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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강진의 역사와 문화
◈ 28. 강진의 우물과 샘
강진의 우물과 샘
 
샘과 우물의 뜻
 
국어사전에서는 물을 자연계에 널리 존재하는 수소와 산소의 화학적 결합물이라고 하였고 물건에 빛깔을 들이는 물질을 말한다고 되어 있다. 또한 물은 공기와 더불어 생물의 생존에 필요 불가결한 물질이며, 만물의 생명을 이어주는 물질이라고 하였다.
 
물은 상온(常溫)에서는 투명한 액체이나, 섭씨 0도 이하에서는 얼음이 되고 100도 이상에서는 수증기로 변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사람의 몸에는 70% 이상이 물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배고픔은 참아도 갈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을 때는 가까운 샘이나 우물에 또는 계곡에 고여 있는 물을 찾게 된다.
 
샘은 새암, 시암 또는 샴이라고 전라도에서는 방언으로 부르고 있다. 샘이란 원어로 바위 사이에서 끼어 나오는 물을 말한다. 즉 자연발생적으로 바위와 땅속에서 용출되는 깨끗한 물을 말한다.
 
또한 우물이란 물을 얻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땅을 파고 물이 고이게 만든 시설로서 고대로부터 인간이 정착생활 수단으로 우물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우물이란 움푹하다 또는 움집 아래 즉 시설물에서 나오는 물이란 뜻으로 움집안의 물이 우물로 변하여 부르는 이름이라고 보는 학자들의 말이다. 한편 한곳의 마을을 동내(洞內)라고 하는데 이는 25가구 정도가 한곳의 우물을 함께 먹고 사는 범위를 규정하여 동내(洞內)라 부른다고 한다.
 
약수(藥水)란 샘과 같으며 자연발생적으로 지하에서 솟아나는 샘물(泉水)을 말한다. 즉 자연에서 오염되지 않고 인간에 필요한 각종 유효성분이 함유되어 건강을 유지하거나 각종 질병의 치유가 가능한 깨끗하고 기능성이 있는 물을 말한다.
 
 
인간과 물
 
큰 하천을 끼고 있는 곳에서 문명이 발달한 이유는 물이 농경과 산업 활동 등에 없어서는 안 될 물질이기도 하거니와 인체가 생리적으로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미 오래 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Thales of Miletus, 생몰 미상)는 ‘물은 만물의 근원’이라고 결론지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는 물과 땅, 공기, 불과 더불어 네 가지 중요한 물질임을 갈파하였다. 또 일찍이 중국 전국시대의 논문집인 『관자(管子)』에서는 물을 일컬어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동양 철학의 주요 경전인 『주역(周易)』에서도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는 오행에서 물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또한 물을 생명과 인류 생성의 근원에 비유하는 것은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구약성서 창세기 첫머리에 “하나님의 신(神)은 수면(水面)에 운행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물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체에게 필요 불가결한 존재이다. 생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물질 가운데서도 물은 생물체 중량의 70내지 80%, 많을 경우 95%까지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생체 성분이며 인간의 신체도 3분의 2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
 
물은 인체에서 물질대사로 생긴 노폐물을 체외로 배출시키는 역할과 체내의 갑작스런 온도 변화를 막아 주는 등 여러 가지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물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면 여러 장애가 생긴다. 수분 부족이 지속되면 체내의 노폐물이 잘 배설되지 않기 때문에 독소가 체내에 쌓여 생명을 잃을 수도 있고, 신진대사가 순조롭지 못해 혈액의 농도가 짙어지므로 뇌경색 같은 병이 생기기 쉽다.
 
또한 물은 현존하는 물질 가운데 유일하게 바닷물, 강물, 지하수, 빗물, 온천수, 눈, 얼음, 수증기, 안개 등 액체·고체·기체의 모든 상태로 존재한다. 액체인 물이 지구 표면의 4분의 3을 차지하며 고체로 땅덩어리의 형태를 끊임없이 변화시켜 왔으며 이러한 순환을 통해 기후 변화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 가운데 우리 삶에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 지하수이다. 사람이나 동식물의 음료와 관개, 농업용수 등으로 사용하는데 우리가 ‘약수(藥水)’라고 부르는 물도 지하수에 포함된다.
지하수는 지표면 아래의 모든 공극에 차 있는 물로서 지층 구조에 따라 다른데 아주 세밀한 광물성 입자인 실트(silt)나 물과 만나면 점성을 띠는 점토는 50 내지 70%, 모래는 30 내지 40%, 잔 자갈층은 25 내지 30%, 굵은 자갈층은 20내지 25%의 공극을 갖고 있다.
 
자갈층보다는 실트나 점토층이 많은 공극을 가지고 있어 더 많은 양의 물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지하수의 대부분은 샘이나 우물에서 용출하는 가용 지하수가 아니라 실트나 점토 등에 붙어 있는 비가용 지하수로서 거의 쓸 수 없다.
 
우리가 식수로 사용하고 있는 수돗물은 강물 등을 정화하여 상수도를 거쳐 집의 수도로 연결된다. 그러나 도시화, 산업화로 물의 오염이 심해지고 도시의 상수도에 살균을 위해 염소를 많이 쓰게 되면서 국민들이 수돗물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예전엔 집 앞에 흐르는 도랑물을 그냥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맑은 물을 세계에 자랑하던 우리나라도 이젠 물을 수입하여 마셔야 할 정도로 수질 오염이 심해졌다.
 
‘삼천리금수강산’이라는 말을 쓰기조차 민망하게 되어 버렸다. 좋은 물은 우선 수온이 1년 내내 변함이 없고 냄새가 나지 않아야 하며 각종 미네랄과 용해성 무기질, 유리성 탄산가스를 알맞게 함유한 약한 산성이어야 한다.
 
인체에 해로운 균이나 유독한 성분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함부로 하지 않고 까다롭게 따지는 품천가(品泉家)들은 맑고, 차고, 부드럽고, 가볍고, 아름답고, 맛이 좋고, 냄새가 나지 않으며 탈이 없는 물을 최고로 쳤으며 이를 물의 여덟 가지 덕목이라 하였다.
 
 

 
기록으로 본 한국 고대 우물(井)의 역할
한국종교사연구회장·한국여성사학회장 문학박사 강 영 경
 
 
고대의 우물(井)이 제단과 관계되는 것을 살펴 볼 때 문헌에 나타난 우물을 찾아볼 수 있다. 문헌에 따르면 삼국사기(三國史記) 1권 시조혁거세조(始祖赫居世條)에 신라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 이성(二聖)의 탄생처가 우물(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문헌에는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대공(蘇代公) 망양산록(望楊山麓) 라정방림간(蘿井傍林間) 유마궤이시(有馬跪而嘶) 칙왕관지(則往觀之) 홀부견마(忽不見馬) 지유대란(只有大卵) 부지(剖之) 유영아출언(有嬰兒出焉)이라 하였다. 즉 양산 아래 라정(蘿井) 옆에 말이 울어 가보니 대란(大卵)이 있었다. 깨보니 어린 아이가 나왔는데 이가 혁거세 이다.
 
또한 알영(閼英)에 대해서도 동서(同書) 혁거세(赫居世) 5년조(五年條)에 춘정월(春正月) 용견어알영정(龍見於閼英井) 우협탄생여아(右脇誕生女兒) 노구견이이지(老嫗見而異之) 수양지(收養之) 이라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사양리(沙梁里)의 알영정(閼英井) 옆에 나타난 용의 옆구리에서 나와 우물의 이름을 따라 알영(閼英)이라 했다. 말이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고 용이 나타나는 이 우물은 보통의 우물이 아닐 것이다.
 
이성(二聖)이 탄생한 양산(楊山) 아래의 라정(蘿井)과 사양리(沙梁里)의 알영정(閼英井)은 개국 이전의 중심지인 육부(六部) 중급양부(中及梁部)와 사양부(沙梁部)에 있었던 우물이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라정(蘿井)에 신궁(神宮)이 설치되어 왕이 친사(親祀)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육부에는 각기 신성한 제단이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장소 중에는 우물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제단이 설치되어 제사가 거행되는 가운데 그 중에서도 유력했던 급양부(及梁部)와 사양부(沙梁部)에서 이성(二聖)이 출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이 신성한 우물에는 신궁(神宮)이 설치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9年(488)조에 춘2월(春二月) 치신궁어나을(置神宮於奈乙) 나을시조초생지처야(奈乙始祖初生之處也)라 하였다. 즉 나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설치하였는데 나을(奈乙)은 신라의 시조가 탄생한 라정(蘿井)으로서 국정(國井)이다. 국정(國井)에 설치된 신궁(神宮)에서 왕들이 즉위하여 친사(親祀) 하였다.
 
국가의 최고통치자로서 왕의 즉위식을 시조가 탄생했던 신성한 우물 제단의 신궁(神宮)에서 제사와 함께 거행하는 것은 뜻있는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라정(蘿井)은 본래 제사를 행하던 곳으로 생각되며, 아울러 알영정(閼英井)도 마찬가지로 생각하여 무리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물은 건국시조가 탄생한 신성한 곳으로서 제단이 설치되어 제사가 거행되며 국정(國井)으로서 신궁(神宮)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또한 왕이 사는 경성(京城)에도 궁정(宮井)이 있었다. 혁거세(赫居世)는 즉위 21년에 경성(京城)을 지어 금성(金城)이라고 하였는데 60년 9월에는 「이용견어김성정중二龍見於金城井中」하더니 갑자기 뇌우가 있어 성(城)의 남문(南門)에 벼락이 쳤다. 그리고 61년 3월에 혁거세(赫居世)가 승하(昇遐)하였다. 이때 알영(閼英)도 함께 죽었다.
 
이용(二龍)은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 이성인(二聖人)을 말한 것이며 궁정(宮井)인 금성정(金城井)에서 그 징조가 보인 것은 이성(二聖)의 죽음을 예시했던 것으로서 궁성(宮城)에 설치된 제단인 만큼 국가의 중대사인 왕훙(王薨)의 징조가 나타났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의 대사인 왕의 즉위와 승하에 관한 일이 국정(國井)과 궁정(宮井)의 우물을 중심으로 한 제단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기록은 삼국사기에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들의 공통점은 모두 한결같이 왕훙(王薨)을 사전에 예견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징조를 정제단(井祭壇)에서 제사장의 주제(主祭)로 신탁(神託)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왕훙(王薨)뿐만 아니라 내란이 일어날 때도 우물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혜공왕(惠恭王) 4년 6월에는 우물이 모두 말랐는데 한 달 후인 동년 7월에는 대공(大恭)의 반란과 96角于(각우)의 상전대란이 일어나는 곤란시기에 내란의 혼란스러운 정세가 우물의 물이 마른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신라 38대 원성왕이 된 김경신(金敬信)이 아직 角于(각우)로써 김주원(金周元)의 밑에 있었는데 복두(幞頭)를 벗고 소립(素立)을 쓰고 12현금(絃琴)을 들고 천궁사(天宮寺)의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이때의 입정(入井)이 입궁(入宮)으로 해석되었고 나중에 그는 왕이 되었다. 이것은 우물을 제단이 설치된 곳으로 볼 때 김경신(金敬信)이 천궁사(天宮寺)의 우물 제단에서 제사를 봉행하여 신탁에 의해 왕이 되는 선치권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성역으로서의 우물과 왕권의 신성을 나타내는 궁(宮)의 공통점이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왕궁(王宮)의 궁정(宮井)은 성역으로서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백제에도 이러한 궁정제단(宮井祭壇)이 있었다. 시조 온조왕(溫祚王) 25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포일(暴溢)하자 일자(日者)가 말하길 「우물물의 포일은 대왕의 발흥(勃興)할 징조」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마한을 배탄(拜吞)할 마음을 가졌으며 27년 4월에는 드디어 실천에 옮겼다. 또 백제 초고왕(肖古王) 39년 10월에는 동쪽 우물에 성패(星孛)가 나타났다. 이는 49년의 일이며 이 징조는 49년 10월의 왕훙(王薨)과 일치된다. 신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왕훙(王薨)의 징조가 우물에 나타난 것이다. 또한 백제가 멸망한 무렵인 의자왕(義慈王) 20년 2월에는 왕도(王都)의 우물물이 혈색(血色)으로 되었다. 그리고 동년 7월에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었다. 국망(國亡)의 예견이 왕도(王都)의 우물에 나타난 것이다.
 
백제의 초고왕(肖古王) 22년은 신라와 전쟁이 빈번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그 해 5월에 왕도(王都)의 우물과 한수(漢水)가 모두 메말랐다는 것은 신라와의 전쟁에 있어서 예시를 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23년 2월의 궁실중수 기사(宮室重修 記事)와 24년 7월의 신라와의 패전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즉 이는 전쟁하기에 앞서 왕도(王都) 우물 정단(井壇)에서 신탁(神託)하는 제사가 행하여졌는데 이때 패전(敗戰)이 예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고왕(肖古王)은 왕실을 중수하고 강행하여 전쟁을 치루었으며 결국 예시대로 패북(敗北)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 우물물에 얽힌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때 백제의 마지막 장군 계백(堦伯)의 결사대와 황산벌에서 마주했던 화랑 관창은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기에 앞서 「이수국정수음지以手掬井水飮之」한다. 단순히 물을 마시고 떠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물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볼 때 「掬井水」 하는 것은 신에게 기원하는 제사행위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황산벌 싸움은 백제의 국망과 직결된 전쟁이었으며 비장한 각오로 임하는 계백장군의 결사대에 직면한 신라로서는 그에 상응되는 정신력과 염원으로 임해야 했으며 그러한 염원이 출전하기에 앞서 거행된 우물 제단에서의 제사와 연결되어 그 표현이 「국정수(掬井水)」로 나타나 있다고 생각된다. 예부터 출사에 제사는 필수적이었으며 부여(扶餘)에서도 군사가 있을 때에는 하늘에 제사 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출전하기에 앞서 제사가 거행되는 것이 필수적 현상임을 볼 때, 그리고 우물이 제단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볼 때 관창이 생명을 걸고 출전하기에 앞서 「국정수」하는 것은 단순히 목을 축이기 위한 행위는 아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우물은 성역인 국정(國井)과 궁정(宮井)으로서 왕의 즉위와 왕훙(王薨), 내란이나 전쟁, 국망 등과 같은 국가의 대사에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이러한 징조를 사전에 예시하는 장소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프레이저의 『황금의 가지』에도 ‘도도나에 있는 큰 떡갈나무의 부리 밑에서도 정령(精靈)이 깃들어 있다는 샘물이 나오고 있으며 여사제(女司祭)들은 그 샘에서 신착(神託)을 들었다’고 하며 그리이스人은 성스러운 샘 또는 우물물을 한 모금 마시게 되면 예언(豫言)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한국민속에서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우물을 「堂우물」 또는 「堂샘」이라고 부른다. 당제(堂祭)라든가 동제(洞祭)를 거행하기 전에 당(堂)우물 주위에 황토를 쌓고 「인줄」이라고 불리우는 왼쪽으로 꼰 새끼에 군데군데 흰 종이를 끼운 금줄을 치고, 우물위에 뚜껑을 덮기도 한다. 이를 ‘물을 가둔다’고 한다. 그 물로 제주(祭主)가 제물을 마련하고 제사에 쓸 조라술(신께 드리는 헌주(獻酒)로서 단술이라고도 한다)을 빚는다. 제사에 쓸 음식은 꼭 「堂우물」을 쓰며 그 기간 동안에는 아무도 접근 못하고 제주(祭主)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 당(堂)우물은 마을의 공동우물이기도 하고 혹은 마을사람들이 일상생활에 쓰지 않는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기도 한다.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성덕리에는 세 그루의 당산나무가 1리, 3리, 4리에 각각 있는데 1리와 4리에는 당(堂)집은 없어도 당(堂)우물은 있다. 이러한 당(堂)우물은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데 적어도 제사준비 기간에는 아무도 그 우물을 사용할 수 없으며 제주(祭主)만 사용한다. 그 우물은 성수로서 제물을 마련하는데 사용되며 그 주위에 금줄을 치고 단을 쌓아 성역화하며 그곳에서 샘굿이 행하여졌다.
 
전북 남원군 서무리 서무마을에서는 정월 14일에 소나무 목신이 있는 당산에서의 제식(祭式)이 끝나면 제관이 제물을 들고 동네로 내려와 황토를 쌓아놓고 성역화 했던 공동우물 앞에서 진설(陳設)→분향(焚香)→헌작(獻酌)→배례(拜禮)→축문낭독(祝文朗讀)→소지소각(燒紙燒却)의 순서로 제를 지낸다. 이는 유교식 제례로 우물에 대한 토착신앙이 유교와 융화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도 샘굿은 지신밟기, 별신굿, 두레풍장, 대동굿, 성주굿 중에 행하여지며 기우(祈雨), 풍농(豐農), 매귀안택(埋鬼安宅), 피사진경(避邪進慶), 장수(長壽), 기자(祈子), 식수(食水) 등을 기원하는 의미로 전국에 걸쳐서 행하여지고 있다. 이러한 샘굿은 한국고대문헌에 나타나는 우물 제사와 연결될 수 있으며, 특히 우물 제단에서 행하여지던 신탁의 형태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다음과 같은 민속이 있다.
 
서울 답십리(踏十里) 도당(都堂) 당굿의 특이한 점은 도가(都家)를 선출하는 것인데 다음과 같이 행하여진다. 음력 9월 그믐날 새벽에 마을에서 이미 선출된 제관 6인이 당(堂)에 올라 신역(神域)안에 신정(神井)에서 조라(신의 헌주라는 이름으로 동이에 맑은 물을 떠 놓은 것)를 단(壇)에 놓고 하얀 종이(3㎝×3㎝)에 그들의 성명을 각각 7장씩 써서 왕팥(붉은색) 일곱 개를 하나씩 싸서 물에 띄워 가라앉지 않는 사람이 도가(都家)가 되는데 뜰 때까지 반복한다. 도가(都家)는 집사(執事), 제주(祭主), 제관(祭官)과는 다르며 제의사무(祭儀事務)로 부정(不淨)을 가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신역(神域)안의 신정단(神井壇) 앞에 설상(設床), 헌주삼배(獻酒三拜),고축(告祝), 소지(燒紙)로 제(祭)를 마치고 당(堂)굿으로 들어가 이튿날까지 마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여흥을 푼다. 굿 앞에는 앞전의 방법으로 선출된 도가(都家) 1인과 소임 5인외 다른 사람은 당(堂) 신역(神域)안에 출입을 절대 금하였다. 이것은 시대가 많이 떨어져 있고 한국 고대 문헌에 나타난 국가적인 규모의 제사와는 차이가 많이 있기 때문에 직접 연결시킬 수는 없지만 고대의 정제단(井祭壇)에서 거행되었던 신탁의 모습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한국고대 문헌과 현재 민속 중에서 나타나고 있는 우물이 제단의 성격을 띄고 있어서 제사가 거행되는 장소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우물에 대한 신앙이 불교가 유입되면서 문헌 속에 절 우물로 나타나고 있다. 불교가 왕실에서 받아들여지고 호국불교의 성격을 띠면서 국교라고 할만큼 일반에게도 성행되었다. 이리하여 삼국은 각기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외래종교인 불교가 토착신앙과 융화되어야 하는 것은 필수조건이었다.
 
 
신앙적 의미의 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물은 물리적인 위상이 아니라 정신과 감정을 지배하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위상이다. 오랫동안 수도작의 비중이 매우 높은 농경 생활을 해온 우리 민족에게 물의 가치는 매우 높았다. 시베리아 원주민 신화나 일본 신화 등 적지 않은 세계 신화들에서는 물을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의 첫 모태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것은 풍요와 생명의 원리로서 물이 가지고 있는 원형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베포도업침」이라는 제주도 천지개벽 신화의 첫머리인 “삼경개문도업(三更開門道業) 제일릅긴, 요 하늘엔 하늘로 청이슬, 땅으로 흑이슬, 중앙 황이슬나려 합수(合水)될 때, 천지인황 도업으로 제이르자”에서 보면, 우주의 이슬 기운이 모여 된 합수를 개벽의 계기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인이 가꾸어 온 물의 원형성은 신화에서 천지개벽의 계기가 된 원수(源水) 관념과 농경 생활에서 비롯된 풍요와 생명력의 원리가 상호 작용을 하면서 복합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에서의 천지개벽의 원수 관념은 후세의 각종 홍수 설화와 물에 관련된 태몽들에 그 자취가 남아 있으며 다시 강이나 바다를 죽음과 재생의 상징으로 형상화하는 작품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 「동명신화」에서는 동명왕의 어머니인 유화가 웅심연이라는 연못 출신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신라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알영정이라는 우물 출신인 것과 마찬가지이며 고려왕조의 여시조인 용녀 또한 개성대정(開城大井)이라는 우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우리 신화에 나타나는 여성성의 대표 격인 유화, 알영, 용녀는 한결같이 ‘물의 왕비’나 ‘물의 여시조’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물의 왕비’들이 물이 지닌 풍요와 생명의 원리 그 자체를 형상화하거나 인간적으로 구현한 것이라면 그들을 ‘물 할미’ 곧 ‘수고(水姑)’들과 같은 선에 놓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약수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샘이나 우물의 지배자라고 믿어 온 물의 여신이 물 할미이고, 이 물 할미를 물의 왕비 또는 물의 여시조의 원형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이렇듯 여성으로 상징되는 물이 생명 원리를 간직한 우물에서 신앙화한 사례는 후대에서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이런 신앙은 현재 약수터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각 약수터마다 이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어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나 소망의 돌탑이 약수터 주변에 즐비한 것 등에서 한민족의 무의식에 흐르는 심성을 살필 수 있다.
 
실제로 우리 민족은 풍요와 생명력의 근원인 물을 신성하게 여겼는데 고려 용녀와 관계된 개성대정을 신정(神井)으로 일컬어 정사(井祠)까지 갖추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물은 민간에서도 신앙으로서 큰 구실을 하였는데 생명력과 정화력, 풍요의 근원으로 섬겨지면서 독특한 종교적 기능을 발휘하였다. 사람들은 물의 생명력에 ‘약’이라는 말을 붙인 ‘약수’를 마시며 의술적인 치유력을 기원하였다.
 
물의 생명력이나 풍요함은 ‘용신’ 또는 ‘용왕’이라는 이름에서도 보이듯 용으로 표상되기도 하였다. 용이라는 짐승은 물에서 태어나 물을 관장한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당연하게 농경의 신으로 섬겨졌다. 오늘날에도 농부들이 논두렁에서 ‘용왕먹이기’를 하고 있는 것은 수신(水神)에게 풍요를 빌기 위해서이다. 각 약수터마다 용이 등장하는 전설이 많다. 이것도 약수가 용왕의 물로 관념화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물은 불과 함께 정화력을 갖고 있다고 믿어져서 부정을 물리치는 기능도 하였다. 바가지에 담긴 찬물을 세 번 흩뿌리거나 심마니들이 산삼을 캐러 떠나기 전에 목욕재계하는 행위는 대표적인 정화의 주술이다. 특히 정화수는 그 자체로 치성 드리는 사람의 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역사와 민속에서 나타나는 물
 
물에 바치는 제례의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의 제례에 대해 “언제나 삼월 삼짇날이면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였으되, 사냥한 사슴과 돼지를 하늘과 산천에 제사 올렸다”라는 기록이 있고, 신라의 제례로는 “삼산 오악과 그 밖의 명산대천을 나누어 크고 작은 제사를 올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에게 바치는 제례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정기적 제례였다. 국가에서 지내는 부정기적 제례에는 가뭄이들 때를 비롯하여 비상시에 지내는 기우제가 있었는데 왕이 직접 지내는 기우제는 강하(江河)뿐 아니라 연못에서도 이루어졌다.
 
산천에 국가적으로 올리는 제례는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전승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 “팔관(八關)은 하늘의 신령과 명산대천과 동신을 섬기기 위함이다”라고 한 것처럼 대규모 국가 행사인 팔관회도 부분적으로는 하천과 용신에게 제사 드리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의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산천에 올리는 제사의 등급을 나누지 않았으니, 나라 안의 명산대천 및 여러 산천을 옛날 제도에 의거하여 등급을 나누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여 산천에 등급을 매기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남·동·서해의 3해와 한강, 경기도의 덕진, 충청도의 웅진, 경상도의 가야진, 압록강, 평양강 등 6독에는 중사(中祀)를 올리고 경기도의 양진, 황해도의 아사진, 청천강 등에서는 소사(小祀)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산천단, 산천성황의 제도가 확립되고 하천 신 가운데 일부를 호국 신으로 섬기기도 하였다.
 
 
서사무가에서의 물
 
서사무가는 고대의 무속 제전(祭典)이 사라진 뒤에도 무속 신앙을 기반으로 전승된 신화이자 서사시이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서사무가가 역사가 흐르는 동안 어느 정도의 변모를 거쳤는가는 아직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민족의 원초적 우주관, 인간관을 이해하는 데는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된다.
 
민담이나 설화는 이름난 약수터 주변에서 흔하게 채록되는데 전국적으로 전승되는 서사무가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바리공주」에는 ‘신기한 약물’이라는 약수가 등장한다.
「바리공주」는 바리데기, 오구풀이, 칠공주, 무조전설이라고도 불리며 죽은 영혼을 위로하고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해 베풀어지는 지노귀굿, 씻김굿, 오구굿 등의 무속 의식에서 구연된다. 지금까지 「바리공주」는 20편 가량 채록되었는데 각 지역과 구연자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내용상의 큰 차이는 없으며 대체로 아래와 같은 서사 단락의 기본 골격을 공유한다.
 
옛날 임금 부부가 딸만 내리 일곱을 낳는다. 버림받은 막내딸은 천우신조로 잘 자라고 왕은 하늘이 내린 아기를 버린 죄로 죽을병이 든다. 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저승의 ‘신기한 약물’이 필요한데 만조백관과 여섯 딸은 모두 약물 구하는 것을 거절한다. 이때 버림받은 막내딸이 찾아와 약물을 구하겠다며 길을 떠나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한 끝에 저승에 도착한다. 막내딸은 약물 관리자의 요구로 고된 일을 여러 해 해주고 그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은 다음에야 겨우 약물을 얻어 돌아온다.
 
그러나 국왕은 이미 죽어 상여를 내가는 중이었다. 막내딸은 신기한 약물과 여러 신비로운 약초로 부친을 살린다. 이 공으로 막내딸 바리공주는 이승과 저승의 길을 인도하는 무신(巫神)이 된다.
 
이처럼 바리공주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길을 열어 죽은 이의 혼을 편안하게 인도하는 힘을 지닐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신기한 약물’ 때문이다. 한민족의 우주관과 인간관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서사무가 「바리공주」에 ‘신기한 약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에서 약수를 바라보는 한민족의 시선을 단편적으로 느낄 수 있다.
 
 
동의보감에 기록된 물의 종류
 
우리 선조들은 약수에 대한 집착이 강한 만큼 같은 물이라도 여러 종류로 세분하여 써 왔다. 특히 조선시대 의성(醫聖) 허준(許浚, 1546~1615)은『동의보감(東醫寶鑑)』의 「논수품(論手品)」에서 물을 33종으로 나누어 각각의 성질과 용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화수(井華水)
새벽에 제일 먼저 길어온 우물물이다. 성질이 순하며 맛이 달고 독이 없어서 구격(입, 양 눈, 양 귀, 양 코, 변 보는 두 곳을 이르는 인체의 아홉 구멍 )에서 출혈하는 것을 치료한다. 또 입 냄새를 없애고 안색을 곱게 하며 음주 후의 신열과 배탈을 다스린다. 이 물은 약을 다리고 개고 마시는 데 쓰며, 술이나 식초에 넣으면 그 음식이 썩지 않는다.
 
국화수(菊花水)
국화로 덮인 못이나 수원지의 물을 말한다. 일명 국영수(菊英水)라고도 하는데, 성질이 온순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중풍으로 마비된 몸, 어지럼증 등을 다스리며 풍기를 제거하고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보한다. 또 안색을 좋게 하고 오래 마시면 수명이 길어지며 늙지 않는다.
 
납설수(臘雪水)
동지 뒤 셋째 술일인 납일에 오는 눈이 녹은 물로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유행성 감기, 폐렴, 급성 열병, 유행성 전염병과 음주 후의 신열, 황달(급성 간염)을 다스리며 일체의 독을 풀어 준다. 또 이 물로 눈을 씻으면 충혈이 없어진다.
 
춘우수(春雨水)
정월의 빗물인데 그릇에 담아 두었다 약을 달여 먹으면 기운이 솟는다. 이 물을 부부가 각각 한 잔씩 마시고 합방하면 신효하게 잉태한다.
 
추로수(秋露水)
가을 이슬로 성질이 부드럽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조갈증(燥渴症)을 그치게 하고 몸이 가볍고 살결이 고와진다.
 
동상(冬霜)
겨울에 내리는 서리로 본질이 촘촘하고 독이 없다. 뭉쳐서 먹으면 음주 후의 열, 얼굴 붉은 것, 감기로 인한 코막힘 등을 다스릴 수 있다.
 
박(雹)
우박을 말한다. 장맛이 나쁠 때 두 되쯤 장독 속에 넣어 두면 맛이 좋아진다.
 
한천수(寒泉水)
좋은 우물물로 성질이 순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소갈증, 구역질, 열병과 이질, 임질 등을 다스린다. 산초나무 독을 풀어 주고 생선 가시 걸린 것을 내려가게 한다.
 
하빙(夏氷)
여름에 쓰는 얼음을 말한다. 성질이 대단히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어 열을 제거한다. 여름에 음식을 냉하게 하는 데에는 얼음을 쓰는 것이 좋다. 부숴서 먹으면 잠깐 동안은 상쾌하나 오래되면 병이 된다.
 
방제수(方諸水)
아침 이슬의 일종이다.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부스럼 독을 씻어주고 흉터를 없애며 옷을 빨면 잿물과 같은 작용을 한다.
 
매우수(梅雨水)
5월의 빗물을 가리키며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눈을 맑게 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좋고 어린이의 열과 목마름 병을 없애 준다.
 
옥류수(屋霤水)
지붕 위에 물을 뿌려 처마 밑에서 받은 물을 말한다. 옥류수로 개에 물린 상처를 씻고 옥류수에 젖은 흙을 개에 물린 상처에 바르면 바로 차도가 있다. 그러나 독이 많이 섞여 있으니 마시면 안 된다.
 
모옥의 누수(茅屋의 漏水)
초가지붕에서 흘러내린 물을 말한다. 운모(雲母, 널빤지나 비늘 모양의 규산광물)의 독을 없애므로 운모를 갤 때 쓴다.
 
옥정수(玉庭水)
옥이 묻힌 산골에서 흐르는 물로 성질이 유순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오랫동안 먹으면 몸이 윤택하고 부드러워지며 모발이 검어진다.
 
벽해수(碧海水)
바닷물을 말한다. 성질이 약간 따뜻하고 맛이 짜며 독이 조금 있다. 끓여서 목욕하면 가려움증과 옴을 낫게 하고 한 홉을 마시면 체하여 헛배 부른 것을 토하게 한다. 큰 바다 가운데 맛이 짜고 색이 푸른 것을 쓴다.
 
반천하수(半天河水)
대울타리 끝과 높은 나무의 구멍에 고인 빗물로 성질이 약간 찬 편이며 맛이 달고 독이 없다. 마음병과 귀신들려 앓는 병을 다스리고 귀신에 홀려 헛소리하는 것을 없앤다.
 
감란수(甘爛水)
냉수를 저어서 뜨는 물이다. 곽란(藿亂)을 다스리고 방광에 들어가서 장과 경련으로 인한 복통을 다스린다. 물 한 말쯤을 동이 속에 넣고 국자로 수백 번 저어 흔들어대면 물 위에 구슬방울이 무수히 뜨는데 그것을 떠서 쓴다.
 
순류수(順流水)
조용히 흐르는 물로 성질이 순하고 아래쪽으로 조용히 흐르므로 방광병을 다스리고 통변을 돕는다.
 
급류수(急流水)
물결이 뛰놀고 급하게 흐르는 물을 말한다. 그 성질이 급하게 밑으로 내려가므로 대변의 통변을 원활하게 한다.
 
역류수(逆流水)
파도를 일으키며 맴돌기를 많이 한 물을 말한다. 그 성질이 거칠고 거스르며 뒤집혀 흐르는 것이므로 가래를 많이 뱉는 증상에 약으로 쓴다.
 
천리수(千里水)
멀리서 흘러온 강물을 말한다. 성질이 유순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병후 허약을 다스리는 데 쓰이며 무수히 저어 약을 다리면 잡귀의 침범을 막을 수 있다. 큰비가 지나간 뒤의 강물은 산골의 뱀과 벌레 등 뭇 생물의 독이 따라 내려오므로 잘못 마시면 중독되는 수가 있으니 주의한다.
 
온천(溫泉)
따뜻한 물을 말한다. 모든 풍과 근육과 뼈의 경련, 피부의 버짐, 수족의 불수(不隨) 그리고 풍 맞은 사람과 옴 환자 등을 주로 치료하는데, 온천수로 목욕을 하고 나면 허하고 피곤해지므로 약과 음식으로 보해야 한다. 성질이 뜨겁고 독이 있으니 마시는 것은 피한다. 옴과 종기·부스럼 환자는 포식한 후 목욕을 하는데 이때 땀이 흐르면 물에서 나오기를 열흘쯤 계속하면 모든 종기가 다 낫는다. 끓는 유황 물은 모든 종기류의 피부병과 풍랭(風冷)을 다스린다.
 
냉천(冷泉)
차가운 물을 말한다. 편두통과 등이 차가운 병, 울화, 오한 등의 증세는 이 물로 목욕하면 잘 낫는다. 냉천의 밑에는 백반이 있어 물맛이 시고 떫고 차다. 7, 8월경에 목욕하되 밤에 하면 반드시 죽는다.
 
지장수(地獎水)
황토를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물을 그 속에 부어서 젓고 흔들어 혼탁하게 한 다음 한참 지난 뒤에 위쪽의 맑은 물을 뜬 것이다. 성질이 차고 독이 없으므로 중독되어 번민하는 것을 풀고 그 밖의 모든 독을 풀어 준다. 산중의 독한 버섯에 중독되면 반드시 죽고 또 단풍나무의 버섯을 먹으면 웃음을 그치지 못하고 죽는데 오직 이 물을 마셔야 낫고 다른 약으로는 구하지 못한다.
 
요수(遙水)
산골짜기 인적이 없는 곳에서 새 흙의 구덩이 속에 괸 물인데 비위를 고르고 식욕을 돋운다. 다른 말로 무근수(無根水)라고도 부른다.
 
장수(獎水)
좁쌀죽을 끓인 뒤 그 위에 뜬 맑은 물을 말한다. 성질이 미온하고 맛이 달고 시며 무독하다. 갈증을 멈추고 곽란과 설사를 다스린다.
 
생숙탕(生塾湯)
끓는 물 반 대접에 새로 길은 물 반 대접을 탄 것을 말한다. 맛이 짜고 무독하니 볶은 소금을 넣어서 한두 되 마시면 체한 것과 독기 있는 음식물을 토해내고 곽란기를 낫게 한다.
 
열탕(熱湯)
끓인 물을 말하며 성질이 순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곽란으로 근육이 뒤틀리는 증세를 다스리는 데 효험이 있다. 이 물은 많이 끓일수록 좋고 만약 반만 끓여서 마시면 창증(배가 부어오르는 증세)에 걸릴 위험에 있다.
 
마비탕(麻沸湯)
푸른 삼베나무 잎을 달인 물이다. 기가 여리고 허열을 빼내기 때문에 소갈증을 다스린다.
 
증기수(甑氣水)
시루뚜껑에 맺힌 물을 말한다. 이 물로 머리를 감으면 모발이 검어지고 윤기가 난다.
 
조사탕(繰絲湯)
누에고치를 달인 물로 뱀독을 다스리며 살충력이 있다. 끓인 탕을 마시되 고치 껍질 실을 달여 먹어도 효과가 있다.
 
동기(銅器)에 오른 김
구리 밥그릇에 밥을 담고 뚜껑을 덮어 두면 뚜껑에 맺혀 떨어지는 물을 말하며 악성 종기, 부스럼, 등창 등이 생긴다.
 
취탕(炊湯)
묵은 숭늉을 말한다. 하룻밤 지난 것으로 얼굴을 씻으면 안색이 없어지고 몸을 씻으면 버짐이 생긴다.
 
 

 
강진면의 우물과 샘
 
옥정리 옥정샘
 
옥정 샘의 위치는 현재의 마을뒤 도로중앙에 샘이 있었다. 이 우물은 강진면 옥정(玉井)마을 뒤에 있었는데 갈담리와 문방리간 도로를 개설하면서 없어진 샘이다. 당초 우물은 지금의 도로 중앙에 있었던바 형태도 지워져 위치도 불분명할 정도로 보이지 않으며 지금은 도로 위 약간 높은 곳에 다른 우물을 조성하여 마을에서 사용 중이다. 본래의 옥정 샘은 옥같이 물이 맑고 맛이 좋아 옛 사람들이 옥정이라 이름 지어 부르게 되었고 마을 주민 전체가 대대로 사용하여 왔으며 이로 인하여 마을 이름까지도 옥정(玉井)이라 하였다.
 
해방 후부터 시작된 운암댐이 1965년 12월에 준공되고 준공식장에서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운암댐은 구댐이 있어 부르던 이름이기에 다른 이름을 찾아보라는 지시에 따라 새로 조성한 댐의 마을 이름을 따서 옥정호(玉井湖)“옥정댐”이라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운암댐, 섬진강댐, 옥정댐으로 각자 편리한대로 부르고 있지만 행정용어상으로는 옥정호(댐) 으로 표기하여 부르고 있기에 비록 샘은 없어졌지만 옥정샘의 중요성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다.
 
 
신기 마을 우물
 
우물의 위치는 신기마을 백련 2길 38-2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청웅면 소재지와 인접된 마을로 백련산 영봉 아래 동쪽 산기슭에 상강진이란 마을이 원래 형성되었으나 마을이 전답과 멀리 떨어져 생활의 불편함을 느낀 후에 이곳에 터를 잡아 이동하여 신기리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 마을 한병순(79세)할머니 이야기에 의하면 집안에 우물이 있는 집이 서너 집 돼서 마을 공동우물은 이 우물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우물은 아래에서부터 돌로 축조한 구조이며 그 위에 콘크리트 흄관(지름 115㎝, 높이 134㎝)를 설치하여 위험을 방지하고 청결을 유지하기위하여 높이를 높였다. 예전에는 20여 호가 이 우물을 사용했는데 물이 적을 때에는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물을 차례로 길러 갔다고 한다. 정월보름 새벽에는 우물가에 떡도 하고 밥도 하여 짚 위에 올려놓고 불을 기름 또는 촛불을 켜고 가족들의 무사함과 많은 복을 주라는 소원을 빌기도 하였다. 우물에 불을 켜고 소원을 빌 때에는 물을 떠가지 못하게 했다.
 
 
백련 마을 아랫 샘
 
백련마을은 강진면의 주산이며 상징인 백련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 앞이며 2차선도로변 건너에 최근 국립임실호국원이 조성되어 전국에서 많은 국가유공자 가족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 마을은 호국원 앞에서 백련산 쪽으로 약500m지점에 조용한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백련마을에는 2개소의 우물이 있는데 위에 있다고 해서 웃샘, 아래에 있다고 해서 아랫샘 이라 부른다.
 
문종성(75세)씨의 말에 의하면 아랫 샘이라고 부른 이 우물은 예전에는 10여 호가 이용하였다고 한다. 원형으로 암반을 파내려간 형태이며 제일 바깥쪽만 돌로 석축을 쌓았다. 또한 우물이 낮아지자 4각 콘크리트 흄관(폭 153㎝, 길이 153㎝, 높이 90㎝)으로 우물 높이를 높였는데 지금은 우물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한 집만 모터펌프를 이용하여 우물물을 끌어다가 고추 씻기와 집안 허드렛물로 이용하고 있다.
 
 
백련 마을 윗 샘
 
백련 1길 119 집 앞에 있는데 마을 위쪽에 있다고 하여 윗거터 샘이라고 부른다. 이 우물은 암벽 안쪽을 파내려간 후 주위를 석축과 4각 콘크리트 구조물로 하여 규모는 너비 165㎝, 폭 150㎝, 깊이 180㎝, 수심 140㎝이다. 또한 위에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하여 우물을 보호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20여 호가 이 물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광역상수도가 들어오기 전에는 우물위에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하여 그 위에 물탱크를 올려 물을 품어 올린 후 간이 상수도 수원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3가구만 이 물을 사용하고 있다.
 
 
부흥리 가추래기 샘
 
이 우물은 강진면 부흥리 원 부흥마을 약간 뒤 김금순씨 집 앞 논 가운데에 위치하며 물이 맑고 수량이 많아 항상 넘쳐흐르는 우물이다. 일명 가추래기 샘이라고도 부르며 형태는 4각 콘크리트 구조물로서 너비 73㎝, 폭 73㎝, 깊이 320㎝, 수심 140㎝로 되어 있다. 이 샘은 겨울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따뜻함을 느끼고 여름에는 너무나 차가움을 느껴 주민들이 땀띠를 치료하는 샘으로 유명하다.
 
옛적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 우물을 식수로 사용하여 왔으며 특히 아낙네들이 물동이를 이용하여 물을 길어다가 식수와 생활용수로 써 왔던 우물이었다.
따라서 겨울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넘쳐흐르는 물로 빨래를 즐겨하던 샘이며 여름에는 차디찬 물로 몸을 씻어 피부염을 치료하였던 우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대문명에 자연속의 우물은 변화되어 마을 간이상수원으로 약 20여년간 사용하여 오기도 하였다. 지금은 광역상수도가 개설됨으로 이마저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우물은 계속 넘쳐흐르고 있어 이야기 속의 우물로 변하고 있다.
 
 
갈담 마을 우물
 
우물의 위치는 갈담 2길 21 집 앞이며 형태는 원형석축과 콘크리트 흄관으로 되어 있고 규모는 지름 135㎝, 깊이 260㎝, 수심 70㎝이다. 갈담 마을은 신라시대에 왕족인 박씨가 정착하게 되어 왕박골 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번창하였고 광주와 전주의 중간 역촌으로 삼례찰방 소속에 갈담역(葛潭驛)을 두었던 마을이다. 이 샘은 갈담 마을 중에서도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웃샘으로 불렀으며 원형으로 석축한 후에 콘크리트 흄관을 올려 우물 높이를 높였다.
 
천순임(83세) 할머니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20여 호가 이 물을 먹었다고 하며 날이 가물 때면 물이 부족해서 잠도 못자고 새벽에 물을 길어 먹었다고 한다. 우물물은 식수로만 사용하고 빨래는 우물 앞 개울가에서 하게 했다고 한다. 우물물이 맑고 물맛이 좋아 마을 사람들은 공을 들일 때 모두 이 우물을 떠다가 공을 들였다. 정월대보름 전날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접시에 기름을 넣고 우물 앞에다가 많은 불을 켠 후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갈담 마을 왕박골 우물
 
우물의 위치는 갈담 2길 11-1 집 앞이며 형태는 원형 콘크리트 흄관으로 되어 있고 규모는 지름이 105㎝이며 높이와 깊이는 측정할 수가 없다. 갈담 마을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 우물로 옛날부터 왕박골 샘이라고 불렀다. 두레박 우물로 20여 호가 이 물을 이용하여 왔는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멀리서도 물을 길러 왔다고 한다. 지금은 상수도시설로 인하여 우물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오래 보존한다는 차원에 우물 덮개를 철판으로 덮고 쇠줄로 우물과 연결해 놔서 안쪽은 확인할 수 없었다.
 
 
이목 마을 우물
 
우물의 위치는 이목리 부흥 2길 38 집 앞이며 우물의 형태는 원형 콘크리트 흄관으로 되어 있고 지름 110㎝, 깊이 165㎝, 수심 75㎝로 되어 있다. 이목 마을은 1664년(현종5년)경 김해 김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 하였으며 큰 배나무가 있어 마을 이름을 배나무실 즉 배남실 이라 하였다. 그 후 한자음으로 이목리(梨木里)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 우물은 마을 위에 있다고 해서 웃뜸샘, 또는 윗거터 샘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20여 호가 이 우물을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한 집만 이 물을 사용하고 있다. 최봉덕(62세) 할머니 말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공동 우물이 아랫마을에 하나, 윗마을에 하나가 있었는데 아랫마을 우물은 메워지고 지금은 이 우물만 남았다고 한다. 예전에는 물의 량이 많았으나 우물 옆으로 하천 공사를 한 후로 물이 따라 나갔는지 지금은 물이 많이 부족해졌다고 한다. 바가지로 떠서 먹는 우물로 정월대보름 날에는 꼭 샘굿을 쳤으며 소원을 빌며 우물에 동전도 던졌다고 한다.
 
 
오두목 가운데 샘
 
우물의 위치는 회진리 66 정영모씨 집 옆에 있는데 원형 콘크리트 구조로서 규모는 지름 145㎝, 깊이 115㎝, 수심 110cm로 되어 있다. 회진마을은 동래정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마을 이름은 바위가 까마귀 머리와 같다 하여 오두목이라 불렀다. 이명월(85세) 할머니 말에 의하면 마을 한가운데 있다고 가운데 샘이라고 불렀던 이 우물은 예전에는 40여 호가 이용하였다고 한다.
 
우물 바닥은 암반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샘 주위는 콘크리트로 정비하였다. 겨울에 우물물을 떠서 얼음에 부으면 얼음이 녹을 정도로 물이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다. 동래정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외지 사람들이 잘 적응을 못했는데 예전에 아픈 사람이 오두목 마을로 이사를 와서 살면서 이 물을 먹고 병이 나아 또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나갔다고 한다. 지금도 두 집에서 모터펌프를 설치하여 식수로 사용하고 있고, 빨래와 허드렛물로도 사용하고 있다. 정월대보름날에는 꼭 샘굿을 치고 정월보름 전날에는 할머니들이 기름을 이용하여 불을 켜고 공을 들이기도 하였다.
 
 
오두목 보통굴 샘
 
위치는 오두목에 있으며 원형 석북으로 되어 있고 규모는 지름 150㎝, 깊이 80㎝, 수심 50㎝로 되어있고 보통 굴에 있다고 하여 보통굴 샘이라고 불렀던 이 우물은 예전에는 20여 호가 이용하여왔다. 이명월(85세) 할머니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이 우물이 가운데 샘보다 더 물맛이 좋았다고 하며 지금은 한 집만 이 물을 이용하고 있다. 이 우물은 마을이 생기면서부터 있었던 샘으로 보고 있으며 한때는 마을 가구 수가 많아 새벽에 물을 일찍 길러 와야 되는 현상이 벌어진 때도 있어 조금 가뭄에는 물이 부족한 편이라고 한다.
 
 
수방 마을 우물
 
수방마을은 옥정댐에서 2차선 도로를 따라 위쪽으로 3km정도 올라가면 옥정마을을 지나 길을 따라 도로를 타고 가게 되면 맨 끝에 있는 마을이다. 우물의 위치는 옥정호로 978 마을회관 뒤이며 형태는 원형, 석축으로 되어 있다. 규모는 지름 190㎝, 깊이 120㎝, 수심 70㎝로 되어 있다. 수방 마을은 김 씨라는 사람이 국법에 위배되자 살 길을 찾아 하늘만 보이는 이곳 수방리를 찾아 정착하였다고 한다.
 
전복순(81세) 할머니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마을 전체 주민들(40여호)이 우물을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허드레물로 한집에서만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마을 전체로 보면 물이 많음을 알 수 있고 마을 뒤로 조금가면 옥정호수가 한눈에 펼쳐 보인다. 정월대보름에는 샘굿도 치고 보름 전날에는 기름불에 불을 켜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산막 마을 우물
 
옥정 댐에서 옥정리를 가기 전 옥정호 여수로 현장에서 우측으로 들어가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산막마을이 나온다. 문방리 산막마을에 있는 우물은 4각 석축으로 되어 있고 규모는 너비 85㎝, 폭 85㎝, 깊이 97㎝, 수심 60㎝이다. 이 마을은 산이 병풍처럼 우뚝하게 둘러쳐진 모양으로 산수가 아름답고 양지 바른 곳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한편 조선조에 강진면 에서는 산막실에서 처음으로 참봉 어른이 나왔다고 전한다.
 
이 마을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우물이 오동신씨 집 옆에 하나 있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이 유일하게 사용하였던 우물이다. 한편 이 마을 공동 우물은 예전에 약 20여 호가 이용하였는데 지금은 이용하지 않고 다만 마을회관에서만 이 물을 연결해 이용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아직도 간이상수도가 설치되지 않아 대부분 주민들은 산에서 내려오는 건수를 호스로 연결하여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필 마을 우물
 
우물의 위치는 마을 앞 개울가 건너편에 있으며 형태는 4각 콘크리트 구조물로 되어 있고 규모는 너비 220㎝, 폭 180㎝, 깊이 160㎝, 수심 60㎝이다. 이 마을은 동쪽에 있는 산이 암소 같은 형국이고 마을 위치가 외양간과 같다 하여 중방리라 하였으나 상·하 마을간 호칭관계로 원님께 소송을 제기하여 원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이 상 중방이 되었다고 하며 그 다음 마을은 하 중방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마을 서쪽에 우뚝 솟아있는 산이 붓과 같다 하여 필봉(筆峰)이라 하였고 상 중방을 상필 마을이라 하였고 하 중방을 하필마을이라 개칭 하였다. 따라서 상필 마을 개울가에 위치한 우물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먹고 살았던 우물로 바가지로 떠서 먹는 우물이다. 이 마을 곽야순(76세) 할머니에 의하면 마을에 시집 와서 보니 정월대보름이 오기 전 마을 전체 주민들이 나와서 우물물을 모두 품어내고 우물 안을 청소하면 우물에서 뱀장어 모양의 물고기가 나왔다고 한다.
 
옛날 마을 어른들은 이 뱀장어 같은 물고기가 샘물 구멍을 뚫어준다고 믿어 우물 청소가 끝나면 다시 우물에 넣어줬다고 한다. 국가무형유산 11-5호인 임실필봉마을의 발상지인 이 마을은 아직까지 정월대보름 날이면 마을 굿과 함께 당산제를 크게 치고 있으며 이 우물에서도 샘굿은 그치지 않고 이어오고 있다. 마을에서 샘굿을 치기 전 구음(口音)은 다음과 같다. “아따 그 물 좋구나! 아들 낳고 딸 낳고, 미역국에 밥 마세”라고 소리하였다.
 
 
하필 마을 찬샘
 
찬샘의 위치는 필봉길 60 집 옆에 있으며 형태는 원형, 석축으로 규모는 지름 150㎝, 깊이 50㎝, 수심 40㎝로 되어 있다. 하필마을은 고려조 시대에 너먼 터라고 하는 마을이 지금의 하필마을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당시 도둑이 어찌나 많은지 마을 사람들이 살 수가 없어서 ‘강성수’라는 사람을 필두로 지금의 하필마을에 터를 잡아 온 마을이 옮겨졌다고 한다. 강병헌(57세)씨 말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원래 우물이 4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의 제일 위에 있었던 우물과 마을 중앙에 있던 우물은 메워져 없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 남아있는 우물 중 마을 서쪽에 위치해 있는 이 우물은 물이 차다고 ‘찬샘’이라고 불렀는데 예전에는 약 17여 호가 이 물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마을 아낙네들은 정월대보름이 돌아오면 이른 새벽에 우물가에 기름으로 불도 켜고 저녁에는 샘굿도 빠지지 않고 쳤다고 한다.
 
 
하필 마을 헛샘
 
헛샘의 위치는 필봉길 53 집 뒤편이며 형태는 4각 콘크리트 구조물로서 규모는 너비 220㎝, 폭 220㎝, 깊이 130㎝, 수심 60㎝로 되어 있다. 하필마을 앞에는 작은 동산이 있는데 마을을 보호해주는 비보(裨補)숲이 있다. 이 숲에는 임실군에서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크기가 보통이 아닌 보기 드문 참나무와 느티나무 4그루가 자라고 있어 보호수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우물은 하필마을 2개의 우물중 하나로 미나리 깡 밭 위에 있다고 하여 미나리 깡 샘 이라고 불러지는 이 우물은 일명 헛샘 이라고도 불러지고 있다. 마을 서쪽에 함께 있는 찬 샘에 비해 물맛이 좋지 않아서 평상시에는 잘 사용하지 않다가 가뭄이 와서 물이 모자랄 때에는 이 우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방현 마을 우물
 
우물의 위치는 방현길 61-11 집 뒤이며 우물의 형태는 4각 콘크리트 구조물로 되어 있고 규모는 너비 80㎝, 폭 70㎝, 깊이 70㎝, 수심 30㎝이다. 이 마을은 천안 전씨(전명열의 6대조)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뒷산에 있었던 성좌암에 어진 선비가 찾아왔다 하여 방현리라 칭하게 되었다. 전백엽(58세)씨 말에 의하면 원래는 마을에 공동 우물이 3개 있었는데 2개는 메워지고 지금의 우물만 남아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마을 위쪽 7~8여 호가 이 우물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백련산 아래 작은 계곡이 있어 마을 위쪽에 폭포가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율치 마을 우물
 
우물의 위치는 학석 3길 16-13이며 형태는 4각 콘크리트 흄관으로 되어 있고 규모는 너비 98㎝, 폭 98㎝, 깊이 100㎝, 수심 35㎝로 되어 있다. 이 마을은 강진면과 하운암의 경계에 위치한 마을로 장수 황씨(황의동의 6세조)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 지명은 하운암으로 넘어가는 재가 있는데 이 재를 밤재 라고 부르며 마을 이름을 한자화 하여 율치(栗峙)라 하였다.
 
이의남(73세)씨에 의하면 원래 마을에는 우물이 2개가 있었는데 개울가 옆 우물은 메워지고 지금 우물만 남았다고 한다. 마을 제일 위쪽 개인 집 앞마당에 위치한 이 우물은 예전에는 약 30여 호가 먹었다고 하며 물이 딸릴 때는 새벽에 사람들이 와서 줄을 서며 물을 떠갔다고 한다.
 
 
백여 마을 우물
 
우물의 위치는 용수 1길 89이며 형태는 4각 콘크리트 구조물로서 규모는 너비 100㎝, 폭 110㎝, 깊이 70㎝, 수심 50㎝로 되어 있다. 백여 마을은 회문산 줄기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 중턱에 마을을 이루고 있다. 박도순(83세)할머니에 의하면 이 마을은 토질이 좋아 옛 부터 밭을 일구어 살았으며 담배 농사와 삼베 농사가 주 작목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마을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하루에 천냥이 나가고 천냥이 들어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한편 예전에는 마을 가구 수가 100여 호에 이르렀으며 주변에서는 상당히 큰 마을이었는데 6·25 전쟁 중에 마을에 큰 불이 난 후부터 마을 사람들이 이사를 많이 나갔다고 한다. 이 마을에도 중요한 우물 하나가 있는데 마을에서 전제가 이 우물을 먹었으며, 일부 사람들의 경우 산속에서 내려오는 깨끗한 계곡물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 우물 역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이 우물은 가뭄에도 절대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백여마을 도구통 샘
 
계곡에서 자연적으로 물이 흐르다가 중간의 파인 곳에 물이 고여 있어 이곳은 도구통 샘이라고 부른다. 예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물을 많이 이용하여 생활용수로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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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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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