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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이제 육십칠, 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다시 이 붓을 드니, 오십삼세 때에 상해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백범일지》 상권을 쓰던 때에서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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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젊어서 붓대를 던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제 힘도 재주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성패도 영욕도 돌아봄이 없이 분투하기 30여 년, 그리고 명의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지킨 지 10여 년에 이루어 놓은 일은 하나도 없이 내 나이는 60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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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침체된 국면을 타개하고 국민의 쓰려지려 하는 3.1 운동의 정신을 다시 떨치기 위하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에게 편지로 독립운동의 위기를 말하여 돈의 후원을 얻어 가지고 열혈 남아를 물색하여 암살과 파괴의 테러 운동을 계획한 것이었다. 동경사건과 상해사건 등이 다행히 성공되는 날이면 냄새 나는 내 가죽 껍데기도 최후가 될 것을 예기하고 본국에 있는 두 아들이 장성하여 해외로 나오거든 그들에게 전하여 달라는 뜻으로 쓴 것이 이 《백범일지》다. 나는 이것을 등사하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몇 분 동지에게 보내어 후일 내 아들에게 보여주기를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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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죽을 땅을 얻지 못하고, 천한 목숨이 아직 남아서 《백범일지》 하권을 쓰게 되었다. 이때에는 내 두 아들도 장성하였으니 그날을 위하여서 이런 것을 쓸 필요는 없어졌다. 내가 지금 이것을 쓰는 목적은 해외에 있는 동지들이 내 50년 분투 사정을 보고 허다한 과오를 은감(殷鑑)으로 삼아서 다시 복철을 밟지 말기를 원하는 노파심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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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하권을 쓸 때의 정세는 상해에서 상권을 쓸 때의 것보다는 훨씬 호전되었다. 그때로 말하면 임시정부라고 외국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한인으로도 국무위원과 십수인의 의정원 의원 외에는 와 보는 자도 없었다. 그야말로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는 임시정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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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편을 쓰는 오늘날로 말하면 중국 본토에 있는 한인의 각 당 각 파가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옹호할뿐더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만여 명 동포가 이 정부를 추대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상납하고 있다. 또 외교로 보더라도 종래에는 중국, 소련, 미국의 정부 당국자가 비밀 찬조는 한 일이 있으나 공식으로는 거래가 없었던 것이, 지금에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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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장래에 완전한 자주 독립국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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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방송하였고, 중국에서도 입법원장 손과(孫科) 씨가 공공한 석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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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제국주의를 박멸하는 중국의 양책(良策)은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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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부르짖었으며, 우리 자신도 워싱턴에 외교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 박사를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외교와 선전에 힘을 쓰고 있고, 또 군정으로 보더라도 한국광복군이 정식으로 조직되어 이청천(지청천의 다른 이름)으로 총사령을 삼아 서안(西安)에 사령부를 두고 군사의 모집과 훈련과 작전을 계획 중이며, 재정도 종래에는 독립운동의 침체, 인심의 퇴축, 적의 압박, 경제의 곤란 등으로 임시정부의 수입이 해가 갈수록 감하여 집세를 내기도 어려울 지경이던 것이 홍구, 상해 폭탄 사건 이래로 내외국인의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 변하여서 점차로 정부의 수입도 늘어, 민국 23년도에는 수입이 53만 원 이상에 달하였으니 실로 임시정부 설립 이래의 첫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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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양으로 임시정부의 상태는 상해에서 이 책 상권을 쓸 때보다 나아졌지마는 나 자신으로 말하면 일부일(一復日) 노병과 노쇠를 영접하기에 골몰하다. 상해 시대를 죽자고나 하던 시대라고 하면 중경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고 할 것이다. 만일 누가 어떤 모양으로 죽는 것이 네 소원이냐 한다면 나는 최대한 욕망은 독립이 다 된 날 본국에 들어가 영광의 입성식을 한 뒤에 죽는 것이지마는, 적어도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을 만나보고 오는 길에 비행기 위에서 죽어서, 내 시체를 던져 그것이 산에 떨어지면 날짐승 길짐승의 밥이 되고, 물에 떨어지면 물고기의 뱃속에 영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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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고해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나는 서대문 감옥에서와 인천 축항 공사장에서 몇 번 자살할 생각을 가졌으나 되지 못하였고, 안매산 명근 형도 모처럼 죽으려고 나흘이나 식음을 전폐한 것을 서대문 옥리들이 억지로 달걀을 입에 흘려 넣어 죽지 못하였으니, 죽는 것도 자유가 있는 자라야 할 일이여서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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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하여 산 것이 아니요, 살아져서 산 것이고, 죽으려고 하여도 죽지 못한 이 몸이 필경은 죽어져서 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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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월, 인동현에서 영국 사람 솔지의 배를 타고 상해에 온 나는 김보연 군을 앞세우고 이동녕 선생을 찾았다. 서울 양기탁의 사랑에서 서간도 무관학교 일을 의논하고 헤어지고는 10여년 만에 서로 만나는 것이었다. 그때에 광복사업을 준비할 전권의 임무를 맡았던 선생의 좋던 신수는 10여년 고생에 약간 쇠하여 주름살이 보였다. 서로 악수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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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해에 갔을 때에는 먼저 와 있던 인사들이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에 대한 민족 대표로 파견한 지 벌써 두 달이나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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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이 일어난 뒤에 각지로부터 모여든 인사들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조직하여 중외에 선포한 것이 4월 초순이었다. 이에 탄생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은 국무총리 이승만 박사, 그 밑에 내무, 외무, 재무, 법무, 교통 등 부서가 있어 광복운동의 여러 선배 수령을 그 총장에 추대하였다. 총장들이 원지에 있어서 취임치 못하므로 청년들을 차장으로 임명하여 총장을 대리케 하였다. 내가 내무총장 안창호 선생에게 정부 문 파수를 청원한 것이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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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 파수를 청원한 것이 경무국장으로 취임하게 되니 이후 5년간 심문관, 판사, 검사의 직무와 사형 집행까지 혼자 겸하여서 하게 되었다. 왜 그런고 하면 그때에 범죄자의 처벌이 설유방송이 아니면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도순이라는 17세의 소년이 본국에 특파되었던 임시정부 특파원의 뒤를 따라 상해에 와서 왜의 영사관에 매수되어 그 특파원을 잡는 앞잡이가 되었고 돈 10원을 받은 죄로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극형에 처한 것은 기성 국가에서 보지 못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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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맡은 경무국의 임무는 기성 국가에서 하는 보통 경찰행정이 아니요, 왜의 정탐의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가 왜에 투항하는 것을 감시하여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데 있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나는 정복과 사복의 경호원 20여 명을 썼다. 이로서 홍구의 왜 영사관과 대립하여 암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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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랑스 조계 당국은 우리의 국정을 잘 알므로 일본 영사관에서 우리 동포의 체포를 요구해올 때에는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피하게 한 뒤에 일본 경관을 대동하고 빈 집을 수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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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전중의일(田中義一: 다나카 기이치)이 상해에 왔을 때에 황포 마두에서 오성륜이 그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폭발되지 아니하므로 권총을 쏜 것이 전중은 아니 맞고 미국인 여자 한 명이 맞아 죽은 사건이 났을 때에, 일본, 영국, 법국(法國: 프랑스) 세 나라가 합작하여 법조계(法租界: 프랑스 조계지)의 한인을 대거 수색한 일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어머니가 본국으로부터 상해에 오신 때였다. 하루는 이른 새벽에 왜 경관 일곱 놈이 프랑스 경관 서대납을 앞세우고 내 침실로 들어왔다. 서대납은 나와 잘 아는 자라 나를 보더니 옷을 입고 따라오라 하며 왜 경관이 나를 결박하려는 것을 금지하였다. 프랑스 경무청에 가니 원세훈 등 다섯 사람이 벌써 잡혀와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왜 경관이 우리를 심문하는 것도 허하지 아니하고, 왜 영사관으로 넘기라는 것도 아니 듣고, 나로 하여금 다섯 사람을 담보케 한 후에 나를 아울러 모두 석방해버렸다. 우리 동포 관계의 일에는 내가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언제나 배심관이 되어 프랑스 조계의 법정에 출석하였으므로 현행범이 아닌 이상 내가 담보하면 석방하는 것이었다. 왜 경찰이 나와 프랑스 당국과의 관계를 안 뒤로는 다시는 내 체포를 프랑스 당국에 요구하는 일이 없고, 나를 법조계 밖으로 유인해 내려는 수단을 쓰므로 나는 한 걸음도 조계 밖으로는 나가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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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5년간 경무국장을 하는 동안에 생긴 기이한 일을 일일이 적을 수도 없고 또 이루 다 기억도 못하거니와, 그 중에 몇 가지만을 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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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 정탐 선우갑을 잡았을 때에 그는 죽을 죄를 깨닫고 사형을 자원하기로, 장공속죄(將功贖罪: 죄를 지은 사람이 공을 세워 속죄함)를 할 서약을 받고 살려주었더니 나흘만에 도망하여 본국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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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우는 왜 경부로 상해에 와서 총독부에서 받아가지고 온 사명을 말하고, 내게 거짓 보고 자료를 달라 하기로 그리하였더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공으로 풍산 군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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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국 내무대신 동농 김가진 선생이 3.1 선언 후에 왜에게 받았던 남작 작위를 버리고 대동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아들 의한 군을 데리고 상해에 왔을 적 일이다. 왜는 남작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는 것이 수치라 하여 의한의 처의 종형 정필화를 보내어 동농 선생을 귀국케 할 운동을 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정가를 검거하여 심문한즉 낱낱이 자백하므로 처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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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선은 해주 사람으로서, 3.1 운동 이전에 상해에 온 자인데, 가장 우리 운동에 열심(熱心)이 있는 듯하기로 타처에 오는 지사들을 그 집에서 유숙케 하였더니 그 자가 그것을 기화(奇貨: 어떤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하여 일변 왜 영사관과 통하여 거기서 돈을 얻어 쓰고, 일변 애국 청년에게 임시정부를 악선전하여 나창헌, 김의한 등 십수 명이 작당하여 임시정부를 습격하는 일이 있었으나, 이것은 곧 진압되고 범인은 모두 경무국의 손에 체포되었다가 그들이 황학선의 모략에 속은 것이 분명하므로 모두 설유하여 방송하고, 그때에 중상한 나창헌, 김기제는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한 결과 황학선이가 왜 영사관에서 자금과 지령을 받아 우리 정부 각 총장과 경무국장을 살해할 계획으로, 나창헌이 경성의전의 학생이던 것을 이용하여 삼층 양옥을 세 내어 병원 간판을 붙이고, 총장들과 나를 그리로 유인하여 살해할 계획이던 것이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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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문초의 기록을 나창헌에게 보였더니 그는 펄펄 뛰며 속은 것을 자백하고, 장인 황학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황학선은 처교된 뒤였다. 나는 나, 김 등이 전연 악의가 없고 황의 모략에 속은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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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박 모라는 청년이 경무국장 면회를 청하였다. 그는 나를 대하자 곧 낙루하며 단총 한 자루와 수첩 하나를 내 앞에 내어 놓으며, 자기는 수일 전에 본국으로부터 상해에 왔는데 왜 영사관에서 그의 체격이 건장함을 보고 김구를 죽이라 하고, 성공하면 돈도 많이 주려니와 설사 실패하여 그가 죽는 경우에는 그의 가족에게는 나라에서 좋은 토지를 주어 편안히 살도록 할 터이라 하고, 만일 이에 응치 아니하면 그를 '불령선인'으로 엄벌한다 하여 부득이 그러마 하고 무기를 품고 법조계에 들어와 길에서 나를 보기도 하였으나, 독립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자기도 대한 사람이면서 어찌 감히 상하랴 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 단총과 수첩을 내게 바치고 자기는 먼 지방으로 달아나서 장사나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놓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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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심하는 사람이거든 쓰지를 말고, 쓰는 사람이거든 의심을 말라'는 것을 신조로 삼아 살아왔거니와 그 때문에 실패한 일도 없지 아니하였으니 한태규 사건이 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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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규는 평양 사람으로서, 매우 근실하여 내가 7, 8년을 부리는 동안에 내외국인의 신임을 얻었다. 내가 경무국장을 사면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경무국 일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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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계원 노백린 형이 아침 일찍 내 집에 와서 노변에 한복 입은 젊은 여자의 시체가 있다 하기로 나가본즉 그것은 명주의 시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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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는 상해에 온 뒤로 정인과, 황석남이 빌어 가지고 있는 집에 식모로도 있었고, 젊은 사내들과 추행도 있다는 소문이 있던 여자다. 어느 날 밤에 한번 한태규가 이 여자를 동반하여 가는 것을 보고 한 군도 젊은 사람이니 그러나 보다 하고 지나친 것이 오래지 아니한 것이 기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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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검사하니 피살이 분명하다. 머리에 피가 묻었으니 처음에는 때린 모양이요, 목에는 바로 매었던 자국이 있는데, 이 수법은 내가 서대문 감옥에서 활빈당 김 진사에게서 배운 것을 경호원들에게 가르쳐 준 그것이었다. 여기서 단서를 얻어가지고 조사한 결과 그 범인이 한태규인 것이 판명되어 프랑스 경찰에 말하여 그를 체포케 하여 내가 배심관으로 그의 문초를 듣건대, 그는 내가 경무국장을 사임한 후로부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왜에게 매수되어 그 밀정이 되어, 명주와 비밀히 통기하던 중, 명주가 한이 밀정인 것을 눈치를 알게 되매 한은 명주가 자기의 일을 내게 밀고할 것을 겁내어서 죽인 것이라는 것을 자백하였다. 명주는 행실은 부정할망정 애국심은 열렬한 여자였다. 그는 종신 징역의 형을 받았다. 후에 나와 동관이던 나우도 한태규가 돈을 흔히 쓰는 것으로 보아 오래 의심은 하였으나 확적한 증거도 없이 내게 그런 말을 고하면 내가 동지를 의심한다고 책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아니 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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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한태규는 다른 죄수들을 선동하여 양력 1월 1일에 옥을 깨뜨리고 도망하기로 약속을 하여 놓고 제가 도리어 감옥 당국에 밀고하여 간수들이 담총하게 경비하게 한 후에 약속한 시간이 되매 여러 감방문이 일제히 열리며 칼, 몽둥이, 돌멩이, 재 같은 것을 가지고 죄수들이 뛰쳐나오는 것을, 한태규가 총을 쏘아 죄수 8명을 즉사케 하니, 다른 죄수들은 겁을 내어 움직이지 못하매 이 파옥 소동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재판하는 마당에 한태규는 제가 쏘아 죽인 여덟 명의 시체를 담은 관머리에 증인으로 출정하더란 말을 들었고, 또 그 후에 한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같은 죄수 8명을 죽인 것이 큰 공로라 하여 방면이 되었고, 전에 잘못한 것은 다 회개하니 다시 써달라고 하였다. 나중에 듣건대 이 편지에 대한 회답이 없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본국으로 도망하여 무슨 조그마한 장사를 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내가 이런 흉악한 놈을 절대로 신임한 것이 다시 세상에 머리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 심히 고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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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무국장이던 때에 있던 일은 여기에서 끝내고 상해에 임시정부가 생긴 이후에 일어난 우리 운동 전체의 파란곡절을 회상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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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 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 안공근, 한형권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서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 진위대 참령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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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 가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 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에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씨는 손을 흔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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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에게 즐겨 쓰는 말이다)도 나와 같이 공산 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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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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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 3 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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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 민족 분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 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기를 권고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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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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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러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소련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백만 루블이라고 대답한즉 레닌이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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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대항하는데 이백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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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은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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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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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이백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제 1차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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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마련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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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 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들어와 공산당 무리들에게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회의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 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 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코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福本和夫: 후쿠모토 가즈오.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의 지도를 받는 김준연 등의 엠엘(ML)당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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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 이정규 두 형제와 유자명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의 맹장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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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 개최된 국민대회라는 것은 참말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일쿠츠코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코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이 못되어서 소위 국민대표회의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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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산당 두 파의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모략에 현혹하여 시국이 요란하므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대표회의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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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 공금 횡령범 김립은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쾌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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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권을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내었으나 효과가 없어서 임시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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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 남아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대표회의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오던 민족적 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 청년동맹, 주중국 청년동맹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도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혁명 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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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한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는 사회운동보다 민족 독립운동을 먼저 하여라'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었다. 이에 어제까지 민족 독립운동을 비난하고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은 경각간에 민족 독립운동자로 돌변하여 민족 독립이 그들의 당시라고 부르짖었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도 그들을 배척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유일독립당 촉성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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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운동이란 미명 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넣고는 그들의 소위 헤게모니로 이를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어지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독립 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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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이니, 이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의 단체여서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이유필, 차이석, 김봉준, 송병조 및 내가 수뇌가 되어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딴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가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는 아직 동포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하면 이상룡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아비 죽이는 회)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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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남군정서, 북군정서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 김좌진, 김규식(나중에 박사라고 된 김규식은 아니다) 등 우리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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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세의 우리에 대한 냉담, 일본의 압박 등으로 민족의 독립 사상이 날로 감쇄하던 중에 공산주의자의 교란으로 민족전선은 분열에서 혼란으로, 혼란에서 궤멸으로 굴러떨어져 갈 뿐이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만주의 주인이라 할 장작림이 일본의 꾀에 넘어가서 그의 치하에 있는 독립운동자를 닥치는 대로 잡아 일본에 넘기고, 심지어는 중국 백성들이 한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서 왜 영사관에서 1개에 많으면 10원, 적으면 3, 4원의 상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우리 동포 중에도 독립군의 소재를 밀고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여기는 독립운동자들이 통일이 없어 셋, 다섯으로 갈라져서 재물, 기타로 동포에게 귀찮음을 준 책임도 없지 아니하다. 이리하던 끝에 왜가 만주를 점령하여, 소위 만주국이란 것을 만드니 우리 운동의 최대 근거지라 할 만주에 있어서의 우리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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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만주에 있던 독립운동 단체는 다 임시정부를 추대하였으나 차차로 군웅할거의 폐풍이 생겨, 정의부와 신민부가 우선 임시정부의 절제를 안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참의부만은 끝까지 임시정부에 대한 의리를 지키더니 이 셋이 합하여 새로 정의부가 된 뒤에는 아주 임시정부와는 관계를 끊고 자기들끼리도 사분오열하여 서로 제 살을 깎고 있다가 마침내 공산당으로 하여 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연출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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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의 정세도 소위 양패구상으로 둘이 싸워 둘이 다 망한 셈이 되었고 한국독립당 하나로 겨우 민족진영의 껍데기를 유지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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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에는 사람도 돈도 들어오지 아니하여 대통령 이승만이 물러나고 박은식이 대신 대통령이 되었으나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쳐 놓았을 뿐으로 나가고, 제 1대 국무령으로 뽑힌 이상룡은 서간도로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 도로 서간도로 물러가고, 다음에 홍면희(나중에 홍진)가 선거되어 진강으로부터 상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조직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한참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 의정원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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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국무령이 되기를 권하였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사양하였다. 첫째 이유는 나는 해주 서촌의 일개 김 존위(경기도 지방의 영좌에 상당한 것)의 아들이니 우리 정부가 아무리 아직 초창 시대의 추형(雛形:축소판 형태)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나같이 미천한 사람이 일국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 말하면 이상룡, 홍면희 두 사람도 사람을 못 얻어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거늘 나 같은 사람에게 더욱 응할 인물이 없을 것이란 것이었다. 그런즉 이씨 말이 첫째는 이유가 안 되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둘째로 말하면 나만 나서면 따라 나설 사람이 있다고 강권하므로 나는 승낙하였다. 이에 의정원의 정식 절차를 밟아서 내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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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 등으로 내각을 조직하고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번번이 곤란할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국무위원의 주석이 될 뿐이요, 모든 국무위원은 권리에나 책임에나 평등이었다. 그리고 주석은 위원들이 번차례로 할 수 있으므로 매우 편리하여 종래의 모든 분리를 일소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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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정부는 자리가 잡혔으나 경제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이 망연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꾼 월급이 20원 미만이었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여러 번 송사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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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위원들은 거의 다 가권이 있었으나 나는 아이들 둘도 다 본국 어머니께로 돌려보낸 뒤라 홑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시정부 정청에서 자고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 하면 전차 회사의 차표 검사원인 인스펙터가 제일 많은 직업이어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과 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는 상거지였다. 다들 내 처지를 잘 알므로 누구나 내게 미운 밥은 아니 주었다고 믿는다. 특히 조봉길, 이춘태, 나우, 진희창, 김의한 같은 이들은 절친한 동지들이니 더 말할 것이 없고, 다른 동포들도 내게 진정으로 동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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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 군은 프랑스 공무국에서 받은 월급으로 석오(이동녕의 당호)나 나 같은 궁한 운동자를 먹여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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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실 임씨는 내가 그 집에 갔다가 나올 때면 대문 밖에 따라나와서 은전 한두 푼을 내 손에 쥐어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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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아기라 함은 내 둘째 아들 신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는 초산에 딸 하나를 낳고 가엾이 세상을 떠나서 노가만 공동묘지에 묻혔다. 나는 그 무덤을 볼 때마다 만일 엄 군에게 그러할 힘이 아니 생기면 나라도 묘비 하나는 해 세우리라 하였으나 숨어서 상해를 떠나는 몸이라 그것을 못한 것이 유감이다. 오늘날도 노가만 공동묘지 임씨의 무덤이 눈에 암암하다. 그는 그 남편이 존경하는 늙은이라 하여 내게 그렇게 끔찍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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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초에 임시정부의 문 파수를 지원하였던 것이 경무국장으로, 노동국 총판으로, 내무총장으로, 국무령으로, 오를 대로 다 올라서 다시 국무위원이 되고 주석이 되었다. 이것은 문 파수의 자격이던 내가 진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진 때문이었다. 비기건대 이름났던 대가가 몰락하여 거지의 소굴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찍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사무할 때에는 중국인은 물론이요, 눈 푸르고 코 높은 영, 미, 법 등 외국인도 정청에 찾아오는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양 사람이라고는 프랑스 순포가 왜 경관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밀린 집세 채근을 오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한창 적에는 1000여 명이나 되던 독립운동자가 이제는 수십 명도 못 되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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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독립운동자가 줄었는가. 첫째로는 임시정부의 군무차장 김희선,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같은 무리는 왜에게 항복하고 본국으로 들어가고, 둘째로는 국내 각 도, 군, 면에 조직하였던 연통제가 발각되어 많은 동지가 왜에게 잡혀갔고, 셋째로는 생활난으로 하여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게 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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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인시정부의 할 일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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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돈이 있어야 할 터인데 돈이 어디서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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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과 만주와는 이미 연락이 끊겼으니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에게 임시정부의 곤란한 사정을 말하여 그 지지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내 편지 정책이었다. 나는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의 열렬한 애국심을 믿었다. 그것은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의 훈도를 받은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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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문에는 문맹이므로 편지 겉봉도 쓸 줄 몰랐으므로 엄항섭, 안공근 등에게 의뢰하여서 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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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 정책의 효과를 기다리기는 벅찼다. 그때에는 아직 항공 우편이 없었으므로 상해, 미국 간에 한 번 편지를 부치고 답장을 받으려면 두 달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다린 보람은 있어서 차차 동정하는 회답이 왔고, 시카고에 있는 김경은 그곳 공동회에서 모은 것이라 하여 집세나 하라고 미화 200불을 보내왔다. 당시 임시정부의 형편으로는 이것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동포들의 정성이 고마웠다. 김경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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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도 안창호, 가와이, 현순, 김상호, 이홍기, 임성우, 박종수, 문인화, 조병요, 김현구, 황인환, 김윤배, 박신애, 심영신 등 제씨가 임시정부를 위하여 정성을 쓰기 시작하고, 미주에서는 국민회에서 점차로 정부에 대한 향심이 생겨서 김호, 이종소, 홍언, 한시대, 송종익, 최진하, 송헌주, 백일규 등 제씨가 일어나 정부를 지지하고, 멕시코에서는 김기창, 이종오, 쿠바에서는 임천택, 박창운 등 제씨가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동지회 방면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위시하여 이원순, 손덕인, 안현경 제씨가 임시정부를 유지하는 운동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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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와이에 있는 안창호(도산 아님), 임성우 양 씨는 내가 민족에 생색날 일을 한다면 돈을 주선하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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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어떤 청년 동지 한 사람이 거류민단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봉창이라 하였다. (나는 그때에 상해 거류민단도 겸임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일본서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독립운동에 참예하고 싶어서 왔으니, 자기와 같은 노동자도 노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가 하였다. 그는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 쓰고, 임시정부를 가정부라고 왜식으로 부르므로 나는 특별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민단 사무원을 시켜 여관을 잡아주라 하고 그 청년더러는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또 만나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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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였다. 하루는 내가 민단 사무실에 있노라니 부엌에서 술 먹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청년이 이런 소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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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안 죽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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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문관이나 무관 하나도 죽이기가 어려운데 천황을 어떻게 죽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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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작년에 천황이 능행을 하는 것을 길가에 엎드려서 보았는데, 그 때에 나는 지금 내 손에 폭발탄 한 개만 있었으면 천황을 죽이겠다고 생각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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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밤에 이봉창을 그 여관으로 찾았다. 그는 상해에 온 뜻을 이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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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나이가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하더라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늙겠으니까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은 대강 맛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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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의 이 말에 내 눈에는 눈물이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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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선생은 공경하는 태도로 내게 국사에 헌신할 길을 지도하기를 청하였다. 나는 그러마 하고 쾌락하고 1년 이내에는 그가 할 일을 준비할 터이나 지금 임시정부의 사정으로는 그의 생활비를 댈 길이 없으니 그 동안은 어떻게 하려는가고 물었더니, 그는 자기가 철공으로 배운 재주가 있고 또 일어를 잘하여 일본서도 일본 사람으로 행세하였고, 또 일본 사람의 양자로 들어가 목하창장(木下昌藏)이라 하여 상해에 오는 배에서도 그 이름을 썼으니, 자기는 공장에서 생활비를 벌면서 일본 사람 행세를 하며 언제까지나 나의 지도가 있기를 기다리노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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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나는 그에게 나하고는 빈번한 교제를 하지 말고 한 달에 한 번씩 밤에 나를 찾아와 만나자고 주의시킨 후에 일인이 많이 사는 홍구로 떠나보냈다.
101
수일 후에 그가 내게 와서 월급 80원에 일본인의 공장에 취직하였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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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부터는 그는 종종 술과 고기와 국수를 사가지고 민단 사무소에 와서 민단 직원들과 놀고, 술이 취하면 일본 소리를 잘 하므로 '일본경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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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하오리에 왜 나막신을 신고 정부 문을 들어서다가 중국인 하인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동녕 선생과 기타 국무원들에게 한인인지 일인인지 판단키 어려운 인물을 정부 문 내에 출입시킨다는 책망을 받았고, 그때마다 조사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다고 변명하였으나 동지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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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럭저럭 이씨와 약속한 1년이 거의 다 가서야 미국에서 부탁한 돈이 왔다. 이제는 폭탄도 돈도 다 준비가 되었다. 폭탄 1개는 왕웅을 시켜 상해 병공창에서, 1개는 김현을 하남성 유치(劉峙)에게 보내어 얻어온 것이니 모두 수류탄이었다. 이 중에 1개는 일본 천황에게 쓸 것이요, 1개는 이씨 자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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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지 복색을 입고 돈을 몸에 지니고 거지 생활을 계속하니 아무도 내 품에 1000여원의 큰 돈이 든 줄을 아는 이가 없었다. 1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이봉창 선생을 비밀리에 법조계 중흥여사로 청하여 하룻밤을 같이 자며 이 선생이 일본에 갈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만일 자살이 실패되어 왜 관원에게 심문을 받게 되거든 이 선생이 대답할 문구까지 일러주었다. 그 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는 내 헌옷 주머니 속에서 돈뭉치를 내어 이봉창 선생에게 주며 일본 갈 준비를 다 하여 다시 오라 하고 서로 작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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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 함께 잤다. 그때에 이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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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으로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주시나 하고. 내가 이 돈을 떼어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 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과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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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로 나는 그를 안공근의 집을 데리고 가서 선서식을 행하고 폭탄 2개를 다시 주고 다시 그에게 돈 300원을 주며 이 돈을 더 보내마고 말하였다. 그리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에 내 낯에는 처연한 빛이 있던 모양이어서 이씨가 나를 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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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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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띄웠다. 나도 그를 따라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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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에 올라앉은 그는 나를 향하여 깊이 허리를 굽히고 홍구를 향하여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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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일 후에 그는 동경에서 전보를 보내었는데, 물품은 1월 8일에 방매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곧 200원을 전보환으로 부쳤더니, 편지로 미친놈처럼 돈을 다 쓰고 여관비, 밥값이 밀렸던 차에 2백원 돈을 받아 주인의 빚을 청산하고도 돈이 남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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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세로 말하면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을 떨치기로 보나, 또 만보산 사건, 만주사변 같은 것으로 우리 한인에 대하여 심히 악화된 중국인의 악감을 풀기로 보거나 무슨 새로운 국면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임시정부에서 회의한 결과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과 파괴공작을 하되, 돈이나 사람이나 내가 전담하여 하고 다만 그 결과를 정부에 보고하라는 전권을 위임받았다. 1월 8일이 임박하므로 나는 국무위원에 한하여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여 두었었다. 기다리던 1월 8일, 중국 신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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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이봉창저격일황부중(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中: 한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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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하는 동경 전보가 게재되었다.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하였다는 것은 좋으나 맞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극히 불쾌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은 나를 위로하였다. 일본 천황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만은 못하나, 우리 한인이 정신상으로는 그를 죽인 것이요, 또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니 이번 일은 성공으로 볼 것이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동지들은 내 신변을 주의할 것을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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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조조(早朝)에 프랑스 공무국으로부터 비밀리 통지가 왔다. 과거 10년간 프랑스 관헌이 김구를 보호하였으나, 이번 김구의 부하가 일황에게 폭탄을 던진 데 대하여서는 일본의 김구 체포 인도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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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민당 기관지, 청도의 《국민일보》는 특호 활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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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이봉창저격일황불행부중(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 한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 맞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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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썼다 하여 당지 주둔 일본 군대와 경찰이 그 신문사를 습격하여 파괴하였고, 그 밖에 장사 등 여러 신문에서도 '불행부중'이라고 문구를 썼다 하여 일본이 중국 정부에 엄중한 항의를 한 결과로 '불행'자를 쓴 신문사는 모두 폐쇄를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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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상해에서 일본인 중 하나가 중국인에게 맞아 죽었다는 것을 빌미로 하여 일본은 1.28 상해사변을 일으켰으니, 기실은 이봉창 의사의 일황 저격과 이에 대한 중국인의 '불행부중'이라고 말한 감정이 이 전쟁의 주요 원인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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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지들의 권고에 의하여 낮에는 일체 활동을 쉬고, 밤에는 동지의 집이나 창기의 집에서 자고, 밥은 동포의 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동포들은 정성껏 나를 대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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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로군의 채정해와 중앙군 제 5군장 장치중의 참전으로 일본군에 대한 상해 싸움은 가장 격렬하게 되어서, 법조계 안에도 후방 병원이 설치되어 중국측 전사병의 시체와 전상병을 가득가득 실은 트럭이 피를 흘리며 왕래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언제 우리도 왜와 싸워 본국 강산을 피로 물들일 날이 올까 하고 눈물이 흘러 통행인들이 수상히 볼 것이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피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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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사건이 전하자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많은 편지가 오고, 그 중에는 이번 중일전쟁에 우리도 한몫 끼어 중국을 도와서 일본과 싸우는 일을 하라고 하는 이도 있고, 적당한 사업을 한다면 거기 필요한 돈을 마련하마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중일전쟁에 한몫 끼이기는 임갈굴정(臨渴掘井: 목이 말라야 우물을 판다는 뜻으로, 평소에 준비 없이 있다가 일을 당하고 나서야 허둥지둥 서두름을 이르는 말)이라, 준비도 없이 무엇을 하랴. 나는 한인 중에 일본군 중에 노동자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그 비행기 격납고와 군수품 창고에 연소탄을 설치하여 이것을 태워버릴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송호협정으로 중국이 일본에 굴복하여 상해전쟁이 끝을 맺으니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송호협정의 중국측 전권은 곽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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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나는 암살과 파괴 계획을 계속하여 실시하려고 인물을 물색하였다. 내가 믿던 제자요 동지인 나석주는 벌써 연전에 서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침입하여 7명의 일인을 쏘아 죽이고 자살하였고, 이승춘은 천진에서 붙들려 사형을 당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을 생각하여도 하릴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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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얻은 동지 이덕주, 유진식은 왜 총독의 암살을 명하여 먼저 본국으로 보냈고, 유상군, 최흥식 등은 왜의 관동군 사령관 본장번(本庄繁: 혼조 시게루)의 암살을 명하여 만주로 보내려고 할 즈음에, 윤봉길이 나를 찾아왔다. 윤 군은 동포 박진이 경영하는 말총으로 모자나 기타 일용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근래에는 홍구 소채장에서 소채장수를 하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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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군은 자기가 애초에 상해에 온 것이 무슨 큰 일을 하려 함이었고, 소채를 지고 홍구 방면으로 돌아다닌 것도 무슨 기회를 기다렸던 것인데, 이제는 중일간의 전쟁도 끝이 났으니 아무리 보아도 죽을 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탄한 뒤에, 내게 동경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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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에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는 큰 뜻이 있는 것을 보고 기꺼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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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침 그대와 같은 인물을 구하던 중이니 안심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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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왜놈들이 이번 상해 싸움에 이긴 것으로 자못 의기양양하여 오는 4월 29일에 홍구 공원에서 그놈들의 소위 천장절 축하식을 성대히 거행한다 하니 이 때에 한번 큰 목적을 달해봄이 어떠냐 하고 그 일의 계획을 말하였다. 내 말을 들더니 윤 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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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랍니다. 이제부텀은 마음이 편안합니다. 준비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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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왜의 신문인 상해 일일신문에 천장절 축하식에 참예하는 사람은 점심 도시락과 물통 하나와 일장기 하나를 휴대하라는 포고가 났다. 이 신문을 보고 나는 곧 서문로 왕웅(본명은 김홍일)을 방문하여 상해 병공창장 송식마에게 교섭하여 일인이 메는 물통과 벤또 그릇에 폭탄 장치를 하여 사흘 안에 보내주기를 부탁케 하였더니 왕웅이 다녀와서 말하기를, 내가 친히 병공창으로 오라고 한다 하므로 가보니 기사 왕백수의 지도 밑에 물통과 벤또 그릇으로 만든 두 가지 폭탄의 성능을 시험하여 보여주었다. 시험 방법은 마당에 토굴을 파서 그 속의 사면을 철판으로 싸고 폭탄을 그 속에 넣고 뇌관에 긴 줄을 달아서 사람 하나가 수십 보 밖에 엎드려서 그 줄을 당기니 토굴 안에서 벼락소리가 나며 깨어진 철판 조각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주 장관이었다. 뇌관을 이 모양으로 20개나 실험하여서 한 번도 실패가 없는 것을 보고야 실물에 장치한다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이 병공창에서 정성을 들이는 까닭은 동경사건에 쓴 폭탄이 성능이 부족하였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때문이라고 왕 기사는 말하였다. 그래서 20여개 폭탄을 이 모양으로 무료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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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물통 폭탄과 벤또 폭탄을 병공창 자동차로 서문로 왕웅 군의 집까지 실어다 주었다. 이런 금물은 우리가 운반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 친절에서였다.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중국 거지 복색을 벗어버리고 넝마전에 가서 양복 한 벌을 사 입어 엄연한 신사가 되어가지고 하나씩 둘씩 이 폭탄을 날라다가, 법조계 안에 사는 친한 동포의 집에 주인에게도 그것이 무엇이라고는 알리지 아니하고, 다만 귀중한 약이니 불조심만 하라고 이르고 까마귀 떡 감추듯 이집 저집에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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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랜 상해 생활에 동포들과 다 친하게 되어 어느 집에를 가나 내외가 없었다. 더구나 동경사건 이래로 그러하여서 부인네들도 나와 허물없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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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우는 젖먹이를 내게 안겨 놓고 제 일들을 하였다. 내게 오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잘 논다는 소문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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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이 점점 박두하여 왔다. 윤봉길 군은 말쑥하게 일본식 양복을 사 입혀서 날마다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살펴서 그 당일에 자기가 행사할 적당한 위치를 고르게 하고, 일변 백천 대장(白川 義則: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사진이며 일본 국기 같은 것도 마련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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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백천이 놈도 식장 설비하는 데 왔겠지요. 바로 내 곁에 선단 말야요. 내게 폭탄만 있었다면 그 때에 해 버리는 겐데."
140
하고 아까워하였다. 나는 정색하고 윤군을 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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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무슨 말이요? 포수가 사냥을 하는 법이 앉은 새와 자는 짐승은 아니 쏜다는 것이오. 날려 놓고 쏘고 달려 놓고 쏘는 것이야. 윤 군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내일 일에 자신이 없나 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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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군은 내 말에 무료(無聊: 부끄럽고 열없음)한 듯이,
143
"아니오. 그놈이 내 곁에 있는 것을 보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입니다. 내일 일에 왜 자신이 없어요. 있지요."
146
"나도 윤 군의 성공을 확신하오. 처음 이 계획을 말할 때에 윤 군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지 않았소? 그것이 성공할 증거라고 나는 믿고 있소.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되오.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 마음이 움직이는 게요."
147
하고 내가 치하포에서 토전양량을 타살하려 할 때에 가슴이 울렁거리던 것과, 고능선 선생에게 들은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라는 글귀를 생각하매 마음이 고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니 윤 군은 마음에 새기는 모양이었다.
148
윤 군을 여관으로 보내고 나는 폭탄 두 개를 가지고 김해산 군 집으로 가서 김 군 내외에게, 내일 윤봉길 군이 중대한 임무를 띠고 동삼성(만주)으로 떠나니, 고기를 사서 이른 조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149
이튿날은 4월 29일이었다. 나는 김해산 집에서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하였다. 밥을 먹으며 가만히 윤 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 태연자약함이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150
김해산 군은 윤 군의 침착하고도 용감한 태도를 보고, 조용히 내게 이런 권고를 하였다.
151
"지금 상해에 민족 체면을 위하여 할 일이 많은데 윤 군 같은 인물을 구태여 다른 데로 보낼 것이 무엇이오?"
152
"일은 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윤 군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내나 들어봅시다."
153
나는 김해산 군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154
식사도 끝나고 시계가 일곱 점을 친다. 윤 군은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내게 주며,
155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156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 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 군에게 주었다.
157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윤 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준다.
160
"자동차값 하고도 5, 6원은 남아요."
161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163
하였더니 윤 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햐여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 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 공원을 향하여 달렸다.
164
그 길로 나는 조상섭의 상점에 들려 편지 한 장을 써서 점원 김영린을 주어 급히 안창호 선생에게 전하라 하였다. 그 내용은 '오전 10시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시오. 무슨 대사건이 있을 듯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석오 선생께로 가서 지금까지 진행한 일을 보고하고 점심을 먹고 무슨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65
오후 1시쯤 해서야 중국 사람들의 입으로 홍구 공원에서 누가 폭탄을 던져서 일인이 많이 죽었다고 술렁술렁하기 시작했다. 혹은 중국인이 던진 것이라 하고, 혹은 고려인의 소위라고 하였다. 우리 동포 중에도 어제까지 소채바구니를 지고 다니던 윤봉길이 오늘에 경천위지할 이 일을 했으리라고 아는 사람은 김구 이외에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같은 몇 사람이나 짐작하였을 것이다.
166
이 날 일은 순전히 내가 혼자 한 일이므로, 이동녕 선생에게도 이 날은 처음 자세한 보고를 하고 자세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3시에 비로소 신문 호외로, '홍구 공원 일인의 천장절 경축대상에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하단(河端: 카와 바타)은 즉사하고 백천 대장, 중광 대사(重光葵: 시게미쓰 마모루), 야촌 중장(野村吉三郎: 노무라 기치사부로) 등 문무대관이 다수 중상.'이라는 것이 보도되었다.
167
그 날 일인의 신문에는 폭탄을 던진 것은 중국인의 소위라고 하더니, 이튿날 신문에야 일치하게 윤봉길의 이름을 크게 박고 법조계에 대수색이 일어났다.
168
나는 안공근과 엄항섭을 비밀히 불러 이로부터 나를 따라 일을 같이 할 것을 명하고, 미국인 피취(비오생이라고 중국식으로 번역한다) 씨에게 잠시 숨겨주기를 교섭하였더니 피취 씨는 쾌락하고 그 집 2층을 전부 내게 제공하므로 나와 김철, 안공근, 엄항섭 넷이 그 집에 있게 되었다. 피취 씨는 고 피취 목사의 아들이요, 피취 목사는 우리 상해 독립운동의 숨은 은인이었다. 피취 부인은 손수 우리의 식절을 보살폈다.
169
우리는 피취 댁 전화를 이용하여 누가 잡힌 것 등을 알고 또 잡혀간 동지의 가족의 구제며 피난할 동지의 여비 지급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전인하여 편지까지 하였건마는 불행히 안창호 선생이 이유필의 집에 갔다가 잡히고, 그 밖에 장헌근, 김덕근과 몇몇 젊은 학생들이 잡혔을 뿐이요, 독립운동 동지들은 대개 무사함을 알고 다행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수색의 손이 날마다 움직이니 재류동포가 안거할 수가 없고, 또 애매한 동포들이 잡힐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동경사건과 이번 홍구 폭탄 사건의 책임자는 나 김구라는 성명서를 즉시로 발표하려 하였으나, 안공근의 반대로 유예하다가 마침내 엄항섭으로 하여금 이 성명서를 기초케 하고 피취 부인에게 번역을 부탁하여 통신사에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사건이나, 상해에 백천 대장 이하를 살상한 윤봉길 사건이나 그 주모자는 김구라는 것이 전세계에 알려진 것이었다.
170
이 일이 생기자 은주부, 주경란 같은 중국 명사가 내게 특별 면회를 청하고, 남경에 있던 남파 박찬익 형의 활동도 있어 물질로도 원조가 답지하였다. 만주사변, 만보산 사건 등으로 악화하였던 중국인의 우리 한인에 대한 감정은 윤봉길 의사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호전하였다.
171
왜는 제 1차로 내 몸에 20만원 현상을 하더니 제 2차로 일본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해 주둔군 사령부의 3부 합작으로 60만원 현상으로 나를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전에는 법조계에서 한 발자국도 아니 나가던 나는 자동차로 영조계, 법조계 할 것 없이 막 돌아다녔다. 하루는 전차공사 인스펙터로 다니는 별명 박 대장의 집에 혼인 국수를 먹으러 가는 것이 10여 명의 왜 경관대에게 발견되어 박 대장 집 아궁이까지 수색되었으나, 나는 부엌에서 선 채로 국수를 얻어먹고 나온 뒤여서 아슬아슬하게 면하였다.
172
남경 정부에서는 내가 신변이 위험하다면 비행기를 보내마고까지 말하여 왔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데려가려 함은 반드시 무슨 요구가 있을 것인데, 내게는 그들을 만족시킬 아무 도리도 없음을 생각하고 헛되이 남의 나라의 신세를 질 것이 없다 하여 모두 사절하여 버렸다.
173
이러하는 동안에 20여 일이 지났다. 하루는 피취 부인이 나를 보고 내가 피취 댁에 있는 것을 정탐들이 알고 그들이 넌지시 집을 포위하고 지키고 있다 하므로, 나는 피취 댁에 더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피취 댁 자동차에 피취 부인과 나는 내외인 것처럼 동승하고, 피취 씨가 운전수가 되어 대문을 나서 보니 과연 중국인, 러시아인, 프랑스인 정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피취 씨가 차를 빨리 몰아 법조계를 지나 중국 땅에 있는 정거장으로 가서 기차로 가흥 수륜사창에 피신하였다. 이는 박남파가 은주부, 저보성 제씨에게 주선하여 얻어 놓은 곳으로, 이동녕 선생을 비롯하여 엄항섭, 김의한 양군의 가족은 수일 전에 벌써 반이해 와 있었다. 나중에 들은즉 우리가 피취 댁에 숨은 것이 발각된 것은 우리가 그 집 전화를 남용한 데서 단서가 나온 것이라 하였다.
175
나는 이로부터 일시 가흥에 몸을 붙이게 되었다. 성은 부모님을 따라 장이라 하고 이름은 진구, 또는 진이라고 행세하였다.
176
가흥은 내가 의탁하여 있는 저보성 씨의 고향인데, 저씨는 일찍이 강소성장을 지낸 이로, 덕망이 높은 신사요, 그 맏아들 봉장은 미국 유학생으로 그곳 동문 밖 민풍지창이라는 종이 공장의 기사장이었다. 저씨의 집은 가흥 남문 밖에 있는데 구식 집으로 그리 굉장하지는 아니하나 대부의 저택으로 보였다. 저씨는 그의 수양자인 진동손 군의 정자를 내 숙소로 지정하였는데, 이것은 호숫가에 반양제로 지은 말쑥한 집이었다. 수륜사창이 바라보이고 경치가 좋았다. 저씨 댁에 내 본색을 아는 이는 저씨 내외와 그 아들 내외와 진동손 내외뿐인데, 가장 곤란한 것은 내가 중국 말을 통치 못함이었다. 비록 광동인이라고 행세는 하지마는 이렇게도 말을 모르는 광동인이 어디 있으랴.
177
가흥에는 산은 없으나 호수와 운하가 낙지발같이 사통팔달하여서 7, 8세 되는 아이들도 배 저을 줄을 알았다.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서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은 상해와 딴판으로 순후하여 상점에 에누리가 없고 고객이 물건을 잊고 가면 잘 두었다가 주었다.
178
나는 진씨 내외와 동반하여 남호 연우루와 서문 밖 삼탑 등을 구경하였다. 여기는 명나라 때에 왜구가 침입하여 횡포하던 유적이 있었다. 동문 밖으로 10리쯤 나아가면 한나라 적 주매신의 무덤이 있고, 북문 밖 낙범정은 주매신이 글을 읽다가 나락 멍석을 떠내려 보내고 아내 최씨에게 소박을 받은 유적이라고 한다. 나중에 주매신이 회계태수가 되어 올 때에 최씨는 엎지른 동이의 물을 주워담지 못하여 낙범정 밑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179
가흥에 우접한지 얼마 아니하여 상해 일본 영사관에 있는 일인 관리 중에서 우리의 손에 매수된 자로부터 호항선(상해, 항주 철도)을 수색하러 가니 조심하라는 기별이 왔다. 가흥 정거장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았더니 과연 변장한 왜 경관이 내려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갔다 하므로 저봉장의 처가인 주씨 댁 산정으로 가기로 하였다. 주씨는 저봉장의 재취로, 첫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아니 되는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저씨는 이러한 그 부인을 단독으로 내 동행을 삼아서 기선으로 하룻길 되는 해염현성 주씨 댁으로 나를 보내었다.
180
주씨 댁은 성내에서 가장 큰 집이라 하는데 과연 굉장하였다. 내 숙소인 양옥은 그 집 후원에 있는데, 대문 밖은 돌을 깔아 놓은 길이요, 길 건너는 대소 선박이 내왕하는 호수다. 그리고 대문 안은 정원이요, 한 협문을 들어가면 사무실이 있는데, 여기는 주씨 댁 총경리가 매일 이 집 살림살이를 맡아 보는 곳이다. 예전에는 4백여명 식구가 한 식당에 모여서 식사를 했으나 지금은 사농공상의 직업을 따라서 대부분이 각처로 분산하고 남아있는 식구들도 소가족으로 자취를 원하므로 사무실에서 물자만 배급한다고 한다.
181
집의 생김은 벌의 집과 같아서 세 채나 네 채가 한 가족 차지가 되었는데, 앞에는 큰 객청이 있고, 양옥과 화원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운동장이 있다.
182
해염에 대화원(大花園) 셋이 있는데 전가 화원이 첫째요, 주가 화원이 둘째라 하기로 전가 화원도 구경하였다. 과연 전씨 댁이 화원으로는 주씨 것보다 컸으나 집과 설비로는 주씨 것이 전씨 것보다 나았다.
183
해염 주씨 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다시 주씨 부인과 함께 기차로 노리언까지 가서 거기서부터는 서남으로 산길 5, 6리를 걸어 올라갔다. 저 부인이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연방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7, 8월 염천에 고개를 걸어 넘는 광경을 영화로 찍어 만대 후손에게 전할 마음이 간절하였다. 부인의 친정 시비 하나가 내가 먹을 것과 기타 일용품을 들고 우리를 따랐다.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 부인의 정성과 친절을 내 자손이나 우리 동포가 누구든 감사하지 아니하랴. 영화로는 못 찍어도 글로라도 전하려고 이것을 쓰는 바이다.
184
고개턱에 오르니 주씨가 지은 한 정자가 있다. 거기서 잠시 쉬고 다시 걸어 수백 보를 내려가니 산 중턱에 소쇄한 양옥 한 채가 있다. 집을 수호하는 비복들이 나와서 공손하게 저 부인을 맞는다.
185
부인은 시비에게 들려 가지고 온 고기며 과일을 꺼내어 비복들에게 주며 내 식성과 어떻게 요리할 것을 설명하고, 또 나를 안내하여 어디를 가거든 얼마, 어디 어디는 얼마를 받으라고 안내 요금까지 자상하게 분별하여 놓고 당일로 해염 친가로 돌아갔다.
186
나는 이로부터 매일 산에 오르기로 일을 삼았다. 나는 상해에 온지 14년이 되어 남들이 다 보고 말하는 소주니 항주니 남경이니 하는 데를 구경하기는 고사하고 상해 테두리 밖에 한 걸음을 내어 놓은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마음대로 산과 물을 즐길 기회를 얻으니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187
이 집은 본래 저 부인의 친정 숙부의 여름 별장이러니, 그가 별세하매 이 집 가까이 매장한 뒤로는 이 집은 그 묘소의 묘막과 제각을 겸한 것이라고 한다. 명가가 산장을 지을 만한 곳이라 풍경이 자못 아름다웠다. 산에 오르면 앞으로는 바다요, 좌우는 푸른 솔, 붉은 가을 잎이었다.
188
하루는 응과정에를 올랐다. 거기는 일좌 승방이 있어, 한 늙은 여승이 나와 맞았다. 그는 말끝마다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189
"원로 잘 오셔 계시오, 아미타불. 내불당으로 들어오시오, 아미타불!"
190
이 모양이었다. 그를 따라 암자로 들어가니 방방이 얼굴 희고 입술 붉은 젊은 여승이 승복을 맵시 있게 입고 목에는 긴 염주, 손에는 단주를 들고 저두추파(고개를 숙이고 다감한 눈길을 보냄)로 인사를 하였다.
191
암자 뒤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위에 지남침을 놓으면 거꾸로 북을 가리킨다 하기로 내 시계에 달린 윤도를 놓아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아마 자철광 관계인가 하였다.
192
하루는 해변 어느 진(나루터)에 장구경을 갔다가 경찰의 눈에 걸려서 마침내 내 정체가 이 지방 경찰에 알려지게 되었으므로 안전치 못하다 하여 도로 가흥으로 돌아왔다.
193
가흥에 와서는 거진 매일 배를 타고 호수에 뜨거나 운하로 오르내리고, 혹은 엄가빈이라는 농촌에 몸을 붙여 있기도 하였다.
194
이렇게 강남의 농촌을 보니 누에를 쳐서 길쌈을 하는 법이나 벼농사를 짓는 법이나 다 우리나라보다는 발달된 것이 부러웠다. 구미 문명이 들어와서 그런 것 외에 고래의 것도 그러하였다. 나는 생각하였다. 우리 선인들은 한, 당, 송, 원, 명, 청 시대에 끊임없이 사절이 내왕하면서 왜 이 나라의 좋은 것은 못 배워 오고 궂은 것만 들여왔는고. 의관 문물 실준중화(衣冠 文物 實遵中和: 의관과 문물은 모두 중국의 것을 좇는다)라는 것이 이조 오백 년의 당책이라 하건마는 머리 아픈 망건과 기타 망하기 좋은 것뿐이요, 이용후생에 관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민족의 머리에 틀어박힌 것은 원수의 사대사상뿐이 아니냐. 주자학을 주자 이상으로 발달시킨 결과는 공수위좌(拱手爲座)하여 손가락 하나 안 놀리고 주둥이만 까게 하여서 민족의 원기를 소진하여 버리니 남는 것은 편협한 당파싸움과 의뢰심 뿐이다.
195
오늘날로 보아서 요새 일부 청년들이 제정신을 잃고 러시아로 조국을 삼고 레닌을 국부로 삼아서 이제까지의 민족혁명은 두 번 피 흘릴 운동이니, 대번에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고 떠들던 자들이 레닌의 말 한 마디에 돌연히 민족혁명이야말로 그들의 진면목인 것처럼 들고 나오지 않는가. 주자님의 방구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류들 모양으로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나는 반드시 주자를 옳다고도 아니하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도 아니한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잃지 말란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장한 체를 말라는 것이다. 제 뇌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란 말이다.
196
나는 엄가빈에서 다시 사회교 엄항섭 군 집으로, 오룡교(五龍橋) 진동생(陳桐生)의 집으로 옮아 다니며 숙식하고, 낮에는 주애보라는 여자가 사공이 되어 부리는 배를 타고 이 운하, 저 운하로 농촌 구경을 돌아 다니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197
가흥 성내에 있는 진명사는 유명한 도주공의 집터라 한다. 그 속에는 축오자(암소 다섯 마리를 기른다)하고 또 양어하던 못이 있고, 절문 밖에는 도주공유지라는 돌비(碑)가 있다.
198
하루는 길로 돌아다니다가 큰 길가 마당에서 군사가 조련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있기로 나도 그 틈에 끼었더니 군관 하나가 나를 유심히 보며 내 앞으로 와서 누구냐 하기로 나는 언제나 하는대로 광동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군관이 정작 광동인인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나는 곧 보안대 본부로 붙들려 갔다. 저씨 댁과 진씨 댁에 조사한 결과로 무사하게는 되었으나 저봉장 군은 내가 피신할 줄을 모른다고 책하고 그의 친우요, 중학교 교원인 과부가 하나 있으니 그와 혼인하여 살면서 행색을 감추라고 권하였다. 나는 그런 유식한 여자와 함께 살면 더욱 내 본색이 탄로되기 쉬우니 차라리 무식한 뱃사공 주애보에게 몸을 의탁하리라 하여 아주 배 속에서 살기로 하였다. 오늘은 남문 밖 호숫가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밖 은하 옆에서 자고 낮에는 육지에 나와 다녔다.
199
이러는 동안에도 박남파, 엄일파(一派: 엄항섭의 가명), 안신암 세 사람은 줄곧 외교 정보의 수집에 종사하였다. 중국인 친구의 동정과 미주 동포의 후원으로 활동하는 비용에는 곤란이 없었다.
200
박남파가 중국 국민당 당원인 관계로 당의 조직부장이요, 강소성 주석인 진과부와 면식이 있어, 그의 소개로 장개석 장군이 내게 면회를 청한다는 통지를 받고 나는 안공근, 엄항섭 두 사람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갔다. 공패성, 소쟁 등 요인들이 진과부 씨를 대표하여 나를 나와 맞아 중앙반점에 숙소를 정하였다.
201
이튿날 밤에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장개석 장군의 자택으로 진과부 씨의 자동차를 타고 박남파 군을 통역으로 데리고 갔다. 중국 옷을 입은 장씨는 온화한 낯빛으로 나를 접하여 주었다. 인사가 끝난 뒤에 장 주석은 간명한 어조로,
202
"동방 각 민족은 손중산 선생의 삼민주의(중국의 쑨원이 제창한 민족, 민권, 민생주의를 이름)에 부합하는 민주정치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204
"일본의 대륙 침략의 마수가 각일각으로 중국에 침입하니 벽좌우(좌우 사람을 잠시 물리침)를 하시면 필담으로 몇 마디를 하겠소."
207
하므로 진과부와 박남파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붓을 들어,
208
"선생이 백만 금을 허하시면 이태 내에 일본, 조선, 만주 세 방면에 폭풍을 일으켜 일본의 대륙침략의 다리를 끊을 터이니 어떻게 생각하오?"
210
그것을 보더니 이번에는 장씨가 붓을 들어,
211
"청이계획서상시(請以計劃書詳示: 청하건대, 계획서로 상세히 보이시오.)"
212
라고 써서 내게 보이기로 나는 물러나왔다.
213
이튿날 간단한 계획서를 만들어 장 주석에게 드렸더니 진과부 씨가 자기의 별장에 나를 초대하여 연석을 베풀고, 장 주석의 뜻을 내게 대신 전한다. 특무공작으로는 천황을 죽이면 또 천황이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으니, 장래의 독립전쟁을 위하여 무관을 양성함이 어떠한가 하기로 나는 이야말로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하남성 낙양의 군관학교 분교를 우리 동포의 무관양성소로 삼기로 작정되어 제 1차로 북평, 천진, 상해, 남경 등지에서 백여 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학적에 올리고, 만주로부터 이청천과 이범석을 청하여 교관과 영관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군관 학교는 겨우 제1기생의 필업을 하고는 일본 영사 수마(須磨弥吉郎: 스마 야키치로)의 항의로 남경 정부에서 폐쇄령이 내렸다).
214
이때에 대일전선통일동맹이란 것이 발동하여 또 통일론이 일어났다. 김원봉이 내게 특별히 만나기를 청하기로 어느 날 진회에서 만났더니 그는 자기도 통일운동에 참가하겠은즉 나더러도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 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는 통일이 목적인 것보다도 중국인에게 김원봉은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면하기 위함이라 하기로, 나는 통일은 좋으나 그런 한 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려는 통일운동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215
얼마 후에 소위 5당 통일회의라는 것이 개최되어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미주대한인독립단이 통일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이 되어 나왔다. 이 통일의 주동자가 된 김원봉, 김두봉 등 의열단은 임시정부를 눈에 든 가시와 같이 싫어하는 패라 임시정부의 해소를 극렬히 주장하였고,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던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송병조, 차이석, 양기탁, 유동열 일곱 사람 중에 차이석, 송병조 두 사람을 내어놓고 그 외 다섯 사람이 통일이란 말에 취하여 임시정부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니 김두봉은 좋다구나 하고 임시정부 소재지인 항주로 가서 차이석, 송병조 양씨에게 5당이 통일된 이 날에 이름만 남은 임시정부는 취소해버리자고 강경하게 주장하였으나, 송병조, 차이석 양씨는 굳이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문패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각원 일곱 사람 중에 다섯이 빠졌으니 국무회의를 열 수도 없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216
조완구 형이 편지로 내게 이런 사정을 전하였으므로 나는 분개하여 즉시 항주로 달려갔다. 이때에 김철은 벌써 작고하여 없고 5당 통일에 참가하였던 조소앙은 벌써 거기서 탈퇴하고 없었다.
217
나는 이시영, 조완구, 김봉준, 양소벽, 송병조, 차이석 제씨와 임시정부 유지 문제를 협의한 결과 의견이 일치하기로, 일동이 가흥으로 가서 거기 있던 이동녕, 안공근, 안경근, 엄항섭 등을 가하여 남호의 놀잇배 한 척을 얻어 타고 호상에 떠서 선중에서 의회를 열고 국무위원 세 사람을 더 뽑으니 이동녕, 조완구와 김구였다. 이에 송병조와 차이석을 합하여 국무위원이 다섯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는 국무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218
5당 통일론이 났을 때에도 여러 동지들은 한 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나는 차마 또 한 단체를 만들어 파쟁을 늘이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이유로 줄곧 반대하여 왔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유지하려면 그 배경이 될 단체가 필요하였고, 또 조소앙이 벌써 한국독립당을 재건한다 하니 내가 새 단체를 조직하더라도 통일을 파괴하는 책임은 지지 아니하리라 하여 동지들의 찬동을 얻어 대한국민당을 조직하였다.
219
나는 다시 남경으로 돌아왔으나 왜는 내가 남경에 있는 냄새를 맡고 일변 중국 관헌에 대하여 나를 체포할 것을 요구하고, 일변 암살대를 보내어 내 생명을 엿보고 있었다. 남경 경비사령관 곡정륜은 나를 면대하여 말하기를, 일본측에서 대역 김구를 체포할 것이니 입적, 기타의 이유로 방해 말라 하기로, 자기가 김구를 잡거든 일본서 걸어 놓은 상금은 자기에게 달라고 대답하였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또 사복 입은 일본 경관 일곱이 부자묘 부근으로 돌아다니더라는 말도 들었다.
220
이에 나는 남경에서도 내 신변이 위험함을 깨닫고 회쳥교에 집 하나를 얻고 가흥에서 배 저어주던 주애보를 매삭 15원씩 주기로 하고 데려다가 동거하며, 직업은 고물상이요, 원적은 광동성 해남도라고 멀찍이 대었다. 혹시 경관이 호구조사를 오더라도 주애보가 나서서 설명하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본색을 탄로할 필요는 없었다.
221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일본에 대하여 항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재류한인의 인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 통일로 되었던 민족혁명당이 쪽쪽이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새로 생기고, 미주대한독립단은 탈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222
이렇게 민족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의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단과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모든 애국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점점 힘을 얻게 되었다.
223
중일전쟁은 강남에까지 미쳐서 상해의 전투가 날로 중국에 불리하였다. 일본 공군의 남경 폭격도 갈수록 우심하여 회쳥교의 내가 들어있는 집도 폭격에 무너졌으나 나와 주애보는 간신히 죽기를 면하고, 이웃에는 시체가 수두룩하였다. 나와보니 남경 각처에는 불이 일어나서 밤하늘은 붉은 모전과 같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무너진 집과 흩어진 시체 사이로 마로가(馬路街)에 어머니가 계신 집을 찾아 갔더니 어머니가 친히 문을 열으시며, 놀라셨겠다는 나의 말에 어머니는,
224
"놀라기는 무얼 놀라. 침대가 들썩들썩하더군."
228
나는 그 길로 동포 사는 데를 돌아보았으나 남기가에 많이 있는 학생들도 다 무고하였다.
229
남경의 정세가 위험하여 정부 각 기관도 중경으로 옮기게 되므로 우리 광복전선 3당의 백여 명 대가족은 물가가 싼 장사로 피난하기로 정하고 상해, 항주에 있는 동지들에게 남경에 모이라는 지시를 하였다. 율양 고당암에게 선도를 공부하고 있는 양기탁에게도 같은 기별을 하였다. 그리고 안공근을 상해로 보내어 그 가권을 데려오되, 그의 맏형수 고 안중근 의사 부인을 꼭 모셔 오라고 신신 부탁하였더니 안공근이 돌아올 때에 보니 제 가권 뿐이요, 안 의사 부인이 없으므로 나는 크게 책망하였다.
230
양반의 집에 불이 나면 신주부터 먼저 안아 뫼시는 법이거늘, 혁명가가 피난을 하면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버린 의사의 부인을 적진중에 버리고 가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는 다만 안공근 한 집의 잘못만이 아니라 혁명가의 도덕에 어그러지고, 우리 민족의 수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안공근은 피난하는 동포들의 단체에 들기를 원치 아니하므로 제 뜻에 맡겨버렸다.
231
나는 안휘 둔계중학에 재학중인 신이를 불러오고 어머니를 모시고 영국 윤선(輪船)으로 한구로 가고, 대가족 백여 식구는 중국 목선 두 척에 행리까지 잔뜩 싣고 남경을 떠났다.
232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신이를 데리고 한구를 거쳐서 무사히 장사에 도착하였다. 선발대로 임시정부의 문부(文簿)를 가지고 진강을 떠난 조성환, 조완구 등은 남경서 오는 일행보다 수일 먼저 도착하였고, 목선으로 오는 대가족 일행도 풍랑을 겪었다 하나 무고히 장사에 왔다. 남기가 사무소에서 부리던 중국인 채 군이 무호(蕪湖) 부근에서 풍랑 중에 물을 길어 올리다가 실족하여 익사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는 사람이 충실하니 데리고 가라 하시는 어머님 명령으로 일행 중에 편입하였던 것이다.
233
내가 남경서 데리고 있던 주애보는 거기를 떠날 때에 제 본향 가흥으로 돌려보내었다. 그 후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때에 여비 100원만 준 일이다. 그는 5년이나 가깝게 나를 광동인으로만 알고 섬겨 왔고,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간에 생겨서 실로 내게 대한 공로란 적지 아니한데,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 줄 알고 노자 이외에 돈이라도 넉넉하게 못 준 것이 참으로 유감천만이다.
234
안공근의 식구는 중경으로 갔거니와 장사에 모인 100여 식구도 공동 생활을 할 줄 모르므로 저마다 방을 얻어서 제각기 밥을 짓는 살림을 하였다. 나도 어머니를 모시고 또 한번 살림을 시작하여서 어머니가 손수 지어주시는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글을 쓰는 오늘날에는 이미 이 세상에 아니 계시다.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상권을 쓸 때와 같이 지난 일과 날짜도 많이 여쭈어볼 것이건마는 이제는 어머니가 안 계시다.
235
이 기회에 내가 상처(喪妻: 아내를 잃음) 후에 어머니가 본국으로 가셨다가 다시 오시던 일을 기록하련다.
236
어머니가 신이를 데리고 인천에 상륙하셨을 때에는 노자가 다 떨어지셨다. 그때에는 우리가 상해에서 조석이 어려워서 어머니가 중국 사람들이 쓰레기통에 버린 배추 떡잎을 뒤져다가 겨우 반찬을 만드시던 때라 노자를 넉넉히 드렸을 리가 만무하다.
237
인천서 노자가 떨어진 어머니는 내가 말씀도 한 일이 없건마는 동아일보 지국으로 가셔서 사정을 말씀하셨다. 지국에서는 벌써 신문 보도로 어머니가 귀국하시는 것을 알았다 하면서 서울까지 차표를 사 드렸다. 어머님은 서울에 내려서는 동아일보사를 찾아가셨다. 동아일보사에서는 사리원까지 차표를 사 드렸다.
238
어머니는 해주 본향에 선영과 친족을 찾으시지 않고 안악 김씨 일문에서 미리 준비하여 놓은 집에 계시게 하였다.
239
내가 인이를 데리고 있는 동안, 어머님은 당신의 생활비를 절약하셔서 때때로 내게 돈을 보내주셨다.
240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사건이 생기매 경찰이 가끔 어머니를 괴롭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어머니께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나오시라고 기별하였다. 그때에는 내게 어머니께서 굶지 않으시게 할 만한 힘이 있다고 여쭈었다.
241
어머님은 중국으로 오실 결심을 하시고 안악 경찰서에 친히 가셔서 출국 허가를 청하였더니 의외에 좋다고 하므로 살림을 걷어치우셨다.
242
그랬더니 서울 경무국으로부터 관리 하나가 안악으로 일부러 와서 어머니께, 경찰의 힘으로도 못 찾는 아들을 노인이 어떻게 찾느냐고, 그러니 출국 허가를 취소한다고 하였다.
244
"내 아들을 찾는 데는 내가 경관들보다 나을 터이고, 또 가라고 허가를 하여서 가장집물을 다 팔게 해놓고 이제 또 못간다는 것이 무슨 법이냐. 너희놈들이 남의 나라를 빼앗아 먹고 이렇게 정치를 하고도 오래 갈 줄 아느냐?"
245
하면서 기절하셨다. 이에 경찰은 어머니를 김씨네에게 맡기고 가버렸다.
247
"그렇게 말썽 많은 길은 안 떠난다."
248
하시고는 목수를 불러 다시 집을 수리하고 집물을 마련하시는 등 오래 사실 모양을 보이셨다.
249
이러하신 지 수삭 만에 어머니는 송화 동생을 보러가신다 칭하고 신이를 데리시고 신천으로, 재령으로, 사리원으로 도막도막 몸을 옮겨서 평양에 도착하여 숭실중학교에 재학중인 인이를 데리고 안동현으로 가는 직행차를 타셨다. 대련서 왜 경찰의 취조를 받았으나 거기서 인이가 늙은 조모를 모시고 위해위 친척의 집에 간다고 대답하여서 무사히 통과하셨다. 어머니가 상해 안공근 집을 거쳐 가흥 엄항섭 집에 오셨다는 기별을 남경에서 듣고 나는 곧 가흥으로 달려가서 9년만에 다시 모자가 서로 만났다.
250
나를 보시자마자 어머님은 이러한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251
"나는 이제부터 '너'라고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는 책하더라도 초달로 자네를 때리지는 않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그 체면을 보아주자는 것일세."
252
나는 어머니의 이 분부에 황송하였고, 또 이것을 큰 은전으로 알았다.
253
나는 어머니를 남경에서 따로 집을 잡고 계시게 하다가 1년이 못되어 장사로 가게 된 것이었다.
254
어머니가 남경에 계실 때 일이다.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어머니의 생신 축하연을 베풀려 함을 눈치 채시고 어머니는 그들에게, 그 돈을 돈으로 달라, 그러면 당신이 자시고 싶은 음식을 만들겠다 하시므로 발기하던 사람들은 어머니의 청구대로 그 돈을 드렸더니 어머니는 그것으로 단총 두 자루를 사서 그것을 독립운동에 쓰라 하고 내어놓으셨다.
255
장사로 옮아온 우리 100여명 대가족은 중국 중앙정부의 보조와 미국에 있는 동포들의 후원으로 생활에 곤란은 없어서 피난민으로는 고등 피난민이라 할 만하게 살았다. 더욱이 장사는 곡식이 흔하고 물가가 지천하였고, 호남성 부주석으로 새로 도임한 장지충 장군은 나와는 숙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많은 편의를 주었다.
256
나는 상해, 항주, 남경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변성명을 하였으나 장사에서는 언제나 김구로 행세하였다.
257
오는 노중에서부터 발론이 되었던 3당 합동문제가 장사에 들어와서는 더욱 활발하게 진전되었다. 합동하려는 3당의 진용은 이러하였다.
258
첫째는 조선혁명당이니, 이청천, 유동열, 최동오, 김학규, 황학수, 이복원, 안일청, 현익철 등이 중심이요, 둘째는 한국독립당이니, 조소앙, 홍진, 조시원 등이 그 간부며, 다음으로 셋째는 내가 창설한 한국국민당이니,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차이석, 송병조, 김병준, 엄항섭, 안공근, 양묵, 민병길, 손일민, 조성환 등이 그 중의 중심 인물이었다.
259
이상 3당이 통합문제를 토의하려고 조선혁명당 본부인 남목청에 모였는데 나도 거기 출석하여 있었다.
260
내가 의식을 회복하여보니 병원인 듯하였다. 웬일이냐 한즉, 내가 술에 취하여 졸도하여서 입원한 것이라고 하였다. 의사가 회진할 때에 내 가슴에 웬 상처가 있는 것을 알고 이것은 웬것이냐 한즉 그것은 내가 졸도할 때에 상머리에 부딪친 것이라 하므로 그런 줄만 알고 병석에 누워 있었다. 한 달이나 지나서야 엄항섭 군이 내게 비로소 진상을 설명하여 주었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261
그날 밤, 조선혁명당원으로서 내가 남경 있을 때에 상해로 특수공작을 간다고 하여서 내게 금전의 도움을 받은 일이 있는 이운한이 회장에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하여 첫 방에 내가 맞고, 둘째로 현익철, 셋째로 유동열이 다 중상하고 넷째 방에 이청천이 경상하였는데, 현익철은 입원하자 절명하고 유동열은 치료 경과가 양호하다는 것이었다.
262
범인 이운한은 장사 교외의 작은 정거장에서 곧 체포되고 연루자로 강창제, 박창세 등도 잡혔었으나 강, 박 양인은 석방되고 이운한은 탈옥하여 도망하였다.
263
성 주석 장치중 장군은 친히 내가 입원한 상아의원에 나를 위문하고, 병원 당국에 대하여서는 치료비는 얼마가 들든지 성 정부에서 담당할 것을 말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구에 있던 장개석 장군은 하루에도 두세 번 정보로 내 병상을 묻고, 내가 퇴원한 기별을 듣고는 나하천을 대표로 내게 보내어 돈 3천원을 요양비로 쓰라고 주었다.
265
"자네 생명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줄 아네--사불범정(邪不犯正: 바르지 못하고 요사스러운 것은 바른 것을 범하지 못함)이지."
267
"한인의 총에 맞고 살아 있는 것이 왜놈의 총에 맞아 죽은 것만 못해."
269
애초에 내 상처는 중상이어서 병원에서 의사가 보고 입원 수속도 할 필요가 없다 하여 문간방에 두고 절명하기만 기다렸던 것이 네 시간이 되어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병실로 옮기고 치료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내가 이런 상태이므로 향항에 있던 인이에게는 내가 총을 맞아 죽었다는 전보를 놓아서 안공근은 인이와 함께 내 장례에 참여할 생각으로 달려왔었다.
270
전쟁의 위험이 장사에도 파급되어서 성 정부에서도 끝까지 이 사건을 법적으로 규명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이운한이 감창제, 박창세 두 사람의 악선전에 혹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인 듯하다.
271
내가 퇴원하여 엄항섭 군 집에서 정양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갑자기 신기(神氣)가 불편하고 구역이 나며 오른편 다리가 마비되어서 다시 상아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엑스 광선으로 본 결과 서양인 외과 주임이 말하기를, 내 심장 옆에 박혀 있던 탄환이 혈관을 통하여 오른편 갈빗대 옆에 옮아가 있으니 불편하면 수술하기도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로 두어도 생명에는 관계가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른편 다리가 마비되는 것은 탄환이 대혈관을 압박하는 때문이거니와 작은 혈관들이 확대되어서 압박된 혈관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면 다리가 마비되던 것도 차차 나으리라는 것이었다.
272
그러던 중 장사가 또 위험하게 되매 우리 3당의 백여 명 가족은 또 광주로 이전하였으니, 호남의 장치중 주석이 광동성 주석 오철성 씨에게 소개하여 준 것이었다. 광주에서는 중국 군대에 있는 동포 이준식, 채원개 두 분의 알선으로 동산백원을 임시정부의 청사로, 아세아 여관을 전부 우리 대가족의 숙사로 쓰게 되었다. 이렇게 정부와 가족을 안돈(安頓)하고 나는 안 의사 미망인과 가족을 상해에서 나오게 할 계획으로 다시 향항으로 가서 안정근, 안공근 형제를 만나 강경하게 그 일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은 교통이 어렵다는 이유로 듣지 아니하였다. 사실상 그때 사정으로는 어렵기도 하였다. 나는 안 의사의 유족을 적진 중에 둔 것과 율양 고당암에서 중국 도사 임한정에게 선도를 공부하고 있던 양기탁을 구출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273
향항에서 이틀을 묵어서 광주로 돌아오니 거기도 왜의 폭격이 시작되었으므로 또 나는 어머님과 우리 대가족을 불산으로 이접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철성 주석의 호의와 주선에 의함이었다.
274
이 모양으로 광주에서 두 달을 지나, 장개석 주석에게 우리도 중경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청하였더니 오라는 회전이 왔기로 조성환, 나태섭 두 동지를 대동하고 나는 다시 장사로 가서 장치중 주석에게 교섭하여 공로(公路) 차표 석 장과 귀주성 주석 오정창 씨에게로 하는 소개장을 얻어가지고 중경 길을 떠나 10여 일만에 귀주성 수부 귀양에 도착하였다.
275
내가 지금까지 본 중국은 물산이 풍부한 지방뿐이었으나 귀주 지경에 들어서는 눈에 띄는 것이 모두 빈궁뿐이었다. 귀양 시중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의복이 남루하고 혈색이 좋지 못하였다. 원체 산이 많은 지방인데다가 산들이 다 돌로 되고 흙이 적어서 농가에서는 바위 위에다 흙을 펴고 씨를 뿌리는 형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한족은 좀 나으나 원주민인 묘족의 생활은 더욱 곤궁하고 야매(野昧)한 모양이었다. 중국말을 모르는 나는 말을 듣고 한족과 묘족을 구별할 수는 없으나 복색으로는 묘족의 여자를 알아낼 수 있고, 안광으로는 묘족의 남자를 지적할 수 있었다. 한족의 눈에는 문화의 빛이 있는데 묘족의 눈에는 그것이 없었다. 묘족은 요순 시대 삼묘씨의 자손으로서, 4천년 이래로 이렇게 꼴사나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무슨 전생의 업보인고. 요순 이후로는 역사상에 묘족의 이름이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기로 그들은 이미 다 절멸된 줄만 알았더니 호남, 광동, 광서, 운남, 귀주, 사천, 서강 등지에 수십 백 종족으로 갈린 묘족이 퍼져 있으면서도 이렇게 소문이 없는 것은 그들 중에 인물이 나지 못한 까닭이다. 현재 광서의 백승희과 운남의 용운 두 장군이 묘족의 후예라 하는 말도 있으나 나는 그 진부를 단정할 자료를 가지지 못하였다.
276
귀양에서 여드레를 묵어서 나는 무사히 중경에 도착하였으나 그 동안 광주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우리 대가족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다 무사히 광주를 탈출하여 유주에 와 있다는 전보를 받고 안심하였다. 그들은 다 중경에 오기를 희망하므로 내가 교통부와 중앙당부에 교섭하여 자동차 여섯 대를 얻어서 기강이라는 곳에 대가족을 옮겨왔다. 군수품 운송에도 자동차가 극히 부족하던 이 때에 이렇게 빌려준 중국의 호의는 이루 감사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277
내가 미주서 오는 통신을 기다리노라고 우정국에 가 있는 때에 인이가 왔다. 유주에 계신 어머니의 병환이 중하신데 중경으로 오기를 원하시므로 모시고 온 것이었다. 내가 인이를 따라 달려가니 어머님은 내 여관인 저기문 홍빈여사 맞은편에 와 계셨다. 곧 내 여관으로 모시고 와서 하룻밤을 지내시게 하고 강남쪽 아궁보 손가화원에 있는 김홍서 군의 집으로 가 계시게 하였다. 이것은 김홍서 군이 호의로 자청한 것이었다.
278
어머니의 병환은 인후증인데 의사의 말이 이것은 광서의 수토병으로, 젊은 사람이면 수술을 할 수 있으나 어머니같은 노인으로서는 그리할 수도 없고, 또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쳐서 손 쓸 길이 없다고 하였다.
279
어머님이 중경으로 오시는 일에 관하여 잊지 못할 은인이 있으니 그는 의사 유동진 군과 그 부인 강영파 여사였다. 이 부처는 상해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나를 위하여주던 사람들인데 쿨링에서 요양원을 경영하던 것을 걷어치우고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나를 대신하여 내 어머니를 모시고 간호하기 위하여 중경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유 의사 부처가 왔을 때에는 벌써 더 손쓸 수가 없게 되신 뒤였다.
280
내가 중경에 와서 할 일은 세 가지였었다. 첫째는 차를 얻어서 대가족을 실어 오는 일이요, 둘째는 미주, 하와이와 연락하여 경제적 후원을 받는 일이요, 셋째로는 장사에서부터 말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여러 단체의 통일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대가족도 안돈이 되고 미주와 연락도 되었으므로 나는 셋째 사업인 단체 통일에 착수하였다.
281
나는 중경에서 강 건너 아궁보에 있는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 본부를 찾았다. 그 당수 김약산은 계림에 있었으나 윤기섭, 성주식, 김홍서, 석정, 김두봉, 최석순, 김상덕 등 간부가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모든 단체를 통일하여 민족주의의 단일당을 만들 것을 제의하였더니 그 자리에 있던 이는 일치하여 찬성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여러 단체에도 참가를 권유하기로 결의하였다.
282
미주와 하와이에서는 곧 회답이 왔다. 통일에는 찬성이나, 김약산은 공산주의자인즉 만일 내가 그와 일을 같이 한다면 그들은 나와의 관계까지도 끊어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약산과 상의한 결과 그와 나의 연명으로, 민족운동이야말로 조국 광복에 필요하다는 뜻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283
그러나 여기 의외의 고장이 생겼으니 그것은 국민당 간부들이 연합으로 하는 통일은 좋으나, 있던 당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합한 단일당을 조직하는 데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주의가 서로 다른 자는 도저히 한 조직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284
나는 병을 무릅쓰고 기강으로 가서 국민당의 전체회의를 열고 노력한지 1개월 만에 비로소 단일당으로 모든 당들을 통일하자는 의견에 국민당의 합의를 얻었다. 그래서 민족운동 진영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과 공산주의전선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 조선혁명자연맹의 일곱으로 된 7당 통일 회의를 열게 되었다.
285
회의가 진행됨에 따라 민족운동 편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은 민족운동을 위하여 공산주의의 조직을 해산할 수 없다고 말하고 퇴석하였다. 이렇게 되니 7당이 5당으로 줄어서 순전한 민족주의적인 새 당을 조직하고 8개조의 협정에 5당의 당수들이 서명하였다.
286
이에 좌우 5당의 통일이 성공하였으므로 며칠을 쉬고 있던 차에, 이미 해산하였을 민족혁명당 대표 김약산이 돌연히 탈퇴를 선언하였으니, 그 이유는 당의 간부들과 그가 거느리는 청년의용대가 아무리 하여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만일 8개조의 협정을 수정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다 달아나겠다는 것이었다.
287
이리하여 5당 통일도 실패되어서 나는 민족진영 3당의 동지들과 미주, 하와이 여러 단체에 대하여 나의 불명한 허물을 사과하고 이어서 원동에 있는 3당만을 통일하여 새로 한국독립당이 생기게 되었다. 하와이 애국단과 하와이 단합회가 각각 해소하고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가 되었으니 역시 5당 통일은 된 셈이었다.
288
새로 된 한국독립당의 간부로는 집행위원장에 김구, 위원으로는 홍진, 조소앙, 이청천, 김학규, 유동열, 안훈, 송병조, 조완구, 엄항섭, 김봉준, 양묵, 조성환, 차이석, 이복원이요, 감찰위원장에 이동녕, 위원에 이시영, 공진원, 김의한 등이었다.
289
임시의정원에는 나를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천거하였는데, 종래의 주석을 국무위원이 번갈아 하던 제도를 고쳐서 대내, 대외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국, 서울, 워싱턴에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 박사를 그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290
한편 중국 중앙정부에서는 우리 대가족을 위하여 토교 동감폭포 위에 기와집 세 채를 짓고 또 시가에도 집 한 채를 주었으나 그 밖에 우리 독립운동을 원조하여 달라는 청에 대하여서는 냉담하였다. 그래서 나는 중국이 일본군의 손에 여러 대도시를 빼앗겨 자신의 항전에 골몰한 이때에 우리를 위한 원조를 바라기가 미안하니 나는 미국으로 가서 미국의 원조를 청할 의사인즉 여행권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즉 중앙정부의 서은증(徐恩曾) 씨가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중국에 있었으니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하나 남김이 좋지 아니하냐 하고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기를 청하였으므로 나는 장래 독립한 한국의 국군의 기초가 될 광복군 조직의 계획을 제출하였더니 곧 좋다는 회답이 왔다.
291
이에 임시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미주와 하와이 동포가 보내어 준 돈 4만원)을 다하여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등 중요 인사를 초청하여 한국광복군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 있던 조성환 등과 합하여 한국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이범석을 제 1지대장으로 하여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본명 공진원)을 제 2지대장으로 하여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학규를 제 3지대장으로 하여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 등의 한국청년 전지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제 5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 3전구 사령부 정치부에서 일을 보고 있는 김문호를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 3분처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을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조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292
독립당과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대표하는 부녀위로총회로부터 중국 돈으로 10만원의 기부가 있었다.
293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지 못하여 몇 달 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로, 부양의 광복군 제 3지대를 찾아온 것인데 지대장 김학규가 임시정부로 보낸 것이었다. 이 사실은 중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어 중한문화협회 식당에서 환영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양 여러 나라의 통신기자들이며 대사관원들도 출석하여 우리 학병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발하였다. 어려서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아 국어도 잘 모르는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고 총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시정부를 찾아왔다는 그들의 말에 우리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목이 메었거니와 외국인들도 감격에 넘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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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어, 미국의 OSS(미국 전략사무국)를 주관하는 사전트 박사는 광복군 제 2지대장 이범석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웜스 중위는 제 3지대장 김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세 비밀 훈련을 실시하였다. 예정대로 3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정탐과 파괴 공작의 임무를 띠고 그들을 비밀히 본국으로 파견할 준비가 된 때에 나는 미국 작전부장 다노배 장군과 군사협의를 하기 위하여 미국 비행기로 서안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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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광복군 제 2지대 본부 사무실에서 열렸는데 정면 오른쪽 태극기 밑에는 나와 제 2지대 간부가, 왼쪽 미국기 밑에는 다노배 장군과 미국인 훈련관들이 앉았다. 다노배 장군이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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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적 일본을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된다."고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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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노배 장군과 내가 정문으로 나올 때에 활동사진의 촬영이 있고 식이 끝났다. 이튿날 미국 군관들의 요청으로 훈련받은 학생들의 실지의 공작을 시험하기로 하여 두곡에서 동남으로 40리, 옛날 한시에 유명한 종남산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동구에서 차를 버리고 5리쯤 걸어가면 한 고찰이 있는데 이곳이 우리 청년들이 훈련을 받은 비밀 훈련소였다. 여기서 미국 군대식으로 오찬을 먹고 참외와 수박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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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본 것은 심리학적으로 모험에 능한 자, 슬기가 있어서 정탐에 능한 자, 눈과 귀가 밝아서 무선 전선에 능한 자를 고르는 것이었다. 이 시험을 한 심리학자는 한국 청년이 용기로나 지능으로나 다 우량하여서 장래에 희망이 많다고 결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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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청년 일곱을 뽑아서 한 사람에게 숙마바 하나씩을 주고 수백 길이나 되는 절벽 밑에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 가지고 오라는 시험이었다.
300
일곱 청년은 잠깐 모여서 의논하더니 그들의 숙마바를 이어서 하나의 긴 바를 만들어, 한 끝을 바위에 매고 그 줄을 붙들고 일곱이 다 내려가서 나뭇잎 하나씩을 따 입에 물고 다시 그 줄에 달려 일곱이 차례차례로 다 올라왔다. 시험관은 이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301
"내가 중국 학생 400명을 모아놓고 시켰건마는 그들이 해결치 못한 문제를 한국 청년 일곱이 훌륭하게 하였소. 참으로 한국 사람은 전도유망한 국민이오."
302
일곱 청년이 이 칭찬을 받을 때에 나는 대단히 기뻤다.
303
다음에는 폭파술, 사격술, 비밀히 강을 건너가는 재주 같은 것을 시험하여 다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을 보고 나는 만족하여 그날로 두곡으로 돌아왔다.
304
이튿날은 중국 친구들을 찾을 생각으로 서안으로 들어갔다. 두곡서 서안은 40리였다. 호종남 장군은 출타하여서 참모장만을 만나고, 성 주석 축소주 선생은 나와 막역한 친우라 이튿날 그의 사저에서 석반을 같이하기로 하였다. 성 당부에서는 나를 위하여 환영회를 개최한다 하고. 서안 부인회에서는 특별히 연극을 준비한다 하고, 서안의 각 신문사에서도 환영회를 개최하겠으니 출석하여 달라는 초청이 왔다.
305
나는 그 밤을 우리 동포 김종만 씨 댁에서 지내고 이튿날은 서안의 명소를 대개 구경하고 저녁에는 어제 약속대로 축 주석 댁 만찬에 불려갔다. 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돌아와 수박을 먹으며 담화를 하는 중에 문득 전령이 울었다. 축 주석은 놀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나보다고 전화실로 가더니 잠시 뒤에 뛰어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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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이 가석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의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310
나는 더 있을 마음이 없어서 곧 축씨 댁에서 나왔다. 내 차가 큰 길에 나설 때에는 벌써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 소리가 성중에 진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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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안에서 준비되고 있던 나를 위한 모든 환영회를 사퇴하고 즉시 두곡으로 돌아왔다. 와 보니 우리 광복군은 제 임무를 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것을 실망하여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데 미국 교관들과 군인들은 질서를 잊으리만큼 기뻐 뛰고 있었다. 미국이 우리 광복군 수천 명을 수용할 병사를 건축하려고 일변 종남산에서 재목을 운반하고 벽돌가마에서 벽돌을 실어 나르던 것도 이날부터 일제히 중지하고 말았다. 내 이번 길의 목적은 서안에서 훈련받은 우리 군인들을 제 1차로 본국으로 보내고 그 길로 부양으로 가서 훈련받은 이들을 제 2차로 떠나보낸 후에 중경으로 돌아감이었으나 그 계획도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중경서 올 때에는 군용기를 탔으나 그리로 돌아갈 때에는 여객기를 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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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에 와 보니 중국인들은 벌써 전쟁 중의 긴장이 풀어져서 모두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고 우리 동포들은 지향할 바를 모르는 모르는 형편에 있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그동안 임시의정원을 소집하여 혹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주장하고 혹은 이를 해산하고 본국으로 들어가자고 발론하여 귀결이 못 나다가, 주석인 내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정회를 하고 있었다.
313
나는 의정원에 나아가 해산도 총사직도 천만부당하다고 단언하고,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의 앞에 정부를 내어바칠 때까지 현상대로 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여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미국측으로부터 서울에는 미국 군정부가 있으니 임시정부로는 입국을 허락할 수 없은즉 개인의 자격으로 오라 하기로 우리는 할 수 없이 개인의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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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7년간의 중경 생활을 마치게 되니, 실로 감개가 많아서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두서를 찾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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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자를 타고 강 건너 화강산에 있는 어머니 묘소와 아들 인의 무덤에 가서 꽃을 놓고 축문을 읽어 하직하고, 묘지기를 불러 금품을 후히 주어 수호를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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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가죽 상자 여덟 개를 사서 정부의 모든 문서를 싸고, 중경에 거주하는 5백여 명 동포의 선후책을 정하고, 임시정부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 중국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주중화대표단을 두어 박찬익을 단장으로, 민필호, 이광, 이상만, 김은충 등을 단원으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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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중경을 떠나게 되매 중국공산당 본부에서는 주은래, 동필무 제씨가 임시정부 국무원 전원을 청하여 송별연을 하였고, 중앙정부와 국민당에서는 장개석 부처를 위시하여 정부, 당부, 각계 요인 2백여 명이 모여 우리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간부들을 초청하여 국민당 중앙당부 대례당에서 중국기와 태극기를 교차하고 융숭하고도 간곡한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장개석 주석과 송미령 여사가 선두로 일어나 장래 중국과 한국 두 나라가 영구히 행복하게 되도록 하자는 축사가 있고, 우리 편에서도 답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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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을 떠나던 일을 기록하기 전에 7년간의 중경 생활에서 잊지 못할 것 몇 가지를 적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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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중경에 있던 우리 동포의 생활에 관하여서다. 중경은 원래 인구 몇 만밖에 안 되던 작은 도시였으나, 중앙정부가 이리로 옮겨온 후로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지방의 관리와 피난민이 모여들어서 일약 인구 백만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아무리 새로 집을 지어도 미처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여름에는 한데에서 자는 사람이 수십만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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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은 배급제여서 배급소 앞에는 언제나 장사진을 치고 서로 욕하고 때리고 하여 분규가 아니 일어나는 때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동포는 따로 인구를 선책하여서 한몫으로 양식을 타서 하인을 시켜 집집에 배급하기 때문에 대단히 편하였고, 뜰을 쓸기까지 하였다. 먹을 물도 사용인을 시켜 길었다. 중경시 안에 사는 동포들 뿐 아니라, 교외인 토교에 사는 이들도 한인촌을 이루고 중국 사람의 중산계급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간혹 부족하다는 불평도 있었으나 규율 있고 안전한 단체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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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의 중경 생활은 임시정부를 지고 피난하는 것이 일이요, 틈틈이 먹고 잤다고 할 수 있었다. 중경의 폭격이 점점 심하여가매 임시정부도 네 번이나 옮겼다. 첫 번 정청인 양류가 집은 폭격에 견딜 수가 없어서 석판가로 옮겼다가, 이 집이 폭격으로 일어난 불에 전소하여 의복까지 다 태우고 오사야항으로 갔다가, 이 집이 또 폭격을 당하여 무너진 것을 고쳤으나, 정청으로 쓸 수는 없어서 직원의 주택으로 하고 네 번째로 연화지에 70여 칸 집을 얻었는데, 집세가 1년에 40만원이었다, 그러나 이 돈은 장 주석의 보조를 받게 되어 임시정부가 중경을 떠날 때까지 이 집을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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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양으로 연이어 오는 폭격에 중경에는 인명과 가옥의 손해가 막대하였으며 동포 중에 죽은 이는 신익희 씨의 조카와 김영린의 아내, 두 사람이 있었다.
323
이 두 동포가 죽던 폭격이 가장 심한 것이어서 한 방공호에서 400명이니 800명이니 하는 질식자를 낸 것이 이때였다. 그 시체를 운반하는 광경을 내가 목도하였는데, 화물자동차에 짐을 싣듯 시체를 싣고 달리면 시체가 흔들려 떨어지는 일이 있고, 그것을 다시 싣기가 귀찮아서 모가지를 매어 자동차 뒤에 달면 그 시체가 땅바닥으로 엎치락뒤치락 끌려가는 것이었다. 시체는 남녀를 물론하고 옷이 다 찢겨서 살이 나왔는데 이것은 서로 앞을 다투어 발악한 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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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이 모양으로 잃어 한 편에 통곡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편에는 방공호에서 시체를 끌어내는 인부들이 시체가 지녔던 금은보화를 뒤져서 대번에 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질식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 밀매음녀 많기로 유명한 교장구이기 때문에 죽은 자의 대다수가 밀매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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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은 옛날 이름으로는 파인데, 지금은 성도라고 부르는 촉과 아울러 파촉이라 하던 곳이다. 시가의 왼편으로 가릉강이 흘러와서 바른편에서 오는 양자강과 합하는 곳으로, 천톤급의 기선이 정박하는 중요한 항구다. 지명을 파라고 하는 것은 옛날 파 장군이란 사람이 도읍하였던 때문이어서, 연화지에는 파 장군의 분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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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의 기후는 심히 건강에 좋지 못하여 호흡기병이 많다. 7년간에 우리 동포도 폐병으로 죽은 자가 80명이나 된다. 9월 초생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운무가 많아 별을 보기가 드물고, 기압이 낮은 우묵한 땅이라 지변의 악취가 흩어지지를 아니하여 공기가 심히 불결하다. 내 맏아들 인도 이 기후에 희생이 되어서 중경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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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5일에 우리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기타 직원은 비행기 두 대에 갈라 타고 중경을 떠나 다섯 시간 걸려 떠난 지 13년 만에 상해의 땅을 밟았다. 우리 비행기가 착륙한 비행장이 곧 홍구 신공원이라 하는데 우리를 환영하는 남녀 동포가 장내에 넘쳤다. 나는 14년을 상해에 살았건마는 홍구 공원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없었다. 신공원에서 나와서 시내로 들어가려 한즉 아침 여섯 시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6000명 동포가 열을 지어서 고대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 있는 길(사람의 키의 한 길)이 넘는 단 위에 올라서 동포들에게 인사말을 하였다. 나중에 알고본즉 그 단이야말로 13년 전 윤봉길 의사가 왜적 백천 대장 등을 폭격한 자리에 왜적들이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단을 모으고 군대를 지휘하던 곳이라고 한다. 세상에 우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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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자반점에 묵었다. 13년은 사람의 일생에는 긴 세월이었다. 내가 상해를 떠날 적에 아직 어리던 이들은 벌써 장정이 되었고, 장정이던 사람들은 노쇠하였다. 이 오랜 동안에 까딱도 하지 아니하고 깨끗이 고절을 지킨 옛 동지 선우혁, 장덕로, 서병호, 한진교, 조봉길, 이용환, 하상린, 한백원, 원우관 제씨와 서병호 댁에서 만찬을 같이하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상해에 재류하는 동포들 중에 부정한 직업을 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말이 나를 슬프게 하였다. 나는 우리 동포가 가는 곳마다 정당한 직업에 정직하게 종사하여서 우리 민족의 신용과 위신을 높이는 애국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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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법조계 공동묘지에 아내의 무덤을 찾고 상해에서 10여 일을 묵어서 미국 비행기로 본국을 향하여서 상해를 떠났다. 이동녕 선생, 현익철 동지 같은 이들이 이역에 묻혀서 함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330
나는 기쁨과 슬픔이 한데 엉클어진 가슴으로 27년 만에 조국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그리운 흙을 밟으니 김포 비행장이요, 상해를 떠난 지 세 시간 후였다.
331
나는 조국의 땅에 들어오는 길로 한 가지 기쁨과 한 가지 슬픔을 느꼈다. 책보를 메고 가는 학생들의 모양이 심히 활발하고 명랑한 것이 한 기쁨이요, 그와는 반대로 동포들이 사는 집들이 납작하게 땅에 붙어서 퍽 가난해 보이는 것이 한 슬픔이었다. 동포들이 여러 날을 우리를 환영하려고 모였더라는데 비행기 도착 시일이 분명히 알려지지 못하여 이 날에는 우리를 맞아주는 동포가 많지 아니하였다. 늙은 몸을 자동차에 의지하고 서울에 들어오니 의구한 산천이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332
내 숙소는 새문 밖 최창학 씨의 집이요, 국무원 일행은 한미호텔에 머물도록 우리를 환영하는 유지들이 미리 준비하여주었었다.
333
나는 곧 신문을 통하여 윤봉길, 이봉창 두 의사와 강화 김주경 선생의 유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말하였더니 윤 의사의 아드님 윤태 군은 38선 이북에 있어서 못 보고 그 따님과 친척들이 혹은 강화에서 혹은 김포에서 와서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분묘가 계시고 친척과 고구(故舊)가 사는 그리운 내 고향은 소위 38선의 장벽 떄문에 가보지 못하고 재종형제들과 종매들의 가족이 상경하여서 반갑게 만날 수가 있었다.
334
군정청에 소속한 각 기관과 정당, 사회단체, 교육계, 공장 등 각계가 빠짐없이 연합환영회를 조직하여서 우리는 개인의 자격으로 들어왔건마는 '임시정부환영'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태극기와 아울러 높이 들고 수십만 동포가 서울 시가로 큰 시위행진을 하고, 그 끝에 덕수궁에 식탁이 400여 개로 환영연을 배설하고 하지 중장 이하 미국 군정 간부들도 출석하여 덕수궁 뜰이 좁을 지경이었으니 참으로 찬란하고 성대한 환영회였다. 나는 이러한 환영을 받을 공로가 없음이 부끄럽기도, 미안하기도 하였으나, 동포들이 해외에서 오래 신고한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라고 강인하여 고맙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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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나는 38선 이남만이라도 돌아보리라 하고 첫 번째 길로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인생에 뜻깊은 곳이다. 스물두 살에 인천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스물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한 살 적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다. 저 축항에는 내 피땀이 배어있는 것이다. 옥중에 있는 이 불효를 위하여 부모님이 걸으셨을 길에는 그 눈물 흔적이 남아있는 듯하여 마흔아홉 해 전 기억이 어제런 듯 새롭다. 인천서도 시민의 큰 환영을 받았다.
336
두 번째 길로 나는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공주에 도착하니 충청남도 열한개 군에서 10여만 동포가 모여서 나를 환영하는 회를 열어주었다.
337
공주를 떠나 마곡사로 가는 길에 김복한, 최익현 두 선생의 영정 모신 데를 찾아서 배례하고 그 유가족을 위로하고 동민의 환영하는 정성을 고맙게 받았다. 정당, 사회단체의 대표로 마곡사까지 나를 따르는 이가 3백 50여 명이었고, 마곡사 승려의 대표는 공주까지 마중을 나왔으며, 마곡사 동구에는 남녀 승려가 도열하여 지성으로 나를 환영하니, 옛날에 이 절에 있던 한 중이 일국의 주석이 되어서 온다고 생각함이었다. 48년 전에 머리에 굴갓을 쓰고 목에 염주를 걸고 출입하던 길이었다. 산천도 예와 같거니와 대웅전에 걸린 주련(기둥에 써 붙이는 글)도 옛날 그대로였다.
338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却來觀世間猶如夢中事: 한 걸음 물러나 세상을 보니 꿈 속의 일만 같구나.)'
339
그때에는 무심히 보았던 이 글귀를 오늘에 자세히 보니 나를 두고 이른 말인 것 같았다. 용담 스님께 보각서장을 배우던 염화실에서 뜻깊은 하룻밤을 보냈다. 승려들은 나를 위하여 이날 밤에 불공을 드렸다. 그러나 승려들 중에는 내가 알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 포기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
340
세 번째 길로 나는 윤봉길 의사의 본댁을 찾으니 4월 29일이라, 기념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나는 일본 동경에 있는 박열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 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 오게 하고,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는 날 나는 특별 열차로 부산까지 갔다.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분의 유골을 모신 열차가 정거하는 역마다 사회, 교육 각 단체며 일반 인사들이 모여 봉도식을 거행하였다.
341
서울에 도착하자 유골을 담은 영구를 태고사에 봉안하여 동포들의 참배에 편케 하였다가 내가 친히 잡아놓은 효창공원 안에 있는 자리에 매장하기로 하였다. 제일 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남기고 그 다음에 세 분의 유골을 차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342
이날 미국인 군정간부도 전부 회장하였으며, 미국 군대까지 출동할 예정이었으나 그것은 중지되고 조선인 경찰관, 육해군 경비대, 정당, 단체, 교육기관, 공장의 종업원들이 총출동하고 일반 동포들도 구름같이 모여서 태고사로부터 효창공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일시 전차, 자동차, 행인까지도 교통을 차단하였다.
343
선두에는 애도하는 비곡을 아뢰는 음악대가 서고 다음에는 화환대, 만장대가 따르고 세 분 의사의 영여(靈輿)는 여학생대가 모시니 옛날 인산보다 더 성대한 장의였다.
344
나는 삼남 지방을 순회하는 길에 보성군 득량면 득량리 김씨 촌을 찾았다. 내가 48년 전에 망명 중에 석 달이나 몸을 붙여 있던 곳이요, 김씨네는 나와 동족이었다. 내가 온다는 선문을 듣고 동구에는 솔문을 세우고 길을 닦기까지 하였다. 남녀 동민들이 동구까지 나와서 도열하여 나를 맞았다. 내가 그때에 유숙하던 김광언 댁을 찾으니 집은 예와 같으되 주인은 벌써 세상을 떠났다. 그 유족의 환영을 받아 내가 그때에 상을 받던 자리에서 한 때 음식 대접을 한다 하여서 마루에 병풍을 치고 정결한 자리를 깔고 나를 앉혔다. 모인 이들 중에 나를 알아보는 이는 늙은 부인네 한 분과 김판남 종씨 한 분뿐이었다. 김씨는 그때에 내 손으로 쓴 책 한 권을 가져다가 내게 보여주었다. 내가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에 자별히 친하게 지내던 나와 동갑인 선씨는 이미 작고하고, 내게 필낭을 기워서 작별 선물로 주던 그의 부인은 보성읍에서 그 자손들을 데리고 나와서 나를 환영하여주었다. 부인도 나와 동갑이라 하였다.
345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는 도중에서 함평 동포들이 길을 막고 들르라 하므로 나는 함평읍으로 가서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환영회에서 한 차례 강연을 하고 나주로 갔다. 나주에서 육모정 이 진사의 집을 물은즉, 이 진사 집은 나주가 아니요, 지금 지나온 함평이며, 함평 환영회에서 나를 위하여 만세를 선창한 것이 이 진사의 종손이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에 나는 함평과 나주를 섞바꾼 것이었다. 그 후에 이 진사(나와 작별한 후에는 이 승지가 되었다 한다)의 종손 재승, 재혁 두 형제가 예물을 가지고 서울로 나를 찾아왔기로 함평을 나주로 잘못 기억하고 찾지 못하였던 것을 사과하였다.
346
이 길에 김해에 들리니 마침 수로왕릉의 추향(楸鄕)이라, 김씨네와 허씨네가 많이 참배하는 중에 나도 그들이 준비하여주어 평생 처음으로 사모와 각대(角帶)로 참배하였다.
347
전주에서는 옛 벗 김형진의 아들 맹문과 그 종제 맹열과 그 내종형 최경렬 세 사람을 만난 것이 기뻤다. 전주의 일반 환영회가 끝난 뒤에 이 세 사람의 가족과 한데 모여서 고인을 추억하며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348
강경에서 공종렬의 소식을 물으니, 그는 젊어서 자살하고 자손도 없으며 내가 그 집에서 자던 날의 비극은 친족간에 생긴 일이었다고 한다.
349
그 후 강화의 김주경 선생의 집을 찾아 그의 친족들과 사진을 같이 찍고 내가 그때에 가르치던 30명 학동 중 하나였다는 사람을 만났다.
350
나는 개성, 연안 등을 순회하는 동시에 노차에 이 효자의 무덤을 찾았다.
352
나는 해주 감옥에서 인천 감옥으로 끌려가던 길에 이 묘비 앞에서 쉬던 49년 전 옛날을 생각하면서 묘전에 절하고, 그날 어머니가 앉으셨던 자리를 눈어림으로 찾아서 그 위에 내 몸을 던졌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을 뵈올 길이 없으니 앞이 캄캄하였다. 중경서 운명하실 때에 마지막 말씀으로,
353
"내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 하시던 것을 추억하였다.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고 모자가 함께 고국에 돌아가 함께 지난 일을 이야기하지 못하심이 그 원통하심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저 멀고 먼 서쪽 화상산 한 모퉁이에 손자와 같이 누워 계신 것을 생각하니 비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혼이라도 조국에 돌아오셔서 내가 동포들에게 받는 환영을 보시기나 하여도 다소 어머니의 마음이 위안이 아니 될까.
354
배천에서 최광옥 선생과 전봉훈 군수의 옛일을 추억하고 장단 고랑포에서 나의 선조 경순왕릉에 참배할 적에는 능말에 사는 김씨들이 내가 오는 줄 알고 제전을 준비하였었다.
355
나는 대한 나라 자주 독립의 날을 기다려서 다시 이 글을 계속하기로 하고 지금은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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