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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임실의 재실
◈ 대정리 영모재(永慕齋)
이 재실은 오수면 대정리 대말 마을 안 서쪽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네 귀에 추녀 받침이 있고 마루 방문 위 양쪽에 영모재(永慕齋), 추원실(追遠室)이라 새긴 편액이 있다. 문간(1칸)은 4307년(1974)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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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리 영모재(永慕齋)
 
이 재실은 오수면 대정리 대말 마을 안 서쪽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네 귀에 추녀 받침이 있고 마루 방문 위 양쪽에 영모재(永慕齋), 추원실(追遠室)이라 새긴 편액이 있다. 문간(1칸)은 4307년(1974)에 세웠다. 전주 이씨 칠산군파조 이담손(李聃孫)의 재실인데 원래는 그가 서재로 지었다고 한다. 재실 안에는 현판 3개, 주련이 2개 걸려있다.
 
 
 
 

1. 대정 영모재삼가 차운하다(謹次)

 
自先榮久數椽成  선영에 서까래 몇 개를 올린 후부터
白首殘齡倍感情  흰머리 남은 여생이라 그 느낌은 배가 되네
履露169)春秋將祀事  선조를 기려 봄가을로 기제사를 모실 것이고
講꓌冬夏讀書聲  여름과 겨울에는 책 읽는 소리
滿山松170)檜經年蔭  산에 가득한 소나무는 일 년 내내 그늘을 드리우고
一砌芝蘭向日榮  섬돌의 지초와 난초는 해를 향해 피어나네
却把吾宗園會誼  또다시 우리 종친들이 둘러모여 의논하기를
承承敬守戒餘生  대대로 공경으로 보존하고 여생을 경계하자 하였네
 
불초손(不肖孫) 회인(會仁)이 삼가 적다.
 
 
 

2. 대정 영모재 추모재기(追慕齋記)

 
옛날 우리 15대조 효령대군 정효공(靖孝公)께서는 우중(虞仲)의 지극한 덕이 있으셨다. 그 후손 삼대째에 봉군이 되어서 일가를 이루고, 번창하여 이어지니, 청사에 빛나도다. 우리 6대조 휘 선명공(善鳴公)께서는 벼슬을 즐겨하지 않으시고, 한양에서 남원 견소곡방(見所谷坊) 옥전리(玉田里)에 은거하여 수년을 거주하시고 돌아가신 후에는 마을 동남쪽의 문덕봉 바로 위의 지맥, 즉 산줄기 서쪽 산자락 끝 묘좌(卯座)에 묻히셨다. 그 아들 휘 위공(煒公)께서는 가학을 몸으로 익히셨으며, 옥전리에서 둔덕면 대야촌으로 이거하였고, 이로인해 대야촌 뒷산에 묻히셨다.
 
신유년 가을, 우리 할아버지인 처사 복흥공(復興公)께서 비로소 석물과 제전(祭田)을 갖추었다. 무술년 겨울, 집안 어른이 불초(不肖)에게 묘각을 세울 것을 의논하면서 먼저 희망을 보이시니, 불초가 종숙과 여러 제종씨들에게 아뢰었다. 계획에 또한 모두들 찬성하여 마침내 세천(世阡)의 아래쪽에 한 곳을 정하고, 조만간에 재료를 모으고 인부를 모았다. 그리고 두 해를 보내고서 공사가 끝났다. 낙성하는 날, 불초가 외람되이 좌중에게 한 말씀을 아뢰니, “대개 듣자하니, 선조를 섬기는 일은 처음은 어려워도 그 끝은 좋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문의 재실이 처음 보았을 때 다 넘어갈 듯한 걱정이 있었는데 이제 재실 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비록 제가 못났지만, 참여할 만한 힘도 없다고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이후에 재실을 짓는 어려움이 지금 짓는 것보다 덜하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크게 견디는 방법은 다만 정성(誠)에 불과할 뿐이다. 일단 정성이 있고 나면, 온갖 사물이 다 통하니 하물며 선조를 사모하는데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선조의 영혼께서 기꺼이 우리에게 후손이 있다고 하시겠는가. 오직 우리 이씨가 대대로 정려를 생각하며 게을리하지 말라”고 하니, 노소가 모두 “옳은 말이다”고 하니, 마침내 현판에 써 놓는다.
 
신축년 가을 8월
오대손 홍릉참봉 면우(冕宇)가 삼가 쓰고
사손 인의(寅儀) 문장(門長) 회인(會仁) 유사[有] 용의(龍儀)
 
 
昔 我十五世祖 孝寧大君 靖孝公 有虞仲之至德171) 其後三世封君 恪守 繼別爲宗172)之義 舃奕蟬聯 照輝靑史矣 惟我六世祖 諱善鳴公 不屑仕宦 自京占遯于南原見所谷玉田里 而幾年居 卒後 因葬於本里東南文德峰直上脉 卽岐下西麓 盡頭處 卯坐原 而其子諱煒公 服習庭訓 自玉田搬居于屯德面大也村 因葬于村之後阡 辛酉秋 我祖考處士復興公 始具石物與祭田
 
戊戌冬 家伯命不肖 擬議刱墓閣 以有先訓希望也 不肖 白于從叔與諸再從氏 謀亦懸合 遂卜地于阡下 不日鳩材集工 然凡再閱歲而功告訖 落之日 不肖 叨以一語諗于座
 
曰盖聞之前輩事之 其初難者其終也好 吾門之丙舍 以其始觀之慮 有竭蹶之患 今旣了役 雖不肖無狀 不可謂不與有力焉 以後 嗣葺之難 不下於今者之刱建 大耐其難之道 不過曰誠而已矣 一誠立矣 百物皆通 況慕先而不用誠則 先祖之靈 其肯曰余有後乎哉 惟吾李 世世念旌而毋怠焉 老少咸曰有是哉言乎 遂書于楣上云爾
 
歲在辛丑秋八月日
五代孫 弘陵參奉 冕宇 謹記
時嗣孫寅儀 門長會仁 有 龍儀
 
 
扁題追慕此齋成  이 재실이 완성되고 ‘추모’라고 편액하니
幾度商量苦用情  그간 고생한 생각에 그 얼마나 감개무량한가
洞府有光新構制  새로이 지었으니 동네에 빛이 되고
雲仍須繼古家聲  모름지기 고가의 명성이 구름처럼 피어나리
楸松鬱立千年卜  송추 울창히 섰으니 천년은 갈 복스러운 곳이요
山水奇羅萬世榮  산수가 기이하고 아름다우니 만대의 영화 이룰 곳이라
讌會多兼花樹樂  연회마다 화수의 즐거움을 대부분 겸했으니
緊要非我一平生  내 한 평생 이보다 더 바랄게 없네
 
 

3. 대정 영모재기

 
우리 효령대군 정효공의 휘는 보(補)이고, 둘째아들 서원군 이안공의 휘는 친(친:立/木)이고, 다섯 째 아들 고림군의 휘는 훈(薰)이다. 첫째아들 자산군의 휘는 선손(璿孫)이다. 육세손 충의위의 휘는 선명(善鳴)으로 처음 대방부[남원] 견소곡방 옥전리로 남하하였다. 후손인 사복시정 휘 위(煒)는 둔덕 대촌에 이거하였다. 이곳에 거주한 지 백여 년간에 후손들이 보잘것 없다 할 수도 없고, 또 번성하였다고 할 수도 없다. 분암(墳菴)을 세울 것을 도모한 지가 오래되었음에도 아직 완수가 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어째서인가.
 
다행이 무술년 겨울 우리 선백(先伯)께서 한 말씀을 하시니, 모든 사람의 의견이 똑같은 것이 마치 그림자가 서로 응하는 것 같았다. 가장 어려운 일은 터를 잡는 것인데, 사중이 밭 한자락을 종중에 출의(出義)하였다. 재목도 예비한 것이 없고, 재화도 모으기가 어려워서 당숙에게 아뢰니, 숙계(塾契)에서 재목 일체를 출력(出力)하니, 얼마 되지 않아서 준공되었다. 한번의 분란도 없이 그 성공을 아뢰니 모두들 우리 가문의 돈독하고 화목함을 깨닫게 되었다.
 
오직 한이 되는 것은 재실이 준공되기 전에 사백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준공을 보지 못하셨으니, 지하의 잠들지 못한 영혼이 혹시나 천대에서 빙그레 미소 짓지 않겠는가.
 
후대 사람들이 우리 사백과 사중이 행한 마음처럼 마음을 먹는다면, 대대로 지켜서 후손이 끊이지 않으면, 천년만년 지붕을 이어서 거의 이 재실이 썩지 않을 것이다. 오직 바라건대 우리 종중이 조상을 사모하기를 열심히 해야 한다.
 
기미년 중추에 오대손 형우(馨宇)가 쓰다.
 
 
惟我
 
孝寧大君靖孝公諱補 第二子瑞原君夷安公諱(친:立/木) 第五子高林君諱薰 第一子恣山君諱璿孫 六世孫忠義衛 諱善鳴 始南下于帶方府 見所谷玉田 嗣子 司僕寺正 諱煒 移居于屯德大村 居于玆百馀年之間 雲仍173)不可謂瑣尾174) 亦不可謂敷榮也 營建墳菴者久矣 猶未遂誠何
 
幸戊戌冬 惟我先伯創出一言 僉意詢同 如影相應 㝡難者基址也 舍仲175)遺來田一座 出義宗中 而材無豫備貨難鳩聚 故禀于堂叔 塾契貿材一齊出力 不日竣工 一無圭角176)而告厥成功 儘覺 吾門之敦睦也
 
惟所恨者畢役之前 舍伯棄世 未覩 其於地下不昧之靈 或喜莞爾于泉臺177)歟 後之人 以吾伯仲之心為心 世守勿墮嗣 而葺之於千萬年 庶此室之不朽矣 惟願吾族 極其永慕勉旃哉
 
 
幾世營來此室成  몇 백년만에 이 재실을 완성하니
分勞誠力永追情  정성을 모으고 수고를 나누어 영원토록 선조를 사모하네
金枝日滿常多實  후손들이 날로 번성하여 늘 자손이 많이 있고
花樹春濃繼有聲  가문이 봄날 새싹처럼 우거져서 명성을 이으리라
誡後敦宗應裕福  후손들에게 훈계하면 응당 복이 넉넉할 것이고
仰先陰德必為榮  선조의 음덕을 우러르면 반드시 영화가 있을 것이라
伯何早逝身全老  선백께서 어찌 일찍 가시고, 나만 온전히 늙어있어
只恨當年共不生  올해 함께 살아서 함께 누리지 못함을 한탄하네
 
기미년 중추에
오대손 형우(馨宇)가 쓰다.
 
 

 
각주
169) 이로(履露) : 선조를 사모한다는 뜻. 《예기(禮記)》제의(祭義)에 “봄에 이슬이 내리면, 군자는 성묘하고 반드시 슬픈 마음을 갖는다.” 하였다.
170) 송추(松楸)의 꿈 : 송추는 부모의 분묘를 가리킨다. 따라서 송추의 꿈은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립다는 뜻이다.
171) 우중의 지극한 덕(虞仲之至德) : 주나라 태왕인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큰 아들 태백(太伯)과 둘째아들 우중(虞仲) 그리고 막내 계력(季歷)이 있었다. 막내인 계력은 어진 아내를 만나 아들 창(昌)을 낳았다. 창은 낳을 때부터 상서로운 일이 있고, 자라면서 특히 영특하였다. 고공단보는 막내 계력에게 후사를 물려주고 싶었다. 이런 아버지의 생각을 헤아린 태백과 우중은 남쪽에 있는 형만(荊蠻: 오랑캐 땅)으로 가서, 몸에 문신을 하고, 상투를 잘라서 태자의 자격을 버렸다. 이 일을 두고 공자는 태백과 우중이 지극한 덕(至德)이 있다고 칭송했다. 양녕대군 사당의 이름이 지덕사(至德祠)이다.
172) 계별지종(繼別之宗) : 별자(別子). 즉 공자(公子)로서 제후국의 시조가 되어 대종(大宗)이 됨을 말함.《禮記 大傳》
173) 운잉(雲仍): 팔대손(八代孫)인 운손(雲孫)과 칠대손(七代孫)인 잉손(仍孫)을 아울러 이르는 말. 먼 후손을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174) 쇄미(瑣尾): ‘시경’에서 취한 말로 “무엇보다 누구보다 초라한 것은 여기저기 객지를 떠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175) 사중(舍仲) : 가운데 동생을 말함. 사계(舍季)는 막내동생.
176) 규각(圭角) : 말이나 행동이나 뜻이 모가 나서 남과 잘 화합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
177) 천대(泉臺) : 구중(九重)의 땅 밑이라는 뜻의 구천(九泉)과 같은 말로, 죽은 뒤에 넋이 돌아간다는 곳을 말함. 일명 저승이라고도 함. [유사어] 천경(泉扃). 천양(泉壤). 황천(黃泉).
【향토】 임실의 재실
• 대정리 저존재(著存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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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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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