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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의 운명(運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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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채만식
1
아시아의 運命(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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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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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자리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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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총기 좋은 할머니)가, 한 동네에 있는 둘쨋집에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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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세 아들, 윤석(允錫), 승석(承錫), 중석(重錫)의 삼형제 가운데, 기미년(己未年) 삼일운동 적에 죽은 그 둘째아들 승석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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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석의 집이라고 하지만, 물론 대주(大主) 승석은 이미 죽어 없고, 유족으로 그의 부인 강씨(康氏)가 아들 원희(元熙)를 데리고, 따로이 한집(戶口[호구])을 이루고 사는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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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석의 둘쨋집, 중석의 세쨋집과 더불어, 맏이 윤석, 멀리 경술년(庚戌年) 합방 후 의병에 투신을 하였다가, 다시 해외로 나가 광복운동을 하다 노령(露領)으로 간 뒤로 이내 소식이 없어, 필연 죽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그 윤석의 집도 같이 이 동네에 있었다. 윤석의 부인 고씨(高氏)가, 그 몸에서는 소생이 없어, 셋째 중석에게서 난 성희(成熙)를 양자로 들여, 같은 한 동네에서 역시 따로이 한 집(戶口[호구])을 이루었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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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집, 둘쨋집, 세쨋집이 그래서 다 이 동네, 한 동네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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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늘, 둘쨋집에도 가서 며칠씩 있다, 큰집에도 가서 며칠씩 있다, 세쨋집으로 와서 한동안씩 있다 하면서, 어린 증손자들의 재롱도 보고, 장성한 손자들이 제각기 제 앞을 가려 가며 사는 양을 흡족하여 하기도 하고, 더러는 어느덧 흰머리가 성성한 며느리들과 함께 파란 많고 한(恨) 많던 과거를 회상하며 하염없어하기도 하고 하는 것으로 낙과 소일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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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한 이틀 춥는 체하더니, 오늘 아침부터 도로 풀리어, 해동머리의 봄날같이 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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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는 할머니한테 대접할 밤참으로 시루떡을 찌느라고 컴컴한 부엌에서 아궁이의 장작불이 황황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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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젊은 주부요 원희의 아낙인 김씨(金氏)가 떡시루의 소댕을 얼고 긴 창칼로 여기저기 떡을 찔러본다. 부연 김이 솟아 부엌으로 가득 잠기고, 호박시루떡이 익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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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끝에는 아직도 날가루가 묻어나와 김씨는 소댕을 덮고 불을 더 싸게 지핀다. 옥녀─원희 내외가 고아를 거두어 기르는 수양딸이, 옆에서 같이 일한다. 여기도 불은 매양 깡통으로 만든 석유등잔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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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추씨만한 등잔불을 등판에 받쳐놓고, 할머니와 며느리와 손자 원희가 둘러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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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어디 가서나 마찬가지로, 아랫목 벽에 기대어 발 벗은 두 다리를 포개 뻗고 편안히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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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목 뒤 곁으로, 이불을 올려논 반닫이가 있고, 그 앞으로 며느리 강씨가 앉아 긴 담뱃대에 담배를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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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같이 늙어가는 고부(姑婦)끼리라고는 하여도, 며느리로 앉아 시어머니 앞에서 장죽에 담배를 피우다니, 속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자못 어색하고, 체수 아닌 풍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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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가 나이 적은 남편 승석보다 한 살 더한 신묘생(辛卯生) 쉰여덟이요, 시어머니 되는 할머니가 일흔여덟이니, 같이 늙는다고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며느리가 시어머니 앞에서 긴 담뱃대 꼿꼿이 물고 앉았다는 것은 예사 가풍(家風)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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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기미년에 둘째아들 승석이 죽고, 그의 아낙 강씨가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자, 시어머니인 할머니는, 이 며느리에게 일부러 담배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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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갑오 을미년(甲午乙未年)에 너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스물다섯살의 새파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이 날까지 살아왔다마는, 늙으나 젊으나 과부한테는 담배밖에 만만하고도 좋은 벗이 없느니라. 가슴 울적할 때, 마음 싱숭거릴 때, 외로울 때, 슬플 때, 밤잠 아니 올 때,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앉았느라면, 저으기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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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담배나 배워라. 그리고 내 앞이라고 어려워하지 말고 나 보는 데서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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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라는 것이 본시부터 우리 조선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인즉은 임진왜란 적에 왜사람의 손으로 들어왔다고 하느니라. 그래서 담배를 가지고 상하를 가리는 것도 중년에 도학샌님들이 마련해낸 노릇이지, 근본에 있던 예법은 아니더란다. 워너니, 듣자면 술 담배를 가지고 상하를 가리는 풍습은 동양 삼국에서도 유독 조선뿐이라더구나. 서양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본 사람이나 청국 사람들은 부자(父子) 대작(對酌)을 하고, 같이 앉아 맞담배질도 하고 한다더라. 술 담배도 음식일 바이면, 음식을 가지고 어른의 앞에서는 먹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애당초에 예법하고는 우스운 예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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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무어라는 게 무슨 상관이냐. 코 벤 수치(羞恥) 아니고. 아무 걱정 말고서 담배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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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서, 마침 장만하여 두었던 곰방담뱃대에 담배 서랍과 담배까지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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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부터 강씨는 담배를 배웠고, 시어머니인 할머니의 앞에서 담배를 먹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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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윤석이 경술년에 해외로 나가고 없어, 그때부터 벌써 과부나 진배없게 지내는 맏며느리 고씨가, 그것을 보고 부러워하다가, 동서(同媤) 강씨를 시켜, 시어머니한테 청을 넣은 것이, 그러다뿐이겠느냐고, 선뜻 허락이 나 고씨가 또한 담배를 배워, 시어머니 앞에서 담배를 먹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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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윗 두 동서가 그러는 바람에 막내 중석의 아낙 윤씨는, 운덤에 담배를 배웠고, 어름어름하다 보니 어느 겨를에 시어머니 앞에서 담배를 먹고 앉았는 며느리가 되어버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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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삼사 년 후에 어지럽다고 담배를 폐하였지만, 세 집이 분가를 하기 전, 같이 한 집에서 살고 있을 때에는 그래서 네 고부(四姑婦)가 어떡하다 한 방에 모이든지 하면, 제각기 길고 짧은 담뱃대를 물고 둘러앉았는 광경이란, 한바탕 기물스런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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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는 일지감치 스물아홉에 남편의 참변을 보았다는 것이었고, 여의치 못한 환경에서 여러 어린 자녀를 양육하기에 고초를 겪었고, 그리고 이 집은 생업(生業 : 職業[직업])이 주장 농업인지라, 사철 농사일에 몸이 고되고 하기 때문에, 세 동서 가운데 제일 고생이 많고, 따라서 늙기도 제일 일찍 늙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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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는 굵고 잔주름이 가로 세로 패이고, 머리는 하마 시어머니인 할머니만치나 세었다. 손이 북두갈고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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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바탕은 그러나 늙고 바스러지기는 하였어도, 모진 데가 없고 두릿하니 퍽 후덕하여 보이는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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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친 강씨의 얼굴을 그대로 그려논 것이, 문앞 바로 중처럼 회색물 들인 솜바지 저고리를 푸석하니 입고 앉았는 맏아들 원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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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 햇볕과 비와 바람 속에서 흙을 주무르며 사는 사람이라, 살결은 늙은 바위처럼 검고 거치나, 너부릇한 얼굴이며 유순하디유순한 눈이 지극히 마음씨 착하고 원만스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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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무렵에 전주 농업학교를 마치고, 한 삼 년 농사시험장의 기수(技手)를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 이래 십오 년 착실한 농민으로써 흙에 묻혀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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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자작답(自作畓)과 소작답을 부치면서, 일변 밭을 가지고 여러가지로 채소농사를 하여 시내에다 먹히고 하였고, 이 근년은 이 채소농사가 오히려 본업이 되다시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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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 아래로 동생 문희(文熙)와 누이동생 숙희(淑姫)가 있으나, 문희는 의사로, 시내에서 병원을 내고 따로 나서 살고 있고, 숙희는 출가를 하였고 해서 그 둘은 시방은 이 집의 원식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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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는,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할머니와 강씨와 원희와, 이런 어른들 말고 저의 어머니를 떨어져 저희 조모 강씨와 함께 이 큰방에서 자고 놀고 하는 원희의 어린 놈 철수(喆洙)와 경수(敬洙)가, 이놈들 역시 세쨋집처럼 초저녁부터 벌써 여기저기 함부로 나가떨어져, 한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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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11월 ─ 1948년) 초생에 집을 나가 한 달이 되어오도록 소식이 없는 세쨋집의 관희(觀熙)에 대하여, 두루 걱정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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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은 잠깐 말이 끊기고, 묵묵한 가운데 강씨와 원희가 피우는 담뱃대에서 수심인 양 연기만 고요히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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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뜩 할머니가 입을 연다.
 
41
“다시 또 내가 이 눈으루 무슨 일을 본다면, 어떡헌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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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자지러지게 한숨을 쉬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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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동학란(東學亂)으루 너이 할아버지가 이듬해 을미년에, 그런 참화를 당하시는 꼴을, 내가 이 눈으루 보구 그리구 나서 내가 스물다섯 살에 새파란 청상과부루, 위로는 칠십 노인 시어머니를 모시구, 여섯 살박이 너이 큰아범 윤석이, 네살박이 네 아범 승석이, 두살박이 너이 고모, 유복자루 그 이듬해 난 너이 셋째아범 중석이, 이 네 어린 것들을 데리구, 서울루 갔다 시굴루 내려왔다 하면서, 겨우겨우 길러놨더니…… 휘유…… 너이 큰아범은 경술년 합방 후에 그렇게 집을 나가, 어디 가 죽은지 모르는 죽엄을 하구…… 네 아범은 기미년에 왜사람의 총에 맞아, 피 흐르는 시체를 떠메 들여오구. 그래서 내 가슴에다 철천의 한을 못(釘[정])박아 주지를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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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조용한 음성은 무어랄 수 없이 애절하였다.
 
45
강씨는 솟아오르는 심회를 긴 한숨에다 맡기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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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도 곰곰히 담배만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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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다시 할머니가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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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씨가 퍼져, 너이들이 생겨나…… 너이만 해두, 남녀간 열이 넘구. 너이에게서 생겨난 것들이 이십 명이 넘구. 한동안 너이들이 왜사람네한테 부대껴, 사지(死地)루 징용을 나가네 병정을 나가네 해서, 내가 그만 또 가슴이 무너지더니, 요행 하나두 죽지 않구 다아 살아 돌아오구. …… 그래, 인제는 내가, 며칠 아니 남은 세상, 맘놓구 살다 맘놓구 죽는가보다.”
 
49
하며 지난날에 애태우던 일들이 새삼스레 머리에 떠올랐음인지 잠시 말이 없다.
 
50
피. 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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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는 문득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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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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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른다.
 
54
부르는 음성이 하도 긴절하여, 할머니도 모친 강씨도 고개를 들고 바라다 본다.
 
55
“그, 우리 할아버지, 규자 천자(奎天)그 어른의 피가, 참 이상한 핀가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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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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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도 거듭 고개를 끄덕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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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사 핏줄이 아냐!”
 
59
마침 원희의 아낙이, 중시루나 되는 떡시루를 예반에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수양딸 옥녀가, 소반에 수저와 동치미와 빈 그릇을 놓아가지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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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박을 무말랭이 썰 듯 썰어, 떡가루에다 듬뿍 많이 섞어서 시루에 앉히고, 그 위에다 팥고물을 수북이 많이 얹고 하여 푹신 찐, 그래서 호박범벅 비슷하되 호박범벅과는 또 다른, 이 호박시루떡은 귀한 진미(珍味)는 아니라도 남방의 농촌에서 가장 푸짐하고 겨울 맛이 나고, 또 아무에게서나 환영을 받는 별식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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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도 한 대접, 강씨도 한 대접, 원희도 한 대접, 각기 한 대접씩을 차지하고, 한 상에 둘러앉아 후후 불어가면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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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이 끔직 달던가 보구나. 떡이 꿀맛으루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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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이빨 하나도 없는 잇몸으로 합죽합죽 먹으면서 칭찬을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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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공출인지 무언지가 조금 무르다더니, 그래, 이런 걸 해먹어도 맘을 놓고 해먹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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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출이야 와락 무를 것도 없지만, 아무려면 할머니 호박떡 한 때 못해 잡수실까요!”
 
66
원희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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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가 그 말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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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이걸 무척 질겨하시더니라. 그래, 아까 오시는 걸 보구서 불시루 가루를 만들구 호박을 썰구 해서……”
 
69
“할머니 설탕 드리렴?”
 
70
원희가 옥녀를 돌려다보면서 그러는 것을, 할머니는 손을 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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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설탕허구 애야 사귀지 못한 성미지만, 이런 단호박떡에 설탕이다 무어냐?”
 
72
“허긴 그래요. 이런, 제풀에 단 음식은 설탕을 해서 먹으면 원 제 맛은 어디루 가버리구……”
 
73
농부다운 미각(味覺)이었다.
 
74
“큰집이랑 셋째집이랑, 뜻뜻해서 좀 보내 드려야지?”
 
75
원희가 그러면서 아낙과 딸년을 돌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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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의 아낙이 무어라고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강씨가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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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싸이렌)을 분 지가 벌써 오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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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루 이웃인걸, 어떨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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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희 녀석은, 인제, 쫓아오리라 좀이 쑤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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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아니나다를까, 개가 짖고, 사립문 밀치는 소리가 나고, 할머니를 부르는 소려와 함께 대희가 씨근버근 뛰어들었다.
 
81
“간대어머니 안녕하세요. 형님 진지 잡수셨어요.”
 
82
제법 이런 인사를 하고는 할머니의 옆으로 가 펄썩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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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다. 떡 먹어라.”
 
84
강씨가 그러면서 원희의 아낙이 한 대접 퍼들고 오는 떡을 받아 상에 놓아주면서 권한다.
 
85
“어서 먹어라…… 이애기 조르러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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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하는 말.
 
87
대희는 해해 웃으면서 떡을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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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는 잘 왔다만서두, 아주머니가 혼자 집을 보아 어떡허느냐?”
 
89
원희가 걱정 비슷이 하는 말이었다. 대희는 일변 먹으면서 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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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없어요! 순사가 뻔쭐나케 댕기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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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그래, 순사한테 안 걸렸디?”
 
92
“걸렸다우.”
 
93
“그래 무어랬니?”
 
94
“우리 할머니가, 바루 저기, 우리 둘째집일 가셨는데, 노인이라 내가 모시러 간다구 그랬지, 머.”
 
95
방안은 모두들 웃었다.
 
96
“할머니.”
 
97
“오오냐.”
 
98
“그 다음 총소린 또 무어지?”
 
99
“아따 그 녀석, 급하기도 하다!”
 
100
“난, 그 얘기, 다 끝장나기꺼진, 할머니만 좇아댕길걸…… 난 그 애기, 다아 들어가지구, 소설 쓸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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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얘기책?”
 
102
“응.”
 
103
“온! 손자새끼가 여럿이 생겨나니깐, 이얘기책 꾸미겠다는 놈이 다 안 있나…… 쯧, 허기야, 악한 짓만 아니구, 바른 일이요, 재주가 시키는 노릇이라면 누가 막겠느냐.”
 
 
10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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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년 난리 담에는 갑신년 난리다. 김옥균(金玉均)이, 홍영식(洪英植)이, 서광범(徐光範), 박영효(朴泳孝), 이런 개화당 패들이, 묵은 민씨네 파를 잡아 없애구서, 개화한 새 정부를 만들 영으루, 한바탕 난리를 꾸몄더란다…… 갑신년, 내가 열세 살 먹던 해요, 시월 열이렛날이니깐, 이보담 조금 일러서지. 우정국(郵征局)이라구, 시방 말루 하면 우편국야. 그 우정국을 전동(典洞)다가 새루 짓구서, 낙성연을 하는데, 그 자리에다 민영익(閔泳翊)이 이하로 이조연(李祖淵)이니, 한규직(韓圭稷)이니, 조정에서 세도하는 묵은 파 대신들을 불러다 놓구 잔치를 하던 끝에, 한편으루 안동별궁(安東別宮)에 불을 지른다치면, 묵은 파 대신들이 그리로 몰려갈 테니깐, 미리서 그 안에다 장사(壯士)를 매복시켰다 깡그리 뚜들겨 잡자는, 계책였더란다……”
 
106
떡 먹던 자리를 말끔히 다 치우고서 원희의 아낙과 옥녀는 부엌으로 나가고, 강씨와 원희와 대희가 남아 앉아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107
은침(銀針)같이 하얗게 머리가 센 할머니는, 발 벗은 다리를 포개 뻗고, 아랫목 벽에 기대어 앉아, 합죽합죽하는 입으로 좇아, 이야기는 명주꾸리처럼 면면히 풀리어나왔다.
 
 
108
3
 
 
109
막지 못할 것은 대세(大勢)였다.
 
110
임오군란은, 일변으로는 새로운 풍조 ─ 개화라는 것에 대하여, 그것을 배척하는 보수적인 의사(意思)의 표시와 행동이기도 하였으나, 결과는 도리어 개화당의 세력과 활동을 자극시킨 것이 된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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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임오군란에서 당한 피해를 문책(問責)하고, 그것을 구실삼아 보다 더 유리한 조약을 맺으려고, 육해군 일천 명을 실은 네 척의 군함의 호위로, 화방의질(花房義質)이 인천을 거쳐 서울로 왔다.
 
112
한국 조정에서는 할 수 없이 이유원(李裕元), 김홍집(金弘集)을 전권으로 인천에 보내어, 팔월 삼십일(陰曆[음력] 7월 17일 ─ 1882년), 일본 전권과의 사이에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 체결되었다.
 
113
조약은, 앞으로 이십 일 안에 한국 정부는, 무리들을 체포하여, 그 수괴를 극형에 처할 것. 한국 정부는 살해당한 일본인을 후히 장사할 것. 한국 정부는 살해당한 일본인의 유족과 부상자에 대한 조위금(弔慰金)으로 오만 원을 물 것. 한국 정부는 반란 때에 일본측이 받은 손해와 이번에 공사를 호위하느라고 든 군대의 파견비로 오십만 원을 물되, 매년 십만 원씩 오 년간에 나누어 치를 것. 일본 공사관의 호위를 하기 위하여 약간의 일본 군대를 서울에 주둔하게 할 것. 한국 정부는 대신을 파견하여 일본 정부에 사과할 것…… 따위의 여섯 조목이었다.
 
114
이 조약에 좇아, 한국 조정에서는 이해 팔월(陰曆[음력])에 박영효(朴泳孝)를 정사(正使)로, 김만식(金晩植)을 부사로, 서광범(徐光範)을 종사관(從事官)으로, 김옥균(金玉均), 민영익(閔泳翊)을 수원(隨員)으로 일본에 파견하여 사과를 하게 하였다. 한국 정부로는 세 번째의 사절의 파견이요, 이때에 국기로 태극기를 처음 비로소 사용하였다.
 
115
개화당과 일본에의 사신 파견과는 피차에 떨어질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를 가졌었다. 개화당은 일본에의 사신 파견으로 비로소 기회가 생기고, 힘을 잡고 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116
1876년(丙子年[병자년]), 김기수(金綺秀)의 제일차 일본수신사(日本修信使)로, 이를 테면 개화당이라는 것의 싹이 터가지고, 계속하여 1880년(庚辰年[경진년])김홍집(金弘集)의 제이차 일본수신사와, 1881년(辛巳年[신사년]) 홍영식(洪英植), 박정양(朴定陽) 들의 일본 신사유람(紳士遊覽)을 거쳐, 다시 1882년(壬午年[임오년]) 박영효, 김옥균 들의 제삼차 사절 파견에 이르는 동안, 개화당은 급속도로 성장을 하여, 마침내는 한국 말년의 정치계에 있어서 큰 쿠데타의 하나인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는 사변을 일으키기까지에 이른 것이었었다.
 
117
일컬어 개화(開化)라고 하던 신풍조는, 그러나 비단 정치상으로만 새로운 사상과 해동을 퍼쳐 온 것은 아니었다.
 
118
임오년(1882년)으로부터 갑신년(1884년)에 이르는 동안에, 무력하고 부패한 봉건적 궁정정치(宮廷政治)의 혁변을 목적으로, 때의 젊은 지식 청년들에 의하여, 십이월 사일의 대쿠데타 갑신정변으로 나타나 직접행동이 일어났었고, 한편으로는 비록 유치하고 정상하지는 못하며 빈약하기는 할망정, 아뭏든 문화적으로도 새싹이 트이기를 시작하였었다.
 
119
1883년(癸未年[계미년]) 정월에 인천항이 개항이 되면서는, 그동안보다 좀 더 손쉽고 활발하게 일본을 거치는 歐米(구미)의 문물이 수입이 되었다.
 
120
화륜선(火輪船 : 汽船[기선])이 처음으로 조선사람의 사업으로써 연해를 운항하였다. 지방의 세미(稅貢米[세공미])를 빠른 화륜선으로 실어 올렸다.
 
121
일부 국부적이기는 하였으나 우편제도가 생기었다.
 
122
양반계급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123
서민(庶民)에게 학교(經學院[경학원] 기타)의 입학을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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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인 인쇄 시설을 가진 박문국(博文局)을 정부의 기관으로 설시하고, 여러 가지의 신식 서적을 인쇄하여 널리 민간에 퍼뜨리기를 꾀하였다. 일대의 명문(名文) 강추금(姜秋琴 : 瑋[위]) 같은 사람이 이를 주간하였고, 1883년 가을에는 일본 사람 정상각오랑(井上角五郞)을 고문으로 초빙하여, 조선 최초의 신문 형식을 가진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행하였다.
 
 
125
전환국(典圜局)을 설시하여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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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기국(機器局)을 두고, 청국으로부터 기사를 초빙하여 그 기술을 전습받는 한편 신식 군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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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상공사(蠶桑公司)를 세워 양잠을 장려하고, 그 밖에 광산과 임산업의 개발, 농업의 개량 같은 것을 장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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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산업에, 여러 사람의 일본인, 청국인, 구미인이 고문과 촉탁으로 초빙되어 그 지도를 맡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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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노오란 머리털이 곱슬거리고, 눈이 새파랗고, 코가 무섭게 크고, 상이 원숭이 같고 한 서양 사람들을 보고도, 장안 백성들은 신기해하거나 돌을 던지지 않을 만큼 인식되었다.
 
130
미국, 영국, 불란서, 노서아, 독일, 이태리, 백이의 들의 구미 열강과 통상조약을 차례로 맺고, 그들 각국에서 공사와 영사가 파견이 되어온 것도 바로 이 동안이었다.
 
131
그중에서도 미국과의 통상조약과 및 사절의 교환은 외교상으로뿐만이 아니라, 정치와 문화에 있어서도 한가닥의 효과가 없지 못한 것이었었다.
 
132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의 정식 비준이 되면 며칠 앞서, 1883년 오월 칠일(陰曆[음력] 癸未[계미] 4월 1일), 연미복을 입은 미국공사 푸트가 사인교에 높이 앉아, 서울 장안으로 들어왔다.
 
133
미국은 나라가 크고 강성하되, 남의 나라에 영토적 야심이 없는 나라라는 말이 있어, 위로는 고종을 비롯하여 개화당의 인물들은 미국에 대한 기대가 자못 컸었다. 따라서 푸트 공사에 대한 상하의 환영도 매우 융숭하고 정중껏 한 것이었었다.
 
134
이 푸트 공사나, 또 그 뒤에 온 미국공사관의 해군무관이었으며, 나중 대리공사를 지낸 폴크 같은 사람은, 미상불 한국의 정치 개혁과 자주 독립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와 흥미를 가졌었다. 가령, 김옥균이 푸트 공사와 교제한 기록에, 푸트 공사가 한국에 주둔한 청국 군대의 철퇴에 관한 교섭을 서둘러 줄 의사를 보인 것이라든지, 또는 갑신의 쿠데타를 너무 시기가 이르다 하여, 김옥균더러 차라리 자기와 함께 여행이라도 하면서, 새로운 국내 사정과 국제 정세의 추이를 기다려, 그때 다시 일을 도모함이 옳겠다고 권고를 한 것이라든지로 미루어, 이를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었었다.
 
135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자격으로써 그러한 것이지,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국책 그것은 매우 흐리멍덩하였다. 더우기 한국의 천연자원이나 상품시장으로서의 가치라는 것이, 차차로 알아본 결과 당시의 현재로는 그다지 신통한 무엇이 없다는 결론을 얻고 나서부터는, 미국의 국무성은 한국에 와 있는 자기네의 사절까지도 마치 의붓자식 대접하듯 하였다. 대리공사 폴크의 연봉이 겨우 오천 불(五千弗)이요, 일천이백불의 교제비의 지출도 거절하고 하는 냉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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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도의적인 외교, 이것에 미국은 만족하려는 태도였었다.
 
137
조약이 성립되고, 미국에서 푸트 공사가 오고 하여, 한국 조정에서도 미국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138
전권대신에 민영익, 부대신에 홍영식, 종사관에 서광범, 수원에 유길준, 변수, 고영철, 그리고 몇 사람의 배종으로 된 일행은, 일찌기 열두해 전 신미양요(辛未洋擾)에 한국을 와서 치던 미국 군함 모노카시를 타고, 1883년 칠월 이십육일(陰曆[음력] 7월 12일) 인천은 떠나 일본 횡빈을 거쳐 태평양을 건넜다.
 
139
상투 곶고, 망건에 사모 쓰고, 도포 입고, 관대 띠고, 오화 신고 한정사 민영익 이하 일행은, 미국 상하의 두터운 대접도 받고, 약간 구경거리 노릇도 하고, 각 방면으로 눈부신 문물을 시찰하고 한 후에, 부사 홍영식은 단독으로 그 해 섣달에 먼저 돌아오고, 정사 민영익과 수원들은 부임하는 미국공사관 해군무관 폴크 소위의 안내를 받아, 대서양으로 돌아 영국, 불란서, 그 밖에 여러 나라를 잠깐잠깐 들러 유람을 하고서, 갑신년(1884년) 유월 초이튿날 무사히 귀국을 하였다.
 
140
우편제도와 신식 농장의 설시와 신교(新敎 : 基督敎[기독교])의 전파는, 미국사절이 가져온 문화상의 선물 가운데 유수한 것들이었다.
 
141
부사 홍영식이며 서광범, 변수(邊燧) 이런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과 사상을 풍부히 얻어가지고 돌아와 개혁운동에 잘 활약을 하였으나, 유독 정사 민영익은 반동을 하였다.
 
142
민영익은 민비의 조카로, 배경의 이용가치도 크려니와, 그래서 김옥균은 일찌기 일본의 수신사의 일원으로 천거하여 데리고 가기도 하였고, 특별히 이번의 미국을 다녀오는 데 대하여는, 그에게 얹히는 기대가 자못 무거웠었다.
 
143
그러나 민영익은 개화에는 조금도 흥미와 관심이 없고,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미구에 청국을 다녀온 뒤로는, 원세개와 결의형제를 하는 등, 청국 세력을 둘쳐 업고 노골하게 반동을 하였다.
 
144
“흰 개꼬리 삼 년이라더니, 씨가 본시 그런 씨알머리라, 하는 수 없어!”
 
145
민영익의 배반과 반동을 보고, 개화당의 한 사람이 뱉은 조롱이요, 탄식의 말이었었다.
 
 
146
4
 
 
147
개화당을 영도하는 최고 인물은 김옥균이었다.
 
148
때의 개화당의 중추분자인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이런 사람들은 거개가 이십이 조금 넘은 새파란 청년들이었다. 이들에 비하여 김옥균은 나이 삼십이요, 나이로 우선 진득한 것이 있었다. 1881년 현재로 김옥균이 서른한 살이요, 서광범이 스물두 살이요, 박영효가 스물한 살이었다.
 
149
나이가 그렇게 진득한 것도 진득한 것이려니와, 김옥균은 해박한 식견으로 하든지 두뇌의 영민한 것으로 하든지, 외교수완(특히 일본의 조야에 대하여) 능란한 것으로 하든지, 더욱 그의 불타는 정열로 하든지, 개화당을 거느리기에 무던한 것이 있는 사람이었다.
 
150
김옥균은 갑신정변까지에 전후 세 차례나 일본을 다녀왔다. 1881년 섣달에, 서재필 이하 일본 유학생 육십 명을 데리고 갔다 이듬해 1882년 임오군란 직후에 돌아온 것이 첫걸음 이었다.
 
151
그 해 바로 팔월에 박영효 등이 사절의 수원으로 가서 정계와 민간의 유력한 일본 사람들과 사귀는 한편, 기채운동(起債運動)을 하다가, 왕의 정식 위임장(委任狀)만 있으면 상당한 빛을 낼 수가 있다는 일본 조야의 내락을 얻고, 그 신임장을 받으러 이듬해 (1883년) 유월에 돌아온 것이 두번째 걸음이다.
 
152
그리고 고종의 위임장과 희망을 가슴에 품고, 그 해 섣달에 또다시 현해(玄海)를 건너갔다가, 일본측의 태도의 표변으로 그만 낙망하여 이듬해 1884년 삼월에 초연히 돌아온 것이 세번째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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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묵은 것에 대한 혁명의 중추세력은, 새로운 의식을 흡수한 새로운 사상의 청년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옥균은 육십 명이나 되는 기개있고 지기 맞는 청년들을 일본으로 데리고 가 학비의 주선까지 하여 주면서 유학을 하게 하였다. 서재필(徐載弼), 이규완(李圭完) 들이, 일본의 육군소학교인 호산학교(戶山學校)며, 그 밖에 여러 학교에 들어 신식의 군사교육이며, 다른 교육을 받은 것도 이 기회였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양성된 청년들이, 과연 갑신정변의 쿠데타에서 중심 분자로서의 활약을 하였다.
 
154
김옥균은 그의 능란한 외교수완을 종횡으로 떨치어, 일본 조야의 유수한 인물들과 친분을 맺었다.
 
155
당시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가지지 아니치 못하였던 관계상, 한국에 사절 ─ 특히 김옥균 에게는 자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소홀치 아니한 대접을 하였다.
 
156
한국을 해외 발전의 디딤돌로 삼고 싶은 야망이 은근한 일본과, 일본의 유신을 본받고 일본의 후원을 얻어 조선의 혁명을 달성하려는 계획을 품은 조선 개화당의 수령 김옥균과 사이에 일맥의 의사가 통하고, 조화가 성립이 될 것은 자연한 이치였다.
 
157
일본은 한국이 정치상 경제상 개혁과 재건에 소용이 되는 돈을 국채(國債)로 혹은 사채(私債)로 알선하여 줄 것을 약속하였다.
 
158
또 한국이 밖으로는 청국의 간섭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보수세력을 숙청하고 혁신정치를 단행한다면, 일본은 직접 간접으로 그것을 후원하여줄 결의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159
일본은 그러나 국제무대에 있어서는 아직도 초년병이어서, 조선문제를 가지고 막상 정국과 맞부딪쳐 단판씨름을 하고 나선다는 것은 도리어 경솔하고 무모한 것이라는 여론이, 그 뒤에 일시적이나마 득세를 하였었다. 지금 우리의 실력으로 저 큰 청국을 건드려 후환이 없을까? 하는 겁이 슬며시 났던 것이었었다.
 
160
일변, 한국 말년의 한국 정계에서 녹록치 아니한 춤을 추던 독일인 고문(獨逸人顧問) 뮐렌도르프, 이 유명한 간물(奸物)이, 민씨네 보수파와 부동이 되어가지고, 가뜩이나 타락한 정치에다 해롭고 부패한 시책과 행정을 함부로 하였고, 그것을 반대 공격하는 정적(政敵) 김옥균을 일본측에다 대고 여러 가지로 모함과 중상을 하였다.
 
161
1883년(辛巳年[신사년]) 섣달, 김옥균이 세 번째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에는, 뜻밖에 일본의 태도는 냉랭하였다.
 
162
단적으로 이간의 경위를 짐작할 수 있는 재료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63
“……박(泳孝[영효])군은 일을 마치고 곧 복명하였으나, 여(余)는 잠깐 일본에 체류해 있으면서 다시 일본의 사정 및 천하의 형편을 탐색하라는 명으로, 몇 달 동안을 남아 있게 되었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술과 담배에 세금을 부가하고, 육해군 확장에 예의중(銳意中)이었었다. 하루, 여는 외무경(外務卿)을 찾아가, 시사를 이야기하는 중, 정상의 말이, 지금 아국(我國)에서는 군비(軍備)를 확장하고 있는 중인데, 이것은 비단 아국의 기본을 튼튼히 하기 위할 뿐 아니라, 귀국의 독립을 위하여서도 주의하고 있는 바이다, 하였다. 일본 정보의 취향이 대개 이러하고, 여 또한 일정의 당로한 여러 사람들과 동양의 사태에 대하여 논담하는 중, 우리 나라의 재정이 극히 곤핍하여, 진작시킬 방법이 없음을 말할 때에, 제군의 대답이, 만약 조선정부의 국채위임장만 가지고 오면 성사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여기에서 여는 귀국하기를 결심하였다. (癸未[계미] 5月[월])
 
164
여, 묵(묄렌도르프)과 함께, 외아문에 다니며, 그 말과 행동을 보며, 매우 의혹되는 바가 많았다. 하루는 당오전과 당십전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것을 청장 오장경(吳長慶)이 말을 내자, 민태호(閔台鎬), 윤태준(尹泰駿) 같은무리들이 중심이 되어, 임금을 기이고 그 계책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여는 제 민씨 급 윤태준 들과 여러 번 언쟁을 하였고, 또 건백서(建白書)를 올리기도 몇십 번이었다. 대신 이하 재보(宰甫 : 卽[즉] 諸閔[제민])에 이르기까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혀가 닳도록 논쟁하였으나, 마침내 閔泳翊(민영익)이 아뢰기를, 묄렌도르프는 외국 사람이니 반드시 정치학문에 밝을 터이므로, 장차 화폐에 대하여 문의코자 한다 하였다. 그때 상께서는, 김옥균과 더불어 의론하고, 또 합모(合謀)하여서 다시 아뢰라는 분부가 계셨다.
 
165
그리하여 민영익이 여와 묄렌도르프를 함께 저희 집에 초청하여서, 화폐에 대한 의론이 있었던바…… 묄렌도르프가 말하기를, 금은화폐(金銀貨幣)를 만들어야 하겠으되, 우선 급한 대로 당오전 당십전, 또는 당백전(當百錢)을 만들어, 목전의 급함을 구하자는 것이었다. 여, 이를 박(駁)하되, 그대는 구주 선진국(歐洲 先進國) 사람이니 재정상 응당히 소견(所見)과 소문(所聞)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대의 말에는 의혹되는 점이 많다. 즉, 그러한 구차스런 화폐정책(貨幣政策)으로서는 국정(國政)에 짐독(酖毒)이 매우 클 것쯤은 배운 것이 없는 무식꾼이라도 넉넉히 알 바이다. 그대가 만약 그러한 폐해가 생길 것을 짐작하고도 이것을 주장한다면, 여는 그대의 심사를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다.
 
166
이렇듯 반 날이나 변쟁(辯爭)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즉시 궐내에 들어가 임금께 이 전후사를 아뢰었더니, 상께서 들으시고 여의 아뢴 바를 윤가(允可)하시고, 동시에 삼백만 원에 대한 국채위임장(國債委任狀)을 내리어 주셨다. 이와 같이 봉탁(奉托)이 지중하시나, 제민배(諸閔輩)와 묄렌도르프가 부동하여 가지고 백방으로 방해하되, 오직 상심(上心)은 견고하시므로 그들은 틈을 타지 못하였다. 여는 다시 일본 갈 계획을 세웠다.
 
167
그 때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이 일본공사로 서울에 와서 있었던바, 여와는 교분이 두터운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묄렌도르프가 외아문(外衙門)에 출사(出仕)한 뒤로부터는, 죽첨(竹添)의 눈치가 점점 여를 멀리하고 여를 의심하는 듯하였다. ……(여가 떠난 뒤에 재민들이 상심을 황폐하게 하고, 마침내 당오전을 만들어 유통시킨 결과, 그 폐해가 날로 심하여 백성은 거의 보전할 길이 없었다.)
 
168
처음 외무경(外務卿) 정상형(井上馨)을 만났더니 그 말과 기색이 전일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여의 의심도 점점 깊었다……(듣건대, 죽첨이 말하기를, 김모가 가지고 간 위임장은 위조(僞造)이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정황(情況)을 살펴보건대, 비단 죽첨의 반간(反間)뿐이 아니라, 서너 달 동안에 일본 정부의 조선에 대한 정략이 아주 변하고 말았다. 그러한 주의(主意)를 알고 난 뒤에야 이러니 저러니 말할 필요조차 없으나, 내가 먼저 생각하던 일본에게 손을 빌고자 하던 계책이 전혀 허사로 돌아가니, 장차 귀국하여서 임금께 복명(復命)하며 정부에 고할 면목이 없다.
 
169
이에 여는 마침내 돌아왔다.”(甲申[갑신] 3月[월])
 
170
그때 시국을 개론(槪論)하면 민태호(閔台鎬), 민영목(閔泳穆), 민영익(閔泳翊), 민응식(閔應植) 네 사람의 민성(閔姓) 권력자들이 시시로 서로 쟁권(爭權)하여 그 세가 상용(相容)하기 어려운 바가 있었고, 또 이조연(李祖淵), 한규직(韓圭稷), 윤태준(尹泰駿) 같은 무리들은 때를 따라서 권력이 많은 자에게 아부(阿附)하여, 스스로 살 도리를 도모하는 판이었다. 소위 당오전은 폐해가 백출(百出)하여 민정(民情)은 날로 시들고, 국세(國勢)는 날로 기울어져, 가히 지탱하기 어려운 판이었다. 상께서 심히 근심하시어서, 여 급(余及) 제민배(諸閔輩)에게 하문하시었다. 제민배, 더우기 당초에 그 길을 꾸민 자들은 스스로 그 실책을 부끄러이 생각하여, 사방에서 묄렌도르프에게 문책을 하였다. 여가 일본에서 귀국하자, 묄렌도르프와 같이 외아문에 서지 못한 형세였다…… 묄렌도르프는 세관(稅關)에 대한 일로 큰 실책이 있었기 때문에 여는 이를 면박(面駁)하였더니, 묄렌도르프는 부끄러워서 여를 미워하기 한이 없었다. 여기에서 묄렌도르프는 한 꾀를 생각하여 냈다. 즉 제민(諸閔) 사이를 중재하되 ‘조선을 위해서 해를 제거함에는 당오전에 있는 것이 아니요 마땅히 먼저 김옥균을 제거하는 데 있다. 김이 임금을 무황(誣謊)하여 제군을 해코자 함이니, 제군은 무슨 까닭으로 김을 없애버릴 생각을 못하고 말엽(末葉)을 의론하자 하느냐……’ 여기에서 제민은 마침내 묄렌도르프의 말대로 합모(合謀)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민영익이 곧 청당(淸黨 : 事大黨[사대당])의 괴수가 되어 밖으로는 오당(吾黨)의 계획을 공척(攻斥)하고 안으로는 민태호, 민영목이 오당을 무함할 계책을 쓰기로 하여서, 형세가 날로 심하여 가며, 양당(兩黨)은 서로 용납할 수 없게까지 되었다. 여, 하루는 상께 아뢰되, ‘국내의 정세를 살피건대 정령(政令)이란 한 가지도 실행되는 것이 없고, 점차 분당(分黨)의 세가 나타나고 있사오니 근심되지 않을 수 없사오며, 신은 잠시 물러가서 당폐(黨弊)의 해소를 기다려, 다시 후일의 필(筆)을 도모함만 같지 못할까 하오이다.’ 하고 나는 잠시 동교(東郊)의 별사(別舍)에 물러가, 모든 정황(情況)을 살피려고 하였다. 민태원 저(閔泰瑗著)『갑신정변(甲申政變)과 김옥균(金玉均)』중, 김옥균이 자초(自抄)하였다는『갑신일기(甲申日記)』에 의함) 그렇게 하여 우울한 심사를 품고, 동대문 밖 별장으로 나가 누운 김옥균은, 그러나 그가 한성의 정계에서 물러났다는 것은 표면에 지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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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그만한 실패나 적의 공세에 혁명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172
김옥균은 안으로는 동지들과 긴밀히 연락을 지탱하고, 밖으로는 미국과 영국, 그중에서도 미국공사 푸트를 종종 만나 기우는 조선의 국사를 개탄하고, 자기의 포부를 피력하면서 넌지시 한편으로 혁명을 단행하는데 있어서, 이왕에 실패한 일본 대신에 미국의 힘을 빌 가망이 있는가를 타진도 하여보고 하였다.
 
173
김옥균이 동대문 밖 별장으로 나간 것이 그 해(1884년 甲申[갑신]) 유월인데,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일본의 태도가 다시 변하였다.
 
174
1884년 삼월, 안남(安南)의 문제로 청국과 불란서 사이에 전쟁이 일었다.
 
175
전투는 처음부터 청군에게 불리하여 산서(山西), 북녕(北寧), 흥안(興安), 그리고 필경 운남(雲南)이 불란서군에게 점령이 되자, 청국은 할 수 없이 오월에 천진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뒤 칠월에 전투는 다시 벌어져 불란서 함대는 복건성(福建省)의 민강(閩江)을 거슬러 올라가 하구(河口)를 봉쇄하고, 팔월에는 기륭(基隆)과 복주(福州)를 포격하고, 남양수사(南洋水師)에 소속한 군함 스물두 척을 쳐 가라앉혔다. 그리고 이듬해(1885년) 이월에는 필경 양자강을 봉쇄하여, 남북의 통운(通運)을 끊어놓는 거조를 하였다.
 
176
청국이 그와 같이 불란서의 많지도 못한 병력에 연전연패하는 것을 본 일본은, 청국의 실력이란 와락 대단할 것이 없는 것을 알았다.
 
177
그러한 것이 청국의 실력이라면 족히 두려울 바이 없을 뿐 아니라, 더우기 그 청국이 지금 동쪽을 돌려다볼 경황이 없는 이 계제를 타, 일본은 조선에서 적극적 정책을 쓴다면, 손쉽게 청국의 세력을 조선으로부터 몰아낼 수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178
일본으로서 본다면, 조선에다 세력을 잡는 것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의 문록역(文祿役 : 壬辰倭亂[임진왜란]) 이래, 삼백 년을 두고 내려오던 숙망이요, 앞으로 국가 천년의 대계(大計)인 것이었었다. 노리고 노리던 첫 기회는 그렇게 해서, 와 조선이라는 고깃덩이를 입에 물고, 이빨 빠진 잇몸으로 이기죽거리기만 하고 앉아 조는 늙은 사자 청국에 대하여, 식용 왕성하고 사납기 다시 없는 ‘어린 삵쾡이’ 일본은 마침내 날카로운 어금니를 벌리고 덤비어들기를 시험한 것이었었다.
 
179
잠시 귀국하였던 일본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이 조선에 대한 적극 행동의 비밀한 사명을 띠고, 시월(1884년 甲申[갑신], 陰曆[음력] 9월) 삼십일날, 인천으로 좇아 서울로 들어왔다.
 
180
죽첨은 그 먼저와는 딴 사람처럼 얼굴에 활기가 돌고, 몸 한번 놀리는 데도 민활한 거동이 보였다.
 
181
이 죽첨은, 저희 나라가 소극정책을 쓸 때에는 풀이 죽어가지고 아무소리도 않고 들어박혀 앉았고, 반대로 공격적인 적극정책을 쓸 때에는 얼굴에 활기가 돌고, 코가 우뚝하여서는 함부로 기광을 부리고 하는 인물이었다.
 
182
죽첨은 들어단짝, 마침 외아문(外衙門)에서 독판 김홍집(督辦 金弘集)과 협판 김윤식(協辦 金允植)이 찾아간 것을, 대뜸 김홍집더러 한다는 소리가, 당신네 외아문에는 청국의 종노릇을 달게 받으려는 양반이 몇몇이 있는 모양인데, 나는 그런 위인들과는 만나 이야기하기도 창피하다고. 넌지시 그래놓고는 그 다음 김윤식더러, 직접 당신은 본래 한학(漢學)이 넉넉하고 청국에 심복하는 분인데, 이왕 그렇거들랑 청국으로 가서 벼슬도 하고 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잔뜩 빈정거렸다. 김윤식은 보수파 사대방의 다른 민씨네 패와는 달라, 추악하고 음험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그야말로 한학자요, 영선사(領選使)로 천진에 가 오래 있으면서, 이홍장과도 교분이 두터운, 그리하여 청국에 심복하고 청국에 의존하려는 사대주의자임엔 틀림이 없었다.
 
183
죽첨은 또 일본측의 동정을 염탐하려고 민파에서 찾아간 외무협판 윤태준(尹泰駿)더러도, 그대들은 속으로는 청국에 복종을 하면서 겉으로만 일본과 친한 체하는 더러운 심보라고 거침없이 면박을 주었다.
 
184
죽첨은 조선 사람측의 보수파 사대당에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저희가 초대한 연회 자리에서, 청국 영사 진수당(淸領使 陳樹棠)을 무골해살(뼈없는 해삼)이라고 조롱을 하고, 또 일본 병정이 내외국 손님들 앞에서, 홍백(紅白) 두 편으로 갈리어 격검승부(擊劍勝負)를 하는데, 홍편이 이기고 백편이 진 것을, 일본이 이기고 청국이 졌다고 노골하게 박수하며 좋아하고 하였다.
 
185
이렇게 죽첨의 더럭 기광이 나서, 방약무인으로 구는 그 배후에는, 조선의 보수파와 청국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이요 도전적인 정책이 가로놓여 있음을 엿보기에 별로 힘들 것이 없었다.
 
186
김옥균과 죽첨 사이에는, 죽첨이 당도하던 이튿날 벌써 죽첨의 사과로 화해가 되고, 동시에 개화당의 거사(擧事)에 대하여 일본은 적극적인 원조를 하여 줄 것으로 밀약이 맺어졌다.
 
187
사사로이도 그랬을 뿐 아니라, 죽첨은 궁중에 들어가 고종(高宗: 李太王[이태왕])에게 은밀히
 
188
1.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에 약정한 임오군란의 배상금 나머지 사십만 원은, 계속하여 일본에 치를 것이 없이, 한국 정부가 그 양병비(養兵費)에 보태어 쓰기를 희망한다는 것. 그러니 독립건설에 이용하고, 다른 비용으로 쓰지 말 것.
 
189
2. 방금 불청전쟁(佛淸戰爭)에 여지없이 패하여 가는 청국은 미구에 망하고 말 것인즉, 한국은 청국을 믿거나 의뢰하지 말 것.
 
190
3. 대원군을 붙들어다 감금한 것은 불법이니, 청국에 대하여 빨리 돌려보내도록 요구할 것.
 
191
4. 한국은 시급히 내정을 개혁하고, 서양의 공법(公法)에 따라 자주 독립의 대계를 세울 것.
 
192
이런 네 가지 조목의 권고적인 제안을 하였다.
 
193
이와 같이 적극적이요 열심한 일본의 태도에 안심하고 기운을 얻은 개화당에서는, 때를 놓칠세라 쿠데타의 계획이 비밀한 가운데 활발하고도 급속히 익어가고 있었다.
 
194
죽첨을 통하여 일본의 태도가 그와 같이 공격적이요 적극화하였고, 일변 때를 같이 하여 개화당측의 동태에 수상스런 활기를 띤 것이 보이고 한 것으로 해서, 청국측과 보수파, 민씨네 편에서도 정녕 졸연하지 아니한 사태가 벌어질 것을 자연 눈치 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5
원세개(袁世凱)는 청군의 진중에 밀령을 내려, 병사들로 하여금 밤이라도 무장을 풀지 말고, 그 밖에 만반 전투태세(戰鬪態勢)를 갖춘 채, 경계 대기(警戒待機)하도록 하였다.
 
196
그와 동시에 한국측의 보수파에서도 우영사(右營使) 민영익이 직접 동별영에 들어가 앉아 동병의 태세를 갖추고, 전영사(前營使) 한규직 좌영사(左營使) 이조연도 각기 배하의 군대를 단속하였다.
 
197
그러는 한편, 십일월 십칠일(陰曆[음력]), 민영익은 정밤중에 하도감(下都監)으로 원세개를 찾아가 오랫동안 밀담을 하고, 두 사람은 그 길로 함께 민의 군영인 동별영으로 왔다가, 원세개는 혼자서 오조유(吳兆有)의 진영으로 가서 비밀한 단속을 하였다. 그리고 십구일에는 얼마 전에 한국정부에서 사들여 창덕궁의 연경당(延慶堂)에 두었던 대포 두 문을 민영익이 수선을 핑계하고 오조유의 진영으로 넌지시 보내었다.
 
198
이렇게 청군과 조선측의 보수파에서 경계의 선을 넘어 완연 시가전이라도 할 형세를 보여가고 있어 인심이 몹시 술렁거리는 참에, 별안간 십일월 십일일 밤중, 남산 밑 하도감 근처에서 일본군대가 불시의 야간사격 연습을 하였다.
 
199
때아닌 야반의 요란한 총소리에, 서울 장안은 상하가 한가지로 필경 난리가 난 것이라 하여 몸을 떨었다.
 
200
연습인 줄을 알고 당장만은 안심들을 하였으나, 장차에 올 풍운을 앞두고 장안의 공기는 물끓듯 소연한 것이 있었다.
 
201
장안의 백성들은 둘만 모여도 수군덕거리고 셋만 모여도 수군덕거렸다.
 
202
청국이 법국(法國 : 佛蘭西[불란서]) 군대에게 연달아 패하여 엊그저께는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203
일본과 청국이 한 달 안에 접전을 한다는데, 그러는 날이면, 서울 장안은 맨먼저 어육(魚肉)이 되고 마느니라고 걱정들을 하였다. 그래서 피난을 가는 사람도 있었다.
 
204
원세개가 한국 장정 십만 명을 병정으로 뽑아 불청전쟁으로 내보내려고 상감(王[왕])과 시방 그 상의를 연일하고 있다라는 풍설도 떠돌았다.
 
205
백성들은 너 나 없이, 얼굴에 공포와 불안과 수심을 띠고, 닥쳐올 난리를 걱정하였다.
 
206
아무리 걱정하여도 물론 모면할 도리는 있을 수가 없었다.
 
207
대답은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208
“할 수 없는 노릇이지!”
 
209
“제엔장,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람?”
 
 
210
5
 
 
211
불안과 긴박한 저운(低雲)에 싸인 채, 1884년이 미구하여 저물려는 십이월 사일(甲申[갑신] 10월 17일) 오후 다섯시, 전동에다 설시하는 우정국 낙성의 초대연회는 드디어 열리었다.
 
212
우정국 총판(總辦)으로, 주인인 홍영식이 상좌에 앉고, 푸트 미국공사, 아스톤 영국영사, 진수당 청국영사, 도촌 일본공사관 서기(竹添[죽첨]의 代理[대리]로 出席[출석]) 등의 외국손님과, 김홍집, 이조연, 묄렌도르프, 민영익, 한규직, 박영효, 민병석, 김옥균 들의 정부 고관 이하 열여덟 명이 모인 조촐한 연회는, 이윽고 술이 돌기 시작하였다. 후영사(後營使) 윤태준(尹泰駿)은 이날 마침 궁중의 당직이라 참석치 못하였다.
 
213
개화당의 계획은 이러하였다.
 
214
우정국에서 연회를 하는 중 안동별궁에 불을 지른다. 예로부터 궁성이 화재가 나면, 각 영문의 대장은 반드시 현장에 달려갈 책임이 있는지라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 윤태준 들도 응당히 별궁으로 달려갈 것이니, 미리 장사를 매복하였다 그들은 조처한다.
 
215
다음,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에 장사와 군대를 매복하였다, 화재를 듣고 문안하러 들어오는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등을 그 자리에서 조처한다.
 
216
이 두 자리에서 빠져서 입궐하는 지목인물(指目人物)은 궁중을 경계하는 동지 군인으로 하영금 최후로 조처하게 한다.
 
217
일본 사람 낭인(日本人浪人)을, 우정국 뒷방에다 매복시켜 생각지 못한 방해가 생길 경우에 임기응변으로 칼을 쓰게 한다.
 
218
안동 별궁의 화재를 신호로, 일본 군대 삼십 명이 우선 출동하여 급호문과 계동(桂洞)의 경우궁(景祐宮) 사이, 즉 관현(觀峴)일대를 경계 한다.
 
219
개화당 수뇌 일행은 우정국에서의 제일단의 공작을 마치고 즉시 창덕궁으로 가 왕을 경우궁으로 옮기고, 거기서 왕을 끼고 천하를 호령한다.
 
220
이 동안 죽첨공사는 마침 대기를 하고 있다가 왕이 원조를 청하면 즉시 일본 군대를 이끌고 달려온다.
 
221
일본 군대는 일중대(一中隊 : 150명)에 불과하지만, 만약 북악(北岳)을 점거한다면, 청병 일천 명을 상대로 능히 두 주일을 싸워낼 수가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죽첨과 그 장교들은 장담을 하였다.
 
 
222
처참한 살기를 흔연한 담소와 접대로써 숨기면서, 휘황한 불빛 아래 연회는 절반이나 진행이 되었다. 이때 김옥균은 안동별궁에 불을 지르려던 것이 실패한 보고를 받았다. 불지르기에 실패하였을 뿐만 하니라, 무리를 하던 중에 순포(巡捕)에게 들키어 장사들과 일행 전부는 이미 우정국 주위로 모여 연회석으로 뛰어들기라도 할 기세를 보였다.
 
223
김옥균은 그도 무방하나, 그러다가 만약 외국 손님을 상하든지 하면 뒷일이 복잡하겠으니, 차라리 이웃에 불을 지르라는 명령을 주었다.
 
224
김옥균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기 미구하여, 별안간 밖에서 불이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났다. 우정국 바로 지척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225
좌중은 모두 놀라 서성거렸다.
 
226
한규직이 먼저, 나는 장임(將任)이라 화재 현장에 가보아야 한다면서 일어서는데, 민영익이 황망히 밖으로 나갔다. 근처가 민태호(閔台鎬 : 閔泳翊[민영익]의 父[부])의 집이어서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었다.
 
227
밖으로 나간 민영익이 조금 있다
 
228
“사람 살류!”
 
229
하고 죽는 시늉을 하면서 피 흐르는 귀를 잡고 굴러들어왔다.
 
230
연회장은 그만 수라장이 되었다.
 
231
눈치를 챈 이조연, 한규직은 어느 겨를에 몸 빼쳐 달아났다.
 
232
민영익을 친 것은 일본인 낭인이었고, 그가 너무 조급히 날뛰느라고 손질을 잘못하였기 때문에, 민영익을 설잡았을 뿐만 아니라, 이조연과 한규직도 놓치고 만 것이었다.
 
233
제일단의 행동에 실패한 김옥균은, 즉시 서광범, 박영효와 함께 우정국을 나와 중로의 교동에 있는 일본공사관에 잠깐 들러, 죽첨의 태도에 변함이 없음을 다시금 확인한 후에 바로 창덕궁으로 달려갔다.
 
234
음력 시월 열이렛날 밤의 달빛은 차갑게 밝았다. 밤은 이미 이슥하였었다. 서재필의 지휘 아래 신복모(申福模)가 거느린 사십여 명의 사관생도(士官生徒) 장사패는, 금호문 일대를 에워싸고 가득 당긴 활처럼 긴장하여 있었다.
 
235
밤은 괴괴하고 궁궐은 달이 밝건만 칙칙하였다.
 
236
몇 개의 그림자와 함께 급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왔다.
 
237
“하늘천.”
 
238
이편에서 미리 서로 정하였던 암호를 하는 소리에, 저편에서도
 
239
“하늘천.”
 
240
하고 응한다.
 
241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가 금호문에 당도한 것이었었다.
 
242
금호문을 지키는 군졸에 미리 내통한 동지가 있어, 문을 열어 주어서 일행은 쉽사리 들어갈 수가 있었다.
 
243
왕은 이미 침전에서 잠이 들었고, 통지 변수(邊燧)가 세 사람을 맞이하면서, 궁중에서는 아직 우정국의 변을 모르고 있다고 귓말을 하였다.
 
244
민비의 가장 총애를 받고, 그래서 그 세력이 영의정 이상 간다는 유재현(柳在賢)이라는 환관(宦官 : 內侍[내시])이 있었다. 숙청의 명부에 오른 인물이었다.
 
245
그런 것도 모르고 유재현은 꼬챙이 같은 목소리로, 야밤에 입내하여 잠든 임금을 깨우라고 한다고 시비를 하다가 김옥균이 호통을 하는 서슬에 그만 주춤하였다. 그리고 그 호통 소리에, 왕과 민비가 다 잠이 깨어 김옥균들을 불러들였다.
 
246
김옥균은 왕의 앞에 나아가, 방금 우정국에서 변이 났는데, 장차 대궐안에 까지 미칠 형세이니 잠깐 정전(正殿)을 피하여야 하겠다고 하였다.
 
247
눈치 빠른 민비가 옆에 있다가, 그 난이 청병이 일으킨 난이냐 일병이 일으킨 난이냐 하고 날카롭게 물었다.
 
248
김옥균이 졸지에 무어라고 대답을 못하고 주저하는 참인데, 그러자 침전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通明殿[통명전])에서 별안간 쿵 하고 굉장히 큰 폭음이 일었다.
 
249
이 폭발은 변란이 방금 궁중에까지 미쳐 들어온 듯이 하기 위하여 미리 계획하였던 행동이었다.
 
250
민비를 가까이 모시는 궁녀로, 키가 크고 몸이 튼튼하여 남자라도 너덧은 한꺼번에 당해내는, 그래서 『수호지(水滸誌)』의 고대수(顧大嫂)라는 별명을 듣는 개화당의 여자 동지가 있었다.
 
251
이 고대수가 미리 받은 지시에 좇아 통명전에 묻은 다이나마이트를 마침 폭발을 시킨 것이었었다.
 
252
과연 효과는 역력하여, 고종은 떨면서 김옥균 들이 하자는 대로 창덕궁을 피하여 경우궁으로 옮았다. 민비와 왕자와 대왕대비와 궁녀들까지 전부 그에 따랐음은 물론이었다.
 
253
왕은 경우궁으로 옮는 도중, 김옥균의 말에 따라 마침으로 박영효가 올리는 종이에다 김옥균이 올리는 연필로 “日本公使來護朕”[일본공사래호짐](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호위하라.)는 친서를 적었다.
 
254
지필의 준비까지도 다 계획하였던 것이고, 역시 계획대로 박영효가 그것을 가지고 일본공사관으로 가 죽첨에게 전하였다.
 
255
왕 이하가 경우궁의 잠긴 뒷문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정전 뜰에 이르렀을 때에, 박영효가 일본군대를 거느린 죽첨 공사와 함께 당도하였다.
 
256
일본군대의 당도를 보고, 개화당은 비로소 안도를 하였다.
 
257
왕 이하 왕비, 왕세자, 대왕대비, 왕세자빈이 정전에 앉고, 김옥균, 박영효와 일본공사 죽첨이 그 좌우에 모여서고, 장사패의 총지휘 서재필이 정난교(鄭蘭敎), 이규완(李圭完) 등 열세 명의 사관생도와 장사패를 거느려 정전 안에서 옹위하고, 정전 문 밖은 다시 이인종(李寅鐘) 등 열명의 사관생도와 장사패가 벌려서고 하였다.
 
258
정전 뜰 앞뒤에는 후영 소대장 윤경완(後營小隊長 尹京完)이 검을 뽑아 들고, 당직병 오십 명을 거느려 배열하고 서서 경계를 하였다. 윤경완은 개화당의 동지로, 이날 밤 침전(寢殿 : 王[왕]의 寢室[침실])의 당직이었는데, 그 당직병 오십 명을 그대로 이끌어, 창덕궁에서부터 벌써 이 쿠데타에 참가를 하였었다.
 
259
마지막, 그리고 죽첨 공사가 거느리고 온 일백오십 명 일본군은 중촌(中村) 중대장의 지휘로 경우궁의 각 문과 주위의 요소를 경비하였다.
 
260
이 밖에 무감(武監) 십여 명을 따로이 궁문에 파수 세워, 변을 듣고 입궐하는 대신이며 요인들을 일일이 사찰하게 하였다.
 
261
좁은 경우궁으로는 이만하면 철통 같은 단속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262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263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은 전후해서 달려와 내시 유재현과 더불어 연방 무어라고 수군덕거리고 하였었다. 청국 군대를 불러오려는 조바심인 것은 묻지 않아도 번연하였다.
 
264
박영효가 마침내 밖으로 나와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을 불러
 
265
“당장 변이 일어 상관 없는 남들 일본 공사까지도 군대를 이끌고 와서 경호를 하는데, 너희는 더구나 임금의 신하요, 그런 중에도 영사(營使)라는 직접 책임이 있으면서, 한 명의 군사도 거느리고 오는 것이 없이 단신으로 들어와 가지고 구석구석이 밀담만 하고 있으니, 그런 태도가 어디 있느냐. 당장 직책을 이행하되 태만하면 왕께 아뢰어 목을 벨 테다.”
 
266
하고 엄포로써 질책을 하였다.
 
267
지당한 책망인지라, 세 사람은 하릴없이 경우궁 뒷문으로 물려나가다가 맨 먼저 윤태준이, 계속하여 한규직과 이조연이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차례로, 이규완 이하 장사들의 번쩍이는 칼날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268
그 다음 민영목이 경우궁 정문으로 들어오려고 명함을 내었다.
 
269
장사들이 문 안으로 맞아들이면서 일본 군대가 늘어선 앞에서 그대로 조처하였다.
 
270
이어서 조영하가 들어오다 역시 같은 솜씨로 조처되었다.
 
271
마지막 민파의 최대의 거물이요 민비의 양오라비 되는 민태호가 또한 한칼에 쓰러졌다.
 
272
광경은 흡사히 수양대군(首陽大君)과 한명회(韓明澮) 들이 사백칠십 년전, 계유(癸酉) 시월 초열흘날 밤 단종(端宗)이 가 있는 향교동(鄕校洞) 정종(鄭悰)의 대문간에서 김종서(金宗瑞) 들을 때려잡던 일을 방불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273
정전에 있는 왕이며 민비들이나 또는 궁녀며 내시들은 피의 숙청을 보지도 못하였고, 따라서 아직은 알지도 못하였다.
 
274
궁녀와 내시들은 정전의 협실에 가득히 모여 앉아 태평으로 함부로 지껄이며 떠들어대었다. 이것은 민비가 외부와 연락을 하여 청군의 구원을 청할 기별을 내보낼 계책을 꾸미려고 우정 그렇게 시끄럼을 피우게 한 노릇이었었다.
 
275
김옥균은 내시 유재현을 결박케 하여 짐짓 궁녀와 내시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죄상을 말한 후에 장사로 하여금 목을 베었다.
 
276
‘피의 호령’을 보고서야 궁녀와 내시들은 떨면서 조용하였다.
 
277
이미 동녘이 밝기 시작한 때였다.
 
278
이렇게 하여 숙청까지 마침으로써, 개화당은 쿠데타에 성공을 한 것이요, 이로부터 왕을 끼고 천하를 호령하는 판이었었다.
 
279
새로운 정부가 조직이 되었다.
 
280
영의정(領議政) 이재원(李載元 : 王[왕]의 從兄[종형])
 
281
좌의정(左議政) 홍영식(洪英植)
 
282
전후영사(前後營使) 박영효(朴泳孝 : 左捕將兼任[좌포장겸임])
 
283
좌우영사(左右營使) 서광범(徐光範 : 外務督辨代理兼右捕將兼任[외무독변대리겸우포장겸임])
 
284
좌찬성(左贊成) 이재면(李載冕 : 左右參贊兼任[좌우참찬겸임]. 大院君[대원군]의 嗣子[사자])
 
285
이조판서(吏曹判書) 신기선(申箕善 : 弘文提學兼任[홍문제학겸임])
 
286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재완(李載完 : 李載元[이재원]의 弟[제])
 
287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윤식(金允植)
 
288
형조판서(刑曹判書) 윤웅렬(尹雄烈)
 
289
공조판서(工曹判書) 홍순형(洪淳馨 : 王大妣[왕대비]의 侄[질])
 
290
호조참판(戶曹參判) 김옥균(金玉均)
 
291
한성판윤(漢城判尹) 김홍집(金弘集)
 
292
판의금(判義禁) 조경하(趙敬夏 : 大王大妣[대왕대비]의 侄[질])
 
293
병조참판(兵曹參判) 서재필(徐載弼 : 正領官[정령관] 兼任[겸임])
 
294
세마(洗馬) 이준용(李埈鎔 : 大院君[대원군]의 嗣孫[사손])
 
295
이 밖에도 몇몇 종친(宗親)이 더 참례를 하였다.
 
296
그동안의 외척전천(外戚專擅)으로부터, 소위 대정(大政)을 왕실에 돌려바쳤다는 형식으로, 여러 종친을 끌어 말썽 없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나 실권은 전부를 개화당이 차지한 것은 물론이었다.
 
297
이어서 신정부의 새 정령(政令)이 발표되었다.
 
298
① 대원군을 며칠 안으로 돌아오게 할 것.
 
299
② 청국에 조공(朝貢)의 예를 폐할 것.
 
300
③ 문벌을 폐하고, 인민의 자유권과 평등권을 제정하며, 인재본위로 관리를 임명하되, 관위(官位)에 좇아 사람을 쓰는 것을 폐할 것.
 
301
④ 지조(地租 : 稅制[세제])의 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농간과 협잡을 막고, 인민의 곤궁을 펴게 하며, 나라의 용을 윤택하게 할 것.
 
302
⑤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되, 그 중 유능한 자만 달리 등용할 것.
 
303
⑥ 간특하고 탐욕하여 나라와 인민에게 많은 해독을 끼친 자를 처벌 할 것.
 
304
⑦ 규장각(奎章閣)을 혁파할 것.
 
305
⑧ 순사(警察制度[경찰제도])를 급히 두어 도둑을 막을 것.
 
306
⑨ 나라의 재정은 전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외의 기관은 전부 혁파 할 것.
 
307
팔십여 종목 가운데 중요한 것이 이러하였다.
 
308
신정부에서는, 이 새 정령을 방을 써서 거리에 붙이게 하였다.
 
309
혹자는 말하기를 갑신 쿠데타에 개화당이 실패하지 아니하였다면, 조선은그 뒤의 우리가 겪은 비참한 역사를 밟지 않았으리라고도 한다.
 
310
혹은 그렇다고 할는지 모른다.
 
311
그러나, 가령 일본측의 군사적 원조가 여의하여 개화당이 잡은 바 정권을 그대로 지탱하고 차차로 지반을 굳히면서 안으로는 개혁을 추진시키고 밖으로는 청국의 기반을 벗어나 자주독립의 길을 밟아나가고 있었다고 하자.
 
312
그 다음 일본은 조선을 어떻게 대하였을 것인가, 앞문으로 늙은 사자 청국을 내쫓고, 뒷문으로 들어온 어린 살쾡이 일본이 과연 고소한 고깃덩이 조선을 도로 뱉어놓고 얌전히 물러나갔을 것일까.
 
313
무섭게 늘어가는 일본의 국력…… 이것을 대륙으로 대고 방산(放散)하기 위하여서는, 교두보(橋頭堡)로서 조선이 절대로 필요하지 아니하였을 것인지.
 
314
개화당이 천하를 호령한 지 사흘 만인 십이월 육일(陰曆[음력] 10월 19일) 오후 세시가 조금 못되어서부터, 왕궁 창덕궁 안팎에서는 드디어 요란한 사격전의 총소리가 일고 말았다.
 
315
민비가 등 뒤에서 조종을 하고, 왕 스스로가 그에 화하여 개화당에서 누누히 만류를 하였으나, 왕은 필경 고집을 써 그 전날인 십이월 오일 오후에 왕 이하가 경복궁으로부터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316
적은 병력으로 방비에 유리한 경복궁을 버리고 넓은 창덕궁으로 자리를 옮은 것이, 개화당에게는 우선 불리한 손실이었다.
 
317
왕의 태도에도 개화당의 사람이나 그 정책을 저으기 꺼려하는 기색이 보였다.
 
318
왕은 평일에는 정치개혁과 자주독립에 쑬쑬히 흥미를 가졌고, 그래서 김옥균이며 박영효, 홍영식 같은 사람을 자못 신뢰도 하고 총애도 하였었다. 그러나 막상 커다란 일이 눈앞에 저질러지고 나니, 마음 약하고 중추 든든하지 못하고 민비의 내주장에 사는 왕은 그만 슬며시 겁이 나기도 하였었다.
 
319
왕 고종은 자신이 맡은 바 백성의 번영과 행복보다는, 일신의 구차한 안전과 무사를 위하여 목전의 조그마한 곤란을 참거나 용기를 낼 강단이 없는, 용렬하고도 불신한 임금의 한 사람이던 것이었었다.
 
320
창덕궁으로 다시 옮아앉은 뒤에 민비는 어떤 종친의 집에서 들어온 음식 그릇이 나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교묘하게 원세개의 청진으로 원조를 청하는 통신을 하였다.
 
321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우두커니 앉아 있을 원세개가 아닌지라 사양할 이치가 없는 노릇이었다.
 
322
원세개는 꼬마동이 왜놈이 이런 엉뚱하고 버르장머리가 없을까 보냐고 분개하였다.
 
323
원세개가 거느리고 서울에 주둔한 청병은 이천 명이 넘었다.
 
324
거기에 비하여 창덕궁 안에 있는 개화당측의 병력은 일본군 일백오십명에 서재필이 지휘하는 사관생도와 장사패 사십여 명으로, 도합 이백명 미만이 주력이었다. 한국병이 약간 있기는 하나, 녹슨 무기를 그제서야 수리하고 있는 형편이니, 더욱이나 힘이 될 것이 못되었었다.
 
325
그러니, 아무리 정예하다고 하지만, 이백 명과 이천 명은 수효에서 오는 강약의 차이가 너무 컸다.
 
326
그런데다 일본공사 죽첨이 슬그머니 불안과 겁을 먹고서 연방 일본군대를 거느리고 물러나갈 핑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만일 일본군대가 철퇴하는 마당이면, 더구나 만사는 그만이었다.
 
327
전투가 시작되자 민비는 재빨리 왕세자, 왕세자빈, 대왕대비 그리고 몇몇 궁녀를 데리고, 무감의 호위를 받으면서 북묘(北廟)로 향하여 궁을 빠져나갔다. 북묘는 청군의 세력범위 안에 있었다.
 
328
왕만 홀로 김옥균 들에게 만류한 바 되어 연경당에 주저앉았다.
 
329
이때 김옥균 들은 왕더러 강화로 파천하기를 주장하였으나 왕은 한사코 이를 거절하고 북묘로 갈 것을 고집하였다.
 
330
왕은 그러면서 자리를 일어서서 북묘를 바라고 걸었다.
 
331
전투는 더욱 치열하여 갔다. 그에 따라 형세는 차차로 불리하여, 잘못하다 일본 군대를 중심한 개화당의 전군은 전멸을 당할지 모르게 되었다.
 
332
일본공사 죽첨은 속으로 간이 콩만 하였다.
 
333
청군측이 이렇게 우세할 줄도 몰랐고, 그렇게 적극적이요 강경하게 나올 줄도 몰랐었다.
 
334
청군에는 많은 한국군대가 합류를 하였었다.
 
335
쏘는 탄환이 거듭 왕의 주변에 떨어지고 하였다.
 
336
핑계를 못 잡아 애를 태우던 죽첨은 좋은 구실거리를 발견하였다.
 
337
죽첨은 결정적으로 일본군대의 물러갈 것을 선언하였다.
 
338
일본군대가 왕을 호위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병정들은 일본군대가 왕을 사로잡기라도 한 줄로 알고서 이렇게 청군과 합류하여 가지고 맹렬한 공격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만일 왕의 신변에 무슨 일이 나든지 한다면 그 일을 장차 어찌할 것이냐. 책임은 누가 질 것이냐. 좌우간 일본군대는 일단 물러갔다가 후일 다시 의론함만 같지 못하다……라는 것이었었다.
 
339
김옥균 이하 아무리 사정을 하여도, 항의를 하여도 죽첨은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340
일본군대는 한마디 호령으로 필경 물러가기 시작하고야 말았다.
 
341
개화당으로는 발을 구르며 안타까와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342
왕은 홍영식과 박영교(朴泳敎 : 朴泳孝[박영효]의 兄[형]) 외에 여섯 명의 사관생도의 옹위를 받아 북묘로 갔다.
 
343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이하 몇몇 개화당의 동지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퇴각하는 일본군대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달리었다.
 
344
이미 날이 어둔 뒤였었다.
 
345
김옥균 들은 그렇게 일본공사관으로 달리어 숨었으나, 왕을 옹위하고 북묘로 갔던 홍영식, 박영교 그리고 여섯 명의 사관생도들은 모조리 청병에게 해를 입은 바 되었다.
 
346
이리하여 왕은 원세개의 손을 거쳐 다시금 보수파 민씨네에게로 넘어가고, 김옥균 들 개화당 잔당은 쫓겨가는 일본공사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을 하고, 개화당의 삼일천하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347
6
 
 
348
“그때, 대황제(大皇帝 : 高宗[고종])께서 하마트라면 총알에 맞아 돌아가실 뻔했더란다…… 에이, 지겨운 난리!”
 
349
이런 말로써 할머니는 긴 이야기를 마친다.
 
350
대희는 눈이 초랑초랑하여 오도카니 듣고 앉아 있다.
 
351
강씨와 원희의 담뱃대에서는 가느다란 연기만 조용히 피어오른다.
 
352
밤은 끝없이 깊고 있고.
 
353
기러기 소리가 한 소리 두 소리 들리다 만다.
 
354
할머니는 혼잣말로 그러고는, 이빨 하나도 없는 빨간 잇몸으로 애기처럼 하품을 뱉는다.
【원문】아시아의 운명(運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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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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