或(혹) 놀라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그 말을 듣더이다. 그 水雷(수뢰)는 敷設水雷(부설수뢰)인가 獨逸水雷艇(독일수뢰정)이 發射(발사)한 것인가 하고 議論(의론)이 百出(백출)하였으나 毋論(무론) 歸結(귀결)되지 못하였나이다. 우리도 국과 牛乳(우유)를 마시고 다시 잠이 들어 翌朝(익조) 長崎(장기)에 碇泊(정박)할 때까지 世上(세상) 모르고 잤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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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崎(장기)서 이틀을 留(유)하여 단번 義勇艦隊(의용함대) 배로 이곳에 到着(도착)한 것이 再再昨日(재재작일) 午前(오전) 九時(구시)로소이다. 그러나 물에서 몸이 지쳐 우리는 그냥 病院(병원)에 들어와 只今(지금)까지 누웠으나 오늘부터는 心神(심신)이 자못 輕快(경쾌)하여 감을 느끼오니 過慮(과려)말으소서.
 
 
 

4. 第四信(제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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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只今(지금) 小白山中(소백산중)을 通過(통과)하나이다. 正(정)히 午前(오전) 四時(사시). 겹琉璃窓(유리창)으로 가만히 내다보면 稀微(희미)하 게나마 白雪(백설)을 지고 인 沈沈(침침)한 森林(삼림)이 보이나이다. 우리 列車(열차)는 零下(영하) 二十五(이십오), 六度(육도) 되는 天地開闢以來(천지개벽이래)로 일찍 人跡(인적) 못 들어 본 大森林(대삼림)의 밤 空氣(공기)를 헤치고 헐럭헐럭 달아가나이다. 들리는 것이 오직 둥둥둥둥한 車輪(차륜)소리와 汽罐車(기관차)의 헐덕거리는 소리뿐이로소이다. 우리 車室(차실)은 寢臺(침대) 四個中(사개중)에 二層(이층) 二個(이개)는 비고 나와 金娘(김랑)이 下層(하층) 二個(이개)를 占領(점령)하였나이다. 蒸氣鐵管(증기철관)으로 室內(실내)는 우리 溫突(온돌)이나 다름 없이 훗훗 하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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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金娘(김랑)의 자는 얼굴을 보았나이다. 담요를 가슴까지만 덮고 입술을 半(반)쯤 열고 부드러운 숨소리가 무슨 微妙(미묘)한 音樂(음악)같이 들리더이다. 그 가는 붓으로 싹그은 듯한 눈썹하며 방그레 웃는 듯한 두 눈하며 여러 날 危險(위험)과 勞困(노곤)으로 좀 해쓱하게 된 두 뺨하며 입술이 약간 가뭇가뭇하게 탄 것이 도리어 風情(풍정) 있더이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지 오래거니와 아직 이 사람의 其間(기간)의 變遷(변천)과 經過(경과)를 仔細(자세)히 들어 볼 機會(기회)가 없었나이다. 上海(상해)서 精誠(정성)된 看護(간호)를 받을 때 그의 마음이 如前(여전)히 天使(천사) 같거니 하기는 하였으나 그 眞僞(진위)를 判定(판정)할 機會(기회)는 없었나이다. 나는 이제야 그 좋은 機會(기회)라 하였나이다. 대개 아무리 外飾(외식)에 익숙한 者(자)라도 잘 때엣 容貌(용모)와 態度(태도)는 숨기지 못하는 것이로소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자는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性情(성정)을 大槪(대개)는 正確(정확)하게 判斷(판단)하는 것이로소이다. 죽은 얼굴은 더욱 그의 性格(성격)을 잘 發表(발표)한다 하나이다. 그러나 家族 外(가족외)에는 남의 자는 얼굴을 보기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硏究(연구)의 最好(최호)한 機會(기회)는 車中(차중)이나 船中(선중)인가 하나이다. 나는 그대의 자는 얼굴을 여러 번 보았나이다. 그러고 그 얼굴로 그대의 性情(성정)을 많이 判斷(판단)하였나이다. 이제 그 솜씨를 가지고 金娘(김랑)의 자는 얼굴을 硏究(연구)하려 하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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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처음 그의 얼굴과 숨소리가 小兒(소아)의 그것과 같이 和平(화평)함은 그의 心情(심정)이 善(선)하고 快暢(쾌창)함을 보임이요, 그의 방그레한 웃음을 띄움은 어떤 處地(처지) 어떤 事件(사건)을 當(당)하거나 絶望(절망)하고 悲痛(비통)하지 아니하고 恒常(항상) 主宰(주재)의 攝理(섭리)를 依支(의지)하여 마음을 和樂(화락)하게 가짐을 보임이니,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그렇게 큰 困難(곤란)을 겪은 뒤에는 반드시 얼굴에 苦悶不平(고민불평)한 빛이 보일 것이로소이다. 그의 숨소리가 順(순)하고 長短(장단) 같음은 그 이 肉體(육체)와 心情(심정)의 完全(완전)히 調和(조화)함을 보임이니 숨소 리의 不齊(부제)함은 무슨 不調和(부조화)가 있음이로소이다. 그는 어젯밤에 누운 대로 端正(단정)한 姿勢(자세)를 維持(유지)하였으니 이는 그의 心情(심정)이 端雅(단아)하고 沈着(침착)함을 보임이로소이다. 或(혹) 베개를 목에 걸고 고개를 번적 재낀다든가 입으로 침을 질질 흘린다든가 팔과 다리를 모양 없이 내어 던지는 사람은 반드시 맘의 主(주)대 없고 亂雜(난잡)함을 보임이로소이다. 입을 꼭 다물지 아니함은 意志(의지)가 弱(약)하다든가 남에게 依賴(의뢰)하려는 性情(성정)을 表(표)함이어니와 조금 방싯하게 입을 연 것은 도리어 美(미)를 더하는 點(점)이로소이다. 只今(지금) 우리 金娘(김랑)은 마치 아기가 그 慈母(자모)의 품에 안긴 듯이 마음을 푹 놓고 極(극)히 安穩(안온)하게 자는 것이로소이다. 나는 한참이나 이 純潔(순결)한 女性(여성)의 얼굴을 凝視(응시)하다가 눈을 감고 壁(벽)에 기대어 생각 하였나이다. 果然(과연) 아름답도소이다. 이 아름다움을 보고 嘆美(탄미)하고 愛着(애착)하는 情(정)이 아니 날 사람이 있사오리이까. 造物(조물)은 嘆美(탄미)하기 爲(위)하여 이런 美(미)를 짓고 이런 美(미)를 鑑賞(감상)하는 힘을 人生(인생)에게 준 것이로소이다. 그 동안 여러 危險(위험)과 困難(곤란)에 餘裕(여유) 없는 胷中(흉중)은 다시 舊(구)에 復(복)하여 散亂(산란)하기 始作(시작)하였나이다. 나는 六年前(육년전) 某女學校(모여학교) 寄宿舍(기숙사)에서「奔走(분주)하신데」하고 살작 낯을 붉히던 그를 回想(회상)하고, 日比谷(일비곡)의 一場夢(일장몽)을 回想(회상)하고, 그때 나의 憧憬(동경)과 苦悶(고민)을 생각하고, 또 내가 지난 四(사), 午年間(오년간)에 겪은 모든 精神的變遷(정신적변천)과 苦悶(고민)이 太半(태반)이나 只今(지금) 내 앞에 누워자는 一短軀(일단구)에 原因(원인)함을 생각 하였나이다. 아마 그는 내가 自己(자기)를 爲(위)하여 겪은 모든 것을 모를 것이로소이다. 그래서 같이 死生間(사생간)에 出入(출입)하면서도 또는 같이 無人(무인)한 車室內(차실내)에 있으면서도 彼此(피차)의 心中(심중)은 大端(대단)히 懸殊(현수)한 것이로소이다. 胷壁(흉벽) 하나를 隔(격)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 心中(심중)은 마치 此界(차계)와 他界(타계)와 같아야 其間(기간)에 交通(교통)이 생기게 前(전)에는 決(결)코 接觸(접촉)하지 못하는 것이로소이다. 그 交通機關(교통기관)은 言語(언어)와 感情(감정)이니 이 機關(기관)으로 彼此(피차)의 內情(내정)을 査悉(사실)한 後(후)에야 和親(화친)도 생기고 排斥(배척)도 생기는 것이로소이다. 그러므로 朋友(붕우)라 함은 서로 理解(이해)하여 各其(각기) 他人(타인)에게 自己(자기)와의 共通點(공통점)을 發見(발견)함으로 생기는 關係(관계)라 할 수 있는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사랑은 이와는 딴 問題(문제)니 그의 性情(성정)이며 思想言行(사상언행)이 或(혹) 사랑의 原因(원인)도 되며, 或(혹) 이미 成立(성립)한 사랑을 强(강)하게 하는 效力(효력)은 있으되 그것은 理解(이해)한 後(후)에야 비로소 사랑이 成立(성립)되는 것이 아니로소이다. 말이 너무 곁길로 들었나이다. 나는 내 心情(심정)을 吐說(토설)함이 金娘(김랑)에게 어떠한 생각을 줄까 하였나이다. 내가 自己(자기)를 爲(위)하여 全人格(전인격)의 變動(변동)과 苦悶(고민)을 받은 줄을 말하면 그의 感想(감상)이 어떠할는가. 自己(자기)를 爲(위)하여 五(오), 六年(육년)을 苦悶中(고민중)으로 지낸 男子(남자)인 줄을 알 때에 果然(과연) 어떠한 感想(감상)이 생길는가. 毋論(무론) 그 事情(사정)을 듣는다고 없던 사랑이 생길 理(리)는 없으련마는 自己(자기)를 爲(위)한 犧牲(희생)을 可憐(가련)하게는 여기리라 하였나이다. 設或(설혹) 그가 내 陳情(진정)을 듣고 도리어 성내어 나를 排斥(배척)하리라 하더라도 稀微(희미)한 怨望(원망)과 함께 오래 품어 오던 情(정)을 바로 그 當者(당자)를 向(향)하여 吐露(토로)하기만 하여도 훨씬 속이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있을 듯하더이다. 그래 나는 제가 잠을 깨기만 하면 곧 그러한 말을 하리라 하였나이다. 그러고 다시 눈을 떠 그의 얼굴을 보매 如前(여전)히 安穩(안온)히 자더이다. 나는 다시 생각하였나이다. 設或(설혹) 저편이 나를 사랑한다 한들 내가 저를 사랑할 權利(권리)가 있을까. 나는 旣婚男子(기혼남자)라, 旣婚男子(기혼남자)가 다른 女性(여성)을 사랑함은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이 禁(금)하는 바라, 그러나 내 아내에게는 어찌하여 사랑이 없고 도리어 法律(법률)과 道德(도덕)이 사랑하기를 禁(금)하는 金娘(김랑)에게 사랑이 가나이까. 法律(법률)과 道德(도덕)이 人生(인생)의 意志(의지)와 情(정)을 거스르기 爲(위)하여 생겼는가. 人生(인생)의 意志(의지)와 情(정)이 所謂(소위) 惡魔(악마)의 誘惑(유혹)을 받아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을 違反(위반)하려 하는가. 이에 나는 道德(도덕)‧法律(법률)과 人生(인생)의 意志(의지)와 어느 것이 原始的(원시적)이며 어느 것이 더욱 權威(권위)가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하겠나이다. 人生(인생)의 意志(의지)는 天性(천성)이니 天地開闢(천지개벽)때부터 創造(창조)된 것이요, 道德(도덕)이나 法律(법률)은 人類(인류)가 社會生活(사회생활)을 始作(시작)함으로부터 社會(사회)의 秩序(질서)를 維持(유지)하기 爲(위)하여 생긴 것이라. 即(즉) 人生(인생)의 意志(의지)는 自然(자연)이요, 道德(도덕)·法律(법률)은 人爲(인위)며 따라서 意志(의지)는 不可變(불가변)이요, 絶對的(절대적)이요, 道德(도덕)·法律(법률)은 可變(가변)이요, 相對的(상대적)이라. 그러므로 吾人(오인)의 意志(의지)가 恒常(항상)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에 對(대)하여 優越權(우월권)이 있을 것이니 그러므로 내 意志(의지)가 現在(현재) 金娘(김랑)을 사랑하는 以上(이상)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을 違反(위반)할 權利(권리)가 있다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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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를 違反(위반)하면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은 반드시 나를 制裁(제재)하리라. 或(혹) 나를 姦淫者(간음자)라 하고 或(혹) 重婚者(중혼자)라 하여 社會(사회)는 나를 排斥(배척)하고 法律(법률)은 나를 處罰(처벌)하리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金娘(김랑)을 사랑함이 社會(사회)와 法律(법률)의 制裁(제재)보다 重(중)타고 認定(인정)할 때에는 나는 그 制裁(제재)를 甘受(감수)하고도 金娘(김랑)을 사랑할지니 大槪(대개) 靈(영)의 要求(요구)가 有形(유형)한 온갖 것보다도 ── 天下(천하)보다도 宇宙(우주)보다도 더 重(중)함이로소이다. 現代人(현대인)은 너무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에 靈性(영성)이 麻痺(마비)하여 靈(영)의 權威(권위)를 認定(인정)못하나니 이는 生命(생명) 있는 人生(인생)으로서 生命(생명) 없는 機械(기계)가 되어버림과 다름이 없나이다. 예수가 十字架(십자가)에 박힘도 當時(당시)의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에 違反(위반)하였음이요, 모든 國土(국토)와 革命 家(혁명가)가 重罪人(중죄인)의로 或(혹)은 賤役(천역)을 하며 或(혹)은 生命(생명)을 잃음도 靈(영)의 要求(요구)를 貴重(귀중)하게 여기어 現時(현시)의 制度(제도)를 違反(위반)함이로소이다. 大槪(대개) 道德(도덕)과 法律(법률)을 違反(위반)함에는 二種(이종)이 있으니, 一(일)은 私慾(사욕), 物慾(물욕), 情慾(정욕)을 滿足(만족)하기 爲(위)하여 違反(위반)함이니 이때에는 반드시 良心(양심)의 苛責(가책)을 兼受(겸수)하는 것이요, 基二(기이)는 良心(양심)이 許(허)하고 許(허)할뿐더러 獎勵(장려)하여 現社會(현사회)를 違反(위반)케 하는 것이니, 이는 法律上(법률상)으로 罪人(죄인)이라 할지나 他日(타일) 그의 爲(위)하여 싸우던 理想(이상)이 現實(현실)되는 날에 그는 敎祖(교조)가되고 國祖(국조)가 되고 先覺者(선각자)가 되어 社會(사회)의 追崇(추숭)을 받는 것이니, 歷史上(역사상)에 모든 偉人傑士(위인걸사)는 대개 이러한 人物(인물)이로소이다. 나는 不幸(불행)히 凡人(범인)이 되어 政治上(정치상) 또는 宗敎上(종교상) 이러한 革命家(혁명가)가 되지 못하나 人道上(인도상) 一革命者(일혁명자)나 되어 보려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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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金娘(김랑)을 사랑함이 果然(과연) 이만한 高尙(고상)한 意義(의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나 이미 내 全靈(전령)이 그를 사랑하는 以上(이상) 나는 決(결)코 社會(사회)를 두려 내 靈(영)의 要求(요구)를 抑制(억제)하지 아니하려 하나이다. 或(혹) 社會(사회)가 나를 惡人(악인)으로 여겨 다시 나서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나는 내 靈(영)의 神聖(신성)한 自由(자유)를 죽여서까지 肉體(육체)와 名譽(명예)의 安全(안전)을 圖謀(도모)하려 아니하나이다. 나는 日本人(일본인)의 情死(정사)를 부러워하나니 대개 제가 사랑하는 者(자)를 爲(위)하여 목숨을 버리기조차 辭讓(사양)히 아니하는 그 精神(정신)은 果然(과연) 아름답소이다. 저 或(혹)은 名譽(명예)를 爲(위)하여, 或(혹)은 身體(신체)나 財産(재산)을 爲(위)하여 사랑하던 者(자) 버리기를 식은 밥 먹듯하는 種族(종족)을 나는 미워하나이다. 나도 그러한 懦弱(나약)하고 冷淡(냉담)한 피를 받았으니 果然(과연) 저 外國人(외국인) 모양으로 사랑하는 者(자)를 爲(위)하여 生命(생명)까지라도 아끼지 않게 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이제 金娘(김랑)을 對(대)하여 이 實驗(실험)을 하여 보려 하나이다. 내가 日前(일전) 破船(파선)하였을 때에 한 行動(행동)도 이 方面(방면)의 消息(소식)을 傳(전)함인가 하나이다. 人生(인생)의 一生(일생)이 果然(과연) 우습지 아니하리이까. 오래 살아야 七十 年(칠십년)에 구태여 社會(사회) 앞에 꿇어 엎디어 온갖 服從(복종)과 온갖 阿謟(아첨)을 하여 가면서까지 奴隸的安全(노예적안전)과 快樂(쾌락)에 戀戀(연연)할 것이랴 무엇이니이까. 제가 正義(정의)로 생각하는 바를 따라 勇往邁進(용왕매진)하다가 成(성)하면 좋고 敗(패)하면 暴風(폭풍)에 떨어 지는 꽃 모양으로 훌적 날아가면 그만이로소이다. 나는 벌떡 일어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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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먹을 불끈 부르쥐고, 〈옳다 怯(겁)을 버려라. 내 사랑하는 金娘(김랑)을 爲(위)하여 全心身(전심신)을 바치리라.〉 하였나이다 . 내 발소리에 깨었는지 金娘(김랑)이 눈을 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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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우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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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올시다. 너무 오래 잤기로 運動(운동)을 좀 하노라고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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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只今(지금) 몇 時(시)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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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일어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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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時(시) 五分(오분)이올시다. 좀 더 주무시지요. 아직 이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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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異常(이상)하게 수줍은 맘이 생겨 金娘(김랑)을 正面(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窓(창)도 내다보며 電燈(전등)도 보며 하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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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딥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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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白山(소백산) 森林(삼림) 속이올시다. 아직까지 두 발 달린 짐승 들어 보지 못한 聖殿(성전)인데 只今(지금)은 鐵道(철도)가 생겨 차차 森林(삼림)도 採伐(채벌)하고 아담과 말하던 새와 사람들도 가끔 두 발 달린 짐승의 銃(총)소리에 놀랍니다. 地球上(지구상)에는 이 두 발 달린 짐승이 過(과)히 繁盛(번성)하여서 모처럼 하나님이 數十萬年(수십만년) 품 들여서 만들고 새겨 놓은 地球(지구)를 말 못되게 보기 숭하게 만듭니다. 自然(자연)을 이렇게 버려 놓는 모양으로 사람의 靈性(영성)에도 붉은 물도 들이고 푸른 물도 들이고 깍기도 하고 새기기도 하여 모양 없이 만들어 놓습니다. 보시오. 우리 身體(신체)도 그러합지요. 모두 무슨 凶物(흉물)스러운 헝겊 으로 뒤싸고 禮儀(예의)니 習慣(습관)이니 하는 오라줄로 꽁꽁 동여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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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오는 대로 한참이나 지껄이다가 過(과)히 冗長(용장)한 듯하여 말을 뚝 끊고 金娘(김랑)의 얼굴을 보았나이다. 金娘(김랑)은 빙그레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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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衣服(의복)도 없고 文明(문명)도 없으면 이 추운 땅에서야 어떻게 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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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살지요. 元來(원래)로 말하면 地球(지구)가 이렇게 식어서 눈이 오고 얼음이 얼게 되면 차차차차 赤道地方(적도지방)으로 몰려가 살 터지지요 말하자면 赤道地方(적도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짜장 살 權利(권리) 있는 사람 이요, 溫帶(온대)나 寒帶(한대)에 사는 사람들은 天命(천명)을 拒逆(거역)하여 사는 것이외다그려. 그러니까 赤道地方(적도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天命(천명)대로 自然(자연)스럽게 살아가지마는 溫帶(온대)나 寒帶(한대)에 사는 사람들은 所謂(소위)「自然(자연)을 征服(정복)」한다 하여 꼭 天命(천명)을 거슬리는 生活(생활)도 합니다그려. 그네의 所謂(소위) 文明(문명)이라는 것이 即(즉) 天命(천명)을 拒逆(거역)하는 것이외다. 爲先(위선) 우리로 보아도 한 時間(시간)에 十里(십리)씩 걸어야 옳게 만든 것을 꾀를 부려 百餘里(백여리)씩이나 걷지요. 눈이 오면 추워야 옳을 텐데 우리는 只今(지금) 따뜻하게 앉았지요……. 그러니까 文明(문명)속에 있어서는 하나 님을 섬길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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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면 先生(선생)님께서는 文明(문명)을 詛呪(저주) 하십니다그려. 그러나 우리 人生(인생) 치고 文明(문명) 없이 살아갈까요? 톨스토이가 제아무리 文明(문명)을 詛呪(저주)한다 하더라도 그 亦是(역시)「家屋(가옥)」속에서「料理(요리)」한 飮食(음식) 먹고「機械(기계)」로 된 衣服(의복) 입고 지내다가 마침내는 鐵道(철도)를 타다가 停車場(정차장)에서「醫 師(의사)」의 治療(치료)를 받다가 죽지 아니하였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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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말에는 대답하려 아니하고 單刀直入(단도직입)으로 金娘(김랑)의 事情(사정)을 探知(탐지)하려 하였나이다. 金娘(김랑)의 述懹(술양)은 如左(여좌)하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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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東京(동경)을 떠난後(후) 一年(일년)에 金娘(김랑)도 某高等女學校(모고등여학교)를 卒業(졸업)하고 仍(잉)하여 女子大學校(여자대학교) 英文 學科(영문학과)에 入學(입학)하였나이다. 元來(원래) 才質(재질)이 超越(초월)한 者(자)라 入學以後(입학이후)로 學業(학업)이 日進(일진)하여 校門(교문)에 朝鮮才媛(조선재원)의 名聲(명성)이 赫赫(혁혁)하였나이다. 그러나 꽃과 같이 날로 피어가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醉(취)하여 모여드는 蝴蝶(호접)이 한둘이 아니런 듯하여이다. 그 中(중)에 一人(일인)은 姓名(성명)은 말할 必要(필요)가 없으나 當時(당시) 朝鮮留學生界(조선유학생계)에 秀才(수재)이던 某氏(모씨)러이다. 氏(씨)는 帝大(제대) 文學科(문학과)에 在(재)하여 才名(재명)이 隆隆(융융)하던 中(중), 그 中(중)에도 獨逸文學(독일문학)에 精詳(정상)하고 또 天稟(천품)의 詩才(시재)가 있어 입을 열면 노래가 흐르고 붓을 들면 詩(시)가 솟아나는 者(자)러이다. 朝鮮學 生(조선학생)으로 더구나 아직 靑年學生(청년학생)으로 日本文壇(일본문단)의 一方(일방)에 明星(명성)의 譽(예)를 得(득)한 者(자)는 아직껏 아마 氏(씨)밖에 없었으리이다. 氏(씨)의 詩文(시문)이 어떻게 美麗(미려)하여 人(인)을 (뇌쇄)하였음은 일찍 氏(씨)의《少女(소녀)에게》라 하는 詩集(시집)이 出版(출판)됨에 그 後(후) 一個月(일개월)이 못하여 無名(무명)한 靑年女子(청년여자)의 熱情(열정)이 橫溢(횡일)하는 書翰(서한)을 無數(무수)히 受(수)함을 보아도 알 것이로소이다. 말하자면 金娘(김랑)의 萬人(만인)을 惱殺(뇌쇄)하는 美貌(미모)를 某氏(모씨) 그 筆端(필단)에 가진 것이라 할 것이로소이다. 金娘(김랑)과 某氏(모씨)와는 詩文(시문)의 紹介(소개)로 不識不知間(불식부지간) 相思(상사)하는 愛人(애인)이 되었나이다. 그러하여 爲先(위선) 雙方(쌍방)의 胷中(흉중)에 火焰(화염)이 일어나고 다음에 詩(시)와 文(문)이 되고 다음에 熱烈(열렬)한 書翰(서한)이 되고 또 다음에 偶然(우연)한 對面(대면)이 되고 마침내 핑계 있는 訪問(방문)이 되어 드디어 떼려도 뗄 수 없는 愛(애)의 融合(융합)이 된 것이로소이다. 或(혹) 新春(신춘)의 佳節(가절)에 手(수)를 携(휴)하고 郊外(교외)의 春景(춘경)을 爛漫(난만)한 百花(백화)의 熱烈(열렬)한 情熖(정염)을 돋우며 朗朗(낭랑)한 종달의 소리에 靑春(청춘)의 生命(생명)의 喜悅(희열)을 노래하고 或(혹) 瀧川高尾(농천고미)에 晩秋(만추)의 色(색)을 賞(상)하여 飄颻(표요)하는 落葉(낙엽)에 人生(인생) 無常(무상)을 歎(탄)하고 冷冷(냉랭)한 秋水(추수)에 뜨거운 靑春(청춘)의 紅淚(홍루)를 뿌리기도 하여 春去春來(춘거춘래) 三個(삼개)의 星霜(성상)을 꿈같이 달고 꿈같이 朦朧(몽롱)하게 지내었나이다. 그러나 某氏(모씨)는 天才(천재)의 흔히 있는 肺病(폐병)이 있어 몸은 날로 衰弱(쇠약)하고 詩情(시정)은 날로 淸純(청순)하여 가다가 去年(거년) 春三月(춘삼월) 피는 꽃 우는 새의 아까운 人生(인생)을 버리고 구름 위 白玉樓(백옥루)의 永遠(영원)한 졸음에 들었나이다. 其後(기후) 金娘(김랑)은 破鏡(파경)의 紅淚(홍루)에 속절없이 羅衿(나금)을 적시다가 斷然(단연)히 志(지)를 決(결)하고 一生(일생)을 獨身(독신)으로 文學(문학)과 音樂(음악)에 보내리라 하여 어떤 獨逸宣敎師(독일선교사)의 紹介(소개)로 伯林(백림)으로 向(향)하던 길에 今次(금차)의 難(난)을 遭(조)한 것이로소이다. 黃海中(황해중)에서 不歸(불귀)의 客(객)인 된 그 西洋婦人(서양부인)은 即(즉) 金娘(김랑)이 依託(의탁)하려던 獨逸婦人(독일부인)인 줄을 이제야 알았나이다. 娘(낭)은 言畢(언필)에 潜然(잠연)히 淚(루)를 下(하)하고 鳴咽(명인)을 禁(금)치 못하며 나는 고개를 돌려 주먹으로 눈물을 씻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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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某氏(모씨)여, 朝鮮(조선) 사람은 某氏(모씨)의 夭逝(요서)를 爲(위)하여 痛哭(통곡)할지어다. 槿花半島(근화반도)의 高麗(고려)한 江山(강산)을 누가 있어 咏嘆(영탄)하며 四千年(사천년) 묵은 民族(민족)의 胷中(흉중)을 누가 있어 읊으리이까. 山谷(산곡)의 百合(백합)을 보는 이 없으니 속절없이 바람에 날림이 될지요, 柳間(유간)의 黃鶯(황앵)을 듣는 이 없으니 無心(무심)한 空谷(공곡)이 反響(반향)할 따름이로소이다. 우리는 이러한 天才詩人(천재시인)을 잃었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라 恨歎(한탄)한들 미치지 못하거니와 幸(행)여나 마음 있는 누가 그의 무덤 위에 한 줌의 꽃을 供(공)하고 한 방울 눈물이나 뿌렸기를 바라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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曙色(서색)이 窓(창)에 비치었나이다. 하늘과 땅이 온통 雪白(설백)한 中(중)에 永遠(영원)의 沈黙(침묵)을 깨뜨리고 우리 列車(열차)는 數百名(수백명) 各種人(각종인)을 싣고 헐덕헐덕 달아나나이다. 이 列車(열차)는 무슨 뜻으로 달아나고 車中(차중)의 人(인)은 무슨 뜻으로 어디를 向(향)하고 달아나나이까. 봄이 가고 겨울이 오니 꽃이 피고 꽃이 지며 밤이 가고 낮이 오니 해가 뜨고 달이 지도다. 꽃은 왜 피고 지며 해와 달은 왜 뜨고 지나이까. 쉬임 없이 天軸(천축)이 돌아가니 滿天(만천)의 星辰(성진)이 永遠(영원)히 맴돌이를 하도다. 저 별은 왜 반짝반짝 蒼穹(창궁)에 빛나고 우리 地球(지구)는 왜 해바퀴를 싸고 빙글빙글 돌아가나이까. 나라와 나라이 왜 적었다 컸다가 있다가 없어지며 人生(인생)이 어이하여 났다가 자라다가 앓다가 죽나이까. 나는 어이하여 났으며 金娘(김랑)은 어이하여 났으며 그대는 어이하여 났으며 나는 무엇하러 小白山中(소백산중)으로 달아니고 그대는 무엇하러 漢江(한강)가에 머무나이까. 나는 모르나이다, 모르나이다.
 
174
그러나 하고 많은 나라에 나와 그대와가 어찌하여 한나라에 나고, 하고 많은 時期(시기)에 나와 그대와가 어찌하여 同時(동시)에 나고, 하고 많은 사람에 나와 그대와가 어찌하여 사랑하게 되었나이까. 나와 金娘(김랑)이 어찌하여 六年前(육년전)에 만났다가 헤어지고 黃海(황해)에서 같이 죽다가 살아나고 이제 同一(동일)한 車室(차실)에서 마주 보고 談話(담화)하게 되었나이까. 나는 모르나이다. 모르나이다. 그대를 腹中(복중)에 둔 그대의 母親(모친)과 나를 腹中(복중)에 둔 나의 母親(무친)과는 서로 그대와 나와의 關係(관계)를 생각하였으리까. 腹中(복중)에 있는 그대와 나와는 서로 나와 그대를 생각하였으리이까. 그대와 나와 初對面(초대면) 하기 前日(전일)에 그대와 나와는 翌日(익일)의 相面(상면)을 期(기)하였으리이까. 그대와 나와 初對面(초대면)하는 日(일)에 그대와 나와의 翌日(익일)의 愛情(애정)을 想像(상상)하였으리이까. 서로 생각도 못하던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者(자) ── 그 무엇이며 서로 제 各各(각각) 제 境遇( 경우)에 자라던 사람과 사람의 맘을 서로 交通(교통)케 하는 者(자) ── 그 무엇이리이까. 나는 모르나이다, 모르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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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케라. 우리가 가장 멀게 생각하는 亞弗利加(아불리가)의 內地(내지)나 南美(남미)의 南端(남단)에 휘파람하는 靑年(청년)이 나의 親舊(친구)가 아닐는지. 뽕 따고 나물 캐는 아리따운 處女(처녀)가 나의 愛人(애인)이 아닐는지. 나는 모르나이다. 모르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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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金娘(김랑)과 나와 서로 對坐(대좌)하였으니 兩個(양개)의 靈魂(영혼)이 제 말대로 鼓動(고동)하나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微妙(미묘)한 줄이 萬人(만인)의 맘과 맘에 往來(왕래)하니 이 줄이 明日(명일)에 甲(갑)과 乙(을)과를 어떠한 關係(관계)로 맺아 놓고 丙丁(병정)과 戊巳(무사)와를 어떠한 關係(관계)로 맺아 놓으리이까. 나는 모르나이다, 모르나이다. 金娘(김랑)과 내가 將次(장차) 어떠한 關係(관계)로 웃을는지 울는 지도 나는 모르나이다, 모르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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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는 明日(명일) 일을 豫想(예상)할 수 없고 瞬間(순간) 일을 豫想(예상)할 수 없나이다. 다만 萬事(만사)를 造物(조물)의 意(의)에 付(부)하고 이 列車(열차)가 우리를 실어가는 데까지 우리 몸을 가져가고 이 靈魂(영혼)을 끌어가는 데까지 우리는 끌려 가려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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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一九年十一月《靑春》第九號 ~ 十一號 所載
【원문】어린 벗에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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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李光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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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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