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순이라는 금년 열여섯 살 먹은 재가승(在家僧)의 따님이 있었다.
5
멀구알같이 까만 눈과 노루 눈썹 같은 빛나는 눈초리,
7
백두산 천지 속의 선녀같이 몹시도 어여뻤다.
11
총각들은 산에 가서 '콩쌀금'하여서는 남몰래 색시를 갖다주었다.
12
노인들은 보리가 설 때 새알이 밭고랑에 있으면 고이고이 갖다주었다.
13
마을서는 귀여운 색시라고 누구나 칭찬하였다.
16
멀구 광주리 맥없이 내려놓으며 아버지더러,
17
"아버지, 우리를 중놈이라고 해요, 중놈이란 무엇인데"
18
"중? 중은 웬 중! 장삼입고 고깔 쓰고 목탁 두다리면서 나무아미타불 불러야 중이지, 너 안 보았디? 일전에 왔던 동냥벌이 중을"
21
아까 산에서 나뭇꾼들에게 몰리우던 일을 생각하였다.
22
노인은 분한 듯이 낫자루를 휙 집어 뿌리며,
23
"중이면 어때? - 중은 사람이 아니라든? 다른 백성하고 혼사도 못하고 마음대로 옮겨 살지도 못하고"
25
"잘들 한다. 어디 봐! 내 딸에야 손가락 하나 대게 하는가고"
28
순이도 그저 슬픈 것 같아서 함께 울었다, 얼마를.
32
북관의 육진 벌을 유목(遊牧)하고 다니던 일족이었다.
33
갑옷 입고 풀투구 쓰고 돌로 깎은 도끼를 메고,
34
해 잘 드는 양지볕을 따라 노루와 사슴잡이하면서
36
수초를 따라 아무데나 다녔다, 이리저리.
41
사내와 같이 먹으며 입맞추며 놀며 지냈다.
42
그러다가 청산을 두고 구름만 가는 아침이면
45
말은 한가히 풀을 뜯고 개는 꿩을 따르고,
49
그래서 술을 먹고 계집질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싸움하고 영지를 빼앗고, 암살이 일어나고 -
50
추장, 무사, 처, 모, 아이,석부(石釜), 초의(草衣) -
51
이것이 서로 죽고, 빼앗고 없어지고 하는 대상
52
평화스럽고 살벌한 세대를 오래 보내었다.
56
천막 속 한자리에서 잠자던 부부와 부모와 처자와 모든 것들이
61
일족은 복잡한 것을 모르고 그날 그날을 보내었다.
63
그네들은 탐탐한 공기를 모르고 성가신 도덕과 예의를 모르고
65
그저 아름다운 색시를 만나면 아내를 삼고
74
앞마을에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왔다고 떠들 때,
75
천막에다 여러 곳에서 나많은 장정들이 모조리
77
여러 대 누려 먹은 제 땅을 안 뺏기려,
79
나갈 때면 울며불며 매여달 리는 아내를 물리치면서
80
처음으로 대의를 위한 눈물을 흘려보면서.
82
냇가에 칠성단을 묻고 밤마다 빌었다, 하늘에
84
그러나 그 이듬해 가을엔 슬픈 기별이 왔었다,
85
싸움에 나갔던 군사는 모조리 패해서 모두는 죽고
86
더러는 강을 건너 오랑캐령으로 달아나고,
87
- 사랑하던 여자와 말과 서부와, 석퉁소를 내 버리고서.
88
즉시 고구려 관원들이 왔었다 이 천막촌에
90
종으로 쓰기로 하고 그대로 육진에 살게 하였다,
97
그네는 혹 둘도, 모여서 일정한 부락을 짓고 살았다.
102
이 일족은 세상을 그리워하며 원망하며 지냈다.
103
순이란 함경도의 변경에 뿌리운 재가승의 따님.
105
놀아도 집중과 시집가도 집중이라는 정칙받은 자!
106
그러나 누구나 이 중을 모른다, 집주이란 뜻을
107
그저 집중 집중 하고 욕하는 말로 나뭇꾼들이 써왔다.
110
해 지기까지 하여서 물터에 물 길러 나섰다,
113
오래 묵은 돌부처 구월 볕에 땀을 씻으면서
115
지나던 길손이 낮잠 자는 터전도 되고 -
116
그 아래는 바로 우물, 바가지로 풀 수 있는 우물,
118
또 그 곁에는 치재(致齋) 붙이던 베 조각이 드리웠고,
119
나무꾼이 원두 씨름아여 먹고 간 꺼-먼 자취가 남았고
120
샘물 우엔 벌레 먹은 버들잎 두어 개 띄웠고 -
123
으아, 우습다 시집간다더라, 청혼왔다구."
124
"부잣집 며느리 된다고, 어떤 애는 좋겠다"
127
"밭도 두 맥 소쉬 있고 소도 세 마리나 있고 흥!"
128
"더구나 새신랑은 글을 안다더라, 언문을"
129
빈정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며
133
가만히 '시집' '신부'하고 불러보았다.
134
어여쁜 이름이다 함에 저절로 낯이 붉어진다,
135
"나도 그렇게 된담! 더구나 그 '선비'하고"
136
그러다가 문득 아까 아버지 하던 말을 생각하고
137
나는 집중 집중으로 시집가야 되는 몸이다 함에
138
제 신세 가엾은 것 같아서 퍽 슬펐다.
139
"어찌 그 선비는 집중이 아닌고? 언문 아는 선비가, 에그 그 부잣집은 집중 가문이 아닌고? 가엾어라"
140
그는 그저 울고 싶었다 가슴이 답답하여지면서
144
"노자- 노자 젊어 노자 늙어……"하는 나무꾼의 목가가 들릴 때,
145
순이는 깜짝 놀라 얼른 물동이에 물을 퍼 담았다
146
가을바람이 버들잎 한 쌍을 물동이에 쥐어넣고 -
150
하늘이 부르는 저녁 노래가 고요히 떠돌아
152
순이를 때릴 때, 그는 저절로 가슴이 뛰었다 -
153
성장한 처녀의 가슴에 인생의 노래가 떠돌아 못 견디게 기쁘었다,
154
그때 어디서 갈잎이 째지며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155
그러자, 새알 만한 돌멩이 발충에 와 떨어진다.
157
순이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모로 돌아섰다.
159
소년은 뛰어나왔다. 갈 밖으로 벙글벙글 웃으면서
160
"응, 순이로구나!" 하면서 앞에 와 마주섰다,
161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콩쌀금'을 내어 슬며시 쥐어준다.
163
낯을 들지 못하였다 늘 하던 해죽 웃기를 잊고 -
164
"너 멀구밭으로 갔던? 어째 혼자 갔나?"
165
"나허구 같이 가자구 하지 않았나? 누가 꼬이든?"
168
순이는 그러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169
소년은 빨개진 소녀의 귓볼을 들여다보며
175
"옳지 알았다 너 부끄러워 우니? 우리 아버지 너 집으로 혼사말 갔다더니 옳지 그게 부끄럽구 우냐!"
177
"얘 너는 우리 집에 시집온단다, 권마성(勸馬聲) 소리에 가마에 앉아서 응"
179
"듣기 싫다 나는 그런 소리 듣기 싫다!"
181
아무 말도 없이 고요히 - 수정(水精)같이
182
소년은 웃다가 이 눈치를 차리고 얼른 달려들어
185
또 한 가지 여왕같이 걸어가는 거룩한 그 자태를 탐내보면서
186
마치 원광 두른 성녀를 보내는 듯이 한껏 아까워서 -
192
두려움과 경이가 큐-피트의 화살이 되었다.
197
아침나절 호풍이 부는 산국(山國)에도 피기 시작하였다.
201
사랑은 재가승과 언문 아는 계급을 초월하여서 붙었다.
207
물 우엔 갈잎 마음속엔 '잊지 말란 풀'
210
처녀의 짓두그릇엔 웬 총각의 토수목 끼었고
211
누가 쓴 '언문본'인지 뎅굴뎅굴 굴렀다
212
순이의 맘에는 알 수 없는 영주가 즐어앉았다.
213
콩쌀금 주던 미소년이 처녀의 가슴에 아아
217
날마다 꼴단 지고 오다가 그 집 앞 돌각탑 우에 와 앉았다,
222
아침은 저녁이 멀고 저녁은 아침이 그리운
225
쌓기는 왕자, 왕녀의 사랑 같은 사랑의 성을
227
헐기는 재가승의 정칙이 헐기 시작하였다.
235
순이도 재가승의 씨를 받아 전하는 기계로 가게 되었다.
238
할 수 없이 그해 겨울에 동리 존위(尊位)집에 시집갔었다,
243
"어찌 저럴까, 언문 아는 선비는 어쩌고, 흐흥, 중은 역시 중이 좋은 게지"라고 비웃었다.
245
이 소문을 듣고 소년은 밤마다 밤마다 울었다.
246
그리고 단 한 번만 그 색시를 만나려 애썼다.
247
광인같이 아침 저녁 물방앗간을 뛰마니며
251
열흘이 지나도 순이는 그림자도 안 보였다
255
단순한 옛날의 기억을 이렇게 깨뜨려좋습니까?"
256
"아, 순아, 어디 갔니 옛날의 애인을 버리고 어디 갔니?
257
너는 참새처럼 아버지 품안에서 날아오겠다더니,
258
너는 참새처럼 내 품안에서 날아오겠다더니,
260
언문 아는 집 각시 된다고 자랑하더니만
261
언문도 내보리고 선비도 없는 어디로 갔니?"
262
"멀구알 따다 팔아 열녀전을 쌓겠다더니
267
물레젓기 타령하던 때에 듣던 부엉새가 운다 아, 순아!"
271
"하늘이시여, 칼을 주소서, 세상을 무찌를
272
순이가 살고 옛날의 샘터가 놓인 이 세상을 무찌를!"
276
"가헌(家憲)'이라거나 '율법'이라거나,
278
뜯어고쳐라 추장이란 녀석이 제 맘대로 꾸며논 타성의 도덕률을
287
몇 날을 두고 울던 소년은 열흘이 되자
290
보꾸러미 하나 둘러메고 이 마을을 떠났다
293
구름은 빌까 험하게 분주히 내왕하는데.
300
농부들은 여전히 호미를 쥐고 밭에 나갔다.
302
언문 아는 선비 일은 차츰차츰 잊으면서.
306
검은 문명의 손이 이 마을을 다닥쳐왔다,
310
그리고 아침나절 짐승 우는 소리 외에도
317
이듬해 여름 강변인 이 마을에 옮겨왔다.
318
아버지 집도 동강(東江)으로 가고요 -
320
멀구 따는 산곡에는 토지 조사국 기수가 다니더니,
328
간첩이란 방랑자와 밀수출 마부의 아내 되는 순이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