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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밤에 고국(故國)을 그리워 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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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1.
방정환
1
달밤에 故國[고국]을 그리워하며
 
 
2
정 깊은 고국을 떠나 풍토 다른 이역에 원객이 되어 객관 고창에 고국을 그리워하는지 어느덧 10여 일이 된지라, 생후로 객지 생활을 처음 당하는 어린 몸이 집을 나온 지 몇 해나 된 것 같아서 날마다 밤마다 모향의 정에 가슴을 울릴 제 누구라 위로해 줄 이도 없고 뉘게다 마음 붙일 곳도 없어 오직 냉랭한 6첩 방에 한없는 고적만이 어느덧 친한 벗이 되도다.
 
3
상엽이 져가는 중추의 어느 날, 추구(追舊)의 비회에 잠 못 이루는 야반에 잠들은 거리로 지나(支那) 국수 장수의 불면서 가는 애련한 피리 소리에 뜨거운 정서가 빨갛게 열중되어 다다미 위에 쓰러진 듯이 누웠던 몸을 벌떡 일어나 창문을 드르륵 여니 아아 정답다.
 
4
교교 월색이 마당에 가득하고나. 마당도 자고, 검은 판장도 자고, 판장 너머 전주도 자고, 이웃집 지붕도 이미 꿈이 깊었는데, 홀로 월광이 남몰래 비치려는 듯이 소리도 없이 낮같이(그러나 다장하게) 환하게 흘러 옛날 이야기에 듣는 꿈 속 같은 나라를 이루어 있고, 그 고요한 꿈 같은 거리를 국수 장사는 몽환곡 같은 피리를 불면서 어디든지 멀리 가고 말아. 아아, 감상의 가을, 달 밝은 밤, 달빛으로는 꿈 속 거리로 꾀어내는 피리의 소리!
 
5
한없는 적막은 옴쑥옴쑥 내 몸을 에워싸서 지탱치 못할 고적과 제어치 못할 모향의 정에 견디지 못하여 이도 우객(異都寓客)인 이 몸은 멀리 사라진 몽환의 곡을 뒤쫓듯 주인까지 잠들은 여관의 대문을 표연히 나섰다.
 
6
만뢰(萬籟)는 구적(俱寂)하여 세상이 죽은 듯하고, 일 윤(輪)의 고월(孤月)은 천공에 높아, 죽은 듯한 거리가 낮같이 밝은데 홀로 여관의 문을 나선 어린 내 몸은 달빛이 던져 준 땅 위에 영자(影子)를 이끌고 정처 방향도 없이 꿈 속 거리를 헤매었도다.
 
7
아아 우리 집에서는 지금들 주무시련마는…….수천리 타관, 서투른 땅에 쓸쓸히 헤매는 외로운 그림자여……. 어미 잃고 헤매어 우는 새끼 양같이 사랑하시는 부모와 정든 벗을 멀리 떠나 무엇 때문에 바람 싸늘한 곳에 외로운 가슴을 울리는가 ─ 생각함에 벌써 더운 눈물이 두 눈에 그윽이 고이는데 산 너머 구름 밖 머나먼 고국의 하늘로 날아를 가는가. 검은 새의 우짖는 소리는 적막한 창공에 울리고 무엇을 탄식하는지, 휘 ─ 하고 불어오는 와세다[早稻田] 송림의 바람은 덧없는 내 마음을 싸가지고 행방도 모르게 몰려를 가누나…….
 
8
정처도 없이 나선 이 몸은 발길 가는 대로 와세다 대학의 교사를 끼고 돌아 도스까죠[戶塚町]를 지나갈 때 역시 거리는 고요히 잠들었는데 따르자니외로운 그림자뿐이요, 나느니 내가 걷는 나막신 소리뿐이라. 세상이 꿈꾸는 고요한 월야에 나막신 소리 나는 것만도 마음이 애처로워 발자취 소리도 없이 고요히 걸어갈제 길가 어느 집 침방에서인지 시계 치는 소리가 그윽히 은근히 들려오는지라, 아마 열 시 아니면 열한 시이리라 심중에 헤이면서 조금 걸어가니 벌써 거리는 끝나고 몸은 도야마하라[戶山原]의 끝에 나섰도다.
 
9
아 ─, 월광이 빈틈도 없이 흐르고 있는 벌판 저 끝은 아득한 속에 숨기어 있고, 달빛이 질펀한 들 속에 홀로 꺼멓게 우뚝이 섰는 참나무들이 두 몸을 맞대고 서서 무슨 정담을 속살대는 것 같아서 내 몸은 아주 꿈 속 나라 아니면 월세계에 온 것 같아서 어디서인지 환 ─ 하게 월광을 받는 들 속에서 가늘게 조용히 무슨 음악 소리가 나는 듯 나는 듯하다.
 
10
벌써 아무 수심도 비애도 없고 희망도 욕심도 없고 고독도 적막도 잊어버리고 몸은 달빛을 받으며 오직 무심히 월세계(月世界) 우거진 풀숲으로 꼬부라진 길을 걸어가도다.
 
11
낮이면 대포 소리 나는 저네의 포병 연습장으로 보기도 두려운 포대도 지금은 오직 조용히 희미한 꿈 속에 들어 있고, 무엇이 어디로 무엇하러 가는지 등불 두 개가 포대 저 끝 그윽한 나무 그늘로 더듬더듬 가는 것도 재미롭게 보면서 달빛 비치는 끝까지 갈 마음으로 길 놓인 대로 한참이나 걸어가니 요코하마[橫濱]로 가는 찻길인지 동에서 서로 길게 놓인 궤도는 월색을 받아 백은같이 빛나고 머리에서부터 월색을 뒤집어쓴 파수막 속에는 역부 한 사람이 붉은 등을 든 채로 졸고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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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꿈이 깰까 겁하여 사뿐사뿐 궤도를 건너서 역시 달빛 흐르는 촌로로 5분 동안이나 걸어서 도야마하라[戶山原] 연병장 넓은 마당에 이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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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은 컴컴한 송림이 있고, 앞으로는 과원인지 금은 수엽이 보드라운 어두운 그림자를 짖고 있는데 그 중에 그윽히 탐탁한 둥그런 마당이 편편히 놓여 다정한 달빛이 이 곳에만 퍼붓는 것 같아 월야의 다감한 정이 더욱더욱 몸에 소름이 나는지라, 어느덧 고국도 잊고, 여관도 잊고, 밤도 잊고, 잠도 잊고, 나는 임자 없는 연병장의 한복판에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섰도다.
 
14
밤은 소리없이 깊어 가고 월색은 점점 맑아서 죽은 듯이 고요한 세상이 거의 처참하게 적막한데, 아아 어디로서 흘러 오는가, 처녀의 느껴 우는 소리같은 만돌린의 울림! 불쌍하고 애처러운 비애를 그윽히 품고 무엇인지 어린가슴의 번민을 하소연하듯 떨면서 우는 가늘은 그 소리는 막힘없는 월공에 떠서 흘러 이것 저것 모두 잊고 섰는 나로 하여금 다시 가슴을 울리게 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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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게 흐르는 그 소리와 함께 마음은 다시 망향에 떠돌아 차츰차츰 일어나는 고향 생각에 내 몸은 또다시 한없는 고적에 싸여 누구나 동무를 찾을 듯이 사면을 두루 둘러보아도 저 끝 송림은 여전히 그윽하고 질펀한 들에는 달빛만 흐를 뿐이라 ‘역시 나 홀로 있었다.’ 입 속으로 부르짖을 때 전보다 심한 고적이 몸을 휘여 싸는데 외로운 적막을 호소하듯 마음 상하는 월명을 원망하듯 한참이나 서서 눈물에 젖은 눈으로 달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발 밑에 싸늘한 내 영자를 보고, 아아 역시 고독이다……, 생각할 때에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갑자기 몸을 찌르는 추위에 전신이 오싹 떨리고 눈에 고였던 더운 눈물이 넘쳐서 싸늘한 뺨에 흘러 내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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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내 몸이 원래 이렇게까지 외롭지는 아니하였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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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아의 모친과는 사별을 당하고 양아의 모친과는 생별을 당하고……, 아아 나를 그리워하는 어린 누이들을 집에 남겨 두고 현해탄 멀리 건너 도야마하라 넓은 벌에 외로이 우는 나는 어느 때까지는 홀로 헤맬 몸이냐, 요적한 객창에 궂은비 소리쳐 울고 싸늘한 장지에 밝은 달 비치울 때마다 가난 중에 돌아가신 어머니, 남아 있는 가련한 누이를 생각하면 손으로 고인 뺨에 추회(追懷)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견디지 못하게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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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어머님 잃고, 오라비마저 떨어진 가련한 누이들이 지금 이 밤에 잠들이나 편히 자는가.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볼 때에 어느덧 고인 눈물이 달빛을 흐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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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고인 눈물을 손으로 눌러 뺨으로 흘리고 다시 하늘을 쳐다보니 달은 이 몸의 비애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잠잠하게 빛날 뿐이고 가늘게 우는 만돌린 소리는 무슨 곡인지 그저 가늘게 떨면서 흘리어 애련한 기분으로 들을 덮는다. 고국에 헤매는 나의 마음은 뒤에 뒤를 이어 생각은 어느덧 안암동(安岩洞) 밑에서 빈한에 우는 누님께 이르도다.
 
20
안암산 화강석(花崗石) 깨뜨려 내는 바위 밑 과목밭 속에 조그만 집, 그 속에서 가난에 부딪치며 눈물과 생활을 해가는 불쌍한 누님, 그가 어머님 돌아가신 후에는 외로이 나 한 몸을 믿고, 나 한 몸을 세상에 단 하나로 알아, 먼 곳이나마 자주 다녀가고, 자주 오라고 때때로 보고자 고대고대하는 것을 공부니 사무니 하고 바쁜 탓으로 자주 가지 못하여 고대하다 못하여 아마 무정해졌는 게라고 홀로 어머님 생각, 내 생각, 어린 동생 생각을 두루 하며 울더라는 누님!
 
21
아아 그가 나 일본 갔단 말을 듣고 얼마나 울었을까. 일본이 어딘지 알지도 못하고 험하고 무섭고 하여 영영 보지 못할 길을 간 줄로 알고 불쌍한 우리 누님이 얼마나 뼈에 맺히는 울음을 울었으랴. 출발이 급하기도 하였지마는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누님께 고별도 못하고 와서, 와서도 주소 번지를 몰라 편지 한 장 못 보내고 있으니 궁금해 하는 마음이 오죽이나 할까. 아아 물가는 비싸고 시절은 험한데 불쌍한 우리 누님은 지금 어찌나 지내는지……. 힘없이 감은 눈 속에 빛 검어지는 얼굴 파리하여 시골 촌부터 박힌 누님의 시름없이 눈물 흘리는 양이 애련히 보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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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누이는 집에서 울고, 출가한 누님은 가난과 설움에서 울고, 이 몸은 도야마하라 들 속에서 울고……. 아 ─ 우리 남매는 그 어느 성신(星辰)이 점지를 하였느냐.
 
23
내 땅 내 집에 모여들 지내도 다소의 비애는 따르는 것을 ──, 모친 없는 어린 몸이 이렇게 헤어져 울고, 그리고 우리의 생모이신 어머님은 지금 남대문 밖 이태원 공동 묘지에 잠드신 지 오래도다.
 
24
아아, 부유(蜉蝣)의 일기라는 기막힌 일생에 이별의 눈물이 어찌 이리 많으냐…….
 
25
생별에 울고 사별에 울어 그리 울며 지내고 만날 날 고대하는 동안에 세상에 마지막 고별할 날이 와…….
 
26
아 ─, 무엇을 위하는 이별이며, 무엇하라는 70년 일명(一命)이냐, 오직 오래 푸르기는 산뿐이요, 길이 흐르는 물뿐! 그간에 하잘것없는 인생의 일세가 이렇듯 덧없구나.
 
27
무상한 인생의 일인인 내가 울면 무엇하며 웃으면 무엇하랴 하여 발길을 돌려 만돌린 소리를 뒤로 두고 여관으로 돌아오니, 죽은 듯이 자는 여관에는 시계가 홀로 반 시를 가리키고, 달은 서쪽으로 조금 기울어지도다.
 
28
─경신(庚申) 추석 다음 다음 날 동경(東京)서─
 
 
29
<1921년 1월 1일 《개벽(開闢)》>
【원문】달밤에 고국(故國)을 그리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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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벽(開闢) [출처]
 
  1921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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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12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