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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초(雜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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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4~5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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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草[잡초]
 
 
2
오학동(五鶴洞)은 이씨촌(李氏村)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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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삼백 년 전에 이씨의 한 집안이 무룡(舞龍)재를 넘어서 이곳으로 와서 살림을 시작한 것이 이 오학동의 시작이었다. 조상의 뼈를 좋은 곳에 묻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삼백 년 뒤 ― 그때의 그 조상부터 십 오륙 대가 내려온 지금에는 거기는 커다란 동리를 이루고 호구 일백 사십여 호 사람의 수효 육칠백 명 항렬로 캐어서 어린아이의 고조부로 비롯하여 늙은 고손까지 촌수로는 이십 육칠 촌까지의 순전한 이씨와 그의 안해들로써 커다란 말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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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학동의 동쪽에는 무룡(舞龍)재라는 매우 가파로운 묏견이 있었다. 서편으로는 말령[馬嶺]이라는 역시 가파로운 묏견이 있었다. 그 무룡재와 말령은 오학동에서 오 리쯤 남쪽에 가서 겨우 작은 개천이 하나 흐를 이만치 벌어지고 오 리쯤 북으로 가서는 서로 합하여서 만약 하늘에서 그곳을 내려다 볼 것 같으면 그것은 마치 묏마루에 있는 한 구렁텅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오학동과 그 근방 일대 ― 무룡재와 말령에 둘러싸인 ― 를 가리켜 ○○골이라 하였다. 여자의 생식기를 따서 붙인 그 골짜기의 이름은 모양으로 보아서 그럴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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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에는 마을이 둘이 있었다. 하나는 물론 오학동이요 또 하나는 정방(正坊)이라는 동리였었다. 오학동은 ○○골의 중앙에 있었고 정방은 무룡재와 말령이 북쪽에서 합한 그 산밑에 있었다. 두 마을의 거리는 한 오 리쯤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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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학동에서는 많은 선비가 났다. 첫번 오학동을 개척한 선조가 세상을 버리고 이곳으로 있던 선비이니만치 그의 후손에도 많은 선비가 났다. 과거에 장원을 하여 그 이름이 근방 일대를 떨친 선비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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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이 무룡재와 말령의 가파로운 길을 넘겨서 많은 며느리를 맞아오고 많은 딸을 내보내는 동안 일가가 늘어 가면 늘어 가느니만치 선비의 수효도 늘었다. 낮에는 밭갈고 밤에는 글읽고 이러는 동안에 연년이 늘어 가는 그 일가는 가까운 장래에 이 ○○골에 차고 넘을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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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동리에서는 오학동을 양반의 동리라 하였다. 오학동 사람들도 그렇게 자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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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댁에 맞지 않는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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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름 아래 많은 며느리가 친정으로 쫓겨갔다. 치마를 벗고 뜰에 나선 죄, 동리 어른께 인사를 못 드린 죄, 김을 맬 때에 웃고 지껄인 죄, 밤에 글을 읽는 새서방에게 빨리 자자고 채근한 죄, 이러한 죄명 아래 삼백 년래로 많은 며느리가 친정으로 쫓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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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방 일대에서는 오학동과 통혼을 하는 것을 큰 명예로 여기고 있었다. 그곳으로 며느리를 보냈다가 쫓겨오더라도 그 허물을 그들은 자기네의 자식 교양 부족에 돌렸다. 또 그만치 오학동에서는 지체가 나쁘다든가 예절을 모른다든가 품행이 나쁘다든가 하는 죄 이외에는 며느리를 버리는 일이 없었다. 성격이 맞지 않는다든가 사람이 좀 얼뜨다든가 인물이 잘못 났다든가 한 것은 오학동의 며느리가 되기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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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학동에서는 정방 사람과는 결코 통혼하지 않았다. 정방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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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이라는 동리는 본시 오학동을 개척한 조상이 들어앉은 지 한 백 년쯤 뒤에 생긴 마을이었었다. 정방은 오씨촌(吳氏村)이며 정방서 자손을 퍼치기 시작한 첫번 오씨는 속량된 종이었었다. 더구나 그 종은 오학동 이씨와 사돈한 집안에 있던 종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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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씨도 조상의 산소를 잘 썼던지 정방으로 온 뒤부터 차차 번식하여 이백년 뒤 십여 대 뒤에는 백여 호의 커다란 마을을 이루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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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번식을 하였다 하나 세력으로써 양반촌인 오학동을 우러러볼 수도 없었다. 같은 ○○골에 있는 두 동리였었지만 오학동 사람은 정방 사람을(종을 면한 지 이백 년 뒤에도) 역시 종으로 보았다.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정방 사람에게는 오냐를 하였다. K동이라는 동리에서 며느리를 맞아왔던 어떤 오학동 이씨는 자기 며느리의 친정에서 정방과 통혼을 하였다는 기별을 듣고 당장에 며느리를 쫓아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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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은 동서가 일 리 남북이 십 리쯤 되는 골짜기였었다. 그 골짜기의 사분의 삼은 이씨가 갈아먹었다. 나머지의 사분의 일 그것나마 북향한 산기슭이 정방 사람의 갈아먹는 토지였었다. 첫번 그곳을 개척할 때에는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 지금은 그 영에 대하여 제각기 내 것 네 것의 소유권이 생겼다. 촌수로 근 삼십 촌까지 벌어진 그들은 비록 일가라 하나 명색이 일가지 남이나 다른 데가 없었다. 대종계 분종계 지종계 사촌계 육촌계가 제각기 갈려 있으며 그 안에서도 우리 파니 남의 파니 당파가 생겼다. 재판까지 생긴 일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일가상피’ 라는 불문율을 무시하고 연애와 음행까지 감행하였다. 그렇듯 자손이 퍼지고 멀어졌는지라 제각기 소유권을 구획하여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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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학동서는 제각기 동리의 친척의 집을 부르기에 거기 적당한 대명사를 지어서 썼다. 가령 그 집 할머니가 대령골서 시집을 왔으면 그 집을 대령방이라 하였다. 그 집 할머니가 우물 있는 집에서 시집을 왔으면 그 집을 우물방이라 하였다. 우물방 한아버니, 대령방 할머니, 익천방 동서, 사슴뫼방 큰애기 ― 만약 다른 곳 사람이 들으면 도저히 이해치 못할 기괴한 대명사를 그들은 서로 부르며 서로 이해하였다. 멀고 가깝고 간에 모두 일가가 되는 그들로서 톳거리 없이 ‘한아버니’ ‘할머니’ 하면은 누구를 가리킴인지 도저히 알 수 없으며 그렇다고 웃어른의 이름은 부를 수가 없으므로 이런 편리한 대명사를 지어 낸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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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 오씨도 그 법을 배워서 자식이 번성한 뒤부터는 ‘무슨 방’ ‘무슨 방’ 하고 서로 불렀다. 그러나 그렇게 부른 지 얼마하지 않아서 오학동 이씨의 간섭으로 그 대명사에 얼마간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학동서는 ‘무슨 방’ ‘무슨 방’ 자를 쓰는 대신 정방서는 ‘무슨 집’ ‘무슨 집’하여 ‘집’ 자를 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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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물은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서 조선에 흘러들어왔다. 도회에서는 상투가 차차 없어졌다. 서당 대신으로 학교가 섰다. 개혁과 문명의 불길은 사면에서 일어났다. ‘핫다라 맛다라(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일인들의 대화를 들으면 유난스레 …다라 하는 소리가 귀청을 자극하는 데서 생긴 의성어)’ 로만 들리던 일본 말을 ‘고자이마스(ございます ― 고맙습니다)’ ‘곤니찌와(今日[금일]は ― 낮인사)’ ‘사요나라(さようなら ― 작별인사)’ 등으로 구별할 만한 이해력이 촌촌까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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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학동에뿐은 이 풍조도 흘러들어오지 못하였다. 지리상 관계로 두 가파로운 뫼 틈에 있는 오학동은 다른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되어 살았다. 무룡재의 동쪽에서 말령의 서쪽으로 길을 가는 사람은 좀 돌림길을 하여서라도 산을 휘돌아서 갔지 깎아세운 듯이 가파로운 무룡재와 말령의 두 고개를 넘기를 피하였다. 문명은 ○○골을 에워싸고 그 근처에까지 퍼졌지만 오학동에는 침범치를 못하였다. 무룡재와 말령에 보호를 받은 오학동은 문명이라는 모진 바람에 쏘일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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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역시 한학을 가르쳤다. 옛날의 예의와 도덕을 가르쳤다. 예의와 도덕이면 인생의 전부여니 하였다. 지식의 근원인 수학을 그들은 알려 아니하였다. 과학의 온갖 정확함을 보려 아니하였다. 낮에는 밭갈고 밤에는 글읽고 ― 이것이 그들의 생활의 전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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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오학동으로 들어온 며느리들에게서 그들은 새 학문의 자랑을 들었다. 물론 학교 출신의 며느리를 그들은 맞은 일이 없으되 며느리들은 보고 들은 바로써 새 학문의 정교함을 때때로 비추었다. 오학동을 찾아온 사위며 처남들에게서 그들은 새 학문의 오묘한 것을 실견도 하였다. 고불고불한 글자로써 수판보다도 정확하게 어려운 수를 푸는 것을 보았다. 암탉이 없이도 달걀을 깬다는 실화를 들었다. 벼락이라고 저퍼하던 ‘전기’를 사람이 이용하여 온갖 방면으로 사용한다는 이야기며 그(알기는 힘드나마) 이론도 들었다. 시계라는 오묘한 기계가 오학동의 몇 큰집에는 걸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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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학문에서 윤리와 도덕을 발견치 못한 그들은 역시 신학문을 경멸하였다. 벼슬이라는 것이 없어진 시대니 이전과 같이 열심히 학문을 할지라도 뒤에 활용할 곳은 없을망정 신학문을 학문으로 여길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장인이나 공인바치가 배울 재간이지 학문이 아니라 경멸하였다. ‘농은 민지본이라’ 벼슬이 없어진 고약한 시대이매 점잖은 사람은 농사나 짓고 윤리와 도덕이나 닦을 게지 장인바치가 배울 재간은 배울 필요가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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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문명은 오학동을 둘러쌌다. 그러나 오학동은 엄연히 그것을 초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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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골 안에 있는 정방은 오학동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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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종의 자손으로 학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백 년을 내려온 그들은 그 동안 농사에만 열중하였다. 하늘에 별과 같이 바닷가에 모래와 같이 그들은 번식하며 번식하느니만치 먹기에 노력하였다. 이백 년 동안을 오학동 양반들에게 갖은 수모를 받으면서도 그 수모를 수모로 여기지는 않고 먹고 살기에 급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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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골을 에워쌌다. 동으로는 무룡재 너머 서로는 말령 너머까지 문명의 물결은 미쳤다. 신학문의 그림자는 좌우 재 넘어서 정방 동리를 에워쌌다. 그리고 오학동을 감히 침범치 못한 이 문명의 물결은 어느 틈에 정방에 새어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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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령을 넘어서 시집을 갔던 딸이 외손주를 데리고 나들이를 왔다. 외손주는 학도생이었었다. 무식한 외조부가 셈을 못하여 안달아하는 것을 외손주가 목필로써 고불고불한 글을 몇 자 써 본 뒤에 손쉽게 계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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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정방 동리에 큰 충동을 주었다. 학도생은 신동이라 하여 동리의 각 어른들이 불러 보았다. 그리고 그 재간이 신동인 탓이 아니고 신학문을 한 탓이라는 것을 안 뒤에 그들은 학문의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이백여 년래를 무식하게 내려온 그들은 학문이라는 것이 유난히도 귀하고 중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학문은 종의 자식을 괄세하지 않았다. 학문 하나이면 그뿐 그 사람의 근본과 선조를 캐자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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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정방 동리 안에는 사립학교가 하나 섰다. 신학문을 한 사위 두 사람을 동리로 불러들여서 학교의 선생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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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냥이나 있는 집 자식은 그 사립학교에서 몇 해를 한 뒤에는 감영으로 보내서 고등학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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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과학문명의 승리를 자랑하는 기차는 이 오학동을 상거한 삼십리 밖 평원을 긴 소리를 치면서 매일 몇 번씩 왕래하였다. 하늬바람이나 살살 부는 날이면 바람이 운반한 기차의 기다란 울음소리는 이 골짜기에서까지 들렸다. 무룡재 꼭대기에 올라서면 삼십 리 밖 수수밭이며 조밭 틈을 닫는 기차의 검은 연기까지 볼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학동의 한아버지며 한머니들이 무룡재나 말령의 가파로운 길을 사인교로 넘겨서 멀리 시집보낸 딸이며 혹은 그 딸이 낳은 외손주를 보기 위하여 문명의 이기(利器)인 기차를 이용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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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그들은 역시 현대의 문명을 거부하였다. 그 교묘함 그 편리함 그 빠름 그 거대함 ― 이런 것을 모두 못 본 바가 아니지만 그리고 또한 그 힘을 시인(是認)치 않음이 아니지만 역시 학문으로서의 현대문명은 단연히 거부하였다. 윤리와 도덕이 없는 물건을 학문으로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음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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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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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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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 재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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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과학문명에 대한 그들의 최대 인식이 여기 끊쳤다. 모든 것이 한낱 재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재간은 재간이지 결코 학문이 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점잖은 이의 배울 만한 것이 못 되었다. ― 이러한 견해 아래서 그들은 더욱더욱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는 학문을 자식들에게 배워 주기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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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정방 동리에 신학문의 학교가 설시된 뒤부터는 오학동의 노인들은 더욱 신학문을 멸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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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전부터 신학문은 상놈이나 배울 게라고 그러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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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비웃은 뒤에는 자기네의 수염을 쓰다듬고 하였다. 그리고 무룡재나 말령의 가파로운 묏견을 넘겨서 자기네의 딸들을 시집을 보내거나 혹은 며느리를 맞아오는데도 개화한 집안이라는 것을 몹시 꺼리었다. 오학동의 어느 며느리는 절구질을 하면서(친정에서 주워들은 창가를 한 마디 콧소리로 부른 것이 탈이 되어 점잖은 집 며느리가 소리를 했느니 말았느니 큰 말썽이 일어난 일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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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야 학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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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청산 바라보게.
43
고목은 썩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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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목은 소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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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라야 그때 도회 등지에 유행한 장학가의 일절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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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방 한머니가 손주딸을 시집을 보냈다. 그 가을 손주딸을 보러 간 일이있었다. 손주딸의 시집은 그 도(道)의 감영이었었다. ○○골에서 백삼십 리 오학동에서 삼십 리 밖을 지나간 문명의 이기인 기차를 이용하면 두 시간쯤 걸리는 곳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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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때는 떡이라 기타 음식 등으로 짐이 많았으므로 기차를 이용하였다. 돌아올 때는 사위가 차표를 사 주어서 역시 기차로 왔다. 이리하여 눈깜짝하는 새에 백여 리의 길을 가서 며칠 묵은 뒤에 역시 눈깜짝하는 새에 돌아온 이 한머니는 너무도 쉽게 갔다가 너무도 쉽게 돌아오기 때문에 백여 리라는 숫자적 이정(數字的 里程)은 잊어버리고 손주딸의 사는 곳의 거리를 멸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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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름날 밤 손주딸에게 관한 불길한 꿈을 꾼 이 한머니는 이튿날 조반 후에 생각다 생각다 못해서 손주딸의 집에를 잠깐 가 보기로 하였다. 백여리라는 숫자적 이정보다도 과거의 경험이 증명하는 바의 경멸할 만한 거리라는 것은 이 한머니로 하여금 잠깐이면 넉넉히 다녀오겠다는 자신을 가지게 하였다. 이리하여 한머니는 집안 사람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손주딸의 시집을 향하여 오학동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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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머니가 손주딸의 시집에 도착한 것은 오학동을 떠난 이튿날도 날이 거의 저물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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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방에서는 한머니를 잃었다고 야단법석할 동안 한머니는 손주딸의 시집에서 노독으로 병석에 넘어졌다. 그리고 앓는 동안도 한머니는 자기가 길을 헛들어서 그렇게 오래 온 줄 알았지 기차가 사람의 발보다 그렇게 빠르리라고는 종내 이해치를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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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머니가 겨우 오학동으로 돌아와서 한 말은 ‘기차의 편리’보다도 오히려 ‘신작로(新作路)의 불편’ 이었다. 예전의 길 같으면 백 몇 십 리를 걷는다 할지라도 그렇듯 노독까지 날 리가 없는데 이번의 노독은 순전히 신작로의 탓이라 하였다. 예전의 길은 길에 풀이 깔려서 땅을 짚는 맛도 푸근하고 게다가 울툭둘툭해서 땅과의 접촉면도 발의 일부분이지 전면이 아니며 그 접촉면이 또한 매 걸음마다 변하므로 길가기가 허스러웠는데, 지금의 신작로라 하는 것은 돌덩이같이 굳고 반반해서 걸음마다 발바닥 전면과 접촉되므로 십 리를 가기 전에 발 전면이 부르튼다 하는 것이 이 한머니의 신작로에 대한 비평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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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덩이 같은 길이 발바닥하구 딱딱 마주치는데, 어디 견딜 수가 있더냐 지금 길은 참 고약두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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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치 그들은 새로운 온갖 사물에 대하여 악의와 정의와 경멸의 눈을 부읏기를 그치지 않았다.
 
 
54
오학동에서는 새로운 것에 대하여는 통틀어 반항을 하는 데 반하여 같은 ○○골짜기에 있는 정방에서는 새로운 학문을 흡수하기에 급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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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유여 년을 종의 자손이라는 명목 때문에 사람의 가질 온갖 특권을 봉쇄당하였던 그들의 앞에 처음으로 학문의 길이 열렸다. 신학문은 종의 자식을 괄시를 안하는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종의 자식이라도 학문만 하면 넉넉히 출세도 하며 벼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한 예에 관한 보고도 연하여 들어왔다. 사람의 온갖 특권을 봉쇄당하기 때문에 하릴없이 의식주에나 급급하던 그들에게 꿈에도 생각 못하였던 출세의 길이 열렸는지라 그들의 향학열은 맹렬하였다.
 
56
물론 수백 년래의 봉건사상에 젖고 또 젖은 그들이었다. 오학동을 눈 아래로 본다든가 오학동에 반항을 한다든가 하는 일은 생각도 못하였다. 역시 오학동 사람들을 만나면 허리를 굽혔다. 길을 비켜 주었다. 신발을 털어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도,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도 인제부터는 사람다이 살 수가 있다는 자랑이 보였다. 오학동 노인들의 점잖은 걸음걸이를 본뜨려는 늙은이도 몇이 생겼다.
 
57
오학동 아이들이 무룡재에서 새를 베면서 타령을 부르는 데 반하여, 정방 아이들은 말령에서 소에 꼴을 먹이면서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하고 창가를 불렀다. 오학동 아이들이 어른 앞에 꿇어앉아서 ‘하늘 천 따지’며 ‘대학지도는 재명명덕’을 욀 동안 정방 아이들은 자기네의 매부 혹은 고모부 되는 선생에게 ‘기역 니은’ 과 ‘1234’ 를 배웠다.
 
58
뿐만 아니라 아직 어른만치 봉건사상에 젖지 않은 정방 아이들은 ― 때때로 오학동 아이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 일이 생긴 때마다 부모에게 무서운 벌을 받고 했지만 정방 아이들은 그래도 오학동 아이들과 흔히 충돌을 하였다.
 
 
59
이리하여 ○○골 안에는 아직껏 ○○골을 지배하던 지벌의 세력을 대항하려는 학문의 세력이 차차 움돋기 시작하였다.
 
 
60
세월은 흘렀다.
 
61
흐르는 세월은 온갖 것을 다 씻어 갔다. 세월의 무서운 힘에 씻기어 없어진 것 가운데는 ‘낡은 사람’이라 하는 것도 있었다. 아무 것도 용서치 않고 씻어 버리는 세월은 낡은 사람도 씻어 가지고 흘러갔다.
 
62
세월과 함께 낡은 사람은 흘러갔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이 낡은 사람의 대신으로 들어앉기 시작하였다.
 
63
학도야 학도야
64
저기청산 바라보게.
 
65
의 시대를 건너서,
 
66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67
의 시대도 건너서
 
68
고꼬와 오꾸니오 난뱌꾸리(此處[차처]は御國[어국]を何百里[하백리])
69
하나레떼 도끼 만슈노…(離[이]れて遠[원]き滿洲[만주]の)
70
(이곳은 나라를 몇 백 리 떠나, 먼 만주의… : 일본군의 만주 침략 당시 만들어진 대표적 군가의 일부. 일반인도 많이 불렀음.)
 
71
의 시대가 이르렀다.
 
 
72
세월은 흘렀다. 시대는 변하였다.
 
73
그러나 오학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직도 기념품과 같이 몇 사람 남아 있는 오학동의 노인들이 그 동리의 지배자이었다. 삼강오륜과 옛날 성현들이 가르친 바 온갖 도덕을 새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처박기에 온 힘을 쓸 뿐이었다. 남녀는 일곱 살에 자리를 같이하지를 못하였다. 스승은 그 그림자도 밟지를 못하였다. 여인에게는 역시 칠거지악을 준하였다. 출입에 반드시 어른에게 아뢰었다.
 
74
―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고 따라서 새로운 사람이 났다 하지만 그 ‘새롭다’ 하는 것은 ‘젊다’ 하는 것을 뜻함이지 결코 내적 변화를 말함이 아니었다. 사람은 바뀌었으나 그 도덕관이며 인생관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75
“맹자 양혜왕을 보시니 왕 가로되.”
 
76
맹자는 ‘하시’ 고 왕은 ‘하’ 였다. 여기 만약 누가 있어서,
 
77
“맹자가 양혜왕게 배알하매 왕께서 가로사되 ―.”
 
78
라고 읽는 사람이 있으면 오학동 전체에서 그런 불경한은 응징할 것이었었다.
 
79
이리하여 오학동에서는 역시 낡은 사람과 마찬가지인 새 사람이 꼬리를 변하여 났다.
 
 
80
어떤 춘기 대청결날이었다.
 
81
오학동에서 가장 돈냥도 많고 점잖으며 학식도 높다는 익천방 한아버님은 긴 담뱃대를 물고 뜰에서 머슴들에게 청결을 시키고 있었다.
 
82
거미줄도 다 쳤다. 뜰의 돌부스러기도 모두 치워 버렸다. 뜰에 멍석을 펴고 방 안의 이부자리며 옷들도 모두 내어놓고 방 안도 먼지 하나 없이 쓸어내었다. 그런 뒤에 노인은 몸소 돌아다니며 부족한 곳이 없는가고 검분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타지를 잡자 하더라도 잡힐 곳이 없도록, 청결은 충분히 되었다.
 
83
그것을 다 돌아본 뒤에 노인은 사랑으로 들어와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헌병들이 검분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84
긴 봄날도 거의 저물어서야 헌병 하나와 보조원 하나가 칼소리를 제걱거리며 익천방 대문을 힘있게 열고 들어섰다.
 
85
벼슬에는 머리를 들지 못하고 권력을 저퍼하고 세력을 두려워하는 익천방 한아버님은 아직 물고 있던 긴 담뱃대를 황급히 놓고 뜰로 뛰어내려갔다. 헌병들은 이 노인이 황급히 나오는 것은 본 체 만 체, 곧 뜰 뒤로 돌아갔다. 노인도 따라 돌아갔다. 헌병들은 두리두리 살핀 뒤에 도로 뜰앞으로 나왔다. 노인도 또 따라 나왔다.
 
86
앞뜰에서 유난히도 똑똑히 검분하고 있던 보조원은 문득 사랑 앞에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땅을 굽어보았다. 거기는 노인이 심은 몇 포기의 채송화가 꽃을 자랑하고 있었다.
 
87
“이게 뭐야.”
 
88
보조원은 채송화를 내려다보면서 심술궂은 소리로 고함쳤다. 뒤에 섰던 헌병이 웃으면서 일본 말로 보조원에게 무에라고 하였다. 보조원도 일본 말로 무에라고 웃으면서 헌병에게 말하였다. 그런 뒤에 다시 발로 꽃을 가르키면서,
 
89
“이게 뭐야.”
 
90
고 고함쳤다.
 
91
노인은 망지소조하여 보조원의 앞으로 갔다. 손은 어느덧 읍하여졌다.
 
92
“그게 꽃이올시다. 채송화라는….”
 
93
“꽃인 줄야 모르리? 꽃이라도 청결 때면 뽑아 버려야 하지 않냐 말이야. 청결이란 모두 깨끗이 하는 건 줄 모르냐 말이야. 낫살이나 먹은 게….”
 
94
“네….”
 
95
노인은 푹 수그렸던 머리를 조금 들었다. 그리고 보조원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 노인은 그 보조원의 얼굴에서 정방 동리 모줏집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96
무섭고도 또 무서운 보조원이 뜻밖에도 이 같은 ○○골 안에 있는 ― 더구나 자기네의 눈아랫 사람인 것을 발견할 때에 노인은 이상히도 반갑고도 안심되었다. 조금 들리었던 노인의 얼굴은 온전히 들리었다.
 
97
“아! 자네 ―.”
 
98
그러나 그 말을 맺지를 못하였다. 눈과 뺨에서 불이 나는 것을 느끼는 순간 노인은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고꾸라지는 것과 동시에 허리로는 무서운 구둣발길이 사정없이 내려찧는 것을 감각하였다.
 
99
“이 자식이 ― 자네가 뭐야. 관리에게 향해서!”
 
100
그 뒤에는 연하여 허리로 가슴으로 엉덩이로 구둣발이 내려왔다.
 
101
이러는 동안 노인은 몇 번을 손을 빌었는지 몰랐다.
 
102
“나리. 살려 줍쇼.”
 
103
몇 번을 늙은 소리로 탄원하였는지 몰랐다. 친척 동리가 모두 모여들어서 보조원에게 사죄사죄를 얼마나 하였는지 몰랐다. 좌우간 아직 해가 있을 때 부터 시작하여 날이 어둡기까지 노인은 보조원에게 맞고 채이고 한 뒤에야 겨우 놓였다.
 
104
오학동의 다른 집들의 청결은 내일 다시 본다고, 가장 집물을 뜰에 내어놓은 채로 그 밤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5
그 이튿날 밤 오학동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106
헌병보조원은 무서웠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관리니까…. 그러나 오학동에서 오 리 밖에 사는 정방 모줏집은 무섭지 않았다. 더구나 종의 후손인 모줏집이며 그 집 늙은이는 지금도 오학동 사람들을 보면 허리를 굽신굽신하는데 그 집 자식놈이 오학동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노인을 발길로 수없이 차고 때렸다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다.
 
107
그것을 관리로 볼 때에는 무서웠으나 돌이켜 자기네가 어렸을 때부터 늘 보아 오던 종의 새끼로 볼 때에는 억분키가 짝이 없었다. 그것은 그냥 두지못할 일이었다.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108
이리하여 의논이 합의가 된 결과 이튿날 하인을 시켜서 정방까지 가서 모줏집 늙은이를 오학동으로 불러왔다.
 
109
영문을 모르는 모줏집 늙은이 하인을 따라왔다. 그러나 익천방 사랑에 줄줄이 모여앉은 오학동의 늙은이들을 볼 때에 아직 시대를 이해치 못하는 모줏집 늙은이는 황공히 뜰 아래 읍하고 섰다. 그 늙은이에게 향하여 익천방 노인의 사촌 되는 노인이,
 
110
“이놈 네 죄를 모르는다.”
 
111
고 호령하였다.
 
112
모줏집 늙은이는 허리를 굽혔다.
 
113
“네 소인의 죄가 무엔지 ―.”
 
114
“무얼?”
 
115
사촌노인은 하인을 둘러보았다.
 
116
“저놈 단매에 살이 터지도록 때려라!”
 
117
거기서는 오학동 노인들의 머리에만 아직껏 남아 있는 형벌이 실행되었다. 호령은 연하여 내렸다. 호령의 틈틈이 모줏집 늙은이에게 오늘 지금 형벌하는 까닭을 알으켰다. 상놈이 하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무서운 짓을 행한 보복의 아픔을 알으켰다.
 
118
낮부터 시작되어 어둡기까지 매질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모진 매 때문에 거의 죽게 된 늙은이를 밤에야 들것에 담아다가 정방 동리 어구에 내버렸다.
 
 
119
청결 때에 채송화를 뽑지 않기 때문에 매맞은 노인은 마침내 죽어 버렸다. 그 노인이 죽은 지 조금 뒤에 모줏집 늙은이도 또한 죽어 버렸다.
 
120
이리하여 두 개의 죽음은 내었을지라도 사건은 여기서 끝이 난 듯싶었다.
 
121
그러나 일은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모줏집 늙은이의 죽음의 뒤에는 ‘법률’이라 하는 국가의 세력이 있었다. 모줏집 늙은이가 죽은 이튿날로 오학동의 사내는(늙은이 젊은이 하인들을 막론하고) 모두 그곳을 관할하는 주재소에 붙들려갔다.
 
122
며칠 뒤에 태반은 놓여나기는 하였다. 그러나 놓여나온 사람들은 모두 죽도록 매를 맞고 나왔다. 그 매 때문에 나와서 죽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못 나온 사람들은 경찰서로 감옥으로 이리하여 살인범이라는 무서운 명목 아래 종신 혹은 십이 년 징역으로 영어의 몸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23
뿐만 아니었다. 이전에는 정방의 어른이며 아이들이 때때로 오학동 사람에게 숨은 반항은 하였지만 내놓고는 그래도 웃사람 대접을 하였는데 그 사건 뒤부터는 노골적으로 반항할 뿐 아니라 어떤 때는 부러 저편에서 적극적 행동을 취하는 때도 있게 되었다. 그러면은 오학동의 점잖은 이들이 오히려 저편을 피하고 있었다.
 
124
“개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게다.”
 
125
입으로는 비록 이런 호어를 한다 하나 사실로는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었었다.
 
126
이리하여 ○○골에는 낡은 세력을 꺾으려는 새로운 세력이, 먼저 헌병보조원이라는 형식으로 들어왔다.
 
127
오학동 사람과 정방 사람의 새에 무슨 말썽이 생기면 반드시 헌병주재소에서 간섭하였다. 그리고 사리는 여하간 죄는 오학동 사람에게로 돌아왔다.
 
128
이백여 년을 두고 수모에 또 수모를 받고 내려오던 정방의 종의 자식들은 새로운 학문을 흡수하고 그 학문으로 자기네의 자식을 헌병보조원에 붙인 덕에 그 수모를 면하게 되었다.
 
 
129
새로운 학문의 힘은 무서웠다.
 
130
정방의 한 자손이 공부를 한 덕에 헌병보조원을 붙어서 아직껏 자기네의 조상이 받아 오던 수모와 그 원한을 푼 일을 실마리삼아 정방의 세력은 차차 높아 갔다. 군서기 군고원 면서기 ― 멀리 감영까지 공부를 갔던 정방의 자손들은 형설의 공을 이루어 꼬리를 이어서 금의환향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정방과 오학동을 합친 ○○골을 관할하는 군이나 면에 붙게 되면 반드시 오학동을 못살게 굴었다. 조그만 트집이라도 생기면 반드시 오학동은 그 때문에 큰 손해나 봉변을 하고야 말고 하였다.
 
131
어떤 때 오학동에는 그곳 군청 서무주임이 시찰을 하러 온다는 통지가 이르렀다. 벼슬과 권력에는 무조건하고 머리를 수그리는 오학동의 노인들은 자기네의 동리의 가장 깨끗한 집을 택하여 만반 음식을 준비하고 서무주임 영감을 기다렸다.
 
132
주임이 이르렀다. 그런데 그 주임에 배종한 사람은 정방의 ― 정방서도 가장 천대받던 어떤 집 아들이었었다. 그 아들이 주임 영감과 자리를 같이 하고 술을 나누는 광경을 오학동의 노인들은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133
“상놈이 벼슬을 하였다.”
 
134
이것은 그들에게는 과연 경이에 다름없었다.
 
 
135
‘상놈이 벼슬을 하였다.’
 
136
이 한 가지의 사건은 오학동 노인들에게 커다란 충동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처세술과 인생관에 대하여서까지 변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137
그들은 인제는 벼슬이란 없어진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벼슬을 한 사람이 있었다. 더구나 그 벼슬을 한 사람은 자기네가 아직껏 사람으로 보지도 않던 정방 종의 자식이었었다. 그러면 그 종의 자식은 어떻게 벼슬을 하였나? 한 가지의 대답이 그들에게 울리었다. 그것은 ‘신학문을 하기 때문’ 이라 하는 것이었었다.
 
138
자기네가 아직껏 벼슬이라는 것을 단념하고 자식들에게 농사나 가르친 것은 결코 벼슬에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벼슬에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학문이 고명하다 할지라도 조선 사람에게는 벼슬의 길이 없는 줄 믿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 조선 사람으로도 벼슬을 한 사람이 생겼다. 더구나 상놈이 벼슬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신학문을 한 때문이었다.
 
139
한낱 재간 혹은 기술에 지나지 못하는 줄 알고 수모하던 신학문에 벼슬의 길이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과연 의외였다. 그리고 벼슬을 할 길이 있는 신학문인지라, 무조건으로 업수이 여기지 못할 것도 막연히 깨달았다.
 
140
‘벼슬! 벼슬!’
 
141
오랫동안 단념하고 있던 벼슬에 대한 욕망은 오학동 사람들의 마음에 무럭무럭 일어났다. 더구나 자기네는 정방놈들보다 훌륭하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오학동 사람들은 자기네가 벼슬만 하면 정방 인종보다는 썩 나은 지위에까지 올라가겠다는 자신까지 있었다.
 
142
이리하여 오학동에서도 아들 몇 사람이 그곳 감영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143
감영으로 유학을 갔던 오학동의 아들들은 그곳서 졸업을 한 뒤에 멀리 또한 외국으로 갔다. 감영에서만 공부를 하고도 군주사 한자리는 넉넉히 하는 시대인지라, 멀리 외국까지 보내면 성주 한자리는 넉넉히 하리라는 굳은 믿음 아래서 용감스러이 만 리의 봉정(蓬征)을 떠난 것이었었다.
 
144
종의 자식들에게 수모를 받는 것은 치가 떨리도록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인제 또한 자기네의 자식들이 신학문을 닦고 돌아오면 또 다시 이전과 같이 종의 자식들을 수모를 할 수가 있으려니 이런 생각으로 오학동의 어버이들은 자식들의 달라는 학비를 결코 많다 하지 않고 주었다.
 
145
그러는 동안에도 시대는 더욱 변하였다. 시대가 변함을 따라서 미리 벼슬을 한 사람들의 세력은 더욱 커 갔다. 세력이 커 감을 따라서 오학동에 대한 압박도 차차 높아 갔다.
 
146
토지를 관할하는 군청과 면소에 자리잡은 종의 자식들은 지주이요 농사를 본업으로 하는 오학동 사람을 곤란케 하기에는 가장 좋은 지위에 있는 셈이었었다. 조그만 일에도 트집을 잡았다. 트집을 잡을 만한 일이 없으면 트집을 만들어 내었다. 이리하여 그 트집으로 오학동을 더욱 힘있게 내려눌렀다.
 
147
증장되어 가는 세력과 쇠하여 가는 세력 이 두 가지의 세력은 시시로 나날이 현저하여 갔다. 오학동 사람의 토지가 하나 정방 사람에게(본의는 아니지만) 팔려갔다. 그 뒤를 따라서 또 하나 팔려갔다. 흥하여 가는 정방이며 자식들이 세도자리(?)에 있는지라 비록 종의 자식일망정 정방에는 돈이 흔하였다. 거기 반하여 쇠하여 가는 오학동에서는 온갖 일이 마음대로 안 되었다. 멀리 유학을 보낸 아들들의 학비를 보내기 위하여 조상 전래의 땅을 연하여 팔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가파로운 묏견 새에 끼여 있는 ○○골의 땅을 살 사람은 같은 ○○골에 있는 정방사람 밖에는 없었다.
 
148
땅이 연하여 정방 사람의 손으로 넘어갈 때마다 오학동 사람들은 집이 무너지도록 탄식하고 하였다. 그러나 그 탄식 가운데도 가까운 장래에 자기네의 자식들이 금의환향하여 도로 그 땅을 사들이고 맵고 미운 정방놈들을 온전히 이 ○○골에서 내어쫓을 날을 예기하고 저으기 스스로 위로하고 하였다.
 
 
149
세월은 연하여 흘렀다.
 
150
‘고꼬와 오꾸니오 난뱌꾸리(此處[차처]は御國[어국]を何百里[하백리])’
 
151
가 낡아지고,
 
152
‘카추샤 가와이야(カチコシヤ可愛[가애]いや)’ (카추샤 귀여워라)
 
153
가 생겼다가 낡아지고,
 
154
‘고꼬와 조센 호꾸딴노…(此處[차처]は朝鮮北端[조선북단]の…)
155
냐햐꾸리 아마리노 오룟꼬(二百里餘[이백리여]りの鴨綠江[압록강])’ (이곳은 조선 북쪽 끝의, 오백여 리 되는 압록강)
 
156
가 각곳에서 들렸다.
 
157
이렇게 시대가 변하는 동안, ○○골 안의 오학동과 정방도 이전과는 그 지위가 온전히 반대로 되어 버렸다.
 
158
관리에 등용된 정방의 자식들이 그 새 이백여 년을 자기네의 조상이 받은 수모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하여, 오학동에 대하여 가한 압박 때문에, 수리라 측량이라 양잠이라 세금이라 마치 술집 회계기와 비슷한 헬 수 없는 명목으로 착취를 당한 오학동은, 지금 몇몇 집이 겨우 자활을 하는 뿐, 대개는 모두 땅을 정방 종의 자식에게 팔아 버리고 그래도 굶어 죽을 수는 없어서 이전에 종의 자식이라고 그렇게도 멸시를 하던 정방 사람들의 소작인으로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159
‘천리는 순환하나니.’
 
160
이전에 자기네가 세도를 잡았을 때는 생각도 않던 이런 격언을 서로 외며 인제 가까운 장래에 자기네의 자식들이 학문을 끝내고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아들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다시 솟아날 길이 있으려니 단단히 믿고 있었다.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여 ○○골을 벗어나간 사람의 수효도 적지 않았다.
 
161
이전에는 종이라 업수이 여기던 정방 동리로 소작짐을 지고 가는 오학동 노인들의 얼굴에는 늘 하늘을 원망하는 기색들이 있었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겟불은 안 쪼인다는 말은 그들에게는 무의미였다. 오학동의 젊은이들은 정방 늙은이들에게 ‘주인님’ ‘나으리’ ‘영감’ 이라는 존경사조차 놓이도록 변하였다.
 
162
신학문이 들어왔다. 들어오면서는 ○○골을 온전히 거꾸로 만들어 놓았다.
 
 
163
오학동 노인들이 기다리던 날이 이르렀다. 멀리 외국까지 유학을 보냈던 아들들이 형설의 공을 마치고 돌아왔다.
 
164
그러나 십여 년 간을 오학동의 어버이들이 논밭을 모두 피눈물을 뿌리면서 정방 사람에게 팔아 가면서 학비를 보내줄 때의 그 기대와 오학동의 자식들이 배워 가지고 돌아온 학문의 새에는 너무도 차이가 컸다.
 
165
그들이 배운 학문이란 것은 소위 ‘붉음’이라는 대명사로 알리워 있는 무서운 사조였었다. (미완)
 
 
166
(〈新東亞[신동아]〉, 1932.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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