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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동(山童)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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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5
채만식
1934년 발표한 채만식의 작품
1
 
2
……인공화산…… 아우성…… 비명…… 아우성…… 돌덩이…… 돌가루…… 도망질…… 혼잡 혼잡…… 피피피피…… 초산 냄새…… 신음소리…… 말굽소리…… 구보…… 철그럭철그럭…… 처벅처벅…… 줄 내린 모자……누런 각반……
 
3
의사…… 들것…… 호외…… 수배(手配)…… 수색 수색…… 호외……검거…… 긴장 긴장 긴장 긴장
 
4
─ 셋?
 
5
─ 넷…… 허구 부상이 일곱.
 
6
─ 묘허지?
 
7
─ 이(虱) 잡듯 헌다지?
 
8
긴장 긴장 긴장 긴장……
 
9
탕 탕…… 안동 아방궁(安東阿房宮)…… 피…… 포위, 일대사백(一對四百)…… 탕탕탕탕탕탕탕탕
 
10
……탕탕탕탕탕탕탕탕탕탕…… 피피피…… 호령…… 탕…… 피……
 
11
─ 아깝다.
 
12
─ 장쾌하다.
 
13
─ 도보로?
 
14
─ 하르빈에서.
 
 
15
호외
 
16
××××과 ××××××의 통일제휴…… 주소 씨명 원적 직업 전연 불명…… 연령 이십사오 세…… 소지품 전무…… 시체 화장……
 
17
사 년 전.
 
18
웬만큼 깊어가는 가을 어느날이었었다. 아침부터 구죽죽하게 내리는 비는 가을날의 싸늘한 기운을 한층 더 도와 추레하고 음산한 기분이 사람사람의 마음을 무단히 심란하고 궁금하게 하였다.
 
19
백 년을 살아도 철을 모르는 말초신경 시인들은 구슬픈 리듬을, 외로운 어머니는 멀리 간 아들을, 젊은 과부는 오지 못하는 남편을, 세상살이에 어려운 사람은 살림살이를, 그리고 돈이 있고 일이 없는 늙은
 
20
호색한(好色漢)은 젊은 계집의 부드럽고 다스한 살을…… 생각나게 하고 그립게 하는 날씨였었다.
 
21
김상준─ 전날에 순천부사를 살아먹었대서 순천 영감─은 위에 말 한 맨 끝에 속한 사람이었었다.
 
22
수병풍을 둘러친 아랫목에 새빨간 모본단 보료를 펴고 장침에 비스듬히 기대어 발이 넘는 담뱃대를 본 순간 영감은 아직도 옛날 순천부사 시절의 면모가 남아 있다.
 
23
칠십이 가까워 머리와 수염은 혀옇지만 소위 동안 백발(童顔白髮)이란 격으로 그의 얼굴은 불그레하고 혈기가 싱싱하였다.
 
24
그는 무심히 담배를 빨고 누워서 속으로는 계집 생각을 간절히 하였다.
 
25
아침부터 비가 와서 그런지 바둑 친구도 한 사람 아니 오고 늙은이가 혼자 누웠노라면 맛있는 음식과 계집 생각밖에는 더 나는 것이 없을 터인데 순천 영감쯤 해서야 맛있는 음식은 싫어서 아니 먹을 만큼 유족한 터이니까 말할 것도 없고 계집도 얼마든지 마음대로 데리고 놀고 자고 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마침 기회가 공교하게 되어 말하자면 팔자에 없는 번민을 하는 터이었었다.
 
26
그는 소위 ‘팔자 좋은 사람’ 이라는 인종 중에도 가장 웃길에 가는 사람이었었다.
 
27
그는 예전에 순천부사를 지냈다. 백성의 것을 갈퀴질하고 나라로 올라가는 세미를 입을 대어 많은 재물을 숱하게 장만하였다.
 
28
일한합병이 된 지 얼마 아니하여 면직을 당하고는 그의 고향인 전라도 정읍(井邑)에 가서 땅을 사고 집을 새로 짓고 살다가 기미년 이후에는 양복청년이 무서워서 서울로 올라왔다.
 
29
물론 가족 전부가 이사를 한 것이 아니고 한 개밖에 없는 자식─반편에 가까운 구두쇠─과 본처는 그대로 두어 농장을 관리하게 하고 자기 혼자만이 서울로 올라왔다.
 
30
안국동에다 ‘안동 아방궁’ 이라는 별명을 듣는 크고 화려한 집을 지어 놓고 첩을 얻어 살림살이를 하였다.
 
31
첩은 대개가 기생이었으나 남의 집 숫처녀도 있었고 여학생 찌꺼기도 있었고 여배우붙이도 있었다.
 
32
그저 얻어들여서는 한 달쯤 기껏 오래야 두어 달쯤 살고는 다른 놈─아니─ 다른 년으로 갈아 세웠다.
 
33
그처럼 갈아 세우고 세우고 하다가 그때의 최근에 들어온 것이 평양집이라는 기생이었었다.
 
34
그 평양집만은 순천 영감의 혼백을 통째로 점령하여 버렸다. 좀처럼 해서 계집에게 애착을 깊이 두지 아니하는 그로는 전례에 없는 일이었었다.
 
35
그러므로 삼 년이나 가까이 데리고 살되 싫증이 나지 아니하였는데 이번에는 전과 아주 반대로 계집인 평양집이 그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36
평양집이 달아나 버리니까 정이 그만큼이나 깊었던만큼 얼른 다른 계집을 들여세우기가 섭섭하여서 하루 이틀 미루고 오던 터인데 그러느라니까 계집에 그런 꼴을 당해 보지 못하던 그로서는 약간한 고생이 아니었었다.
 
37
그렁저렁 밤이 들었다.
 
38
날은 더욱이 구죽죽하고 음산하여졌다.
 
39
순천 영감은 저녁을 마치고 나서 역시 낮과 같이 궁금히 누워 말 못하는 담배만 피웠다. 방에 불을 조금 때기는 하였으나 방안의 공기는 싸늘하였다.
 
40
밖에서 보슬보슬 내리는 빗소리와 도르락거리는 낙수를 소리가 초초히 들리고 방안에도 전등불이 잠자는 듯 고요히 비쳤다. 매력을 가진 유혹의 밤이었었다.
 
41
그는 말없는 전등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발치에 있는 문갑 위에 놓인 평양집 사진판을 집어 들고 다시 누웠다.
 
42
방금 울듯한 오목한 입과 오이씨와 같이 갸름한 얼굴에 샐쭉한 눈, 날씬한 코가 모두 다 귀엽고 어여뻐만 보였다. 그처럼 귀엽고 어여쁘니만큼 옆에 없는 것이 못견디게 섭섭하고 안타까왔다.
 
43
마침 때를 맞춰 그와 같이 산산한 밤에 전골남비나 보글보글 지지고 시골서 올라온 쩍쩍 들러붙는 전내기 약주를 평양집이 부어주는 대로 대여섯 잔 먹고는 그의 보드라운 알몸을 안고 푸근히 누웠을 맛을 생각하니 금시에 침이 꿀꺽꿀꺽 넘어가고 온몸이 비비 꼬이는 듯하였다.
 
44
생각은 욕망으로 변하고 욕망이 다시 방편을 가르쳐 준다.
 
45
평양집은 이미 옆에 없고 그러면 아무리 하여도 궁금하고 적적한 회포를 풀어버려야 하겠는데 그러면 평양집 대신은 누구?
 
46
순천 영감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계집 하인으로 부리는 옥섬이의 얼굴이었었다.
 
47
평양집이 달아난 후에는 물론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전에도 호색하는 그는 옥섬을 속으로 욕심내지 아니한 것이 아니었었다.
 
48
그러나 그를 산동이와 배필을 지어주겠다고 말을 하였고 따라서 저희끼리도 멀지 아니한 장래에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조금 남은 양심과 체면이라는 것에 거리끼어 차마 손을 대지 못하여 왔었다.
 
49
그러하던 터에 평양집이 나가 버린 후로는 거무스름한 생각이 슬며시 대가리를 쳐들던 차이었었다.
 
50
그는 옥섬의 두릿한 얼굴에 방금 무슨 말을 할 듯이 유혹적으로 생긴 어글어글한 눈과 또 토실한 게 설면자 방석에 누운 듯한 그의 알몸뚱이를 생각하니 다시 더 체면이나 위신 같은 것을 돌아볼 겨를이 생각이 아니하였다.
 
51
마침 산동이가 약을 짜서 알맞게 식혀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원래의 정력도 좋았으나 그래도 삼과 용을 장복하였다.
 
52
그가 약을 마시는 동안에 산동이는 이부자리를 보았다.
 
53
이부자리를 펴놓고 산동이는 웃목에 물러서서 무슨 영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영감은 자리옷을 갈아 입고 나서 이불을 노작거려 보았다.
 
54
무슨 구실로 옥섬이를 불러올까 하다가 마침 이불이 겹이불인 것을 보고 그야말로 묘안이 머리에 떠올랐다. 말은 서울만 시골말 반 섞어.
 
55
“저…… 안에 들어가서 옥섬이더러…… 응…… 이불장에 들은 솜이불…… 좀 얇은 놈으로…… 하나 내갖구 나오라구 해라…… 갖구 나오라구……”
 
56
그래도 좀 무엇해서 산동이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말을 도막도막 끊어 그러나 끝에 가서는 옥섬이더러 가지고 오라는 말을 다져 일렀다.
 
57
산동이는 허리를 굽신하며
 
58
“예─” 대답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영감은 혼자 싱긋 웃었다.
 
59
산동이는 가슴이 더럭 내려앉았다.
 
60
날이 아직은 그다지 춥지 아니한 터이니까 그대로 불이나 좀더 때라고 할 것이고 또 이불을 가져오라고 하더라도 하필 옥섬이더러 가지고 나오라고 하는 것이 아무리 하여도 무슨 일이 저질러지는 것 같았다.
 
61
그러나 한편으로는 설마 저와 짝을 지어주겠노라고 하여 둔 옥섬이를 손을 대지야 아니하리라는 안심도 하였다.
 
62
더구나 전에도 종종 밤은 아니지만 낮으로 영감이 옥섬이를 불러다가 심부름도 시키고 다리도 치게 한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63
언제나 흉가집같이 휑하니 찬바람이 도는 집안이 우수수한 가을비를 맞아 한층 더 음습하고 무시무시하였다.
 
64
안잠자기와 옥섬이가 자고 있는 건넌방에는 전등불만이 환히 켜져 있고 인기척은 고요하게 그쳐졌다.
 
65
큰방은 평양집이 달아난 뒤에 겉문을 굳이 닫아 두었기 때문에 밤이면 우중충하니 무서운 기운이 스며나는 듯하였다.
 
66
산동이는 섬돌 위에 올라서서 잠깐 벼르다가 건넌방을 향하여
 
67
“옥섬아.” 하고 불렀다.
 
68
목소리는 이상하게 떨렸다. 대답이 없다.
 
69
그대로 나아가서 옥섬이가 자느라고 일어나지 아니한다고 핑계를 할까 생각도 나기는 하였으나 어쩐지 그렇게 하기가 죄송스러웠다.
 
70
다시 서너 번 거푸 옥섬이를 불렀다.
 
71
“응응.” 하는 옥섬의 대답 반 잠꼬대 반 소리가 들렸다.
 
72
“옥섬아.” 하고 재차 불렀다.
 
73
“응?” 하는 분명한 대답이 들렸다.
 
74
“좀 일어나거라.”
 
75
“왜?”
 
76
잠깐 동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열리는 문으로 옥섬이가 눈을 비비며 불빛에 싸여 마루로 나왔다.
 
77
“왜 그러우? 잠이 와서 죽겠구만.”
 
78
옥섬의 하는 말은 불평을 말하나 그 말소리는 결코 불평이 없고 다정스러웠다.
 
79
옥섬이의 다정하고 어여쁜 얼굴을 보니 산동의 마음은 또다시 불안스러워졌다.
 
80
“솜이불 한 채만 내오라구 하시더라…… 너더러 갖구 나오라고.”
 
81
“왜 나더러?”
 
82
“모른다 나두.”
 
83
“참 별일두 많네.”
 
84
“어서 가서 내갖구 가자.”
 
85
옥섬이는 정말로 불평스럽게 퉁퉁 걸어가서 닫아 둔 안방문을 활활 열어젖히고 전등불을 켰다.
 
86
으리으리한 방안 짐이 불빛을 받아 무긋한 반사가 방안에 넘쳐흘렀다.
 
87
옥섬이는 문갑 속에 든 열쇠를 찾아서 이불장을 열고 새파란 제병이불 한 채를 꺼내어 마루로 안아다 놓았다. 안아다 놓고는 산동이더러 가고 나가라는 듯이 눈으로 말을 하고 다시 들어가서 방안과 방문을 전과 같이 단속하여 놓아두었다.
 
88
옥섬이는 산동이가 박힌 듯이 근심겨운 얼굴로 서서 있는 것을 보고 갑갑증이 났다.
 
89
“어서 갖구 나가우.”
 
90
“너더러 갖구 나오라신단다.”
 
91
“왜 글쎄 나더러……”
 
92
“나두 몰라.”
 
93
옥섬이는 산동이의 추렷한 태도에 처녀의 본능으로 불길한 예감을 받아 더럭 겁이 난 소리로
 
94
“왜 그러실까!” 하고 긴하게 물었다.
 
95
“글쎄…… 멀…… 내일 아침에 멀 시킬라구 그러실 테지.” 옥섬이가 놀래는 것을 보니 억지로라도 안심을 시켜 주고 싶었다.
 
96
“참말?”
 
97
“그러찮으면 하필 너더러 나오라실라구?”
 
98
옥섬이는 잠깐 생각하다가 원정을 하듯이
 
99
“내 대신 제발 좀 갖구 나가우. 나는 정말 무서워.”
 
100
하고 산동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101
산동이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의심스러운 눈치를 보일 수는 없었다.
 
102
“뭔 아무 염려 말구 가지구 나가 봐라.”
 
103
“참말? 갠찮어?”
 
104
“그럼……”
 
105
“그럼 나는 몰라.”
 
106
옥섬은 당부하듯 안기어 떠밀 듯 턱 마음을 놓고 선선하게 일어서서 이불을 안아들었다.
 
107
산동이가 앞을 서서 사랑으로 나아갔다.
 
108
 
109
옥섬이는 이태 전 그가 열다섯 살 때에 서울로 올라왔다.
 
110
순천 영감의 산지기(山奴)의 딸로서 침선과 모든 범절을 잘 가르쳐서 얌전한 배필을 골라 출가를 시켜주기로 하고 데려온 것이었다.
 
111
만일 옥섬이가 얼굴이 어여쁘지 못하였다 하면 그러한 선택에도 들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옇든 순천 영감은 안잠지기 하나를 고르더라도 제일 조건을 얼굴을 어여쁜 것으로 하였다. (물론 꼭 필요의 필요로만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112
옥섬이는 흔히 시골 처녀에게 보는 바와 같이 아주 순탄하고 말수 없는 계집애였었다.
 
113
그 까다롭고 요사스러운 평양집에게도 질투의 미움밖에는 다른 곳에는 험을 잡히지 아니하였다. 그의 생김생김이나 말썽 많은 집에서 배운 침선이며 다정스러운 천성을 가지면 남의 집 마누랏감으로는 샐 틈 없는 마감이었었다.
 
114
어려서부터 거친 일을 하여왔기 때문에 수족은 험하게 굵었으나 얼굴은 풍더분한 것이 누구나 한번 보면 두번째 돌아보고 싶고 세번째는 욕심이 날만큼 복성스럽게 생겼다.
 
115
더구나 그가 해쭉이 웃을 때에 보이는 덧니 하나가 아주 썩 운치 있게 교태가 있었다.
 
116
이러한 옥섬이를 두었으므로 만일 평양집이 아니었었으면(산동이와 옥섬이를 짝을 지어주기로 한 것도 평양집의 계책이었지만) 벌써 옥섬이는 순천 영감의 개밥이 되었었을 것이다.
 
117
말하자면 평양집은 옥섬에게 대하여 보호자의 격으로 있었던 것이었다.
 
 
118
옥섬이가 그의 생활권 내에 들어오면서부터 산동이의 생활은 이십 세라는 생전에 맛보지 못하던 고운 실로 행복의 수를 놓았다.
 
119
산동이는 아홉 살 적에 정읍에서 순천 영감의 부인이 거지로 돌아다니는 것을 우연히 거두어 길렀다.
 
120
그러므로 그는 그의 아홉 살의 과거를 알지 못하였다. 성도 모르고 이름도 없고 부모도 없고 부모도 알지 못하여 따라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121
그의 나이가 그때에 아홉 살이라는 것도 다른 사람의 짐작이었지 산동이 자신은 알지 못하였다.
 
122
처음에는 영감의 부인이 손에서 길리다가 열두어 살 때부터 순천 영감의 차인꾼으로 이래 아홉 해 동안 서울까지 따라와서 충실한 하인 노릇을 하여왔다.
 
123
그의 생활(?)이라는 것은 직선같이 변화가 없고 단순하였다.
 
124
약을 달이라면 약을 달이고 다리를 치라면 다리를 치고 그저 무엇이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밥을 주면 먹고 잘 때가 되면 자고 일어나야 할 때면 일어나고─ 마치 손에 들고 짚고 가면 따라오는 순천 영감이ㅡ 지팡이와 같이 담배를 넣고 불을 붙여 빨아들이면 연기가 나오는 순천 영감의 담뱃대와 같이 걸림성 없고 말수 없이 쓰고 싶은 대로 쓰이는 한개의 도구(道具)로서 십 년 동안을 살아왔다.
 
125
그는 외부의 사회와 아무 간섭이 없이 살았다. 따라서 세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126
안다고 하면 다만 다른 사람들도 그저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심부름을 시키면 심부름을 하고 살아간다고만 생각할 뿐이었었다.
 
127
그러므로 그는 장래라는 것도 생각하여 본 적이 없었다.
 
128
그저 은혜로운(그는 순천 영감의 부처에게 깊은 은혜를 느끼고 있었다) 순천 영감에게 한평생 시중을 들고 시키는 일을 어김없이 복종하면서 살아갈 터이었었다.
 
129
그처럼 살아가자니 세상에 별로이 어렵거나 고생스러운 것도 없거니와 그 반면에는 재미스럽고 행복을 느낄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130
남에게 다정히 굴어본 적도 없거니와 남의 정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131
그러나 원래의 저능아는 아니었었다. 환경이 바뀌고 또한 생리적으로 변화가 생김에 따라 그의 마음에서도 정의(情意)의 싹이 돋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옥섬이가 그의 생활권 내에 들어온 때부터였었다.
 
132
옥섬이가 올라오던 날부터 그의 마음은 공연히 기쁜 것 같았다.
 
133
아직 철이 훨씬 들지도 아니하였으나 그렇다고 어린애도 아니요 토실토실하니 어여쁘게도 생기고 아담스럽게도 생긴 옥섬이가 말할 수 없이 귀여웠다.
 
134
그 심리는 마치 좋은 인형을 가져보지 못하던 소녀가 상점의 진열장에 놓인 인형을 가지고 놀고 싶어하는 것과 흡사하였다.
 
135
같이 앉아서 나이도 물어보고 저의 집안 이야기도 들어보고 손도 좀 만져보고 얼굴도 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136
옥섬이가 무슨 일을 좀 잘못(?)하다가 평양집한테 꾸지람을 듣거나 또는 침모나 안잠자기 마누라에게는 시골뜨기라고 조소를 받는 것을 볼 때에는 성이 버럭 나고 옥섬이를 곧 그저 어디로 데려다가 숨겨 두고는 잘 어루만져 주고도 싶었다.
 
137
반 년 가량이 지나 둘 사이에 제법 낯이 익어지고 또 주인의 심부름때문에 오며가며 말마디씩이나 하게 된 때의 일이었었다.
 
138
영감과 평양집은 저녁을 먹은 뒤에 극장으로 구경을 가고 침모와 안잠자기도 어디인지 다니러 나가고 사랑에는 산동이가 안에는 옥섬이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139
산동이는 빨아 말린 양말이 구멍이 뚫어져서 그것을 꿰매려고 하였으나 마침 실이 없었다.
 
140
에라 겸두겸두해서 조용한 틈에 옥섬이와 이야기 좀 하여보리라…… 고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141
안에는 방방이 모두 불만 환하게 켜져 있고 인기척은 고요하였다.
 
142
산동이는 섬돌 위에 올라서서 컴 하고 밭은기침을 하였다.
 
143
옥섬이가 벌써 자는가 하고 도로 나오려다가 시험삼아 건넌방을 향하여
 
144
“옥섬아.” 하고 조용히 불렀다.
 
145
대답 대신 문이 열리며 옥섬이가 얼굴을 내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반가와는 하면서 그래도 좀 의외로와하는 눈치가 보이는 듯하였다.
 
146
산동이도 공연한 짓을 하였다 싶어 후회를 하였으나 그대로 우물우물할 수도 없었다.
 
147
“저…… 검은 실…… 조꼼만 다구.”
 
148
옥섬이는 해쭉이 웃으며 마침 옆에 놓고 쓰던 바느질 광주리에서 검정 실패를 찾아가지고는
 
149
“검정실은 무엇하게?” 하고 물었다.
 
150
산동이는 대답하기가 퍽 거북하였다. 할 수 없으니까 제 손으로 양말구멍을 꿰매어 신는 것이지만 그것을 옥섬이에게 말하기는 어쩐지 계면쩍은 생각이 났다.
 
151
“저…… 좀 쓸라구.”
 
152
“글시 무엇에다 써?” 하고 옥섬이는 손에 든 실패를 등 뒤로 감추었다.
 
153
“무엇이다 쓰던지……”
 
154
“일러주야 주지……”
 
155
“꼭 알고 싶으냐?”
 
156
“응.”
 
157
“저 양말 좀 꾸매 신을라구.”
 
158
옥섬이는 하하 하고 웃었다. 산동이는 더욱 무렴하였다.
 
159
“그 말 허기가 그렇게 어려워서?”
 
160
“누가 어려워서 그러냐?”
 
161
“그럼?”
 
162
“그럼 뭣……”
 
163
“이리 주…… 내가 꾸매 주께.”
 
164
그 말에 산동이는 날개가 돋칠 듯이 기뻤다. 옥섬이가 퍽 자기에게 고맙게 구는구나 생각하고 눈에서 방금 눈물이 쏟아질 듯이 가슴이 벅찼다.
 
165
“니가 꾸매 줄니?”
 
166
“응.”
 
167
“내가 신던 양말인디?”
 
168
“신던 양말은 못 꾸매는 법인가?”
 
169
“그래 그럼 가서 갖구 오마.”
 
170
산동이는 발이 땅에서 떠오르는 것같이 가분가분하였다. 얼른 그러나 그중에도 좀 덜 꿰진 놈 한 켤레를 골라가지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171
옥섬이는 마침 바늘에 실을 꿰어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172
그는 산동이가 말없이 주는 양말을 말없이 받아가지고 문턱 안에 쪽 흩뜨리고 앉아 바느질을 시작하였다.
 
173
산동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앉았다.
 
174
“옥섬아.” 하고 불렀다.
 
175
“응?”
 
176
산동이는 불러는 놓고 별로 할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평소에 하여 보고 싶은 말이 많이 있었지만 웬 일인지 꽉 막히고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177
옥섬이는 불러놓고 왜 말이 없느냐는 듯이 고개를 돌려 산동이를 바라보았다.
 
178
산동이는 할 수 없이 아무 말이나 꺼냈다.
 
179
“일하기 고되잖데?”
 
180
“아 아니.”
 
181
“시골 늬 집에 있을 때하구 어떻던?”
 
182
“몰라.”
 
183
옥섬이는 고개를 쌀쌀 내둘렀다.
 
184
“어디가 존지를 몰라?”
 
185
“몰라.”
 
186
“집 생각 안 나데?”
 
187
“몰라?”
 
188
“오래비(오빠) 있냐?”
 
189
“없어.”
 
190
“동생은?”
 
191
“없어.”
 
192
“너 혼자뿐이구나?”
 
193
“응.”
 
194
옥섬이는 바느질을 하고 산동이는 하늘하게 불에 환히 비치는 옥섬이의 얼굴과 얌전스럽게 움직이는 손끝을 번갈아 바라보며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195
“바느질은 언제 그렇게 잘허냐?”
 
196
옥섬이는 수줍은 생각에 고개를 숙여버렸다.
 
197
“내가 뭘 잘한다구……”
 
198
“침모가 칭찬이 아주 놀랍더라.”
 
199
“피……”
 
200
옥섬이는 꿰진 양말을 잘 접어 도닥도닥 하여가지고 산동에게 내주었다.
 
201
산동이는 그것을 받아들고 감격에 넘쳐 잠깐 동안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202
“고맙다.”
 
203
“누가 그런 소리 하라고 하나?”
 
204
“나는 정말 고마워서 그러는디 그래?”
 
205
“고맙기는 무엇이 고마워?”
 
206
“너 같으면 안 고맙다겄냐?”
 
207
“그럼.”
 
208
“허허허허.”
 
209
“후제도 내가 꾸매주께 무엇이던지 갖다주우 응?”
 
210
“뭘……”
 
211
“무어 뭘…… 그리고 속옷이랑 내가 잘 빨어주께.”
 
212
이때부터 산동의 생활은 새로와졌다.
 
213
그의 마음은 즐겁고 가벼워지고 그의 옷과 먹는 것은 산뜻하고 다스워졌다.
 
214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국문을 혼자 공부하고 사랑에 놀러오는 영감들에게 글 이야기를 듣고 그리하다가 신문을 읽고 잡지 조각 같은 것을 읽었다.
 
215
그는 무어나 알고 싶었다.
 
216
그리하여 그는 신문의 사회면 기사쯤은 띄엄띄엄 읽을 수가 있게 되었다.
 
217
그것을 읽는 동안에 그는 전에 벼르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었다. 따라서 옥섬이에게 이야기할 거리도 장만하였다.
 
218
그것은 물론 한심한 지식이었었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요, 안개 둘린 풍경을 바라보는 것 같은 것이었었다.
 
219
또한 그가 그러한 적은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자기라는 인생을 연구할 만한 것도 못되었었다.
 
220
그의 마음만은 더 알고 잘 알아서 옥섬이에게 변변한 사람이 되어보이고 싶은 생각이 언제나 간절하였고 또 한심하게나마 노력만은 계속하였다.
 
221
그러는 동안에 옥섬이를 귀여워하는 즐거운 이태가 지나고 그것이 한겹 더하여 옥섬이를 아주 자기의 아내로 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때에 그의 행복은 하늘 끝까지 올라간 듯하였다.
 
222
옥섬이를 아내로 삼아 아무도 없고 옥섬이가 주인이요 자기가 주인인 자기네 집에서 옥섬이와 한가지로 살아갈 것이 그에게는 꿈인 듯싶게 즐거운 희망이었었다.
 
223
 
224
바스스하는 빗소리, 똑똑 듣는 낙수물 소리, 그리고 가끔 가다가 늦은 전차, 자동차의 는 소리가 처량히 울려오고 건너 큰방에서는 영감에게 붙잡혀 앉은 옥섬이가 다리 치는 소리가 한시경을 잊은 듯이 토닥토닥 들려왔다.
 
225
산동이의 긴장된 신경은 조금 누그러지고 종시 일이 없으려나보다 싶어 무겁던 가슴도 적이 가벼워졌다.
 
226
얼마 후엔지 영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227
산동이는 가슴이 다시 더럭 내려앉으며 귀는 저절로 기울어졌다.
 
228
“좀 쉬었다가 쳐라.”
 
229
다시 얼마 동안 침묵이 계속되다가
 
230
“옥섬아.” 하고 영감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231
옥섬이가 대답을 하였는지 아니하였는지는 모르나 말소리는 들려오지 아니하였다.
 
232
“네가 지금 멫 살이지?”
 
233
“………”
 
234
“응…… 열여달…… 인제는 시집갈 나이가 되었구나.”
 
235
“이리 가까이 온.” (가까이 오너라.)
 
236
“………”
 
237
“허, 그년이……”
 
238
영감의 목소리는 약간 거칠어졌다. 잠깐만에 옥섬의 소리가 명백히 들려왔다.
 
239
“놓아주세요.”
 
240
“네가 요년 산동이를 생각하고 그러는가 부다마는 산동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241
“놓아주세요.”
 
242
“요년!”
 
243
영감의 호통 소리가 들리며 무엇인지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영감은 준절히 꾸짖었다.
 
244
“요년이 원 철을 몰라서 이러지…… 네가 요년 이렇게 고집을 부리면 내가 그만둘 줄 아니? 위선 네 어미 네 아비가 어떻게 될지를 몰라?”
 
245
“………”
 
246
영감의 목소리는 다시 나직하고 타이르듯이 순순하여졌다.
 
247
“그러구저러구 간에 내가 한번 하구 싶은 것이면 그만두진 않는다…… 그러지 말구 이리와…… 네 신세가 오즉이나 잘 되겠니?”
 
248
산동이는 끝까지 옥섬이가 반항하는 말을 듣고 싶어 침을 삼키고 등에 땀을 흘리며 귀를 기울였다. 그의 눈은 장지문을 뚫고 다시 벽을 뚫고 건넌방을 투시할 듯이 열이 번득하였다.
 
249
한참 동안 고요히 아무 말이 없다가 문득 옥섬이의 흑흑 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250
또 조금 있다가는
 
251
“아이구아얏!” 하는 옥섬의 비명이 들렸다. 그것은 아픔을 참지 못하여 무의식중에 부르짖는(얕고도 모진 품이) 창자가 끊기는 듯한 비명이었었다.
 
252
그 소리와 아울러
 
253
“가만 있어…… 괜찮다.” 하는 영감의 허덕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254
산동이는 주먹을 불끈 쥐고 벌떡 일어서서 눈이 찢어지도록 건너 큰 방을 향하여 흘겼다.
 
255
그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리고 이는 보드득 갈렸다. 그는 문을 확 잡아 열듯이 몸을 앞으로 내어밀다가 무슨 큰 힘에게 잡아 끌리는 듯이 뒤로 물러섰다.
 
256
또 한번 옥섬의 비명이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산동이는 “으악” 소리를 치며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어버렸다.
 
 
257
산동이는 옛이야기에서 들은 염라대왕의 사자처럼 흉하고 무섭게 생긴 순천 영감이 한손으로 옥섬이를 움켜쥐고 또 한손으로 자기를 잡으려고 덤벼드는 것을 옥섬이를 구하여 낼 겸 자기 몸을 피할 겸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문득 잠이 깨었다. 잠이 깨었다는 것보다도 정신을 차렸다.
 
258
그는 꿈과 생시를 확실히 구별치 못하여 아직도 그 무서운 귀신이 옆에 가까이 덤벼드나 하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259
그는 꿈과 생시를 확실히 구별치 못하여 아직도 그 무서운 귀신이 옆에 가까이 덤벼드나 하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260
때는 이른 아침이었었다. 전기불이 켜져 있는 채 창문은 훤하게 밝았다.
 
261
밤새에 비가 개고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아니하고 듣다 남은 낙수물 방울이 잊을 만하여서 한 방울씩 툭툭 내려졌다.
 
262
산동이는 차츰차츰 정신을 가다듬어 지난밤의 일을 처음부터 조금씩 생각하여 보았다.
 
263
그의 기억이 점점 이 사건의 절정으로 가까워가다가 맨 나중에는 그의 귀에는 옥섬의 부르짖던 비명과 영감이(보지 아니하여도 입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가만 있거라 가만 있어” 하던 소리가 눈에 보이는 것같이 완연히 들려오는 듯하였다.
 
264
그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몸서리를 쳤다.
 
265
그는 지난밤에 옥섬이의 일이 되어가는 것을 엿듣느라고 그저 흘려들은 영감의 한마디 말을 문득 생각항 냈다.
 
266
“네가 요년 산동이를 생각하고 그러는가 부다마는 산동이쯤 아무것도 아니다……”
 
267
이 말의 뜻을 되풀이하며 그 뜻을 새겨보고는 그는 이를 보드득 갈았다.
 
268
옥섬이로 인한 분과 자기로 인한 분이 한데 뭉쳐 당장 분풀이를 하고 싶었으나 그러나 그에게는 순천 영감이 감히 침노하지 못할 무서운 사람이었다.
 
269
그렇다고 그는 그 분함을 잊을 수는 없었다.
 
270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사뭇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분한 눈물, 원통한 눈물, 그리고 옥섬을 생각하는 눈물, 여러 가지 눈물이 합쳐 흘러내리는 것이었었다.
 
271
실컷 눈물을 흘려 울고 나니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은 가뿐하여진 것 같았다.
 
272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에 번쩍 떠올랐다.
 
273
“에랏!”
 
274
그는 자기 스스로가 놀랄 만큼 소리를 치고 덮었던 이불을 걷어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275
“분하다. 분하다. 이놈의 세상……”
 
276
그는 이부자리를 걷어 치워놓고 벽에 걸린 당목 두루마기와 모자를 내려쓰고 밖으로 나왔다.
 
277
비가 갠 가을날의 아침 하늘에는 가벼운 안개가 자욱이 끼고 산뜻한 바람끝이 사람의 정신을 쑤시어 깨는 듯하였다. 날은 아주 환하게 밝아졌다.
 
278
뜰앞 화초밭에서 참새가 두어 마리 재재거릴 뿐 사람의 기척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279
산동이는 잠깐 아무것도 다 잊어버리고 타성적으로 영감의 시중을 들으러 갈 듯이 몇 걸음 방으로 향하여 걸어가다가 다시 정신을 차려가지고
 
280
대문간으로 향하고 나아갔다.
 
281
그는 영감의 집에서 영영 나가는 길이었었다. 나가느라고 마지막 발길이 대문 밖으로 나서질 때 그는 옥섬이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282
차마 그는 그대로 가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발부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283
안 부엌에서는 안잠자기가 아침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산동이가 의관을 차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284
“어디를 이렇게 일찍 갖다 오우?” 하고 물었다.
 
285
“갔다 오는 게 아니라 가는 길이우.”
 
286
산동의 마음은 아주 평탄하고 침착하였다.
 
287
그는 옥섬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응당 그러리라고 생각은 하였으나 그래도 물어보았다.
 
288
“옥섬이는 어디 갔수?”
 
289
“응…… 참 그애가 웬일이우? 자다가 깨어보니까 자꾸만 울고 있겠지, 왜 그러냐고 물어야 대답두 않구…… 웬일이라우?”
 
290
이렇게 지껄이다가 그는 산동이의 눈이 역시 팅팅 부은 것을 보고 더구나 이상히 여겨
 
291
“이잉 저것 보게, 산동이도 울었구만? 아이구 이게 웬일들이라우?”
 
292
하고 무슨 큰일이나 난 듯이 걱정을 하였다.
 
293
“내야 왜 울었겠소만…… 그래 옥섬이는…… 인제는 자우?”
 
294
“자는 게 무어야, 지금도 울고 있지…… 좀 들어가 보구려, 나는 웬 셈인지를 모르겠어.”
 
295
산동이는 장성한 뒤로는 별로이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안방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296
산동이가 들어오는 것을 알았던지 옥섬이는 이불을 무릅쓰고 얼굴을 가렸다.
 
297
산동이는 한참이나 그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가 옥섬의 옆에 가 앉았다.
 
298
“옥섬아.”
 
299
부르는 산동이의 음성은 전과 같이 다정하면서도 비통하였다.
 
300
옥섬이는 대답이 없고 느껴 흑흑거리는 소리만 가늘게 들렸다.
 
301
“옥섬아, 나는 간다.”
 
302
이 말에는 옥섬이가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앉아서 놀라운 눈으로 산동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303
치마 주름이 뜯어지고 머리는 쑥대같이 흐트러졌다. 밤 사이에 홀쭉하게 야위고 두 눈두덩만이 팅팅 부어서 눈을 잘 뜨지 못하였다.
 
304
옥섬이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이 새로운 눈물만 떨어뜨렸다.
 
305
산동이는 모든 인연을 단념하는 듯이 한숨을 후 내어쉬며
 
306
“잘 있거라.” 하고 옥섬의 손을 잡았다.
 
307
“가면 어디로 가우?”
 
308
“글쎄……” 하고 산동이는 생각하다가 문득 신문에서 자주 보던 만주라는 곳이 생각이 났다.
 
309
“만주라는 데가 있다는데……”
 
310
옥섬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치었다.
 
311
“먼가?”
 
312
“멀구말구.”
 
313
“나도 갈 테여.”
 
314
“너는 못 간다.”
 
315
“왜?”
 
316
“멀기두 멀지만 나 혼자 몸뚱이도 어찌 될지 모르는디 니가 어떻게……”
 
317
“그럼 나는?”
 
318
이 말에 산동이는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둘 사이에 든 정도 정이려니와 귀신 같은 순천 영감에게 차마 어떻게 불쌍한 옥섬이를─ 자나깨나 저렇게 부대껴 울고 지내다가 필경 가서는 전에 다른 첩들이 쫓겨나듯이 쫓겨나 버릴 옥섬이를 차마 두고 혼자 갈 수가 없었다.
 
319
그러나 또 한편으로 앞일을 생각하니 데리고 갈 수도 없는 일이었었다. 더구나 지난밤 일을 생각하니 옥섬이를 보아도 몸서리가 나는 듯하였다.
 
320
그는 옥섬이게게 대고 ‘왜 어젯밤에 죽도록 발악을 못하고 영감의 위협하는 소리에 넘어갔느냐’ 고 족쳐주고 싶었으나 지금 와서 그 말을 하였다 도리어 갈리는 터에 섭섭만 할 것이고 또 자기 역시 어젯밤 그 자리에서 눈을 끔벅끔벅 뜨고 바라보고만 있던 일이 옥섬이더러만 큰소리를 할 기운이 나지 아니하였다.
 
321
그리하여 그는 다만 고개를 흔들면서
 
322
“못 간다 너는…… 내가 이렇게 나가는 것이 너를 띠어놓고 가서 나혼자만 잘 되어볼라구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 분을 품구 사람이 그대루 살어가면 무얼 하니?”
 
323
이 말은 산동이가 문득 생각이 나서 한 말이었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두고두고 그 말을 지킬 결심을 하였다.
 
324
옥섬이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는 처참하고도 숭엄한 결심의 빛이 완연히 나타났으나 산동이이로서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325
“그러면 잘 가우.”
 
326
“오냐.” 하고 산동이는 대답은 하였으나 나오는 말이 목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눈에서 눈물이 줄기로 쏟아졌다.
 
327
옥섬이도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다가 견디다 못하여 와락 산동의 목을 끌어안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328
산동이도 옥섬이를 마구 끌어안고 울었다.
 
329
서로 붙어안고 울고 또 울고 실컷 맘껏 울었으나 솟아오르는 설움은 그치지 아니하였다.
 
330
“잘 있거라.”
 
331
“응…… 날 잊지 마우.”
 
332
“오냐 죽는 날까지 안 잊고 있으마.”
 
333
“나두 안 잊으께.”
 
334
“오냐. 너두 잊지 말어라.”
 
335
“나두 대문간까지 갈 티여.”
 
336
“그래라. 같이 나가자.”
 
337
두 남녀는 앞서고 뒤서고 마루로 나왔다.
 
338
안잠지기는 보고도 못본 체 부엌에서 일만 하였다.
 
339
옥섬이는 산동이를 따라 마당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한참이나 있다가 무엇인지 종이에 싼 것을 주먹에 쥐고 나왔다.
 
340
해는 벌써 길이 넘게 솟아오르고 찬 안개는 고요히 벗어져가기 시작하였다.
 
341
문앞 길거리에서는 오고가는 두부장수들의 외치는 소리가 요란히 들렸다.
 
342
옥섬이는 산동이와 나란히 서서 걸어가다가 안중문 옆에 있는 우물가에 발을 멈추었다.
 
343
“그러면 잘 가우.”
 
344
“오냐 잘 있거라.”
 
345
눈물은 다시 쏟아져내렸다.
 
346
“날 잊지 말구……”
 
347
“오냐 잊어버리다니 될 말이냐.”
 
348
옥섬이는 손에 쥐었던 것을 산동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349
“이건 두었다가 시장한 때 요기나 하우.”
 
350
“그건 무어냐?”
 
351
“돈…… 아버지가 내려갈 때 주신 것하구 또 마나님(평양집)이 나갈때 준건디……”
 
352
“오냐 고맙다.”
 
353
“그러구 이건” 하고 옥섬이는 제 손에서 은반지를 뽑아 산동이에게 끼워주며
 
354
“날 잊어버리지 말라는 표루……”
 
355
“오냐 이것이 없다구 잊어버리겠냐만……”
 
356
“옷이 저렇게 검어서 인제 누가 빨아주?”
 
357
“옷 같은 것이야 걱정 없다만……”
 
358
그들은 두 손을 서로 잡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서로 바라보았다.
 
359
“잘 있거라.”
 
360
“잘 가우…… 그러구 잊지 마우.”
 
361
“오냐.”
 
362
산동이는 발을 돌이켰다. 두어 걸음 걸어갔을 때에 옥섬이의 “잘가라”는 소리가 들렸다.
 
363
그가 몸을 돌이켜 대답을 하려고 보니 옥섬이는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우물 속에서 쏟쳐 내려가는 소리로 “잘 가라”는 옥섬의 목소리만 감감히 들리고는 뒤미처 철부덩 하는 물소리가 울려나왔다.
 
364
그는 그 자리에 박힌 듯이 꾸욱 서서 한참이나 생각을 하다가 주먹을 가슴이 터져라고 불끈 쥐고 눈이 찢어지도록 사랑방을 향하여 흘겼다.
 
365
솟는 해는 여전히 빛나고 참새도 무심히 지껄이고 문밖 길거리에서는 두부장수 소리가 역시 무관심하게 들렸다.
 
366
산동이는 발길을 돌려 기운차게 대문밖으로 걸어나갔다.
【원문】산동(山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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