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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介(논개)의 還生(환생) ◈
◇ 在世篇(재세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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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5∼8
김동인
1
論介(논개)의 還生(환생)
2
在世篇(재세편)
 
 
3
논개는 패연이가 되었다.
 
4
환생한 논개 ―.
 
5
변하여 패연이 ―.
 
6
이중의 성격, 이중의 이성, 이중의 사상, 이중의 눈을 가진 기이한 사람의 이중의 생활은 여기 시작되었다.
 
7
오전은 논개 오후는 , 패연이 ―. 밤잠을 푹 자고 난 이튿날 아침의 이 기생은, 영락없는 논개였다. 그 마음, 그 사조, 그 기억력, 그 성격, 어느 것이든 삼백여 년 전 모곡촌육조와 남강에 몸을 던지기 전의 논개였다.
 
8
그러나 그 시대착오의 논개가 오정쯤 피곤한 낮잠을 푹 자고 다시 깰 때는 삼십이년도의 쾌활하고도 모던인 패연이로 변하는 것이었다.
 
9
논개는 패연이를 놀랐다. 패연이는 논개를 놀랐다. 한 몸집을 쓴 두 가지의 성격은 오전과 오후에 서로 번갈아가며 놀랐다.
 
10
처음 이삼 일 동안을 그는 그냥 누워 있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패연이라 하여 친척들도 그만치 대접하여 주었다. 그동안부터 오전의 패연이는 연하여 놀라고 놀랐고 하였다. 모든 현대의 문명이 그에게는 경이였다. 변하였으리라. 변하였으리라. 온갖 것이 놀랄 만치 변하였으리라. 이렇게 미리부터 든든히 마음먹고 다시 피어난 그였지만 이 너무도 변함에는 놀라지 않으려야 놀라지 않을 수가 도저히 없었다. 아직도 논개의 기억만 새롭게 가지고 패연이의 기억은 도무지 못 가진 그는 연하여 놀라고 놀라고 하였다.
 
11
약을 넣은 투명되는 병, 머리맡에 걸려 있는 커다란(놀랄 만치 똑똑한) 거울, 화장하는 약품을 넣었다는 아름다운 그릇들, 시계라는 오묘한 기계, 천하고 천하여져서 행랑 아범의 이빨에까지 붙은 황금, 양복이라 하는 옷 ― 변한 풍속, 변한 제도, 변한 습관, 변한 문화, 이런 것들을 처음 볼 때마다 놀라지 않으려고 굳게 마음먹고 있던 패연이였지만 놀라지 않을 수가 도저히 없었다.
 
12
그러나 낮잠을 한잠 푹 자고 난 뒤의 패연이는 온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하였다.
 
13
오전에 자기가 경이로써 바라보았던 그 기억을 오히려 경이로써 회상하는 그였다.
 
14
패연이는 시계를 들어 본다. 오전에는 그렇듯 오묘하고 기이하여 보이던 그 기계 ― 그러나 그것은 아무 기이도 없었다. 이치까지는 모르지만 가장 작은 바늘이 한 바퀴 돌면 한 분이요 큰 바늘이 한 바퀴 돌면 한 시간이며, 중침이 한 바퀴 돌면 한나절 ― 그리고 그 돌아가는 것은 태엽을 감아 주기 때문에라 하는 일을 잘 아는 패연이에게는 오전에 그 기계를 들고 경이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던 자기가 오히려 경이였다.
 
15
나를 버리고 가신님은 십리를 못가서 발병이나.
 
16
시계를 들고 번번히 누워서 콧노래를 하며 오전의 자기를 경멸하고 경멸하고 하였다 지금은 어린애들일지라도 . 돌아보지도 않는 병(물분을 넣었던 빈 병)을 들고, 그것이 너무도 아름답고 신기하여 요리조리 돌려보던 오전의 자기를 회상하여 보고는 스스로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고 하였다. 그리고 그 창피한 짓을 하고 있을 동안에 누가 자기를 본 사람이나 없나 하고 스스로 혀를 채고 하였다.
 
17
밤잠을 잔다. 오전이 된다.
 
18
그때 깨어나는 패연이는 온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하였다. 몇 시간의 밤잠은 그로 하여금 삼백여 년의 기간을 무시하고 옛날의 아름답고 겸손한 품성과 성격을 가진 의기 논개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19
그는 현대의 놀랄 만한 문명에 경이의 눈을 던지는 동시에, 또한 변하고 변한 습관에 경이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20
오후에 자기의 병을 위로하러 찾아온 손님들에게 긴 상에게는 오른손을, 이 상에게는 왼손을 잡히우고, 머리는 박 상의 무릎에 놓고 발로는 최 상을 꾹꾹 찌르며 웃고 지껄이던 자기를 회상하고는 그 너무도 파렴치하고 너무도 뻔뻔스러움에 놀라고 하였다. 이런 짓은 삼백 년 전에는 색주가라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21
일찌기 논개를 인간 세계로 돌려보낼 때에 태백성은 논개에게
 
22
“지금 세상은 남녀가 평등이라.”
 
23
하는 말을 하였다. 혹은 자기의 그 행동이 거기서 나온 바인지는 알 수 없다. 평등이므로 사내들 앞에서도 자빠누워서 발버둥이를 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잘 생각하여 보면 그 행동은 더욱 자기의 지위와 처지를 낮추 한 데 지나지 못하였다.
 
24
오후의 기억은 어느 것이든 오전에 생각해 보면 숙스럽고 뻔뻔스러웠다.
 
25
생각한 일, 행한 일, 모두가 얼굴 붉힐 만한 창피한 짓이었다.
 
26
그러나 또한 낮잠을 한 번 자고 오후가 되기만 하면 오전의 일이 부끄럽기가 한이 없었다. 유성기의 앞에서 너무도 신기하여 ‘어디 사람이 숨어 있지나 않은가’고 유성기 속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 꼴은 생각만 하여도 부끄러웠다.
 
27
뿐만 아니라 그 사상에 있어서도 오전에는 그만치 숙스럽고 뻔뻔스런 행동이라고 스스로 얼굴을 붉히던 그 행동이 조금도 부자연하지를 않았다. 기생이란 웃음을 파는 직업 ― 그것이 정당한 직업이요 직업의 필요상 행한 수단인 이상에 거기 무슨 뻔뻔스럽다고 스스로 얼굴 붉힐 일이 존재할 까닭이 없다 먹기를 위하여서 남의 . 애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직업이나 먹기를 위여서 남의 사내들을 얼러대는 기생이라는 직업이나 다 마찬가지로 정당한 직업인 이상에는 교사가 남의 애들에게 웃기 싫은 웃음을 웃는 것이나 기생이 남의 사내들에게 피우기 싫은 아양을 피우는 것이나 다 일반일 것이다.
 
28
그것을 숙스럽다 뻔뻔하다고 비웃는 것은 너무도 시대를 모르는 일이다. 오전의 자기는 너무도 도학적이다.
 
29
― 이리하여 오전과 오후에 각각 딴 사람같이 달라지는 기괴한 생활이 거듭되었다.
 
30
패연이는 오전에 오전의 자기를 비판하여 보았다. 거기는 아무 불합리한 일도 없었다. 어제 오후에도 그같이 어리석다고 비웃던 생각이며 행동이 조금도 불합리하다고 별스러운 점이 없었다.
 
31
오후에는 또한 오후의 일을 비판하여 보았다. 그것 또한 오전의 일과 마찬가지로 너무도 합리적이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32
오전의 일은 어디까지든 오전에는 정당하였고 또한 (그와 정반대인) 오후의 일이 오후에 생각하면 어디까지든 정당하였다.
 
33
오전에는 오전의 흠을 알 수가 없었다. 오후에는 오후의 흠을 알 수가 없었다.
 
34
여사여사하니 오후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분명히 비판하던 그 이론의 가장 자세한 곳까지도 오후에도 넉넉히 생각은 있지만 오전에는 그렇듯 정당하던 이론조차 오후에는 한낱 억설이나 궤변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35
오후의 일은 또 오전에 그와 같이 보였다.
 
36
요컨대 낮잠 전에 자기와 낮잠 뒤의 자기의 새에는 도저히 서로 이해할 수가 없는 크고 또 큰 구렁텅이가 있었다.
 
37
여기서 패연이는 어떻게든 자기를 한 가지로 통일을 하여보려고 정하였다.
 
38
비록 그의 이성이며 성격은 그와 반대되는 때가 있다 하지만 겉으로라도 가식할 통일된 패연이를 만들어 보려 하였다.
 
39
오후의 자기를 오전의 자기로서 고칠까. 오전의 자기를 오후의 자기로 고칠까.
 
40
오전에 생각하면 자기를 오전의 모양으로 통일하여야만 좋을 것 같았다.
 
41
그러나 오후에 생각하면 오후의 자기가 옳은 듯하였다.
 
42
이리하여 오전과 오후 그 어느 모양으로 자기를 통일할까고 얼마 생각한 뒤에 패연이는 마침내 오후의 자기로써 표준을 삼기로 결심하였다.
 
43
오후에 생각하면 오후가 좋을 것 같고 오전에 생각하면 오전이 좋을 것 같아서 좋고 나쁜 데 대한 판단은 얻을 수가 없으되 현대 이십세기에 살아 나아가는 이상에는 지금 풍속이며 습관에 어울리는 오후의 자기같이 통일하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44
이리하여 점잖고 무게있고 의있던 오전의 패연이의 위에도 얕고 가벼운 현대의 도금을 씌운 뒤에 이 기괴한 인격과 성격의 소유자 이패연이는 드디어 경성 화류계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가 되었다.
 
45
패연이는 두 달 동안을 휴업을 하였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뒤에 다시 불리게 가 되었다.
 
46
경성 화류계에서의 패연이의 성가(聲價) ― 그것은 정평이 있는 것이었다.
 
47
근대적의 커다란 움직이는 눈과 볼의 네 개의 우물과 후리후리한 키와 좁다란 입의 주인이며 풍부한 성량(聲量)으로 육자배기를 냅다 뽑으면서도 수심가 도 제법 꺾어 넘기며 샤미셍의 조자도 웬만치 짐작하고 유행 노래도 웨이트레스(女給[여급])에게 지지 않도록 하는 모던 기생 이패연이는 화류계에서는 얻지 못할 든든한 자리를 잡고 있던 것이었다.
 
48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뒤 불리기 시작한 한동안 패연이는 놀랍게 잘 팔렸다. 점심때가 지나면 인력거꾼이 표지를 들고 패연이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자정이 썩 지나서야 피곤한 몸을 인력거에 싣고 다시 제 집으로 돌아오고 하였다.
 
49
“패연 아씨. 노름이오.”
 
50
“오 ― 라잇.”
 
51
“명월관이오.”
 
52
“OK.”
 
53
술로써 쓰린 심사 삭여나 볼까 다시는 안보려던 그이건마는 밤마다 웬일인가 철없는 꿈에 애끊는 이마음은 지향도 없이!
 
54
술로써 타는 가슴 잊어나 볼까 한 옛적 인연 끊는 그이건마는 무시로 지나간꿈 다시 더듬는 애타는 이마음을 둘곳은 어디?
 
55
유성기의 레코드로써 수입된 이 유행 노래를 코로 흥얼거리며 요리집으로 가며 혹은 요리집에서 돌아올 때마다 패연이는 이 온 장안을 눈 아래 코 아래 턱 아래로 보았다 . 나발바지, 칠피구두, 가짜 ‘스네이크우드’의 지팡이, 도금 시계줄, 양대모 안경, 돈을 다하고 재간을 다하여 몸을 장식하고 종로의 거리를 헴쳐다니는 모든 모던 보이들을 인력거에서 굽어볼 때마다 패연이의 이쁘장스런 코는 바룩거리고 하였다. 세상의 온 사내들의 몸치장이 모두 패연이 자기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것같이 보였다. 근엄한 얼굴로 가게 철궤 앞에 앉아서 십 전, 일 원, 십 원, 물건을 파는 가게 주인들도 모두 패연이 자기를 위하여 돈을 버는 듯싶었다.
 
56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패연이를 온갖 계급 사람들이 모두 불렀다. 미리부터 패연이를 알던 손님들은 무론 한 번씩 불렀다. 모르던 손님들도 죽었다 다시 산 사람이라고 패연이를 불렀다. 에보나이트 안경 안에서 허연 눈썹을 검벅거리던 대학 교수들도 ‘기적을 실지로 본다’는 핑계로 패연이를 불렀다. 교사의 행한 일의 좋지 못한 방면은 반드시 본받는 학생들도 패연이를 불렀다. 예수교의 장로들도 ‘죽음에 비밀을 듣고서’ 패연이를 불렀다. 중들도 예수교인과 같은 핑계로 패연이를 불렀다. 종교가, 학생, 교수, 실업가, 배우, 부랑자, 가지각색의 계급의 사람이 패연이를 보려 하였다.
 
57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패연이를 불러 보지 않는 사람은 여인들과 돈없는 사람뿐이었다.
 
58
오후의 패연이는 득의의 절정이었다. 눈 아래 코 아래 턱 아래 아니 오히려 발 아래 온 세상이 꿇어 있는 듯하였다.
 
59
그러나 거기 반하여 오전의 패연이는 늘 고민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였다. 오후의 패연이가 기뻐하면 기뻐하느니만치 오전의 패연이에게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60
“굳 나잇!”
 
61
인력거꾼에게까지 인사를 가볍게 던지고 제 방으로 돌아와서 곤한 잠을 자고 난 이튿날은 눈을 뜨기도 전부터 먼저 혀를 채고 하였다. 어젯저녁의 일이 무서운 고통과 함께 그에게 회상되는 것이었다.
 
62
도금 시계줄과, 십팔금 시계줄과, 이십이금 시계줄을 찬 세 사람에게 각각 그 시계줄의 중량의 비례로써 애교를 부어준 자기의 행동이 오전의 패연이에게는 아프기가 짝이 없었다.
 
63
인격보다 돈으로 취하였다 . 같이 돈이 많은 사람이면 학식보다 얼굴을 취하였다. 반반한 얼굴에 크림이나 칠하고 머리는 참기름으로 광을 낸 이십 세 전후의 소년, 유행 노래는 제일 먼저 부를 줄 알고 서로 말을 할 때는 일본 말을 사용하며 영화감독의 이름은 모르지만 여배우의 이름은 다 암송하고, 친구를 찾을 때는 성대(聖帶)를 놀리기보다도 휘파람을 불며 잉크 마른 만년필과 분홍빛 손수건을 양복 웃주머니에 넣고 마장 때문에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힌 이런 소년 혹은 청년은 경우에 의지하여는 돈 문제를 집어 제치고까지 패연이 쪽에서 달겨드는 때가 있었다. 그런 소년 혹은 청년의 담배는 바지 주머니에는 마코를 넣은 해태갑이 있고, 저고리 주머니에는 진정한 해태가 들어 있어서 장소에 따라서 담배가 두 군데서 나오는 것도 패연이는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의 맨 새빨간 새 넥타이는 겨울 옷을 전당잡아서 그 돈으로 산 것을 짐작 못하는 바도 아니었다. 그런 것을 모두 짐작하면서도 그런 청년이나 소년을 만날 때는 패연이는 금전 문제를 초월하여 호의를 보이는 것이었다. 내일 오전만 되면 이 일이 반드시 후회가 나고 가슴 아프려니 생각하면서도 요리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면 자진하여 이끌고 어두운 방으로 찾아가는 패연이였다.
 
64
“패연이의 서방은 삼만이천 사람.”
 
65
어떤 계산 아래서 삼만이천이라는 숫자가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평판을 듣느니만치 패연이는 정많은 사람이었다. ‘돈’은 무론 패연이의 서방 될 자격을 주고 가장 긴한 열쇠였다. ‘세력’도 패연이의 서방이 될 만하였다. 얼굴 반반한 것도 패연이의 서방이 될 만하였다. 유행 창가 한 마디를 잘하는 것도 서방 될 만하였다. 제 집 서방, 여관 서방 요리집 서방, 절간 서방, 자동차 서방, 벌판 서방, 순간순간의 감정으로써 되는 대로 집어 센 패연이의 서방은 스스로도 손으로 꼽기가 힘들었다. 이런 정 많은 자기를 생각할 때는 오전의 패연이는 어이 없어서 스스로 웃을 때도 있었다.
 
66
오전에는 패연이는 할 수 있는 대로 나가다니지를 않았다. 사람도 만나기를 피하였다.
 
67
오전의 심경으로 생각하건대 오후의 자기는 천박스럽기가 짝이 없지만 그 천박스러운 자기로는 명기 이패연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을 보면 지금 세상의 기생은 마땅히 그리하여야만 되는 듯하였다. 그러면 자기로 하여금 오후의 자기를 이해시키어야 할 것이요 이해하기까지는 시대착오의 자기를 뭇사람 앞에 내놓지 않아야만 할 것이다. 시대착오의 오전의 자기가 섣불리 등장을 하였다가 어떤 기괴한 연극을 할는지 알지 못하겠으므로 패연이는 그 전에는 할 수 있는껏 사람을 피하였다. 그리고 오후의 자기를 천박스럽다고 비웃는 ‘오전의 자기’에게 하루바삐 ‘오후의 자기’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68
그러는 동안에 기괴한 일이 생겨 나서, 패연이의 삶에 커다란 틈을 낳아 놓았다.
 
69
어떤 날 아침 곤한 잠을 깬 패연이는 자기의 자리 한편에서 웬 소년 하나를 발견하였다.
 
70
“?”
 
71
처음 경험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패연이는 펄떡 정신을 차리어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 몰래 빠져나와서 자기의 아우의 방으로 건너갔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우의 방을 임시 피난처로 쓰던 것이었다.
 
72
그러나 아우의 방문을 조금 열었던 패연이는 얼굴이 새빨갛게 피어 황급히 다시 문을 닫았다. 동생의 베개에도 웬 머리가 둘이 마주 놓여 있었다.
 
73
동시에 어젯밤의 기억이 불둑 패연이의 머리에 솟아올랐다. 패연이의 서방은 전라도 어떤 부자의 아들이었다. 벼 오백 석을 몰래 팔아 가지고 서울로 뛰쳐올라온 것이었다. 동생의 서방은 자기의 서방의 병정이었다.
 
74
소년대장은 문 상(文樣)이었다. 병정은 긴 상이었다. 한 주일 동안을 계약하고 오백 원이란 돈으로 패연이는 OK를 부른 것이었다. 긴 상은 덧붙이었다. 패주에게의 ‘와리마에(わりまえ ― 몫)’는 오백 원 가운데서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75
패연이는 잠시 주저하였다. 어머니의 방을 건너다보았다. 거기도 웬 손님이 와 있었다. 여기서 좀더 주저하던 패연이는 하릴없이 제 방으로 다시 와서 가만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76
아랫목에서 버석 하는 소리가 났다. 곁눈으로 보매 소년이 깨나는 모양이었다. 패연이를 그리워 아랫목으로 향하고 누워 있던 소년의 머리가 이편으로 조금 돌아왔다. 동시에 눈도 희미하니 띄었다.
 
77
패연이는 눈을 꺽 감았다. 자기의 감정을 씹어 죽였다. 다시 패연이가 눈을 뜰 때는 얼굴에뿐은 온화한 감정이 나타나 있었다.
 
78
“좀더 주무시지요?”
 
79
오후의 패연이 같으면 ‘모 오메자메?(もうおめざめ ― 벌써 깨었구나)’
 
80
하면서 귀여운 듯이 소년의 엉덩이라도 두드려 줄 것이었다.
 
81
소년은 수저운 듯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손을 이불 밖으로 내어서 제 내복을 끌어다가 이불 속에서 입기 시작하였다.
 
82
저 소년이 이제 제 고향으로 돌아가면 어머니한테 혹은 손뼉볼기라도 맞을 테지 그때 소년은 엉엉 . 소리쳐 울기도 쉬우렷다. 무지하고 잔혹한 짓이로다. 사기로다. 뒤를 따라서 이어 나는 이런 도학적 생각을 씹어 죽여 가면서 패연이는 귀여운 듯한 눈으로 (이불 속에서 내복을 입는)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83
“패연 씨. 몇 시요?”
 
84
“열시 이십분.”
 
85
이때에 패연이는 옛날 유아랑들이 무척이도 그리웠다. 커다란 상투를 베개 한편에 눕히고 자릿속에서 시를 흥얼거리며 해장할 아침임을 호령하던 옛날 오입장이들이 그립고 그리웠다.
 
86
“문 주사 나리, 미츠꼬시나 가 보십시다.”
 
87
문 상, 긴 상, 패연이의 형제, 이렇게 네 사람이 조반을 끝낸 뒤에 긴 상이 이런 의논을 꺼냈다. 그런 뒤에 패연이와 패주에게 향하여 눈을 껌뻑 하였다.
 
88
‘미츠꼬시 가서 잘 따내게.’
 
89
이런 뜻이었다.
 
90
패연이는 쓴웃음을 웃었다. 패주는 미소하였다.
 
91
패연이는 미츠꼬시 가기를 반대하였다. 다시 살아난 뒤에는 아직 미츠꼬시를 가 본 일이 없는지라 ‘오전의 패연이’는 미츠꼬시에 대한 명확한 관념을 머리에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히도 마음이 무거운 지금의 심경으로 그런 곳에 갔다가는 어떤 희활극을 일으킬지 알 수가 없으므로 패연이는 가기를 반대하였다.
 
92
그러나 패연이의 이 반대가 성립될 까닭이 없었다. 봉(鳳)을 문 기생이 미츠꼬시행을 거절한다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병정 긴 상과 동생 패주는 이것을 패연이의 사양으로 여겼다. 더구나 자기네는 자기네끼리의 플랜을 가지고 있는 긴 상과 패주는 사랑하는 패연이를 부랴부랴 채근을 하여 화장을 시켰다.
 
93
“뿡 ― ㅇ.”
 
94
택시의 소리가 들렸다.
 
95
긴 상이 화닥닥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문 상의 구두를 먼지를 털어서 가지런히 놓았다.
 
96
“저, 택시 왔는데 어서 갑시다. 날도 좋기도 하다.”
 
97
“패연 씨, 가십시다. 패주 씨도.”
 
98
소년도 부끄러운 듯이 이렇게 말하며 뒤를 따라서 일어섰다.
 
99
택시에 오른 뒤에 긴상은 패연이의 귀에 대고,
 
100
“다이아 반지나 하나 따내게.”
 
101
이렇게 소군거렸다. 그러나 패연이는 불쾌한 듯이 휘 머리를 돌이킬 뿐이었다.
 
102
미츠꼬시.
 
103
향그럽다기보다 오히려 역한 내음새였다. 문안에 쑥 들어서자 패연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내음새에 첫 공격을 받은 패연이가 눈을 들어서 둘러볼 때에 그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 버렸다.
 
104
근대적 장식? 온갖 신기한 물건? 눈을 현혹케 하는 장신구? 그런 모든 것을 의식하기 전에 패연이의 마음을 놀라게 한 것은 수없는 색다른 옷을 입은 인종이었다. (27행 약)
 
105
“패연이 이 치마감 어때?”
 
106
긴 상의 목소리였다. 보매 패연이의 앞에는 남빛 하부따에(羽二重 ― 얇고 고운 명주) 한 필이 놓여 있었다. 패연이는 기계적으로 하부따에를 만져 보았다. 그리고 머리를 가로 저었다.
 
107
“집에 하부따에 치마는 스물일곱 벌이 있어요.”
 
108
“또 한벌 하지.”
 
109
“싫어요.”
 
110
긴 상이 와짝 입을 패연이의 귀에 가까이 하였다.
 
111
“손해 없는 일, 스물여덟 벌로 하게나.”
 
112
패연이는 눈을 들었다. 긴상과 패연이의 눈의 상거는 두 치가 되지 못하였다. 잠시를 아무 표정도 없는 눈으로 긴 상의 눈을 바라보는 패연이는 다시 눈을 내려뜨고 말았다.
 
113
거기서 긴 상은 하릴없이 패주에게만 치마 한 감을 끊어 주었다. 돈은 문상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114
“패연이.”
 
115
또 긴 상의 소리다. 보니 양산 진열장 앞에 왔다.
 
116
“이것 어떤가?”
 
117
“양산도 많아요.”
 
118
“그게야 벌써 작년 것, 금년 유행 것을 사야지.”
 
119
“싫어요.”
 
120
패연이 이것 어떤가 . 패연이 이것 어떤가? 문 상의 돈으로 패연이를 사주면 무엇이 기쁜지, 긴 상은 어떤가를 연발하였다. 그 매번을 가볍게 거절하였지만 패연이의 마음에는 긴 상에 대한 염오의 정이 가속도로 늘어 갔다.
 
121
그들은 보석전 앞에 섰다.
 
122
“패연이 어떤가.”
 
123
긴 상은 반지 하나를 골라 쥐었다.
 
124
“열일곱 개 있어요.”
 
125
“다이알세.”
 
126
“다이아도 여섯 개나 있어요.”
 
127
삼백칠십 원의 정가표가 긴 상의 손바닥 안에서 나부끼었다.
 
128
“일곱 개로 채우게나.”
 
129
“그건 일곱 개씩 해서 뭘 합니까?”
 
130
긴 상의 입이 또 패연이의 귀에 가까이 왔다.
 
131
“패연이. 오늘 왜 그러나. 이런 판에 따내지 어째 따내겠나.”
 
132
패연이는 머리를 휙 들었다. 너무도 귀찮았다. 참고 참은 노염이 드디어 폭발한 것이었다.
 
133
“여보. 당신은 문 주사에게 손해를 입히면 무에 유쾌하오? 당신 돈 있으면 당신이나 패주에게 사주구료.”
 
134
그리고는 문씨에게로 돌아섰다.
 
135
“문 주사. 우리끼리 먼저 가십시다. 난 머리가 너무도 아파서 못 견디겠어요. 패주 너는 천천히 오거라.”
 
136
이리하여 패연이는 문씨를 이끌고 미츠꼬시에서 나왔다.
 
137
“여보 문 주사.”
 
138
어떤 조용한 절간의 외딴 방. 말하는 사람은 패연이. 머리를 푹 숙이고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듣고 있는 사람은 문씨.
 
139
“김씨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읍니까?”
 
140
“….”
 
141
패연이는 눈을 들어서 문씨를 보았다. 머리를 푹 수그리고 어려운 듯이 앉아 있는 이 소년은 패연이에게는 사랑스러운 동생으로 보였다. 패연이의 한마디 한 마디의 말에 문씨는 얼굴이 빨갛게 되며 대답도 못하고 있었다.
 
142
“시골서 떠나실 때 얼마나 ― 돈을 얼마나 가지고 떠나셌어요?”
 
143
“삼천오백칠십이 원 십이 전.”
 
144
“지금 얼마 남았어요?”
 
145
“이천칠백오십.”
 
146
문씨는 셈을 하려고 지갑을 꺼냈다.
 
147
“그만하면 알겠어요. 그러면 한 팔백여 원 쓰셨군요. 내 팔백 원을 취해 드릴께 고향으로 내려가세요. 그리고 아무 말씀 마시고 아버님께 돌아가세요. 너무 이르외다. 사오 년, 오륙 년 더 계시다가 오입을 하세요. 그리구 내 한턱 할 테니 술이나 잡수세요.”
 
148
패연이는 술을 먹었다. 얼굴이 발갛게 되어 미안한 듯이 거북한 듯이 옹그리고 앉았던 문씨에게는 그다지 권하지도 않으며 혼자서 연하여 술잔을 들었다. 환생한 이래 쌓이고 쌓인 울분을 여기서 한꺼번에 술로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149
이 날의 이 사건은 패연이로 하여금 그 날 낮잠을 잊게 하였다.
 
150
낮잠을 못 잔 패연이.
 
151
비록 오후가 되어서 ‘오후의 패연’이라 하나, 그 심경은 ‘오전의 패연’ 올라가서는 삼백여 년 전에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논개였다.
 
152
술이 깨지 못한 채 패연이는 저녁에 놀음에 불렸다.
 
153
논개의 심경을 가진 ‘명월관엣 패연이’.
 
154
눈앞에 흩어져 있는 온갖 비속된 일을 아직 술에 취한 패연이는 겨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이 무슨 말을 하여도 기생의 직업상 하릴없이 대답은 하지만 귀찮은 표정을 나타내기를 결코 주저치 않았다. 발간 넥타이에 미지로 머리를 재운 손님이 패연이의 가까이 와서 무엇이 어떻다고 생글거릴 때는 패연이는 노골적으로 귀찮은 듯이 눈을 흘기고 딴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하였다.
 
155
주석의 취흥이 꽤 돌아가서 기생들에게 노래를 명할 때에 패연이는 추야장의 시조 한 마디를 뽑아 내었다. 삼백여 년 전 진주의 일대 명기로 이름 높던 논개의 부르는 시조였다. 만약 이 좌석에 진정한 오입장이가 있었더면 무릎을 두드리며 경탄하지 않으면 안 될 시조였다. 불행한 좌석. 거기는 오입장이 가 없었다. 시조를 들을 줄 아는 기생도 없었다.
 
156
“아유, 듣기 싫어. 상가 난 집 같다. 곡은 왜 해?”
 
157
“집어치워라.”
 
158
“아 꼬랴 꼬랴(こりゃこりゃ ― 일인의 노래에 흥겨울 때 가볍게 장단을 맞추며 내는 소리).”
 
159
이러한 ‘야지(野次 ― 야유)’ 아래서 부르던 시조를 중단한 뒤의 패연이의 마음은 울분으로 말미암아 터질 듯하였다.
 
160
“그럼 일본 노래를 해요?”
 
161
“그럼. 우리 패연이지. 사께와 나미다까 다메이끼까(酒は淚か溜息か ―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가 자 나온다.”
 
162
술기운으로 패연이는 일본노래를 부르마 하였다. 그러나 아직 두 가지의 인격이 잘 섞이지 않은 패연이는 일본 노래를 몰랐다.
 
163
‘사께와 나미다까’ ‘와다시노 고꼬로와 호가라까요’ ‘아이시떼죠 다이네(愛 ― て頂戴ね ─ 사랑해 주세요)’ 몇 가지의 가사와 곡조의 개념뿐이 머리에 오락가락할 따름이었다.
 
164
여기서 흥분된 눈을 사면으로 두르고 있던 패연이는 드디어 맹연히 일어섰다. 삼백 년 전 논개의 시대에 촉석루에서 배운 시를 여기서 읊으려 한 것이었다.
 
165
패연이는 손님의 지팡이를 힘있게 양손으로 잡았다. 다음 순간 패연이의 입에서는 ‘노래’가 나왔다.
 
166
“벤세이 슈꾸슈꾸, 요루 가와오 와다루우. 아까스끼니미루 ―” (鞭聲肅肅夜川を渡る. 曉に見る…― 말 모는 소리는 끝나고 채찍소리만 휙휙 내며 조용히 밤에 내를 건넌다. 새벽에 보는…)
 
167
검무를 끝낸 뒤에 아연히 쳐다보고 있는 손님들에게 일별을 던지고 패연이는 그냥 그 방을 벗어나서 제 집으로 돌아갔다.
 
168
그 날의 사건은 이리하여 끝났다. 손님들은 그 날의 그 일을 패연이의 주정이라 하여 일소에 붙이고 말았다. 그러나 패연이에게 있어서는 그 날의 그 일이 간단한 사건이 못 되었다.
 
169
오전과 오후. ― 밤잠과 낮잠.
 
170
이리하여 정확히 교체되던 두 가지의 인격과 두 가지의 이성은 이 날을 기회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171
오전에는 무론 이전의 ‘오전의 패연이’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오후의 패연이는 간단한 ‘이전의 오후의 패연이’가 아니었다. 오전의 패연이의 영분이 오후에까지 침범하였다. 비록 낮잠을 잔다 할지라도 낮잠 뒤에 패연이에게도 ‘오전의 패연이’의 성격과 이성이 무시로 출몰을 하는 것이었다. 한창 멋이 들어서 무릎을 두드리며 모던 풍(風)을 발휘하다가도 한 번 하품을 한 뒤에는 시치미를 뚝 떼고 엄숙히 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시대착오의 광태를 한바탕 연출하는 것이었다.
 
172
이리하여 패연이는 점점 논개에 가까워 갔다. 논개를 패연화(化)하여 오려고 한동안 애썼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패연이가 논개화(化)하여 간 것이었다. 그리고 무시로 출몰하고 서로 충돌하고 서로 역정내는 두 가지의 인격 때문에 패연이의 행동은 제삼자로 보자면 차차 발광되는 듯하였다.
 
173
“저 애도 차차 이상해 가.”
 
174
“죽었다 나더니 아마 혼이 바뀐 게야.”
 
175
사실 혼이 바뀐 것이었다. 혼 바뀐 패연이. 몸 바뀐 논개.
 
176
이 괴물의 발자취를 작자는 적어 보려 하는 것이다.
 
 
177
(미완)
【원문】在世篇(재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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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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