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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자(墮落者) ◈
◇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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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 ~3.
현진건
1
타락자
 
2
12
 
 
3
어데에서 술이 좀 취한 나는 열 점 가까이 되어 웬걸 있을라고 하면서도, 이 말 무지로 그의 잠긴 중문을 뚜드리며 불러본 일이 있었다.
 
4
"놀음 가고 없습니다."
 
5
아니나 다를까 굵다란 남자의 소리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릴없이 발을 돌리랼 때였다.
 
6
"네에!"
 
7
이번에는 새된 여자의 목청이 들리었다. 금심의 소리리라. 짤짤 끄는 신 소리를 들을 겨를도 없이 중문은 열리었다.
 
8
시난고난이 드러누워 있는 춘심을 보았다. 핏기 하나 없는 샛노란 얼골에도 나를 반기는 웃음은 움직였다. 그리고 신음하는 소리를 떨었다.
 
9
"아이고 오셔요, 오셔요……. 나는 어제부터 이렇게 아파요……. 이럴 때 오셨으면, 오셨으면 하던 차이여요."
 
10
나는 가엾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그의 머리를 짚으며,
 
11
"어데가 그렇게 아프담?……. 나는 없단 말을 듣고 곧 가려고 하였지……."
 
12
라고 하였다.
 
13
"아버지께서 모르시고 그런 것이야요. 목소리가 당신 같길래, 금심이더러, '나가 보아라, 아마 ○○○씬가 보다.’ 하였어요."
 
14
제 아픈 것은 둘째이고 딴 것이 매우 마음이 키이는 것 같이 변명하였다.
 
15
"나는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어데가 저렇게 아퍼?"
 
16
"무얼 몸살이 좀 낫는가 보아. 그것이야 어쨌든 요사이 왜 그리 안 왔습니까? 어데가 아프면 당신 생각이 열 곱 스무 곱 더 나서 짜장 견딜 수 없습니다……. 암만한들 제 마음을 아시겠소……."
 
17
그의 말마따나 나는 며칠 동안 그를 멀리 하였나니, 그것은 빈손으로 오기가 뻔뻔스럽고 추근추근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만 오면 딴 이의 부르는 것을 따는 것이 민망도 하였음이다. 더구나 홀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고통을 아니 느끼고 올 수 없었음이다. 그러나 어째 와서만 보면 나의 예상은 노상 틀리었다. 그의 일거 일동과 일빈일소(一嚬一笑) 어느 것에 나를 비난하는 무엇을 찾기 어려웠다. 오늘 역시 그러하였다.
 
18
"고맙군, 고마워. 그렇게 나를 생각해 주니……."
 
19
나는 참말 감사 안 할 수 없었다.
 
20
"늘 저러겠다……. 참말이다? 고마울 게 무엇이야요? 어데 나리가 생각하라서 생각합니까? 절로 생각해지니, 생각하는 게지……."
 
21
"이랬든 저랬든 고마우이. 이것은 참 참말이다."
 
22
"그래 참말이야요? 나리가 참말이라니 나도 참말을 좀 하리까? 나는 화류장에 노는 계집이올시다. 노는 계집이라 이 손님하고도 놀고 저 손님하고도 놉니다. 요릿집에서 요릿집으로 불리어 다닙니다. 번화하게 웃고 지냅니다. 그래도 때때로 외로운 생각이 들어요. 곧 울고 싶어요. 시쳇말로 나지미가 많으면 많을수록 어째 쓸쓸해서 견딜 수 없어요. 요새 문자로 꼭 한 사람에게 연애를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하로도 열두 번이나 나겠지요."
 
23
그는 폐부에서 짜낸다는 어조로 이렇게 늘어놓았다. 왼통 허위는 아닌 고백이리라. 참된 사랑을 할 수 없음은 위에 없는 심적 비극일 것이다. 환락의 맨 밑에는 비애가 가루 누워있음도 혹 사실일 것이다. 술에 물커지고 육(肉)에 해어진, 백공천창(百孔千瘡) 뚫린 넋의 신음을 나는 듣는 듯 싶었다. 춘심은 말을 이었다.
 
24
"나리를 알게 되자, 어째 전일에, 생각하던 대로 된 것 같아요.……그런데 웬일인지 더욱 애닯고 슬퍼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 전 슬픔은 여기에 대면 아모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리를 보면 웃음은 나오면서도 가슴이 메어지는 듯 하여요, 고만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리를 아삭아삭 물어 뜯고 싶겠지요. 그러나 물어뜯기는 건 제 가슴이지요. 독한 벌레에게 쏘인 것처럼 쓰리고 아팠어요. 이것이 무슨 까닭인지?……"
 
25
이 피를 뿜는 듯한 언언구구(言言句句)가 단 쇠끝 모양으로 나의 가슴에 들어 박혔다. 따끈따끈한 고통을 느끼면서 신랄한 쾌감을 맛보았다. 나도 그를 지근지근 물어주고 싶었다. 물지는 못할망정 나의 입술은 그의 입술을 열렬하게 빨고 있었다. 그 위에 핀 키스의 꽃을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것처럼…….이윽고 뜨뜻한 무엇이 나의 얼굴에 축축하게 젖음을 느끼었다. 나는 낯을 떼었다. 그는 울고 있다. 다이아몬드 알갱이 같은 눈물 방울이 번쩍이는 그의 속눈썹에 송송 솟는 것을 보았다. 나는 다시금 그를 움켜 안았다…….
 
26
"놓아 주셔요, 놓아 주셔요."
 
27
하고 얼굴을 돌리며 눈물을 씻는다.
 
28
"헤프게도……. 웃지나 말아 주셔요. 속없는 년이라고 웃지나 말아 주셔요……. 얼 없는 사나이의 우는 꼴을 볼 때 미쳤다 울기는 왜 울어하고 속으로 웃은 일이 있습니다. 그 품앗이로 오늘은 내가 울고 나리가 웃겠지요!"
 
29
하고 울음을 물어 멈추려고 한동안 애를 쓰다가 암만해도 못 참겠다는 듯이 흑흑 흐느끼며,
 
30
"나같이 못난 것 생각마시고 부모 봉양이나 잘 하셔요. 처자나 잘 기르셔요. 아까운 청춘에 이런 데 다니시지 마시고 만 사람이 우러러 보게 잘 되십시오. 나는 진정으로 나리께 바라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나도 이를 악물고 나리를 잊겠습니다…… 아아, 우리가 왜 알게 되었던가…… 다시 오시지 말아 주셔요. 내 눈에 보이지 말아 주셔요. 나에게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31
딸 자식 하나만 바라는 불쌍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의 노경을 편안히 지낼 만한 거리를 아니 장만하고는 내 몸이라도 내 몸이 아닙니다. 어제도 딴 년처럼 사나이 삿갓 못 씌운다고 야단을 만났습니다.……. 내 한 몸만 같으면……."
 
32
말끝은 오열에 멈춰지고 말았다. 마츰 그 때이었다. 중문 흔드는 소리가 요란히 들렸다. 춘심이 다리러 또 인력거가 왔다. 옆 방에 있는 금심은 나갔다 들어왔다. 춘심은 눈물을 숨기었다.
 
33
"저어…… 김 승지 영감이, 식도원에서……."
 
34
"아파서 못 간다 하려무나."
 
35
금심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위협하는 듯한 차부의 소리가 가루 질렀다.
 
36
"그러지 말고 가셔요. 김 승지 영감이 부르셔요. 또 올 걸입시오."
 
37
"아픈데 어찌 간단 말인가?"
 
38
"꼭 모시고 오래요. 괜히 남 걸음 시키지 마시고."
 
39
"우연만하면 가 보게그려."
 
40
나는 곁에서 말 참여를 하였다.
 
41
이 김 승지란 자는 나의 가장 위험한 경쟁자이었다. 춘심의 말에 의지하면 궐자(厥者)는 일 년 전부터 자기에게 마음을 두어 가용(家用)도 대주고 세간도 장만해 주었으되 상관(?)은 없었다. 궐은 서울에서 굴지(屈指) 하는 부호의 장자이니 재산은 유여하지만 그 인물에 이르러서는 영(零)이었다. 그 검고 얽은 얼굴이란 보기만 하여도 지긋지긋하되 돈 하나로 말미암아 괄시할 수 없는 손님이었다. 빚 6 천 원 갚아 주고 5 천 원짜리 집 사 준다는 조건 밑에 궐은 춘심을 떼어 들이려고 하는 중이었다. 금력으론 싸울 수 없다. 인격이나 사랑으로 대항하려는 나는 궐이 부른 줄 알면 피해 주는 것이 항례이었고 가기 싫다는 것을 가 보라고 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궐자로 말미암아 우연의 길운과 초자연의 기행(奇行)을 믿게 되어 습득횡령(襲得橫領)을 꿈꾼 것만 여기 자백해 두자. 춘심은 버티고 가지 않았다.
 
42
얼마 아니 되어 궐자가 친히 왔다. 금심이가 미닫이를 열자 춘심은 일어 앉으며 인사하였다.
 
43
"어데가 그리 아프담?"
 
44
"어째 몸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45
"에키, 몸살이 난 게로군. 그런 줄 모르고 나는 식도원에서 요리를 시켜놓고 불렀지. 시킨 요리를 퇴할 수도 없고 또 혼자야 먹을 수 있나? 그래 이리 가져 오라 하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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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그렇습니까? 퍽도 미안합니다. 좀 올라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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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계신데……. 나 곧 갈 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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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는 혈관에서 불을 피우며 미쳐 날뛰었다. 어떻게 생긴 놈인지 상판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춘심의 앞에서 보기 좋게 모욕해 주고 싶은 잔인한 생각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래서 나의 관대와 아량을 보이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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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관계없습니다. 들어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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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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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고맙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52
간다고 하면서도 가지 않았다. 궐과 나는 한참 버티고 있었다. 그럴 사이에 요리상 온다는 것이 나의 용기를 꺾었다. 그것 오기 전에 나는 이 자리를 아니 떠날 수 없었다.
 
53
"더 노시다가 가시지요?"
 
54
춘심은 미안해 못 견디는 듯이 말을 하였다.
 
55
"신진대사(新陳代謝)라니 먼저 온 사람은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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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점잖은 말을 하고 나왔다. 마루에 걸어앉은 이 경쟁자를 해치고 싶은 나는 전신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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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내가 가야 들어가시겠습니까?"
 
58
하고 나는 눈살로 궐자를 쏘며 웃음 속에 도전의 칼날을 빛내었다.
 
59
"이것 안되었습니다. 매우 미안합니다."
 
60
하고 궐자도 홍소하며 눈이 불을 흘리었다. 궐의 얼굴은 마치 이글이글 타는 숯불 위에 놓여 있는 불고기 덩이 같았다. 모르면 모르되 나의 얼굴빛도 그러하였으리라. 어찌하였든 나는 밀리어 나왔다. 패배하고 말았다. 분해서 견딜 수 없다. 다시 들어가 아까는 내가 나갔으니, 인제는 노형이 나가시오 하고도 싶었다. 그것보다 딴 사람을 들여보내 들부수는 것이 나으리라 하고 나는 미친 듯이 달음박질하였다. C의 여관 문을 두드렸다. C는 없었다. 나는 밤이 깊어 가는 줄을 모르고 다방골 근처를 빙빙 돌며 헛되이 보복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다.
 
61
그런 창피를 당했으면 다시는 그의 집에 아니 갈 것이련만 나는 마치 흉한에게 빼앗기었던 애인의 안부를 살피려는 것처럼 그 이튿날도 춘심을 방문 하였다. 이만치 나는 춘심에게 정신을 잃게 되었다.
【원문】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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