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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정열의 회호리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1934
현진건
1
용산 S의원에 실려간 은주와 여해는 인공 호흡과 응급 수단으로 목숨들은 다 건지게 되었다.
 
2
그 이튿날 아침까지도, 은주는 열이 오르나리고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여해만은 완전히 정신을 수습하였다.
 
3
환하게 병실 유리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햇발을 얼굴에 느끼자 여해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4
팔다리가 욱신욱신하고 쑤시기는 하였지마는 머리는 거뿐하였다.
 
5
붉은 햇살이 가슴속까지 쏘아 들어오는 것 같다. 웬일인지 근래에 없이 심기가 좋았다.
 
6
검누른 흙탕물이 입으로 코로 벌떡벌떡 들어갈 제 속이 능글능글하기는 하였으되 은주를 부여잡은 때의 기쁨이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아슬아슬하고 유쾌하였다.
 
7
그는 물에 젖었던 후줄근한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병실을 나섰다.
 
8
그는 은주에게 가 볼 작정이었다.
 
9
조그마한 그 병원은 병실이라고 몇 개가 없었다. 복도에서 은주를 맡아 보는 간호부를 만나 물으니 은주의 병실은 바루 제 병실의 다음 다음 방이었다.
 
10
곧 들어가 보려다가 여해는 주춤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11
은주가 나를 보면 놀라지나 ' 않을까. 죽음을 결단하게 한 장본인을 눈앞에 본다면 어린 신경에 또 얼마나 흥분이 될 것인구. 그녀에게는 악마인 내가 아닌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며 가뜬하던 기분이 다시금 흐려지고 마음은 또다시 천근 같이 무거워졌다. 발길을 돌리려다가 다시 생각하니 은주가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렸을 것 같지 안 했다. 나를 알아 볼까. 아직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지나 않을까.
 
12
여해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병원을 나가고 싶었다. 깨어난 다음에야 일시인들 진절머리 나는 병원에 있기가 싫었던 것이다.
 
13
병원을 나가기 전에 그는 은주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싶었다. 이번 한 번만 보고 나면 이 앞으로야 다시 만날 기회도 없고 필요도 없을 것 아니냐.
 
14
제 지은 죄는 삭치려 삭칠 수 없는 노릇이니 이번 한 번으로 이 괴상한 인연을 청산하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 은주 몰래라도 은주의 용태나 보살펴 보고야 발길이 떨어질 것 같았다.
 
15
필경 여해는 은주의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16
은주의 병상 곁에는 아모도 없었다. 여해는 물론 병일과 석호가 남아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은주가 피어나는 것을 보기가 무섭게 아까 여해 가 복도에서 만난 간호부에게 맡겨 놓고, 그들은 제 갈 데로 가 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은주의 유서를 읽고 은주 곁에 있기가 면구하였던 탓도 탓이리라.
 
17
은주는 여해의 추측과 같이 과연 잠이 들었다.
 
18
은행 껍질 같은 눈시울이 지그시 감기고 이글이글 타는 듯하는 눈은 핼쓱하게 여위었다.
 
19
어젯밤까지 죽음의 고통과 싸우던 흔적은 그 얼굴 어데에도 없었다. 평화하고 종용한 빛이 그린 듯이 깃들인 듯하였다. 그 하붓이 열린 입으로 하하하는 단 숨길이 흐르지 않고 가슴 언저리에 멎은 흰 이불 자락이 달싹거리지 않았던들 누구라도 고요히 운명한 줄로 알았으리라.
 
20
여해는 이윽히 들여다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21
그 서슬에 은주는 눈을 큼직하게 떴다.
 
22
천만무량의 감회를 남기고, 발길을 돌린 여해가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말고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순간! 은주의 시선과 마주쳤다.
 
23
여해는 아뿔싸 싶었다. 환자의 신상에 일어날 무거운 변화를 기다리며, 일 찰나 움직이지 않았다.
 
24
뚱그런 눈동자가 두리번두리번할 뿐이요, 아모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25
은주는 여해를 몰라보았음인지 삶과 죽음의 실낱 같은 경계선에서 오락가락하는 그의 정신은 아직도 꿈과 생시를 구별하지 못하였음인가.
 
26
이랬거나 저랬거나 여해에게는 어떻게 다행한지 몰랐다. 최후로 제 희생의 얼굴을 한 번만 보아두겠다는 안타까운 희망이 이렇다 할 지장 없이 이루어진 것도 다행하거니와, 마지막 길에 제 눈으로 은주가 깨어난 것을 본 것이 더군다나 안심이 되었다.
 
27
여해는 마음 놓고 문을 열고 나오려 하였다. 그 때였다. 등뒤에서 동강 동강 끊어진 말이 들리기는,
 
28
"누 누구세요?"
 
29
긴장한 여해의 신경은 깜짝하고 놀래었다.
 
30
'인제 정말 깨었나 부다.' 하고 당황히 나와 버렸다. 본정신이 완전히 돌아오는 다음에 자기를 본다면! 큰일이 아닌가.
 
31
강 속에서야 초죽음이 된 뒤이니 의식이 있을 리 없고 따라서 저를 건져낸 사람이 누구인 것을 모르리라. 설령 여해인 줄 안다 하더라도 자기를 죽음의 길로 이끌어 넣고 죽으려는 슬픈 소원까지 방해한 그를 더욱 미워는 할지언정 고마워할 까닭은 없으리라. 여해는 문 앞에서 제 방에서 나올 때 만났던 그 간호부와 마주쳤다.
 
32
왼 얼굴에 주근깨를 뒤집어 쓴 갈걍갈걍한 그 간호부는 여해를 보고,
 
33
"환자가 어때요, 깨어났어요?"
 
34
하고 물었다.
 
35
여해는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어슬렁어슬렁 복도를 걸어 나려왔다.
 
36
현관까지 나와서 생각하니 제 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급한 김에 고무신을 걸치고 한강으로 뛰어나온 것은 생각이 나지마는 신을 벗고 강물에 뛰어들었는지 또는 그대로 뛰어들었는지 기억이 흐리마리하다. 설령 벗어놓고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 신을 어떻게 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37
동저고릿 바람은 그래도 괜찮다 하겠지마는 아모리 한들 맨발을 벗고야 병원을 나갈 수 없었다.
 
38
이럴까 저럴까 하고 현관에서 망설이고 있는 즈음에 간호부가 종종걸음을 쳐서 달려온다.
 
39
"여보세요, 여보세요."
 
40
하고 가쁘게 부른다.
 
41
"왜 그러십니까?"
 
42
여해는 의아한 듯이 물었다.
 
43
"저, 환자가 찾으셔요."
 
44
"누구를요?"
 
45
"아마 손님 말씀인가 봐요."
 
46
"나를 찾아요?"
 
47
"지금 이 방에 들어왔던 이를 불러 달라구 그러더군요."
 
48
여해는 어리둥절하였다.
 
49
"정말 나를 찾아요?"
 
50
여해는 간호부의 말을 못 미더워하는 듯이 재우쳤다.
 
51
"지금 막 병실에 들어갔다 나오셨죠?"
 
52
간호부는 되짚어 묻는다.
 
53
"그렇소."
 
54
"그럼 분명히 당신을 찾습니다. 내가 들어갔더니 막 나간 이가 누구냐고 묻지 않아요. 어쩌면 자기를 물속에서 구해낸 은인의 얼굴도 몰라 볼까. 그래 내가 그 말을 했죠. 그이가 바루 당신을 구해낸 이라구……."
 
55
간호부는 어젯밤의 비극을 잘 안다. 여학생이 빠지고 청년 하나가 그를 구하려고 뛰어들고, 배를 풀고 한 사단은 이 근방에 짜하고 퍼졌었다. 그는 여해가 은주와 아모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지나치는 길에 은주가 빠지는 것을 보고 뛰어 들었다가 하마하더면 제 목숨조차 잃어버릴 뻔한 줄로 안다.
 
56
그의 눈에 여해가 세상에도 용감한 청년으로 보이었던 것이었다.
 
57
'객쩍은 것을 알렸고나.' 하면서 여해는,
 
58
"그래서?"
 
59
하고 잼쳤다.
 
60
"그랬더니만, 정신을 모으는지 눈만 말뚱말뚱하고 있겠죠……."
 
61
간호부는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몰라보는 은주를 비난하는 어조다.
 
62
"그래, 내가 들은 대로 얘기를 해 들렸죠. 그이가 철교 난간 위에서 ─ 그 높은 데서 거꾸로 떨어져서 당신을 건져내다가 자칫하더면 죽을 뻔했다구……."
 
63
"그런 말은 왜 해요?"
 
64
여해는 민망한 듯이 간호부를 나무랬다.
 
65
"왜요? 제가 어째 살아난 줄이야 알아야죠."
 
66
간호부는 잘한 듯이 항의를 하였다.
 
67
그제야 내 말을 알아들은 " 모양예요. 몹시 감동이 된 눈칩니다. 그래 불러! 불러! 라구 애처럼 동강 말을 쓰겠죠."
 
68
"나를 누군지도 모르는데 괜한 말씀을 하셨구려. 난 지금 병원을 나가 봐야겠는데……."
 
69
사람의 목숨을 구해 주고도 제 생색도 내지 않고 그대로 가 버리려는 이 헙수룩한 청년의 행동에 간호부는 더욱 감탄하였다.
 
70
"왜 그대로 나가신단 말예요? 그 오빤가 되는 이를 보지도 않고."
 
71
"그런데, 내 신이 어데 있소?"
 
72
여해는 간호부의 말을 귀에 담아듣지도 않고 제 물을 것을 물었다.
 
73
"그 그 고무신 말이죠? 그건 저 신 상자 속에 들었지만, 하여간 환자가 보자구 하는데 잠깐만 들어와 주셔요, 네."
 
74
여해가 그대로 가 버리려는데, 간호부는 간원하다시피 말리었다.
 
75
여해는 일초 바삐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이 병원을 나가는 것이 곧 지긋지긋한 은주에 대한 추억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지글지글 지옥의 가마솥 같은 고통에서 달아나는 것이었다.
 
76
그리고 정신이 돌아가는 즉시로, 그는 명화의 일이 까닭없이 궁금하였다.
 
77
온다던 애인은 정말 왔는가. 오래 그리던 두 애인은 어데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 병원을 나가는 길로 위선 명화의 집에를 뛰어가 볼 작정이었다.
 
78
지금 또다시 은주를 대하기는 정말 괴로웠다. 혼곤히 잠든 틈을 타서 잠깐 보고만 간다는 것이 간호부의 수다로 말미암아 이렇게 발목을 잡히게 될 줄 이야.
 
79
그러나 이왕 자기를 불러 달라는 바에 떼치고 가는 것이 애연도 하였다.
 
80
여해는 간호부의 뒤를 따라갔다.
 
81
여해는 은주의 침대 앞에 와서 섰다. 은주는 파리한 얼굴로 말미암아 더욱 큼직해진 눈을 들어 물끄러미 여해를 바라볼 뿐이요 아모 말이 없다.
 
82
"나를 찾으셨소?"
 
83
여해는 은주가 분명히 자기인 줄 알아본 뒤에도 예기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적이 안심하며 물었다.
 
84
은주는 가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커다란 눈과 앳된 입모습 언저리에 그윽하나마 호의와 감사의 기색이 움직이는 듯하였다.
 
85
"왜 나를 찾으셨소? 이 못된……."
 
86
하다가 여해는 옆에 있는 간호부를 힐끗 보고 입을 닫치었다.
 
87
은주의 조금 짧은 듯한 윗입술이 달삭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할 듯하면서 가슴이 억색해져서 나오려던 말이 주저앉고 앉고 하는 모양이었다.
 
88
가까이 보면 볼수록 여해는 설레는 가슴을 억제하랴 억제할 수 없었다. 그 가느다랗게 부러지게 된 목과 배꽃같이 핼쓱해진 얼굴 어디에, 그 쾌활하고 영롱하던 은주의 티가 남았는가. 무서운 오뇌와 번민의 흔적이 암담한 그늘 모양으로 그의 심신을 휩싸놓았다.
 
89
여해는 참다 못하였다.
 
90
"무슨 말입니까? 얼핏 들려 주시오. 나는 가 봐야겠습니다. 이 자리를 떠나야 되겠습니다. 이러구 은주 씨를 보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말 못할 고통입니다. 무슨 말이든지 얼핏 들려 주시오."
 
91
"저……저……왜 저를 구 구해……."
 
92
은주의 목에서는 모기 같은 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러자 멍하게 뜬 눈시울에서는 굵은 눈물 방울이 흰 누에같이 기었다.
 
93
복도가 쿵쿵 하고 울리고, 어지러운 발자최 소리가 났다. 병실 문이 사나웁게 열어제쳐지며 병일과 석호가 달겨들었다. 그들은 요릿집에서 밤새움을 하고 그대로 오는 길이리라. 병일은 넥타이도 매지 않았고, 석호는 그의 눈도 보이지 않도록 모자를 눌러쓰고 비척거리며 들어왔다.
 
94
병일은 여해를 보든 맡에 고함을 질렀다.
 
95
"너 이놈, 또 여기를 왔구나. 우리 없는 새, 또 무슨 짓을 저질를라구……."
 
96
하고 눈을 부라린다.
 
97
여해의 얼굴에 피가 벌컥 솟았다. 불끈 쥔 두 주먹은 벌벌 떨리었다. 그는 맹호와 같이 병일에게 일격을 주려는 자세를 취하였다.
 
98
간호부의 올올 떠는 몸과 석호의 비실비실하는 몸이 두 사이를 재바르게 막아섰다.
 
99
"이놈아, 덤벼라 덤벼! 이 개만도 못한 놈 같으니……."
 
100
병일은 눈을 홉뜨고 팔을 부르걷고 뽐내며 허장성세를 하다가 술기운에 밀리어 비실비실 뒷걸음질을 친다.
 
101
간호부는 얼른 뒤로 돌아 쓰러지려는 병일의 몸을 떠받치듯 가누며,
 
102
"구만 참으셔요, 구만 참으셔요."
 
103
하고 달래었다.
 
104
"그래, 그래, 네 말도 옳다. 고만 참을까. 헌데, 저런 죽일 놈이 어데 있단 말이냐. 이놈, 뉘 앞이라고 언감생심인들 손짓을 하려고. 저런 놈은 붉은 옷을 입혀 두는 수밖에는 별수가 없단 말야. 이놈, 이놈. 그래, 덤빌 터야. 이놈 이놈."
 
105
하고 병일은 황소처럼 머리로 떠받는 시늉을 하며 발을 쾅 하고 굴렀다.
 
106
여해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껄껄 웃어 버렸다.
 
107
"오냐, 내가 이 방에 들어온 것은 잘못이다. 나는 간다."
 
108
여해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하였다.
 
109
이 때에 은주가 침대에서 별안간 일어앉았다.
 
110
"선생님, 선생님, 가시지 말아 주셔요."
 
111
아까와는 딴판으로 제법 또렷또렷한 소리를 낸다.
 
112
여해는 주춤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113
"가지 말아 달라? 그깟 놈을 잡고 시비를 캐면 뭣하니?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구."
 
114
병일은, 여해를 부르는 제 누이의 말을 되받으며 중얼거렸다.
 
115
은주는 더욱 분명한 음성으로,
 
116
"그러구 오빠는 가셔요."
 
117
한다.
 
118
"뭐 뭣이 어째? 나더러 가거라? 이 애 봐라."
 
119
하고 병일은 눈을 커닿게 떠서 은주를 바라본다.
 
120
"그래요. 오빠는 가셔도 괜찮아요."
 
121
"이 애가 미쳤나? 너 그건 어떻게 하는 말이냐?"
 
122
병일은 제 누이에게로 한 걸음 들어선다.
 
123
"그래 여해는 있구, 나더러는 가란 말이냐."
 
124
왼 방안의 시선은 은주에게로 몰리었다.
 
125
은주는 그 석고 같은 얼굴에 잠깐 붉은 빛이 피어 올랐으나, 고개를 크게 끄떡였다.
 
126
병일은 새벽녘에 취한 술이 주렁주렁 매어 달린 듯한 눈을 한 번 쓰담았다.
 
127
"저 원수놈은, 저 악마는 가지 말구, 나더러 가거라. 허, 얘가 정말 미쳤고나! 허 여기 이러구 있을 일이 아니다. 피어난 담에야 어서 집으로 가자.
 
128
어서 집에 가서 어찌하든지."
 
129
하고 석호를 보며,
 
130
"자동차는 기다리라 하였지?"
 
131
석호는 모자 쓴 채 머리를 까딱하였다.
 
132
"어서 일어나거라. 집으로 가자. 오빠 망신 구만 시키구."
 
133
"저는 가기 싫어요."
 
134
"가기가 싫다니? 그럼 이 병원에서 살테냐, 어서 일어나."
 
135
"저는 싫어요. 오빠의 집에 가기는."
 
136
이애 좀 봐 그러면 " , 어데를 갈 테란 말이냐? 허 일껀 건져 내놓으니까……."
 
137
"어디 오빠가 건져내셨어요? 뭐."
 
138
"그러면 누가……."
 
139
하다가 여해를 보고 눈을 부라리며,
 
140
"이게 모두 저놈이 주둥아리를 놀린 탓이구나. 그 잘난 물에 좀 뛰어든 걸 하상 대사라구, 무슨 은혜나 입힌 듯이 어린애를 꼬득였구나. 놈 천착스럽기는. 우리는 철교 위에서 쩔쩔매고만 있는데 저 혼자 물에 뛰어나렸다구 흰소리를 했겠구나. 너 이놈, 너도 다 뒤어진 걸 우리 배가 아니면 어떻게 건져내었겠느냐 말야. 인생이 불쌍해서 살려 놓으니까……."
 
141
병일은 몹시 흥분해 한다. 양심에 찔리는 것을 억지로 누르고 생판 억설을 늘어놓은 까닭인가.
 
142
여해는 그 넙적한 입을 한 번 쭉 다물었다. 두 볼의 근육이 떤다. 사나운 말씨가 우박같이 쏟아지려는 것을 꾹 참는 눈치였다.
 
143
"여러 말씀 마셔요."
 
144
은주의 약간 떨리는 듯한 말이 물을 끼얹듯이 냉연히 떨어졌다.
 
145
"오빠의 동생은 어젯밤에 죽었어요. 저는 인제 오빠의 동생이 아녜요. 죽어도 오빠의 집에는 가기 싫어요."
 
146
은주의 쪼글쪼글해진 입술에는 돌릴 수 없는 결심이 보이었다.
 
147
"허, 저 애가 암만해도 미쳤군. 허."
 
148
병일은 석호를 돌아보며 혼잣말같이 뇌이었다.
 
149
석호는 졸음 오는 듯한 눈을 깜빡깜빡하며,
 
150
"응으, 응으."
 
151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다가 살짝 은주를 한번 곁눈질해 보고,
 
152
"지금은 몹시 흥분되신 모양이니, 안정을 하시도록 하게나."
 
153
하고 까딱까딱 걸어나간다.
 
154
"미친 애를 두고 그양 가면 어떡한단 말인가?"
 
155
병일은 허둥지둥 석호를 잡았다.
 
156
"미치기는 왜. 조금 딴 생각이 계신 게지."
 
157
하고 석호는 눈으로 여해를 가리키고 잇새로 쌕 웃어 보이었다 은주는 독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오싹 몸을 떨었다.
 
158
병일과 석호가 웅얼거리고 있는 사이에, 여해는 서슴지 않고 성큼성큼 병상 가까이 걸어갔다.
 
159
"나는 가 봐야겠습니다. 또 오지요."
 
160
"네에……."
 
161
은주는 목 안에서 잡아당기는 듯한 소리를 들릴 듯 말 듯 대답하고 고개를 외우 꽂았다.
 
162
여해는 휙 나와 버렸다.
 
163
은주의 수수께끼 같은 태도의 하회가 궁금은 하였지마는 불쾌한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이 마치 지렁이가 움지럭거리는 수렁을 뛰쳐나온 듯이 상연하였다.
 
164
전찻길까지 나오자 전차 탈 돈 오 전까지 지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였다.
 
165
한강통에서 청진동까지는 정말 걷기에 벅찬 거리이었다.
 
166
여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음박질을 하다시피 빨리 걸었다. 다리는 허정허정 공중을 차고 나는 듯하다.
 
167
그대도록 그는 은주보담도 명화의 일이 몇 백 곱절 더 궁금하였다. 명화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일분 바삐 일초 바삐 명화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168
뻘뻘 땀이 흐르고 피곤한 다리가 느릿느릿 늘어질 임물이면, 명화는 갖은 포즈로 그의 눈앞에 얼렁거렸다.
 
169
그는 헐떡거리며 씨근거리며 불채쪽으로 종아리를 후려갈기는 듯이 걸었다.
 
170
그는 단숨에 명화의 집에 뛰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171
그는 다짜고짜로 안방문을 펄쩍 열었다.
 
172
명화는 없었다. 부리는 계집애 겸, 명화의 대를 받을 동기 겸으로 있는 옥연이가 혼자 양금을 치다가 바시시 일어난다.
 
173
"안 계시니?"
 
174
"안 계셔요. 보다 모르셔요?"
 
175
옥연은 무엇에 성이 났는지 그 뾰족한 입을 더욱 뽀르틍하게 내어민다.
 
176
"어데를 가셨니?"
 
177
"누가 알아요?"
 
178
"식전에 어데를 나갔단 말이냐?"
 
179
"식전에는. 어젯밤 나가셔서 어데 들어오시기나 했어요, 뭐?"
 
180
"정거장에는 나가셨다 돌아오셨지?"
 
181
"돌아오시긴! 그대로 가물치 코야, 참 사람 속상해 죽겠어. 손님은 왜 어데 갔다가 인제 오신단 말예요? 난 무서워 죽을 뻔했는데."
 
182
옥연은 안차고 당알진 계집애였지만, 열네 살이란 나이가 있어 휑 덩그렁하게 빈집을 혼자 지키느라고 꽤 무서웠던 터에 여해를 보고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183
여해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184
그는 명화가 그 애인인가 하는 자를 끌고 갈데없이 제 집으로 돌아와 있는 줄로만 알았었다.
 
185
집에 안 왔다면 명화는 ! 분명 그 애인이란 자를 끌고, 제 집보담도 더 종용한 데를 찾아갔음에 틀림이 없었다. 훌쩍거리고 노닥거리고 애무로 포옹으로 흠씬 그리던 회포를 푸는 두 남녀를 상상하매, 여해는 견딜 수 없었다.
 
186
가슴속에서 불기둥이 떠받치고 일어서는 것 같다.
 
187
"그래 어디 있는지 권번에 전화도 안 걸어 봤단 말이냐? 망할 년 같으니."
 
188
말씨까지 사나워졌다.
 
189
"왜, 이년 저년 해요? 전화를 안 걸어 보긴. 오늘 아침에만 해두 두 번이나 걸어 보았는데."
 
190
"그래, 어데 있다던?"
 
191
"권번에나 알려 두셨으면 작히나 좋게. 권번에서도 모른대요. 되려 날더러 어디 좀 찾아보라겠지. 참 기가 막혀. 어디 가시면 세상없어도 권번에는 알리시는데, 어젯밤에는 권번에 안 알려서 남 잠자는데 인력거까지 와서 등쌀이야. 밤새도록 인력거꾼 소리에 몇 차례 깨었는지 가뜩이나 무서워 죽겠는데……."
 
192
옥연은 연거푸 종알거렸다.
 
193
여해는 제가 묵고 있는 아랫방으로 돌아와, 네 활개를 쭉 뻗고 누웠다. 눕고 보니 피로가 왼몸의 근육을 자근자근히 쑤시고 퍼져서 몸을 꼼짝도 못할 것 같았다.
 
194
그는 피로한 김에 잠이나 한 숨 잘까 하였다. 슬픔도 기쁨도 빠지짓빠지짓 타는 가슴도 이 망각의 세계에서는 안식을 얻으리라. 솜 같은 피로도 풀리리라 하였다.
 
195
자는 동안에 명화는 오리라. 어젯밤을 밝혔다면 오늘 낮에나 집에 아니 돌아올 리 없으리라 하였다. 그도 내 일이 궁금하리라. 집에 돌아오면 내 방에 먼저 오리라. 또 어젯밤 모양으로 자는 내 옆에 참다랗게 앉아 있을는지 모르리라 하였다.
 
196
터무니없는 달착지근한 공상에 여해는 치밀리던 불덩이가 잠깐 주저앉았다.
 
197
그는 정말 자는 듯이 눈을 감고 잠을 청하여 보았다. 손끝 발끝이 저리도록 몸은 노곤하게 풀리며 엷은 안개 자락 같은 잠이 스르르 덮어지는 듯도 하였다.
 
198
그러나 잠은 올 듯 올 듯하면서도 좀처럼 오지는 않았다. 눈시울까지 무겁게 나려앉았다가 말고 요리 삐끗 조리 삐끗 감질만 내고는 홱 달아나고는 하였다.
 
199
여해는 이리 궁글 저리 궁글 목침을 가로 세로 모로 바로 여러 번 곤쳐 비어 보았다. 곤쳐 빌 적마다 잠은 천 리나 만리나 달아나는 듯하였다. 배포유하게 잠 올 터수가 아닌 것을!
 
200
머리는 쨍쨍하게 밝아진다.
 
201
여해는 필경 잠을 단념하고 말았다.
 
202
인제나 저제나 하여도 명화의 들어오는 기척은 나지 않았다. 칼날같이 날카로워진 신경은 가장 가느다란 음향에도 널 뛰듯 뛰었다.
 
203
눈은 감고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눈만 감으면 환영이 다시금 그를 괴롭게 하였다. 명화와 그의 애인과의 러브신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204
누으락 앉으락 하였다. 이유도 없고 염치도 없는 이 정열의 회호리바람에 그는 안절부절을 못하였다.
 
205
저녁 때가 되어도 명화는 오지 않았다. 밤이 되었다.
 
206
여해는 명화의 집을 나왔다. 근처 중국 요릿집에서 전화를 빌렸다.
 
207
먼저 권번에 물어보았다. 아까 옥연이 말마따나 권번에서도 명화의 거처를 몰랐다.
 
208
생각다 못해 각 요릿집으로 물어보았다. 명월관 식도원 등 서너 군데 걸어 보는 사이에 여해에게도 자신이 없어졌다. 대답은 한결같이 안 왔다는 말뿐이었다.
 
209
조선 요릿집은 끝이 났다. 이번에는 일본 요릿집으로 대모한 데를 골라서 더러 걸어 보았다. 결과는 역시 실망이었다.
 
210
일찍이 명화에게 들은 취월이 언뜻 생각이 났다.
 
211
"옳지, 옳지. 분명히 거기를 갔을 게다."
 
212
여해는 혼자 중얼거렸다. 애인과 단둘이 간다면 그런 후미진 요릿집을 찾았음에 틀림이 없었다.
 
213
'왜 입때 취월을 생각지 못하였던고.' 여해의 직각은 취월에 명화가 있다는 것을 알리었다. 그는 전화도 구만두고 곧 취월로 뛰어가고 싶었다.
 
214
아모튼 전화를 걸어는 보았다.
 
215
"잠깐만 기다리셔요."
 
216
일본 여자의 혀를 감아 올리는 듯한 친절한 대답이다. 여해는 몸과 맘으로 부르짖었다.
 
217
"있고나!"
 
218
사랑하는 이의 직각은 틀리지 않았다.
 
219
바루 전화통 옆에서 얘기를 하는 듯한 말낱이 동강동강 들려왔다.
 
220
"어젯밤부터 있는 그 조선 기생 말이지."
 
221
"……전화가 오드래두 따 버리랬어……."
 
222
여해는 전화통을 내동댕이를 치듯이 걸고 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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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玄鎭健) [저자]
 
193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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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소설(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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