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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生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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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채만식
1
生 命[생명]
 
 
2
오월이는 물러나앉아서 옷을 다스리고도 일어나 나가진 않고 머뭇머뭇 머뭇거린다. 불을 꺼버린 방안은 눈을 잃은 것같이 어둡다.
 
3
서방님은 이부자리 속에서 잠깐 부스럭하더니, 이내 아무 기척도 않고 죽은 듯이 누워 있다.
 
4
방안은 바스락 소리도 없이 조용하다. 밤이 아직 깊지 않건만 집안은 교교하다. 다만 멀리 텃논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새삼스럽게 아득히 들린다.
 
5
오월이는 입술까지 나와서 뱅뱅 도는 말을 도로 삼킨다. 그래도 송구스러워 말이 와락 나와지지를 않던 것이다.
 
6
만일 밝은 대낮이라든지 또 불을 켰다든지 해서 사방이 환하고 얼굴이 마주보이고 한다면, 오월이도 뉘 앞이라고 조심스런 상전한테 입을 벌려 말을할 그런 생심이야 언감히 먹지도 못했을 것이다.
 
7
미상불 그새 여러 날을 두고 조용히 만날 틈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하겠다, 알려드려야 하겠다고 걱정은 했지만, 딱 잡아 그리 하리라고 결심은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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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했었다. 그러하던 차에 오늘 밤에 마침 또 나왔다가 이렇게 물러앉으면서 문득 생각하니, 어두운 것이 졸지에 기운을 돋구어주는 성싶어, 그래 다부진 마음을 먹어본 것이다.
 
9
“서방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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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는 마침내 쥐어짜듯 가느다랗게 소리를 낸다. 그러면서 손은 무심결에 도독히 불러오른 배를 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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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태(胞胎)한 지 이미 넉 달 ── 넉 달이나 된 깐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은 편이나 그래도 손으로 만져보면 옷 위롤망정 완구히 부른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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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냉큼 들어가 버리지 못허구, 저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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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들릴까 봐서 숨죽인 목소리지만 무섭게 거세었다.
 
14
오월이는 그만 무참해서 몸을 움칠하고 황망히 뒷문으로 나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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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은 성냥을 더듬어 확 그어 석유좌등에 불을 켜면서 뒷문으로 나가는 오월이의 치마꼬리를 힐끔 돌아다보다가 이맛살을 찡그리면서 캑하고 놋타 기에 마른침을 뱉는다.
 
16
서방님은 그새 반 년이나 두고 십여 차례나 이 오월이를 품자리 속에 끌어 들였지만 그런족족 한번도 이뻐한 법은 없었다. 이뻐하기는커녕 그러고 나서는 구역질이 나게 불쾌해했다.
 
17
서방님은 아씨와 공방이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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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열여섯에 장가를 들었는데, 아씨는 네 살 맏이인 스무 살이었었고 오월이는 그때 열두 살에 아씨의 몸종(侍婢)으로 따라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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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서방님과 아씨는 금실이 퍽 좋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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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한지 사 년 되던 해에 딴살림을 나앉았다. 그해 늦은가을에 아씨는 왜목불알이 대롱대롱하는 아들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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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때부터 서방님은 드는 칼로 벤 듯이 싹 돌아앉아 버렸다. 지금 그 애기가 거진 세 돌을 바라보게 되었어도 서방님은 공방이 풀리기는커녕 점점 더해서 요새는 밥상까지 사랑으로 내어오래다가 먹곤 한다.
 
22
아씨며 큰댁에서는 금실 좋던 끝에 옥동자를 난 기쁨이나 막내손자를 본 경사로운 생각은 잠시요, 근심에 싸여 공방풀이하기에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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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다는 무당이며 점장이며 명두면은 다 찾아다니고 불러오고 해서 하라는 대로는 죄다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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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공방은 풀리지 아니하고 점점 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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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은 아씨가 애기를 밴 때부터 보기 싫은 생각이 나기 시작했었다.
 
26
더구나 만삭이 되어 북통같이 큰 배를 보고는 몸서리를 쳤다.
 
27
아씨는 얼굴도 밉게는 생겼었다. 말처럼 기다란 얼굴이 바탕은 푸르족족한게 표독스럽고 입술은 상스럽게 두꺼웠다.
 
28
이러한 얼굴이 임신을 해서 만삭이 되자 마구 뒤틀리고 부숭부숭한 게 보기에도 차마 숭했다.
 
29
서방님도 그때에 어찌하다가 아씨와 마주치면 얼굴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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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해산을 하고 나서 배는 없어졌어도 머리가 쏙 빠져 가뜩이나 산후의 추한 얼굴은 더욱 꼴숭업게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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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이 지나고 이태가 지나 아씨의 본 얼굴은 회복되었어도 서방님의 돌아앉은 마음은 되돌아앉지 않았다. 본 얼굴이라는 것이 원이 별 수 없는 그얼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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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은 나이 이제는 스물한 살이다. 열여섯 살에 갓 장가를 들어 멋이라는 것은 모르고 안해를 한편 동무처럼 여겨 미추를 분간 안하고 대할 나이는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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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공방풀이를 한다고 아무리 무당이며 경장이를 시켜 ‘귀신’으로 하여금 그 마음을 돌리게 하잔들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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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은 팔팔하게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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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다가 어려서 이성을 알았다. 또 부모의 덕택으로 용과 삼을 많이 먹었다. 정력이 전신에 차고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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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직 외입을 하러 나갈 담보는 생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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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어느만큼까지는 마음대로 쓸 수가 있고 보통학교를 이삼 년이나마 다니느라고 머리도 깎기는 했고 또 마을에서 매일 다니는 자동차로 오십 리만 나가면 기생이며 무어며가 있는 대처가 있다. 그렇게 멀리 나가지 않아도 마을에 술장수 여편네가 시글시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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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라기를 단순히 자랐기 때문에 그는 이 다음에는 몰라도 아직은 그런 곳으로 발을 두를 담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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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 그리 해볼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으나 겁이 나고 무서워서 주저앉아 버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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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월이가 애꿎이 그 밥이 된 것이다.
 
41
작년 겨울이었었다.
 
42
서방님이 사랑채에서 기침을 콜록콜록하는 것을 아씨는 행여 자기의 정성을 알아줄까 하고 알심을 부리느라고 부랴부랴 식혜를 달여서 일부러 이슥한 뒤에 오월이를 시켜 사랑으로 내어보냈다. 서방님은 깊어가는 겨울밤에 잠을 잃어버리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판이다.
 
43
그는 들어오는 오월이를 힐끔 보았다. 그는 아씨만 못잖게 추물로 생긴 오월이를 그새까지는 한번도 눈 거듭떠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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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사람이 들어오는 인기척에 그렇게 힐끔 한번 보았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다시 한번 짯짯이 바라보던 것이다. 오월이가 식혜 그릇을 들고 바싹 옆으로 와서 놓는 것을 서방님은 손목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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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는 처음은 놀랐고 다음은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터럭 하나만한 힘으로도 항거는 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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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은 석유좌등의 불을 입으로 훅 불어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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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는 영문 모를 순간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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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은 오월이를 내보내고 나서 아직도 퀴퀴하고 쩝쩔한 냄새가 이부자 리에 밴 것이 비위가 역해 연신 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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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영 아쉰 때면 오월이가 사랑방에 나온 틈에 잡아끌었다.
 
50
도무지 말 한마디 하는 법 없었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거듭해갈수록 그는 불쾌한 생각에 다시는 그리하지 않으려니 하고 퉤퉤 침을 뱉으면서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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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새 반 년이나 두고 십여 차례나 그 짓을 해왔다.
 
52
오월이는 처음에는 놀랐으나 차차 길이 들기 시작하면서는 도리어 속이 느긋해졌다. 그는 해맑고 선비다운 서방님을 낮으로나 불 안 껐을 때에 넌지시 보느라면 솔깃하게 정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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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정다운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는 서방님이 처음부터 이내 말 한마디 안 해주고 냉랭한 것이 섭섭했다.
 
54
그러다가 마침내 포태한 줄을 알고 그는 우선 아씨가 알까봐서 겁이 났다. 그러나 일변 또 자랑스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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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밤에는 그 말을 하려고 가까스로 입을 벌렸다가 그만 냉갈령을 맞고 쫓겨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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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는 처음 두어 달 동안은 까마아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오월이가 저녁 상을 내가든지 또 밤에 심부름을 나가서 오래 있다가 들어오는 때 무심코 물어보면 다리를 쳤다고 혹은 자리를 보았다고 그 밖에 그럴 듯이 핑계대는 것을 그대로 곧이들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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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요 한 달지간 오월이의 몸이 이상해진 것을 보고 자기의 포태해본 경험으로 어렴풋이 기수를 채게 되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각별히 오월 이의 태도를 여살펴보았다. 보니 미상불 수상한 것만 드러났다.
 
58
아씨는 마침내 오늘 저녁에 약을 달여 짜가지고 사랑으로 나가는 오월이의 뒤를 밟아 중문 뒤에서 엿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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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가 사랑방 뒷문으로 들어가자 방에서 불이 꺼질 때에 아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도 그새까지는 의심은 하면서도 그게 아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졌었는데 급기야 의심이 정말이 되고 마는 순간 그는 부르르 치가 떨렸다. 그는 와락 사랑방 뒷문 쪽으로 몸이 쏠려나가지는 것을 겨우 겨우 억눌렀다.
 
60
안해는 남편이 어떠한 일을 하든지 그와 마주서서 더우기 사랑에 뛰어나가서 야료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배우기도 했거니와, 그는 남편이 그럴수록 거슬려서는 이롭지 못하다는 침착한 타산을 할 수 있는 여인이었었다.
 
61
그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것을 일부러 견디면서 기다렸다.
 
62
이윽고 문이 다시 환해지면서 이어 열리는 문으로 오월이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때 어둠 속에서 오월이를 노리는 아씨의 얼굴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장정이라도 기색이 되었을 것이다.
 
63
아씨는 오월이를 지나쳐놓고 훨씬 있다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러한 경우에 몸종을 어떻게 다스린다는 것은 시집 오기 전 친정에서 그의 어머니가 또는 오라비댁이 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64
그는 성냥과 손칼을 참겨가지고 집 후원으로 가서 무강나무(槿[근]) 가지를 여남은 개나 골라 끊었다. 침척으로 자판 기럭지만큼씩한 무강나무 가지는 본시 회초리로 많이 쓰이기도 하지만 마침 물이 올라 회창회창한 게 감칠맛이 있다.
 
65
아씨는 회초리를 방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찬찬하게 둘씩 둘씩 잡아 꼬아가지고 양 끝은 풀리지 않게 굵은 실로 창창 동여맨다.
 
66
그냥 미끈한 것도 아니요 군데군데 오톨도톨한 혹이 돋쳐가지고 두 개씩 마주 꼬인 게 매를 맞아본 사람이면 보기만 해도 떨릴 만하다.
 
67
아씨는 마주 꼰 놈 다섯 개를 장만해서 옆에다 딱 놓는다. 그러고는 방안을 한번 휙 둘러본다. 방안에는 자기 혼자뿐이다. 아기는 벌써 침모를 시켜 건넌방으로 자는 놈을 안아다가 뉘게 했었다.
 
68
“오월아!”
 
69
아씨는 그저 천연스럽게 건넌방으로 대고 부른다.
 
70
“네에.”
 
71
오월이의 역시 천연스러운 대답 소리에 뒤이어 문소리가 들린다.
 
72
오월이는 아까 사랑에서 그렇게 무렴을 당하고 쫓겨들어서 이 생각 저 생각에 그다지 영리하지 못한 머리로 막막한 궁리를 하고 있던 참이다.
 
73
말을 좀 해보려고 하는 것을 서방님이 그렇게 마구 머쓰려버리니 이 다음 에라도 다시 더 입을 벌릴 기운은 나지 않는다. 그러니 염치없는 배는 더럭 더럭 불러올 테고 그래서 자연 아씨가 먼저 알고 말게 될 테니 그 일을 어찌하나……
 
74
서방님이 미리 알아서 어디로 보내주든지 무슨 조처를 해주었으면 그 위에 덮을 일이 없으련만 그것은 인제 영영 바랄 수 없는 것, 그렇고 보면 아씨 뿐인데 차라리 아씨한테 다 고해 바치고 말까……
 
75
아무래도 꾸지람과 매는 타둔 것이니 미리서 그래버릴까……
 
76
아씨는 역정도 내고 매질도 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말이 종이요 상전이지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고 시집에까지 데리고 왔으니 말하자면 동기간 진배없는 사이니까 숭허물이 적어서 혹은 지금 걱정하는 대로 그렇게 어려운 고패는 없게 해주실는지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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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래도 차마 어떻게 아씨 앞에서 입을 벌려 말을 하나……
 
78
더우기 아씨는 전과도 달라 시방은 그런 액운을 겪고 계시는데……
 
79
이렇게 목마른 생각을 하면서 무심코 옆에 뉘인 채 색색 숨소리 곱게 자고 있는 어린 아기를 굽어다보느라니 손은 저절로 배가 만져지고 빙그레 입술이 벌어지던 것이다.
 
80
그러자 아씨의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어 총총히 마루를 지나 안방으로 건너왔다.
 
81
안방으로 들어서서 처음에는 몰랐다가 아랫목 가까이서 그는 아씨 옆에 놓인 매를 보고 주춤했다.
 
82
‘웬일일까? 알았나?’
 
83
그는 더럭 의심이 났다.
 
84
“겉문 다아 닫고 안으로 고리 걸어 잠거라, 다아.”
 
85
나직하고 심상한 듯하면서도 아씨의 말소리는 엄하고 안색도 결코 평온하 지는 않았다.
 
86
오월이는 떨리는 다리를 끌고 다니면서 겉문을 일일이 닫아 문고리를 안으로 걸었다.
 
87
오월이가 문을 다 걸어잠그고 웃목에 가 넌지시 서 있는 것을 아씨는
 
88
“여기 와서 앉어라.”
 
89
하면서 회초리 하나를 집어 자기 앞을 똑똑 두드린다.
 
90
오월이는 가리키는 자리에 가서 한 다리를 꿇고 한 다리를 무릎세워 쪼글 트리고 앉는다.
 
91
“바른 대루 말해라.”
 
92
아씨는 패앵팽한 눈살로 소곳한 오월이의 앞이마를 노려본다.
 
93
오월이는 기가 칵 질렸다. 만일 아씨가 매를 보이지 않고 그러고 좀 더 보드라운 목소리로 물었다면 그는 서슴지 않고 활활 불었을 것이다. 하기야 순순히 실토를 했댔자 아씨의 심정이 그대로 사그라질 리는 없는 것이고 차라리 그러한 또렷한 자백이 도리어 아씨의 노염을 더 돋구기는 했을 것이지만.──
 
94
잠긴 목에서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만 꼴깍하고 오월이는 말이 없다.
 
95
휙 짧게 그러나 쟁그랍게 회초리 두르는 소리와 함께 매는 오월이의 볼을 귀까지 얼러 찰싹하고 모질게 패어든다.
 
96
“요년!”
 
97
“아이구!”
 
98
두 입에서 한꺼번에 나오는 두 소리다. 하나는 얼핏 다시 매를 겨누고 하나는 볼을 우디러 올라가던 손이 바르르 떨고 만다.
 
99
여인의 모질게 먹은 마음은 매 끝에 가 사무쳐 오월이의 볼때기는 단번에 손가락같이 물큰 불켜오르고 검붉은 피가 주르르 흐른다.
 
100
일찌기 인류는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요대도록 모질게 미워함을 겪은 적이 드물 것이다.
 
101
아씨가 만일 집정관(執政官) 이었다면 그는 오월이를 단두대로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희광이(斷頭人[단두인])는 직업적으로 오월이의 목을 자를 뿐일 것이요, 아씨도 원수를 이처럼 오밀조밀하게 미워하는 쾌미를 맛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102
바르르 떠는 오월이의 손을 겨누어 갈기는 매는 헛나가서 다시 볼을 파헤친다.
 
103
오월이가 앞으로 푹 엎드러질 때에 아씨는 일어서면서 왼손으로 오월이의 머리채를 감아쥐고 잡아챈다.
 
104
“아씨!”
 
105
“요년!”
 
106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르는 것을 가로막고 매는 또 얼굴을 내려갈긴다.
 
107
“아이구우!”
 
108
오월이는 뼛속에서 우러나는 비명을 길게 빼어 우짖는다.
 
109
“아씨, 살려주세요!”
 
110
“이 소리가 어디서!”
 
111
매는 사뭇 쏟아진다.
 
112
“아씨 아씨, 다아 사뤄요. 다아 사뤄요.”
 
113
“인제? 요년!”
 
114
소리도 한결 높고 매에도 더 힘을 주어 내리갈기면서 아씨는 뇌인다.
 
115
“인제 겨우? 요년! 네 입으로 불잖는다구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이년.”
 
116
아씨는 오월이가 말로라도 끝까지 아니라고 버티었으면 그래도 조그만치는 마음이 편할 텐데 바른 대로 토한다는 데는 더욱 분이 치올랐다.
 
117
필경 회초리가 다 못쓰게 되자 아씨는 손을 잠깐 멈추고 이번에는 두 개를 한데 쥔다.
 
118
“이년 옷 다아 벗어라.”
 
119
“아씨, 살려주세요 아씨이이. 아이구 아씨이이.”
 
120
창자가 녹아서 우러나오는 울음소리다. 위아래를 활씬 벗고 엎드려 매가 아직 내리기 전의 고 찰나에 제웅은 떨며 애원하는 것이다.
 
121
수없이 내리쳐 살을 으끄리고 피를 터뜨리되 터럭 하나의 빈 자리도 피할 길이 없이 된 매서운 매 밑에 엎드린 그 순간은 지옥의 영겁의 고통보다도 차라리 더 클 것이다.
 
122
매는 마침내 쏟아져내린다.
 
123
아씨는 인제는 넋두리도 없이 위아랫니를 악물고 내리치기만 한다.
 
124
휙휙하는 맷소리, 아씨의 가쁜 숨소리, 그리고 오월이의 얕은 신음소리, 이 속에서 오월이의 온 몸뚱이는 회치듯 바수어진다.
 
125
등어리, 엉덩이, 팔, 다리, 젖가슴 그리고 유독 배, 모두 굵은 지렁이처럼 툭툭 불켜올라서는 터진 자리로 피가 솟아흐른다.
 
126
맞는 오월이도 정신이 없거니와 때리는 아씨도 정신이 없이 때린다. 그는 더우기나 발가벗은 오월이의 몸뚱이에서 그 위에 덮친 남편의 몸뚱이의 환영을 보면서 독기(毒氣)찬 힘을 주어 때린다.
 
127
무강나무 매가 다 피고 부러지자 두껍집 위에 얹힌 화류침척을 내려 들고 때린다.
 
128
화류침척이 웬만해서 부러지자 아씨는 달려들어 물어뜯고 꼬집고 머리채를 잡아 내박지른다.
 
129
마침내 오월이는 게거품을 뿜고 기절이 되어 펄쳐졌다. 피투성이가 된 큰 알몸뚱이는 그들먹하게 방 가운데 내던져진 채 꼼틀하지도 않는다.
 
 
130
오월이의 뱃속에 자리잡고 앉은 미미한 한 개의 생명은 어미의 두두룩한 살로다가 무서운 매를 방패삼아 모락모락 자랐다.
 
131
아씨는 결코 오월이를 남편에게서 빼앗아 어디로 치우려 하지 않고서 그대로 두어두고는 질투와 분노를 매질로써 오월이의 살더미에다가 풀곤 했다.
 
132
서방님은 아씨가 아무리 매질을 해도 도무지 모른 체하고 참견을 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세 번이나 오월이를 품자리에 끌어들였지만 여전히 어둠 속에서 말이 없이 자기 할 일만 하고 말곤 했다.
 
133
그럭저럭 여덟 달이 지나고 아홉 달이 거진 되어오는 달이 되었다. 오월이의 배는 이제는 주체할 수 없이 불렀다.
 
134
그는 아씨의 무서운 매와 구박을 받으면서 아씨가 그러면 그럴수록 깊이깊이 뱃속의 생명에 커다란 애착을 느꼈다. 그는 매를 맞을 때에도 배만은 두팔로 안고 돌면서 안 다치려고 애를 썼다.
 
135
그리하다가 마침내 아홉 달이 넘어서 산삭을 한 달쯤 앞두게 되자 그는 더욱 조심과 위협을 느꼈다. 매가 무서운 바는 아니나 만일 그 몸을 해가지고 한번만 더 매를 맞으면 뱃속의 생명은 성치 못할 것을 경험이야 없더라도 어머니의 본능으로 예감이 되던 것이다.
 
136
오월이는 마침내 마음을 굳게 도사려 밤 들기를 타서 사랑으로 나갔다.
 
137
서방님은 커다랗게 숭어운 배를 안고 들어오는 오월이를 미심쩍게 거듭떠 보더니
 
138
“왜?”
 
139
하고 이맛살을 찌푸린다. 오월이는 지금 새삼스럽게 받는 냉대는 아니지만 오늘 밤이야 말고 그것이 뼈에 사무치게 고깝고 안타까와 그 자리에 푹 엎드려서 갖추갖추 울며 넋두리라도 하고 싶은 것을 끄윽 참았다.
 
140
“또 매를 맞다가는 뱃속의 것이 성하지 못하겠어요.”
 
141
오월이는 겨우 이 말을 하고는 주먹으로 눈물을 씻는다. 서방님은 눈을 흘기듯이 뻔하고 바라보더니
 
142
“내일버틈 큰댁에 가서 있으렴…… 내가 노마나님께 여쭈어 줄 테니 ……”
 
143
하고는 할 말 다 했다는 듯이 홱 돌아누워 버린다.
 
144
오월이는 그것만도 다행해서 물러나왔다.
 
145
안중문에는 아씨가 엿을 듣고 있다가 그대로 말없이 오월이의 머리채를 끌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146
“이년! 무엇이 어째?”
 
147
아씨는 단지 이 말 한마디만 하고 두껍집에서 새로 개비한 침척을 꺼내 내려 매질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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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 소리가 너무 요란하니까 아씨는 침척을 내던지고 달려들어서 물어뜯고 꼬집어뜯고 무릎으로 제기고 한다. 그러면서도 유난스럽게 주먹으로 옆구리며 배를 퍽퍽 지른다.
 
149
오월이는 배를 부둥키고 꾸불트리고 앉아서 한참 맞는데 갑자기 진통이 일어났다. 그는 무심결에 아이구 배야아, 소리를 질렀다.
 
150
그는 맨 처음번 말고는 이내 맞으면서 아프다고 소리를 내거나 잘못했다고 빌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혀를 깨물면서 소리없이 맞는 걸로 형용없는 앙갚음을 해왔었다. 아씨에게 대한 존경 대신 그만큼 그는 적의를 품었던 것이다.
 
151
오늘도 그렇게 소리없이 맞고 있었다. 그러다가 배가 아프자 그는 놀란 결에 소리를 지르고 만 것이다.
 
152
아씨는 오월이가 숭을 쓰는 줄 알고서 그대로 물고 뜯고 하다가 필경 기절해 넘어져 입으로 게거품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서야 손을 멈춘다.
 
153
한참만에 깨어난 오월이는 몸을 뒤틀고 신음소리를 지르면서 쩔쩔매기 시작한다. 아씨는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 줄을 알고 얼결에 건넌방의 침모를 불러댄다.
 
154
그 판이 어느 판일 것을 가릴 줄도 모르는 뱃속의 새생명은 때아닌 격동에 흔들리어 부득부득 머리를 들이밀고 나오기 시작하던 것이다.
 
155
“응애.”
 
156
이것은 천 마디 만 마디의 말이 머금겨 있는 선언이요 주장이다. 웅장하기로 치면 하늘이 찢어질 듯한 우뢰 소리보다도 더할 것이고.
 
157
마지막 힘을 다 들이고는 정신을 놓았던 오월이는 애기 울음소리에 빠듯이 눈을 뜬다.
 
158
“아들이다!”
 
159
침모는 처음 이 방에 들어와서 본 놀라운 광경에 정신이 따로 혼란하면서 그래도 손을 재게 놀려 삼을 가르고 하다가 급한 대로 오월이의 치마에 방금 받은 애기를 안아 가까이 대어준다.
 
160
오월이는 무슨 의산지 모르게 입술을 가느다랗게 벌리고 짧은 한숨을 내쉬 더니 눈은 다시 아씨를 찾는다.
 
161
장승같이 우두커니 서서 있던 아씨는 오월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미 싸늘한 사색(死色)이 내려 핼끔해진 오월이의 눈에서 사무치는 원한의 빛을 보았다. 보고는 무서움에 몸을 부르르 떤다.
 
162
오월이는 그때에 벌써 정신이 혼미해서 원망이고 앙심이고 그런 차근차근한 사려를 가질 힘이 없었다. 다만 의미없이 마지막으로 아씨를 한 번 본 것일 따름이다.
 
163
그런 것을 아씨는 결리는 데가 있는지라 그렇게 보고 만 것이다.
 
164
더구나 오월이가 그렇게 아씨에게로 돌린 눈을 감지 못하고 그대로 힐끔하게 뜬 채 목구멍에서 고르르 소리가 나면서 숨이 딸꼭 지자 아씨는 푸른 얼굴이 더욱 푸르러 가지고 사지를 와들와들 떤다.
 
165
그때 마침 아이가 다시 응애 하고 우는 소리에 아씨는 정신없이 달려들어 덤쑥 안아올렸다.
 
166
그 뒤로 아씨는 마치 범의 새끼한테 젖을 물리는 것같이 서먹서먹해서 마음을 놓지 못하면서도 유모도 정하지 않고 자기 젖으로 그것을 길렀다.
 
167
무심한 그 생명은 그렇게 해서 아씨의 젖을 빨아가며 모락모락 자라갔다.
 
168
(1937. 1. 30)
 
 
169
〈白光[백광] 3·4집, 1937 ; 蔡萬植短篇集[채만식단편집], 1939〉
【원문】생명(生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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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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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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