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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장(僞裝)의 과학평론(科學評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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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2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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僞裝[위장]의 科學評論[과학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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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실 리얼리즘에 대한 侮瀆[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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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의 영명(英名)을 표절하여 건실한 문학의 진로를 저해함으로써 도리어 리얼리즘을 욕되게 하는 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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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寫實主義)라고는 하면서 기실 자연주의(自然主義)의 말류(末流)를 도창(導唱) 비호하고, 입으로 유물론적 방법을 염불하는 동안에 관념론 이란 자가함정의 진흙구렁에 전락한 자천(自薦) ‘과학적 평론가’ 김용제 (金龍濟) 씨가 바로 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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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자신은 엥겔스의 수제자인 양 하는가보나 당자 엥겔스 지하에서 낙루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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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특수한 지역의 역사적 제사실에서 얻은 바 한 계급의 사회적 범주에 다가 다른 곳의 노말한 인민의 현실을 우그려 넣으려고 할 때에는, 유물론적 방법은 그 반대물인 관념론에로 변화된다고 한 엥겔스의 규정은 귀에 못이 박인 소리다. 그러니 하는 짓 같아서는 누구보다도 그걸 잘 알고 있어야할 김용제 씨가 오히려 예의 선잠이 덜 깬 탓인지 에른스트의 ‘현행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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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하기에 여념이 없으니 진실로 보기에도 민망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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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 물론 아무리 특수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역사적 발전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그러나(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조선의 ‘조선적’ 현실은 전연 독자적 포즈일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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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내에서 발효된 내부적 조건보다도 외래적 자극으로 인한 파행적 제 사실, 운명적으로 자율성을 갖지 못한 ‘세계의 일환’으로서의 수동적 제약성, 이러구러 역사의 기형아임을 면치 못하는 게 조선의 정당한 특수현실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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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조선의 이런 특수현실은 부자집 도련님답게 비교적 노말한 길을 걸어왔다고 볼 수 있는 일본 내지의 그것과는 절로 다름이 없지 않을 수가 없다. 하물며 인도 하며 아프리카 하며 그런 곳과도 또한 다르지 않지 못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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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현실을 구명(究明)함에 있어서는 유물 론적인 인식방법이 예외없이 필요하기는 한 것이로되, 어느 딴 지역에서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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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바 범주에다가 그걸 우그려넣는 날이면 정당한 판단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얻고 말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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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김용제 씨의 방법이 그러했다. 씨는 딴 나라의 ‘현대’ 를 참고삼아 일본 내지의 ─ 그거나마 7,8년 전의 ─ 사회적 정세를 기준해서 ‘유물론적 방법’이라는 한 개의 지형(紙型)을 장만했다. 이 부적방망이 같은 지형을 짊어지고 씨는 조선의 독자적이요 특수한 그리고 더욱 병자정축(丙子丁 丑)년의 현단계적인 모든 군더더기를 잘라버리고서 그 지형에 들어맞도록 조선의 현실을 재단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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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결과 애초에도 몹시 약질이었던 그리고 그거나마 작금에는 전면적으로 퇴후(退後)하여 있는 모야수야(某也誰也)의 ‘긍정적 방면’이 느닷없이 아주 발랄하고 적극적이고 한 대사(大寫)로서 등장을 했다. 그리고 오늘 날의 현실인 ‘부정적 방면’은 일체 말살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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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요란스런 그러나 용두사미 인공적 일류미네션에 지나지 못한 기초 위에 올라앉아 씨의 문학행동은 마침내 소리를 외쳤으니 왈 명랑한 현실 이요, 왈 낙관적 재료요, 왈 리얼리즘의 승리요, 왈 건강한 문학이요…… 등속의 희떱고 속 못 차리는 잠꼬대다.(이상에서 내가 ‘퇴후하여 있는 긍정적 방면’이라고 한 것은 그것의 소멸을 의미한 것이 아니요, 또 오늘의 현실인 부정적 방면’이라고 한 것은 역사적 발전과정으로서 명일에의 긍정을 내포한 상대적인 포즈를 의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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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제 씨는 그처럼 관념론의 요술을 부려 조선의 현실을 왜곡 개장한 ‘긍정적 전면’의 호화판을 만들어 가지고 문단에 뛰어들어 대도상인(大道商人)과도 같이 그걸 투매(投賣)질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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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다시 포복할 절창은 씨의 ‘공범자’들이 불긍(不肯)했던지 「맥추」와 같이 “작품의 예술적 결함을 정치적 암시로 보충하려는 저급한” 작품도 가뭄에 콩씨요 거의 전부가 문학 되다가 만 재질들이 씨의 그 호화 판의 원매자(願買者)거늘 씨는 오히려 리얼리즘의 승리라고 감지덕지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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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이 고기맛을 보더니 절에 빈대가 없어졌다는 속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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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제 씨의 그다지도 동떨어진 문학감식안이야 빈대를 모조리 잡아먹은 중의 식성이라고나 할까. 그 본색은 그리하여 유감도 없이 발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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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李箕永) 씨는 그의 충실한 숭배자 김용제 씨의 강청(强請)이기에 이리하는 바니 재삼 들추어냄을 관서(寬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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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카프 당절에 작품적 활동을 많이 했고 그리고 『고향』 그것이 있대서 이기영 씨를 모셔 앉히고는 감히 고개를 들어 정시(正視)하지 못하는 김용제 씨만 아니고서야 이씨의 근일 제작에 대해서 다소 불만을 품지 않을 자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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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결함을 정치적 암시로다가 보충할 것 같으면 설사 그 ‘정치적’ 인 것의 내용이 정당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문학은 그런 짓을 거부하거든, 하물며 이미 지양된 바 농민의 자연발생적인 그 무엇 하나를 천편 일률로 10년 후의 오늘에도 변함없이 울거내는 「맥추」의 이중과오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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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차 「돈」이며 「배낭」이며 「추도회」며 「인정」이며 그러한 작품들을 보라. 실로 이기영 씨의 전공(前功)을 의심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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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게(上揭)의 제작은 모두 소시민의 생활에서 취재한 것들이다. 거기 대해서는 물론 아무도 이의(異議)할 자 없다. 문제는 작자의 세계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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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기영 씨가 정말로 이기영 씨랄 것 같으면 어떠한 형태로서든지 그런 작품을 통해서 작자의 진보적 세계관이 반드시 나타나 보였어야 할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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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이 없었다. 없고서 그 대신 작자인 이기영 씨의 ‘소시민적 이데아’에로 투항이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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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있어서 빈곤 문제, 「배낭」에 있어서 현제도하의 소유 문제와 양심 문제, 「추도회」에 있어서 몰락한 인텔리 문제, 「인정」에 있어서 인정 문제 등등 그 어느 것에고 우리는 작자의 진보적인 세계관이라고는 볼수가 없고 단지 소시민적 이데아의 긍정과 그것의 타협이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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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기영 씨는 이기영 씨면서 그러나 세계관의 과오 내지 타락으로 해서 이기영 씨 아닌 딴 작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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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전일에 소박 생경하나마 진보적 세계관 하나로 겨우 명맥을 지탱해 내려오던 이기영 씨거늘 그것마저 뽑아버린 오늘날에 이르러 그의 서투르고 향기 없는 문장기술에다가만이라도 석일(昔日)의 높은 평가를 그대로 던져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어디 있을 것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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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왈 과학적 평론가라고 하는 단 한 사람이 이 물음에 거수를 한다. 즉 김용제 씨다. 그의 분반(噴飯)할 다음의 결론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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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 유물론적 방법이요, 왈 과학적 평론이요, 왈 진보적 세계관이요 하면서 천지라도 개벽한 듯이 왜곡된 조선현실의 호화판인 ‘긍정적 전면’ 을 떠받고 나서던 그 기세는 한심하게도 이기영 씨 등의 그러한 작품에다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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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문학’ 이요, 자 ‘리얼리즘의 승리’ 요 하는 레테르를 붙이는 것으로써 사미(蛇尾)를 지었던 것이다. 거목을 넘어뜨리고서 이쑤시개 한 개 값을 얻어가지고 나서는 자와 비교가 어떠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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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그처럼 작품들에게 실례를 들지 말고서 그대로 추상론으로나 시종 했더라면 ‘꼬리’는 잡히지 않았을 테고 그리고 문학의 공리성(功利性)이며 상층구조가 하층구조에 역작용을 한다는 원리의 맹목적 사도라하여 공식주의(公式主義)기는 할망정 그 사회적 정열이나마 가상타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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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제 씨여! 씨가 소위 ‘리얼리즘을 옹호’ 한다는 일문(一文) 중에 보인 이기영 씨의 「돈」에 대한 변명은 어쩌면 그다지도 옹색하뇨? 또 남은 건드리지도 않은 『고향』을 치켜들고 나섬은 무슨 전법이뇨? 내가 『고향』 을 나쁘다 했드뇨? 「리얼리즘의 옹호」라는 그 일문은 과연 체계있는 논문 이라고 자량하드뇨? 진실로 욕설 중심의 횡설수설이라고 생각지 않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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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치적 자유’란 무얼 의미한 중상(中傷)이며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는가?” 유의 식언(食言)은 어인 망령이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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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활자로써 사죄할 용기 없을 양이면 스스로 자책이라도 해서 자신의 양심에나마 속죄를 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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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뭏든 이상과 같이 이기영 씨 등 일련의 작가는 ‘소시민적 이데아’ 에로 투항을 하고, 유물론적 방법이란 호위(虎威)를 빌어 과학적 평론가로 위장한 김용제 씨는 그러한 작품들을 리얼리즘의 승리라고 구가를 하여 주객(主 客)이 부동(附同)이 되었으니 그 문학이 망하지 않고는 갈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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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이 망하는 문학으로부터 발을 빼치려고 애쓴 자를, 김용제 씨는 이단(異端)이라고 낙인찍어 공중(公衆)의 앞에 무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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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 ‘퇴폐문학’인 「젖」의 작자 채만식이가 그 피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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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의 적수는 그래도 모기(蚊)는 아니었었다. 나는 붓을 들기는 하되 견문발검(見蚊拔劍)의 어리석음이 한편으로는 없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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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제 씨는 나와 같은 ‘소시민 작가의 발악’ 을 응징하여 써 ‘리얼리즘을 옹호’ 한다면서 그 자신에의 공박자를 실로 성현과도 같이 식언과 중상 으로 치고 무함하는 데 심혈을 경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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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론 그의 그런 욕설 같은 건탄하려고 하는 자 아니다. 그건 한낱 사사(私事)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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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니까 모씨처럼 사석에서 사과를 받을 수도 있고 또 그런 게 아니라도 사사답게 종용(從容) 조처를 하려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가령 “발에는 구두를 신고 몸에는 루바시까를 걸치고 머리는 상투를 짜고 한손에는 녹슨 대패침을 쥐고 또 한손에는 부적방망이를 들고 문단을 이리 끼웃 저리 끼웃 생침질을 꾸욱꾹, 일변 “계급문학 나오너라 또드락 딱” “리얼리즘 문학 나오너라 또드락 딱” 하면서 섣부른 획득물을 끌어안고서 자열(自悅)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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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물 하나를 만화로 그려서 김용제 씨한테 사신(私信)으로 진정(進呈)을 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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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이 성가시느라고 묵살을 하거나 사사로 처분을 하자니 그 말라리아 병독이 장차 문단 전체에 퍼지겠어서 못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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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제 씨는 그의 편견이나 오류 같은 것은 딱 접어놓고서, 아니 오히려 그것을 강화시켜 가면서 온전한 객기와 원혐만으로다가 그에의 공박자를 치되, 치는 그 욕설을 카무플라즈하느라고 예의 ‘리얼리즘을 옹호’ 한다는 엉뚱한 연대기(聯隊旗)를 떠받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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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도 뒤가 허전했던지 평론계에서 김남천(金南天) ·임화(林和)· 한효(韓曉) · 한식(韓植) · 안함광(安含光)의 제씨와 작가측에서 그의 대 우상인 이기영 씨를 비롯하여 한설야(韓雪野) · 엄흥섭(嚴興燮) · 조벽암(趙碧巖) · 이무영(李無影) · 함대훈(咸大勳) · 김남천(金南天) · 윤세중(尹世重)의 제씨를 그 연대기 아래로 소집해 놓았다. 진세(陣勢) 미상불 어마어마하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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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이 백만대병으로 장사진을 치고 방포일성(放砲一聲), 진두에 선뜻 나선 선봉장으로 말하면 묻지 않아도 그 김용제 씨인데, 포즈는 어떠한고 하니 상기한 대로 내가 그려보내겠다는 그런 만화적 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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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쉰 대로 이름만 꾸어온지라 과연 임화 씨며 한효 씨가 그 뒤에 발표한 걸 보면, 이기영 씨 등의 근일 제작에 대한 평단(評斷)이 ‘덮어놓고 닷냥 금새’ 하는 김용제 씨의 사대주의적 아첨과는 전연 빙탄(氷炭)인 데가 없지 않았다. 더구나 천하 악작 「젖」에 대해서 일찌기 의견(意見)의 일부분을 달리한 김남천 씨까지 끌어들인 것은 대단 옹색한 청병(請兵)이 아닐 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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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타의 제씨, 특히 작가 제씨 중 김용제 씨의 그러한 아첨의 추앙으로 얻은 ‘자만’심과 올바른 작가적 양심과 사이에 마찰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되 아뭏든 임화 · 한효양 씨의 그와 같은 ‘배반’ 만으로도 김용제 씨는 분사 괴사(憤死愧死)를 했으련만 오히려 건재하다니 그의 신경 굵직한 걸 믿어 나 역시 자살 방조자 안될 줄로 안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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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커나 김용제 씨는 그처럼 견진(堅陳)을 펴고서 나를 치는 동시에 일변 진즉부터 알찐거리던 예의 ‘꼬리’ 를 감추려고 백방으로 애를 썼으나 실상 그게 도리어 역력히 드러나고 말았다. 우스꽝스런 비극이라 하겠으나 인정을 돌아볼 일이 아니고 ‘달기(妲己)’는 그대로 방임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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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젖」이라는 졸작은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삼으면 삼을지언정 김용제 씨의 시비는 그러니까 애초에 얼토당토 않은 생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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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온 지 석 달 만에 모유를 (뺏겨) 빼빼 야위어서 병들어 죽게 된 유아가 있고 그 반면 그 젖을 매삭(每朔) 15원씩에 사서 먹고 포동포동 살이 찐 유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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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보는 사실이요,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오늘날 이 세대에 있어서는 인간이란 건 낙지(落地)하면서부터 지닌 자와 지니지 못한 자 사이에 갈등이 되는 그 갈등에 참예를 하게 된다……는 이치를 발견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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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졸작 「젖」의 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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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만약 누구고 구안(具眼)의 평가(評家)랄 것 같으면 작자가 그 테마를 어느만큼이나 잘 살렸느냐 못 살렸느냐를 우선 논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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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을 김용제 씨는 그러한 주제에 관한 것은 범접도 못하고서 지엽 문제만 쳐들어 가지고 트집을 잡았던 것이다. 진소위 남의 다리에 감발을 한다든가…… 그걸 가소(可笑)타 하여 나는 그를 본 지상에서 야유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평론가에게 논의로써 예하지 않고 야유를 했대서 그런지 천하의 대죄인이나 잡도리하듯 그는 나를 문죄(問罪)했었다. 그걸 보고 아뭏든 활자란 편리한 거라고 위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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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제 씨는 그와같이 「젖」에 있어서 테마가 얼마만큼이나 살았느냐하는 문제라든가 그 테마를 통해서 본 작자의 세계관이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에는 지날 말로라도 일언반구나마 비추지를 않았다. 기껏해야 그 분 김용제 씨니 그만 것도 못보고 넘겼기가 십상이요 결코 괴이찮은 일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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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서 예의 동문서답 격의 얼뜬 트집인데 그 제일장 제일조가 무엇이냐 하면 작자가 현실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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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집 유모로 들어온 한 여자가 허영이 증장(增長)된다거나 부정(不貞) 을 꿈꾼다거나 교만을 부린다거나 그래서 무능한 실업남편한테도 띄게 굴고 애정이 없다거나 제 자식에게 대한 애정도 식어버렸다거나 그렇기 때문에 제 자식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기별을 남편한테서 듣고도 가서 보지를 않는다거나, 파라솔을 사가지려고 아껴둔 돈을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제 자식의 약값으로 내놓기를 싫어한다거나…… 이러한 사실은 무지한 여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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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이라는 일종의 인형극에 있어서 그 연출자인 유모는 전기(前記)와 같은 인물로 등장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현실계에는 도저히 있을수 없는 사실이라고 분개하여 김용제 씨는 다음과 같이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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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절 이 유모와 같이도 양심이라는 인간성의 그림자조차 없는 여성이 현실적으로 있을까? 단순한 생리적 모성애로서도 이러한 모성은 실로 금수 세계에도 희유(稀有)할 존재일 것이다.” (김용제 씨의 「문학의 건강성과 퇴폐성」 중 일절 ― 본지 소재) 이 너무도 고답적인 평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야유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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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지금 세상에 앉아서, 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에미, 못난 노동자 등의 사실이 있는 줄을 모르는 건 김용제 씨 하나뿐이니, 애초부터 문제가 되지도 않는 것이다.”(蔡[채]의 「評界[평계]의 새로운 소음」 중일절 ― 본지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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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김용제 씨는 발연(勃然)변색, 예의 ‘리얼리즘을 옹호’ 한다는 ‘소시민 작가의 발악상’에서도 눈 깜작 않고서 실로 의젓하게 다음과 같은 시침을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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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세상에 앉아서 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에미, 못난 노동자 등의 사실이 있는 줄을 모르는 건’ 나 하나뿐이라고 말하여 그의 문학적 내용을 변명하려고 하나 내가 언제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였든가.”(방점만 蔡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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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제 씨여 아무러면 궁했다기로서니 좀더 영리할 것이지, 이대도록의 식언이야 조금은 부끄럽다고 생각되지 않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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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평론가라면서 지상으로 일반 앞에 남을 공격하느라고 한 말일 것 같으면 야시장꾼의 에누리가 아닌 바에야 스스로 그 책임을 지는 게 떳떳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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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한 말은 했다고 하고서 공공연하게 과오를 청산하든지 그렇잖으면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말이 지당한 줄로 내뻗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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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을, 청산을 하잔즉 창피하고 내뻗어보잔즉 뒤가 허하니까 필경 사설(蛇舌 : 兩舌[양설])질을 하여 “나는 그런 말을 한 일이 없다” 고 도망을 하니, 그러면 이렇게 ‘꼬리’ 가 잡히고 나서는 이번에는 또 어디메로 도망을 하려느뇨? ‘이상스럽다’ 를 ‘사랑스럽다’ 라고 고의로써 왜곡시켜 인용해 놓고는 그건 오식(誤植)이라고 발뺌을 하듯이 역시 오식 속으로 망명을 하려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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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처럼 김용제 씨는 머리만 숨기고 둔부는 그대로 나와 있는 가엾은 도망을 하면서 슬쩍 문제를 딴 방향으로 돌려놓았으니 즉 그러한 ‘부정적 방면’ 에서 취재를 했다는 것과 그러한 ‘부정적 방면’ 을 긍정적으로 취급한 작자의 태도 ─ 이것이 글렀다고 어엿하게 호령을 했다. 아무렇든 김용제 씨를 노둔(魯鈍)하다고만 보아온 것은 인식착오요, 그의 그만큼 민첩함에는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그 발육상태 갑(甲)까지는 몰라도 을(乙)은 족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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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지라 나도 그의 식언 문제는 더 추궁치 않고서 소청(所請)대로 제2단 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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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전에 한가지 나에게 갖추갖추 웃음의 재료를 제공해준 김용제한테 치하삼아 인사를 닦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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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1회분 중 동경문단은 일본 내지의 오기(誤記)이기로 정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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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제 씨의 말대로 하면 “「젖」에 있어서는 못난 인물을 추려다가 아무런 비판도 없이 에로티즘에 분장해서 그려놓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노동자 실업자란 이러한 불의한 생활만 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만으로 지적하는 반동적 효과를 자아낼 뿐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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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길 잃은 양의 무리의 목자인 양 그들의 열렬한 편역인 양하는 그 위선이야 구역(嘔逆)이 없이는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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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가엾은 것은 진실을 두려워하는 비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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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세 십자군의 무사 김용제 씨는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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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독한 에미, 못난 노동자, 불의한 생활을 하고 있는 실업자 등 이러한 현실의 ‘부정적 일면’ 이 문학작품 속에 나타나는 것이 그다지도 겁이 나드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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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두려워하는 자는 차라리 사라센의 마호멧교인이요 용감한 십자군한 테는 진실이야말로 가장 힘 미더운 무기가 아니드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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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일개 문학청년의 거짓 정열이나 희망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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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제고 엄숙하게 스스로의 법칙대로 운동 발전하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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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 과정상 일면적 ‘부정면’이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싫으나따나 진실은 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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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을 우선 목전(目前)에만 불리하대서 그걸 덮고 가리고 속이고 하려 서야(물론 그래지지도 않는 것이지만) 그건 바가지를 쓰고 벼락을 막으려는 우인(優人)의 짓이 아니면 위선자의 헛 설교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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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는 그 ‘부정적 일면’ 을 진실로서 긍정을 하고서 그것이 다시 부정되어 새로운 ‘긍정면’ 에로 발전하는 역사의 선(線)을 밟아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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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라야만 비로소 그들의 태도를 비판하고, 써 그 나아갈 바 길을 계시할 수가 있는 동시에 ‘민중의 가장 좋은 교과서’ 로서의 문학의 정당한 공리성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 노말한 정세 밑에서 일반적 태도는 그렇 도록 규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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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인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꼭 그와 같은 문학적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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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 문학적 내용의 대상군(對象群)이 오랜 대립의 갈등에 참가한 성장(成長)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러한 ‘긍정면’ 이 전면적 퇴후(退後)를 한 것이 아니라 ‘부정면’ 과 적어도 대립이 되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다시 당자인 문학인에게 ‘아무리해도 면할 수 없는’ 외부적 중압이 없을 일반 적이고 노말한 경우에 한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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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발자끄와 같이 리얼리스틱한 굳센 붓으로써 현대의 두 대립의 갈등을 그려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 전인(前人)도 일변 다음과 같은 신축 있는 지시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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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과 같은 정세를 당해서는 소설은 대개 자본가층 즉 직접 우리 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독자로 하고 있읍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 같아 서는 현실의 상호관계를 바르게 기술하여 거기 덮여 있는 가공적 일류미네 션을 깨트려 그들의 세계관을 동요시킴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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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도망하기에 능한 김용제 씨라도 이 말의 타협성을 거부하지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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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거들랑, 그리고 정히 문학을 하고 싶거들랑 다시 한번 침착해서 오늘날의 ‘조선적’ 현실이 어떻다는 것을 살피고 난 뒤에 작가들은 어떠한 태도로써 문학에 임해야 하겠다는 것도 스스로 문리(文理)를 얻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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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든 작품에 있어서 거기에 등장한 인물들을 그들의 환경, 그들의 개성, 더우기 특정한 테마를 무시하고서 그들을 로보트와 같이 선량한 인 물, 모모 방면으로 전진하는 이상적 인물로만 만들어놓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은 씨가 얼마나 ‘멋도 모르고 침대롱을 잡은’ 문학 가의사(假醫師)의 투약임도 깨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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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기 「젖」에 있어서 악독한 유모와 못난 노동자에 대하여 그들의 ‘악’을 비판치 않고 동정치 않고 계몽치 않았다는 질책은 공(公)의 「문학의 건강성과 퇴폐성」이란 문학오진서까지 참고해서 볼 때에는 작자더러 ‘일요강화’나 중등학교 교장 본의 수신교수를 하지 않았다는 시비와 다름 없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라.
 
99
그래도 모르겠거든 아예 문학을 그만두든지 또는 되짚어 나를 욕하든지, 그건 자량(自諒)해서 할 일이다.
 
100
이상에서 나는 현실, 정세, 작중인물의 개성 이런 것을 무시하고서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듯이 모든 사건은 모모편에 유리하도록 운반하고 모든 인물은 이상화함이 불가한 소치를 우선 추상적 견지에서 말한 것이거니와 「젖」에 있어서는 더우기나 그렇지 못할 이유가 있다.
 
101
「젖」이란 작품은 위에서도 구구스럽게 설명을 했거니와 이 세상에는 모유를 팔아야 할 자 있고, 그걸 살 수 있는 자 있어서, 그런 때문에 인간이란 낙지(落地)하던 길로 지닌 자와 지니지 못한 자 사이에 갈등이 되는 그 갈등에 참예를 하게 된다……는 것이 그 테마다.
 
102
그러니까 그 테마를 한 개의 문학작품으로 구상화하는 데 있어서 유모가 선량한 에미냐 악독한 에미냐, 또 그 유모의 남편인 최서방이 똑똑한 노동 자냐 못난 노동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103
남편이 똑똑한 노동자요 제 자식을 극진히 사랑하는 여자라도 실업과 가난에 못배겨 남의 집 유모살이로 들어가는 수가 있다.
 
104
일변 아무리 반편스런 남편과 살고, 성미가 악독하고 제 자식에게 애정이 없고 한 여자라도 남편이 벌이가 없다거나 그래서 생계가 절박하다거나 하지 아니한 이상 굳이 남의 집 유모살이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남편이나 자식이 싫으면 차라리 버리고 달아날지언정.
 
105
그러니까 유모가 유모 되는 소치는 그 원인이 가난함에 있지 성질의 선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106
6
 
 
107
따라서 「젖」에 있어서 유모가 악독하고 그의 남편 최서방이 병신스럽고 하다고, 그걸로는 추호도 작자가 책잡힐 며리는 없다.
 
108
그런 것을 못난 인물만 추렸느니 실업노동자(失業勞動者)의 불의(不義)한 생활만 기술했느니 하고 시비를 청하는 것은 결국 헌갓쟁이의 생트집이요, 「명일」에 구장이나 한 가지 얻어 할까 하는 노동자에의 비루한 아첨이다. 그러나 그건 곤장 삼십도짜리임을 명심해야 한다.
 
109
그런데 그처럼 특정한 테마가 작정이 되고 거기에 소위 ‘악독’ 한 에미와 ‘못난’ 애비가 등장되었을 때에 작자의 취할 바 방법은 단 한 가지 밖에 없고 만다.
 
110
즉 젖이란 유일의 식량을 놓고서 갈등하는 당자들인 두 유아는 인형과도 다름없는 애기들이라 그들의 의식이나 행위를 사건삼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 유모며 애비를, 그들의 지닌 바 개성이 허하는 범위 안에서는 그것만큼 그들의 악하고 무능한 행동을 심각하게 그려내는 것……이것이다.
 
111
거기에 작자의 동정이나 계몽이나 비판 같은 것은 사족(蛇足)이요, 작자는눈 한번 깜짝 않고서 냉혹하게 그들의 악과 무능을 그려야 된다.
 
112
그래서 그것이 심각 잔인하면 심각 잔인할수록 독자의 그들에게 대한 반감은 그것에 정비례해서 크고, 다시 이 반감이 크면 클수록 젖을 빼앗긴 무고한 유아에게 대한 동정은 깊어지게 된다.
 
113
그러해야만 「젖」의 테마는 싱싱하고 효과 있이 살아나게 된다.
 
114
이렇게까지 해설을 하고 나니까 문득 회심(悔心)이 드는 건, 과연 내가 「젖」이라는 작품을 지금 장담하는 대로 그렇게 잘 만들어냈느냐? 하는 자기에 대하여 스스로 고개가 흔들린다는 것이다.
 
115
고육지책이 아니라 이상의 해설에 꼭 맞도록은 쓰지를 못한 옳은 졸작이다.
 
116
그러나 한가지는 큰소리를 칠 수가 있다.
 
117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김용제 씨 한 분한테만은 소기의 효과의 절반은 거둔 작품이었다고.─
 
118
김용제 씨가 「문학의 건강성과 퇴폐성」이라는 데서 「젖」을 해설한 걸가만히 보느라면, 유모의 그러한 악독한 짓이나 최서방의 그러한 반편스럽고 불의한 그 생활에 대해서 여간한 증오와 반감을 가진게 아니어 보인다.
 
119
작자가 소기(所期)한 대로 「젖」이 보여준 바 ‘악’ 과 ‘불의’에 대해서 독자가 되었거나 문학침쟁이가 되었거나 자칭 평론가가 되었거나 아뭏든 그처럼 반감과 울분을 느꼈다고 했으니, 작자로 앉아서는 저으기 유쾌한 뉴스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120
그런데 그 다음이 아주 망발이다. 그 망발로 해서 김용제 씨는 오늘날 이다지도 갖추 치소를 당하게 된 것이니, 한편 생각하면 가련타 않을 수 없다.
 
121
천성이 순박하다고 할까 혹은 7,8년 동안이나 잠을 자다가 선잠이 깨어서 엉겁결에 그랬다고 할까, 아뭏든 김용제 씨는 「젖」의 인물인 유모의 그와 같은 악독스런 짓이나, 최서방의 불의 무능한 생활을, 너무도 분개한 나머지 그 분풀이를 사뭇 작자한테다가 하려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122
어느 관객 하나가 극장에 가서 심각한 비극을 보고는, 그 극본의 작자한테로 쫓아가서 “너는 어쩌면 그다지도 잔인하게 아무개(극의 주인공)를 죽였단 말이냐!” 고 칼부림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23
김용제 씨도 만약 이 사람처럼 나한테 칼부림을 한다든지 멱살잡이를 한다 든지 했더라면 그 순정임을 희한히나 여겼을 것을 평론유죄하여 동에도 닿지 않는 횡설수설로다가 왈 ‘문학의 건강성과 퇴폐성’을 논합네, 왈 ‘리얼리즘을 옹호’ 합네 해서 급기야는 자신의 무지를 들키고 말았으니, 평론 유죄를 삼탄(三歎)치 않을 수가 없다.
 
124
김용제 씨가 「젖」을 그의 주장대로만 폄을 하려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 는가 하는 것은, 필경 재료가 궁하니까 작중의 몇 절을 인용하는 데 있어서 고의로 그러나 가장 효과 있게 개삭(改削) 인용한 걸 보아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125
가령 기생집 유모로 들어간 것을 일본 내지인네 집 유모라고 고친 것이나, 유모가 부정(不貞)을 꿈꾸고 있지 아직 행동에까지 이르지 않은 것을 벌써 부정한 짓을 한 것으로 설명한 것 같은 것은 오히려 용서하겠다.
 
126
그러나 “─ 이상스럽게 두터운 입술을 벌려 빙긋 웃는다.” (여기에 ‘이상스럽게’는 기실 ‘상스럽게’가 오식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치사 하게 그 ‘이’자를 취소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127
이 일절을 김용제 씨는 “사랑스럽게 두터운 입술 ─”이라고 지극히 교묘 하게 개삭 인용을 해놓았다.
 
128
여자의 입술을 형용하는 데 있어서 ‘이상스럽게 두터운 입술’ 혹은 ‘상스럽게 두터운 입술’이라고 하는 것과 ‘사랑스럽게 두터운 입술’이라고 하는 것과는 글자로는 간단한 차이지마는 작자의 태도는 천양지차가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29
또 그 다음에 바로 “─ 혼자서 보기는 아깝다 ─” 이런 일절이 있는데, 상하의 문맥상 그것은 유모 자신이 제 육체를 거울에 비춰보면서 생각한 말로 보아야 당연할 것이다.
 
130
사실 나는 그걸 표시하느라고 그 구절의 상하에다 “─” (縱線[종선])을 쳤었다.
 
131
그런 것을 김용제 씨는 그것을 작자가 혼자 보기는 아깝다고 여긴 것 처럼 인용을 해놓았다.
 
132
그와 같이 김용제 씨는 개삭 왜곡의 인용을 해놓고서 미리 준비해 가지고 있던 결론을 거기다가 둘러맞추어 가로되 “작자의 에로티시즘의 분장이요 취미적 긍정 태도” 운운이다.
 
133
거짓말을 제일 잘하는 게 제일 능한 외교관이란 말이 있다. 나는 김용제 씨가 외교관 후보생으로 고문시험(高文試驗)을 준비 않고서 문단으로 뛰어 들었음을 그의 천재를 위하여 못내 애석히 여긴다. 그런데 김용제 씨의 그 능한 외교적 호령은 다시 한번 발휘되었으니 즉 그의 전기 개삭 왜곡의 인용에 대한 나의 야유에 어물어물하다가 가로되 “그런 오식을라컨 문제삼지 말아라” 는 것이다.
 
134
김용제 씨여! 씨는 나의 「평계의 새로운 소음」이라고 제한 소문(小文)을 욕설이요 소시민 작가의 발악이라고 했으나 나는 결코 씨를 욕할 의사나 발악할 그런 악취미도 없었고 단지 제법 논박까지도 해줄 대상이 못되기 때문에 진짜 야유를 했던 것이다.
 
 
135
〈朝鮮日報[조선일보] 1937.12.1∼6〉
【원문】위장(僞裝)의 과학평론(科學評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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