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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동명왕 ◈
◇ 왕업(王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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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2월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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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업(王業)
 

1

 
3
무돌의 인도를 받은 주몽의 군사는 저녁을 먹고 나서 질풍같이 모둔골을 향하고 몰아 왔다. 모둔골이 내려다 보이는 두텁고개에 다다랐을 때에는 훤하니 먼동이 텄다.
 
4
주몽은 여기서 군사를 머물러 아침을 먹고 잠간 졸고 쉬게 한 뒤에 음술물 아랫목을 막을 부대와 거기와 모둔골의 중간을 지킬 부대를 먼저 떠내어 보내고 모둔골 시가를 엄습 할 주력 부대는 더 오래 머물러 넉넉히 쉬게 하였다. 군사들은 개잘량을 깔고 덮고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흠씬 자게 하였다. 격렬한 전투 준비를 함이었다. 주몽도 말 안장에 기대어서 쉬고 있었다. 그도 개잘량 하나를 깔고 하나를 덮었다.
 
5
주몽은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거처하는 것이나 부하 장졸과 똑같이 하였다. 어디서 큰 도적의 굴을 쳐서 많은 재물을 빼앗아도 많은 계집을 빼앗아도 제 주인을 찾아 주고, 남은 것은 모조리 부하에게 골고루 나눠 주고 자기는 하나도 가지는 일이 없었다. 주몽이 위에서 이렇게 하기 때문에 아래 있는 사졸도 무엇이나 좋은 것이 있으면 「우리아기」, 「장군마마」께 갖다 바치는 것이었다. 가을 산길에 굵은 아람을 주워도, 익은 머루 한 송이를 얻어도 그것을 주몽에게 바쳐 조금이라도 입에 대었과져, 손에 들어 한번 보기라도 하였과져 하는 것이었다. 인제 겨우 스무 살 갓 넘은 소년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돌아 갈까, 하고 나 많은 부하들은 더욱 주몽을 존경하여서 하늘이 내인 양반이라고 마음으로 입으로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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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양으로 주몽아기를 위하여서는 죽어도 좋다는 사람이 지난 이태 동안에 만명도 넘을 것이다. 동부여 사람, 말갈 사람, 졸본부여 사람 할 것 없이 한번 접한 사람이면 주몽을 사모하였다. 누가 보기에나 주몽은 제 욕심이 없이 나를 위하니 어찌 아니 사모하랴. 제 힘과 제 수고로 얻은 것을 아낌 없이 다 나눠 주니 어찌 아니 따르랴. 높고도 교만치 아니하니 어찌 아니 정이 들랴. 행군하다가 곤란할 지경을 당하는 때도 많았으나 주몽이 자기네와 똑 같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졸들은 마음이 든든하였다. 장군 주몽이 같을 것을 먹는다 하면 날도토리를 씹어도 꿀맛이 나고, 눈 위에 몸이 얼 때에도 주몽아기도 똑같이 언다 하면 도리 어 황송하였다. 이렇게 이년 동안에 정 들이고 길 들인 수 만명 사졸은 지나 온 천리 길에 곳곳에 흩어져 있어, 사람을 대하는 대로 주몽을 칭송하면서 아무 때나 주몽을 위하여 일어날 날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7
이처럼 큰 인심을 얻은 것이 물론 주몽 혼자의 힘이 아니요, 오이·마리·합보의 도움이 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주몽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나 세 사람에게 물었고, 세 사람이 하자고, 또는 말자고 진언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귀담아 들었다.
 
8
「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을 주몽은 몸소 행하는 것이었다. 무엇이나 물어, 무슨 말이나 귀 기울여 들어, 좋은 일은 내세우고 나쁜 말은 못 들은 체, 이곳저곳 양쪽 말을 다 들어서 그 중간을 백성에 쓴다는 것이다. 천하의 말을 다 들어 만민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삼으려는 것이 큰 임금 주몽의 뜻이었다.
 
 

 
 

2

 
10
주몽도 몸의 피곤을 느껴서 한잠을 자고 싶건마는 이 날은 도무지 잠이 들지 아니하였다. 적과 싸우기 몇 천 번이라, 닥친 싸움일래 잠을 못 잘 주몽도 아니언마는 이날은 이상 하게도 생각이 많이 일어나서 억제할 수가 없었다.
 
11
안장에 기대어서 눈을 뜨면 별 반짝거리는 새벽 하늘이 있었다. 먼동이 터서 동쪽이 훤하면 도리어 다른 쪽은 잠시 더 어두워지는 그러한 때였다. 한없이 멀고 깊은 검은 하늘에 지극히 깨끗한 빛을 발하는 샛별 하나, 주몽은 그것이 저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같이 생각했다.
 
12
<나는 새 빛이 되어 이 세상을 밝힌다.>
 
13
주몽은 불현 듯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나는 큰 임금이 된다」는 평소의 희미하던 생각이 빛이 되어 발하는 것이었다.
 
14
이날의 싸움은 뜻이 큰 싸움이었다.
 
15
왜 그런고 하면, 한 나라 군사와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16
한 나라라면 굉장히 크고 한량 없이 군사도 많고 물자도 많은 나라로 알아서 그에 대하여 모두 무서움을 품고 있는 이때에, 주몽이 많지도 못한 병력을 가지고 처음으로 한병과 접전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일어날 싸움은 오이의 말과 같이 결코 주몽에게 이로운 조건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싸움에 이긴다고 한 나라를 이기는 것도 못되는 한편, 이 싸움에 지면 지금까지 쌓은 장군의 명성을 떨어뜨릴 것이요, 낙랑 기타 한 나라와는 적 이 될 것이니 되도록 이 싸움은 피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었다.
 
17
이러한 반대가 있건만도 주몽이 이 싸움을 맡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첫째로, 하늘의 뜻을 받아 백성의 괴로움을 덜기로 사명을 삼는 주몽이 무돌이가 전하는 조시누 공주의 말과 예물을 받고 이해 득실을 교계할 수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주몽 혼자만 속속 깊이 감춘 이유였다. 둘째로는, 아무리하여도 이 땅으로 물밀 듯 먹어 들어오는 한족을 쳐 물릴 운명에 있는 우리 민족임을 아는 그는, 「한병 무섭지 않다」는 기운을 사실을 본보기로 하여 동포의 마음에 넣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요, 셋째는, 낙랑 왕이 계집과 재물을 탐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남의 나라 속에 들어 온 것이라 하니, 그렇게 경솔하고 교만한 낙랑 왕일진댄 자기 꾀와 재주의 좋은 밥이 될 것이라, 이것을 사로잡아서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18
주몽의 이 뜻은 설명하더라도 알아 들을 사람이 없으니 홀로 샛별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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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그레 먼 동쪽 산으로 햇발이 올려 쏘아도 주몽은 군사의 행진을 명하지 아니하고 의외에도 일제히 불을 때어 밥을 지으라는 영을 내렸다.
 
21
『밤을 놓친 것도 아까운데 새벽까지 놓치고 어찌하시려오! 대낮에 적이 웅거한 성을 들이치면 우리 편에 손해가 많지 않겠소?』
 
22
하고 오이가 출발을 재촉하나 주몽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어서 듣지 아니하였다.
 
23
『지금 밥을 지어 연기를 내이면 우리 군사가 여기 있는 것을 적이 알지 않겠소? 군법에, 나 있는 곳을 감추라 하였거늘, 일부러 알리려 하시오? 밥 먹은 지도 얼마 안 되니 불만은 아니 때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24
하고 재사가 말하여도 주몽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 뿐이요 아무 변명이 없었다.
 
25
주몽은 혼자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이었다.
 
26
아니나 다를까, 두텁 고개에서 난데 없는 연기가 오르자 모둔골로 부터서 말탄 군사 수십명의 일대가 주몽의 진을 향하고 달려 오는 양이 보였다.
 
27
주몽은 계교를 일러 척후 두어 명을 내려 보내어 길가에 숨어서 모둔골서 오는 군사를 기다리게 하였다. 모둔골 군사가 고개 밑까지 달려 와서는 말 걸음을 늦추고 조심조심 사방을 둘러 보며, 일부는 고개 밑에 머무르고 일부는 천천히 고개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28
『거 누고?』
 
29
하고 주몽의 척후가 마른 풀 속에서 뛰어 나서며 칼을 겨 누었다.
 
30
놀란 모둔골 군사들 중에 더러는 말을 돌려 달아나고 더러는 떨어지는 듯 말께서 내렸다. 그 중에 하나가 칼을 빼어 들고 마주 나서며,
 
31
『게야말로 누고?』
 
32
『우리는 일월지자 하백지손 주몽아기마마의 군사여니와, 게는 누고?』
 
33
하는 말에 고미의 군사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선다.
 
34
『주몽아기라고?』
 
35
『그렇다. 주몽 아기.』
 
36
『저 일월기 날리는 도적 두목 말이지?』
 
37
『이놈아, 입을 함부로 놀려 주몽 장군마마라고 여쭈어라.』
 
38
『장군이라면 우리 고미 장군이 계시다.』
 
39
『오 고미? 그놈 죽일놈! 졸본 나라 녹을 먹고 낙랑 왕의 앞잡이가 되어 마을을 쑥밭을 만들고, 모둔골 젊은 아낙네와 계집애들을 한병에게 팔아 먹는 그 찢어 죽이고 저며 죽여서 개밥, 매밥, 구더기 밥을 하여도 아깝지 아니한 그 역적놈 고미가 네 두목이란 말이야? 에 퉤퉤 더럽다. 너 같은 놈들 하고 말하기도 더러워! 우리 장군마마로 말하면 일월기를 받으시고, 약한 이 억울한 이를 도우시고, 악한 이 억센 이를 꺾으시며, 계집이나 재물에 하나 손대시는 일 없고, 먹을 것 마실 것도 당신 잡수시기 전에 우리네 군사들을 먼저 주시니, 이런 거룩하신 어른이 어디 또 있느냐 말이다. 너희 놈들도 사람의 심장을 가졌거든 고미놈을 버리고 우리 주몽아기 밑으로 오란 말이다.』
 
40
이 말에 모둔골서 온 두 군사는 서로 돌아 본다. 말을 듣고 보니 옳기는 옳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41
『그렇지만 우리 처자가 다 모둔골에 있으니 그것을 어찌하고 너의 두목헌테 간단 말이냐.』
 
42
하고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43
『흥. 오늘 저녁에는 우리 주몽 장군마마께서 모둔골 성중에서 주무실 게다. 너희놈들 마음대로 해. 고미놈헌테로 가고 싶거든 가고, 여기 있고 싶거든 있고. 배때기가 고프거든 밥이라도 처먹고 가.』
 
44
『너 우리를 속여서 사로잡는 거 아니야? 밤참도 못 먹은 배가 꼬루룩거리기는 한다마는.』
 
45
『너희놈을 속여서 사로잡아? 흥, 저기 섰는 너희 군사 놈들은 한놈 살아 돌아 갈 줄 아느냐? 우리 장군마마께서 너희들을 잡으려면야 모조리 염통을 뚫어서 잡으실 게다. 그렇지마는 그 어른은 호생지덕이 있으시와서 아무쪼록 나는 새 한 마리도 안 죽이시려는 거야. 그렇지마는 고미 같은 역적놈이나 그놈을 끝까지 따라 댕기는 놈들은 용서를 못 받을 것이다. 아마 이 해가 지기 전에 너희 눈깔로 그것을 볼 것이다.』
 
46
고미의 두 군사는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말을 내버리고 도망하여 저 뒤에 물러가 기다리고 있는 동무들께로 간다.
 
47
『이 못난 놈들아. 말이나 타고 가거라.』
 
48
하고 주몽의 군사는 도망하는 군사들의 뒤에서 소리를 질 렀다.
 
 

 
 

4

 
50
고미군에서 왔던 수십명의 척후대는 모둔골로 달려가는 것이 보이고 주몽은 두 척후에게서 고미의 군사와 교혼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주몽은 전군에 출발 명령을 내렸다.
 
51
선두에 붉은 바탕에 검은 해와 흰 달을 수놓은 일월기를 날리며 일렬 종대의 긴 행렬이 천천히 움직였다. 금으로 장식한 투구와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앉은 주몽의 몸은 아침 볕에 빛났다. 주몽의 몸이 움직이는 대로 번쩍번쩍 여러 방 향으로 빛을 뻗치는 것이 십리 밖에서도 보였다. 누가 보아도 이것은 싸움하러 가는 무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천천히 한가하게 주몽의 장사진은 모둔골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었다.
 
52
모둔골을 앞으로 오리나 두고 작은 개울 하나가 가로 흐르고 있어 주몽의 군사는 그것을 건너야 하게 되었다. 주몽은 이 개울가에 군사를 머무르고, 혹은 말에게 물을 먹이며 혹은 군사들에게 씨름을 붙이며 또 혹은 마음대로 말을 달려 장난 모양으로 또는 미친 모양으로 들로 돌게 하였다.
 
53
아무쪼록 규율 없이 마음놓고 유산하는 양을 보이는 것이었다.
 
54
오이와 기타의 부하들은 주몽에게 급히 모둔골 성에 진격할 것을 재촉하였다. 적이 준비하기 전에 들이치자는 것이니, 이른바 출기불의(出其不意)하자는 것이었다.
 
55
그러나 주몽은 무엇을 생각함인지 듣지 아니하였다.
 
56
날씨는 따뜻하것다, 배는 부르것다, 모래도 포근하것다, 군사들은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저쪽 아지랑이 밑에는 적병이 있는 줄을 아나 주몽을 믿는지라 아무도 겁이 없었다.
 
57
이렇게 유산을 시키는 것도 주몽아기의 병법이라고 믿는 것이었다.
 
58
말들도 대장의 뜻을 아는가 싶어, 으흥 소리를 지르며 덜미털을 흔들고 뛰놀았다. 뽀얗게 먼지가 올라 아지랑이와 어울렸다.
 
59
주몽은 홀로 모둔골 성중에서 일어날 일을 상상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왔던 고미의 척후들은 겁이 나서 돌아간 것이 분명하였으니, 그들은 필시 주몽의 군사가 수없이 많더 라고 보고하여 아무쪼록 접전이 없도록 고미를 위협하였을 것이다.
 
60
낙랑 왕은 재물과 계집이 소원이요 모둔골 땅이 소원이 아니니, 얻은 것을 배에 싣고 달아나면 고만이지 위험을 무릅 쓰고 피흘려 싸울 생각이 없을 것이다. 고미는 한사코 싸워서 모둔골을 제 것을 만들고 싶겠지마는 한병이 배에 올라 꽁무니를 빼는 것을 보면 고미의 군사들도 싸울 뜻을 잃을 것이다. 설혹 고미가 군사를 몰아 주몽의 군사를 저항하려 하더라도 그 군사는 목숨을 내어 놓고 싸울 뜻이 없을 것이다. 이리 되면 많은 피를 아니 흘리고 모둔골에서 적병을 쫓을 것이요, 배에 오른 적병은 물목을 막고 지키는 군사의 손에 패할 것이다.
 
61
이것이 주몽의 생각이었다. 주몽의 생각은 옳았다. 그는 싸우기 전에 벌써 이긴 것이었다.
 
 

 
 

5

 
63
주몽은 고미의 군사가 싸우러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해가 낮이 되도록 열, 스물의 군사가 이쪽 형세를 정찰하려는 모양으로 뻐끔뻐끔 내다볼 뿐이요, 대부대는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고미는 태수가 만일 밀사를 보낼 수 있었다면 구원병이 졸본에서 올 법하지 서쪽으로 오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대부대의 군사를 동쪽 졸본으로 통하는 세 길목에 배치하고 서쪽으로는 겨우 백여 명의 소부대를 남겨 두었을 뿐이었다. 아까 두텁 고개에 갔던 척후병이 그 부대의 일부였다.
 
64
두텁 고개에 갔던 척후병은 고미에게 주몽의 군사가 두텁 고개 수풀 속에 가득 차서 아침 먹을 쌀 씻은 물로 개울물 이 온통 뻘겋게 수수 씻은 쌀 뜨물이더라고 보고하고, 그 군사들은 동부여와 말갈 사람들이 섞여서 모두 키가 구척이요, 인물이 호랑이나 곰 같더라고 보고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엄포함으로 고미가 싸울 뜻을 안 가지게 하려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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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저희들이 죽지 아니할 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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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들의 보고는 고미의 기운을 꺾었다. 그는 곧 낙랑 왕에게 달려 가서, 주몽이라는 무서운 도적의 떼가 구름같이 모둔골로 밀려 온다는 것을 척후의 말에 더욱 보태어서 말하였다. 낙랑 왕은 조시누만 잡아 가면 목적은 달하는 것이어서 여기서 피를 흘리고 싸울 뜻은 없었기 때문에 한병 한 떼를 주어 고미를 태수부로 보내어, 태수 부처와 화친하고 떠나겠노라고 속여서 데려다가 배에 싣고 곧 배를 떠나기를 명하였다.
 
67
낙랑 왕이 태수 부처와 한병과 많은 젊은 여자 포로와 재물을 싣고 음술물에 나뜨는 것을 보고 고미의 군사와 백성들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리고 딸들과 젊은 아내들을 빼 앗긴 백성들은 물가로 따라 내려가며 몸부림하고 아우성하였다.
 
68
한병이 떠난 후에 모둔골의 치안은 갑자기 혼란하였다. 백성들은 고미의 집을 습격하였으나 그 가족은 없었다. 그들은 역적놈의 집을 부셔라 하고 고함을 치면서 가장 집물을 막 두들겨 깨뜨리고 집에는 불을 싸놓았다. 무기를 가진 고미 군사들은 막 약탈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무뢰한들의 손에 여기저기 불이 일어났다.
 
69
주몽 장군은 왜 안 들어오느냐고 뜻 있는 백성들은 고대하면서 뒷산으로들 기어 올랐다. 그래도 아무도 주몽의 군중으로 갈 용기는 아니났다. 무서웠던 것이었다. 소문으로는 주몽이 의인이라 추호 불범한다고 들었지마는 제 나라 군사도 믿지 못하게 된 오늘에 도적의 떼를 더 믿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70
백성들은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 같았다.
 
71
모둔골에서 불이 일어나고 피난민이 산으로 올라 가는 것을 본 주몽은 전군에 행진을 명하였다. 무돌이 앞장을 서고 삼백명 말탄 군사는 질풍같이 순식간에 모둔골에 들어 왔다. 물론 아무 저항도 없었다.
 
 

 
 

6

 
73
一. 집에 불을 놓는 자 一. 부녀를 겁탈하는 자 一. 재물을 약탈하는 자 一. 군에 거역하는 자는 추호도 용서 없이 죽인다고, 말탄 군사들이 시가로 달리며 지휘하였다.
 
74
무돌은 주몽을 인도하여 태수부로 갔으나 거기는 우짖는 나인들과 늙은 비부뿐이요, 공주도 태수도 없었다. 그러나 인심을 잃지 아니하고 천성의 사모함을 받던 태수부라 약탈 이 여기까지는 들어오지 아니하여서 태수의 세 어린 아이와 유모들은 있었다.
 
75
공주와 태수를 고미가 한병을 데리고 와서 데려 갔단 말을 듣고 무돌은 발을 구르며 통곡하였다. 무돌은 천신 만고로 기약한 오늘 해지기 전에 주몽을 데려 왔건만 공주와 태수는 잡혀 간 것이었다.
 
76
주몽은 공주와 태수는 도로 찾아 올 터이니 태수부를 잘 지키라 하고, 오이에게 모둔골 시가의 치안을 회복할 것을 명한 뒤에 몸소 활 잘 쏘는 한 부대의 군사를 끌고 재사의 인도로 낙랑 왕의 함대를 잡으려고 말을 몰았다.
 
77
모둔골에서 지름길로 이십리쯤 내려 간 물굽이에서 낙랑 왕의 다섯 척 배는 미리 매복하고 있던 무골이 거느린 군사와 만나 싸우고 있었다. 이쪽의 진지는 높은 언덕이요, 배는 이 언덕 밑으로 지나 가야만 하였다. 두 배의 돛은 화전(火箭)을 맞아 타고 있고, 배 위에서 키 잡는 사람과 상앗대를 잡은 사람들이 있으나 이쪽의 화살에 연해 맞아 쓰러져서 미처 보충할 새가 없었던 것은, 배 위에 널브러진 시체와 피를 흘리고 구르는 군사들을 보아서 알 것이었다.
 
78
주몽은 목소리 큰 사람을 시켜,
 
79
『낙랑 왕아, 배를 돌려라. 항복하면 살고 달아나면 죽는다. 일월지자 하백지손 주몽 장군이 여기 있다.』
 
80
하고 소리를 치게 하였다.
 
81
그러나 배는 키를 돌리려고도 아니하고 세우려고도 아니하고 이 목정이만 벗어나면 살겠다는 듯이 연해 죽으면서도 연해 아래로 내려 갔다.
 
82
주몽의 홀에서 떠난 살이 연해 세 사공을 꿰니 사람이 미처 번갈 새 없어 배가 방향을 잃어 서로 부딪치고 서로 밀치면서 흘렀다. 그래도 낙랑 왕 최 낙은 항복하려 아니하고 이번 물굽이를 지나 화살 오는 목을 벗어나려 하였다. 그러나 개울이 멀리 남쪽으로 휘돌아서 다시 동북으로 굽어드는 목은 두 산 틈바귀요, 좌우는 가파른 언덕인데다가 소나무 잣나무 같은 잎 푸르고 키 큰 나무가 빗살같이 들어 서고, 게다가 바위와 돌까지 많았다. 마리가 거느린 부대는 키 큰 나무를 여럿 찍어 굴려서 뱃길을 막아 놓았는데 낙랑 왕의 함대는 이것을 모르고 빠른 산옆 물을 따라 내려 오다가 여기 걸려 버렸다. 배 위에 사람의 그림자만 얼씬하면 좌우 언덕으로 살이 날아 오고 돌이 굴러 오고 도끼날같이 서슬이 선 돌팔매가 날아 와서 한 사람도 살려 두지는 아니할 것 같았다.
 
 

 
 

7

 
84
낙랑 왕은 마침내 흰 기를 내어 걸기를 명하였다. 마리는,
 
85
『배를 돌려 모둔골로 가거라. 그러면 살린다. 이것은 우리 장군 주몽아기의 명령이다.』
 
86
하는 지령을 주었다.
 
87
『활과 돌팔매를 거두시면 배를 돌리오리다.』
 
88
하는 한병의 탄원에 마리는 그것을 허락하였다. 낙랑 배 위에는 한병들이 개미 떼와 같이 나와서 상앗대로, 노로 배를 저어 돌려서 도로 물을 거슬렀다. 그날 해가 두텁 고개에 올라 앉을 때쯤 낙랑 왕의 배가 모둔골 선창에 올라와 닿았다. 주몽은 위의를 갖추고 군사와 백성에게 옹위되어 물가에 진치고 있었다.
 
89
한병은 활과 창과 칼을 묶어서 먼저 배에서 내려 주몽의 앞에 바치고, 다음에 낙랑 왕은 조시누를 앞세우고 목에 끈을 메어 늘이고 두 팔을 등 뒤에 얽매이어서 고개를 숙이고 주몽의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그 뒤에는 꼼짝 못하도록 결박을 진 고미가 한병에게 개끌리듯 끌려와 엎드리고, 그리고는 포로로 배에 실렸던 젊은 아낙네와 아가씨들이 놓여 내려와 주몽의 앞에 절하고 일어날 줄을 모르고, 다음에는 한병들이 모두 맨손으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목을 늘이고 있었다. 마음대로 칼이나 도끼로 찍어 줍소서 하는 항복의 뜻을 표하는 것이었다.
 
90
일월기 밑에 임시로 단을 모으고 높이 앉은 주몽은 일어나 조시누를 맞아 위로하고 태수는 어찌 되었느냐고 물으니, 조시누는 비창한 낯으로 모른다 하였다.
 
91
주몽은 낙랑 왕의 결박을 끄르고 앉을 자리를 줄 것을 명하였다. 최 낙은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무수히 고맙다 하고, 금후 자기의 자손은 영원히 주몽의 자손에 대하여 친선할 것을 맹세하였다.
 
92
주몽은 다음에는 몸을 소스라치며 고미를 불렀다.
 
93
고미는 잔뜩 뒷짐을 지고 머리를 풀어 뒷짐 진 손에 비끄러매어서 턱을 땅에 고이고 엎드리고, 칼 든 군사들이 각각 한 발로 고미의 덜미를 누르고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94
『이놈, 네가 고미냐?』
 
95
하는 주몽의 음성은 컸다.
 
96
『그러하오.』
 
97
『태수는 어찌하였느냐?』
 
98
『태수는 죽었소.』
 
99
『네가 죽였지?』
 
100
『태수는 물에 뛰어 들어 죽었소.』
 
101
이 말에 조시누는 기색하여 쓰러진다.
 
102
『이봐라, 이 역적 고미의 목을 베어 소금에 절여 높이 달고 그 몸뚱일랑 들에 버려 짐승의 밥이 되게 하여라. 그리고 저 한병에게 잡혀 갔던 아낙네들은 다 제 집을 찾아 주고, 한병의 배에 있는 재물도 다 주인을 찾아 주되, 주인을 못 찾을 재물은 오늘 싸움에 죽은 자의 유족과 불에 타 집 잃고 의지없는 백성에게 나눠 주어라.』
 
103
하는 분부를 내리니 누가 먼저 불렀는지 모르나,
 
104
『우리 임금 만세야!』
 
105
하고 군사와 민중이 함께 외치고 한병들까지도 저의 말로 만세를 불렀다.
 
 

 
 

8

 
107
주몽은 사흘 동안 군사들을 쉬어 가지고 모둔골을 떠났다.
 
108
조시누는 말할 것도 없고 모둔골 백성들도 주몽이 모둔골 태수로 머물기를 바라고, 주몽의 부하 중에도 지난 이년 간의 방랑 생활에 진저리가 나서 모둔골같이 물산 풍부한 곳에 머물고 싶었으나 주몽은 동으로 동으로 가는 길을 계속 하였다.
 
109
모둔골서 동으로 음술물을 내려 가면 백리쯤하여 졸본물과 합하고, 거기서 또 백리쯤 동으로 가면 비류물(沸流水)이라는 강이 있다. 이 강은 음술물이나 졸본물과는 딴 줄기로, 서는 연안에 꽤 넓은 평야를 이루고 서남으로 흘러서 직접 아리나리에 들어 가는 강이다.
 
110
비류에 이르러서 주몽은 여섯 신하를 거느리고 뒷산과 앞 산에 올라 지형을 살피더니,
 
111
『좋다!』
 
112
하고 외쳤다.
 
113
『여기가 무에라는 데냐?』
 
114
하고 물으니 어떤 늙은 나무꾼이 대답하기를,
 
115
『여기가 흘승골(紇升骨)이라는 데요. 저기 저 성이 흘승골 성이요.』
 
116
하고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키니 산마루를 돌아서 오랜 토성이 보인다.
 
117
『저것은 어느 때 성인가?』
 
118
하고 물으니 그 늙은 나무꾼은,
 
119
『낸들 아오마는, 옛 어른들 말씀이 단군께서 세 아드님을 데리시고 쌓으신 것이라 하오. 그래서 이 산을 아들메(三郞城)라 하고 저 뒤에 높은 봉우리가 함박(太白), 낮은 봉우리가 쪽박(小白), 그리고 이 봉우리가 아들메요, 여기 큰 나라가 들어 앉는다 하오.』
 
120
하고 눈을 들어 주몽을 슬쩍 살피고는 어디론지 가 버리고 만다.
 
121
뒤에 세 봉우리 산이 있고 앞에 비류가 흐르고 물을 건너서는 큰 벌이 있어 양식도 넉넉하고 교통도 편하고도 흘승골의 요해가 지키기 쉽고 치기 어렵게 생긴 곳이었다.
 
122
주몽은 이곳에 머물기로 뜻을 정하고 재사·오이의 무리를 시켜 터를 잡아 집을 짓게 하였다.
 
123
산을 등지고 강을 앞으로 두게 하면 남향이었고 어디나 땅을 파면 좋은 샘이 솟아 물이 달았다.
 
124
주몽이 흘승골에 웅거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방으로서 백성들이 모여들어 주몽의 집 곁에 집을 지었다. 모둔골에서도 조시누 공주를 머리로 하여 수천호가 주몽을 사모하여 따라 오고, 졸본에서도 가족과 세간을 끌고 오는 이가 많아서 비류물벌 흘승골 앞에는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수천호의 집이 생겨서 큰 도시를 이루었고, 누가 언제 부르기 시작하였는지 모르나 이 새 도시를 「나라내」라고 부르니, 이것이 후세에 「國內城」, 「平壤」이라고 한자로 부르게 된 어원이었다.
 
125
백성들 사이에는 나라내는 살기 좋은데요 피난처였다. 세도 있는 계급이나 탐관 오리의 학정 협잡이 없으니 벌면 버는 대로 내 것이요, 죄만 안 지으면 자유 천지였다. 또 도적도 관군도 감히 주몽을 못 건드리니 나라내는 언제나 태평 세계의 피난곳이라는 것이었다.
 
 

 
 

9

 
127
조시누 공주는 남편이 다스리던 고을 모둔골을 주몽에게 바치고 어린 세 아이를 끌고 흘승골로 왔다. 제 재산으로 가지고 있던 금은과 다른 보화도 모두 주몽에게 바쳤으나 그것은 물리치고 조시누가 주몽의 의복과 음식을 맡는 것만을 허하였다.
 
128
이때에 졸본에서는 큰 문제가 일어났다. 주몽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한병의 손에서 모둔골을 회복하고 조시누 공주를 구한 것은 졸본 왕으로서 가상할 일이 어니와, 주몽이 제 마음대로 흘승골을 점거하여 한 나라를 이룰 기세를 보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이 불온한 일이었다.
 
129
모둔골 일이 있은 후에 졸본 조정에서는 주몽으로 모둔골 태수를 삼을 터이니 졸본으로 오라고 불렀으나 주몽은 회답도 아니하였다. 눈알을 가지고 갔던 다라미의 말을 좇아 왕 명으로 수천의 군사가 모둔골을 향하여서 떠났으나 중로에서 그 반수도 못되는 고미의 군사에게 패하여 칠분 오열이 되어 달아나 버린 것으로, 졸본 나라의 위신은 더욱 땅에 떨어졌는데 이러한 졸본 왕의 부름에 주몽이 응할 까닭이 없었다.
 
130
주몽이 흘승골에 웅거한 가을에는 이상하게도 흘승골 사방 백리 안에는 무전 대풍이 들어서 백성들은 이것이 다 주몽 장군의 덕이라 하여 칭송하여서 그 중 큰 수수이삭, 조 이삭 같은 것을 먼 곳에 사는 백성들도 예물로 가져다가 주몽에게 바쳤다. 곡식만 잘된 것이 아니라 소도 돼지도, 닭·개 짐승도 다 무병하게 번식하였고, 흘승골 백리 안에는 큰 도적 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좀도둑도 주몽의 위엄에 눌려서 그림자를 감추고, 호랑이와 범조차 인축을 해함이 거의 없었다.
 
131
주몽은 엄하게 부하를 단속하여 백성에게 행패하는 자가 없고, 또 백성들에게도,
 
132
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인다.
 
133
二. 부녀를 겁간하거나 남의 부녀와 간통하는 자는 죽인다.
 
134
三. 도둑질하는 자는 죽인다.
 
135
四. 남의 집에 불을 놓거나 남의 집을 허는 자는 죽인다.
 
136
五. 남을 때리거나 남을 욕설하거나, 남을 속여 재물을 얻는 자는 볼기와 형문을 때린다.
 
137
이러한 간단한 법률을 주어 추호도 용서함이 없으므로 치안이 잘 유지되어서 누구나 흘승골에 와 살기를 좋아하였다.
 
138
이래서 졸본에서까지도 몰래 가족과 재물을 끌고 흘승골로 오는 사람이 나날이 늘게 되니 졸본으로서는 시급히 흘승골에 대한 대책을 아니 세울 수 없었다.
 
139
국가의 체면으로 보아서 가장 적절한 방책은 주몽이 왕명을 받지 않고 국토를 찬탈한다는 이유로 군사를 보내어 이를 토벌하는 일이지마는, 이때 졸본으로서는 이것은 엄두도 못 내일 일이었다. 고미의 오합지졸에게 짓밟히는 졸본의 병력으로 주몽을 어찌 당하랴. 그러면 남은 길은 모략이나 항복이 있을 뿐이었다.
 
 

 
 

10

 
141
모든 쇠망하는 나라가 다 그러한 모양으로, 졸본 조정에서는 음모만 일삼고 성의가 없었다. 날로 강해 가는 주몽의 세력에 대하여 성의 있는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막리지 이 무기, 두상 대감 도가비 등은 속으로는 주몽을 무서워하면서도 임금 앞에 모여서 말할 때에는 대의 명분을 내세우는 고담 준론을 할 뿐이요, 주몽을 베어야 된다고만 하지마는 베일 계책도 없어서 아무 결론에 달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었다.
 
142
시월 상달을 잡아서 주몽이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기별이 오매 졸본 조정에서는 장히 황망하였다. 시월 상달이라면 앞으로 한 달도 남지 아니하였으니 사정은 극히 촉박하였다. 졸본 조정에서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 동안에 또 둘째 기별이 왔다. 기별이란 것은 흘승골에 보낸 염탐군의 기별이었다. 그 기별은,
 
143
『주몽은 군사를 발하여 졸본을 들이쳐서 이달 안에 졸본을 점령하고 시월 상달에는 졸본에서 주몽이 등극한다.』
 
144
하는 것이었다.
 
145
이에 졸본 조정에서는 어전 회의를 열고 밤을 새워 의논한 결과, 병력을 가지고 주몽을 대항할 의도를 버리기로 작정하고 왕의 망내 따님 작은아기를 주몽에게 주어 왕과 주몽과 옹서의 관계를 맺음으로 이 급한 고비를 넘기자는 것이니, 이것은 노쾌한 이무기의 계교였다. 왕은 그것을 반대하지 아니하였다. 주몽이 군사를 끌고 졸본으로 들어 와서 오랜 나라의 늙은 임금으로서 새파랗게 젊은 도적 두목 주몽의 앞에 항복하는 수치만은 면할 것 같았다.
 
146
그래서 조의 대선 두루미를 특사로 하여 왕의 친서를 주어서 흘승골로 보내니, 이날에 벌써 졸본의 사직은 망한 것이었다.
 
147
주몽은 오이·마리·합보·재사·무골·묵거 등을 좌우에 놓고 위의를 갖춘 자리에서 조의 대선을 인견하고 졸본 왕의 국서를 받을 때에는 주몽은 공손하게 자리에서 내렸다. 겸손은 주몽의 특색이었고 이것이 인심을 얻는 데 가장 큰 덕이었다.
 
148
조의 대선은 거만한 젊은 장수의 버릇 없는 태도를 상상하였다가 그의 위엄에 놀라서 도리어 공손하게 주몽의 앞에 절하였다.
 
149
『대선 과공이시오.』
 
150
하고 주몽은 몸소 두루미를 붙들어서 자리를 권하였다.
 
151
두루미는 황송하다 아니할 수 없었다. 그는 한번 주몽을 보매 그 해와 달의 정기를 받은 듯한 환한 얼굴과 웅장한 음성과 무거운 행동과, 그리고 겸손한 중에도 위엄이 있는 것이 제왕의 덕을 갖춘 큰 인물임을 느꼈다. 과연 명불허전이라고 속으로 칭찬하였다. 그러고 좌우에 모신 여섯 사람이 다 의젓한 도인인데 놀랐다. 이무기와 같이 간사하고 음험하거나 도가비와 같이 거만하고 탐욕스러움이 없었다. 비록 모두 야인이라 궁정에서 오래 닦인 우아함은 부족하다 하더라도 거개 도인의 높은 풍도를 가진 것이 놀라웠다. 두루미는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명랑함을 느꼈다.
 
 

 
 

11

 
153
주몽은 두루미를 자리에 앉히고 자기의 자리에 돌아와 앉아 졸본 왕의 친서를 읽고 나서,
 
154
『선생이 원로에 오시노라 수고하셨소.』
 
155
하고 흔연히 두루미를 향하여 인사말을 하였다.
 
156
『장군의 성화를 오래 듣다가 오늘 지척에 뵈오니 과연 명불허전이라, 영웅 기상이시고 겸하여 애인하사하시는 덕을 뵈오니 못내 칭송하오.』
 
157
하고 조의 대선은 기분이 상쾌하여 활달하게 말하였다.
 
158
『천만에 말씀이요. 내 들으니 조의 대선은 도학이 높다하시니 나같이 젊은 사람에게 많은 가르침을 드리우시오.』
 
159
하고 화두를 돌려,
 
160
『그래, 선생께서는 무슨 일로 이렇게 원로에 내림해 계시오?』
 
161
하고 용무를 물었다.
 
162
두루미는 상쾌하던 낯빛을 거두고 옷깃을 여미어 엄숙한 태도를 지으며, 그러나 장히 미안한 듯이 좌우에 앉은 여섯 사람을 돌아 보더니 사신이란 이렇게 우물쭈물할 수 없다 하여 용기를 내어 가지고 말을 꺼내어,
 
163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일에는 여럿이 알아서 좋은 일도 있고 여럿이 알아서는 좋지 아니한 일도 있사온데,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164
하고 희끗희끗 센 긴 눈썹을 쫑긋 올리며 주몽을 바라본다.
 
165
『과연 지혜로운 말씀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166
하고 주몽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는다.
 
167
『그러하온데 지금 소인이 장군께 아뢰려는 말씀은 장군께서만 아시고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어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옵는데.』
 
168
『여기는 다른 사람은 없소.』
 
169
『어인 말씀이시온지. 지금 좌우에 여섯 분 현인이 있거늘 다른 사람은 없다 하시니 어인 말씀이시온지?』
 
170
『어, 이 여섯 사람 말씀이요? 이 여섯 사람은 남이 아니요. 이 여섯 사람의 눈이 모여서 주몽의 눈이 되고, 이 여섯 사람의 귀가 모여서 주몽의 귀가 되오. 주몽이 무엇을 한다 하면 이 여섯 사람이 하는 것이니, 밥은 주몽이 혼자 먹어도 일은 이 여섯 사람을 빼고 주몽이 혼자 하는 일이 없소. 이 여섯 사람을 물리라 하신다면 그것은 마치 주몽더러 눈을 빼고 보고, 귀를 막고 들으라는 것과 같소.』
 
171
주몽의 이 말에 재사·오이 등 여섯 사람은 일어나 절하고 두루미도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자기도 일어나 한번 깊이 읍하고 나서,
 
172
『장군! 과연 갸륵하시오. 어수지교(魚水之交)라는 것을 옛 글에서만 보았더니 오늘날 장군 막하에서 처음 보오. 과연 갸륵하시오. 소인의 실언을 사례하오.』
 
173
하고 또 한번 주몽에게 깊이 읍하고, 다음에 재사·오이 등 여섯 사람을 향하여도 가볍게 읍한다.
 
174
『그러면 소인이 우리 상감마마께오서 장군께 전하라 하신 말씀을 아뢰오리다.』
 
175
이 말에 주몽은 일어나 읍하여 졸본 왕에게 경의를 표한다.
 
 

 
 

12

 
177
두루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읍하여 앞가슴에 붙이고 약간 고개를 숙이고 주몽에게 졸본 왕의 말을 아뢴다─.
 
178
『첫째로는, 상감마마께오서는 장군께서 모둔골 적병을 물리치시고 공주 조시누마마를 구원하신 공을 깊이 가상하시노라 하오신 뜻을 장군께 아뢰라 하시오. 둘째로는, 상감마마께오서는 아드님이 없으시고 끝엣 공주 작은아기마마 한 분을 두시와 이제 나이 열 여섯이시온데 이 아기로 비루 공주를 하이시고 장군으로 비루 부마를 하이실 뜻이시니 장군의 뜻을 물어 오라 하시오. 셋째로는, 상감마마께오서 이미 춘추 높으시고 또 태자 아니 계시니 상감마마 만세 후에는 보위(임금의 자리)를 장군께 전하실 뜻이니 장군의 뜻이 어떠하신가 알아 아뢰라 하시오. 이 세 가지 사명을 받들어 소인이 장군 막하에 왔사오니 무엇이라고 상감마마께 돌아가 아뢰올지 장군의 말씀을 기다리오.』
 
179
하고 한번 읍하여 말이 끝난 뜻을 표하니 주몽도 자리에서 일어나 읍하여 왕의 말에 경의를 표한다.
 
180
공식 회견은 이것으로 마치고 그날 밤에 주몽의 마을에 잔치를 베풀고 두루미 대선을 접대할 새, 역시 재사·오이 등 여섯 사람을 부르고 조시누 공주도 이 자리에 나오게 하였다.
 
181
조시누 공주가 태수의 거상을 입어 소복으로 천천히 방에 들어오매 주몽을 제하고 일동은 다 일어나서 맞고 두루미는 공주가 좌정하기를 기다려서 그 앞에 나아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조상하는 뜻을 표하고 뒤따라 유모에게 안겨 나온 온조·비루 두 아기와 또 한 유모의 손에 끌려 들어 오는 보슬아기의 앞에도 읍하였다. 이때에 말이 막힌 두루미 대선의 늙은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고 다른 사람들도 이 충성스러운 두루미의 행동에 감격되어 같이 울었다.
 
182
얼마 뒤에야 두루미는 조시누 공주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눈물에 젖은 공주를 우러러 보며,
 
183
『공주마마, 아뢰올 말씀이 없소. 그러나 이렇게 마마께서와 세 분 아기 다시 뵈오니 그만 고마운 일이요. 상감마마 께오셔도 마마를 생각하시고 낙루하심을 소인네도 매양 뵈와 황송하기 그지 없소. 이번 소인이 흘승골에 올 때 하도 상감마마께오서는 소인을 가까이 부르시와 목메인 말씀으로 부디 주몽 장군께 청하여서 마마께와 세 분 아기 뵙고 오라 하오시고, 주몽 장군께 여짜와 아기 네 데리시고 마마께서 부디 한번 졸본에 오시와 상감마마 만세 전에 부디 한번 대면하시게 하라 분부 계시었소.』
 
184
하고 소매로 눈물을 씻었다.
 
185
공주는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두루미의 말을 다 듣더니,
 
186
『이 몸과 이 세 아이 오늘에 살아 있는 것은 다 장군마마 덕택이요. 장군마마 곧 아니시더면 이 몸은 벌써 무슨 욕을 당하고 어떤 죽음을 하였을지 모르오.』
 
187
하고 주몽을 향해 한번 일어 절한 뒤에 다시 말을 이어,
 
188
『이 몸과 세 아이만 살려 주신 은혜도 크려든 태수 을두지의 원수를 마저 갚아 주셨으니 장군마마의 은혜는 하늘보다도 넓고 땅보다도 두텁소. 이 몸이 무엇으로 그 은혜를 갚으리마는 평생에 장군마마 잡수실 것을 여투고 입으실 것을 지어 드리다가 이 몸이 백골이 되거든 넋이라도 장군마마를 따라 끝 없는 은혜를 갚으려 하오. 대선, 졸본에 돌아 가시거든 이 뜻으로 상감마마께 아뢰어 주오.』
 
189
하고 고개를 돌리고 흐느껴 울었다.
 
 

 
 

13

 
191
『그러하시더라도─.』
 
192
하고 두루미는 조시누에게,
 
193
『그러하시더라도 한번 졸본에 들어 가셔서 상감마마 애자지정을 풀어 드리시는 거야 못하실 리 없을 것이요. 너그러우신 주몽 장군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실 줄 아오.』
 
194
하고 주몽을 향하여,
 
195
『장군, 공주께서 한번 졸본에 귀녕(歸寧)하시기를 허락하 시오리까?』
 
196
하고 물었다. 주몽이,
 
197
『허락하고 말고가 있소? 공주는 나를 도와 주시는 은인이시니 공주가 원하시는 일을 막을 사람이 없소.』
 
198
하는 말에, 공주는,
 
199
『황송도 하오셔라.』
 
200
하고 일어나 주몽을 향하여 절하고 두루미도 공주를 따라서 주몽에게 절하고,
 
201
『장군마마는 과연 성인이시오. 소인은 장군의 덕이 이대 도록 높으신 줄은 몰랐소.』
 
202
하고 진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조시누는 주몽의 포로로서 벌써 첩이나 종이 되었을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203
『그러면 공주마마─.』
 
204
하고 두루미는 다시 공주를 향하여,
 
205
『장군께서 저렇게 허락하시니 이번 길에 소인이 뫼시고 가오리다. 사흘이면 졸본에 가시고 사흘이면 흘승골에 오시니 나흘쯤 귀녕하시와도 모두 열흘이면 족할 거 아니오니까?』
 
206
하고 공주가 이번에 자기와 같이 졸본에 들어 가기를 간청 하였다.
 
207
공주는 살랑살랑 고개를 흔들며,
 
208
『아니요. 이 몸은 상감마마 앞에 나아갈 몸이 못되오.』
 
209
하고 극히 비창한 표정을 한다.
 
210
『그건 어이한 말씀이시온지?』
 
211
하고 두루미 대선 언 듯 공주가 주몽에게 몸을 허하여 과부로서의 절개를 더럽힌 것이나 아닌가 하고 공주의 눈을 들여다 본다.
 
212
공주는 이윽히 머뭇머뭇하다가,
 
213
『지아비가 큰 고을에 태수로 나라 땅과 나라 백성을 잘못 지켜 싸워도 못 보고 적군에 잡혀 나라를 욕되게 하고 죽었으니 그 아내 된 이 몸이 무슨 낯으로 상감마마께 뵈오리까. 마땅히 지아비의 뒤를 따라 죽을 거이로되 세 어린 거이 있어 못하고 이제는 지아비를 대신하여 장군마마 은혜를 갚을까 하고 살아 있는 몸이요. 부부 일신이라 하니 지아비가 죄인이면 아내도 죄인이라, 나라의 죄인의 몸으로 무슨 낯으로 다시 아바마마께는 뵈이며 졸본 사람들을 대하겠소. 불효 불충한 이 자식을 잊으시도록 대선은 상감마마께 좋도록 아뢰어 주오. 그리고 다시는 졸본으로 가잔 말씀은 말아 주오.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이 가슴을 칼로 어이는 듯하오.』
 
214
하고 주몽께 물러간다 하직하고 아이들 데리고 방에서 나가 버린다.
 
215
두루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른 여섯 사람과 주몽까지도 측은한 마음에 한참이나 추연하여 말이 없었다. 그들의 마음 눈에는 눈물에 젖은 소복한 조시누 공주의 아름답고 갸륵한 모습이 박혀 스러지지 아니하였다.
 
 

 
 

14

 
217
이윽고 행배(잔을 돌리기)가 시작되어 조시누 공주로 하여 슬펐던 기분이 가실 때쯤 하여 주몽은 두루미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218
『졸본 나라는 쇠하였으나 대왕께서는 덕이 높으신 모양이요. 공주가 저러하시고 신하가 대선 같으시니.』
 
219
『부끄러운 말씀이요.』
 
220
하고 두루미는 이무기·도가비 등을 생각하였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계집이요 재물이요 제 권세였고, 그들의 밑에 있는 사람은 모두 그들을 본받고 그들을 속이고 그들에게 아첨하는 무리였다. 그 중에 누가 나라와 임금을 생각하는고.
 
221
누가 백성을 생각하는고. 대신들이 이러하니 적은 관리들도 그러하고, 대장들이 이러하니 밑에 졸병까지 그러하여서, 백성들은 이리 쪼이고 저리 뜯기고 하여 어느 힘있는 집에 등을 대지 아니하고는 부지할 도리가 없었다.
 
222
졸본 왕은 천성이 인자하여서 백성을 아들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향락은 좋아하였으나 탐학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인자한 마음만으로 백성이 편안할 수는 없는 것이니, 백성이 편안하려면 탐관 오리를 숙청하고, 청백하고 충의로운 인물을 써서 인자한 정사가 밑에까지 내려 가야 할 것인데, 왕은 늙기도 하였거니와 천성이 인자하여 측근에 있는 사람들을 소인인 줄 알면서도 차마 물리치지 못하고, 죄 있는 줄을 알면서도 차마 벌하지 못하니, 결과에 있어서는 왕의 인자한 것은 소인들에게만 미치고 백성에게는 내려 가지 못하는 대신에, 백성들은 이리와 같고 여우와 같고 뱀과 같은 소인의 무리의 밥이 되는 것이었다. 조의 대선은 이 병을 모름이 아니었으나 그에게 말하는 혀가 있으되 왕의 좌우를 깨끗이할 아무 힘도 없었다.
 
223
조의 대선은 속으로, 주몽 같은 사람을 임금으로 모셨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였다. 그래서 진정으로 작은 공주와 주몽과의 혼인을 일러서 주몽으로 왕의 후계자를 삼고 싶었다.
 
224
『상감께서는 진실로 성군이시오. 그저 인자하오시고, 조시누 공주께서도 인자하시고 명민하시지마는 작은 공주께서는 아마 언니마마보다도 더욱 현철하시고 숙덕이 있으시다고 생각하오. 용모로 보나 심덕으로 보나 진실로 후비의 기상이 있으신 줄로 아오.』
 
225
하여 두루미는 주몽의 비위를 돋구고 나서 주몽의 눈치를 엿보았다.
 
226
그러나 주몽의 얼굴에는 아무 욕심의 움직임도 나타남이 없었다. 주몽은 두루미가 졸본 작은 공주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을 들을 때에 가섬벌에 남기고 온 예랑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떠난 지 이제 이태, 예랑은 어찌 되었는가. 천하를 경영하는 몸으로서 처자를 그리워하는 빛을 사람의 눈에 띄게 할 주공이 아니어니와, 낮에도 말에도 드러내지 않은 심사는 속으로 타는 불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움을 능히 억제할 힘있는 마음인지라, 사랑하는 이를 그리는 정도가 더욱 강한 것이다.
 
 

 
 

15

 
228
연회가 파하여 객이 다 흩어진 후에 약간 주기를 띤 주몽은 혼자 촛불 밑에서 조잔한 벌레 소리를 들으며 예랑과 그가 낳았을 어린 아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229
주몽은 비류강 가에 집 하나를 짓되 모두 자기가 설계를 내었다. 그리고 후원에는 강을 연하야 버드나무를 심었다.
 
230
동부여는 대개 평지여서 버들이 많았으나 졸본은 산이 많고 벌이 좁아 소나무와 참나무가 많았다. 버드나무도 없는 것은 아니나 그리 많지 아니하였다. 그런 것을 주몽은 가섬 벌 예백의 집을 모본하여 집을 짓고 예랑이 나아가 놀기를 좋아하던 버들 숲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금년에 심은 애버들이 십년이면 족히 그늘을 이룰 것이다. 버들 그늘에 거니는 예랑을 주몽은 속으로 그리워하였다.
 
231
예랑이 병으로 죽었다는 풍설도 있고 대소의 손에 죽었다는 풍설도 있으나, 주몽은 그것을 믿으려 아니하였다. 주몽은 예랑이 그렇게 만만하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겸하여 자기와 짝지은 사람이 그렇게 박복하지 아니하리라고 자신하였다. 주몽은 어려서부터도 제 운명에 대하여 자신이 있었거니와, 일월기를 들고 나오는 동안에 여러 번 위태한 경우를 당하면서도 매양 승리하는 것으로 보아서 자기는 과연 하늘과 땅과 해와 달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고 자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이 다 이룰 것을 믿는 한편, 그의 하고자 함이 위에 어그러질 때에는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232
주몽의 지난 이태 동안의 생활에는 짝을 그리워할 사이도 없었거니와, 모둔골을 지나서 흘승골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는 몸이 편할 날이 있는 만큼 젊고 건장한 몸이 짝을 구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천하에 한꺼번에 셋도 있기 어려울 듯한 미인 공주가 옆에서 시중하고, 시중할뿐 더러 지극히 사모하는 정을 퍼붓고 있으니 조시누의 그 마음이 주몽에게 통하지 아니할 리가 없어서 이것이 더욱 주몽에게 예랑을 그리워하는 생각을 자극하였다.
 
233
이 모양으로 정히 예랑을 생각할 즈음에 비루의 유모가 들어와 주몽께,
 
234
『공주께서 장군마마께 잠깐 아로일 말씀이 있으니 나아와 뵈옵기를 허하시오리까 여쭈시오.』
 
235
하고 물었다.
 
236
『그래. 애기를 다리고 옵소서 하여라.』
 
237
이윽고 공주는 세 아이와 유모들을 데리고 들어와 주몽께 절하고,
 
238
『장군마마, 낮에는 정사로 군사로 늘 바쁘시옵고 계집의 몸으로 밤에 뵈옵기도 어려워 사롭고 싶은 말씀 여태 사롭지 못하였소. 오늘은 아무리 하여서라도 장군마마께 이 말 씀을 사롭고저 버릇없이 나왔으니 과히 허물마시고 들어 주시올지?』
 
239
『무슨 말씀이나 하시오. 그래 무슨 말씀이요?』
 
240
하고 유모더러 가까이 오라 하여 세 아기의 머리와 손을 만진다.
 
 

 
 

16

 
242
『다름이 아니오라─.』
 
243
하고 조시누는 낯을 붉혀 수삽하며,
 
244
『요사이 온조가 처음으로 아빠를 찾소. 세상에 아빠라고 여짜올 어른이 없는 고아의 정경이 가련하지 아니하오니까. 우으로 두 아이도 그러하오. 세상에서 어미 없는 어린 아기도 가여워라 하거니와 아비 없는 자식은 새즘생도 숙본다 하오. 아조 염치 없고 빤빤스러운 말씀이오나, 우으로 두 아 이까지는 몰라도 이제 처음으로 아빠를 부르는 온조만이라도 장군마마를 아버지라 여쭙게 하여 주실 수 없사올지. 아 이들은 장군마마를 아버지라 여짜옵고 소인은 어미라고 부르는 것이 못마땅하오면 소인은 어미라고 아니 불러도 좋을 까 하오. 장군마마, 긍휼이 여기시는 처분만 기다리오.』
 
245
하고 조시누는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246
조시누의 말에 주몽은 가슴이 뭉클하였다. 주몽 자신도 아비 없는 설움을 당하였고 그래도 금와왕은 자기를 아들처럼 사랑하여 주었다. 대소와 그 칠형제 아들들의 시기와 학대를 받았으나, 금와왕만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은혜를 생각하여 금와왕의 나라 동부여는 건드리지 아니 할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247
또 만일 강상의 달밤의 인연으로 예랑이 아들을 낳았다 하면 그 아들도 주몽 자기와 같이 아비라고 부를 사람 없는 고아로 자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주몽의 가슴이 아팠다.
 
248
그래서 주몽은 먼저 일어나 유모에게서 온조를 받아 안고,
 
249
『온조야, 내 아들이다.』
 
250
하고 얼렸다.
 
251
온조는 주몽의 말 뜻을 알아 들을 리는 없지마는 팔과 다리를 버둥버둥하면서,
 
252
『아빠, 아빠, 아빠.』
 
253
하고 세 번이나 부르며 주몽의 얼굴을 쳐다보고 웃었다.
 
254
주몽은 이 어린 아기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느꼈다. 아무리 주몽이라 하더라도 이 핏덩이가 자라서 그로부터 이십년 후에 백제라는 나라를 세우는 칠백년 왕업의 큰 시조가 될 줄을 몰랐을 것이다. 이것은 나중 이야기어니와, 온조는 그 생부 을두지 우태(優臺), 또는 구태(仇臺)와 같이, 주몽, 즉 동명 성왕을 종묘에 같이 모시어 끝까지 주몽을 아버지로 섬겼다.
 
255
주몽이 온조를 아들이라고 불러서 안아 주는 것을 보고 세 살 먹은 비루도 부러운 듯이 지척지척 걸어 와서,
 
256
『아빠 나도.』
 
257
하고 주몽에게 매어 달렸다.
 
258
주몽은 비루도 아들이라 부르고 안아 주었다.
 
259
다섯 살 먹은 보슬아기는 죽은 아버지를 잘 기억하는지라 주몽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아니하였으나 손가락을 물고 역시 주몽에게 매어 달렸다.
 
 

 
 

17

 
261
주몽은 재사·무골·묵거·오이·마리·합보, 여섯 사람을 불러 졸본 문제를 토의하고 조의 대선 두루미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262
『대왕께서 작은 공주를 내게 허하신다는 뜻은 고마우나 나는 동부여에 두고 온 아내가 있으니 다시 혼인할 뜻이 없다고 아로이시오. 또 나는 인자하신 대왕의 졸본을 건드리지 아니할 것이니 안심하시고, 만일 어떠한 우환이 있거든 내게 말하면 언제나 도와 드린다고 아로이시오. 그리고 조시누 공주가 지성으로 나를 공궤하시니 고맙다고 아로이시오.』
 
263
이 회답을 받아 가지고 두루미는 흘승골을 떠나 졸본으로 돌아 갔다. 졸본 왕은 주소로 근심으로 기다리다가 두루미의 회보를 듣고 안심하였다.
 
264
주몽의 생각에는 졸본이 그렇게 탐나는 것은 아니었다. 주몽은 졸본을 가지려면 언제나 가질 것을 알았고, 왕위에 관하여서도 남의 것을 전해 받지 아니하여도 제가 언제나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므로 주몽은 동부여와 같이 졸본도 건드리지 않기로 하였다. 본을 잘 보호하는 것이 조시누의 정성에 대한 갚음이라고도 생각하였다.
 
265
주몽의 뜻은 동으로 남으로 바다 있는 데까지 나아가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위로 대륙을 돌아 보는 마음보다 앞으로 반도를 내다보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것은 주몽 혼 자의 생각인 것보다는 민족 전래의 희망이었다. 더 따뜻한 나라, 더 아름다운 나라, 바다에 닿은 나라를 찾아 동으로 남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266
주몽은 반도의 남쪽에 신라(新羅)라는 나라가 벌써 새로 일어난 것을 들어 알았다. 이때에 벌써 신라의 박혁거세왕이 즉위한 지 이십 일년이었다. 주몽은 서에 한(漢)이 있고 동에 신라가 있어 내 눈을 막는고나 하고 한탄하였다. 그래서 주몽은 다소 바쁜 마음을 가지고 갑신년 시월 초사흘 단군께서 태백산 단목 하에 신시(神市)를 세우고 등극하던 날을 택하여 흘승골성 서리 찬 밤에 즉위의 대례를 행하였다.
 
267
즉위 식장은 둥궐이 아니라 솔밭 속이었다. 늙은 소나무 숲속에 나무 몇 포기를 베어 내어 단을 모으고, 넓은 마당을 닦으니 모두 누런 흙이었다. 이날은 밤하늘이 맑고 별이 빛났다. 때때로 우수수 솔밭을 울리던 첫겨울 바람도 재밤 중이 되면서는 자 버리고 이 큰 제터에 모인 군사와 백성의 두목들도 나무로 깎은 듯이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었다.
 
268
큰 나라가 나기 전, 큰 임금이 자리에 오르기 전 순간의 고요함이었다. 움직이는 것은 네 귀에 피워 놓은 네모도 그것을 미리 알았던 자는 없었다. 주몽의 생명이 그 때 그 때 자라 가지 뻗고 잎이 피어서 봉을 지고 꽃이 핀것이지 누구의 예정도 아닌 것이다. 예정이란 것이 잇다면 그것은 민족의 요구와 거기 응하는 주몽의 마음이 있을 뿐이다.
 
269
엄체수를 건너서 얼마아니하여서부터 주몽은 말갈의 유적과 싸오기 시작하였다. 유적이란 것은 열명 스므명 떼를 지어 가지고 큰 부락으로 돌아다니며 노략질을 하는 것이다.
 
270
물이 밀어 들어오듯이 우루루 말을 타고 밀려 들어왔다가 할 일을 다 하고는 물이 빠져 나가 듯이 어디론지 가 버린다. 하여서 흐르는 도적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이 말갈의 유 적들은 행인을 겁탈하고 동네에 들어와서는 재물을 빼앗고 불도 지르거니와 가장 질색할 것은 젊은 부녀를 잡아가는 것이었다. 말갈이란 저 북족 추운 지방에 사는 백성이어서 무지하나 기운이 있고 말을 잘 타고 죽기를 겁내지 아니 하였다.
 
271
주몽은 어떤 동네에 들어 자다가 말갈의 습격을 당한 일이 여러 번 있었고 그럴때 마다 활과 계교로 그들을 쳐 물리치기도 하고 더러 살오잡기도 하엿다. 어떤말갈은 주몽의 재조에 탄복하야 신하되기를 청하고 그러면 주몽은 목숨을 살려서 허락하였다. 꼭 죽을 줄 알았다가 용서를 받으면 그들은 더욱 감격하여서 주몽을 우덜어 보고 주몽은 한 번 용서하여서 부하를 만든 뒤에는 결코 의심하거나 차별하는 일이 없었다. 혹 항복한 말갈과 한 자리에 자는 것을 위태하다고 말리는 사람이 있으면 주몽은,
 
272
「내가 저를 의심하면 저도 나를 의심 하지않는냐. 제게 붙은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273
하야 도모지 개의치 아니하였다.
 
274
주몽이 말갈과 싸와서 이긴다는 소문은 산을 넘어 강을 건너서 사방으로 퍼졌다. 말갈이라면 겁을 집어 먹고 떨던 백성들은 주몽이 저이들의 지방에 오기를 바라고 어떤 넉넉 히 사는 큰 부락에서는 위해 사람을 보내어서 주몽을 정하기로 하였다.
 
275
말갈의 무리도 주몽의 해와 달을 그린 기를 보면 두려워하여서 주몽이 들어 묵는 동네나 골자기는 호랑이가 새끼친 골작이 모양으로 도적이 얼신을 못 하였다. 그럼으로 어는 큰 부락이나 주몽을 환영하고 크게 대접하며 가장 좋은 옷과 음식으로 대접하여 제 말을 바치고 예물을 드리는 자도 있었으나 주몽은 일절 재물이나 여색에 손을 대지아니하였다. 주몽이 어떤 동네를 도적의 손에서 건져 주고 떠날 때에는 오직 사흘 먹을 양식 만을 받을 뿐이었다.
 
276
십 사년 팔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 부인이 동부여에서 돌아 가니 그 왕 금와는 동명왕을 위하여 이를 태후의 예로 장사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케 하고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어 기 별하니 이것이 고구려와 동부여와의 첫 교섭이었다. 동명왕은 오이로 하여금 방물을 가지고 가 태후 묘에 제사하고 금와왕께 감사한 뜻을 표하며 예랑의 거취를 수탐하게 하였다.
 
277
오이의 회보는 절망적이었다. 예랑은 벌써 죽어 장사한 지 십 육년이나 되었다. 오이는 예백의 집을 물었으나 예백은 이미 죽은 지 오래고 예도는 간 곳을 몰랐다. 오이는 사람 들의 가르침을 받아 예랑의 무덤에 참배하였다. 늦은 가을 두 여자의 무덤은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278
이러한 보고를 듣는 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진실로 애를 끊는 설움이었다.
 
279
왕은 전에도 예랑이 죽었다든가, 대소가 예랑을 죽인 것이라든가 하는 풍문을 들었으나 그것을 믿으려 아니하였다.
 
280
그러나 오이의 보고를 듣고는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281
「예랑은 죽지 않는다, 언제나 다시 만난다.」
 
282
하던 자신을 잃어 버린 왕은,
 
283
『아아 내 운수도 다로구나.』
 
284
하는 낙심을 하게 되었다.
 
285
만일 목전에 무서운 적이 있었다면 왕은 싸우려는 용기로 이 설움을 잊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말갈과 옥저도 이미 내 것을 만든 오늘에는 가까운 이웃에는 염려될 만한 적은 없었고, 이로부터 영토를 넓힌다면 북으로는 동부여·북부여, 남으로는 새로 일어난 신라와 오랜 나라 마한(馬韓), 그리고 서으로는 낙랑과 선비(鮮卑)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동부여나 북부여는 모두 아버지의 나라라 칠 수 없고, 신라 같은 애숭이 나라는 아직 눈에도 차지 아니하거니와, 그보다 먼저 고구려와 신라와의 중간을 막은 낙랑의 한족을 쳐 물려야 할 터인데 최낙이 살아 있는 동안 낙랑과는 친선한 관계에 있을뿐더러, 새로 서는 나라에 아직 그만한 실력은 없으니 아직은 잠자코 힘을 기르기에 전력할 때이기 때문에 왕의 슬픔을 돌릴 사건이 없었다.
 
 

 
 

18

 
287
이 모양으로 선비를 제하고는 당장 침노할 만한 외적은 없었다. 졸본·비류·행인·옥저 등 네 나라 합병한 고구려의 서울 나라안(흘승골)은 비록 선 지 이십년도 못된 어린 도시언마는 인총이 많기로나 물화가 품성하기로나 졸본이나 가섬벌보다도 더하였다.
 
288
건국의 오랜 싸움에 시달리던 장병들은 계속하는 태평에 마음을 턱 풀어 놓고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야심 있는 자는 반역의 음모를 꾸미고 그렇지 아니한 자는 향락에 즐겨 세월을 잊어 버리는 것이다. 역사 상에 이른바 퇴폐의 시작이다.
 
289
건국 원훈의 한 사람으로서 군사의 두목인 무골은 새로 왕의 신임을 얻은 장군 부분노를 미워하여 반란을 일으키다가 사형을 당하였거니와, 그 밖에도 혹은 백성의 재물을 빼앗은 죄로, 또 혹은 백성의 집 아름다운 딸이나 아내를 탐내다가 사형을 당하는 자, 제 공과 왕의 신임을 믿고 행하다가 혹은 목을 잘리고 혹은 매를 맞고 또 혹은 벼슬을 떼우는 자도 날이 갈수록 수가 늘었다.
 
290
그런 중에도 동명왕만은 엄숙하고 소박한 생활을 버리지 아니하였으나, 오이가 동부여에 다녀 와서 예랑이 분명히 죽은 것을 안 후로는 왕의 마음도 풀리는 빛이 보였다. 왕은 술을 마시고, 술이 취하면 계집을 희롱하는 버릇이 났다.
 
291
왕이 이렇게 주색의 향락에 빠지는 것을 가장 슬퍼하는 이는 재사와 조시누였다.
 
292
재사는 여러 번 왕께 주색을 절약하기를 간하였다. 주색에 빠진 사람이 모두 그러한 모양으로, 왕은 처음에는 재사의 말을 부끄러워하였으나 차차 그 말을 귀찮아하게 되고 나중 에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리되면 재사도 할 수 없이 입을 다물고 만다.
 
293
조시누는 왕의 몸이 상하지 아니하도록 식절과 의복·거처를 주의하기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왕의 몸은 날로 수척하고 서른 아홉 살 되는 봄이 되어서는 왕은 밭은 기침을 하고 잘 때에 땀을 흘리며 꿈자리가 사나왔다. 왕은 사오년 주색 생활에 마침내 부족증이 생긴 것이었다.
 
294
왕은 겨우내 봄내 밖에 나간 일이 없어 침전에 침거하고 있었다. 본래 희던 얼굴이지마는 오랫 동안 볕을 못보아서 옥과 같이 희게 되었다. 조시누의 정성으로 잠시 주색을 줄 이고 인삼과 녹용과 복령과 잣과 꿀과 사슴의 고기 같은 것으로 몸을 보하여 삼월이 끝나고 사월이 잡혀서부터는 왕은 훨씬 기운을 회복하였다.
 
295
그래서 사월 어느 날 유궁(柳宮)에 납신다는 분부를 내렸다. 하루 늦은 봄 이른 여름의 풍경을 완상하자는 것이었다.
 
296
이날은 비루·온조 두 왕자(왕도 이들을 왕자로 대우하였고 백성들도 이 두 분을 왕자라고 부르고 있었다)와 조시누와 왕의 궁중에 있는 부인들과 재사·오이 등 가까운 신하들도 불렀다. 주식과 풍악이 따를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297
백성들은 오래 거둥납시는 것을 못 뵈온 끝이라 모두 왕의 모습을 우러러 보려고 벼르고 이른 아침부터 연도에 모여서 거둥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송양왕이 항복하던 때며, 행인국 왕이 사로잡혀 왔을 때며, 옥저 왕이 비빈을 이끌고 끌려 올 때며, 이러한 영광스러운 개선 행렬에서 젊은 왕의 씩씩한 모습을 우러러 뵙기에 눈익은 나라안 백성들이 이날 왕을 뵈옵기를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

 
299
왕이 주색에 침면하는 것이나 근래에 병이 있는 것이나 그 소문이 백성의 귀에도 아니 들어 간 것은 아니지마는, 원체 영특한 임금으로 믿어 오던 터이라 왕은 반드시 앞으로도 몇 개선의 영광을 더 보여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300
이날의 연회의 처소 유궁이란 것은 왕이 즉위한 첫해에 벌 써 예랑의 집을 본따서 강가에 지은 그 집이었다. 그때에 심어 놓은 버들이 벌써 십 구년이나 되었으니 제법 트진 몸 집에 퍼진 가지에 가섬벌을 연상케 하였다. 왕은 해마다 버들푸른 봄과 버들누른 가을에 여기 와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예가 되어 이것을 궁중과 민간에서는 유궁 거둥, 또는 유궁 놀이라고 불렀다. 오늘도 유궁 놀이였다.
 
301
사람들은 상감의 경치를 취하여서 유궁에 난다 하건마는 왕은 예랑을 생각노라고 유궁에 나는 것이었다. 예랑이 죽어 장사한 줄을 오이로 말미암아 분명히 알았다고 믿은 지 이제 다섯 해, 그동안에는 유궁 놀이도 없었고 오직 때때로 미복으로 유궁에 와 멀리 예랑의 무덤을 생각하고 낙루하였던 것이다. 그러하던 왕이 어찌하여서 이날 유궁 거둥을 할 생각이 났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났던 것이다. 알 수 없는 흥이 일어났던 것이다.
 
302
유궁 거둥을 바라보는 군중 가운데 극히 허술한 남녀 네 사람으로 된 일행이 섞여 있었다. 하나는 머리 세고 볼에 주름 잡힌 노파요, 하나는 스무남은 살이나 되었을 듯한 젊은 사람이요, 나머지 두 사람은 다 사십세 내외인 남자와 여자였다. 모습으로 보아서 노파와 중년 남자, 중년 여자와 청년이 모자인 성싶으나, 중년 여자와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사람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얼굴로 보아서 남매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내외라고 할 수도 없었다.
 
303
의복 차림으로 보아서는 다 한 가족인 듯하나 중년 여자의 눈찌나 몸가짐에는 그 차림차림과 아울리지 아니하는 데가 있었다. 그는 필시 고귀한 피와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애써서 제 행색을 감추려는 것 같았다.
 
304
이 네 사람 일행이 자리를 옮길 때마다 따라서 움직이는 세 사람 한 떼가 있으니, 그들은 다 중년 남자들로서, 차림 차림이나 몸가짐으로 보아서 산중에 숨어서 공부하고 도를 닦는 조의들인가 싶었다. 그들은 모두 등에 보따리를 지고 지팡이 하나씩을 짚고 있었다.
 
305
이 일곱 사람이야말로 예랑의 일행이었다. 중년 부인은 예랑이요, 소년은 예랑이 낳은 주몽왕의 아들 유리(琉璃)요, 노파는 예랑의 유모요, 중년 남자는 유모의 아들 괴유(怪由)요, 그리고 뒤에 따르는 세 조의는 유리를 도우려는 옥지(屋智)·구주(句?)·도조(都祖)였다.
 
306
그들은 숨어 있던 북부여를 떠나 말갈 땅을 돌아서 며칠 전에 나라 안에 들어와 행색을 감추고 왕의 사정을 염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알려는 것이 무엇이었던고?
 
 

 
 

20

 
308
예랑이 첫째로 알고 싶은 것은 주몽왕이 자기를 받을까 함 이었다. 고구려 지경에 들어 서서 그가 들은 것은, 주몽왕은 졸본 공주 형제에게 장가를 들었고 그 밖에도 낙랑 왕의 딸 이며 여러 한녀의 비빈이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것이 사 실이라 하면 자기가 나타나는 것은 주몽왕에게는 불쾌한 일 일는지 모를 것이요, 적어도 주몽왕의 집에 큰 불화를 일으 킬 빌미가 될 것이었다. 이십년이나 혼자 참고 살던 자기가 아니냐, 좀더 참으면 그만일 것을 지금 나타나서 남에게는 괴로움을 주고 제게는 망신을 청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309
둘째로 알고 싶은 것은 주몽이 유리를 받아 들일까 함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들은 바에 의하면, 조시누 공주와의 사이에는 비루와 온조와의 두 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것이 사실이라면 유리가 나타나더라도 왕위를 계승할 수 없을뿐더러 자칫하면 유리의 생명까지 위태할 것이었다. 사삿 집이라면 유리가 쫓겨 나면 고만이겠지마는, 나랏집이란 그러고만 말 수가 없는 것이니, 태자의 자리를 다투는 마당에는 피가 흐를 근심이 있는 것이었다.
 
310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랑은 잘 사정을 알아 보아서 나타날 만하면 나타나고 그렇지 아니하면 유리를 데리고 더욱 동방으로 내려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생각이었다.
 
311
예랑은 가섬벌을 떠난 뒤로 실로 갖은 고생을 다 하였다.
 
312
처음 몇 해 동안은 가섬벌에서 그리 멀지 아니한 곳에 숨어서 때때로 집과도 연락이 있어 살았으나, 예랑 모자가 살아 있다는 풍설이 대소의 귀에 들어 가매 예도는 예랑의 거취를 대라 하여 대소의 손에 악형을 받아서 죽고, 예랑 일행은 배를 타고 강에 떠서 물 가는 대로 흘러서 북부여 해모수의 나라로 갔다(註─지금 송화강 하류 佳木斯 근방일 것이다).
 
313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들은 예랑은 이곳에 의탁하려 한 것이었으나 예랑 모자가 북부여에 갔을 때에는 해모수왕은 벌써 죽어서 없고, 그뿐더러 그 신하들 사이에 서로 나 라를 차지하려고 큰 싸움이 일어나 몸을 붙일 곳이 없었다.
 
314
할 수 없이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와 말갈 지경의 산 속에 피신하여 괴유의 사냥으로 연명하며 유리를 기르고 있다가 유리가 차차 자라서 아버지를 찾게 되매 다시 동으로 동 으로 주몽을 찾아 떠난 것이었다. 아들이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설었던 것이다.
 
315
다시 동부여 지경에 들어서 비로소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갈 마음은 불일 듯 하였으나 유리가 몸으로나 재주로나 성인이 되기를 기다려서야 길을 떠났다.
 
316
천신 만고로 졸본 지경까지 오니 주몽왕은 벌써 많은 비빈과 두 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북부여와 고구려가 불과 수 천리 상거였으나 이천년 전 당시에는 교통이 터지지 못하고 중간이 온통 깊은 삼림과 맹수와 도적의 소굴이어서 백리 밖에 가는 것도 필생의 사업이었다. 하물며 예랑과 같은 부녀가 수천리 길을 다닌다는 것은 비록 괴유와 같은 힘있는 보호자가 있다 하더라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317
유리가 자라서 큰 장수의 자격을 갖춘 어른이 되었길래로 비로소 고구려로 올 용기를 내었던 것이다).
 
 

 
 

21

 
319
나라 안 백성들은 오래간만에 거동납시는 왕의 모습을 우 러러 보고 기뻐하여서,
 
320
『어아, 어아, 우리 임금 만만세야.』
 
321
하고 환호의 소리를 질렀다.
 
322
왕은 눈같이 흰 백달마 위에 높이 앉아 있었다. 비록 수척은 하였으나 늠름한 기상은 여전하였다. 흰 얼굴에 검은 수염이 첫여름 볕에 눈에 띄어 아름다웠다.
 
323
행차가 예랑의 앞에 다다랐을 때에 예랑은 유리의 어깨에 손을 걸고 쓰러졌다. 하도 억색하였던 것이다.
 
324
유리는 처음 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꿈과 같았다.
 
325
<저이가 정말 내 아버질까?>
 
326
『어머니, 어머니.』
 
327
하는 유리의 소리에 예랑이 정신을 차려서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벌써 왕의 말은 지나가고 그 뒤를 따르는 후비(기실은 후비는 아니나 예랑은 그렇게 생각하였다)들의 기마를 탄 행차가 왔다. 맨 앞에 조시누 형제는 누가 가르쳐 말하지 아니하여도 소문난 졸본 공주인 줄 알 것이다. 그들의 화려한 차림차림과 자기의 초라한 행색을 예랑은 비겨 보고 마음이 언짢았다.
 
328
다음에 역시 말 타고 오는 것이 비루와 온조 두 왕자였다.
 
329
그들은 흰 바탕에 검은 단을 두른 위아래를 입고 꿩의 깃 꽂은 뾰족한 검은 관을 쓰고 허리에는 금장식이 번쩍거리는 칼을 차고 있었다. 말들은 내가 태운 양반이 뉘신지 아느냐 하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고 가끔 네 굽을 들고 달렸다. 둘이 다 유리와 비슷한 연배였다.
 
330
『저리로 가십시다.』
 
331
하고 괴유가 앞섰다.
 
332
『어디로?』
 
333
하고 예랑은 눈물을 씻었다.
 
334
『유궁으로 상감 행차를 따라 가시지요.』
 
335
하고 괴유가 서두르는 것을 옆에서 보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336
『여보, 당신네들 어디서 온 사람인데 상감 거둥을 보고 울기는 왜 우오?』
 
337
하고 물었다. 과연 수상쩍기도 할 것이다. 예랑과 유리와 유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괴유와 세 조의의 눈에도 눈물이 있었던 것이다.
 
338
예랑은 유궁이라는 것을 보고 아니 놀랄 수 없었다.
 
339
『아이구머니!』
 
340
하고 먼저 소리를 지른 것은 그러나 유모였다.
 
341
『아가씨 댁 고대로가 아니요?』
 
342
하고 유모는 예랑의 소매를 끌었다.
 
343
예랑의 눈에서는 또 눈물이 흘렀다.
 
344
『유모 눈에도 그런가. 나는 이것이 꿈이 아니면 내 눈이 허깨비를 보는 것이나 아닌가 하였소.』
 
345
하고 예랑도 겨우 입을 열었다.
 
346
『그럼은요. 꼭 같은 걸요. 저 보셔요. 문제에 움물까지 꼭 같지 아니해요? 저 움물 뒤에 바시켰돌까지도 어쩌면 저렇게 같아요? 돌 위에 바가지 하나 올려 놓은 것까지도.』
 
347
하고 유모는 눈을 크게 뜨고 어안이 벙벙한다.
 
 

 
 

22

 
349
괴류는 빙그레 웃으며,
 
350
『아가씨, 그것이 같은 것이 아니오니가. 아기마마께서 아가씨 댁 고 모양대로 이 집을 지으신 것이니 꼭 같을 수 밖에 없지 아니하오니까. 저 버들 숲도 봅시오. 밑에 매어 놓은 배를 봅시오.』
 
351
하고 손으로 가리킨다.
 
352
『그럴까. 아기마마─아니 이제는 상감마마가 아니신가.』
 
353
하고 예랑은 눈물을 흐르는 눈에 웃음을 띄운다.
 
354
『그러하오. 이제는 상감마마시오. 지금까지의 입버릇으로 아기마마라고 여쭈었소. 황송도 하여라.』
 
355
하고 유모도 눈물 속에서 웃으며,
 
356
『아가씨도 왜 지금이야 아가씨신가. 중전마마시지. 도련님은 태자마마시고. 아이 황송도 하여라, 좋기도 좋을시고.』
 
357
하고 하도 좋아서 몸을 흔들고 웃는다.
 
358
여태껏 왕의 거동만 바라보고 있던 유리가 어머니 쪽으로 돌아 서며,
 
359
『어머니 외가댁이 꼭 이 유궁과 같단 말씀이요?』
 
360
하고 묻는다.
 
361
『그렇단다. 저 버들숲까지도 저 우물까지도.』
 
362
하고 예랑은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 보더니,
 
363
『다 같고 다른 것은 뒷산과 앞강이야. 거기는 산에 참나무와 잡목이 많은데 여기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많고, 거기는 강물이 흐린데 여기는 강물이 맑은 것이 다르고, 너의 아버지께서 가섬벌을 떠나시던 날 밤에 아버지는 저 버들 숲에 오셔서 나를 만나셔서 저 배 맨 곳에 나를 배에 태우시고 저 강에 떠서─그때는 지금같이 봄이 아니고 가을이야. 달이 밝고, 그러고 안개가 깊고.』
 
364
『처음에는 안개가 깊다가 나중에는 환하게 걷었소.』
 
365
하고 유모가 옆에서 말을 딴다.
 
366
『그래, 처음에는 안개가 깊다가, 그래 낭종에는 걷었어. 아아, 그 애는 죽고.』
 
367
하고 예랑은 유모의 딸을 생각하고 말이 막힌다.
 
368
유모는 눈을 써벅써벅하다가 다시 웃음을 지으며,
 
369
『아가씨, 설어 마셔요. 그 년이 죽었더라도 아가씨께서 이렇게 아기마마를 만나시게 되시니 저도 한이 없을 것이요. 그 년이 생전에 그렇게 아가씨를 사모했는데─.』
 
370
하고는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 하나 굵은 눈물이 감은 눈을 뚫고 뚝뚝 떨어진다.
 
371
괴유가 유모의 소매를 끌며,
 
372
『어머니, 이 기쁜 날 왜 눈물을 내시오? 어서 저 수풀 속에 들어 가셔서 아가씨와 도련님 옷을 갈이 입으시도록 하시오. 이제는 시각이 바쁘게 부자분 내외분이 만나실 도리를 하시지요. 안 그렇소?』
 
373
하고 옥지·구주·도조, 세 사람을 돌아 본다.
 
374
『그러하오. 어서 옷을 갈아 입으시오. 파연이 되기 전에, 또 술들이 취하기 전에 대면을 하시도록 하시오.』
 
375
하고 옥지가 말한다.
 
 

 
 

23

 
377
예랑은 유모를 데리고 괴유는 유리를 모시고 사람이 보지 않는 수풀 속으로 들어 가서 옷을 갈아 입었다.
 
378
예랑은 유모의 도움을 받아서 머리를 새로 빗고 이십 년 전 주몽과 마지막 만나던 날 고대로 머리를 쪽찌고 그날에 입었던 한 나라 비단 긴 옷을 입었다. 아무러한 곤란을 당 하더라도 이것만은 버리지 않고 꽁꽁 싸서 유모가 제 생명과 같이 몸에 지니고 다녔다. 몇 십년 후에 어디서 다시 상면할지 모르는 신세라 용모는 늙어서 변하더라도 아니 변할 무슨 표가 필요한 때문이었다. 파파노인이 다 된 뒤에라도 그 긴 옷은 변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예랑과 유모는 생각한 것이었다.
 
379
아버지 예백에게서 마지막으로 받은 옥비녀는 변함이 없었으나 비단 옷의 자주빛은 많이 날았다. 그래도 거기 짜 넣어진 해 무늬와 달 무늬는 썩기 전에는 아니 변할 것이었다.
 
380
만일 생전에 주몽 못 만나고 죽는다 하면 이 비녀를 머리에 꽂고 이 긴 옷으로 몸을 싸고 무덤으로 들어 갔을 것이요, 예랑이 죽어서 혼이 있다 하면 이 비녀를 꽂고 이 긴 옷을 입고 주몽의 혼을 찾아 헤매었을 것이다.
 
381
예랑은 다 차리고 나서 시냇물에 제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눈추리에는 몇 줄기 가는 주름이 잡히고 입설의 붉은 빛도 많이 날았다. 이제는 십 팔세의 애티 있는 처녀가 아 니라 사십을 바라보는 중년 부인이었다. 오랜 고생과 먼길에 약간 초췌는 하였으나 옛날 예랑의 모습을 다 잃지는 아니한 것 같았다.
 
382
『이만하면 알아 보실 것 같소?』
 
383
예랑은 옷을 돌려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다소 적막한 웃음이었다.
 
384
『그럼은요, 꼭 고대로신걸요. 그때와 같으신 애티는 없으셔도 환하시고 의젓하신 그 천질이야 어디 가겠어요?』
 
385
하고 유모는 만족한 듯이 내 딸을 대하는 듯이 예랑을 바 라보고 있었다.
 
386
유모도 새옷을 갈아 입었다. 새옷이란 것은 주몽이 떠나던 날에 입었던 옷을 모본하여 예랑이 손수 이날이 있기를 바라고 지은 것이었다.
 
387
예랑은 앞에 나타난 유리를 보고 새삼스럽게 그가 주몽을 닮았음에 놀랐다. 키가 주몽보다 약간 더 클까, 얼굴은 물론이요 몸매와 걸음걸이와 목소리까지도 그렇게도 닮았다고 예랑은 생각하였다. 주몽이 만일 제 얼굴을 안다 하면, 그 부러진 칼이라는 신표가 없더라도 유리만 보아도 제 아들인 줄을 알 것이었다.
 
388
예랑은 딴 사람과 같이 된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 보면서,
 
389
『네가 참 네 아버지를 닮았다. 아버지 젊으셨을 적 고대 로고나.』
 
390
하고 대견한 듯이 빙긋 웃었다.
 
391
유리도 웃으며,
 
392
『어머니께서도 그 옷을 입으시니 딴 어른 같으시오. 갑자기 스무 해는 젊어지신 것 같으시오.』
 
393
하고 다시 정색하며,
 
394
『어머니, 아까 그 어른이, 그 수염 나신 상감님이 분명 이 몸의 아버님이시오? 분명 이 몸이 그 어른 닮았소?』
 
395
하고 묻는다.
 
396
『그럼.』
 
397
하고 예랑은 약간 시무룩하며,
 
398
『분명 그 어른이시다. 분명 그 어른이 네 아버니시다마는, 처음 보시는 너를 그 어른이 알아 보실까. 이십년 만에 보는 이 몸인들 알아 보실까. 알아 보시기로니 그땟 정이 남았을까. 사람의 마음은 변하고, 사람은 떠나면 서로 멀어진다는데, 이 몸만은 마음 변한 일 없건마는─.』
 
399
하고 한숨을 쉬며 아까 본 가마 속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생각한다.
 
400
『어머니!』
 
401
하고 유리는 예랑의 앞에 가까이 와서,
 
402
『어머니, 염려마시오. 유리가 다 좋도록 할 것이니 어머니, 자, 가십시다. 늦기 전에, 일각이라도 빨리.』
 
403
하고 예랑을 재촉하였다.
 
 

 
 

24

 
405
벌써 술이 몇 순배, 용안은 불콰하였다. 술의 힘이 아니라도 마음이 풀어지고 흥이 솟아 오를 날씨다. 눈인 듯 날아 오는 버들꽃, 풍악에 섞여 드는 새 소리. 바람결이 싫은 왕의 약한 몸도 술김과 흥김에 훈훈하여서 잔물결 치는 앞 개울에 물을 차는 제비와 더불어 목욕이라도 하고 싶도록 기운이 났다.
 
406
『상감마마, 선선하지 아니하시온지?』
 
407
하고 가까이 모셔 앉은 오이가 말하였다. 오이는 재사와 함께 번을 갈다시피 하여서 국상(國相)의 직에 있었으나 상감과 사사로이 친근하기로는 더욱 오래 사귀인 오이가 고작이었다.
 
408
『이 따뜻한 여름날씨에, 설마.』
 
409
하고 왕은 길게 느리게 울려오는 풍악 소리를 방해 아니 하려는 듯 가만히 말하였다.
 
410
따르는 대로 왕은 술을 마셨다. 미상불 등골이 오싹오싹하였으나 왕은 그것을 이기려 하고 잊으려 하였다.
 
411
옆방에 모신 조시누는 가끔 시녀를 왕께 보내어 거북한 데나 없으신지, 누우시지 아니하실지, 술을 과히 잡숩지 마시도록─이 모양으로 마음을 썼다. 그러나 몸이 성치 못하다는 것에 화를 내는 왕은 남이 그것을 아랑곳하는 것이 도리어 불쾌하였고 모처럼 솟는 흥을 깨뜨리는 것을 귀찮히 여겼다.
 
412
『아무렇지도 않으니 염려 말라 하여라.』
 
413
하는 상감의 말씀이 옆방에서 마음을 쓰고 있는 조시누의 귀에 들어올 때에 조시누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왕의 음성에는 화 기운이 보였다. 조시누가 왕을 모신 지 십 팔 년에 한번도 왕이 성가시어하거나 화내는 빛을 못보았다.
 
414
화내는 빛을 보이는 것은 마음이 약하여진 때문이니 조시누는 이것으로 왕의 수명을 의심한 것이었다.
 
415
풍악 한 가락이 그칠 때에 문 지키는 장수가 들어와 왕께 아뢰었다.
 
416
『상감마마께 아뢰오. 어떤 젊은 사람이 상감마마 아드님이라 하옵고 뵈와지이다 하오니 어찌하올지?』
 
417
일좌가 다 아연하였다.
 
418
『이 몸의 아들이라고?』
 
419
하고 왕은 눈을 크게 뜨셨으나, 곧 껄껄 소리를 내어 웃고 곁에 모신 비루와 온조를 바라다 보며,
 
420
『잘못 알고 왔나 보다. 무어 먹을 것이나 주어 보내어라. 비루와 온조 밖에 이 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421
하여 더 알아 보려고도 아니하였다.
 
422
이것은 유리가 괴유를 데리고 유궁 문전에 왔던 것이었다.
 
423
『상감마마, 그렇지 아니하오.』
 
424
하고 재사가 나 앉았다─.
 
425
『상감마마, 잠룡(왕 되기 전)시에 그런 일이 있으셨다면 아드님도 겨오실 것이니 다시 한번 생각하심이 어떠 하오실지.』
 
426
왕은 이 말에 한숨을 쉬며,
 
427
『이 몸이 동부여에 있을 때에 예백의 딸 예랑과 그런 일이 있었더니라. 그러나 그는 아기를 낳을 새도 없이 죽었어─ 안 그러오, 오이?』
 
428
하고 오이를 돌아 본다.
 
 

 
 

25

 
430
『그러하오.』
 
431
하고 오이는 제게 크게 관계되는 일이어서 힘을 내어서 아 뢰인다.
 
432
『소인이 태후마마 첨배차로 동부여에 갔을 때에 분명히 예랑 아씨의 산소에 술을 따르고 절하고 왔소. 그것이 벌써 오년이나 되었소.』
 
433
『그것 보오, 재사. 사람이 무덤 속에서 아들을 낳을 수가 있다면 몰라도─자, 어서 풍악을 치고 춤을 추어라. 그 어인 젊은 손이 와서 이 몸의 심사를 장히 산란하게 하느냐. 어서 술을 부어라. 오늘 잔뜩 취하란다. 아니 취고 어이리. 자, 다들 마시오. 이렇게 좋은 날이 몇 날인가. 때 늦어 가지 않나?』
 
434
유궁에서는 끊임 없이 풍악 소리와 어여쁜 노랫 소리가 흘러 나와 꾀꼬리 소리와 어울렸다.
 
435
날은 맑고 따뜻하였으나 해가 낮이 기울면서부터 살랑살랑 바람이 일어 버들꽃과 민들레 털을 날리기 시작하고 강물에는 가는 물결이 일었다. 강언덕 냉이꽃이 낮볕을 받아 제법 금빛을 발하였다.
 
436
이때에 배 한 척이 상류에서 흘러 유궁 앞으로 내려 왔다.
 
437
그 배를 젓는 것은 젊은 무사요, 뱃삼에 기대어 앉은 이는 자주빛 긴 옷을 입은 한 여성이었다. 그것은 예랑과 그의 아들 유리였다.
 
438
유궁에서 흥겨워 노는 사람들은 이 배를 볼 여유도 없고, 강가에 구경으로 모인 백성들만이 이 이상한 배에 눈이 끌렸다.
 
439
배를 젓는 젊은 사람의 입에서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 곡조는 이 고장 사람들의 귀에는 서투른 것이었다. 그럴 수 밖에, 그것은 동부여 강에 다니는 뱃사람들의 노래 가락이었다. 노래 가락은 북방일수록 구슬프거니와, 슬픔을 품은 사람이 부르면 더욱 슬픈 법이다. 노래의 사설은 이러하였다─.
 
440
가섬벌 달 밝은 밤에 우물가에 말을 매시고 뉘 손에 물 받으시니꼬?
 
441
아으 그 뉘 손에 물 받으시니꼬?
 
442
가섬벌 달 밝은 밤에 버들 숲에 배 떠나신 제 눌 다려 눈물 지시니꼬?
 
443
아으 그 눌 다려 눈물 지시니꼬?
 
444
가섬벌 달 밝은 밤에 꺾으오신 한 도막 칼을 뉘 품에 맡기시니꼬?
 
445
아으 그 눌 주라 맡기시니꼬?
 
446
아무리 흥에 겨워 놀던 왕의 귀에도 이 노랫 소리는 아니 들릴 수가 없었다. 더구나 높고 긴 지름으로 뽑는 셋째 마디는 진실로 사람의 가슴을 헤치고 드는 것이었다.
 
447
첫마디는 주몽이 처음 예랑을 만나 물 한 그릇을 얻어 먹던 정경이요, 둘째 마디는 주몽이 위험을 무릅쓰고 예랑과의 약속을 지켜 왔던 것, 그리고 셋째 마디는 주몽이 칼을 분질러, 아들이 날 경우에는 신표를 삼으라고 남기던 정곡이니, 이것은 주몽과 예랑과 두 사람 밖에는 천지간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인 것이다.
 
448
유궁 연회에 모인 사람들의 눈도 귀도 다 강상에 뜬 작은 배와 거기 탄 두 사람(?)에게로 모인 것이다.
 
449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 위에 손을 대고 강상을 바라 볼 때에 신하들은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왕의 이상한 거동에 다들 몸에 소름이 끼쳤다.
 
 

 
 

26

 
451
왕은 한걸음 쓰러질 듯이 앞으로 나가며,
 
452
『이봐라, 저 강상에 뜬 배를 다들 보느냐, 나만 보느냐?』
 
453
하는 소리는 떨렸다.
 
454
『저기 저 배 말씀이오니까?』
 
455
하고 사람들은 왕에게 쏠렸던 눈을 강상으로 돌렸다.
 
456
『그래, 저 배. 사람들이 탄 저 배. 저것을 다들 보느냐, 내 눈에만 보이는 허깨비냐?』
 
457
왕은 미친 사람과 같이 눈을 크게 떴다.
 
458
『허깨비 될 리 있소. 분명 배요.』
 
459
하고 국상 오이가 아뢰었다.
 
460
왕은 그래도 못 믿는 듯이,
 
461
『온조야, 네 눈에도 저 배가 보이느냐? 저 배에 탄 사람도 보이느냐?』
 
462
하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온조의 팔을 잡았다.
 
463
온조는 왕을 부액하면서,
 
464
『아바마마, 진정하시오. 소인의 눈에도 분명 보이오. 젊은 무사는 노를 젓고 어떤 부인은 앉아 있소.』
 
465
하고 분명히 아뢰었다.
 
466
왕은 온조에게 몸을 기대며,
 
467
『그러면 저 배가 내 눈에 허깨비도 아니요, 저 배에 탄 사람이 귀신도 아니란 말이냐? 귀신이 아니면 이십년 전에 죽은 사람이 어찌 저기 있으며 이십년 전 주몽이 어찌 배를 젓는단 말이냐? 오이, 예랑은 죽었다고 아니하였는가?』
 
468
하고 왕은 오이의 소매를 끌어 당기니 오이는 황망하여 왕의 곁으로 비틀거리고 끌려 가며,
 
469
『그러하오. 소인은 분명히 가섬벌에서 예랑 아가씨의 무덤 앞에 술을 부어 놓고 울고 왔소.』
 
470
하고,
 
471
『가섬벌 달 밝은 밤에 꺾으오신 한 도막 칼을 뉘 손에 맡기시니꼬? 아으 그 눌 주라 맡기시니꼬?』
 
472
하는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473
왕은 그때에야 노래 사설을 분명히 알아들은 듯,
 
474
『꺾으오신 한 도막 칼 뉘 손에, 눌 주라.』
 
475
하고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더니 부액한 온조도 뿌리치고 방에서 내려와 후원 버들 숲으로 허둥허둥 내려 간다.
 
476
『상감마마, 상감마마─.』
 
477
하고 모두 왕의 뒤를 따랐다. 이 광경에 놀란 조시누와 작은 공주와 낙랑 왕의 딸과 기타 모든 궁녀들도 얼빠진 듯이 뒤를 따른다.
 
478
이상한 배는 버들 숲쪽으로 흘러 내려오며, 「가섬벌 달 밝은 밤에」를 연해 부르고 있다.
 
479
배는 천천히 물가에 닿았다. 왕은 닿는 배 가까이로 갔다.
 
480
왕은 배에 내리는 예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 신 없는 사랑의 목소리로,
 
481
『예랑! 내 아내 예랑인가. 살아 왔나, 죽은 귀신인가? 귀신이라도 좋아. 예랑 예랑!』
 
482
하고 떨리는 손을 내밀어 예랑의 손을 잡는다.
 
483
예랑은 푹 고개를 숙여 왕께 절하는 듯 땅에 쓰러지다가 유리에게 붙들려 겨우 다시 몸을 펴나 가슴만 들먹거리고 말문이 막힌다.
 
484
『아바마마, 유리요.』
 
485
하고 유리가 왕의 앞에 꿇어 엎디어 품에 지녔던 신표를 내어 두 손으로 받들어 왕께 올리며,
 
486
『이것이 아바마마께오서 어마마마께 남기시고 가신 칼끝 이요.』
 
487
하고 눈물 흐르는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488
왕은 그 칼끝을 받아 들고 한 손으로 허리에 찬 칼을 빼어 부러진 자리에 맞추어 보며,
 
489
『오, 내 아들 유리!』
 
490
하고 치어다 보는 유리의 눈을 내려다 보며 눈물을 뚝뚝 떨군다.
【원문】왕업(王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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