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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열(情熱)은 병(病)인가 ◈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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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3.14~
김동인
1
情熱[정열]은 病[병]인가
 
2
2
 
 
3
이 도시의 유일한 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최상급(最上級)의 하학종이 울렸다.
 
4
피아노 반주에 무슨 노래들을 부르던 청아한 소리는 조금 전에 그치고 그 뒤에 무엇을 설명하는 듯하던 소리도 하학종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5
우수수하니 일어나는 소리가 잠시 소란스러웠다. 동시에 교실문이 열리며 안경 쓴 중년의 서양 여인이 옆에 악보를 끼고 좌우편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학생들의 인사에 대답하며 나왔다.
 
6
그 뒤를 따라서는 터질 듯이 젊은 처녀의 무리들이 따라나왔다. 악보며 교과서를 싼 책보를 하나씩 끼고서.
 
7
책보를 싸기가 좀 더디었던 듯 맨 나중에 달린 처녀 하나이 동무들의 틈을 부비어 뚫으며 바삐 나왔다.
 
8
“애두, 왜 이리 덤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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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깜짝이야. 낙태하겠구나.”
 
10
“이게 웬 일이야.”
 
11
떠밀리어 비틀거리는 학생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하였다. 그러나 떼밀고 뚫으며 나오는 처녀 서연(徐娟)이는 동무들에게는 대꾸도 안하고 그냥 뚫으며 나와서 거진 맨 앞에 다 나온 처녀에게까지 뒤미쳐 그 등을 쳤다.
 
12
“채옥이.”
 
13
등을 치면서 불렀다.
 
14
채옥이라 불린 학생은 머리를 푹 수그리고 무슨 생각에 잠긴 듯이 잠자코 걷다가 연이에게 등을 맞고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다.
 
15
“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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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끈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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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야? 무심히 가는 사람을 그렇게도 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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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따라오는데도 모르고 간담.”
 
19
서로 마주 보고 서로 웃었다. 그러나 채옥이의 웃음에는 어디인지 쓸쓸한 데가 보였다. 둘은 차차 다른 동무들에게서 벗어나서 따로 나기 시작하였다.
 
20
“채옥이 그 새 며칠 학교 쉬었지.”
 
21
“응.”
 
22
쓸쓸하고도 약간 괴로운 기색이었다.
 
23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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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서.”
 
 
25
“어디가?”
 
26
“여기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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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옥이는 아픈 데를 지시하는 듯이 턱으로 위아래를 가리켰다.
 
28
“아이머니. 그렇게 여러 군데가 아파?”
 
29
“응.”
 
30
채옥이는 스스로 픽하니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연이도 따라서 명랑히 웃었다.
 
31
학교 현관을 나서면 하늘까지 닿은 듯한 포플라 행로수가 좌우편으로 한일자로 서 있다. 그 틈으로는 첫여름 햇빛이 줄기줄기 내려비치고 있다. 약간 언덕지른 듯한 그 상쾌한 길을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처녀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나아가는 것이다.
 
32
홍채옥이와 서연이도 그 행로수길(처녀들은 이 길을 포플라길이라 하였다)로 내려섰다.
 
33
“우리 놀러 갈까?”
 
34
포플라길에 내려서면서 연이는 채옥이에게 제의하였다. 자유와 금전에 부족함을 모르고 자란 연이는 제 올케에게 전화 한 통만 하고는 마음에 있는 대로 놀러 갈 수가 있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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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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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데.”
 
37
채옥이는 한순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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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 나는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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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40
“걱정하시어.”
 
41
“어머님께 허락을 두구 가자꾸나.”
 
42
“그래두.”
 
43
“가요. 오늘은 몹시도 비싸게 구네.”
 
44
“몸도 아프구.”
 
45
“그러기에 놀러 가잔 말이지. 자 내 말만 들어요. 나두 언니께 전화하구 오께. 잠깐 기다려요.”
 
46
그러고는 채옥이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도로 돌아가서 학교로 뛰어들어갔다.
 
47
연이가 집에 전화를 걸고 도로 나올 때까지 채옥이는 무슨 큰 수심이라도 품은 사람같이 우두커니 그 자리에 그 모양대로 서 있었다.
 
48
“자, 난 허락을 받았으니 인제는 홍두 허락을 받아야지.”
 
49
“나, 오늘은 참말 용서해 줘, 응? 연이.”
 
50
채옥이는 거진 애원하는 듯한 눈을 들어 자기보다 약간 키가 더 큰 연이를 쳐다보았다.
 
51
“오늘은 왜 그러는 거야.”
 
52
“정말 놀러 못 갈 사정이 있어.”
 
53
“정말?”
 
54
“응.”
 
55
“거짓말 없이?”
 
56
채옥이는 또 다시 애원하는 듯한 눈을 연이에게 던졌다. 얼굴에 비하여 약간 큰 듯한 눈을 넓게 뜨고 미소와 애원이 섞인 듯한 표정으로 쳐다볼 때 이 눈을 정면으로 받은 연이는 칵 붙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57
“사정이 그렇다니 금일은 용서하노라. 채옥이. 그렇게 몸이 아퍼?”
 
58
“몸도 아프거니와 다른 사정도 있어.”
 
59
“다른 사정?”
 
60
채옥이는 대답이 없었다. 연이도 다시 굳이 묻지 않았다. 두 처녀는 묵묵히 포플라길을 교문으로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다.
 
61
묵묵히 내려갈 동안 연이는 여러 번 슬금슬금 채옥이의 얼굴을 곁눈으로 보고 하였다. 연이의 마음에는 괴롭고 불쾌한 한 가지의 감정이 단단히 붙어서 털어지지를 안했다.
 
62
이 학교 이 학급에서 연이는 채옥이와 가장 친하게 지냈다. 채옥이에게는 환갑 가까운 부모가 있을 뿐 무남독녀였다. 점잖은 집안의 후손으로 특별한 생업은 없고 약간 들어오는 추수로 간신히 계략을 하여나아가는 터이었다. 아들 없는 집 외딸이라 장차 좋은 사위를 맞아서 아들 겸 사위 겸 데리고 노후(老後)를 보내려는 것이 채옥이의 늙은 부모의 예정이었다.
 
63
채옥이의 부모도 연이를 퍽 신용하였다. 다른 동무들과는 놀러 다니는 것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고, 더우기 밤출입이라든가 멀리 놀러 간다든가 하는 것은 엄금을 하였지만 연이와 함께 간다면 퍽 신용하고 방심하였다.
 
64
연이의 집에는 올케 보현이의 피아노 밖에 연이의 것으로 따로 하나 있어서 음악 전공의 이 처녀들은 밤이 늦도록까지 시간가는 줄을 모르다가 어떻게 되면 채옥이는 연이와 함께 연이의 방에서 자는 때도 있었다. 이런 때라도 연이가 집 하인을 시켜서 채옥이의 부모께 채옥이가 자기네 집에서 묵어간다는 것만 알리어 두면 채옥이의 부모는 안심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65
채옥이의 부모가 다른 동창들보다 연이 하나를 신용하는 유일한 근거는, 연이는 점잖은 집안의 딸이라 하는 점이었다. 채옥이의 아버지가 연이의 아버지와 막역지교였으며 또 그의 아버지가 역시 같은 시대의 벼슬아치로 친하게 지냈고 같은 노론(老論)으로 사생 관계에까지 일을 함께한 동지였으며 ― 이렇게 거꾸로 올라가자면 오륙 대를 연하여 친하게 지내 내려온 집안의 장손 꼭지였다.
 
66
장손의 집안으로 아들이 없으니 당연히 지손(支孫)의 집안에서 양자라도 할 것이지만 여기는 애정 관계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개명(開明)의 물을 먹었는 이상 구태여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양자를 삼으랴 하여 양아들보다 양사위를 맞기로 한 것이었다.
 
67
만약 채옥이의 부모로서 연이의 오빠가 여자 희롱에 능란한 수단을 가졌다는 일만 알 것 같으면 오륙 대가 아니라 오륙천 대의 세교가 있다 할지라도 결코 자기네의 딸을 연이와 친히 사괴지조차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68
채옥이도 자기의 입장을 잘 알았다. 그러므로 늙은 부모께 걱정을 시키지 않으려 좀 친히 사괴고 싶은 동무가 있을지라도 부모의 눈치를 보아 가면서 사괴고, 놀러 가고 싶은 곳이 있을지라도 먼저 부모에게 품하기 전에 눈치부터 따져 보고 하였다.
 
69
딸이 이러니만치 부모도 인제는 딸을 꽤 신용하고 딸의 하는 말에 대하여 그다지 재검토를 하지 않고 두었다.
 
70
연이는 연이로서 채옥이를 늘 집에 데리고 와서 놀기는 하지만 한 가지의 경계심을 언제든 풀지 않았다.
 
71
오빠의 품행 때문이었다. 채옥이의 부모가 자기를 그만치 신용하거니 자기는 또한 만약 오빠의 독수(?)가 채옥이의 몸에 내리려 하면 채옥이를 거기서 구해 낼 의무감을 느꼈다. 원형의 얼굴에 코며 입이며가 모두 잘 조화되게 붙어서 꽤 아름다운 얼굴인데다가 더우기 얼굴에 비해서 약간 큰 광채나는 그 눈을 크게 뜰 때나 가늘게 뜰 때나 가만히 닫는 때나 어떠한 때에도 놀랍도록 그의 얼굴을 장식하여 고혹적 전율을 느끼게 하여 육척 남자의 간장을 녹일 만하였다. 이런 미인을 오빠의 눈앞에 내어 놓기가 겁이 났다.
 
72
오빠 서구는 어떤 여자를 보든지 표면 대범하였다. 내가 흘리는 게 아니라 여인들이 달려드는구나 하는 오빠의 말이 사실인지, 오빠가 여자에게 대하는 태도는 마치 길가의 돌이었다. 관심하는 듯하지를 안했다.
 
73
연이의 다른 동무들이 연이의 집에 드나들 때도 그러하였거니와 내심 걱정하면서 채옥이를 데려온 때에도 또는 그 뒤 채옥이가 자주 놀러 올 때에도 늘 무관심한 듯하였다. 그래서 연이는, 오빠도 차마 누이의 동무에게는 손을 못 대는가 부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러는 동안 차차 경계심도 풀렸다.
 
74
그런데 사오 일 전에 갑자기 채옥이가 결석을 하였다.
 
75
그 날은 무심히 지냈다.
 
76
그런데 이튿날도 또 채옥이는 결석을 하였다.
 
77
웬 일일까. 좀체 결석을 안하던 채옥이였다.
 
78
그 날 하학한 뒤에 연이는 동무 몇 사람과 채옥이의 집을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79
채옥이의 집에까지 이르러서 연이는 양말이 조금 흘러내리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하고 있는 동안에 다른 동무가 먼저 들어갔다가 혼자 나왔다. 나와서는 머리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 한다.
 
80
“없더냐?”
 
81
연이가 물어 보았다. 그 동무는 이상하다는 듯이 그냥 머리를 개웃거렸다.
 
82
“어제 너하구 나갔다는구나.”
 
83
연이는 놀랐다.
 
84
“나하구?”
 
85
“응, 너하구 장단(長湍)이라나 어디라나 너의 산장에 가서 이삼 일 있다가 온다구 그러구 나갔대.”
 
86
연이는 깜짝 놀랐다. 동시에 몇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뭉쳐서 그의 머리에 가득 찼다. 그 가운데 가장 강하고 중대한 생각은 어서 채옥이를 동무에게 변명하여야겠다 하는 생각이었다. 채옥을 변명하기 위한 거짓말이 직시로 제조되어 나왔다.
 
87
“오, 네가 잘못 들었다. 연이가 아니라 연희라고 있느니라. 동경음악 학교 출신으루 올드 미스요 채옥이의 리베(애인)니라. 그 사람허구 놀러간 모양이로군.”
 
88
“야아. 너 강짜하겠구나아.”
 
89
동무의 한 사람은 연이를 놀려 대었다. 그 놀림을 연이는 정면으로 받았다.
 
90
“망할 기집애. 그러니깐 나한테두 그댓말두 못했구나.”
 
91
“야아. 예편네 뺏기구. 엑기 못난 녀석같으니.”
 
92
“듣기 싫다.”
 
93
“짜증은 동무한테 하구.”
 
94
연이는 책보를 들어서 동무들을 때리려는 시늉을 하였다. 동무들은 이것을 피하여 깔깔대며 골목 밖으로 달음박질하여 뛰어나갔다.
 
95
동무들이 골목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도로 책보 든 손을 내리는 연이는 팔에 힘이 하나도 박히지 않은 것이 분명하였다.
 
96
책보 든 손을 내린 뒤에는 마땅히 자기도 빠른 걸음으로 동무들의 뒤를 따라야 할 것이나 연이는, 그렇지 않고 그냥 머리를 푹 가슴에 묻어버렸다. 그러고는 참말로 안해라도 잃은 사람같이 힘이 하나도 없는 걸음으로 천천히 골목 밖을 향하여 발을 옮겼다.
 
97
“계집 잃은 녀석 꼴 봐라.”
 
98
동무들은 골목 밖에서 돌아서서 연이를 보고 웃어대었다.
 
99
골목 밖까지 나와서 연이는 동무들과 동서로 갈라졌다.
 
100
지금 연이의 마음을 지배하는 감정은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근심이었다.
 
101
“어제 연이와 함께 나갔다.”
 
102
이 말을 듣는 순간 연이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오빠도 어제 나가서 지금(아까 학교서 전화걸어 볼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는 사실이었다.
 
103
채옥이가 어제 나가서 지금까지 안 돌아온 일과 제 오빠가 어제 나가서 지금까지 안 돌아온 일의 새에 무슨 관련이 혹은 없는지도 모른다. 혹은 있는지도 모른다.
 
104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은 채옥이가 이번에 나간 일은 결코 정정당당한 일이 못 된다는 것이다. 만약 나가는 일이 떳떳하고 비밀 없는 일이라면 부모께 정당히 그 연유를 말할 것이지 결코 ‘연이와 함께 연이의 산장에 간다’고 부모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105
설사 오빠가 나간 것과 채옥이가 나간 것이 날짜가 우합(偶合)할 뿐이지 아무 관련이 없다 할지라도 채옥이의 이번 일은 정당 행동이 아니다. 더구나 처녀가 부모를 속이고 다른 데서 잔다는 것은 연이의 상식으로는 결코 용서치 못할 죄악이다.
 
106
그런데 이번 일 ― 오빠의 외박(外泊)한 날짜와 채옥이의 외박한 날짜가 일치되는 일 ― 은 또한 연이의 직각으로서는 결코 우연이라 보이지 않았다.
 
107
채옥이가 제 부모를 속임에 연이를 끌어넣었다. 이것은 혹은 연이와 간다야만 부모가 허락할 것 같아서 꾸며 댄 말이라고 단순히 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연’이라는 핑계가 불쑥 나온 연유는 ‘연이의 오빠’가 이번 길의 동반자라는 점에서 생겨 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까.
 
108
만약 자기의 오빠와 채옥이가 동반을 하여 어제 어디 가서 안 돌아왔다 하면 이것은 큰일난 일이다.
 
109
오빠는 여자 농락하는 것을 한 개의 취미로 한다. 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여서가 아니라 또한 악의로 그 여자를 망쳐 주려고 하는 노릇이 아니라, 단지 한낱 취미로 한다. 그것은 마치 들에 핀 꽃을 꺾으러 다니는 것이나 혹은 물 속의 고기를 낚으러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순전히 취미로 한다. 오빠의 진실한 애정은 오직 올케 되는 보현이의 위에만 있지 결코 취미에 걸려드는 여자에게로는 옮지 않는다. 그런지라 오빠에게 걸려들었던 여자는 죄 진실한 사랑은 조금도 받아 보지 못하고 기진하여 떨어져 버린다.
 
110
기혼자요 또한 여자 사회에 여자 농락가로 이름높은 오빠에게 뒤따라 걸려드는 여자가 있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였다. 더우기 오빠 자신의 말마따나 오빠는 결코 자진하여 적극적으로 여자를 끌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 측에서(그런 남자인 줄 뻔히 알면서도) 덤벼든다.
 
111
이것은 혹은 오빠가 너무도 여자에게 대범한 데 대한 반항심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혹은 오빠의 풍채(사치하게 꾸미지 않고도 점잖고 경하지 않고 스타일 몸태도까지도 한 군데 흠할 데 없이 점잖아 보였다)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재산(약 이십만 원으로 오빠의 온갖 취미에 부족함이나 간신히 없이 지낼 만한쯤이었지만)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여자들은 연하여 오빠에게 덤벼든다. 그러면 오빠는 일변으로 받아서 일변으로 걷어치우며 이렇게 적지 않은 여인을 희롱하여 왔다.
 
112
그러나 오빠는 지금껏 연이의 동무를 건드린 일이 없었다. 오빠 자신이 혹 능동적으로 건드렸다면 걸릴 자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빠는 그런 일은 안하는 사람이요 처녀 측은 연이가 엄중히 감시를 하였는지라 지금껏은 무사히 지내 왔다.
 
113
그런데 지금 의외의 일 ― 혹은 채옥이와 오빠가 어떻게 되지나 않았나 하는 의심스러운 일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114
연이의 마음은 천근같이 무거웠다.
 
115
연이의 무거운 발로 전찻길까지 나섰다. 전차를 타려 하다가 기분이 전차 타기가 싫어서 걸어가기로 하였다. 전차, 자동차, 자전거, 사람 등등이 앞뒤로 홱홱 지나다니는 도회의 길이 이런 기분 무거운 때는 잠시 잊기우기도 한다.
 
116
지금 연이의 머리에 꾹 차 있는 것은 다만 채옥이와 오빠가 동행인지 아닌지 하는 점만이었다. 그리고 직각적으로 동행이라고 생각 키우기 때문에 더욱 기분이 무거웠다.
 
117
여기서 집에까지 가려면 전차 정류장으로 네 개쯤 가서 전차없는 큰 길을 조금 들어가서이다. 연이가 무거운 기분으로 전차 정류장을 하나 하고 또 반쯤 갔을 때쯤 하여 차도(車道)를 달리던 택시 한 대가 인도(人道) 가까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다가 연이가 걸어가는 근처에서 멎었다.
 
118
그리고는 차의 문이 열리며,
 
119
“연이, 연이.”
 
120
하고 찾는 소리가 들렸다. 잡답한 도회의 소란 가운데서 서너 번을 불리고야 연이는 들었다. 들으면서 뉘 소린지까지 알아들었다. 올케 보현이의 음성이었다.
 
121
돌아보니 택시의 문을 열고 반만치 몸을 일으키고 저를 부르는 사람은 과연 올케였다.
 
122
“아이, 언니.”
 
123
“연이로구먼. 채옥이네 집에 놀러 간다더니.”
 
124
대답키 거북하였다. 또 거짓말을 안할 수 없었다.
 
125
“그 댁 할머니가 오셔서 그냥 왔어요. 언니는?”
 
126
“올라와요. 난 연이가 좀 늦게 올 것 같다기에 그 틈에 포목점에 잠깐 다녀오는 길이어.”
 
127
연이는 택시로 올라가 앉았다. 택시는 미끄러지듯이 다시 닫는다. 연이는 올케의 무릎 위에 놓인 꽤 커다란 보퉁이를 보면서,
 
128
“무얼 그렇게 많이 샀소?”
 
129
하고 물었다.
 
130
“연이 혼수감.”
 
131
“망칙해.”
 
132
택시 안에서는 이 말을 사괸 뿐이었다.
 
133
집으로 돌아와서 연이는 책보만 자기 방에 들여뜨리고 올케를 따라서 큰방으로 들어갔다.
 
134
“오빠 아직 안 오셨수?”
 
135
들어가서 앉으면서 연이가 첫번 물은 말이 이것이었다.
 
136
“안 오셨어.”
 
137
“어딜 가셨나.”
 
138
“글쎄.”
 
139
“언니, 오빠 안 들어오시면 쓸쓸하지 않으세요?”
 
140
“왜 안 쓸쓸해.”
 
141
묘하다고 형용하고 싶은 얼굴에 쓸쓸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142
“또 ―.”
 
143
묻기가 거북하였다. 처녀로서 그 위에 손아래 사람으로서 더우기 묻기가 힘든 말이었다. 연이는 한순간 주저한 뒤에야 물어 보았다.
 
144
“강짜 안 나세요?”
 
145
묻고는 스스로 깔깔 웃었다.
 
146
올케는 누이를 굽어보았다. 얼굴에는 미소가 나타났다.
 
147
“강짜가 왜 나?”
 
148
“왜 안 날까. 나 같으면 넥타일 졸려잡고 한참 흔들어 줄걸.”
 
149
“그러면 오빠 숨 답답하시지 않나?”
 
150
“그러라고 그러는 건데.”
 
151
“그랬다가는 그 뒤에 또 간호해 드려야지.”
 
152
그 다음에는 둘을 한 번 크게 웃었다.
 
153
부부생활이라 하는 것은 처녀로서는 알지 못하는 신비의 세계다. 그러나 남편이 만약 다른 여인을 접한다 하면 안해 된 자는 당연히 질투의 감정이 있으리라는 것쯤은 상상이 된다. 그런데 올케는 어찌도 그 방면에는 전혀 무감각인지.
 
154
사냥꾼이 사냥 나가면 그동안은 안해는 쓸쓸하다. 그러나 사냥을 끝내고 돌아오면 그만이 아니냐 ― 올케는 이만한 관대한 마음으로 남편의 외도를 해석한다. 사랑이 변치 않으니 혹은 이치로 따지자면 그럴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질투라든가 사랑이라든가는 감정의 산물이지 이치의 산물이 아닌 이상에 어찌 그렇게 간단히 처리할 수 있을까.
 
155
연이는 겉으로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도 내심 의혹과 근심(채옥이 때문에)이 적지 않았다.
 
156
“이봐요, 연이.”
 
157
그 날 저녁을 먹으면서 올케는 연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158
“샘이라든가 그런 걸 난 모르지만 걱정이 꼭 하나 있어. 걱정이란 다른게 아니구 여자라는 건 남자와 달라서 시선 한 번 그르치면 일생을 망치는 노릇이거든. 오빠 말씀이야 저쪽에서 떨어지는 게니 책임없다 하시지만 그건 억설이구, 사실에 있어서 한 번 처신 잘못하는 게 일생을 좌우하는 겐데. 그걸 애당초 생각치 않고서. 그게 내게는 단 한 가지 걱정이야.”
 
159
이 말을 하면서 올케는 약간 탄식성을 내었다.
 
160
그날 밤도 오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161
이튿날 학교에 가 보니 채옥이는 예상대로 또 결석이었다. 저녁 때 동무들과 함께 가서 동무들만 채옥이의 집에 들여보내 물어 보니 물론 아직 안 돌아왔다는 것이다.
 
162
인제는 거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채옥이는 지금 오빠와 어디 박혀 있는 것이다. 서울 있는지 어디 갔는지는 모르지만 오빠와 채옥이가 동반해 있다는 것만은 거진 확실성을 띠었다. 연이의 가슴은 아프고 저리었다.
 
163
“처신 한 번 그르치면 여자의 일생은 망친다.”
 
164
언니의 하던 말이 절절히 새롭게 가슴에 울렸다.
 
165
오빠는 지금 채옥이를 희롱하는 것도 과거에 적지 않은 여자를 희롱한 그 기분으로 할 것이다.
 
166
과거에 다른 여자들이 오빠의 희롱을 당할 때는 그저 일상 다반사로 가볍게 보았지만 지금 자기의 가장 친한 동무가 자기의 가장 경애하는 오빠의 희롱을 받고 있을 생각을 하니 어찌하여야 할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167
오빠를 미워할 수 없다. 어떠한 일 어떠한 경우를 당할지라도 연이는 결코 오빠를 미워할 수 없었다.
 
168
그렇다고 지금 그 오빠의 독수(?)에 희롱받을 친구 채옥을 생각하니 채옥이에게 온통 정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169
“일생을 망친다.”
 
170
그렇다 할진대 지금 채옥이는 피해를 입는다. 채옥이를 피해자로 보자면 오빠는 가해자다. 피해자를 동정하자면 가해자를 밉게 안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오빠를 그래도 밉다는 감정으로 볼 수 없는 연이는 타오르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날 하학한 뒤 연이는 메이는 듯한 가슴을 억제할 수 없어서 한강까지 나가서 강변을 훨훨 돌아다니다가 다시 시내로 돌아와서 남산에 올라가서 울창한 송림 새를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의미없고 정신없는 방황을 하다가 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171
집 대문 밖에서 오빠가 올케와 산보나갔다가 돌아오는 참에 마주쳤다.
 
172
이튿날 학교에를 가 보니까 오늘은 채옥이가 등교를 한 것이다.
 
173
연이는 여러 번을 주의하여 채옥이를 관찰하였다.
 
174
조금 어떻게 보면 흥분된 듯한 기색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때때로 오뇌하는 듯한 표정이 나타나는 때가 있었다.
 
175
그러나 그게는 그 밖에 다른 기색이 없었다. 좀 피곤해 보이는 듯하였다.
 
176
하학한 뒤에 연이는 책보싸기가 좀 늦어서 바삐 싸 가지고 뒤따라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채옥이를 붙들었다. 붙들고 놀러 가자고 청하여 보았다.
 
177
물론 채옥이가 자기와 놀러 가기를 열적어할 것을 짐작은 하였다. 그러나 요행 함께 가게 되면 좀 막연하나마 그의 심경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178
그랬더니 채옥이는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굳이 함께 놀러 가기를 거절하였다.
 
179
할 수 없었다.
 
180
학교 밖에 나서서 서로 헤어지는 곳까지 이를 동안 두 처녀는 몇 마디의 말을 사괴지 않았다. 갈라지는 곳에서도 간단히 서로 얼굴을 보고 머리를 끄덕 하고는 헤어졌다.
 
181
이튿날부터 연이는 채옥이의 동정을 매우 주의하여 살폈다. 오빠의 동정도 당연히 살필 것이나, 오빠의 태도는 여전히 대범한 것뿐으로, 더 살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채옥이만을 주의하여 살핀 것이다.
 
182
채옥이는 분명히 오뇌하는 듯한 기색이 현저하였다. 그리고 또 흔히 무슨 생각에 빠지는 듯 불러도 대답하지도 않고 멍하니 있는 때가 많았다.
 
183
그러나 이상 관찰한 바가 무엇을 뜻하는지 연이로서는 똑똑히는 알 수 없는 바였다. 아직 연애라는 과정을 밟아 보지 못하고 더우기 성(性)이라는 방면에서 아주 무지한 처녀로서는 채옥이의 태도만을 보고 어떠어떠한 감정에 잡혀 있다고 판단을 내릴 자신이 없었다.
 
184
자신은 없으나 막연히 느낀 바는 있었다. 채옥이가 소위 연애라는 감정에 잠겨 있는 모양이라는 이만한 막연한 결단은 연이로도 내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만약 채옥이가 사실 그렇다면 그 상대자는 틀림없이 자기의 오빠일 것이다.
 
185
이 학교는 가사과(家事科) 같은 질소(質素)한 과목을 전공하는 학생중에도 그런 학생이 간간 생겨서 학부형이나 학교 당국자를 골치쏘게 하였다. 하물며 문과(文科)든가 음악과(音樂科)에는 늘 몇 사람의 과외자가 있고 하였다.
 
186
교풍(敎風)이라기보다 학생의 풍조가 그러니만치 연이도 그런 학생들이 통상시에 어떤 태도며 어떤 표정을 가지는지도 짐작이 간다. 그 위에 무르익은 이 처녀들 새에 유행하는 동성끼리의 사랑 등등은 적지 않았는지라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아주 그 방면에 무식한 바가 아니었다.
 
187
채옥이의 태도가 연애하는 자의 태도에 흡사하고 채옥이가 오빠와 이삼 일간 함께 어디 숨었던 것은 인젠 거진 의심할 바가 없고 하니, 채옥이는 오빠를 현재 사랑하고 있다 하는 점도 넉넉히 상상할 수 있었다.
 
188
오빠 서구가 남녀 관계를 비교적 가볍게 생각하는 반대로 연이는 이를 또한 매우 중하게 보는 처녀였다.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 하는 것은 반드시 결혼을 전제삼아 할 것이지 희롱삼아 할 것이 아니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189
오빠에게는 사랑하는 부인이 있다. 채옥이는 오빠의 안해,(연이에게 있어서는 여자가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안해, 혹은 장래 안해에 한해서 가질 권리인 듯하다) 한 남자는 한 안해만을 가져야 한다.
 
190
이런 세 가지의 생각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근심’이라 하는 것이 되어 연이를 괴롭게 하였다.
 
191
채옥이를 중하게 보자면 올케를 버려야 한다. 그러나 연이는 올케를 조금이라도 가볍게든가 밉게든가는 볼 수가 없었다.
 
192
연이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다. 홀아버지의 아래서 남매가 자라다가 연이가 열다섯 살 나는 해에 오빠가 장가를 들었다. 장가든 직후에 신혼여행으로 세계 일주를 한다고 일 년간을 조선을 떠나 있었다. 오빠 내외가 귀국한 지 얼마 안 지나 홀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연이는 오빠 내외의 손에 길러왔다.
 
193
처음에는 올케에게 단지 의지하고 살았다. 좀 지나는 동안 애정이 생겼다. 그러나 좀더 철이 든 뒤에는 올케의 인격에 감화되어 버렸다.
 
194
오빠는 온갖 점으로 비난할 점이 없지만 소위 스스로도 악취미라고 부르며 행하는 여자 희롱. 이것은 안해 된 자로서는 참기 힘든 일이지만 역시 일호의 샘도 느끼지 않고 정면으로 승인하는 올케의 심정은 연이로서도 경탄할 바이었다. 올케의 인내심은 이 일에뿐 아니라 온갖 일에 경탄할 만한 일이 많았다. 감격하기 쉬운 나이의 처녀는 자기의 올케를 지존지고의 여자의 표본으로 보았다. 그런 경탄할 사람을 자기의 올케로 모시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기꺼이 생각하였다.
 
195
이런지라 올케를 약간이라도 좋지 않은 감정으로 볼 수가 없었다.
 
196
그러면 채옥이는 어떻게 처치해야 되는가.
 
197
물론 현재 연이가 그런 훌륭한 올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채옥이를 올케로 삼아도 좋다. 내외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는 모르지만 자기의 올케로 삼기에 채옥이는 그다지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서로 성격이 맞고 안 맞고는 당자끼리라야 알 문제지만 겉에 나타난 점만으로는 채옥이도 넉넉히 올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198
그러나 현재 한 떳떳한 올케가 있는 이상에….
 
199
여기서 연이의 근심은 출발되는 것이다.
 
200
한 오빠에게 두 올케.
 
201
대체 오빠와 채옥이의 정사(情事)가 언제부터 어떤 경로를 밟아서 시작되었나.
 
202
채옥이가 연이 자기와 동반하여 자주 집에 오면 자연히 오빠와 대면할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203
여기까지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뒤의 전개는? 오빠가 먼저 편지(연이의 상식으로는 연애의 전개는 한편쪽의 편지로서 출발하는 것이라 믿는다)를 하였을까?
 
204
이것은 연이에게 믿기지 않는 말이다. 오빠의 말마따나 오빠는 언제든 수동적(受動的)이지 능동적이 아니었다.
 
205
그러면 채옥이가 먼저 편지를 하였을까?
 
206
이것은 연이의 상식으로는 너무도 망칙스러운 일이었다. 처녀가 남자 ― 더구나 기혼 남자에게 보통 편지도 아니고 그런 편지를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얼굴 붉어지는 일이었다.
 
207
오빠와 채옥이의 이번 일의 전개(展開)는 연이에게 있어서는 전혀 수수께끼였다.
 
208
하여간 한 기혼 남자와 한 처녀가 수일간을 함께 숨어 있었다 하는 것은 연이로서는 그저 보지 못할 비행이었다.
 
209
누가 선착수를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선착수인 사람은 마땅히 비난(非難)당할 사람이요 따라서 좋지 못한 사람이다.
 
210
그 두 사람이 연이에게는 매우 가까운 사람들이라 연이는 마음이 더 좋지 않았다.
 
211
그 일(오빠와 채옥이가 수일간 행방불명이 된)이 있은 뒤에 연이는 몇 번을 채옥이와 단둘이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212
단둘이서 만나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주고받다가 우연히(사실은 연이가 부러 한 일이지만) 이야기가 연이의 오빠 서구에게 미치면 채옥이는 당황해하고 이야기를 피하려 하고 그러면서도 일방 더 들으려 하고 ― 수상하다고 볼 일이 너무도 많았다.
 
213
연이의 판단으로는 채옥이는 분명 처녀의 순정으로 제 오빠 서구를 사모하는 것이라 보았다.
 
214
그 대신 그 일이 있은 뒤부터는 한사코 연이의 집에는 오지 않았다. 퍽 애써서 끌어 본 일까지 있지만 채옥이는 마지막에는 몸을 떨며 울먹울먹하면서까지 연이의 청을 거절하였다.
 
215
“무슨 큰 원수졌남. 왜 우리 집엔 안 가겠다는 게야.”
 
216
나무람조를 꽤 끼여서 연이가 채옥이에게 이렇게 물을 때에 채옥이는 그의 유난히 큰 눈을 꼭 바로 뜨고 연이를 마주 보면서,
 
217
“연이 오해하지 말아요. 안 가겠다는 게 아니라 오늘은 집에 일이 있어서 못 가겠어.”
 
218
하고 변명하는 것이었다.
 
219
“그럼 내일은?”
 
220
“내일은 내일 보아야지.”
 
221
요컨데 채옥이는 연이의 집에는 무슨 핑계를 써 가면서든지 가지 않았다.
 
222
이런 모든 일이 연이에게는 적적하고 마음 괴로웠다.
 
223
오빠와 채옥이가 그 뒤에도 또 만났는지 어떤지 이 점도 꽤 주의하여 살폈지만 이것도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224
오빠가 채옥이에게 대하여 가지는 감정이 어떤지 이 방면도 좀 따져보고 싶었지만 이것도 직접 물어 보기 전에는 언제든 대범한 오빠의 태도로는 알 수가 없었다.
 
225
사건이 어떻게 어디까지나 진전되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는 일이라 연이는 몹시도 걱정하면서도 얼마만치나 걱정해야 할 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226
언제 한 번 오빠와 단둘이서 조용히 만날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227
채옥이와 함께 며칠을 지냈다고 생각되는 그 행방불명 사건이 있은 뒤에는 서구는 한동안 딴 데서 밤을 지내는 일이 없었다. 서재에 박혀서 책을 보거나, 창작(創作)의 붓을 잡거나 혹은 내외 동반하여 놀러 나다니거나 하는 뿐, 새로이 여자 관계에 손을 대는 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228
그 어떤 토요일날 연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도회의 중심지 되는 네거리에서 전차를 바꾸어 타려다가 오빠 서구와 만났다.
 
229
“지금 학교에서 오는 길이냐?”
 
230
“네. 오빤 어디 가세요?”
 
231
“훨훨 산보로다.”
 
232
“언니는?”
 
233
“집에서 침모 볶고 있겠지.”
 
234
여기서 헤어지려 하였다. 연이는 이 기회에 오빠와 단둘이서 무슨 의논을 좀 하려고 도로 오빠를 찾았다.
 
235
“오빠. 점심 한턱 하시겠어요?”
 
236
“점심?”
 
237
귀찮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한순간 생각하였다.
 
238
“허지. 무얼? 야끼이모(燒き芋 ― 군고구마)?”
 
239
연이는 오빠를 흘겼다.
 
240
“그럼 오뎅?”
 
241
“먹는 것보담두 어디 시원한 데 가서 쉬고 싶어.”
 
242
“집이 제일 시원할걸.”
 
243
여름이 다 된 일기였다. 시원한 데 가서 한껏 허리를 펴보고 싶은 시절이었다.
 
244
“집에 가세요.”
 
245
서구는 잠깐 생각하고 미소하였다.
 
246
“나는 괜찮지만 넌 보도연맹에 들키면 귀찮지 않니?”
 
247
“오빠하구 나하구면 누구든 오누이로 인정해요.”
 
248
“아무려나. 좌우간 좀 조용한 점간으루 가자.”
 
249
오누이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약 반 시간 남아 지난 뒤에는 오누이는 교외 어느 조용한 음식점에 마주 앉게 되었다.
 
250
음식을 시키고 잠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뒤에 연이는 불쑥 요건(要件)을 들고 나왔다.
 
251
“오빠.”
 
252
“응?”
 
253
“저 채옥이요. 홍채옥이 말씀이예요. 채옥일 어떻게 보세요?”
 
254
막연한 질문이었다. 이 막연한 질문을 던지면서 연이가 가장 속으로 걱정하고 근심할 바는 오빠가 이 문제를(귀찮아서든 열적어서든 간에) 회피하여 버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255
‘아, 미인이지.’
 
256
하고 하하 웃어버리든가,
 
257
‘내가 알 것 있느냐.’
 
258
하고 성가신 듯이 내어버리든가 하면 그 뒤를 계속하기가 힘든다. 오빠가 눈살을 찌푸리고 내어던진 문제는 연이로서는 다시 들고나오기 힘들고 설사 다시 들고나온다 할지라도 거기 오빠는 대척치 않는다.
 
259
이렇게 때문에 적지 않게 조마조마해서 이 질문(막연한 질문이었다)을 오빠에게 던진 것이다. 그런데 의외에도 여기 대한 오빠의 태도가 비교적 신중하였다. 오빠는 물었던 담배를 손에 내리어 재를 털면서 누이를 정면으로 건너다보면서 대답하였다.
 
260
“질문을 조금 요령있게 해보아라. 어떻게 보다니?”
 
261
“아이.”
 
262
참 묻기 힘든 말이었다. 오빠의 태도가 신중하니만치 이 기회를 놓치기가 싫었다. 그러나 요령있는 질문이나 선뜻 생각나지 않았다.
 
263
그러나 생각할 만한 시간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연이는 단도직입적으로 재차 질문을 던졌다.
 
264
“오빠 채옥이와 며칠 함께 지내셨지요?”
 
265
너무도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이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면서도 연이는 전번의 막연한 질문을 던질 때와 꼭 같은 근심을 하였다.
 
266
‘그게 무슨 소리냐.’
 
267
고 탁 튀겨 버리든가,
 
268
‘그런 일은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269
고 피해 버리든가,
 
270
‘색마 오라방 두구 너두 애쓴다.’
 
271
고 웃어 버리든가 하면 뒷말을 잇기가 매우 힘들다. 그런데 오빠는 비교적 신중한 태도로 응하는 것이었다.
 
272
“음. 이삼 일간.”
 
273
오빠는 정면으로 연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하였다.
 
274
오빠가 이렇게 응하고 보니 역시 뒷말을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인제부터는 연이는 사려(思慮)있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탁탁 질문을 던졌다.
 
275
“오빠 그게 ―.”
 
276
울먹울먹 하였다.
 
277
“그게 무슨 일이세요?”
 
278
서구는 잠깐 뒤에야 대답했다.
 
279
“무얼 말이냐.”
 
280
노여운 음성도 아니요 희롱의 음성도 아니었다. 연은 눈에 눈물을 그득이 고여 가지고 오빠를 쳐다보았다.
 
281
“학생을 ―. 누이의 동물…….”
 
282
잠시 침묵.
 
283
“연아, 너 너의 오빠를 믿음직한 오빠로 아느냐, 미덥지 못한 오빠로 아느냐.”
 
284
“그야 ―.”
 
285
쑥스러운 대답이라 입밖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쳐다보는 그의 눈은 전면적으로 신뢰할 만한 오빠라는 뜻을 나타내었다.
 
286
서구가 다시 말을 이었다.
 
287
“여러 말 말자. 너는 아직 처녀야. 너한테 이런 말 하기두 어렵구 한댔자 어느 정도까지 이해할지 모르지만 네 동무 채옥이는 지금두 순결한 처녀루다. 그것만 믿어라.”
 
288
“오빠.”
 
289
“사내동생이 여자동생한테 말하기 쑥스런 말이다. 하지만 네게 부탁이 있다. 네가 채옥일 조용히 만날 기회가 있거든 네 오빠가 기혼자이구 색마(서구는 스스로 미소하였다)이고 또 절대로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이해시켜 다고. 채옥이는 너무도 정열이 세어. 정열이 센 건 좋아도 그 정열이 딴 길로 뻗었다가는 신세 버린다.”
 
290
얼마 전에 올케에게서 여자 처신을 한 번 그르치면 신세망친다는 말을 들었다. 오늘 오빠에게서 채옥이가 정열이 과히 세어서 그 처치 잘못했다가는 신세버린다는 말을 들었다. 처신 그르친다는 말과 정열의 처치를 잘못한다는 말과는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91
그 소위 신세 망치는 행동을 했으리라고 믿고 있던 채옥이가 오빠의 말눈치로 보아서는 아직 그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 그 위에 도리어 오빠 측에서 연이 자기에게 부탁을 해서 그 일을 피하게 하고자 하는 모양이었다.
 
292
원체 일 자체부터가 아직 처녀인 연이에게는 막연히밖에는 짐작이 못가는 일인 데다가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연이는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다만 아직 채옥이가 신세를 망치는 행동을 하지 않은 듯하고 오빠가 그 가해(加害)를 하지 않은 듯한 점만이 연이의 가슴에 무득하니 기뻐 왔다.
 
293
이 이상 더 깊이 물을 줄도 모르거니와 안다 할지라도 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남매는 이것으로 이 문제는 해결지은 셈으로 쳤다.
 
294
채옥이의 이야기를 집어치우고는 서구는 조금 물러앉으며 팔로 난간을 의지하며 눈으로는 난간 쭉 아래 흐르는 계곡을 내려다보면서 농담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295
“나두 어서 매부를 하나 골라야 하지 않는가.”
 
296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알아듣고는 홱 손에 들었던 수건을 오빠에게 던졌다.
 
297
“난 안 가요.”
 
298
“흥, 안 가? 잘 견디어 배기겠다.”
 
299
“오빠 같은 줄 알우?”
 
300
“어떤 녀석을 골라 주나? 얘, 저기 소나무 틈으로 목동(牧童)들이 가지? 경치 제법일세.”
 
301
저녁때가 거진 되어서 점심을 먹고 남매가 집으로 돌아오매 집에서는 벌써 저녁밥이 되어 있었다.
 
302
이 날의 이 비교적 한가롭고 싱거운 듯한 이야기 몇 마디로 연이의 마음은 훨씬 명랑해졌다. 채옥이에게 품었던 기괴한 감정이며 오빠에게 품었던 별한 생각은 일소되어 버렸다.
【원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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