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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방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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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7
채만식
1
보리방아
 
 
2
남방의 농촌에는 이런 풍경도 있다.
 
 
3
용희(容姬)는 그늘 짙은 뒷마루에 바느질을 차리고 앉아 자지러지게 골몰해서 있다.
 
4
샛노란 북포로 아버지의 적삼을 커다랗게 짓고 있는 것이다. 날베가 되어서 여기 말로 하면, 빛은 꾀꼬리같이 고와도 동리가 시끄럽게 버석거린다.
 
5
급한 바느질이다. 그러나 거진 다 되어간다. 고의는 벌써 해서 옆에다 개켜놓았고 적삼도 시방 깃을 다는 참이다. 그래도 용희의 손은 바쁘게 놀고 있다.
 
6
고운 손결이다. 방아도 찧고 부엌에서 진일도 하지만 마디도 불거지지 아니한 몽실몽실한 손가락들이 끝이 쪽쪽 빠졌다.
 
7
손톱이 복사꽃잎같이 곱다. 소곳한 이마와 날씬한 콧등에 땀방울이 잘게 솟았다. 불그레한 볼이 갸름하게 턱으로 굴러내려갔다. 아직 배내털이 송글송글하다.
 
8
내리깔고 있는 눈이 그래서 눈초리가 더 올라가 보인다. 봉의 눈.
 
9
땋아내린 머리채가 마루에 닿고도 남았다.
 
10
기름기 없는 머리칼이 몇 개 이마로 처져 가끔 손질을 시키곤 한다.
 
11
용희는 실이 다된 바늘을 떼어가지고 실패를 찾다가 문득 숨을 호 내쉬면서 고개를 들고 잠시 우두커니 생각을 한다.
 
12
전에 보통학교에 다닐 무렵에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더러 장터에 사는 동무의 집에 들러서 얻어 써보던 재봉틀 생각이 났던 것이다.
 
13
그러나 그 편하고 재미있는 것도 학교를 졸업하던 재작년 봄까지가 써본 것이 마지막이요, 그 뒤로는 들어앉아 내외를 하느라고 장터에도 들어가 보지 못했고, 그래서 영영 재봉틀이라고는 구경도 못했던 것이다.
 
14
꿈에는 더러 재봉틀 바느질을 해보았다. 용희가 제것이라고 사놓고 쓰면서 좋아도 했고, 또 어쩌다가 산산 부서지든지 누가 뺏어가든지 해서 울다가 잠이 깨면 꿈이곤 하였다. 그래서 용희는 인제 기어코 재봉틀은 하나 사가지려고 골똘이 마음을 먹었다.
 
15
어머니를 졸라 이웃집에서 ‘배메기’로 암토야지 새끼 한 마리를 얻어다가 실상 먹여 기를 수도 없는 터에 용희가 제 몫으로 기르고 있는 것도 인제 요원(!)한 장래에 재봉틀을 사가지려는 커다란 포부에서 나온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희는 또 한번 숨을 호 내쉬면서 실패를 찾아 실을 꿰어가지고 손을 부지런히 놀린다.
 
16
오월이라고 하지만 윤달이 들었었기 때문에 유월 폭이다.
 
17
뒤 울타리로 숱하게 뻗어올라간 호박덩굴의 탐진 호박잎들이 내리쪼이는 불볕에 맥이 없이 처져 있다.
 
18
울타리 너머로 다가선 언덕의 솔숲에서 향긋한 송진내가 나른한 미풍에 섞여 자취 없이 스며내린다.
 
19
울타리 밑으로 기다랗게 두어 두둑 되는 고추밭에는 시커멓게 자란 고춧대에 세살박이 같은 고추가 벌써 열렸다. 앵도나무에 앵도가 구슬처럼 새빨갛게 다닥다닥 들어붙었다.
 
20
암탉 데린 장닭이 그늘진 울타리 밑에서 꼬꼬거리며 메를 헤적거리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홰를 치며
 
21
“꼬꾜─”
 
22
길게 한마디 운다. 뒤미처 신사(神社)에서 치는 오정 북소리가 감감히 들려오다가 그친다.
 
23
그리고는 사방은 다시 바스락 소리도 없이 고요하다.
 
24
해는 태고적부터 이렇게 낮은 듯이 늘어지게 길다. ─촉촉한 밤은 잊어버린 것처럼.
 
25
마을도 할머니의 옛이야기같이 조용하다. 졸립게도 조용하다.
 
26
열어놓은 앞뒷문으로 마주치는 가는 바람이 땀이 스민 용희의 이마와 등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다. 그럴 때마다 자릿한 쾌감에 그는 갸름한 눈을 더욱 갠소름하게 뜨곤 한다.
 
27
노인이라면 그대로 슬며시 일감을 놓치고 졸았으리라. 그러나 용희는 초랑초랑한 눈으로 바늘 잡은 손을 바지런히 놀린다.
 
28
한 코 또 한 코 이렇게 재게 떠나가다가 필경 실끝을 똑 잡아 떼면서 허리를 펴고 잠겼던 한숨을 내쉴 때에 앞마당에서 갑자기
 
29
“두, 저런 놈의 도야지가, 두.”
 
30
하고 발을 구르며 외치는 요란한 소리가 일어났다.
 
31
잘겁하게 놀란 용희는 앞마루로 뛰어나갔다.
 
 
32
앞마당에서는 용희의 아버지 태호가 손에 든 삽을 휘두르며 소리소리 치고 있고 허리에 줄을 맨 중도야지 한 마리가 마늘밭을 함부로 짓밟으면서 뛰어 달아나다가 울타리 밑 개구멍으로 빠져나가 버린다.
 
33
마당 한편에는 보리를 여남은 뭇이나 펴널었었다. 그것을 동리집에서 비끌어 맨 줄을 잡아떼고 도망해 나온 도야지가 지나던 길에 무심코 새겨먹다가 마침 논에서 돌아오는 태호한테 들켰던 것이다.
 
34
“망헐 놈의 동리! 도야지를 그렇게 놓아멕여서 남의 것으로 킬 테면 누구는 못헐까!”
 
35
태호는 이렇게 혼자 두런두런하면서 앞마루에 털썩 걸터앉다가 딸 용희가 민망해서 옆에 섰는 것을 보고 낯빛을 눅여
 
36
“늬 어머니는 어디 갔느냐?”
 
37
하고 보드라이 묻는다.
 
38
“콩밭으로 지(김치)거리 뽑으러 가섰다우…… 뒷마롱(마루)으서 바느질을 허는 새 도야지가 그렇게……”
 
39
용희는 이렇게 간신히 마당 지키지 못한 변명을 하였다.
 
40
그러나 딸이 변명을 아니하더라도 또 딸이 정말 잘못해서 보리를 좀 먹였더라도 겉으로는 물론 속으로라도 딸을 나무랄 태호는 아니다. 용희는 태호 내외에게 다시 없이 귀엽고 소중한 무남독녀 외딸이다.
 
41
하기야 태호가 나이 아직 마흔 살이니 자손을 영영 단념하기는 이르지만 십칠 년 전에 용희를 낳고 나서 이내 태호의 안해는 포태도 해보지를 못했다. 그동안은 냉으로 그랬다지만 남편보다 나이 다섯 살이나 위여서 마흔다섯이 된 태호의 안해는 건강한 여인이라도 거진 단산을 할 나이다.
 
42
그래서 내외가 요즘 와서는 자녀간 더 바라는 마음조차도 놓아버렸고 그런만큼 용희가 그들에게는 소중한 아들도 되고 귀여운 딸도 되는 것이다.
 
43
“게 옷은 다 히였느냐?”
 
44
태호는 마루에서 일어서면서 딸더러 묻는다.
 
45
“예…… 인제 대리기만 허면……”
 
46
“대리기는 그까짓 걸 무얼 대려야…… 그냥저냥 입어두지.”
 
47
“그리두……”
 
48
태호는 헛간에 가서 도리깨를 가지고 나온다. 아까 도야지가 바수어 먹던 보리를 치려는 것이다.
 
49
“아버지 즘신 잡숫구……”
 
50
“즘신? …… 게 있거라. 이것 쳐놓구 나서 한술 먹든지……”
 
51
“아버지 면역소 가신담서요?”
 
52
태호는 오늘 장터에 들어갈 일이 있어서 옷도 그렇게 부랴부랴 새로 지은 것이다.
 
53
“오냐, 이것 쳐놓구 가두 갠찮다.”
 
54
태호는 뙤약볕을 쪼이면서 도리깨로 보리를 치기 시작한다.
 
55
보리라야 작년 겨울의 추위에 태반이나 얼어죽고 남은 것은 거름맛을 못 보아 한 목쟁이에 보리알이 여남은 몇 개씩이나 붙었을까 말까.─ ‘물초란이’ 같이 못된 것이다.
 
56
태호는 어색하게 도리깨질을 터덕터덕 하고 섰다. 벌써 십 년 가까이 벗어 붙이고 ‘생일’을 하건만, 본시 선비집 자제로 태어나 이십까지는 한문 공부를 하고 삼십까지도 손에 흙은 묻혀보지 아니하던 샌님이라 종시 농군의 꼴은 박일 수가 없었다.
 
57
일을 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얼굴 생김새도 어느 편이냐 하면, 소위 ‘서방님’ 이었지 농군은 아니다. 고생에 찌들고 햇볕과 비바람에 그을기는 했어도 용희가 닮아 받은 준수한 코며 보드라운 얼굴의 윤곽이 옛날 미남자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58
태호가 보리를 거진 다 치고 나서 대를 추어내고 있을 때 안해 정씨가 열무를 조그맣게 한 다발 안고 들어온다.
 
59
얼굴이 볕에 익어 땀도 흐르지 아니한다. 용희가 아버지 태호를 닮았기 말이지 어머니를 닮았더라면 역시 어머니처럼 양미간이 넓고 코가 모양이 없고 얼굴이 헤멀그러져 남방에서 흔히 보는 여인네의 모습 그대롤 뻔했다.
 
60
“장터에 들어간다더니 안 가보시우?”
 
61
정씨는 허덕이며 대뜰로 올라서고 용희가 부엌에서 나와 열무를 받는다.
 
62
“인제 들어가 보아야겠네.”
 
63
태호는 하던 일을 마침 다 마치고 마루에 와서 앉는다.
 
64
“그것두 놉이나 하나 얻어서 가다구를 쳐버려야지…… 도리깨질 멫번 했더니 허리가 아푼걸……”
 
65
“워너니 자(저애)허구 나허구 한 뭇 두 뭇 손 나는 대루 뚜드려서 먹을틴디 무엇허러 도리깨질을 허라던그라우.”
 
66
“것두 다 어려서 생일(勞動)을 못밴 탓이지…… 우리 아버지두 내가 이 지경이 될 줄 아섰으면 글을 안 가르치구 생일을 가르치섰을 건디……”
 
67
‘서방님’이 농군으로 떨어졌으니 한몫 농군도 못 되는 ‘서방님’네가 곧 잘 팔자 한탄에 섞어 하는 소리다.
 
68
사립문 밖에서 밭은기침 소리가 나더니 구장이 끼웃이 굽어다본다.
 
 
69
구장이 온 것을 보고 태호는 사립문 밖으로 나오면서
 
70
“연설인지는 늑점버텀 시작헌다문서 벌써 재촉허러 왔넌가?”
 
71
하고 농삼아 묻는다.
 
72
“아니 그것두 그것이지만 자네 무색옷 장만했넌가?”
 
73
구장은 무심결에 자기가 입은 먹물 들인 두루마기를 내려다보면서 어색하게 웃는다.
 
74
“내사 두루매기는 입어서 무얼 허넌가? 보리바슴히여서 주마구 북포 한 필 그날 읃어다가 잠뱅이적삼 한 벌 히여놓았네…… 갠찮얼 티지?”
 
75
“글씨 첫물은 갠찮얼 터지…… 그럼 곧 들어가세…… 나는 또 이집 저집 돌아댕기면서 신칙을 히여야지…… 그놈의 짓 참말 고디어 못 히여먹겠네! 허허.”
 
76
“허허…… 피차에 먹구 살자는 노릇이니 헐 수 있넌가!”
 
77
“그리어! 목구녁이 포도청이구…… 그럼 천천히 오소.”
 
78
“어이 땡겨가세…… 나두 좀 일찍 들어가서 면에 가서 볼일 좀 보아야겄구만.”
 
79
태호가 구장을 보내고 들어오니 앞마루에는 밥상을 차려놓았고 뒷마루에서는 아내 정씨와 용희가 다림질을 하고 있다.
 
80
“아무렇게나 슬슬 문대두소. 더운디……”
 
81
태호는 마루로 올라앉으면서 안해를 돌려다보고 말한다.
 
82
“잘 대리구 싶어두 깜부기(끈숯)불이라 대려지지두 않겄수.”
 
83
“콩밭은 어떻기 생깄던가? …… 지꺼리가 저 꼴인 걸 보니 아마 콩두 저렇기 배배 꾀였지?”
 
84
“꾀구말구라우! 날이 비가 좀 와야 밭곡식이 살어나지! …… 이러다간 콩두 숭년 들 것입디다……눈은 아직 말르지나 안힜던그라우?”
 
85
“응, 아직 말르지넌 안히었데마는…… 그리두 제법 검싯검싯허던걸…”
 
86
태호는 논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으기 흡족했다.
 
87
우후종이지만 다른 사람의 논처럼은 아직 물도 마르지 아니하고 했으니까 인제 비만 잘 오면 그 논에서 스무 섬은 넘겨 먹을 것이다.
 
88
도조 일곱 섬에 암모니아 값이야 장리야 다 제해도 여덟 섬은 떨어질 것, 거기다 빚이나 얼마 얻으면 올 가을에는 딸을 여읠 수가 있는 것이다.
 
89
“멘역소서 장리럴 좀 줄란가 모르겄수?”
 
90
정씨는 다른 삼베 고의적삼을 들고 앞마루로 나오면서 남편더러 걱정삼아 묻는 것이다.
 
91
늦은가을, 겨울, 이름봄에는 굶기도 하고 조팝으로도 살아나왔다. 사월부터는 솥을 씻어놓고 기다리던 보리를 먹기 시작했다.
 
92
보리가 그렇게 흉년만 아니었어도 밭 두 자리만은 자기 것이니까 밭도조를 물을 것도 없고, 한 석 섬 가량은 온곳 낼 수가 있었다.
 
93
그러나 그새 먹은 것이 여남은 말 될까말까한데 시방 헛간에 다발째 쟁여둔 것이 다 털어도 열 말이 못될 판이다.
 
94
그놈을 그대로 먹으면 한 달 양식밖에는 아니 된다. 그러고 나면 앞일이 걱정이다.
 
95
논은 고지를 주어서 지으니까 논농사에는 농량이 들 것이 없다지만 밭농사는 놉을 대어야 할 터인데 일꾼들한테 보리 곱삶이만 먹일 수도 없다.
 
96
또 보리에다 쌀을 조금씩만 섞어 먹으면 훨씬 마딘 법이다.
 
97
그래저래해서 오늘은 강연을 들으러 갈 길에 면소에 들러서 면에서 대부하는 농량을 좀 얻어오자는 것이다.
 
98
정씨는 그것을 태산같이 믿고 있던 판이다.
 
99
“글씨 원 어떨는지……”
 
100
태호는 이렇게 분명찮은 대답을 하면서 시꺼면 꽁보리밥을 한 덩이 덜어서 찬물에다 꺽꺽 말고 있다.
 
101
반찬이란 건 아침에 먹던 찬 된장 한 뚝배기에 보리고추장과 밋지(무김치) 몇쪽이다.
 
102
“용희야, 너두 밥 먹어라.”
 
103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용희더러 태호가 하는 말이다.
 
104
“츤츤히 먹어요.”
 
105
용희는 부엌 앞문으로 나오다가 마침 도야지울에서 도야지 새끼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 그리로 간다.
 
106
“저걸 굶기기 아니면 이런 곱삶이만 먹여서!”
 
107
태호는 지금 자기 입 속에서 씹는 대로 잘 씹히지는 아니하고 요리조리 미끄러져 나가는 입맛 없는 꽁보리밥을 새삼스럽게 어설퍼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108
용희는 도야지울 옆으로 가서 무엇을 좀 줄까 하고 망설이다가 울타리에 덮인 호박잎을 우둑우둑 뜯기 시작했다.
 
109
그때 마침 이웃집 옥례가 사립문으로 꺄웃이 들여다보다가 용희를 보고 긴하게 손짓을 한다.
 
 
110
용희는 호박잎을 뜯던 손을 멈추고 돌아보면서 같이 손짓을 한다.
 
111
그래도 옥례는 손짓만 하고 섰다.
 
112
“누구 왔냐?”
 
113
마루에서 어머니가 묻는다.
 
114
“응, 옥례……”
 
115
“왜 안 들어오구…… 들어오니라 옥례냐.”
 
116
“갠찮이여라우.”
 
117
용희는 뜯던 호박잎을 도야지 밥구시에 넣어주고 사립문께로 나갔다.
 
118
“재봉틀장수 왔어.”
 
119
옥례는 가만히 귓속말하듯이 하나 그도 퍽 긴장한 눈치다.
 
120
용희한테는 여간만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그의 눈은 빛났다.
 
121
“응? 어디?”
 
122
“우리 집에…… 가서 보자 응……”
 
123
그러나 용희는 반가운 것은 다만 일순간이었었다. 가서 구경할 생각도 나지 않는다.
 
124
재봉틀! 그것을 파는 장수!
 
125
그리고 그 장수가 바로 그 옆집에 와서 있다. 그러니 반가왔다. 그러나 그 뿐이다. 척 살 수가 있어야 말이지…
 
126
“재봉틀 가지구 왔데?”
 
127
“아니 사진만 가지구 왔더라.”
 
128
“늬집이서넌 사냐?”
 
129
“자꾸 사라구 졸르넌디 돈이 있어야 사지!”
 
130
“을매(얼마)씩인디?”
 
131
“몰라. 머 여러가진디 제일 헐헌 놈이 월부루 허먼 한 달에 칠 원씩 열여덟 달 낸다더라.”
 
132
칠 원이면 여기 돈으로 서른닷 냥이다. 서른닷 냥이면 보리가 거진 한섬 값이나 된다. 그러니 그것을 칠 원 한번만 내고 사라고 해도 어려울 텐데 황차 다달이 칠 원씩 열여덟 달!
 
133
용희는 속으로
 
134
‘새수빠진 장수! 내가 도야지를 길러서 재봉틀 살 돈을 모아놓거들랑 오질 않구.’
 
135
이렇게 안타까와했다. 그는 차라리 그 소식을 듣지 아니한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괜히 맘만 들뜨게 해놓고.
 
136
그런 속도 모르고 옥례는 용희의 소매를 잡아끌다시피 하면서
 
137
“가서 이야기라두 듣구 사신이라두 구경허구 그러지.”
 
138
“싫다.”
 
139
용희는 처음과는 아주 딴판으로 추렷해서 있다.
 
140
“괜히 사지두 못하면서 보아야 속만 더 상허지…… 너나 늬 어머니더러 하나 사달라구 그리라.”
 
141
“어머니가 사준다냐 멀.”
 
142
“그리두 너넌 네 소랑 또 도야지랑 여러 마리 있으니까……”
 
143
옥례도 시치름해서 고개를 살래살래 내흔든다.
 
144
“안 사준단다…… 하나 사주었으면 졸 틴디……”
 
145
이야기를 하고 섰는데 태호가 장터 출입을 하느라고 나왔다.
 
146
옥례가 비껴서면서
 
147
“어디 가기라우?”
 
148
하고 인사를 한다.
 
149
“오냐, 장터 좀 들어간다. 늬 아버지두 가실 틴디 아직 안 가섰냐?”
 
150
“인지 가신대라우.”
 
151
“들어가서 놀지, 문앞에 가 그리 섰냐 들.”
 
152
태호는 중길이나 되는 담뱃대를 털고는 골목으로 나간다. 용희는 그 뒤를 바라보았다.
 
153
제가 한 바느질이라 자연 새로 입고 나서면 눈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용희의 눈에는 바느질보다도 아버지의 초라한 행색이 먼저 눈에 띄었다.
 
154
고무신에 대님은 양말 목에다가 매고 고의 가랑이는 정갱이에서 반까지밖에 더 내려오지 아니한다.
 
155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썼고 물론 동저고리 바람이다.
 
156
용희가 한 일고여덟살 때만 했어도 그때의 아버지는 저렇게 상스럽게 차리고는 장터 출입을 아니하셨는데, 생각하니 재봉틀이고 무엇이고 생각이 다 달아나버리는 것 같았다.
 
157
“용희 밥 안 먹을래?”
 
158
안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용희는 정신이 들었다. 옥례는
 
159
“나 그럼 울어머니 한번 더 졸라보께.”
 
160
하고 도르르 가버렸다. 용희는 잠시 우두커니 섰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161
“옥례가 왜 왔더냐?”
 
162
어머니는 용희의 새촘한 기색을 보고 혹 무슨 일이나 있었나 해서 묻는 것이다.
 
163
“재봉틀 장수 왔다구……”
 
164
용희는 지금 앞에 놓인 보리밥같이 입맛 없는 대답을 한다.
 
165
“재봉틀 장수? 재봉틀 장수가 이런 촌구석에는 멋허러?”
 
166
“몰라…… 시방 즈이 집에 왔다구 나더러 가보자구.”
 
167
“옥례네는 산다데야?”
 
168
“안 산대여……”
 
169
“그렇지 머…… 그 집두 제 땅마지기나 있다지만 무슨 수루 재봉틀을 사놓겄냐.”
 
170
모녀는 보리밥을 고추장에 비벼서 잠시 서로 떠먹다가 용희가
 
171
“나 재봉틀 하나 샀으면……”
 
172
하고는 제딴에도 웃는다.
 
173
어머니는 숟갈을 들고 잠시 딸을 바라보다가
 
174
“인자 부자집으루 시집가거던 재봉틀두 사구 다 그리라.”
 
175
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거린다.
 
176
시집이란 소리가 나면 언제든지 그러듯이 용희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177
용희는 어린 처녀다운 부끄러움에 어머니가
 
178
“……시집을 가거든……”
 
179
이라고 하는 말에 볼을 붉히고 고개를 돌리기는 하였으나 그러면서도 귀가 솔깃하기도 했다.
 
180
시집을 가면…… 그렇지 부자집으로 시집을 가면……
 
181
그러나 용희의 상상의 시야는 거기서 더 넘어가지를 못했다.
 
182
시집은 대체 어떻게 해서 가는 것이며, 어디로 누구한테로 가는 것이며, 그리고 어떻게 누가 재봉틀이며, 또 그보다 좋은 것들을 사주게 되는지 용희는 그래서 그것을 알 수도 없으려니와 믿을 수도 없었다.
 
183
그보다는 도야지가 한결 미더웠다.
 
184
시월에 가면 ‘배메기’로 얻어온 저 도야지가 새끼를 날 테니까 열 마리만 날 셈 치고 그중 한 마리는 걸구를 껴서 돌려주고 나머지는 아홉 마리, 아홉 마리에서 두 마리쯤 축질 요량을 해도 일곱 마리, 일곱 마리를 한 마리에 사 원씩만 받아도 이십팔 원, 이십팔 원이면 십사 원짜리 송아지가 두 마리, 그놈을 일년 반만 먹이면 큰소가 두 마리…… 큰 소 한 마리에 얼마씩이나 하나?
 
185
“어머니, 큰소 한 마리 얼마씩이나 헌대여?”
 
186
용희는 무심결에 이렇게 물었다.
 
187
어머니는 이애가 갑자기 이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용희를 바라보다가
 
188
“왜 재봉틀은 그만두구 인자는 소를 살래?”
 
189
하고 웃으면서 묻는다. 용희도 따라 웃는다.
 
190
“응, 아니 팔게……”
 
191
“팔어? 소가 어디 있어서?”
 
192
“인제……”
 
193
“인제? 인제 누가 너를 소를 한 바리 갖다 준다데야?”
 
194
“아니, 저 도야지 키어서……”
 
195
“원! 지집애두…… 나넌 무슨 소리라구! ……그리라. 어서 키어서 송아지를 사놓아라.”
 
196
어머니는 될 수 없는 말이라고 하려다가 딸이 낙심이 될까봐서 그렇게 대답해 준 것이다.
 
197
“큰소 한 바리면 오백 냥(백 원)은 받을 테닝께 잘허면 재봉틀 하나 헌 놈으루 사겄다.”
 
198
용희는 방그레 웃었다. 그러면 한 마리는 집에 두어두어 부리게 하고 한 마리만 팔아도 넉넉한 것이다.
 
199
마침 도야지가 입맛 사나운 호박잎을 먹다가 물리고 삑삑 소리를 친다.
 
200
용희는 부리나케 내려가서 도야지울을 들여다본다. 아직 중돌도 못된 새끼다. 잘 얻어먹지 못해서 뒷다리가 배배 꼬이고 눈곱이 다닥다닥 붙었다.
 
201
용희가 와서 섰는 것을 보고 주둥이를 벌씸거리면서 연신 꿀꿀거린다. 무엇 먹을 걸 좀 달란 말이다.
 
202
“어서 호박잎이나 먹어라. 저(겨)넌 이따가 방애 찧어서 주께.”
 
203
용희는 사람한테 말을 하듯이 타이르나 도야지 새끼는 알아들을 턱이 없다.
 
204
용희는 도야지를 굽어다보고 있노라니까 어느새 그놈이 큰소가 되어서 무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너머로 다르르 바늘이 오르내리는 재봉틀이 보이는 것 같다.
 
205
도야지는 밥을 주지 아니하니까 꿀꿀 소리는 그만두고 다시 삑삑 우는 소리를 지른다.
 
206
“게 있거라. 내 그럼 방애 곧 찧어서 네 밥 주께.”
 
207
용희는 이렇게 도야지를 달래듯이 말을 하고 돌아서서 마루로 왔다.
 
208
어머니는 아까 해온 열무를 다듬고 있다.
 
209
“어머니 방애 안 찧어?”
 
210
“찧기는 찧어야겄다. 보리쌀이 저녁거리밲이(밖에) 읎지야?”
 
211
“응.”
 
212
“그럼 찧어야겄다만 좀 있다가 찧어야지 시방 어디 더워서 찧겄냐?”
 
213
“시방 찧어야 엽쳐서 널었다가 대끼기가 좋지.”
 
214
그것도 그거려니와 용희는 기왕 방아를 찔 바이면 바삐 찧어서 도야지를 겨를 주자는 것이다. 자꾸자꾸 먹이기만 하면 먹이는족족 도야지가 물씬물씬 자랄 것만 같았다.
 
215
“그럼 내가 채리놓구 먼저 엽치기 시작허께 어머니.”
 
216
“그리라만 더웁다.”
 
217
“갠찮어……”
 
218
용희가 그래서 서편으로 있는 헛간 앞 그늘에 멍석을 펴고 절구통을 굴려다놓고는 가마니에서 보리를 퍼다 붓는데 사립문 앞으로 웬 낯선 여인네가 둘이나 끼웃이 굽어다보더니
 
219
“이 집인가 원……”
 
220
하고 마당으로 들어선다.
 
221
“이 집이 윤씨댁이요?”
 
222
앞에 선 한 오십이나 먹어보이는 뚱뚱한 여인이 이렇게 묻는다.
 
223
그러면서 집안과 그중에도 용희를 찬찬히 뜯어본다.
 
224
윤씨란 이 집 성이다.
 
 
225
장성한 딸을 둔 어머니의 직감은 예민하였다. 정씨는 그 안손님네가 무엇하러 온 것인지를 첩경 보고 눈치를 채었다.
 
226
그러고 보니 당황했다.
 
227
앞에 서서 들어와 맨 첨 말을 묻는 아낙네며, 또 그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십 가량 되어 보이는 아낙네며 차림새나 언동이나가 너무도 이 집에는 얼리지 아니하게 사치스럽고 귀골다왔다.
 
228
그래서 정씨는 무엇 보자기라도 있으면 그 범절이 지지리도 궁해 보이는 자기 집안 꼬락서니를 푹 덮어버리고 싶었다.
 
229
그런 중에도 제일 무색한 것은 선을 보여야 할 ‘새악시’ 용희가 보리방아를 찧으려다가 들킨 것이다. 그 입은 옷이며.─
 
230
그러나 그렇다고 우두커니 서서 멀뚱멀뚱 보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
 
 
231
뚱뚱한 여인은 이렇게 대답을 한다.
 
232
“못쓸 것이, 이렇게 가난헌 집에서 며누리를 읃어가구 보면 개개 탈이란 말이여…… 허기사 규수는 언뜻 보매 갠찮얼 것 같네마는……”
 
233
“내 말두 그 말이요. 그리구 웬만치 칭이 나야 말이지. 이러구서야 새악시가 무엇 음식 하나 바느질 한 감 밸 수가 있었겠소? 부엌에서 진일이나 허구 보리방아나 찧구 허느라구……”
 
234
가냘픈 여인이 이렇게 자상스럽게 소견을 말하는 것이다.
 
235
정씨는 등에서 식은땀이 오싹 나고 앞이 캄캄해졌다.
 
236
분한 깐으로는 쫓아나가서 한바탕 욕이라도 해주고 싶으나 체면에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237
정씨는 그래도 당장 변해진 안색을 보이지 아니하려고 잠시 부엌에 더 머뭇거리다가 캑 기침을 하고 앞마루로 나갔다.
 
238
주인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나그네들은 일어섰다.
 
239
“왜 벌써 일어스세요? 땀이나 들여서 즘심진지나 좀 잡숫구 가시지……”
 
240
정씨는 주인 된 도리로 이렇게 권하기는 하나 그들이 속히 일어서는 것이 속으로는 시원했던 것이다.
 
241
“아이구, 그렇게 폐를 찌쳐서 쓸라구요.”
 
242
뚱뚱한 여인이 이렇게 너무 고지식하게 사양을 하고 벌써 마당으로 내려섰다.
 
243
정씨에게는 그것이 더욱 얄미웠다. 가난뱅이 집에서 무얼 그 푸달진 점심을 얻어먹으랴 싶어 그러는 것 같아서.─
 
244
“따님두 퍽 좋게 두섰소.”
 
245
가냘픈 여인이 이렇게 치하를 한다. 정씨는 더욱 아니꼬운 생각에 그저
 
246
“멀이요.”
 
247
하고 코대답을 했다.
 
248
용희는 부엌에서 꾸어온 밥쌀을 씻다가 우두커니 서서 사립문으로 나가는 그들을 바라다보았다.
 
249
“왜 저렇게 일찍 갈까?”
 
250
용희는 궁금했다.
 
251
그 여인네들이 선을 보러 온 줄을 알고 부끄러워서 뒤 울안으로 뛰어들어는 갔으나 속은 이상하게 동요가 생기었다.
 
252
물론 집안이 가난이 꾀죄죄 흐르는 것, 꼴사나운 주제를 하고 방아를 찧으려고 섰다가 들킨 것이 또한 부끄럽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한편으로는 느긋이 기쁘기도 했었다.
 
253
조금 전에 어머니가
 
254
“……시집을 가거든, 부자집으로 시집을 가거든……”
 
255
한 그 말이 도로 생각이 났었다.
 
256
선을 보러 온 여인네들은 갈데없이 부자집 여인네들이다.
 
257
그러니 그래서 그런 부자집으로 정말 시집을 가게 되나보다 싶었던 것이다.
 
258
부자집으로 시집을 가면?
 
259
이렇게 용희는 생각해 보았으나 어떻다는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용희가 부자로 살아보지를 못했으니까 모르는 것이다.
 
260
그러나 무엇보다도 재봉틀을 사가질 수가 있고 그리고 시방 사는 것처럼 가난하지는 아니할 것이고……
 
261
그러고 새서방은? 하고까지 용희는 얼굴을 스스로 붉혀가며 생각해보았다.
 
262
그러나 그것은 더구나 알 수가 없었다.
 
263
그러면서 용희는 한편 나그네들을 점심을 대접해야 할 것도 생각하고 있었다.
 
264
쌀은 뒷집 막내네 집에서 취하고 반찬과 그릇은 옥례한테 기별을 해서 빌려오고 그러려던 참인데, 어머니가 나와서 이것저것 시키니까 그 말을 듣고 하는 체했지만 속은 아주 우렁이속같이 깊었던 것이다.
 
265
그래 그는 부랴부랴 쌀을 취하고 또 막내네를 시켜 옥례한테로 이것저것 보내달라고 기별을 하고는 밥쌀을 씻는데 나그네들이 갑자기 돌아가고 보니 맥도 풀리고 궁금도 했다.
 
266
어머니는 들어와서 용희가 쌀을 씻다 만 것을 보고
 
267
“밥 허지 말어라.”
 
268
하며 아주 좋지 않은 기색이다.
 
269
그러고 돌아서면서 혼잣말로
 
270
“망할 년들! 가난허다구!”
 
271
하고 혀를 찬다.
 
272
용희는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273
가난하게는 살았어도 어머니 아버지의 귀염 밑에서 남의 해피나 정가를 받지 아니하고 자란 용희다. 그런데 이날 공연히 두 여인이 와가지고는 용희에게는 생전에 당해보지도 못한 멸시를 주고 흔연히 돌아간 것이다.
 
274
솟아오르는 부끄러움과 노염에 용희는 헉헉 느껴 울었다. 그렇듯 아니꼬운 심정들인 것도 모르고 혼자 좋아서 멋없이 납뛴 것도 또한 못견디게 안타까웠던 것이다.
 
 
275
용희는 뒷마루로 가서 엎드려 실컷 울다가 겨우 눈물을 거두고 일어나 앉았다.
 
276
울고 나니 답답하던 속이 탁 트이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277
그는 혼자 속으로
 
278
‘내 시집을 가나 보아라. 한평생……”
 
279
이렇게 소리 없는 이를 보드득 갈았다.
 
280
시집이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으나 그것은 아까 왔던 그 여인네들같이 거만스럽고 도도하고 밉살머리스러운 것인 듯싶었다.
 
281
어머니도 앞마루에서 울고 있다가 뒷마루로 나왔다.
 
282
“울지 마라. 울면 소용 있냐. 세상이 다 그런 걸…… 내가 너를 부자집으루 시집을 보내자구 맘을 먹은 것버텀 아예 망녕이지…… 아니꼽구 칙살시런 세상!”
 
283
어머니는 이렇게 딸을 위로해 주는 것이다.
 
284
심부름을 보냈던 막내네 어머니가 커다란 소쿠리를 안고 부엌으로 돌아 뒷마루에다 놓으면서 두리번두리번하다가
 
285
“나그네 왔다더니 어디 갔수?”
 
286
하고 눈이 퉁퉁 부은 모녀를 미심쩍게 번갈아 본다.
 
287
“갔다우.”
 
288
정씨가 내키잖게 대답을 한다.
 
289
소쿠리에는 깨끗한 그릇이야 수저야 또 반찬이야가 담겨 있었다.
 
290
그것을 보니 정씨는 새삼스럽게 창피하고 심정이 상했다.
 
291
“그럼 이건 괜히 읃어왔구만…… 누구 친정댁으서 오섰다 갔수?”
 
292
왔다던 손님은 가고 없고 주인 모녀는 눈이 붓게 울었고 하니까 막내네 어머니도 분명 친정에서 누가 왔다가 훌훌히 떠나매 그래 섭섭해서 그러는 줄 짐작한 것이다.
 
293
정씨는 서글퍼서
 
294
“아니.”
 
295
하고 코대답을 한다.
 
296
“그럼 이건 도루 갖다주어야겄구만…… 그 집으루 시방 나그네가 와서 벅석허던디.”
 
297
“웬 나그네?”
 
298
정씨는 혹시 그런가? 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299
“멋 옥례 선을 보러 왔다넌갑디다…… 아주 즘잖허게 생긴 부인네가 둘이 왔는디…… 저 ××사넌 큰부자라구 그러던디라우.”
 
300
말을 들으면서 용희 모녀는 얼굴에 화로불을 끼얹는 것같이 확확 달았다.
 
301
“그리서 즘신을 대접하는가?”
 
302
속은 쓰리면서두 이렇게 꼬치꼬치 파묻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303
“예. 시방 닭을 잡넌다 무얼 헌다 야단이 나구, 옥례넌 입이 귀밑까지 째져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허구…… 그러구 선보러 온 이덜두 좋아서 야단이던디라우.”
 
304
“무어라구?”
 
305
“새악시가 이뿌구 얌전허다구.”
 
306
“어서 그거 도루 갖다 주…… 왁자허게 떠들지넌 말구…… 나그네가 곧 가서 쓰잖었다구 그러구 조용히 갖다 주.”
 
307
정씨는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핑계삼아 막내네 어머니를 쫓아버렸다.
 
308
막내네 어머니와 엇갈려서 이번에는 양머리를 한 채 운동화를 신은 여자 하나가 손에다 낡은 바스켓을 들고 들어와
 
309
“이 댁에 재봉틀 부속품 안 사십니까?”
 
310
하고 앞마루에 척 걸터앉는다. 얼굴이 무섭게 길고 검은 여자다.
 
311
재봉틀이란 말에 용희는 그래도 얼른 내어다보고 정씨는 긴찮은 나그네란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312
그러나 재봉틀 부인은 움직이려고도 아니하고 그대로 앉아 구변 좋게 말을 벌려놓는다.
 
313
“아이구, 이 댁에두 저런 좋게 생긴 처녀가 있군! 이 옆엣댁에는 방금 선을 보러 왔다고 법석을 놓는데……”
 
314
말하는 눈치가 아까 옥례가 이야기하던 그 재봉틀 장순데 거기서 노닥거리다가 아마 점심까지 얻어먹고는 이리로 온 모양이다.
 
315
집을 문전이며 살림살이로 보아 더구나 삯바느질도 없을 이 벽촌에서 재봉틀을 가졌거나 또 새로 사거나 할 듯싶지 아니하다는 것은 이편에서 말도 하기 전에 알았으련만 그 재봉틀 부인은 무슨 딴 궁리가 있음인지 바스켓을 열고 카달로그를 줄 벌여놓으면서
 
316
재봉틀 광고올시다. 이걸 구경허시구 새루 하나 사십시요. 종류두 여러 가지요 값도 여러 가지 것으로 있읍니다.”
 
317
하고 나서
 
318
“월부로 팔기도 합니다.”
 
319
라고 덤을 붙인다.
 
320
정씨는 아까 일로 용희가 속이 언짢아 있을 것을 아는지라 그것을 잊어버리게 하느라고
 
321
“나가서 구경이나 허자…… 아니 시언헌디 이 뒷마롱으로 오시요.”
 
322
하고 재봉틀 부인을 청해들인다.
 
 
323
종이에다가 사진을 찍은 카달로그가 아니고 실물이라면 용희는 좀더 가지고 싶은 생각도 났을 것이나 첫째 실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 그는 좀 뒤적거리다가 그냥 물러앉았다.
 
324
그것을 보고 재봉틀 부인은 묘하게 말머리를 돌린다.
 
325
“그 처녀 참 좋게두 생겼다! 올에 몇이요?”
 
326
좋게 생겼다고 추는 말을 용희는 솔직하게 들으면서
 
327
“열일곱 살이라우.”
 
328
하고 대답했다.
 
329
“열일곱살?? 어쩌면! 숙성두 허지…… 학교에 다녔수?”
 
330
“예, 보통학교……”
 
331
“응…… 그러구는 들어앉어 내우를 헌다! 공부를 더 했드라면 좋았을걸! …… 아까운걸.”
 
332
“계집애가 육 년이나 핵교 댕겼으면 구만이지 공부를 더 하여서 무엇허게요.”
 
333
정씨는 이렇게 한마디 거든다. 그는 그 끝에 ‘돈이 있으면 다 되는 세상!’이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다.
 
334
“에구, 천만에 말씀이지요. 지금 세상은 여잘수룩 공부를 더 잘해야지요…… 더구나 저렇게 얌전허구 똑 떨어진 색시가 공부를 척 잘허구 나서보시요! 천하의 ‘모담보이’가 다 추앙을 허구 덤비지요.”
 
335
정씨는 ‘모담보이’가 무슨 말인지 뜻은 모르겠으나 좌우간 잘난 사람들이라는 일본말인 줄만 생각했다.
 
336
그러나 용희는 그래도 그 말을 알아들었다.
 
337
“거 아깝다! 나더러 부탁을 허시면 좋은 데 천거를 해드리련만!”
 
338
재봉틀 부인은 용희의 얼굴을 바라다보면서 이렇게 절절히 탄식을 한다.
 
339
“존 디라니요?”
 
340
“좋은 신랑감도 골라 드릴 수 있구……”
 
341
“누가 이런 촌기집애한티루 그런 좋은 신랑이 장가를 온다던그라우? 다 괜헌 말이지.”
 
342
“천만에! 아 시방 청년들은 순진한 농촌 처녀를 더 좋아합니다.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지…… 사실 도회지의 신여성들은 건방져서 못쓰지요. 속에 식자나 들었다구 도도허게 굴구…… 글쎄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섬기잖으러 드는걸……”
 
343
“참 요새 시체 새악시덜은 시부 밑에서 시집살이를 안헐라구 그런답디다.”
 
344
정씨는 재봉틀 부인의 입담에 옭히어 이렇게 혹해가지고 이야기를 청한다.
 
345
“그렇구말구요! 일허기 싫으니까 그래요…… 시집살이뿐입니까? 단둘이 살면서두 밥 아니 해먹구 양식 주문해다 먹기, 밤이면 극장에나 다니기…… 머 형편 아니지요.”
 
346
한 십 년 전에 신여성을 공격하는 데 쓰던 문구도 여기서는 기발하고 참신했다. 정씨는 그런 외국말 같은 어려운 문자를 알아듣지는 못하나 어쨌건 재봉틀 부인의 이야기가 재미는 있었다.
 
347
그 기회를 보아 재봉틀 부인은 제이의 화살을 슬며시 쏜다.
 
348
“그러니 댁의 따님두─아까 내가 공부 더 시키란 말은 지나는 말이지만, 또 허기야 공부해서 신여성이 되면 다 그렇게 버리란 법이야 있나요 어데? 더구나 저렇게 영리하게 생긴 색시야─그러니 좌우간 어데 좋은 청년 하나 소개할 테니 결혼이나 허게 허십시요그려?”
 
349
“그렇지만 어디 그렇게 속 모르던 자리에 불쑥 혼인을 헐 수야 있어요?”
 
350
“허! 그거야 인제 다 서루 맞선두 보구 그래야지요.”
 
351
그러나 그건 정씨에게 썩 내키지도 아니하는 말이다. 아까 일로 보아 집안이 너무 층이 지는 혼인을 이제는 이편에서 도리어 거절을 할 형편이다.
 
352
용희도 말은 아니하고 있어도 아예 마땅치 아니한 수작이어서 거들떠보지도 아니했다.
 
353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못쓰지라우. 다 저이 찌리찌리(끼리끼리) 만나서 살어야지……”
 
354
정씨는 이렇게 주장을 했다.
 
355
재봉틀 부인은 세째의 화살을 내어놓는다.
 
356
“그두 생각허면 그렇기는 허지요…… 그러면 내 정말 좋은 일에 천거허리까?”
 
357
“무언디요?”
 
358
“실례올시다마는 댁이 아마 가세가 좀 어려우시지요?”
 
359
“예, 그저 농사나 짓구 살자니 그저 어렵지요.”
 
360
“그러면 댁의 따님을 제사공장으루 보내십시요. 내가 데리구 가서 잘 천거해 드리지요.”
 
361
이 말은 정씨나 용희에게 다같이 솔깃한 말이다.
 
362
미상불 전에 이 마을에서 두엇이나 ‘비단 짜는 데’ 즉 제사회사의 여공으로 뽑혀갈 때에 용희도 가고자 했고 태호나 정씨도 보낼 생각이 없지는 아니했었다.
 
 
363
만일 용희의 위로든지 아래로든지 달리 아들이나 딸이 있었다면 태호 내외는 그때에 벌써 용희를 전주(全州)의 제사공장으로 보냈었을 것이다.
 
364
그러나 둘도 없는 딸 하나를 비록 백리 상거밖에 아니 되는 곳일망정 보내버리고 나면 두 내외가 쓸쓸히 지낼 일이 아득해서 그냥 작파를 했던 것이다.
 
365
그 뒤에 전주로 간 두 아이 중에서 하나는 그대로 전주에 있고 하나는 바로 뒷집 막내네 집 딸인데 전주서 서울로 갔다더니, 이내 가끔 돈 십 원씩 한 오륙 원씩 부모에게로 부치곤 하고, 그것이 어려운 살림에 여간한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었었다.
 
366
그래서 그때에 용희도 전주로 보냈더라면 첫째 집안에서 굶주리고 헐벗고 하는 고생도 아니할 것이요, 더구나 제 돈냥이나 모아서 나중에 시집을 가게 되면 거기에 떰뜻이 보태어 쓰게 되었을 것인데 하는 생각으로 태호 내외는 적잖이 후회도 했었던 것이다.
 
367
그뿐 아니라 막내네 집 딸 복동이가 서울서 가끔 보내주는 십 원이니 오 원이니 하는 돈은 온 마을이 부러워하고 있는 판이다.
 
368
그런데 마침 아까 선보러 왔던 그런 일이 있고 보니 정씨도 정씨려니와 용희의 마음은 지금 당장이라도 따라나서고 싶은 생각이 꿀맛 같았다.
 
369
재봉틀 부인은 세째 화살의 효과가 보이는 눈치를 채고 고삐를 바싹 다긏는 것이다.
 
370
“어떠십니까? 내야 거기 별 이도 없으니까 굳이 나서서 이렇다 저렇다 하지는 않겠읍니다마는 실상은 제사회사에 내 친척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데리구 가서 잘 부탁을 하면 아마 월급 같은 것두 후허려니와 제백사가 다 괜찮을 듯헙니다…… 내가 이러는 것도 저 아이가 저렇게 좋게 생겼는데 이 촌구석에서 고생을 허는 게 딱해서 그리는 거지요 머……”
 
371
“월급을 을매씩 준대요?”
 
372
비로소 용희가 묻는 말이다.
 
373
“내가 가서 부탁을 하면 초급으로도 사십 원은 줄걸……”
 
374
사십 원! 거기 돈으로 이백 냥이다. 한 달에 이백 냥! 엄청나게 많은 돈이다.
 
375
용희와 정씨가 벙벙해서 있는 것을 보고 재봉틀 부인은 연해 입맛을 돋아준다.
 
376
“사십 원에서 기숙사 밥값으로 한 팔 원 제허구 용돈이야 옷 해입는 거야 다 제해도 이십오 원은 남으니 그게 어딥니까? 곧 부자가 되지요.”
 
377
그러나 정씨는 그렇게 요량이 통히 없지는 아니했다.
 
378
“그러면 시방은 즈이 아버지가 안 지시닝개 그새 상의히여서 작정히여노께 이 담번에 한번 더 와주실라우?”
 
379
다 된 줄 알았더니 이 말을 듣고 보매 재봉틀 부인은 적지 않게 실망이 되었다.
 
380
그러나 끈기도 없는 것은 아니다.
 
381
“글쎄요…… 이번에 가면 언제 또 여기를 오게 될는지 모르겠는데요…… 바깥양반은 언제 오십니까?”
 
382
“이따가 저녁때 오시지라우.”
 
383
“아따 그러면 내가 쉴 겸 해서 좀 기다리지요. 그게 좋잖습니까?”
 
384
“아니 나는 벌이하시는 이를 너머 오래 지대리시라기가 미안히여서 그렇지라우!”
 
385
재봉틀 부인은 다시 안심을 하고 웃어보인다.
 
386
“미안 여부가 어데 있나요, 그것쯤으루…… 참 그렇게만 되면 댁의 아기야 팔자를 곤치지요 팔자를 곤쳐……”
 
387
“그렇기나 히였으나 나두 한짐을 덜겄수마는…… 즈아버지가 무어라구 허실난지 몰르지요.”
 
388
이렇게 해서 재봉틀 부인은 용희의 ‘팔자를 고쳐주기 위해서’주인 양반 즉 태호를 기다리고 있게 되었다.
 
 
389
이편 장터에 들어간 태호는 위선 면사무소에 가서 면장을 만나 저리농량(低利農糧)을 교섭하고 있는 판이다.
 
390
그는 지금 짓는 논의 지주에게서 장리를 한두 섬 더 얻어먹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편은 장리가 반 섬이다.
 
391
그런데 이편 면에서 내어주는 것은 두 말이니 그만해도 서 말의 이해가 붙는 것이다.
 
392
그뿐 아니라 그렇게 어떻게 해서 반연을 지어놓으면 농우자금(農牛資金)을 얻어 소도 한 바리 살 수가 있고 또 자작농 창정에 한몫 끼어 잘하면 육백 육십원어치의 논도 연부로 갚도록 마련할 수도 있는 것이다.
 
393
그래서 그는 얼마 전 구장이 권하는 것을 못이기는 체는 하면서 내심에 그런 계획이 있기 때문에 위선 진흥회에 들어두었던 것이다.
 
 
394
면장은 커다란 사무상업 회전의자에 대롱대롱 매달려 앉아 결재서류를 뒤적거리며 도장을 꾹꾹 찍고 있다.
 
395
그는 면장(面長)이라는 면장보다도 난장이를 면했다는 ‘면장’이라고 남들이 면장 면장 하는만큼 키가 작았다.
 
396
그러나 그는 키가 작은 것을 조금도 마음에 걸려 하지 아니하였다. 도리어 친구들이 키작은 것을 조롱을 하면
 
397
“조선은 소국이라 키작은 사람이 속을 차린다.”
 
398
는 옛말을 인용해서 천연스럽게 뒤집어씌우곤 했다.
 
399
사실로 그는 속이며 하는 짓이 맺히고 모져 앙큼하니 영악했다.
 
400
사십이 넘었으되 잔주름 하나 잡히지 아니한 통통하고 되바라진 얼굴이나 꼬집어뜯은 것같이 작되 새까마니 또렷또렷한 눈이 미상불 정력과 야심을 뭉쳐논 듯싶었다.
 
401
그러나 그는 키작은 고통이 꼭 하나 있었으니, 면장실의 자기 자리에 앉아 있을 때다.
 
402
그는 보통 두 발이 마룻바닥에 닿도록 앉자면 회전의자를 훨씬 낮추어야 할 터인데 그리하면 사무상이 턱에 가 받치게 되어 꼴이 창피할 뿐 아니라 일도 하기가 불편하고 더우기 사람을 대할 적에는 도무지 위엄이 서지 아니하게 된다.
 
403
그래서 한 꾀를 고안해낸 것이 즉 회전의자를 훨씬 돌려 훨씬 높여가지고 발은 비록 대롱대롱해도 사무상 위로 윗몸뚱이는 웬만큼 솟아보이게 한 것이다.
 
404
오늘도 그렇게 하반신을 카무플라즈하고 앉아 결재서류에 도장을 누르면서 태호가 작년에 가물로 흉년이 들고 또 겸해서 보리 흉년까지 들어 여름의 농량을 댈 길이 없다고 궁상을 피워가며 죽 늘어놓는 이야기에
 
405
“응 그리서……”
 
406
“허! 그맀던가? ……”
 
407
하며 건성으로 코대답을 하고 있는 판이다.
 
408
그러다가 마침내 태호가
 
409
“-그러니 면에서 내어주는 저리 농량에서 나락을 두 섬만 장리로 주어야 살겠다.”
 
410
고 말을 맺자 면장도 마지막 도장을 누른 서류뭉치를 철사바구니에 집어넣고는 고개를 들어 사무상 건너에 앉은 태호를 마슬러보면서 자기 키보다도 커보이는 합죽선을 좍 펴가지고 의젓이 부채질을 한다.
 
411
“응? 나락 두 섬을 달라구? ……”
 
412
“응, 두 섬만 꼭 주어겨야 허겄구만……”
 
413
태호는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를 면장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우습지도 아니한데 웃는 체를 한다.
 
414
그는 면장과는 나이도 ‘벗’을 할 나이요, 또 다같이 세교가 있는 소위 반명(班名)하는 집안의 끈터리라 맞허우를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태호 편이
 
415
“-주어겨야-”
 
416
라고 높여주는 말을 섞어 쓰는 것이다.
 
417
면장은 태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우두커니 바라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418
“자네 옷이 그게 무언가?”
 
419
하고 아주 걱정스럽게 묻는다.
 
420
이 말이 왜 ‘색복’을 입지 아니했느냐는 나무람인 것은 빤한 속이다.
 
421
태호는 손이 저절로 뒤통수로 올라가면서
 
422
“급히여서…… 처 첫물은 이렇게 누렇걸레 갠찮얼 줄 알었더니…… 허.”
 
423
하고 계면쩍게 웃는다.
 
424
“그리두 재미 없지! 더군다나 자네는 진흥회원인디……”
 
425
“그럼 오늘 저 회에두 이렇게 입구 가서 못쓰까?”
 
426
“허허!”
 
427
면장은 음전스럽게 걱정을 하고 잠시 까막까막 생각을 한다. 그래 태호가 짐짓 민망해하면서
 
428
“못쓰겄으면 차라리 회에는 빠지구 말 생각인디? ……”
 
429
하니까 면장은 얼른 고개를 내흔들면서
 
430
“그리서는 더 못쓰지…… 가만 있자 시간이……”
 
431
하고 시계를 꺼내 보다가
 
432
“네시가 다 되였는걸…… 집으루 도루 가서 바꾸어 입구 올 새두 업구만 그리어!”
 
433
“그럼 어떻게 허까?”
 
434
“헐 수 없으니 오늘은 그냥 출석허구 이 담에는 아예 그렇게 입지 말소. 거 내가 곤란탄 말이여!”
 
435
생각지 아니한 난관을 만났다가 다행히 무사히 피어는 났으나 그것 때문에 정말 요긴한 이야기가 흐지부지 될까봐서 태호는 속이 조였다. 그래 다시 이야기를 내려고 입술을 달막거리는데 면장이 그 눈치를 채었는지
 
436
“그러구 아까 말허든 나락은 거 안되겄네.”
 
437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가다귀를 치려 한다. 아까 태호의 옷을 탈을 잡은 것은 그 복선(伏線)이었던 것이다.
 
 
438
그러나 태호에게도 그만한 방패막이에 대한 반격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
 
 
439
이 면에는 작년 봄에 예정한 홋수대로 세 호의 자작농 창정(自作農創定)이 되기는 되었다.
 
440
그러나 그 세 호 가운데 단지 단 호만이 그래도 법적으로든지 실질적으로든지 자작농 창정에 참가될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지 나머지 두 사람은 협잡이 붙은 유령적 존재(幽靈的存在)였었다.
 
441
자작농 창정의 대상은 근본적으로는 세농민이라고 한다.
 
442
그들 세농민에게 육백육십 원이라는 돈을 빌려주어서 삼 단보 혹은 사 단보의 논을 사게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논을 자기 것삼아 지어가면서 그저 비싼 도조 정도로 매년 그 돈을 갚아가다가 이십 년 만에 다 끝을 내면 그때에 비로소 그 논이 자기 소유가 되게 된 것이다.
 
443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세농민은 도저히 거기에 참가를 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444
첫째 그들은 무지해서 그것을 이용할 줄을 모른다. 자작농 창정이 무엇인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게 그들이다.
 
445
또 가령 그들에게 삼 단보 혹은 사 단보의 자작농 창정을 해준다 해도 농사 밑천이라고는 세코잠뱅이와 호미 한 개밖에 없는 그들인지라 농자(農資)때문에 그것을 지어나갈 힘이 자라지를 못한다.
 
446
그리고 또 육백육십 원만 가지고는 규정된 삼 단보나 사 단보의 논을 사기가 어렵고 대개는 자기의 돈을 더 보태야 하는데 세농민은 그러할 힘도 없거니와 또 그것을 빚으로라도 둘러댈 신용과 주변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니까 자작농 창정의 사실상의 대상은 세농민이 아니라 그래도 네댓 마지기 농사를 이리저리 둘러대어 지어나갈 힘이 있고, 또 모자라는 돈은 저리자금이라도 얻어 보탤 신용과 수완이 있는 말하자면 중농 부류랄지 또는 제법 식자나 들고 내노라고 하는 그러한 농촌의 인텔리 축이라고 할 수가 있다.
 
447
아까 말한 이 면에서 창정된 자작농의 세 호 가운데 하나인 김이라는 사람도 그러한 부류의 사람이다.
 
448
이것은 가령 사실에 있어서 세농민이 무능력하기 때문에 일을 담당한 면이나 금융조합도 어찌할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나머지 두 호는 완전히 야바위가 붙었던 것이다.
 
449
즉 ××조합의 ××한 사람과 ××××의 ××한 사람이 제가끔 만만한 세 농민 한 사람씩을 엎어 삶아가지고 그들을 피창정인으로 떡 내세웠다.
 
450
더욱 일이 잘 되느라고 마침 금융조합에서 저당유실되는 논이 있었던 지라 그것을 헐값으로 낙가시켜서 대번 아무아무 두 세농민의 명의로 자작농 창정을 해놓았다.
 
451
물론 그 두 세농민은 웬 영문인지도 모르고 도장만 빌려주었고 아무 말도 말라니까 시키는 대로 아무 말도 아니했다.
 
452
그랬으니까 법적으로는 아무것도 차착없이 수속이 된 것이다.
 
453
그러나 금년 봄에 땅값이 바짝 오르매 기회가 좋다고 두 ××씨는 그 논들을 팔아 육백육십 원을 일시에 갚아버리고 이백 원씩의 이익을 감쪽같이 남겨먹었다.
 
454
그것이 문서상으로는 자작농 창정인 아무아무 두 사람이 한 일로 되었으니까 어느 모퉁이나 탈잡을 거리가 없이 되었다.
 
455
허장성세의 빈약한 내용의 것에 다라운 브로커의 좀까지 생긴 것이라는 것이 즉 그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456
이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면 모르거니와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면장은 여간만 위협을 느끼지 아니했던 것이다.
 
457
가령 면장 자신이 그것을 묵허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책임 문제가 있는데, 하물며 알고도 슬그머니 눈을 감아준데야 더구나 할 말이 없는 것이다.
 
458
태호는 이러한 속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약점 잡아 억지를 쓰려고 하는 판인데, 아직 그 눈치를 못 챈 면장은 연해 위엄을 갖추어가지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459
“안될 것이, 자네가 진흥회 회원은 회원이지만 그 나락은 진흥부락 사람한티만 내주는 것이라 말이네…… 것두 내 맘대루 허는 것이면 어떻게 둘러대기라두 해보겄네만 면에서는 군농회(郡農會)의 심부름만 허구 있으니까 도무지 무슨 변통이 되어야지!”
 
460
“그럼 진흥부락 사람을 데리구 와서 수속은 그 사람 앞으루 허구 내가 갖다 먹구 내가 갚으면 되겄구만?”
 
461
태호는 위선 이렇게 눈치를 떠보았으나 면장은 아직도 의젓하게 고개를 흔든다.
 
462
“거 그래서야 쓰나! 그걸 농회서 알면 내가 책임을 져야 허게? 안되지 안되어!”
 
463
태호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고까운 듯이 슬쩍 외면을 하면서
 
464
“체! 원 그보단 더헌 자작농 창정두 모다들 남의 이름으로 히였다가 지가가 오르닝개 팔어서 돈을 냉겨먹더만! 그까짓 나락 두 섬이야 어떨라구?”
 
465
하고 짐짓 노염을 보인다. (未完)
【원문】보리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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