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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선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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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2
채만식
1
강 선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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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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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삼준(三俊)은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조반 수저를 놓으면서 이내 일어 서, 기름 묻은 작업복 저고리를 떼어 입고, 아낙은 벤또 싼 보자기를 마침 들려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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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목에서, 세살박이 손자놈을 안고 앉아 밥을 떠넣어주고 있던 강선달 이, 아들의 낯꽃을 보고 보고 하다, 짐짓 지날말처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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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널두 늦게 나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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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센트하며 김만경(金萬頃) 그 등지 농민의, 알짜 전라도(全羅道) 사투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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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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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준은 얼굴과 대답 소리가 모호하면서, 무얼 딴 생각을 하느라고 우두커니 한눈을 팔고 섰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하기는 하려면서도 옆에서 보기 에도 민망하도록 덤덤히 섰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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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일랑 이노고리가 있드래두, 직공들끼리 하게 하구서, 일찍 나오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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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못해, 아낙이 거들음을 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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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삼준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기색이 시무룩하고 좋지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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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은 더욱 마음에 불안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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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도 있구 하니깐…… 뫼시구 나가서 차표두 끊어드리구, 재리두 잡아드 리구 하자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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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을, 강선달이 질색하여 며느리의 말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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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정거장으넌 나와서 무얼 허냐?…… 아, 나 저녁 일찌감치 먹구서, 츠은츤이 나가서, 지대리다가, 차표 사 각구, 차 타먼 구만이지, 아 무엇허러 외왼종일 고된 일헌 사람이 날 바래다 준다고 또 정거장까장 나온담 말이야? 아예 그럴라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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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그래두 모서다 드려예지, 아버님 혼잔 못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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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걱정 말래두 그러냐?…… 그러구, 정거장으 오구가구 허넌 즌차삯 허구, 입장표값허구, 것만 히여두 돈이 이십 전인디, 야덜아 글씨, 돈 이십 전이 뉘 애기 이름이냐? 돈얼 그렇게 함부루 쓰먼 못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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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샌 젊운 사람두 찰 타기가 고생스런데 어떻게 혼자 나가시서 타신다 구…… 접때 올라오시믄서두 밤새두룩 서서 오시느라구 욕을 보섰드라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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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두 댕길라더냐, 고까짓 것 하룻저녁 좀 서서 가먼 어쩔라데야? 갱기찮다, 갱기찮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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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강선달은, 빠진 아랫니 새로 말과 침이 한꺼번에 새어 흘러서, 싯하고 들여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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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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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엉 내려가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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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새삼스런 말을 또 묻는다. 찡그린 듯한 이맛살이며, 말 운이, 약간 성화스런 무엇조차 없지 않다. 강선달은 그러나 심상하고서, 별로 대답도 하려고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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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때기에다 밥알을 다래다래 쥐어바른 어린 놈이 저의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발딱 일어나더니 비척거리고 제 아범한테로 쫓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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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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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아랫도리를 걸싸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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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콧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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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범이 나무라던 것이나 어린 놈은 도리어 눈웃음을 치면서, 도로 비척거 리고 달려와 할아버지의 무릎에 가 털썩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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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은 하도 귀여 못하겠다는 듯이, 어린 놈을 들여다보고 같이 웃으면 서, 수탉 발목 같은 손가락으로 콧물 흐른 것을 훑으려 자기 버선바닥에다 쓱 씻는다. 그러고는 연신 어린 놈을 어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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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우리 강아지새끼 보고 자퍼서 어쩌까?…… 오널 저녁으 네리가먼 우리 강아지새끼 보고 자퍼서 어쩐담 말이여? 으응? 눈으가 사암삼 밟힐 틴디 보고 자퍼서 어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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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며느리가 왜 아니냐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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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놈이나 데리구 노시믄서 오래애오래 좀 기시들랑 않으시구서…… 아버님은 화로가에다 엿 붙여놓구 오섰나 봐?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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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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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이 아들과 며느리를 번갈아 보면서, 계제삼아 또 발명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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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젤 갑갑히서 그런다, 갑갑히서 그리여!…… 아, 눈만 뜨면 외왼종일 들루 나가서 살구 허던 사램이, 아 이 좁운 집안으서 밤이나 낮이나 우두커니 들앉어 있을랑개, 속으서 갑갑징이 나서 살 수가 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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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갑갑하시기두 하실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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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갑하시서 그러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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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준이 버럭 아낙을 것지르면서, 눈까지 흘긴다. 이를테면 부친한테 못하는 화풀이를 아낙에게 미어다 부딪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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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은, 그래서 같이 성구지 않고 비깃이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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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 모르잖아 알아요!…… 어서 내려가시서 일하시구 싶어서 그러시는 줄 다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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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진 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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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준이 음성을 도로 부드럽게 하여, 부친더러 원정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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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인전, 그 일 좀 그만 하시구, 편안한 영감님 노릇 좀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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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 너두 딱헌 소리두 다 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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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 모레가 칠십인신데 그 흉악한 촌구석에서, 잘 잡숫지두 못하지수, 잘입지도 못하시구, 육장 그 고된 농사일만 하시구 기시니, 그럼 자식된 맘에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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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두 내가 기운이 아주 빠져서 일 감당을 못허게 생깄으먼사 쯧, 네말두 괴이찮얼 티지야만, 아직 이렇게 저엉정헌디, 아 그, 심심삼어서 일 좀 허기루 어쩌칸디 그러냐? 그러나마 칠십평생을 일루 살아온 이 애비 아니냐? 어띠서 그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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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집안에 아무두 일 감당을 해나갈 사람이 없다면 또 모르죠! 아, 형수가 있구 영호(永浩)놈이 올에 스무 살이니 장정 아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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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란, 삼준의 죽은 맏형의 맏아들이다. 그애는 시골서 상일을 하고, 다리 병신 둘째아이 병호(丙浩)는 삼준이 데려다 가게지기를 시키고 있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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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겨우 일곱 말지기에 밭이나 한 삼천 평 된다믄서, 그만 농살, 형수가 영호놈 데리구 휘여잡아 나가지 못해요? 또오, 둘째형이 있으니 오면 가면 보살펴 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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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넌 속내평얼 모르닝개 그런 소리럴 허넝가 부다만, 그 느 형수라넌 아씨 때미 내가 속이 지러 썩넌다! 과부 된 핑계허구서, 농사야 집안 살림살 이야 모다 모른 체허구넌 절루 불공허러 댕기기가 일이구!…… 그놈 영호넌 자식이 쓰기넌 쓰겄어! 몸두 실직허구, 부지런허구, 속두 가중커리구…… 그리두넌, 아직 나이가 어려놔서, 무얼 알어야지? 농사짓넌 것두 물리가 나야 허넌 벱인디, 아직 그럴 낫세가 되였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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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드래두 어디 가서 태산을 떠오는 일 아니구, 거저 모른 체하시구 내버려 두시면, 다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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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른 체허구 내빼리 두어 부아라! 농사허며 집안 살림이며 쥑이 되넌지 뱁이 되넌지 몰른당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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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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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이, 아들 내외가 그대도록 만류하는 것을 듣지 않고, 분에 넘치는 호강도 다 마다하고 부득부득 고향으로 내려가기로만 고집을 세우는 것은, 이유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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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은 미상불 자기 말따나, 농사라든지 집안 살림이라든지가, 두루 마음이 뇌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것만이라면야, 가령 농사만 하더라도, 인제는 가을걷이밖에 남지 않았으니, 웬만큼 자기가 아니 더라도 큰 손자가 영호가 저 혼자서 넉넉 해치울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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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방금 며느리가 하던 말대로 어서 내려가서 일이 하고 싶어서…… 물론 그렇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단순히 일이 하고 싶어서만 어서 바삐 내려가 지를 못해 앨 쓰는 것도 또한 아니었다. 아무리 일이 하고 싶어도 손발이 저리기로서니 한가을쯤 그걸 못 참을 바 없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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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갑하다는 거도 일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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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거의 하루같이, 아침 어둘녘부터 온종일 날이 저물 도록 들에서 살던 영감이다. 넓은 들에서 넓은 하늘 아래서, 활개를 펴고 맘대로 호흡하며 맘대로 일하고 살던 영감이다. 그리던 영감이 하루아침, 이 옹색스런 속에 와서 들박혀 있으려니 응당 갑갑증이 날 노릇이었다. 뜰이라야 두 걸음만 걸으면 세 걸음째는 앞 판장이 이마에 가부딪친다. 좌우는 이웃집 뒷벽이 답답히 가슴을 누른다. 하늘은 처마와 처마 사이로 손바 닥만큼 올려다보인다. 하루의 태반을 좁고 더운 방구석에서 누웠다 앉았다, 서성거렸다 해야 한다. 강선달은 그래서, 이건 바로 전중이 살기보다 더하 다고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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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암만 그렇더라도, 꾸욱 참고 견디자고 들면야 결단코 못할 것은 아니었다. 이 밖에도, 구실은 얼마든지 많이 있었다. 시골로 내려가겠단 말이 날 적마다 번번이 이유가 달랐다.
 
60
물 한 지게에 5전씩 내고 사먹는단 말에 강선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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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 원, 오 전이먼 엽전(葉錢) 두 돈 오 푼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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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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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넨 언덕 꼭대기가 돼서 그게 정한 시센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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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심상히 며느리는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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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서울언 물까장 다 사먹넌다구 소문이사 들었더니라만 원, 물 한지게여 돈이 두 돈 오푼이라니?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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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두 이 꼭대기꺼정 져다 주느라구 힘드는 일 생각허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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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가 저렇게 돈 아깐 중얼 몰라서 어찌끄나! 돈이 두 돈 오 푼이면 야야, 십 년 저짝만 히여두 논이 상답(上畓)으루 한 평이다, 한 평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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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시방은 돈이 옛날보담 흔해지지 않았어요,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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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 돈이 흔허기넌 말구 새금파리 쪼각으루 맹글어 쓴들, 물 고까짓것 한 지게여다 두 돈 오 푼얼 주구 사먹다니, 손복(損福)허겄다, 손복허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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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아버님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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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넌 그런 물 먹구 못 살겄다. 어서 도로 네리가야겄다! 에이, 무선 세생이다!…… 그럴래서넌 큰 방죽 하나만 각구 있으면 당장 만석꾼이 부자가 되거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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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디, 물값인가요? 져다 주는 값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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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 치나 미여 치나 일반이지야!…… 참 사람 못살 고장이다!…… 나넌 죄(罪)로 가까 무서서 그런 물 못 먹겄다! 어서 도로 네리가야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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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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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준도 공장에서 돌아오고 하여 부자 나란히 앉아 저녁을 먹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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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일언 양철동우럴 두 개만 사각구 오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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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강선달이 아들더러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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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철동이요? 무엇에 쓰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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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지게여다 두 돈 오 푼씩 주구 사먹넌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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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길으실려구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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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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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만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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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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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길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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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못 질어?…… 야야, 내가 시방두 이백스무 근(斤)짜리 나락 한 섬얼 지구, 십리씩얼 댕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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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이야 있으시나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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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가 옆에서 거드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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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신 아버님을 물 길으시게 하자구 모셔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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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히 가셔야, 자식 된 즈이가 다아 맘에 질겁구, 민망한 생각이 들지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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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느가 날 그렇게 위히여 주넌 정성언 반갑다만서두, 아니, 눈 멀뚱 멀뚱 뜨구 앉어서 물 한 지개여다 두 돈 오 푼씩 주구 사먹넌 걸 그냥 보구 있으람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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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마 즈이가 한 달 물값이나 한 삼 원 내게두 군색한 살림살이라믄 몰라두, 그렇잖은 댐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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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넌 손복허까 무서서 그런 물 먹구 못살겄다! 어서어서 도로 네리가야 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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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옴곰 무슨 생각을 하면서 밥만 뜨고 있던 삼준이 문득 조용한 음성을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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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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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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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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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머니 일을 생각하면 철천의 한(限)이 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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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삼준은 잠깐 말을 끊었다 이윽고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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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일찍 부모 슬하를 뛰쳐나와서 종적두 소식두 없이 객지루 떠돌아 다니느라구, 지질히 애가 밭게 해드리잖었어요? 그러다 필경은 임종두 못해드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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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준이 목이 메어 또 말을 끊는다. 눈에는 눈물도 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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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때라두 편안히 모셔 드리지를 못하구서, 끝끝내 그 모진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시게 한 일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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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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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도 창 연한 기색으로, 그러나 쓸어 덮듯 아들의 말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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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 와서 그런 말 일르니, 상심만 되지 소용 있냐? 고생허다가 후분(後 分) 못 보고 그냥 죽은 것두, 다아 자기 팔자지! 내남 읎이, 세상 일이 다아 운수 소간이요, 타구 난 팔자거니 허먼 구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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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한테 못 해드린 대신, 아버지 한 분만이라두 제가 뫼시구, 제 정성, 제 힘 및는껏 편안히 기시게 하자는 노릇인데, 벌써버틈 물을 길으시네 무얼 하시네 하시니, 어디 뫼셔 온 보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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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덜 그 맘 하나먼 구만이여야! 맘 하나먼 구만이여야!…… 나넌 아무것두 더 안 바랜다!…… 느가 시운(時運)얼 타서, 먹구 살기나 쪼들리잖구, 그러먼서 단돈냥이라두 밀려가먼서 살구, 그러먼 나넌 구만이여야! 존 음식, 비단옷, 그런 건 내게 당치두 안히여야!…… 내가 아읍 살버텀 쪽지게럴 지구 나무럴 히여다 때구, 열두 살버텀 장정덜 틈으 가 찡겨서 지심얼맸다! 그렇게 살아온 칠십평생이여! 그렇게 칠십평생얼 살어온 내가 느닷읎이 비단옷이 어디 당헌 것이며 끄니마닥 괴기반찬으다가 반주(飯酒)가 어디 당헌 것이냐? 물 한 지게여 두 돈 오 푼씩 주구 사먹넌, 이 대처(大處)서 오래 산다께 어디 당헌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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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아버님두!…… 오래두룩 그렇게 일만 하시구 고생으루 지나섰으니깐, 더구나 인전 편안히 좀 호강을 하서야죠!”
 
108
며느리의 말이다. 강선달은 커다랗게 고개를 젓는다.
 
109
“모르넌 소리다! 옛말으두, 송충이는 솔잎얼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못 산다넌 벱이니라!…… 그러구, 그러구 내가, 느가 날 위히여 주니라구 돈 함부로 쓰넌디 구만 아주 질색얼 허겠다! 가만히 보먼, 나때미네 궈년시리 안쓸 돈얼 디리읎이 써!”
 
110
이렇게 강선달은, 아들네가 돈을 함부로 쓰는 것, 분에 맞지 않는 호강을 시키려 드는 것, 이런 것도 제각기 내려가고 싶게 하는 이유의 한가지씩이었다.
 
111
그야 물론, 한편으로는 두루 다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12
아들 삼준이, 시골 농토(農土)에 파묻혀 농사꾼으로 평생을 마치기를 원하지 않고, 부모 몰래 집을 나간 것이, 보통학교를 마치던 봄이요 지금으로부터 십판 년 전이었다.
 
113
그 뒤로 십삼사 년을 묘연히 종적이 없었다. 집안에서는, 분명 어디 가서 죽었거니 했었다.
 
114
그러던 삼준이, 오 년 전, 그의 모친의 초상마당으로 푸뜩 나타났었다. 집을 나가면서 무얼로든 한 가지 성공을 해야만 두번 다시 고향을 찾으리라 고, 이를 갈아 맹세했던 그는, 과연 그 맹세를 헛되이하지 않았었다. 경성에서도 유수하다는 어떤 인쇄소의 기계과장(機械課長)이라는 지위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115
아낙도 잘 얻었었다. 같은 그 인쇄소의 제본공(製本工)으로 다니던 여잔데, 저희끼리 마음이 맞아서 결혼을 했었다. 인물은 그리 보잘것이 없어도 첫째 왈 사람이 퍽 사근사근하고 붙일성이 있으며, 겸하여 살림규모가 대단 했다. 그래서, 이건 작년 봄 일이지만, 친정집이 몹시 가난하던 끝에 뒤받쳐주는 사람을 잘 만나 함경도(咸鏡道)로 가서 정어리를 한 것이 수를 잡아 일조에 힘을 퍼게 되자, 돈을 삼천 원인가 타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사고, 몇백 원 남은 걸 가지고는, 장소가 마침 적당하여 구멍가게를 내고 했었다. 되라는 사람은 되기로만 마련이더라고, 시험삼아서 낸 구멍가게가 순식간에 번창을 하여, 불과 일 년 반인데, 지금은 가게 수입이 삼준의 월급 갑절도 넘을 만큼 버젓한 것이 되었다.
 
116
삼준 내외는 그동안 누누이 부친 강선달을 제네가 모시겠노라고 직접 혹은 중형 재준을 통하여 졸랐으나 강선달은 좀처럼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가, 지나간 칠월 백중(白仲)에야, 농사일이 너끔함 계제에, 잠깐 다녀가려니 하고 올라온 것이, 여지껏 그만 붙잡힌 모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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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은 올라와서 눈으로 보자니, 생각터니보다도 훨씬 더 흡족하고, 따라서 마음에 기쁘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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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서 죽은 줄 알았던 막동자식이 이렇게 잘하고 살아, 저희끼리 오다가다 만났을망정 그 가속이 대단히 현숙해. ── 소 같은 큰며느리나 촉새 같은 둘째며느리에다 대면, 이건 바로 어른 하고도 어른이었다.
 
119
가볍고 시원한 비단옷을 입혀 주어, 칠월 복중(伏中)인데 솜버선까지 신겨 주지를 않는가. 촌 농군이야 입동(立冬)이 지난 뒤에도 얼마를 있다 겨우 버선 한 켤레를 신으면, 설이나 혹시 새걸 갈아 신을까, 그러고는 이른봄 못자리를 하는 날 버선을 벗으면 다시 입동 후에야 비로소 신는, 그 버선이 아닌가.
 
120
끼니마다 새로 지은 밥에, 고기나, 하다못해 생선 꽁댕이라도 솜씨 내서 장만하여 밥상이 어설프지 않고, 반주를 떨어뜨리지 않고, 가끔가다 냉면이니 우동이니 하여 별식(別食)을 시켜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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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갑하고 심심해 할까 봐서, 며칠 걸러큼씩 며느리가 모시고 나가, 서울 장안을 고비샅샅이 구경을 시켜주고.
 
122
이런 팔자 편한 영감님일 데라곤 없었다.
 
123
강선달의 마음에도 다 좋고 즐거웠다. 노상이 싫거나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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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칠십평생을 흙에 묻혀서 더불어 살아온 강선달에게는 그 모든 호강이 아무리 해도 몸에 가 차악 안기는 줄을 모르겠었다.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느낌이었다.
 
125
옷감도 휜치르르하고, 또한 뜨듯해서 좋기는 좋으나, 어쩐지 옷이 살에 가붙지를 않고 엉성한 것 같은, 마음 어색스럼이었다. 그리고 무엇인지 불안스러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간절히 고향집으로만 내려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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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27
“어서 가 부아라! 시간으 만도(晩到)되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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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웃목에 가 충그리고 서 있는 아들더러 강선달이 재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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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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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준은 건성으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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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가, 남편과 시아버지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깜작깜작 무얼 생각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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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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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긴하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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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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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이한테 지시는 심 치시구, 인제 며칠 남지두 않었구 하니깐 말씀예요, 추석(秋夕)이나 쇠시구서 내려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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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못써 못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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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은 엄살스럽게 손과 얼굴을 서얼설 내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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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초롬 올라오신 길에, 추석이나 즈이허구 겉이 쇠시구서 내려가시믄, 즈이두 객지서 외롭잖구 헐걸……” “갔다가 쉬 또 오마!…… 아암, 자주 오명가명 허구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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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려가시서 추석 쇠시군, 곧 또 올라오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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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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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아니 오시믄, 뫼시러 내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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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곧 올라오마!…… 그렇게 오느라 가느라 허자니 노수가 자꾸 들어 서 걱정이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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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은 문득 한 말이 있었으나, 아주 와서 있는 게 아니고 가끔가끔 며칠씩 다녀 내려가고 하는 것은 차라리 해롭잖은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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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일곱시, 강선달은 호남선(湖南線) ××역(驛)에서 무사히 차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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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정거장이 우선 반가왔다. 모두가 눈에 익고 친숙했다. 서로 누가 누군지 모르는 사이건만, 역엣 사람들이 다 임의로운 것 같고, 혹 무슨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별로이 허물치 않을 것 같았다. 역 앞에 이루어진 조그 마한 저자의 가게하며, 사람들도 역시 그런 것 같았다. 내려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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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은 무한 마음이 즐거우면서, 삼준이 내외가 이것저것 많이 사서 짐매어 준 짐을 멜빵 걸어 묵직하니 짊어지고 집 동네를 향하여 걸었다. 소로 (小路)로 가면 시오리요 신작로로 가면 이십리다. 강선달은 가까운 소로를 버리고, 도는 신작로로 갔다. 선산(先山)과 논이 있는 곳을 지나가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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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까지 거진 오느라면 신작로 옆으로 조그만한 야산(野山)이 있다. 이 야산 아랫자락으로, 따로 떨어진 삼천 평 가량 되는 산판(山坂)이 강선달네 선산(先山)멧갓이다. 그리고 그 선산과 연달아서 일곱 마지기 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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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은 대대로 물려내려오던 산하답(山下畓)이다. 한때 궁하다 못해 팔아 버렸던 것을 그 뒤에 자작농 창정(自作農創定)으로 도로 내 차지를 만들었었다. 그런 만큼 강선달에게는 더욱 소중하고 재미가 곡진한 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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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은 논두덕에 가 멈춰 서서 논을 내려다본다. 한 달 남짓했건만 잃어 버렸던 것을 다시 찾은 것같이 반갑고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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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박한 봉답(奉畓)이 되어서 웬만큼 거름을 하지 않고는 양석 소출(兩石所 出)이 어려운 논이지만, 금년은 간곳마다 풍년이라, 역시 탐스런 볏목이 처억척 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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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도 흐뭇한지 몰라, 강선달은 혼자서 싱그레 웃는다. 인제 며칠 더 있다가, 저걸 죄다 베어서 등짐을 해서 집 마당에다 그득히 가려놀 생각을 하니, 자꾸만 입이 흐물흐물하여 견딜 수가 없다. 역시 이렇게 일찌감치 내려오기를 잘했다 싶었다. 서울 아들네의 살뜰한 봉양과 그 호강도 좋지만, 암만해도 이 재미만은 못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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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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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은 무심코 이렇게 논 이랑을 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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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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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이랑 다 그대로 있다. 한 이랑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고개를 끄덕끄 덕하다가 비로소 자기의 실없음을 깨닫고는, 벌쭉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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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도록 논을 보고 나서는, 그 다음 멧갓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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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입시로, 마누라의 무덤이 있다. 영호가 그새 벌써 말끔히 벌초(伐草)를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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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은 무덤 앞으로 가까이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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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삼준이안티 갔다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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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산 사람과 안사하듯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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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덜 허구 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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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조금 있다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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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멈두 한 십년만 더 살지 그맀넝가? 십 년만 더 살었으먼 삼준이 덕두 보고, 실컷 호강을 히였지! 가아두 애여 맘으 걸리넝가 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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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조금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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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더러, 거그서 즈허구 항깨 살자구 만류허데만, 쯧 네리왔네! 다아 편허구 좋데만 암만히여두 여그만 못헝 것 같덩만! 그리서 또 가마구 허구, 네리오넌 길이네, 시방…… 무얼 담뽁 사주어서, 이렇게 한 짐히여 지구 정거장으 네리서 시방 집으루 가넌 질이네. 그런 중이나 알라구, 할멈 무덤으 댕겨가니라구, 이 질루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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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처량하다거나 간절한 음성도 아니요, 예사 그저, 영감이 마누라더러 이야기하듯이, 오히려 구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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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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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달은 발길을 돌이키려다가 뒤미처 생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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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준이가 내년찜, 할멈 비석(碑石) 히여 신다구 그러데! 그리서, 그리라구 그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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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談[야담] 1942년 2월호 ; 집, 1943>
【원문】강선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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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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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7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