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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 막 ◇
카탈로그   목차 (총 : 3권)     이전 2권 다음
1947.4
함세덕
1
고목
2
제 2 막
 
 
3
삼십 분 후, 같은 장소 거복, 마루에 앉아서 글씨를 쓰고 있다. 장기말에 맞춰 오린 종이본〔 〕에다 초를 잡고 쓰고 있는 것이다. 자기 글씨에 스스로 취하여 한 자 쓰고는 떼놓고 바라보고 연성 흠, 흠 하며 감탄한다. 주위에는 백지와 본 오린 종이 부스러기가 산재해 있다. 멀리 대회장 쪽에선 판에 박은 듯한 애국가의 합창소리와 악대소리가 낭송하듯이 들려온다.
 
4
사이
 
5
여학교 교장 곽목사, 닷도상같이 달려온다. 낡은 모닝그에 고풍한 중산모를 썼다. 펄럭펄럭 하는 앞섶에 연회준비위원장이란 표를 달았다.
 
 
6
곽목사  뭘 하고 있으시오?
 
7
거 복  (쓰던 것을 멈추며) 목사님, 어서 오시오.
 
8
곽목사  빨리 가십시다. 모두들 기다리구 있으시오. 각하께선 오늘루 다음 장소루 가셔야 하기 때문에 대회는 두 시간 안으루 끝마치구 곧, 환영연회에 모시기루 했소.
 
9
거 복  호, 목사님두. 난 직접 회장엔 얼굴 내지 않기루 요전부터 얘기하지 않았소?
 
10
곽목사  허지만 거복 씨가 빠지구서야?
 
11
거 복  집에서들 모두 갔으니까......어머님께서두 가셨구, 조금 아까 여편네 하구 맹첨지두 보냈소.
 
12
곽목사  가족들하구 애국당 재정부장인 거복 씨하군 다르지 않소?
 
13
거 복  군수영감과 곽교장게서 나가겼으니까 난 빠져두 별 지장 없을 거요.
 
14
곽목사  그 사람들이나 내나 공직뿐이지 무슨......실력은 돈인데 읍에서 돈 가진 분은......
 
15
거 복  (눈이 둥그래지며) 아니 그럼 이번 대회 비용을 날더러 혼자 책임지란 말이오? 도로 장식비하구 요리대 합하면 칠만 원이 넘을 텐데......돈을 쓰구두 생색이나 난다문 모를까, 각하께서야 이 박거복이가 칠만 원을 썼는지, 칠십 원을 썼는지 어떻게 아시겠소?
 
16
곽목사  이번 비용은 정회를 통해서 할당 수집키루 이미 결정한 게 아니오?
 
17
거 복  그러게 말이오. 이런 돈이란 읍민 전부가 한 사람에 얼마씩 부담할 것이지 재정부장이나 주최자인 우리 애국독립회가 지출할 성질의 것이 아니오.
 
18
곽목사  내 얘긴 그런 게 아니라 요전 위원회에게 기부 얘기가 나왔을 때 재정 부장께서 저 행자나무를 바치겠다구 자진해서 말씀하시더니, 이제 와서. 뒤를 빼시니까 말이오. 딴 지부에선 모두들 몇십만 원씩 돈을 내구, 주단, 광목, 기타 물품을 기부들 하는데 우리 고을만 말쑥하다면 우리 지부의 면목이 뭐가 되겠소?
 
19
거 복  (돌연 항아리가 깨질 듯이 웃는다) 하하하하, 내가 꽁무니를 뺀단 말이지요? 하하하하. 내가 꽁무니를 뺀단 말이지요? 하하하하.
 
20
곽목사  그럼 왜 안 나오시겠다구?
 
21
거 복  헌납은 꼭 내가 나가서 직접 해야만 되오? 대신은 못 한답디까?
 
22
곽목사  대신이라니요?
 
23
거 복  우리 어머님께 대신 하시구 오시라구 했소.
 
24
곽목사  어머님께요?
 
25
거 복  그렇소. 아주 도장꺼정 드렸소. 차례가 되면 일어나셔서 내 이름으루 선물 삼 정, 즉 화로, 장기 일 식, 바둑 일 식을 신청하실 게요.
 
26
곽목사  (장기 본을 집어 보며) 그럼 바로 이게?
 
27
거 복  그렇소 나물 베는 대루, 도장포에 부탁해서 팔 작정이오. (감화도 깊은 양) 작년 시월 라디오에소 각하의 목소리를 첨 듣던 그 시각부터 난 각하를 뵐 날을 손꼽아 고대하구 있었소. 누구보다두 먼저 뛰어가구 싶지만, 내 용모가 너무두 흉해서......
 
28
곽목사  혹 말씀이오?
 
29
거 복  첨 뵈는 각하께 언짢은 인상을 드리는 것보다, 먼 발치루 각하를 예배하구 기부나 바치는 것으로 그저 만족하려구 하오.
 
30
곽목사  거복씨, 오 각하께선 우리 조선의 가장 큰 죄인인 친일파, 민족반역자 까지라두 다 함께 손을 잡구 나가자구 하신 분이오. 이처럼 관대하시구, 인자하신 각하께서 거복 씨 목에 붙은 조그만 혹 한 개를 문제시하시겠소?
 
31
거 복  그러실까요?
 
32
곽목사  그럼요.
 
33
거 복  (단연 결심을 돌이키고) 그럼, 잠깐만 기다리슈. 같이 나갑시다.
 
34
(거복, 장기 본만 골라서 한쪽에다 차곡차곡 쌓아놓고 부스러기는 쓰레받기에 다 몰아 넣는다. 벼루집을 치우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명주 목도리를 들고 나와 혹을 가려 싼다. 두루마기에 모자를 쓴 후 체경 앞으로 간다.)
 
35
곽목사  원, 흉하긴커녕 이쁘기만 하시오.
 
36
거 복  (이모저모로 비쳐 보더니 다시 끄르며) 그만두겠소, 역시. 이 더운 복중에 목도리를 하다니 각하께 이 무슨 실례겠소?
 
37
곽목사  원 참, 고지식한 양반두.
 
38
거 복  (시계를 보며) 빨리 혼자 가보시오. 벌써 시작했겠소.
 
39
곽목사  우린 환영위원이니까, 추산각(秋山閣)으로 직접 가면 되오. 그러데 거복씨야 못 온다지만 수국인 또 어찌 된 일이오?
 
40
(수국, 책보에 수포를 싸면서 구두를 끌며 나온다. 교장을 보고 경례한다.)
 
41
곽목사  그래 수는?
 
42
수 국  잘 안 됐어요. (하고 책보에서 다시 끄러 마루에다 편다.)
 
43
곽목사  (감탄하며) 이건 참 과연 미술품인데. (수 놓인 가사를 낭독한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44
거 복  (감격하여 화창한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다시 재촉한다) 그럼 우리끼리 가는 수밖에 없겠다.
 
45
(목사와 수국, 후문으로 나가려 할 때 돌연 관장 넘어서 ‘아 우습다, 호호호호, 아 우습다. 호호호호’ 하고 야유하는 여자들의 여자들의 소성〔笑聲〕)
 
46
곽목사  (발을 멈추며) 웬 여자들이오?
 
47
거 복  퇴학 맞은 진이라구 그 패들이지 누구겠소 망한 것들, 우리 수국이가 수 놔가지구 추산각에 나가는 게 쌍심지들이 나서 까시들 하는 걸 거요.
 
48
곽목사  (눈살을 찌푸리며) 저 패들을 퇴학시켰기 망정이지 그리 안 했으면 오늘 대회엔 여학생이라군 얼굴도 못 비쳤을 거요
 
49
수 국  (주저하며) 아버지, 나 안 가겠어요.
 
50
거 복  구다기 무서서 장 못 담근다구, 저 기짖ㅂ애들 무서서 못 간단 말이냐?
 
51
수 국  요전 수챗구멍으루 몰래 등교할 때처럼 돌파매질을 하면 어떡해?
 
52
거 복  삼십육 년간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시도록 독립을 위해 반생을 바치신 각할 환영하러 가는 거야. 그까짓 년들한테 욕 좀 먹으문 어떻구 돌팔매질 좀 받으문 어때?
 
53
수 국  그래두......
 
54
곽목사  똥이 무서서 피하겠냐? 더러서 피하지. 그까짓 거 그럴 거 없이 뒤루 돌아서 가자꾸나.
 
55
(곽목사, 자기도 켕기지만 체면상 위엄을 갖추고 황겁해 하는 수국을 끌고 곡간 사잇길로 나간다. 이어서 소성〔笑聲〕,박수, 석유등을 두들기는 소리, 쫓아가듯이 넘어온다. 곽목사, 잊어버린 거나 있는 듯이 창황히 되돌아온다.)
 
56
곽목사  오늘 대회를 방해하려고 공산당패에서 테러들 올지 모르오. 그러니 거복 씨두 주의하시오. (하고 구르는 듯이 다시 나간다.)
 
57
(이때 대회장 쪽에서 천지가 진동할 듯한 만세소리와 박수소리. 오 각하가 등장하셨나보다. 거복,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미끄러진다. 다시 올라간다. 미끄러진다. 뒤꼍으로 가더니 사닥다리를 매고 나와 나무에 걸고 쏜살같이 올라간다. 멀리 대회장을 응시하며 손에 땀을 쥔 체 침을 꿀꺽꿀꺽 삼킨다. 군중의 박수소리와 ‘옳소’를 절규한다. 한동안.)
 
58
(초국, 창황히 달려온다. 신풍을 겪어온 전형적인 초부〔樵夫〕다. 거복은 찬동소리를 이마받이하여 발을 멈추고 꼭대기를 쳐다본다.)
 
59
초 국  (농으로) 무슨 육갑인가?
 
60
거 복  (회장에 정신이 팔려 전연 들이지 않는 모양이다. 회장의 ‘옳소’ 소리에 호응하여 다시 ‘옳소’를 연발한다)
 
61
초 국  (불안해지며) 저 사람이 별안간 정신이상이 생겼나? (돌연 겁이 덜컥 나므로 안으로 달려간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대답이 없으므로) 수국아, 수국아. 모두들 어딜 갔나? (다시 나무 밑으로 오며) 여보게 거복이, 거복이.
 
62
거 복  (박수를 치며) 옳소!
 
63
초 국  허, 이거 큰일 났는걸.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더니 무슨 묘책이 떠올랐는지 옆에 있던 장대를 집어들고 뒷간 쪽으로 나간다. 이으고 똥을 끝에다 묻혀 가지고 나와 거복의 코 앞에다 치켜든다)
 
64
거 복  아채! (하고 재채기를 두서너 번 연거푸 하더니 악을 쓴다.) 어떤 놈이야. 빨리 이 똥자루 비키지 못해. 아 구려. (하고 재채기)
 
65
초 국  (뒤에 가숨은 채 목소리만) 정신이 바로 들기 전까지 못 비킨다.
 
66
거 복  이놈아, 정신이 바로 들기 전이라니, 내가 미쳤단 말이야?
 
67
초 국  (장대 밑을 붙든 채 마당으로 나오며) 그럼 날 알아보겠나?
 
68
거 복  알아보겠나라니? 진이 아범 초국이 아닌가? 빨리 이 장대 비키게.
 
69
(초국, 그제서야 안도하고 장대를 비킨다. 거복, 나무를 타고 내려온다.)
 
70
초 국  (그래두 약간 미심쩍어) 자네, 정말 아무 일 없어?
 
71
거 복  누가 할 소린데? 미친 놈이 아니구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루 남의 코 밑에다 똥자루를 들이밀 수 있겠나?
 
72
초 국  (진땀을 씻으며) 난 자네가 꼭 미친 줄 알았네.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 바가지 들이키고 나오며 다시) 난 자네가 꼭 미친 줄 알았네. 그래 이걸 어떡허나 하던 참에 퍼뜩 어릴 때 생각이 나데. 미친 놈은 똥자루만 보면 정신이 든다구 하지 않았나, 왜?
 
73
거 복  (성이 아직 안 풀려) 원 싱건 사람, 그렇다구 그 꼭대기서 떨어지면 어떡허라구 거기다 그걸 들이댄단 말이야? (하고 마루로 올라간다.)
 
74
(이때 진이, ‘아버지‘ 하고 달려온다.)
 
75
초 국  너 웬일이냐? 정거장에두 안 오구?
 
76
진 이  차 시간을 알어야 나가지. 그러지 않구, 언제 오늘 온다구 했나 뭐.
 
77
초 국  참, 그렇지. 며칠 더 있다가 오려구 했는데 집을 넘긴다구 해서 도중에 달려왔다. 그래 집에 별일 없었니?
 
78
진 이  응.
 
79
초 국  학굔?
 
80
진 이  퇴학이야.
 
81
초 국  그럼 끝끝내 지구 말았구나?
 
82
진 이  응. 허지만 싸울 만큼 싸우구 졌으니까 후회되진 않어.학교에 나가게 된 애들이 앞으루 점점 더 감옥생활 같은 교육을 받게 될 게 걱정이지.
 
83
초 국  퇴학은 맞았지만, 그놈의 거 시원하게 한 번 잘했다. 그 교장 녀석 꺼떡대구 돌아댕기는 꼴이란, 우리두 눈꼴이 셔서 못 보겠더라.
 
84
진 이  요샌 학굔 아주 제쳐놓구 정치하기에 눈이 뒤집혔어. 애국당 조직부장이라나.
 
85
초 국  (들어보라는 듯이) 망둥이가 뛰니까 송사리가 뛴다든가, 세상은 점점 못돼먹어만 가구 있어.
 
86
거 복  (물주리를 재떨이에다 탁탁 때린다.)
 
87
초 국  일본놈 불알 긁던 그 손으루 미국 사람 긁구, 많이 긁구 많이 알랑거리는 놈이 장치게 마련이니, 이놈의 세상이 어떻게 돼먹으려구 이래? 학생들 한테 그만큼 배척을 당했으면 저두 개돼지가 아닌 이상 생각이 있겠지. 그까짓 놈의 학교 아니면 하늘 아래 공부할 데 없겠니? 아무걱정할 게 없다.
 
88
진 이  아버지, 나 그 대신 오늘은 여행비 찾아온 걸루 술 한 병 사다 드릴게. 얘기하구 빨리 오셔. (하고 판장 문으로 들어간다.)
 
89
초 국  (마루로 올라가며 담판조로) 그래 집은 넘겼나?
 
90
거 복  아직 안 넘겼네.
 
91
초 국  그래, 며칠을 못 참구 인편에다 재촉을 해야 옳단 말인가? (주머니에서 지패 뭉텅이를 꺼내 주며) 에이 치사스럽네.
 
92
거 복  (의아하여) 이게 얼만가?
 
93
초 국  원금하구 별릴세. 손 하나 대지 않구 그대구 가지구 왔네
 
94
거 복  그럼 장사한다는 건?
 
95
초 국  그만뒀네.
 
96
거 복  그만두구 어떡헐려구?
 
97
초 국  산으로 두루 들러가야겟네.
 
98
거 복  산으루?
 
99
초 국  응, 송충인 역시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죽게 마련인가 보이. 딸년 공부 때문에 삼팔선을 넘어 왔는데, 퇴학 맞았다니 여기 있으문 뭘하겠나? 자기 얘기 들어봐가지구 평양으루 보내구 난 도루 산으루 들어갈까 하이.
 
100
거 복  그렇게 되면 섭섭하겠는걸. (하고 금궤에서 차용증서를 꺼내 준다.)
 
101
초 국  (받아서 찢으며) 섭섭할 거야 있나. 혜산진을 떠난지 반 년밖에 안 되는데 처갓집에 색시 두고 온 것처럼 가구 싶어 못 견디겠네.
 
102
거 복  자넨 산하구 뭐 되나 보이.
 
103
초 국  어떤 인 바다가 좋다구 하구, 어떤 인 또 대처가 좋다구 하지만, 산에다야 댈 수 있나? 산 중에서두 백암, 혜산진, 백무선을 타구 두만강으루 들어가는 연변 일댄 참 산 주의 산이지, 산 주의 산이야.
 
104
거 복  호랑이가 있다지?
 
105
초 국  호랑이뿐인가? 늑대, 곰, 여우, 너구리, 뱀, 노루, 사슴, 토끼, 매, 수리, 짐승이란 짐승은 다 모이지. 사람이라군 김일성의 항일 군대가 몇 달에 한번씩 지나갈 뿐이구, 그 외엔 바람하구 눈하구 안개만 드나드는, 그야말로 영검한 숲이야.
 
106
거 복  아직두 눈이 허옇게 쌨다지?
 
107
초 국  그럼, 지금두 겹바지 저고리가 선선하니까. 구월 들어서면 벌써 첫눈이 풀풀 날어. 그리구 그 도끼소리가 수백 길 되는 깊은 골짜기에 울려서 산울림으루 되돌아오구. 그 하늘을 찌를 듯한 큰 나무가 천둥을 치듯 쿵 하구 쓰러지는 그 장쾌한 맛이란, 도회지선 도저히 맛볼 수 없지, 맛복 수 없어.
 
108
거 복  삼팔선 끊어지면 나두 한번 꼭 가보구 싶네.
 
109
초 국  자넨 저 행자나무가 오백년 됐다구 자랑하지만 거긴 오백 년 넘지 않은 건 하나두 없어. 대가가 칠팔십 년이구 나이 많은 건 천 년, 이천 년짜리두 수두룩하네.
 
110
거 복  기왕 나무 얘기가 났으니 말이네만, 자네 우리 나무 좀 베어주지 못하겠나?
 
111
초 국  저 행자나무를?
 
112
거 복  응.
 
113
초 국  그럼 화로하구, 바둑판, 오 각하 별장에다 헌납한다는게 사실인가?
 
114
거 복  누가 그러던가?
 
115
초 국  정거자에 내리니까 벌써 소문이 자자하데.
 
116
거 복  참 빠르긴 하군. 각하께선 삼십육 년 동안이나 해외에 계셔서 조선 물건에 애착심이 누구보다 강하실 걸세. 그 지긋지긋한 공산당 극렬분자들 때문에 골칠 썩이구 계시는 각하께서 저녁 잡수구 나서 쓱 바둑을 한 번 두시고 모든 시름을 잊으실 수 있다면 조선 독립을 위해 얼마나 큰 공이 되겠나?
 
117
초 국  ......
 
118
거 복  그리구 화로를 풍치 있게 맹글려면 저 사방으루 뻗은 부릴 하나두 상치 않구 베어야 할 텐데 우리 읍에서 다치지 않구 벨 사람은 자네 빼놓군 없을 걸세.
 
119
초 국  ......
 
120
거 복  친한 친구 새에 이런 얘기하면 뭣하게 생각하겠지만, 일삯은 넉넉히 내겠네. 자네두 요새 궁할 테니까.
 
121
초 국  돈이야 문제 아니지만......
 
122
거 복  그럼 좀 수고해 주게. 사실은 그것 때문에 자넬 얼마큼 기다렸는지 모르네.
 
123
초 국  난 행자나문 베어 본 적이 없어서......
 
124
거 복  나무야 다 매한가지 아니겠나?
 
125
초 국  연장을 떠날 때 모두 맡기구 와서......
 
126
거 복  명장이 대패를 가리겠나? 자네같이 능란한 벌목이에게야, 이까짓 행자나무 같은 건 식은 밥 먹길걸세.
 
127
초 국  그야 그렇지......허지만 난......두만강......두만강 연변 이외 아문......손 안 대기루 작정했네.거기 나문 모두가 태고 적부터......태고 적부터산 정기 먹구 자란 나무라......보통 인가에 있는 나무하군 바탕이 다르이.
 
128
거 복  (폭발하려는 노기를 억압하며) 허지만 인가의 나무두 나무 나름이지. 우리집 행자나문 거미줄 하나 안 걸리구 삼대째 내려오는 영검한 나무 아닌가?
 
129
초 국  ......거미줄은 안 걸렸지만......거미줄은 안 걸렸지만......
 
130
거 복  그럼 두만강 나무하구 마찬가지 아닌가?
 
131
초 국  (dd에서 활로를 구한 듯 일사천리로) 저 행자나무 안엔 사람의 때가 묻어있네. 더러운 사람의 때가 말일세.
 
132
거 복  (참았던 분격이 터진다.) 뭣이, 사람의 때가 묻었어? (내뱉듯이) 흥, 자네 언제부터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갔나? 산신령 같은 나무를 베어두 벌목인 벌목이구, 공동묘지의 상수리나물 베어두 벌목인 벌복이야.
 
133
초 국  (분개하며) 벌목이 벌복이, 의붓자식 이름이냐? 아무리 내가 천해두 벼슬자리나 하나 얻어 할까 하구 눈깔이 뒤집혀 쫓아댕기는 네놈보다 칩칩하구 더럽진 않다.
 
134
거 복  (맹호같이 날뛰며) 뭐, 벼슬자리 하나 얻어 하려구? 얻어 하면 어때? 네놈한테 무슨 상관이야? 흥, 배가 아퍼? 조선나라에 벼슬하는 게 어때서 칩칩하구 더럽단 말이야? 내가 칩칩하면 네놈은 뭐냐? 제 고장에서 못 벌어먹구 함경두 산골루 품팔이 나간 놈이.
 
135
초 국  뭣이 어때 이놈, 제 고장에서 못 살구 타방으루 품팔이 갔다구? 너 이놈 말 잘했다. 나를 이 동리서 함경두 산골루 내쫓던 놈이 누구냐, 응? 누구야? 네놈 하 할아범하구 네놈하구 아니냐? 네놈 할아범이 우리 할아보님 땅을 뺏구, 느이 아범이 우리 아버님 땅을 뺏구, 네놈이 우리집하구 땅을 저당으로 집어삼켰기 때문에 내가 별 수 없이 괴나리봇짐을 싸가지구 백무선 벌목이루 들어간 게 아니냐?
 
136
거 복  널더러 이놈아 누가 뺏기라더냐? 저 못나서 뺏기구 이제 와서 무슨 넋두리냐?
 
137
초 국  허지만 너두 이놈아, 이젠 먹은 거 겨눌 날이 왔다. 함경두선 너 같은 지주놈들의 땅하구, 일본놈들이 뺏어갔던 땅은 모조리 몰수해서 작인들한테 전부 나눠줬다. 작인들은 대두 한 말에 두 되 가웃씩 현물세를 바치구 나선 나머진 떡 해먹구, 술 해먹구, 자유판매하구 제 맘 제 콩이야. 천지가 뒤바뀌었어 이놈아. 개벽을 했어. 느이 놈들이 잘 먹구 날뛰던 세상이 뒤바뀌었단 말이야.
 
138
거 복  이놈아, 삼팔 이북에나 세상이 뒤바뀌었지, 이남에서 뒤바뀐단 말이냐?
 
139
초 국  여기두 오래잖아 뒤바뀌게 됐어. 네놈한테 뺏긴 문전옥토 다 도루 찾아서 여편네하구 자식 데리구 떵떵거리구 잘살어 볼 날이 머지 않었다.
 
140
거 복  원 쓸개 빠진 소리 다 듣겠네. 오 각하께서 살아계시는 한 느이 놈들한테 땅을 공짜루 내주는 그 육실할 놈의 천지개벽은 절대루 안 올 게다. 돈받구 판 물건두 안 물어주는 세상이야. 담보루 뺏은 땅을 왜 내놓는단 말이냐?
 
141
초 국  그래서 네놈이 오 각하, 오 각하 하구 신주님 모시듯 떠바치는구나?
 
142
거 복  그렇다 이놈아, 어때?
 
143
초 국  그런데 왜 이놈아, 너나 떠받치지 나꺼정 떠받치라구 지랄이야? 밀가루 강냉이만 먹어서 도끼 들 기운두 없다.
 
144
거 복  싫으문 그만둬, 이놈아, 구구스럽게 청하지 않을 테니. 조선 팔도에 나무 베는 놈이 너 하나뿐이더냐? 너 하나뿐이야? (모자를 눌러 쓰고 마루를 내려오며) 벌목이 불러가지구 네놈 그 도도한 코를 납작하게 해줄 테다. 네놈 그거만한 눈앞에서 으즈즉 쿵 하구 보기 좋게 베어 보아 줄 테다. (하고 분개하여 나간다.)
 
145
(초국도 화가 나서 뒤이어 내려오는데 맹첨지, 막봉이, 처, 땀을 씻으며 들어온다. 일행은 출발시의 원기는 하나도 없다.)
 
146
처   아니 언제 오셨어요?
 
147
초 국  조금 아까 왔지요.
 
148
처   우리집 양반은?
 
149
초 국  나무 벨 사람 얻으러 간다구 지금 막 나갔쉬다.
 
150
처   댁에다 부탁하겟다구 했소.
 
151
초 국  내가 못 하겠다구 했소.
 
152
처   아 좀, 오신 김에 베어주시지?
 
153
초 국  딴 일이야 뭘 못 해주겠소만, 그거야 내 손으루 어떻게 하겠어요? 동네서 청년단이 구제금 대신 기부해 달라구 그렇게 애걸해두 안 줬다문서, 겨울도 되기 전에 화롤 맹글어 바친다는데.
 
154
맹첨지  그렇지요.
 
155
초 국  그런데 어델 이렇게들 갔다 오세요?
 
156
맹첨지  대회라구 원 시시하구 재미도 없습디다. 그래서 우린 도중에서 나와 버렸어요.
 
157
초 국  그래 땅 얘긴 뭐라구 하시던가?
 
158
맹첨지  그러니까 일 년에 얼마씩 까가라는 거지.
 
159
막봉이  (들이대며) 아, 이놈의 첨지야, 이때까지 빚에두 목이 안 돌아갈 지경인데 거기다 또 빚을 지란 말이야, 아들 팔아 사란 말이야?
 
160
맹첨지  이거 왜 나한테 들이대구 야단이야?
 
161
막봉이  죽기전에 제땅 가지구 한번 일궈볼까 했더니, 다 틀리구 말았어. 제기랄 다리품만 밑졌네.
 
162
초 국  머지 않어 여기두 바람이 한번 훅 불기 전에야, 우리들 없는 사람들이란 일생 가두 도로아미타불이지.
 
163
막봉이  예전하구 똑같다문야, 기 쓰구 독립할 게 뭐예요? (처에게) 내려가 보겠어요.
 
164
처   늦었는데 묵구 가지?
 
165
막봉이  뒤숭숭해 묵구 있을 수 있겠어요? 집에서들 눈이 빠지게 기다릴 텐데.
 
166
처   그럼 살펴가게. 아까 소작권 땐단 얘긴 쥔 어른한테 내가 다시 얘기해줌세.
 
167
막봉이  그만두세요. 오늘 판결은 그렇게 내렸지만, 우리 동리 농민조합에서두 가만힌 안 있을 거예요.
 
168
(막봉이, 밖으로 나간다. 초국도 판장 문을 열고 자기집으로 들어간다.)
 
169
맹첨지  나두 북선으루나 갈까 봐요.
 
170
처   모두 가구 나면 여기 농산 누가 짓구?
 
171
(이때 진이, 바스켓을 들고 판장 문에서 나온다.)
 
172
진 이  (처에게) 운동장에 나가셨더랬지요?
 
173
처   으, 응.
 
174
진 이  땅 얘기 말구, 또 무슨 얘기 하세요?
 
175
처   (기억을 더듬으며) 이번 홍수가 난 건 산에 나물 많이 베엇 그러니, 나물 많이 심어서 붉은 산이 없두룩 하라구 그러시더라.
 
176
진 이  그런 말은 누군 못해! 당장 잘 데가 없구, 굶어죽게 된 사람들을 어떻게 살릴까가 문제지, 천년대계가 문젤까?
 
177
처   그리구 뭉치문 살구 흩어지문 죽는다구 하시더라. 그러니 친일파건 뭐건 우선 뭉쳐서 나라부터 찾아놓구 보자시더라.
 
178
진 이  뭉치는 거야 좋지만 쌀에다 양잿물을 어떻게 뭉치겟어요? 친일파, 민족 반역잔 양잿물이에요. 먹으면 죽는 양잿물이에요. 팥하구 콩하구 수수, 조 쌀이 합치면 맛있는 오곡밥이 되지만 그 위에다 양잿물을 섞어 보세요 그 밥 먹구 살 수 있나.
 
179
맹첨지  양잿물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 만주서 온 어느 젊은 과부가 어제께 수용서 양잿물을 먹구 자살했답디다. 어린것들은 줄래줄래 매달려서 밥 달라구 하구, 밥은 없구 생각다 못해 그랬나 봐요.
 
180
처   쩟쩟, 가엾어라.
 
181
진 이  그리구 또 무슨 얘기 하세요?
 
182
처   또 뭐라구 하시더라......참 저, 각하께서 죽으라문 죽구 살라문 살구 모든 것을 각하께 맡기라구 하시더라. 그리구 명령을 기다리구 있다가, 명령이 떨어지는 대루 행동하두룩 하라구 하시더라.
 
183
진 이  (대회장을 흘겨보며) 주책 없는 양반 같으니. 자기가 뭔데 죽으라면 죽구 살라면 살란 말이야? 왜놈들이 천황만 믿구 따라갔다가 나라를 망친 걸 두 눈으루 똑똑히 봤는데, 못 봤으면 모를까 본 이상 어떻게 그 따위 어리석은짓을 되풀이하란 말이야?
 
184
맹첨지  (비꼬듯이) 땅이나 주구 따라오라구 하시믄 따라갈까, 땅두 안 주는데 누가 따라간담.
 
185
진 이  삼십팔도선 문제에 대해선 무슨 얘기 없으셨어요?
 
186
처   (기억이 안 나므로) 그건 참 뭐라구 하시더라......
 
187
맹첨지  거기다 피를 흘려야 한다구 하셨지 뭐라구 하셔요?
 
188
처   응 참, 피를 흘리라구 하시더라. 우리 한국이 독립이 안 되는 건 삼십팔도선 때문이라시더라. 그러니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구, 기운 있는 사람은 기운을 내서 모든 힘을 하테 뭉쳐가지구 때가 오는 대루 피를 흘리지구 하시더라. 그래서 그 선을 끊어버리자구 하시더라.
 
189
진 이  망령이 들리셨나 봐. (하고 대회장 뽁을 쏘아본다.) 피는 자기나 흘리지 왜 남더러만 자꾸 흘리라는 거야? 미국하구 아라사하구 영국이 의논해서 독립응 시켜준다구 공공연히 약속했는데 뭣이 답답해서 피를 흘린단 말이에요? 우리 읍 같은 건 대포 한 방이면 날아갈 텐데, 맨주먹으로 어떻게 비행기와 전차 앞에 대들란 말이에요?
 
190
처   (주위를 둘러보며) 얘, 조용조용히 예기해라. 누가 들을라. 그러지 않어두 공산당 사람들은 동리에서 학교에서 관청에서모조리 쫒아내자구 외치시더라.
 
191
진 이  세금을 안 냈나, 왜 쫓아내요?
 
192
처   삼십팔도선을 없애려면 동리에서 공장에서 공산당패를 모조리 쫓아내야만 된다구 땀을 뻘뻘 흘리시문서 외치시더라. 그러니까 듣구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치켜들고 ‘옳소’ 하구, 대회가 끝나는 길루 토끼사냥하듯 몰아내자구 하더라. 그러니 너두 아버지 모시구 동리서 살라거든 주의해라.
 
193
진 이  덮어놓구 뭉치자면서 좌익들은 왜 못 몰아내서 기를 쓰셔? 좌익 다 내쫓구 자기들만 안방 차지할 텐가? 재주껏 쫓아내 보라구 하세요. 우린 기를 쓰구 안 쫓겨나갈 테니.
 
194
처   쉬이, 인제 그만해두구 물이나 빨리 길어가지구 가라. 그리구 온 김에 등물이나 좀 해다구.온 몸에 땀띠가 나서. (하고 앞서 안으로 들어간다.)
 
195
(진이, 뒤따라 들어간다. 맹첨지는 꼴을 한 다발 안고 외양간이 있는 곡간 사잇길로 들어간다. 이윽고 거복, 목수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온다.)
 
196
거 복  이 나무요.
 
197
목 수  (쳐다보고 둘러보며) 혼자 도저히 안 되겠는걸요.
 
198
거 복  아, 자네 같은 목사가 저까짓 걸 혼자서 못 벤단 말인가?
 
199
목 수  목수하구 나무 베는 벌목이하군 다르죠.
 
200
거 복  잘만 베어봐, 내 돈은 넉넉히 줄 테니.
 
201
목 수  돈두 돈이지만 혼잔 안 되겠는걸요 몇 사람 더 불러야 되겠어요.
 
202
거 복  손이 만으면 자네 앞에 돌아갈 게 적지 않겠나? 혼자서 해보게.
 
203
목 수  혼잔 절대루 못하겠어요.
 
204
거 복  그럼 몇 사람이나 더 불러야 하겠나?
 
205
목 수  오늘 안으루요? 원 참 망령의 말씀두......적어두 사흘은 잡으셔야 해요. 그럴 거 없이 앞집 초국 씨한테 부탁해 보시지요. 그이가 한다면 혼자서 한나절이문 떨어질 겁니다.
 
206
거 복  누군 부탁할 줄 몰라서 못 부탁하는 줄 아나? 사정이 있으니까 그러지. 그래 모두 얼마면 되겠어?
 
207
목 수  한 사람 앞에 하루 백 원은 주셔야겠수다. 일사는 사, 삼사 십이, 한 일천이백 원 가량 먹겠는걸요.
 
208
거 복  (눈알이 튀어나올 듯 놀라며) 일천이백 원?
 
209
목 수  네.
 
210
거 복  그, 그만두구 어서 가게. 일천이백 원이라니, 엿 한 자루 값인 줄 아나?
 
211
목 수  아, 방 한 간 놓는데두 천원씩인데, 사흘씩 골 빳구 그거 안 받구 하겟어요?
 
212
거 복  그러니 그만두란 말이야.
 
213
(목수, 불평만만하야 뭐라구 중얼거리며 나간다.)
 
214
거 복  (목수가 사라지자) 흥, 도적놈의 자식들 해방됐다니까 뭐 먹을 판 난줄 아는 모양이야. 배보다 배꼽이 크지. 그래, 나무 한 그루 쓰러뜨리는 데 일천이백 원이 뭐야? 생 불한당놈들 같으니. (하고 씩씩거린다.)
 
215
(처, 등물을 끝내고 적삼을 입으며 안에서 나온다.)
 
216
처   아직 안 났수.
 
217
거 복  아직 안 났는데, 나오문 어떻해?
 
218
처   ......
 
219
거 복  그러니 도중에서 나왔겠군?
 
220
처   네.
 
221
거 복  각하께서 말씀하시는 도중에 사람들을 헤치구 나오문 어떡해? 사내두 아니구 여편네가? 모두들 쳐다봤을 게 아닌가?
 
222
처   쳐다보긴 나 혼자 나왔어야 쳐다보지요.
 
223
거 복  그럼 또 누가 나왔단 말이야?
 
224
처   막봉이두 나오구, 맹첨지두 나오구, 봉필 아버지, 광복이 영감, 홍손이 색시, 봉술이 오빠, 모두들 우 하구 나옵디다. 그래 나두 그 틈에 껴서 따라 나옥 말았소.
 
225
거 복  그 사람들이야 무식하니까 각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나온 게지, 당신이야 그만한 말씀은 알아들을 텐데 왜 도중에 튀어나온단 말이야?
 
226
(이때 바스켓에 물을 퍼들고 진이가 안에서 나와 앞을 지나간다.)
 
227
거 복  (호통을 치며) 네가 옆에서 쏙삭거렸지?
 
228
(진이, 깜짝 놀라는 바람에 바스켓을 땅에다 떨어뜨린다. 물이 사산한다.)
 
229
진 이  쏙삭거리는 거 보셨어요?
 
230
거 복  보나 안 보나지 뭐야? 그까짓 얘기, 더운데 듣구 있을 거 없이 집에가 우물물에 멱이나 감자구 쏙삭거렸지 뭐야?
 
231
처   그 앤 회장엔 나타나지두 않았습디다.
 
232
진 이  만만한 싹인가 봐. 뭐든지 나한테만 뒤집어 쒸우려구만 하셔. (하고 빈 바스켓을 집어들고 판장 문을 코아 닫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233
(이때 대회장 쪽에서 우레 같은 박수소리와 ‘옳소’ 하는 군중의 환성.)
 
234
거 복  글쎄, 저 고마운 말씀을 마다하구 돌아온담? 군수 영감, 대한양조장 주인, 그 외 애국당 역원들이 얼마나 기분나뻐 했을 거야? 그러니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
 
235
처   당신두 쓸데없이 헐 걱정 안 헐 걱정 다 하구있소 아, 듣다가 저 싫으면 나오는 것이지, 체면이 무슨 체면이겠소?
 
236
거 복  듣다가 저 싫으면 나오다니? 누구 말씀이기에 듣다가 저 싫으면 나온단 말이야?
 
237
처   각하님 말씀 아니라 부처님 말씀이래두 저 싫으면 안 듣는다는데, 중간에 나왔기루 무슨 그리 대단한 큰 일이라구 눈알을 부라리구 이 야단이오?
 
238
거 복  대단칠 않다니? 그게 대단칠 않으면 어떤 게 대단하단 말이야, 응? 가족들의 사상문젠 우리 대국당 간부를 뽑는 데, 내가 또다시 재정부장이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문제하구 중여한 관계가 있단 말이야.오 각하께선 우리 애국당 지부 역원들 가족에겐, 빨갱이는 물론이거니와 분홍이나 회색두 있어선 안 된다구 말씀하셨어.
 
239
처   난 빨갱이두, 분홍두, 회색두 아니오 얘기가 재미ㅣ없으니까 나왔다뿐이지.
 
240
거 복  얘기가 재미가 없다니? 아, 삼천만 민족이 독립해야겠다는 거룩한 말씀이 재미가 없단 말이야?
 
241
처   독립을 하면 뭘 하겠소? 땅두 안 나눠 준다는데......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에 전율하여 손으로 입을 막고 뚝 그친다.)
 
242
거 복  (경천지할 듯한 아내의 의사 외의 말에 쥐어찌는 듯한 기성으로 규한한다.) 뭣이 땅두 안 나눠 준다구?
 
243
처   (공포에 질려 무언) ......
 
244
거 복  땅을 안 나눠 줘?
 
245
처   ......
 
246
거 복  땅을 나눠 주문, 받는 놈은 누구구, 뺏기는 놈은 누구게?
 
247
처   ......
 
248
거 복  응? 뺏기는놈은 누구냐 말이야? 우리집 땅이 어떤 땅인지나 알구 그 따위 소릴 해? 할아버님께서 한국시대 수세관으루 계실 때부터 장만하신 땅이야. 딴 사람들은 거지반 동척한테 뺏기거나 팔아먹었지만, 우리 아버님은 오줌두 맛보구 진국여야만 사셨어. 남이 전기 켤 때 등잔 켜시구, 남이 고기먹을 때 새우젓 자시구 지며 오신 땅이야. 그걸 내가 또다시 물려받아서 이십이년째 전당포를 해오면서 늘린 땅이야. 그 땅 늘리는데 동래놈들한테 악담은 좀 들은 줄 알어? 저주소린 좀 들은 줄 알어? 그 땅을 세무서 검사원 한테 밀주 항아리 뺏기듯 송두리째 뺏길 놈은 누구냐 말이야?
 
249
처   ......
 
250
거 복  굴 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그렇게 다물구만 있지 말구, 말을 좀 해. (하고 마루를 쾅 내리친다.)
 
251
처   아이 깜짝이야. (하고 눈만 꿈벅거린다.)
 
252
거 복  당신이 우리 집안을 망해 놓으려구 왔어, 흥해 놓으려구 왔어? 내가 문전옥답 다 뺏기구, 초국이 아범처럼 쪽박 차구 두만강 변두리루 들어가야 시원하겠어?
 
253
처   애가 왜 당신 집안을 망쳐놓으려구 왔겠소? 내가 왜 당신이 쪽박 차는 꼴을 보구 싶어 하겠소? 당신이 쪽박 차믄 나두 차구 따라가야 할 게 아니오? (하고 도래할 자기들의 운명에 스스로 비감한다.)
 
254
거 복  그런데 왜 나눠 주지 않는다구 재미없다구 그랬어?
 
255
처   영팔이?
 
256
처   네, 그 애가 요전부터 자꾸 일본으루 다시 들어가겠다구 합디다. 오늘 모처럼 구한 벌이자리두 놓치구 했으니 필경 떠나려구 할 거요. 아까 막봉이 얘기가 독립만 되문 나라에서 모두 땅을 나눠 준다구 하셨다구 합디다. 그렇게 되문 영팔이두 땅을 얻어줘서 농살 짓게 하구, 닭두 길르구 돼지두 치게 해서 이 고장에서 살게 할려구 했었소 그래서 어머님 몰래 대회장엘 나갔었던 거요 그랬는데, 그랬는데...... (하고 운다.)
 
257
거 복  당신은 동생놈만 알았지, 시어미나 딸년이나 남편은 몰른단 말이야?
 
258
처   허지만 어디 집에서야 밥 굶소?
 
259
거 복  ......
 
260
처   (멀건히 허공을 응시하며 한 마디 한 마디 푸념을 한다.) 일굽 살에 부모 잃구 남들 학교 댕길 때 그 앤 근처에두 못 가봤어요......열두 살에 일본집에 들어가 그 추운 겨울에두 맨발에 게다짝을 끌구 댕겼구......일본 들어가서두 그렇지, 제 손으로 어떻게 색실 골라 장갈 드니, 누가 색시 경대 하날 사주나, 수저 한 벌을 맹글어 주나......난리통에 세간 나부랭이 다 뺏기구, 조선말두 잘 못하는 여편넬 데리구 하늘 아래 딱 하나인 누나라구 이 알뜰한 년을 찾아오니 밥이나 집은 고사하구 저 잘난 행자나무두 못 내주겠다니......생각하문 생각할수룩 불쌍하구 측은해서 밥을 먹어두 목구멍에 넘어가질 않구, 눈을 붙여두 통 잠이 안 오우. (하고 운다.)
 
261
거 복  (약간 측은한 마음이 들어) 오늘 같은 경사스런 날 왜 찔끔거리구 야단이야? 제 고자에서 살게 될려면 땅만 가져야 맛이겠어?
 
262
처   (솔깃하며) 그럼?
 
263
거 복  아, 벼슬은 못하구, 장산 못해?
 
264
처   벼슬이요?
 
265
거 복  그래. 땅은 못 주지만 정부만 서는 날이문, 자리는 한 군데 넣어 줄 수 있을 거야.
 
266
처   그럼 벼슬을?
 
267
거 복  응, 각하께서 대통령만 되시문, 우리 대국당 간부들은 대개들 중요한 자리에 앉게 될 게야. 나두 도지산 좀 어렵지만 부윤이나 군수쯤은......
 
268
처   (침을 꿀꺽 삼킨다.)
 
269
거 복  그렇게 되문, 영팔이두 내무부장이나 또는 공장 같은 데 지배인쯤은 시킬 수 있게 될 거야.
 
270
처   (다시 한번 침을 삼키며) 부장이나 지배인을요?
 
271
거 복  응, 그러니 기완 참는 김에 좀더 참으라구 그래.
 
272
처   그럼 내 흥녘에 가서 그렇게 이르구 오리다. (하고 광희하여 달려가려고 한다.)
 
273
거 복  아, 맹첨지더러 이르라구 하문 되지 않어? 행자나무는 지금 베어야 할테니 정한수나 떠다 바치두룩 해. (하고 창고로 들어간다.)
 
274
처   (뒤란을 향하여) 맹첨지, 맹첨지.
 
275
(맹첨지, 꼴을 손에다 든 채 나온다.)
 
276
처   빨리 송이산 수용소에 가서 영팔이 좀 오라구 그래.
 
277
(맹첨지, 옷에 풀을 털고 나간다. 혼자 남은 처는 어찌도 좋은지 엉덩이춤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다. 날개가 몸에 돋힌 듯 안으로 들어간다. 나무 위에서 쓰르라미가 한바탕 패우〔dd〕처럼 울어댄다. 한동안. 이윽고 처, 소반에다 냉수 한 대접과 북어 한 마리와 쌀밥 한 주발을 받쳐들고 나온다. 나무 밑에다 내려놓고 정성껏 고사를 지낸다. 뒤이어 거복, 큰 톱을 들고 곡간에서 나온다. 처의 절이 끝나기 기다려 이어 절한다.)
 
278
거 복  (톱 한 끝을 처에게 주며) 붙들어.
 
279
처   (붙들며) 섣불리 베었다가 나무나 괜히 상하지 않겠소?
 
280
거 복  그렇다구 일천이백 원씩 들여서 벨 수 있겠어?
 
281
처   여보, 가장구부터 쳐 놓구 밑둥을 벱시다.
 
282
거 복  화로를 맹글려면 뿌리부터 베러야 돼.
 
283
처   아무리 생각해두 가장구부터 대강 쳐놓구 베는 게 좋겠소.
 
284
거 복  뿌리부텀 베어야 돼. (하고 악을 쓴다.)
 
285
처   에구 고집두......
 
286
(거복과 처, 노출된 뿌리 하나를 고른 후 거적을 깔고 마주 앉아서 쓱싹쓱싹 톱질을 한다. 쓰르라미가 또 한바탕 울어댄다.)
 
287
처   이렇게 당신하구 있으니까 흥부 놀부 얘기 속에 나오는 박을 쓸구 있는 것같구려.
 
288
거 복  (유쾌한 듯) 오래잖아 이 박 속에서 금은보화가 우르르 쏘다져 나올거야.
 
289
처   허지만 놀부처럼 똥이 쏟아져 나오문 어떡허우?
 
290
거 복  방정맞은 소리 다 하구있네.
 
291
처   ......
 
292
거 복  당신한테만 말이지, 이번에 각하께서 강연 나오신 건 남조선 단독정부 때문에 오신 거야.
 
293
처   단독정부라니요?
 
294
거 복  삼팔선 이북은 이북대루 내버려 두구, 우리 남조선만이라두 정부를 세워야겠다구 하시는 거야. 공산당놈들은 그렇게 되면 남선에선 자라 모가지처럼 쑥 들어가구 말 게야. 인민위원회니 농민조합이니 맹글어가지구, 지긋지긋이두 우릴 못 살게 굴더니 이젠 앓던 이 빠지듯 시원하게 됐어. 우리가 미국 사람한테서 정권을 맡게 되면 대신, 국장으로부터 지방의 경찰서장, 역장, 허다못해 동회총대까지두 우리 편에서 할 작정이야.
 
295
처   (황홀해서 듣고 있다.)
 
296
거 복  그렇게 되면 공산당패에서 ‘땅을 농민에게를’ 소릴 감히 해? 당장 잡아다 물고를 낼 테야. (점점 흥분해 온다.) 땅은 절대루 작인들한테 뺏길 염려 없어.집두 뺏길 염려 없구. 은행예금두 뺏길염려 없어. 뺏기긴 커녕 일본놈들 두구 간 땅, 신한공사에 얘기해서 떠맡아 가지구 지금보다 곱은 늘릴 수 있어. 소작료 많에 하구 군소리 하는 놈들은 이루 사정 없이 무 줄거리 자르듯 탁탁 쳐버리구 쌀은 종전대구 또박또박 받아서 저 곡간 속에다 가득히 쌀하놓구 다리 뻗구 살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서울 가 있는 수정이가 대학을 졸업하구 내려오는 대루, 이 집하구 땅을 물려주구 난 맘 턱 놓구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어. 공산당 불한당패들한테 손톱 하나 까닥하지 못하게 하구 고스란히 큰애한테 물려줄 수 있어. 수정이꺼정 가면 사대째야. 할아버님부터 사대째야. (감격하여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297
처   그럼 그 정분 언제나 서게 될까?
 
298
거 복  각하께서 남선 강연을 끝마치구 서울에 돌아가시는 대루 곧 내각 조직에 착수하실 거야. 그러니 불과 며칠 안 남았어.
 
299
(이대 근처에서 뻥 하고 무엇이 폭발하는 소리.)
 
300
거 복  (질겁을 하여 일어서서) 빨리 숨어. 공산당패야.
 
301
(처, 급히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간다. 거복, 곡간 옆에 놓인 장독으로 뛰어 들어간다. 독이 쨍 하고 갈라진다. 왔다갔다 어쩔 줄을 모르다 처에게 바지 밑을 잡혀 마루 밑으로 글려 들어간다. 침묵. 옥수수 튀기는 사나이, 후문 앞에 나타난다.)
 
302
사나이  (고개를 디밀며) 옥수수나 밀이나 쌀이나 튀길 가 없습니까?
 
303
(거복과 처, 안도하여 기어 나온다.)
 
304
거 복  (사나이를 보니 화가 일시에 폭발한다.) 튀길 거 없어. 집을 보구 말을 해, 집을 보구. 어느 모루 보든지 우리집에서 옥수수 튀겨 먹을 것 같어?
 
305
사나이  거 참, 우스운 양반 다 보겠네. 안 튀기문 그만이지 왜 악을 쓰구 야단이야.
 
306
거 복  악을 쓰문 누굴 어쩔 테야? (하고 옆에 세웠던 장대를 집어들고 쫓아나가려고 한다. 옥수수 튀기는 사나이, 겁을 집어먹고 뺑소니를 친다. 거복 장대를 팽개치고 돌아와 마루에 걸터앉는다. 울화가 뻗쳐 어쩔 줄 몰라 씩씩거리며 부채질을 한다.)
 
307
처   (혹 한숨을 내쉬며) 십 년 살 건 감한 것 같소.
【원문】제 2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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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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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세덕(咸世德)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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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발표]
 
  희곡(戱曲)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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