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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향전 (淑香傳) ◈
◇ 숙향전 중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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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숙향전 (淑香傳) 중권
 
 
2
각설. 이선이 이 후로 공명(功名)에는 생각이 없고 다만 소아를 더욱 그리워하더니 하루는 한 사람이 뵙기를 청하거늘 불러 보니 그 사람이 예배(禮拜)하여 말하기를,
 
3
"소사(小士)는 남경 사는 조적이온대 한 족자의 찬제를 얻고자 하여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왔습니다."
 
4
하고 족자를 드리거늘, 선이 받아보니 꿈에 보던 요지경이라 심중에 의아하여 물어 말하기를,
 
5
"이 족자를 어디서 얻었느냐?"
 
6
하니 조적이 그 놀람을 보고 생각하되, '그 할미가 행여 이 집 것을 도둑질하였는가?' 하며 말하기를,
 
7
"이는 선경(仙境)에 속한 것이니 그대에게는 불가하다. 내게 수 족자가 있으니 바꾸거나 비싼 값을 받고 파는 것이 어떠하냐?"
 
8
하니 조적이 말하기를,
 
9
"백금을 주고 샀으니 더 주시면 팔고 가겠습니다."
 
10
하였다. 선이 즉시 이백 금을 주고 사서 절에서 지은 글을 금자(金字)로써 써서 족자를 꾸며 침실에 걸고 밤낮으로 소아만 찾고자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루는 깨달아 헤아리기를, '나는 요지에 다녀왔거니와 이 수 놓은 사람은 어떠한 이인데 천상 일을 알아 역역히 그렸는고. 필연 비상한 사람일 것이다. 동촌 술 파는 할미를 찾아가면 자연 알리라.' 하고 노새를 타고 가니 이 때는 하사월(夏四月)이었다. 숙향이 누상(樓上)에서 수를 놓고 있는데 문득 청조가 석류꽃을 물고 낭자 앞에 앉았다가 북쪽으로 날아가거늘 낭자가 이상하게 여겨 새 가는 곳을 보기 위하여 주렴을 걷고 바라 보니 한 소년이 소요건에 푸른 도포를 입고 노새를 타고 할미 집을 향하여 오거늘 자세히 보니 요지에서 진주를 집던 선관 같은지라. 마음에 반갑고 놀라 주렴을 지우고 앉았더니 그 소년이 문 밖에 와 주인을 찾았다. 할미가 나가 보니 북촌 이상서 집 공자라 맞이하여 들어가 좌정한 후에 물어 말하기를,
 
11
"공자께서 누추한 곳에 임하시니 감격하여이다."
 
12
하니 이랑이 말하기를,
 
13
"마침 지나다가 할미 집 좋은 술을 생각하고 왔으니 한 잔 술을 아끼지 말라."
 
14
하였다. 할미가 웃으며 말하기를,
 
15
"제 집에 술이 많으나 늙은이 벗이 없어 먹지 못하더니 이제 다행히 공자를 만났으니 싫도록 먹사이다."
 
16
하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윽고 자개반에 오색 접시 다석을 놓았으되 인간에서 못 보던 바라 이랑이 가장 의아하여 술이 반취(半醉)한 후에 묻고자 하니 할미 말하기를,
 
17
"공자께서 촌가의 소쇄한 맛을 아시겠습니까?"
 
18
하니 이랑이 말하기를,
 
19
"옛 말에 이름 모르는 음식을 먹지 말라 하였으니 어디서 난 음식인지 알고자 하노라."
 
20
하였다. 할미가 말하기를,
 
21
"늙은이 망녕되어 남의 집에 가 얻어 온 것이니 비록 맛은 없으나 젓가락질이나 하십시오."
 
22
하니 이랑이 말하기를,
 
23
"그러하나 이름을 알고 먹으리라."
 
24
하였다. 할미가 웃으며 말하였다.
 
25
"유리 접시에는 일광채니 동해 용왕에게 얻어 오고, 산호 접시에는 청광채니 만류산 길원선에게 얻어 오고, 금태 접시에는 신랑채니 천태산 마고선녀에게서 얻어 오고, 밀화 접시에는 금랑채니 봉래산 구류선에게 얻어 오고, 마노 접시에는 반채니 요지 서왕모에게서 얻어 왔습니다."
 
26
이랑이 할미 말을 듣고 말하기를,
 
27
"할미 말이 매우 황당하도다. 봉래, 동해 등이 다 선경으로 진시황이나 한(漢)나라 무제도 못 얻은 것을 할미가 어찌 얻어 왔겠느냐?"
 
28
하니 할미가 웃으며 말하기를,
 
29
"제가 비록 기력은 없어도 사해 팔황을 임의로 왕래하거니와 공자같이 구차히 남이 인도되어 다니겠습니까?"
 
30
하였다. 이에 이랑이 말하기를,
 
31
"내게 천리 노새가 있어 임의로 다니는데 어찌 남이 인도하겠느냐?"
 
32
하니 할미가 말하기를,
 
33
"그러하면 대성사 부처를 어찌 따라 갔습니까?"
 
34
라고 물었다. 이랑이 대답하여 웃으며 말하기를,
 
35
"내 과연 대성사 부처를 따라가 요지에 다녀왔거니와 할미가 어찌 내 몽사를 아느냐?"
 
36
하니 할미가 말하거늘,
 
37
"공자께서 저를 업수이 여기거니와 저는 요지를 지척같이 다니니 모를 것이 없습니다. 상제께서 주시던 반도와 계화를 어디다 두었습니까?"
 
38
라고 물었더니 이랑이 말하기를,
 
39
"꿈은 다 허사니 아무 것도 모르노라."
 
40
하였다. 할미가 또한 말하기를,
 
41
"그 일은 꿈이거니와 조적에게 산 족자도 꿈이었습니까?"
 
42
하니 이랑이 더욱 황홀하여 그제야 전후사연을 다 말하였다.
 
43
"소아가 인간 세상에 내려 왔다하니 할미를 만나 족자를 얻은 곳을 알아내어, 소아를 찾고자 하노라."
 
44
할미가 물었다.
 
45
"소아가 있는 곳은 알거니와 공자께서 소아를 찾아 무엇하려 하십니까?"
 
46
이랑이 말하기를,
 
47
"소아는 나의 천생배필임에 반드시 찾으려 하노라."
 
48
하니 할미가 말하기를,
 
49
"배필을 삼으려 하시거든 아예 찾을 생각을 마십시오."
 
50
하니 이랑이 물었다.
 
51
"그 어인 말이냐?"
 
52
할미가 말하기를,
 
53
"낭군은 상서댁 귀공자라, 제왕가(帝王家) 부마(駙馬)아니면, 재상가(宰相家) 서랑(壻郞)이 되리니 어찌 소아의 배필이 되겠습니까?"
 
54
하니 이랑이 말하기를,
 
55
"소아에게 무슨 허물이 있느냐?"
 
56
라고 물으니 할미가 말하였다.
 
57
"하늘에서 얻은 죄가 중하여 인간에 내려와 천인(賤人)의 자식이 되어 오세의 난중에 부모를 잃고 정처 없이 다니다가 도적을 만나 환도에 맞아 한 팔을 잃었고, 명사계 성황당을 덧내어 귀 먹고, 표진강에 빠졌을 때에 행인이 구하였으나 눈이 흐려 보지 못하고, 노전에서 화재를 만나 한 다리를 불에 데여 저니 입만 남은 병신입니다. 어찌 배필을 삼겠습니까?"
 
58
이랑이 말하기를,
 
59
"비록 병신이더라도 천생연분(天生緣分)이 중하니 다만 소아를 찾고자 하노라."
 
60
하니 할미가 말하였다.
 
61
"낭군은 지성으로 찾으나 그런 병신을 상서께서 며느리로 삼을 리 없을 것이니 부질없이 찾지 마십시오."
 
62
이랑이 말하기를,
 
63
"부모께서 아무리 금하여도 나는 맹세코 소아가 아니면 취처치 아니 하리니 할미는 잔말말고 가르치라."
 
64
하니 할미가 말하기를,
 
65
"저는 소아의 곁을 떠나 있은지 오래 되어서 있는 곳을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만약 굳이 찾으려 하거든 남군 장승상집에 가서 찾되 근본은 남양 땅 김전의 딸 숙향입니다."
 
66
이랑이 즉시 돌아가 부모께 고하여 말하기를,
 
67
"형초 땅에 문인(文人)들과 재사(才士)들이 많다고 하오니 구경코져 하나이다."
 
68
하고 행리를 차려 황금 백냥을 가지고 필마 서동으로 행하여 남양 김전의 집을 찾아가니 백발 노옹이 나와 물어 말했다.
 
69
"공자는 어디에서 오셨으며 누구를 찾습니까?"
 
70
이랑이 말하기를,
 
71
"나는 낙양 이위공의 자제로 이 집 주인을 만나러 왔노라."
 
72
하니 노옹이 말하기를,
 
73
"김상서는 소복(小僕)의 주인이며, 큰 주인께서는 운수선생으로, 공명에 뜻이 없이 산림(山林)에 처하였으나 저번에 황제의 특지로 '현인의 자손을 조용(調用)하라.' 하시어 작은 주인께서는 지금 낙양태수로 계시나이다."
 
74
하였다. 이랑이 말하기를,
 
75
"이 집 낭자의 이름을 숙향이라 하느냐?"
 
76
하니 노옹이 말하기를,
 
77
"숙낭자는 작은 주인의 딸로서 다섯 살 때 피란 중에 잃은 후로 지금까지 생사를 모르고 있습니다."
 
78
하니 이랑이 이 말을 듣고 낙담하여 즉시 남군 장승상집을 찾아가 통하니 승상이 청견(聽見)하여 물었다.
 
79
"그대는 어디서 왔느냐?"
 
80
이랑이 말하기를,
 
81
"소자는 낙양 이위공의 아자(兒子)로서 남양 땅 김전의 딸 숙향이 존댁(尊宅)에 있다 하기로 천장가연(天定佳緣)을 맺고자 하여 왔습니다."
 
82
하니 승상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83
"과연 숙향이란 아이를 다섯 살 때 어떤 짐승이 업어다가 내 집 동산에 두고 가는지라 그 정경도 가련하고 또 노인이 자식이 없기로 거두어 십 년 동안 기르며 극진히 사랑하였으나 내 집 종년 사향의 모함 구축함을 입어 표진강에 빠져 죽었다 하니 지금은 그 존망(存亡)을 모르노라."
 
84
하였다. 이랑이 말하기를,
 
85
"정녕 알고 왔으니 속이지 마십시오."
 
86
하니 승상이 말하기를,
 
87
"나의 친자식이라도 위공과 인친(姻親)되기를 원할 것인데 어찌 숨기겠느냐?"
 
88
하였다. 이랑이 또 물었다.
 
89
"듣사오니 그 여자 수족을 못쓴다 하오니 비록 구박한들 어찌 멀리 가기 쉽사오리까?"
 
90
승상이 말하기를,
 
91
"내 아내가 숙향을 잃고 슬퍼하기를 지나치게 하나 위로할 길이 없어 민망하여 하던 차에 그 아이 화상을 그려간 사람이 있어 비싼 값을 치르고 그 화상을 사서 부인을 위로하고 있노라."
 
92
하고 그 족자를 내여 오니 과연 한 계집아이가 모란꽃을 들고 서 있는지라 생이 익히 보다가 말하기를,
 
93
"이 화본(畵本)을 보니 병신이 아니거늘 들은 말과 다릅니다. 이 여자를 위하여 왔다가 수천 리를 헛되이 돌아가기 섭섭하오니 화상을 팔기를 청하나이다."
 
94
하였다. 승상이 말하기를,
 
95
"부인이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아니하니 그리하기가 난처하도다."
 
96
하니 이랑이 말하기를,
 
97
"승상의 말씀이 진정이어니 어찌 강잉하여 청하겠습니까?'
 
98
하고 하직하고 표진강에 나와 지향없이 두루 찾으나 알리 없었다. 한 노옹이 말하기를,
 
99
"연전(年前)에 어떠한 계집 아이 장승상집으로부터 나와 이 물에 빠져 죽었었다."
 
100
하거늘 이랑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향촉을 갖추어 물가에서 제(祭)하였더니 문득 청의동자가 저를 불며 앞에 와 배를 매고 이랑더러 말하기를,
 
101
"숙향을 보려 하거든 이 배에 오르라."
 
102
하니 이랑이 배에 올라, 가다가 한 곳에 다다르니 동자 말하기를,
 
103
"이 물 지키는 신령이 나에게 말하기를, '저 즈음에 숙향이 물에 빠져 죽게 되니 내 구하여 동쪽으로 가게 하였노라.' 하였으니 그 쪽으로 가서 찾으라."
 
104
하였다. 이랑이 사례하고 동쪽으로 가다가 한 중을 만나 길을 물으니 중이 말하기를,
 
105
"이 앞 길에 놋감투 쓴 노옹이 있을 것이니 네가 지성으로 물으라."
 
106
하여 이랑이 갈대 속으로 들어 갔더니 과연 한 노옹이 앉아 졸고 있거늘 이랑이 나아가 재배하였다. 노옹이 이를 본척만척하고 눕거늘 이랑이 민망하여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107
"길을 묻나이다."
 
108
노옹이 그제야 눈을 들어 이랑을 보며 말하기를,
 
109
"내가 귀가 먹었으니 소리를 크게 하라."
 
110
하였다. 이랑이 말하기를,
 
111
"소자는 낙양 이위공의 아들 선으로 숙향의 거처를 알고자 합니다."
 
112
하니 노옹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였다.
 
113
"너는 어이 깊은 갈대 밭에 들어와 늙은이 잠을 깨우느냐?"
 
114
이랑이 다시 절하여 말하기를,
 
115
"표진강 신령이 이리로 가라 하기로 왔으니 노장은 숙향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116
하니 노옹이 말하기를,
 
117
"저 적에 어떤 여자 표진강에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들었더니 표진용왕이 그대의 제물을 먹고 가리킬 데가 없어 내게로 떠넘기도다."
 
118
하였다. 생이 말하기를,
 
119
"숙향이 표진용왕의 구함을 얻어 이 길로 왔다 하더이다."
 
120
하니 노옹이 말하기를,
 
121
"그러하면 여기 와서 불타 죽은 여자로다. 보려거든 저 재무덤이나 보고 가라."
 
122
하였다. 이랑이 그 재를 헤쳐 보니 의복 탄 것뿐이거늘 다시와 그대로 고하니 노옹이 졸다가 말하기를,
 
123
"네 두 손으로 내 발바닥을 문지르라."
 
124
하여 생이 종일토록 노옹의 발바닥을 부비더니 노옹이 깨어나 말하기를,
 
125
"그대를 위하여 사방으로 찾아 다녔으나 보지 못하고 후토 부인께 물으니 마고할미 데려다가 낙양 동촌에 가 산다하기로 거기 가보니 과연 숙향이 누상에서 수를 놓고 있거늘 보고 온 일을 표하기 위해 불덩이를 내리쳐 수 놓은 봉의 날개 끝을 태우고 왔노라. 너는 그 할미를 찾아 보고 숙향의 종적을 묻되 그 수의 불탄 데를 이르라."
 
126
하였다. 이랑이 말하기를,
 
127
"제가 처음 가 찾으니 여차여차 이르기로 표진강가에까지 갔다가 이리 왔는데 낙양 동촌에 데리고 있으면서 이렇게 속일 수가 있습니까?"
 
128
하니 노옹이 웃으며 말하기를,
 
129
"마고선녀는 범인(凡人)이 아니라 그대 정성을 시험함이니 다시 가 애걸하면 숙향을 보려니와 만일 그대 부모가 숙향을 만날 것을 알면 숙향이 큰 화를 당하리라."
 
130
하고 이미 간 데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랑은 집으로 돌아왔다.
 
 
131
선시(先時)에 할미 이랑을 속여 보내고 안으로 들어와 낭자 더러 말하기를,
 
132
"아까 그 소년을 보셨습니까? 이는 천상 태을이요, 인간 이선입니다."
 
133
하니 낭자가 물었다.
 
134
"태을인줄 어찌 아셨습니까?"
 
135
할미가 말하기를,
 
136
"그 소년의 말을 들으니 '대성사 부처를 따라 요지에 가 반도를 받고 조적의 수 족자를 샀노라.' 하니 태을임이 분명합니다."
 
137
하니 낭자가 말하였다.
 
138
"세상 일이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니 옥지환의 진주를 가진 사람을 살펴주십시오."
 
139
할미가 말하기를,
 
140
"그 말이 옳습니다."
 
141
하였다.
 
 
142
하루는 낭자가 누상에서 수를 놓더니 문득 난데없는 불똥이 떨어져 수놓은 봉의 날개 끝이 탔는지라 낭자가 놀라 할미에게 보이니 할미가 말하기를,
 
143
"이는 화덕진군의 조화니 자연 알 일이 있을 것입니다."
 
144
하였다.
 
145
이 때 이랑이 목욕재계하고 황금 일정을 가지고 할미집을 찾아가니 할미가 맞이하여 말하기를,
 
146
"저번에 취한 술이 엊그제야 깨어 해장(解腸)하려고 하던 차에 오늘 공자를 만나니 다행한 일입니다."
 
147
하니 이랑이 말했다.
 
148
"할미 집의 술을 많이 먹고 술 값을 갚지 못하기로 금전 일정을 가져와 정을 표하노라."
 
149
할미가 말하기를,
 
150
"주시는 것은 받거니와 제 집이 비록 가난하나 술독 위에 주성(酒星)이 비치고 밑에는 주천(酒泉)이 있습니다. 가득찬 술동이의 임자는 따로 있는 법이라, 어찌 값을 의논하겠습니까? 다른 말씀은 마시고 무슨 일로 수천 리를 왕래하셨습니까?"
 
151
하니 이랑이 탄식하며 말했다.
 
152
"할미의 말을 곧이 듣고 숙향을 찾으러 갔노라."
 
153
할미가 말하기를,
 
154
"낭군은 참으로 신의 있는 선비입니다. 그런 병인(病人)을 위하여 그렇게 수고하니 숙향이 알면 자못 감사할 것입니다."
 
155
하니 이랑이 말하였다.
 
156
"헛수고를 누가 알겠는가?"
 
157
할미가 거짓으로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158
"숙향이 이미 죽었습니까?"
 
159
이랑이 말하기를,
 
160
"노전에 가 노옹의 말을 들으니 낙양 동촌 술파는 할미집에 있다고 하니 할미집이 아니면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을 속임이 너무 짓궂도다."
 
161
하니 할미 정색하며 말하기를,
 
162
"낭군의 말씀이 매우 허단합니다. 화덕진군은 남천문 밖에 있고 마고선녀는 천태산에 있어 인간에 내려올 일이 없거늘 숙향을 데려갔다는 말이 더욱 황당합니다."
 
163
하였다. 이랑이 말하기를,
 
164
"화덕진군이 말하기를, '숙향이 수 놓는데 불똥을 나리쳐 봉의 날개를 태웠으니 후일 징간(徵看)하라.' 하였으니 그 노옹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165
라고, 물으니 할미가 말했다.
 
166
"진실로 그러하다면 낭군의 정성이 지극합니다."
 
167
이랑이 말하기를,
 
168
"방장(方丈), 봉래(蓬萊)를 다 돌아서도 못 찾으면 이선이 또한 죽으리로다."
 
169
하고 술도 아니 먹고 일어나거늘 할미 웃으며 말하기를,
 
170
"숙녀(淑女)를 취하여 동락(同樂)할 것이지 구태여 그런 병든 걸인을 괴로이 찾습니까"
 
171
하니 이랑이 말하기를,
 
172
"어진 배필이 없음이 아니라 이미 전생 일을 알고서야 어찌 숙향을 생각지 않겠느냐? 내 찾지 못하면 맹세코 세상에 머물지 아니하리라."
 
173
하였다. 할미가 또한 말하기를,
 
174
"제가 아무쪼록 찾아 기별할 것이니 과히 염려하지 마십시오."
 
175
하니 이랑이 말하기를,
 
176
"나의 목숨이 할미에게 달렸으니 가련하게 여김을 바라노라."
 
177
하고 할미를 이별하고 집에 돌아와 밤낮으로 고대하더니 삼일 후에 할미가 나귀를 타고 오거늘 기쁘게 맞이하여 서당(書堂)에 앉히고 물었다.
 
178
"할미는 어찌 오늘에야 찾아 왔는가?"
 
179
할미가 말했다.
 
180
"낭군을 위하여 숙낭자를 찾으러 다니니 숙향이란 이름이 세 곳에 있으되 하나는 태후 여감의 딸이요, 하나는 시랑 황전의 딸이요, 하나는 부모 없이 빌어 먹는 아이였습니다. 세 곳에 기별한 즉 둘은 응답하나 걸인은 허락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내 배필은 진주 가져간 사람이니 진주를 보아야 허락하리라' 하더이다."
 
181
이랑이 대희하여 말하기를,
 
182
"필시 요지에 갔을 적에 반도를 주던 선녀로다.' 수고스럽지만 이 진주를 갔다가 보아라."
 
183
하고 술과 안주를 내어 관대하니 할미 응낙하고 돌아가 낭자더러 이생의 말을 이르고 진주를 내어 주거늘 낭자가 보고 '맞습니다.' 하니 할미는 웃고, 즉시 이랑에게 가 말했다.
 
184
"그 진주가 걸인의 것이 분명하기로 데려다가 집에 두었으나 얼굴이 추비(醜鄙)하고 몹쓸 병이 여러 가지니 낭군은 알아서 하십시오."
 
185
이랑이 말하기를,
 
186
"할미는 부질없는 말을 말라. 그 병이 나로 말미암아 난 병이니 어찌 박대하겠는가?"
 
187
하니 할미가 말했다.
 
188
"그러나 낭군이 마땅히 육례로 맞이하지 아니하면 허락치 아니할 것입니다."
 
189
이랑이 말하기를,
 
190
"다시 이르지 말라."
 
191
하니 할미 말하기를,
 
192
"그러하면 부모님께서 알고 계십니까?"
 
193
라고 물었다. 이랑이 말하기를,
 
194
"부모님이 엄하시니 고하지 못하고, 고모께 주혼(主婚)하실 것이니 그리 알라."
 
195
하니 할미가 말하였다.
 
196
"송채는 금월 십사일이요, 혼례 날은 십오일이 길하나이다."
 
197
이랑이 황금 백냥을 주며,
 
198
"혼수에 보태라."
 
199
하거늘 할미가 말하기를,
 
200
"혼인은 각자의 생활에 맞추어 치르는 것인데 어찌 낭군의 돈을 받겠습니까?"
 
201
하고 받지 아니하였다.
 
 
202
원래 이랑의 고모는 복야(僕射) 여흥의 부인이었다. 일찍 홀로 되어 자녀가 없음에 선을 양육하여 친자식같이 길렀다. 하루는 부인이 생에게 이르되,
 
203
"내 지난 밤 몽중에 옥조를 타고 광한전에 들어가니 한 선녀가 말하기를, '내 사랑하는 소아를 그대에게 주노니 며느리를 삼으라.' 하고 어떤 여자를 데려와 내게 보이니 내가 너를 생각하였다. 아마 네가 얼마 후 숙녀를 취할 듯하구나."
 
204
이랑이 기뻐하여 드디어 자기 몽사와 할미를 만난 전후사를 고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205
"이 일이 매우 이상하고 네 부친 성격이 지엄하나 내 스스로 감당하리라."
 
206
하였다. 생이 대회하여 혼례 날을 고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207
"네 부친이 예법을 숭상하여 스스로 어기는 법이 없고 네가 네 마음대로 아내를 취한 것을 알면 반드시 죄책이 중할 것이다. 너는 집에 가 있다가 그날을 당하거든 내 집에 와 차려가되 혼구(婚具)는 내가 준비하겠다."
 
208
하니 생이 기뻐하여 본댁에 돌아 왔다가 당일 고모의 집에 가서 혼례복을 갖추어 입고 할미 집으로 가니 할미 또한 위의를 성비하여 이랑을 맞을새 포진과 기용범절이 인간세계에서는 못보던 것이었다. 혼례식을 치루며 동방화촉에 두 사람이 합근할 때에 생이 바삐 눈을 들어 보니 낭자의 요조선연한 태도 요지에서 보던 선녀와 하나고 다름이 없음에 견권지정이 더욱 비할 데 없었다. 삼일 후에 돌아와 고모를 뵈오니 부인이 말하기를,
 
209
"신부를 보고 싶으나 네 부친이 내려오거든 친히 사연을 얘기한 후에 데려다가 보고자 하노라."
 
210
하였다. 이에 생이 말하기를,
 
211
"신부를 보고 싶으면 이 족자를 보십시오."
 
212
하고 드리니 부인이 보고 대희하여 말하기를,
 
213
"진실로 몽중에 보던 소아로다."
 
214
하였다.
 
 
215
이 때에 상서가 국사(國事)에 매이어 집에 돌아오지 못하였더니 상서의 부인이 생의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수상함을 보고 하인들을 힐문하였다. 이에 하인들이 부득이하여 사실대로 아뢰니 부인이 크게 놀라 즉시 상서께 기별하였다. 상서가 또한 통분하나, '누님께서 주혼하고 선이 몹시 사랑한다 하니 달리 금치 못하리라.' 하고 낙양태수에게 기별하되,
 
216
"동촌 술파는 할미집에 숙향이라는 계집이 가장 요악하다 하니 잡아다가 죽이라."
 
217
하였다. 이생은 고모집에 있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때 낙양태수 김전이 위공의 말을 듣고 즉시 관원들을 풀어 숙향을 잡아오니 숙향이 아무것도 모르고 잡히어 관전(官前)에 이르니 태수가 물어 말하기를,
 
218
"너는 어떤 창녀이기에 위공댁 공자를 고혹하였느냐? 이제 쳐죽이라는 기별이 왔으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
 
219
하고 아랫사람들에게 호령하여 형틀에 매고 치려하니 낭자가 원망하여 말하기를,
 
220
"소녀는 다섯 살 때 피란 가던 중에 부모를 잃고 동서로 구걸하며 다니다가 할미집에 의지하였는데 이랑이 빙례로 구혼하옴에 상하체면에 거스리지 못하여 성혼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첩의 죄가 아닙니다."
 
221
하였다. 태수 말하기를,
 
222
"나는 상서의 기별대로 할 뿐이다."
 
223
하고 치기를 재촉하니 숙향의 화월(花月)같은 용모에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눈물이 밍밍하여 슬피우니 그 경상(景象)을 차마 못볼러라. 집장 사령이 매를 들어 치려한 즉 팔이 무거워 들지 못하였다. 태수가 크게 노하여 다른 사령으로 갈아 치웠으나 또한 매끝이 땅에 붙고 떨어지지 아니하니 태수가 괴이히 여겨 말하기를,
 
224
"필시 애매한 사람이리라. 그러나 상서의 기별임에 나로서는 어쩌지 못하겠다."
 
225
하고 동여매어 물에 넣으려 하였다. 이 때 태수의 부인인 장씨의 꿈에 숙향이 앞에 와 울며 말하기를,
 
226
"부친께서 저를 죽이려 하거늘 모친이 어찌 구하지 않으십니까?"
 
227
하니 부인이 놀라 깨어 시비로 하여금
 
228
"상공이 무슨 공무를 보시는가 알아 오라."
 
229
하였다. 시비가 되돌아 와 말하기를,
 
230
"상공이 이상서의 영(令)으로 그 댁 며느리를 죽이려 하십니다."
 
231
하니 장씨가 놀라 급히 태수를 청하여 말하기를,
 
232
"여아(女兒)를 잃은 지 십여 년에 한 번도 꿈에 뵈는 일이 없더니 아까 몽중에 숙향이 울며 여차여차하오니 매우 이상합니다. 오늘 보시는 공무(公務)는 어떤 일입니까?"
 
233
하였다. 태수가 말하기를,
 
234
"이위공의 아들이 숙향에게 고혹되어 부모를 속이고 장가들었음에 제게 기별하여, '죽이라' 하기에 이번 일을 하는 것입니다."
 
235
하니 장씨가 말하기를,
 
236
"몽사가 이상하고 이위공의 며느리가 또한 피란중에 부모를 잃었다 하니 그 근맥을 물어 보겠습니다. 일을 잠시만 미루어 주십시오."
 
237
하였다. 태수가 이에 응낙하고 하령하여, '가두라.'하니 낭자 약하디 약한 몸에 큰 칼을 쓰고 누수만면(淚水滿面)하여 옥에 들며 말하기를,
 
238
"이 곳이 어디입니까?"
 
239
하니 옥졸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240
"낙양 옥중이다. 내일은 죽을 것이니 불쌍하구나."
 
241
하거늘 낭자 헤아리되, '이랑은 내가 죽는 것을 모를 것이니 소식을 누가 전하리오?' 하고 애통해하더니 날이 밝음에 문득 청조 날아와 울거늘 낭자가 적삼 소매를 떼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편지를 써 새의 발목에 매어주며, '이랑께 전하라.' 경계하니 청조가 두 번 울고 날아갔다.
 
 
242
이 날 이랑이 고모집에서 자는데 문득 이랑의 고모가 잠결에 대경 대로하여 말하기를,
 
243
"선이 비록 상서의 아들이나 내 또한 길렀음에 주혼하였던 것인데, 내게 묻지도 아니하고 어찌 이렇듯 무류를 끼칠 수 있는가?"
 
244
하거늘 생이 부인을 흔들어 깨웠다. 부인이 정신을 차려 생에게 꿈 얘기를 이를 즈음에 문득 청조가 날아와 이랑의 앞에 앉거늘 자세히 보니 발목에 한 봉물이 매여 있는지라 끌러 보니 그 글에 하였으되,
 
245
"박명 첩 숙향은 삼가 글월을 이랑 좌하에 올립니다. 첩이 전생 죄를 차생(此生)에서 피하지 못하여 속절없이 낙양 옥중의 흙이 되니 죽기는 섧지 아니하나 낭군을 다시 못 보니 지하에 가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낭군은 천첩을 생각지 말으시고 천금같이 귀한 몸을 보중(保重)하십시오."
 
246
하였거늘 이랑이 편지 글에 크게 놀라 그 글을 고모에게 드리고 낙양 옥중에 가 함께 죽고자 하니 고모가 말하기를,
 
247
"내 몽사와 같으니 장차 어찌하리오? 그러나 경솔히 굴지 말고 할미집에 사람을 시켜 자세히 알아오라."
 
248
하며 일변으로 상서집 노복을 불러 물으니 노복 등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249
"부인이 알으시고 상서께 기별하여 여차여차한 것입니다."
 
250
하거늘 부인이 대로하여 말하기를,
 
251
"내 주혼함을 업수이 여기고 내게 묻지도 아니하고 무작정 사람을 죽이려 하는구나. 내 친히 경성으로 올라가 상서를 만나 결단하리라."
 
252
하고 치행하여 경성으로 갔다.
 
 
253
이 때, 태수가 내청(內廳)에서 공무를 보며 숙향을 불러 사는 곳과 성명과 나이, 부모에 대하여 물으니 숙향이 정신을 수습하여 말하기를,
 
254
"나이 다섯에 부모를 잃고 유리표박하였사오니 살았던 곳과 부모님의 성함은 모르옵고 다만, 저의 이름은 숙향이며, 나이는 십 육세입니다."
 
255
하니 장씨가 이를 듣고 실성 누체하며 말하기를,
 
256
"제 얼굴이 죽은 딸과 같고 이름이 또 같으되 다만 근본이 자세치 아니하니 아직 죽이지 말고 이상서께 기별하여 다시 치죄케 하십시오."
 
257
하였다. 태수가 이를 옳게 여겨 다시 가둘 때 부인이 상공께 청하여 씌운 칼을 벗기고 시비를 시켜 음식을 수시로 내여 보내고 이후로 숙향을 생각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258
이 날 태수가 이위공께 숙향을 치죄하던 연유를 기별하니 위공이 대로하여 김전을 갈고 새로이 유도를 보내어 쳐죽이려 하였다. 이때 문득 여부인이 오신다 하거늘 상서가 급히 맞이하여 자리를 정하고 앉자 부인이 노색이 등등하여 말하였다.
 
259
"요사이는 관직이 높고 위엄이 중하면 윗사람도 모르고 동기(同氣)라도 멸시하느냐?"
 
260
상서가 황공하여 대답하여 말하기를,
 
261
"이 어인 말씀이십니까?"
 
262
부인이 말하기를,
 
263
"나는 그대와 더불어 오륜에 참예치 못하느냐?"
 
264
상서가 더욱 송구하여 말하기를,
 
265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해야 한다.' 하였거늘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266
부인이 말하기를,
 
267
"그러하면 그대 어찌 나를 행인으로 아느냐?"
 
268
하니 상서가 말하기를,
 
269
"청하건대 명정기죄하여 면전에서 밝혀 주십시오."
 
270
하였다. 이에 부인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271
"선이 비록 그대 자식이나 나 또한 어릴 때부터 양육하여 친자식이나 다름이 없고, 내 일찍이 생각하니 선이 타일에 입신(立身)하면 두 아내를 두겠기에 내가 먼저 주혼하고 나중은 그대 주장하는 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기로 그리하였더니 나를 업신여기고 애매한 사람을 죽이려 하니 그런 도리가 있느냐?"
 
272
하니 상서가 침음하고 대답하여 말하기를,
 
273
"소제(小弟)가 그런 줄도 모르고 제 임의대로 낙양태수에게 기별하여 그렇게 한 일입니다."
 
274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275
"부부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고 또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대는 용서하라."
 
276
하니 상서 마음속으로는 불평하나 거스르지 못하고 대답하여 말하기를,
 
277
"명대로 하겠습니다."
 
278
하고 낙양태수를 보고 그 사연을 일러,
 
279
"죽이지는 말고 멀리 쫓으라."
 
280
하였다.
 
281
위공이 아들을 엄히 단속하여 경성(京城)으로 데려가니 생이 낭자를 못보고 가면서 모친께 하직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282
"범사(凡事)에 조심하여 다시는 그름이 없게 하라."
 
283
하였다. 선이 비로소 전후곡절(前後曲折)을 고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284
"네 말 같다면 천장연분이니 너는 아직은 방심 말고 학업에나 힘써라."
 
285
하니 생이 명을 받고 하직한 후 낭자를 찾아보지 못하고 마음이 울민하여 할미에게 글을 남기고 갔다. 서울에 이르니 상서가 크게 책망하여 말하기를,
 
286
"혼인은 인륜대사(人倫大事)라 부모 모르게 임의로 한 것이 큰 죄로되 누님께서 만류하시니 용서하겠다. 그러나 네 등과 전에는 대면(對面)치 아니하리라."
 
287
하고 태학으로 보내고 상서는 공사(公事)를 맺은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288
이때 김전은 계양태수로 이직(移職)하고 신관(新官)이 도임(到任)하여 낭자를 놓아주며,
 
289
"근처에 있지 말라."
 
290
하였다. 할미가 낭자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니 생이 보낸 글이 있거늘 낭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291
"이 땅에 있지도 못하고 또 이랑은 서울로 갔으니 장차 어찌 하겠습니까?"
 
292
하니 할미가 말하기를,
 
293
"이 곳에 있으면 또 환(患)을 볼 것입니다."
 
294
하고 집을 옮기고 난 뒤 하루는 할미가 말하기를,
 
295
"저는 천태산 마고선녀로서 낭자를 위하여 내려왔다가 이제 연분이 다하여 떠나게 되니 섭섭함이 비할 데 없습니다."
 
296
하였다. 낭자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297
"사람의 육안(肉眼)으로 어찌 선인(仙人)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저의 전생 죄악이 심중하여 의지할 데가 없었는데, 거두어 일생을 제도(濟度)해 주시니 저의 보람이 친부모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제 별안간 버리려 하오니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298
하니 할미가 말하였다.
 
299
"낭자의 지난 액은 어차피 면치 못할 것이었고, 앞으로는 태평할 것이니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제가 청삽사리를 두고 가니 어려운 일을 당하면 삽사리가 능히 주선할 것입니다."
 
300
낭자 말하기를,
 
301
"함께 가고자 합니다."
 
302
하니 할미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303
"그러할터이면 차마 어찌 버리고 가리오마는 하늘이 정하신 바라 머물지 못합니다. 제가 입던 옷함을 빈렴하고 저 개를 따라가 후비는 곳에 묻고 혹 어려운 일이 있거늘 제 분묘(墳墓)로 오십시오."
 
304
하고 입던 적삼을 벗어주고 두어 걸음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낭자 적삼을 붙들고 통곡하며 옷함을 빈렴하여 장사 지내기 위해 낭자가 친히 가려하니 삽사리가 낭자의 치마를 물어 앉히니 낭자 할 수 없이 역군(役軍)에게 일러,
 
305
"개를 데리고 가 후비는 곳에 묻으라."
 
306
하였다. 역군이 대답하고 개를 따라가니 북촌 이상서집 동산 서편 언덕이었다. 그 곳에 장사지내고 돌아오니 낭자가 말하기를,
 
307
"할미가 죽어서도 나를 잊지 못하여 낭군의 집 가까이에 묻혔구나."
 
308
하고 아침 저녁으로 제사상을 극진히 받들었다.
 
 
309
세월이 여류(如流)하여 추칠월(秋七月) 망간(望間)이 됨에 양풍(凉風)은 소슬하고 밝은 보름달은 조요한지라, 낭자가 종이를 펴놓고 글을 지어 읊다가 책상을 의지하여 잠시 졸다가 깨어 일어나 보니 삽사리 온데 간데가 없어 놀라서 삽사리를 찾았으나 종적이 없는지라 더욱 망연하여 신세를 한탄하였다.
 
310
이 때 이랑이 태학에 있어 낭자의 소식을 모르더니 하루는 삽사리가 오거늘 반갑고 놀라 데려다가 어루만질 새 그 개가 문득 한 봉서를 토하니 이는 곧 낭자의 필적이었다. 급히 떼어 본즉 그 글에,
 
311
"숙향의 팔자 지험(至險)하여 나이 다섯에 부모를 잃고 동서 유리하다가 천정연분으로 이랑을 만났으나 원앙금이 완전치 못하여 이별이 웬 말인가? 간장은 그치고 서로 만날 때가 기약이 없구나. 이제 할미마저 죽었으니 누구를 의지하여야 할지 알지 못하겠구나. 나의 궁박함을 누가 알리겠는가?"
 
312
하였거늘 이랑이 글을 보고 더욱 슬퍼하였다. 음식을 내어 개를 먹이며 편지를 써 개 목에 걸어주며 경계하여 말하기를,
 
313
"할미가 죽었으니 너는 낭자를 잘 보호하라."
 
314
하니 그 개 머리를 조아려 응하고 가는 것이었다.
 
 
315
화설. 낭자는 개마저 잃고 홀로 있어 사면이 적료(寂廖)함에 슬픔을 금치 못하여 자결하고자 하여 비단 수건을 손에 쥐고 창천을 의지하여 부모를 부르짖어 통곡하다가 문득 들으니 무슨 짐승이 소리를 크게 지르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마음속으로 놀라 창을 닫고 동정을 살피고 있노라니 이윽고 그 짐승이 들어와 문을 후비기에 자세히 들으니 이는 곧 삽사리였다. 그제야 반겨 급히 문을 열고 나가 개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316
"네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었느냐?"
 
317
하고 슬피우니 그 개가 목을 늘이어 낭자의 팔 위에 얹거늘 이상히 여겨서 보니, 목에 한 봉서가 매여 있었다. 바삐 끌러 보니 이는 곧 이랑의 필적이었다. 그 글에,
 
318
"백년가랑 이선은 글월을 숙낭자에게 부치노니 낭자의 이렇듯한 괴로움이 모두 나로 말미암은 것이오. 내 한 번 이리로 옴에 높은 산이 첩첩히 가리고 소식이 끊어졌는데 생각지도 못하던 낭자의 친필을 받고 보니 서로 대한 듯 반가웠소. 그러나 할미가 죽었다는 소식은 나로 하여금 심신을 혼미하게 하였소. 옛 말에 고진감래(苦盡甘來)하고, 또 요사이 과거 소문이 들리니 다행히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면 평생 원(願)을 이룰 것이오. 낭자는 천만 관심하여 나의 돌아감을 고대하시오."
 
319
하였다. 낭자가 편지 글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삽사리가 수천 리를 하루에 득달함을 기이하게 여겼다.
 
 
320
수일 후에 울타리 밖에 사람이 지나가며 말하기를,
 
321
"오늘 밤 이 집에 도둑이 들 것이니 낭자가 어찌 면하겠느냐?"
 
322
하거늘 낭자 놀라 어찌할 줄 모르더니 삽사리 집안 세간을 물어다가 땅에 묻는지라 낭자 할미 말을 생각하고 할미 분묘에 갈새 낡은 옷을 입고 새 옷을 개 등에 얹고 경계하며 말하기를,
 
323
"이제 할미 분묘로 가려하니 너는 길을 인도하라."
 
324
하니 삽사리는 꼬리를 치며 앞에 서서 가다가 구비구비 돌아 보며 낭자 오기를 기다려 가기를 수마장하더니 한 곳에 이르나 수풀은 울창하고 꽃들이 분분한 가운데 한 무덤이 있고, 개가 무덤 앞에 가 앉거늘 낭자가 물어 말하기를,
 
325
"이 분상(墳上)이 진실로 할미의 무덤이냐?"
 
326
하니 개가 분묘를 후비고 절을 하였다. 낭자가 사면을 돌아보니 보름달은 요량하고 풍경은 처량한지라 심산궁곡(深山窮谷)에 인적 없이 홀로 앉아 있으니 슬픈 마음만 일어나는지라, 할미의 분묘를 두드리고 일장통곡하였다.
 
 
327
각설. 상서는 아들 이선을 학관(學館)에 두고 돌아와 하루는 집안이 적료(寂廖)함에 부인과 더불어 완월루에 올라 술을 마시는데 어디서 처량한 곡성이 들려왔다.
 
328
"이 심야에 어떤 계집이 우는고? 알아오라."
 
329
하였다. 마침 이랑의 유모가 상서를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분부를 받고 우는 소리를 찾아가니, 한 분묘 앞에 젊은 여자가 울고 있는지라 유모가 나아가 물어 말하기를,
 
330
"낭자는 어떤 사람인데 이 깊은 밤에 이렇듯 우십니까?"
 
331
하니 낭자가 무슨 변고라도 있는가 하여 겁내어 들은 체 아니하니 유모가 거듭 물었다. 낭자가 비로소 소리의 임자가 여자인 줄 알고 울음을 그치고 전후 사연을 이르고,
 
332
"이 곳에 와 죽으려 합니다."
 
333
하니 유모가.
 
334
"낭자를 뵈오니 반갑습니다. 소인은 이랑의 유모로써 부인의 분부로 곡성(哭聲)을 찾아 왔는데 어찌 낭자인 줄 뜻하였겠습니까? 소인의 집이 멀지 아니하오니 그리로 가사이다."
 
335
하였다. 낭자 대답하여 말하기를,
 
336
"그대가 낭군의 유모라 하니 기쁘나 상서께서 나를 죽이려 하시니 어찌 그대에겐들 가겠는가?"
 
337
하니 유모가 말하기를,
 
338
"낭자의 말씀이 옳으시니 돌아가 부인에게 고하여 회보(回報)하겠습니다."
 
339
하고 가더라.
 
 
340
이 때 삽사리 머리를 들어 상서집을 향하여 구덩이를 파느라 정신이 없거늘 낭자 울며 말하기를,
 
341
"내가 이 곳에 있는 줄을 상서께서 알으시면 반드시 죽이려할 것이니 내 차라리 스스로 죽으리라."
 
342
하고 수건을 들어 목에 매려하니 삽사리 수건을 물어 뜯는지라 낭자가 말하기를,
 
343
"너는 기이한 짐승이라 나를 죽지 말라 하거든 할미 분상에 올랐다가 내려와 절 세 번만 하면 네 뜻대로 하리라."
 
344
하니 삽사리 즉시 분상에 올랐다가 내려와 절하거늘 낭자 말하기를,
 
345
"네 비록 짐승이나 가장 비상하니 어쨌든 가르치는 대로 하리라."
 
346
하더라.
 
 
347
이 때 유모가 부인께 들어가 낭자와의 문답사(問答事)를 낱낱이 고하니 부인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348
"내가 깜박 잊었도다. 선을 낳을 때에 선녀가 이르던 말을 기록해 놓은 것을......."
 
349
하고 적은 것을 가져다가 상서께 드리니, '이 아이 배필은 남양 땅 김전의 딸 숙향이라.'하였거늘 상서 또한 김전의 일을 생각하여 이상히 여기니 부인이 말했다.
 
350
"과연 선의 배필입니다. 아무튼 데려다가 근본을 알고자 하나이다."
 
351
상서가 허락하니 부인이 유모에게,
 
352
"교자를 가지고 가 데려오라."
 
353
하니 유모 즉시 교자를 차려 가지고 나아가 부인 말씀을 숙향에게 전하고 가기를 청하니 낭자 말하기를,
 
354
"부인의 명을 거역치 못하여 가려니와 천인(賤人)이 어찌 방자히 교자를 타겠느냐?"
 
355
하니 유모 등이 거듭 권유하여 낭자 할 수 없이 교자에 오르니 시녀가 등촉을 잡아 낭자를 인도하였다. 곧바로 망월루에 다달아 누상에 올라가니 상서와 부인이 나란히 앉아 계시는지라 낭자가 나아가 재배하니 상서부부가 자리를 가까이 주고 눈을 들어 숙향을 보았다. 근심은 띠었으나 찬란한 용모와 단장(丹粧)을 폐하였으나 선연한 태도는 진실로 천하국색이었다.
 
356
"저렇듯한 가인을 접하여 어찌 미혹되지 아니하리오?"
 
357
하고 도리어 지난날의 일을 후회하며 고향과 부모를 물으니 낭자 피석(避席)하여 말하기를,
 
358
"소첩의 팔자 기박하여 나이 다섯의 난중(亂中)에 부모를 잃었기로 부모와 거주를 모르나이다."
 
359
하니 상서 말하기를,
 
360
"동촌 이화정의 할미의 집에는 어찌하여 왔더냐?"
 
361
낭자 자초지종을 고할새 장승상집에 있다가 사향의 참소(讒訴)로 쫓겨나던 일과, 표진강에 빠졌으나 선녀가 구하던 일과, 갈대밭에서 화재를 만나 화덕진군이 구하던 일과, 이화정 할미를 만나 한 가지로 가던 일과, 여복야 집에서 통혼하던 일과, 낙양옥중에서 고초 겪던 일과 도적을 피하여 할미의 무덤에 와 죽으려 하던 일을 낱낱이 고하니 부인이,
 
362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몇이며, 생월 생일을 아느냐?"
 
363
라고 물었다. 낭자 말하기를,
 
364
"이름은 숙향이요, 나이 십육이며, 생일시(生一時)는 사월 초파일 자시(子時)입니다."
 
365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366
"생월일시를 어찌 아느냐?"
 
367
하니 낭자 말하기를,
 
368
"부모를 떠나올 때 금낭을 채워 주고 갔기에 헤어진 후에 열어 보니 거기에 저의 이름과 생년월시가 적혀 있기에 아나이다."
 
369
하였다. 금낭은 원래 김전이 왕균에게 숙향의 미래사(未來事)를 들은 즉,
 
370
"부모를 잃을 것입니다."
 
371
함에 후일을 염려하여 생일시(生一時)와 이름을 기록하여 금낭에 넣어서 숙향에게 채워 둔 것이다. 부인이 금낭을 보고 대희하여 말하였다.
 
372
"생년월일이 선과 같고 이름이 또한 숙향이니 선녀의 말이 맞되 다만 부모를 모르니 답답합니다."
 
373
상서 말하기를,
 
374
"근본은 자연 알리라."
 
375
하고 선이 머물던 봉룡당에 침소를 정하여 주었다. 다음 날에 부인이 낭자를 불러 물어 말하기를,
 
376
"의복과 기명(器皿)을 땅에 묻고 왔습니다."
 
377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378
"현부 아니면 그곳을 누가 알겠는가?"
 
379
하니 대답하여 말하였다.
 
380
"첩이 아니라도 청삽사리가 그 곳을 아나이다."
 
381
하니 부인이 유모에게 명하여,
 
382
"개를 데리고 가라."
 
383
하니 유모 개를 데리고 가 개가 가르치는 데를 파 가지고 왔거늘 부인이 기이히 여겨 말하기를,
 
384
"짐승도 저리 기이하니 그 임자는 더욱 비상하리로다."
 
385
하더라. 하루는 부인이 낭자를 불러 물어 말하기를,
 
386
"네 무슨 재주를 배운 게 있느냐?"
 
387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388
"배운 것은 없사오나 아무 일이라도 한 번 보면 그대로 할 듯합니다."
 
389
하였다. 부인이 그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여 비단을 내어 주며 말하기를,
 
390
"상공의 관복이 낡았으니 저 관복을 보고 그대로 지어 보라."
 
391
하거늘 낭자 받아 가지고 침소로 돌아와 비단을 보니 좋지 못하거늘 혜오되, '내 재주를 시험하리라.' 하고 자기가 미리 짜둔 비단을 내어 바꾸어 지어내니 시녀가 이를 보고 대경하여 부인께 고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392
"관복은 다른 옷과 달라 내 어려서 침재(針才)를 겨룰만한 사람이 없으되 수 일에 마쳤거든 저가 어찌 하루가 지나지 않아 다 지었겠느냐?"
 
393
하고 낭자를 부르니 낭자 관복을 드리거늘 부인이 대경하여 말하기를,
 
394
"수품제도가 천재(天才)일 뿐 아니라 비단이 또한 내가 준 것이 아니구나."
 
395
하니 낭자가 말하기를,
 
396
"주신 비단이 부정하기로 첩이 전일에 짠 비단으로 바꾸어 왔나이다."
 
397
하였다. 부인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관복을 가져다 상서께 드리며 말하기를,
 
398
"수품과 비단이 며느리의 재주이니 자세히 보십시오."
 
399
하니 상서 재삼 살펴보고 칭찬을 분에 넘치게 하더라.
 
 
400
이 때 조정에 일이 있어 황제께서 심부름하는 관원을 시켜 상서를 부르시니 상서께서 명을 받고 다음 날 발행하려 할 새,
 
401
"흉배가 낡았으니 좋은 흉배를 사 오라."
 
402
하거늘 낭자 곁에 서 있다가 물어 말하였다.
 
403
"상공의 직품이 무슨 흉배입니까?"
 
404
부인이 말하기를,
 
405
"장학이다."
 
406
하니 낭자가 말하기를,
 
407
"첩이 수 놓기를 아오니 아무렇게라도 놓아 보겠습니다."
 
408
하고 물러가 밤새도록 수를 놓아 다음날 아침에 부인께 드리니 상서와 부인이 보고 대경하여 말하기를,
 
409
"천인(天人)의 재주가 아니면 어찌 이렇듯 신기하리오?"
 
410
하고 애중함이 날로 더하여 갔다.
 
 
411
차설. 상서가 황성(皇城)에 득달(得達)하여 천자께 숭배(崇拜)하니 상이 인견(引見)하여 국사(國事)를 의논하시더니 상서의 관복과 흉배를 보시고 물어 말하기를,
 
412
"경의 관복의 비단은 어디서 얻었으며, 흉배는 누가 놓았느냐?"
 
413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414
"이는 다 신(臣)의 며느리 재주입니다."
 
415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416
"그러하면 경의 아들이 죽었느냐?"
 
417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418
"살았나이다."
 
419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420
"비단은 은하수 물결에 맞추어 짜고 흉배는 짝 잃은 학이 청천(靑天)을 향하는 격이니 경의 아들이 있으면 어찌 이렇듯 고단한 형상을 하였겠느냐?"
 
421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422
"성상(聖上)의 총명이 일월(日月)과 같사옵니다."
 
423
하고 선이 숙향을 만나던 사연을 아뢰니 상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424
"이 여자의 정절과 재주는 고금에 드물 것이다."
 
425
하시고 상을 많이 주시니 상서 사은하고 집에 돌아와 연중설화를 이르고 상으로 받은 보물을 다 낭자에게 주었다.
 
 
426
이야기는 바뀌어, 이랑이 삽사리를 보내고 숙향의 생각이 무궁하여 밥을 먹어도 맛이 없고 잠을 자도 편하지 아니하였다. 이 때 태학관이 황제께 주달하되,
 
427
"요사이 태을성이 태학에 비추오니 필연 좋은 일이 태학에서 있을까 하나이다."
 
428
상이 들으시고 하초(下招)하여,
 
429
"알성과를 베풀라."
 
430
하시니 사방에서 선비가 구름 모이는 듯 하는지라 이 때에 선이 지필묵을 갖추어 과장(科場)에 나아가 현제판을 바라보니 글제는 '제제다사'라 하였거늘 종이를 펼쳐 놓고 단숨에 써 내려가니 더 고칠 것이 없었다. 천자께서 친히 시전을 잡아 고하(高下)를 정하실 새 한 장 글을 보시니 천만(千萬)중 제일이라 급히 봉한 것을 떼어 내시니 병부상서 이정의 아들 선이라 하였거늘 전두관에게 바로 하명하니 선이 많은 사람을 헤치고 옥계(玉階)에 나아가더라. 상이 선의 헌헌한 풍신과 준수한 용모를 보시고 대희 대찬하시어 어주(御酒) 석 잔을 주시고 즉시 한림학사직사(翰林學士禁門直事)를 제수하시니 학사 사은퇴조하여 여부인께 뵈옵고 삼일유가 후에 집으로 돌아올 새 여부인을 모시고 대성사에 이르러 대연(大宴)을 배설(排設)하고 여러 스님들과 극진히 즐기며 부처께 하직한 후에 이화정 낭자의 집을 찾아가니 집은 쑥밭이 되고 인적이 적막한지라 한번 봄에 심담이 떨려 말에서 떨어짐을 깨닫지 못하여 실성누체하여 말하기를,
 
431
"슬프다 낭자여! 만단고초를 겪어 간장을 살으다가 다시 상면치 못하고 황천객이 되었단 말인가? 내 몸이 비록 귀히 되었은들 무엇이 기쁘리오?" 맹세코 불효죄 될지언정 숙낭자를 좇아 지하에 가리로다."
 
432
하고 말에 올라 집에 돌아 왔으나 수심에 쌓여 행색이 처량하였다. 이 때 상서부부가 이선이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온다는 기별을 듣고 불승환희하여 중문 밖에 나와 맞아들이되 학사는 수색(愁色)이 만면하여 기쁜 기색이 없거늘 상서가 괴이하게 여겨 물어 말하기를,
 
433
"네 몹시 불평하여 수색(愁色)이 있느냐? 마음에 걸림이 있어 기쁜 기색이 없느냐?"
 
434
하니 학사 급히 사죄하여 말하기를,
 
435
"먼 길에 피곤하여 자연 신기(身氣)가 불화하여 그러하옵니다."
 
436
하며 슬픔을 감추지 못하니 부인이 그 뜻을 알고 위로하여 말하기를,
 
437
"네 뜻을 아노니 느긋한 마음으로 서서히 숙낭자를 상봉하라."
 
438
하니 선이 믿지 아니하고 몸이 곤함을 칭탁하고 불탈의관(不奪衣冠)하여 난간에 구부려 누우니 부인이 낭자를 명하여,
 
439
"학사를 인도하여 편히 쉬게 하라."
 
440
하였다. 낭자가 부끄러움을 머금고 주취홍상으로 나아가 학사의 소매를 잡아 일어 나기를 청하니 학사 눈을 들어 본즉 이 곧 꿈에도 그리던 숙낭자였다. 학사가 대경대희하여 한편으로는 반신반의하며 낭자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441
"낭자의 혼이 이선을 보느냐? 이선이 꿈에 낭자를 보느냐?"
 
442
하며 여취여광(如醉如狂)하거늘 낭자 또한 일희일비한 중에 도리어 학사의 거동을 민망히 여겨 간(諫)하여 말하기를,
 
443
"군자께서 어찌 이렇듯 미친 사람의 행동을 하십니까? 체면을 돌아보시고 마음을 진정하십시오."
 
444
하니 학사 비로소 사실임을 알고 급히 물어 말하기를,
 
445
"그대 어찌 내 집에 이르렀습니까?"
 
446
하였다. 낭자가 말하기를,
 
447
"자초지종은 서서히 들으십시오."
 
448
하니 학사가 낭자의 손을 잡고 봉룡당으로 들어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 물어 말하였다.
 
449
"학생이 다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낭자를 보고 싶은 마음이 급하여 오는 길에 이화정을 찾아 가나 형영(形影)이 없음에 흉격이 막히어 그대가 정녕 죽은 줄로 알고 부모를 뵈온 후에 결단하여 그대 뒤를 따르고자 하였는데 어찌 내 집에 있을 줄을 뜻하였겠습니까? 지금까지 사실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450
낭자 말하기를,
 
451
"지나간 일은 일러도 쓸데 없으니 금일로부터 편하고 즐겁게 지내십시오."
 
452
하고 학사를 권하여 함께 봉룡당에서 나와 문안을 드리니 상서부부가 더욱 사랑하여 즉시 대연을 배설하고 친척고구(親戚故舊)를 다 청하여 삼일을 즐기고 파하였다.
 
 
453
이 때 학사 벼슬이 높고 낭자를 얻어 평생 원을 이루어 집에 들어오면 효도를 극진히 하고 조정에 나아가 충성을 다하니 명망이 사림(士林)에 으뜸이었다.
 
 
454
화설. 상서가 학사더러 말하기를,
 
455
"네 아내 규행(閨行)이 청숙(淸淑)하고 부덕(婦德)이 온순하니 진실로 숙녀이긴 하지만 네가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아내를 취하였음을 다른 사람들이 시비할 것이오, 또 전일 양왕과 정약(定約)하였으니 정녕 재촉할 것이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456
하니 학사 말하기를,
 
457
"이 일은 어렵지 아니하오니 소자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458
하고 즉시 상경하여 숙낭자 만나던 전후곡절을 궁궐에 주달하니 상이 전일에 숙낭자 이름을 들어 알고 계신지라 이 날 표문(表文)을 보시고 크게 칭찬하여 즉시로 숙향을 정렬부인에 봉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아뢰어 말하기를,
 
459
"여자의 직첩(職牒)은 지아비 벼슬로 정하옵거늘 이제 이선의 처가 먼저 일품(一品)에 오르니 불가하옵니다."
 
460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461
"그러하면 지아비 없는 여자는 절행(節行)이 있어도 직첩을 못주랴?"
 
462
하시고 선의 벼슬을 돋우어 간의대부문연각한림학사(諫議大夫文淵閣翰林學士)를 하이시니 백관이 뉘 아니 공경하리오. 이 때 양왕이 상서께 혼인을 재촉하니 상서가 처음에 허락한 일이라 수락지 못하여 민망하여 하거늘 학사가 말하기를,
 
463
"소자가 공도(公道)로 물리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464
하였다.
 
 
465
각설. 형초 땅에 수 년동안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침에 도적이 크게 일어나 작난(作亂)이 심하거늘 상이 근심하실새 한 사람이 반열(班列)에서 나와 아뢰어 말하기를,
 
466
"신이 비록 나이 어리고 재주 부족하오나 형초 땅 민심(民心)을 진정하오리니 하명(下命)하심을 청하나이다."
 
467
하였다. 상이 보신즉 이선이라 상이 크게 기뻐하시고 즉시 형주자사 겸 형주의 안찰사를 제수하시고 절월과 상방검을 주시니 자사 숙사퇴조(肅謝退朝)하거늘 상서가 말하기를,
 
468
"남아 대장부가 입신양명(立身揚名)하면 임금을 섬기는 날은 많고, 부모를 섬기는 날은 적다 하였으니 이제 나라 일로 멀리 떠남은 예사로운 일이지만 너를 멀리에 보내고 그리워 어찌하겠느냐? 다만 형초 인심이 강악하다 하니 이를 염려할 뿐이다."
 
469
하였다. 자사가 말하기를,
 
470
"소자 또한 슬하를 떠날 뜻이 없사오니 국사를 피치 못하여 부득이하여 가오니 크게 염려치 마십시오."
 
471
하고 낭자를 이별하여 말하기를,
 
472
"신하된 몸으로 임금의 명을 지체하지 못하여 먼저 가니 부인은 뒤를 좇아오십시오."
 
473
하니 부인이 물었다.
 
474
"남군이 어디 입니까?"
 
475
자사가 말하기를,
 
476
"남군은 형주의 속현(屬縣)으로, 그리로 가는 역로(歷路)입니다."
 
477
하니 부인이 또 물었다.
 
478
"그러하면 지나는 길에 은혜 갚을 곳이 많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479
자사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480
"그대의 원(願)대로 하십시오."
 
481
하고 발행하였다.
 
482
이 때 자사 형주에 이르러 각읍을 순행(巡行)하여 그른 자를 물리치고 어진 자를 가리어 소임(所任)을 맡기며 관곡(官穀)을 흩어 백성을 진휼(軫恤)하기를 밤낮으로 애쓰니 도적이 감화하여 향응귀순함에 자사의 선치(善治)하는 명성이 원근에 크게 진동하였다. 상서가 집에 들어와 낭자더러 말하기를,
 
483
"이제 들으니 선이 내려가 선치하여 도적이 향화하여 양민(良民)이 되었다하니 너는 치행하여 내려가라."
 
484
하였다. 이에 부인이 수명(受命)하고 즉시 제물을 준비하여 할미 분묘에 제(祭)하였더니 버린 제물을 삽사리가 다 먹는지라 부인이 개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485
"네가 아니었던들 나는 벌써 이 땅의 흙이 되었을 것이다."
 
486
하고 탄식하였다. 이 때 삽사리 발로 땅을 끄적이거늘 부인이 괴이히 여겨 살펴보니 글자로 썼으되,
 
487
"이제 연분이 다하였기로 여기서 떠나고자 하오니 부인은 편안하십시오."
 
488
하였거늘 부인이 대경하여 말하기를,
 
489
"내가 또한 네게 신세진 것이 많아 은혜 갚기를 늘 원하였더니 이제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느냐?"
 
490
하니 삽사리 부리로 분묘를 가리키며 두 번 절하고 서너 발 걸음에 부인을 돌아보며 소리를 지르더니 문득 구름이 사면으로 에워 들어오며 개를 옹위하여 간데 없거늘 부인이 슬퍼하여 말하기를,
 
491
"개도 천상 짐승이로다."
 
492
하고 그 개 섰던 곳에 의금을 갖추어 장사지내고 상서 양위께 하직한 후에 발행할새 하인에게 분부하여 말하기를,
 
493
"지나는 길에 제할 곳이 많으니 제물(祭物)을 대령하고 지명(地名)을 낱낱이 고하라."
 
494
하였다. 한 곳에 다달으니 노전이었다. 부인이 화덕진군에게 제문을 지어 제하였더니 잔에 담긴 술이 다 없어지고 거위알 같은 구슬이 담겼는지라, 가장 고이히 여겨 거두어 가지고 가다가 한 곳에 다달으니 표진으로 통하는 양진강이었다. 표진을 가려 하면 뱃길도 험하고 멀기도 하거늘 부인이 가장 서운하여 방황하다가 얼마쯤 갔을 때 문득 광풍이 크게 일어나 닻줄을 끊어 가니 사공이 배를 걷잡지 못하여 놓아 버림에 서쪽으로 향하여 가는데 빠르기가 화살 같은지라 배 안의 여러 사람이 넋을 잃고 어찌할 줄을 몰라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바람이 쉬고 물결이 고요해 지니 여러 사람이 정신을 차려서 살펴보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알지 못하였다. 또 기갈(飢渴)을 이기지 못하여 밥을 하려해도 땔나무를 구하지 못하여 민망해 하던 중에 부인이 문득 돌아보니 채련하는 선녀가 연엽주(蓮葉舟)를 타고 저를 불며 내려오거늘 자세히 보니 전일 표진강에서 보던 선녀였다. 반가워 장차 길을 묻고자 하였더니 그 배 나는 듯이 지나가며 노래를 부르되,
 
495
"왕년 오늘날 이 곳에서 숙낭자를 만났더니 금년 오늘날 또 부인을 만났도다. 반가운 마음으로 하례(賀禮)를 하려고 하나 배안의 여러 사람이 반겨하여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화덕진군의 화주를 가지고도 배안 여러 사람의 기갈을 구하지 못하는구나."
 
496
하거늘 부인은 그 얼굴을 보고 소리를 들으나 여러 사람은 보도 듣고 못하는지라 부인이 혜오되, '노전에서 얻은 구슬이 과연 화주(火珠)로다.' 하고 쌀을 그릇에 담고 그릇 밑에 구슬을 넣으니 쌀이 저절로 끓어 밥이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말하기를,
 
497
"부인은 진실로 천신(天神)이로다."
 
498
하였다. 어느덧 배가 표진강에 이르렀거늘 사공이 놀라 말하기를,
 
499
"양진서 표진이 일천 오백 리요, 뱃길이 또한 험난하니 아무리 순풍이었다 한들 어찌 오늘 아침에 출발하여 해가 지기 전에 표진에 이를 수 있겠는가?"
 
500
하고 신기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 다음 말은 다음 회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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