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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農村) 색시와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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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7
채만식
1
農村[농촌] 색시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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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음력입니다. 아직도 시골 이야기를 하자면 더구나 농가 풍경에는 음력으로 해야 머리속에 잘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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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나지막한 야산이 빗밋이 미끄러져 내려오다가 옷자락을 좍 벌린 곳에 마을이 하나 있읍니다. 흔히 있는 남향한 마을입니다. 남쪽으로는 끝도 없이 퍼져나간 들(野)입니다. 들이라도 벌판이 아니라 논입니다. 동쪽은 조금 멀찍이 산이 둘러서서 있고 서쪽은 남쪽처럼 역시 끝없는 들이 저기 멀리 그림같이 아물아물하는 원산(遠山)까지 퍼져나갔읍니다.
 
4
이 들에는 심은 모들이 벌써 뿌리가 잡히고 거름을 빨아올려 새카맣게 자랐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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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바람이 불면 까슬까슬한 벼잎이 마주 비벼지느라고 한꺼번에 솨 소리가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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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들 귀퉁이에 있는 이 마을입니다. 한 백 호나 될는지 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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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진 여주인공 이야기에 원 운(韻)없는 전원사(田園詞)를 읊느냐고요? 가만 계십시오. 지금 이야기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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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무소가 있고 주재소가 있고 보통학교 교서(敎書)의 삽화에 있는 그대로의 포플라나무 둘러선 보통학교가 있고 금융조합과 우편국도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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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에 기와를 인 것은 이 네 집 외에 하나도 없읍니다. 큰 부자집도 대대로 내려오는 이엉이 두터운 초가집입니다. 그 대신 함석집은 많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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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창고, 나까무라상네 가게, 긴상네 매갈잇간, 다나까상네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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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차 기와지붕이 그러고 보니까 또 있기는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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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鄕校)하고 사정(射亭)하고 그리고, 뒷산 중허리의 도리이(한문 글자로는 조거[鳥居]라 쓰는) 너머로 보이는 ‘✕✕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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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말하자면 이 마을은 이즈막에 어디 가나 그저 수두룩하니 그래서 한 전형적 형의 조선 농촌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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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마을 가운데 조그마한 어느 집에 지금 내가 이야기하려는 ‘잃어진 여주인공’ 이 살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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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첨에 말한 대로 음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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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사람보다 부지런하다고 하지만 농촌 사람은 해보다 더 부지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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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시오. 해는 아직 뜨지도 아니했는데 들판에는 세코잠방이를 입고 삽을 어깨에 멘 농군이 벌써 논두덕에 있지 아니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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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서도 잠이 깨기 시작했읍니다. 맨먼저 ‘그 색시’ 가 청포모기장을 붙인 방문을 열고 나옵니다. 방금 자고 깨었는데 눈에는 조금도 탁한 빛이 없이 맑고 영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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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밑머리도 풀어지고 머리는 흐트러졌으나 난잡하지 아니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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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도리사적삼이 퍽 노성해 보이게 하지만 귀밑으로 아직도 배내털이 송글송글 있읍니다 새빨간 분홍적삼을 . 입혔으면 좋겠읍니다. 열여섯 아니면 기껏해야 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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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렴직한 얼굴이 더구나 조그맣게 올라붙은 주걱턱과 오동보동하니 하얀 아랫볼이 어찌 보면 방금 엄마 젖꼭지를 빨다가 나온 애처럼 앳되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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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방문을 열고 나오니까 마루 구석에 낡은 모기장 조각으로 덮어 놓은 질자배기에서 파리떼가 벌떼같이 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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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어제 저녁에 이 집 식구가 먹고 남긴 곱삶이보리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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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눈박이 암캐가 색시를 보고 그 유순한 눈으로 짖으면서 마당에서 꼬리를 홰홰 칩니다. “밤새 안녕허시유?” 하는 듯이 참새들이 재재거립니다. 가벼운 이슬안개가 새벽꿈같이 내리고 있읍니다. 울타리를 수북히 덮은 호박잎이 싱싱하게 이슬에 젖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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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옹당우물이 마당 가운데 있고 그 옆으로 역시 조그마한 화단이 있읍니다. 백일홍이 한창 어우러져 피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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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큰 백일홍 옆으로 아주 가볍게 생긴 새빨간 금낭화(金囊花 : 이 꽃은 굵은 콩알만큼씩한데 생기기를 꼭 엽낭같이 생겼읍니다)가 조랑조랑 피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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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색시의 고운 맘새가 다 이 화단에 새겨져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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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볼 찢어진 검정 고무신을 짝짝 끌고 화단으로 갑니다. ‘네눈이’ 가 잘래잘래 그 뒤를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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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는 벌써 꿀벌이 두어 마리 날아와서 앵앵하고 날아다닙니다. 이꽃 저꽃 들여다보고 다니는 색시의 얼굴에 꽃빛이 비쳐서 서울 색시들 같으면 연지를 볼에 바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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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저편 마당 구석에 있는 도야지울에서 도야지가 삑삑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색시는 얼핏 도야지울로 가서 넘어다봅니다. 도래를 채인 동아줄로 허리를 매어울 천정에 비끄러매인 중도야지 암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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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아주 이 집 것은 아닙니다. 이 색시가 동무네 집에서 ‘배멕이’로 두 달 전 새끼 적에 얻어온 것입니다. 그것을 이 색시는 정성껏 길렀읍니다. 정성은 그렇지만 자주 굶기기 때문에 살이 잘 오르지 못하고 빼빼 야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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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도 굶는데 도야지 제가 무어라고 안 굶을 수가 있나요. 어제 저녁도 도야지는 굶었읍니다. 그래서 지금 배가 고프다고 제 깐에는 밥을 달라는 것이 삑삑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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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가 조르르 도야지울로 가니까 도야지는 반갑다는 게 ‘꿀꿀’ 입니다. 사람이 왔으니 밥을 주리라고 여긴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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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밥구유는 물론 개수물독도 다 비었읍니다. 도야지는 우두커니 서서 있는 아가씨를 보고 연해 꿀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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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는 돌아서서 마루로 오더니 아까 파리가 엉켜지는 보리밥 자배기의 곱삶이 보리밥을 들고 도야지울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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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방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어머니가 나옵니다. 이어 딸이 밥자배기를 들고 도야지울 옆에 섰는 것을 보더니 역정을 냅니다. 그러나 천성인지라 역정이 났어도 도무지 말소리며 모질지 아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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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 은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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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인제야 색시 이름이 ‘은순’인 것을 알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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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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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은순이는 어머니 옆으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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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밥 도야지 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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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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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실수한 것을 깨닫고 웃으면서 고개를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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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애가!…… 네 아버지 조반 진지는 무얼 잡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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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가 좀 있기는 하나 대끼지 아니해서 일찍 들에 나갈 아버지만 찬밥을 묻어데서 천천히 조반 겸 점심 겸 먹으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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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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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좋으나 이 마을 앞 그 좋은 들에서 그렇게도 숱해 벼가 많이 나건만 이 마을 사람들의 거의다가 그렇듯이 이 집 사람들도 쌀밥을 먹기는 겨우 가을 한철 뿐입니다. 여름에는 노박이로 꽁보리밥을 먹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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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순이는 어머니와 같이 보리를 찧느라고 식전부터 땀을 흘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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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야기의 시초를 잡아놓고 잊어버린 지 여러 해가 되었읍니다. 이것은 긴 이야기의 아주 시초요 짧은 한 토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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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도 그것을 내버리지는 아니했읍니다. 오래잖아서 쓰기 시작하려고 합니다마는 어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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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만 되면 인제 은순이를 서울로 데려다가 보여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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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잃어버린 것은 여주인공 은순이가 아니라 또 하나 주인공 될 은순이의 아저씨가 행방불명이 되어서 그게 큰일입니다.
 
 
53
<新東亞[신동아] 1936년 7월호>
【원문】농촌(農村) 색시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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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 농촌 색시와 나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 신동아 [출처]
 
  1936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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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1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